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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문할 수 있는 사람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은, 확실한 관점에서 육성된 용기대담성이다. 신비 수행자는 이러한 미덕이 육성될 수 있는 기회들을 곧바로 찾아내야 한다. 신비 수행에서 그 미덕은 아주 체계적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생활 자체도 특히 이러한 방향으로 가기에 좋은 도량(道場)이다. 아니, 최상의 도량일지도 모른다. 위험을 평정한 마음으로 직시하며 난관들을 대범하게 극복하려는 태도. 신비 수행자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위험을 마주하면 즉시 힘을 내어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나의 불안은 아무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결코 불안해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 불안을 느꼈던 일들과 대면해도, 적어도 가장 내적인 본래의 감정에는 ‘불안함’이나, ‘용기 없음’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정도로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자기 교육을 통해서, 고차적인 비밀에 입문할 때 필요한 아주 특정한 힘을 자기 속에서 개발해 낸다. 물리적 인간이 물리적 감각을 활용하기 위해 신경을 쓰듯이, 영혼적 인간은 용기 있고 대담한 본성에서만 개발되는 힘을 필요로 한다.

··········

   세계의 힘들은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이다. 외적인 실재의 운명은 발생과 소멸이다. 지자(知者)는 이러한 힘들의 작용, 이러한 운명의 진행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정신적 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겨져야 한다. 그러나 인간 자체는 이러한 힘들, 이러한 운명과 뒤얽혀 있다. 인간 고유의 본성 속에는 파괴적 힘과 건설적 힘이 있다. 지자의 눈앞에 사물들은 숨김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러한 자기 인식과 마주하여 신비 수행자는 힘을 잃어서 안 되는데, 그가 넘칠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을 때에만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힘든 생활상 속에서도 내적 평정과 확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현존재의 선한 힘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자기 속에서 육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를 이끌었던 수많은 동인(動因)이 더 이상 그를 이끌지 않을 것임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무지 속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일을 단지 그렇게 행하고 생각했다는 것을 통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지녔던 것들과 같은 그런 근거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가 행했던 많은 일은 허영심의 발로였다. 그는, 지자에게 일체의 허영심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보게 된다. 그가 행했던 많은 일은 소유욕의 발로였다. 그는 일체의 소유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는 행위와 사고를 위한 전혀 새로운 동인을 개발해야 한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용기와 대담성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고 생활 자체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러한 용기와 이러한 대담성을 육성하는 일이다. 신비 수행자는 실패를 겁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일에 또 실패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이 시도하고자 한다.”

   이렇게 그는 세계 속에서 퍼 올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진장하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는 자신을 고양하고 지탱해 줄 정신적인 것을 얻고자 거듭 노력한다. 그의 현세적 존재가 아무리 힘없고 약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미래를 목표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추구에서 과거의 어떠한 경험도 그를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서술된 특성을 어느 정도까지 지니고 있는 인간은 고차적 지식을 위한 열쇠인 사물들의 참된 이름을 경험할 정도로 성숙한 것이다. 세상 사물들을, 그 신적 창시자의 정신 속에 있는 그런 이름들로 명명하는 법을 배운다는 데에 정신계 입문의 본질이 있다. 사물들의 이러한 이름 속에 사물들의 비밀이 있다. ··········

 깨달음은 아주 단순한 과정들에서 시작된다. ·········· 단순한 과정들을 인내를 다하여 엄격하고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사람만이, 그 과정을 통해서 내적인 빛의 현현(顯現)을 지각할 수 있다. 최초의 시작은 여러 가지 자연 존재, 예컨대, 투명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띤 돌(수정), 식물과 동물 등을 일정한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진다.


먼저 돌과 동물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비교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려고 시도하라. 여기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생생한 감정을 동반한 채 영혼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이 끼여들어서 집중적인 관찰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다음의 말을 유념하라. 


   “돌에는 형상이 있다. 동물에도 형상이 있다. 돌은 자기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 동물은 자기 자리를 바꾼다. 동물로 하여금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것은 충동(욕망)이다. 그리고 동물의 형상이 섬기는 것 또한 충동들이다. 동물의 장기(臟器)와 기관은 이러한 충동에 부합되게끔 형성되어 있다. 돌의 형상은 욕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는 힘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생각에 깊이 몰두하면서 주의력을 모아 돌과 동물을 관찰하노라면, 영혼 속에서 두 가지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 활기를 띤다. 우리 영혼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감정이 돌과 동물 각각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아마도 처음에는 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진정으로 끈기 있게 수행하다 보면 이러한 감정이 생길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수행뿐이다. 처음에는 관찰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감정이 현존하지만, 나중에는 그 감정이 오래도록 작용한다. 그리고 나면 그것은 영혼 속에 생생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외적 대상을 관찰하지 않더라도 생각만으로 두 가지 감정이 항상 솟아오를 것이다. 이러한 감정, 그리고 거기에 결부된 생각에서 투시 기관이 형성되어 나온다. 관찰에 식물이 추가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감정은 그 성질과 그 정도에 따라서 볼 때, 돌과 동물에서 흘러 나오는 각기 다른 두 감정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는 기관이 정신적 눈이다. 


··········


 ‘정신의 눈’ 으로 보는 능력을 획득한 사람은, 물리적 현실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어떤 존재와 조만간 만나게 되는데, 부분적으로, 인간보다 고차적인 존재일 수도 있고 낮은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다.


 여기에 기술되어 있는 만큼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는 많은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신비학자가 말한 것들이나 그가 전한 내용에 유의하지 않고 무작정 전진하는 식의 태도가 권장되어서는 안 된다. 


··········


어떤 경우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신중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신비학으로 가는 길을 걷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신비 수행자가 될 사람은 고귀하고 선하며 모든 물리적 현실에 대해 다감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특성 중 어떠한 것도 잃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도덕적 힘, 내적 순수성, 관찰력 등을 신비 수행 도중에 지속적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한 가지 경우만 언급하자면, 깨달음의 기초적인 수행 과정 동안에 신비 수행자는 인간 세계와 동물 세계에 대한 동정심, 자연미에 대한 감각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수행을 통해 그런 감정과 감각은 계속 둔해진다. 마음은 돌처럼 굳어질 것이며, 감각은 둔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험한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


   우리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신비학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으며, 그 방식은 가지각색이다. 위험한, 심지어는 비난받아 마땅한 수많은 조치들이 행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들의 진정한 면모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비 수행의 성과에 관해 약간이나마 알게 될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전달된 것은 그러한 가능성에 상응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착오로 인해 큰 해가 초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참된 것이 공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제시된 길을 통해 간다면,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만 유념하면 된다. 자신의 생활 처지, 자신의 의무에 따라서 그가 관장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힘과 시간을 그러한 수행에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신비의 오솔길을 통해서 자신의 외적 생활 상황의 어떤 것을 순식간에 바꾸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성과를 원한다면 끈기를 가져야 한다. 몇 분 동안 수행한 후에 멈추고 자신의 일상적 일에 조용히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에 대한 생각이 일상적인 일에 섞여 들어와서는 안 된다. 최고 · 최선의 의미에서 기다림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신비 수행자가 되기에 부적합하며, 설사 그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성과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50년간 1만 명의 의뢰인의 삶을 분석한 일본의 한 변호사가 ‘운의 이치'를 분석했다. 니시나카 쓰토무가 쓴 책의 제목은 ‘운을 읽는 변호사'. 그는 점쟁이나 관상가는 아니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의뢰인들, 예컨대 상속과 이혼 등 분쟁 당사자, 돈을 받아달라는 채권자나 범죄자들, 법망을 피해 교활하게 성공하려는 사람과 자연스레 번창하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며 행운과 불운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가 밝혀낸 가장 큰 운의 이치는 이른바 ‘도덕과학'이었다. 법률상의 죄가 아닌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는 것. 또한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아도 운이 나빠진다고 했다. “은혜를 받는 것은 ‘도덕적 부채’로 쌓입니다. 그런데 이 부채는 갚지 않으면 금전적 부채보다 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설명했다.


-운이란 무엇인가요?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종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신비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운이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확실해요.”


-운을 이야기하는 선생은 정작 운좋은 인생을 살았습니까?

“교육철학자인 모리 신조 선생은 “인간이 평생 만나야 할 사람은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을 때 꼭 만날 수 있다”라고 했어요. 내 나이 일흔넷 가까이 변호사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때마다 어디선가 조력자가 나타나 구해주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역시나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만 명 이상 의뢰인의 삶을 지켜본 결과 확실히 운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셨다고요?

“맞아요. 재판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나중에 비슷한 곤경에 처해 또 찾아와요. 그런 사람은 나쁜 운이 반복되는 거죠. 반대로 법률 자문을 받으러 올 때마다 사업이 잘 되고 나날이 번창하는 운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덕’을 쌓고 있는가 여부지요.”


-덕이란 무엇이죠?

“가능한 다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작은 상황도 분쟁으로 만들고 빈번하게 소송으로 해결하려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겨도 계속 비슷한 분쟁이 반복될 뿐이예요. 불운을 끊어내지 못하는 거죠.”


-다툼으로 먹고사는 변호사인데도, 선생은 소송을 막는 변호사로 유명합니다. 

“설사 승소해도 분쟁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변호사 생활 50년의 결론입니다. 경험으로 보면 이긴 사람은 대부분 그 후에 도산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불행해집니다. 분쟁에서 이겨도 진 사람에게 원한을 사기 때문이지요.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을 어떻게해서든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저승에 가서라고 끌어내리려고 해요. 그러니까 결국 이겨도 운이 좋아질 수가 없는 거예요.” 


-오랜 변호사 경험으로 볼 때 운에 가장 치명적인 분쟁은 무엇인가요?

“상속 분쟁입니다. 상속 다툼은 반드시 자식 대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제 생각에 가장 큰 불운입니다. 한 예로 조모의 유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로 조카와 분쟁을 한 여성이 있었어요. 원하는 만큼의 유산을 받아냈지만 그것을 물려준 자기 자식에겐 안 좋은 일이 생겼어요. 그 자식은 사촌 형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어머니의 상속분쟁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어요.”


-한편으로 봉사와 헌신을 해도 운이 잘 트이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런가요?

“교만 때문이예요. 은연 중에 타인의 죄책감을 부추기면 고생해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일례로 자리보전하고 누운 시어머니를 큰며느리가 10년 넘게 간호해서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다른 자식들이 크게 반발했어요. 그저 돈 욕심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며느리에 대한 악감정이 컸어요. 어머니를 잘 모신 건 인정하지만 항상 감사하라며 생색을 낸 건 용서할 수 없다는 거죠. 타인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도 운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의뢰인을 만나보면 100% 교만 때문이에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을 잊으면 봉사도 헛 것입니다.”

수많은 행운과 불운을 지켜본 74세 변호사의 지혜를 담은 책 ‘운을 읽는 변호사’. 수많은 행운과 불운을 지켜본 74세 변호사의 지혜를 담은 책 ‘운을 읽는 변호사’.


-도덕적 과실과 운을 연결지어 말씀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도덕적 과실이 운에 치명적인 것은 역시나 타인의 ‘원한'을 사기 때문인가요?

“도덕과학이란 게 있어요. 법학자인 히로이케 치쿠로 선생이 창안한 학문으로 도덕을 과학적인 영역으로 연구했습니다. 도덕과학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한 계속 도덕적 과실을 저지른다고 말합니다. 가령 늘 이용하는 철도나 도로도 이를 건설할 때 사고로 생명을 잃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 존재할 수 없어요. 도덕과학에서는 이것을 ’도덕적 부채‘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도덕적 부채를 깨닫지 못하고 평소에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부족하면 타인에게 작은 피해를 입어도 못 참고 달려들어요. 이웃의 상한 감정은 언젠가는 불운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얼마전 연예인 최시원 가족의 개에게 변을 당한 유명 음식점 한일관 사장 이야기로 장안이 떠들썩했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고 명망과 부를 쌓았지만, 순간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을 두고 우리는 불운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기에 이웃 가족과 원수가 되어 기나긴 법정 시비를 다툴 차례였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고인의 아들은 ‘돌아가신 어머니라면 소송을 원하지 않을 것이고 그 마음을 따라 싸움 대신 애도를 택한다'고 했다.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보다 앞서 철원 총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빗나간 탄환을 쏜 병사가 자책감을 안고 살아가길 원치 않으니 어느 병사가 쐈는지 밝히거나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말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가족의 어이없는 죽음이라는 불운 앞에서 그들이 보인 태도는 ‘앞으로는 더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달라'는 당부 뿐이었다. 한일관과 철원 총기 사고의 유가족은 불운으로 기억될 사건의 방향을 틀어 그들 가족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마음의 기운을 바꿨다. 

어쩌면 행운을 어떻게 받아먹는가보다 불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진짜 운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도 바르고 성실한데 갑작스레 운이 나빠지는 경우는 없나요? 

“인생은 다 제 각자 운의 드라마가 있어요. 처음에 손해 보지만 나중에 빛을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불행은 남과 비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성급하게 운이 나쁘다고 판단한 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봐야지요.”


-운도 덧셈 뺄셈으로 계산된 각자의 장부가 있습니까?

“하늘의 장부라고 하죠.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져요. 은혜를 받는 것은 ‘도덕적 부채’로 쌓입니다. 그런데 이 부채는 금전적 부채보다 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내놓지 않으면 오만함이 생기고, 오만함은 운을 좀먹는 곰팡이와 같지요. 그래서 받은 은혜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합니다. 안그러면 다툼이 생깁니다.”


-부모의 은혜를 깨닫거나 효도하면 운이 들어온다는 건 어떤 원리에 의해서인가요?

“도덕과학에서 말하는 은인의 계열을 따져봅시다. 내가 있고, 부모님이 있고, 또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습니다. 1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2046명입니다. 만약 이 2천 명 남짓한 조상 중 자기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어도 지금의 나는 없겠죠. 부모님을 통해 내 생명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효를 행하는 것은 신을 섬기는 것으로 운을 부르는 근원입니다. 윤리법인회의 창업자 마루야마 도시오 선생도 ‘근본을 잊지 말고 끝을 어지럽히지 말라’ 했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효도를 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한 의뢰인이 여러 형제 중에 부모님을 모시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시골에 땅을 사서 부모님을 모셨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지역에 고속도로가 나서 토지 가격이 폭등했어요. 이득이나 손실과 상관없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과 행운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사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운은 절반이상 타고나는 것 아닐까요?

“아니요. 유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을 저는 많이 봤어요. 아무리 절세 지식을 총동원해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도 사실 자식 인생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써야할 지 돈의 가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돈은 불운의 시작입니다. 인간관계의 질도 그렇고,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평판도 나빠져요. 같은 의미로 자기만을 위해 돈을 쓰는 부자는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성공한 기업인이나 유명인을 만나서 인터뷰 해보면 다들 ‘운이 좋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정말 운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들이겠지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보다 겸손하게 운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운이 좋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금수저'인데도 감사를 모르고 ‘불운하다'고 불평하다 추락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반면 교활한 방법으로 남의 몫을 가로채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사업에 실패해서 변호사에게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대부분 얼마 전까지 큰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잔머리를 굴려 돈을 벌거나 출세를 했어도 그 성공은 오래가지 못해요. 머지않아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저는 변호사지만 하늘의 법을 더 신뢰해요.‘하늘의 법망은 크고 넓어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악인은 빠짐없이 걸러낸다’.”


-조직에 운을 쌓으려면 ‘유능한 사람’보다 ‘믿음이 가는 사람’을 채용하라고 했는데, 단기적인 성장 효과를 신봉하는 한국의 조직에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떤가요?

“유능함은 사장이 시장에서 손익만 따지는 것과 같지요. 손익만 따지는 회사는 고객의 마음을 얻기 힘들어요. 일본도 성장 위주의 경제활동을 강요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 부작용이 오늘날 여실히 나타나고 있어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마음을 얻지 못하면 즉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하면 정치로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지 못해요. 유능한 사람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조직의 운을 바꿔줍니다.”


-회사나 집안의 운을 단기간에 바꿀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구성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내 지인인 여자 사장은 사원이 제안하거나 말을 걸어오면 어떤 내용이든 평가하지 않고 “좋네요”라고 긍정한답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어도 일단 믿고 반응해주니, 젊은 직원들이 늘 적극적이고 결국 알아서 해결책을 찾아간다더군요. 그 회사는 정말 잘 운영되고 있어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야구선수들이 캐치볼 훈련을 하듯이,서로의 말을 듣고 “아 그래? 그랬구나”라고 되받아주기만 해도 상대는 말을 이어갈 수 있어요. 아내가 “꽃구경 다녀왔어” 하는데 “한가해서 좋겠다”라고 딴소리를 하면 다툼이 생기겠죠. 아이들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먼저 들어주고 긍정하면 절로 성장합니다. 한마디로 귀로 운을 트는 거죠.”


-개인이 자기 운을 개선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운이 방향을 틀려면 운좋은 사람,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끼리끼리 모입니다. 서로 끌어당기는 법칙이라고 할까요. 저도 예전에 소매치기 한 명을 변호하게 되었는데, 그 의뢰인 주변 사람들을 계속 오면서 소매치기 전문 변호사처럼 되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소매치기 주변에 소매치기들이 모여 있었던 거죠. 그 뒤로 그 일을 사양하게 되었어요. 어느 분야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은 주변에 가까이하는 운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자동차용품 판매업체 옐로우햇의 창업주 가기야마 히데사부로 씨예요. 그는 슈퍼마켓에서 식품을 살 때 일부러 유통기한이 임박한 것을 산다고 합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 쌓여 슈퍼마켓이 손해를 보면 결국 서비스가 나빠지고 소비자들도 손해를 테니, 기왕이면 나부터 먼저 해결해주자는 생각에서지요. 택시를 타면 항상 “거스름돈은 됐어요"라고 합니다.”

니시나카 쓰토무 변호사도 가기야마 씨를 본받아 안 팔리는 그림을 사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어쨌든 작은 일에서부터 지역 사회의 운을 먼저 생각하니 사업이 잘 될 밖에요. 지금 옐로우햇은 매출액이 1조원이 넘는 대기업으로 번창했습니다.”


-국가나 민족에도 운이 있다고 보십니까?

“국가, 민족에도 운이 존재합니다. 과거의 국가 지도자가 무엇을 했는지, 국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행운과 불운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도덕적 과실을 깨닫고 더 많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 활동하는 국가와 민족은 앞으로가 더 좋은 운명입니다.” 


-좋은 운을 유지하기 위해 선생은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운은 인연에서 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큰 목소리로 인사합니다. 연말엔 꼭 자필로 연하장을 써요. 지금도 매년 2만 장씩 쓰고 있어요. 그리고 생명의전화 상담원으로 10년째 근무하며 연간 1만 명을 상담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 74세지만, 양로원의 경청 봉사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100만큼 일하면 보수로 80을 받고 20을 타인에게 돌려줍니다. 잠자리에 들때는 늘 나한테 베풀어준 은인을 생각해요.”


-중년 세대에 비해 지금 한국의 청년 세대는 나아질 희망이 없으니 ‘운이 없다’라고 체념하곤 합니다. 장기 불황에 직업도 구하기 어려우니까요. 이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운은 조건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비롭고 막연한 것도 아니에요. 나의 운은 항상 남의 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을 지니면 예외없이 좋은 운이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도덕적 과실’을 깨닫고 사세요. ‘남들 다 하니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도덕적 잣대를 갖고 살아야 불운을 피할 수 있어요. 따지고 보면 불운만 피해도 얼마나 감사한 인생인지요!”

출처: 조선비즈

사진:blog.sermo.com


1. 시각 활동에서의 안구근육의 움직임

 

눈의 망막에서 사물이 날카롭게 보이는 중심점은 전체 망막의 0.02%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물의 전체형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눈의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사물의 표면을 빠르게 옮겨 다니고, 이렇게 부분적으로 얻은 시각내용을 ‘자아조직’이 함께 구성해서 사물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손으로 사물을 만지듯이, 눈으로 사물을 더듬는다고 여길 수 있다. 눈으로 더듬는 이 활동을 Saccade라고 하며,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 초당 2~5회 정도 발생한다. 시각 활동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능동적인 활동인 것이다.

 


2. TV 화면은 실재인가?

 

TV화면이 움직이는 그림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흔히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TV화면은 브라운관의 화면에 투사되는 무수한 색점에 불과하다. 아날로그 TV의 경우 초당 25개의 완전한 화면이 투사되는데, 그 25개의 완전한 화면을 위해서 50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만 한다. 즉 완전한 한 화면을 위해서 두 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 보면 한 화면이 투사되는 시간이 오십분의 일초가 된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안구 고유의 활동인 Saccade가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시각대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이 ‘더듬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TV시청 중의 Saccade활동이 20초 안에 5~7회만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1979년의 연구결과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는 20초 안에 40~100회의 Saccade가 일어나는 점과 비교해 보면 평균 잡아 안구활동이 90%나 줄어 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 시각영역이 200도임에 비해, TV시청 시의 시각영역은 TV의 크기에 따라 겨우 6~7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결국은 TV시청 중에 시각 활동이 생리적으로 완전히 저해될 수밖에 없다.

 


3. Alpha상태

 

두 가지 뇌파가 있다. 눈을 뜨고 의식적으로 깨어서 활동할 경우 생기는 Beta파와, 명상이나 최면상태, 의식활동이 적은 상태, 어두워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Alpha파가 그것들이다. TV시청 중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은, 비록 눈을 뜨고 움직이는 화면을 능동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도, 오히려 그 반대로 베타파보다 알파파가 현저하게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결국 눈을 뜬 상태에서 최면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극도로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의 근육이 대상물을 ‘의지적으로’ 더듬을 수 없고, 결국은 ‘보는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소극적인 알파파의 상태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하게 보자면, TV화면에는 결코 완전한 그림이 생성되지 않는다. 완전한 그림은 결국 신체 내부, 즉 망막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시각은 지속적으로 화면에 고정되어야 하지만, 외부에서 완전한 그림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안구의 활동의지가 사라지고 마는 기이한 현상이 TV시청 중에 일어나고, 알파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칼로리 소모

 

TV시청 시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 적다는 점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인간은 끊임없이 안구 근육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칼로리 소모가 있기 마련이다. 8세에서 12세 까지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칼로리 소모가 기본소모보다 약간 씩 줄어 든 반면, TV시청 시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보다 평균 14%가 내려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TV시청을 하면서 그저 멍하니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전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어대는 데에 있다. 오늘날 선진국에 만연하는 어린이 비만현상의 원인을 TV시청에만 돌릴 수는 없겠지만, 고려를 할 만한 연구결과임에는 틀림없다.

 


5. 중독성

 

TV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은 될 수 있으면 많이 시청자의 주의를 빼앗는 것이다. 장면의 변화나 화면의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음향과 프로그램의 주제, 내용을 통해서 시청자가 몰입토록 하는 일이, 미디어 분야가 광범위해진 오늘날 그렇게 쉽지는 않다. 결국은 더욱 더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TV시청자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적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바보상자를 쳐다보더라도, 극적인 비상사태에나 분비되는 호르몬인 Kortisol과 Adrenalin이 예기치 않았던 장면전환에서 분비된다고 한다. 비상상태에 분비되어야 할 호르몬의 잦은 분비가 독성으로 작용해서 신체가 항상 드러나지 않은 스트레스상태에 머물게 되며, 생리학적인 중독현상을 보이게 된다.

 


6. 자기활동이라는 환상

 

인지학적으로 보아서 감각활동은 감성의 성향을 지닌 ‘의지활동’으로 감각을 통해서 인간이 세계로 들어서고, 세계가 인간 내부로 들어온다. 인간의 자아활동에 속하는 의지력이 안구근육을 움직여서 개별적인 사물을 향하게 하고, 시각적인 주의를 지배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감각론, 즉 감각기관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입구에 다름없으며, 그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극을 두뇌의 신경기관이 처리해서 인간이 지각하고, 인간이 이 감각활동에서 소극적이라는 통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화면이 지속적으로, 극도로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TV시청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지만, 사실은 최면상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이 되고 만다. TV시청 중에 인간이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신체적인 근거는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인지학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영적-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내어야 할 ‘형상적 상상, Imagination' 즉 ‘생동하는 내면의 그림’을 화면의 그림이 대체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아의 활동을 완전히 저지한다는 데에 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슈타이너가 당시의 흑백영화를 보면서 예언하기를, 이 매체가 극도로 빠르게 문화의 한 장르로 발달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지학적 인류발달사를 조망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예전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물을 바라보면 동시에 그 사물에 작용하는 정신적 존재 역시 형상으로 볼 수 있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 5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꿈꾸는 듯한 형상적 인식’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오늘날의 인간은 정신적 존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졌다.

 

현재의 문화기가 들어선지 얼마 후인 17세기에 이미 영화와 유사한 기법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에서,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후의 인간이 외부에서 그 형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칼리유가가 끝날 무렵인 19세기 후반에 무성영화가 개발되었으며, 그 이후 100여 년 동안 미디어는 급속히 발달하였다.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내적인 형상을 일구는 대신,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그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비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이 TV시청을 하면서 의식적인 자아활동을 놓아 버리고, 수동적으로 외부의 그림에 최면당한 듯 몰두하는 동안, 의식이 비어버린 그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인간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자유’를 얻었으며, 자유를 얻은 만큼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책임감 역시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인류의 운명을 -여기에서 미래는 역시 확장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자아활동을 통한 형상적 사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 자아활동이 멈춘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 즉 아리만적, 루시퍼적 힘들이 인간의 미래를 양도받는 위치에 들어선다. 이는 비단 TV시청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곳에는 항상 그렇다. 선전을 통한 사고의 조절,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 등은 사실 이런 자연이하의 힘들의 작용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7. 어린이의 TV시청

 

어른과는 달리 어린이는, 특히 7세 이전의 어린이는 ‘존재전체가 감각기관’이다. 어린이는 세계 속에 침잠해서 살고 있으며,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어린이들이 TV를 시청하면, 어른들이 그것을 TV화면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그것이 ‘실재’라고 여기며,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직 실재와 허상(virtual)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세 이하의 어린이 교육은 의지감각들, 즉 촉각, 생명감각, 운동감각, 균형감각을 올바르게 발달시키는데에 그 중점이 있다. TV시청은 이 의지감각들을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악이 된다. 만질 수도 없으면서 실재로 다가오는 TV 속의 친구들, 동물들, 사건들이 어린이에게 실재와 허상의 구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생한 청소년 총기난사사건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TV와 컴퓨터 중독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시사해 준다. 위에 언급된 생리학적, 신체적 현상 때문에라도, 어린이를 TV 앞에 앉혀 두는 것은 ‘신체손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 TV가 집 안에 없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TV를 통해서 많이 배운다거나, TV를 어릴 적부터 보아야 나중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독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종학력이 높을수록, 수입이 높을수록 TV시청률이 적다고 한다. 즉 배움은 책이나 강의와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얻는 것이지, TV를 통해서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소일거리가 있기 때문에 TV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고, 다른 소일거리를 배우거나 만드는 것은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그 다른 소일거리를 즐겨서 해 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골라서 보여주어라’, ‘함께 시청을 해라’ 등등 조언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조언들은, 일단 집 안에 TV가 있으면, 부모가 어지간한 고집불통이라서 수미일관적이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집안의 TV존재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조금 더 보겠다고 날마다 떼를 쓰는 아이와, 안 된다고 야단하는 엄마의 ‘TV-연극’을 이미 프로그래밍 하고 있다고 여기면 된다. 꼭 TV가 있어야 한다면, 우선은 ‘철저한 일관성과 무한한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와 싸울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인과 어린이는 다르다는 점을 아이에게 반드시 인식시키고, 집에서 결정권은 부모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특히 ‘양부모가 함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아빠는 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식의 변명이 통용되면 TV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아이들은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TV를 보게 해주는 아빠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할 것이다.

 

7세 이전에는 TV금지, 15,6세까지는 선별해서 TV를 시청토록 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한다.

 

*

 

TV가 없으면 아이가 친구 집에 가서 시청한다. 이 점이,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미디어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단답형의 해결안은 없는 것 같다. 각자가 TV시청의 해악을 깊이 인식해서 스스로에게 가능한 개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글: 최혜경



샘물의 기적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비극에 나온 동화

《영혼의 시험》에서 




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살았습니다.

그 아이는 외로운 숲속에서

가난한 나무꾼의 외아들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부모님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느다란 몸매와

투명한 살갗을 지닌 아이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 깊고 깊은 정신의 경이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몇몇 사람을 알게 되었지만

아이에게는 친구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산 위로 황금빛 태양이 떠오르면

아이의 고요한 눈은 그 정신의 금빛을

영혼 깊이 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가슴 속 존재도

마치 아침 햇살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아침 햇살이 어둡고 짙은 구름을

뚫고 나오지 못해

산들이 온통 음침한 기운에 뒤덮이면,

아이의 눈은 슬픔으로, 그리고

아이의 가슴은 아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드는 정신의 힘에

아이는 온전히 몰두하였고,

그 세계를 마치 자기 몸의

일부처럼 친숙하게 느꼈습니다.

물론 숲 속의 나무와 꽃들도

아이에게는 친구였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꽃봉오리와 꽃술들, 그리고

나무꼭대기로부터 정신 존재들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그들의 속삭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저

살아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과

영혼으로 대화를 나눌 때면,

비밀스러운 세상의 경이가

아이를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녁이 되면 종종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스레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바위를 뚫고 솟아나서

수천수만의 물방울이 바위 위로 흩날리는

샘물가에 있곤 하였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색들의 유희 속에 마술처럼

은색 달빛이

그 물방울들의 흐름에 비치면,

아이는 오랫동안

그 바위의 샘물가에 굳어버린 듯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면 물방울의 흐름과 반짝이는 달빛 속에

신비로운 어떤 형상이 만들어져

아이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형상은 세 여인의 모습이 되어서

훗날 아이의 영혼이 힘 있게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포근한 여름밤

아이가 다시 그 샘물가에 앉아 있을 때,

세 여인 중 한 여인이

수천수만 개로 흩날리는 물방울을 잡아서

두 번째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두 번째 여인은 그 흩날리는 물방울로

은색의 빛나는 잔을 만들어

세 번째 여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그 잔에 은색 달빛을

가득 담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이는 이 모든 것을

앞을 내다보는 눈길로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이 있던 날 밤에

아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난폭한 용이

그 잔을 훔쳐갔습니다.




이 밤이 지난 뒤 아이는 

샘물의 기적을 세 번 더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여인들은 아이를 떠났습니다.

아이는 달빛 아래에서 

바위샘을 바라보았지만요.

그리고 360주가 세 번 지났을 때,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오랫동안 지내온 

부모님의 집과 숲을 떠나

낯선 도시에 갔습니다.

어느 날 저녁, 

고된 일에 지친 그는 생각했습니다.

‘대체 어떤 삶이 다가오는 걸까?’

문득 그는 자신의 바위샘이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의 여인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면서 외롭다고 느낄 때면

나와 함께 한 순간을 떠올리렴.

그러면 나는 사람들의 영혼의 시선을

끝없이 열린 하늘과 별들을 향해 이끌어줄 거야.

그리고 나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내 기적의 잔으로

삶의 희망이 담긴 물을 건네줄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여인도 말했습니다.

“살면서 용기에 도전을 받을 때면

나를 잊지 말렴.

그러면 나는 사람들의 심장의 힘을

영혼 깊은 곳으로, 또 정신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거야.

그리고 나에게서 그 힘을 구하는 사람에게

내 기적의 망치로

삶의 믿음을 강하게 단련시켜줄 거야.”




세 번째 여인이 말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풀리지 않는 삶의 수수께끼가 너를 괴롭힐 때면

네 정신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렴.

그러면 나는 삶의 미로에서, 또 영혼의 심연에서

네가 가진 생각의 실들을 자아내줄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꾸는 사람에게

내 기적의 베틀로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비쳐줄 거야.”

 

그 일이 있던 날 밤에

그는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난폭한 용이 살금살금 주위를

기어 다녔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습니다.




어릴 적 바위샘에서 지켜보았고,

고향을 떠나면서

낯선 곳으로 함께 옮겨갔던,

그 정신 존재들이

그를 용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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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 war einmal ein Knabe,

Der wuchs als armer Förstersleute einzig Kind

In Waldeseinsamkeit heran. -

Er lernte außer seinen Eltern

Nur wenig Menschen kennen.

Er war von schwachem Gliederbau:

Durchscheinend fast war seine Haut.

Man konnte lang ins Aug' ihm schaun;

Es barg die tiefsten Geisteswunder.

Und wenn auch wenig Menschen nur

Des Knaben Lebenskreis betraten,

Es fehlte ihm an Freunden nicht.

Wenn in den nahen Bergen

Erglühte golden Sonnenhelle,

Dann sog des Knaben sinnend Auge

Das Geistesgold in seine Seele ein:

Und seines Herzens Wesen,

Es ward so morgensonnengleich. -

Doch wenn durch finstre Wolken

Der Morgensonne Strahl nicht drang

Und düstre Stimmung alle Berge überzog,

Da ward des Knaben Auge trüb

Und wehmutvoll sein Herz —.

So war er hingegeben ganz

Dem Geistesweben seiner engen Welt,

Die er nicht fremder fühlte seinem Wesen

Als seines Leibes Glieder.

Es waren ihm ja Freunde auch

Des Waldes Bäume und die Blumen;

Es sprachen Geisteswesen aus den Kronen,

Den Kelchen und den Wipfeln -,

Verstehen konnte er ihr Raunen —.


Geheimer Welten Wunderdinge

Erschlossen sich dem Knaben,

Wenn seine Seele sich besprach

Mit dem, was leblos nur

Den meisten Menschen gilt.

Und sorgend oft vermißten abendlich

Die Eltern den geliebten Sprossen. -

An einem nahen Orte war er dann,

Wo aus den Felsen eine Quelle drang

Und tausendfach zerstäubend

Die Wassertropfen über Steine sprengte.

Wenn Mondeslichtes Silberglanz

In Farbenfunkelspielen zauberhaft

Sich spiegelt' in des Wassers Tropfenstrom,

Da könnt' der Knabe stundenlang

Am Felsenquell verharren.

Und Formen, geisterhaft gebildet,

Erstanden vor dem Knabenseherblick

Im Wassertreiben und im Mondenlichtgeflimmer.

Zu dreien Frauenbildern wurden sie,

Die ihm von jenen Dingen sprachen,

Nach denen seiner Seele Trieb gerichtet. -

Und als in einer milden Sommernacht

Der Knabe wieder an der Quelle saß,

Ergriff der Frauen eine viele tausend Stäubchen

Des bunten Wassertropfenwesens

Und reichte sie der zweiten Frau.

Die formte aus den Tropfenstäubchen

Ein silberglänzend Kelchgefäß

Und reichte es der dritten Frau.

Die füllte es mit Mondessilberlicht

Und gab es so dem Knaben.


Der hatte alles dies geschaut

Mit seinem Knabenseherblick. -


Ihm träumte in der Nacht,

Die dem Erlebnis folgte,

Wie er beraubt des Kelches

Durch einen wilden Drachen ward. -


Nach dieser Nacht erlebte jener Knabe

Nur dreimal noch das Quellenwunder.

Dann blieben ihm die Frauen fort,

Auch wenn der Knabe sinnend saß

Am Felsenquell im Mondensilberlicht. -

Und als dreihundertsechzig Wochen

Zum drittenmal verstrichen waren,

War längst der Knabe Mann geworden

Und von dem Elternhause und dem Waldesgrund

In eine fremde Stadt gezogen.

Da sann er eines Abends,

Von harter Arbeit müde,

Was ihm das Leben wohl noch bringen möge.

Es fühlte sich der Knabe plötzlich

Nach seinem Felsenquell entrückt;

Und wieder konnte er die Wasserfrauen schauen

Und dieses Mal sie sprechen hören.


Es sagte ihm die erste:

Gedenke meiner jeder Zeit,

Wenn einsam du dich fühlst im Leben.

Ich lock' des Menschen Seelenblick

In Ätherfernen und in Sternenweiten.

Und wer mich fühlen will,

Dem reiche ich den Lebenshoffnungstrank

Aus meinem Wunderbecher. -


Und auch die zweite sprach:

Vergiß mich nicht in Augenblicken,

Die deinem Lebensmute drohen.

Ich lenk' des Menschen Herzenstriebe

In Seelengründe und auf Geisteshöhn.

Und wer die Kräfte sucht bei mir,

Dem schmiede ich die Lebensglaubensstärke

Mit meinem Wunderhammer. -


Die dritte ließ sich so vernehmen:

Zu mir erheb' dein Geistesauge,

Wenn Lebensrätsel dich bestürmen.

Ich spinne die Gedankenfäden

In Lebenslabyrinthen und in Seelentiefen.

Und wer zu mir Vertrauen hegt,

Dem wirke ich die Lebensliebesstrahlen

Auf meinem Wunderwebestuhl.

Es träumt' in jener Nacht,

Die dem Erlebnis folgte,

Dem Manne, daß ein wilder Drache

In Kreisen um ihn her sich schlich -

Und nicht ihm nahen konnte:


Es schützten ihn vor jenem Drachen

Die Wesen, die er einst am Felsenquell geschaut

Und die aus seiner Heimat

Mit ihm zum fremden Ort gezogen waren.

출처:슈타이너사상 연구소


한비자 제15편 망징(韓非子 第15篇 亡徵)


1. 나라는 적은데 군신(群臣)의 저택은 크고, 군주의 권력은 약한데 대신의 세력이 크면 멸망한다.


2. 법령, 금제를 소홀히 하여 그에 따르지 않고, 모략에 열중하여 국내를 다스리지 못하고, 외국의 원조만 믿고 있으면 멸망한다.


3. 군신(群臣)이 학문을 닦고, 귀족의 자제가 공허한 변론을 즐기며, 상인이 정부를 배경으로 남몰래 축재를 하며, 아래 백성들이 군주가 베풀어 준 것을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 망한다.


4. 군주가 궁전과 누각과 정원과 연못 같은 토목 건축을 좋아하고, 수레와 말, 의복과 기이한 물건 그밖에 오락물에 골몰하고, 그 때문에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여 재정을 낭비하면 망한다.


5. 군주가 날짜나 시간 따위의 길흉에 마음을 쓰고, 귀신에 혹하여 점쟁이의 말을 믿고 굿하기를 좋아하면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6. 군주가 신하의 진언을 들어 관작을 수여하는데 실제의 공적을 조사하지 않고, 다만 한 사람의 총애하는 신하를 밖의 정세를 보고하는 창구라고 믿고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7. 중신의 알선으로 관직이 주어지고, 뇌물을 바쳐 작록을 얻을 수 있는 나라는 망한다.


8. 군주의 성격이 아둔하고, 일을 처리한 적이 별로 없으며, 의지가 유약하고 결단력이 미약하며, 기호가 분명치 않고, 남에게 의지하여 자립정신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9. 군주가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며, 어떤 일이든 이득을 보겠다고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10. 군주가 자기 마음대로 포상하기를 좋아하고, 법규를 따르지 않으며, 말만 앞세우고 실용성을 따지지 않고 겉치레에만 골몰하여 전시효과만을 노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11. 군주의 사람됨이 천박하고, 밖에서 쉽게 엿볼 수 있으며, 비밀을 가슴속에 간직해 두지 못하고 바로 누설시키며, 주의는 산만하고 신하들의 말을 밖에 알리는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12. 군주가 억지를 부리며 심술궂고, 사람과 화목하지 못하며 충고를 배척하고,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며, 국가를 돌보지 않고 경거망동하며, 더욱이 자신이 있다는 듯이 서두르는 나라는 망한다.


13. 동맹국의 원조를 믿고, 이웃 나라를 가벼이 여기면 그런 나라는 망한다.


14. 외국에서 들어온 자가 처자를 외국에 둔 채, 위로는 모사를 일삼고 아래로는 민사에 관계하고 있는 나라는 망한다.


15. 신하와 백성은 재상을 믿고 있지만, 군주에게는 심복할 수 없다고 하는 데도 군주는 그러한 재상을 신임 총애하고 있으면 권력은 아래로 옮아가므로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16. 자기 나라의 탁월한 인물은 등용하지 않고, 도리어 외국의 인재를 초청하여, 공로에 의해서 그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 다만 소문만으로 좌우시키며 외국인을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히고, 종래의 신하를 천대하는 나라는 망한다.


17. 적출의 공자는 경시되고 서자가 세력이 있으며, 태자를 아직 책봉하기도 전에 군주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18. 군주가 소탈하여 과실을 후회하지 않고 나라가 혼란한데도 자기 재능만을 믿고, 제 나라의 실력도 모르고 이웃 나라를 경시하는 나라는 망한다.


19. 자기 나라가 소국인데도 대국에 대하여 겸손하지 않고, 무력하면서 강대국을 경계하지 않고 탐욕적인 서투른 외교를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0. 태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부왕이 강대국의 공주를 정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태자의 지위가 위태해진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마음이 변하여 부인 편에 서게 되는데 그런 나라는 망한다.


21. 군주가 겁쟁이이며 지조가 없고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고, 단행해야 된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결행하지 못하는 나라는 망한다.


22. 군주는 망명하여 다른 나라에 있는데 그 나라에서 다른 군주를 추대하거나, 타국에 인질로 가 있는 태자가 귀국하지 않고 있는데 군주가 다른 자식을 태자로 옹립하거나 하면, 민심이 국가에서 이탈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23. 군주가 대신을 모욕하면서도 때로는 너무 허물없이 대우하고, 아래 백성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거나 하면, 그들의 원한은 그칠 줄 모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처에서 난동이 일어나고, 그 나라는 망한다.


24. 두 대신이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군주의 백숙부나 형제가 권력 기구에 참여하여 세력을 펴고, 국내에는 도당이 있어 외국의 원조를 얻어 권력 싸움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5. 군주가 몸종이나 시녀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총신이나 광대의 계획을 실행하면, 궁정의 안팎에서 원성을 듣게 될 것이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듭 불법을 행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26. 대신을 소홀하게 대우하고 일족의 존장에게 무례를 범하며, 서민을 못살게 굴고 죄 없는 자를 죽이면 그 나라는 망한다.


27. 군주가 법률을 왜곡하며 사사로운 일을 공적인 일처럼 처리하고, 법령을 함부로 변경하면서 수시로 호령을 내리면 그 나라는 망한다.


28. 국토에 요새가 없고 성곽도 형편없으며, 식량의 저장도 없고 물자도 적으며, 방어전의 준비가 없는 나라는 타국이 침공해 오면 곧 망한다.


29. 군주와 친족이 장수하는 사람이 없고 잇따라 군주가 죽어 어린애가 군주가 되면 대신이 권력을 자행하여, 타국에서 온 자에게도 벼슬을 주어 패거리를 만들게 하고, 외교를 한답시고 영토까지 잘라 선물하게 되는 나라는 망한다.


30. 어떤 나라의 태자가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 이름도 널리 알려지고, 그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구축되고 대국과의 교제가 많아지면, 군주와의 사이는 벌어질 것이며 결국 나라는 망한다.


31. 군주가 성미가 급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무슨 일이나 성을 내며, 앞뒤를 가리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2. 군주가 자주 성을 내고,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여 농사철을 잃으면서까지 전쟁을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3. 귀족들이 서로 투기를 하며 대신의 세도가 당당하고, 밖으로 외국의 응원을 받아 안으로 서민을 못살게 구는데도 그러한 자를 벌하지 않는 나라는 망한다.


34. 군주는 우매한데 군주의 백숙부나 형제는 현명하며, 태자의 위력이 약하며 서자가 그에 대항하고, 관리가 힘이 없고 백성이 오만하면, 나라 안이 소란해져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35. 군주가 무엇에 노하고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죄가 분명한데도 벌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은근히 군주를 미워하거나 걱정을 하여,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되어 반란 따위가 일어나서 나라는 망한다.


36. 원정을 할 때 장군에게 무거운 권력을 주거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에게 높은 지위를 주어 멋대로 재판을 하고 명령을 하며 독재적이고 군주의 지령을 기다리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37. 정부인은 음란하고 태후에게는 추행이 있고, 내전과 정부의 구별이 없으면, 정부인의 무리와 태후의 무리가 양립하여 암투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38. 정부인의 권위가 약하고 애첩의 권위가 강하면 태자보다 서자가 존경을 받게 되고, 안으로는 정부인의 당과 애첩의 당이 싸우게 되고, 밖으로는 태자의 당과 서자의 당 및 재상과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서 그 나라는 망한다.


39. 대신이 극진히 존경을 받고 그들 도당이 강대하고 그 대신이 군주의 판단을 방해하며 국사를 멋대로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0. 정실 인사에 의한 관리가 중용되고 공로 있는 자가 배척 당하며, 변두리에서 일어난 작은 선행 따위는 높이 평가되고, 국가에 헌신한 공로를 경시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1. 군주의 금고는 비어 있는데 대신의 창고는 가득하며, 정착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은 가난한데 유랑민은 오히려 돈이 많고, 농업과 전투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은 천대받고 있는데 대단치 않은 직업에 종사하는 자만이 부자가 되는 나라는 망한다.


42. 군주가 눈앞에 큰 이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물어물 그것을 포착하지 않거나, 화가 미칠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만하여 그것을 경계하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막론하고 군사를 소홀히 하며 오직 인의만을 가지고 외양에만 힘쓰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3. 군주가 주군으로서의 효도를 하고 싶다 하여 국가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모군의 명령에 따르거나 여자가 국정을 처리하며 내시가 국사에 참견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44. 군주가 말을 할 때 달변이긴 하지만 조리가 없고, 마음은 현명하지만 법과 술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으며, 다재다기하나 법규에 의해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


45. 신참의 신하가 진출하고 고참의 신하는 물러서며, 미련한 신하가 국정을 다투고 현명한 신하는 물러서며, 공로가 없는 자에게 높은 작록을 주고 노고가 많은 자를 천대하면 백성의 원한을 얻게 되어 그 나라는 망한다.


46. 군주의 백숙부, 형제 또는 대신의 봉록과 관작이 그 공로에 비하여 무겁거나 등급을 표시하는 문장이나 복장이 분에 넘치고 그 저택이나 음식물이 사치스러운데도 군주가 금지시키지 않으면, 따라서 신하의 욕망은 한이 없게 되는데 그러한 나라는 망한다.


47. 군주의 사위나 손자가 백성과 같은 고을에 살며, 그 위세를 앞세우고 마을에서 설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원래 망국의 징조라는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말이 아니라,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요가 둘이 있다해도 다 같이 왕이 될 수는 없으며, 걸이 둘이 있다해도 다같이 멸망할 수는 없다. 멸망하거나 왕이 될 수 있는 운명은 치란강약(治亂强弱)이 어느 한편에 기우는 데서 발생한다. 초목이 부러지는 것은 그 속에서 벌레가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며,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목에 벌레가 파고든다 할지라도 강풍이 불지 않으면 부러지지 않을 것이며, 담장에 틈새가 있다 하더라도 폭우가 내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만승의 대국의 군주는 술을 지켜 법을 행하고, 멸망의 징조가 있는 나라를 벌레가 좀먹는 나무나 틈새 난 담장을 때리는 폭풍우가 되어 쳐들어가면 그 나라를 쉽게 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일을 쉽게 이룩한다.

출처: 옛글닷컴


1. 관청법(觀聽法)


잘 보고 똑똑히 듣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 중 한 가지만 잘해선 안 되고 두 가지를 다 동시에 잘 해야 한다.   

윗사람들이 얻게 되는 정보는 한정적이고 그나마 편향돼 있는 게 보통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드는 일에는 솔깃해지고 싫은 일에는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면 그에 대한 나쁜 평가는 '들으려' 하지 않고,

'들은 것'이 마음에 들면 상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은 실제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음흉한 수하들은 듣기 좋은 얘기만 해주거나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니 윗사람은 수하가 전한 듣기 좋은 얘기는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수하가 보여준 것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널리 들어봐야 한다.



2. 일청법(一聽法)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하나 다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재능도 없이 무리 속에 숨어 머리 숫자만 채우고 있는 자'를 골라낼 수 있다.

일청법을 쉽게 알 수 있는 우화 한 토막.

어느 왕이 피리 합주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궐 안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자그마치 300명이나 됐다.

어느 날 '피리 명인'을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자 그를 피리 합주단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엉터리였다.

합주만을 즐기던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왕은 선대왕과는 달리 독주를 즐겼다.

새 왕은 300명이나 되는 피리 부는 사나이들에게 각기 독주를 해보라 했다.

그러자 피리 명인을 자처했던 자는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다.

한비자에 있는 이 우화로 짐작할 수 있듯 개개인의 능력을 시험해봐야

무리에 끼어 묻어가는 자들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다.



3. 협지법(挾智法)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하면서 상대를 시험하는 것이다.

한(韓)나라의 소후(昭侯)는 신하들 중 누가 거짓말을 잘하는지 가려내기 위해

어느 날 잘라낸 자신의 손톱 하나를 감춰두고

'내 손톱 하나가 없어졌다. 손톱이 없어지면 불길하다고 하던데, 모두들 샅샅이 살펴 찾아보라!'고 명했다.

여러 신하들이 대전 안을 샅샅이 뒤져 왕의 손톱을 찾았으나 없었다.

그때 한 신하가 자신의 손톱을 잘라 "폐하, 여기 있습니다."하고 바쳤다.

소후는 바로 그 자가 자주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알아냈다.



4. 도언법(倒言法)


황당한 말이나 사실과 무관한 이야기 등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는 방법이다.

연나라의 한 재상이 수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저 문으로 백마가 나갔는데, 참 이상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에 말이 들어왔다가 나갔겠느냐'고 했으나,

한 수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들어 와

'정말 백마 한 마리가 방문 밖에 있다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라.'고 말해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냈다.

또 위나라의 한 재상은 왕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신을 할 수 없어 왕이 총애하는 다른 정승을 만나 다짜고짜 그를 마구 비난했다.

그러자 화가 난 충신은

"당신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다. 주군께서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라고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왕의 속마음을 알아냈다고 한다.



5. 반찰법(反察法)


어떤 사건이 발생 했을 땐 그 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자를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다.

한나라 희후가 욕탕에 들어갔더니 욕조 안에 여러 개의 자잘한 돌멩이들이 보였다.

희후는 시녀를 불러

"지금 목욕탕 관리를 맡고 있는 책임자가 바뀔 경우 그 후임으로 정해진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희후는 후임으로 내정돼 있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가 오자 "왜 내 욕조에 돌멩이를 집어넣은 것이냐?"고 추궁했다.

처음엔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던 그는

나중에 "지금 책임자가 파직이 돼야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동기를 찾아보면 상대를 간파할 수 있고 잘 부릴 수 있다는 얘기다.


니콜라 테슬라

심상화(사고실험), 정신세계 체험

전기공학자이자 천재 발명가라 일컬어지는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는, 인류 최초로 교류 시스템을 착안하고 실현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발명은 현대의 전력공학과 무선통신의 근간을 만들며 인류의 삶을 진일보시켰습니다. 

테슬라는 자신의 발명품의 도면을 그리거나 실제로 만들어보지 않고도, 시각화와 루시드드림을 통해 자신의 모든 발명품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그리고 가끔은 낮에도) 혼자 있을 때마다, 여행을 떠나곤 했다. 새로운 장소나 도시, 나라 등을 보기도 하고, 그곳에 살면서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마치 실제의 삶 속에 있는 이들 못지않게 소중했고, 구현되는 그들의 모습 또한 현실에 비해 미흡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나는 발명에 눈을 뜨기 시작한 17살 때까지 끊임없이 이러한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우 기쁘게도, 내가 시설이나 물건도 완벽하게 시각화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어떠한 모델도, 도면도, 실험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실제 삶 속의 모든 것들을 상상 속에서 똑같이 재현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나는 실제의 일에 바로 뛰어들지 않는다. 어떠한 아이디어를 얻었을 때 나는 먼저 그것을 상상 속에서 구현했다. 그 상상 속에서 구조를 바꾸기도, 발전시키기도, 장비를 작동시켜보기도 했다.

기계의 터빈을 상상 속에서 작동시키든 내 가게에서 작동시키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상 속의 기계가 불균형 하면 그것을 상상 속 노트에 기록하기도 했다. 내 상상 속에서 진행한 것과 실제의 삶 속에서 테스트 한 것들은 늘 결과가 같았다. 이 방법을 통해서 나는 내 아이디어를 빠르게 발전시키고 완벽하게 구체화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도 말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내 발명품에 아무런 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완한 후, 완벽하게 구체화할 수 있을 때, 내 머릿속에 있는 최종적인 결과물을 실제 제작 공정에 넣었다.

예외 없이 나의 발명품들을 한상 내가 상상한 그대로 작동했고, 실험 또한 내가 계획했던 그대로의 결과를 보였다. 20년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내가 왜 다른 방법을 쓰겠는가?"

My Inventions: The Autobiography of Nikola Tesla

출처: 루시드 드림(자각몽)


·········· 가장 복잡한 미디어인 텔레비전은 완벽하게 정해진 틀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텔레비전을 역설적으로 '간결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간결함'은 원래 광고업계에서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 문장으로 생각을 집약시켜야 합니다. 생각을 통제하기 위한 아주 교묘한 기법입니다. 

따라서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당신 생각을 세 문장으로 집약시킬 기회가 생기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당신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주장을 뒷받침해줄 최소한의 증거를 제시한 시간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테러에 관한 프로그램에 당신이 초대받았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카다피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1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증거를 따로 제시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빌 클린턴은 테러리스트다'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생전 처음 듣는 주장일 테니까요. 하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당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미치광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우받으려면 모두가 알고 있는 말만 떠벌리면 됩니다. ··········


·········· 정보Information는 적절한 말이 아닙니다. 흔히 정보라 표현되는 것은 대개 '왜곡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언론은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근본적 한계를 갖습니다. 따라서 제도적 관점에서 언론은 민간 기업에 시청자를 파는 또 하나의 민간 기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론은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한계를 지녔음에도 언론이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직업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


·········· 스스로를 관찰하는 사람은 이 7년 주기의 급변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한 주기의 길이는 곧이곧대로 똑같지 않고 대략적입니다. 마흔아홉, 마흔둘, 서른다섯 살 적을 돌아보면 아주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다. 그 이전에는 네가 지녔던 자질로 절대 이를 수 없었을 것을 그 일로 인해서 체험하거나 느끼도록 배웠다. 그것은 마치 영구치를 얻기 전에는 영구치로 씹을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다." 인간이 삶을 구체적인 것으로서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이 인류 발달의 경로에서 소실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스스로에게서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내적으로 수련을 하지 않으면 서른 살 이후의 주기들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십대 초반까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당히 어렵기는 하지만 이십대 후반까지도 그 내적인 변화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간조직이 그러하기를 사실 스물예닐곱, 스물여덟 살이 될 때까지만 자연적인 발달에 의해 이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한계가 점점 더 낮은 연령으로 밀려 내려가는 추세입니다. 아득한 옛 시절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직 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것을 겪어야만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을 통한 그런 규정성이 지양되었기 때문에, 오직 그런 이유로 해서 자유가 가능해졌습니다. 자연의 규정성이 멈추는 그 정도만큼만 자유가 가능해집니다. 먼 옛날에는 사람이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을수록 자연 법칙에 따라 그 정신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싹텄습니다. 반면에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적인 노력을 통해서 정신적인 것을 찾는 길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런 상황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며칠 동안 논했던 그 모든 이유로 인해서 구세대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들이 과연 무엇이 되었는지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지성주의에 머물고 맙니다. 그 지성주의가 대략 열여덟살, 열아홉 살 사이에 이미 완전히 발달되어서 그 나이에 이르면 지적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주의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껏해야 더 나은 숙련에나 이를 수 있지 질적인 진보는 이를 수 없습니다. 지성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려는 유혹에 일단 한 번이라도 빠져들면, 그 증명과 반박에서 어떤 진보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수십 년 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 낸 것을 지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열여덟 살밖에 먹지 않은 녀석도 지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십에 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도 벌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성주의는 의식 영혼 시대 동안에 일단은 이르렀어야만 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심화라는 의미에서는 아무 진보도 없습니다. 단지 숙련의 의미에서만 진보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아직 당신처럼 그렇게 똑똑하지 못합니다. 아직은 당신이 나를 기만할 수 있습니다." 라고 젊은이가 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젊은이는 상대방이 지성주의의 영역에서 자기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겁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과격하게 표현해야만 합니다. 저는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자연적인 발달이 과연 무엇인지 설명을 드릴 뿐입니다. 현시대가 어떤 성격을 띠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내적인 능동성으로부터 발달을 추구하면서 그 발달을 깨어 있으면서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십대 이후에는 단순한 지성주의와 더불어 녹슬고 맙니다. 그러면 인간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통해 단지 인위적으로만 연명하게 됩니다.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자주 극장에 가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영화를 보려는 욕구, 모든 것을 외적인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그 욕구 자체가, 인간이 내적으로 수동적이고 비활성화되어서 내적인 활동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은 정신과학은 항상 내적으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나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사진과 함께>>라고 덧붙여진 행사나 강연에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멍하니 앉아서 사고 활동을 가능한 대로 조용히 쉬도록 버려둡니다. 모든 것들이 그냥 그렇게 사람을 지나쳐 갑니다. 사람이 완전히 수동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수업 전체가 그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교육학적인 이유에서 오늘날의 실물 수업이 지니는 진부함에 반대하면 그가 누구든 간에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 취급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실물 수업에 반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관조 기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기구가 아닙니다. 인간은 오로지 내적인 활동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학적인 것을 제시한다 함은, 인간이 영적으로 스스로 일하도록 초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모든 정신과학은 그런 내적인 활동으로 초대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신과학은, 외적·감각적 관조에서는 더 이상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어서 내적인 힘들이 자유롭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 모든 고찰들을 몰아가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내적인 힘들의 작용 속에서 사고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형상적 상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안 됩니다. 

모든 인지학적 정신과학의 근거는 말하자면 그 내적인 활동성입니다. 내적인 활동성으로의 일깨움입니다. 모든 감각이 일단 침묵하고 오로지 만활한 사고 활동만 남아 있는 경우에 인간 내면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에 호소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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