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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15년의 주인공이 될 제조사별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

(소니 A5100,삼성 NX3000,파나소닉 GM5(출시예정), 후지 XT-1, 올림푸스 E-M10)



신상 미러리스 카메라에 놀아나지 말지어다

이제 더 이상 최신 카메라 산다고 어깨가 으쓱해지는 세상도 아닌데, 카메라 하나 사기 뭐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식이 없어서 그런가? 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겁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스펙을 아무리 쳐다봐도 뭐가다른지 모른 제품들 뿐이니 정보가 부족한 자기 탓을 할 수도 있겠죠. 


정보부족을 해결하려 커뮤니티를 찾았더니 보이는 정보라곤 "신상이 최고임", "구형 어떻게 씀? 모름지기 미러리스는 초당 11연사를 동체추적 AF로 갈기는 A6000이 짱임" 같은 말 뿐입니다. 짱이라니까 사야죠. 그렇게 큰맘먹고 산 신상 미러리스 카메라, 사기만 하면 사진이 작가처럼 확 바뀐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전에 쓰던 똑딱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자책을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실력이 미천할 뿐이라며. 


신상 미러리스카메라를 사는게 정말 최선 일까요? 



벌써 6년, 미러리스 카메라는 건강하게 성장해 왔는가? 


2008년 부터 지금까지 발매된 제조사별 미러리스 카메라 리스트


자료를 만들어놓고 보니 재미있더군요. 바디의 왕국 소니라고들 핀잔 받았는데, 실상 신제품 발매 갯수나 평균 발매주기는 삼성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미러리스 카메라 주요 제조사 6곳 모두 신제품 발매 주기가 평균 4개월 전후로 짧습니다. (후지가 6.4개월로 표기되어있으나 X100시리즈까지 포함하면 평균 4개월 입니다.) 소비자들의 제품선택이 어려워지고 헷갈리는건 당연합니다. 


미러리스 카메라가 직접 경쟁이 가능한 DSLR등급이 2자리수 모델 까지라 하고, 500D부터 700D,50D부터 70D 그리고1000D/1100D/ 100D까지 캐논은 6년간 총 11기종을 발표해 발매주기는 8개월로 미러리스진영보다 2배나 더 여유롭습니다. 게다가 5년간 센서 한번 제대로 바뀌지 않고 외형과 사양만 조금씩 바꾸면서 장사를 했고, 점유율 마저 미러리스 진영의 최초 예상보다 크게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무려 6개의 회사가 일년에 서너개씩 신제품을 발표 해가면서 들인 노력과 돈을 생각하면, 지난 6년간 계속된 미러리스와 DSLR의 치열한듯 했던 싸움은 사업성에 있어서 만큼은 캐논의 여유롭고 느긋한 승리였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한 것 아닙니다. 시장에 강력히 자리한 기성 선두업체를 완전히 끌어내린다는게 쉬운건 아니니까요. 문제는 지난 6년간 그렇게 치열했던 미러리스 제조사들의 노력 과정이 더 나은 미래를 기약 할 만큼 건강했느냐, 그리고 기존 제품 구매한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 만큼 가치가 있는 신제품들을 발표했냐 입니다. 


위 표에 제조사별로 색칠을 해 놓은건 신제품 중 소비자에게 인상적인 가치를 제공하거나 시장 반응이 좋았던 제품들을 표시 한 것입니다.소니는 6년 내내 모든 제품이 타 제조사에 비해 좋은 반응을 이끌었기 때문에 모두 색칠을 한 것이고, 나머지 제조사들은 파나소닉을 제외하면 인상적인 제품이 고작 2~3제품 뿐입니다. 16가지나 되는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소비자에게 유의미하게 어필 할 수 있는 괜찮은 카메라를 2개 밖에 만들지 못했고, 나머지 제품들은 이슈를 이어가기 위한 신제품일 뿐이었는데, 미러리스 카메라가 소비자들에게 인상깊게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요? 


지난 6년간, 삼성은 팔기위한 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급급했고, 올림푸스는 마포의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허덕였으며, 파나소닉은 어느방향으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 잡았고, 니콘은 팔 생각이 없었고, 후지는 잘 할 수 있는걸 했지만, 그것이 이기는 방법은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소니는? 소니는 그냥 하는만큼만 해도 나머지가 못 쫒아와서 땅짚고 헤엄쳤다고 해야겠죠. 그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있을 동안 세상은 과연 계속 미러리스 카메라에게 열린 기회의 땅으로 남아있었을까요? 



작지만 최상급 화질을 자랑하는 "미러리스 카메라"의 가치, 아직도 유효한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미러리스카메라가 시장에 선을 보이고 6년동안 별로 탐탁치 않은 행보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렌즈교환 시장 점유율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작고 가볍지만 DSLR과 동일한 화질" 이라는 명제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러리스 카메라가 80만원 정도의 금액을 지불하는 카메라 중 휴대가 간편하면서도, 업계 최상급의 화질을 얻을 수 있는 카메라라는 사실이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 할까요? 제 대답은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입니다. 


1인치 하이엔드 카메라 시장의 포문을 연 소니 RX100의 등장은 카메라 시장에 많은 부분을 변화 시켰습니다. 당장이라도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컴팩트 카메라 시장을 살려냈음은 물론, 렌즈교환 카메라로 일원화된 시장에 다양성을 부여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저 사양 번들렌즈에 묶인 보급형 미러리스카메라/DSLR과의 관계입니다. 


코구멍이 머리통만해지도록 멀쩡한 사진 200% 확대하고, 뭔지도 모를 숫자로 도배된 프로그램으로 분석하면 분명 미러리스 카메라의 사진이 1인치 카메라의 사진보다 뛰어날 겁니다. 단 보통의 1인치 하이엔드 카메라가 보유한 F2.0이하의 렌즈로 누리는 촬영 편의성과 사진찍는 과정의 퀄리티는 미러리스보다 1인치 카메라가 더 좋습니다. 


한 장이라도 사진을 더 찍을 수 있는 휴대성이 월등하고, 초보가 겪는 악조건일 수록 흔들릴 가능성이 더 적은 카메라라는 사실. 캐논이 가세하기 시작해 가격하락까지 시작 될것임을 고려하면 더 이상 1인치 하이엔드 카메라를 두고 허울만 좋은 번들렌즈 뿐인 미러리스 카메라를 살 이유는 없습니다. 언제든 렌즈를 교환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댈 이유가 없다는 뜻 입니다. 



아웃포커싱 가능한 렌즈 함께 살 것 아니라면, 미러리스 카메라 사지 마라 

아웃포커싱에만 매달리는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기 스펙 홍보에 치중된 현재의 중급이하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면서 30mm이상 F2.0이하의 단렌즈를 함께 구매하지 않는다면 초싣자들에게는 카메라로서 가지는 가치가 1인치 카메라에 비해 더 나은점이 없다는 뜻 입니다. 


최신미러리스의 광속 AF덕분에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훨씬 잘 찍을 수 있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분하게 따져봅시다. 어둑어둑한 실내나 방에서 아이를 찍는데 광속 AF의 F.3.5렌즈와 다로 느린 AF의 F1.8의 렌즈 중 어느쪽이 촬영자가 더 만족스러운 사진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용자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렌즈를 구매해서 확장 할 수 있는 가능성에 구매 이유를 찾는 것도 더이상은 의미 없습니다. 대부분의 초심자가 그 가능성에 혹해서 "일단"번들렌즈만 사고 결국 그렇게 계속 번들렌즈만 씁니다. 


앞으로 몇년 후 판도가 또 변할 수 도 있겠지만, 지금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려고 마음먹은 초심자 분들이 있으시다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려고 하고 있는지 따져보십시오. "사진이 잘나온다고 해서" 라면 그 잘나온 사진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따져보세요. 


내가 잘 나온다고 생각한 사진이 배경이 예쁘게 날아간 아웃포커싱 사진이라면 미러리스 카메라와함께 꼭 단렌즈를 함께 사세요. 그것이 아니라면, 미러리스 카메라 사지마시고 50만원 전 후의 1인치 하이엔드 카메라를 알아보는게 맞습니다. 현재의 미러리스 카메라는 렌즈를 교환해서 사용 하는 렌즈교환 카메라 일때만 그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웃긴건, 렌즈를 함께 살 경우 여러브랜드 중 미러리스 카메라 1위인 소니가 가장 좋지 못한 조건을 가진 브랜드라는 사실 입니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단지 그 카메라를 가지고 싶은 소유욕이 아니라면, 더 이상 신상 미러리스 카메라에 놀아나지 마세요. 본인이 누리고 싶은 가치에만 집중하세요. 

출처: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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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 VOGELSTEIN

Published: October 4, 2013 


Campbell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55 마일 길은 정말 멋지다. 산타 크루즈 산맥 동쪽과 인접한 광활하고도 비어 있는 고속도로인 Junipero Serra Freeway를 지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자기 페라리 자동차의 속도 테스트를 벌이는 실리콘 밸리 신생 기업 창업자들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휴대폰이 정말 안 터지는 최악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앤디 그리뇬(Andy Grignon)에게는 2007년 1월 8일의 순간을 되새길 완벽한 장소였다.


그가 원래 출근하는 길이 이 길은 아니다. 그는 Campbell 서쪽 동네에 있는 쿠퍼티노의 애플 수석 엔지니어였다. 그의 아침 출근길은 7 마일 정도, 15분 거리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의 보스이자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쇼에서 역사를 만들 스티브 잡스를 보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애플 팬들은 그동안 아이포드 안에 휴대폰 넣어주기를 잡스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그래야 두 가지의 기기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잡스가 그날 그 소원을 채워줄 작정이었고, 그리뇬과 그의 동료들은 근처 호텔에서 밤을 보낸 후, 그 다음 날 오전 10시에 다른 이들과 같이 잡스가 첫 번째 아이폰을 선보이는 광경을 지켜 봤다. 


하지만 북쪽으로 운전해 가는 느낌이 별로 흥분되진 않았었다. 오히려 무서웠다. 실리콘밸리에서 무대에서 선보이는 제품 대부분이 잘리기 때문이었다. 열악한 인터넷과 통신망 때문에 좋은 프레젠테이션이 왜 잘릴까? 그래도 잡스는 생방송을 고집했다. 그래야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제품 시연 중에 눈에 띄는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잡스 전설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그리뇬처럼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한 스트레스가 없었다.


그리뇬은 아이폰의 모든 주파수 대역의 라디오파를 맡은 관리자였다. 정말 큰 일이었다. 오늘날 휴대폰은 정말 유용한 존재이지만, 제일 기본 기능은 송수신 라디오였다. 그리뇬은 전화기가 전화기일 수 있게 만드는 장비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만약 통화가 안 된다거나 블루투스 헤드셋이나 와이파이가 안 되는 경우 그리뇬은 답변을 해야 할 위치였다. 아이폰 초기 엔지니어 중 하나로서, 그는 2년 반(종종 1주일 내내였다)을 이 프로젝트에 투신했다.


그리뇬은 아이폰 리허설 팀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잡스가 90분 동안 프레젠테이션하는 광경을 많이 봤지만, 실수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잡스는 5일 내내 기조연설을 연습했고, 심지어 리허설 마지막 날에 아이폰은 여전히 통화가 잘 안 되거나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고, 얼어서 꺼야 할 때가 있었다. 그의 말이다.


"처음에는 리허설 자체가 정말 멋진 일이었어요. 뭔가 선택됐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정말 참가가 허락된 인원은 소수였습니다만, 순식간에 그 느낌이 불안으로 바뀌었습니다. 잡스가 그토록 분노했을 때를 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는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단히 직접적이고 크고 엄중한 목소리로 '네가 내 회사를 [욕 삭제]되게 만들었어'라거나 '우리가 실패하면 너 때문이야'라 말했습니다. 그토록 진지했었죠. 키가 1인치로 줄어드는 느낌이랄까요." 


리허설에 참가했던 다른 이들처럼 그리뇬도 실제 프레젠테이션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잡스는 단순히 비난에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다. 


"시연을 100번 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매번 뭔가 문제가 생겼죠. 좋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최고 기밀 사항이었다. 목요일부터 그 다음주 말까지 애플은 모스코니(Moscone)를 모두 다 잡고 있었고, 무대 뒤에 애플은 아예 전자 연구소를 설치하여 아이폰을 테스트했다. 그 옆에는 잡스를 위해 소파가 설치된 휴게실을 세웠다. 이들 방 앞과 빌딩 주변에는 하루 24시간 내내 보안 경호원 열 댓 명이 서 있었다. 자신의 전자 체크 카드를 가지고 와서 잡스가 개인적으로 승인한 목록과 비교해서 통과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잡스가 리허설을 하는 곳은 소규모의 간부들만 볼 수 있었다. 잡스가 워낙 누출에 대해 집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애플이 고용한 모든 계약직들(부스를 담당하거나 프레젠테이션의 조명, 음성을 맡는 이들)마저 프레젠테이션 이전에는 모스코니 안에서 잠자게 하려 했지만, 보좌진들이 겨우 잡스를 설득 시켜서 그 일만은 막았다.


그리뇬은 아이폰이 평범한 제품 발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폰의 발표가 그렇게 중대한 순간이 될지 아는 이는 없었다. 7년 동안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이제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중대한 혁신의 반열에 올랐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더부룩했던 휴대폰 업계를 뒤바꿨다. 새롭고 거대한 이윤이 남는 소프트웨어 업계의 플랫폼을 제공한 것이 아이폰과 아이패드며, 모바일 앱은 2008년 판매를 시작한 이래, 10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고, 이는 수 십억 달러의 개인용 컴퓨터 업계를 뛰어넘는 실적이었다. 아이패드 판매를 데스크톱과 노트북에 포함한다면, 애플은 현재 지구상 최대의 PC 업체이다. 지난해 팔린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전세계에서 팔린 자동차의 두 배 이상인 2억 대 이상이다. 


그 충격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기도 하다. 애플의 혁신에는 인간이 머신과 어떻게 감응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단순히 마우스 대신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우리 두뇌의 확장이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식을 바꿨기 때문이다. 책과 신문, 전화기, 라디오, 테이프 녹음기,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나침반, 텔레비전, 비디오, DVD, 개인용 컴퓨터, 휴대폰 비디오 게임, 아이포드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보시라. 스마트폰은 이들 모두를 주머니 안에 집어 넣었다. 게다가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방식, 의사가 환자들을 다루는 방식, 우리가 여행하고 탐색하는 방식을 스마트폰이 바꿔버렸다. 오락과 미디어 접근과 경험 또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됐다.


그런데 애플은 여전히 포위돼 있다. 2007년 하순, 구글이 안드로이드 모바일 기기 및 휴대폰으로 세상을 지배할 계획을 발표했을 때, 구글은 아이폰과의 경쟁만 벌이려 하지 않았다. 구글은 실제로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성공을 거뒀다. 2010년부터 안드로이드는 유명세를 폭발적으로 확장 시켰으며, 구글의 전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80%에 달하고 있으며 애플은 20% 이하로 줄어들었다. 아이패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경향이 흐르고 있다. 2010년 아이패드는 태블릿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60%를 넘지 않는다. 안드로이드 태블릿들 때문이다.


애플 팬들이 제일 걱정하고 있는 바는 애플의 방향일 것이다. 잡스가 2011년 10월 서거했을 때 뭣보다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은 팀 쿡이 그를 계승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구라도 잡스를 이어 받을 수 있겠느냐였다. 잡스가 애플에 있을 때 애플은 혁신 머신이었다. 3년~5년마다 혁명적인 제품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전기작가인 월터 아이잭슨(Walter Isaacson)에 따르면 잡스는 TV 혁명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쿡의 애플은 아직 그런 제품을 선보이지 않았으며, 투자자들의 불안감도 그만큼 뚜렷해졌다. 애플 제품 발표는 으레 주가를 올렸었다. 9월 쿡이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 5c와 아이폰 5s를 발표했을 때 애플 주가는 10% 하락했다. 1년 전, 애플 주가는 주당 $702어서 애플이 세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기업이 됐지만 현재는 정상(頂上)에 있을 때보다 25% 하락한 상태다.


물론 스티브 잡스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 2년째 지나가면서 애플 CEO 쿡은 잡스가 자기에게 했던 말을 되새겼다. 잡스는 그에게 잡스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생각하지 말고, 쿡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행하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 아이폰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범상치 않은 힘, 도대체 복제해낼 수 없는 한 사내와 모든 것이 관련돼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아이폰을 선보이기로 한 결정은 분명 도박이었다. 잡스는 새로운 종류의 휴대폰(애플이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그 휴대폰은 잘 작동하지도 않는 프로토타입이었다. 비록 아이폰의 실제 판매는 6개월 후부터였지만 잡스는 세상이 곧바로 아이폰을 갖고 싶어하기를 원했다. 사실 작업이 더 필요한 부분은 실로 방대했다. 생산 라인도 세워야 했고, 화면과 플라스틱 접합 부분의 눈에 띄는 차이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으며, 화면상의 흠집도 발견됐었다. 게다가 휴대폰용 소프트웨어가 버그 투성이었다.


아이폰은 노래나 영상의 일부를 재생할 수 있었으나, 전체 클립을 안정적으로 재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메일을 보낸 후의 웹서핑 정도는 괜찮았지만, 그 반대 순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래서 엄청난 시도와 실수 끝에 엔지니어들이 일컫는 "골든 패스(golden path)"가 만들어졌다. 특정 방식으로 특정 순서에 따라 아이폰을 움직여서 마치 아이폰에 버그가 없는 양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잡스가 골든 패스를 따랐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아이폰에 대한 손질이 필요했다. 발표 당일, 그리뇬의 라디오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와 아이폰 메모리 관리 소프트웨어에는 버그가 여전했다. 게다가 잡스가 시연용으로 별도로 한 요구 때문에 문제는 더 악화됐다.


잡스는 무대 위에서 사용할 시연용 아이폰 화면을 자기 뒤의 대형 화면에 그대로 미러링 시키기를 원했다. 큰 화면에 기기를 비추기 위해, 기업들 대부분은 비디오 카메라를 제 위치에 붙이곤 하지만, 잡스는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 그 경우 조작하는 손가락이 보이기는 해도, 프레젠테이션의 외양을 망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잡스는 애플 엔지니어들에게 서킷 보드와 아이폰용 비디오 케이블을 고쳐서 무대에 그대로 시연이 가능토록 명령했다. 당시는 프로젝터에 비디오 케이블이 연결됐기 때문에 잡스가 아이폰의 달력 앱 아이콘을 터치할 경우 손가락은 나타나지 않고, 손가락의 명령에 반응하는 큰 화면 이미지가 무대 뒤에 떴다. 효과는 마술 같았다. 청중은 자기 손에 실제로 아이폰을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 아이폰의 다른 큰 문제점을 고려해 보면, 오류 없이 설정하기가 당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이폰의 와이파이 라디오 소프트웨어는 너무나 불안정해서 그리뇬과 그의 팀은 아이폰의 안테나를 무대 뒤의 전선에 연결 시킬 정도로 확대했다. 무선 신호의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해당 주파수에 대한 접근은 금지됐다. 그의 말이다. "심지어 베이스스테이션 ID을 숨긴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러니까 노트북의 무선 신호에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조연설 청중 5천명이 다 컴퓨터 광들입니다. 어떻게 신호를 해킹할 방법을 알아내겠죠." 그래서 그는 에어포트 소프트웨어를 수정하여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운영하는 것인 양 만들었다. 미국에서 허용 안되는 주파수를 일본 와이파이가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잡스가 무대 위에서 할 전화 송신이 잘 될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뇬과 그의 팀은 좋은 신호가 잡히기만을 기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폰용 통신사인 AT&T가 휴대용 통신탑을 가져왔기 때문에 신호 자체는 강력할 터였다. 잡스의 결재에 따라 그들은 신호 강도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막대가 실제 강도와는 관계 없이 언제나 다 채워지도록 했다. 90분의 기조연설 중 잡스가 전화기를 사용하는 동안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았지만 어느 때라도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높았다. 그리뇬의 말이다. "우리 의심대로 만약 라디오가 충돌돼서 재시작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실제 막대바를 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하드코딩을 하여 항상 다섯 개 막대가 보이도록 해 놓았죠."


그런데 아이폰 최대의 문제, 한 번에 몇 가지 이상 작업을 할 때 메모리 부족으로 재시동된다는 문제는 해결책이 없었다. 잡스는 이 문제의 관리를 위해 무대 위에 몇 가지 시연용 아이폰을 다 갖고 올라갔다. 한 기기의 메모리가 낮아진다면 첫 기기가 재시작할 동안 다른 기기로 바꿀 요량이었다. 그렇지만 잡스가 계획한 시연이 몇 가지 있었기에 그리뇬은 실패할 잠재적 시점이 너무 많다고 우려했다. 10여 가지 중 한 가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폰 최고의 기능이 같은 폰에서 같은 순간 일어나는 피날레 중에는 반드시 잘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음악을 재생하고 전화를 하며, 한 통화를 그대로 두고 다른 통화를 하고, 검색 및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면서 첫 번째 통화자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음악으로 돌아간다는 순서였다. 그리뇬의 말이다. "저와 팀원들 너무나 조바심을 가졌어요. 당시 시연용 아이폰 메모리가 128 메가바이트 뿐이었습니다. 128 메가바이트라면 커다란 디지털 사진 20여장 정도였어요. 아직 마감이 안 됐기 때문에 모든 앱에 버그가 여전했습니다."


잡스가 원래 배수의 진을 치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관리 감독으로 잘 알려졌으며, 직원들을 어떻게 몰아서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케 하는지 아는 인물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안 됐을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당시 애플에서 작업하고 있었던 유일한 멋진 무언가는 아이폰 뿐이었다. 아이폰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프로젝트였으며, 백업 계획도 없었다. 그리뇬의 말이다. "애플 TV나 아이폰이었습니다. 만약 맥월드에 애플 TV만 선보여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이튠스와 텔레비전에 연결되는 신제품만으로는 도대체 뭔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반응을 얻었을 겁니다."




자기 커리어에서 최대의 순간이 파멸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뇬은 위통을 겪을 정도였다. 2007년까지 그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애플이나 애플 제휴사에 두고 있었다. 아이오와 대학교에 다닐 시절인 1993년 그와 친구인 와일드(Jeremey Wyld)가 뉴튼 메시지패드를 재-프로그래밍하여 인터넷 무선 연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을 때도 그랬다. 뉴튼은 비록 제품으로서 성공하진 않았지만, 뉴튼을 최초의 주류 휴대용 컴퓨터로 간주하는 시각은 여전히 많다. 그리뇬과 와일드의 해킹은 그 시절 상당한 위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둘 다 애플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와일드는 실제로 뉴튼 팀에 들어갔다. 그리뇬은 애플의 그 유명한 진보기술그룹(Advanced Technology Group)에 들어가서 화상회의 기술을 다뤘다.


2000년 그리뇬은 전직 애플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설립한 Pixo로 옮겼고, 그곳에서 휴대폰 외 소형기기용 운영체제를 작업했다. 2001년 최초의 아이포드에 Pixo가 들어가자, 그리뇬은 다시금 애플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Pixo에서의 작업 덕분에 그는 화상회의 기술 말고도 컴퓨터 라디오 트랜스미터(와이파이와 블루투스), 그리고 휴대폰과 같은 휴대기기용 소프트웨어 작업이라는 유망한 분야 두 곳의 전문가가 돼 있었다. 그리뇬은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살고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대부분은 그들의 코드가 하드드라이브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거나 칩에 과부하를 준다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다. 데스크톱과 노트북 컴퓨터 하드웨어는 강력하고 수정이 자유로우며 저렴했다. 메모리와 하드 드라이브, 심지어 프로세서도 저렴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고, 벽의 전원이나 거대한 배터리에 컴퓨터를 연결해서 사용하던 때였다. 그리뇬의 임베디드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는 고정돼 있었다. 너무 큰 코드는 돌아갈 수 없었고, 특히나 노트북이라면 몇 분 정도 밖에 못 버틸 소형 배터리에는 하루 내내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이폰 작업 시작은 2004년 말에 이뤄졌으며, 그리뇬은 프로젝트 초기 엔지니어가 될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2007년, 그는 심정적으로 지쳤다. 몸무게도 50 파운드가 늘었다. 결혼때문이라 강조하지만 말이다. 아이폰 팀은 애초부터 휴대폰 만들기가 컴퓨터나 아이포드 만들기와는 전혀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었다. 그리뇬의 말이다.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애플에서 나올 차세대 빅 히트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심겨졌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모든 영리한 인물들을 매우 좁은 방 안에 다 집어 넣었죠. 그런 압박 하에 미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울정도로, 잡스는 이미 전화기 한 번 만들어 보라는 설득을 받아 왔었다. 전화기는 잡스의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 주제 중 하나였고, 애플이 아이포드를 만들었던 2001년부터 계속 제기돼 왔었다. 개념은 분명했다. 소비자들이 이메일과 사진, 음악용 기기로 하나를 원하지 두 세 개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잡스와 그의 경영팀이 그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알아볼 때마다 전화기 제조는 자살에 가까웠다. 휴대폰용 칩과 속도는 너무나 느려서 인터넷이나 음악, 영상 다운로드를 휴대폰 통신망으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메일 정도만 전화기에 붙일 만했지만 RIM의 블랙베리가 이미 그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뭣보다 잡스는 무선 통신사 그 누구하고도 파트너를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통신사들이 당시 휴대폰 업체와의 파트너십을 지배했으며, 그들이 통신망을 갖고 있기에 모든 것이 그들 마음이었다. 유명한 통제광으로서 잡스는 통신사에게 휘둘린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03년 모토로라 인수를 생각했다가 결국 당시 애플로서는 인수하기에 너무나 크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었다. (몇 년 후, 애플과 모토로라는 협력을 하기는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 가을, 통신사와의 사업 얘기가 좀 통하기 시작했다. Sprint는 통신망을 도매로 팔기 시작했으며, Sprint로부터 광대역을 사들였다가 되팔면 애플도 통신사("가상 이동망 사업자(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전화기를 만들어서 통신사와 논의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잡스 자신이 이사로 앉아 있는 디즈니는 이미 자사의 무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Sprint와 협상중이었다. 잡스는 애플도 이동망 사업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대단히 많은 질문을 했다. 결국 애플은 Cingular(후에 AT&T가 인수한다)와 2006년, 계약을 맺기는 했지만, 그러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 계약은 아이폰 자체를 만들기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수많은 간부와 엔지니어들은 아이포드의 성공으로 한껏 고양돼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 만들기는 조그마한 매킨토시 만들기와 비슷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그대신 애플은 2005년과 2006년, 세 가지 별다른 버전의 아이폰을 디자인했었다. 모 프로젝트 관련자에 따르면 애플은 당시 실제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을 6가지 만들어 놓았다. 각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이 각기 달랐다. 온힘을 다 쏟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폰이 실제 판매에 들어간 후, 회사를 나간 경우도 있었다.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이었던 터니 포델(Tony Fadell, 그도 2010년 Nest라는 자기 회사를 차렸다)의 말이다. "최초의 달 착륙과 비슷했습니다. 저도 이골이 나 있었습니다만, 새로운 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만 있을 수 없더군요."


잡스는 아이폰에 수정된 버전의 오에스텐(모든 맥에 탑재돼 있다)이 들어가기 바랬다. 그렇지만 아무도 오에스텐과 같은 거대한 프로그램을 휴대폰 칩에 올려 놓을 시도를 하지 않았었다. 오에스텐을 거의 1/10로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코드 수 백만 줄을 없애거나 다시 작성해야 했으며, 칩이 2006년에나 나왔기에 엔지니어들은 칩 속도와 배터리 수명을 시뮬레이션하여 작업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소비자용 제품으로 멀티터치를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정전식 터치 기술(손가락이나 전도성 물체가 하는 "터치") 1960년대부터 있었다. 단 손가락 두 세 개를 사용하되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정전형 멀티터치는 훨씬 더 복잡했다. 연구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으며, 애플이 아이폰에 터치 화면을 넣고 대량 생산하는 것이 큰 도전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감히 아무도 그런 데에 대량 투자를 할 자가 애플 말고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기술을 유리 안에 집어 넣어서 자동 수정이 이뤄지는 가상 키보드를 뜨게 하고 사진과 웹 페이지를 부드럽게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도 문제였다. 즉, 제대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을 만들기가 대단히 비쌌다. 그런 멀티터치 화면을 대량 생산한 경험이 있는 생산라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비자용 전자제품에서 터치스크린은 보통 스타일러스나 손톱을 통해 조작하는 감압식이 대세였다. (Palm Pilot과 Palm Treo같은 기종들이 이 기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설사 멀티터치 아이폰 화면을 만들기 쉽다 하더라도, 화면상 키보드나 "탭으로 확대하기" 등과 같은 기능이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일지에 대한 확신도 분명치 않았다.


2003년 초, 애플 엔지니어들은 태블릿에서 멀티터치를 어떻게 구현할지 알아냈다. 당시 프로젝트 참여자 중 하나였던 스트리콘(Joshua Strickon)의 말이다. "스티브는 화장실에 있을 때 이메일을 볼 수 있는 장비를 원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제품 사양이었죠. 하지만 충분한 배터리 없이는 만들 수 없었습니다. 유용하도록 충분한 그래픽 성능을 낼 칩도 구할 수 없었죠. 뭘 할지 일단 정리하는 데에 시간을 매우 많이 보냈습니다." 2003년 애플에 들어오기 전, 스트리콘은 MIT 석사 논문을 위해 멀티터치 장비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애플 내부부터 그와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프로토타입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는 2004년 그 기술 갖고 애플이 아무것도 못하리라 예상한 채 애플을 떠났다. 


당시 애플의 수석 간부진 중 하나였으며 애플 내 최대의 멀티터치 옹호자였던 부커(Tim Bucher)는 프로토타입이 사용한 소프트웨어인 오에스텐이 손가락이 아니라 마우스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프로토타입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맥미니와 비슷한 10인치, 혹은 12인치 화면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다른 멀티터치 제스처를 이 화면에서 돌려야 했죠. 한 시연에서 키보드 애플리케이션이 밑에서 나오는데 2년 후에 나올 아이폰과 대단히 유사한 모습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쁘지가 않았어요. 무슨 선을 감은 것 같았어요."


잡스가 2005년 중순, 멀티터치 아이디어를 강하게 추진하기 전까지, 터치스크린 기술이 새로운 종류의 휴대폰의 핵심 기술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퍼델의 말이다. "잡스가 한 번은 제게 이리 와 보라더군요. 작업하는 것이 있는데, 무슨 생각이냐, 우리가 이걸로 휴대폰을 만들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이 이어졌어요. 잡스가 가리키고 있는 시연을 보니까 거대했어요. 방을 다 채울 정도였죠. 천장에 프로젝터가 달려 있었고, 이 프로젝터는 맥 화면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한 3이나 4 스퀘어피트 정도 됐을까요. 맥 화면을 터치해서 물체를 움직이거나 그릴 수 있었습니다." 퍼델은 터치스크린 프로토타입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는 몰랐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맥 제품이기 때문이었고, 그는 아이포드 책임자였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앉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논의를 시작했죠."


퍼델은 그토록 거대한 프로토타입을 휴대폰을 줄이고, 또 대량생산까지 할 수 있을지 강한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는 스티브 잡스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기보다 더 알고 있었다. 그는 애플의 수퍼스타 중 하나였으며, 최초의 아이포드 제작을 돕기 위해 애플에 2001년에 처음, 고문으로 들어왔었고, 골치 아픈 기술적 문제 앞에 소심한 인물이 아니었다. 2005년까지는 아이포드 판매가 치솟았고, 이제 36세인 그는 이제 애플 내 간부진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 돼 있었다. 그의 말이다.


"어떻게 할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만, 방을 다 채울 정도로 거대한 특별한 기기를 작게 만들고, 그것을 또 백만 대 수준으로 비용-효율적이면서 신뢰감 있는 생산이 가능할지가 고려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 목록부터가 아주 길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유리 기술이 있는 LCD 업체에 가서 그들 라인에 남는 시간이 있는지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터치스크린을 만드는 픽셀 전자의 알고리즘을 보정하고 보상하는 알고리듬도 알아 봐야 하죠."


"즉, LCD가 우선 문제였습니다. 터치스크린 기기를 만들기 위한 전체적인 프로젝트였어요. 실제로 터치스크린을 만들 두 세 가지 방법을 고려해 봤습니다만,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이어야 했습니다."


오에스텐을 줄이고 멀티터치 스크린을 제조하기란 혁신적이기는 해도 어려웠다. 적어도 기업으로서 애플이 당시 갖고 있던 기술로는 말이다. 오에스텐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서 집어 넣어줄 회사는 애플 말고 없었다. 액정이야 모든 노트북과 아이포드에 LCD를 넣으니 LCD 업체들을 애플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휴대폰은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그리고 2006년 아이폰 작업을 하고 나서야, 애플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애플은 실험실과 장비를 지어서 아이폰 안테나를 테스트했다. 인간 머리 모형도 만들고 인간 두뇌를 모방하기 위해 끈적거리는 것까지 머리 모형 안에 집어 넣었다. 전자파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한 수석 간부는 최초의 아이폰을 만드는 데에만 들어간 비용이 1억 5천만 달러를 넘었으리라고 관측했다.


잡스는 아이폰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실제 제품화된 것과 유사한, 오에스텐을 돌리는 터치 스크린형 아이폰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렇지만 2005년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애플 최초의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잡스가 실제로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장난 삼아 보여줬던 다이얼 달린 아이포드에 더 가까웠다. 그리뇬의 말이다. "시장에 내보낼 쉬운 방법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처럼 쿨하지는 않았죠."


두 번째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2006년 초에 나왔으며, 잡스가 실제로 선보인 것에 훨씬 가까운 형태였다. 터치스크린과 오에스텐이 들어갔지만, 브러시드 알루미늄으로 제조했었다. 잡스와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는 알루미늄 디자인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들 둘 다 라디오 전파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며, 그들이 아름다운 벽돌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 라디오파는 금속을 잘 통과하지 못한다. 2008년에 애플을 떠난 엔지니어인 키어니(Phil Kearney)의 말이다. "저와 애플의 안테나 전문가인 카발레로(Ruben Caballero)가 이사진 방에 올라가서 스티브와 아이브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금속을 라디오파가 통과 못 한다고요. 설명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디자이너들 대부분은 예술가이거든요. 그들이 공부했던 과학은 중2때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애플에서 권력자는 디자이너에요. 그래서 '라디오파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라고 질문들 합니다. 왜 안 되는지 설명을 해 드려야 하죠."


당시 애플의 하드웨어 책임자였던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은 전화기 크기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도 매우 길었다고 말했다. "저는 아이포드와 마찬가지로, 아이폰과 아이폰 미니, 두 가지로 나와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하나는 스마트폰으로, 하나는 그냥 전화기로 하면 된다 여겼거든요. 그렇지만 작은 쪽은 주목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서는 하나에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야 했어요."


아이폰 프로젝트는 너무나 복잡해서 애플 전체에 위협을 가할 때도 종종 있었다. 애플 내 수석 엔지니어들이 아이폰 프로젝트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다른 일의 시한을 늦춰야 할 때가 발생해서였다. 아이폰이 애플을 다 덜어내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애플은 당시 대규모적인 제품 발표를 아이폰 외에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이폰 프로젝트의 한 수석 간부에 따르면 아이폰이 실패할 경우, 애플의 수석 엔지니어들이 실패 때문에 좌절하여 애플을 떠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온갖 기술적 난관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잡스의 비밀주의였다. 주당 80 시간을 일하는데 지쳤어도 아이폰을 작업하는 수 백 명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은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친구들과 바에서 대화하거나, 배우자에게 얘기하는 장면을 애플이 본다면, 곧바로 해고도 가능했다. 혹시 한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싶냐고 물어볼 때, 현재 속한 팀 사무실 내에서도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비공개 서약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그 프로젝트가 뭐냐고 물어 보면, 별도의 비공개 서약에 서명을 하여 프로젝트가 뭔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는 서류를 다시 만들어야 했었다. 지난 10월까지 애플 iOS 소프트웨어 책임자이자 수석 부사장이었던 스콧 포스탈의 말이다. "아이폰 빌딩인 자주색 빌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인을 해야 했어요. 거기는 '파이트 클럽'이라 불렸습니다. 파이트 클럽의 첫 번째 규칙은 아무에게도 파이트 클럽을 얘기하지 않는다였잖습니까." 


포스탈은 2012년 애플 대 삼성 재판에서 증언도 했었다. "스티브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작업을 위해 애플 외부 고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회사 내부에서 고용을 하라 일러뒀죠. 그래서 저는 몇 사람 제 사무실로 불러서 앉힌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네들이 현재 역할에서 수퍼스타들인 셈인데,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여러분이 고려해 주기 바라지만 그것이 뭔지 알려 줄 수는 없다.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퇴근과 주말을 포기해야 하며, 다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초기 아이폰 엔지니어의 말이다. "와아피이 라디오 칩은 Marvell에서, 블루투스 라디오 칩은 CSR에서 만들었죠. 그들도 자기네들이 뭣 때문에 칩을 공급하는지 몰랐었어요. 그저 새로운 아이포드를 만들겠거니 여겼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가짜 도해와 가짜 디자인을 제공했었어요. 그런데 아이폰 다음 날 다들 말하는 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그리뇬은 애플이 심지어 출장가는 직원들 회사를 바꿔서 출장 보낼 때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Cingular로 갈 때 그랬다. "프론트나 우연히 만날 모두가 애플이라는 이름을 안 보기를 원했죠."


비밀주의에 대한 잡스의 집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있다. 애플 본사 내의 폐쇄된 구역이다. 아이폰 참여자가 아니면 아예 갈 수가 없는 구역이다. 그리뇬의 말이다. "스티브가 이런 걸 좋아했습니다. 부서 만들기를 좋아했죠. 하지만 거대한 [욕설 삭제] 뭔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회사 내 록스타들이 저기 다 모여 있는 거 뻔히 알지만 보려고 가 보면 당신은 접근권이 없다고 못 들어가는, 그런 식이었죠. 느낌은 안 좋았습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 스스로도 서로 간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전자 부문을 디자인하는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를 볼 수 없었고, 테스트를 위해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경우, 실제 코드가 아니라 프록시 코드를 받았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소프트웨어를 작업한다면 하드웨어 성능 평가를 위해 시뮬레이터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조너선 아이브가 있는 2번 빌딩의 1층이 있다. 잡스의 최측근들 말고는 누구도 그곳을 방문할 수 없었다. 아이브의 프로토타입을 둘러싼 보안은 너무나 엄격해서, 들어가려 할 때 인증을 못 받으면 곧바로 보안 요원이 들이닥치리라고 믿는 직원들도 있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받은 첫 번째 임무가 아이폰이었던 한 엔지니어의 말이다. "피할 수 있으면 된다는 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상했습니다. 로비 바로 앞에 거대한 금속문이 달려 있어요. 지금이나 그 때나 문이 열려 있으면 들여다보려 할 겁니다만, 그 이상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포스탈은 증언하는 동안 "카드 기록"을 4번 해야 하는 연구실이 있다고 말했다.


잡스의 시한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나 강해서 평범한 토의도 이내 싸움박질로 변하기 일쑤였다. 기진맥진한 엔지니어들은 일을 그만 뒀다가 잠 좀 자고 며칠 후에 다시 출근하곤 했다. 포스탈의 보좌 수석이었던 보랏(Kim Vorrath)은 한 번 너무나 문을 세게 닫는 바람에 아예 방에 갇혀 버린 적이 있어서, 동료들이 한 시간도 넘게 그녀를 꺼내 주려 한 적도 있었다. 그리뇬의 말이다. "우리 모두 서서 지켜 봤었죠. 재미있기도 했지만, 일단 물러서서 [욕설 삭제] 도대체 뭔지 알아야 하기도 했으니까요."


2007년 1월 9일, 잡스가 아이폰을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2년 반 동안 꿈꿔 왔던 날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비자들이 어째서 자기 휴대폰을 싫어하는지 잔뜩 이야기를 들려 줬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모든 문제를, 분명히 풀어냈다고 말했다. 


잡스가 아이폰으로 음악과 영상을 재생하고 아이폰의 아름다운 화면을 보여줬을 때, 그리뇬과 다른 이들은 청중 속에서 초조해 하며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발명해낸 주소록과 보이스메일을 보여 주며 전화를 걸었고, 문자와 이메일을 보냈으며, 터치-스크린 키보드가 얼마나 타자 치기에 쉬운지도 보여줬다. 그는 여러 사진을 스크롤 하면서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크게, 작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지 보여주고, 뉴욕타임스와 아마존 웹사이트를 보여 주면서 아이폰용 인터넷 브라우저가 자기 컴퓨터의 브라우저만큼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구글 지도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하고는 무대 위에서 스타벅스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폰이 없으면 왜 안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이 되자 그리뇬은 안도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예 그는 취했다. 스카치 한 병을 사서 자신의 초조함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다. "엔지니어, 관리자 등 우리 모두는 다섯 번째 열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연이 끝날 때마다 스카치 한 잔씩 했죠. 대 여섯 명 쯤 있었을 겁니다. 시연이 한 번씩 지날 때마다 해당 기능 책임자가 원샷 했어요. 마지막이 되자 우리는 스카치를 다 비웠습니다. 모두가 잘 흘러갔고, 정말 우리가 봐 온 시연 중 최고였어요. 나머지는 그냥 전체 아이폰 팀에게는 [욕설 삭제] 날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도시에서 하루 내내 마시며 보냈어요. 엉망진창이었지만, 정말 근사했습니다."


Fred Vogelstein is a contributing editor for Wired. His book “Dogfight: How Apple and Google Went to War and Started a Revolution” will be published in November.


Editor: Dean Robinson


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s in print on October 6, 2013, on page MM36 of the Sunday Magazine with the headline: AND THEN STEVE SAID, ‘LET THERE BE AN iPHONE’.


http://www.nytimes.com/2013/10/06/ma...nted=all&_r=3&

출처: http://www.albireo.net/threads/41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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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인터넷 산업의 세계 최강국이라 자부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5G 무선 인터넷망 구축 계획을 자랑하고, 싸이월드는 페이스북보다 5년 먼저 소셜네트워크 문화를 구축했으며, 온라인 게임은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스포츠리그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인터넷 문화의 다른 면은 분명 암흑기에 빠져있습니다.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세계 각국의 인터넷 자유도를 보면 한국의 인터넷은 “부분적 자유”로 분류되고 (관련 뉴스페퍼민트 기사)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의 “인터넷의 적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검열 수준은 이집트, 태국, 러시아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됩니다. 미래지향적인 문화의 한국에서 인터넷은 되려 퇴보하고 있는 걸까요?


작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 페이지 23,000개를 삭제하고 63,000개의 페이지를 차단했습니다. 음란물과 도박을 막기 위해 설립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민간 독립기구지만 대통령이 위촉한 9명 심의위원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자정 넘어 16세 미만 청소년의 게임접속을 차단하는 ‘셧다운제’가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언론을 차단하고 (공식적으로 휴전 중이기에) 디지털 지도 정보를 공유하는 데도 제약이 가해집니다. 그래서 구글맵은 한국 내에서 네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죠. 2010년 UN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사실상의 국가 검열조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2011년 박경신 방송통신 심의위원은 남성의 음부를 드러낼 수 없다는 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하기 위해 블로그에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 그림을 올렸다가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2012년 15세 프로게이머가 프랑스 시간으로 진행된 스타크래프트 경기 도중 한국시간 자정을 넘겨 게임이 강제종료되고 결국 패한 사건도 있었죠. 같은 해 트위터에서 북한의 트위터 계정을 조롱하며 리트윗한 사진가가 10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습니다. 2008년에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원화가치 하락을 예고한 박대성 씨(필명 미네르바)가 “허위사실 유포”죄목으로 104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인터넷은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2004년 선거에 관해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네티즌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했습니다. 2009년에는 하루 10만 명 이상 방문자를 갖춘 웹사이트에 댓글을 다는 모든 네티즌에게 같은 법이 적용되었다 결국 폐지되었죠. 그렇다고 인터넷에 대한 감시를 늦춘 건 아닙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2011 년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담당하는 조직을 신설하여 전년 대비 13배로 증가한 4,500개 답글을 삭제하였습니다. 국가정보기관의 요원들은 2012년 선거 당시 현 박근혜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해 인터넷 댓글로 여론 몰이를 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있습니다. 작년 12월 박대통령은 철도민영화와 관련된 논의 과정에서 정부는 “소셜 미디어에 허위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속도를 누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아직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The Economist)


원문보기

[출처: http://newspeppermint.com/2014/02/13/korea-internet-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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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유명 과학매체 파퓰러사이언스는 인간 뇌에 천재성 발현에 대해 다뤄 흥미를 끌었다. 

극히 일부 뇌손상 입는 사람들에게서 기이한 놀라운 능력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 예로, 2006년 세일즈관련 직의 데릭 아마토(39세)는 수영장에서 친구들과 놀다 수영장 바닥에 부딪혀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중증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그는 그 후, 기억상실과 청력의 30%이상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놀라운 일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그가 관심도 없었던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룬 것이었다.

 

이렇게 장애 가진 사람 특정 부분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을 [서번트 증후군],

그런 사람을 흔히 '서번트(savant)'라 불러진다.

 

이러한 우연한 뇌사고로 후천적 천재성을 보인 현재 공식 알려진 사례로만 30여건 이상 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들 능력은 예술 분야 음악, 미술 뿐만 아니라 수학, 그리고 뛰어난 기억력 등이 나타났다고 한다.

 

무엇이 그런 서번트를 발생케 하는 것일가?

그에 대해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관련 흥미로운 것으로 일련의 과학자들이 '인간 뇌에 숨겨진 천재성'이 있지 않을가'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로 캘리포니아대학 행동신경학자 브루스 밀러는 그의 연구에서 치매를 보이는 노인들 중에 특별한 재능이 나타나는 사례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과 서번트들과 유사함을 발견한 것.

즉, 치매로 언어, 고수준 명령처리 등 담당 뇌가 퇴행하자  에술적 재능이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인간의 특정 능력 향상 시킬때 뇌피질을 그 부분에 할당하는 뇌작용(신경가소성)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밀러 교수는 서번트 경우 그와는 다른 구조의 '좌뇌와 우뇌'의 제어때문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논리적 등을 관장하는 좌뇌 힘이 저하되자, 창의력 등 예술부분 우뇌가 활성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즉, 보통 뇌는 효율성을 위해 신경회로들이 서로 연결 또는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뇌질환자(치매)나 서번트들 뇌는 그런 억제가 사라지자 예술적 부분이 표출된 것이란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는데, 

미국 미주리대학 신경학자 베리트 브로가드 교수는 그러한 뇌손상-천쟁성 발현을 '뇌충격에 의한 신경전달물질 방출'때문으로 보았다.

즉, 충격에 의해 강력한 신경물질이 대량 방출되 뇌의 여러 부분을 재배열시켜 그동안 사용되지 못한 부분이 활성화 된 것이란 것이다.

 

그 예로, 앞서 아마토 경우,

그는(베리트) 아마토가 아마 무의식적으로 여러 음악을 뇌에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뇌에 충격 당한후 신경망이 재열되, 그러한 저장된(잠재된) 음악에 접속 활성화 시켰을 것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의 뇌에서 그런 서버트적 능력을 발현시킬 수 없을가?

 

그 관련 호주 시드니대학 신경학자 '엘런 스나이더'가 있는데, 그는 대다수 학자들이 꺼려하는 정상인의 뇌에서 천재성을 끌어내는 부분까지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작년 연구보고서는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그의 실험에서 28명의 피실험자로 하여금 처음 아주 어려운 기하학 문제를 풀게 하였다고 한다.

예상대로 모두 풀지 못하였다.

이후 그피실험자들의 뇌를 경두개 전류자극을 이용해 그들 뇌 일부를 마비시켰다.

- 그것은 서번트들에게 나타난 영역.

 

그러자, 놀랍게도 그 시행 받은 피실험자들 40%이상 그 문제를 풀었다.

반면, 시술받지 않는 그룹은(다른 처리받은) 여전히 전혀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이의 실험은 서번트에 나타난 뛰어난 재능 등은 누구나 잠재되 있으며 적절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스나이더 박사 등은 믿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뇌의 비밀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또한 인간에 대한 높은 위험성과 윤리적 문제로 대다수 학자들이 그러한 연구를 꺼리고 있어, 뇌에서 천재성 발현 방법이나 도구는 먼 이야기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여러 뛰어난 잠재능력들을 가지고 있음을 위의 연구들은 보여준 것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켤(발동시킬) 킬스위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줄 모른다. 

http://blog.naver.com/paust21/5016732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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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과 구리, 심지어 은을 습지의 이끼를 적용해 폐수에서 얻어낼 수 있습니다. 이끼의 놀라운 특성에 대해서 시베리아 학자들이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바이칼호 습지에서 실험을 진행한 결과 이탄이 이 금속들과 일부 다른 금속의 이온을 잘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습지는 시베리아지방에서 담수의 주요원천이며 그 저장량은 수십만 입방미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습지로부터 많은 하천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서부시베리아의 유명한 와슈간 습지는 면적으로 보아 스위스보다 더 큽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입니다. 이탄의 광범위한 량은 공기의 탄소를 흡수하는 것으로 온실효과를 방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러시아전문가들은 습지의 또 하나의 특성을 발견했습니다. 습지는 희귀금속을 <채취하는>성분을 소유하고있습니다. 그들은 바이칼호 지방 브드린 습지에서 아연과 구리의 이상적 집중을 발견했습니다. 건 물질 1천 톤 에 500-600 그램의 금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알아본즉 금속은 식물의 세포벽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은의 보유량은 현저히 적었으며 오직 0,4그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수도 희금속에 있어서 높다고 해야겠습니다. 지각에 그 보유량은 1톤 당 평균 오직 0,07그램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금속<채취자들>의 놀라운 성분에 대해서 러시아과학원 지질학 및 광물학연구소 보리스 셰르바 연구사가 본 방송과의 회견에서 말했습니다.


<이끼의 세포구성이 그렇습니다. 실례로 풀은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습니다. 만일 풀에 먼지와 함께 무엇인가 내렸다해도 나중에 물로 씻어집니다. 그러나 이끼는 이것을 흡수해 축적하고 있습니다.>


금속을 축적하는 것은 식물의 보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끼는 지나치게 많은 은 집중이 해롭기 때문에 벌써 세포벽에서 보다 덜 해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독물질의 흡수를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식물들은 사람들도 유독 물질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습니다. 통례로 산림들을 지구의 폐로 부르고 있지만 사실 이끼들이 바로 산업적 분출물의 유독성에 대처할 수 있으며 대형 화재의 영향을 극소화할 수 있게 한다고 보리스 셰르바는 설명합니다.


<2010년 모스크바에서 그리고 올해 여름에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때 세슘, 스트론튬, 플루토늄, 납, 카드뮴, 수은, 비소 등은 에어러졸 형태로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에 날렸습니다. 이끼들은 상공에서 날리는 이 모든 해로운 물질들을 흡수하는 성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끼는 생물화학적 장벽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끼의 성분은 오염된 물이나 폐수 정수에 사용될 수 있으며 산업폐수와 폐물에서 일부 희금속을 얻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희금속은 이끼에 보다 원유에 몇 십 배로 더 많이 보유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원유는 전략적 연료이며 재생되지 않습니다. 대신 시베리아의 습지들은 1만 년 전에 발생했으며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습지의 75%는 나이가 500년을 넘지 않습니다. 없지 못해 장래에 이끼로 광물을 채취하는 기술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러시아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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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항공기가 널리 사용되기 전이나 그 성능이 미약했을 때 거대한 풍선이라고 할 수 있는 비행선 (Airship) 은 운송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힌덴부르크호 참사 이후 비행선의 시대는 저물었고 그 자리에 대신 대형 점보 여객기들이 하늘을 누비고 있습니다. 

  

힌덴부르크호 같은 비행선 참사는 수소 대신 헬륨 가스를 사용하므로써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비행선은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그 크기 때문에 측풍에 약해 지상에서 고정하는데 꽤 애를 먹을 수 있으며 속도 역시 시속 100 - 200 km 수준이 최고라 현대의 아음속 제트 여객기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장점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비행선은 오랬동안 공중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관광용으로 적합하며 무엇보다 자체적으로 부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공중에 뜨기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같은 거리를 이동한다면 항공기 대비 에너지 효율이 매우 높습니다. 또 공중에서 호버링 하는 경우에도 훨씬 안정적이며 헬기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또 헬기처럼 바로 아래에 아주 큰 풍압을 가하지 않는 장점도 있어 특수한 용도로는 매우 이상적입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고르 파스테르나크 (Igor Pasternak) 가 창립한 Aeros 사는 비행선 및 개인 비행기등을 생산하는 회사로 비행선 부분에 상당한 노하우를 가진 회사입니다. 현재 CEO 이기도한 이고르 파스테르나크의 꿈은 초대형 비행선을 이용해서 화물 및 사람을 수송하는 미래입니다. 수년전부터 거론된 에어로스사의 Aeroscraft Heavy Lift Air Vehicle 의 프로토 타입인 드림 드래곤 (Dream Dragon) 이 이제 비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드림 드래곤 프로토 타입  Credit : Aeros


 

 

이 프로토 타입은 2013 년 비행 예정이며 거대한 행거 안에서의 테스트는 완료했습니다. 실제 2배 크기인 완성형은 2016 년 비행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풀스케일 Aeroscraft 는 4800 km 의 항속 거리에 66 톤의 화물을 실을 수 있으며 최고 시속 140 마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화물 수송기에 비해 인상적인 능력은 아니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비행선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특수한 환경에서의 화물 수송입니다.  

 

예를 들면 현대의 대형 풍력 발전기들은 거대한 블레이드를 수송하는데 매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지름 100 미터 이상급 풍력 발전기도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를 그 위치까지 수송하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형 비행선이라면 어디든지 수송이 가능합니다. 또 석유나 가스 파이프의 경우도 비슷한데 접근 도로도 없는 오지라고 해도 비행선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지상에서 거대한 터빈 블레이드를 수송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점차 블레이드가 커지면서 이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  Turbine Blade Convoy for Scout Moor Wind Farm passing through Edenfield   Credit : Paul Anderson)  



(Credit : Aeros)

  

그외에도 쉽게 화물을 수송할 수 없는 산꼭대기에 건물을 짓거나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경우라든지, 비행기가 내릴 수 없고 헬기로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지역에 물자를 수송하는 용도로 안성맞춤입니다. 예를 들어 밀림 한가운데서 벌목을 하는 경우 벌목 자체보다 접근 도로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나무를 베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비행선으로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고 대신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른다면 훨씬 친환경적 벌목이 가능합니다. 

 

에어로스는 미래에 500 톤급의 초대형 비행선에 대한 꿈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꿈은 이전에 DARPA 의 지원하에 등장했던 왈루스 (Walrus) 비행선의 후속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초대형 비행선을 군사적인 수송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2010 년 계획이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하려고 했던 기술들이 에어로스크래프트 비행선에 적용될 것이라고 합니다. 

  

에어로스의 비행선은 이전에 비행선에 비해서 한가지 기술적 혁신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부에 헬륨 가스를 따로 저장하는 밸러스트 탱크가 있어 화물을 탑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체적으로 부력을 조절해서 안전하게 착륙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과거 비행선의 경우 부력 조절이 힘들어서 화물을 실지 않은 상태에서는 위로 날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지상요원들이 이를 고정하기 위해 잡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행선 유지 운영에 너무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에어로스크래프트의 신형 비행선은 내부의 헬륨 가스를 압축해서 스스로 부력을 조절할 수 있어 필요한 인력을 대폭 줄였다는 것이 제조사 측의 설명입니다.  

 

대형 비행선이 실제로 다시 상용화 된다면 생각보다 응용범위가 꽤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에어로스 이외에도 몇몇 회사들이 다시 비행선 르네상스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 중인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목됩니다. 

 

참고  

http://www.aeroscraft.com/

http://www.prweb.com/releases/2013/1/prweb10314373.htm

http://en.wikipedia.org/wiki/Aeroscraft

- 고든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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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가 미국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최근의 한 시장조사에의하면 LG가 지난 12월 핸드폰 시장 (스마트폰 + 피처폰)에서 점유율 13%로 애플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LG는 2011년 3분기 까지는 2위자리를 고수하였으나 iPhone 4S가 나온 이후에는 애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LG는 최근 Optimus G 스마트폰이 선전하고 있고, 구글과 손잡고 만든 넥서스 4도 시장에서 품귀현상이 일어날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삼성과 애플에 밀려 스마트폰 시장에서 상당히 고전해왔던 LG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http://techneedle.com/?p=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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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스마트폰 게임인 템플런의 후속작인 템플런 2가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목요일 애플 앱스토어에 출시된 이 게임은 불과  4일만에 2천만 다운로드를 달성하며 신기록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Imangi Studios가 만든 이게임은 주인공이 장애물을 피해 끊임없이 달려가거나 점프를 하는 게임으로, 템플런 2에서는 언덕, 곡선 길, 계단, 카트 타기등 다양한 재미요소가 추가되었다.


Imangi Studios는 워싱턴 DC 지역의 한 부부가 창업한 회사로 아직 직원이 몇명되지 않는 소규모 업체이지만, 템플런에 이어 템플런 2도 큰 인기를 끌고 있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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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애플의 인재를 지키기위해 다른 회사에 협박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낸일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2007년 잡스가 Palm의 CEO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Palm의 임원들이 조직적으로 애플의 인재를 빼내가고 있다’고 전제하고 양 회사간 서로 인재를 빼와서 고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Palm이 응하지 않을 경우엔 특허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암시를 내비쳤다. 회사들끼리 서로 상대방의 회사에서 인재를 고용하지 않기로 협약하는 등의 행위는 공정 경쟁을 방지하는 일로 미국 많은 곳에서 불법으로 알려져 있다. 애플 이외에도 지난 4-5년간 인텔, 구글, 어도비등 굵직 굵직한 회사들이 최고위 층에서 암암리에 비슷한 협약을 맺은 일이 있어 당국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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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전한 4 Gamer.net 등은 이 장치의 상용화가 언제인지는 공개된 바 없지만 2013 년 4월 27일 에서 5월 2일 사이 파리에서 개최되는 컴퓨터 과학 컨퍼런스 AMC CHI 2013 에서 상세 발표가 있을 지 모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올해 E3 즈음 공개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도는 차세대 XBOX 와 연동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PC 와의 연동 역시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데 색다른 게임 경험을 원하는 유저들에게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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