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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부학에 따르면, 사람 몸의 근육 구조는 두 종류가 있다. 근육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 매끈매끈한 실들을 보여주는 민무늬근이 있고, 가장 작은 부분에서 규칙적인 가로무늬를 보여주는 가로무늬근이 있다. 그런데 민무늬근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근육이다. 예를 들어 매끄러운 내장의 근육은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으깨어진 음식물을 앞으로 밀어 보내는데, 인간의 의지는 이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밖에 눈의 홍채에 있는 근육도 매끄럽다. 눈은 이 홍채 근육에 의한 움직임을 통해서 적은 빛에 노출되면 동공이 확장되고 많은 빛이 흘러들면 동공이 수축된다. 이런 움직임 또한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반면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움직임을 조정하는 근육, 예컨대 팔다리를 움직이는 근육은 가로무늬근이다. 심장은 근육이면서도 이런 일반적인 특성에서 예외인 경우이다. 현재의 인간 발달기에는 심장이 의지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심장은 가로무늬근이다. 정신과학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제시한다. 심장이 늘 지금처럼 그렇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심장은 미래에 전혀 다른 형태와 변화된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심장은 수의근이 되어가는 중이다. 미래에 심장은 인간 내면의 영혼적 충동의 결과가 될 그런 움직임을 실현할 것이다. 바로 지금 심장은, 심장의 움직임이 현재 팔을 들어 올리거나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의지의 표현이 될 미래에 얼마만한 중요성을 가질 것인지를 이미 그 구조를 통해 보여준다.


심장을 이와 같이 바라보는 것은, 이른바 혈액 순환과 심장의 관계에 대한 정신과학의 포괄적인 인식과 관련이 있다. 기계론적 · 물질주의적 생명론에서는 심장을 규칙적으로 혈액을 온몸에 보내는 일종의 펌프 장치로 본다. 여기서는 심장이 혈액 이동의 원인이다. 정신과학적인 인식은 매우 다른 것을 보여준다. 정신과학적 인식에서 혈액의 맥박과 전체적인 내적 가동성은 영혼적 과정의 표현이자 작용이다. 영혼적인 것은 혈액이 특정한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이다. 공포감으로 얼굴이 하얗게 되고 부끄러움을 타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핏속에서 영혼적 과정들이 거칠게 작용한 결과이다. 핏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혼 활동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표현일 뿐이다. 다만 혈액의 맥박과 영혼의 내적 자극들 사이의 관계가 신비스러울 만치 아주 깊을 뿐이다. 그리하여 심장의 움직임은 맥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미래에는 심장이 인간의 영혼 속에 짜 넣어진 것의 효과를 자발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외부세계로 운반할 것이다.


·········· 발달의 오르막에 있는 또 다른 기관이 호흡기관, 그러니까 발화 도구인 호흡기관이다. 오늘날 인간은 이 호흡기관을 통해서 자신의 사고를 공기의 파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내면에서 체험하는 것을 외부 세계에 새겨넣는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인 체험을 공기의 파동으로 변화시킨다. 이 공기의 파상운동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의 재현이다. 미래에 인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내적인 본성을 점점 더 많이 바깥으로 형상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방향의 발달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날 결과는 인간이 완벽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의 발화기관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 - 자기 같은 사람 - 을 산출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발화기관들은 미래에 생식기관을 자기 안에 배아로 품고 있다. 그리고 남성 개체의 경우 사춘기에 변성(목소리의 변화)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발음 도구와 생식의 본질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관계의 결과이다.


·········· 내가 어떤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해 곧바로 어떤 판단을 내린다고 가정하자.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동일한 사태에 관해 첫 번째 소식과는 일치하지 않는 더 많은 소식을 듣게 된다. 이 때문에 나는 이미 내린 판단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 불리한 영향이 미친다. 맨 처음에 판단을 자제했더라면, 완전히 확실한 판단 근거를 가질 때까지 일 전체에 관해 내적으로 생각하는 데에서나 외적으로 말하는 데에서 ‘침묵’했었더라면, 사태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판단하고 말할 때 신중을 다하는 것은 점차 ·········· 수행자의 특징이 된다. 


   ·········· 수행에서는 어느 한쪽의 감각만 육성되는 법이 결코 없다. ·········· 자연의 운행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도 나타난다. 성장과 발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모두 영혼의 온기를 발산한다. 쇠퇴와 파괴와 몰락 가운데 있는 것은 모두 영혼의 냉기라는 특성을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감각의 육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촉진된다. 이와 관련하여 ·········· 수행자가 준수하는 첫 번째 일은, 사고의 진행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다(이른바 사고의 제어). ·········· 의미 있는 진실한 사고를 통해 개발되듯이, ·········· 사고의 진행을 내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개발된다. 의미 없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순전히 우연적으로 어우러져 오락가락하는 사고가 ·········· 형태를 망쳐 놓는다.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되면 될수록, 비논리적인 것이 배제되면 될수록, 이 감각 기관은 그만큼 더 그에 합당한 형태를 띠게 된다. 비논리적인 생각을 듣게 될 경우 ·········· 수행자는 곧바로 올바른 것을 차근히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발달을 촉진할 목적으로, 어쩌면 비논리적일 수 있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아무런 애정도 없이 벗어나서는 안 된다. 또 자기 주변에 있는 비논리적인 것을 즉각 교정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껴서도 안 된다. 그는 오히려 아주 조용하게 자신의 내면 속에서,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밀려들어 오는 생각들에 대해 논리적이고 시종일관한 방향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생각 속에서 늘 이러한 방향을 엄수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일은 자신의 행동에도 그와 똑같은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행동의 제어). 행동에서의 불안성과 부조화는 지금 말하고 있는 ·········· 망쳐 놓는다. ·········· 수행자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어지는 행동이 앞선 행동에 대해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지도록 한다. 어제와는 다른 의미에서 오늘 행동하는 사람은, 앞서 그 특징을 말한 감각을 결코 개발하지 못한다.


   세 번째 일은 지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이다. ·········· 수행자는 이런저런 영향 때문에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서 멀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가 그 목표를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말이다. 그에게 장애란 그것을 극복하려는 요구이지, 포기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네 번째 일은 인간들, 다른 존재와 사물들에 대한 관대함(관용)이다. ·········· 수행자는 불완전한 것, 악한 것과 나쁜 것에 대한 불필요한 비판을 일체 억제하며,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자 애쓴다. 태양이 나쁜 것과 악한 것 모두에 두루두루 그 빛을 던지듯이, 그는 모든 일에 대해 이해심에 찬 관심을 보인다. 어떤 불쾌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는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필연적인 것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그의 힘이 미치는 한 사태를 좋은 쪽으로 돌리고자 노력한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들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려고 한다.


   다섯 번째 일은 생활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믿음’ 또는 ‘신뢰’ 라고들 말하기도 한다. ·········· 수행자는 어떤 인간,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이러한 신뢰로써 대한다. 행동할 때 그는 그러한 신뢰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일을 전해 듣게 될 경우, ·········· 수행자는 그것이 기존의 자기 견해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법이 결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새로운 견해에 비추어 항상 시험하고 바로잡을 태세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에 대해 늘 마음을 열어 두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의 유효성을 신뢰한다. 소심증과 의심벽을 자신의 존재에서 추방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러한 의도의 힘에 대한 믿음 역시 가지고 있다. 수백 번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러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믿음’이다.


   여섯 번째 일은 생활에서 확실한 균형(침착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 수행자는 고통이 닥치는 기쁜 일이 닥치든 한결같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늘을 오를 듯이 기뻐함과 죽고 싶은 만큼 슬퍼함’ 사이를 오가는 버릇을 버린다. 그는 불행이나 위험에 처해도 행운이나 후원을 만난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가짐을 가진다.



   꽃잎들의 발달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영혼이 어떤 특정한 과정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 과정은 여덟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과정은 관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통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에 자기를 내맡긴다. 그는 이러저러한 것을 듣고 보며, 그에 따라 자신의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가 그런 식으로 처신하는 한, 열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그의 연꽃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방향에 따라 자기 교육에 착수할 때 비로소 그의 연꽃은 활동적으로 되기 시작한다. 이를 목적으로 그는 자신의 관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각의 관념이 그에게 의미를 갖게끔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그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에 관한 특정한 메시지나 정보를 보아야 한다. 그는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관념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개념 생활 전체를 조정해서, 그것이 외부 세계의 충실한 거울이 되게끔 해야 한다. 그는 잘못된 관념을 자신의 영혼에서 멀리 떼어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의 두 번째 과정은, 첫 번째 과정과 비슷한 방향에서, 인간의 결단과 관계 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충분히 숙고하여 근거를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모든 행동, 아무런 의미도 없는 모든 행위를 자기 영혼에서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충분히 숙고된 근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의미 있는 근거가 없는 일이라면 그만두어야 한다. 


   세 번째 과정은 말과 관계 있다. ·········· 수행자는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 말만을 해야 한다. 말을 위한 말은 그를 수행의 길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수행자는 무분별하고 잡다하게 모든 것이 뒤죽박죽 말해지는 통상적인 대화를 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주위 사람과 교류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바로 그 교류 속에서 그의 말이 의미 있게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대화를 나누지만 생각을 충분히 하고 모든 방향에서 숙고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근거 없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너무 많이 하려하지 않으면서 너무 적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혼의 네 번째 과정은 외적 행동의 조절이다. ·········· 수행자는 주위 사람의 행동과 주변 상황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거나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모순되는 행동은 자제한다. 그는 자기 행동이 주변과 생활 상황 등등에 조화롭게 편입되도록 행동하려고 한다.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해 행동이 유발될 때, 그는 어떻게 하면 그 유발 동기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을지를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관찰한다.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자신의 행위 방식이 끼치는 효과를 아주 명학하게 고려한다.


   여기에서 고찰되는 다섯 번째 과정은 생활 전체의 수립과 관련된다. ·········· 수행자는 자연과 정신에 부합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는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게으르지도 않다. 지나치게 많이 일하는 태도와 지나치게 게으른 태도 모두 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생활을 수련의 수단으로 여기며, 이에 부합하도록 살아간다. 건강 관리, 습관 등등을 조정해서 조화로운 생활이 되도록 한다.


   여섯 번째 과정은 인간적인 노력과 관계 있다. ·········· 수행자는 자신의 역량과 능력을 시험하며, 그러한 자기 인식의 의미에서 행동을 취한다. 그는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은 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자기 힘이 미치는 일을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는 여러 가지 이상, 인간의 위대한 의무와 관련된 목표를 설정한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기를 하나의 톱니바퀴로서 인간 동력 장치 속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는 자신의 과제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점점 더 훌륭하고 완벽하게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영혼 생활에서의 일곱 번째 과정은, 인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우려는 노력과 관계 있다. ·········· 수행자에게는, 그의 삶에 유익한 경험을 모을 계기를 제공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그가 어떤 일을 부정확하고 불완전하게 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에 비슷한 일을 정확하게 또는 완벽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을 볼 때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그들을 관찰한다. 그는 경험이라는 풍성한 보물을 모으고, 그것을 끊임없이 신중하게 이용하고자 한다. 그는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착수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체험들을 되돌아보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 수행자가 매순간 자기 내면을 응시해야 한다는 것이, 마지막 여덟 번째 과정이다. 그는 자기 안에 깊이 들어가 신중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생활 원칙을 세우고 시험하며, 경험적 지식을 철저히 사고하고 그의 의무를 숙고하며 인생의 내용과 목적에 관해서 깊게 사유하는 등등의 일을 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앞에 있는 장에서 말했다. 여기에서는 열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의 발달과 관련해서 열거할 따름이다. 수행을 통해서 연꽃은 점점 더 완전하게 된다. ·········· 능력의 육성이 그러한 수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외부 세계에서의 발전 과정과 일치하면 할수록, ·········· 능력은 더 빨리 개발된다. 참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열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의 싹을 죽이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진실성, 올곧음, 정직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며, 허위, 기만, 불성실은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 수행자는 이때 ‘좋은 의도’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행동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내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을 사고하고 말하면, 비록 여전히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 있더라도, 정신적 감각 기관 속에 있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비록 모르고 한 일이라도 불 속에 손을 집어 넣으면 화상을 입는 것과 같다. 


   앞서 말한 영혼의 과정이 그 특징이 묘사된 방향으로 실행된다면, 열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은 장려한 색채로 빛을 발하게 되고 합법칙적인 운동을 부여받게 된다. 그렇지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영혼이 일정 정도 육성되기 전에는 ··········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활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여전히 애쓰는 동안에는 이러한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앞서 서술된 과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한, 그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언급된 방식의 삶을, 마치 습관적으로 하듯이,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 첫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런 일들은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는 자명한 생활 방식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자기 자신을 계속 관찰하고 몰아쳐 가며 그런 식으로 살도록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모든 것은 습관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열여섯 장의 꽃잎을 지닌 연꽃을 다른 방식으로 발달시키는 모종의 지침들이 있다. 참된 신비학은 그러한 모든 지침들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몸의 건강을 파괴하고 도덕적 파탄을 낳기 때문이다. 그 지침들은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보다 실행하기가 더 쉽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목표로 인도해 주며 도덕적인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연꽃의 왜곡된 육성은 모종의 ·········· 능력이 나타날 경우에 환상과 공상적 관념을 낳을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을 미망을 빠뜨리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그런 식의 육성을 통해서 사람들은 겁이 많고 질투와 허영심이 강하며 거만하고 아집에 가득 찬 사람이 되는데, 이 모든 속성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열여섯 장의 연꽃잎 가운데 여덟 장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개발되었으며 이것들이 ·········· 수행 과정에서 다시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이제 ·········· 수행자의 노력에서 모든 관심은 다른 여덟 장의 꽃잎에 쏟아져야 한다. 잘못된 수행에서는 이전에 개발된 꽃잎들만 쉽게 나타나며 새로이 형성되어야 하는 꽃잎들은 위축되어 있다. 이는 수행 과정에서 논리적, 이성적 사유에 너무 무관심할 때 특히 자주 생기는 일이다. ·········· 수행자가 명료한 사유를 중시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말을 할 때 최대한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뭔가 초감각적인 것을 예감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그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올바른 발달을 가로막는다. 이 일에 관해 말을 적게 하면 적게 할수록 더 낫다. 어느 정도 분명한 인식을 얻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말해야 할 것이다.



가장 복잡하고 자연스러운 유기체를, 즉 인간 유기체를 여기서 언급되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사람은, 인간 유기체의 전반적인 존재가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체계로 드러나며, 그 체계들이 각기의 독립성을 지니고 작용한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상호 간에 작용하는 그 세 가지 체계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성격화할 수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유기체 내에서 그 체계의 한 영역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신경 생활감각 생활을 내포한다. 인간 유기체에서 가장 중요한 지체인 머리에 신경 생활과 감각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는 집중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머리-유기체라 부를 수 있다. 

인간 조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리듬 체계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을 인간 조직의 두 번째 지체로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호흡-혈액 순환이다. 즉 인간 유기체의 리듬 과정에서 표현되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체계로는 그 활동과 기관으로서 사실상의 신진대사에 연결된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세 체계가 상호 간에 조직되어 있다면, 인간 유기체의 전체 과정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존재한다.(여기에서 의미하는 지체는 공간적으로 경계지을 수 있는 그런 신체 지체가 아니라 유기체의 활동(기능)에 따른 것이다. 머리에 우선은 신경-감각 생활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머리 유기체>를 다룰 수 있다. 다른 신체 지체에도 신경-감각 활동이 존재하듯이, 머리에도 당연히 리듬 활동과 신진대사 활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의 세 가지 양식이 그 본성에 따라 상호 간에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

인간 유기체에 하나의 절대적인 집중이 존재하지 않고, 세 가지 체계들이 제각기 하나의 고유한, 외부 세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를 지님으로써, 세 가지 지체가 - 머리 체계, 순환 체계 혹은 가슴 체계, 신진대사 체계 - 일정한 독립성 속에 작용함으로써 어떻게 인간 유기체 내부의 전체 과정을 유지하는지 조망하였다. 머리 체계는 감각을 통해서, 순환 체계 혹은 리듬 체계는 호흡을 통해서, 그리고 신진대사 체계는 영양 섭취 기관과 운동 기관을 통해서.

··········

세계를 표상하는 전반적인 양식이, 즉 우리의 사고습관이 예를 들어서 인간 유기체 내에서 자연 작용의 내적인 본성으로 드러나는 것에 아직은 완전히 적합하지 않다. ·········· 각기의 인간 영혼 내부에 - 각기의 인간 영혼이 사회적 유기체를 위한 작용에 참여하기 때문에 - 사회적 유기체를 위한 불가피한 사항에 대해서 적어도 본능적인 인식이 존재해야만 한다. 사회적 유기체가 건강해야 한다면 자연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삼지적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비록 다소간에 단순히 본능적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알고 있어야만, 사회적 유기체의 형성과 관련해서 건강한 사고와 감각, 건강한 의지와 욕구가 발달될 수 있다.

··········

자연적인 유기체의 고찰에서 삶의 가능성을 인간의 사고가, 인간의 감각이 느낄 수 있도록 배우고, 그 다음에 그 느낌의 방식을 사회적 유기체에 적용하기를 추구한다. 자연적 유기체에서 배웠다고 믿는 것을 흔히 하듯이 단순하게 사회적 유기체에 적용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유기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유기체 역시 그것 자체의 법칙에 따라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고찰하고 연구하려는 능력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보여 준다. 자연 과학자가 자연적 유기체를 마주 대하듯이, 사회적 유기체 자체의 법칙을 감지하기 위해서 사회적 유기체를 그 독립성에 따라 진정 객관적으로 대상화하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고찰의 진지함을 대면해서 모두 유추 해석 놀이가 멈추게 된다.

··········

사회적 유기체의 힘들이 어떻게 작용해야 그 유기체가 생존 능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지를 건강하게 느끼도록 배우기, 바로 그것을 지금부터는 사람들이 요구할 것이다. 그런 느낌이 없이 사회적 유기체에 발을 디디려 한다면, 바로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고 건강하지 않다는 느낌을 습득해야만 할 것이다.

정신 생활이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사회적 공생에는, 사회적 유기체의 생존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힘 중에 하나가 결여된다는 사실의 무게를 진정으로 느끼도록 배워야, 이 영역에서 오늘날 생각하는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적 유기체는 정신 생활의 무기력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정신 생활의 무기력에 대한 인정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 병이 더욱 악화될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사회 운동에 적합한 사고를 발달시킬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흡사 강렬한 계시라도 받은 듯 그의 시각은 오로지 경제 생활만 바라보도록 이끌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곳에,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에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필수적으로 들어서야 할 동인이 존재할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비정신적이고, 비영적인 경제 생활의 발달을 통해서만 그가 인간 존엄적이라 느끼는 상태가 생겨날 수 있다고 유일하게 믿고 있다. ·········· 자신의 구원을 오로지 경제 생활의 개혁에서만 찾도록 몰아대어졌다. 사적 기업과 개별적 고용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피고용인 내에 존재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권리 요구를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개별적 고용주의 무능에 기인하는 모든 손상이 오로지 경제 생활의 개혁을 통해서만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 몰아대어졌다. ·········· 모든 정신적, 영적인 것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순수하게 경제적인 과정으로만 시각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그런 의견이 생겨났다. 


그로 인해서, ·········· 모순적인 모든 것이 들어서게 되었다. ·········· 최종적으로 완벽한 인간 권리를 그에게 줄 모든 것이 경제에서, 경제 생활 자체에서 발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로 그 완벽한 인간 권리를 위해서 그는 투쟁한다. ··········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이 경제 생활 자체에서 생겨난다고 믿고 있지만, 결코 유일하게 경제 생활로부터만 그것이 솟아날 수 없으며, 오히려 고대 노예 제도에서 봉건 시대의 농노 제도를 거쳐서 현대 ·········· 노동자에 이르는 직선적 발달선상에 존재한다. 현대 생활을 위해서 상품 순환, 통화 유통, 자본 조직, 소유, 토지와 부동산 제도 등등이 형성되었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지지 않는 어떤 것이, ·········· 역시 의식적으로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니는 사회적 의지의 실제적인 근본 자극이 되는 어떤 것이 현대 생활 내부에 형성되었다. 


··········


전반적인 현대 ·········· 사회 운동의 근본 자극 중에 하나로서, 시장에서 상품을 팔듯이 자신의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팔아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수요와 공급을 따르는 시장의 상품처럼 자신의 노동력이 노동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이 그들의 본능 속에, 잠재 의식적인 느낌 속에 얼마나 강하게 살고 있는지를 한번만이라도 일별할 수 있다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한 그 혐오감이 현대 사회 운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자유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 그 ·········· 자극이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압박하면서 몰아대고 격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에는 노예가 있었다. 인간 자체가 상품처럼 팔렸다. 조금 적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간 존재의 한 부분이 농노제를 통해서 경제 과정으로 편입되었다. 자본주의는 인간 존재의 나머지에 상품적 성격을 들러 붙이는 권력이 되었다. 바로 노동력이다. ·········· 경제 생활에 편입되는 모든 것은 상품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경제 생활 자체 내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는 보지 않는다. 상품의 생산과 실용적인 소비에 경제 생활이 존재한다. 인간 노동력을 경제 과정에서 분리시킬 가능성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에서 상품의 성격을 벗겨낼 수가 없다. 경제 과정을 재형성해서 그 과정 내에서 인간 노동력이 그에 정당한 권리를 얻게끔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노동력을 경제 과정에서 분리해 내어서, 그것에서 상품적 성격을 덜어 내는 것을 사회적인 힘에 의해 규정되도록 하는가? 바로 이것이 추구되어야만 한다. ·········· 자신의 노동력이 적절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경제 생활 상태를 갈망한다. 그렇게 갈망하는 이유는, 자신의 노동력이 지니는 상품적 성격이 본질적으로 보아서 경제 과정에 완전히 얽매여 있는 자신의 상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그 과정에 완전히 양도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과정 안에서 자신의 전체 인간으로 몰두한다. 노동력의 조정을 그 내부에 둘 수 있는 한 경제 생활은 그 자체적인 성격으로 인해, 마치 상품이 소비되듯이 바로 그렇게 노동력을 적절한 방식으로 이용하기를 추구한다. 현대 경제 생활의 힘에 마취나 된 듯 사람들은 오로지 그 내부에서 작용할 수 있는 것만 주시한다. 


어떻게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될 필요가 없는지를 그 시각으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경제 형태는 단지 다른 방식으로 노동력을 다시금 상품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 생활 내에서는 그 영향권이 인간 노동력으로까지 확장되지 않아야 할 이해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는 법칙에 따라 상품 생산, 상품 유통, 상품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한, 노동 문제를 그 진정한 형상에서 사회 문제의 한 부분으로 만들 수 없다. 


한편으로는 노동력으로서 인간에 결부된 것이 경제 생활에 어떻게 편입되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부터 소비에 이르기까지 상품이 흘러가는 그 길에서 원천적으로 보아 인간과 무관한 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완전히 상이한 이 두 양식을 구분할 수 있도록 근대의 사고가 배우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이 방향으로 가는 건강한 사고 양식을 통해서 노동 문제의 진정한 형상이 드러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고 양식을 통해서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에서 경제 생활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지도 역시 분명해질 것이다.


·········· 참된 인내력을 갖춘 온화함과 과묵함을 통해 영혼은 영혼 세계에 대해, 정신은 정신 세계에 대해 열린다. 

   “평정과 고독 속에 머물러라. 수행 이전에 그대에게 전해졌던 모든 것에 대한 감각을 닫아라. 이전의 습관에 따라 떠올랐다 사라지는 모든 상념을 정지시켜라. 내적으로 완전히 정숙하고 과묵한 채 참을성 있게 기다려라. ·········· 곧바로 보고 듣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행하는 것만이 ·········· 기여하기 때문이다. ·········· 한동안 평정과 고독 속에 머물렀다면, 이제 그대의 일상적 업무에 착수하라. ‘나에게 이루어져야 할 일은, 내가 그러기에 적합하게 성숙해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된다’는 생각을 그대 마음 속 깊이 새기면서, 그대의 자의에 의해 무언가 ·········· 힘을 끌어 오려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마라.”

이것은 모든 수행자가 길을 시작할 때 스승으로부터 받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노라면 그는 자신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은 허사다. 참을성과 지구력이 없는 사람은 이 가르침을 따르기 힘들다. 각자가 스스로 길 속에 갖고 들어오며 또 정말로 피하려고 한다면 누구든 피할 수 있는 것들 이외의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비의 오솔길에 있는 난관들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전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 없이 가장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보다 이 오솔길의 첫 단계를 넘어서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쉽다. 

·········· 물론 목표에 더 빨리 다다르는 다른 길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그 길은 수행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추구하지 않는 그런 영향을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길 가운데 몇몇은 계속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탓에,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확실히 경고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한 길의 진정한 모습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단편들은 유익함을 낳을 수 없으며, 건강, 행복, 영혼의 평화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 그 진정한 본질과 근원을 알 수 없는 완전히 어두운 힘들에 자신을 내맡길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과 관계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루돌프 슈타이너. 번역:최혜경

종속 개념을 판단의 근거로 삼게 되면, 한 인간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속에 대한 가장 집요한 편견은 인간의 성에 관한 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서, 여성은 남성에서 이성의 일반적인 성격을 항상 강조해서 더 많이 보게 되고, 개인적인 것은 거의 무시한다. 그것은 실생활에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손해를 입힌다.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대부분 비인도적인데, 그 이유는 많은 면에서 개별적인 여성의 개인적 고유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여성의 자연적 과제와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는 일반적인 표상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에서 남성의 행위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소질에 따라 판가름되는 반면, 여성의 행위는 바로 여성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주변의 상황에 따라 규정된다. 여성은 종속적인 것의 노예, 일반적으로 여성적인 것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여성이 그 자질에 따라 이러저러한 직업에 적합한지에 대해서 남성들에 의해 논의되는 한, 소위 말하는 여성 문제가 그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성이 그 천성에 따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여성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들이 현재 그들에게 걸맞다고 여겨지는 직업에만 적합하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은 자신에서 벗어나서 다른 것에는 거의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성은 무엇이 그들의 천성에 걸맞는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여성이 종속적 인간이 아니라 개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 사회 상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의 절반이 비인간적인 현존을 누리고 있는 사회적 상황은 그야말로 절박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런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북돋우도록 유의하라는 것이다. 한 인간이 얼마나 건강한가 하는 것은 물론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그 방향으로 자신을 북돋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건강한 인식은 건강한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 수행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수행자가 건강하게 살려는 의지를 갖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 속에서 사람은 가능한 한 최대한의 자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 대게는 묻지도 않았는데 -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좋은 충고를 하더라도 듣지 말라. 그런 충고는 대체로 아무 쓸모가 없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 수행자에게 향락이 의무와 같은 자리를 차지해서는 결코 안 된다. 수행자에게 향락은 건강과 생활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아주 성실하고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금욕적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향략과 비슷한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많은 사람들은, 고차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방해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생활 환경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이런 처지에서 나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어.”라고 말한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사람의 경우 생활 환경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비 수행을 목적으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바로 현재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몸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하면 된다. 모든 일은 인류 전체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일은 나에게 너무 맞지 않아, 나는 다른 일이 맞아.”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영혼보다, 보잘것없고 누추할 수도 있는 어떤 일이 인류 전체를 위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분명히 아는 인간의 영혼이 훨씬 더 위대하다.


  수행자에게는 완전한 정신적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불건전한 정서 생활과 사고 생활은 항상 고차적 인식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명료하고도 평정(平靜)한 사고, 확실한 지각과 감정이 수행에서 토대가 된다. 공상벽이나 격양된 존재, 신경질, 흥분, 광신 등에 치우치는 성향만큼 수행자가 멀리해야 할 것은 없다. 그는 모든 생활상에 대한 건전한 시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는 생활 속에서 올바른 길을 확실하게 찾아야 한다. 그는 사물들이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는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생활의 요구에 따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판단과 지각에서 과장된 것, 단면적인 것은 일체 피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수행자는 고차 세계 대신 자기 자신의 상상력의 세계 속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진리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생각이 유효하게 될 것이다. 흥분을 잘하거나 공상적이기보다는 ‘냉정한’ 편이 신비 수행자에게는 더 좋다.


··········


  두 번째 조건은, 자기 자신을 전체 생명의 한 부분으로 느끼는 것이다. ·········· 내가 교사인데 학생이 내가 바라는 바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내 감정을 먼저 학생에게 퍼부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나는 학생과 내가 하나임을 느끼면서, “학생에게 나타나는 불만스러운 점이 내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는 아닌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나는 내 감정을 학생에게 돌리는 대신, 장차 그 학생이 내 요구에 더 잘 부응할 수 있도록 하려면 나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숙고할 것이다. 그와 같은 의향에서부터 인간의 사고 방식 전체가 점차적으로 변해 나간다. 이는 극히 사소한 일과 큰일에 다 적용된다.


  예를 들어, 범죄자를 보더라도 나는 그러한 의향이 없을 경우와는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나는 판단을 삼가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나 또한 이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다. 환경을 통해 나에게 이루어진 교육이 아마도 그의 운명을 걷지 않게 나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나에게 노력을 기울였던 스승들이 그에게도 똑같은 노력을 베풀었다면 이 인간 형제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모자란 것이 나에게 제공되었다는 것, 나의 좋은 점은 그에게는 모자란 바로 그 상황 덕택이라는 것을 고려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전체 인류의 한 구성원일 따름이며 만사에 다 책임이 있다는 관념 또한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게 된다. ·········· 그런 사고는 조용히 영혼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은 아주 점차적으로 한 인간의 외적 태도에 아로새겨진다. 그런 가운데 각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 속에서 개혁을 시작할 수 있다. ·········· 수행자가 하는 일은 표면에서가 아니라 심층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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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조건은, ·········· 수행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의미를 지닌다는 관점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웃 사람을 증오하면 그를 때리는 것과 같은 정도로 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뭔가를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세계는 나의 선행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과 똑같이 나의 순수한 감정과 생각으로써 이롭게 된다. 세계에 대해 나의 내면이 지니는 의미를 믿을 수 없는 한, 수행자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 영혼적인 것을 외적인 것과 적어도 동일한 정도로 현실적인 양 다룰 때, 비로소 나는 나의 내면, 나의 영혼의 의미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나의 감정이 나의 손이 하는 일과 똑같은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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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조건은, 인간의 본래적인 본질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스스로를 외적 세계의 산물로서만, 물리적 세계의 결과로서만 여기는 사람은, 수행에서 어떠한 성취도 거둘 수 없다. 스스로를 영혼적 · 정신적 존재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수행의 기초이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내적 의무와 외적 성공을 구분할 수 있다. 그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바로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수행자는, 외적 조건이 규정하는 것과 그가 자신의 태도와 관련하여 적합하다고 인식하는 것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찾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환경에 대해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되지만, 이 환경에 의해 인정될 수 있는 것만 행하려는 욕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는 오로지 인식을 추구하는 성실한 영혼의 목소리 속에서만 자신의 진리에 대한 인정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환경에 무엇이 도움이 되고 이로운지를 찾아내기 위해 가능한 한 환경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 ‘정신의 저울’이라 부르는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발달시킨다. 그 저울의 접시 한쪽에는 외부 세계의 필요에 대해 ‘열린 가슴’이, 다른 한쪽에는 ‘내적인 확고함과 불굴의 지속력’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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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조건은, 한번 결심한 것을 꿋꿋하게 따르는 것이다. 결심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신비 수행자로 하여금 결심한 것을 어기게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결심은 다 하나의 힘이다. 이 힘은 바라는 직접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을 할 때에만 성공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고차 세계에서는 오로지 행동에 대한 사랑만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수행자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모든 것은 이 사랑 속에서 펼쳐져야 한다. 그러면 그는 아무리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결심을 거듭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시들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기 행동의 외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자체에서 만족을 누리게 된다. 그는 그의 행동, 아니 그의 존재 전체를 세계에 바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세계가 그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말이다. 수행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희생적 헌신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


  여섯 번째 조건은,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현존재가 우주 전체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생명을 받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가! 우리는 자연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가!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고차적 인식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무한한 사랑을 자기 속에서 기를 수 없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나는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을 감사에 가득 찬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로써 내가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


일곱 번째 조건은, 이상의 조건이 요구하는 대로 삶을 이해하고 끊임없이 다듬어 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행자는 자신의 삶에 통일적인 특징을 부여할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그의 개별적인 생활 표현들은 모순됨 없이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 그는 수행의 첫 단계에서 도달해야 할 평정함을 위한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들을 충족시키려는 진지하고도 성실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수행을 결심할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그림이 화가의 머릿속에만 있을 때에는 아직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표현 없는 수행은 있을 수 없다. 외적인 것 속에서 내적인 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엄격한 형식을 경시한다. 어떤 사상(事象)의 정신이 중요하지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정신이 빠진 형식이 가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형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정신 또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존재할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조건들은 수행자를 강하게 만들기에 적합하다. 이를 통해 그는 정신 수행이 그에게 가하지 않을 수 없는 더 많은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기를 수 있다. 그에게 이러한 조건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새로운 요구가 주어질 때마다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필요한 인간에 대한 신뢰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신뢰와 진정한 인간애 위에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신뢰와 진정한 인간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혼의 힘에서 솟아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구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애는 모든 존재, 아니 모든 현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점차 확장되어야 한다. 앞에서 거론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든 건설과 창조에 대한 완전한 사랑도, 모든 파괴와 부정 그 자체를 그만두려는 경향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0-3세 아이들 그림

생후 7년까지 첫 주기의 발달 특성에 대해 이해한다면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결하여 수업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그림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그림들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 속에는 대부분 비슷한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그림들을 보며 “와! 참 잘 그렸구나.” 하고 생각할 뿐, 더 이상 그 그림을 가지고 뭔가를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면 금세 “아! 이 그림은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그림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을 만큼 자랐는가?’를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과 엄격하게 짚어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인가요? 빠른 아이인 경우 8-9개월에 걷기도 하고, 늦되는 아이는 1년이 한참 지나서야 걷기도 합니다. 그렇게 걷는 시기가 아이들마다 다른 것처럼 지금 보는 그림들은 꼭 특정한 나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평균적인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그림들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을 통해 아이들이 발달해 나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가고자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그림의 발달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경우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가지고 아이들 그림들을 바라 봐야 합니다.

아이가 처음에 연필 같은 것을 쥐고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언젠가 누군가가 하는 행위를 봤기 때문입니다. 늘 모방을 하는 어린아이들은 행위와 움직임을 통해서 따라하고 배웁니다. 아이가 연필을 잡고 그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을 봤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시장 가기 전에 뭘 살까 메모하는 것을 아이가 봤다면 아이는 엄마가 했던 행위를 따라하려고 합니다. 이때 아이가 따라하는 것은 '오이, 당근, …' 등의 글자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행위, 동작 같은 움직임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뭔가를 쥐고 그리려고 하는 행위를 본 적이 있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가 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아이는 제일 처음 연필을 쥐고 (뭔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휘두르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종이에 흔적을 남깁니다. 물론 아이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처음에 나타난 형태는 점 형태가 아니라 마치 점에 꼬리가 뻗은 것 같은 형태가 나타납니다. 아이는 허공에 모방적 행위를 하다가 우연히 종이와 만나는 것입니다.(그림1)

(그림1)

이 시기는 빠르면 8-9개월, 늦으면 1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시기가 지난 다음에는 의도적으로 뭔가를 표현합니다. 아이가 직접 종이에 그리려고 표현할 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형태가 동시에 나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의 대부분은 왼쪽으로 그리는 형태로 나옵니다. (그림2)

(그림2)

다만 오늘날에 와서는 가끔 오른쪽으로 하는 아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물질주의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에는 아이들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그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뾰족한 물건을 찾습니다. 그것으로 그려낸 그림을 보면, 같은 것을 반복하지만 똑같이 만나지도 않으며 힘이 균등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는 진하게 또 연하게도 나타나는데, 바로 여기에서 아이들의 역동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색깔 크레파스를 주면 대부분 밝은 색부터 먼저 집고 그립니다. 그리고 그림은 점점 더 안으로 밀집해 들어갑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검은색이 되어 갑니다. 원들이 점점 밀집되어 작아져 가다가 언젠가는 점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그림3)

(그림3)

점을 찍으면서 어떤 아이들은 “이건 나야, 이건 나야”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나이가 3세 때쯤입니다. “이건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바로 이때부터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점의 시기가 나오기 전까지에 대해 우리는 기억을 잘 못합니다. 점이 나타난다는 것은 '첫 번째 자아가 태어났다', '이제 나는 지상에 도착해서 두 발로 섰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이것을 거꾸로 본다면 점 이전의 그림들에서 하는 행위는 '출생 이전의 것'을 행위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러두기 : 본래 강연에서는 0세에서 7세까지를 (1) 0-2⅓세, (2) 2⅓-4⅔세, (3) 4⅔-7세로 세 주기로 나누었지만, 여기에서는 (1) 0-3세, (2) 3-5세, (3) 5-7로 바꾸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시기에 따랐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만나서 엄마의 몸속에서 커 가는 것입니다. 그 전의 인간 존재는 아주 넓고 굉장히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커다란 작용에 의해 크게 원을 그리다가 이것이 점점 밀집해서 하나의 점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 먼 우주에서 이 지상으로, 인간이 육화되는 과정입니다. 우주적 존재였던 인간이 완전히 지상적 존재가 되는 것은 만 21세 정도가 되어서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주로부터 배꼽을 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우주의 법칙성에 의해서 지상으로 오다가, 이제 처음으로 ‘나는 지구에 도착했다’라는 의식과 함께 태어나는 그 순간, 바로 점의 순간입니다. 즉, 점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은 이런 면에서 '나는 우주적 존재였다가 이제는 지상적 존재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밀집된 그림은 밀집과 동시에 퍼져나가는 요소도 보입니다. 퍼져나가는 형태는 여러 모양이지만 대부분 나선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 문화 유적 가운데에서 신전의 문양을 보면 나선형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져 나가는 그림이 많습니다.

나선형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되어 가는 인간, 즉 육화과정'을 의미하며, 풀어져 나가는 것은 '탈육화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이런 면에서 아이는 항상 되어 가는 육화의 형태, 다시 말해 안으로 들어가는 나선 형태를 그리지, 풀어져 나가는 형태는 절대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4)

(그림4)

나선 형태로 계속 들어오다가 끝을 선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나는 지상인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표현입니다. 아이들은 나선 형태를 계속 그리지는 않고 점차 원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즉, 나선 형태로 가다가 끝 부분에서 나선 형태가 풀어지는데 그것이 점점 작아지다가 원 형태로 갑니다. (그림5)

(그림5)

어떤 그림에서는 원을 그리면서 원을 마무리하려고 노력한 것이 역력히 보입니다. 원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처음 시작한 데에서 만나려고 합니다. (그림6,7)

(그림6)

(그림7)

이렇게 원을 만드는 시기는 점을 찍는 시기와 똑같습니다. 원도 만나려 하고 동시에 점도 찍습니다. 점이라는 것은 '나'라는 의미이고, 원은 '내 주변, 집안에 내가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색깔이 나오는 나선 형태를 그린 아이는 좀 더 자란 아이입니다. 그 전까지는 색깔의 차이를 모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두움입니다.

저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 이 어두운 지구에 왔다는 의미인데, 내가 지구에 도착함으로써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어두워졌다는 것은 내가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을 지나 지구에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밝은 색에서 시작해 점점 그림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이가 점을 찍을 수 있고 원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이때 배운 이것이 후에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점과 원을 잘 그릴 수가 있는 이유입니다.

색이 있는 나선 형태를 그린 그림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는데, 나선형을 파란색으로 색칠한 가운데에 ‘자기’를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림5 참조) 이때가 바로 머리 인간(머리만 있고 그것에서 손과 발이 나오는 그림)의 시기로, 나선 형태로 육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지상에 왔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색깔을 쓰는 아이는 동그라미와 점을 온전하게 그릴 수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원과 점을 그릴 수 있다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것을 그려 나갑니다. 3.7세가 되면 원 안에 작은 원이나 점들을 그리기도 하고 좀 더 나이가 든 아이(만 4세)는 원에다가 점들을 찍어 그리기도 합니다. (그림8,9)

(그림8)

(그림9)

4세 아이의 그림은 ‘자아의식’에서 조금 벗어난 시기입니다. 출생부터 3-4세 시기까지 발달 과정의 특성을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3세 이하의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혼자 놀거나 개별적인 단어들을 열거하는 자기중심적인 때입니다. 그래서 0세에서 3세 사이를 ‘자기 발견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원 형태로 겹치는 그림뿐만 아니라 원이 아닌 다른 형태의 그림들도 나타납니다. (그림10)

(그림10)

이런  그림들 역시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어둡게 만들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정한 방향 없이 그리다가 점차 일정한 방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방향을 만들다가 두 방향으로 교차되는, 마치 십자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림11,12,13,14,15)

(그림11)

(그림12)

(그림13)

(그림14)

(그림15)

이렇게 그림이 겹쳐질 때는 ‘나’라는 초기적인 자아의식이 생길 때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완전히 자유롭게 놔 둘 때 나오지, 인위적인 조작으로 “이거 그려라, 저거 그려라” 하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그림을 ‘면’으로 그리지 않고 선으로만 그립니다. 아이가 십자가 모양을 그릴 때에는 ‘내가 저 높은 곳에서 와서 지상에 섰다’는 수직관계뿐만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는 궤도의 방향처럼 수평의 관계도 성립해서 ‘이제 나는 세상에 와서 내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림16)

(그림16)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부분에서 이제 내가 생겨났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 모양의 몸짓은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나의 삶으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마구잡이로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원형적인(원초적인) 상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견할 때 굉장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이들이 존경스럽고 경외스럽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원형적인 것을 그리는 것은, 천상의(점과 원, 십자가 같이 지혜가 가득 담긴 상징들은 천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천상에 있는 것들을 아이들이 그림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과 십자가들을 많이 그리고, 또 굉장히 연습을 많이 해서 언젠가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 밑이나 원 안에 선들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또 원 안에 점들을 찍는 그림도 있고, 십자가에서 발전한 형태의 선으로 인간을 표현합니다. (그림17,18,19,20)

(그림17)

(그림18)

(그림19)

(그림20)

그러한 그림들은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자기가 그린 것을 보고 “아! 이건 마리고, 저건 페터야”라고 말하며 그 그림에 대해 말합니다. 또 이 시기에 머리 인간의 형태를 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을 직선과 곡선을 가지고 그립니다. (그림21)

(그림21)

그러면 이것 말고 더 나올 것이 없을까요? 점, 선, 곡선, 이것들을 가지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무엇인가를 굉장히 빨리 그려 놓고 보니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아! 이건 자전거잖아” 하고 말합니다. (그림22)

(그림22)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리는 자전거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움직임으로 그립니다. 아이가 자전거라고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전에 자전거를 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라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아이가 그린 그림에서 아이는 “이건 오토바이야” 하고 말합니다. 그림에 “부릉, 부릉”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아이는 오토바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23)

(그림23)

이러한 주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흥미롭고 또 잘 알아야 될 부분인지를 감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될 때, 이러한 그림의 과정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3-5세 아이들 그림

어제는 9개월에서 3세 사이의 아이들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원, 점, 십자를 그리는 시기로 초기적인 자아가 생길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출생 전에 경험했던 것들이 그림으로 나타나고, 우주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지상세계에 도착해서 ‘이제 내가 이 지상에 서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인식하는 과정임을 여러분께 보여 드렸습니다. 아이들은 뾰족한 크레파스 같은 것을 잡고 선을 그리는데, 이때는 색깔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종이에다 밝은 색에서 점점 어두운 색으로 밀집을 하며 그려 나갑니다.

초기에 아이들은 엄마가 사용했던 것들을 따라서 잡고, 그 후에 여러 가지 도구들을 잡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학교에 갈 때까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타나는 그림들이 원을 그림과 동시에 방향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십자 형태가 나타날 때까지 아이들은 반복해서 연습을 합니다. 지혜로운 것은 아이들이 그림을 원형(原形)적인 선(원), 점, 십자 같은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출생 전에 경험했던 것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원, 점, 십자를 그리면 첫 7년 주기의 첫 번째 시기(0-3세) 끝에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은 첫 번째 시기 이전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그 이후부터 기억합니다. 3세 즈음에 자아의식이 처음으로 생기면서 비로소 사고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이들은 자기를 가리켜 “나”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원, 점, 십자 형태를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이 세 가지를 이용하여 그리는 것을 습득하고 나면 평생 동안 이 기술을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림을 보면 점, 선, 원은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그 후 머리 인간이 나올 때까지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려 나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아! 이건 엄마, 아빠야” 하며 알게 됩니다. 3.5세 정도 된 아이들 그림을 보면 머리 인간에서 다음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몸통 같은 것을 그립니다. (그림24)

(그림24)

3세 이후 아이는 다음 발달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기 혼자 놀며 양극성 있는 놀이를 합니다. 문을 닫았다 열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앞으로 섰다 뒤로 섰다 등 자기 중심적인 놀이를 합니다. 그 이후 아이는 다른 아이와 놀고 싶어 하는 발달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때부터는 언어에서도 사회성이 나타나 다른 사람과 대화적인 언어를 합니다. 이제 아이는 감각기관을 펼쳐 들리는 곳으로, 소리 나는 곳으로, 보이는 곳으로 모든 방향으로 의식을 집중해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시기의 그림을 보게 되면 대개 사람들은 ‘해님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발달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25)

(그림25)

아이가 머리 인간을 그려 놓고 또 옆에는 해 같은 것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 이제는 바깥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아이의 상태가 표현된 것입니다.(그림26)

(그림26)

아래의 그림을 그린 아이는 사방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림27)

(그림27)

아이들 그림 중에 배경 같은 것을 그린 경우가 있는데, 주의할 점은 아이들은 스스로 배경 같은 것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나 교사가 그려 주었거나 그리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부모나 교사는 절대로 말을 시키거나 지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28)

(그림28)

기본적인 그림들은 이 시기에도 나타나지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들마다 다 다릅니다. 밖에서 가져오고 싶은 행위는 비슷하지만 이러한 잠재적 경향은 아이마다 다릅니다. 이 시기에 발달이 빠른 아이들 가운데에는 색깔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림29, 30, 31, 32, 33, 34)

(그림29)

(그림30)

(그림31)

(그림32)

(그림33)

(그림34)

이 시기의 모티브는 바깥 세계와 나의 만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아이들 그림 중에는 나선형에서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림 35)

(그림35)

색이 있으면서 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서도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림36)

(그림36)

또 점으로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림37)

(그림37)

아이들은 다양한 개인성이 있기 때문에 같은 모티브에서 출발하더라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이가 조금 든 아이들은 그림에 몸통이 생기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십자 형태도 그리며, 손이 움직이는 모습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림38,39,40)

(그림38)

(그림39)

(그림40)

이 시기의 아이들은 처음에는 머리를 중요시 여기며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마치 머리에서 안테나와 같이 뻗쳐 나가는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그림41)

(그림41)

저는 이런 그림들을 볼 때 아이들이 아직도 하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이 시기에 더 나이든 아이들 그림을 보면 머리 위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림42)

(그림42)

또 어떤 아이의 그림을 보면 귀에서 뭔가 나가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이틀 후에 귀에 염증이 났습니다. 이미 아이가 그 전에 느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43)

(그림43)

3-5세 사이의 그림들을 보면 아주 특별한 태아기에 대한 그림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프랑스 한 의사 부부는 아이들의 그림을 수집하여 태아기의 기억(회상)에 대한 그림들을 설명하여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이러한 특별한 그림들은 아이들한테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나선 형태를 안쪽으로 그릴 때 그것은 육화하는 것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 그림 중에 나선형을 그리고 난 다음 그 가운데에 또 하나의 원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안에 있는 부분인 것처럼 작은 원을 표현했고 그 위에 사람 얼굴 같은, 즉 엄마와 같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엄마의 몸 전체와 엄마의 내부까지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44)

(그림44)

어떤 아이는 나선형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별들이 함께 나선형 안으로 들어오는 그림도 그립니다. 육화하는 과정을 엄마의 몸에 표현한 것인데, 더 흥미로운 일은 밖에 있는 별들이 엄마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림45)

(그림45)

또 다른 아이들 그림을 봐도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림46,47)

(그림46)

(그림47)

이것은 러시아 인형처럼 생겼는데, 이젠 아이가 바깥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 그림입니다. (그림 48)

(그림48)

다음 그림을 보면 점점 '내(자아)가 천상에서부터 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성인의 경우는 밑에서부터 그려 올라가겠지만, 아이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림을 그립니다. 이는 저 세상인 천상에서부터 이 세상으로 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 49)

(그림49)

또 다른 아이의 그림을 보면 ‘내가 온다. 아, 내가 와야만 하지!’라며 위에서 아래로 표현하고, 지상에 와서는 척추 같은 형태의 그림들을 통해 강하게 표현을 합니다. (그림 50)

(그림50)

두 그림의 경우(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그림) 다른 조건들이 있는데 한 그림은 오고 싶어서 좋아하는 그림이고, 또 한 그림은 오고 싶지 않은 듯한 조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3세 아이가 그렸는데, 태아기에서 세쌍둥이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2.9세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쌍둥이처럼 그렸는데 그린 아이는 정말 쌍둥이입니다. 이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바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51)

(그림51)

아이가 중심으로부터 12개의 선이 바깥으로 뻗어 나와 12개 선마다 원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12개의 선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마치 황도 십이궁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양탄자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위에 아이가 뉘어져 있고 식구들이 아기를 받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52)

(그림52)

아이들 그림을 많이 연구한 덴마크 의학자가 저에게 “당신은 당신의 일생을 선 하나로 끊이지 않고 그릴 수 있느냐?”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그린 어떤 그림을 보여 주면서 아이가 자기 일생을 선 하나로 표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그림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머리가 밑을 향하고 있는 태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선은 다시 태아 같은 것을 돌아 나와서 세상을 계속 살다가 다시 왔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림을 선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53)

(그림53)

어느 시기에 다다른 아이의 그림을 보면, 엄마의 머리와 몸을 그리고 엄마 몸에 있는 아기 머리가 밑으로 내려가서 태어나려고 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림 54)

(그림54)

이제까지 아이는 이러한 것들을 연습하고 표현한 다음 더 발전하여 마치 계단이나 사다리처럼 선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지학에 따른 인간의 발달론에 대해 소개한 다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인지학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7년 동안 형성력(에테르체)이 작용해 신체를 형성한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시기인 0-3세 시기에는 숫구멍이 닫힐 때까지 형성하는 힘이 머리 부분에서 제일 많이 작용합니다. 3세 즈음의 그림들을 보면 원을 완전하게 그리는데,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될 때까지 계속 힘을 쏟고 숫구멍이 닫힐 때까지 그 힘이 계속 작용합니다. 0-3세 시기에는 두뇌가 거의 70-80% 정도 형성되며, 두 번째 시기(3-5세)에는 몸통 속에 있는 기본적인 장기들이 대부분 형성됩니다. 또 이때에 신경계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인간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다음에 있는 인간학적인 그림들을 보겠습니다. 3-5세부터는 지금까지 나온 그림들을 조합하여 그리는 형태가 나옵니다. 이 시기에는 항상 공간을 만들어 놓고 채워 놓는 듯한 사다리 그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림55)

(그림55)

이제 선이 왼쪽 오른쪽으로, 가슴-몸통에서 하는 일들인 규칙적이고 리듬적인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그림56)

(그림56)

이젠 머리가 작아지고 중간 부분인 몸통을 두드러지게 그립니다. 즉, 사다리에 머리가 있는 형태의 그림입니다. 머리가 작아지고 몸통이 크게 그려지며 몸통에 사다리처럼 내부를 표현합니다. (그림57)

(그림57)

어떤 아이는 이 부분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가 새로 나올 시기가 되면 아이 스스로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고, 입을 사다리 모양 안에 많은 선을 그려 표현합니다. (그림58)

(그림58)

이 시기의 아이는 눈도 사각형으로 그리곤 합니다. (그림59)

(그림59)

성인의 신경계를 보면 가슴 부분에 사다리 형태가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신경계가 완성되는데, 이때 아이들 그림에서도 사다리 모양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림60, 61)

(그림60)

(그림61)

아이들은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전 발달 단계에서 십자를 그린 형태에서 발전하여 사각형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 시기에는 그전 발달단계에서 보인 점, 선, 원이 빠지는데, 이 부분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선이 발달하여 막힌 사각형으로 발전했고, 원이나 곡선은 사람의 장기 형태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그림에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흥미로운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장기 부분은 어디에 나타났는지 한 번 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


5-7세 아이들 그림

어제는 태아기 때를 그린 그림을 살펴보았습니다. 태아기 때의 그림 중에 사다리꼴 모양에서 막힌 사각형이 나오는 그림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 형성하는 힘에 의해 몸통 부분이 생겨 나는 것을 그림에 보았습니다. 사다리꼴 모양이 수평적인 선과 수직선인 십자 모양에서 발전된 것도 보았습니다. 사다리꼴 모양의 형태는 일반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면 신경계 형태의 그림인데, 그러한 모티브들이 우리 몸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점, 선은 나왔는데 원에 대한 것은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아마도 원에 나타난 형태는 몸속에서 장기 형태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장기 형태는 아이들 그림 속에서 둥그런 원형들이 장기 형태로 보이는데 아직 그림에서는 확연히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잉에 브로흐만(『아이들 그림의 비밀』의 저자)은 저와 함께 연구를 했던 분으로 아이들 그림을 통해 발달과정을 연구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아이의 두 번째 발달 단계에서 원형은 장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언급은 되어 있지만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내용에도 약간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제 과제로 내준 ‘장기 같은 형태’가 그림의 어느 부분에 나타나는지 혹시 발견 사람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그것이 몸통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곳은 나중에 우리의 감정(느낌)이 사는 곳입니다. 아이들 그림 중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나타납니다. (그림62, 63, 63-1)

(그림62)

(그림63)

(그림63-1)

색깔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7-14세 시기에 발달합니다. 손을 다쳐 울고 있는 아기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면 “책상이 나한테 그랬어”하고 말합니다. 감정이 내부에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가 아프거나 울 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면 아기는 스스로 어디가 아픈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초기적인 감정에 대한 인식은 우리 신체 안에 3-5세 사이에 생겨납니다. 나중에 감정이 발달하기 위한 기초적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주기(0-3세)에서 나온 그림 중에 색깔들이 나온 그림들이 있는데 그것은 색깔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둡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색깔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다리꼴에 대한 모티브가 나타난 그림들에서도 색깔이 들어 있는데, 그 색깔은 마치 강조가 된 듯했습니다. 아이가 한 색깔을 그리면서 ‘아! 이것이 빨강이구나’ 하고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다리에 대한 모티브를 그리면서 색깔을 연습해 가는 과정들이 이 시기에 확연히 나타납니다.

바로 두 번째 단계(3-5세)에 아이들은 색깔도 인식하는 단계에 접어듭니다. 하지만 색을 한꺼번에 다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천천히 발견해 냅니다. 아이 스스로가 내면에서 색깔을 발견해 나갈 때 누군가가 ‘이건 빨간색이야’ 하고 미리 색을 말해 준다면 색을 발견해 나가는 성취감을 잃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5-7세)가 되면 색깔을 발견하는 정점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시기의 초기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때에는 아이들이 색깔들을 굉장히 많이 발견해 내고, 아직도 사다리 모티브 형태 안에서 색깔들을 더 많이 칠함과 동시에 덧칠하며 색을 정복해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아이들이 이 나이 때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터득한 사각형 모양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색깔을 채워 나가면서 색에 대해 알아갑니다. (그림64)

(그림64)

이제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이 네 귀퉁이에서 시작해 색을 채워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림65)

(그림65)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5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색을 칠해 나가다가 사각형이 나옵니다. 이제까지의 사다리에서 나오는 사각형과는 다른, 뾰족한 부분이 서 있는 마치 마름모와 같은 그림들이 나옵니다. (그림66)

(그림66)

사실 잘 보면 마름모를 그린 것 같지만 본래는 삼각형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학교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행위를 하기 위한 신체에 기본적인 것’이 생깁니다. 이때는 손재주가 굉장히 늘어나고 발도 빨라집니다. 이것은 사지를 가지고하는 것으로, 사지에서 발견한 삼각형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그림66)과 같은 그림들(양탄자 모양)을 몇 주 동안 계속 그리게 되는데, 그것을 그리는 사이에 삼각형을 그리는 것입니다.

점, 선, 원, 사각형, 삼각형 이러한 것들은 기하학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색깔을 가지고 연습하기도 하지만 ‘대칭연습’을 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대칭연습을 한 후 이제는 어떤 것을 봤을 때 표상하는 힘이 생겨서, 자기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완전히 똑같은 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다를 경우 ‘살아 있는 대칭’의 그림들이 나옵니다. (그림67)

(그림67)

그리고 나서 아직도 모서리 부분을 그리고, 그러다가 하늘을 발견하여 대칭축 부근에 해를 그립니다. (그림68)

(그림68)

살아 있는 대칭은 항상 똑바른 대칭이 아닙니다. 이런 대칭에 대한 그림은 학교에 갈 때까지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그림이 있는데 대칭이 나타나고 양쪽에 삼각형이 나오고 별 모양, 반달모양, 또 별 두 개가 양쪽으로 똑같이 대칭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69)

(그림69)

이렇게 아이들이 색깔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자기가 봤던 것을 표상하여(Vorstellung, 아이가 유치원에 오면서 봤던 나무를 그리려고 할 때, 표상은 자기가 본 것을 자기 앞으로 가져온다는 뜻) 그리는 힘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그림을 보면 꽃이 대칭의 중심선에 있고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땅의 대칭이 있습니다. 양쪽에 나무가 있는데 한 나무는 연두색, 다른 나무는 초록색의 살아 있는 대칭을 보여줍니다. (그림70)

(그림70)

또 아이가 습득해낸 것들(점, 선, 십자, 원, 삼각형, 사각형, 색깔들)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이는 땅에 대해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것을 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집은 우리 영혼이 사는 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림71)

(그림71)

위의 모든 과정을 거쳐야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어른들이 지시했을 때는 살아 있는 그림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5.3세에서 5.5세 사이의 아이들 그림을 보면 중심축이 있고, 양쪽, 위, 아래에 삼각형이 나옵니다. (그림72)

(그림72)

삼각형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학교에 가기 전 시기에는 아직 동물 그림이 잘 나오지 않는데, 간혹 집에 동물을 길렀을 때 나오기도 합니다.

6.9세에는 대칭의 중심에 집이 서 있고, 꽃, 나무, 태양 등이 대칭으로 그림에 나타납니다. 이때가 되면 표상(Vorstellung)이 어느 정도 되는데 아이들은 ‘저 위에 있는 저것만이 하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림에서처럼 하늘과 땅을 잡아 당겨 표현합니다. (그림73, 74)

(그림73)

(그림74)

아이들은 바깥에서 인식했던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시도합니다. 부모가 음악가인, 그림을 잘 그리는 6.6세 된 아이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75)

(그림75)

이 그림에서는 대칭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섬세하거나 자세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아이의 그림이 나중에 어떻게 나오는지 뒤에 말하겠습니다. 한국의 아이들 그림에도 위와 같은 대칭적인 그림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세계 어느 나라 아이든지 일반적인 발달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대칭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아직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않았지만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특히 집과 나무를 많이 그립니다. 전세계에서 수집한 집과 나무들 그림을 보면 자기들이 습득한 색깔과 선들을 가지고 연습해서 그린 것들이 나타납니다.

저는 이집트에 가서 이집트 최초의 발도르프 유치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때 있던 아이들도 바로 위와 같은 발달단계를 거쳤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이집트에 가면 삼각형 모양의 집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때 그곳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의 초기 그림에도 삼각형이 달린 집들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집은 인간의 몸과 관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각형 형태의 집에는 머리, 눈, 코, 입의 형태가 나오는데 이런 의미에서 집은 몸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칭 연습을 많이 하다가 표상을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작은 창문을 통해 큰 나무가 다 보이고, 열쇠 구멍을 통해 큰 산이 다 보이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아이는 교사에게 “선생님, 어떻게 저 큰 탑이 눈에 다 들어오나요?”라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 아이들은 원근에 대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을 가지고 연습하고 실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이 있으면 산 뒤에 있는 꽃을 그림에 그립니다. (그림76, 77)

(그림76)

(그림77)

그 사이에 흥미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새 머리를 파란색으로, 주둥이를 주황색으로, 몸통은 노란색, 한쪽 날개를 빨간색, 다른 날개를 노란색, 꽁지를 노란색으로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그림을 그릴 때 정말 멋있는 새를 그립니다. (그림78)

(그림78)

그런데 아래의 그림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새들의 형태입니다. 그러한 그림을 그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79)

(그림79)

다음 그림을 보면 원근감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를 크게 그리고 그 뒤에 왕관을 쓴 왕과 나무들은 점점 작게 표현했습니다. (그림80)

(그림80)

또 도끼를 크게 그리고 집이나 길 들을 작게 표현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사람을 크게, 먼 쪽에 있는 집들은 작게 표현합니다. 이렇게 원근감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학교에 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갈 만큼 성숙되었다고 보이는 그림에는 삼각형이 나오거나, 머리에 항상 무엇인가 얹혀 있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지상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신발이 나오는 것도 하나의 표식입니다. 그리고 모자를 쓰거나 머리 부분을 매우 강조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림81)

(그림81)

아이들이 그린 것을 보고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게 “너 무엇을 그렸니?”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를 그리기도 합니다. 가령 나무를 들고 간다거나 망치로 못을 때리는 등의 행위를 하는 그림들을 그립니다. (그림82)

(그림82)

이 시기 아이들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옆모습을 그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왕비에게 등잔불을 주는 내용의 그림을 보면 그 전까지는 사람의 앞모습을 그렸는데 이제는 왕의 옆얼굴을 그리는데, 아직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눈 색깔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눈의 모습을 보면 이상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림83)

(그림83)

또 이 시기에는 자세하게, 예를 들어 당근의 잎까지 표현하려고 하는 것도 나타납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줄거리,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가령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가는데 비가 오다가 다시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와서 무지개가 뜹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림84)

(그림84)

아이가 누구의 도움 없이, 외부의 조작 없이 지금까지 계속 그림을 그려 왔다면 놀라운 일이 나옵니다. 0-7세 동안 아이들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학교 담임교사의 과제는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지입니다. 이에 대한 것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까 말했던 음악가 부모님의 아이, 그림을 잘 그렸던 그 아이가(그림75) 6.6세에서 6.9세가 되어서 그린 그림을 보고 부모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엄마는 저에게 “아니 선생님,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아이가 지금 이 그림이 뭡니까?” 하며 놀라서 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옆에 있다가 저에게 와서 “선생님, 제가 그림을 이야기해 줄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식사를 위한 시’를 표현한 것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나옵니다.

빛은 곡식이 되고, 곡식은 양식이 됩니다.

땅의 열매도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빛은 내 가슴속에도 들어옵니다. (그림85)

(그림85)

이것을 보게 되면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와 비슷합니다. 이 아이는 바로 알고 있는 내용을 글로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그린 그림들 중에는 교사가 보여준 손유희에 있는 내용을 표현한 그림도 있습니다. 손유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콩콩이라는 친구가 산보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어깨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떨어져 시궁창에 빠졌네’라는 내용입니다. 유치원에서 행하는 손유희의 줄거리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글씨를 쓰고 싶은데 글씨를 몰라서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손을 잡고 둥지에 앉았습니다. 한 참새가 깨어나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또 다른 참새가 깨어나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둘 다 함께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함께 다시 둥지로 날아옵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이 내용을 가지고 아이에게 손유희를 하면서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저에게 왔습니다. 그 그림은 ‘두 새가 한 둥지에 있고 한 새가 둥지에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또 다른 새가 다시 날아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두 새는 함께 날아가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림86, 87)

(그림86)

(그림87)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이가 이제까지 알았던 것을 가지고 정말로 학교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교사는 이러한 것을 받아서 이제까지 알았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변환시켜, 어떻게 아이들에게 셈하고 쓰기를 가르칠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아름답게 배워 왔습니다.

아이들이 동물을 그리는 것은 학교 가기 직전쯤에 나타납니다. 또 이 시기에는 남자아이들은 배를 많이 그리고, 대부분 여자아이들은 집을 많이 그립니다. 아마도 집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고, 배도 집은 집인데 물 위에 떠서 움직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계가 있는지는 제가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확실한 것은 남자아이는 배를, 여자아이는 집을 그린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생긴 크레파스를 주는가 하는 질문에 본인은 넓적하게 생긴 크레파스를 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뾰족한 것을 골라 그리기 때문입니다. 또 유치원에서 수채화를 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건 학교에 들어가서 해야 될 문제이지 유치원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움직임,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아래 그림은 터키 아이가 그렸습니다. 이 아이 그림 속에는 나무, 집, 이빨, 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사람의 눈, 입도 들어 있습니다. (그림88)

(그림88)

* 이 글은 2002년 Margret Costantini 여사의 사)한국발도르프교육협회(www.waldorf.or.kr) 교사교육 저녁특강을 재수정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여사님의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www.margretcostantini.de

출처: 슈타이너사상 연구소

깨어있는 인간이 되도록 습관 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 가지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곧바로 한 가지만 유의해 봅시다. ·········· 근본적으로 보아 단 하루도 우리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채 지나가는 적이 없다는 점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문장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느 날 기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저녁에 여러분의 하루를 되돌아 보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돌아 보면 여러분 스스로 크고 작은 사건들, 보통 정도의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내 삶에 정말로 기이한 것이 등장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여러분이 그저 충분히 포괄적으로만 생각하신다면, ·········· 삶의 연관성을 충분히 포괄적으로 고찰하신다면 그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의 삶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이 어떤 계기로 인해 저지되었는가?”라고는 물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지된 일이, 발생했더라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통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에서 제거되는 것들의 배면에 우리를 깨어있는 인간으로 교육하는 요소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내게 과연 무슨 일들이 모두 일어날 수도 있었을까? 매일 저녁 이렇게 질문하면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일어나게 할 수도 있었을 개별적 사건들을 고찰해보면, 자기 수련에 주의력을 더해주는 생활 고찰이 그 질문에 연결됩니다. 이런 연습은 시작에 해당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점점 더 멀리 이끌어가서 마침내 우리 삶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탐색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오전 열한 시 반에 외출을 하려고 하는데 마침 그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외출을 할 수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생각했던 대로 외출을 할 수 없게 되어서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시간에 외출을 했더라면, 집을 나섰더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은 보통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과연 내 삶에서 무엇이 변했을런지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

언젠가 이 자리에서 그런 것들에 관해 제가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부정적인 것, 발생하지 않은 것, 하지만 우리 삶의 지혜에 찬 지도에 대한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관찰하기, ·········· 그 양자 간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길, 직통으로 연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우리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여드레 후에 지부의 두 번째 강연에서 제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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