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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의 평수는 아파트 평수보다 넓다.


처음으로 전원주택을 계획하시는 많은 분들이 단독주택의 평수가 아파트보다 넓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집을 40평 정도로 설계해 주세요? 라고 주문을 하시면서 방은 3개 그리고 거실은 넓게 하고 뭐 기타 등등....” 이렇게 주문을 하시는 이유를 되물어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이 40평형인데 그만하면 충분하고 또 다른 곳에서 상담을 했더니 특히 목조주택이나 스틸하우스의 경우 벽두께도 얇고 더구나 40평형 아파의 전용면적은 33평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40평 주택이면 충분하다는 이유에서 이다.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30평형 아파트에 준하는 단독주택의 평수는 대체로 35평~40평 규모가 적당하고 40평형 아파트에서 느끼는 공간적 충족감을 느끼기 위한 단독주택의 평수는 대체로 50평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 이유중 한가지는 다분히 정신적(mental)인 요인에서 기인하는데 “아이 뭐 현재 30평 아파트에 살아보니 크게 문제없으니 그 정도로 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설계를 시작하게 되는데 좀 더 세밀하게 상담을 하다보면 거실은 크게 하고 또 드레스 룸은 필수적이고 다용도실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등, 실제 전원생활에서는 아파트 생활보다 공간적으로 좀 더 크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요인은 계산적 착오와 주택기능의 낮은 이해도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아파트의 경우 보일러실이 필요 없고, 현관의 기능도 1층에서 대신해 줄수 있어 현관이 가지는 방풍실 기능이 단독주택에 비하여 약하다는 것과, 아파트의 다목적 공간이 발코니가 단독주택에서는 다용도실 등 전용면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과 특히 2층 주택의 경우 화장실의 개수가 대부분 3개 정도를 요구 하고 있어서 아파트의 2개에 비하여 많은 면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한 증가되는 면적을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대략 11.5평 정도가 증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쉽게 생각해서 아파트평수 보다 약 10평정도의 부가적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  분

소요면적(평)

비 고

아파트(A)

전원주택(B)

(B-A)평

현  관

1.2X1.5(0.54평)

1.8X2.1(1.14평)

0.60

30평형 

아파트


2층 

전원주택

복  도

거의 없음

0.5평 내외

0.50

화장실

2개(2.39평)

3개(2.60평)

1.30

계단실

없음

5.71평

5.71

보일러실

없음

심야전기(2.09평)

2.09

다용도실

없음

1.8X2.4(1.30평)

1.30

기  타

 

 

 

 

 

 

 

합  계

 

 

11.5평

<자료비교기준은 같은 크기/갯수의 방과 거실/주방 있는 것으로 간주함>


<아파트와 전원주택 평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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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 사회가 어떻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답이 보이셔야 합니다.

 

이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한 답이 떠오르시나요?

선명한 답을 찾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시는 겁니다.

 

간단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이 대동 사회가 오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내 주식이 대박 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나 이 시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문명이 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물질문명이 뒷받침을 하고,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인과 군자, 욕심과 양심을 구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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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 : 사람들이 보통 남자답고, 사나이 다우면 대장부라고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좀 생각이 많고 분석적인 성향이 있어서 어찌 보면 내성적일 수 있는데요. 꼭 영화속 장군같이 해야 대장부가 될 수 있는 것인지요. 대장부는 정확하게 어떤 사람을 말하나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맹자의 대장부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세요.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인仁),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예禮), 천하의 큰 길을 걷는다(의義).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걸으며,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걷는다. 부하고 귀함(富貴)으로도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가난하고 천함(貧賤)으로도 그를 움직일 수 없으며, 권위와 무력(威武)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러한 자를 이른바 ‘대장부’라고 한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맹자 등문공滕文公 」하)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 이것은 사랑을 말해요. 사랑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죠. 사람의 집이라고도 맹자가 표현합니다. 우리가 늘 살아야 될 집은 사랑이에요. 인(仁, 사랑). 그래서 천하의 넓은 곳에 나는 살며, 늘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요. 그리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예절(禮)을 늘 지키고요. 천하의 큰 길만을 걷는다. 맹자는 정의(義)를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닐때는 꼭 정의로 다니라는 거에요.

 

사랑의 마음을 품고, 다닐 때는 정의로 다녀라. 보통 인(仁)은 집에 비유되고, 의(義)는 길에 비유되요. 늘 사랑에 살면서 늘 정의로운 길을 걸어라. 이런 얘깁니다.

 

집에 있다가 길에 나올 때는 사랑을 버리고 정의만 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고요. 사랑은 우리의 집같은 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늘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어야 되구요. 정의는 우리가 항상 걷는 길처럼 늘 정의를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갈 때요. 양심(4단, 인의예지)이 뻗치는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그러면 이 분은 뜻을 얻어 임금이 되건, 재상이 되건, 등용이 되면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걸어요. 보살입니다. 그래서 유교는 대승불교와 잘 맞아요. 대승적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걸어요. 홀로 그 길을 걷는 분 보고 소승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이겁니다. 예를 들어 토굴 속에서 둘이 앉아서 같이 수련하고 있다고 치죠. 토굴 수행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 분은 중생구제를 해야 되는데 내가 여건이 안 돼서 이러고 있다 하면 대승이에요. 나는 애초에 그런 생각이 없다 하면 소승이에요. 모습 보고는 모릅니다. 무슨 동기에 하고 있는지 알아야 되요.정말 중생을 구제하고 싶은데 뜻을 못 얻어서 나라도, 내 몸에서라도 도를 구현하자하고 하고 있는 분은 소승이 아니겠죠. 이거 구분 하셔야 합니다.

 

맹자의 대장부는 대승이에요. 그래서 그 분은 부귀도 타락시킬 수가 없어요. 돈을 줘도 이 분은 뭘 보냐 하면 상대방이 돈을 내 놓으면 저게 양심(4단)에 맞나 이거만 봐요. 그러니까 타락을 못 시켜요.

 

누군가 겁을 줘요. 가난과 천함. 너 이렇게 있다가는 너 굶어 죽어 라고 해도 사단에 맞으면 괜찮다라고 생각해요. 권력과 무력으로 그 사람을 협박해도 양심(4단)에 맞으면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해요. 내가 당당히 맞서겠다라고 생각해요. 이러니까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4단(인의예지)이라는건 우주의 법입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많이 써요. 지구에 사는데 전 우주의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을, 누가 지구에서 그 사람을 협박하겠습니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공자님, 다 우주의 법을 따르신 분들이에요. 그래서 지구에서 그 분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런 비유를 들잖아요. 개미들이 우루루 가는데 개미 하나가 다리꼬고 앉아서 있다가 인간하고 눈이 딱 마주쳤는데 니 뜻, 니 마음 내가 안다하고 개미 하나가 보고 있으면 하느님이 볼 때도 인간 중에 그 개미같은 존재가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우주에서 먼지같은 존재입니까? 그런데 마인드가 우주와 통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거에요.

 

양심(4단)은 우주적인 법입니다. 내가 그 사람 배려하는데 누가 싫어해요. 내가 그 사람한테 피해 안 줬는데 누가 싫어해요. 내가 그 사람한테 겸손하게 구는데 누가 싫어하며 그 사람한테 내가 틀린 말 안 하는데 누가 싫어할 수가 있어요? 지구에 이렇게 꼬물거리는 벌레같은 인간중에 우주적인 걸 이해하는 사람들이 성인(聖人)입니다. 우주의 법을 내가 다는 못해도 따라해 보겠다는 사람들이 보살들이에요. 군자들이구요. 그런 분들을 대장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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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하는 고민들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후세계나 윤회는 영원히 증명되지 않는 난제인데요. 이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지 윤홍식 대표가 자명하게 이야기 주십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군요. 

 

 

- 질문자 : 선생님은 철학과 명상을 오랫동안 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명상을 하신 분들이 자신의 전생을 보았다고 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사후세계 이야기를 하는데 사후세계나 윤회가 진짜 있는 것인가요?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 윤홍식 답변 : 제가 사후세계 얘기하면 드리는 말씀 있어요. 명상해서 제 나름의 신비한 체험이 있다고 해도, 이런 것을 얘기 해 봤자 저한테는 자명해도 여러분께는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들어 봤자라는 겁니다. 제 선생님인 봉우선생님도 명상중에 몇 번인가 전생을 보셨으나 그래도 믿음이 안가서 직접 확인하러 중국엘 가셨답니다. 재미있죠? 그러니까 이게 소설 『단丹』이란 책에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신비한 체험을 해도 가서 확인해 봐야 알아요. 그런데 만약 확인할 수 없는 걸 봤으면요? 사실 확인 할 길이 없죠.

 

그래도 제가 이런 사후세계 같은 것을 인정하셔야 공부에 도움이 되실 거다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공부를 해보시면 알거에요. 우주가 카르마(업業)의 작용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이런 겁니다. 긴 우주는 우리가 몰라도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이것은 분석 가능하지 않나요? 지금 이걸 분석해보면 우주가 다 카르마 작용이에요. 업보, 잠재인상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돌아가요. 그런데 내 잠재인상에 내가 태어난 뒤의 것이 아닌 게 많이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성지능(양심 지능)이 틀려요.

 

우주는 카르마(업業)의 작용이란 것을 정확히 알고 나면, 전생 같은 인과법칙을 인정 안할 도리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과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아요. 우리가 인과를 다 끝나고 죽는 게 아니거든요. 죄를 많이 저질러 놓고 죽어버려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복을 많이 쌓아놓고 죽어버렸어요. 이거 어쩌자는 겁니까? 인과가 풀리지 않고 지금 계속 가요. 그럼 이어서 계속 간다는 얘기죠. 그것을 전제해야 인생이 설명이 되는 게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초끈 이론이니 평행이론은 진리처럼 얘기되지만 아직 증명된 게 아닙니다. 증명되지 않았는데 얘기가 된 이유는 그것을 전제해야만 공식이 풀리기 때문입니다. 윤회를 인정하는 것이 같은 전제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그걸 전제해야만 우리가 수행을 해나갈 수 있고 공식을 풀 수 있습니다. 현상세계를 설명할 수가 있고요.

 

그리고 태어날 때 영성지능이 틀려요. 그럼 복불복인가요? 이러면 공부할 맛 안 나죠. 누구는 영성지능이 이렇게 높게 태어났는데, 나는 하나도 안 주면서 나더러 공부하라 그러면 불공평 한 거 아닌가요? 한 생인데요. 윤회론을 인정하지 않으면 한 생인데, 왜 한 생 사는데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살고, 누구는 공자님으로 살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돼요. 우리가 실제 수행을 하다보면 알 수가 있어요. 수행을 하다보면 참 쉽게 안 닦입니다. '모른다!'하고 깨어서 업력을 다 누르고, 양심(4단, 인의예지) 힘으로 이겨내야 겨우 업의 장애 하나가 떨어져요.

 

그러면 영성지능 높은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맞나요? 엄청 열심히 했구나. 이게 맞죠. 잘 태어났구나 라고 하면 말이 안 되죠. 윤회를 인정해야만 이게 설명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공부할 힘이 생기고 죽는 날까지 공부할 수가 있어요. 이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후세계나 이런 것을 제 삶에 전제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제 전생에 대한 어떤 신비한 체험보다는, 내가 공부를 해보니 이렇게 안하면 업장이 안 지워지더라는 걸 봤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 믿습니다. 업장이 많이 지워진 사람이 태어났다면 이 사람은 전에 수없이 지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현이나 부처가 되기 위해선 윤회가 필요합니다.

 

이번 한 생의 경험치로 원만한 인격을 만든다는 게 오만 아닌가요? 제가 가난한 사람도 되어 보고, 부자도 되어 보고, 뭐도 되어보고, 남자도 되어보고, 여자도 되어보고, 온갖 건강한 사람도 되어보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되어보고, 다 해봐야 되지 않나요?

 

한 가지를 체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이 명심보감에 있는 말입니다. 참나가 우주에서 끝없이 우주를 굴리며 무한한 지혜를 나투는 데 거기에 참여하려면 같이 굴러야 성장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고, 공부해서 내가 자명하게 얻은 결론으로 당연하게 추론되는 걸 가지고 고민해 보면, 저는 윤회나 사후세계를 인정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냐? 이것은 문화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이 투영되어서 보이니까요. 다르더라도 이 자체를 인정해야 겠죠. 안 그러면 우리는 공부를 할 힘이 안 나죠. 윤회가 안 된다 하면 충돌이 나서 말이 안 되게 됩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사후세계를 인정하고 전제하고 갑니다.

  

 

업력을 극복하는 비결(윤홍식)

 

'업력'은 과거의 에고가 저지른 업보에 구속되는 힘이요, '도력'은 지금 이 순간 참나(양심)에서 흘러 나오는 자유자재한 힘입니다.

 

업력은 늘 과거의 습관에 구속되지만, 도력은 과거에서 자유롭기에 매순간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에고의 업력'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과거의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나(양심)의 도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서 과거의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에고'는 과거의 습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참나(양심)'만이 시간성을 초월하여 과거의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지금 곧장 업력을 초월하십시오. 자신의 '이름'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모른다!"라고 선언하십시오. 내면의 '순수한 알아차림'인 '참나(양심)'에 곧장 접속하십시오.

 

이것이 매순간 마음을 리셋하여 다시 태어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업력을 초월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을 때 자신의 과거 업력도 내려놓아집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창조적인 업을 지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시간성을 초월하여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력으로 업력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운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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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이면 착하기만하고 당하고 사는 모습들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심을 잘 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 일까요? 윤홍식 대표가 쉽게 이야기를 주십니다. 인의예지의 균형이 중요하네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첨부된 양심노트를 다운 받아 본인의 문제를 한번 풀어 보십시오. 무엇인가 안 풀린다면 놓치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질문자 : 지도자가 양심은 있는데 무능해서 방향제시를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것도 양심적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양심적인데 재능이 없다 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양심적이기만 하고 재능은 없어도 되느냐? 그런게 아니라 재능이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양심적이거나 양심적인 사람 중에 그 일에 재능이 제일 잘 맞아야 효과가 나겠죠. 그런데 이런 것도 있어요. 양심적인 것 같은데 양심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면 부분적인 양심에 빠져서 크게 망치는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논어』에 보면 양심의 6단계가 나와요. 내가 15세에 '지우학'(志學)을 했고 하는 것이 공자님이 평생 연구한 것을 나이별로 설명해 놓은 양심의 단계입니다.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까지 가는 것이 양심의 계발 단계인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영성지능이 좀 있다, 양심적이다 라고 해도 그 분이 과연 지금 인의예지에 맞게 판단을 내렸는지는 또 따져봐야 하거든요.

 

예를 들자면 성리학이 우리나라를 망쳤다라고도 하는데요. 그런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리학을 했건 어쨌건 간에 양심에 문제가 있을 때 문제가 생기지요. 양심적이지 못했던 부분이 있어서 그렇게 문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완전한 양심이라는 것은 인간사에서 힘들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양심으로 했는데 문제가 생긴 확률보다는 무언가 양심에서 빠지는 부분이 있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눠드린 것이 그런 것을 체크하는 체크리스트(양심노트)입니다. 내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보여도 이 체크리스트를 적어가면서 빠진 것을 보완하자는 것입니다. 저희는 언제든지 함정에 빠진부분이 있을 거라고 보고 끝없이 단련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이 말씀하신 6단계를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가는 것을 도와드리는 방법론이기 때문에, 가정을 양심잘 한다고 하는 것이 저는 무리라고 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공부를 잘 안했는데 왜그러냐 하면요. 우리가 양심을 이야기 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도 양심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계세요. 그래도 내가 죄는 안짓지 않았나라고요. 양심이 공부가 잘 안되는 이유도 대부분은 웬만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들어가 보면 어렵고 쉽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이 여기 계신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하는데요. 인간에 대한 이해라든가, 제가 가진 정보의 명확성, 여러분 개개인의 사정을 제가 다 모르거든요. 현실이라는 것은 늘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겁니다. 잘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자님이 맞다고 보는 것이 『논어』에 보면 늘 못한다는 얘기만 하세요. 어느 바이블에도 그렇게는 안 되어 있죠. 나만 따르라하고 있는데, 공자님의 바이블을 보면 내가 동생한테 원하는 것을 가지고 형한테 못하고, 자식한테 원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한테 못하고, 친구한테 원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친구한테 못하고 등등 이런 얘기를 쭈욱 합니다.

 

아래 사람한테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윗사람한테 다 못해준다. 잘한다는 얘기를 아예 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런 태도부터가 하나의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잘한다라고 가정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이 70세에 도달했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욕심이 꼴리는대로 해도 양심에 어긋나지가 않더라는 경지를 우리의 목표로 삼으시면 좋고, 그게 쉽게 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런 경지를 얻었다고 하는 본인도 늘 부족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노력을 하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상당히 양심적인데 늘 치이고 살아요. 그러면 원가 양심에 문제 생기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중력법칙처럼 심리법칙이 있어서 어떤 사람이 착한데 자꾸 사기를 당해요. 잘 보면 인의예지중에서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지적인 부분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자명함을 덜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남에 대한 어떤 배려심 때문인데 이럴 때 우리가 겉으로 보면 양심적으로 보이지만, 양심에서 볼 때는 안 맞아요.

 

양심경영의 노하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웬만큼은 하지만 잘한다는 말은 하기 힘듭니다. 『중용』에 이런말이 나와요.

 

"이 도라는 것은 아주 평범한 부부도 알고 있는 거지만, 그 극치에 가면 성인도 모르는게 있다."


이것이 제일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알아요. 인의예지가 동물한테도 있다는게 조선 성리학의 입장이예요. 다만 인간이 제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않했을 때는 짐승만도 못해진다. 이게 조선 성리학의 큰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끝없이 공부해도 잘한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고 잘 한다고 하는 순간 또 양심에 어긋나게 되는 미묘한 공부가 양심공부입니다. 이 느낌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아래 양심노트 양식을 다운 받으셔서 본인의 사안에 한번 적용해 보십시오.

 

양심노트 양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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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를 보면 남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법을 어기지는 않았다고 떳떳하다고, 법치주의 국가라고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 분노가 느껴지는데 이런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볼지 모르겠습니다. 윤홍식 대표가 이 부분에 대하여 『논어』의 이야기를 들어서 설명해 줍니다. 

 

 

- 질문자 : 요즘은 법망만 빠져 나가면 떳떳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괜히 양심지키다가 피해나 본다는 생각들도 많은데요. 정말 법만 안 어기면 괜찮은 건지, 도대체 무엇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공자님께서 『논어』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셨죠.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정치상의 법률과 명령으로만 인도하고 형벌로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덕德’으로 인도하고(사단四端의 확충, 명명덕明明德) ‘예절’로 가지런히 해야만(사양지심辭讓之心의 확충),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다(수오지심羞惡之心의 확충)”라고 하셨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유명한 얘기입니다. 정책과 어떤 법률과 명령 만으로 만약에 사람들을 인도하고 형벌로, "말 안 들으면 잡아넣지 뭐." 이렇게 다스린다는 건 한비자가 주장했던 정치 방식입니다. 진시황이 그걸 택했었어요. 인간은 '호리피해'(好利避害)의 존재이다. 인간은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니까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면 통치되게 되어 있다라는 한비자의 주장을 적용했는데 진시황 아들 때 바로 망했죠.

 

인간이 이렇게는 안 되거든요. 상을 줄 때도 그냥 주면 안 돼요. 예의를 갖춰서 줘야 좋아합니다. "옛다, 상이다." 하고 100만원 던져주면 나를 뭘로 보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고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은 그렇게 돌아가지가 않아요. 그래서 중국에서 진시황 때 한비자의 법가 사상을 충분히 써 보고 망하고 난 뒤에는 한나라 때 다시 유교를, 대아적 효율성을 어떻게든 제일 앞에다 걸어요. 법가를 추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겉에다는 유교를 걸어요. 지금도 그럽니다.

 

자본주의는 솔직히 한비자와 똑같아요.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는데도 겉에다는 그렇게 안 하죠. 우리는 가족이고 뭐 우리는 한 식구고 딴 소리를 해요. 인의예지를 걸어야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이죠. 손님이 왕이네, 너를 위할거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호리피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인간이 싫어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실험해서 체험한 겁니다.

 

그 뒤로는 절대 중국 2천년 간 인의예지를 앞에다 걸지 욕심을 앞에다 안 걸어요. 이걸 걸면 다 싫어한다는 걸 알아요. 망해버렸으면 해요. 저 집안 망해버렸으면 하고요. 왜냐하면 자기들만 이익을 얻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거잖아요. 그럼 그 얘기는 나한테 피해가 올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인간은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얘기가 이것을 얘기한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면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아적 효율성만을 가지고 교육을 시키면 어떤 효과가 나느냐?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같은 사회입니다. 법망에 안 걸리면 그걸로 아주 만족해 하지 내가 그래도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하고 생각 안 한다는 겁니다. 이 양심이 활성화가 안 되어 있으니까요.

 

수오지심(정의,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을 부끄러워 하는 마음)을 활성화 시켰으면 아에 죄를 안 저질렀을텐데 수오지심이나 측은지심을 활성화를 안 시켜놓고 죄를 지은 다음에 잡아다 그걸 처벌만 한다는 식으로는 처벌 피하면 다행이다 하고, 자기 양심에는 전혀 반성을 안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 부끄럽게 만드는 게 훌륭한 정치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리더부터 잘 해야겠죠. 그래서 그 다음 얘기가 이겁니다. 덕으로 인도하고, 임금이 양심을 잘 지켜서 백성들도 양심을 지킬 수 있게 유도하는 겁니다. 이게 노자가 말한 진정한 '무위'(無爲)에요. 임금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이렇게 양심을 회복하자 하는 거죠. 홍익학당 같으면 양심(4단)노트를 전 국민, 전 가정에 보급하라 하는 것입니다. 저의 '호리피해'의 마음, 욕심도 조금 있습니다만 세종대왕께서도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삼강행실도』를 만화로 만들어서 보급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보급을 했는데 그게 한문으로, 그땐 한글이 없었어요. 한문으로 한 편에 삽화를, 스토리를 한 그림에 그린 만화식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한문으로 써서 보급했는데 문제가 한문을 아는 사람만 읽을 수 있으니까 백성들은 못 읽어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삼강행실도 보급해 보고, 윤리문제, 그때도 부모를 죽이고 하는 패륜사건이 났거든요. 세종대왕이 가슴 아파서 『삼강행실도』를 돌렸는데 한문이 통하지 않더라는 것과, 『농사직설』같은 기술서를 보냈는데 정작 농사짓는 사람들이 못 읽어요. 법조문을 못 읽어서 피해가 나요. 이런 사건들 때문에 한글을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윤리, 기술이나 정보, 법률문제 때문에 송사사건 때문에 한글을 만들어요. 세종대왕의 측은지심이 끝장이죠. 백성들이 불쌍해서 남 같지 않아서 밤 잠 안자고 연구해서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신하들은 다 머뭇거릴 때 임금이 주장해서 만든 거예요. 이런 경우가 덕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나부터 해서, 내 양심이 못 견디겠다 라고 임금부터 해서 덕으로 인도한다는 게 양심(4단)을 확충하는 겁니다.

 

덕으로 인도한 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양심(4단)노트' 쓰라고 그래라고 하면서 자기는 안 지키는 이런 게 아니구요. 자기부터 잘 해서 신하들을 인도하는 겁니다. 국민과. 예절로 가지런히 해준다. 예절은 사양지심의 문제인데 왜 사양지심을 공자님은 자꾸 얘기 하냐면 사랑의 마음, 분노의 마음은 표현될 때는 꼭 사양지심으로 표현돼요. 사랑한다는 것도 예절(에티켓)에 맞아야 되고, 분노도 예절에 맞아야 돼요. 적절한 분노여야지 과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밖으로 표현되는 건 예절로 표현되기 때문에 양심을 계발하되 밖으로 표현이 적절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런 사양지심을 적절히 계발해서 밖으로 언행이 적절하게 나가게만 해 주면 백성들 스스로가 부끄러운 줄 알고 스스로 바로잡을 것이다. 백성들의 수오지심이 자극 받아서 감히 죄를 못 짓게 되게 만들거라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죠. 만약에 지금 교통법규나 여러 가지에 대해서 안 걸리면 장땡이다라고 우리가 쉽게 생각 하잖아요. 사안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상당히 중요한 사안들이 남한테 피해가 많이 가는 부분에 있어서 이런 식으로 국민들이 판단하게 방치하고 있다면 잘못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양심 교육을 시켜줘야 된다는 거죠. 부끄럽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인간이 본래 갖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자극만 주면 원래 계발이 되게 되어 있다는 게 유교의 입장인 거죠. 재밌는게 아주 악인들도 거짓말할 때 보면 눈깔이 돌아가고 이렇습니다. 양심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게요.

 

이게 태연하게 하는 사람은 진짜 사이코패스, 아주 심한 사람들은 그래도 덜 하겠지만 그래도 달라요. 사람은 거짓말하기 힘들게 만들어졌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여러분도 잘 못하시잖아요. 할 때 다 티나요. 자기는 최대한 평정심을 갖고 한다고 하지만 거짓말 탐지기 하면 걸리죠. 심장 박동부터 틀려지는데요. 이게 양심이 있다는 근거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안 할려면 한번 크게  결심을 하셔야 돼요. 내가 정말 우리 새끼들 때문에 내가 양심을 잠시 꺼 둬야겠다. 이런 비장한 각오가 없으면 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요. 자신이 어떤 진짜 힘들어서 했더라도 편치 않은 게 이게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래서 범인들 중에 상당수가 자수하거나 잡혔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정말 힘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과법칙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주에 인과법칙이 있다. 어디있냐? 왜 죄인이 잘 살지 않냐? 죄인 속이 편치 않아요. 우주에 인과법칙이 있다는 근거가 이겁니다. 겉으로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냉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양심을 어긴 순간 자기로부터 벌써 부정당해요. 자기 양심으로부터 인정을 못 받고 남한테 드러나게 됐을 때는 쇠고랑을 안 차더라도 남한테 지탄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상태가 이미 처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과법칙이 절대 없지 않아요.

 

여러분도 있다는 걸 아니까 되도록 죄 안 짓고 사시잖아요. 한 번 죄를 저질러 놓으면 그것 때문에 시달려야 된다는 걸 아시니까 되도록 안 어기실 겁니다. 요즘 애들이 친구 때리고 잠바 뺏어가죠. 이것을 친구 잠바 뺏지마라만 자꾸 가르쳐서 될 일이냐는 거죠.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이 발달되면 친구 잠바를 못 뺏게 되어 있죠. 잠바 잃어버리고 집에 갈 친구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고 그 친구 입장에서 자기의 악행을 한 번 돌아보는 이런 감각만 발달해 있으면 죄를 못 짓는다는 겁니다. 차라리 잠바 안 입고 말지로 결론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양심노트를 권장드리는 건 이런 식으로 평소에 자기 양심을 계속 자극을 주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중요한 순간에 죄를 못 짓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아래 양심노트 양식을 다운 받으셔서 본인의 사안에 한번 적용해 보십시오.

 

양심노트 양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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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교과서 문제, 역사관 문제로 많이 시끄럽습니다. 우리가 조선시대에 많이 열등하게 살아와서 서양이나 일본이 개화시켰다는 주장들도 많은데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질문자 : 요즘 역사논쟁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말에 우리가 너무 열등하니까 일본이 들어와서 개화시켰다는 의견도 제시되는 상태인데요. 우리나라의 제도가 서양에 많이 뒤졌었나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의회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들어왔고 우리는 최근에 민주주의를 하니까 동양 고대의 것은 봉건주의고 예전 거니까 볼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해 버리시면 정말 잘 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요즘 드라마 정도전도 방영되는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보듯이 동양이 민주주의나 이런 이론은 훨씬 예전에 이미 다 세워 놨었어요. 4천년전 요순임금 때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지금 이상으로 했어요. 중국은 이미 그런 경험이 과거에 있고 동양은 그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민주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요즘 서양문화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철학이 민주주의, 특히 이런 근대사회에서는 맞지 않지 않나라는 의견도 가능한데요. 제가 사학과 출신인데 역사 분석을 할 때 정말 황당한 분석들이 조선을 봉건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봉건이라는 건 영주들 간에 계약관계로 일어나는 사회입니다. 조선은 봉건사회가 아니에요. 일본은 막부시대가 봉건사회였어요. 영주 간에 제일 위에 있는 영주와 밑에 영주들이 계약관계를 맺는 겁니다. 중앙집권이 안될 때 보통 봉건제를 해요.

 

조선과 중국 명나라나 이런 나라들은 일찍이 중앙집권을 했고 관료제, 즉 과거같은 고시체계를 갖추고 있었어요. 서양에서 고시체계를 갖춘 것은 봉건제가 다 무너진 뒤입니다. 서양에서 근대 속성들이 우리나라나 중국은 이미 하고 있던 게 많아요. 그래서 예전에 국사책에서 고려를 중세라고 하고, 조선을 애매하게 근대도 아니고 근세라고 하고 넘어가는 이유가 너무 근대적 속성들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과거는 신분제약이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양인 이상 백성들은 다 볼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평민들은 다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누구나 고시를 볼 수 있고 고시에 의해서 관료를 뽑아서 중앙집권을 하고 전국에 관료를 파견하면서 운영했던 시스템은 일본도 막부 망하고 생기고요. 중세 봉건사회가 다 무너지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생깁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동양이 선구적으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맹자』나 예전 사서삼경에 보면 펼쳐지는 민주적인 속성들 때문에, 일찌기 이런 문화들을 만들어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냥 봉건이라고 부르시면 안 돼요. 봉건은 중앙집권이 되기 힘든 사회에서 천자가 제후한테 네가 그 영토 알아서 다스려 하고 맡길 때 봉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관료 어떻게 뽑을까요? 그냥 영주가 녹봉주고, 연봉주고 스카웃하면 끝나요. 일본 소설이나 그런 거 보세요. 재주를 부려가지고 어떤 영주한테 녹봉 얼마나 받고, 연봉 얼마나 받고 스카웃 될거냐 이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조선은 안 그랬어요. 고려 때도 과거제가 고시제가 도입되었지만 좀 더 귀족주의적인 속성이 있었는데, 조선 올 때는 많이 털고 와버립니다. 또 조선은 정말 이상한 사회인 것이 중국이나 일본, 조선만 가지고 비교를 해도 일본이나 중국은 신분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한번 그 신분을 받으면 계속 유지가 됩니다. 신분제라고 확고히 말할 수 있는데 조선은 덜 그래요. 조선은 삼대 연속해서 고시생이 안 나오면요 몰락합니다. 유동적인 신분제에요.

 

이것은 우리나라가 정말 평등지향주의적인 속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한 계급이 계속 가는 걸 싫어하니까 안전장치를 많이 건 겁니다. 조선시대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셔도 됩니다. 그 시대에 그 정도의 평등주의를 가지고 근대적으로 정치를 운용한 나라가 전세계에 없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자기들 절대왕정일 때 동양에 온 거잖아요. 중국에 들어와 가지고 중국만 와서 보고도 뿅 가요. 자기들이 꿈꾸던 정치가 일어나고 있다고요. 서양에서 못 보던 정치 시스템인 관료제가 다 안착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과학력을 중국에서 가져간 겁니다. 나침반, 화약 가져가다가 자기들이 무기를 만들고 힘이 강해지니까 그때부터 중국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중국 들어왔을 때는 꿈의 나라라고 그랬어요. 신의 나라라고 그랬습니다. 자기들은 중세 봉건시대인데 자기들이 꿈꾸던 이상사회가 펼쳐지고 있으니까요. 재밌죠. 이런 거 시중 역사책에 다 나와 있습니다. 참고해서 보시면 동양관이 변화하는 그 시점도 다 나옵니다. 처음에는 '와!' 했다가 자기들이 힘을 가지니까 공격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약탈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무시합니다.

 

조선도 정치철학 이런 것이 '어 세련되어 있네?', '의외로 세련되었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훨씬 앞선 문화로 계속 살아오다가 서양이나 일본에서 무기들을 쎈 것을 만들면서, 과학력을 확보하면서 최근에 뒤처진 겁니다. 그것을 부러워할 게 아니에요. 거기가 어떻게 자본을 모았는데요. 흑인 잡아다가 팔아서 자본 모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짓을 안했겠지요.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우리가 모자란 부분도 있었지만 잘한 부분도 많았다는 것을 아시고 보셔야 됩니다. 이걸 자꾸 봉건적이다, 고대적이다 이렇게 보시면 안 돼요. 인간의 본질은 똑같기 때문에 동양이 훨씬 정확히 보고, 정확히 푼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배운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출처: http://v.daum.net/link/52171524 

 

시간이 되시는 분은 조선건국철학이 담긴 조선경국전 강의를 한번 들어 보시면 자부심이 넘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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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복잡하다보니 주변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참자니 답답하고 표출하자니 문제가 생길 것 같을 때가 많은데요. 올바르게 화를 내는 방법에 대해서 윤홍식 대표가 쉽게 설명해 줍니다. 정신차리고 차분하게 화를 내는 것이 중요하군요. 

 

 

- 질문자 : 친구나 주변사람이 저를 자주 화나게 합니다. 참고 또 참다가 한번 화내면 조절이 안되어서 되려 문제가 많이 발생을 하는데요. 이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자꾸 화를 내게 됩니다. 올바르게 화를 내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예를 들어 한 친한 친구가 말실수를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몹시 화가 날 것입니다. 머리속에서는 친구의 실수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내면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이 이글거리는 심각한 상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이 때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면, 이성의 필름이 끊기면서 곧장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해오던 대로 습관적으로 화를 내고 말겠죠.

 

만약 '운명'을 바꿔 보고 싶다면, 이러한 순간을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다 화낼 일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면, 인생은 누구나가 걷는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접어들 것입니다.

 

분노를 다스리고 싶다면, 일단 자신의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5분간 집중적으로 바라 보십시오. 지금 화가 났다는 사실조차도 잊어 버리고 오직 자신이 숨을 고요하게 쉬는지 거칠게 쉬는지 살펴 보십시오.

 

이러다 보면 '나'와 '분노'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분노=나'가 아니란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마음이라는 집의 주인은 바로 '나'이며, 분노는 '손님'일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분노는 내가 아니야!", "내가 분노해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를 들이대도, 나는 분노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여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바라 볼 수 있다면, 그 마음에는 'Go.Stop'의 창이 뜰 것입니다. 화를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무조건 화를 참으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화를 낼지 안 낼지를 차분하고 고요한 몰입상태에서 결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뒤끝 없는 화,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남기는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깊은 고려 없이 화를 내는 것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지금 화를 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옳을까?", "화를 낸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수준에서 내는 것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도움이 될까?", "친구의 입장이라면 내가 화를 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등을 차분하고 고요한 몰입상태에서 충분히 생각해 보고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몰입이 안 된 상태에서 내린 결론은 지극히 좁은 시야에서 내린 결론에 불과하니, 결국 우리 자신에게도 친구에게도 큰 상처만 남길 것임을 잘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 출처: http://v.daum.net/link/52235563

 

시간이 되시는 분은 '몰라! 괜찮아!'로 마음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도움이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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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 : 가끔 TV나 신문 보다 보면 확 갈아엎어 버리고 싶을 때가 많은데요.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은 양심이 아닌 것 같고요. 양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까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정당은 서비스업체일 뿐이다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탕왕이 걸을 치고, 무왕이, 다 성인급으로 대우받는 분들인데, 이분들이 주나라를 쳤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경전에 있습니다." "아니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면 됩니까?" 임금 입장에서는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겠죠. 반역아닙니까 라구요.

 

그런데 맹자가 이 말을 해요. "사랑을 해치는 자를 우리가 해치는 자라고 하고, 정의를 해치는 자를 상하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해치고 상하게 하는 사람을 일러 ‘홀로된 사내’, 즉 천하에서 왕따가 된 사내, 이 버림받은 사내인 주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못들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홀로 됐다는 것은 천하가 다 미워하는 사내, 우리나라에도 있을까요? 이해되십니까?  맹자 무섭죠?

 

임금노릇을 했어야 임금이지. 임금은 국민 전체를 나와 둘로 보지 않고, 공적인 서비스, 서비스를 해줄려면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되잖아요. 지금 장사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백성이  고객이죠. 돈내는데가 백성이잖아요. 백성이 세금내서 정부는 먹고 사는 거잖아요. 국민 세금으로 먹고 사는 조직은 임금부터 아래까지 다 똑같죠.

 

동양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 '농공상'은 다 자기가 생산해서 먹거리를 만드는데, 사(士)는 농공상을 잘 관리해주고 돈을 뜯어가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이 사(士)는 철저히 공적인 서비스죠. 사적인 것도 아니에요. 국가적으로 세금을 받아서 월급을 받고 서비스를 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士)라는 업체, 즉 여러 업체가 만약에 경쟁하면 가격도 떨어지고 서비스도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이런 것을 제한시켜 놓고 선거, 우리 몇중에 한번 뽑아봐라 라고 하는 이 자체가 저는 독재라는 겁니다. 시장장벽을 높여가지고 고를 수 있는 업체가 대기업 몇 개밖에 없어요. 지금 물건 사는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지금 어느 당, 어느 당 아니고는 고를 수도 없어요. 거의 독과점에 해당하게 이미 그렇게 만들어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최고의 서비스를 못받는 겁니다.

 

아주 제한된 당, 몇 개의 당에서 골라야 하는데, 여기서 서비스가 개판이면 다른데서 고를 데가 없는 상황. 예전엔 어떤가요? 한 가문이 이것을 맡아서 하고 있었죠. 더더구나 이런 말 하기가 힘들죠. 그러니 한 가문이 왕을 계속 하는 입장에서는 탕왕도 어디 감히 반역을 하냐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서비스가 개판이면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천하에서 왕따가 된 사내라는 건 서비스가 전혀 국민들한테 안가니까 천하가 다 미워하게 된 존재죠. 이것들이 돈을 가져가지 말던가. 서비스를 잘 해주던가. 그런데 돈은 돈대로 더 가져가고 서비스는 전혀 안돌아오고요. 그래서 왕따가 된 사내를 치는건 당연하다 라고 맹자가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국민 입장에서, 국민의 대표로서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더 좋은 서비스를 약속하면 되는 거잖아요. 임금은 고객 만족을 최우선시 하는 공복(公僕)이기 때문에 이 논리가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맹자는 이미 임금은 더 천하고 백성이 제일 귀하다고 했잖아요. 임금보다는 나라가 귀하고, 나라보다는 백성이 귀하다고 맹자가 얘기한 게 있죠. 이 입장에서 볼 때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을 이미 다 담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계약 위반이니까 그런 건 임금 쳤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민심은 천심이자 양심

 

이것을 동양의 『대학』에서는 “강고에 이르기를 천명은 일정하지 않다.”라고 합니다. 천명은 하늘이 네가 왕 하라고 명령하는 게 천명입니다. 그런데 천명은 일정하지 않다고 말 하는 건 무서운 말이죠.

 

“선하면 얻고 선하지 못하면 잃는다.” 서비스가 좋으면 왕 계속 하라고 하늘이 해주고, 서비스가 개판이면 하늘이 업체를 바꿔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명, 민심이 천심이기 때문에 사실은 천명이라고 하지만 하늘의 명령은 보이지 않죠. 뭘로 바뀝니까? 민심이 떠난 걸로 바뀝니다.

 

동양에서 천명이라는 건 민심과 둘이 아니에요. 농공상(農工商)의 마음이 민심이죠. 자, 그런데 이거 하나 생각하십시오. 정치학에서 계산하는 민심은 여러분의 단순한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에요. 욕망이라 하더라도 국민 전체에 걸려있는 마음을 민심이라 합니다. 지금 국민들이 각자각자 품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국민들은 우리 국민한테 그게 해가 된다, 이익이 된다는 걸 알고 있죠. 그것을 계산 하는 마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하면 그건 민심이 아니고 사심(私心)이에요.

 

그러니까 민심은 공적인 마음입니다. 민심이 이 왕을 지지해 줬잖아요. “네가 우리한테 한번 서비스를 해 줘라.” “네가 하는 게 제일 잘 할 것 같다.”라고 국민들이 마음을 모아서 “네가 우리에게 제일 이득이겠다.”하고 맡겼는데 만약 서비스가 안 좋으면 민심이 떠나버리겠죠.

 

민심이 곧 천심입니다. 개인적인 사심은 천심이 안 돼요. 하늘의 마음은 한 두명, 소수가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이득이 되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로서의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백성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같습니다. 백성이 자식이고 부모가 하늘이기 때문에 두 마음은 같아요. 국민한테 해를 끼친 대통령을 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어 있어요.

 

사실은 민심은 양심이에요. 백성들이 갖고 있는 양심적인 부분, 그러니까 내 개인 욕심이 아닙니다. 한 임금이 잘못했을 때 꼭 나한테 해가 돼서 화내시는 거 아니죠? ‘그러면 국민한테 해롭잖아!’ 이것 때문에 화내시죠. 그게 양심이에요. 나와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그걸로 해서 피해를 안 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라도 피해본다는 거 자체가, 이건 국민한테 해(害)라고 판단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양심이면서 동시에 민심이에요. 백성 전체를 위하는 마음.

 

이것이 하늘 마음과 같기 때문에 만약에 백성이 이 서비스 업체에게 등을 돌려버리면 천명이 떠난 겁니다. 그러면 국민은 이미 마음에서는 새로운 업체를 찾는다는 얘기예요. “이 대통령은 아니다.” “우리의 리더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제한된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그 어떤 해결책이 없어서 못하는 거지, 갈아치우고 싶으실 때 많이 있으시죠. 그런데 한 개인의 욕심으로 갈아치우면 큰일 나겠죠. 국민 전체의 의견이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어서 갈아치울 때 그게 동양에서 민심인 거고, 천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선거 안 했으니까 동양은 민주주의 아니야.” 이러시면 안 돼요. 서양식 민주주의만 가지고 보시면 안 돼요. 여러분이 선거를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동양은 더 폭넓게 열어 놓고 보는 겁니다.

 

심지어 탕왕이 걸왕을 물리친 것마저도 백성이 탕왕을 다 지지해 줬거든요. 그 자체도 이미 국민들의 의사표현인 겁니다. 주권의 행사에요.

 

“야! 네가 쟤 좀 끌어내려줘!”

“나오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네?”

“분명히 우리가 얘기했는데 안 내려오네?”

“네가 좀 끌어내려줘” 하고 “우린 너희 업체한테 맡길게”하고 탕왕한테 맡겨버린 거예요. 그래서 탕왕이 단순히 반역한 것이 아닌 겁니다.

 

탕왕이 반역이 아닌 이유는 백성들이 탕왕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민심이 움직여버리면 이건 반역이라고 말을 못해요. 민심이 걸왕을 버리고 탕왕한테 “당신들이 우리에게 서비스를 해줘야겠소!”하고 맡겨 버리면 그 전 업체는 빨리 나가줘야 하는 업체가 되어 버리겠죠. 그때 일어나는 건 반역이라고 안 보는 겁니다.

 

동양의 이론은 이런 게 있어요. 이걸 잘 아셔야 됩니다.

- 출처: http://v.daum.net/link/52250179 

 

시간 되시는 분은 팟캐스트에서 이미 15만명이 청취한 동양의 사회계약론인 정약론의 『탕론』강의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속이 뻥 뚫리도록 통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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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로 극복을 해야 할까요? 윤홍식 대표의 힘이 되는 말씀 들어 보십시오. 시련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 질문자 : 요즘 회사나 집안일로 동시에 곤란한 일들이 몰려 오고 있습니다. 내 잘못인 것 같기도 하고 남 탓도 많이 합니다. 답답하고 너무 힘이 든데요.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자세는 무엇일까요?

  

- 윤홍식 대표 답변 : 우리의 소아적인 마음인 '욕심(에고, 인심人心)'이 원하는 것은, 생각과 감정 오감이 원하는 바를 늘 충족시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자]에서 “우환 속에 살고 안락 속에 죽는다”(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라고 하였듯이, 욕심(인심)이 늘 충족되는 삶은 참으로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은 ‘참된 인간’으로 사는 길은, ‘욕망’이 늘 충족되는 삶이 아니라 ‘양심’이 늘 충족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많은 것은, 욕심(인심)에게는 욕구불만을 가져올 것이나 양심에게는 욕구충족의 계기가 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사람은 욕심(인심)이 늘 충족되는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심(인심)’의 욕구대로만 사는데도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면, 자신이 깨어있는 마음인 ‘양심’을 따르며 살고 있는지 절대로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행동인 ‘덕’은, 우리가 난관과 곤경을 만나 자신의 심사와 언행을 반성하는 중에 배양됩니다.

 

[맹자]에서 이르길

 

“백성을 사랑하는 데도 그들이 나를 친밀히 여기지 않을 때는, 내 ‘사랑’(仁)이 부족하지 않은지 반성하라.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나의 ‘지혜’(智)가 부족하지 않은지 반성하라!”(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라고 하였듯이,

 

우리는 역경에 처할 때마다, 우리의 부족한 점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덕’에 나아갈 수 있고 ‘행실’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매사가 내 뜻대로 진행되고 순조로울 때는 교만해지고 자만에 빠지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어두워지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참으로 온몸이 독기가 꽉 찬 짐새의 ‘독’에 흠뻑 빠져 죽어가는 격이 됩니다.

 

사람은 일이 어그러지고 곤경에 빠져야만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비양심적으로 굴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 그제야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반성’이야말로, 욕심(인심)의 과오를 직시하고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그러니 ‘양심’에게는 역경이 사는 길이며, 순경이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큰 인재를 낼 때도 먼저 곤경과 시련으로 ‘큰 덕’과 ‘큰 재주’를 배양할 터전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맹자]의 다음 구절은 참으로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고자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며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 몸뚱이와 피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고, 행동을 함에 그 하는 바를 어그러지고 어지럽게 하니, ‘마음’을 요동하게 하고, ‘성질’을 참아내게 하여, 그 할 수 없는 바를 도와서 잘 할 수 있게 하고자 함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역경을 만나야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실덕을 반성하며, 단단한 각오로 역경을 이겨내고자 노력하는 중에, 나약한 성질을 극복하고 강인한 마음을 일으켜 양심을 배양하여 ‘덕’으로 나아가고 재주를 배양하여 잘하지 못하던 일을 잘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역경’을 기뻐해야 하고, ‘순경’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나 우리가 ‘역경’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의 덕을 배양하는데 있어서 가장 절실한 부분들입니다.

 

‘이성’ 문제로 역경에 처한 것은 그 부분의 덕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며, ‘돈’ 문제로 역경에 처한 것은 그 부분의 덕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실 ‘역경’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우리가 현 시점에서 배양해야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가르쳐주는 최고의 스승인 것입니다.

 

그러니 ‘역경’을 두려워 말고 ‘덕’과 ‘재능’을 배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역경을 맞이할 때, 역경은 더 이상 좌절의 계기가 아닌 덕과 재능을 배양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출처: http://v.daum.net/link/52266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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