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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에 이른 어린이들은 삶에서 그들의 영혼 상태가 의미심장한 변화를 거치는 단계에 놓여있다. 태어나서 6, 7세가 되기까지의 시기에 인간은 직접적인 주변환경에 있는 모든 것에 몰두하는 자질을 지닌다. 그렇게 모방하는 본능으로부터 자신의 되어 가는 힘을 형성한다. 6, 7세가 되면 교육자와 교사가 자명한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어린이에게 작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영혼이 열린다. 그의 내면에서도 역시 살아야 하는 것이 교육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내면에 살고 있다는 불분명한 느낌에서 어린이가 권위를 수용한다. 모방 본능에서 자명한 권위 관계를 근거로 하는 습득력으로의 변화를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없이 어린이를 대한다면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단순한 자연관에 근거하는 현대 인류의 인생관은 인간 발달에서 드러나는 그런 사실들에 완전히 의식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이 지니는 삶의 표현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을 위한 감각이 있는 사람만 그런 것에 필수적인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런 감각이 교육과 수업 예술을 지배해야 한다. 그 감각이 교과 과정을 형성해야 하고, 교육자와 어린이를 합일시키는 정신 속에 살고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하는 일은, 추상적 교육학의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 고무된 것에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교육자는 활동하는 매 순간 되어 가는 인간에 대한 생동적인 인식으로부터 항상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활기에 찬 교육과 수업은 많은 어린이들이 있는 학급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이의를 당연히 제기할 수 있다. 특정한 한도 내에서 그 이의는 분명히 옳다. 그런데 특정한 한도를 넘어서까지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정규-교육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어린이 각자의 내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진정한 인간 인식에 접하는 생동적인 교육 예술과 수업 예술을 관철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가르침을 통해 어린이를 주제에 붙들어 놓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육과 수업에서 작용하는 것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하는 것이 충분이 강하게 생동적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인간 인식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어 가는 인간이 아주 고도로 그가 풀어야만 하는 삶의 수수께끼가 되어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시도에 어린이들이 동참하도록 일깨운다. 그런 동참이 개별적인 가르침보다 더 풍부한 결과를 가져온다.

개별적인 지도는 진정한 자아 활동과 관련하여 어린이를 너무 쉽게 마비시키고 만다. 물론 일정한 한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인간 인식에 의해 완전히 고무된 삶을 사는 교사가 가르치는 가득찬 학급이, 그런 삶을 발달시킬 능력이 없어서 정규-교육학으로부터 출발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적은 학생 수의 학급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어린이 답게-예술적인 교육에서 얼마나 강하게 지적인 것을 건져낼 수 있는지를 간파한다면, 초등학교 첫 학년의 수업에서 예술에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음악 예술과 조형 예술을 수업 영역에 올바르게 위치시키고, 신체적인 연습에 예술적인 것을 적합하게 연결할 것이다. 체조와 운동을 음악적인 것이나 낭송에 의해 고무되는 감정의 표현으로 만들 것이다. 단지 육체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것만 근거로 하는 것의 자리에 오이리트미적인 것, 의미에 찬 움직임이 들어선다. 그러면 수업의 예술적인 구성에 의지 형성과 감성 형성을 위해 얼마나 강한 힘이 내재하는지 알게 된다. 

특정한 삶의 단계에서 현시하는 발달력과 방법론 간에 존재하는 관계를 투철한 인간 인식으로 통찰하는 교사만 여기에 암시된 방식으로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면서 수업을 할 수 있다. 어린이를 다루는 학문으로 교육학을 배운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인간 인식을 통해 내면에서 교육자가 깨어나야 그 사람이 진정한 교사가 된다. 


·········· 가르치는 내용을 어린이가 모두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고 기회만 되면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서까지 애를 쓸 때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런 노력에는 분명히 훌륭한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지는, 인간이 어린 시절에 순수하게 기억으로만 습득한 것을 나중에 나이가 좀 든 후에 다시 일깨우고, 그 동안 노력해서 얻은 성숙도를 통해서 비로소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깨닫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억력으로 수업 내용을 습득하는 경우에 흔히 어린이가 보이는 그 염려스러운 무관심을 교사가 활기에 찬 방식을 통해 필수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교사가 자신의 존재 전체로 수업 활동에 내재한다면, 어린이가 나중에서야 완전히 이해를 해서 희열에 찬 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도 어린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바로 그 나중의 신선한 체험 속에 삶의 내용을 간단없이 강화시키는 것이 들어 있다. 교사가 그런 강화를 위해 작용할 수 있다면, 그는 현존의 노정을 위해 잴 수 없이 커다란 삶의 자산을 어린이에게 준비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어린이의 <이해>를 겨냥하느라 <실물 수업>을 지나치게 적용해서 진부해지는 것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런 수업이 어린이의 자립적인 활동을 참작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어린 시절을 위해 아주 불쾌한 맛을 지니기 마련이다. 특정한 관계에서 아직은 어린이의 <이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을 어린이 내면에서 교사의 활력에 찬 불꽃으로 불을 지피는, 바로 그 일깨우는 힘이 인생 전체를 거쳐 작용하면서 머문다. 

- '사회 문제의 핵심' 중에서


··········


[1919년 8월과 9월,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학교 개교에 즈음한 14일 간의 교사세미나를 마친 후에 행한 슈타이너의 "결어"]

[독일어 번역입니다. - 최혜경 옮김]

이제 제가 말하자면 여러분의 마음에 명심시키고 싶은 것에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오늘 이 고찰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교사가 크고 작은 것에서 자신의 직업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정신화 함에서, 교사가 하나하나의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의 개념과 모든 개별적인 감각을 어떻게 발달시키는지, 바로 그 양식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교사는 발안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교사가 절대로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달리 말하자면, 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것과 어린이들을 대하는 처신에 완전히 현존해야 한다는 점을 숙고하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즉 교사는 크고 작은 전체에서 발안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 두 번째는, 사랑하는 여러분, 교사로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과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교사로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흥미로울 수 있는 것에 어떤 식으로든 등을 진다면, 그런 것이 교사에게서 자리잡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별적인 어린이들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두 번째입니다. 교사는 세상과 인간존재를 위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내면에서 진실이 아닌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내면 깊숙이 참된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절대로 진실이 아닌 것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많은 경로를 통해서 진실이 아닌 것이, 특히 방법론에서 우리의 수업으로 흘러들어오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진실한 것을 추구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경우에만, 우리의 수업이 진실한 것의 각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실현되기 보다는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나 역시 교사라는 직업을 위해서 황금률인 것이 있습니다. 교사는 메마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메마르지 않은 신선한 영혼정서! 메마르지 않고, 시대에 뒤 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교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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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더해서 인간은 지상의 현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배워야만 한다. 

그 첫 번째로 인간은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키기를 배운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적으로 간과한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킨다는 사실에서 인간과 동물 간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 중 하나를 건드리게 된다. 동물은 공간 내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균형 상태를 발달시키도록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다. 어떤 동물은 기어오르도록 규정되어 있고, 또 어떤 동물은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등등. 동물은 애초에 조직되어 있기를 자신에 알맞은 방식으로 공간에 들어선다.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 동물학자가 이 사실을 숙고한다면, 예를 들어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며 얼마나 많은 수의 유사한 뼈와 근육이 있는지 별로 강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균형 관계를 위한 완벽한 소질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비해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전체 존재로부터 균형 관계를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한다. 걷지 못하는 존재에서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에게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에게 수직적 자세, 공간 내의 균형 상태를 주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중력에 대한 관계에 대치시킨다. 사실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고찰에 있어서는 외관상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이 점을 아주 쉽게 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기어오르는 동물이 기어오르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도 똑바로 서서 걷도록 조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주시해 보면 동물의 경우에는 조직의 특성이 공간 내로 들어서도록 만드는 요소임에 비해 인간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임을 알 수 있다. 영혼이 공간에 대한 관계 내로 들어서서 조직을 극복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배우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일한 것으로서 현신에서 현신으로 전진하는 존재로부터 스스로 배우는 두 번째, 그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인간을, 일단은 인간을 통해서 물체적 세계를 관통하는 정신 생활의 주체로 만든다. 말을 할 수 있기도 전 어린 나이에 외딴 섬에 방치된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은 사람은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 자주 강조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유전으로 물려받은 것, 후일의 삶을 위해 고정된 상태로 유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서 일곱 살이 되면 이갈이를 하도록 유전 관계를 통해서 이미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 외딴 섬에 있다 하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면 이갈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기는,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서의 영혼 존재가 고무되어야만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자아의식을 아직 지니지 않은 바로 그 시기에 후두 발달을 위한 기초를 형성해야만 한다. 거슬러 올라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그 시기 이전에 후두 발달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놓아야만 후두가 언어 기관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를 통해서, 달리 말하자면 한 현신에서 다음의 현신으로 건너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 배우는 그것은 사고 세계 자체 내에서의 삶이다. 두뇌에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고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초기에는 아직 그 기관의 조형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지니고 다니는 그 존재의 의미에 따라 두뇌를 사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출생 직후의 두뇌 상태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힘들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전생에 따라 고유한 존재로서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사고 내에 표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 출생 후에 - 부모나 조상에게서 물체적으로 독립적이 되면 물려받은 두뇌의 특질을 스스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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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상(事象)을 파악할 때, 그 사상 자체에 관해 말해진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것과 관련해 알려진 수많은 사실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진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화음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는 이 점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 가지 수행이 제대로 이해되고 또 제대로 행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수행자가 영혼의 조화를 위해 그 첫 번째 수행의 일면성을 걷어 내는 또 다른 수행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 수행은 그릇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서가 내적인 체험이 될 정도로 이 글을 내밀하게 읽는 이는, 내용을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대목에서는 이런 감정을, 저 대목에서는 저런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영혼의 발달과 관련하여 각각의 감정에 어떤 비중이 할당되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그는 이런저런 수행을 자신의 특수한 개성에 따라 몸소 어떤 행태로 시도해야 할지도 알아낸다. 이 글처럼 체험되어야 하는 과정들에 관한 묘사가 다루어질 경우, 내용을 거듭해서 읽는 것이 필수적임이 밝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시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많은 것이 충분하게 이해되며, 이전에는 놓칠 수밖에 없었던 사상(事象)의 어떤 미묘한 면들을 이런 시도가 있고 난 연후에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테니까 말이다. 

앞에서 밝힌 길을 갈 의도가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이 글에서 내면 생활에 유익한 것들을 많이 찾게 된다. 이를테면 생활의 규칙들이나, 수수께끼 같은 현상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지에 대한 시사 등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인생 경험이 풍부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삶의 가르침을 깨친 많은 이들은 여태까지 자기 머리에 따로따로 떠올랐던 것, 다시 말해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충분할 정도로까지 생각지는 못했던 것이 연관 관계 속에서 해명되는 것을 느낄 때, 어떤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1909년 10월 12일, 베를린. 루돌프 슈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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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학교에 대한 정신 생활의 공적 관리가 현대에 들어 점점 더 국가 소관이 되어 버렸다. 교육 제도는 국가가 떠맡아야 할 안건이라는 생각이 현재 너무나 깊이 인간 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런 의견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상상이라도 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론가>로 치부된다. 하필이면 삶의 바로 그 영역에 가장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놓여 있다. 이미 암시된 방식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움>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방어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오늘날 인류의 문화 생활에서 쇠퇴하는 흐름의 모사에 불과한 특징을 유별나게 띠고 있다. 새로운 국가 형성은 그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 삶의 요구 사항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현대 인류의 경제적 요구 사항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를 보인다. 교육 제도를 종교 공동체에서 분리해 내어 완전히 국가에 종속시킨 이래로 교육 제도에 낙후성이라는 딱지를 눌러 붙였다. 

모든 단계에서의 학교가 인간을 양성하는 데에 있어서, 국가가 필수적이라 여기는 일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를 고려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학교 제도에 반영한다. 보편적인 인성 교육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강하게 자신을 국가질서의 한 지체로 느끼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성 교육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실은 국가에 쓸모 있는 하인을 만드는 교육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 관계에서 오늘날 사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유익한 것을 전혀 약속하지 않는다. 낡은 국가를 거대한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국가의 학교가 그 경제 조직에서 연속되어야 한다. 그 연속이 현재의 학교가 지니는 모든 오류를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 확대시킬 것이다. 국가가 아직은 교육 제도의 지배자가 아니었던 시대에서 유래한 것들이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물론 구시대에서 유래하는 정신이 다시 지배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발달된 인류의 새로운 정신을 학교로 들여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국가를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 그 경제 조직 내에서 쓸모 있는 노동 기계나 될 사람들을 양성하도록 학교를 변형시킨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단일학교>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 단일학교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상상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를 경제 조직의 유기적 지체로 형성하면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시해야 할 것은 학교가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 내에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교육해야 할지는 오로지 성장하는 인간과 개인의 소질에 대한 인식에서만 나와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인류학이 교육과 수업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해 인간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어떤 소질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가? 그 인간 내부로부터 무엇을 계발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항상 새로운 힘을 사회 질서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사회로 들어서는 성인들이 그 사회와 할 수 있는 것이 사회 질서 내에 항상 살게 된다. 반면에 기존의 사회 질서가 성장하는 세대로부터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침없이 발달하도록 양성된 개인적 재능들이 항상 새로이 사회 조직으로 공급될 때에만 학교와 사회 조직 간의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학교와 교육 제도가 자치적 근거에 세워질 때에만 그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독립적인 정신 생활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 과정을 지시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연령에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지는 인간 천성에서 나와야만 한다. 국가와 경제는 인간 천성의 요구에 상응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특정한 직무를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필요한 사람인지 검증하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도록 교육하라."고 국가와 경제가 말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유기체의 정신적 지체가 독립된 행정으로부터 적합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을 일정 정도까지 교육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경제는 정신적 지체에서 이룬 일의 결과에 맞추어서 조직해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인간 천성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천성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 스스로에 근거하는 정신 생활이 인간을 세상 물정에 어둡게 양성하리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와는 반대로, 기존의 국가 조직과 경제 조직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스스로 규제하는 경우에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생겨난다. 국가와 경제 내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이미 되어 버린 것에서 관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되어 가는 인간의 계발을 위해서는 사고와 감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원칙이 필요하다. 교육되어야 할, 수업을 받아야 할 사람을 자유롭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마주 대하는 경우에만 교육자로서, 교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작용 원칙을 위해서는 오로지 사회 질서의 본성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 대한, 인간 천성에 대한 인식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지시나 법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사회 질서를 공동체적인 관점을 따르는 사회 질서로 전환시키기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포함한 정신 생활이 독자적인 행정을 따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유기체의 그런 독립적인 지체로부터 양성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 생활에 의해 규제되는 학교에서는 그런 열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 배출될 수 있을 뿐이다.

국가와 경제를 위해 완전히 의식적인 시민과 일꾼이 되기 전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지배권의 영향력을 마치 파괴하는 요소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교사와 교육자의 힘을 통해서 되어 가는 인간이 성장해야 한다. 그런 교사와 교육자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능력 역시 자유롭게 발달시킬 수 있다.

··········

지난 수백년간 시민 계급적 사회 조직 내에서 경제 생활의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정신 생활이 경제 생활에 강한 종속성을 띠게 되었다. 인간 영혼이 관여하는 자체적인 근거를 지니는 정신 생활에 대한 의식이 소실되고 말았다. 자연 과학과 산업주의가 그 소실에 협력했다. 현대에 들어 학교를 사회적 유기체 내로 편입한 방식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다. 국가와 경제 내의 외적인 생활을 위해 인간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학교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최우선적으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사물의 정신 질서와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그 의식을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국가와 경제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점점 덜 고려되었다.

두뇌들이 점점 더 정신적 세계 질서를 외면했고, 점점 더 경제적인 생산 관계만 주시했다. 시민 계급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 생활의 느낌에 상응하는 방향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적 지도자들은 그것에서 이론적인 인생관, 삶의 도그마를 만들어 내었다. 그 삶의 도그마가 미래에 학교 제도의 구축을 위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회적 유기체에서 아무리 뛰어난 경제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에서는 정신 생활의 관리, 특히나 학교 제도를 위한 생산적인 제도는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낡은 사고 세계의 전승을 통해서 학교 제도를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의 형상화를 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당들은 계속해서 낡은 세계관의 소유자들에게 학교 내의 정신적인 것을 관리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는 지속되는 낡은 것에 대한 내적인 관계가 성장하는 세대들에게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정신 생활이 점점 더 피폐해지고 만다. 내적인 힘의 원천이 될 수 없는 인생관과 함께 자기기만적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세대의 영혼이 황폐해질 것이다. 산업주의에서 생겨난 공동체 질서 내에서 사람들은 영혼이 비어 버린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삼지적인 사회적 유기체를 향한 운동은 수업 제도를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자 한다. 교육계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지체는 그 분야에서 직접 활동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어떤 권력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업 제도의 행정, 교육 과정과 교육 목표의 설정은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거나, 혹은 정신 생활에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만 관여해야 한다. 그런 인물들 각자가 수업이나 여타의 정신적 활동과 학제를 위한 행정 간에 그들의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정신 생활의 판단을 아무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수업 활동을 하거나 다른 정신적 창조 활등을 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교육 제도와 수업 제도의 조직과 행정에 필요한 활력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무너진 공동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정신 생활의 새로운 원천이 어떻게 열려야 할지를 공평무사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필시 그 사람만 우리 시대를 위한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르크시즘과 삼지성"이라는 논설에서, 올바르기는 하지만 역시 일방적인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인간을 지배하던 정부의 자리에 물건의 행정과 생산 과정의 관리가 들어선다." 엥겔스의 생각이 옳은 만큼, 경제적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인간을 함께 지배했기 때문에 과거의 공동체 질서 내에서 인간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역시 진실이다. 그 지배가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지배 자극을 통해 인간 내에 작용했던 삶의 동력을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정신 생활에서 얻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에 또 다른 점이 더해진다. 정신 생활은 스스로 단일성으로서 발달할 수 있을 때에만 풍부하게 성장한다는 점이다. 충족시키는 세계관, 인간을 떠받치는 세계관이 나오는 영혼력의 동일한 발달에서, 인간을 경제 생활을 위해 유능한 일꾼으로 만드는 생산적인 힘이 생겨난다. 건강한 방식으로 고차적인 세계관을 위한 동력도 역시 발달시킬 줄 아는 수업 제도에서만 외적인 생활을 위해 실용적인 인간이 양성되어 나온다. 건강하게 발달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단지 물건만 취급하고 생산 과정만 관리하는 사회 질서는 점차적으로 아주 잘못된 길을 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 생활의 새로운 구축은 독립적인 수업 제도를 설치할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을 낡은 방식으로 더 이상 <지배> 해서는 안 된다면, 모든 인간 영혼 내의 자유로운 정신이 완전히 강건해져서, 그것이 각 인간의 개인성 내에서 삶의 주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정신은 결코 억압되지 않는다. 경제 질서의 관점에서만 학교 제도를 조정하려는 체제는 그런 억압을 위한 시도가 된다. 그런 체제는, 자유로운 정신이 그 천성적 근거로 인해 끊임 없이 반항하도록 만들 것이다.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학교 제도를 조직하려는 질서의 불가피한 결과로 사회구조에 지속적인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찰하는 사람에게는,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의 자유와 자치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인간 공동체의 구축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구가 된다. 이 영역에서 올바른 것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다른 모든 필수적인 요구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오늘날 정신 생활의 형상을 솔직한 시각으로 일별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의 분열성을, 그리고 올바른 것을 인식하기에는 인간 영혼을 위해 너무나 부족한 그것의 적재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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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체험했던 것이나 행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회상을 자주 해 보면 아주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경험을 더욱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네 삶의 이 시기나 저 시기에 너는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말했었던가?"라고 자문해 보면, 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


이 관찰을 자주 하면, 이론적으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한 생활 실천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인간이 실행해야 할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이해력으로 실행해야 한다면, 모든 관계를 조망하는 지능으로 실행해야 한다면, 삶에서 그리 멀리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점은 이론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단지 다음의 사실을 숙고해 보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어느 연령기에 자신의 현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행하는가? 인간이 언제 자신에게 가장 지혜로운 행위를 하는가? 

태어나서 부터, 지상의 현존에서 흘러 보낸 세월을 후일의 삶에서 되돌아보면 아직 기억해 낼 수 있는 바로 그 시기까지 그렇게 일한다. 사오 년 전에, 그리고 훨씬 더 이전에 했던 것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어린 시절의 특정한 시점에 이른다. 그 시점 이전으로는 더 이상 기억을 더듬어 올라갈 수가 없다.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그 특정 시점에까지만 이를 뿐이다. 사람이 자신을 나로 느끼기를 배우는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상적인 삶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시점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 이전에 인간 영혼이 자신에게 가장 지혜로운 일을 행한다. 나중에 자신의 의식에 도달한 상태에서는 어린 시절의 첫 해들 동안에 잠재의식적인 영혼 근거로부터 실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비범한 것을 인간이 스스로에게 행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전생의 열매로 얻은 것을 출생을 통해 물체적인 세계로 들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이 갓 태어나서는 예를 들어서 신체적 두뇌가 아직은 상당히 불완전한 도구다. 이제 인간의 영혼이 그 도구에 일단은 섬세한 구조를 만들어 내어서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매개가 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인간 영혼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되기 이전에 이미 실제로 두뇌에 일을 한다. 그래서 두뇌가 전생의 결과로서 영혼의 소유가 되는 모든 능력, 소질, 성향 등을 실현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신체에 하는 그 일은, 인간이 나중에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 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관점에 의해 이끌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인간이 자신의 두뇌를 조형적으로 완성시키는 일, 그 일만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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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인 의지 자극으로 포괄하는 자아 외에도 그것보다 더 힘찬 두 번째 자아가 자신 내부에 있다는 통찰에 머지않아 이른다. 이러한 통찰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더 고차적인 힘으로서의 그 두 번째 자아에 순응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는 선함과 진솔함으로 기우는, 완전히 의식적이고 명료한 영혼 존재로 포괄하는 자아에 비해 그 두 번째 자아를 더 낮은 존재로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더 낮은 존재를 극복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내밀한 자성이 그 두 번째 자아에 대해 조금 다른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것이나 행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회상을 자주 해 보면 아주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경험을 더욱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네 삶의 이 시기나 저 시기에 너는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말했었던가?" 라고 자문해 보면, 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칠팔 년 전에, 아니면 이십 년 전에 어떤 일을 했다고 하자. 그에 대해 이렇게 확언할 수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네 오성의 폭이 넓어져서 네가 그때 했었던 일, 그 때 했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의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영혼에 대한 그런 자성을 자주 하면 비범한 효과가 있다. "네가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들을 사실 오래전에 했었다. 당시에는 네 이해력이 충분히 성숙치 못했었기 때문에 네가 행하고 말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알아보는 그 순간에, 그런 종류의 발견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이 영혼의 느낌과 유사한 것이 시작된다. "내 존재의 심연 속에는 관장하는 선한 힘을 통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은 인간이 그야말로 최상의 의미에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것과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보아 세상에서 실행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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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헝가리의 국가 형태는 반세기가 넘도록 쇄신을 촉구하였다. 다양한 민족 공동체에 뿌리박은 정신 생활이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였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자극들에서 형성된 단일국가가 그 새로운 형태의 발달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 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의 시발점이 되는 세르비아·오스트리아 분쟁은, 단일국가의 정치적 국경이 특정한 시점에 이르면 민족 생활을 위해 어떤 문화 국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전적으로 타당한 증거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정치적 국가와 그 국경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신 생활이 그런 경계를 넘어서서, 각 민족들의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정신 생활 내에 그 뿌리를 둔 분쟁이 정치적 재난으로 폭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정치가답게> 생각한다고 자만했던 모든 이들에게는 그 방향을 목표로 한 발달이 완벽한 불가능으로, 심지어는 순전히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그들의 사고습관이, 민족적 공통성의 경계와 국경은 일치해야 한다는 표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육 제도와 정신 생활의 다른 부분을 포괄하는 정신적 기구들이 국경을 넘어서서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그 사고습관에는 불쾌하게 거슬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국제 생활을 위한 새 시대의 요구 사항이다. 실질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외관상의 불가능성에 매달려서, 그 요구 사항이 지니는 의미에서의 제도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새 시대의 요구 사항에 부합될 수도 있었던 방향으로 <정치가적인> 사고를 이끄는 대신에 그 요구 사항과는 반대로 단일적인 국가를 유지하려는 제도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로 인해 국가가 점점 더 몰상식한 형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의 20년대에 이르러서는 낡은 형태에서의 자기 존속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해체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거나, 내적인 불가능성을 전쟁이라는 조처에 근거하는 외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목전에 두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가들>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남아 있었다.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의 생존 조건을 위한 방향으로 그들의 의도를 돌려서, 새로운 신뢰를 일깨울 수 있었던 의지로서 그것을 공표했어야만 했거나, 혹은 구시대적인 것의 존속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에 발생했던 것을 이런 저변으로부터 판단하는 자만, 책임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민족 공동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가 형태에 관여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를 발달시킬 세계 역사적 과제가 그 형태에 부여되었었다. 그런데 그 과제를 간과하였다. 세계 역사적 발달의 정신에 적대적인 그 과오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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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에게는 ·········· 세계 창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창조를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 파악을 위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 철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확실한 지반을 찾아야만 한다. 


·········· 사고하는 주체, 혹은 사고되는 객체에 대한 관계가 없이, 우선은 사고를 완전히 중립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체와 객체 속에 이미 사고를 통하여 형성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것을 파악할 수 있기 전에, 사고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창조의 시초 부분이 아니라 최종 부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통한 세계 해명을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현존재의 최초의 요소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부터, 밀접하게 주어진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고찰을 시작하기 위해서 세상의 시초로 훌쩍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최근의 것에서 좀 더 이전의 것으로 점진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지질학이 지구의 현재 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가공의 변혁에 대해서 말했던 동안에는, 그저 암흑 속에서 더듬기만 했던 것이다. 어떤 과정들이 현재의 지구상에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거기에 과거사를 연역해 내는 점에서 출발했을 때에야, 비로소 지질학이 확실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철학이 원자, 운동, 물질, 의지, 무의식과 같은 모든 가능한 원리를 가정하는 동안에는 그저 공중에 유영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자신의 최초의 것으로 간파하게 되면, 비로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 발달이 향해 온, 절대적으로 최종의 것, 그것이 바로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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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의식은 개념과 관찰이 서로 만나 함께 연계되는 공연 무대다.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 동시에 이 (인간의) 의식이 성격화 된다. 인간의 의식은 사고와 관찰의 중개자다. 인간이 대상물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대상물이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이 사고를 하는 한,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대상물은 객체로, 자기 자신은 사고하는 주체로 고찰한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자신 스스로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자아 의식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사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시각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 돌리게 되면, 바로 사고가 자신의 근원적 존재, 자신의 주체를 대상물이라는 객체로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로지 사고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을 주체로 결정하고, 객체의 맞은편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를 단순한 주체적인 행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사고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개념도 형성한다. 우리가 사고하는 주체로서 개념을 하나의 객체에 연관시킬 때에, 이 관계를 단순히 어떤 주체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관계를 이끌어 오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로서 행하는 활동은 그저 단순히 주체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은, 이 양 개념을 극복하여 넘어서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주체가 사고한다고 말할 권리가 전혀 없다. 이 개인적인 주체는 오히려 사고의 은혜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를 나의 자아 이상으로 이끌어 내어, 객체와 연결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동시에 사고가 나를 주체로서 객체의 맞은편에 세워 둠으로써, 나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기인한다. 인간은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과 나머지 세계를 포괄한다. 그는 동시에, 사고에 의하여 사물의 맞은편에 서 있는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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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에까지 이른 당시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에 형성된 단일국가를 지목하면서, 유럽 사회의 건강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를 유기적인 세 부분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관리, 지배하고 책임지는 단일국가가 해체된 그 자리에, 교육 · 문화 · 종교 등 인간의 정신 생활을 담당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조직,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권리 · 법률 부문을 담당하는 민주적 국가 조직, 박애를 근거로 하는 경제 조직이 들어서도록 하되, 그 세 조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사회를 언급하였다. 그런 사회 형태를 그는 '삼지적 사회 유기체'라 명명하였다. 

··········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이 바로 인간의 한 부분인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데에 있다. '일=수입'이라는 생각이 자연법칙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일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한 부분을 팔아야 하고 자신의 내적인 요구와는 무관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로써 또한 경제 구조 내에 맞물린 개인의 노동이 박애의 근거를 지니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불가피하게 얻게 된다.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서 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 대부분의 상황이 아닌가?

··········

"네 행위의 원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합하게끔 행하라."라는 칸트의 윤리학에 슈타이너는 "네 특유의 개인성에 따라,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하라!"고 대답하였다. 교육을 통해 접종된, 외부의 기대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발안한 일을 할 때에만 인간이 자유롭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그 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인지학계 은행인 GLS 은행의 이름은 삼지적 사회 내의 자본에 대한 관념 중 중요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Geben=주기, Leihen=빌려주기. Schenken=기부하기, 이 세 단어의 이니셜을 딴 약자가 그 은행의 이름이다. 삼지적 사회 유기체 내에서 은행의 역할은 자본 근거를 지닌 사람과 활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연결해 돈이 고여 냄새가 나기 전에 흐르도록 만드는 일에 국한된다. 그렇게 은행을 통해 매개되는 자본 근거 중에서도 조건 없이 그냥 주는 돈이 가장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정신 생활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교육 담당자, 예술가, 작가, 종교 지도자, 학자 등은 국가가 아니라 경제 생활 영역에서 넘어오는 조건 없는 기부금으로 뒷받침될 때에만 그들의 활동 결과가 가장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작가의 생활 상태가 일의 결과물인 책을 판매하여 나오는 수입에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팔릴 책만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보다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신 생활의 영역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자치를 실행하고, 경제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뒷받침을 얻는 것, 바로 이 사실에 오늘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거와 더불어 한 사회의 건강한 미래 형상이 담겨 있다.

··········

슈타이너의 삼지적 사회 유기체의 관념에 따르면 자연물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해 변화시킨 것만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유통되고 소비된다. 토지나 대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자연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생산물처럼 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토지나 대지, 부동산 등은 생산을 위한 자본 근거가 되며,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시기 동안 그것에 대한 재량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생산 활동을 멈추는 순간에 그것에 대한 재량권이 생산적으로 활동할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 전환되어야만, 자본 근거의 부당한 집적으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적 현상을 막을 수 있다.

··········

타인 내에 존재하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인지라는 선제 조건을 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자유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만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수 있으며, 서로 간의 신뢰를 싹 틔워서 함께 돌보는 과정에서 자유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

오늘날의 기존 개념으로는 [사회 문제의 핵심]을 통해 루돌프 슈타이너가 인류에 제시하는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어깨 위에 다른 머리가 필요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 내용은 혁명적이다. 자본축적이 아니라 자본소진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이라거나, 돈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자로 불어나지 않고 낡아서 가치를 상실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산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바로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를 건강한 유기체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은 외적인 정치 활동도 사회 활동도 아니라, 각 개인이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념과 개념을 새로이 정립해서 느끼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삼지적 사회 유기체'는 어떤 거대한 조직이, 예를 들어서 국가 조직이 그런 사회 체제를 만들어 냄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가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서' 삼지적 사회관념에 따라 사고하고 느끼기를 배워서 살아내려고 애쓸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심지어 인지학계의 인사들조차 슈타이너의 사회적 삼지성은 이미 극복된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머리가 로마시대 이래로 존재해 온 낡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 생활은 당연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사람들이 쉽게 말들 한다.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문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 생활이 자유롭다고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 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이루는 교육에 이르면 갑자기 정신 생활의 자유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증서가 필요해서, 국가공인이 필요해서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는가? 자식을 교육시키는 이유 역시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장래의 경제 생활을 보장해 줄 직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국가의 인정이나 경제 생활의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배움 그 자체를 위해서만, 되어 가는 인간의 전개 자체를 위해서만 자식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하면, 사회의 발달과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현재의 독일 발도르프 교육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들조차도 국가의 공인을 받으려고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도 그 정도가 심각하게, 그 정도로 뼛속 깊이 우리의 정신 생활을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루어내지 않는다면,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을 각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내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건강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의 정신 생활을 위해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자유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어께 위에 다른 머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야만 한다.

- 역자 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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