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조선은 철학의 왕국이었다.



인문학으로 살아가기 - 전 세계인이 조선선비들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


조선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알려지지 않는 좋은 면들을 재조명함으로써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복구해보고자 한다.


1.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민족이 사는 국가였다

옛날 조선에서는 ​아이가 새벽에 오줌을 싸면 다음 날 동네에서 소금을 받아오게 시켰다. 얼핏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미신적인 풍습 같지만 여기에는 조선인들의 심오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었다. 음양오행상 새벽은 수기(水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이므로, 수기운이 약하면 신방광 계통에 이상이 온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이 때 오줌을 지리기가 쉬운 것이다. 반면, 염기의 양이온인 Na+와 산의 음이온인 Cl-가 만나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소금은 활동전위를 발생시켜 신경물질을 전달하고, 삼투압을 조절하고, 신체 내 노폐물을 해소시키는 기능을 하는 원소인데 오행상 생명력을 주관하는 수기로 본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아이의 부족한 수기를 채우라는 의미에서 아침에 이웃집을 돌며 소금을 받아오게 한 것이다. 순수한 연역적 추론(음양오행)에 의거한 조선인들의 과학성이 놀랍지 않은가?


조선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민족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람들만큼  이음양오행 이론을 철저하게 지킨 민족이 없었다.

먼저 음양이 합하여 이루어진 태극은 한민족이 예로부터 건물, 가구, 일상용품에 애용하는 문양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국기로 이어지고 있다. 

 

오행은 목(木, 봄;동쪽), 화(火, 여름;남쪽), 토(土, 중앙), 금(金, 가을;서쪽), 수(水, 겨울;북쪽)의 다섯 기운이 서로 상생하고 상극하며 우주의 조화를 이룬다는 사상으로, 오행설에 따라 유난히 5를 좋아했던 민족이 한민족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5부족, 고구려의 중앙의 5부와 지방의 5부, 백제의 5부 5방제의 행정구역, 통일전 신라의 지방 5주제, 발해의 5경 제도, 조선의 한양을 5방으로 나눈 것과 장시가 5일장으로 열린 것 등이 오행설과 관련이 있다. 오행설은 상생과 상극의 원리 속에서 우주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한다는 이론이지만, 한국인은 토(황제)-목(하)-금(은)-화(주)-수(진)-토(한)로 상극적이고 투쟁적인 중국보다 평화적인 상생의 측면을 선호한다. 그래서 사람도 상생의 순서에 따라 태어난다고 보아 목→화→토→금→수의 원리로 이름을 짓는다. 이것이 항렬인데 예를 들어 조부대에 흠(欽)과 같이 쇠금(金)변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아들대의 항렬은 연(淵)과 같이 물 수변이 들어가게 짓고, 손자대는 동(東)·상(相)·식(植)자와 같이 나무목(木)변이 들어가게 작명을 한다.

한편 왕조의 교체도 상극의 논리인 중국과 달리 상생논리로 이해하여 신라는 금, 후고구려와 고려는 수, 조선은 목의 왕조로 인식해 각 왕조는 이를 상징하는 9, 6, 8의 숫자를 애용하였다. 예를 들어 박-석-김으로 왕위가 교체되다가 김(金)으로 왕위가 세습된 신라는 금(4, 9)을 선호하였는데, 지방의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고, 중앙의 군사도 9서당으로 편재하여 금의 왕조임을 나타내었다. 수는 후고구려와 고려가 사용하여 후고구려의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사용했고, 고려는 전국을 6도(5도 양계)로 나누었다. 또한 숙종때 수도를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으나 남경의 주인은 목성을 가진 자가 주인이 된다는 설 때문에 수도를 옮기지 못하였다. 인종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1126년)도 목성인 이씨로 정권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목성을 가진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목(木, 3·8)을 표방한 조선은 유난히 3자를 선호했는데. 3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 삼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 삼법사(형조·사헌부·한성부), 3년마다 자(쥐띠해), 오(말띠해), 묘(토끼해), 유(닭띠해)년에 과거를 보는 식년시를 시행하고, 전국을 8도로 나눈 것과 장시가 5일장으로 열린 것은 모두 음양오행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오행을 오상(인·의·예·지·신), 방위(동·서·남·북·중), 빛깔(청·백·적·흑·황), 짐승(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 오장(간장·폐·심장·신장·비장)과 관련시켜 받아들이는 자세도 매우 진지했다. 

사실상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은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세워진 계획도시였다. 북쪽에 백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왼쪽에 낙산(좌청룡),  오른쪽에 인왕산(우백호), 남쪽에 남산 목멱산(남주작)이 서 있었다. 


가장 중요한 궁전인 경복궁의 3개 문을 차례로 지나면 왕의 정사를 돌보던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전 중앙은 토(土), 황제의 자리다. 그 뒤쪽 깊숙한 곳에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이 있다. 교태전의 모습은 태극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천지의 음양의 기운이 한데 어울려 만물의 근원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쪽에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오행의 목(木)을 뜻하며, 세자는 자라서 왕이 된다는 뜻이다. 서궁(경운궁)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는데 대비의 거처로, 대비는 지는 해라는 의미로 오행의 가을(金)을 나타내고 있다. 

궁실의 ​대문은 우주의 기운이 흐르는 입구로 건춘문, 오행에서 목(木)으로 봄을 마주하는 문이다. 서쪽에는 영추문, 오행의 금(金)으로 가을을 보낸다는 뜻이다.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한쌍의 해태의 눈은 관악산을 응시하고 있는데, 왜 광화문 앞에 세워진 것일까? 해태는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써 물은 오행상 수(水)에 해당되면서 한강 너머의 관악산은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水)와 화(火)가 있어서 물로써 불을 제압하기 때문에 해태상을 양쪽으로 세워 관악산의 화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남대문의 옛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예(禮)는 오행중 불인 화(火)로써 방향으로는 남쪽을 나타내는데, 숭(崇)은 글자의 모습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는 이유는, 세로 현판으로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이열치열의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임진왜란과 6·25전쟁도 무사히 넘겼지만 2008년 2월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북쪽의 동대문의 현판 역시 특이하다. 다른 곳의 현판이 세 글자인 데 비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네 글자다. 한양의 가장 큰 약점은 동쪽 약산의 기세가 약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동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들을 통해 서울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때문에 1869년 고종 때 '흥인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에 산맥을 뜻하는 '갈 지(之)' 자를 넣어 좌청룡의 약한 기운을 보강했다고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음양오행에 따라 설계된 것이 왕궁이 터를 잡고 있던 강북이었기 때문에 강남보다 지진 빈도가 현저히 낮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한국의​ 산천 곳곳에서도 음양오행 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산은 그 기세에 따라 양산과 음산으로 나뉘어 진다. 탑의 둥근 모양은 음탑, 각진 모양 양탑이라 불린다. 남근석은 대표적인 양의 기운이다. 양기를 누르기 위해 물을 갔다 붓는다. 좋은 기운은 더욱 북돋아 주고, 약한 기억은 보충하는 것이 풍수지리의 원리이다. 

​마이산은 80여개의 다양한 돌탑이 쌓여있는데, 특이하게도 양산과 음산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축조된 탑들은 우주순행의 이치를 담고 있다. 천지탑(음양탑)은 마이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탑으로 음양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탑은 동서남북으로 한쌍으로 음돌과 양돌을 싸놓고 있다. 마이산의 탑들이 200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태극 모양으로 안고 도는 형세로 마을 입지 조건으로 최고로 꼽힌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장승을 만나게 된다. 장승은 남녀를 상징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마주 보거나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양인 천하대장군은 양각으로 깎고, 음인 지하여장군은 음각으로 깎는다. 이 역시 음양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정승과 함께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도 음양론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했다. 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사랑채가 있고 서쪽에 안채가 있다. 안채로 들어가면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는 여성만의 공간이다. 안채는 여자들의 주 생활 공간이다. 가사 공간이기도 하다. 마루를 따라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주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랑채는 건축에서 하늘에 해당된다. 사당은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죽음은 탄생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오행론적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아이들의 거처인 동채는 탄생에 해당하는 동쪽에 해당한다. 곳간은 모으는 힘이 강한 금(金)의 방향인 서쪽에 위치한다. 

북쪽에는 부엌이 있다. 아궁이는 생산을 의미하는 자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엌은 집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신앙의 대상이었다. 불을 다루는 부엌에는 화재 예방을 위해 숫자나 한자를 써붙었다. 장독대는 북쪽 제일 끝에 위치해 있다.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는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고추의 붉은색은 양색으로 음인 악귀를 쫓는 힘이 있고, 숱의 검은 빛은 음색으로 귀신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장독대는 성역처럼 여겨졌기에 금줄로 잡귀의 침입을 금하고 있다.


 

​한국의 집은 천지인 세계관을 반영한 소우주다. 하늘에 닿기 위한 계단은 신성한 장소이며, 기둥은 권위를 상징하고, 지붕은 하늘의 상징이다. 네개의 기둥이 둘러싸여진 단은 신성한 영역을 상징한다. 

 

공동우물은 마을의 생명줄로 마을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예로부터 우물을 잘못파면 마을에 병고가 생긴다고 믿었다.그래서 재앙을 막고 1년내내 물이 잘 솟으라는 샘굿은 동신제(洞神祭)에서도 가장 좋은 볼거리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서 농기의 삼색은 각기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이다. 농악은 음양오행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우리의 민속음악이다. 

​혼례(婚禮)는 저물 때 행하는 예식이라는 뜻이다. 결혼이 남자와 여자, 즉 양과 음의 결합이기 때문에, 시간도 양인 낮인 양과 밤인 음이 만나는 저녁 때 하는 것이다. 신랑이 입는 청색은 태양을 상징하는 동방이기 때문에 양기가 왕성한 것을 상징한다. 신부의 다홍색은 기쁨을 표현하고 액혼을 막고, 흙을 상징하는 노란 저고리는 탄생과 새출발을 의미한다. 전통 혼례복은 부부금실과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음양이 끝없이 돌며 태극을 만드는 강강술래는 이러한 생명의 과정을 재현하는 민속놀이이다.

​한복에도 음양오행의 이치가 숨어있다. 윗옷과 아래옷으로 나뉘어 만든 것은 양인 상채와 음인 하채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녹색 저고리(활옷), 홍색치마는 목생화(木生火)의 상생의 원리를 담고 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3세기 초에 이미 오색을 갖춘 색동옷이 출연하고 있다. 아이들이 주로 입는 색동옷은 오행을 두루 갖춤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오방색이 잘 들어간 것이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궁중 무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을 상징하는 오방처용무는 음양오행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목(木)을 상징하는 동반신장은 청색 의복을 입고, 화(火)를 상징하는 남방신장은 적색 의복을 입으며, 금(金)을 상징하는 서방신장은 백색 의복을 입으며, 수(水)를 상징하는 북방신장은 흑색 의복을 착용한다. 중심에 위치한 중앙신장은 토의 색깔인 황색 의복을 입고 있다. 다섯 신장은 원을 돌면서 오행의 상생 상극을 그려낸다.

우리의 주식인 밥 속에도 오행의 기운이 다 들어있다. 적당한 양을 맞추어 붓는 물은 수기(水氣), 나무의 불을 피는 밥음으로 화기(火氣)와 목기(木氣)를 고루 갖추게 된다. 또 밥을 짓는 가마솥은 쇠로 만든 금기(金氣)다. 음식이 놓이는 단상은 주로 둥근 상태로 하늘을 나타낸다. 다리가 네 개인 것은 땅을 상징하고 음을 상징한다. 둥근 숫가락은 양, 긴 젓가락은 음으로, 수저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낸다. 어륙은 불에 구은 것으로 화기(火氣)가 포함되어 있고, 국과 찌개 간장 동치미 등은 수기(水氣)가 포함되어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쇠(金氣)나 흙(土氣)으로 만든 도자기다. 이렇듯 음식과 식재료로 이루어진 상차림에는 음양오행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

쌀, 보리, 수수, 콩, 조 오곡밥은 오행의 원리를 두루 갖는다. 김치는 오색은 물론이고 오미를 두루 갖추고 있다. 대추의 쓴맛과 단맛, 고춧가루의 매운맛, 젓갈과 소금의 짠맛 익었을 때의 신맛 등 김치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완벽한 식품이다. 


음양오행 말고 조선의 무속신앙은 어떤가? 무신도 속의 붓다와 보살 등 무속신앙은 중국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장 오래된 한국적인 신앙이다. '신난다'는 말과 그 어원인 '신명(神明)난다'도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멋의 원류인 풍류나 요즘 유행하는 한류나 월드컵 때 붉은 악마도 결국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신바람(神氣)은 샤머니즘(巫氣)과 통한다. 



2. 조선은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민주주의 국가였다


조선 중기 선조 이후 사림의 정권 독점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예송논쟁 등 하찮은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국가로 전락하였지만, 조선초 훈구파, 관학파에 의해 구축된 조선의 시스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놀랍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를 이해하면, 한국인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윤리관, 생활방식 등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조선은 개천에서 용 나는 기회평등지향 사회였다​.

500년간 유지된 조선의 과거제도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조선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는 양반뿐 아니라 평민과 서얼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대거 과거에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를 출간했다. 이 책을 보면 조선 전기 태조∼선조 대에 선발된 문과 급제자는 모두 4527명이며, 이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는 1100명으로 전체 급제자의 24.3%를 차지한다. 신분이 낮은 1100명 중 3품 이상 고관에 오른 급제자는 306명에 이른다.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태조∼정종 대에 40.4%, 태종 대에 50%였다가 광해군 대에 이르면 14.6%로 낮아지고 다시 점차 증가해 고종 대에 이르면 58%대에 이르는 U자형 추이를 보인다. 조선 중기인 17세기를 전후로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문벌가문이 득세하면서 신분이 낮은 급제자들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시험을 통한 신분 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역동적이었다.

애초에 조선시대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양천제를 지향했다(이후 변질된 것이 문제였다). 양반가에서 태어났더라도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집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거나 집안에 돈이 없으면 평민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양반은 농사 짓고, 남의 집 허드렛일도 해주며 살았다.

 

또 조선시대는 노비고 여인이고 할 것 없이 왕에게 글로 상소를 할 수 있었다. 글을 못 쓰는 서민들은 왕궁 옆에 매달아 둔 신문고를 울려 형조의 당직관리에게 민원을 제기할 수 있었고, 보고 내용은 왕의 귀에 들어갔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는데,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인데 그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이다.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었으며, 최소한도의 합리성도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 때도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는 등 법의 공포와 시행에 수 년이 걸렸다.​

조선 시대의 법제도도 상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조선 왕조는 사형수에 한해 3복제를 실시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간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왕들은 사형수가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 무수히 노력을 했고,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3. 조선은 세계적인 복지 국가, 공동체주의 사회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아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라"는 말을 했고, 플라톤은 "장애아는 사회에서 격리시켜라"는 말했다. 중세 유럽에서 장애인은 신에게 벌을 받은 사람으로 장애인에게 고문과 사형 집행이 가해졌다.

 

서양에서 자행되었던 장애인의 잔혹한 역사에 비해 조선은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국가의 기본 정책 기조로 삼았다.

 

독질인(篤疾人) - 매우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

잔질인(殘疾人) - 몸에 질병이 남아있는 사람

폐질인(廢疾人) -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

 

이처럼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겼던 조선시대 왕들은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했는데 세종 14년(1432년 8월 29일)에는 이런 법령이 반포되었다.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이 있는 사람은

나이가 70세가 차지 않았더라도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시정 -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군역에서 면제된 사람)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 (오늘날의 병역면제), 장애인을 정선껏 보살핀 가족에게는 표창제도 실시되었다.

 

반면 장애인을 학대하는 자에게는 가중 처벌을 내리는 엄벌제도를 시행해서 장애인이 무고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고을의 읍호(邑號)를 한 단게 강등시켰다. 장애인을 천시했던 서양과 달리 선진적인 복지 정책을 펼쳤던 것이 우리 선조들의 나라 조선이었다.

 

특히, 장애인의 자립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 장애인을 위한 전문직 일자리 창출이 그 예다.

 

세종 16년(1434년 11월 24일)에는 '관현(관악기와 현악기)을 다루는 시각장애인 중에 천인인 자는 재주를 시험하여잡직에 서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애인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위주의 채용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명통시(明通寺)가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명통시에 소속된 장애인들은 기우제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담당 그 대가로 노비와 쌀을 받았다. 장애인에 대해 편견과 차별없는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국가관 때문에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척추장애인 허조 -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

간질장애인 권균 -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

지체장애인 심희수 -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청각장애인 이덕수 -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

 

조선시대,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종 13년 (1431년), 박연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거문고를 타며 시를 읆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밖에도 조선이 이상적인 공동체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두레'는 농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부락 단위로 둔 조직이다. 두레는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이겨내는 공동체 생활의 본보기였다. 절기마다 빚어먹는 과자와 떡, 술과 명절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벌이는 각종 놀이와 굿판도 이웃끼리 나눔을 위한 것들이었다. 떡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고 소외된 이웃을 감싸주었다. 노동요와 타령, 육자배기, 판소리, 농악, 살풀이 등의 춤사위도 심신의 조화를 이루게 하며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공동체의 건강법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실시한 '새마을 운동'이 농촌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4. 조선은 세계적인 인문 국가였다


조선시대 왕은 바로 곁에 사관을 두고 있었다.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정리한 문서를 목판활자로 찍고,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정본을 남겨주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500년 역사가 실록으로 남았다. 

왕에게 올릴 보고서를 정리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2억 5,000만)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난다고 한다. 

왕들이 쓰는 일기였던 일성록(日省錄)도 정조 때부터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150여년간 계속 쓰여졌다. 선대왕들이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고민해서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이렇게 각종 문서에 적힌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이다.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약진)에서부터,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법이 있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다. 

조선의 세계적인 인문학적인 수준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감은 있지만, 조선의 과학기술 역시 서양을 제외한 세계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이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한 일이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 갈릴레오의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다. 결국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이 그로부터 100년 뒤인 1767년이다. 

 

한국에서는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가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고 말해 지동설을 선언했다. 이것이 1400년대이다. 서양의 1632년, 또는 1767년보다 한참 앞서 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을 다룬 책으로,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이순지가 1,444년에 만든 달력은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낸 뒤 만든 것인데,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이순지의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다. 1,400년대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이다. 

 

조선에서는 국학의 명산과(수학과)를 졸업하면 공무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산관(算官)이라고 했다. 산관들은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정밀한 수학적 지식을 이용했다. 이런 제도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시대 때 수학교재로 썼던 책 중 하나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을 보면, 2차 방정식과 미지수 다섯개(5원 바정식), 피타고라스의 정리(구고의 정리), 원주율(밀률), 삼각함수 문제 등 다양한 수학 문제들이 나온다. 우리는 벌써 삼국 시대 때부터 이 정도 수준의 수학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학자 홍대용이 쓴 <담헌서(湛軒書)>에도 cos, sin, tan 등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다.  



5. 조선의 조공 시스템은 만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의 사대주의를 문제삼는다. 또 조선의 조공도 문제삼는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賜與)를 내린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나라 멸망의 주요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의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이와 반면에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사대주의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명나라와 청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건축 양식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초라하고 보잘 것 없기가 그지없다. 당장 세계에 자랑할만한 문화유산이 빈약하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만들었던 시황제의 만리장성이나,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면, 조선의 볼품없는 건축은 역설적으로 조선에서 백성들을 억압하는 정치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끝으로, 조선의 조경 양식은 화려한 중국, 섬세한 일본에 비해 시각적인 임팩트는 떨어지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동화되도록 만들어졌다. 정원을 조성할 때는 지형을 함부로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물의 이용에 있어서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을 이용했고 인공적인 힘을 가하여 하늘에 쏘는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꽃이나 나무는 생성하는 생물이므로 관상수 따위를 심어 인공의 수형을 만드는 가지치기 작업을 피하였다. 정자나 누각을 배치 할 때도 자연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여 연못이나 강가, 산자락에 세워 원을 감상하는 장소로 삼았다. 무심한듯 자연스러운 조선의 조경양식은 한민족의 솔직하고 순수한 본래의 성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stratic007/220426988803



철학왕국과 조선선비 이야기



인문학 고전콘서트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인류 역사이래 늘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이 있었다.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혁명은 그들삶의 전부였다. 내 젊은 시절에도 함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았다. 혁명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지향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혁명이란 말은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남한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노맹이 대부분 검거되고 나서부터였을까? 아니면,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부터였을까?


아무튼, 혁명은 우리에게 추억처럼 조금씩 멀어지고 대신 ‘제 3의 길’이니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듣게 되었다. ‘혁명’이란 단어가 멀어지고 난 후에 세상을 바꾸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회를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격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지속가능성’, ‘생명’, ‘평화’, ‘평등’ 같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설명하지만, ‘혁명’을 말하던 그 때 만큼 명쾌하지도 역동적이지도 않다. 1980년 대 스테디셀러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쓴 박세길이 15년을 각고 한 끝에 ‘혁명’에 불을 지피는 새로운 저작 <추억의 혁명 미래의 혁명>을 세상에 내놨다.



이 책은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 마르크스주의의 태동, 세계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조선혁명, 베트남혁명, 68혁명, 쿠바혁명, 브라질 노동자당,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소연방해체와 현실사회주의 붕괴,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도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 반세계화 공동투쟁, 세계사회포럼, 쿠바농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이후 일어난 크고 작은 혁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렇지만, <추억의 혁명, 미래의 혁명>은 단순한 혁명사가 아니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그리고 민중이 주체로 우뚝 서서 역사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조건과 비전을 제시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소련이 무너지던 즈음, 처음 ‘혁명’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한 이래 <추억의 혁명, 미래의 혁명>을 세상에 내 놓기까지 15년을 각고하였다고 한다.


지난 15년간, 1만매에 이르는 초고를 썼다가 마침내 2,600매에 이르는 원고로 갈무리하기까지 저자의 고심참담은 각별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변혁을 꿈꾼 사람 입장에서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런 광정일 수 있다. 그 속에는 분명하게도 쓰라린 패배의 장명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때는 더없이 고결하게만 느껴졌던 혁명의 역사가 숱한 오만과 편견, 어리석음과 우유부단함을 가득품고 있음을 수긍하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저자 여는 글 중에서)


박세길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온 근대 이후 혁명사를 “전 지구적 관점과 역사적 맥락 비추어”반추하면서 새로운 반전, 곧 미래혁명에 대한 전망을 세우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역사발전이란 과거의 부정을 통해 미래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답습으로는 결코 새로운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마땅히 지난한 재창조의 과정이 있어야하며 신자유주의 이후에 올 새로운 세계를 ‘혁명’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프랑스로 통한다. 


박세길은 670쪽에 이르는 대작인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쓰면서 그 첫 장에 프랑스 대혁명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일컬어 근대혁명의 ‘빅뱅’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를 바하로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로 혹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를 데카르트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혁명 중의 혁명, 모든 혁명의 아버지 격인 혁명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라고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봉건적 특권에 맞서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하는 것으로써 시민혁명의 보편적 가치를 선명하게 창출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은 각종 특권의 확대로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끊임없이 부활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이 되었다.”(본문 중에서)


루이 16세의 군대소집에 맞선 국민회의의 민병대 조직과 자치위원회 구성에 뒤이은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바스티유 점령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지배질서가 일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스티유 점령 이후 군중은 격렬한 형태로 지존질서와 지배세력을 공격하였으며, 농촌에서는 폭동이 확산되고 귀족습격, 봉건문서 폐기, 지방행정조직 파괴와 같은 봉건체제에 대한 저항이 다반사로 일어났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현상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된 정치클럽이다. 1789년과 1795년 사아에 5500개 지역에 약 6000개의 정치 클럽이 존재하였으며, 구성원은 대략 50만에서 6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프랑스혁명이 표류하면서 혁명전쟁을 통해 부상한 나폴레옹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것은 대혁명과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전제군주제의 부활로 나타났다. 


지은이는 나폴레옹을 “군주형 혁명 지도자”의 첫 번째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유능한 정치가였기 때문에 대혁명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하는 것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길임을 정확히 간파하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을 통해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 양심과 종교 선택의 자유, 재산권 보장, 농노제 폐지 등 대혁명 과정에서 구호로 제기된 사항들은 법체계에 담았다. 그밖에도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법원, 학교 등에서 근대적 모델을 확립하는 등 적잖은 성과를 남겼다.”(본문 중에서)


그러나, 혁명의 적이었던 전제군주제는 혁명이 추구했던 참정권 확대를 극도로 제약하고 보통선거제를 후퇴시켰다고 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노동자계급을 형성시키고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을 비약적으로 이끌어내어 수많은 위기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을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간주되고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회적 환경이 바로 그것이다. 곧 부르주아적 질서와 문화의 확립이야말로 산업혁명을 야기한 결정적 요인이었다.”(본문 중에서)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에서 지은이는 명예혁명 등 일련의 정치혁명을 통해 대륙 국가들에 비해 부르주아의 지배가 일찍 확립되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토대 가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후 영국 부르주아들의 이익 증대는 수백 퍼센트, 수천 퍼센트에 이르는 수직상승이 이루어졌으며, 가히 ‘혁명’이라 부를 만한 상황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자본가들이 거둔 엄청난 이윤 축적은 노동자들에 대한 극단적이 착취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이후 노동자들은 여러 혁명에서 계급투쟁의 주력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대륙으로 넘어와 프랑스로 퍼져나갔고, 선거법에 대한 불만이 촉발시킨 1848년 혁명으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2월 혁명에서 정권을 잡은 부르주아는 노동자들 권력으로부터 소외시켰고, 그해 6월 새로운 봉기를 일으키지만 좌절로이어진다.


좌절된 듯이 보였던 노동자들의 혁명은 인류역사상 최초로 전시민이 참여하는 보통선거 실시로 이어지는 파리 코뮌으로 이어진다. 파리 코뮌은 선출된 의원이 입법과 집행을 동시에 책임지는 형태였으며, 철저한 인민주권 원칙에 입각한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였다고 한다. 가히 혁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은 1968년 이른바 68혁명으로 이어진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항상 세계 혁명사의 중심에 있었다. 


혁명에 날개를 단 마르크스와 공산당선언 


한편, 지은이는 자본주의 이후 시작된 ‘혁명’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마르크스’라고 평가한다.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선언은 그 엄청난 파급효과를 감안한다면 그 자체를 역사의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848년 공산당선언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대략 150년의 세월은 바로 그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난 150년의 역사는 공산당선언을 검증한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본문 중에서) 


1848년 2월 25일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후, 유럽은 급속히 혁명의 폭풍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남서독일, 바이에른, 베를린, 빈, 헝가리, 밀라노를 거쳐 불과 몇 주일 만에 유럽 10개국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바다 건너 남미로 번져갔다고 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본원적 모순을 정확히 진단함으로써, 이후 일어난 모든 ‘혁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무엇을 혁명의 성공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역사상 최초로 집권에 성공하는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다. 1917년 10월 마침내 볼세비키가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이후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 패망을 딛고 동유럽일대로 사회주의혁명이 확산되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베트남이 혁명에 성공한다.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쓴 박세길은 앞서 일어난 혁명이 어떻게 새로운 혁명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하여 혁명역사를 되돌아본다. 러시아혁명을 딛고 이루어지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조선 그리고 베트남 혁명, 프랑스 68혁명, 쿠바혁명과 남미혁명을 조망하면서, 그 한계와 파급효과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실패로 보이는 혁명이, 초기부터 국가사회주의 병폐를 안고 출발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다른 나라, 다른 혁명에서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살펴보는데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은이는 성공한 혁명에 면죄부를 주는 경우도 없고, 실패한 혁명에 굴레를 씌우는 일도 없다. 실패로 보이는 혁명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미래의 혁명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혁명에 반대편에 서 있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공고하게 지탱하기 위하여 자기변혁의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이 된 미국자본주의의 성장, 케인즈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의 태동 그리고 그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개혁개방노선과 중화주의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와 고르바초프실험의 실패, 중소분쟁과 소련의 고립, 정체의 늪에 빠진 소련체제 그리고 소연방의 해체에 이르는 혁명을 거꾸로 돌려놓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하여도 역사적 검증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혁명은 ‘새로운’ 혁명이다. 


세상의 어떤 혁명도 앞서 이루어진 혁명을 그대로 따라서 성공한 경우는 없다. 모든 혁명은 다른 조건,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세력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서 새로운 혁명의 모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피억압 계층은 늘 혁명을 통해 민주의의를 확장하고 새로운 분배를 실현해나가고 인민이 중심이 되어 복지를 확장해나간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은 러시아 혁명과 소련붕괴라고 한다. 러시아 혁명은 인간의 힘으로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지만 소련붕괴는 정반대의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소련 붕괴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실험을 지극히 허망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에 따라 사회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은 극심한 혼돈과 지적 공황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소련 붕괴와 함께 전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마지노선이 함께 붕괴된 것이다.”(본문 중에서)


결국 소련붕괴는 20세기에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정짓는 사건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아무런 제약없이 질주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67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 중에서 300여 쪽은 지나간 ‘혁명’을 반추하는 내용이다.


지은이는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소련붕괴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규명하고, 다시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꿈꾸는 새로운 사례로 쿠바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도전을 살펴본다. 또한 지식정보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새로운 선진계급으로 등장하는 과정과 기업혁명을 통해서 주주독재에서 민주적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당위성을 짚어본다.


박세길은 기업혁명, 자본혁명, 시장혁명을 통해서 생태주의, 문화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가 실현되는 사회, 세상의 중심축이 자본에서 사람으로 이동하는 여러 가지 징후들을 발견하고 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실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업혁명, 자본혁명, 시장혁명의 사례들을 낱낱이 찾아내어 소개하고 있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새로운 혁명을 이루어가는 방안으로 주주(자본)의 절대권력을 타파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해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새로운 시대 사회혁명은 과거와 같은 소수 엘리트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연대에 기초한 인민의 자주적 해결 능력을 고양시킴으로써” 이루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회연대가 중심을 이루고 국가는 지원과 조정 임무를 수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서 ‘사회연대국가’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기업, 자본, 시장 혁명을 통해 ‘사회연대국가’로 


아울러 소수 엘리트에 권력이 집중되는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구성원의 연대와 협력을 통한 자치실현이 국가의 강제기능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민에 의한 권력통제가 가능한 조건으로 전자민주주의 도입, 국민발안제, 국민투표제, 국민소환제 제도화, 그리고 의원숫자를 대폭 늘리는 의회기구 개혁과 의원에 대한 특권폐지는 기본적인 전제조건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울러 지역 공동체에 기초한 복지모델과 자치권력을 강화하는 현존하는 제도로서 스위스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위스는 최고 7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수백에서 수천 명 규모의 3072개의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공동체는 직접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운영되며, 스위스 연방의 실질적인 최고 주권기관으로서 지위를 갖고 있다. 연방정부는 이러한 공동체의 연대를 보장하는 공동사무국의 형태를 띨 뿐이다. 말하자면 스위스는 현존하는 코뮌 국가라고 할 수 있다.”(본문 중에서)


그리하여 지은이는 생태, 문화, 여성, 평화와 같은 대안의제에 기반을 둔 사회권력과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자치권력이 국가권력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권력과 자치권력은 사회연대를 기반으로 직접 행사하는 권력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을 쓴 박세길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사회연대국가’라는 새로운 길을 가는 지도를 내놨다. 이 책이 가진 탁월함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문제점과 모순을 나열하는데서 크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데 있다. 소련이 붕괴한 후 누구도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지 못한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을 내놨다.그는 자신이 내놓은 밑그림이 “다양한 토론을 촉발시키고 사고의 혁신을 자극하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짧지 않은 서평이지만 내 글을 통해<추억의 혁명, 미래의 혁명>을 온전히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사회연대국가로 나아가는 기업혁명, 사회혁명, 시장혁명에 대한 구체적 방안과 사례는 찾아 읽는 것은 독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단언하건데, 소련붕괴 이후 나온 그 어떤 책보다 가장 분명하게 다시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박세길의 해박한 지식과 사회변혁을 향한 뚜렷한 지향이 담긴 책이다.



목차


여는 글 혁명, 추억의 반추 그리고 미래의 전망 


PART 01 혁명의 열정, 역사를 바꾸다


CHAPTER 01 근대혁명, 계급투쟁으로 뿌리를 내리다 

근대혁명의 빅뱅,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과 노동자계급의 형성 

혁명에 날개를 달아준 마르크스주의 


CHAPTER 02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시련을 먹고 자라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극한을 넘나드는 혁명의 물결 

스탈린 시대의 빛과 그림자 


CHAPTER 03 동아시아 혁명, 새로운 꽃을 피우다 

중국혁명, 그 기나긴 장정 

파란과 곡절을 딛고 선 조선혁명 

작은 거인의 분투, 베트남혁명 


PART 02 역사는 한계를 딛고 전진한다 


CHAPTER 04 자본주의 세계의 3중주, 기묘한 역설을 말하다 

미국, 자본주의 세계의 중앙정부 

케인스, 자본주의의 도약대 마련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 68혁명 


CHAPTER 05 제3세계, 새로운 지평을 열다

냉전의 최전선 한반도, 그 격정의 드라마

혁명의 활화산 

미국의 개입 

민중의 반격


CHAPTER 06 중국의 변신, 새로운 전범을 만들다 

역사를 거꾸로 돌린 대약진운동

극단을 향해 치달은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의 길

표면화되는 중화주의 


CHAPTER 07 소련의 붕괴, 한쪽 날개가 사라지다 

중소분쟁과 소련의 고립 

정체의 늪에 빠진 소련 체제 

고르바초프 실험의 실패 

기묘한 소연방의 해체 


PART 03 신자유주의 세계화, 바닥을 드러내다


CHAPTER 08 자본주의, 위기에서 탈출하다

장기 불황과 신자유주의의 부상 

초국적자본의 세계 정복

주주자본주의의 태동 


CHAPTER 09 포획당한 한국 경제, 허울만 남다 

성장의 원동력과 시스템 사이의 모순 

새로운 점령군

저성장의 구조화 


CHAPTER 10 신경제 10년 천하, 무덤이 가까워지다 

퇴로를 상실한 신경제 

무너지는 달러 제국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저항의 세계화


PART 04 대반전, 이제 다시 ‘사람’이다


CHAPTER 11 전환기, 창조적 파괴의 현장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회민주주의

베네수엘라의 대담한 도전 

쿠바, 농업에서 출구를 찾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북한 


CHAPTER 12 

세상의 중심축 이동, ‘자본’에서 ‘사람’으로 

노동혁명, 기계의 노예에서 생산의 주인으로

기업혁명, 주주독재에서 민주적 공동체로 

자본혁명, 착취의 도구에서 사회혁명의 동력으로 

시장혁명, 탐욕의 기지에서 사회화의 무대로 


CHAPTER 13 미래가치의 구현, 관점의 혁명으로부터 

생태주의, 생존의 조건 

문화주의, 행복의 조건

여성주의, 미래가치의 모태 

평화주의, 공존의 조건 


CHAPTER 14 사회연대국가, 주권재민의 실현 

‘창조적 다수’의 소통과 연대 

인민에 의한 권력 통제 

공동체에 기초한 복지 모델과 자치권력 

생존 철학으로서의 공유와 협력

[출처: http://www.ymca.pe.kr/3]





모스크바를 따라 고리끼 공원으로 내려갔지요. 
변화의 바람에 귀를 기울이면서. 

팔월의 한 여름밤 행진해 가는 군인들. 
변화의 바람을 들으면서. 

세계는 가까이 모여서고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우리가 이렇게 형제처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내일은 불확실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어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순간의 마법으로 나를 데려가세요. 
영광스러운 밤에 미래의 어린이들이 
변화의 바람속에서 꿈결같은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곳. 

길을 따라 걸으면서 
아득한 추억들을 영원한 과거 속에 묻고 

모스크바를 따라 고리끼 공원으로 내려갔죠. 
변화의 바람을 들으면서 

순간의 마음 속으로 나를 데려 가세요. 
영광스러운 밤에 그 꿈을 당신과 내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변화의 바람은 시대에 직면하여 강하게 불고 있어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자유의 종소리를 울릴 폭풍처럼. 
당신의 발라라이카가 노래하게 하세요. 
내 기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I follow the Moskva down to Gorky Park 
Listening to the wind of change 
An August summer night, soldiers are passing by 
Listening to the wind of change 

The world is closing in 
Did you ever think 
that we could be so close like brothers 
The future’s on the air I can feel it everywhere 
Blowing with the wind of chang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dream away 
In the wind of change 

Walking down the street 
Distant momorise are buried in the past forever 
I follow the Moskva down to Gorky Park 
Listening to the wind of chang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share their dreams 
With you and m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dream away 
In the wind of change 

The wind of change blows straight into the face of time 
Like a stormwind that will ring the freedom bell 
For peace of mind 
Let your balalaika sing what my guitar wants to say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share their dreams 
With you and m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dream away 
In the wind of chang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share their dreams 
With you and me 

Take me to the magic of the moment on a glory night 
Where the children of tomorrow dream away 
In the wind of change



우분투 Ubuntu란 말을 아시나요? 아마 이공계 전공을 한 분이라면 리눅스 소프트웨어나 요즘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의 운영소프트로 유명해진 이름인데요. 그보다는 더 숭고한 의미의 말입니다. 아프리카 남부지역 반투어에 있는 말로서 우분투란 아프리카인의 공동체 정신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상입니다. 그게 뭔지 설명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 실험을 하였다. 그곳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멀리 떨어진 나무에 음식을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달려가서 그 나무에 제일 먼저 도달한 사람만 음식을 먹으라 했다. 엄청난 경쟁과 치열한 다툼을 기대했던 인류학자는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손에 손잡고 다 함께 음식이 매달린 나무에 가서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게 아닌가. 충격을 받은 인류학자가 왜 욕심을 내지 않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달려가서 나 혼자 일등하면 많은 사람들이 슬프잖아요.' (우분투,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째서 한 명만 행복해질 수가 있어요?)



우분투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인본주의 사상으로 아프리카의 전통적 사상이며 평화운동의 사상적 뿌리이기도 하다. 실제 넬슨 만델라는 이 우분투 사상을 근간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자칫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그 공동체에 속한 자신의 위치도 그만큼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1999년과 2008년에 각각 우분투의 뜻을 다음과 같은 명쾌한 해석을 하였다. 


'우분투 정신을 갖춘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할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뛰어나고 유능하다고 해서 위기 의식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큰 집단에 속하는 일원일 뿐이며 다른 사람이 굴욕을 당하거나 홀대를 받을 때 자기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알기에 우분투 정신을 갖춘 사람은 굳은 자기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1999년 No Future Without Forgiveness에서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 중에는 우분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지요.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홀로 떨어져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우분투라는 자질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관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개인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서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좋을 일을 하면 그것이 번져 나가 다른 곳에서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전체를 위하는 일이 됩니다.'

— 2008년


공진화(共進化)는 한 생물 집단이 진화하면 이와 관련된 생물 집단도 진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진화생물학의 개념이다. 공진화는 작게는 아미노산의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에서부터 크게는 진화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종들 사이에 일어나는 형질 변화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의 모든 규모에서 관찰된다. 공진화에 관여하는 한 생물의 진화는 이와 관련이 있는 생물에 대해 자연선택의 요소로서 작용하여 진화를 촉발시킨다. 숙주와 기생 생물의 관계, 상리 공생을 하는 생물의 관계 등이 공진화의 사례이다.


공진화는 포식자와 먹이 생물, 숙주와 기생 생물, 공생 생물 등과 같이 생물 간에 일대일 관계가 형성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진화 과정이다. 따라서 기후 변화와 같은 비 생물적 자연환경의 변화로 인한 진화는 공진화에 포함되지 않는다. 생물의 상호작용이 진화에 뚜렷한 영향을 준 사례가 있는 반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호작용으로 인해 상호작용의 영향이 뚜렷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뚜렷히 드러나는 공진화를 "종 특유의 공진화"(llang|en|species-species coevolution}}이라하고 뚜렷하지지 않는 공진화를 "확산공진화"(영어: diffuse coevolution)라 한다. 자연환경에서는 확산공진화가 보다 일반적인 현상이다.


공진화의 개념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고《난초의 수정》에서 다시 소개되었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리 반 발렌은 1973년 공진화의 한가지 모델로서 붉은 여왕 가설을 제시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생물학자 시에리 로데는 적대적 공진화가 성 경쟁을 촉발한다고 보았다.


공생과는 달리 공진화는 생물 간의 상호의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포식자와 먹이, 숙주와 기생 생물의 경우에서 처럼 서로의 생존을 위해 적대적인 관계에서도 공진화가 발생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핵과는 다른 별도의 DNA를 가지고 있어 진핵생물의 발현과정에서 이루어진 공진화의 결과 세포소기관으로 편입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를 세포내 공생설이라 한다.


공진화의 개념은 인공생명에도 도입되었는데 데니얼 힐스는 소프트 프로그램 인공생명에 공진화 알고리듬을 사용하였고 칼 심스는 컴퓨터 상의 가상 생물에 공진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진화하는 가상 생명의 동영상





더불어 산다

조개와 물고기의 공생


물은 물고기의 집일뿐더러 조개의 집도 된다. 온 세상의 강과 호수에 사는 물고기와 조개, 곧, 어패류(魚貝類)는 절묘한 ‘더불어 살기’, ‘서로 돕기’를 한다. 공생(共生), 공서(共棲)라는 것 말이다. 조개는 물고기 없으면 못 살고 물고기 또한 조개 없으면 살 수 없다. 불가사의하다고나 할까,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면서 ‘공진화’를 한 탓이다. 

 

 

공진화, 조개는 물고기 없이 못 살고 물고기는 조개없이 못 산다

여기서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란 생물들이 서로 생존이나 번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진화하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식자, 기생자와 숙주끼리 한 쪽의 적응적 진화에 대해서 대항적 진화 또는 협조적인 진화를 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긴 세월 질곡의 삶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나 없인 너 못 살고 너 없이는 내가 못 산다? 악연이던 선연(善緣)이던 간에 둘이 이렇게 연을 맺고 산다니 정녕 신묘하다.

 

우리나라 강에 살고 있는 민물고기 210여종(외래종 포함) 중에 유독 납자루아과(亞科)에 속하는 납줄개속(屬) 4종, 납자루속 6종, 큰납지리속 2종 등 12종과 모래무지 아과의 중고기속 3종, 모두 합쳐 15종의 어류가 조개에 알을 낳는다. 물고기는 다 물풀이나 돌 밑에다 알을 낳는데 이 무리들은 기이하게도 반드시 조개에 산란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17종 조개 중에서 말조개, 작은말조개, 칼조개, 도끼조개, 두드럭조개, 곳체두드럭조개, 대칭이, 작은대칭이, 귀이빨대칭이, 펄조개 등 6속 10종의 석패과(石貝科,Unionidae)의 돌처럼 야문 조개들은 유생(幼生)을 물고기에 달라 붙인다. 조개는 껍대기 2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매패라고 한다. 조개를 꼭지 끝이 위로 가게 두고 볼 때 오른 쪽 끝에 수관 두 개가 있다. 위에 자리 잡은 가는 것이 출수관(出水管)이고 아래 굵은 것이 입수관(入水管)이다. 물은 입수관으로 들어와서 아가미를 거쳐 출수관으로 나간다.


두드럭조개, 한국고유종, 멸종위기야생동물1급.<사진: 최병래 명예교수>

 

 

물고기가 조개 속에 알을 낳는다


임실납자루 수컷. 혼인색이 선명하다.<사진: 김익수 명예교수>


앞서 이야기 한 이들 물고기들은 산란시기가 되면 갑작스레 암수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 수컷은 몸 색이 아주 예쁜 혼인색(nuptial color)을 띠어 멋쟁이가 된다. 암컷은 여태 없던 산란관(産卵管, 알을 낳는 관)이 항문 근처에 늘어나니 줄을 길게 달고 다니는 산불 끄는 헬기 꼴이 된다. 산란관의 길이는 종(種)에 따라 달라서 큰 조개에 산란하는 놈은 제 몸 길이보다 긴가 하면 작은 것에 산란하는 녀석들은 제 몸길이의 반이 안 된다. 이 산란관은 수란관(輸卵管)이 길어진 것이고, 산란 후엔 몸으로 빨려 든다. 이렇게 멋진 혼인색과 긴 산란관은 발정의 신호다.

 

잘 생기고 건강해야 좋은 짝을 만날 수 있고, 그래야 훌륭한 후사를 보게 되는 것이니 ‘성(性)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곱씹어 말하지만 물고기나 사람이나 후손을 잇지 못하면 도태하고 만다. 헌데, 요상하게도 이 물고기들은 언제나 산 조개에만 알을 낳는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진짜 닮은 가짜 조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물론 조개를 찾아내는 것은 수놈 몫이다. 제가 차지한 조개 가까이에 다른 수컷이 나타났다가는 난리가 난다. 휙~~휙! 주둥이로 들이박거나 몸을 비틀어 후려쳐 텃세를 부린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암놈이 나타나면 가까이 다가가 부라린 눈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하고, 방아 찧기, 곤두박질치기, 지그재그로 갖은 교태(嬌態)를 다 부려 암놈을 산란장(조개)으로 유인한다. 다 그런 거지! 곡진한 애정이다.

 

눈치 빠른 암놈은 순간적으로 벌어진 조개수관에 산란관을 꼽아 넣어 알을 쏟고 내뺀다. 어물거리면 조개가 입을 닫으니 동작이 재빠르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여기저기에 알을 낳는다. 중고기 무리는 입수관에, 납자루 무리는 출수관에 산란한다. 옆에서 지켜본 수놈은 잽싸게 달려가 입수관 근방에다 희뿌연 정자를 뿌린다. 입수관으로 물과 함께 들어간 정자는 외투강(중고기 무리의 알이 듦)이나 아가미관에 끼어있는(납자루 무리의 알들임) 알을 수정시킨다. 아가미에 가득 끼어있는 물고기 알들이 조개의 숨쉬기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임실납자루 암컷. 산란관이 늘어져 있다.<사진: 김익수 명예교수>

 

 

조개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다시 그 조개를 찾는다

물고기의 모정과 부정이 가득 고여 있는 조가비, 조개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자식을 품은 대리모(代理母)가 된 셈이다. 무슨 이런 기구한 운명인가! 조개 몸 속의 알(한두 개에서 30~40개 정도)은 다른 물고기에 먹히지 않고 고스란히 다 자라서 나오는 지라 여읜 자식이 하나도 없다. 강물에는 조개를 통째로 꿀꺽 삼키는 동물이 없지 않은가. 인큐베이터(incubator) 속에서 자라 나온 미숙아(未熟兒)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들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들에 비해서 알을 적게 낳는다. 예로, 붕어 한 마리가 평균 67,827개를 낳는 것에 비해 이들은 알을 300~400여개 정도밖에 안 낳는다. 이런 것을 보상작용이라고 하는데, 요새 사람들이 유아사망률이 낮아진 것 때문에 출산을 적게 하는 것과 똑 같다. 수정란(受精卵)은 조개 속에서 약 한 달간 자라서 약 1cm정도의 어린 물고기가 되어 밖으로 나온다.

 

이 어린물고기가 다 자라 어른 물고기가 되어 새끼 칠 때가 될라치면 제가 태어난 안태본(安胎本)인 조개를 찾는다. 연어가 모천(母川)을 찾아들 듯이 자기를 탄생시켰던 바로 그 조개들을 찾아가 알을 낳는다. 유전인자(DNA)에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 일종의 귀소본능이요 회귀본능인 것이다. 너무나 신비로운 어류들의 비밀스런 생태다.

 

 

조개 유생은 새끼를 낳으러 온 물고기를 따라 여행을 떠난다 

아무튼 세상에 공짜 없다. 반드시 갚음을 한다. 그래서 이제는 조개가 물고기에게 신세를 질 차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물고기와 조개의 산란시기가 거진 반 일치하니 말이다. 석패과 조개는 어린 물고기 시절 한 달 가까이 붙어 살았던, 돌아온 어미 물고기(母魚)의 향긋한 젖내를 잊지 못한다.

 

글로키디움. 왼쪽 위쪽으로 유생사를 볼 수 있다.<사진: 권오길 명예교수>


물고기가 조개에 산란키 위해 주변에 얼쩡거리면 재빨리 알을 훅 훅! 내뿜는다. 여기서 '알'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미 꽤나 발생이 진행한 1.5mm가량의 '유패(幼貝)'로, 이를 갈고리라는 뜻의 ‘글로키디움(glochidium)'이라 부른다.

 

클로키디움에는 이미 두 장의 여린 껍데기가 있고, 그 끝에 예리한 갈고리(hook)가, 그 갈고리에 수많은 작은 갈고리(hooklet)가 있다. 그 갈고리로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비늘을 쿡 찍어 물고 늘어진다. 그뿐 아니다. 글로키디움은 가늘고 긴 유생사(幼生絲,larval thread)라는 실을 늘어뜨려 놓는다. 일종의 올가미인 셈인데, 종에 따라서는 몸길이의 60배나 된다. 물고기가 근방을 지나치면서 올가미에 걸리면 몸을 감아서 무전여행(無錢旅行)을 한다. 

 

물고기는 숙주이고 글로키디움은 기생충이다. 녀석들은 물고기의 몸 속 깊숙이 헛뿌리(haustorium)를 박아서 체액이나 피를 빤다. 글로키디움이 더덕더덕 떼거리로 많이 달라붙으면 까뭇까뭇 육안으로 보일 정도이다. 이러면 숙주인 물고기가 기진맥진 죽는 수도 있고, 2차 세균 감염으로 생채기가 심해 형편없는 몰골이 되기도 한다. 정말 갚음하기 어렵다! 한편 조개마다 글로키디움의 크기나 모양이 다르기에 종(種)분류의 검색(檢索)열쇠(key)가 된다. 새끼를 물고기에 붙여놓은 조개는 제 새끼가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 먹힐 걱정이 없다. 게다가 기동성 좋은 물고기 배달부가 종횡무진 새끼들을 멀리까지 옮겨주니 얼마나 좋은가. 신천지를 개척하는 유리한 적응방산(adaptive radiation)을 하는 것이다. 조개 유생은 역시 근 한 달간 탈바꿈하여 조개 모양새를 갖추면 강바닥에 떨어져 거기서 살아간다. 제2의 탄생인 것이다.

 

 

조개와 물고기의 주고 받기는 숙명적 만남, 뗄 수 없는 상생이다

이들 두 동물의 주고받기는 유전인자에 프로그래밍(programming)되어 있는 것. 숙명적인 만남, 뗄 수 없는 상생(相生)이다. 그래서 강에 조개가 절멸하면 물고기가 잇따라 전멸하고 물고기가 없어지는 날에는 조개도 따라 사라진다. 도미노 같은 것이다. 찬탄이 절로 나온다. 서로 없이는 못사는 이런 관계를 두고 인연이라 하는 것. 모든 사물은 다 연에 의해서 생멸(生滅)한다. 넌 물고기 난 조개, 부디 우리의 귀한 연분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생물 환경은 ‘공진화’하므로 물리적 환경 변화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나는 지난 글에서 자연선택이 생명체를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첫째 이유로 환경 변화를 꼽았다. 생물의 환경이 늘 변한다고 말할 때 ‘환경’은 온도, 습도, 일조량 등의 이른바 물리적 환경(physical environment)이다. 하지만 생물의 환경에는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생물들이 형성하는 생물 환경(biotic environment)도 있다. 생물 환경에 대비하여 물리적 환경은 다른 말로 비생물 환경(abiotic environment)이라고도 한다. 비생물 환경과 생물 환경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생물 환경은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생물과 함께 변화한다, 즉 공진화(coevolution)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물리적 환경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공진화의 예로 가장 잘 알려진 관계는 단연 현화식물과 그들에게 꽃가루받이(pollination)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벌, 나비, 박쥐, 새 등의 동물이 맺고 있는 관계이다. 꽃가루받이는 서로 이득을 주고 받는 상리공생(mutualism) 형태의 공진화이지만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인 포식(predation)과 기생(parasitism)의 상대들도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함께 진화한다. 날로 속도가 느는 치타의 추격을 따돌리려 영양도 점점 빨라지고, 늘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여 공격하는 기생생물에 대항하여 기주생물(host)도 새로운 유전자 조합으로 면역력을 키운다. 이 관계는 마치 옛날 소련과 미국이 벌였던 군비경쟁을 방불케 한다. 소련이 새롭고 더 강력한 미사일을 개발하면 미국은 그걸 공중에서 격침시킬 수 있는 요격미사일을 개발하곤 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와 흡사하게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군비경쟁을 진화적 군비경쟁(evolutionary arms race)이라고 부른다.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발달의 신경회로워 규칙적인 후성 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마음은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한다. 물론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개체의 두뇌를 통해 유전된 후성 규칙들의 안내를 받아 이뤄진다.


 문화는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구전 전통이 글쓰기와 예술을 통해 증보되면 문화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세대를 건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성 규칙이 주는 영향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것이며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인간 두뇌의 해부/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 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


 유전적 속박의 본성과 문화의 역할은 이제 다음과 같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어떤 문화 규범은 경합하는 다른 규범들보다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다. 이때문에 문화는 유전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연결은 더 느슨해진다. 하지만 그런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문화는 정확한 유전적 처방 없이 고안되고 전달되는 정교한 적응들을 통해 완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에드워드 윌슨, 통섭, 232-233p 



공진화의 개념 확장과 산업적 의미

공진화 개념이 발전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공진화의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사례들은 기업 및 산업의 발전에 대한 통창력을 제공하여 준다.

 

내성의 증가에 대한 대비

인체와 세균과의 관계도 경쟁적 공진화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인류는 1928년 페니실린의 발명 이후 세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듯이 보였으나, 세균이 다시 진화하여 어떤 항생제로도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항생제를 남용하여 세균이 진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인류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는 조직 및 사회 발전에도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사회악 등 조직이나 사회에서 억제하고 싶은 행동이나 조직들도 억제책에 대응하여 진화할 수 있으므로, 초기에 너무 강한 억제 정책을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악 억제책이 사회악을 억제하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다는 ‘풍선 효과’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정책을 입안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급진적 변화의 부작용에 대한 대비

공진화의 사례 연구는 오랜기간 공진화한 부분들은 예상하기 어려운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제거하였을 경우,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표적인 연구가 기생충과 인체의 공진화에 관한 연구이다. 영국과 베트남 연구진은 기생충을 가지고 있는 어린이들이 알레르기 발생률이 매우 낮은 것을 파악하고, 이들에게 구충제로 기생충을 제거한 결과 집먼지진드기에 대한 알레르기가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기생충이 수백만 년 동안 인간과 공진화하면서 인체의 면역반응을 무디게 해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몸 안에 기생충이 없어지면 면역체계가 균형을 잃으면서 알레르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기업이나 사회에서 급진적인 개혁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점을 깊이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2006년 나이키는 축구공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도 어린이들의 노동을 착취한다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이후 나이키는 수제 축구공을 하청생산하던 인도의 사가 스포츠가 노동시간과 근로 환경 기준 등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을 종료시켰다. 사가의 형편없는 경영으로 나이키가 어린이 노동과 다른 노동위반 행위와 관련 있는 기업처럼 인식되는 점에 대한 부담이었다. 사가 스포츠 노동력의 70%가 나이키 제품 생산을 위해 고용되었기 때문에 나이키와의 계약 종료는 이 어린이들에게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니스벳(Nisbett)과 코헨(Kohen)은 미국의 남부 지역이 북부보다 폭력적인 이유를 사례로 문화가 유전자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였다. 미국 남부는 이민 초기에 주로 목축업자들이 정착하였고, 목축업의 특성상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력 등의 공식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웠고, 소유하고 있는 동물이 전 재산이기에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부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라든지, 모욕적인 언행에 대항할 때는 기꺼이 폭력을 행사하는 경형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Culture of honor)'로 인하여 자신이나 가족 등에 대한 모욕에 대항하기 위한 범죄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또한 통제된 상황에서 진행된 실험에서 남부 사람들은 모욕을 당했을 때 북부 사람들에 비해 코르티졸과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훨씬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나서, 문화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 것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Culture of honor)'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은 예상외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인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보이드(Robert Boyd)와 피터 리처슨(Peter J. Richerson) 교수는 문화를 인류의 진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보고, 유전자의 변형은 심리학적, 동물행동학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즉 인간을 개개인이 모인 집단인 개체군으로 보고, 이 개체군의 문화가 다시 그 안의 개개인을 변형하면서 인류가 진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행동을 유전적ㆍ문화적ㆍ환경적 원인의 상호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통섭(consilience)'의 주창자로 유명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gene-culture coevolution)’을 주장하면서 문화의 단위(모방자)가 의미 기억의 연결점과 그것의 뇌 활동이 빚어낸 산물이라고 말하였다. 인간의 마음이 작용해 만들어진 문화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지고 인간의 유전자는 다시 인간의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설명이며, 이 과정을 통해 마음도 문화도, 유전자도 진화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즉, 문화적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가 서로 피드백 관계로서 공진화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확보를 위한 준비

예측 못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서는 조직이나 기업내에 다양한 자원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경영전략에서는 순혈조직으로 구성된 경영진이 운영하는 기업들은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경영진이 운영하는 기업들보다 변화에 대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이러한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공진화는 많은 역할을 한다.


지구에 다양한 광물이 존재하는 것도 생명체와 광물간의 공진화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태양계 행성이 만들어지던 45억 6천만년 이전에는 겨우 60여 종의 광물만이 존재했지만, 지구 행성이 생긴 뒤 화산 폭발과 물의 작용 등으로 광물의 종류가 수백 종으로 늘어났고, 이후 원시생물이 탄생하고 바다에 조류와 말류가 번창하면서 광합성 작용으로 산소가 배출됐고, 대기 중에 자유산소(O₂)는 금속산화물의 출현을 촉진했다. 조개류가 죽고 나서 쌓이며 생긴 석회 광물도 지구에 흔하게 됐으며, 미생물의 신진대사를 통해 생긴 점토 광물도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광물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억 년 전 무렵에 지구에 금속산화물을 만들 만큼 충분한 산소가 만들어진 후, 4,200여종인 지금의 상태로 진화해 왔다.


카우프만(Kauffman)은 공진화 원리를 기업과 기업, 혹은 기업과 시장 또는 기업과 소비자 등 개체 수준을 넘어선 집단 범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었고, 비생명체인 기술 영역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해서 수정난의 형태형성에 이르기까지, 캄브리아기의 대번성에서 기술혁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주제들의 근저에 깔려있는 질서를 보여주면서 공진화 원리를 설명하였다.



자기조직화

'자기조직화는 복잡성 과학의 이론을 토대로 하여 출현한 이론이다.


자기조직화를 행정시스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란 시스템의 구조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관련이 없이 스스로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직을 꾸려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한 시스템안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얼기설기 얽혀 상호관계나 복잡한 관계를 통하여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


자기조직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일리아 프리고진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는 점균류 곰팡이를 관찰하여 자기조직화 이론을 도출해내었는데, 점균류 곰팡이는 영양분이 모자라게 되면 서로 신호를 보내어 수만 마리가 일제히 요동을 시작하여 한 곳에 모여 어떤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들은 응집 덩어리를 형성하고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기어다니며 영양을 섭취한다. 이 후에, 환경이 다시 나아지면 다시 흩어져서 단세포 생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조직화 이론은 과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혁신을 주도하는 세계의 흐름속에서 주목 받는 이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동물행동학의 근원은 유전자에 있다

윌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이론 중의 하나는 많은 동물 집단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타적 행위조차도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화되었을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다윈의 진화 이론에 의하면 자연선택은 각각의 생물 개체에 작용하여 그 개체로 하여금 생식의 기회를 증가시키는 육체적․행동적 특징들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한 생물체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타적 행위는 자연선택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윌슨은 그런 이타적 행위들이 사실상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 집단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비록 자신은 죽지만 결과적으로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른 개체들에게 보다 많은 생존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동물들의 이타적 행위도 진화적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후손들에게 더 많은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행위라는 것이다. 윌슨은 진화의 전략이 개체보존이 아닌 유전자 보존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행동의 대부분은 각 개체들에 내장된 유전자들에 의해서 통제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개미들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구축하고 고도의 분업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동물들이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행위나 최고의 배우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컷끼리 생명을 걸고 혈투를 하는 행동 등이 모두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유하는 유전자를 보다 많이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등장한 이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이유는 분명하다. (1975년 이후 30년 동안 사회생물학을 주제로 해서 발간된 책만 해도 수백 권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우리 인간도 동물계의 일원인 분명한 바, 인간이라고 해서 사회생물학이 제시하는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은 불가피하게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을 유발하게 되었는데, 이런 논쟁의 중심에 선 연구자의 입장에서 윌슨은 1978년 또 한번 화제의 책 <인간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를 내아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책의 발간으로 윌슨은 처음으로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두 번째 퓰리처상 수상은 1990년 <개미들(The Ants)>의 출간으로 이루어졌다.



인간행동 역시 결국은 진화의 산물이다

<사회생물학>과 <인간본성에 대하여>라는 두 책에서 윌슨은 일관된 입장을 피력한다. 인간은 행동과 사회 구조를 획득하는 성향을 유전에 의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데 이런 성향은 말하자면 대개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특성에는 남녀간의 분업, 부모자식간의 유대, 가까운 친척들에게 행하는 고도의 이타성, 근친상간 기피, 여러 다양한 윤리적 행동들, 이방인에 대한 의심, 부족주의, 집단내 순위제, 남성 지배 등이 포함된다. 사람들은 비록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을 행사하지만 이런 결정에 관계하는 심리적 발달의 경로는 비록 우리 자신이 아무리 다른 길로 들어서고자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우리 몸 속에 깃들어있는 유전자들에 의해서 어떤 일정한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것이 윌슨의 주장이다.


윌슨에 따르면 인류 문화가 제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결국은 이런 특성을 향해 부득이 수렴되는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서 서울 도심에 사는 사람이나 남태평양의 원시부족의 일원이나를 막론하고 설령 그들이 수만 년을 격리되어 있었다고 해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공통적인 유전자들로 인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본성에 대한 이런 윌슨의 관점은 1970년대의 시대조류에서 볼 때 대단히 예외적인 관점이었다. 사실상 서구사회에서는 20세기 내내 천성인가 양육인가 하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양육론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와중에 제기된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천성론에 더할 수 없는 힘을 실어주게 되었는데, 이 논쟁은 지금까지도 곧잘 과학논쟁의 주제가 되곤 한다.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량으로 보는 새로운 지정학  (0) 2013.02.15
공진화 共進化  (0) 2013.02.15
프랙탈 fractal  (0) 2013.02.14
블랙홀 black hole - 정리  (0) 2013.02.14


1.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마을에 가서 추장의 집을 찾으려거든 마을에서 제일 허름한 집을 찾아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부족사람들의 일을 챙기다 보니 자신의 살림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낮에는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지, 밤에 집에 등짝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와 ‘이 일 어떻게 하면 좋냐?’고 도움을 청하기 일쑤이다. 심지어 잠자고 있는 새벽 4시에도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이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다 보면 자기의 생계를 위해 일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추장이나 주술사들은 가난하다. 그들이 결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일을 도와준 지도자들에게 감사하다며 먹거리며 옷가지 등을 손수 만들어 선물로 가져온다. 하지만 추장이나 주술사들은 그것들조차 자신보다 더 어렵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지도자의 자리는 고달프고, 힘든 자리다.

 

그럼에도 많은 아메리카 젊은이들이 추장이나 주술사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지도자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이 정치야말로 ‘최고의 영적인 행위’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북미 이로쿼이 인디언들은 여인들이 지도자를 뽑는다. 그녀들은 부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주의깊게 관찰한다. 아이가 친구들과 잘 노는지, 여자아이를 놀리거나 울리지는 않는지, 또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거나 말을 거칠게 하지는 않는지, 동생들을 데리고 잘 노는지, 또는 쓸데없이 칭얼대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는지, 아이가 유순하고 착한지, 아니면 심술궂은지 등등....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면밀하게 관찰한 다음, 그 아이들이 커서 성인이 되었을 때 그중에서 지도자를 뽑는다. 그때 어렸을 적에 동생들을 때리거나 여자아이들을 못살게 군 적이 있는 아이들, 또 쓸데없이 짜증을 잘 내거나 칭얼대던 아이나 유달리 욕심이 많았던 아이들은 우선적으로 지도자의 후보에서 제외시킨다. 


비록 어린 시절의 그런 좋지 않은 품성을 털어버리고 훌륭한 젊은이로 자랐다고 해도 어린 시절의 그런 품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습성들이 잘 다스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뒤 힘을 갖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의 못된 성질들이 다시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성격이 원만하고 동생들을 잘 챙기며,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고, 부락의 일에 헌신적으로 나섰던 아이들 중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점지하는 것이다.



유인호 평전- 사회변혁을 꿈꾼 민중경제학자의 삶

조용래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경제민주화 주장’ 유인호 교수, 평전으로 기리다

20주기 기념 추모집도 발간… 민중경제학자의 삶 재조명


“어느 날 목사님들이 모여 ‘유 교수는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얘기한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망하지 않은 걸 보니 거짓말 아니냐’고 농을 걸었습니다. 교수님은 되레 ‘목사님들은 예수 재림을 20년 가까이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한 것이 무슨 대수냐’는 위트를 보여줬어요. 자본주의 위기가 세계적 규모로 퍼지고,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니 교수님의 예언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김병태 건국대 명예교수는 민중경제학자 일곡 유인호 전 중앙대 교수(1929~1992)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5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는 유 교수의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330㎡(약 100평) 규모의 행사장은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가득 들어찼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박형규 목사, 한승헌 변호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추모식에 이어 고인의 삶과 사상을 집대성한 <유인호 평전>과 지인들의 추모사를 엮은 <진보를 향한 발걸음>(각 인물과사상사)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렸다.


무엇이 오랜 세월을 지나고도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경제민주화를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가 바로 유 교수였다. 재벌을 비롯한 소수 1%의 정치·경제적 장악력이 강해졌고, 중소상공인·자영업자·노동자·농민의 생활이 어려움을 더해가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평전을 집필한 조용래 박사는 “한국경제는 유 교수가 본격적으로 주장을 펴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줄곧 제기해 온 문제군(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당면 과제로 경제민주주의 실현을 꼽았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유 교수는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제 기본권 7가지 규정’을 제기했다. 여기에는 ‘국가 권력은 경제력 집중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사상은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낸 고도성장의 허상을 지적하는 데서 비롯됐다. 유 교수에게 당시의 성장은 자본과 기술, 시장을 외국에 의존한 ‘종속적’인 성장에 불과했다. 수출과 국민총생산(GNP)이라는 숫자 증대에만 매달리면서 재벌을 비롯한 일부의 배만 불리고 대다수를 피폐하게 만드는 허깨비뿐인 성장이었다. 대신 유 교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경제의 풍부함”(김종걸 한양대 교수)을 이야기했다. 그는 ‘민중’ ‘민족’ ‘민주’의 경제학자로 불렸다. 대다수 민중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민중경제’, 세계화 시대에도 강력한 국내 자본을 육성하는 ‘민족 경제’가 돼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추진하는 데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벌어진 뒤 박정희 군부세력은 정유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당시 동국대에 재직하던 32살의 유 교수에게 계획안을 맡겼다. 유 교수는 외자를 일절 배제하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건설할 것을 주장했으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안에 밀려 채택되지 못했다. 훗날 1970년대 유신경제가 수출은 16억달러에서 150억달러로 늘었지만, 외채를 220억달러나 도입해야 했으며 무역적자도 136억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유 교수의 혜안을 보여준다.


유 교수는 ‘국내 자원 활용 주도형’ 경제 발전을 주창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기업농’ 육성책에 반대해 ‘농업 협업화를 통한 농민들의 연합’을 주장했다. 농민들이 일정한 토지와 농기구를 공동 소유하고 생산의 결과를 나눠가지는 방법이다. 유 교수는 새마을 운동을 농업 협업화의 방향으로 전개하자고 박정희 정부에 건의했으나 정치적 목적을 우선한 집권세력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는 재벌을 소규모 기업들로 해체하기보다 재벌의 소유를 ‘총수’로부터 ‘사회’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을 국유화시켜 관료들에게 맡기는 방법이 아니다. 농업 협업화처럼, 공장도 구성원들에게 운영을 맡기는 소유의 민주화를 뜻한다.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한 유 교수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구소련식의 계획경제가 아니었다. 

계급이 사라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는 사회에 가까웠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일곡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료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 1974년 10월 한 일간지에 ‘연료정책의 모순’이라는 칼럼을 쓰기 위해 연탄공장을 찾은 유인호 교수. 유 교수는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인물과사상사 제공


유 교수는 자신의 최대 연구과제가 “나와, 겨레와, 인류의 가난과 슬픔과 비참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1980년에는 민주화를 촉구하는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가 신군부가 만들어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추모집에서 “민중을 위한 스스로의 학문적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고행의 길을 살다 간 용기있는 사람”이라며 “그 발자취가 역사의 한 구석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황경상 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0


인류는 본래 옛적부터 소규모 단위의 자족적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그런 삶에 자연은 부족함이 없었지만,
산업혁명과 대규모 생산.소비 즉 자본주의가 발생하며 새로운 불행이 커지게 됐다. 대다수가 아닌 소수만이 독점적 부와 쾌락을 누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결코 대다수 모두가 독점적 부와 쾌락을 누릴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세뇌되거나 믿고 있으며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걸 감내할 수도 없고 감내하지도 않을 것인데,
지속적이지 않은 삶은 그 나락의 끝에 다다를 것이고 모두가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을 것이고 살아남은 인류는 예전의 방식을 찾아 자족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생물은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시대의 사람이라는 존재만이 자연 속에 살면서 스스로를 분리시켜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문명이라는 것을 누린다고 생각하며 마음 속 공허함을 쾌락으로 채우며 하루 하루를 버텨간다.

조금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문명이라는 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삶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대규모의 집단적 시스템은 그만큼의 리스크를 안고가야 한다.

절대적 안정을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를 안다면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리라.

이남곡, 장수농부 <좋은 마을


내가 땅을 사게 만들도록 역할을 한 게 멧돼지였습니다. 왜 그런지 짐작이 갑니까? (제가 사는 곳은) 골짜기 위에 논을 작했는데, 첩첩산중인데 일조량이 굉장히 좋습니다. 된장발효조건도 좋습니다. 고르다보니까 좋은 곳을 골랐습니다. 멧돼지가 벼 익은 것을 좋아합니다. 복숭아도 익은 것 좋아합니다. 벼가 익으니까 멧돼지가 분탕을 쳐버립니다. 그래서 전 주인이 멧돼지 때문에 농사를 못 짓겠다고 해서 제가 그곳을 사게 됐습니다. 멧돼지 아니었으면 거기 자리 잡기 어려웠을 것입니다(웃음).

작년에 이사 온 분이 저보다 한 살 위입니다. 이 분이 얼마나 부지런한 지 (뒷산에 저는 한 번도 못 올라가봤다), 이 분은 등산로를 만들어서 9부등산로까지 개척했습니다. 이 분이 지난 등산하러 가셨다가 멧돼지를 만난 모양입니다. 산중에서 만나면 겁나죠. 백두대관 뒤에가 봄이 되면 나물이 좋아요.

봄나물 말씀해보셔요? (취나물, 머위, 두릅, 고사리..)우리 부부만 살 때는 산나물에 관심이 없었어요. 요새 이사 온 두 집이 다 좋아하셔요. 전에는 밑에 동네서 나물을 다 따왔는데, 이사 온 사람들이 따니까 신경이 쓰이는가 봐요. 알려져서, 이제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점점 나물캐는 게 빨라졌다. (여담인데), 아주 나물이 좋습니다. 나물 캐러 갔다 이웃 아주머니가 금방 내려왔다, 멧돼지 소리가 난다고. 요즘은 (멧돼지 소리가 나니까) 조를 짜서 올라갑니다.

저는 5년간 (멧돼지)구경 한번 못해봤어요. 멧돼지가 제일 천적이에요, 사과밭도 그렇고. 이듬핸가 발자국은 많이 봤어요. 고구마를 심었는데, 좋게 말하면 자연농법이고 방치였다. 일을 굉장히 많이 하다보니까, 고구마에 신경을 못 써 풀이 엄청 났어요, 억센 풀들이 꽉 찼습니다. 언제 고구마밭에 가봤더니, 발자국이 많더라구요. (멧돼지가)고민한 흔적이 보여요. 고구마밭인가? 풀밭인가? 풀이 굉장히 많아서요. 우리 밭에는 못 들어가더라구요.

풀밭을 만들어보세요(웃음). 잠깐, 산골생활에 대해 스케치삼아 이야기 했습니다. 재밌습니다.


(
몇평 쯤 되십니까?) 다섯 집이 다 들어와서 사용할 수 있는 땅은 5천 평 정도. 아침에 나가보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각종 꽃, 새소리, 다 좋아요. (저희 집이)가공하니까 항아리사고, 원료 값 줘야 하고, 통장에 돈이 떨어지면 경치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시골사람들이 정도 많은 것 같지만 굉장히 타산적입니다. 옛날 인심 좋은 것 생각하면 실망도 많이 하게 됩니다. 굉장히 비합리적 기성이 대단합니다. 억지요, 억지. 그것과 만나서 속앓이 할 때는 경치가 눈에 안 들어옵니다. 일을 심하게 해서 피곤하면 경치가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 삶도, 돈 걱정 안하고 이웃사람과 불화하지 않고 일이 힘들지 않는 조건이 될 때, 자연 환경이 살려집니다. (그때) 농촌생활의 즐거움, 행복이 느껴집니다.


요즘 생각하는 게, 적어도 귀농을 해서 행복목표를 달성 하려면, 세 가지가 박자가 맞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그렇고, 주변 귀농하는 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첫째, 동기랄까, 다른 말로하면 의욕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귀농하려는 꿈이 분명해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 말로 로망이 분명해야 합니다. 로망이 뭡니까?
(‘산을 좋아합니다. 산 가까이 가서 동물을 많이 키우고 싶습니다. 아이들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자연이 좋아서요. 아침에 해 뜨는 것 보고 저녁에 해 지는 것 보고. 자연과 살고 싶어서요.’ ‘모든 플랜을 남편에게 따라 가려구요.’) 결혼하신 분들은 자연과 살기 이전에 부부와 함께 살겠다는 로망이 중요합니다. 한분만 더? (정년도 했구요. 원래부터 그렸던 시골생활이 그리워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결혼 안 하신 분, 결혼에 대한 로망은 없습니까? (생각 안 해봤습니다) 이걸

여쭤보는 이유는, 아주 현실적입니다. 로망이 서로 같은 게 귀농성공에 가장 중요합니다. 자연하고는 처음에는 좋지만, 오래 살다보면 너무 익숙해져버립니다. 처음에는 생명에 환희를 느낍니다. 오래가다보면, 몇가지 걱정 (돈 걱정, 부부싸움, 힘든 일)으로 자연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보다 현실적인 로망을 생각해보십시오. 쓸 만한 남자를 구해서 같이 들어간다. 그게 단순한 삶입니다. 문화운동이, 소유로부터 존재의 삶을 살겠다는 겁니다.

경쟁, 갈등의 삶에서 벗어나서 단순, 존재의 삶으로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문화혁명이죠. (저는)귀농을 은퇴해서 내려가는 은둔자의 삶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혁명가들이라고 봅니다.



로망은 누가 억지로 갖게 할 수 없습니다. 진짜 힘듭니다. 많이들 말씀 나눴을 겁니다. 소박, 단순, 존재의 삶. 이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귀농합니다. 귀농자들 중에 가장 실패하기 쉬운 예가, 귀농해서 그린 로망 때문에 간절해서 귀농하는 게 아니고 무엇무엇으로부터 탈피하려고 귀농하는 사람들은 실패할 확률이 많습니다. 서울생활이 싫어서, 사람관계가 싫어서 그렇다면, 행복한 경우가 쉽지 않습니다.


이보단 낫겠지, 하고 갔더니, 이보단 나은 정도가 아니고. (엄청나게 좋다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리광산정도 일 줄 알고 갔더니 금광이다는 분도 소수 있습니다. 뭐가 싫어서, 탈피하려고 간 사람들은 오히려 확률로 보면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도, 도시와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한테 치어서 시골 가겠다는 건 크게 오산입니다. 그렇다면, 서울 사는게 좋습니다. 서울은 익명성 공간이 확보돼 있잖아요. 시골은 집들이 띄움 띄움 있습니다. 익명성이 없어요. 안 좋게 말하면 프라이버시 보호가 잘 안 돼요. 관심이지만, 나쁘게는 간섭이 심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사하면, “저쪽에서 어디 가느냐?”, “장에 갑니다.”, “뭐 사러 갑니까?”, “뭐 삽니다.”, “사서 뭐하게?” 아주 관심이 대단합니다.

나중에는 가다가 남원시장에 장화 사러 가는데, 밭에 갈 때 신으려고 사러 갑니다. 한꺼번에 얘기했더니, 재미가 없어. 처음부터 다시 얘기했습니다. 관심이 많아, 심지어 숟가락이 몇 갠가까지 압니다. 이건 사람 많지 않은데,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사이가 안 좋으면 지내기 참 힘들어집니다. 뭘 피해서? 예를 들어 경쟁이 싫다면, 경쟁대신에 앉아들일 것이 준비 안돼서 갑니다. 그게 없으면 자립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져요. 그래서 확대해서 말하면 사회진보운동도 마찬가지이구요.

무엇무엇에 반대해서, 싫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좋아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귀농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망이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성공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시, 로망은 느리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저는 그렇습니다) 좋은 로망입니다. 왜 느리게 살고 싶으세요? 000 (스피드 사회에서 모든 걸 몰아넣는 것 같에서요. 설명보다는 체험으로 다가오는 느낌으로 살고 싶어서요) 좋은 로망입니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있습니다.

사실은 느리게 산다는 것은 그동안 산업사회 패턴들에 대한 반성, 성찰적 반성으로부터 나온 목표이기도 합니다. 크게 말하면, 인간중심으로부터 자연을 수탈해온 산업문명, 특히 한국 사람들이 가진 빨리빨리를 넘어서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도 그렇게 살고 싶거든요. 주인의 삶, 주체적인 삶. 빨리빨리는 자기주체적인 삶이 아닙니다. 쫓기는 삶이 아닌 게 느리게 사는 삶입니다.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게 게으름입니다. 느리게와 게으르게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달라요.

요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게으름과 느리게는 전혀 다릅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느리게라고 할 때 연상되는 동물이 있습니다. (거북이) (나는 연상되는게) 호랑이와 사자는 느립니다. 두려운 게 없어요. 빠를 땐 기가 막히게 빨라요.

느리게 산다는 로망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겠다. 빨리빨리는 전부 강요된 삶입니다. 이걸 게으르단 것과 혼돈하면 굉장히 큰 함정에 빠집니다. 농촌에선 게으르게 살 수 없습니다.


주위가 24시간 보고 있는데, 그것을 견딜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풀 때문에 스트레스가 아니고, 주변사람들 시선을 견딜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농사일이 적기가 있어요. 시기를 놓쳐 버렸다하면, 일이 엄청 힘들고 수확도 못합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사자처럼 느리지만 빠를 때는 전광석화같이 (시기를)맞춰져야 됩니다. 정말로 그 시기에 맞춰해야 할 일은 정말로 빨리 움직여야 됩니다.

그것이 바탕이 된 느림입니다. 느림을 게으름으로 생각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 로망이 어떤 로망인가가 첫째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행복을 그릴 때 사람마다 다 달라 객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로망을 절실하고 간절하게 아름답게 꿈꾸세요. 그랬을 때 성공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시골사람들이)어떤 말을 듣기 싫어하냐면, ‘나이 먹었으니 농사나 지어야지하는 말입니다. 농사일이 진짜 힘들어요.

귀농하려는 로망이 뚜렷할수록,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포기합니다. 로망은 구체적이고 절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실력입니다. 꿈만 있지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기도 힘들지만 주위가 힘들어요. 특히 가족단위에서 잘 봐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입니다. 로망은 절실하고, 아름다운데, 구체화시킬 실력은 준비가 안 되고 없을 때 그 꿈 자체가 공허해져요. 쉽게 말하면, 일은 벌려 놓은데, 제대로 땅을 활용하고 농사를 지을 실력이 뒷받침 안 되면 같이 가는 사람이 힘듭니다.

실력은 다 갖추고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적어도 실력을 닦아 보겠단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예전에 도산 안창호선생은무실역행을 강조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이)너무 실무적인 능력이 없는 거예요.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실천의 발이 준비 안 되면 정말 힘들어집니다. 본인도 힘들뿐 아니라 주위사람들도 힘들어집니다. 귀농하려면, 서서히 그 로망과 함께 로망에 맞아떨어지는 실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돈도 있습니다. 돈을 넉넉하게 준비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자연과 주변사람과 더불어 즐길 수 있습니다. 돈 못지않게 실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농사기술은 배우면 됩니다.
 
그중 실력은 체력과 끈기입니다. 체력을 많이 준비하셔야 됩니다. 실력중 하나예요. 제가 아는 역귀농한 친구 중 하나가 헬스클럽에 가서 체력을 다졌습니다. 실제 농사는 그것과 다릅니다. 단기적인 힘쓰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지는데, 일을 하면 나보다 못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서서히 체력을 준비해가야 합니다.



그 다음이, 소통의 실력입니다. 아까 농사방법도 얘기했지만, 실제로 농촌에 가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문화혁명에서 핵심 하나가 소통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과 스트레스를 피해서 도시처럼 복잡하게 얽혀 사는 곳이 아닌 농촌 환경을 선택하려고 하지만 그것과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 문화적요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경쟁, 갈등하는 관계에서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맘을 여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소통이 있는 곳이라면, 이게 모두 공동체예요. 어떤 형태가 있는게 아니라, 사람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있는 곳이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준비를 해야 됩니다. 준비는 마음가짐의 변화라고 할까요. 아까 로망 얘기 하다 떠올랐는데,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로망이 뭘까요. 성인이 되고 싶은 로망입니다. 동의하십니까? 하십시다.

우리 성인이 시다. 괜찮습니까.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기왕 귀농하실 거 성인이 돼 봅시다. 마음자체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귀농, ()으로 돌아간다. 인간본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봄은 어떨까. 왜 마음이 안 당깁니까.

정말 소통을 잘하려면 자기 스스로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 사례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을 변화했다면, 내가 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결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은, 아집이 있는 인간끼리 소통하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 실력이 쌓이면 성인의 실력입니다.

사실, 면벽구년하고, 참선도 하고 명상도 하는데, (이것들도)굉장히 마음의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면벽보다는 대면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내려와서 누가 더 깨달은지를 놓고 싸운다면 무슨 소용있겠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소통이 되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몇 살 때 소통이 가능했다고 했습니까. 이순 (60), 귀가 뚫렸다는 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린다는 겁니다. 요즘 소통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무소유, 사람간의 소통의 자유, 이것이 동기라면 이 길이 성인의 길이다. 여기서 실력을 쌓으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왕에 귀농하면, 이 같은 목표를 넌지시 가져봄이 어떤가 싶습니다. 의무감, 사명감으로 가지면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실력입니다. 로망이 실력을 갖출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소통을 연습하는데, 멀리서 할 필요 없습니다. 가장 연습하기 좋은 상대가 부부예요.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소통의 파트너를 만나야 되요.

옛날 사람들은 성인의 길을 가려면 집을 버리라고 했잖아요. 성인의 길을 가려면 악처를 만나라고. 멀리 있는 사람은 달라도 삽니다. 안 맞으면 그만이야. 하지만, 귀농은 부부가 24시간 같이 있어야 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귀농해보셔요, 24시간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귀농은 성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게 안 되면 힘들다니까. 올해로 저는 결혼한 지 31년째 됐습니다. 그런데, 삼십년 살면서 장수에서만큼 오래 같이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반경 500미터 안에서 늘 같이 사니까요. 같이 살면서 소통의 실력이 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마을같이 만드는 사람들과 논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연찬강독을 했습니다. 제가 한 2년 동안 공자에게 푹 빠져 지냈습니다. 성찰과 소통에 대해서는 우리가 같이 강독하면서 연찬할 수 있는 내용으로 논어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그걸 통해서 서로 성찰도 하고 소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제자들이 공자에게선생님, 평생동안 간직해야 할 한마디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서슴치 않고 공자가 대답하길용서할 서()”입니다. 무엇이 연상됩니까? 어떤 때 합니까? 네가 잘못했지만, 내가 용서할께.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용서는 내가 옳다는 게 바탕이 돼 있어요. 요새말로 하면, (이 의미는)용서라기보다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서()예요. 이게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에요. 내가 기준이 돼서 나는 옳다, 바르다는 기준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막힘이 없어요.

내가 옳다하면 막힘이 있어요. 그러면 뭔가 부자연스러움이 있어요. 부부간에 가족 간에 잘 연습을 해보시면, 진짜 인생자체가 질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집사람 예를 듭니다만, 서로 성격이 많이 달라요. 성격도 다르고 로망도 달라요. 집사람이 (가공공장)사장이고, 제가 종업원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집사람은 꽃밭에 가 있습니다. (이걸) 한참 이해를 못 했다니까요.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구요. 나중에는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서라는 건 뭐냐?)저 사람이 꽃 가꾸는 것을 참 좋아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였더니 이해가 되었어요. 집사람한테는 가공 일보다는 꽃 가꾸는 데 관심이 더 많고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받아들였어요. 근데 맘속에서는 뭐가 올라와요. 어느 순간에 정리되는 계기가 있더라구요. 머리로 할게 아니라, 꽃밭 가꿀 때 같이 해보니까, 그 즐거움이 나한테 비로소 들어오더라구요. 물론, 집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바탕이 됐을 때 되더라구요.

어느 기특한 순간에 내가 저 사람이 꽃밭 가꾸는 걸 맘 놓고 하게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서()인 것 같더라구요. 진짜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게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는 사랑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이럴 때 비로소 사람간의 소통이 되는 것 같더라구요. 가족, 특히 부부 그리고 정말 가까운 사람들하고 소통의 연습을 하십시요. 이게 귀농할 때 중요하게 갖출 실력입니다. 구리광산인 줄 알았는데, 금광산이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귀농이 문화운동이고 혁명이라면, 소통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걸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연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가 책임입니다.

요새 느끼는 게 젊은 분들은 어떤 일을 끝까지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분들 볼 때 제일 안타까운 게 유시무종(有時無終)입니다. 시작을 했는데, 끝이 없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책임져 보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물론 다 그렇단 얘기는 아닙니다.
 
실제 중요한 것은 끝까지 책임있게 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주인의식입니다. 주인은 끝까지 합니다. 자기인생의 주인인데, 스스로 그것을 못 하는 겁니다. 주인의식이 약한 이유 중 하나가 어떤 어려움에 닥쳤을 때, 금방 시선이 다른 사람과 환경으로 갑니다. 실제로 목표가 분명하면, 환경 탓, 남 탓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할까 골몰합니다. 대체로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바로 환경 탓, 남 탓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면 중도에서 끝납니다.

사실, 귀농 자체가 삶의 전환, 문화혁명이라면, 끝까지 해보겠단 주인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삶에 충실한 삶이어야 합니다.

가끔 여러 가지 세상사를 보면서 떠오르는 우화가 솔로몬우화, 친자소동이 생각납니다. 친어머니의 태도 있잖아요. 진짜 친어머니의 자세예요. 실제 참된 주인의식은 남 탓, 환경 탓으로 돌리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골몰합니다. 실제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논어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내 맘이 동요가 없을 때 군자다 (이게 주체적인 인간). 요새 얼마나 남의 평가에 흔들리기 쉽습니까. 화가 날 때 하나가, 다른 사람이 나를 몰라줄 때 내 맘이 요동을 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자기를 뺏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식은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하든지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로망을 끝까지 실천해가는 게 아닌가요. 요새 제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로망을 절실히 갖추고, 실력 중 중요한 게 소통의 실력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일을 해나가는 주인의식, 주체적인 태도.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귀농이 성공적으로 다가옵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리시겠지만, 이게 잘 안되면 귀농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도 조화롭지 않습니다. 다만, 노력하는 과정이 됐으면 합니다.




<
질의, 응답>


-
시골 가서 장류를 한 계기는?

무소유공동체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 했을 때 제일 걱정이 경영이었습니다. 예순때 왔으니까, 농사 짓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사짓는 것 보다는 노동이 적고 수입도 생겨서 택했습니다. 귀농할 때 자기가 가진 적성들을 살려서 하십시오.


-
제가 음식만드는 데 관심있어서 장만들기에 관심이 갑니다. 평소에 해보셨던 겁니까. 집사람도 이것을 할 줄 몰랐습니다.
고추장이 한번 염도가 안 맞으니까, (신맛이 돌아버리니까) 일곱, 여덟 항아리 땅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대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
콩은 직접 농사 짓습니까.

다 못 짓습니다. 고추는 유기농으로 지은 걸 사서 쓰고, 콩은 제것이랑 주변이랑 합해서 씁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장류는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청국환입니다.


-
작년 녹취록에서 공동체 안에서 가구들이 농작물을 분담해서 짓는다고 읽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또 하나는 야마기시공동체 나와 지금까지 사시면서 무소유 삶에 대한 지향을 여전히 가지고 계신지요?


저희 마을은 개별 시스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스템에 맞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무소유 삶이 지금 시스템에 맞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소유 삶에 로망이 있었습니다. 무소유가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데 확신이 있습니다. 다만, 아직 인간에게는 아집이 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무소유 실험이 안 맞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어느 정도 제가 하고 있느냐는 모르겠습니다. 그 실태에서 출발해서 나도 준비하고 서로가 준비하면 어느 날은 (무소유를 실현할)때가 되지 않겠냐고 봅니다. 다섯 집이 협의체를 구성하지 않습니다. 전부 각자 하고 싶은 작물을 짓습니다. 제일 편합니다. 대신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한테서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기풍을 일으켜야 합니다. 서로 감흥 하는 분위기. 양보의 이니셔티브를 연습해보려고 합니다. 자율적으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사실, 가공은 어느 한 집이라도 같이 하면 좋다는 마음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걸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육체적으로 힘들어지니까요. 그러나 집마다 로망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개별 가정들이 완전히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서로 알게 모르게 조화를 이뤄 가려고 합니다.

얼마전에는 양계하려는 사람이 이사를 왔습니다. 정해져 있는 규칙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게 없이 정말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조화되는 모습이 (제가 그리는) 우리 마을의 모습입니다. 규약, 협의체 전혀 없습니다. 8년간 시스템에서 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거기서 오는 반작용인줄은 모르겠습니다. 짜임새가 필요하면 그렇게 할 겁니다. 현재는 그렇습니다.



-
경제적 빈곤으로 공동체안에서 관계문제도 어렵다고 하든데요. 다섯 가구에서 상대적 박탈감, 관계에서 어려움은 안 생겼나요?

저도 신경 쓰이는 점들입니다. 아마 그것이 하루하루 사람과 만나 살면서 하는 새로운 경험들일 겁니다. 전부 부채가 많아요. (전부) 넉넉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저도 협동조합을 하자고 생각을 해봤어요. 아직은 불편하단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필요에 따라 할 거예요.

자유노동, 자발적인 자유의지로. 품앗이는 댓가가 없는 게 아니예요. 품앗이도 일종의 교환이에요. 노동의 교환, 품앗이보다 진일보 한 것 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집이 하나둘씩 해보면, 같이 살면서 성인의 길을 가는 거예요. 정말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예요.

공동의 지갑, 1%를 넣자. 정말 자유의지에 따라 마을의 공동기금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이게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노인복지, 교육, 육아, 질병에 대한 대처가 되겠죠. 이렇게 해서 자유노동과 마을공동의 지갑 만들기가 진척되면 의식이 향상돼서 협동, 무소유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요. 너무 염려하지 말고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무소유의 삶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쉽게 말하면, 분배, 급료가 없는 시스템입니다.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씁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공동체에서 무소유하는 데는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소유의식과 아집이 있는 상태에서는 부자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 실태하고 다르다보니까 생기는 부작용들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일은 못하는데, 씀씀이가 많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수강생그게 불가능합니다.

불교, 카톨릭종교기관에서도 못하고 있잖아요. 그걸 다섯 세대, 열 세대가 모였다고 하겠습니까?”) 인간이 가진 특권이라고 봅니다. 미래는 보통사람들이 성인이 되는 시대라고 봅니다. 실제로 가능한 목표로 왔다고 봅니다. 아직은, 지금 인간의 실태와 안 맞다고 봅니다.


-
거기서 살아보려면?

지금 땅이 없습니다. 근방에 알아볼 수 있죠. 나는 30분 거리에는 모두 이웃으로 봅니다. 산내면쪽으로 오면 됩니다.


-
판로개척은?

생협, 수도권 생협, 개별적 가구들입니다. 채소를 하는 이웃은 가족회원제도를 시험해보려고 합니다. 가족회원제도는 회비형태로 받고 채소를 1년간 공급하는 겁니다. 1년에 40만원이면, 삼십 가구 되면 1200만원 됩니다. 이 돈으로는 단순 소박한 삶 정도는 살 수 있습니다.

'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년 농사표 - 24절기 농사법  (0) 2010.08.02
귀농과 마을공동체  (0) 2010.08.02
내차에 다는 캠핑카 루프텐트 [카텐트]  (0) 2010.07.27
농지구입과 빈집수리, 집짓기  (0) 2010.07.27

 영국 북쪽 끝 모레이만에 있는 생태마을 - 핀드혼 농장
 
* 이 체험기는 제가 2000년 5월 핀드혼을 방문했을 당시에 기록한 것입니다. 핀드혼 체험기의 일부는 한겨레출판사에서 나온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에도 실려 있습니다만 그 글은 편집자의 요구에 의해 상당히 축소된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원문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싣습니다.

자유. 사랑. 공동체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요즘 전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해리 포터’의 모험 이야기는 영국 런던의 킹스크로스역을 출발하는 기차 안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킹스크로스에서 기차를 타고 스코트랜드로 가는 나의 마음이 꼭 그랬다. 스코트랜드 북쪽 끝 어딘가에 핀드혼 공동체라는 것이 있어서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그곳에 소개받은 사람도 없다. 게으른 성격에 숙소 예약도 안하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것이다. 도착 시간을 보니 무려 9시간이나 걸리는 기차여행이다. 열차 안은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빈틈이 없다. 그래도 냉방이 잘 되어 있어서 오슬오슬 춥기까지 하다.

스코트랜드. 스코트랜드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게 무엇이 있나? 우선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고집불통이고 독립심이 강하다는 것. 아직도 스코트랜드 독립을 외치는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 007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낼리도 스코트랜드 출신인데 영국 왕실에서는 수년 전부터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스코트랜드 독립주의자 당을 지지하는 바람에 번번이 취소되었다가 최근에야 모종의 절충이 이루어져 작위를 수여한 일이 있다. 사실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경쟁의식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봄에 두 나라(?) 사이의 축구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이건 한일전이 무색할 정도로 치열하다. 차라리 전쟁이라고 말하는 게 옳지 싶다. 그밖에 멜 깁슨이 주연하여 히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내가 알고 있는 스코트랜드에 대한 지식의 전부이다. 그 스코트랜드의 북쪽 해변에 지금으로부터 35년전 한 쌍의 부부가 모종의 신비경험을 체험한 뒤 일구기 시작한 공동체가 지금은 영국에서 가장 큰 공동체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내면세계 탐구와 생태공동체의 국제적인 기지가 되어서 해마다 전세계에서 14만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9시간의 기차여행을 창 밖만 내다보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영국의 전원풍경에 엔간히 진력이 났을 즈음 가방에서 한 뭉치의 복사 서류를 꺼낸다. 전 날 인터넷에서 건져낸 문건들이다. 주로 농수산부에서 발표한 환경농업에 대한 정책요강과 지침에 관한 것이다. 세상이 변하니까 농업 정책도 이렇게 변하는구나! 역시 재야에서 오래 활동한 장관이라 다르긴 다르다 싶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처음에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사라지고 자조와 한탄이 신음처럼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주제가 환경농업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그 실천방법과 사고방식은 유신시대의 새마을 운동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제시된 정책을 잘 따르는 마을과 개인들에게 점수를 매겨서 포상을 하다니! 농민들에게 그따위 경쟁심을 부추겨서 얻어지는 게 사행심 말고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정부의 환경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인가. 환경농업은 관료들의 과시용 숫자 놀음의 대상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비친 관료들의 사고방식은 마치 제2의 새마을 운동을 벌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우리 농촌의 근대화가 달성되었으니 이제는 제2의 새마을 운동을 통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자는....

환경농업은 70년대의 소위 ‘녹색혁명’ 과는 그 기본철학이 다르기 때문에 정부가 농민을 지배와 조작의 대상으로 삼는 한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녹색혁명’은 관료조직과 국제식량생산기구가 합작하여 벌인 위로부터 아래로 퍼부어진 ‘혁명’이었지만(그것도 엄청난 후유증을 남겨 놓은 채) 환경농업은 땅 위에 서 있는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견’과 ‘깨우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그런 식의 성과 위주의 정책 보다 농민들의 교육과 환경농업이 촉진될 수 있는 기반조성에 더 힘을 기울여야한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어도 농업문제에 관한 한 정부가 관료적으로 간섭하여 농업이 제대로 된 일이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물며 농업의 의미를 문명의 대안으로까지 격상시키고자하는 환경농업에 있어 서랴...우리가 정부의 구태의연한 농업정책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시민. 농민 단체가 강화되고 농민 개개인의 의식계발이 이루어져 국가의 획일적인 힘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대응력을 길러야 한다. 어쨌든 간에 시대상황에 맞추어 정책이 바뀌었다는데 에 만족하며 다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반환경적인’ 영국 농촌의 광대한 들판에 눈길을 돌린다. 핀드혼 가는 길에 엉뚱하게 환경농업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사실 9시간의 기차여행이 길기도 했지만 핀드혼에서의 경험도 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핀드혼 공동체와 인접한 포레스역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바다 저편에서 너울너울 대고 있다. 역에서 나와 포레스 시내로 들어가 배부터 먼저 채우고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봐야겠다. 조그만 타운인데도 호텔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관광지임은 짐작하겠다. 길거리가 얼마나 깨끗한지 도저히 피우던 담배꽁초를 버릴 수가 없다. 집들도 깨끗하고 예쁘다. 여기에는 런던에서처럼 구질구질한 벽돌집이 없어 일단 보기에 좋다. 대부분이 고풍스런 돌집이거나 벽돌집이라 하더라도 미장을 깨끗이 하여 겉에 맨 벽돌이 보이는 집은 없다. 근처의 현금 자동지급기에서 돈을 좀 뽑은 뒤 제일 싸다고 여겨지는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 로 들어가서 기본을 시킨다. 식사비를 지불하려고 돈을 세아리다가 화들짝 놀란다. 같은 액수의 돈인데 모양이 다 다른 것이었다. 재수 없게 위조지폐를 뽑아 가진 줄 알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까 주인이 껄껄 웃으며 스코트랜드 돈이란다. 자기네 돈을 따로 찍어내는 것이다. 그것도 두 은행에서 각각. 그러니 같은 단위의 돈에도 서너 가지 다른 문양이 있는 것이다. 스코트랜드인의 고집과 독립심이 느껴진다.

일단 주소에 나와 있는 대로 공동체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이 행해지고 있는 클루니 힐(Cluny Hill)로 간다. 마침 주말이라 건물 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안내 창구도 닫혀 있고. 이리저리 헤맨 끝에 겨우 담당자를 만나 공동체에 관한 기본 정보를 얻어들고 다시 길거리로 나온다. 오기 전에 미리 신청을 하지 않아 당장에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천상 다음 주에나 하는 수밖에. 덕분에 푹 쉬면서 핀드혼 인근 구경이나 하자며 택시를 불러 타고 공동체 실현지가 있는 핀드혼 만(Findhorn Bay)으로 간다. 정보지에 적혀있는 숙박업소에 전화를 넣어보니 여름휴가철이라 도무지 방을 구할 수가 없다. 핀드혼은 공동체 실현지일 뿐 아니라 해변과 만안 일대가 잘 알려진 관광지이기도 하다. 할 수 없이 목록에 나와 있는 것 중 방 값이 가장 비싼 집에 전화를 한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다짜고짜 한국에서 온 학생인데 방 값을 얼마 밖에 낼 수 없으니 재워주겠느냐고 묻는다. 주인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오라고 한다. 가보니 거대한 저택이다. 이름은 Minton House.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고 공동체와 연계하여 각종 워크샵과 행사를 치르는 리트리트(Retreat)이다. 내게 준 방은 이 집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는데도 침대가 두개나 들어있는 큰  방이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큰집에 사람이 안 보인다. 짐을 풀어놓고 사정을 알아보니 며칠 후에 워크샾이 열리는데 그때 단체손님을 받기 위해 방을 비워두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어차피 비어있는 방에 들어가서 약간의 부수입을 올려주고 있는 것이다. 복도를 지나치다가 가운을 걸친 조그만 동양여자를 만난다. 20대의 일본 여자. 핀드혼 공동체에 왔다가 이곳의 분위기가 좋아서 눌러앉아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8개월 째란다. 이후로도 이와 같은 경우의 일본여성들을 여럿 만나게 된다.

널찍한 잔디 마당을 지나 만 쪽으로 나아가니 더 나가구자시구고 할 것 없이 바로 발아래서 바닷물이 찰랑대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완벽한 휴식장소에 와 있는 것이다. 사전 예약도 없이 무식하게 쳐들어 온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너무 과분한 환대를 해주시는 것 같다. 달님은 구름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 저만치 바다 위에는 정박 중인 요트 몇 대가 잔물결에 흔들리고 있다. 부근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자갈을 둥그렇게 그러모아 놓고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주변엔 파도에 밀려온 죽은 나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불 구경과 불 피우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하는 나이다. 그만큼 불 피우기를 좋아하고 또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길 좋아한다. 나는 나름대로 이것을 ‘모닥불 명상’이라고 부르데, 이날 자정이 넘도록 ‘명상’을 즐겼다. 발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나무 가지들이 이리저리 얽혀서 여러 가지 불꽃무늬를 만들어 내다가 결국에는 새하얀 재로 변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민톤 하우스에 머무는 나흘 동안 나는 매일 밤 은총 어린 ‘모닥불 명상’에 잠긴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 핀드혼 공동체와 마을을 돌아본다. 핀드혼은 바닷가 모래톱에 위치한 오래된 작은 어촌과 그 아래 35년 전 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과 공동체의 관계는 상당히 원만한 것으로 보여진다. 핀드혼 자체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공동체를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꽤 북적대는 곳이다. 공동체는 코뮤니티 센터를 중심으로 상당히 넓게 분포되어 있다. 중앙에는 코뮤니티 센터를 비롯하여 방문객 센터, 상점, 식당, 카페, 사무실, 도서관, 공연장 등 공동체의 기간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서쪽은 핀드혼 만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는 공동체에 청정식품(Organic Food)을 공급하는 농장이, 동쪽에는 에코 빌리지(Eco-Village)가, 남쪽에는 이동식 주택(Caravan)과 텐트촌이 자리하고 있다. 공동체에 귀속되어 있는 사람이 백 오십 명이고, 전체 상주 인구가 300명가량 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공동체에는 직접 귀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개 공동체 건설에 참여했다가 보다 자유로운 사회활동을 위하여 독립하여 나왔거나 일시적으로 공동체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방문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기도 한다. 현재 공동체는 에코 빌리지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어서 동쪽 벌판에는 건설 중인 에코하우스가 몇 채 서 있는 게 보인다.

우선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에코 빌리지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핀드혼은 ‘세계 에코 빌리지 네트웍’(GEN: Global Eco-Village Network)의 일부로서 영국 에코 빌리지 운동의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에코 빌리지 운동은 대안적 생활양식을 모색하는 시민운동의 하나로서 유럽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세계 각국의 비슷한 운동들과 연계되어 지구적인 네트웍을 갖추고 있는 국제적인 지역공동체 운동이다. 이 운동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운동을 지구적 차원에서 개념화하고 네트웍을 형성하였다는 데서 그렇다는 것이지 에코 빌리지 자체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에코 빌리지 운동은 간디의 공동체 운동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고 있으며 이미 비 유럽 지역에서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발전이 진행 중이다. 남미 콜롬비아에 있는 가비오타스(Gaviotas)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에코 빌리지 운동은 이전의 고립적이고 낭만적인 공동체 운동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그곳이 도시이건 시골이건 간에 또는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간에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속가능한 기술의 채택, 투입 자원의 최소화, 에너지와 자원의 재활용, 자주적 지역 공동체 건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글로벌 에코 빌리지 네트웍(GEN)은 1994년 다음과 같은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첫째, 지속가능한 공동체 마을의 건설을 지원하는 것. 둘째, 공동체들 간의 정보교환을 촉진하고, 셋째 에코 빌리지의 개념과 실현지에 대한 정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것 등이다. 현재 네트웍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오세아니아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서 운영되고 있다.

핀드혼 공동체는 ‘글로벌 에코 빌리지 네트웍’의 창립 멤버로서 그 동안 이를 주제로 여러 차례 국제회의를 유치했다. 에코 빌리지 사업은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확장 중에 있다. 원래 핀드혼은 영성공동체로 출발한 것이다. 지금도 영성(Spirituality) 을 중시하는 기조는 변함없지만 공동체의 성장에 따라 생태학적 요소와 사회경제적 요소 등이 가미되어 더욱 풍요롭고 조화로운 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제 핀드혼 에코 빌리지의 시설과 기능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1. 에코 하우스

현재 공동체 단지 내에 27채의 에코하우스가 들어서 있으며 앞으로 삼 사년 내에 40채를 더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에코 하우스는 환경 친화적이고 에너지 절약형으로 설계되었으며, 모든 건축 재료도 지역에서 생산된 독성이 없는 자연재료를 쓴다. 나는 이담에 내가 집을 직접 지을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에코하우스들을 비교적 상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곳의 에코 하우스들은 모두가 유럽 전통 양식의 목조건축이다. 나는 특별히 흙건축에 관심이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없다. 대신 밀짚으로 지은 집이 한 채 있는데 연장 창고로 쓰고 있다. 그밖에 폐타이어를 이용한 반지하식의 창고 건물이 있다.

핀드혼의 에코 하우스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목조가옥이고, 다른 하나는 ‘위스키통 집’(Whisky Barrel House)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집이다. 이 집들은 인근에 있는 위스키 공장이 문을 닫음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버려진 거대한 위스키 통을 보고 그 나무조각들을 떼어다 집 지을 생각을 한 것이다. 이왕이면 위스키 통에서 떼어왔으니 집모양도 위스키통 비슷하게 설계했단다.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위스키통 집에 들어가 본다. 그 집은 재미있게도 핀드혼에서 최고의 고참이 살고 있는 집이다. ‘로져’라고 불리는 그는 공동체에서 26년째 살고 있는 독신남이다. 집 형태는 에스키모의 이글루와 거의 같다. 다만 집이 반구형이 아니고 원통형인 점만 다르다. 내부는 한사람이 살면 꼭 알맞을 정도로 콤팩트하게 꾸며져 있다. 원형공간의 한쪽에 열린 벽을 쌓아 욕실을 만들어 놓고 욕실 천장 위에 침실을 꾸며놓았다. 위스키통 집은 이렇게 통 하나로 된 것도 있고 여러 개가 중첩된 것도 있는데 삿갓 모양의 지붕과 함께 아주 멋들어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가는 핀드혼의 명소가 되었다. 위스키통 집은 환경친화성은 물론이고 자원재활용, 지역에 근거한 창조적 발상 등으로 하여 생태건축의 모범적 케이스가 되고 있다.

현재 짓고 있는 에코 하우스의 내부도 들어가 본다. 이들의 얘기에 의하면 석재 목재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건축재료들을 스코트랜드 인근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마감할 때 쓰는 페인트도 값이 한배 반에서 두 배나 비싼 자연산 페인트를 구해다 쓴다. 목조가옥의 외부는 참나무와 소나무류에서 추출한 기름을 바를 뿐이라고 한다. 목재는 통목재 뿐 아니라 합판도 상당히 많이 사용한다. 목수들은 모두 최첨단의 장비로 일하고 있다. 문틀과 창틀도 모두 육중하면서도 부드럽게 여닫히는게 상당히 고급품으로 보인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열효율을 높이기 위해 3중 유리창을 쓴단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식으로 지어서는 집 값이 엄청나게 나갈 것 같다. 과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에코하우스 지을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핀드혼 공동체 전체를 생태건축 측면에서 보자면 여전히 많은 문제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태개념과는 거리가 먼 캬라반과 같은 임시 주택에서 살고 있으며, 공동체 사람들의 경제수준으로 볼 때 현재 짓고 있는 에코 하우스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공동체의 주거문제를 생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저렴하고 비전문적인 생태건축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아, 한가지 빠뜨려서는 안될 보석과 같은 집이 에코 빌리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이름하여 ‘자연의 사원’(Nature Sanctuary)라고 하는데 명상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석재로 지은 작은 반 지하 집이다. 뒤에서 보면 풀이 무성한 두툼한 무덤 같고 앞에서 보면 아담한 돌집이다. 경주의 석빙고를 연상하면 된다. 영어로 이런 스타일의 집을 Earthshelter 혹은 Earthship 이라고 한다. 집이 땅속에 반쯤 묻혀있어서 아주 아늑한 느낌을 준다. 조명은 천정에 나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을 이용한다. 내부설계와 앞마당을 얼마나 정갈하고 예쁘게 꾸며놨는지 누구든 보기만 하면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 명상의 집은 진입로에서부터 돌계단과 비석을 세심하게 깔아 놓아서 집과 그 주변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이 집은 늘 열려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어가서 명상에 잠길 수가 있다. 매일 아침 8시에는 공동체 사람들이 모여 떼제성가(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에서 부르는 성가) 합창을 통해 그날의 조율을 한다. 나는 딱 한번 아침 모임에 나가봤는데 짤막한 불어(또는 라틴어) 성가를 화음을 넣어서 반복적으로 부르는 것이 마치 불교에서 만트라를 외우는 의식과 흡사했다.

2. 에너지 및 자원 재활용

핀드혼 공동체의 동녘 벌판 끝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하나 외로이 서있다. 이곳은 바닷가라 해풍과 육풍이 번갈아 불어서 풍력 발전에 유리하다. 그러나 아직 설치비가 많이 들어 대중화되고 있지는 못하다. 이 발전기는 75 킬로와트 짜리인데 이것하나로 공동체 사용전력의 20%를 충당하고 있다. 이 밖에 에코하우스 자체의 방열효과(스코트랜드 표준보다 2.5배 우수)와 몇 군데 설치되어 있는 태양전지, 그리고 자체 숲에서 나오는 땔감나무 등을 다 합하여 현재 재활용 에너지의 비율은 28%에 그치고 있다. 에코 빌리지 프로젝트에 의하면 앞으로 6년 내에 이 비율을 80-90%로 끌어올리겠다고 한다.

캬라반 파크 남쪽 끝에 가면 공동체가 자랑하는 ‘리빙머신’(Living Machine)을 만나게 된다. 리빙머신은 수생식물과 미생물, 박테리아 등을 이용한 하수처리 시설을 말한다. 리빙머신이 설치되어 있는 그린하우스 안에 들어서니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입구에 캐나다 국기가 보이기에 안내인에게 왜 저걸 걸어놨냐고 물으니 이 리빙머신의 발명자인 존 토드가 캐나다 사람이라서 그랬단다. 아하, 그러구 보니 핀드혼의 리빙머신은 달포 전에 슈마허 대학에서 에코 디자인 강의시간에 슬라이드로 본 것이다. 존 토드 교수의 발명품을 여기서 또 만나게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그는 이곳의 리빙머신 설치 작업을 지도하고 오프닝 세리머니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이 시설은 하루에 300명분의 하수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하니 공동체에서 배출되는 하수는 거의 다 처리하고 있는 셈이다.

하우스 안은 탱크에 담겨있는 각종 수생식물들이 뿜어내는 향기로 인하여(특히 수생 페퍼민트를 많이 심어 놓았다) 하수처리장이 아니라 아늑한 온실 같다. 첫 탱크에는 물 흡수력이 왕성한 버드나무와 이파리가 무성한 열대 수중식물들을 심어 놓았다. 중간에 개구리밥만 잔뜩 덮여있는 탱크의 물을 손으로 휘저어 보니 물벼룩이 바글바글하다. 물벼룩은 미세한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개구리밥으로 덮어놓은 것은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물의 부영양화를 막기 위해서 이다. 마지막 탱크에서 나오는 물이 담겨있는 조그만 연못에는 물 달팽이와 방게가 노닐고 있다.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물을 떠서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비벼본다. 깨끗하기는 한데 아직 세수를 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벼과 식물을 이용한 마지막 단계를 하나 더 거쳐야 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 물을 채소재배에 쓰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는 그 옛날 청계천 더러운 물로 채소를 길러 먹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서는 정화된 물을 그냥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치 상 공동체 농장이 리빙머신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안내인에 의하면 조만간 이 물을 활용할 방도를 찾아낼 것이라고. 그는 내가 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와서는 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더니 수도가로 데리고 가서 손을 씻으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정화된 물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그는 규정상 방문객이 물을 못 만지게 하니 이해하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만의 하나라도 이 물로 인하여 사고라도 난다면 리빙머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기에 그런 규정을 만들어놓은 것 같다.

3. 공동체 농장

핀드혼 공동체에 늘 신선한 식품을 공급하는 농장은 두 군데가 있다. 채소를 생산하는 컬런농장(Cullerne Garden)은 공동체 단지 안에 있고, 계란과 우유 등을 생산하는 목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이들 농장은 유기농법(Organic Farming) 혹은 바이오다이나믹 농법 (Biodinamic Agriculture)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 농법의 특징은 무농약, 자연산 퇴비 사용, 적절한 윤작 및 병작, 생물 다양성의 존중, 공동 노동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아직도 이들이 개척해야할 분야가 한 두 군데 더 남아있다. 한번은 농장에 실습을 나가서 콩 수확과 제초작업을 했다. 풀을 뽑으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기존 작물 사이에 난 풀들을 보니 일부를 빼고 거의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제초작업은 거의 기쁨이라곤 느끼기 힘든 강제노동 비슷하다. 만약 자신이 먹기 위해서 이 풀들을 뽑는다고 생각하면 일석이조일 뿐 아니라 일도 힘든 줄 모르고 하게된다. 나는 제초작업을 할 때 늘 바구니를 두개 들고 하나에는 먹을 수 있는 풀을, 다른 하나에는 먹을 수 없는 풀을 뽑아 담는다.”

그들은 기발한 생각이라며 신기해 했지만 실제로 해볼 엄두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밭에 난 ‘잡초’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후조건 아래서 땅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난 것이다. 가령 땅에 필요한 특정 요소를 ‘잡초’를 통하여 조달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땅에 필요한 특정 생물을 유인하기 위해 ‘잡초’를 내었다든지 하는. 아무튼 자연상태에서 자라난 어떠한 풀들도 고정관념에 의하여 함부로 제거하는 것은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도 이곳의 온실은 생물 다양성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 온실 안에 되도록 여러 가지 작물을 기능적으로 배치하여 심어 놓았다. 토마토 온실의 경우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 향기가 짙은 허브를 사이사이에 심어 놓았으며, 온실 한쪽 구석에는 작은 연못까지 만들어서 식물과 작은 생물들 사이의 상호교류를 꾀하였다.

나는 이 날 콩을 수확하면서 ‘브로드 빈’(Bread Bean)을 처음 보았는데 대단히 유용한 작물 같았다. 콩깍지 길이가 다 자라면 아이 팔뚝 만하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하도 커서 징그러운 마음에 먹고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덜 익은 브로드 빈을 날로 먹어보니 향긋하고 달콤한게 맛이 그만이다. 희안하게도 콩 비린내가 전혀 없다. 콩이 크니 자라기도 빨리 자라 콩대가 부드러운 것이 녹비식물로도 적격이다. 게다가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뿌리혹 박테리아 식물이 아닌가. 나는 이 작물만큼은 우리 나라에 도입하고 싶다. 어쩌면 이미 국내 슈퍼마켓에 나와 있는지도 모르지.

핀드혼 농장의 주된 노동력은 공동체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다. 영국의 일반 농장들은 자원노동의 대가로 숙식을 제공하는데, 이곳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부려먹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한다 싶지만 모두들 자기가 좋아서 기꺼이 돈 내고 일해주며 배우는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공동노동을 통해 ‘대안 농법’(Alternative Agriculture)을 배우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몸에 익힌다. 아직까지는 핀드혼에 노동력이 고갈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4. 지속가능한 경제

핀드혼 공동체는 35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 오면서 주변에 40개가 넘는 사업체를 만들어 내었다. 이들은 공동체(Findhorn Foundation)의 직접 지배아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다수가 독립된 사업체로 되어있다. 공동체 운영자들은 공동체의 비대화와 그에 따른 관료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업체들의 독립을 적극 유도하고 있다. 지금 영국에는 ’Green Business‘ 혹은 ’Ecological Economy‘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현실적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Green Capitalism 이다. 그린 캐피탈리즘은 자본주의를 여하히 에콜로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재편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비록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이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나는 여기서 이 논쟁들을 소개할 여유도 능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가진 미래에 대한 비젼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다. 어떤이는 남의 비젼을 비판하는 것에 온 힘을 쏟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남의 비젼을 쫒아만 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한다. 칠 팔십년대에 우리는 소위 ’사회과학‘ 학습을 통하여 비젼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일정한 조건 아래서 행해진 ’주입식 교육‘과 같은 것이었다. 혹은 ’분단‘ 과 ’독재‘ 라는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한정된 비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21세기에 우리가 가져야할 비젼은 언어와 논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뭔가 천지와의 교감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핀드혼 공동체의 모든 사업체는 에콜로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운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령 사업의 지역적 완결성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다든지, 사업장 내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한다든지 혹은 지역화폐운동(LETS)이나 공동체 은행, 윤리적 투자 등과 같은 대안적 경제행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렇다. 공동체 내의 경제행위를 일일이 알아볼 만큼 나의 체류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아래에 공동체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사업체들의 이름만 열거해 보겠다.

*Phoenix Community Stores 핀드혼 지역의 공동체 상점
*Phoenix Bakery 오르가닉 제빵
*Findhorn Press 출판사
*Findhorn Flower Essence 향기요법(Aroma Therapy)의 연구개발 및 판매
*Wind Park 풍력발전사업
*Findhorn Bay Housing Company 택지개발 및 건축
*Gnosis 콤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및 운영에 대한 상담
*Trees for Life 스코트랜드 산림 재생 사업
*Moray Steiner School 스타이너 어린이 학교
*Minton House 휴양 및 워크샾 센터
*Newbolt House 휴양 및 워크샾
*Health Works 대안의학센터
*Findhorn Center for the Arts 미술 창작
*Findhorn Crafts Association 공예, 도예, 직조 등
*Eco-Village Ltd 에코 디자인, 에코 하우징
*Ecopia Project 소비자 협동조합, 공동체 은행 등
*Ecologia Trust 러시아 공동체와 프로그램 교환

핀드혼 공동체에는 지금도 새로운 사업체와 프로젝트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공동체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려는 움직임이다. 근자에 진행되고 새로운 사업 중에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핀드혼 대학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이다. 이 문제는 워낙에 덩지가 큰 사업이라서 아직도 내부에서 찬반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속 가능한 지역 공동체의 건설”에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 사업체들 중 공동체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피닉스 코뮤니티 상점 하나만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피닉스는 내가 지금까지 다녀 본 이런 종류의 상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번성하는 상점이다. 취급하고 있는 품목과 수량에 비해 건물이 너무 협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진열된 상품 중 상당수는 자체 생산품이다. 오르가닉 식품이나 책, 공예품 등이 그렇다.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공동체내의 주요 소식을 전하는 게시판이 나온다. 정면에서 볼 때 왼편에 책, 중앙에 공예품 오른쪽에 식품 순으로 진열해 놓았다. 서가의 북 콜렉션이 적어도 뉴 에이지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핀드혼이 오랫동안 스피리츄얼 공동체(Spiritual Community)로 명성을 누려왔다는 사실이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밖의 분야도 콜렉션이 대단한 수준이다. 나는 서가에서만 이틀 오후를 보냈다. 서가 한 켠에는 각종 CD와 테이프가 있는데 정리가 제대로 안되어 어수선하다. (그래도 매상고는 서적과 비슷한 수준이란다) 공예품 중 상당수는 Fair Trade(제3세계 상품을 제값 매겨서 수입하는 운동)를 통해 들여온 제3세계 상품이다. 오른쪽 안으로 들어가니 대체의약품 코너가 있는데 그 가짓수와 물량에 압도당할 지경이다. 대체의학 관련서적도 빼곡이 꽂아 놓았다. 공동체 안에 아로마 세라피(향기요법) 센터와 대체의학센터가 있어서 이 분야에 관련된 상품이 특별히 많은 듯했다. 식료품은 거의가 ‘오르가닉’을 취급한다. 자체 생산물 뿐 아니라 스코트랜드 인근의 지연식품들도 이곳에서 취급한다. 바로 옆 건물엔 오르가닉 제빵(베이커리)이 있는데 거기서 구워낸 빵으로 공동체 식구들의 대부분을 먹여 살리는 것은 물론 주말에는 지역에 있는 농가 직거래 장터에 가서 하루에 1200개나 팔고 온단다.

지금 피닉스는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다. 날로 성장하는 상점을 확대하는 일과 상점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일이다. 피닉스는 작년에 처음으로 매상고 백만 파운드를 기록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중에 순수익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들은 수익의 1/10을 지역의 공동체 및 교육 사업지원을 위해 기부한다고 한다. 상점의 확대는 지금의 추세로 보아 불가피해 보인다. 사실 가게 안을 돌아다니기가 너무 비좁다. 또 하나 문제는 상점의 일꾼들이 번창하는 사업으로 인해 노동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공동체 생활의 기본 철학 중의 하나는 되도록 적게 일하고 검소하게 살되 보다 많은 창조적인 시간을 가지자는 것인데 사업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자니 원래의 순수한 의미가 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 지금까지 피닉스는 공동체 재단(Findhorn Foundation)의 단독 소유였으나 수년 전부터 물밑 작업을 계속해와 이제 곧 상점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 즉 종업원, 재단 관계자. 소비자, 공급자, 후원자 등이 모두 참여하는 ‘협동조합 소유’(Co-operative Ownership or Community Ownership) 로 전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정으로 이름에 걸맞는 ‘공동체 상점’이 되는 것이다.

5. 에코 빌리지 트레이닝

핀드혼 공동체는 지난 20년간의 에코 빌리지 경험을 바탕으로 에코 빌리지 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달 코스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 교육 프로그램은 내용이 알찰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참석자들의 다양한 정보교환으로도 인기가 높다. 커리큘럼을 들여다보면 생태 공동체 건설을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를 소화하기엔 한 달이라는 기간이 너무 짧지만 참석자들의 대부분이 활동가들이므로 인트로덕션 혹은 방향전환의 계기로서 아주 좋은 프로그램으로 보여진다. 나는 너무 늦게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게되어 시기를 놓쳤지만(매년 2월중에 시작) 언젠가는 꼭 한번 참여하고자 하는 꿈을 접어두고 있다. 참고 삼아 여기에 9개의 과목으로 짜여진 커리큘럼을 소개한다.

*Eco-Villages and the Emerging Paradigm
*Building Effective Groups: Democracy, Empowerment and Creativity
*Permaculture-Design for Sustainability
*Earthshare: food, Farming and Community
*Towards s Social Economy
*Fundraising & Networking
*Building for the New Millennium
*The Healing Power of Community
*Deep Ecology, Wilderness & Ecological Restoration

희망 섞인 사족을 붙이자면, 국내 사회운동단체에서 젊고 유능한 일꾼들을 선발하여 이런 곳으로 해외연수 기회를 주게되면 개인으로 뿐 아니라 운동차원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비유럽 지역 참가자들에게는 잘만 이야기하면 공동체로부터 얼마든지 교육비 보조를 받아낼 수도 있다.


핀드혼 공동체 2

에코 빌리지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다시 나의 개인적인 핀드혼 경험을 얘기해야겠다. 핀드혼은 북쪽과 서쪽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변마을이다. 마을 중간쯤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고 나머지는 거의 평평한 사구(Sand Dune)로 되어있다. 핀드혼을 둘러보는 첫 날. 마을에서 동떨어진 풍력 발전기에서 바닷가로 나아가는 길이다. 중간에 광대한 지역이 모두 고스(Gorse) 라는 나무로 채워져 있다. 이 나무는 영국의 해안가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일종의 침엽수로서 나뭇잎이 그야말로 바늘 끝 같다. 다 자라야 사람 키만큼 밖에 안 큰다. 이 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도무지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사람이 접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식물들도 이 나무들 속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 정말 징그러운 나무다. 나는 이 나무에 고슴도치 나무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봄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일제히 노란 꽃을 피워대는 것이 정말 장관이다. 이 곳의 고스숲에는 잔디풀이 굉장히 잘 발달되어 있는데 얼마나 오랜 세월 나고 죽고 또 났는지 푹신하기가 응접실의 소파 저리가라다. 발로 쾅쾅 밟아 보아도 땅바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위에 똥그란 토끼 똥이 엄청나게 깔려있다. 토끼가 똥을 얼마나 많이 싸는지 토끼를 길러봐서 잘 안다. 핀드혼 일대엔 정말로 토끼가 많다. 토끼들 등쌀에 이 곳의 정원은 모두 이중 삼중의 철조망을 쳐 놓았다.

고스 숲을 지나니 갑자기 일망무제의 황무지가 나타난다. 황무지라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칼라풀하다. 스코트랜드 특유의 헤더(Heather) 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사철나무 비슷한데 잎 크기가 사철나무 잎의 1/4도 안되고 가지 끝에는 코딱지 만한 분홍색 꽃이 잘잘하니 맺혀있다. 키가 겨우 발목 근처에나 올까말까할 이것이 둥글둥글 무리를 지어 온 사구를 뒤덮었는데, 처음 이 광경을 마주치는 순간 숨이 헉하고 막히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야생의 들판(Wilderness) 이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 주변에 이런 ‘윌더니스’가 있다니! 이 헤더들판은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사구의 굴곡이 심해짐에 따라 더욱 현란한 장관을 연출한다. 나는 이후로도 심심하면 찾아와서 이 황량한 아름다움에 젖어있곤 하였다.

바닷가에 이르면 모래사장이 한없이 길게 뻗어있다. 이렇게 좋은 모래사장이 있어도 수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나 긴 해안선 중간쯤에 접근불허의 철조망이 나란히 달리고 있어 가까이 가보니 군용 비행장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유엔군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 한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있냐고 물으니 이 근방에서 핀드혼 지역이 가장 맑은 날이 많기 때문이란다. 장자의 말이 딱 맞는다. 쓸모가 많은 놈은 제 명에 못 산다더니. 핀드혼은 이 놈의 비행장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인상을 찡그리고 살아야 한다. 물론 살다보면 이골이야 나겠지만, 학창시절 비행장 옆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나로서는 어찌하여 공동체 설립자들이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이 비행장은 때때로 평상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굉음을 낼 때가 있는데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면 아마도 전시에나 만들어졌음직한 거대한 구형 수송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 타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나이지만 그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과연 저들이 누구로부터 저렇게 산천초목이 벌벌 떨 정도로 소음을 내어도 좋다는 권리를 부여받았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하늘의 무법자요 독재자다. 어느 나라엘 가든 군대는 성역이다. 거기엔 에콜로지고 이웃이고 간에 없다. 논리는 간단하다. 나라가 침공 당하면 생태환경이고 이웃이고 간에 보존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여기 핀드혼 해변가에는 저 군인들의 오만한 사고방식이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초라하게 나자빠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2차 대전 중 이곳의 군인들은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해안가에 콘크리트 방벽을 세우고 곳곳에 토치카를 세워 놓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파도에 의한 해안침식으로 인하여 모두 무너져 내려서 지금은 모래사장 위에 군데군데 머리만 내밀고 있다. 마치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하다. 문명의 최고수준을 뽐내던 ‘위대한’ 미국의 상징이었던 ‘자유의 여신상’이 해변 모래사장 위에 반쯤 파묻혀 있는...

민톤 하우스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며 4일을 보냈다. 오랜 떠돌이 생활에 지친 내게는 정말 꿀맛 같은 휴식이다. 이제 워크샾 날짜가 닥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방을 비워야만 한다. 아침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웬 젊은이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아니 다가온게 아니라 이 집에서 일을하고 있는 일본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끼어든 것이다. 파비오라고 자기이름을 밝히면서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이스라엘 키브츠에도 좀 있다가 인도의 한 아쉬람에서 6개월을 보낸 뒤 이리로 온 것이라고 한다. 오늘 핀드혼을 떠난단다. 스위스로 돌아가면 농사일에 도전해 보겠다고 자기 포부를 말한다. 나도 농사를 짓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친해진 것처럼 이것저것 물어본다. 밖에서 택시 경적소리가 나니까 부랴부랴 가방을 열더니 메모지에다 자기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고 스위스에 오거든 연락하라고 한다. 그리고는 핀드혼 공동체 역사를 다룬 책 한권을 선믈로 준다. 전날 책방에서 살까말까하고 망설이다가 그만둔 책이다. 나도 밥 먹고 바로 나가야한다니까 친절하게도 주인여자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며 B&B(Bed & Breakfast) 한집을 가르쳐 준다. 고맙다고 말할 사이도 없이 짐을 들고 나가버린다. 만난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친절이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해 본다. 확실히 핀드혼에는 무언가 베풀고싶어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짐을 싸 가지고 체크아웃을 하는데 데스크에서 공동체 단지 내에 있는 B&B 한군데를 또 가르쳐 준다. 아무 생각 없이 두 번째 가르쳐준 집으로 가기로 한다. 무거운 짐을 낑낑거리고 들고나오니까 매니저가 와서는 자기 차로 가는 곳까지 태워주겠단다. 이런 고마울 데가! 가보니 피닉스 상점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단독 주택이다. 조금 전에 전화하고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 대신 문 앞에 키가 꽂혀 있고 그 위로 메모지가 하나 붙어있다. 결혼식에 가기 때문에 집을 비우니 오른쪽 방에 짐을 풀고 마음놓고 지내란다. 들어가 보니 작은 방이 세 개 있는데 그 중에 2개를 손님방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거실 소파에 앉아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니 거의 모두가 신비주의에 관한 것들이다.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걸려있는데 지형이 좀 이상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언가가 그린 미래의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에 의하면 미국은 서부지역이 완전히 물에 잠기고 아프리카도 절반이 날아간다. 제일 타격이 심한 나라는 러시아다. 거의 80%가 물에 잠긴다. 우리 나라도 절반쯤은 날아간다. 대신 바다 여기저기에 새로운 대륙이 생겨난다. 내가 읽은 한국 예언가들의 예측과는 사뭇 다르다. 한가지, 다가올 미래에 무언가 엄청난 지질학적 변동이 있다는 점만은 같다. 재미있는 집에 온 것 같다. 주인 없는 집에 혼자 있기가 뭣하여 나도 메모를 남겨놓고 나가버렸다.

밖에서 저녁식사까지 해결하고 집에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 Mo Willet. 핀드혼 주민 협의회(Council) 주요 멤버로 7년째 이곳에서 살고있는 ‘고참’이다. 말씀이나 행동을 보면 전혀 신비주의에 탐닉할 분 같지가 않다. 행동이 거침없고 활달하다. 살아온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굉장히 모험심이 강한 분이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아온 궤적의 편린들로 장식해 놓았다. 한쪽 다리를 약간 전다. 젊었을 때 테니스를 잘 쳐서 직업운동선수로 나가려고 하였단다. 자신의 이름 Mo도 그 무렵 윔블던 대회 최연소 우승기록을 세웠던 여자선수의 이름을 따서 고쳤단다. 그는 지역대회에서 우승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윔블던 구장에 섰단다. 그런데 신은 그에게 다른 길을 예비해 놓으신 모양이다. 첫 게임에서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그 뒤로 수술을 여러 번 하였건만 결국은 다리를 약간 절게 되었단다. 결혼 두 번에 아이들 셋을 낳아 다들 보내버리고 7년전부터 혼자 이곳에 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 도중 전화가 와서 기다리는 사이 탁자 위에 놓인 잡지들을 들춰본다. 역시 대부분 UFO 나 초능력 따위의 신비주의 관련 잡지들이다. 그 속에 낯익은 잡지가 하나 눈에 띈다. Amnesty. 이 분의 관심이 다양한 것은 알겠는데 엠네스티 활동까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잡지를 손에 들고 물었다. “혹시 엠네스티 회원이십니까?”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집회활동은 못하고 이렇게 뉴스레터나 받고 있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간단히 내 소개를 한다. 십사년 간 옥살이를 한 정치수 출신이며 국제 엠네스티 초청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반색을 한다. 갑자기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가족을 대하듯 애틋한 정이 넘쳐흐른다. 그 동안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것저것 묻는다. 얘기를 대충 듣고 난 그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요청을 한다. 당신의 얘기를 이 곳 공동체 식구들에게 들려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엠네스티와 관련하여 이런 요청을 받으면 거절을 할 수가 없다. 그 동안 엠네스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둘째로 치고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제3세계의 수많은 양심수들을 생각하면 내게 시간과 능력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든 해야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이러한 모임을 가져봤기에 나의 발언이 제3세계 현실과는 십만팔천리 떨어져 있는 서구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러겠노라고 수락했다.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냐고 묻는다. 나는 나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고 에코빌리지를 둘러보고 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왔다고 말한다. 프로그램 등록은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미 며칠 전에 대금 지불을 포함하여 등록 절차를 마쳤다. 그는 나 같은 경우 참가비 면제를 받을 수 있다며 자기가 환불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단다. 그러더니 사방에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대충 낌새를 보니 저쪽에서 굉장히 난감해 하는 것 같다. 이미 지불이 완료된 것인데 다른 방식으로도 나를 도울 수있을 것이니 제발 그만 두라고 사정을 한다. 할 수 없다는 듯 그제야 수화기를 놓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또 하나의 작은 방에 묵고 있는 데런이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삼십대 중반 무렵의 지적으로 생긴 웨일즈 출신 여자이다. 현재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사회사업을 하는 활동가이다. 주로 하는 일은 여성들의 의식개발과 지위향상에 관련된 것이란다. 자기를 포함하여 친구 몇몇이 조그만 자선사업단체(Charity)를 조직하여 외부의 도움 없이 현지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카드를 그려 팔아서 그 돈으로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단다. 대단한 여성들이다. 현재 영국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있으며 시월이면 다시 감비아로 간단다. 피곤해 보이는 Mo가 먼저 침실로 간 뒤에도 밤늦도록 데런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날 오후 바닷가 산책을 갔다오니 모의 집에 손님 두 사람이 와 있다. 인사를 나눴다. 제레미와 엠마. 모두들 십여년 넘게 산 고참들이다. 둘 다 공동체와 외부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고 있단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대외창구인 셈이다. 이들은 무언가 흥미로운 껀수를 감춰들고 왔는지 싱글싱글하며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제레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내가 한국 TV에 방영되어도 괜찮으냐는 것이다. 이게 무슨 아닌 밤에 홍두깨인가 싶어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고 다그친다. 자기네들에게도 놀라운 우연의 일치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자기들이 기억하기에 내가 핀드혼에 찾아온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후 만난 모든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주에 한국 국영 TV 촬영팀이 이곳에 올 것이며 또 그 주말에는 한국 기독교 선교단체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란다. 한국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안 비치던 곳에 한꺼번에 세 무리의 한국사람들이 들이닥치게 되니 기가막힌 우연이라는 것이다. 전에도 나라마다 이런 바람이 불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웨이브(Wave) 라는 단어를 썼는데, 전에도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Japanese Wave, Brazilian Wave, Spanish Wave가 밀어 닥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물결이 한번 몰아 닥친 이후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그 나라 말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게 되었단다)
이제는 코리안 웨이브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냐며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그건 그렇구, 그들은 한국의 촬영팀이 오게되면 이 곳의 어디를 안내해야 할지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가 이곳에서  공동체 체험하는 장면을 찍고 한국말로 인터뷰를 하면 홍보효과가 더 있을 것이라며 나에게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이다. 나는 뭐 숨어 다니는 사람도 아닌데 안 될게 뭐 있나싶어 당신들 뜻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이건 여담인데, 작년에 한국을 떠난 이래 이상하게도 TV 카메라와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네덜란드에서는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일단의 광고방송 촬영팀에게 붙들려서 본의 아니게 새로 개발한 콤퓨터 소프트웨어 제품을 광고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한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특이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노르웨이에서는 TV에 나가 어벙벙한 표정으로 토크쇼까지 하였고, 슈마허 대학에서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국 BBC 촬영팀이 와서 학교 생활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찍어갔다. 무슨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았는데 확인을 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이번엔 한국 티브이가 여기까지?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들 말에 의하면 아직까지 핀드혼 교육관에서 행해지는 교육 프로그램 내부를 외부에 공개해 본 적이 없다는 것과 한국 촬영팀의 촬영의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미리 날짜를 당겨서 결말을 이야기하겠다. 공동체 스태프들이 내가 속해 있는 그룹에 와서 촬영협조를 부탁하자 그룹 성원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절반쯤은 상관없다는 의견이고 나머지는 거부의사를 표시한다. 이것은 내용상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이므로 외부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논의를 시작할 때 반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결론은 자명하다. 이 사실이 통고된 후 나는 우연히-그러나 내 생각엔 교육생의 일정을 잘 알고 있는 스태프들이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핀드혼 코뮤니티 식당에서 KBS 촬영팀과 마주쳤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일주일에 하루 날 정해서 하는 ‘침묵의 식사’ 시간이었다. 이역만리 오지(?) 에서 동포를 만났는데 말도 못하고 눈인사만 나눈 채 묵묵히 밥을 먹는 모습이 마치 어색하게 연출된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서야 겨우 통성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나의 이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공동체 스태프들이 다 얘기한 모양이다. PD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건넨 젊은 친구가 묻는다. “내일 모래 여기서 기자회견을 하신다면서요?” 오잉! 왠 기자회견? “기자회견이 아니라 공동체 사람들의 초청에 의하여 제가 감옥에서 겪었던 정신적, 심리적 변화과정을 이 곳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들은 KBS 의 ‘세계는 지금’ 이라는 프로를 제작하고 있는데 얼마 전 에딘버러 페스티발을 다녀왔단다. 여기에 와서는 에코빌리지 취재를 마쳤으며 이제 북 아일랜드에 가서 한가지만 더 취재하고는 돌아갈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이곳의 사는 모습이 밖의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오고 그러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변함없는 매일의 일과 속에서 ‘신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라고 말해주고 프로그램 일정에 쫒겨 간단한 눈인사만 나눈 채 식당을 빠져 나왔다.


핀드혼 체험기 3

핀드혼에서는 공동체 생활 체험과 내면세계 탐구에 관한 교육 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운영하고 있다. 모두 7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Experience Week 이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다른 코스를 하기 전에 먼저 이 코스를 밟도록 권장하고 있다. 사실 현재 핀드혼 공동체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코스를 마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들은 공동체 체험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동시에 완전한 공동체 성원이 되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모든 프로그램이 유료이므로 결국 핀드혼 공동체 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투자를 해야만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공동체 성원 충당과 비지니스를 교묘히 결합시켜 놓았다. 해마다 쉰개 이상의 나라에서 온 4천여명이 프로그램에 등록한다고 하니 대단한 ‘장사’이다. 회계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핀드혼 공동체를 운영하는 자금의 80%가 이들 학생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프로그램은 매주 토요일에 시작해서 일주일 뒤인 금요일에 끝난다. 금요일 저녁에는 교체되는 참가자들로 인해 조금 번잡스럽다. 그날 못 떠난 사람들은 하루를 더 묵고 다음 날 떠나기도 한다. 첫 날 저녁이었다. 방에 짐을 풀어놓고 근방을 한번 둘러보려고 문을 나섰다. 이 교육장은 예전에 호텔이었던 것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서 건물 자체가 운치도 있고 주변경치도 괜찮다. 바로 앞의 골프장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 눈앞이 시원하다. 나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웬 젊은 여자가 다가와 담배 한 대만 줄 수 없냐고 묻는다. 호젓한 저녁에 말동무가 생겼구나 싶어서 두말 않고 주었다. 불을 붙여주고 나서 애연가이시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원래 안 피운단다. 그런데 왜? 이유인즉슨 이렇다. 자기는 어제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자인데 자기에게 닥친 쇼크가 하도 커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중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담배라도 한번 피우면 좀 가라앉으려나 하고 청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속으로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까지 심각한가? 하고 내심 놀란다. 시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이런 류의 인성훈련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아서 스스로 연구도하고 후배들과 함께 실험도 해보는 등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이 많아 그다지 큰 기대는 않고 있었다. 그저 이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하나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얘기를 대충 들으니 한번도 이런 경험이 없는, 특히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이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공동체 체험이 충격이 될 법도 하였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주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프로그램 참가자 전원의 상견례가 있었다. 우리 그룹은 26명인데 남자라곤 나를 포함해 셋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은 대부분 일터에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이런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확실히 여자가 남자보다 더 내면세계의 탐구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은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외면세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는지도 모르겠다. 참석자들을 국가 별로 보니 참으로 다양했다; 독일, 스위스, 미국, 일본, 이태리, 덴마크, 네덜란드, 잉글리시, 그리고 한국. 일본 참가자가 넷씩이나 되었다. 둘은 나이든 아줌마이고 둘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 1년생이다. 내가 잉글리시를 따로 적었는데 이곳은 스코트란드이기때문에 같은 영국이라도 서로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26명중에 영국사람은 겨우 둘밖에 안 된다. 이것은 곧 핀드혼 공동체가 국내에서 보다 해외에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돌아가면서 죽 자기 소개를 한다. 나이와 직업, 사회적 배경이 각양각색이다. 재미있게도 전에 참가했던 자신의 엄마가 권고해서 왔다는 사람이 둘이나 되었다. 이곳에 참가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언가 자기 삶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모색해 보려는 동기가 강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비싼 돈주고 이렇게 먼 곳에까지 올 리가 없다. 소개를 하던 중 일본에서 온 학생 차례에서 문제가 생겼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것이다. 유카라는 여학생은 고교시절 미국에서 좀 살았기 때문에 상당히 말을 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인 아이미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 유카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기소개를 마친 아이미는 이 일로 인하여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프로그램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이렇다. 대개 오전에는 공동체내의 여러 작업반에 할당되어 일을 한다; 건물청소, 정원관리, 식사준비 및 설거지, 농장관리 등이 그것이다. 사실상 핀드혼 공동체의 유지관리는 돈 내고 참가한 교육생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후에는 주로 건물 안에서 여러 가지 인성훈련 프로그램이 행해졌다. 저녁시간에는 인성훈련과 함께 초청강사 시간이 있다. 짧은 기간에 여러 가지를 하다보니 시간표가 상당히 빡빡한 게 사실이다. 여기에다 프로그램 하나 하나를 다 말할 수는 없고 그중 인상깊었던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소개하겠다.

둘쨋날 오전에 ‘영적인 춤’ (Sacred Dance) 이란 프로그램을 마치고 명상의 집에 모여 ‘천사의 명상’ (Angel Meditation)이라는 시간을 가졌다. ‘천사’ 라고 하면 비기독교 전통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선 개념이지만 서구인들에게는 마치 우리의 삼신할미처럼 친근한 존재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천사학’ (Angelology)이라는 학문분과가 있을 정도이다. 천사는 핀드혼 공동체에서 ‘안내하는 정령’ (Guide Spirit)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가이드 스피릿’인 천사에게 먼저 신고하고 도움을 청한다. 굳이 이들을 분류하자면 ‘정령숭배자“ (Animist) 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자연물과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정령이 있음을 믿고  이 정령들과의 교신과 조화를 통해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진기한 것이,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대부분 애니미스트인 ’이방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켜 왔는데 오백년이 지난 지금 서양 기독교의 본고장에서는 애니미즘이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20세기 들어와 일기 시작한 ’에콜로지 운동‘과도 연관이 되어있어 간단히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좌우간, 명상의 방에 들어가 빙 둘러앉으니 한 가운데에 천사 그림이 새겨진 카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듯 각자 카드 하나씩을 뽑아든다. 카드의 뒷면에는 상징적인 단어가 한마디씩 적혀 있다. 그 카드를 가지고 한참동안 명상에 잠긴 뒤 천사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뽑은 카드에는  ‘Purification‘ (정화)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비교적 초반에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내 바로 앞 차례의 여자가 우는 바람에 이후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 여자는 심리치료사인데 정작 자신의 심리는 치료하지 못하여 여기에 와서 울면서 그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나는 ’정화‘ 라는 단어를 입력시켜 놓고 어떤 느낌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어 말하는 그 순간까지 내 마음은 지극히 담담했고 평화로웠다. 나는 ’정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새겼다. “감옥에 있을 적에 내 생활은 지극히 단조롭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했다. 그러나 출옥 후 일년이 지나는 동안 잡다한 세상일을 겪으면서 내 마음은 상당히 오염이 되었다. 오늘 나의 ’안내 천사‘는 내게 정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그런데 말머리에서 “지극히 단조로웠고... ”를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고 감정이 북받히면서 목이 메이는 것이었다. 나중엔 눈물까지 줄줄 흘렀다. 사실 이것은 전혀 슬픈 내용이 아니다. 어디에서고 덤덤히 진술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스러울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정말로 어떤 아지못할 힘에 의해 정화의 작용이 일어난 것일까? 어쩌면 내가 아직도 그 시절의 어려웠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뒤의 모든 참석자들도 자기 느낌을 얘기하면서 하나같이 흐느꼈다. 들어보니 별로 슬픈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다. 눈물은 참으로 감염력이 대단하다. 특히나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드러내 보일 때는 더욱.

세쨋날은 내용도 가장 충실했고 그만큼 새로운 경험도 많이 했다. 오전에 한 ‘Group Discovery Game'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Unfolding Game'이라는 것으로서 서로 짝을 지어 상처받아 웅크리고 있는 상대방을 부드러운 마사지와 가벼운 접촉으로 ‘풀어주는’ (unfolding) 게임이다. 몇몇 참가자는 이 게임을 거부하기도 했다. 잘 모르는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서구인들은 개방적인 연애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몸에 타인의 손길이 와 닫는 것은 지극히 꺼린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개방적인 연애는 못하지만 신체접촉에 있어서는 오히려 관대한 측면이 있다. 내 짝은 7년전에 남편과 사별했다는 예순 넘은 독일 할머니(?)가 되었다. 젊은 여자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중에 가장 노인네와 짝이 되었나하며 운도 되게 없다고 내심 서운해했지만 끝나고 나서 보니 정말 좋은 파트너를 만났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먼저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분은 마루바닥에 마치 누에고치처럼 옹크리고 모로 누웠다. 나는 먼저 발부터 시작하여 부드러운 마사지로 전신의 기혈을 풀어주면서 팔다리를 하나씩 편한 자세로 옮기어 놓았다. 나이 드신 분이라 오히려 마음 편하게 ‘만질’ 수 있었다. 마지막엔 상체를 일으켜 앉힌 다음 뒤에서 포옹을 한 채 한참을 있었다. 이번에 자리를 바꾸어 내가 상처받은 짐승이 되었다. 그분도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풀어나갔지만 조금 달랐던 것은 발 마사지에 특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 점이다. 발 마사지는 신체접촉 부위가 가장 작은 부위이지만 그 효과는 가장 탁월하다. 이런 것을 알고 또 잘 할 수 있는 젊은 여자는 별로 없다. 그분은 노련한 솜씨로 발의 이곳저곳을 주물러주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발이 풀리니까 손발은 저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서로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고 결과 또한 만족스러웠다. 그후로 이 독일 할머니는 나만 보면 “내 파트너!” 하시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날 저녁 총괄시간에 많은 참가자들은 이 게임이 무척 당혹스러웠다고 토로하였다. 우리가 서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성 개방 풍조나 번창하는 포르노 산업을 보고 이들의 신체에 대한 관념이 대단히 개방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오히려 신체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한 그들의 관념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역설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개방’은 단순히 자신의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개방’은 ‘나‘와 ’나 아닌 것‘과의 동등한 결합 내지는 교류를 의미한다. 이것은 ’나 아닌 것‘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서구인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철저한 ’사유화‘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유화‘에 대한 관념을 갈고 닦아 왔다. 먼저 자연물을 사유화하고, 다음은 거기서 생산된 생산물을 사유화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체와 정신마저 배타적으로 사유화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구조아래서 무제한적 상거래니 지적재산권이니 하는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들의 배타적인 소유권이 포기되는 경우는 오직 그에 상응하는 값(시장가격)이 지불되었을 때이다. 그 과정에 진정한 개방과 교류는 있을 자리가 없다. 가격에 일치하는 ’교환‘ 만이 있을 뿐이다. 신체적 개방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나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개방이 허락된다. 거기에 금전적 거래는 없지만 심리적 거래가 숨어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자유연애와 이혼이 빈번한 것은 ’배타적 소유권에 기초한 자유로운 (상)거래‘ 라는 관념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날의 게임에서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은 이들의 문화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핀드혼 프로그램에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당연시 여겨왔던 것이나 지나쳐 왔던 것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핀드혼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집단게임을 통한 인성의 변화는 이들의 중요한 연구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공통체안에 ‘게임연구소’라는 부설기관을 따로 마련했을 정도이다.

이날의 총괄시간에 영어를 잘 못하는 아이미 때문에 또 한번의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돌아가면서 혹은 자유롭게 하루의 일정을 평가하고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모두들 한 마디씩하고 난 파장 무렵에 아이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심각한 얼굴로 귀국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짧은 영어로 “나는 내일 간다” 하고는 내내 울면서 일본말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것을 옆에 있는 유카가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첫째로 의사소통이 안되어 괴롭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공부하라는 압박 속에서 살아왔는데 대학(간호대)에 들어와서도 그러한 압박은 변함이 없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으며, 이곳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현재의 자신의 상태로는 감당할 수 없어 내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인 유카를 무작정 따라왔던 터였다. 나는 그녀의 귀국발표와 관련하여 진행자의 무능력에 대해 은근히 화가 났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미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언어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도중하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겐 언어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진행자는 아이미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특별한 배려를 했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능력의 고하에 상관없이 누구나 받아들이는 공동체 정신이 아닌가. 이점은 앞으로도 핀드혼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풀어가야할 문제이다. 아이미가 울면서 말하고 있는 사이 모두들 어떡하든 위로를 해주어야겠는데 어찌할 줄을 몰라 황망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이미는 흥분해서 아까한 말을 또 반복하여 말하곤 하였다. 나는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는데 이 상태를 어떻게 해서건 부드럽게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어의 불통으로 생긴 문제는 언어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감옥에서 독학으로 익힌 일본말들을 재빨리 주워섬겼다. 벌떡 일어나 아이미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감싸쥐고 일본말로 위로해 주었다.

“아이미, 영어를 못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훌륭한 여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가더라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내 말을 들은 아이미는 어깨까지 들먹이며 더욱 섧게 우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일본 아줌마가 내 말을 또 영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나 와서는 아이미를 감싸고 저마다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날의 총괄시간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다음 날 아침 진행자는 뒤늦게나마 떠나는 아이미를 위해 환송과 축복의 댄스 마당을 마련해 주었다.

네쨋날 프로그램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국에서 활약하는 여자 풍수가가와서 지도한 ‘Landscape Temple 3'이었다. 우리말로 변역하자면 ’자연의 사원 3‘ 라고나 할까. 이것은 교육장 인근에서 가장 지기(earth energy)가 왕성한 세 군데를 돌면서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첫 번째 장소는 명상의 집 바로 앞인데 경사진 곳이라 자세가 불안정해서인지 제대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두 번째 장소가 바로 클루니 힐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그것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산꼭대기 위인데, 바로 질러가면 채 5분도 안 걸릴 거리를 산 정상까지 나선형 오솔길을 만들어 놓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에너지의 상승을 느끼도록 해놓았다. 숲 속을 헤치며 나선형 길을 따라 오르니 과연 비슷한 느낌이 오는 것 같았다. 정상에 오른 참가자들은 모두 빙 둘러서서 손에 손을 잡고 튜닝(조율)을 하기 시작했다. 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이완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구음을 내었다. 사람마다 음역이 다 다르기 때문에 계속하다보면 묘한 하머니가 연출된다. 주위의 숲과 하나가 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집단적인 구음은 계속되었다. 휘영청 밝은 달밤아래 지기가 승한 특별한 장소에서 벌이는 집단구음은 뭔지 모를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자연과 천지의 기와 스스로를 낮춘 인간들이 빚어내는 심포니였다. 이것은 우리들의 아득히 먼 조상들의 자연적인 종교(또는 주술) 행위로부터 빌려온 아이디어이다.  이 프로그램은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천지의 기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적 생명력을 일깨워주는 아주 좋은 의식으로 보여진다. 나는 돌아가면 전라도 영광 산 속에 있는 나의 농장에 명당자리를 골라 자연의 사원을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그런데 사실 풍수가 원래 그러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이미 우리에게도 있다. 다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다 보니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해서 그렇지. 우리에게 영가(詠歌)라는 전통이 있다.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우리 선비들은 승경지에서 우러나는 흥(일종의 바이오 에너지)을 시조나 노래로 풀어내었다. 영가는 가사나 말 대신에 순전히 구음으로만 자신의 흥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각 그 장소에 진동하는 천지의 기에 자신의 구음을 실어 함께 노니는 것이다. 나중에 흥이 고조되면 춤까지 덩실덩실 추며 하는 경우도 있다. 영가는 굳이 승경지가 아닌 방안에서라도 천지와의 조율을 꾀하기 위해 할 수 있다. ’자연의 사원 3‘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풍수지리적 요소(삼각형의 꼭지점을 연결하는 것-이러한 연구를 그들은 geomancy라고 부른다)와 공동체적 요소(집단구음)를 가미한 것이다. 

소경이 길을 안내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 핀드혼에서 소경이 길 안내한 얘기를 하나 들려줄까 한다. 첫날 상견례 하는 자리였다. 아주 이색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바짝 끌어안다 시피하고 문을 들어서는데 여자는 전형적인 이태리 미인처럼 생겼고 남자는 파싹 늚은 것이 무슨 중병이라도 앓고 난 사람처럼 몸 운신을 잘 못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거의 매달리다 시피한 채로 계속 뭐라고 쫑알대며 애교를 부리는 것이 둘이 애인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나는 것 같고 삼촌-조카 사이나 부녀지간으로 짐작이 갔다. 소개할 때 보니까 이들은 부부사이로서 놀랍게도 남자는 소경이었다. 그는 독일 출신이고 여자는 예측대로 이태리에서 왔다. 이름은 각각 볼프강과 키아라 (이름도 예쁘다) 이다. 말하자면 여자는 그 남자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눈 역할치고는 남이 보기에 부러울 정도로 여자의 서비스가 그만이었다. 여자의 사랑이 그만큼 지극정성이라고 보아야겠지. 며칠 지나면서 보니까 볼프강이란 남자의 인간적 흡인력과 영성이 대단하였다. 말하는 것이 부드럽고 조리정연하면서도 유머가 풍부하다. 아주 매력적인 품성을 지녔다.

공동체 훈련 코스의 다섯 번째 날은 볼프강의 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오후에 ‘Creative Space' (일종의 창작교실)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전체를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각 그룹이 합의하에 무엇이든 창작하여 나중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략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는데 첫째 그룹은 볼프강의 지도하에 ’Body Sound'라는 것을 하기로 하였고, 둘째 그룹은 나의 주도아래 ‘Collective Painting' (협동회화)을 하기로 하였으며, 셋째 그룹은 홀랜드 여자가 이끄는 ’Butterfly Dance' (집단 무용) 이었다. 셋째 그룹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따로 나가서 했으므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협동회화 그룹은 대충 의견수렴을 한 결과 이곳의 ‘가이드 스피릿’인 천사와 동양사상의 상징인 음양오행을 결합시켜 형상화하기로 하였다. 제시된 몇 가지 도안을 기본으로 내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각자가 알아서 색을 덮는 것이었다. 나는 종이 모자이크를 염두에 두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더니 숲 속에서 나뭇가지 돌멩이 낙엽 꽃잎 등 여러 가지 자연물들을 줏어와서는 붙이기 시작했다. 역시 여럿이 모이면 기발한 생각들이 떠오르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는 그림 전체의 통일성을 위하여 내가 그려 놓은 밑그림과 구도에 충실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두들 제 기분 내키는 대로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시간이 없어서 그림을 완성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여러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멋있다고 칭찬해주었다. 사실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멋진 효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확실히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떨어졌다. 어쩌면 통일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협동화란 것은 남이 어떻게 그리건 상관없이 나에게 할당된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니까. 거기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예측할 수 없는 협동의 효과를 감상하는 것이 협동화의 묘미이기도하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내심 내가 밑그림을 그린 사람으로서 전체 그림이 내 의도대로 그려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협동화의 정신에 위배되는 명백히 잘못된 태도이다. 그랬기 때문에 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내 안에는 미진한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마음을 비우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끊임없이 성원들과 의견교환을 해 가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다른 접근방법으로 보이지만(전자는 ‘개인주의적,’ 후자는 ‘사회적’) 실제 작업에 있어서는 서로 뒤섞여 나타난다.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고 하지만  작업 자체가 한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협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견교환을 한다해도 결국 자기 작업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는 전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때문에 나는 두 가지를 다 아울러 ‘공동체적 접근방법’ 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두 가지를 명확히 판별하고 수렴하는 것이야말로 ‘Group Dynamics'(집단동학)를 이해하는 요체이다. 왜냐하면 그에 근거하여 그룹내부에 있어서 리더의 역할, 성원과 성원 사이의 관계 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볼프강이 리드하는 그룹은 아연 활기에 차 있었다. 볼프강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재담과 흡인력으로 성원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Body Sound'란 온몸을 이용하여 소리를 내는 게임인데 그냥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아래 집단적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게임은 리더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리더가 성원들의 자세와 위치 등을 지시하고 리더의 매김 소리에 맞추어서 집단이 소리를 질러대기 때문이다. 그는 성원들을 모두 마루바닥에 눕힌 뒤  어깨동무를 하게 하거나 서로의 배를 베고 소리를 질러대게 하였다. 이 포지션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가 대지나 이웃들 속에 파묻혀 있어야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하고싶은 소리를 마음껏 질러댈 수 있다. 가령 리더가 “야, 오늘은 토요일이다. 디스코 장에 가서 몸이나 풀어보자!” 하고 말하면 모두들 마치 디스코 장에라도 간 듯이 몸을 구르며 갖은 소리를 다 질러댄다. 볼프강은 여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궤뚫어보고 상황에 적합한 주문을 하였으며 여자들은 마치 한풀이하듯이 또는 장난치듯이 신나게 소리를 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괴성과 소란스러움에 옆에서 하는 우리 작업이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게임이 끝난 후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사실 그의 게임 지도 능력은 실제 우리를 지도하러온 사람들보다도 뛰어났다. 그는 그 방면에 풍부한 경험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소경이지만 능히 길 안내를 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 한가지 까먹을 뻔했는데, 이 날 오전 교육장 게시판에 일요일 날 핀드혼 코뮤니티 센터에서 있을 내 강연에 대한 공지가 붙었다. 공지문은 내가 지난번에 언급한 모 윌렛(Mo Willet)이 나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몇몇 참가자들이 그것을 보고 와서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조금 있자니 프로그램 진행자인 가이(Guy)가 조용히 나를 부른다. 나에게 한국 TV 촬영팀이 와서 인터뷰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고(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적어도 그 시각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내가 핀드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서였다. 물론 일요일에 있을 강연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을 테고. 이 가이란 친구는 겉모습이나 말하는 태도가 굉장히 성실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다. 십여 년간 일해왔던 컴퓨터회사를 어느 날 갑자기 때려치우고 핀드혼에 들어와 산지 3년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어떤 생각을 품고 핀드혼에 찾아왔으며 또 그 간에 느낀 감상이 어떠한지에 대해 솔직히 얘기해 주었다. 먼저 현재까지 이루어놓은 핀드혼의 성과에 대해 깊은 찬사를 보낸 뒤 내가 느낀 핀드혼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해마다 방문객의 숫자가 국제적으로 십사만명이나 된다는 이곳에 흑인을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다. 항간에 핀드혼의 공동체 운동은 백인 중산층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그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핀드혼의 운동 노선에 지배적인 백인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지 않느냐. 만약 당신들의 공동체 이념이 어디에고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스코트란드 구석에 앉아 부유한 나라에서 오는 손님만 받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제3세계로도 진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또한 자본주의 아래서 자생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구조를 만들어내었는데 그로 인해 대가없이 주고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 훼손된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다음 날 저녁 공동체의 한 간사가 나와서 핀드혼 공동체의 재정과 조직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그의 입에서 내가 가이에게 한 비판의 말이 거의 그대로 나오는 것을 보고, 그날 저녁 간사회의에서 나의 발언이 논의되었음이 틀림없다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여섯째 날은 오전에 작업반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자유시간이었으므로 별달리 기록할 것은 없다. 이쯤에서 매일 오전 있었던 작업반 일과 핀드혼 농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정원관리반에서 일했다. 아, 어떻게 참가자들이 각 작업반에 할당되는지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첫날에 진행자는 몇 개의 작업반을 제시하고 참가자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작업반을 택하라고 한다. 각 반마다 정원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무작위로 접수를 받아서는 단번에 신청자수가 정원에 일치할 리는 만무하다. 결과를 보니 농장일에 3명이 초과이고, 기타 다른 작업반에 2명, 1명 씩 부족이다. 나 역시 농장일을 지원했다. 진행자는 결과를 알려준 뒤 다시 한번 종이쪽지를 나누어주고 접수를 받는다. 나는 안되겠다 싶어서 일의 성격이 비슷한 정원관리부로 돌렸다. 두 번째 뚜껑을 열어보니 농장반은 여전히 정원초과였다. 결국 4번의 접수 끝에 제시된 정원과 일치하게 되었다. 시간이 다소 걸렸지만 핀드혼의 이 방식은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였다. 인원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압력이나 영향력도 행사되지 않았다. 그저 결과만 알려주고 접수도 말 대신에 종이에 적어서 받았다. 개개인의 판단과 결정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아침에 작업하러 나가면 먼저 한 자리에 둘러앉아서는 그날의 기분과 전날 있었던 일 등에 대해 돌아가면서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작업반장은 공지사항과 함께 그날의 할 일을 설명한다. 참가자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그룹이 작으므로 인원초과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동안 혼자 농장과 정원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풀도 뽑고 씨앗도 채취하고 수확도 거들어 주고 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 해보지 못한 퇴비장 작업에만 내리 매달렸다. 이들의 퇴비 만드는 방식을 잘 알아두고 싶기도 했다. 이들이라고 해서 퇴비 만드는 과정이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아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퇴비 재료는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찌꺼기와 정원관리하면서 나오는 온갖 부산물, 그리고 농장에서 생산되는 밀짚이 주가 되고 사이사이 석회와 효소 등을 뿌려주었다. 퇴비 만들기는 우리말로 하면 시루떡 만들기와 비빔밥 만들기를 번갈아 가며 하는 것과 같다. 숙성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김치 만들기와 같고. 퇴비 막이 한 10동되었는데 퇴비를 처음 만든 날 뒤섞은 날 등을 칠판에  적어두고 차질 없이 생산하고 있었다.

핀드혼 사람들은 작업을 전후해서 꼭 ‘Tuning'(조율) 이라는 것을 한다. 빙 둘러서서 서로의 손을 잡고 누군가 원하는 사람이 작업과 관련하여 기도를 한다. 기도가 끝나면 기도한 사람이 옆 사람의 잡은 손에 힘을 꾹 가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또 자기 옆 사람의 손을 꾹 누르고, 이렇게 해서 마지막 사람에게까지 신호가 전달되면 손을 풀고 튜닝이 끝난다. 튜닝이야말로 핀드혼이 영성적 공동체 (Spiritual Community) 임을 알려주는 가장 특징적인 행위이다. 이 튜닝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어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곤란하다. 어떤 이는 천사에게 고백하듯 하는가하면, 어떤 이는 단순한 비나리만 읊조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날 대하고자 하는 자연물의 정령을 불러내어 대화하듯 하기도 한다. 이것을 동양철학으로 풀어보자면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하여 천지의 기운에 감응하는 것이고, 기독교적으로 보자면 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며, 신과학에서 보면 자신의 생체에너지 파동의 주파수를 외부의 그것과 일치시키는 것과 같다. 어느 것이나 강조 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작용과 효과는 동일하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만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주위의 사물과 일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독실한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다. 이들은 인간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자연물로부터도 신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지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영적 훈련과 수련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루는 작업반장인 로버트가 요즘 토끼가 자꾸 화초밭에 들어와 골치라면서 튜닝을 하는데 그 내용이 참 재미있다.


“토끼야, 내 말 들리니? 왜 요즘 자꾸 화초밭에 들어오고 그러니?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서 정원 한 구석에 따로 풀밭을 마련해 두었잖았니. 거기서라면 네 친구들과 충분히 먹고 놀 수 있을 텐데 제발 화초밭엔 들어오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그럼 오늘도 평안히...”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내가 마치 눈앞에 토끼를 데려다 놓고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이런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이 기도가 효험이 있건 없건 간에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이러한 자세에 깊음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아무리 토끼에 의한 피해가 극심하다 하여도 절대 약이나 덫을 놓는 일이 없다. 울타리만 더욱 강화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방어적이다. 사실 클루니 힐의 정원에는 아주 많지는 않지만 토끼란 놈들이 꽤 살고 있어서 잔디밭에는 늘 서너 마리의 토끼가 뛰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아무 것도 없는 적막한 풀밭보다 훨씬 운치도 있고 자연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적절한 인구조절일 것이다.


국내에서 발간된 “생태농업을 위한 길잡이” 란 책에 보면 핀드혼에 대한 소개가 짤막하게 나오는데 (‘미내사’의 기관지 ‘지금여기’에서 재 수록했다고 쓰여있다) 핀드혼 사람들이 식물의 요정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서 18 Kg이나 되는 양배추를 길러내고 눈 속에서도 장미가 피어나는 등 기적을 일구고 있다고 해놓았다. 나는 앞 뒤 설명 없이 적어 놓은 이런 식의 소개가 오히려 핀드혼의 실상을 왜곡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망상을 품게 하거나 반대로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핀드혼은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적의 마을’이 결코 아니다. 18 Kg 짜리 양배추는 품종과 재배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한겨울의 장미꽃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잘 찾아보면 영국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기후가 겨울에도 온난하기 때문에 뒤늦게 핀 장미꽃이 그때까지 남아있는 수가 왕왕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도 눈이 와서 세상이 새하얀데 건물 한 구석엔 뒤늦게 핀 창포꽃과 장미꽃이 외롭게 서있다. 그렇다고 내가 핀드혼의 실험을 깍아내리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내면에 작동하는 원리를 보자는 것이다. 나는 핀드혼 농장에서 기적이라고 부를만한 거대한 농작물을 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러한 얘기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도 보질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곳의 농작물들이 보통 수준 이상으로 건강하고 달콤한 것은 사실이다. 핀드혼 사람들은 ‘기적을 만드는 사람’ 이라기 보다는 ‘기적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수없이 많은 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적이란게 뭔가?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일이 기적 아닌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한 알의 감자가 영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지 인간의 작은 두뇌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아무리 두껍게 써 놓은 생물학 책이라 한들 그것은 이 과정의 만 분의 일도 밝혀내지 못한다. 핀드혼 사람들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사물의 뒤에 숨어있는 힘과 대화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했더니 이런 기적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하는 식의 ‘데몬스트레이션’이 아니다. 우리의 한계로 인하여 볼 수 없는 것과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기적과 같은 현상도 나타날 수 있고 대 실패도 겪을 수 있다. 흔히 자연농법이나 유기농법을 행하는 사람들중에 자기네 농법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해 특이한 결과를 과장하여 집중적으로 홍보하는 경우가 있는데, 핀드혼에 대한 평가도 그와 같은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연히 찾아든 ‘기적’을 가지고 그것만 부각시켜 핀드혼을 ‘기적의 마을’로 부르는 것은 실상에 대한 명백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며칠 동안 핀드혼에 와서 카메라로 겉모습만 담아간 KBS 촬영팀과 같이 “이곳의 사는 모습이 바깥 세상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데 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감상도 핀드혼을 잘못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식물의 요정과 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가! 어떻게 우주의 신비를 묵상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참에 우리나라의 운동하는 사람들과 영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마디하고 지나가야겠다. 나는 이십 년이 넘게 소위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보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제한적이지만서도-부대끼며 살아온 사람이다. 스스로도 ‘래디칼’ (Radical)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운동하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어느 정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운동권 인사들 중에는 ‘영성’이란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쩔래쩔래 흔드는 이가 많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역사가 있다. 극악했던 군사독재 시절 소위 ‘영성’을 추구한다는 종교인들과 순수 문학인들의 사회적 행태는 그 무렵에도 큰 논쟁거리였다.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적어도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이들의 무저항 내지 현실안주는 독재체제를 옹호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할 뿐이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영혼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별개의 것으로서 이렇게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영혼구제에 더욱 힘써야 된다며 비판을 일축했다. 또한 독재정권은 이러한 균열을 이용하여 종교인들과 순수문학인들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해주고 장려했다. 군사독재 기간이 어언 30여 년을 헤아리다 보니 한국의 종교와 문학은 이들에 의해서 그 주된 흐름이 만들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운동권’안에 영성의 문제가 주된 이슈도 아니었고 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잠자고 있던 ‘운동권의 영성’을 향하여 ‘카미가제’식의 자살공격을 감행한 사건이 있었으니, 1991년 봄 소위 ‘분신정국’의 막바지에 터져 나온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당장 때려치워라!”는 조선일보 투고가 그것이다.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민주화 투쟁대열을 향하여 마치 철퇴와 같이 내려쳐진 김시인의 선언은 한때 반독재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그의 모든 이미지를 한순간에 날려버렸고, 평소 영성운동을 강조하던 그의 주장은 심한 배반감과 함께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김시인의 사상에 대해서는 그의 지나친 자민족중심주의를 빼고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그가 비록 운동권이 영성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한 극단적인 행위를 했다하더라도 그것의 시기와 방법이 틀렸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운동권은 영성의 문제를 더욱 외면하게 되었으며, 민주화 투쟁 역시 독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적으로써 적을 다스리는”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이후로 운동권 인사가 어쩌다 영성수련이라도 갈라치면 소리 소문도 없이 가야하는 형상이 벌어졌다. 혹시라도 김시인과 같은 부류로 ‘찍힐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왜 운동에 있어서 영성이 중요한가? 나는 지금도 최고의 운동가는 최고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비근한 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는 서구인들에 의하여 거의 ‘세인트’ (Saint)로 까지 받들여지고 있다. 세인트는 종교적 영성이 탁월한 자에 한해서 붙여주는 순수히 종교적인 용어이다. 베트남 해방전쟁 당시 남쪽 민중의 반제 반독재 투쟁의 불길을 당긴 이는 사이공 대로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 입적하신 쾅 스님이다. 쾅 스님의 경우 영성의 수준이 극에 달하면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가 사라짐을 보여준다. 영성수련의 문제는 결코 한가한 자들의 자기만족적인 행위가 아님을 얘기하고 싶어서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중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가 상당수 있음을-불행히도 내 삶의 반경이 워낙 짧아서 그분들을 직접 뵙고 감화 받진 못했으나- 이리저리 들어서 알고 있다. 반면에 감옥 안에서 혹은 밖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성의 천박함 혹은 그 결핍을 목격하고 절망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시 한번, 운동하는 사람에 있어서 영성이 왜 중요한가? 어떤 이는 최루탄이 머리 위로 왔다 갔다하는 마당에 뭔 구름 잡는 영성이냐 하고 핀잔 어린 말투로 내밷기도 한다. 그렇다, 최루탄이 횡행할수록 영성은 더욱 필요하다. 굳건한 영성의 소유자일수록 최루탄 연기 속에 더 오래 서 있을 수있으며, 최루탄 연기가 가신 뒤에도 더 올곧게 자신의 위치를 지켜 나갈 수 있다. 영성을 무시하고 자기수련을 게을리한 사람일수록 사회가 변하여 운동권의 논리가 잘 안먹혀들어가게 되면 쉽게 변질하여 자기가 욕하던 세상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렇담 영성수련을 위해 세상을 절하고 산 속에 들어 가든가 무슨 무슨 수련장엘 찾아가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내가 핀드혼의 공동체 체험을 자세히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조금만 시선을 안으로 돌리면 일상의 삶 속에서, 매일의 정치활동을 통하여 영성을 수련할 수 있는 계기가 얼마든지 있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 속에 들어가 평생 도를 닦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렇다고 수련을 위해 일시적으로 산 속에 들어가는 것 마저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의미해서라기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에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동물이다. 영성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영성이지, 그것과 떨어져서 홀로 존재하는 영성은 없다. 불교나 선계의 고승열전에 보면 ‘나’라고 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그러한 ‘자기의식’ (ego)없이 사는 야생의 생명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망각하고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차라리 인간이 아닌 들판에 자라는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성 얘기를 하다가 옆으로 많이 빗나갔다. 공동체 체험 주간의 일곱 번째 날은 마지막 날로써 일주일간의 체험을 총 정리하고 성대한 작별만찬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마지막 총괄 모임은 첫 상견례가 있었던 방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빙 둘러앉아 한 사람씩 자기소감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 의례적으로 말하는 소감을 듣고는 그 사람에게 진정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 충격이 훨씬 후에야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고. 대부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몇몇은 벌써 표정만으로도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일주일간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대로 다 따라했지만 이것이 구체적인 나의 삶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모임을 좋아하는 것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말하자면 마음의 빗장을 여는데 쓰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을 감사히 여기고 그들에게 기타 반주와 함께 우리 구전가요 ‘타박네’를 들려주었다. 끄트막에 소감을 말한 카린이라는 캐나다 처녀애의 마무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자기 차례가 오자 한마디 말도 않고 둘러앉은 사람 하나 하나를 마치 심장에 새기듯이 깊이 응시하는 것이었다. 이 일주일 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처녀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그녀는 타고난 ‘Natural Girl'이다. 거리낌없이 활달하면서도 다정 다감하고 느긋했다. 마치 야생의 풀밭에 자라나는 들꽃처럼 아무하고도 잘 어울렸고 빈대붙는 솜씨도 수준급이다.(배낭에 텐트 하나 넣어 가지고 몇 개월째 유럽에서 개기고 있는 중이란다) 언듯 보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지만 사물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참으로 그윽하고 깊다. 타고난 영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포옹을 했다. 나도 적어도 하루에 한 두 번은 그녀와 포옹을 했다. 며칠 뒤 내가 핀드혼을 떠나기 전날 해변가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 그녀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녀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놀고 있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백사장을 따라 거의 1 Km는 따라왔다. 너무 멀어지기 전에 돌아가라고 하자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나긴 포옹을 해주고 친구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것도 상당한 거리는 내 쪽을 향하여 계속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치면서. 이럴 때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영어가 있다. "What a girl!" 그녀가 별로 가진 돈도 없이 장기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새들이 강남 가는데 여비가 들던가? “Just follow the natural law." 노자님의 말씀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음은 이 여행의 또 하나의 축복이었다.

클루니 힐의 교육장에서 나와 다시 처음에 숙박을 했던 모 윌렛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그녀는 내가 올 것을 대비하여 일부러 손님도 받지 않고 방을 비워두고 있었다. 일주일만에 다시 만난 모는 오랜 친구가 다시 찾아온 양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날 저녁에는 방문객 센터에서 한국 기독교 선교공연이 있고 다음날엔 코뮤니티 센터에서 나의 강연이 있다. 한국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안 비치던 스코트랜드 끄트머리에 갑자기 코리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나는 오후 내내 바닷가에 나가 이리저리 거닐기도 하고 낮잠도 자면서 내일 있을 강연을 대비하여 생각을 정리하였다. 해질 무렵에 그곳에 있는 동안 자주 이용하던 킴벌리 식당에서 저녁노을 바라보며 느긋한 식사를 즐긴 다음 시간에 맞추어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시간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공연장에 당도하니 무대에서 공연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말고는 관객이 하나도 없었다. 엇, 이것 무엇이 잘못 되었구나 하고 당황해하며 자리에 앉아있노라니 단원들을 지휘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서는 인사를 한다. 공연 시작 시간이 30분 연장되었단다. 한국사람이라고 하니까 크게 기뻐하면서 자기가 이 공연단을 이끌고 있는 김아무개 목사라고 소개를 한다 (실명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선교방식에 비판적인 나의 기술이 그분의 선한 의도를 훼손할까보아 밝히지는 않는다). 말이 몹시 빠르고 분주한 몸짓과 함께 의욕이 넘쳐 보이는 목사였다. 미국 LA 지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한지 겨우 4년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세계 여러 나라에 자기네 선교회 지부가 14군데나 된다며 자랑을 한다. 현재 영국 남쪽 해안 도시인 본머스에 2000명의 학생들을 데려다 공부시키고 있으며, 내년에는 이 스코트란드 북쪽 끝에 있는 도시 인버니스에 한국학생 1000명을 데려다 공부시킬 계획이란다. 이미 작업이 진행 중인데 그가 말하는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힌다. 당국의 허가를 얻어 언어학원을 개설하여 한국학생들을 모집하면 몇 천명이고 데려올 수있으며, 학원을 운영하면서 신학교를 세워 거기서 선교 일꾼들을 길러낸다는 것이다. “얘들은 얼마든지 저희 선교원에서 훈련시켜 이렇게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어디어디로 진출할 것이라며 거침없이 늘어놓는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이거 뭔가 걸물을 만나긴 만난 것 같은데 방향이 좀 이상하다 싶었다. 그에게는 신학생들이 마치 종로학원의 수강생이나 논산 훈련소의 훈련병쯤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목사랑 얘기하고 있는데 전도사라는 사람이 왔다. 그러자 목사가 이분은 여기에 계시는 한국분이신데... 하고 입을 열기가 무섭게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더니 내게 성함이 어떻게 되지요? 연락처는? 하고 속사포처럼 묻는다. 그러자 목사가 팔을 내저으며 “아, 아 그것은 내가 벌써 적어놨어.” 하고 말린다. 나는 한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길거리를 걷다가 한국에서 파견되어 나온 여호와의 증인 아줌마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데 이 분들은 그에 비하면 거의 기업적으로 선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 왜 갑자기 그 시각에 김우중씨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70년대에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외화벌이의 신화를 만든 사나이. 이분들의 선교 행태가 꼭 그랬다. 이 저돌적이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교방식이 그 시절 수출 견본 하나들고 맨 몸으로 뛰어다니며 해외지사를 일구어 낸 대우의 해외 영업사원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긴 선교방법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것이고 보면, 거꾸로 기독교의 모국에 선교하러 온 이 김목사라는 사람의 기개는 일단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객석엔 많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사람들이 꽤 모인 편이다. 앳되 보이는 신학교 학생들이 나와서 전통무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공연을 하였다.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저 정도면 아마추어로서 꽤 잘한다 싶었다. 한가지 거슬리는 것은 찬송가 ‘노가바’를 하는데 하필이면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신세타령을 하면서 불렀던 ‘타향살이’와 ‘희망가’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 믿으라는 가사를 “이풍진 세상을 사~라았으~니~”의 가락에 맞춰 부르는 것은 어색하기만 했다. 아마도 해외동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서 였을텐데 여기엔 해외동포라고는 없지 않은가. 드디어 공연이 한바탕 끝나고 목사의 설교시간이 되었다. 그는 여기서 또 한번 나를 경악시킨다. 설교는 물론 영어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한국의 부흥회 목사들의 그 열광적인 설교가 억양하나 말씨하나 틀림이 없이 영어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형적인 미국식 영어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의 설교는 관객들에게 그 어떤 엔터테인먼트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 내용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스토리이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다시 살아났다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객석의 외국인들은 그의 말이 하도 빨라서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아무리 빠른 말일지라도 같은 한국사람 영어인데다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것이라서 단어 하나 하나가 빠짐없이 들렸다. 저 정도의 스피드로 설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같은 설교를 수 백 번은 했지 싶다.

설교가 끝나자 이번에는 관객들과  영국을 위하여 기도해 주겠다며 단원들을 모두 무대위로 불러보아 ‘기도 대형’으로 세웠다. 목사가 먼저 두 손을 치켜들고 “하나님 아버지”하며 큰소리로 기도를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전 단원들이 통성기도를 외쳐대기 시작한다. 나는 속으로, “오, 하나님, 기어코 당신께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하고 탄식하였다. 외국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이 희한한 기도 광경을 경이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단원은 “오, 주여”라는 말만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을 영어로 ‘엑스타시’ (Ecstasy) 라고 하던가. 통성기도가 길어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목사의 신호와 함께 합창소리가 일제히 잦아진다. 나는 통성기도에 대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기도 시작!’ 하는 순간부터 열광적으로 외치다가 “기도 끝!”하면 일시에 끝낼 수 있는지가 늘 의문이었다. 아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히 모르리라. 감옥에 있을 적에 옆방에서 들려오는 통성기도 소리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 온 나는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기도를 마친 단원들은 객석으로 다가와 일일이 관객들의 손을 잡아주며 “God bless you" 라고 외치며 축복의 말을 해주었다. 끝으로 김목사의 공연단을 초청한 사람이 나와서 인사말을 하였다. 30대의 젊은이로 보이는 그는 한때 핀드혼 공동체에서 살았단다. 그러다가 1년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인버니스로 나가 신앙 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김목사를 만나 그의 ‘강력한’ 영성에 감화되어 이리로 모셔왔다는 것이다. 그는 김목사의 선교운동을 기독교 사회를 진동시킬 만한 ”새롭고도 강력한 영적 운동“이라고 추켜세웠다. 부흥교회는 물론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 들어온 이래 조선 고추장 특유의 열광하는 기질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내가 보기에 이곳 날씨처럼 조용하고 우중충한 영국인들에게 그런 식의 선교가 먹혀들어갈른지는 회의적이다. 어쩌면 그 젊은이는 쇄퇴일로를 걷고 있는 영국교회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던 중 김목사의 엔터테인먼트를 가미한 공세적인 선교방식에서 희망의 일단을 발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오후 일찌감치 저녁을 해결한 모와 나는 강연장 설치에 필요한 도구들을 들고 코뮤니티 센터로 향했다. 센타는 2층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목조건물로서 위층은 회의실로, 아래층은 공동체 식당으로 쓰고 있다. 위층엔  벌써 어떤 모임이 진행 중인지 떠드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우리는 식당 옆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비디오 데크를 설치한 뒤 의자를 배치하였다. 나는 마침 노르웨이에서 만든 나에 관한 비디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그 무렵엔 일정한 숙소도 없이 떠돌아다녔던지라 모든 짐을 들고 다녔던 것이다. 정한 시각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핀드혼의 저녁은 공적 또는 사적으로 늘 여러 가지 모임들이 진행 중이라 특별한 사안이 아닌 한 어느 한 집회에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모이기는 힘들다.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대략 30명 가까이 모였다.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카린과 가이등 교육장에서 만난 친구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가만히 보니 어제 김목사의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도 몇 있었다. 나는 서두에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이제 여러분은 어제오늘 양일간에 걸쳐서 한국에서 온 두 극단적인 인간을 보게됩니다. 아무쪼록 보통의 한국인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음을 명심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랍니다.”

먼저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비디오에는 나를 비롯한 초장기수 선생님들의 모습도 나온다. 20분간에 걸친 비디오 상영이 끝난 뒤 그들로서는 상상이 안가는 한국의 인권현실과 어떤 연유로 내가 구속이 되어 장기형을 받았는지에 대해 먼저 간략히 설명했다. 아무래도 이곳이 ‘영적 공동체’이니 만큼 나는 이야기의 초점을 감옥 안에서의 나의 정신적, 종교적 변화에 맞추었다. 내가 어떻게 고문을 받고 고문의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고문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는지, 절망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다가 어떤 계기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는지, 신앙이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도가철학을 받아들인 뒤 나의 신앙과 옥중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종교적 입장을 ‘도가적 카톨릭’ (Taoistic Catholic) 이라고 설명하였다. 아무래도 도가철학은 그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라 자꾸 질문이 들어왔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하여 도가철학의 기본 개념들만 몇 가지 설명해주고 강연을 마치었다. 우렁찬 박수와 함께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면서 그들은 감사의 말과 함께 한분 한분 내게 포옹을 해주었다. 입구에는 모가 모금 깡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여기 왔을 적에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것에 못내 서운했는지 공지문에다 기부금을 요청하는 문구를 넣었다. 모가 나중에 봉투에 담아서 내주는데 세어보니 221 파운드 (약 36만원)가 걷혔다. 상당한 액수였다.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 평균으로 보았을 때 결코 잘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만해도 이런 자리에 가서 일파운드 이상 내본 일이 없다.  모의 의도가 어땠건 나는 이 돈을 도저히 개인용도로 쓸 수가 없었다. 이틀 뒤 런던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국제사면위원회 본부 (Amnesty International Secretariat) 아시아팀을 찾아가서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버마(미얀마)의 정치수들을 위해 써달라고 기증하였다. 그들은 몇 달 뒤 내게 그 돈은 현재 버마와 태국 국경에서 살고 있는 한 정치수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지급되었다고 알려왔다.

밤늦게 모의 집에 돌아와 하루 일을 돌이켜보며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웬 여자였다. 자신을 핀드혼 이탈리아 방문단의 간사라고 밝힌 그녀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한 여성참가자가 나와 꼭 상담을 하고 싶은데 만나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사안에 따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사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자기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고문한 자들을 용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도움이 되겠거니 생각한 모양이다. 용서야말로 내 삶에 있어서도 크나 큰 화두일진대 내가 남에게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완곡하게 거절을 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 처지를 설명해 주었다. 나의 경우는 용서의 대상자가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는 조직의 하부기관이었다. 나에게 고문을 가한 자들은 물론 개인이지만 나는 그들 역시 국가조직의 희생자로 보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용서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경우는 대단히 사적인 문제인데 내가 거기에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음 날 나는 바로 런던으로 내려갈까 하려다가 아무래도 그 동안 나를위해 여러 가지로 애쓴 모에게 무언가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하루 더 머물기로 하였다. 무엇이 좋을까? 핀드혼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상점에 있는 기념품을 사서 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테고... 아무튼 점심먹고 바닷가에 나가 천천히 생각해 보자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동체 식당에서 밥을 받아놓고 막 먹으려고 하는데 웬 여자가 다가오면서 “미스터 바우!”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어젯밤 전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침 자기가 어젯밤 전화로 말한 이태리 여자와 함께 있는데 식사하고 꼭 만나 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거 공동체 구경하러 왔다가 영어로 상담까지 하게 되었으니... 지난밤에 모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모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며 실은 상담을 청한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해왔는데 그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뒤늦게 그 말을 듣고 거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젠 꼼짝없이 무슨 말이든 해주어야했다. 결국 나는 그러마 했고 그 여자는 식사 마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물러섰다.

밥먹으면서 머리를 좀 굴려봤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에이, 이럴 때는 하느님께 맡기는 게 최고다 하고는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 식당 앞 잔디밭에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인사를 했다. 20대 젊은 이태리 여자였다. 그런데 겉모습으로는 동구쪽 혈통으로 보였다. 기묘한 상담이 시작되었다. 이태리 여자는 영어를 거의 못했고 중간에 통역을 통해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내게 묻는다. 어떻게 그 많은 고초를 이겨냈느냐고. 그것은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대답한다. 또 묻는다. 여기 한 아버지가 있는데 그가 만약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다면 내가 어떻게 그런 살인자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여자가 비유법을 쓰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하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부끄러운 사실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으랴.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정색을 하고 말한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라도 그런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지 않고는 하루도 편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복수를 한다 하여도 결코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그런 조건 없는 용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느냐?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니 당신께서 내 대신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간절할수록 하느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축복(Blessing)을 내려 줍니다. 그 축복에 의하여 당신은 남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용서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축복이 가득 차면 용서고 뭐고 그런 개념이 없어집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생각하지 마시고 작은 일부터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그런 연습이 계속되면 자기 안에 차곡차곡 하느님의 축복이 쌓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구태여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엄청나게 원수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도 더 이상 원수로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듯하게 말은 잘한다. 나는 사전에 준비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런 말들이 즉흥적으로 술술 나오는지 생각해 본다. 물론 어려웠던 시절 이런 주제를 가지고 치열하게 자기 성찰을 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럴 때마다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은 나 자신도 용서에 관한 한 여전히 수련과정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이런 말들이 조금도 주저함 없이 나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 뒤로 이태리 여자는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나의 앞날을 축복해 주고 자리를 떴다.


“주님, 이 여인의 앞길을 밝혀주소서!”


나는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바닷가에 나가 명상에라도 잠겨 볼까 하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마침 간조 때가 되어서 만 안쪽에는 드넓은 풀밭이 형성되어 있었다. 떠내려 온 고목나무 등걸에 자리를 잡고 앉아 ‘튜닝’을 시작했다. 이 냄새, 이 풍광, 하느님의 축복이 아낌없이 핀드혼 만 안에 내리붓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한 사내가 맨 살이 드러난 뻘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가더니 들고 간 그릇을 내려놓고 삽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옳거니, 조개를 잡아서 모에게 조개 국을 끓여 주어야겠다! 일어나서 바지가랭이를 걷어붙이고 뻘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갔다. 그는 낚시 미끼로 쓰기 위하여 갯지렁이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로 가면 조개를 잡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가 저 너머에 가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손짓으로 가르쳐 준다. 그곳에 가니 과연 조개가 천지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뻘을 파면 그 안이 조개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조개들로 가득 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자연물을 채취해서 먹는다는 개념이 없다. 먹는 것은 슈퍼에서 사먹는 것이지 자연은 어디까지나 자연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보호 개념이 투철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만큼 자연환경과 자신을 분리해서 보고 있다. 이들은 식품이 어떻게 자연상태에서 채취되어 자신의 밥상에까지 오르는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식품이란 ‘테스코’나 ‘세인즈버리’ (영국의 거대 슈퍼마켓)에서 생산해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곳에서도 때때로 야생풀을 뽑아 먹는 등 자연물을 채취하곤 하는데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이런 것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행위조차 이해할 수 없다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덕분에 영국의 산야에는 고사리와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식용 풀들이 썩어문드러지게 자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곳의 조개도 마찬가지이다. 조개가 외부의 간섭 없이 같은 자리에서 계속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다보니 뻘 자체가 반은 조개 무덤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릇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티셔츠를 벗어서 부대를 만들어 정신없이 주워 담았다. 이곳의 조개는 대략 3종류였다. 홍합과 모시조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손바닥만한 큰 조개인데 역시 덩치가 크다보니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개를 주워 담으며 “만약 이런 곳이 한국의 아줌마 부대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단 며칠도 안되어 초토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영국인들의 ‘무관심’이 이들 조개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거의 한 양동이는 될 것 같은 조개를 끙끙대며 들고 들어오니까 모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녀는 여기 살면서도 한번도 이런 일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이 모는 조개를 좋아했다. 내가 씻어 다듬고 모가 요리를 하였다. 냄새가 기가 막혔다. 둘이서 정신없이 조개를 까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보니 상위에 조개껍데기가 산처럼 쌓였다. 그녀가 흡족해 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중에 런던의 도서관에서 조개이름을 알아보기 위해 관련 잡지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화보를 곁들인 한 기사를 읽고 가슴이 철렁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산 속 냇가에서 민물 홍합을 잡아먹고 껍질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가버린 사진을 실어놓았다. 그 밑에 써 있기를 “민물 홍합은 영국 하천의 청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생물이다. 이것이 이 정도 크기로 자라려면 적어도 80년이 걸린다. 여기에 800여 개의 조개껍질이 버려져 있는데 어떻게 이들은 한 순간의 미각을 위하여 64,000년의 세월을 무참하게 유린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이 민물홍합은 자연상태에서 수명이 100년이라고 한다). 수량이 많았던 홍합과 모시조개는 문제될게 없는데 손바닥만한 큰 조개가 먹고 나서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혹시 희귀한 조개를 알지도 못하고 마구 먹어치운 게 아니가 하고. 아직도 나는 그 조개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작별의 인사를 해야할 시간이다. 모는 일찍 일어나 영국식 아침식사를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고마운 분을 만나 즐거운 추억들을 가득 남겨 놓고 떠나는구나 싶었다. 함께 지내고 보니 왜 사람들이 그녀를 “원더풀 모”라고 부르는지 알겠다. 식사 후 그녀는 차로 나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기차가 왔다. 그녀와의 긴 포옹을 풀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 오르는 내게 두 장의 편지를 내밀며 외친다.


“Keep in touch, Bau!"


선반 위에 짐을 올려놓고 난쟁이 헤더(Heather)가 빽빽이 자라고 있는 스코트란드의 굴곡진 산야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산들이 끝나고 지루한 평원이 펼쳐질 때쯤이 되서야 주머니를

뒤적거려 편지를 꺼낸다. 하나는 모의 것이고 또 하나는 언젠가 모의 집 근처에서 한번 인사를 나눈 가브리엘이라는 여자였다. 먼저 모의 편지를 뜯는다. 예쁜 조가비와 마스코트 인형이 나온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는 쪽지에는 “이 기념품들이 네가 이곳에 있었음을 늘 상기시켜 줄 것이다”라고 써 있다. 가브리엘의 편지를 연다. 야생화가 그려져 있는 카드가 나오고 그 안에 정갈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당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겸허하면서도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가슴아프게 생각하지만
 당신이 헤쳐온 길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당신의 생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가브리엘 가이어

 *만약 글라스고우에 오실 일이 있다면
 저의 집에 묵어 가시기 바랍니다 (주소).

“Thank you so much for sharing your experiences
 with us.
 I found your talk very moving and humbling.
 I am so sorry for the suffering you have had
 but I am so proud of the way you have reached.
 May Blessings go with you
 throughout your life."


 Gabrielle M. Guire


*If you are ever in Glasgow and need a bed to sleep in
 please visit (address).

2000. 12. 31. 와이에서 결.


+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