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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blog.sermo.com


1. 시각 활동에서의 안구근육의 움직임

 

눈의 망막에서 사물이 날카롭게 보이는 중심점은 전체 망막의 0.02%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물의 전체형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눈의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사물의 표면을 빠르게 옮겨 다니고, 이렇게 부분적으로 얻은 시각내용을 ‘자아조직’이 함께 구성해서 사물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손으로 사물을 만지듯이, 눈으로 사물을 더듬는다고 여길 수 있다. 눈으로 더듬는 이 활동을 Saccade라고 하며,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 초당 2~5회 정도 발생한다. 시각 활동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능동적인 활동인 것이다.

 


2. TV 화면은 실재인가?

 

TV화면이 움직이는 그림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흔히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TV화면은 브라운관의 화면에 투사되는 무수한 색점에 불과하다. 아날로그 TV의 경우 초당 25개의 완전한 화면이 투사되는데, 그 25개의 완전한 화면을 위해서 50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만 한다. 즉 완전한 한 화면을 위해서 두 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 보면 한 화면이 투사되는 시간이 오십분의 일초가 된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안구 고유의 활동인 Saccade가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시각대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이 ‘더듬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TV시청 중의 Saccade활동이 20초 안에 5~7회만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1979년의 연구결과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는 20초 안에 40~100회의 Saccade가 일어나는 점과 비교해 보면 평균 잡아 안구활동이 90%나 줄어 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 시각영역이 200도임에 비해, TV시청 시의 시각영역은 TV의 크기에 따라 겨우 6~7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결국은 TV시청 중에 시각 활동이 생리적으로 완전히 저해될 수밖에 없다.

 


3. Alpha상태

 

두 가지 뇌파가 있다. 눈을 뜨고 의식적으로 깨어서 활동할 경우 생기는 Beta파와, 명상이나 최면상태, 의식활동이 적은 상태, 어두워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Alpha파가 그것들이다. TV시청 중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은, 비록 눈을 뜨고 움직이는 화면을 능동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도, 오히려 그 반대로 베타파보다 알파파가 현저하게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결국 눈을 뜬 상태에서 최면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극도로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의 근육이 대상물을 ‘의지적으로’ 더듬을 수 없고, 결국은 ‘보는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소극적인 알파파의 상태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하게 보자면, TV화면에는 결코 완전한 그림이 생성되지 않는다. 완전한 그림은 결국 신체 내부, 즉 망막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시각은 지속적으로 화면에 고정되어야 하지만, 외부에서 완전한 그림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안구의 활동의지가 사라지고 마는 기이한 현상이 TV시청 중에 일어나고, 알파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칼로리 소모

 

TV시청 시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 적다는 점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인간은 끊임없이 안구 근육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칼로리 소모가 있기 마련이다. 8세에서 12세 까지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칼로리 소모가 기본소모보다 약간 씩 줄어 든 반면, TV시청 시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보다 평균 14%가 내려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TV시청을 하면서 그저 멍하니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전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어대는 데에 있다. 오늘날 선진국에 만연하는 어린이 비만현상의 원인을 TV시청에만 돌릴 수는 없겠지만, 고려를 할 만한 연구결과임에는 틀림없다.

 


5. 중독성

 

TV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은 될 수 있으면 많이 시청자의 주의를 빼앗는 것이다. 장면의 변화나 화면의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음향과 프로그램의 주제, 내용을 통해서 시청자가 몰입토록 하는 일이, 미디어 분야가 광범위해진 오늘날 그렇게 쉽지는 않다. 결국은 더욱 더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TV시청자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적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바보상자를 쳐다보더라도, 극적인 비상사태에나 분비되는 호르몬인 Kortisol과 Adrenalin이 예기치 않았던 장면전환에서 분비된다고 한다. 비상상태에 분비되어야 할 호르몬의 잦은 분비가 독성으로 작용해서 신체가 항상 드러나지 않은 스트레스상태에 머물게 되며, 생리학적인 중독현상을 보이게 된다.

 


6. 자기활동이라는 환상

 

인지학적으로 보아서 감각활동은 감성의 성향을 지닌 ‘의지활동’으로 감각을 통해서 인간이 세계로 들어서고, 세계가 인간 내부로 들어온다. 인간의 자아활동에 속하는 의지력이 안구근육을 움직여서 개별적인 사물을 향하게 하고, 시각적인 주의를 지배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감각론, 즉 감각기관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입구에 다름없으며, 그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극을 두뇌의 신경기관이 처리해서 인간이 지각하고, 인간이 이 감각활동에서 소극적이라는 통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화면이 지속적으로, 극도로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TV시청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지만, 사실은 최면상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이 되고 만다. TV시청 중에 인간이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신체적인 근거는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인지학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영적-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내어야 할 ‘형상적 상상, Imagination' 즉 ‘생동하는 내면의 그림’을 화면의 그림이 대체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아의 활동을 완전히 저지한다는 데에 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슈타이너가 당시의 흑백영화를 보면서 예언하기를, 이 매체가 극도로 빠르게 문화의 한 장르로 발달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지학적 인류발달사를 조망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예전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물을 바라보면 동시에 그 사물에 작용하는 정신적 존재 역시 형상으로 볼 수 있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 5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꿈꾸는 듯한 형상적 인식’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오늘날의 인간은 정신적 존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졌다.

 

현재의 문화기가 들어선지 얼마 후인 17세기에 이미 영화와 유사한 기법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에서,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후의 인간이 외부에서 그 형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칼리유가가 끝날 무렵인 19세기 후반에 무성영화가 개발되었으며, 그 이후 100여 년 동안 미디어는 급속히 발달하였다.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내적인 형상을 일구는 대신,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그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비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이 TV시청을 하면서 의식적인 자아활동을 놓아 버리고, 수동적으로 외부의 그림에 최면당한 듯 몰두하는 동안, 의식이 비어버린 그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인간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자유’를 얻었으며, 자유를 얻은 만큼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책임감 역시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인류의 운명을 -여기에서 미래는 역시 확장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자아활동을 통한 형상적 사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 자아활동이 멈춘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 즉 아리만적, 루시퍼적 힘들이 인간의 미래를 양도받는 위치에 들어선다. 이는 비단 TV시청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곳에는 항상 그렇다. 선전을 통한 사고의 조절,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 등은 사실 이런 자연이하의 힘들의 작용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7. 어린이의 TV시청

 

어른과는 달리 어린이는, 특히 7세 이전의 어린이는 ‘존재전체가 감각기관’이다. 어린이는 세계 속에 침잠해서 살고 있으며,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어린이들이 TV를 시청하면, 어른들이 그것을 TV화면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그것이 ‘실재’라고 여기며,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직 실재와 허상(virtual)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세 이하의 어린이 교육은 의지감각들, 즉 촉각, 생명감각, 운동감각, 균형감각을 올바르게 발달시키는데에 그 중점이 있다. TV시청은 이 의지감각들을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악이 된다. 만질 수도 없으면서 실재로 다가오는 TV 속의 친구들, 동물들, 사건들이 어린이에게 실재와 허상의 구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생한 청소년 총기난사사건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TV와 컴퓨터 중독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시사해 준다. 위에 언급된 생리학적, 신체적 현상 때문에라도, 어린이를 TV 앞에 앉혀 두는 것은 ‘신체손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 TV가 집 안에 없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TV를 통해서 많이 배운다거나, TV를 어릴 적부터 보아야 나중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독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종학력이 높을수록, 수입이 높을수록 TV시청률이 적다고 한다. 즉 배움은 책이나 강의와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얻는 것이지, TV를 통해서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소일거리가 있기 때문에 TV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고, 다른 소일거리를 배우거나 만드는 것은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그 다른 소일거리를 즐겨서 해 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골라서 보여주어라’, ‘함께 시청을 해라’ 등등 조언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조언들은, 일단 집 안에 TV가 있으면, 부모가 어지간한 고집불통이라서 수미일관적이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집안의 TV존재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조금 더 보겠다고 날마다 떼를 쓰는 아이와, 안 된다고 야단하는 엄마의 ‘TV-연극’을 이미 프로그래밍 하고 있다고 여기면 된다. 꼭 TV가 있어야 한다면, 우선은 ‘철저한 일관성과 무한한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와 싸울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인과 어린이는 다르다는 점을 아이에게 반드시 인식시키고, 집에서 결정권은 부모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특히 ‘양부모가 함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아빠는 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식의 변명이 통용되면 TV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아이들은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TV를 보게 해주는 아빠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할 것이다.

 

7세 이전에는 TV금지, 15,6세까지는 선별해서 TV를 시청토록 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한다.

 

*

 

TV가 없으면 아이가 친구 집에 가서 시청한다. 이 점이,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미디어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단답형의 해결안은 없는 것 같다. 각자가 TV시청의 해악을 깊이 인식해서 스스로에게 가능한 개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글: 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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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의 기적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비극에 나온 동화

《영혼의 시험》에서 




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외로운 숲속에서

가난한 나무꾼의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부모님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느다란 몸매와

투명한 살갗을 지닌 아이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깊고 깊은 정신의 경이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몇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아이에게는 친구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산 위로 황금빛 태양이 떠오르면

아이의 고요한 눈은 그 정신의 금빛을

영혼 깊이 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가슴 속 존재도

마치 아침 햇살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아침 햇살이 어둡고 짙은 구름을

뚫고 나오지 못해

산들이 온통 음침한 기운에 뒤덮이면,

아이의 눈은 슬픔으로, 그리고

아이의 가슴은 아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드는 정신의 힘에

아이는 온전히 몰두하였고,

그 세계를 마치 자기 몸의

일부처럼 친숙하게 느꼈습니다.

물론 숲 속의 나무와 꽃들도

아이에게는 친구였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꽃봉오리와 꽃술들, 그리고

나무꼭대기로부터 정신 존재들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그들의 속삭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저

살아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과

영혼으로 대화를 나눌 때면,

비밀스러운 세상의 경이가

아이를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녁이 되면 종종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스레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바위를 뚫고 솟아나서

수천수만의 물방울이 바위 위로 흩날리는

샘물가에 있곤 하였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색들의 유희 속에 마술처럼

은색 달빛이

그 물방울들의 흐름에 비치면,

아이는 오랫동안

그 바위의 샘물가에 굳어버린 듯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물방울의 흐름과 반짝이는 달빛 속에

신비로운 어떤 형상이 만들어져

아이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형상은 세 여인의 모습이 되어서

훗날 아이의 영혼이 힘 있게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포근한 여름밤

아이가 다시 그 샘물가에 앉아 있을 때,

세 여인 중 한 여인이

수천수만 개로 흩날리는 물방울을 잡아서

두 번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두 번째 여인은 그 흩날리는 물방울로

은색의 빛나는 잔을 만들어

세 번째 여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그 잔에 은색 달빛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이는 이 모든 것을

앞을 내다보는 눈길로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이 있던 날 밤에

아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난폭한 용이

그 잔을 훔쳐갔습니다.




이 밤이 지난 뒤 아이는 

샘물의 기적을 세 번 더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여인들은 아이를 떠났습니다.

아이는 달빛 아래에서 

바위샘을 바라보았지만요.

그리고 360주가 세 번 지났을 때,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오랫동안 지내온 

부모님의 집과 숲을 떠나

낯선 도시에 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고된 일에 지친 그는 생각했습니다.

‘대체 어떤 삶이 다가오는 걸까?’

문득 그는 자신의 바위샘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의 여인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면서 외롭다고 느낄 때면

나와 함께 한 순간을 떠올리렴.

그러면 나는 사람들의 영혼의 시선을

끝없이 열린 하늘과 별들을 향해 이끌어줄 거야.

그리고 나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내 기적의 잔으로

삶의 희망이 담긴 물을 건네줄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여인도 말했습니다.

“살면서 용기에 도전을 받을 때면

나를 잊지 말렴.

그러면 나는 사람들의 심장의 힘을

영혼 깊은 곳으로, 또 정신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거야.

그리고 나에게서 그 힘을 구하는 사람에게

내 기적의 망치로

삶의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켜줄 거야.”




세 번째 여인이 말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풀리지 않는 삶의 수수께끼가 너를 괴롭힐 때면

네 정신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렴.

그러면 나는 삶의 미로에서, 또 영혼의 심연에서

네가 가진 생각의 실들을 자아내줄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꾸는 사람에게

내 기적의 베틀로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비쳐줄 거야.”

 

그 일이 있던 날 밤에

그는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난폭한 용이 살금살금 주위를

기어 다녔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어릴 적 바위샘에서 지켜보았고,

고향을 떠나면서

낯선 곳으로 함께 옮겨갔던,

그 정신 존재들이

그를 용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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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 war einmal ein Knabe,

Der wuchs als armer Förstersleute einzig Kind

In Waldeseinsamkeit heran. -

Er lernte außer seinen Eltern

Nur wenig Menschen kennen.

Er war von schwachem Gliederbau:

Durchscheinend fast war seine Haut.

Man konnte lang ins Aug' ihm schaun;

Es barg die tiefsten Geisteswunder.

Und wenn auch wenig Menschen nur

Des Knaben Lebenskreis betraten,

Es fehlte ihm an Freunden nicht.

Wenn in den nahen Bergen

Erglühte golden Sonnenhelle,

Dann sog des Knaben sinnend Auge

Das Geistesgold in seine Seele ein:

Und seines Herzens Wesen,

Es ward so morgensonnengleich. -

Doch wenn durch finstre Wolken

Der Morgensonne Strahl nicht drang

Und düstre Stimmung alle Berge überzog,

Da ward des Knaben Auge trüb

Und wehmutvoll sein Herz —.

So war er hingegeben ganz

Dem Geistesweben seiner engen Welt,

Die er nicht fremder fühlte seinem Wesen

Als seines Leibes Glieder.

Es waren ihm ja Freunde auch

Des Waldes Bäume und die Blumen;

Es sprachen Geisteswesen aus den Kronen,

Den Kelchen und den Wipfeln -,

Verstehen konnte er ihr Raunen —.


Geheimer Welten Wunderdinge

Erschlossen sich dem Knaben,

Wenn seine Seele sich besprach

Mit dem, was leblos nur

Den meisten Menschen gilt.

Und sorgend oft vermißten abendlich

Die Eltern den geliebten Sprossen. -

An einem nahen Orte war er dann,

Wo aus den Felsen eine Quelle drang

Und tausendfach zerstäubend

Die Wassertropfen über Steine sprengte.

Wenn Mondeslichtes Silberglanz

In Farbenfunkelspielen zauberhaft

Sich spiegelt' in des Wassers Tropfenstrom,

Da könnt' der Knabe stundenlang

Am Felsenquell verharren.

Und Formen, geisterhaft gebildet,

Erstanden vor dem Knabenseherblick

Im Wassertreiben und im Mondenlichtgeflimmer.

Zu dreien Frauenbildern wurden sie,

Die ihm von jenen Dingen sprachen,

Nach denen seiner Seele Trieb gerichtet. -

Und als in einer milden Sommernacht

Der Knabe wieder an der Quelle saß,

Ergriff der Frauen eine viele tausend Stäubchen

Des bunten Wassertropfenwesens

Und reichte sie der zweiten Frau.

Die formte aus den Tropfenstäubchen

Ein silberglänzend Kelchgefäß

Und reichte es der dritten Frau.

Die füllte es mit Mondessilberlicht

Und gab es so dem Knaben.


Der hatte alles dies geschaut

Mit seinem Knabenseherblick. -


Ihm träumte in der Nacht,

Die dem Erlebnis folgte,

Wie er beraubt des Kelches

Durch einen wilden Drachen ward. -


Nach dieser Nacht erlebte jener Knabe

Nur dreimal noch das Quellenwunder.

Dann blieben ihm die Frauen fort,

Auch wenn der Knabe sinnend saß

Am Felsenquell im Mondensilberlicht. -

Und als dreihundertsechzig Wochen

Zum drittenmal verstrichen waren,

War längst der Knabe Mann geworden

Und von dem Elternhause und dem Waldesgrund

In eine fremde Stadt gezogen.

Da sann er eines Abends,

Von harter Arbeit müde,

Was ihm das Leben wohl noch bringen möge.

Es fühlte sich der Knabe plötzlich

Nach seinem Felsenquell entrückt;

Und wieder konnte er die Wasserfrauen schauen

Und dieses Mal sie sprechen hören.


Es sagte ihm die erste:

Gedenke meiner jeder Zeit,

Wenn einsam du dich fühlst im Leben.

Ich lock' des Menschen Seelenblick

In Ätherfernen und in Sternenweiten.

Und wer mich fühlen will,

Dem reiche ich den Lebenshoffnungstrank

Aus meinem Wunderbecher. -


Und auch die zweite sprach:

Vergiß mich nicht in Augenblicken,

Die deinem Lebensmute drohen.

Ich lenk' des Menschen Herzenstriebe

In Seelengründe und auf Geisteshöhn.

Und wer die Kräfte sucht bei mir,

Dem schmiede ich die Lebensglaubensstärke

Mit meinem Wunderhammer. -


Die dritte ließ sich so vernehmen:

Zu mir erheb' dein Geistesauge,

Wenn Lebensrätsel dich bestürmen.

Ich spinne die Gedankenfäden

In Lebenslabyrinthen und in Seelentiefen.

Und wer zu mir Vertrauen hegt,

Dem wirke ich die Lebensliebesstrahlen

Auf meinem Wunderwebestuhl.

Es träumt' in jener Nacht,

Die dem Erlebnis folgte,

Dem Manne, daß ein wilder Drache

In Kreisen um ihn her sich schlich -

Und nicht ihm nahen konnte:


Es schützten ihn vor jenem Drachen

Die Wesen, die er einst am Felsenquell geschaut

Und die aus seiner Heimat

Mit ihm zum fremden Ort gezogen waren.

출처:슈타이너사상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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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제15편 망징(韓非子 第15篇 亡徵)


1. 나라는 적은데 군신(群臣)의 저택은 크고, 군주의 권력은 약한데 대신의 세력이 크면 멸망한다.


2. 법령, 금제를 소홀히 하여 그에 따르지 않고, 모략에 열중하여 국내를 다스리지 못하고, 외국의 원조만 믿고 있으면 멸망한다.


3. 군신(群臣)이 학문을 닦고, 귀족의 자제가 공허한 변론을 즐기며, 상인이 정부를 배경으로 남몰래 축재를 하며, 아래 백성들이 군주가 베풀어 준 것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망한다.


4. 군주가 궁전과 누각과 정원과 연못 같은 토목 건축을 좋아하고, 수레와 말, 의복과 기이한 물건 그밖에 오락물에 골몰하고, 그 때문에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여 재정을 낭비하면 망한다.


5. 군주가 날짜나 시간 따위의 길흉에 마음을 쓰고, 귀신에 혹하여 점쟁이의 말을 믿고 굿하기를 좋아하면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6. 군주가 신하의 진언을 들어 관작을 수여하는데 실제의 공적을 조사하지 않고, 다만 한 사람의 총애하는 신하를 밖의 정세를 보고하는 창구라고 믿고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7. 중신의 알선으로 관직이 주어지고, 뇌물을 바쳐 작록을 얻을 수 있는 나라는 망한다.


8. 군주의 성격이 아둔하고, 일을 처리한 적이 별로 없으며, 의지가 유약하고 결단력이 미약하며, 기호가 분명치 않고, 남에게 의지하여 자립정신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9. 군주가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어떤 일이든 이득을 보겠다고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10.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포상하기를 좋아하고, 법규를 따르지 않으며, 말만 앞세우고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겉치레에만 골몰하여 전시효과만을 노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11. 군주의 사람됨이 천박하고, 밖에서 쉽게 엿볼 수 있으며, 비밀을 가슴속에 간직해 두지 못하고 바로 누설시키며, 주의는 산만하고 신하들의 말을 밖에 알리는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12. 군주가 억지를 부리며 심술궂고,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며 충고를 배척하고,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며, 국가를 돌보지 않고 경거망동하며, 더욱이 자신이 있다는 듯이 서두르는 나라는 망한다.


13. 동맹국의 원조를 믿고, 이웃 나라를 가벼이 여기면 그런 나라는 망한다.


14. 외국에서 들어온 자가 처자를 외국에 둔 채, 위로는 모사를 일삼고 아래로는 민사에 관계하고 있는 나라는 망한다.


15. 신하와 백성은 재상을 믿고 있지만, 군주에게는 심복할 수 없다고 하는 데도 군주는 그러한 재상을 신임 총애하고 있으면 권력은 아래로 옮아가므로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16. 자기 나라의 탁월한 인물은 등용하지 않고, 도리어 외국의 인재를 초청하여, 공로에 의해서 그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 다만 소문만으로 좌우시키며 외국인을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고, 종래의 신하를 천대하는 나라는 망한다.


17. 적출의 공자는 경시되고 서자가 세력이 있으며, 태자를 아직 책봉하기도 전에 군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18. 군주가 소탈하여 과실을 후회하지 않고 나라가 혼란한데도 자기 재능만을 믿고, 제 나라의 실력도 모르고 이웃 나라를 경시하는 나라는 망한다.


19. 자기 나라가 소국인데도 대국에 대하여 겸손하지 않고, 무력하면서 강대국을 경계하지 않고 탐욕적인 서투른 외교를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0. 태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부왕이 강대국의 공주를 정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태자의 지위가 위태해진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마음이 변하여 부인 편에 서게 되는데 그런 나라는 망한다.


21. 군주가 겁쟁이이며 지조가 없고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고, 단행해야 된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결행하지 못하는 나라는 망한다.


22. 군주는 망명하여 다른 나라에 있는데 그 나라에서 다른 군주를 추대하거나, 타국에 인질로 가 있는 태자가 귀국하지 않고 있는데 군주가 다른 자식을 태자로 옹립하거나 하면, 민심이 국가에서 이탈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23. 군주가 대신을 모욕하면서도 때로는 너무 허물없이 대우하고, 아래 백성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거나 하면, 그들의 원한은 그칠 줄 모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처에서 난동이 일어나고, 그 나라는 망한다.


24. 두 대신이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군주의 백숙부나 형제가 권력 기구에 참여하여 세력을 펴고, 국내에는 도당이 있어 외국의 원조를 얻어 권력 싸움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5. 군주가 몸종이나 시녀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총신이나 광대의 계획을 실행하면, 궁정의 안팎에서 원성을 듣게 될 것이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듭 불법을 행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6. 대신을 소홀하게 대우하고 일족의 존장에게 무례를 범하며, 서민을 못살게 굴고 죄 없는 자를 죽이면 그 나라는 망한다.


27. 군주가 법률을 왜곡하며 사사로운 일을 공적인 일처럼 처리하고, 법령을 함부로 변경하면서 수시로 호령을 내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28. 국토에 요새가 없고 성곽도 형편없으며, 식량의 저장도 없고 물자도 적으며, 방어전의 준비가 없는 나라는 타국이 침공해 오면 곧 망한다.


29. 군주와 친족이 장수하는 사람이 없고 잇따라 군주가 죽어 어린애가 군주가 되면 대신이 권력을 자행하여, 타국에서 온 자에게도 벼슬을 주어 패거리를 만들게 하고, 외교를 한답시고 영토까지 잘라 선물하게 되는 나라는 망한다.


30. 어떤 나라의 태자가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이름도 널리 알려지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구축되고 대국과의 교제가 많아지면, 군주와의 사이는 벌어질 것이며 결국 나라는 망한다.


31. 군주가 성미가 급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무슨 일이나 성을 내며, 앞뒤를 가리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2. 군주가 자주 성을 내고,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여 농사철을 잃으면서까지 전쟁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3. 귀족들이 서로 투기를 하며 대신의 세도가 당당하고, 밖으로 외국의 응원을 받아 안으로 서민을 못살게 구는데도 그러한 자를 벌하지 않는 나라는 망한다.


34. 군주는 우매한데 군주의 백숙부나 형제는 현명하며, 태자의 위력이 약하며 서자가 그에 대항하고, 관리가 힘이 없고 백성이 오만하면, 나라 안이 소란해져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35. 군주가 무엇에 노하고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죄가 분명한데도 벌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은근히 군주를 미워하거나 걱정을 하여,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되어 반란 따위가 일어나서 나라는 망한다.


36. 원정을 할 때 장군에게 무거운 권력을 주거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에게 높은 지위를 주어 멋대로 재판을 하고 명령을 하며 독재적이고 군주의 지령을 기다리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37. 정부인은 음란하고 태후에게는 추행이 있고, 내전과 정부의 구별이 없으면, 정부인의 무리와 태후의 무리가 양립하여 암투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8. 정부인의 권위가 약하고 애첩의 권위가 강하면 태자보다 서자가 존경을 받게 되고, 안으로는 정부인의 당과 애첩의 당이 싸우게 되고, 밖으로는 태자의 당과 서자의 당 및 재상과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서 그 나라는 망한다.


39. 대신이 극진히 존경을 받고 그들 도당이 강대하고 그 대신이 군주의 판단을 방해하며 국사를 멋대로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0. 정실 인사에 의한 관리가 중용되고 공로 있는 자가 배척 당하며, 변두리에서 일어난 작은 선행 따위는 높이 평가되고, 국가에 헌신한 공로를 경시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1. 군주의 금고는 비어 있는데 대신의 창고는 가득하며, 정착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은 가난한데 유랑민은 오히려 돈이 많고, 농업과 전투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은 천대받고 있는데 대단치 않은 직업에 종사하는 자만이 부자가 되는 나라는 망한다.


42. 군주가 눈앞에 큰 이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물어물 그것을 포착하지 않거나, 화가 미칠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만하여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막론하고 군사를 소홀히 하며 오직 인의만을 가지고 외양에만 힘쓰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3. 군주가 주군으로서의 효도를 하고 싶다 하여 국가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모군의 명령에 따르거나 여자가 국정을 처리하며 내시가 국사에 참견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4. 군주가 말을 할 때 달변이긴 하지만 조리가 없고, 마음은 현명하지만 법과 술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며, 다재다기하나 법규에 의해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


45. 신참의 신하가 진출하고 고참의 신하는 물러서며, 미련한 신하가 국정을 다투고 현명한 신하는 물러서며, 공로가 없는 자에게 높은 작록을 주고 노고가 많은 자를 천대하면 백성의 원한을 얻게 되어 그 나라는 망한다.


46. 군주의 백숙부, 형제 또는 대신의 봉록과 관작이 그 공로에 비하여 무겁거나 등급을 표시하는 문장이나 복장이 분에 넘치고 그 저택이나 음식물이 사치스러운데도 군주가 금지시키지 않으면, 따라서 신하의 욕망은 한이 없게 되는데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47. 군주의 사위나 손자가 백성과 같은 고을에 살며, 그 위세를 앞세우고 마을에서 설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원래 망국의 징조라는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요가 둘이 있다해도 다 같이 왕이 될 수는 없으며, 걸이 둘이 있다해도 다같이 멸망할 수는 없다. 멸망하거나 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은 치란강약(治亂强弱)이 어느 한편에 기우는 데서 발생한다. 초목이 부러지는 것은 그 속에서 벌레가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며,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목에 벌레가 파고든다 할지라도 강풍이 불지 않으면 부러지지 않을 것이며, 담장에 틈새가 있다 하더라도 폭우가 내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만승의 대국의 군주는 술을 지켜 법을 행하고, 멸망의 징조가 있는 나라를 벌레가 좀먹는 나무나 틈새 난 담장을 때리는 폭풍우가 되어 쳐들어가면 그 나라를 쉽게 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일을 쉽게 이룩한다.

출처: 옛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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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청법(觀聽法)


잘 보고 똑똑히 듣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 중 한 가지만 잘해선 안 되고 두 가지를 다 동시에 잘 해야 한다.   

윗사람들이 얻게 되는 정보는 한정적이고 그나마 편향돼 있는 게 보통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드는 일에는 솔깃해지고 싫은 일에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면 그에 대한 나쁜 평가는 '들으려' 하지 않고,

'들은 것'이 마음에 들면 상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은 실제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음흉한 수하들은 듣기 좋은 얘기만 해주거나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니 윗사람은 수하가 전한 듣기 좋은 얘기는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수하가 보여준 것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봐야 한다.



2. 일청법(一聽法)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하나 다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재능도 없이 무리 속에 숨어 머리 숫자만 채우고 있는 자'를 골라낼 수 있다.

일청법을 쉽게 알 수 있는 우화 한 토막.

어느 왕이 피리 합주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궐 안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자그마치 300명이나 됐다.

어느 날 '피리 명인'을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자 그를 피리 합주단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엉터리였다.

합주만을 즐기던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왕은 선대왕과는 달리 독주를 즐겼다.

새 왕은 300명이나 되는 피리 부는 사나이들에게 각기 독주를 해보라 했다.

그러자 피리 명인을 자처했던 자는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다.

한비자에 있는 이 우화로 짐작할 수 있듯 개개인의 능력을 시험해봐야

무리에 끼어 묻어가는 자들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다.



3. 협지법(挾智法)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하면서 상대를 시험하는 것이다.

한(韓)나라의 소후(昭侯)는 신하들 중 누가 거짓말을 잘하는지 가려내기 위해

어느 날 잘라낸 자신의 손톱 하나를 감춰두고

'내 손톱 하나가 없어졌다. 손톱이 없어지면 불길하다고 하던데, 모두들 샅샅이 살펴 찾아보라!'고 명했다.

여러 신하들이 대전 안을 샅샅이 뒤져 왕의 손톱을 찾았으나 없었다.

그때 한 신하가 자신의 손톱을 잘라 "폐하, 여기 있습니다."하고 바쳤다.

소후는 바로 그 자가 자주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알아냈다.



4. 도언법(倒言法)


황당한 말이나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 등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는 방법이다.

연나라의 한 재상이 수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저 문으로 백마가 나갔는데, 참 이상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에 말이 들어왔다가 나갔겠느냐'고 했으나,

한 수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들어 와

'정말 백마 한 마리가 방문 밖에 있다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라.'고 말해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냈다.

또 위나라의 한 재상은 왕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신을 할 수 없어 왕이 총애하는 다른 정승을 만나 다짜고짜 그를 마구 비난했다.

그러자 화가 난 충신은

"당신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주군께서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라고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왕의 속마음을 알아냈다고 한다.



5. 반찰법(反察法)


어떤 사건이 발생 했을 땐 그 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자를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다.

한나라 희후가 욕탕에 들어갔더니 욕조 안에 여러 개의 자잘한 돌멩이들이 보였다.

희후는 시녀를 불러

"지금 목욕탕 관리를 맡고 있는 책임자가 바뀔 경우 그 후임으로 정해진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희후는 후임으로 내정돼 있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가 오자 "왜 내 욕조에 돌멩이를 집어넣은 것이냐?"고 추궁했다.

처음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던 그는

나중에 "지금 책임자가 파직이 돼야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동기를 찾아보면 상대를 간파할 수 있고 잘 부릴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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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심상화(사고실험), 정신세계 체험

전기공학자이자 천재 발명가라 일컬어지는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는, 인류 최초로 교류 시스템을 착안하고 실현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발명은 현대의 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근간을 만들며 인류의 삶을 진일보시켰습니다. 

테슬라는 자신의 발명품의 도면을 그리거나 실제로 만들어보지 않고도, 시각화와 루시드드림을 통해 자신의 모든 발명품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그리고 가끔은 낮에도) 혼자 있을 때마다, 여행을 떠나곤 했다. 새로운 장소나 도시, 나라 등을 보기도 하고, 그곳에 살면서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마치 실제의 삶 속에 있는 이들 못지않게 소중했고, 구현되는 그들의 모습 또한 현실에 비해 미흡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나는 발명에 눈을 뜨기 시작한 17살 때까지 끊임없이 이러한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우 기쁘게도, 내가 시설이나 물건도 완벽하게 시각화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어떠한 모델도, 도면도, 실험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실제 삶 속의 모든 것들을 상상 속에서 똑같이 재현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나는 실제의 일에 바로 뛰어들지 않는다. 어떠한 아이디어를 얻었을 때 나는 먼저 그것을 상상 속에서 구현했다. 그 상상 속에서 구조를 바꾸기도, 발전시키기도, 장비를 작동시켜보기도 했다.

기계의 터빈을 상상 속에서 작동시키든 내 가게에서 작동시키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상 속의 기계가 불균형 하면 그것을 상상 속 노트에 기록하기도 했다. 내 상상 속에서 진행한 것과 실제의 삶 속에서 테스트 한 것들은 늘 결과가 같았다. 이 방법을 통해서 나는 내 아이디어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완벽하게 구체화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도 말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내 발명품에 아무런 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완한 후, 완벽하게 구체화할 수 있을 때, 내 머릿속에 있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실제 제작 공정에 넣었다.

예외 없이 나의 발명품들을 한상 내가 상상한 그대로 작동했고, 실험 또한 내가 계획했던 그대로의 결과를 보였다. 20년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내가 왜 다른 방법을 쓰겠는가?"

My Inventions: The Autobiography of Nikola Tesla

출처: 루시드 드림(자각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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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복잡한 미디어인 텔레비전은 완벽하게 정해진 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텔레비전을 역설적으로 '간결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간결함'은 원래 광고업계에서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 문장으로 생각을 집약시켜야 합니다. 생각을 통제하기 위한 아주 교묘한 기법입니다. 

따라서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당신 생각을 세 문장으로 집약시킬 기회가 생기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당신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주장을 뒷받침해줄 최소한의 증거를 제시한 시간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테러에 관한 프로그램에 당신이 초대받았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카다피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1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증거를 따로 제시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빌 클린턴은 테러리스트다'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생전 처음 듣는 주장일 테니까요. 하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당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미치광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우받으려면 모두가 알고 있는 말만 떠벌리면 됩니다. ··········


·········· 정보Information는 적절한 말이 아닙니다. 흔히 정보라 표현되는 것은 대개 '왜곡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언론은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근본적 한계를 갖습니다. 따라서 제도적 관점에서 언론은 민간 기업에 시청자를 파는 또 하나의 민간 기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론은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한계를 지녔음에도 언론이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직업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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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관찰하는 사람은 이 7년 주기의 급변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한 주기의 길이는 곧이곧대로 똑같지 않고 대략적입니다. 마흔아홉, 마흔둘, 서른다섯 살 적을 돌아보면 아주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 그 이전에는 네가 지녔던 자질로 절대 이를 수 없었을 것을 그 일로 인해서 체험하거나 느끼도록 배웠다. 그것은 마치 영구치를 얻기 전에는 영구치로 씹을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다." 인간이 삶을 구체적인 것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인류 발달의 경로에서 소실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스스로에게서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으면 서른 살 이후의 주기들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십대 초반까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당히 어렵기는 하지만 이십대 후반까지도 그 내적인 변화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조직이 그러하기를 사실 스물예닐곱,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만 자연적인 발달에 의해 이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한계가 점점 더 낮은 연령으로 밀려 내려가는 추세입니다. 아득한 옛 시절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직 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것을 겪어야만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을 통한 그런 규정성이 지양되었기 때문에, 오직 그런 이유로 해서 자유가 가능해졌습니다. 자연의 규정성이 멈추는 그 정도만큼만 자유가 가능해집니다. 먼 옛날에는 사람이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을수록 자연 법칙에 따라 그 정신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싹텄습니다. 반면에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적인 노력을 통해서 정신적인 것을 찾는 길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런 상황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며칠 동안 논했던 그 모든 이유로 인해서 구세대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들이 과연 무엇이 되었는지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지성주의에 머물고 맙니다. 그 지성주의가 대략 열여덟살, 열아홉 살 사이에 이미 완전히 발달되어서 그 나이에 이르면 지적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주의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껏해야 더 나은 숙련에나 이를 수 있지 질적인 진보는 이를 수 없습니다. 지성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려는 유혹에 일단 한 번이라도 빠져들면, 그 증명과 반박에서 어떤 진보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수십 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 낸 것을 지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열여덟 살밖에 먹지 않은 녀석도 지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십에 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도 벌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주의는 의식 영혼 시대 동안에 일단은 이르렀어야만 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심화라는 의미에서는 아무 진보도 없습니다. 단지 숙련의 의미에서만 진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아직 당신처럼 그렇게 똑똑하지 못합니다. 아직은 당신이 나를 기만할 수 있습니다." 라고 젊은이가 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젊은이는 상대방이 지성주의의 영역에서 자기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겁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과격하게 표현해야만 합니다. 저는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자연적인 발달이 과연 무엇인지 설명을 드릴 뿐입니다. 현시대가 어떤 성격을 띠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내적인 능동성으로부터 발달을 추구하면서 그 발달을 깨어 있으면서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십대 이후에는 단순한 지성주의와 더불어 녹슬고 맙니다. 그러면 인간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통해 단지 인위적으로만 연명하게 됩니다.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극장에 가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영화를 보려는 욕구, 모든 것을 외적인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그 욕구 자체가, 인간이 내적으로 수동적이고 비활성화되어서 내적인 활동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은 정신과학은 항상 내적으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나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사진과 함께>>라고 덧붙여진 행사나 강연에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멍하니 앉아서 사고 활동을 가능한 대로 조용히 쉬도록 버려둡니다. 모든 것들이 그냥 그렇게 사람을 지나쳐 갑니다. 사람이 완전히 수동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수업 전체가 그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교육학적인 이유에서 오늘날의 실물 수업이 지니는 진부함에 반대하면 그가 누구든 간에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 취급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실물 수업에 반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관조 기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기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오로지 내적인 활동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학적인 것을 제시한다 함은, 인간이 영적으로 스스로 일하도록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모든 정신과학은 그런 내적인 활동으로 초대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신과학은, 외적·감각적 관조에서는 더 이상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어서 내적인 힘들이 자유롭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 모든 고찰들을 몰아가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내적인 힘들의 작용 속에서 사고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형상적 상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안 됩니다. 

모든 인지학적 정신과학의 근거는 말하자면 그 내적인 활동성입니다. 내적인 활동성으로의 일깨움입니다. 모든 감각이 일단 침묵하고 오로지 만활한 사고 활동만 남아 있는 경우에 인간 내면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에 호소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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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에 이른 어린이들은 삶에서 그들의 영혼 상태가 의미심장한 변화를 거치는 단계에 놓여있다. 태어나서 6, 7세가 되기까지의 시기에 인간은 직접적인 주변환경에 있는 모든 것에 몰두하는 자질을 지닌다. 그렇게 모방하는 본능으로부터 자신의 되어 가는 힘을 형성한다. 6, 7세가 되면 교육자와 교사가 자명한 권위를 바탕으로 해서 어린이에게 작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영혼이 열린다. 그의 내면에서도 역시 살아야 하는 것이 교육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내면에 살고 있다는 불분명한 느낌에서 어린이가 권위를 수용한다. 모방 본능에서 자명한 권위 관계를 근거로 하는 습득력으로의 변화를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없이 어린이를 대한다면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단순한 자연관에 근거하는 현대 인류의 인생관은 인간 발달에서 드러나는 그런 사실들에 완전히 의식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인간 본성이 지니는 삶의 표현 중에서 가장 섬세한 것을 위한 감각이 있는 사람만 그런 것에 필수적인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런 감각이 교육과 수업 예술을 지배해야 한다. 그 감각이 교과 과정을 형성해야 하고, 교육자와 어린이를 합일시키는 정신 속에 살고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하는 일은, 추상적 교육학의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 고무된 것에 아주 적은 정도로만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교육자는 활동하는 매 순간 되어 가는 인간에 대한 생동적인 인식으로부터 항상 새로이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활기에 찬 교육과 수업은 많은 어린이들이 있는 학급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이의를 당연히 제기할 수 있다. 특정한 한도 내에서 그 이의는 분명히 옳다. 그런데 특정한 한도를 넘어서까지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추상적인 정규-교육학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어린이 각자의 내면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진정한 인간 인식에 접하는 생동적인 교육 예술과 수업 예술을 관철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가르침을 통해 어린이를 주제에 붙들어 놓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육과 수업에서 작용하는 것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하는 것이 충분이 강하게 생동적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인간 인식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되어 가는 인간이 아주 고도로 그가 풀어야만 하는 삶의 수수께끼가 되어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시도에 어린이들이 동참하도록 일깨운다. 그런 동참이 개별적인 가르침보다 더 풍부한 결과를 가져온다.

개별적인 지도는 진정한 자아 활동과 관련하여 어린이를 너무 쉽게 마비시키고 만다. 물론 일정한 한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인간 인식에 의해 완전히 고무된 삶을 사는 교사가 가르치는 가득찬 학급이, 그런 삶을 발달시킬 능력이 없어서 정규-교육학으로부터 출발하는 교사가 가르치는 적은 학생 수의 학급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어린이 답게-예술적인 교육에서 얼마나 강하게 지적인 것을 건져낼 수 있는지를 간파한다면, 초등학교 첫 학년의 수업에서 예술에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음악 예술과 조형 예술을 수업 영역에 올바르게 위치시키고, 신체적인 연습에 예술적인 것을 적합하게 연결할 것이다. 체조와 운동을 음악적인 것이나 낭송에 의해 고무되는 감정의 표현으로 만들 것이다. 단지 육체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것만 근거로 하는 것의 자리에 오이리트미적인 것, 의미에 찬 움직임이 들어선다. 그러면 수업의 예술적인 구성에 의지 형성과 감성 형성을 위해 얼마나 강한 힘이 내재하는지 알게 된다. 

특정한 삶의 단계에서 현시하는 발달력과 방법론 간에 존재하는 관계를 투철한 인간 인식으로 통찰하는 교사만 여기에 암시된 방식으로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면서 수업을 할 수 있다. 어린이를 다루는 학문으로 교육학을 배운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자나 교사가 될 수 없다. 인간 인식을 통해 내면에서 교육자가 깨어나야 그 사람이 진정한 교사가 된다. 


·········· 가르치는 내용을 어린이가 모두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고 기회만 되면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서까지 애를 쓸 때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런 노력에는 분명히 훌륭한 의지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지는, 인간이 어린 시절에 순수하게 기억으로만 습득한 것을 나중에 나이가 좀 든 후에 다시 일깨우고, 그 동안 노력해서 얻은 성숙도를 통해서 비로소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깨닫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억력으로 수업 내용을 습득하는 경우에 흔히 어린이가 보이는 그 염려스러운 무관심을 교사가 활기에 찬 방식을 통해 필수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교사가 자신의 존재 전체로 수업 활동에 내재한다면, 어린이가 나중에서야 완전히 이해를 해서 희열에 찬 체험을 할 수 있는 주제도 어린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바로 그 나중의 신선한 체험 속에 삶의 내용을 간단없이 강화시키는 것이 들어 있다. 교사가 그런 강화를 위해 작용할 수 있다면, 그는 현존의 노정을 위해 잴 수 없이 커다란 삶의 자산을 어린이에게 준비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어린이의 <이해>를 겨냥하느라 <실물 수업>을 지나치게 적용해서 진부해지는 것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런 수업이 어린이의 자립적인 활동을 참작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열매는 어린 시절을 위해 아주 불쾌한 맛을 지니기 마련이다. 특정한 관계에서 아직은 어린이의 <이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을 어린이 내면에서 교사의 활력에 찬 불꽃으로 불을 지피는, 바로 그 일깨우는 힘이 인생 전체를 거쳐 작용하면서 머문다. 

- '사회 문제의 핵심' 중에서


··········


[1919년 8월과 9월,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학교 개교에 즈음한 14일 간의 교사세미나를 마친 후에 행한 슈타이너의 "결어"]

[독일어 번역입니다. - 최혜경 옮김]

이제 제가 말하자면 여러분의 마음에 명심시키고 싶은 것에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오늘 이 고찰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교사가 크고 작은 것에서 자신의 직업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정신화 함에서, 교사가 하나하나의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의 개념과 모든 개별적인 감각을 어떻게 발달시키는지, 바로 그 양식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교사는 발안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교사가 절대로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달리 말하자면, 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것과 어린이들을 대하는 처신에 완전히 현존해야 한다는 점을 숙고하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즉 교사는 크고 작은 전체에서 발안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 두 번째는, 사랑하는 여러분, 교사로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과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교사로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흥미로울 수 있는 것에 어떤 식으로든 등을 진다면, 그런 것이 교사에게서 자리잡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별적인 어린이들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두 번째입니다. 교사는 세상과 인간존재를 위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내면에서 진실이 아닌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내면 깊숙이 참된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절대로 진실이 아닌 것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많은 경로를 통해서 진실이 아닌 것이, 특히 방법론에서 우리의 수업으로 흘러들어오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진실한 것을 추구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경우에만, 우리의 수업이 진실한 것의 각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실현되기 보다는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나 역시 교사라는 직업을 위해서 황금률인 것이 있습니다. 교사는 메마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메마르지 않은 신선한 영혼정서! 메마르지 않고, 시대에 뒤 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교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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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더해서 인간은 지상의 현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배워야만 한다. 

그 첫 번째로 인간은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키기를 배운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적으로 간과한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킨다는 사실에서 인간과 동물 간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 중 하나를 건드리게 된다. 동물은 공간 내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균형 상태를 발달시키도록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다. 어떤 동물은 기어오르도록 규정되어 있고, 또 어떤 동물은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등등. 동물은 애초에 조직되어 있기를 자신에 알맞은 방식으로 공간에 들어선다.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 동물학자가 이 사실을 숙고한다면, 예를 들어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며 얼마나 많은 수의 유사한 뼈와 근육이 있는지 별로 강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균형 관계를 위한 완벽한 소질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비해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전체 존재로부터 균형 관계를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한다. 걷지 못하는 존재에서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에게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에게 수직적 자세, 공간 내의 균형 상태를 주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중력에 대한 관계에 대치시킨다. 사실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고찰에 있어서는 외관상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이 점을 아주 쉽게 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기어오르는 동물이 기어오르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도 똑바로 서서 걷도록 조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주시해 보면 동물의 경우에는 조직의 특성이 공간 내로 들어서도록 만드는 요소임에 비해 인간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임을 알 수 있다. 영혼이 공간에 대한 관계 내로 들어서서 조직을 극복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배우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일한 것으로서 현신에서 현신으로 전진하는 존재로부터 스스로 배우는 두 번째, 그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인간을, 일단은 인간을 통해서 물체적 세계를 관통하는 정신 생활의 주체로 만든다. 말을 할 수 있기도 전 어린 나이에 외딴 섬에 방치된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은 사람은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 자주 강조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유전으로 물려받은 것, 후일의 삶을 위해 고정된 상태로 유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서 일곱 살이 되면 이갈이를 하도록 유전 관계를 통해서 이미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 외딴 섬에 있다 하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면 이갈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기는,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서의 영혼 존재가 고무되어야만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자아의식을 아직 지니지 않은 바로 그 시기에 후두 발달을 위한 기초를 형성해야만 한다. 거슬러 올라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그 시기 이전에 후두 발달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놓아야만 후두가 언어 기관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를 통해서, 달리 말하자면 한 현신에서 다음의 현신으로 건너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 배우는 그것은 사고 세계 자체 내에서의 삶이다. 두뇌에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고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초기에는 아직 그 기관의 조형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지니고 다니는 그 존재의 의미에 따라 두뇌를 사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출생 직후의 두뇌 상태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힘들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전생에 따라 고유한 존재로서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사고 내에 표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 출생 후에 - 부모나 조상에게서 물체적으로 독립적이 되면 물려받은 두뇌의 특질을 스스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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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상(事象)을 파악할 때, 그 사상 자체에 관해 말해진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것과 관련해 알려진 수많은 사실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진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화음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는 이 점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 가지 수행이 제대로 이해되고 또 제대로 행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수행자가 영혼의 조화를 위해 그 첫 번째 수행의 일면성을 걷어 내는 또 다른 수행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 수행은 그릇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서가 내적인 체험이 될 정도로 이 글을 내밀하게 읽는 이는, 내용을 잘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대목에서는 이런 감정을, 저 대목에서는 저런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영혼의 발달과 관련하여 각각의 감정에 어떤 비중이 할당되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그는 이런저런 수행을 자신의 특수한 개성에 따라 몸소 어떤 행태로 시도해야 할지도 알아낸다. 이 글처럼 체험되어야 하는 과정들에 관한 묘사가 다루어질 경우, 내용을 거듭해서 읽는 것이 필수적임이 밝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시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많은 것이 충분하게 이해되며, 이전에는 놓칠 수밖에 없었던 사상(事象)의 어떤 미묘한 면들을 이런 시도가 있고 난 연후에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테니까 말이다. 

앞에서 밝힌 길을 갈 의도가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이 글에서 내면 생활에 유익한 것들을 많이 찾게 된다. 이를테면 생활의 규칙들이나, 수수께끼 같은 현상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지에 대한 시사 등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인생 경험이 풍부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삶의 가르침을 깨친 많은 이들은 여태까지 자기 머리에 따로따로 떠올랐던 것, 다시 말해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충분할 정도로까지 생각지는 못했던 것이 연관 관계 속에서 해명되는 것을 느낄 때, 어떤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1909년 10월 12일, 베를린. 루돌프 슈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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