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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에 이른 어린이들은 삶에서 그들의 영혼 상태가 의미심장한 변화를 거치는 단계에 놓여있다. 태어나서 6, 7세가 되기까지의 시기에 인간은 직접적인 주변환경에 있는 모든 것에 몰두하는 자질을 지닌다. 그렇게 모방하는 본능으로부터 자신의 되어 가는 힘을 형성한다. 6, 7세가 되면 교육자와 교사가 자명한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어린이에게 작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영혼이 열린다. 그의 내면에서도 역시 살아야 하는 것이 교육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내면에 살고 있다는 불분명한 느낌에서 어린이가 권위를 수용한다. 모방 본능에서 자명한 권위 관계를 근거로 하는 습득력으로의 변화를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없이 어린이를 대한다면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단순한 자연관에 근거하는 현대 인류의 인생관은 인간 발달에서 드러나는 그런 사실들에 완전히 의식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이 지니는 삶의 표현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을 위한 감각이 있는 사람만 그런 것에 필수적인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런 감각이 교육과 수업 예술을 지배해야 한다. 그 감각이 교과 과정을 형성해야 하고, 교육자와 어린이를 합일시키는 정신 속에 살고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하는 일은, 추상적 교육학의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 고무된 것에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교육자는 활동하는 매 순간 되어 가는 인간에 대한 생동적인 인식으로부터 항상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활기에 찬 교육과 수업은 많은 어린이들이 있는 학급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이의를 당연히 제기할 수 있다. 특정한 한도 내에서 그 이의는 분명히 옳다. 그런데 특정한 한도를 넘어서까지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정규-교육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어린이 각자의 내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진정한 인간 인식에 접하는 생동적인 교육 예술과 수업 예술을 관철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가르침을 통해 어린이를 주제에 붙들어 놓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육과 수업에서 작용하는 것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하는 것이 충분이 강하게 생동적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인간 인식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어 가는 인간이 아주 고도로 그가 풀어야만 하는 삶의 수수께끼가 되어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시도에 어린이들이 동참하도록 일깨운다. 그런 동참이 개별적인 가르침보다 더 풍부한 결과를 가져온다.

개별적인 지도는 진정한 자아 활동과 관련하여 어린이를 너무 쉽게 마비시키고 만다. 물론 일정한 한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인간 인식에 의해 완전히 고무된 삶을 사는 교사가 가르치는 가득찬 학급이, 그런 삶을 발달시킬 능력이 없어서 정규-교육학으로부터 출발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적은 학생 수의 학급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어린이 답게-예술적인 교육에서 얼마나 강하게 지적인 것을 건져낼 수 있는지를 간파한다면, 초등학교 첫 학년의 수업에서 예술에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음악 예술과 조형 예술을 수업 영역에 올바르게 위치시키고, 신체적인 연습에 예술적인 것을 적합하게 연결할 것이다. 체조와 운동을 음악적인 것이나 낭송에 의해 고무되는 감정의 표현으로 만들 것이다. 단지 육체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것만 근거로 하는 것의 자리에 오이리트미적인 것, 의미에 찬 움직임이 들어선다. 그러면 수업의 예술적인 구성에 의지 형성과 감성 형성을 위해 얼마나 강한 힘이 내재하는지 알게 된다. 

특정한 삶의 단계에서 현시하는 발달력과 방법론 간에 존재하는 관계를 투철한 인간 인식으로 통찰하는 교사만 여기에 암시된 방식으로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면서 수업을 할 수 있다. 어린이를 다루는 학문으로 교육학을 배운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인간 인식을 통해 내면에서 교육자가 깨어나야 그 사람이 진정한 교사가 된다. 


·········· 가르치는 내용을 어린이가 모두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고 기회만 되면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서까지 애를 쓸 때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런 노력에는 분명히 훌륭한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지는, 인간이 어린 시절에 순수하게 기억으로만 습득한 것을 나중에 나이가 좀 든 후에 다시 일깨우고, 그 동안 노력해서 얻은 성숙도를 통해서 비로소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깨닫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억력으로 수업 내용을 습득하는 경우에 흔히 어린이가 보이는 그 염려스러운 무관심을 교사가 활기에 찬 방식을 통해 필수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교사가 자신의 존재 전체로 수업 활동에 내재한다면, 어린이가 나중에서야 완전히 이해를 해서 희열에 찬 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도 어린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바로 그 나중의 신선한 체험 속에 삶의 내용을 간단없이 강화시키는 것이 들어 있다. 교사가 그런 강화를 위해 작용할 수 있다면, 그는 현존의 노정을 위해 잴 수 없이 커다란 삶의 자산을 어린이에게 준비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어린이의 <이해>를 겨냥하느라 <실물 수업>을 지나치게 적용해서 진부해지는 것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런 수업이 어린이의 자립적인 활동을 참작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어린 시절을 위해 아주 불쾌한 맛을 지니기 마련이다. 특정한 관계에서 아직은 어린이의 <이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을 어린이 내면에서 교사의 활력에 찬 불꽃으로 불을 지피는, 바로 그 일깨우는 힘이 인생 전체를 거쳐 작용하면서 머문다. 

- '사회 문제의 핵심' 중에서


··········


[1919년 8월과 9월,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학교 개교에 즈음한 14일 간의 교사세미나를 마친 후에 행한 슈타이너의 "결어"]

[독일어 번역입니다. - 최혜경 옮김]

이제 제가 말하자면 여러분의 마음에 명심시키고 싶은 것에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오늘 이 고찰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교사가 크고 작은 것에서 자신의 직업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정신화 함에서, 교사가 하나하나의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의 개념과 모든 개별적인 감각을 어떻게 발달시키는지, 바로 그 양식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교사는 발안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교사가 절대로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달리 말하자면, 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것과 어린이들을 대하는 처신에 완전히 현존해야 한다는 점을 숙고하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즉 교사는 크고 작은 전체에서 발안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 두 번째는, 사랑하는 여러분, 교사로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과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교사로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흥미로울 수 있는 것에 어떤 식으로든 등을 진다면, 그런 것이 교사에게서 자리잡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별적인 어린이들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두 번째입니다. 교사는 세상과 인간존재를 위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내면에서 진실이 아닌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내면 깊숙이 참된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절대로 진실이 아닌 것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많은 경로를 통해서 진실이 아닌 것이, 특히 방법론에서 우리의 수업으로 흘러들어오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진실한 것을 추구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경우에만, 우리의 수업이 진실한 것의 각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실현되기 보다는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나 역시 교사라는 직업을 위해서 황금률인 것이 있습니다. 교사는 메마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메마르지 않은 신선한 영혼정서! 메마르지 않고, 시대에 뒤 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교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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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학교에 대한 정신 생활의 공적 관리가 현대에 들어 점점 더 국가 소관이 되어 버렸다. 교육 제도는 국가가 떠맡아야 할 안건이라는 생각이 현재 너무나 깊이 인간 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런 의견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상상이라도 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론가>로 치부된다. 하필이면 삶의 바로 그 영역에 가장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놓여 있다. 이미 암시된 방식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움>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방어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오늘날 인류의 문화 생활에서 쇠퇴하는 흐름의 모사에 불과한 특징을 유별나게 띠고 있다. 새로운 국가 형성은 그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 삶의 요구 사항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현대 인류의 경제적 요구 사항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를 보인다. 교육 제도를 종교 공동체에서 분리해 내어 완전히 국가에 종속시킨 이래로 교육 제도에 낙후성이라는 딱지를 눌러 붙였다. 

모든 단계에서의 학교가 인간을 양성하는 데에 있어서, 국가가 필수적이라 여기는 일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를 고려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학교 제도에 반영한다. 보편적인 인성 교육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강하게 자신을 국가질서의 한 지체로 느끼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성 교육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실은 국가에 쓸모 있는 하인을 만드는 교육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 관계에서 오늘날 사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유익한 것을 전혀 약속하지 않는다. 낡은 국가를 거대한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국가의 학교가 그 경제 조직에서 연속되어야 한다. 그 연속이 현재의 학교가 지니는 모든 오류를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 확대시킬 것이다. 국가가 아직은 교육 제도의 지배자가 아니었던 시대에서 유래한 것들이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물론 구시대에서 유래하는 정신이 다시 지배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발달된 인류의 새로운 정신을 학교로 들여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국가를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 그 경제 조직 내에서 쓸모 있는 노동 기계나 될 사람들을 양성하도록 학교를 변형시킨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단일학교>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 단일학교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상상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를 경제 조직의 유기적 지체로 형성하면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시해야 할 것은 학교가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 내에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교육해야 할지는 오로지 성장하는 인간과 개인의 소질에 대한 인식에서만 나와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인류학이 교육과 수업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해 인간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어떤 소질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가? 그 인간 내부로부터 무엇을 계발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항상 새로운 힘을 사회 질서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사회로 들어서는 성인들이 그 사회와 할 수 있는 것이 사회 질서 내에 항상 살게 된다. 반면에 기존의 사회 질서가 성장하는 세대로부터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침없이 발달하도록 양성된 개인적 재능들이 항상 새로이 사회 조직으로 공급될 때에만 학교와 사회 조직 간의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학교와 교육 제도가 자치적 근거에 세워질 때에만 그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독립적인 정신 생활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 과정을 지시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연령에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지는 인간 천성에서 나와야만 한다. 국가와 경제는 인간 천성의 요구에 상응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특정한 직무를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필요한 사람인지 검증하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도록 교육하라."고 국가와 경제가 말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유기체의 정신적 지체가 독립된 행정으로부터 적합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을 일정 정도까지 교육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경제는 정신적 지체에서 이룬 일의 결과에 맞추어서 조직해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인간 천성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천성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 스스로에 근거하는 정신 생활이 인간을 세상 물정에 어둡게 양성하리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와는 반대로, 기존의 국가 조직과 경제 조직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스스로 규제하는 경우에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생겨난다. 국가와 경제 내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이미 되어 버린 것에서 관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되어 가는 인간의 계발을 위해서는 사고와 감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원칙이 필요하다. 교육되어야 할, 수업을 받아야 할 사람을 자유롭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마주 대하는 경우에만 교육자로서, 교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작용 원칙을 위해서는 오로지 사회 질서의 본성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 대한, 인간 천성에 대한 인식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지시나 법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사회 질서를 공동체적인 관점을 따르는 사회 질서로 전환시키기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포함한 정신 생활이 독자적인 행정을 따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유기체의 그런 독립적인 지체로부터 양성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 생활에 의해 규제되는 학교에서는 그런 열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 배출될 수 있을 뿐이다.

국가와 경제를 위해 완전히 의식적인 시민과 일꾼이 되기 전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지배권의 영향력을 마치 파괴하는 요소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교사와 교육자의 힘을 통해서 되어 가는 인간이 성장해야 한다. 그런 교사와 교육자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능력 역시 자유롭게 발달시킬 수 있다.

··········

지난 수백년간 시민 계급적 사회 조직 내에서 경제 생활의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정신 생활이 경제 생활에 강한 종속성을 띠게 되었다. 인간 영혼이 관여하는 자체적인 근거를 지니는 정신 생활에 대한 의식이 소실되고 말았다. 자연 과학과 산업주의가 그 소실에 협력했다. 현대에 들어 학교를 사회적 유기체 내로 편입한 방식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다. 국가와 경제 내의 외적인 생활을 위해 인간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학교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최우선적으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사물의 정신 질서와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그 의식을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국가와 경제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점점 덜 고려되었다.

두뇌들이 점점 더 정신적 세계 질서를 외면했고, 점점 더 경제적인 생산 관계만 주시했다. 시민 계급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 생활의 느낌에 상응하는 방향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적 지도자들은 그것에서 이론적인 인생관, 삶의 도그마를 만들어 내었다. 그 삶의 도그마가 미래에 학교 제도의 구축을 위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회적 유기체에서 아무리 뛰어난 경제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에서는 정신 생활의 관리, 특히나 학교 제도를 위한 생산적인 제도는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낡은 사고 세계의 전승을 통해서 학교 제도를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의 형상화를 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당들은 계속해서 낡은 세계관의 소유자들에게 학교 내의 정신적인 것을 관리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는 지속되는 낡은 것에 대한 내적인 관계가 성장하는 세대들에게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정신 생활이 점점 더 피폐해지고 만다. 내적인 힘의 원천이 될 수 없는 인생관과 함께 자기기만적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세대의 영혼이 황폐해질 것이다. 산업주의에서 생겨난 공동체 질서 내에서 사람들은 영혼이 비어 버린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삼지적인 사회적 유기체를 향한 운동은 수업 제도를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자 한다. 교육계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지체는 그 분야에서 직접 활동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어떤 권력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업 제도의 행정, 교육 과정과 교육 목표의 설정은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거나, 혹은 정신 생활에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만 관여해야 한다. 그런 인물들 각자가 수업이나 여타의 정신적 활동과 학제를 위한 행정 간에 그들의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정신 생활의 판단을 아무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수업 활동을 하거나 다른 정신적 창조 활등을 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교육 제도와 수업 제도의 조직과 행정에 필요한 활력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무너진 공동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정신 생활의 새로운 원천이 어떻게 열려야 할지를 공평무사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필시 그 사람만 우리 시대를 위한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르크시즘과 삼지성"이라는 논설에서, 올바르기는 하지만 역시 일방적인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인간을 지배하던 정부의 자리에 물건의 행정과 생산 과정의 관리가 들어선다." 엥겔스의 생각이 옳은 만큼, 경제적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인간을 함께 지배했기 때문에 과거의 공동체 질서 내에서 인간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역시 진실이다. 그 지배가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지배 자극을 통해 인간 내에 작용했던 삶의 동력을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정신 생활에서 얻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에 또 다른 점이 더해진다. 정신 생활은 스스로 단일성으로서 발달할 수 있을 때에만 풍부하게 성장한다는 점이다. 충족시키는 세계관, 인간을 떠받치는 세계관이 나오는 영혼력의 동일한 발달에서, 인간을 경제 생활을 위해 유능한 일꾼으로 만드는 생산적인 힘이 생겨난다. 건강한 방식으로 고차적인 세계관을 위한 동력도 역시 발달시킬 줄 아는 수업 제도에서만 외적인 생활을 위해 실용적인 인간이 양성되어 나온다. 건강하게 발달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단지 물건만 취급하고 생산 과정만 관리하는 사회 질서는 점차적으로 아주 잘못된 길을 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 생활의 새로운 구축은 독립적인 수업 제도를 설치할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을 낡은 방식으로 더 이상 <지배> 해서는 안 된다면, 모든 인간 영혼 내의 자유로운 정신이 완전히 강건해져서, 그것이 각 인간의 개인성 내에서 삶의 주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정신은 결코 억압되지 않는다. 경제 질서의 관점에서만 학교 제도를 조정하려는 체제는 그런 억압을 위한 시도가 된다. 그런 체제는, 자유로운 정신이 그 천성적 근거로 인해 끊임 없이 반항하도록 만들 것이다.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학교 제도를 조직하려는 질서의 불가피한 결과로 사회구조에 지속적인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찰하는 사람에게는,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의 자유와 자치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인간 공동체의 구축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구가 된다. 이 영역에서 올바른 것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다른 모든 필수적인 요구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오늘날 정신 생활의 형상을 솔직한 시각으로 일별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의 분열성을, 그리고 올바른 것을 인식하기에는 인간 영혼을 위해 너무나 부족한 그것의 적재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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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헝가리의 국가 형태는 반세기가 넘도록 쇄신을 촉구하였다. 다양한 민족 공동체에 뿌리박은 정신 생활이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였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자극들에서 형성된 단일국가가 그 새로운 형태의 발달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 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의 시발점이 되는 세르비아·오스트리아 분쟁은, 단일국가의 정치적 국경이 특정한 시점에 이르면 민족 생활을 위해 어떤 문화 국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전적으로 타당한 증거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정치적 국가와 그 국경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신 생활이 그런 경계를 넘어서서, 각 민족들의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정신 생활 내에 그 뿌리를 둔 분쟁이 정치적 재난으로 폭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정치가답게> 생각한다고 자만했던 모든 이들에게는 그 방향을 목표로 한 발달이 완벽한 불가능으로, 심지어는 순전히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그들의 사고습관이, 민족적 공통성의 경계와 국경은 일치해야 한다는 표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육 제도와 정신 생활의 다른 부분을 포괄하는 정신적 기구들이 국경을 넘어서서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그 사고습관에는 불쾌하게 거슬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국제 생활을 위한 새 시대의 요구 사항이다. 실질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외관상의 불가능성에 매달려서, 그 요구 사항이 지니는 의미에서의 제도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새 시대의 요구 사항에 부합될 수도 있었던 방향으로 <정치가적인> 사고를 이끄는 대신에 그 요구 사항과는 반대로 단일적인 국가를 유지하려는 제도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로 인해 국가가 점점 더 몰상식한 형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의 20년대에 이르러서는 낡은 형태에서의 자기 존속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해체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거나, 내적인 불가능성을 전쟁이라는 조처에 근거하는 외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목전에 두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가들>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남아 있었다.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의 생존 조건을 위한 방향으로 그들의 의도를 돌려서, 새로운 신뢰를 일깨울 수 있었던 의지로서 그것을 공표했어야만 했거나, 혹은 구시대적인 것의 존속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에 발생했던 것을 이런 저변으로부터 판단하는 자만, 책임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민족 공동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가 형태에 관여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를 발달시킬 세계 역사적 과제가 그 형태에 부여되었었다. 그런데 그 과제를 간과하였다. 세계 역사적 발달의 정신에 적대적인 그 과오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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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에게는 ·········· 세계 창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창조를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 파악을 위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 철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확실한 지반을 찾아야만 한다. 


·········· 사고하는 주체, 혹은 사고되는 객체에 대한 관계가 없이, 우선은 사고를 완전히 중립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체와 객체 속에 이미 사고를 통하여 형성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것을 파악할 수 있기 전에, 사고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창조의 시초 부분이 아니라 최종 부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통한 세계 해명을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현존재의 최초의 요소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부터, 밀접하게 주어진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고찰을 시작하기 위해서 세상의 시초로 훌쩍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최근의 것에서 좀 더 이전의 것으로 점진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지질학이 지구의 현재 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가공의 변혁에 대해서 말했던 동안에는, 그저 암흑 속에서 더듬기만 했던 것이다. 어떤 과정들이 현재의 지구상에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거기에 과거사를 연역해 내는 점에서 출발했을 때에야, 비로소 지질학이 확실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철학이 원자, 운동, 물질, 의지, 무의식과 같은 모든 가능한 원리를 가정하는 동안에는 그저 공중에 유영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자신의 최초의 것으로 간파하게 되면, 비로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 발달이 향해 온, 절대적으로 최종의 것, 그것이 바로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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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의식은 개념과 관찰이 서로 만나 함께 연계되는 공연 무대다.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 동시에 이 (인간의) 의식이 성격화 된다. 인간의 의식은 사고와 관찰의 중개자다. 인간이 대상물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대상물이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이 사고를 하는 한,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대상물은 객체로, 자기 자신은 사고하는 주체로 고찰한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자신 스스로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자아 의식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사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시각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 돌리게 되면, 바로 사고가 자신의 근원적 존재, 자신의 주체를 대상물이라는 객체로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로지 사고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을 주체로 결정하고, 객체의 맞은편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를 단순한 주체적인 행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사고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개념도 형성한다. 우리가 사고하는 주체로서 개념을 하나의 객체에 연관시킬 때에, 이 관계를 단순히 어떤 주체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관계를 이끌어 오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로서 행하는 활동은 그저 단순히 주체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은, 이 양 개념을 극복하여 넘어서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주체가 사고한다고 말할 권리가 전혀 없다. 이 개인적인 주체는 오히려 사고의 은혜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를 나의 자아 이상으로 이끌어 내어, 객체와 연결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동시에 사고가 나를 주체로서 객체의 맞은편에 세워 둠으로써, 나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기인한다. 인간은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과 나머지 세계를 포괄한다. 그는 동시에, 사고에 의하여 사물의 맞은편에 서 있는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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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에까지 이른 당시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에 형성된 단일국가를 지목하면서, 유럽 사회의 건강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를 유기적인 세 부분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관리, 지배하고 책임지는 단일국가가 해체된 그 자리에, 교육 · 문화 · 종교 등 인간의 정신 생활을 담당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조직,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권리 · 법률 부문을 담당하는 민주적 국가 조직, 박애를 근거로 하는 경제 조직이 들어서도록 하되, 그 세 조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사회를 언급하였다. 그런 사회 형태를 그는 '삼지적 사회 유기체'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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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이 바로 인간의 한 부분인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데에 있다. '일=수입'이라는 생각이 자연법칙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일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한 부분을 팔아야 하고 자신의 내적인 요구와는 무관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로써 또한 경제 구조 내에 맞물린 개인의 노동이 박애의 근거를 지니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불가피하게 얻게 된다.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서 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 대부분의 상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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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행위의 원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합하게끔 행하라."라는 칸트의 윤리학에 슈타이너는 "네 특유의 개인성에 따라,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하라!"고 대답하였다. 교육을 통해 접종된, 외부의 기대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발안한 일을 할 때에만 인간이 자유롭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그 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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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계 은행인 GLS 은행의 이름은 삼지적 사회 내의 자본에 대한 관념 중 중요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Geben=주기, Leihen=빌려주기. Schenken=기부하기, 이 세 단어의 이니셜을 딴 약자가 그 은행의 이름이다. 삼지적 사회 유기체 내에서 은행의 역할은 자본 근거를 지닌 사람과 활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연결해 돈이 고여 냄새가 나기 전에 흐르도록 만드는 일에 국한된다. 그렇게 은행을 통해 매개되는 자본 근거 중에서도 조건 없이 그냥 주는 돈이 가장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정신 생활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교육 담당자, 예술가, 작가, 종교 지도자, 학자 등은 국가가 아니라 경제 생활 영역에서 넘어오는 조건 없는 기부금으로 뒷받침될 때에만 그들의 활동 결과가 가장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작가의 생활 상태가 일의 결과물인 책을 판매하여 나오는 수입에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팔릴 책만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보다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신 생활의 영역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자치를 실행하고, 경제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뒷받침을 얻는 것, 바로 이 사실에 오늘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거와 더불어 한 사회의 건강한 미래 형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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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의 삼지적 사회 유기체의 관념에 따르면 자연물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해 변화시킨 것만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유통되고 소비된다. 토지나 대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자연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생산물처럼 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토지나 대지, 부동산 등은 생산을 위한 자본 근거가 되며,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시기 동안 그것에 대한 재량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생산 활동을 멈추는 순간에 그것에 대한 재량권이 생산적으로 활동할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 전환되어야만, 자본 근거의 부당한 집적으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적 현상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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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내에 존재하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인지라는 선제 조건을 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자유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만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수 있으며, 서로 간의 신뢰를 싹 틔워서 함께 돌보는 과정에서 자유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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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존 개념으로는 [사회 문제의 핵심]을 통해 루돌프 슈타이너가 인류에 제시하는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어깨 위에 다른 머리가 필요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 내용은 혁명적이다. 자본축적이 아니라 자본소진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이라거나, 돈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자로 불어나지 않고 낡아서 가치를 상실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산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바로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를 건강한 유기체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은 외적인 정치 활동도 사회 활동도 아니라, 각 개인이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념과 개념을 새로이 정립해서 느끼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삼지적 사회 유기체'는 어떤 거대한 조직이, 예를 들어서 국가 조직이 그런 사회 체제를 만들어 냄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가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서' 삼지적 사회관념에 따라 사고하고 느끼기를 배워서 살아내려고 애쓸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심지어 인지학계의 인사들조차 슈타이너의 사회적 삼지성은 이미 극복된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머리가 로마시대 이래로 존재해 온 낡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 생활은 당연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사람들이 쉽게 말들 한다.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문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 생활이 자유롭다고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 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이루는 교육에 이르면 갑자기 정신 생활의 자유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증서가 필요해서, 국가공인이 필요해서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는가? 자식을 교육시키는 이유 역시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장래의 경제 생활을 보장해 줄 직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국가의 인정이나 경제 생활의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배움 그 자체를 위해서만, 되어 가는 인간의 전개 자체를 위해서만 자식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하면, 사회의 발달과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현재의 독일 발도르프 교육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들조차도 국가의 공인을 받으려고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도 그 정도가 심각하게, 그 정도로 뼛속 깊이 우리의 정신 생활을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루어내지 않는다면,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을 각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내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건강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의 정신 생활을 위해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자유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어께 위에 다른 머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야만 한다.

- 역자 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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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관점에 대하여, 기본 법칙, 근원 법칙이 우선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대응하여 나타난다는 점이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우리를 자연이라는 모체(母體)로부터 떼어 내어 '자아'와 '세계'로 대립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괴테는 그의 논설 <자연>에서, 그 방식이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비학문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 점을 고전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자연)의 품속에 우리는 살고 있어도, 그녀가 낯설기만 하다. 그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데, 비밀은 탄로하지 않는다." 괴테는 그러나 그 이면도 알고 있다. "인간 모두 그녀 안에 존재하고, 그녀는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것이 진실인 것처럼, 우리가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자연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도 진실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의 효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연을 향한 길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 우리가 스스로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어떤 것을 함께 가지고 왔음에 틀림없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이 자연 존재를 다시 찾아내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먼저 우리 내부의 자연을 알아야만, 우리의 외부에서 자연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연의 동일형이 우리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진로가 보인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깊숙이 하강하여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도피하면서 구해 내어 온 바로 그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연구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을 가져와야만 한다.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는 그저 막연한 '자아'가 아니라, 여기에는 '자아' 이상의 것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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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위가 순수하게 동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영역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우리의 동기는 사실 항상 사고로 관철된다. 사랑, 동정심, 애국심 들은 냉철한 이해 개념 속에 녹아나지 않는 행위의 원동력이다. 여기서는 바로 가슴과 정서가 그 정당성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

가슴으로의 길은 머리를 통해서 이른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이 그저 성욕의 출구가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하여 만드는 표상에 접촉되어 있다. 이 표상이 더욱 이상적일수록 사랑은 더욱 행복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사고가 감성의 아버지가 된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사랑하는 존재의 약점을 보지 못한다고 말들 한다. 그런데 사실을 역으로 보아 "사랑은 바로 그 존재의 장점을 위해서 눈을 열어 준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한 인간의 장점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생각 없이 지나쳐 간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장점들을 보게 되고, 그의 영혼 안에 사랑이 일깨워진다. 그 사람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표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표상이 부재하기 때문에 사랑도 일어나지 않는다.

 ··········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물을 이해하려 한다. 인간 행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사고의 원천에 대한 질문을 선행 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하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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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경제 개혁 위해 매달 돈 가치 떨어지는 ‘노화하는 돈’ 구상 지역통화운동이나 여러 대안적 금융기관들에 큰 영향 끼쳐


돈은 종종 혈액에 비유된다. 인체의 피가 세포에 '산소'를 전달해주는 매개체라면, 사 회 속의 돈은 경제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에 게 '가치'를 전달해줌으로써 그 활동을 촉진 하는 매개체다. 돈은 경제의 곳곳을 누비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활동을 도울 때 비로소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돈에는 자기증식의 논리가 있다. 자 신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올려놓는 힘 도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생산의 결과물이 자 생산물의 매개체에 불과하던 돈이 자본 주의 체제와 결합돼 하나의 목적이 되는 과 정을, 그리고 이 속에서 인류가 돈이 돈을 낳 는 (것처럼 보이는) 메커니즘 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보여준 바 있다. 진정한 가치를 낳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경제적 활동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돈이 가치의 원천처럼 나타난다. 마르크스의 '물신성' 개 념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런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담겨 있다. 물신성이 확대됨 에 따라 자기증식하는 돈의 논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되고 금융적 수익을 통해 부를 추구하는 생활양식도 확산된다. 이제 돈은 생산적 활동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경제 현장에서 '퇴장'하거나 사람들의 삶이나 진짜 경제와는 무관한 투기적 공간으로 진출 해 자기증식 논리를 더욱 강화한다. 이 과정 에서 돈이 부족해진 진짜 경제는 활동이 위 축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돈이 넘쳐나게 된 가상의 투기적 공간은 거품을 부풀린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왼쪽)와 독일의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 

이들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도록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해 자기증식 능력을 제한하는 거라고 믿었다.한겨레 자료



저축 의미 잃고 대규모 투자 불가능


그렇다면 어떻게 돈을 본연의 위치로 돌려 놓을 수 있을까?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 을 고용해 생산을 주도하고 잉여가치를 최대 한 뽑아가는 상황에서는 단순히 화폐제도를 고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 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역시 돈이 목적의 자 리에서 수단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 장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참신한 해법은 오히려 경제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내놓았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사회개 혁가이고 신비주의 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 너(1861∼1925)와 독일의 사업가이자 아나 키스트이고 경제학자인 실비오 게젤(1862∼ 1930)이 바로 그들. 이들은 화폐와 금융의 문제에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 했다. 그리고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 도록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란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해 자 기증식 능력을 제한하는 거라고 믿었다. 즉 돈도 인간처럼 태어나고(발행되고), 늙어가 고(가치가 떨어지고), 세상을 떠나도록(가치 가 없어지도록) 함으로써 목적하는 바를 이 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 발상은 이른바 '화폐 노화법'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법은 돈의 가치 가 예컨대 매달 10%씩 떨어지도록 규정한 다. 그러니까 신권 10만원은 한 달이 지나면 9만원으로, 두 달이 지나면 8만원으로 그 가치가 계속 떨어지며, 열 달이 지나면 0원 이 된다. 이 법이 적용되는 세상에서는 시간 이 흐를수록 돈이 노화해 그 가치가 줄어들 고, 수명 또한 10개월로 제한되는 것이다. 이 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루 일하고 거래 상대 방에게 신권 10만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이 돈을 투자해 더 많은 돈 으로 돌려받는다는 발상이 사라질 터이다. 그리고 외식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늘리거나 집수리 등을 해서 새로 생긴 돈의 구매력이 줄어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써버리려 할 것 이다. 

이처럼 돈이 퇴장하지 않고 '진짜 경제' 내에 계속 돌면서 빠른 속도로 경제활동을 매개하게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경제도 좋아지고 사람들의 다양한 창조적 활동도 늘어날 게다. 물론 세상에 '노화하는 돈' '감가하는 돈'만 있다면 저축이 의미를 잃을 테고 많은 자금이 은행에 모일 수 없게 돼 대규모 투자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슈타이너와 게젤이 전국적 차원에서 발행·운영하는 전통적 통화 부문과 돈의 노화 원리에 기반해 지역마다 자율적으로 발행·운영하는 대안적 통화 부문이 공존하는 이원화된 화폐 시스템을 제안한 것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였다.



'슈타이너와 전쟁' 선포한 나치


화폐 문제에 대한 이들의 도발적인 해법은 현실에서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 특히 슈타이너가 주도한 사회개혁운동은 1920년대 중부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의미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나치 정권은 '슈타이너(주의)와의 전쟁'까지 선포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암살을 시도했고, 슈타이너는 결국 스위스로 망명한다. 독일과 소련 정권은 이들의 저서를 금서로 취급해 불태우기까지 했지만, 이들의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개혁을 모색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됐고 이후 신좌파운동과 녹색운동의 물결이 일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슈타이너와 게젤 사이에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실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해법 또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독일 관념론이라는 공동의 지적 전통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유럽 좌파의 지배적 흐름은 생산의 중요성과 노동계급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하며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혁명을 지향한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등 높은 구체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이론의 체계성을 중시하고 거대 담론에 치중한 마르크스주의나 오스트리아학파에서는 찾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슈타이너는 정치·경제·문화의 세 부문이 독자적 영역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며 창조적 삶을 꽃피우는 다차원적 사회를 지향한 '삼중 구조화 운동'을 이끌었다. 게젤은 개인의 능력에 기반한 자율적인 지역화폐 및 경제 시스템을 세우려는 '자유경제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보유 재산과 각자의 필요에 따라 금리와 지대에 차이를 둠으로써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좁히는 세상을 꿈꿨다. 이들의 사상은 철학이나 경제학에서는 주요한 학파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휴머니즘과 사회정의의 이상으로 돈과 금융의 냉혹한 현실주의를 감화시킴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가려는 실천가들에게 대단히 유용한 지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돈과 경제와 사회의 관계


수십 년 동안 더디지만 꾸준히 확산되고 있는 지역통화운동이나 여러 대안적 금융기관들의 새로운 실험은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대안적 금융기관들이 이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구현하고 있으며 전통적 금융기관과 차별화되는 어떤 비전을 보이는지, 그리고 이들의 사업모델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넘길 수밖에 없겠다). 슈타이너와 게젤의 작업이 더 널리 알려진다면, 돈과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슈타이너의 사상 중 인지학과 유아교육에 관한 부분은 ‘발도르프 학교’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 의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유기농법이나 지역통화에 관한 부분은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 같은 우리 사회의 눈 밝은 분들이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엔데의 유언: 모모의 작가 엔데, 삶의 근원에서 돈을 묻는다>는 미하엘 엔데의 마지막 육성을 통해 슈타이너와 게젤의 사상이 지니는 현재적 의의를 들려줄 것이다.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출처: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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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역동농업은 인지학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루돌프 슈타이너 (1861~1925)가 세상에 선물처럼 주고 간 것이다.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슈타이너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독일 카이저링크 백작의 초청을 받아 열흘 동안 자신 평생의 지혜를 농업 강좌로 풀어놓았다. 당시는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토양오염이 경고되는 한편 1차 대전 이후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의 강좌를 들은 농민들이 그의 가르침을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이라 이름 짓고 곧바로 데메테르협회를 창립했으며, 1928년에는 데메테르 유기농 인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금 생명역동농업에서 사용하는 9가지 증폭제의 제작 방법과 파종달력의 기본원리 또한 그날의 농업 강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슈타이너의 농업 강좌를 정리한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에는 “빛과 온기의 작용에 따라 식물 안에 있는 요소들의 함량이 달라진다”는 생명역동농업의 원리가 설명돼 있다. 예를 들어 아침저녁에는 식물 안의 질소 함량이 많아져 성장이 촉진되고 한낮에는 질소 함량이 적어져 성장이 위축되는데, 기운의 원천인 천체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이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생명역동농업의 요체는 달과 행성의 천체 기운이 땅과 먹을거리에 잘 깃들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생명역동농업은 우리의 절기농사와도 맥이 닿는다.


지금은 세계 50여개 나라의 15만㏊ 농지에서 생명역동농사를 짓고 있으며 곡물과 과일, 채소뿐 아니라 커피와 차, 포도주, 낙농과 육류, 화장품, 유제품, 꽃, 종자 등 다양한 데메테르 인증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데메테르 포도주 생산자만도 450농가에 이른다.


생명역동농업의 공동체 마을로 유명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도텐펠더호프 협동농장에서는 1년 과정의 인지학 및 생명역동농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평생교육기관인 에머슨대학에서도 올해부터 1년 과정의 생명역동농업 원예학 강좌를 개설한다.

이민호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파종달력 맞춰 천체 기운 머금은 먹거리 생산


김준권 회장이 생명역동농법으로 재배한 벼를 살피고 있다. 


[나는 농부다] 생명역동농업 일구는 김준권씨 

 

“해마다 발행하는 파종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과채류, 화채류, 엽채류, 근채류를 나눠, 각각 씨 뿌리고 수확하기에 적합한 날을 열매, 꽃, 잎, 뿌리의 날로 표시해요. 별자리에 따라 그날이 정해지고요. 예를 들어 달이 사수자리와 양자리, 사자자리에 있을 때가 과채류 농사에 적합한 ‘열매의 날’이에요.”


한국의 유기농을 이끌어온 경기도 포천의 김준권(67) 정농회장은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에 푹 빠져 있다. 수년 전부터는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를 만들어, ‘세계 최고 유기농법’의 보급과 확산에 나서고 있다. “일본 자연농법의 후쿠오카 마사노부 농장도 찾아가 봤어요. 하지만 말로 듣던 것과 많이 다르고 수확량이 너무 적었어요. 실망스러웠죠. 그러던 차에 생명역동농업을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게 느껴졌어요. 생명역동농업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고서야, 기본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 이 농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증폭제. 소뿔 속에 수정 가루와 물을 가득 채워 만든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생명역동농업이 유기농 중의 유기농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도 김 회장의 용기를 북돋웠다. 실제로 1928년 독일에서 시작한 생명역동농업은 데메테르(Demeter)라는 별도의 인증 프로그램을 두고 있으며, 50여개국의 농민이 가입해 있다. 데메테르 인증이 붙은 농산물은 일반 유기농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부인 원혜덕(59)씨도 거들었다. “같은 무를 파종달력의 ‘뿌리의 날’과 ‘잎의 날’에 심어보았어요. 뿌리의 날에 심은 무는 동그랗게 튼실했는데, 잎의 날에 심은 무는 잎만 무성하고 뿌리가 가늘었어요. 데메테르 농산물을 특수카메라로 촬영하면, 조직의 모양이 아주 활기차고 또렷해요. 일반 유기 농산물이나 관행 농산물과 확연하게 다르지요.” 원씨는 풀무원을 세운 고 원경선 선생의 딸이다. 김 회장은 풀무원 농장에서 일하면서 원씨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http://www.montirius.com/en/our-philosophy/bio-dynamic-culture/]


김 회장과 생명역동농업을 실천하는 회원들은 해마다 두차례 모임을 열고 ‘증폭제’(Preparation)라는 것을 만든다. “4월과 10월에 우리 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해요.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기도 어렵거든요. 땅의 활력을 살리는 9가지의 자연 제제인데요. 아주 적은 양으로 강력한 효과를 낸다 해서, 증폭제라고 우선 번역했어요. 처음 생명역동농업을 접하는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증폭제 때문이지요.”

  

대한민국 생명역동농법의 산실인 김 회장의 포천 밭. 파종달력에 맞춰 심은 배추와 무가 잘 자라고 있다.

            

500번에서 508번까지 번호를 붙인 증폭제는 모두 9가지. 그중 첫번째인 500번 증폭제는 암소뿔과 소똥으로 만든다. 한차례 이상 새끼를 낳은 암소의 뿔에다 암소의 똥을 집어넣고, 겨우내 여섯달 동안 땅에 묻어두는 식이다. “암소뿔이 땅속의 생명 기운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똥이 기운을 가득 머금게 되지요. 겨울에 묻는 이유는 땅의 기운이 가장 살아있을 때거든요. 봄에 꺼내서 물을 채운 양동이에 담아 1시간 동안 좌우로 번갈아가며 세게 저어 희석시켜 쓰면 됩니다. 암소뿔 1개 분량으로 3000평의 땅을 기름지게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증폭제 만드는 방법도 유별나다. 수정(실리카) 가루를 소뿔에 넣고 여름 동안 비옥한 땅에 묻어두는 501번, 서양톱풀 꽃을 수사슴 방광에 넣어 여름철에는 상온에 매달아두었다가 겨울 동안 묻어두는 502번, 카밀러(캐머마일) 꽃을 소의 장에 넣어 겨울철에 묻어두는 503번 등이다. 이렇게 만든 증폭제는 퇴비 더미에 뿌려 사용하는데, 1티스푼의 극소량으로 500~1000평의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김 회장은 20여마리의 한우를 직접 사육한다. 농사지을 퇴비를 얻으면서 증폭제로 쓸 좋은 소똥을 얻을 요량이다. 서양톱풀과 캐머마일,


떡갈나무 껍질을 속에 채워넣은 소 두개골을 땅에 묻어 증폭제를 만드는 모습

 

쐐기풀 등의 까다로운 재료들도 직접 재배한다. 수사슴 방광, 소의 장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독일에서 수입한다.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원들이 소똥을 속에 넣은 암소뿔을 땅에 묻고 있다.

 

김 회장의 집념과 끈기는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이미 2008년에 국제데메테르협회에서 김 회장의 공을 인정해 한국을 준회원국으로 등록했으며, 최근에는 근처 포천 지역의 농민들도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모임을 창립했다. 농촌진흥청 유기농업과에서는 포천의 일부 지역을 생명역동농업 실천단지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 회장은 1만5000㎡의 밭에서 토마토, 케일, 무, 배추, 마늘, 콩 등의 농사를 짓는다. 해마다 증폭제를 뿌리고 파종달력에 맞춰 씨를 뿌리고 거두어, 사람 몸에 가장 좋고 우주의 기운을 한껏 머금은 먹거리를 생산한다. 당연히, 김 회장의 농산물은 ‘포천 김준권이 기르고 만든 유기농 토마토주스’ 등으로 유기농 매장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맛도 으뜸이다.


김 회장은 “사람이 어떤 것을 먹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지를 늘 생각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초반 화학비료가 개발되면서 유럽의 농지가 급속하게 황폐해졌어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런 땅에서 키운 곡식이나 채소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기운이 빠져 있다고 보았어요. 망가진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방법으로 생명역동농업을 제시한 거예요.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 또한 사람이 어떤 것을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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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Bio-dynamic Agriculture



Bio-dynamic 증폭제 뿌리는 모습



Bio-dynamic Agriculture 와인 농장




[농사] - 생명역동농업(루돌프 슈타이너 농법) - 우주역학농법에 대한 참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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