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한 인간이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인 의지 자극으로 포괄하는 자아 외에도 그것보다 더 힘찬 두 번째 자아가 자신 내부에 있다는 통찰에 머지않아 이른다. 이러한 통찰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더 고차적인 힘으로서의 그 두 번째 자아에 순응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는 선함과 진솔함으로 기우는, 완전히 의식적이고 명료한 영혼 존재로 포괄하는 자아에 비해 그 두 번째 자아를 더 낮은 존재로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더 낮은 존재를 극복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내밀한 자성이 그 두 번째 자아에 대해 조금 다른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것이나 행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회상을 자주 해 보면 아주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경험을 더욱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네 삶의 이 시기나 저 시기에 너는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말했었던가?" 라고 자문해 보면, 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칠팔 년 전에, 아니면 이십 년 전에 어떤 일을 했다고 하자. 그에 대해 이렇게 확언할 수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네 오성의 폭이 넓어져서 네가 그때 했었던 일, 그 때 했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의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영혼에 대한 그런 자성을 자주 하면 비범한 효과가 있다. "네가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들을 사실 오래전에 했었다. 당시에는 네 이해력이 충분히 성숙치 못했었기 때문에 네가 행하고 말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알아보는 그 순간에, 그런 종류의 발견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이 영혼의 느낌과 유사한 것이 시작된다. "내 존재의 심연 속에는 관장하는 선한 힘을 통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은 인간이 그야말로 최상의 의미에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것과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보아 세상에서 실행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오스트리·헝가리의 국가 형태는 반세기가 넘도록 쇄신을 촉구하였다. 다양한 민족 공동체에 뿌리박은 정신 생활이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였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자극들에서 형성된 단일국가가 그 새로운 형태의 발달에 방해 요소가 되었다. 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의 시발점이 되는 세르비아·오스트리아 분쟁은, 단일국가의 정치적 국경이 특정한 시점에 이르면 민족 생활을 위해 어떤 문화 국경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전적으로 타당한 증거다.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정치적 국가와 그 국경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신 생활이 그런 경계를 넘어서서, 각 민족들의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정신 생활 내에 그 뿌리를 둔 분쟁이 정치적 재난으로 폭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정치가답게> 생각한다고 자만했던 모든 이들에게는 그 방향을 목표로 한 발달이 완벽한 불가능으로, 심지어는 순전히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그들의 사고습관이, 민족적 공통성의 경계와 국경은 일치해야 한다는 표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육 제도와 정신 생활의 다른 부분을 포괄하는 정신적 기구들이 국경을 넘어서서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자체가 그 사고습관에는 불쾌하게 거슬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바로 국제 생활을 위한 새 시대의 요구 사항이다. 실질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외관상의 불가능성에 매달려서, 그 요구 사항이 지니는 의미에서의 제도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칠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새 시대의 요구 사항에 부합될 수도 있었던 방향으로 <정치가적인> 사고를 이끄는 대신에 그 요구 사항과는 반대로 단일적인 국가를 유지하려는 제도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로 인해 국가가 점점 더 몰상식한 형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의 20년대에 이르러서는 낡은 형태에서의 자기 존속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해체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거나, 내적인 불가능성을 전쟁이라는 조처에 근거하는 외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목전에 두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가들>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남아 있었다.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의 생존 조건을 위한 방향으로 그들의 의도를 돌려서, 새로운 신뢰를 일깨울 수 있었던 의지로서 그것을 공표했어야만 했거나, 혹은 구시대적인 것의 존속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4년에 발생했던 것을 이런 저변으로부터 판단하는 자만, 책임 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다수의 민족 공동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가 형태에 관여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건강한 사회적 유기체를 발달시킬 세계 역사적 과제가 그 형태에 부여되었었다. 그런데 그 과제를 간과하였다. 세계 역사적 발달의 정신에 적대적인 그 과오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전쟁으로 몰아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평생 여러분 살았을 때, 여러분이 평생 얻은 실적은 뭐냐?

“공부한 실적 내놔봐라.”할 때 

얼마나 내가 ‘개과천선’, 악을 선으로 바꿨는가?

그게 여러분 실적입니다.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얼마나 바꿨는가?

나쁜 말을 좋은 말로 얼마나 바꿨는가?

나쁜 행동을 좋은 행동으로 얼마나 바꿔 냈는가?

그게 여러분 평생 공부한 실적이에요.

그래서 모든 철학이나, 인문학, 종교는 다 그 얘기를 합니다.

그게 제일 본질이에요.

인간을 업그레이드 시키려는 게 본질이거든요.


그냥 두면 짐승수준이 되요, 인간은.

짐승보다 이제 더 못해져요.

짐승이 하지 안 을 짓까지 하거든요.

그러니까 개과천선을 시켜서 

진짜 인간이 뭔지 우주에서 보여 주는 게 인간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사명이 뭔지 아세요?

“이게 인간이야!”하고 보여 주는 거예요.

“짐승이랑 이게 달라!”

지금 우리처럼 살면요, 

“이것도 동물이야!”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도 짐승이야!”, “우리도 짐승이야!”라는 걸 보여 주실 거예요?

아니면 “이게 인간이야!”라는 걸 보여 주실 거예요?

“짐승들 이거 못하지, 이게 인간이야!”라는 걸 보여주셔야죠.


그런데 이런 말 할 때 당당하지 못하신 건 

‘우리 집 개가 나보다 나은데 같은데, 성격이’ 

이런 생각 드시면 이거 찜찜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동물보다 나은 거예요.

동물은 그냥 고정된 대로만 사는데 대부분,

인간은 내가 고생해서 만든 거예요.


우리 집 강아지보다도 덜 착해보여도 인간이 왜 위대하냐 면요, 

내가 고생해서 이거 만들어 낸 거라고요.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겨내고 만든 거예요.

그 작은 성취부터 여러분 중시하셔서 

양심을 한번 구현해 보는 존재가 되시길 바래요.

그게 “이게 인간이야!”라고 우주에 보여 주는 게 

인간의 사명입니다. 제가 봐선.


다 그렇게 살아요. 동물은 뭘 보여주나요? 

강아지는 “이게 개야!”라는 걸 보여줘요.

새는요? 부지런히 날라 다녀요. “이게 새야!”

땅은요? “이게 지구야!” “이게 지구라는 거야” 

“이게 하늘 이라는 거야” 다 보여주는데,

문제는 인간이 “이게 인간이라는 거야!”할 때 

뭔가 제 기능을 다 못하고 있다는 찜찜함이 있어요.

그거 날려 버리자는 겁니다.


철학 인문학은 왜 할까요? 종교는 왜 나왔을까요?

고거 날리고 싶어서요.

인간의 그런 무지몽매한 마음을 어디 붙들어 맬 때가 

필요해서 나온 게 아니고요, 그게 본질이 아니고,

종교, 철학, 이런 인문학은 왜 나왔느냐?

인간을 진화 시키려고 나온 거예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즉 인간의 존재를 밝히려고 나온 거예요.

그리고 그걸 밝힌 다는 건, 공부가 필요해요. 

수행이 필요해요. 쉽지 않거든요. 

노력이 필요해요.


그런 노력을 개인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여기 공부하러 오셨지만, 여러분 개인만 닦고 계시면 안돼요.

사회 전체가 밝아져야 돼요, 원리가 하나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에서 양심이 빛나고, 

사회 전체에서 양심이 빛날 때 “이게 인간이다!”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철학자들에게는 ·········· 세계 창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창조를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 파악을 위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 철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확실한 지반을 찾아야만 한다. 


·········· 사고하는 주체, 혹은 사고되는 객체에 대한 관계가 없이, 우선은 사고를 완전히 중립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체와 객체 속에 이미 사고를 통하여 형성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것을 파악할 수 있기 전에, 사고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창조의 시초 부분이 아니라 최종 부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통한 세계 해명을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현존재의 최초의 요소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부터, 밀접하게 주어진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고찰을 시작하기 위해서 세상의 시초로 훌쩍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최근의 것에서 좀 더 이전의 것으로 점진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지질학이 지구의 현재 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가공의 변혁에 대해서 말했던 동안에는, 그저 암흑 속에서 더듬기만 했던 것이다. 어떤 과정들이 현재의 지구상에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거기에 과거사를 연역해 내는 점에서 출발했을 때에야, 비로소 지질학이 확실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철학이 원자, 운동, 물질, 의지, 무의식과 같은 모든 가능한 원리를 가정하는 동안에는 그저 공중에 유영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자신의 최초의 것으로 간파하게 되면, 비로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 발달이 향해 온, 절대적으로 최종의 것, 그것이 바로 사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 인간의 의식은 개념과 관찰이 서로 만나 함께 연계되는 공연 무대다.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 동시에 이 (인간의) 의식이 성격화 된다. 인간의 의식은 사고와 관찰의 중개자다. 인간이 대상물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대상물이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이 사고를 하는 한,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대상물은 객체로, 자기 자신은 사고하는 주체로 고찰한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자신 스스로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자아 의식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사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시각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 돌리게 되면, 바로 사고가 자신의 근원적 존재, 자신의 주체를 대상물이라는 객체로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로지 사고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을 주체로 결정하고, 객체의 맞은편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를 단순한 주체적인 행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사고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개념도 형성한다. 우리가 사고하는 주체로서 개념을 하나의 객체에 연관시킬 때에, 이 관계를 단순히 어떤 주체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관계를 이끌어 오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로서 행하는 활동은 그저 단순히 주체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은, 이 양 개념을 극복하여 넘어서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주체가 사고한다고 말할 권리가 전혀 없다. 이 개인적인 주체는 오히려 사고의 은혜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를 나의 자아 이상으로 이끌어 내어, 객체와 연결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동시에 사고가 나를 주체로서 객체의 맞은편에 세워 둠으로써, 나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기인한다. 인간은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과 나머지 세계를 포괄한다. 그는 동시에, 사고에 의하여 사물의 맞은편에 서 있는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해야만 한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예술교육의 중요성

변종인



현재 인류는 커다란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 위협이란 다음과 같다.


1. 산업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결과인 자연파괴

-지나친 농약과 비료사용으로 야기된 땅의 생명력 고갈

-과도한 원시림 벌목(매일 약 서울면적정도)

-기상조건의 극심한 변화로 인한 천재지변

-동․식물의 종류 감소(50년 안에 전체 동․식물의 10%~50%)

-전 대양의 오염

-무분별한 배기가스로 인하여 오존층이 점점 엷어짐


2. 석유자원의 고갈대책으로 개발한 원자력 발전소의 위협

-언제 체르노빌의 재앙이 다시 찾아 올 줄 모르고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내포된 중금속 쓰레기 문제


3. 인간복제가능성

-자유의지가 없는 로버트형 인간이 대량으로 등장할 가능성

-국제 테러단의 난무

-나아닌 사람은 모두 나의 경쟁상대

-인간은 지능을 갖춘 기계로 전락



이러한 위기 속에 우리가 가져야할 올바른 태도는 체념, 자포자기, 무관심, 망각이 아니라 지혜로운 해결방법을 찾아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에 옮기는 것 일게다. 가령 화학세제를 쓰지 않거나 유기농법으로 전환하거나 등등. 그러한 실천만이 우리를 이 위기 속에서 구해줄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정보를 접할 때 그 내용이 오직 머리의 지식으로만 남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행동의지로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올바른 일을 하려면 내면 양심의 소리가 너무나 미약하다. 나부터 우선 살고보자는 이기주의와 쉽게 살려는 안일주의에 빠진다. 왜 이럴까?


그 이유는 아마 우리 받았던 교육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지식축적, 지능개발에 가장 큰 비중을 둔 교육이다. 입시경쟁에 필요한 과목위주로만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히 예술과목을 등한시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메말라져갔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 점은 대부분의 인류사회에 공통으로 놓여있는 문제일 것이다. 일방적 지식축적, 지능개발은 교묘하게 남을 이용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일방적 교육방향을 우리가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 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존멸위기의 중대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1861년에서 1925년 사이에 주로 중부유럽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출생 루돌프 슈타이너는 발도로프 교육을 창시하면서 교육예술이란 새로운 단어를 교육계에 도입했다. 이 교육예술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예술은 여러 가지 대상을 가지고 표현한다. 가령 소리, 나무, 돌, 색깔 등등. 이 때 우선은 예술의 표현수단인 대상의 속성을 잘 알아야 할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속성 근원에 놓여있는 대상의 본질적인 것이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세운 개념을 교육예술에 적용한다면, 교육예술이라는 것은 먼저 그 대상인 아이들을 잘 알아서 그 다음 아이의 본질적인 모습, 개별적인 특성이 나오도록 하는 예술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교사는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산파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찌도 이미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우리 교사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는 동시대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로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신이 심어놓은 아이들의 고유한 모습이 나타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하루는 한 인디언아이가 높은 산위에서 독수리 알을 찾아 집으로 가져와 그 알을 암탉이 품도록 다른 달걀들과 함께 두었다. 시간이 지나 알에서 나온 독수리 새끼는 다른 병아리들과 함께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 메고 다니며 자라났다. 때때로 날개를 펴보기도 하고, 주변에 있는 낮은 나무 가지로 날아가 안기도 했다. 하루는 하늘 높이 빙빙 도는 새를 한 마리 보았다. 󰡒해까지 치 닿을 듯 나는 저 멋있는 새는 도대체 무슨 새야?󰡓하고 옆에 있던 닭에게 묻자, 󰡒응, 저건 독수리인데, 하늘의 왕이지. 그런데 그렇게 높이 쳐다보지 마! 너와 난 닭일 뿐이야. 우린 결코 저렇게 높이 날지는 못 해.󰡓라고 옆에 있던 닭이 말했다. 그 소리를 마음에 담은 독수리새끼는 자신이 닭이라고 생각하며 생을 마쳤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이의 본질이 잘 드러나도록 하려면, 우선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 발달 과정에 따른 교육의 중요성을 말했다. 다음은 그 발달과정에 대한 간추림이다. 인간 삶의 영역을 크게 나누면, 악함이 아닌 선함을 추구하는 종교,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그리고 거짓이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한꺼번에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인 과정을 거치며 발달한다. 다른 말로 나타내면 인간을 몸과 마음과 정신으로 구분할 때, 7년 주기로 우선 몸이, 그 다음 마음, 마지막으로 정신의 순서로 성장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7년 첫 주기에만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시기의 발달과정은 몸이 중점적이고 그때 이루어진 몸을 토대로 삼아 계속 발전된다. 이를 또 다르게 표현한다면 첫째 주기에 의지, 두 번째 주기에 감정, 세 번째 사고영역의 중점을 두어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 수도 있다.


나비의 성장과정을 관찰하면 어느 정도 앞에 말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번데기-나비의 변화과정을 거친다. 알에서 전혀 다른 애벌레가 나오고, 애벌레에서 전혀 다른 번데기가 되고, 마지막으로 번데기에서 전혀 다른 나비가 탄생된다. 사람은 나비 같은 외형변화는 갖지 않는다. 일곱 살에 머리에 뿔이 나고, 열네 살에 등 뒤에 날개가 솟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면은 이와 비슷한 변화를 겪는다. 이 말은 일곱 살이되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내면속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태어나서 일곱 살 때 까지 아이들은 종교인이 자신이 믿는 종교에 완전히 맡기듯이 주변 환경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 의심도 없고, 비판도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 그것이 좋다고 여긴다. 이 때 아이는 자신 몸의 기본형태를 만든다. 나쁜 것을 많이 보면 나쁜 것에 맞는 몸으로 표현해야하는 시기이다. 밀어보고, 당겨보고, 쓰다듬어보고 꽉 쥐어보고, 미끄러져보고 등등. 이 때 지나치게 가만히 있으라고 강요하면 이는 아이의 행동의지를 꺾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이주면에서 어른들은 언어, 행동, 생각까지도 아이가 해서 안 될 것을 스스로 배제해야 한다. 이 때에 아이의 교육을 맡이 있는 사람들은 경건한 종교인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일곱 살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세상에 있는 것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교사의 눈을 통해서, 교사의 귀를 통해서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사물의 이치를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설명으로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내면의 상이 풍부하게 떠오를 수 있는 설명을 원한다. 아이들은 아직 스스로 참되고 거짓을 구분 할 수 있는 지성이 깨어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 때 아이들은 교사의 안목으로 아름다운 것은 좋게 받아들이고, 추한 것은 나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참되고 거짓된 것을 구분하려면 논리적인 추구능력, 이치를 따질 수 있는 지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이 논리적 지력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다.


7-14살 사이에 형성된 미의 감각, 예술 감각은 이 다음 시기에 올 진리를 추구하는 데 밑바탕이 된다. 이는 마치 애벌레 시절에 충분히 풀을 먹고, 건강한 애벌레가 되어야 이다음 튼튼한 번데기가 되어 올바른 나비가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예술 감각은 감정을 풍부하게 다듬어 주는데 이 때를 놓치게 되면 이후에 일어나는 지적능력은 차가운 기계식 사고가 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불행은 바로 이러한 선․미․진의 불균형적인 발달에 놓여있다. 아이들이 예술을 추구하면 어떤 때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억지로 견디라고 강요받지 않고 예술적으로 극복하게 할 때 아이들은 미에 대한 감각뿐 아니라 강한 의지도 길러진다.


불균형적인 입시위주의 지적중심교육에서 벗어나는 길은 곧바로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동물은 나자마자 동물이 되지만, 사람은 20여년의 알찬시간을 엮어야 의․정․지를 고루 갖춘 사람이 된다. 이러한 의․정․지 또는 의지․감정․사고가 균등하게 발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게으른 인간, 약한 자를 거리김 없이 삼키는 냉혈 인간이 될 것이고, 전쟁을 일으켜 무기판매를 하여 자기 배만 불리면 된다는 이기적 인간이 되기가 너무나 쉽다. 따라서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예술교육에 더욱 비중을 두는 것 일게다.


모양그리기(Formenzeichnen, 포르멘자이히넨) 또는 선그림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1919년 처음으로 학교교육에 도입한 과목이다.


발도로프교육을 창시한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림을 처음부터 색깔그림과 선그림으로 나누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색깔그림은 미리 상상한 어떤 형태에 색깔을 채워 넣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색깔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을 잘 익힌다음 나중에 색깔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내는 형태를 찾도록 하였다.

선그림에서는 직선이나 곡선, 삼각형이나 사각형등의 기본선의 성질을 먼저 익혀 능동적으로 무궁무진한 형태의 세계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는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수동적 태도와는 뚜렷히 구별된다.


발도로프 학교(또는 슈타이너학교)에서는 2-3주일간의 모양그리기 에포크시간을 1학년에서 5학년까지 1년에 2-3번 갖는다. 이 선그림은 1,2학년 때는 글자를 유연하게 잘 쓰기위한 준비과정이기도 하고 5학년 때는 본격적인 기하로 들어가는 예비단계가 되기도 한다.


사람몸에 흐르는 생명기운은 만 7살 전후까지 주로 신체기관(심장, 허파, 콩팥, 등뼈등등을)의 기본꼴을 만드는데 쓰여져야 한다. 이를 가는 시기쯤 이 기운은 예술적 상상력과 기억력으로 바뀌어진다. 그전에 이 기운을 문자, 숫자교육이나 선그임을 익히는데 사용하면 인간의 신체는 그만큼 약해진다. 이뿐아니라 만 7살까지 아이들은 원이나 삼각형따위를 원이나 삼각형자체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한 기본모양을 꼭 사물과 연관을(가령 태양처럼 둥글다던지, 상자처럼 네모나다든지 등등)지어야 한다. 따라서 선그림을 유치원에서 도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1학년 때는 주로 직선과 곡선, 삼각형, 소용돌이 무의,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 원각에 대한 기본 성질을 익힌다.


2학년(만 8살 전후)이 되면 비로소 체내의 평형감각이 어느정도 갖추어짐으로 처음에 좌우대칭을 다음에 상하대칭을 익힌다음 마지막에 사방대칭으로 넘어간다.


쉬운 모양 변화과정을 도입하여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상상력을 펼칭 기회를 준다. 자연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다양한 형태는 그 형태로 고착되기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모양 변화의 과정을 연습함으로 상상력이 발달 할 뿐 아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서도 어렴풋이나마 눈을 뜨게 된다.


3학년(만 9살 전후)이 되면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과 하나가 아닌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시기이다.(Rubicon)이 시기에는 원과 중심, 중심으로 이어지는 삼면대칭, 오면대칭을 익혀 독립된 존재이지만 그래도 모두는 큰 세상에 속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 수 있게 한다.


만 10살 전후는 사춘기전 아이들의 황금시기이다.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발달되어 있다. 4학년에는 3학년때 깨어나기 시작했던 자아의 힘을 매듭모양, 얽힌 모양, 엮은 모양을 통하여 조금 더 강화해준다.


5학년에는 4학년때 시작된 엮기의 정도를 조금 더 복잡하게 하고(그리스, 에트루스문양), 기하의 준비단계로서 자와 콤파스를 쓰지 않고 도형그리기를 연습한다.


6학년때는 논리적인 사고가 미약하나마 일어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슈타이너 학교에서는 방정식을 도입한다. 랑고바르드족이나 아일랜드인들이 사용했던 복잡한 문양을 그린다.

선그림의 기본요소는 곧은 선과 둥근 선이다. 곧은 선은 생각을 둥근선은 의지를 나타낸다. 이 선에 대하여 언급한 보기를 든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Prokles(아테네, 410~485) : 모양그리기(선예술)는 영혼속에 들어 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면(이데아)에 대한 회상이다.

모양그리기가 주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정신을 일깨우고 이성을 정화하여 사람안에 들어 있는 어떤 높은 존재를 바깥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Filppo Brunelleschi(1377~1446, 이탤리 플로랜스 대성당건축) : 선이나 모양은 하느님의 손짓을 볼 수 있게 드러내주는 도구이다. 이런 선들을 이해하면 어떻게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Johannes Kepler(1571~1630) : 둥글고 곧은 두 선의 요소는 창조의 기본요소이며 이 두요소의 협력작업으로 세상이 이루어졌다.


Siegfried Muller : 선그림에도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다. 우리는 선그림을 통하여 자신을 가다듬과 변화시킬 수 있다. 특히 엮기 모양을 통하여 개인 스스로에 대한 자각 뿐 아니라 전체 사회속에 얽혀있는 개인의 존재에 대한 자각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 : 인간의 신체나 영혼구조는 양극성을 띄고 있다. 한 극(머리부분)은 비교적 고요함을 이루고 있고, 다른 극(사지부분)은 움직임의 흐름속에 들어 있다. 위에서는 신경-감각조직이, 아래에서는 신진대사-사지운동조작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한쪽은 생각에, 다른 쪽은 행동에 그 역할을 서로 나누고 있다. 생각은 죽은 개념으로 굳어질 수도 있고 지혜의 빛으로 가득 할 수도 있다. 행동은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고 사랑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이러한 두 성질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지 않고 조화로이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그림은 일반적으로 집중력, 모양에 대한 감까, 생각의 유연성과 상상력을 북돋우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자아를 강하게 하는 좋은 수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선그림을 그릴때에는

-모양을 주변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걸을 수도 있다.

-모양을 공중에 크게 그린다. 이때 눈이 손끝을 좇아간다.

-손가락으로 종이위에 몇 번 연습한 다음 연필이나 크레용으로 옮긴다.

(서울 자유 발도르프 학교 카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슈타이너는 인간의 본질을 육체․영혼․정신의 통합적 존재로 보고, 4가지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합성된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발달 단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 발달에 있어서의 단계는 출생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의 20여 년간의 기간을 3개의 7년 주기로 단계를 나누었다. 또한 각 단계마다 본질적인 교육과제를 책정하고 있다. 1단계의 7년은 탄생에서 7살까지로 신체의 건전한 발육과 감각에 의한 환경의 모방시기 이며, 2단계의 7년은 7살부터 14살까지로 예술체험에 의해 세계를 미적으로 느껴 가는 시기이고, 마지막으로 3단계의 7년은 14살부터 21살까지로 사고 파악에 의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라고 했다.(슈타이너의 인지학적 교육과 인간 기질에 관한 연구, 교육학논총 2000, 제21권 제2호. 조용태, 김성원, p6)



1) 육체 ․ 영혼 ․ 정신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육체, 영혼, 정신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삼원적 본질구조 중, 육체는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나는 환경 속에 있는 사물을 의미하며, 영혼은 이러한 사물들을 자신의 존재와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신은 인간이 사물을 ‘신성한 존재’로써 느낄 때에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 무엇을 뜻한다. 이와 같이 슈타이너는 인간을 세 가지 의 현존재 구욕, 즉 육체를 통하여 감각세계에, 영혼을 통하여 영혼세계에, 정신을 통하여 정신세계에 속하고 인간의 본질 파악은 인간을 이러한 세가지 측면에서 총합적으로 고찰할 때만이 가능하다 하였다(곽노의, 1998; 유아교육개혁모델로서 자유 발도르프 유치원교육 탐색. 열린유아교육 3. p179).



2) 인간존재의 4가지 특성 

슈타이너는 인간본질 구성체는 네 가지 본질로 물질육체, 생명육체(에테르체), 영혼육체(아스트랄체), 자아체로 구별하였다.


물질육체는 무기질의 광물계에 속하며 중력의 법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무기질과 자연의 요소로 구성되어 죽어서는 분해되어 없어진다.


생명육체(에테르체)는 유기체로서의 식물에서 발견된다. 에테르체의 출현은 무기질과 유기질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식물은 광물적인 부분을 지니면서 중력의 법칙에 역행해서 밑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생성, 번식, 유전의 생명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힘을 지배하는 것이 에테르체이다. 인간의 육체는 에테르체의 힘이 소멸될 때 죽는다. 에테르체는 삶의 모든 순간이 소멸될 때까지 물질적 육체를 보존하는 것이다.


영혼육체(아스트랄체)는 욕망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요소로 식물과 같은 생명체에는 결여 되어 있으나, 동물에게는 존재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단순히 외적 자극에 의하여 반응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자극에 대하여 감정을 가지고 내면적 과정을 거쳐 반응하는 점이 중요하다. 신경체계를 갖고 있는 생물체는 아스트랄체를 갖고 있는 것이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의 세계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자아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물질육체, 생명육체, 영혼육체를 통제하고 지시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 준다. 즉, 자아는 아스트랄체에 의하여 생겨나는 인간의 욕망과 소망, 그리고 에테르체에 의하여 생겨나는 습관과 기질 뿐만 아니라 물질육체에 의하여 만들어 지는 인간의 모든 외적 모습에도 영향을 미치며, 이들을 순수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특수한 역할을 한다(슈타이너 교육예술론에 의한 미술교육방법 연구, 권준범). 



1. 루돌프 슈타이너의 유아 발달관

발도르프교육에서의 어린이의 발달을 단계나 지적 주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으로 바라본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아이가 가지고 나온 힘의 변화를 관찰을 통하여 출생-7세의 아이들의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의 힘이 바깥 세상으로 내밀고 있는 것을 관찰한다. 어린이가 밖으로 내보낸 힘은 바로 반사되어 아이의 육체안으로 받아 들이는 힘을 모방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관련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3세 아이가 육체적으로 건강한데 왼쪽 다리가 이상하게 절룩거리는 알고 의사에게 데리러 갔다. 의사는 아이의 아버지가 전쟁 때 왼쪽 발에 입은 상처로 다리를 절게 된 것을 보고 아이가 다리 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걸음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잘 안 먹는 2세 아이가 있는데 아이 스스로가 좌절감과 우울증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였다. 그 이유는 아이가 갖고 있는 헝겊으로 만든 동물 인형의 슬픈 표정을 아이가 자기화 하여서 우울증에 빠져드는 것을 알 수 있다(Walter Riethmuller, 발도르프 교사교육 참관 강연록)



첫 번째 7년 주기인 유아기 시기에는 육체 기관이 성장하는 시기로 아주 중요하다. 이 시기는 행동감, 생동감적인 요소를 통하여 내적이며 외적인 몸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시기로 형태를 단단하게 만들어 간다(Margret Costantini,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20권, 2005, 여름, p73).


아이는 주위 세상을 받아들여 육체적인 모방을 하며 성장하는데 교사나 부모는 아이의 지적 능력을 촉진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가 본보기와 모방을 향해서 따라 갈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게 주위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교육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아시기의 발도르프 교육은 사고적 능력의 촉진이 아니라, 모범적인 본보기를 따라 할 수 있는 환경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고적 연습은 교육이 아니다. 그렇기에 장난감 선택에서 다양한 놀이감을 제공하여야 한다(Walter Riethmuller, 발도르프 교사교육 참관 강연록 ).


발도르프 유치원에서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단순하지만 예술성이 깃들어 있는 놀이감과 아이들에게 알맞은 놀이는 아이들의 건강한 신체 발달을 돕고 창조적 상상 능력을 일깨우고 크게 키운다(변종인, 1998, 유아교육을 위한 전국교사모임 자료. p1).


발도르프 유치원은 완전한 모양을 갖춘 장난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대신에 아이들은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뭇가지, 나무토막, 나무뿌리, 솔방울, 양털, 여러 가지 천조각, 과일 씨앗 따위를 가지고 갖가지를 지어내며 재미있게 논다. 이런 자연물들은 아이들의 손끝감각을 발달시키는데도 큰 몫을 한다(변종인, 1998, 유아교육을 위한 전국교사모임 자료. p7-8).



네 살 짜리 한 아이가 엄마가 빨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자기도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는 밑바닥에는 솔방울과 도토리로 채운다. 그리고 수건 몇 장을 가지고 와서는 자기도 빨래를 한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는 도토리와 솔방울을 보자기에 넣고 싸고는 이것이 하나의 자루인것처럼 아깨 위에 맨다. 그리고 아주 무거운 발걸음 하며 허리를 숙여 엄마에게 다가가서는 엄마에게 여기 나무 장작이 왔어요 한다. 그리고 안에 있던 것을 비우고 나서는 보자기를 바구니에 넓게 걸친다. 이제는 목욕조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인형아기를 목욕시키기 시작한다. 솔방울은 이제 비누가 된다. 그리고 보자기는 이제 목욕 수건이 되고 도토리는 우유병이 된다.

여기서 이 시기에 아주 눈에 띄는 것은 아이가 자기 생활의 주변에서 아주 단순하고 쓸모없이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이제는 아주 “올바른” 사물로 만들어 나가는 능력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아이의 행위 즉, 그의 놀이는 일상 생활 체험에서의 모방인 것이다(허영록,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5권, 2000, p159).



아이가 일곱 살 될 때 까지 활동적인 놀이를 통하여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이는 행위는 아이에게 느낌(Empfindungen), 감각적 인상(Sinneseindruecke), 의미가 풍부한 관계성을 연결시켜 주고 결국에는 또한 상상력, 체험, 그리고 통찰력으로 연결 시켜 준다. 이것이 보편성이라는 배움이고, 조기의 암기 습득과 추상화를 통하여 아이 스스로의 다양한 발전이 방해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허영록, 한국슈타이너교유협회 자료집 5권 , 2000, p160).


손끝 운동은 언어 발달에 도움을 준다. 놀이감이 일정치 않고 여러 가지 다른 느낌의 이런 다양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나중에 아이의 사고 구별 능력을 키워 준다. 손으로 하는 행위가 뇌의 형성과 사고 능력에 영향을 받는 연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나이별 뇌주름살 형성(%)

(Walter Riethmuller, 발도르프 교사교육 참관 강연록)


이러한 뇌의 형성은 나중에 사고 능력에 영향을 주는데 형성되고, 이는 학교 들어 가기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며, 성인이 되어서 사고 능력에 영향을 준다. 보는 능력의 발달은 뇌세포와 연결되는데 7세까지는 보는 능력이 98%가 이루어 지고 2%는 14세가 되어서야 세밀한 명암까지도 구분하는 능력이 형성된다(Walter Riethmuller, 발도르프 교사교육 참관 강연록). 


이렇게 0-7세 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는 자극, 그림, 인상들이 다가오게 함으로써 모방 모범을 이루게 되는데 이 때 신경체계들이 형성되어 진다(Walter Riethmuller,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24권, 2007, 여름, p79).


7년 주기의 삶은 상을 만드는 모든 주변 세상의 움직임을 통하여 또는 반복적인 언어를 통하여 뇌가 발달 한다. 아이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반복적인 행동을 한다. 물론 아이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기 전에 먼저 어른의 모범적 행동이 있어야 하며, 특히 리듬 있는 이야기는 음악성과 사물들과의 연계성, 움직임, 주변세상과 관계가 있으므로 살아있는 사고가 가능해 진다(Margret Costantini,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20권, 2005, 여름, p73). 


출생-7세의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즐거움 인데, 이러한 즐거움을 위해서는 반복적인 리듬적인 이야기로 이러한 반복은 아이들에게 안정감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Susanne Kriegstoetter,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3권, p59).


출생-7세 시기는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해서 듣고 확인하기를 원한다(Johannes Schneider,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5권, 2000, 여름, p36). 3주정도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은 선이 악을 물리치는 것으로 단어하나 틀리지 않게 반복해서 듣는 것이다. 다시 3주 후에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역시 선이 악을 물리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 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신뢰하는 어른이 직접 이야기로 해 주어야 하며 이렇게 일관성 있게 반복하는 것은 도덕성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7세까지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리라고 이해한다. 아이들이 자신이 믿는 사람이 일치되지 않는 말을 할 때 혼란스러워 한다. 엄마나 아빠 또는 교사가 다르게 이야기하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신뢰하는 사람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아도 진실성을 믿지 못한다.7세 까지는 적어도 어른이 도덕성을 잘 갖추고 행동과 말을 일치시켜 나가야 아이도 자신의 진실에 대한 의지를 발달시켜 나간다.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자신의 말대로 당연히 행동해야 한다고 하면 아이도 역시 어른을 기계적으로 대한다. 이렇게 아이는 신뢰하는 사람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진실을 배우고 받아들인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의 모방론

루돌프 슈타이너는 성인과 어린이 사이의 관계를 본보기와 모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관계는 그러나 모방되어야만 하는 시범적인 것 내지는 규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유대를 말한다. 어린의 모방 능력은 어린이의 내면에 있는 자유의 표현이며 이는 어린이가 자신의 주변 인물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인지한 경우만 개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비교될 수 있는 것이란 결국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삶과 자신의 본질이 일체를 이루는 인간을 의미한다(Wolfgang Sassmannshausen,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권, 1997, ,p15-16).


어린이가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즉, 자신의 생각을 의지를 가지고 미래로 옮겨 단계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모범이 되는 성인을 통해서 체험하고자 한다. 어린이는 성인이 갖고 있는 개인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의지를 통해 실천될 때 이를 매우 참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에서조차도 이 같은 의지의 실천을 추구한다. 생각과 의지의 관계 속에서 어린이는 성인을 실험하고자 하는 도전적인 요구를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린이 스스로가 생각과 의지라는 양극 사이에서의 일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Wolfgang Sassmannshausen,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권, 1997, p16).


발도르프교육의 심리학적 측면에서 모방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행위 방식에 의식을 넣어서 살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가 초자아를 지상의 세계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리적 신체에 넣는 것과 관련지어서 어린이는 완전히 물리적인 육체에 높은 자아를 심는 작업을 한다면 어른은 습관과 높은 자아를 나에게 심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것을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모범이라 한다. 이는 항상 실제적인 생활과의 관계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Wolfgang Sassmannshausen,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6권, 2001, 겨울, p44).


슈타이너는 7세 이전의 시기 아이들이 지닌 열림성은 어른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 열려 있는 특성 혹은 능력은 정신세계에서 가지고 온 능력이고 이 능력(열림성, 모방)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에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정신적인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어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주위의 사물을 인식할 때 내면 안에서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고 슈타이너는 설명한다. 정신세계는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아이들은 아직까지 정신세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런 능력이 따라 하기, 모방하기의 표현으로 나타난다(Peter Loebell,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8권, 2001, 여름, p66).


슈타이너는 배움이라는 것은 일단 모방하기 즉 따라 하기를 통해서 배운 다음에 진정으로 자유가 될 수 있다 라고 했다. 따라 하기의 의미는 온 몸 전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열려 있을 때 진정한 따라 하기가 가능하다. 마치 하나의 스펀지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완전히 빨아들인다. 따라 하기는 세상을 향해서 많이 열려 있는 사지, 특히 손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일을 알아 나가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은 사지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방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있다.


출생-7세 이 시기에 대해 완전히 열려있는(열림성) 그러한 존재가 아이이다. 슈타이너는 이 세상에 열려 있다 라는 의미를 아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삶에 대한 흔적이라고 했다. 즉 아이가 이세 상에 오기 전에 했던 행위들이 지금 태어나기 전에 했던 것들이 이 시기에는 아직도 버릇처럼 남아 있다. 그러한 열림성이 아이한테는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 하늘적인 것만큼 열려 있기에 아이도 많이 열려 있는 존재의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이들 또한 세상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존재들이 한없이 열려져 있던 것이 좁은 육체로 들어오는데 육체가 너무 좁아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가 바로 모방이 되는 것이다. 나가고 싶은 욕구가 바로 사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방하기는 움직임인 사지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Lothar Steinmann,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21권, 2006, p138).


출생-7세 에서의 아이들은 움직임을 좋아하고 동작을 좋아하는 특징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아이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따라하거나 만지거나 하는 것들이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어린 아이들은 몸 전체가 감각기관이다 라고 말을 했다. 감각기관은 한정적이지 않고 모든 것에 다 열려있다는 뜻이다. 마치 많은 문어 다리가 접하는 대로 모두 만지려고 하는 것이 아이의 특성이다. 산이 얼마나 높은지도 모르고 뜨거운 것도 모르고 스스로가 만져보고 알려고 하는 것이 아이들의 존재인 것이다. 완전히 열려 있다 라는 이야기는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에 차별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만져보고 하는 것은 아이들이 열려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모방은 결국 무엇을 따라 하기인데 이는 움직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생-7세까지의 교육의 기본 원리는 따라 하기이다. 행위, 움직임을 통해서 아이가 배우는 것이다(Michael Handtmann,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5권, 2003, p36)


이러한 움직임이 어떻게 사고하기로 배워지는지를 베른트 루프(Bernd Ruf)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이의 동작은 처음 시기에 고개를 들고, 뒤집고, 앉고, 서고, 걷고 한다. 이 행동은 주변 행동을 보고 의지가 생긴 것이다. 인간이 서려고 하는 의지는 언어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그 래서 말하는 것은 이미 전에 서려고 하는 것이 완성되었을 때이다.그 리고 걷기, 말하기, 초기적인 사고하기가 그 후에 생겨난다. 이 세 가지는 움직임을 전제로 한다. 올바른 움직임 없이는 올바른 언어, 사고하기에 도달할 수 없다. 걷기, 말하기, 생각하기는 인간이기 위한 기본 능력이고 이는 결국 모방하기를 통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인간적인 모방이지 기계적인 모방은 아니다.

말한다는 자체가 움직임이다. 사고하기도 움직임이다. 움직임 없으면 사고하기도 없다. 살아있는 생각, 경직되어 있는 생각은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초기적인 모방’이 필수적이다.

아이는 따라하기 할 때 우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고 있다. 완전하게 주변 어른들을 신뢰한다. 바로 그러한 ‘조건없는 신뢰’는 아이들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능력이다. 이 근본적인 신뢰는 인류의 전생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Bernd Ruf,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7권. 2004, 겨울, p127)



아이들은 모든 것이 열려 있기 때문에 특히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부모나 교사들 움직임을 보고 따라하며 자기와 관계된 사람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길 원하는 것이다. 그만큼 아이는 열려 있기에 적어도 자기와 직접 관계된 사람들에게는 경계가 없을 정도로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모두 용서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Michael Handtmann,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15권, 2003, p36). 


모방은 처음 따라할 때 가장 완벽하며 반복할수록 완벽함이 줄어든다. 모든 건강한 아이가 모방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정상적인 원리이다. 이러한 모방은 하나의 개성적이고 개별적인 움직임의 형태를 부분적으로 따라하는 것이다. 이런 아동의 따라 하기 재능은 인간이 갖고 있는 것에 속해져 있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서 있는 인간을 보지 않는다면 아이도 서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서 있는 다고만 해서 따라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아이가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의 관계가 많아 질 때 그 상의 존재가 본보기가 된다. 그 본보기를 따라하는 것이다(Johannes Schneider,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5권, 2000, p18).


만약 본보기에 대한 열림성이 없으면 어떻게 출생-7세 시기에 물질육체가 성장하는지 요하네스 슈나이더 박사는 늑대소년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인도 정글에 늑대 소년 두 명이 발견되었다. 발과 손을 이용하여 마치 짐승의 네발처럼 잘 뛸 수가 있었고 어떤 어른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빨리 뛰었다. 두 아이의 손은 무릎까지 내려 올 정도로 길어 졌다. 이 아이들은 인도의 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 또 죽은 동물을 먹을 수 있다. 그 시체에 독소가 있어 보통 사람들은 먹으면 죽지만 이 늑대 소년은 소화기간까지도 늑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 아이는 30단어를 사용하는데 6년이나 걸렸다(Johannes Schneider,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5권, 슈나이더, 2000, 여름, p20)



인간이 본보기로부터 얼마만큼 자신을 발달시키고 모방하는지 알 수 있으며 출생-7세의 시기에는 물질 육체가 가장 많이 형성 발달하는 시기이고 모든 주위의 환경은 아이의 물질육체를 발달하는데 영향을 줌을 알 수 있다. 


슈타이너는 주위의 환경이 신체적 기관들을 형성하는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이가 주변환경에서 도덕적인 것을 보게되면 뇌와 혈액 순환에서도 건전한 도덕적 감각을 위한 신체적 자질을 형성하게 된다. 어린이가 7세 이전에 주변 환경에서 멍청한 행동만을 보게 되면 뇌는 나중의 삶에서도 역시 멍청한 형태들만을 받아 들이게 된다(루돌프 슈타이너,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2001, p31).



아이의 따라하기가 물질육체에 형성됨을 더 살펴본다면 출생-7세 시기는 아이가 태어 날 때에는 뇌세포가 형성되어 있지만 섬세한 부분은 아직 많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첫 시기에 앞으로 사용할 뇌세포의 구조적 접속이 모두 이루어진다. 이렇게 모든 기관들이 나중에 제대로 쓸 수 있도록 성장이 된다. 아이는 유전을 통해서만 발전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을 통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따라하기를 통해 사람이 되어져 간다. 예를 들면 여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그 중 한아이의 행동만을 골라서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방한다는 것은 선택적 모방이고 교육적인 핵심이 되는 것이다. 육체가 형성되는 것도 교육이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 쓸 수 있는 것을 만들어 가는 1차 교육시기이다. 이때 일어난 일들에 의해 형성된 것은 나중에 평생 쓸 수 있는 것이 형성되는데 이 시기에 잘못 형성된 것은 수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이렇게 받아들인 것은 물질육체에 곧바로 영향을 주어 동작으로 보여 진다. 그 행위가 되었을 때 이제는 뇌세포에 접촉이 일어나 발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적인 모방은 교육의 중요한 열쇠이다(Bernd Ruf,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자료집 17권, 2004, p127). 바로 이 시기의 육체적 성장을 위한 신체적 환경을 위한 기쁨과 흥미 그리고 사랑이 건강한 신체적 기관을 형성함을 루돌프 슈타이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쁨은 환경과 함께 신체적 기관을 만들 수 있게 작용하는 힘에 속한다. 선생님의 밝은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고 강요되지 않은 사랑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신체적 환경이란 온화하게 파고드는 진정한 사랑을 말하며 바로 이것이 신채 기관의 형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분위기에서 건전한 모범을 모방할 수 있다면 아동은 올바른 요소를 갑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함이란 아이가 모방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아동의 주변에서 전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아동에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아이 앞에서는 행해서는 안 된다(루돌프 슈타이너,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 2001,p34).



슈타이너는 유치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고자 할 때 모방될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아는 것이 중요하며 유치원에서의 가장 중요한 교육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인생의 처음 7년 동안에 여러분이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소리내는 도덕적 개념의 단어가 아니라 여러분의 행동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루돌프 슈타이너, 어린이 왕국, 한국슈타이너교육협회 학교분과 공부모임 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모방과 심심함의 가치

베르너 쿠푸스(Werner Kuhfuss) / 변종인 옮김  

쿠푸스는 1931년 독일 태생으로, 1956년부터 약 30년간 국공립 학교 및 발도르프 학교에서 특수교육 교사로 일했습니다. 놀이 및 동작 연구 모임 ‘칼리아스 슐레’를 설립하여 ‘치유적으로 작용하는 놀이’를 연구하면서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본 발도르프 유아교육」,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 방침」, 「아이는 어떠한 존재인가」 같은 책을 썼습니다. 

옮긴이 변종인은 스위스의 바젤음악대학에서 성악과 고음악을 전공하고 스위스 도르낙의 루돌프슈타이너사범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스위스의 도르낙음악학교 교사와 인지학연구센터 연구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위스 바젤의 중증 장애인 학교 로젠보겐에서 장애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여기 제시하는 글들은 그동안 유치원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처음에는 놀이 속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연구하는 모임인 칼리아스 슐레(Kallias Schule)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눠 읽는 자료로 시작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과 분량이 늘어나 책으로 엮게 되었다. 


이 글은 현존하는 발도르프 유아교육과 담판을 벌이는 글이기도 하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바꿀 여지를 거의 두지 않고 지나치게 서둘러 정형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무엇보다 첫 7주년 주기의 아이들 교육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 시각은 교육을 정형화시킨다거나 고정된 일과표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 전반에 대한 인지학적인 이해를 아이들에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태아발달의 생물유전자적 기본 법칙에 따라 태아의 개체발생은 전 계통발생을 짧은 시간 안에 반복한다. 문화유전적 반복 또는 문화창조적 반복도 아이들이 갖고 태어나는 기본 능력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이 속에서 인류의 문화발달과정을 여명기부터 더듬듯이 반복하여 현재의 삶과 연결지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발달과정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서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속에 자연과학이 이미 씨앗처럼 들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마르틴 바겐샤인(Martin Wagenschein)의 저서 『물리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아이들』(Kinder auf dem Wege zur Phisik)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연장시키면 물리뿐 아니라 화학, 수학, 생물, 건축 등에 대한 서술도 가능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모든 문화적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사실 인지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좁은 교육적 의도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으로 우리 눈이 열리면 아이들의 놀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끝없이 풍부하고 흥미로운 새로운 연구 분야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방향으로 넓고도 깊은 연구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난다. 한 가지는 미리 정해진 하루 일과를 채우기 위해 모든 힘을 소진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힘이 솟아나고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아이들의 온전한 발달을 저해하는 조기 인지교육의 위협을, 삶과 동떨어지게 하고 의지를 깎아내리는 지능발달이 아니라 삶과 연결짓고 의지를 굳세게 하는 창조적인 지능발달로 이겨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들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들을 모은 것이다. 어떤 글은 불완전한 스케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스케치를 아이들의 실제 삶에서 재확인하는 일은 미래의 몫이다. 새로 탄생하는 아이들의 언제나 변화무쌍한 흐름처럼,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우리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자유를 향한 교육’ 첫 7년 주기의 기본 방침

아이들의 모방을 염두에 둔 교육은, 어른들의 모범을 통해 세상의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의 의지를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신뢰를 북돋우는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자유의 철학』에서 말한 ‘자유를 향한 교육’이란 모든 상황 아래에서 아이의 의지를 자유롭게 두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우리가 마주하는 아이들 속에 여러 모습으로 육화(肉化, incarnation)하는 개별 인격체(individuality)가 존재하고, 그 인격체가 저마다 자기 발달에 대한 고유 의지를 스스로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옛날부터 아동교육은 아이가 속해 있는 환경의 문화적 발달 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의식갈등,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특히 예수회의 원리) 그리고 한참 뒤 영국 청교도주의를 통해 비로소 아이들의 습관을 특정 세계관 속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려는 욕구가 일어났다. 이러한 특정 습관을 각인시키려는 전통과 교육을 연결짓는 것은 루돌프 슈타이너 정신과학의 가치를 떨어뜰이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발달해나가는 사람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손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문화를 꾸리고 또 그 문화를 발달시켜 나가는 연결망 속에서 교육이 일어나야 한다. 문화적 연결망 속에 아이들을 자유롭게 둘 수 있는 것이 미래 아동교육의 새로운 청사진이다. 교육은 직접적인 문화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성과여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럴 때 유치원이라는 분리된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작업장, 화실, 채소밭, 농가 주변 또는 그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모방력을 충분하고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교육이란 어른들의 진정한 문화작업 가운데 들어 있는 원초적 현상이다. 교육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지 머리를 짜서 지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작업을 쇄신하려는 노력이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의지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일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슈투트가르트 교사협의회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음악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아동교육의 기본요소는 리듬, 음악적 작업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연마다. 또 열심히 일하는 어른들과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함께 울리는 노동요를 연습하는 것이다. 미래의 아동교육은 이러한 요소를 통해 발달해갈 것이다. 오직 울림과 의지가 있는 환경만이 한편으로는 그것에 감응하는 아이들의 탐색적 놀이를 고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인격체들이 육화 이전에 세웠던 결심들을 이끌어내는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기하로 설명해보자. 아이의 고유의지를 어른의 의지대로 유도하려는 아동교육이 원의 중심을 향한 것이라면, 이제 아동교육은 이 중심에서 벗어나 원의 접선을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원둘레에서는 공동 문화작업이 일구어내는 울림이 일어나고, 그 울림의 중심에는 능동적인 자유 공간이 형성된다. 이 자유 공간 속에서 ‘자유의 씨앗’인 아이의 개별 인격체가 필요한 경우에만, 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교정을 받게 된다. 이 교정도 모방하는 놀이의 관계 속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일의 내용만 모방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문화를 일구어내는 어른들의 진지함을 아이들은 반드시 모방한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은 어른들의 존재 자체에서 일어나지 교육적 의도나 희망, 교육적 이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도덕 형성은 자유롭게 일어난다. 개별 인격체는 자신의 도덕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때 모범이 되는 것은 손으로 이루어내는 어른들의 의미 있는 행위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어른들의 내면 자세다. 이렇게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 밑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작업 동료이자 감독관인 셈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모방하는가?

현존하는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하나의 ‘신념’ 위에 형성된, 실제적인 생각 앞에서는 버텨낼 수 없는 구조물이다. 전형적인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이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잘 꾸며진 지금의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에서 거주하거나 일하고 싶어 하는 어른을 생각할 수 있을까? 화가, 조각가, 원예사, 제과사로 일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이 진짜 일을 한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꾸릴까? 그리고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를 떠올려보길 바란다.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에서 제대로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는 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일까?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유익한’ 공간에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일부러 작게 만들어 안으로 움츠려들어야 한다. 화가, 조각가, 원예사, 제과사 같은 사람들이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로 일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금속을 두드려 예술품을 만들어 내고, 식물을 가꾸고, 빵을 굽고, 그림을 그리고, 치즈와 소시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사람들의 창조력은 작품 대신 교육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만일 이런 활동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환경에서 제공된다면 모든 아이들이 기꺼이 경험하고 모방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유치원 같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창조력을 발휘하기보다 교육학을 만들어 낸다. 아이들에게 필요할 거라고 사전에 생각한 것을 아이들이 따라하도록 억지로 아이들의 의지를 유도한다는 말이다. 

이때 아이들은 무엇을 모방하게 될까? 교사가 원하는 것을 아이들이 하도록 유도하는 마음 자세를 모방한다. 교사는 빵을 구울 때도 교육적 의도 아래 굽고, 인형을 만들면 아이들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만들고, 그림도 교육적 동기 아래 그린다.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자기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는 창조적 인간이 아닌 듯 보인다. 자신들이 봉사, 헌신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을 따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믿음’에 복종하는 어른의 내면을 모방한다.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부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단순한 문제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은 먼저 손을 쓰는 어떤 일을 배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조각을 배웠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작업실을 꾸릴 것이고 그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사람의 관심은 흙, 돌, 연장, 작품이다. 이들 예술가, 원예사, 제과사, 금속공예가 옆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삶의 현장에 홀로 섰을 때, 아이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일방적 ‘믿음’에 따라 짜여진 발도르프 유아교육을 받았을 때보다 더 역동적인 의지를 갖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작업의 목적에 맞고 편리하고 모범적인 다용도 작업실이 인지학에 바탕을 둔 유치원의 모델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에게 좋을 것이다. 실제 작업이 가능한 공간에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진정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일하는 사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른의 주의력은 자신이 일하는 조건과 제품에 쏠린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의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타고난 장인들이기 때문이다. 태아 시기에 하늘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신체를 형성할 때 포괄적 기본 수업을 이미 마쳤다. 이제 그때의 수업을 이 땅의 실제 삶에서 손으로 하는 작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유아교육은 어떤 이론을 가졌든 대부분 아이들을 어리석고 모자라다고 판단하고, 교육학적으로 지어낸 그 어리석음과 모자람에서 인위적으로 아이들을 벗어나게 해주려 한다. 진짜 어리석음은 아이나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방식에 대한 불분명한 사고에 있다. 아이들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생각 뒤에는 인지학이 있기 오래 전에 세상에 들어온 사고의 틀이 숨어 있다. 그 속에는 정신과학으로 자유로운 시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비자율적으로 만들고, 그 영혼을 소유하여 멀리서도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인지학에 바탕을 둔 다용도 작업실이 유치원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돌을 쪼고 쇠를 두들기고 나무를 깎고 빵이나 과자를 구울 수 있는 공간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만들어 봄직 하지 않는가? 일본에서 만드는 집은 슈투트가르트나 베네수엘라에서 만드는 집과 확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물론 제 1차 괴테아눔이나 말쉬(Malsch)가 만든 모델하우스나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위스 도르낙에서 작업할 때 사용한 목공실과 닮은 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일하는 옆에서 노는 아이들을 한번 상상해보라! 슈타이너가 아이들 주변에서 일하기 위해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심심함의 가치

요즈음 유치원에서는 잘 놀지 못하고 때로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심심해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마음씨 좋은 유치원 교사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아이들에게 관심거리가 될 만한 것을 이것저것 찾아서 아이에게 권한다. 악의 없고 당연하게 보이는 행동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회주의’라 부를 만한 요소가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겉보기에 비활동적인 어린 아이들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활동으로 전환시키려는 사람은 그런 행동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의 모방을 고무시키는 어른들의 모범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동기유발이 일어나는 상황은 아주 섬세해서 우리가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친절하긴 하지만 약간은 가식과 강요가 들어 있는 방법으로 아이의 내면에 개입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새싹을 삶아서 채소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는 맛이 있을지 몰라도 자라나야 할 식물 자체는 사라진다. 

아이가 겉보기에 심심해하는 모습을 허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은 유치원 교사 스스로 아이들이 심심해하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겉보기에 심심해 보이는 것은 어른의 문제이지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롭지 못한 정신, 자유를 일으키는 정신과 자유를 구속하는 정신으로 갈라진다. 어른에게 심심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이들 모습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심심함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아이들이 실제로 느끼는 심심함과 두 번째는 바깥에서 그렇게 보이는 심심함이다. 두 종류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두 번째 심심함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내면은 사실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차릴 뿐 아니라, 내면에서는 열심히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거리의 청소부나 들판의 농부, 대장장이(아직도 있다면)가 일하는 모습을 넋 나간 듯이 쳐다보는 아이의 내면에서는 아주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다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그냥 쳐다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깊숙이 관여하며 함께 경험한다. 이런 아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일 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한층 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로 바뀐다. 


실제로 심심함을 느끼는 첫 번째 아이들은 불만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다. 두 번째 아이들은 만족하는 아이들인 반면에 불만을 느끼는 이 아이들의 내면은 분열 상태에 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이런 아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려는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런 아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을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기회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활동은 미덕이고 비활동은 악덕이라는 옛 사고의 틀 속에 아이들을 규정짓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구교와 신교의 견해이며 청교도의 견해이다. 첫 7년 주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근원적으로 놓여 있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회적인 월권 행위이다. 이제 처음으로 만들어지려는 자유로운 의지 표출을 방해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끊임없이 활동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활동은 모든 활동의 원천인 자신의 자아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자아는 아이들 주변에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보여주는 어른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하는 활동에 온 힘을 쏟아 그 활동이 참되고 깊이가 있고 열정에 넘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자신의 자아 본질에서 출발해, 참되고 깊이 있고 열정이 담긴 어른의 활동을 알아차릴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 저마다 개별 인격체의 기준에 따라 모방을 자율적 놀이로, 자율적 결단력으로,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꾸려나가는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지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은 오늘날 아이들이 탄생 전에 담았던 것을 재인식할 수 없는 문명사회에 태어난다. 아이의 부모도, 주변 공간이나 색깔들, 움직임, 언어, 냄새, 소음, 울리는 소리 어느 것 하나도 아이의 탄생 전 본질이 온전하게 발달할 수 있는 것을 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의 인격체(personality)는 움츠려 들고 자신의 몸에서 멀리 떠나 머물게 된다. 아이의 몸은 자신의 자아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발달한다. 심한 경우에는 각양각색의 친절한 심리학자나 치료사들이 등장하여 예리한 관찰로 아이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아이에게 유익할 만한 것을 정한다. 

세상이 다방면에 걸쳐 문화적 위기와 마주하게 되면 이에 비례해 심리학자와 치료사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의 절반이 심리학자나 치료사가 되어도 이 위기에 대처할 어떤 방안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전체 인류가 심리학자나 치료사가 되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위기의 징후라고 보아야 한다. 심리학자나 치료사를 통헤 문화 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 신성을 추구하는 노력, 그리고 그런 노력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통해서 비로소 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실제로 심심함을 느끼는 아이는 세상이 현재 놓여 있는 위기를 아는 것이다. 진정한 치유사는 아이의 높은 존재 자체이다. 아이 안에 내재하는 이 치유사는 주변에서 적당한 사람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로서 현재의 위기를 인식하고 스스로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활로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자신을 도울 것이다. 주변에서 이런 활동이 일어난다면 아이의 높은 자아는 미래를 믿고 미래를 위해-어떤 교육적 의도가 없이-실천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것이며 그런 어른들에게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알맞은 발달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때때로 먼 훗날 아이 자신이 인생 한가운데 섰을 때 비로소 그 길이 나타날 때도 있으므로 현재 우리의 눈에는 그 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발도르프 도그마의 하나인 ‘정리정돈’에 대해 말해야 될 것 같다. 유치원 교사인 한 어머니가 정리정돈 시간만 되면 아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모든 의욕이 마비되는 것 같아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할 것 같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루일과표가 명령하는 정리’를 하기 싫어하거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런 증세를 보면, 정리정돈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 아이의 몸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파괴행위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신이 이런 도그마를 만들었을까? 

소시민적인 정리정돈이 아니라 장인들이나 예술가들이 하는 수준에서, 그런 정리정돈이 실제 작업에 필요해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 가볍게 마치 춤추는 것처럼 움직여야 아이들도 모방하고 함께 돕는다. 정리정돈을 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또 아이들을 부추기지 말아야 하고 강요해서는 더욱 안 된다. 특히 좋지 않은 것은 정리정돈을 하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있고 없고를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정리정돈을 하는 것은 좋고, 않는 것은 나쁘다’, 이런 정의와 함께 유치원 교사는 이전에 누군가가 지어낸 카테고리 속으로 자신을 구속시킨다. 보통 장인이나 예술가들은 내일 계속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로 정리정돈을 한다. 자유인으로서 활동적인 사람으로서 이런 정도가 작업장, 아틀리에, 농장의 청결성을 유지하는 척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이도 이 정도 수준에서 자발적인 의지로 유치원 교사와 함께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세기 초에 볼 수 있었던 소시민적인 거실의 청결성은 이제 지난 세기의 일로 남겨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목표는 아이 하나하나 속에 탄생 전에 심어진 진실한 우주 질서가 바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소시민적인 정리정돈은 따분한 일이다. 그러나 내면이 정돈된 사람은 쾌활하고 창조적인 사람이다.



인지학(Anthroposophie)은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제시한, 일반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정신영역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이란 말은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다가가면 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이 직접 알아낸 정신세계에 관한 지식을 실제 삶에 적용하여 의학, 농업, 교육, 치유교육, 건축,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교육 분야의 경우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에서 처음으로 학교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발도르프 또는 슈타이너라는 이름을 내건 12년제 통합학교가 950여 개, 유치원이 1500여 개로 늘었다. 우리나라에도 약 10년 전부터 소개되기 시작해 발도르프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교사양성기관도 몇 군데 생겨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옮긴이 또한 1998년 스위스 도르낙에 있는 슈타이너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발도르프 유아교사 양성기관 가운데 하나인 인지학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발도르프 유아교육도 학교교육처럼 루돌프 슈타이너의 직접적인 지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믿고 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쿠푸스의 저서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 방침』 을 읽고 ‘여기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구나!’ 하는 의혹이 일어났고 몇 해 동안 쿠푸스의 지적을 나름대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의혹은 쿠푸스의 사고를 더욱 아끼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우리나라에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글들은 쿠푸스가 발도르프 유치원에서의 경험에 기초해 아이들의 놀이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정신과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본 발도르프 유아교육』(2005),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방침』(2006)-에서 뽑은 것들이다. 쿠푸스의 글은 우선 서구, 특히 인지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전제로 한 글이기 때문에 한국 독자들에게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우리나라에도 발도르프 유아교육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길 바란다. 

한 가지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이 글 때문에 루돌프 슈타이너와 인지학을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본인이 직접 유치원은 만들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남긴 글이나 강연을 참고해 임의로 만든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루돌프 슈타이너와 관계는 있지만 독자적인 또 하나의 다른 교육체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옮긴이 변종인

- 민들레 통권 53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교육에 관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과 지금의 한국 실정을 비교해 보자 현재 일반 제도교육이 영성을 가다듬는 교육이 아니라 인성까지 말살시키는 교육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7년 주기로 큰 변화가 오는 인간 성장 가운데 첫 시기에 건강한 몸을 갖추게 하여 꿋꿋한 의지를 심어주고 두번째 시기에는 여러 예술 활동으로 풍부한 감성을 길러주고, 세 번째 시기에 생각을 깊이 이끌어주어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제각기 따로 떨어져 모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정서와 상관없이 지혜로 가득찬 말이다.

양심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리지만 남을 속이고 해치는 행동을 한다든지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든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든지, 심한 우울증에 빠져 만사가 귀찮다든지 하는 모습들은 의지와 감정과 생각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실정을 보자. 첫째 시기에 부모나 아이 교육을 맡고 있는 사람 들이 본을 보이는 대신에 무조건 금지시켜 아이들의 의지를 꺾고,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이한테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 든다든지 또는 한정되어 있는 생명력을 일찍부터 두뇌로 돌려 몸이 약한 아이로 만든다든지, 학교에 들어가면 이제 너도 컸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한테 무리하게 판단을 미루어 우유부단한 아이가 되도록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리고 편파적인 지식 교육으로 감정을 거칠게 만들고 청소년이 되어 이제 스스로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때는 부모나 교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토록 강요함으로써 자립 기회를 빼앗는다.


지난날처럼 순종이 으뜸가는 미덕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교육으로 우유부단하고 의지와 자아의식이 악하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지배층에서 보면 백성이 우둔할수록 자기들 마음대로 백성을 부릴 수 있으니 그런 교육이 옳은 교육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교육을 밀고 나가는 것은 권력이나 돈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이 노예처럼 얽매여도 상관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민들레 7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우리는 아직 슈타이너를 모른다

변종인



스위스 바젤에 살고 계신 변종인님은 음악을 전공하고 바젤에 있는 슈타이너 사범대학에서 음악교사 양성과정을 마쳤습니다. 큰 딸(18세)은 지금 발도로프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민들레에서 '슈타이너 교육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주제로 집중조명을 하겠다는 데에 얼른 수긍이 가지 않았다. 주제가 단순히 '슈타이너 교육은 어떤 교육인가?'라면 금방 납득이 갔겠지만….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슈타이너 교육이 어떤 교육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이 교육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니 없니 하고 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민들레 5호에 김희동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슈타이너는 역시 참고자료일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김희동 선생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아무리 저를 설득하려 해도 끝내 그에게 동의할 수 없는 아쉬운 점, 그것은 그의 철학이나 교육내용에서 이 땅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에게서 배울 수는 있으나 그를 따를 수는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라는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김희동 선생더러 자기를 따르라고 했을까?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의 말을 눈먼 장님처럼 무조건 따르지 말고 옳은지 그른지 잘 살펴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땅의 정서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도 우리의 정서에 맞아야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직도 누군가 우리를 이끌어야 하나? 언제까지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꼭 누군가를 따라야 하나? 각 개인이 왜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못하나? 에디슨이나 제임슨 와트나 스티븐슨은 이 땅의 정서를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들이 찾아낸 원리를 이용해 우리도 배니 자동차 같은 온갖 기계들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내가 어떤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놓여 있지 동의 여부가 먼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슈타이너 교육의 핵심에 다가서기란 그리 쉽지 않다. 더구나 74년 전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말이나 글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서양말로 포장이 되어 있어 번역이나 통역이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통역이나 번역이 어설플 땐 그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가 더욱 힘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고 금방 단정을 짓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피타고라스의 직각 삼각형에 대한 정의나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갖고 이 땅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니 없니 다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도 이런 차원에서, 아주 객관적인 위치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말 속에 진실이 들어있는지, 내가 바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모르더라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 현상을 이해하면 그만큼 우리의 시야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에 태어났다 해서 꼭 동양 전통의식만으로 살아야 하고 동양 미술만 그리고 동양 음악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을, 온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은 이미 옛날 같지 않은데 의식은 옛의식을 고집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옛날에는 어느 지역에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임금이 죽어라고 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죽어야 했다. 인간의 존엄성이니 인권이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전통 속에 진리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이 우리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바도 아니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으로 우리의 전통을 한번 비추어보자. 우리의 전래 이야기 가운데 ꡐ해와 달이 된 오누이ꡑ 란 이야기가 있다. 이오덕 선생은 이 이야기를 폭군과 가난한 백성의 모습으로 풀이를 하는데 필자는 다르게 본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의 저서 비밀학 개요(Die Geheim-wissensonaft im umriss, 1910)에서 자신의 영안으로 지구의 진화 과정을 밝혀 세상에 알렸다. 여기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 지구는 현재 모습을 띄기 전에 이미 세 번이나 그 모습을 바꾸었다. 마치 사람이 죽으면 몸을 벗고 저승으로 갔다가 다음 생에서 새 몸을 입듯이. 지구의 첫 모습은 오직 열기운으로 시작하는데, 몸을 새로 입을 때마다 공기와 빛, 물과 소리, 땅과 생명이 차례로 보태어졌다. 지구가 네 번째로 새 몸을 입을 때 지난 과정들이 되풀이되면서 물의 요소가 들어오자 해가 지구에서 빛과 열을 갖고 빠져나가고 땅의 요소가 들어와 점점 굳어지자 지구가 더 이상 굳지 않도록 달이 그 굳어지는 기운을 갖고 지구를 빠져나갔다. 물론 여러 신들의 작용과 물질계의 수많은 변화 과정을 몇 문장으로 다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호랑이를 굳는 기운으로 치면 우리 옛이야기가 바로 억만년 전의 일을 담고 있지 않나?


보기를 하나 더 들어보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람이 죽어서 몸을 벗고 저승으로 간 다음 새 몸을 입기까지 거치는 여러 과정들을 잘 밝혀주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정신-영혼은 약 사흘간 지난 생을 돌이켜 본다. 이때는 객관적 위치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한테 고통이나 상처를 입혔으면 자신도 그만큼 아픔을 겪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었던 좋은 일에도 상대방이 느꼈던 기쁨을 같이 갖는다. 그리고 게을러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일도 아픔으로 다가선다.


이렇게 자신의 전생을 돌이켜 본 다음 사람의 정신-영혼은 점점 퍼져서 달까지 넓혀지는데 이때 시간은 그 사람이 살았던 나이의 삼분의 일 정도가 된다. 이때는 사람이 몸을 갖고 있었을 때 품었던, 아직 채 해결하지 못했던 갖가지 욕망을 떨구어내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지난 다음, 사람의 정신-영혼은 점점 퍼져서 태양계를 거쳐 나중에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 신들과 함께 다음 생을 준비한다. 저승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죽음에 견줄 만한 것은 고립이다. 어떤 사람이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고 양심을 속이는 삶을 살았다고 하자. 이런 사람은 주변에 다른 정신-영혼 존재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다가가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 고립이 저승에선 아주 큰 고통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실컷 즐기다가 가야지 영성을 닦긴 뭘 닦아, 죽으면 다 그만인데 하고 물질향락에만 집착하면 이는 이 세상의 삶이 바로 저 세상의 삶도 결정하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정신-영혼한테도 도움을 주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그 사람과 이승에서 직접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영성에 관한 바른 글을 읽어 주거나 생각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혼백을 위해 적어도 49일 동안은 날마다 천도제를 올렸다. 지금은 미신이라고 많이 없애버린 조상한테 올렸던 제사도 이런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한테는 이런 조상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도 거의 막혀있는 실정 아닌가? 우리 조상들은 어릴 때 충분히 기어다닌 아이는 튼튼한 위장을 갖는다는 것을 알았다. 슈타이너 교육에서도,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행기에다 태우고 이리저리 다니게 하면 왜 평생을 심신이 허약한 상태로 보내게 되는지, 또 그밖에 참으로 많은 귀중한 진리를 전해준다.


교육에 관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과 지금의 한국 실정을 비교해 보자. 현재 일반 제도교육이 영성을 가다듬는 교육이 아니라 인성까지 말살시키는 교육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매주 세 명 꼴로 청소년이 자살하고 있다.(이는 물론 학교 교육에만 결부되어 있지 않겠지만.) 또 이렇게 민들레가 용감하게 들고 나왔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런 사정을 쉽게 짐작케 한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7년 주기로 큰 변화가 오는 인간 성장 가운데 첫 시기에 건강한 몸을 갖추게 하여 꿋꿋한 의지를 심어주고, 두 번째 시기에는 여러 예술 활동으로 풍부한 감성을 길러주고, 세 번째 시기에 생각을 깊이 이끌어주어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제각기 따로 떨어져 모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정서와 상관없이 지혜로 가득찬 말이다. 양심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리지만 남을 속이고 해치는 행동을 한다든지,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든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든지, 심한 우울증에 빠져 만사가 귀찮다든지 하는 모습들은 의지와 감정과 생각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실정을 보자. 첫째 시기에 부모나 아이 교육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대신에 무조건 금지시켜 아이들의 의지를 꺾고,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이한테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 든다든지 또는 한정되어 있는 생명력을 일찍부터 두뇌로 돌려 몸이 약한 아이로 만든다든지, 학교에 들어가면 이제 너도 컸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한테 무리하게 판단을 미루어 우유부단한 아이가 되도록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리고 편파적인 지식 교육으로 감정을 거칠게 만들고 청소년이 되어 이제 스스로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때는 부모나 교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토록 강요함으로써 자립 기회를 빼앗는다. 지난날처럼 순종이 으뜸가는 미덕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교육으로 우유부단하고 의지와 자아의식이 약하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지배층에서 보면 백성이 우둔할수록 자기들 마음대로 백성을 부릴 수 있으니 그런 교육이 옳은 교육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교육을 밀고 나가는 것은 권력이나 돈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이 노예처럼 얽매여도 상관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스위스에 있는 12년제 통합학교인 슈타이너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10학년으로 올라가면 그날부터 교사들은 학생들한테 말을 높여준다. 물론 체벌은 한참 옛날 일이다. 매질이나 욕설로 교육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미운 아이한테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아이한테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은 전형적인 전제군주 시대의 잔재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나 교사의 소유물이 아니다. 매질이나 욕설로 아이들한테 죄짓는 일은 이제 마땅히 그만두어야 할 일이다. 우리 조상들도 매질하는 엄교를 가장 저질 교육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사실 우리는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다. 단순히 한 철학자나 사회개혁가나 교육자로 생각하는 정도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루어 낸 일을 보면 다만 그런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나 어마어마하다. 어떤 사람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괴테의 영향을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한다. (실제 우리는 괴테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자유정신과학 대학과 세계 인지학 협회 본부가 들어서 있는 곳도 괴테아눔(Goethe-anum, 괴테관)이라 부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열린 영안으로 괴테의 정신 높이를 가장 잘 알아줄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루돌프 슈타이너였다.


세계 인지학 협회에 대해 한마디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한 강연회에서, 일이 번거롭지만 않다면 인지학이니 인지학 협회니 하는 명칭을 매주 다른 명칭으로 바꾸어 쓰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ILKLEY, 영국, 1932년 8월 17일). 이름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요즈음 그런 이름을 갖고 상표 등록을 한다, 특허를 낸다, 네가 쓰면 법에 저촉이 되니 안된다 어쩌구 저쩌구 야단들이다. 세계 인지학 협회 회원은 협회를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될 수 있다.(영문 정관 가운데 네 번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The Anthroposophical Society is in no sense a secret society, but is entirly public. Anyone can become a member, without regard to conviction, who considers as justified the existence of an institution such as the Goetheanum in Dornach in its capacity as a school of Spiritual Science. The Anthroposphical Society rejects any kind of sectarian activity.)


누구라도 세계 인지학 협회에 들고 싶으면 필자한테 연락하길 바란다. 신청서가 외국말로 되어 있어 문제지 그밖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지학 협회 회원이라고 해서 또는 슈타이너 교사양성과정을 수료했다 해서 인지학을 제대로 알고 있다거나 제대로 알린다거나 또는 올바른 교육을 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사람이 훨씬 더 올바른 교육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단체에서든, 최소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름을 빌리는 단체에서만이라도, 그 단체에 들어 있는 개인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해서 그 의견을 살펴보기도 전에 단체의 이름으로 억누른다든지 대의명분을 내세워 개인을 묵살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개인 없는 단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 없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듯이. 개인은 단체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로 알고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은 물론 아주 중요하다고 필자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것만 지나치게 고집하다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것네것할 것 없이 모조리 잃을지 모른다. 자연을 다시 살리자는 이상실천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만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웃의 불행을 모른 척하고 자연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면 자의든 타의든 자연을 잃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둘까? 거센 물살은 뒤에서 아무리 잡아 당겨도 되돌릴 수 없다. 한 걸음 앞서서 물살의 흐름을 잡아 틀면 몰라도.


마지막으로 한길사에서 펴낸 크리스토퍼 린덴베르크의 슈타이너 전기에 대해 한마디하자. 본문에는 오역이 수없이 눈에 띈다. 앞부분에 있는 몇 곳만 살펴보자.


11쪽

난 이 과외수업을 퍽 고맙게 생각했다. 이미 배운 수업자료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나는 학교 수업시간에 항상 긴장해 있었다. 내게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인생설계에서 어떻게 수용되는 것인지를 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인지도로 얻은 게 많았다. 나는 수업시간에 거의 꿈을 꾸듯이 있었다. 그래서 수업 때 다루었던 내용을 전해주기 위해선(수업이 끝난 뒤, 필자주) 정신을 차려 다시 그 내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꿈꾸듯 받아들인 수업내용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쪽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매를 맞았다. 나는 그때부터 복사일에 아주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되어 손을 떼기로 했다. 그리고는 매를 맞은 사실을 숨긴 채 자진해서 그 일을 그만 둔 것처럼 행동했다.

->우린 모두 학교에서 매를 맞게 되었다. 나는 매질 그 자체를 아주 싫어했고 그때 어떻게 그 매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알았다. 그 뒤에도 늘 매를 피해 갈 수 있었기에 한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


14쪽

서로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생각과 질문들 에 사로잡혔고,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매료되었다. 영혼적으로 순수하고 내면적으로만 바라보는 교육형태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느껴지지 않아도 나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다. 

->평행선이 도대체 어디서 교차하는가 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고 피타고라스 정의에 매료되었다. 외부감각을 빌리지 않고도 오로지 마음속으로 여러 기하형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순수 내면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15 쪽

슈타이너는 독일어 선생이 이 기본서의 전문 용어에 불만을 품고 집필한 논문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슈타이너는 선생이 얄밉게 느낄 정도로 적합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글을 지었다.(*독일어 선생이 논문을 집필하지 않았음. 슈타이너는 논문을 훔쳐보지 않았음.)


곳곳에 이런 오역이 눈에 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 책은 당장 판매를 중지하고 재번역에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물리나 화학을 모르는 사람이 독일말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독일 말로 된 물리나 화학서적을 번역할 수 있을까? 아직 한국에서는 슈타이너가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 격월간 민들레에 실린 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