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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북한 고위급 회담에 큰 진전

○ 북미 대화 합의를 위한 김정은 위원장의 과감한 결단 등이 과제

- 북한과의 고위급 회담 이후 72시간 동안 협상에 큰 진전이 이루어 졌다지만 아직 해야 할 많은 일이 남아있는 상태하고 평가. 향후 북미 합의를 위해 김정은 위원장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언급

- 트럼프 대통령, 뉴욕을 방문 중인 북한 대표단이 워싱턴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해주기를 기대

- 친서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매우 긍정적일 것으로 예상. 6월 12일 의미 있는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를 원하지만, 이후에도 추가 회담이 필요할 가능성


[해외시각]

북미 고위급 회담, 실무적으로 긍정적 평가 

○ 북한의 핵 포기 공약 검증이 관건

- 미국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핵무기 포기에 대한 약속 이행 검증(블룸버그)

- 폼페이오 국무장관 발언을 고려할 때, 북한은 여전히 트럼프 정부의 목표인 북미 정상회담 이전 비핵화 합의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추정(Harry Kazianis, Defense Studies at the Center for the National Interest, CNN)

-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성사되어도 북한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 필요. 아직 북한이 핵무기 해체에 진지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는 증거는 미흡(CNN)

- 북한이 주장하는 정권보장 및 체제안정은 단순한 핵무기 폐지 등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고려할 때, 미국과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지는 불투명 (WSJ)

1. 차이나불링의 역사와 사례

 중국은 자국의 핵심 이익이 위협받게 되면 주변국가에 경제적 보복을 가하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

- 수 천년간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던 중국은 뿌리 깊은 중화(中華)사상을 내재하고 있음. 중화사상의 핵심은 ‘중국, 또는 중국인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인데, 주변 타 국가에 대한 민족주의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함. 중화사상의 토대 위에서 중국은 오랜 시간 동안 주변국들에 부모 혹은 형제의 도리를 요구해 왔고, 이를 거부하는 국가는 무력으로 굴복시켰음. 주변국과 정치∙외교적 마찰이 발생할 때마다 경제적으로 보복하는 중국의 보이콧 외교 행태를 ‘차이나불링(China Bullying)’이라 통칭함

- 근대(近代) 들어서도 상하이 지주들이 난징조약에 항의하는 의미로 외국인에 대한 토지임대를 단체로 거부한 바 있으며(1843년),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이 청프전쟁의 상대국인 프랑스 국적의 선박 수리를 거부하며 집단 파업하기도 했음(1884년). 중국 공산당은 자국 내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거나 무마하는 수단으로 종종 차이나불링을 활용해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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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중국의 경제·외교적 위상이 급상승하면서 차이나불링의 빈도와 강도는 점점 강해지는 추세임

-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도 빈번히 차이나불링의 대상이 되고 있음. 차이나불링의 빌미는 중국 내 소수민족(달라이 라마), 반체제 인사(류샤오보) 문제부터 접경 지역의 영토 분쟁(댜오위다오)이나 군사적 갈등(사드)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함. 정부의 비공식적인 지시를 통한 관광객(유커) 제한, 상대국 제품에 대한 통관∙수입 제한이나 불매 운동, 상대 국가에 대한 원자재 수출 금지 등과 같이 반(反)시장경제적 수단이 많이 활용됨

- 티베트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달라이 라마와 관련하여 심심찮게 차이나불링이 발생하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생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안드레 푸스 수석연구원 등은 2010년 논문에서 다른 국가의 지도자가 달라이 라마를 접견했을 때 해당국과 중국 간 교역이 2년간 최고 8.1% 위축된다는 실증 결과를 발표. 푸스는 “중국의 경제적 징벌은 국내 정권 안정이 주는 정치적 이득이 경제교류 위축에 따른 손실을 넘을 경우에 만연한다”고 분석


<최근의 주요 차이나불링 사례>

국가

연도

제재 사유

주요 제재 수단

프랑스

2008

달라이 라마 접견

에어버스 150대 구매계약 취소 위협

일본

2010

2012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분쟁

희토류 수출 중단, 관광 제한, 

자동차 등 일본산 불매 운동

노르웨이

2010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여

연어 수입 금지, 비자면제 취소

영국

2012

달라이 라마 접견

80억 파운드 투자계획 철회 위협

필리핀

2012

남중국해 영토분쟁

관광 제한, 식품검역 강화

베트남

2014

남중국해 영토분쟁

베트남 기업 사업입찰 금지, 

농산물 통관 강화, 관광 제한

대만

2016

차이잉원 총통의 대중 강경책

관광 제한

몽골

2016

달라이 라마 초청

국경통과 차량에 통관세 신설

한국

2016

사드 배치

관광 제한, 

사드부지를 제공한 한국기업(롯데마트) 영업정지 등



2. 국가별 대응 유형

 (백기투항형) 차이나불링으로 피해를 보게 된 자국 기업들의 로비 및 여론 압박에 밀려 중국의 요구를 빠르게 수용하는 유형

- 2008년 12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고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 시위대가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자를 습격. 이에 분노한 중국인들이 까르푸 등에 대한 불매 운동 돌입, 중국 정부는 150대 규모의 에어버스 구매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위협. 프랑스 정부는 이듬해인 2009년에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

- 2012년 5월, 영국 캐머런 총리는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 접견. 중국은 크게 반발하며 고속철도, 원자력 발전 등에 관한 80억 파운드 규모의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언급. 영국은 중국의 제재 초기에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지만, 이듬해인 2013년 리커창 총리와 접견 후 티베트가 중국 영토라는 공식 성명 발표


 (읍소무마형) 차이나불링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함과 동시에 중국 측에 불가피한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는 유형

- 2016년 11월, 몽골은 2006년 이후 10년 만에 달라이 라마 초대. 중국은 몽골 국경 통과 차량에 통관세 부과, 전기공급 중단, 차관 지급 연기 등 다양한 경제적 압박을 가함. 티베트 불교의 한 분파인 몽골 내 불교 신자들이 달라이 라마를 추앙하고 있어 중국의 압박에 전적으로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 몽골 정부의 딜레마. 그해 12월 몽골 외무부는 중국에 사과를 표명하고, 현 정부 집권기간인 2020년까지는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선에서 마무리

- 2016년 7월, 한국은 주한미군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공식 발표. 중국은 한한령(限韓令, 한류금지령)과 더불어 한국행 관광상품 전면 금지, 사드부지를 제공한 롯데(롯데마트) 영업금지, 한국산 배터리 탑재 차량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제외 등으로 보복. 한국 정부는 민관채널을 총동원하여 한국의 안보 상황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3不정책(사드 추가 배치 배제, 미국 주도 MD체계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을 구두로 밝히면서 중국 측과의 갈등 봉합


 (정면대응형) 차이나불링에 굴복하지 않고 중국과 정면 대결을 통해 자국의 원칙을 고수하는 유형

- 2012년 4월, 필리핀 군함이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남중국해 스카버러섬(중국명 황옌다오)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단속. 중국은 초계함을 파견하여 군사적으로 대치, 이후 중국인의 필리핀 관광을 중단시키고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 금지. 필리핀은 오히려 미국과 합동군사 훈련을 시행하고, 2013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국제중재재판소에 회부하여 승소

- 2014년 5월, 중국이 베트남과 분쟁 중인 시사(파라셀) 군도에서 석유시추 공사를 강행하면서 양국 함정이 2차례 충돌하는 등 첨예하게 대립. 중국 함정은 베트남 순찰함을 향해 물 대포를 발사했으며, 양측 배가 수 차례 충돌하면서 인명피해 발생. 베트남은 해군 함정과 경비대 초계함 등 29척을 급파했으며, 인명피해 발생 후에는 대규모 반중시위가 벌어지면서 베트남 내 중국 및 대만기업에 직간접적인 경제적 피해 발생


 (와신상담형) 차이나불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새로운 판로 개척이나 기술개발을 통해 지혜롭게 만회하는 유형

- 2016년 5월, 대만 민진당 차이잉원은 총통 당선 후 중국 공산당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 반대하며 대만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 중국은 즉시 자국민의 대만 관광을 제한했고, 이로 인해 대만 관광객의 40%(’15년)를 차지하던 유커가 급감하면서 대만의 관광 수입에 큰 타격. 대만 정부는 태국, 한국 등을 대상으로 비자 면제, 판촉 확대 조치를 취하며 새로운 관광객을 유치했고, 페이스북에 “중국 관광객이 오지 않으니 안정이 찾아왔다”는 도발적인 홍보 문구를 게시하며 일본 관광객 유치에도 총력. 이 같은 노력으로 2016년 대만을 찾은 관광객은 중국 관광객이 16.1%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년비 2.5% 증가했으며, 이 중 동남아시아 관광객은 16%나 증가. 이후에도 차이잉원 총통은 ‘신남향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전반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최근에는 동남아 지역의 무슬림 관광객 유치에도 민관 합동의 노력 전개)

- 2010년 9월, 일본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인근에서 시위하던 중국 어선을 나포하고 선장을 송치. 중국은 각종 전자기기의 핵심 원료로 사용되는 희토류의 대일본 수출을 전격 중단했으며 중국 내 대대적인 반일시위로 일본계 기업의 경제적 손실 발생. 일본은 인도, 베트남, 호주 등으로의 수입다원화를 통해 90%에 달했던 대중국 희토류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대체 및 재활용 기술 확보에 매진. 그 결과 일본의 희토류 중국 의존도는 절반 정도로 떨어졌고, 중국산 희토류 가격 하락으로 중국도 손해를 봄. 또한 희토류 문제로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 승리하면서 중국에 불공정 국가의 낙인을 찍음. 이후 일본은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을 통해 해외투자 다변화에 나서면서 중국의 추가 경제보복에 대비(일본의 대중국 투자는 2015년 U$65억에서 2016년 U$31억으로 절반 이하로 감소)

- 2010년 10월,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시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반체제인사 류샤오보를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 중국은 노르웨이에 유감을 표시하며 노르웨이산 연어 수입을 제한했고, 노르웨이의 중국 연어시장 점유율은 90%에서 30%대로 급락. 노르웨이는 EU, 한국 등 신규시장 개척과 홍콩과 베트남 등을 통한 중국시장 우회 수출 확대로 대응. 양국 외교관계가 회복된 2016년까지 중국의 노르웨이 연어 수입금지 조치가 6년이나 지속됐음에도 노르웨이의 연어 수출액은 연간 U$65억 수준을 유지하는 데 성공


3. 향후 전망

 일각에서는 제반 여건에 비추어 중국이 더 이상 차이나불링을 남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도 있음

- 시진핑 주석의 주변국 외교의 큰 줄기인 주변국과 친하게 지내고(親), 성실하게 대하며(誠), 혜택을 나누고(惠), 포용하겠다는(容) ‘친성혜용 (親誠惠容)’ 원칙에 정면 배치. 차이나불링은 정치적 이유로 무역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한 WTO 규정에 위배되며, 현재 중국이 미국, 유럽, 일본을 상대로 쟁취하고자 하는 WTO의 시장경제지위 획득에도 걸림돌이 됨. 파이낸셜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세계적 권위지들이 차이나불링을 비판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있으며, 중국 내부에서조차 거영국(巨嬰國, 덩치만 큰 철부지 어른 국가)이라는 비판 제기

- 글로벌화된 국제경제 구도하에서 차이나불링의 효과는 단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중국에도 손해가 될 수 있음. 차이나불링은 상대국에 대한 실질적인 경제 손실보다는 국제 정치에서 갖는 선전 효과, 즉 ‘중국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이렇게 벌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변국을 길들이려는 목적이 더 큼. 일례로 2012년 센카쿠 분쟁으로 중국 내에서 격렬한 일본산 불매 운동이 발생해 일본 차 수출이 32% 감소했지만 바로 한 해 뒤 정상 수준으로 회복


 그러나 작금의 동북아 정치∙경제 지형도에 비춰 볼 때, 한국을 타깃으로 한 주변 강대국들의 경제적 괴롭힘, 즉 불링 발생 가능성은 매우 높음

- 중국은 미국과의 정치적‧경제적 패권 경쟁이 심해짐에 따라 한국을 엉뚱한 화풀이 대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큼. 중국은 외교적 영향력이 강하거나(미국), 대체 불가한 기계 장비 등을 공급하거나(독일), 거대한 시장잠재력이 있는(인도) 국가는 어쩌지 못하고, 그 외 경제적‧외교적으로 만만한 국가에 불링을 가하는 경향이 큼. 사드 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수출입 대상국이기 때문에, 한국은 앞으로도 새로운 차이나불링의 희생양이 될 공산이 큼

- 전 세계적인 ‘스트롱맨’ 전성시대에 중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러시아 등도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 새로운 불링의 주체로 나설 가능성이 있음.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한국산 철강, 가전제품 등에 대해 보복성 경제 제재를 노골화하고 있으며, 일본 아베 정권도 자국 우익 정권의 결속을 위해 위안부 문제 등을 빌미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보복에 나설 유인이 있음. 러시아의 푸틴 정부도 장기집권 유지를 위한 국내 정치 안정용으로 예상치 못한 엉뚱한 이유를 빌미로 한국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음


 자국 이기주의의 확산과 맞물려 전통 강대국 외에도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불링의 주체로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 새롭게 각광받는 무슬림 시장, 즉 중동과 동남아의 이슬람 국가들은 종교, 인종, 외교 등의 이유로 언제든 새로운 불링의 주역이 될 수 있음. 무슬림의 종교적 전통을 무시하거나 자극하는 행위는 이슬람권 전체의 반발과 함께 한국 기업에 대한 과격한 불매 운동으로 전개될 위험성이 큼. 최근 UAE 정부는 한국 정부와의 원전 계약과 군사협력의 신뢰가 흔들릴 조짐을 보이자 단교 가능성까지 흘리며 크게 반발한 바 있음

- 전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가 간 이해가 복잡해질수록 보호무역의 포장을 쓰고 갖가지 형태의 불링이 만연할 것으로 보임. 국제 사회의 합의와 규범보다 극단적인 자국 이기주의를 중시하는 경향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불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큼. 전 세계의 권역별 패권경쟁이 심해질수록 고래 싸움에 피해 보는 새우처럼 엉뚱한 불링의 유탄을 맞을 수 있음


4. 시사점과 대응방안

 민간 기업이 주도적으로 차이나불링을 막을 방법은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사후 대응방안 모색은 반드시 필요

- 차이나불링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 정치‧외교적 갈등에서 촉발되는 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관련 기업들이 떠안아야 한다는 특징이 있음. 경제적 보복의 당사자인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 위축, 원자재 공급 단절, 현지 불매운동 및 공격적 테러 등의 피해를 떠안아야 함

- 차이나불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업이 있는 반면, 일부 기업들은 새로운 판로 개척과 기술개발로 전화위복의 전기 마련. 중국 사드보복으로 유커가 50%가량 감소하자 한국의 관광, 면세점, 화장품, 식품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롯데마트는 중국사업 철수 상황에 직면. 반면 와신상담형 케이스, 즉 대만 관광업계, 노르웨이 연어양식 업계, 그리고 일본의 전자업계는 내실을 다지고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로 활용 


 기업 차원에서 차이나불링의 예상 원인과 시점을 미리 점검하고, 주요 사업별 리스크 검토 및 사전∙사후 대비책 정비 필요

- 우선 전사 차원에서 ‘차이나불링 종합 대책’을 수립하여 불링의 원인, 형태, 피해 규모, 대비 방안 등에 대한 시나리오 검토 필요. 불링의 위험성과 영향도가 큰 사업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대응책 추진

- 사전 예방책을 통해 불링의 타깃이 될 위험 최소화 필요. 중국 현지에서의 사회공헌 활동과 대정부 활동, 우호적인 인적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친(親)중국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높이는 것이 중요. 또한 현지 업체들과의 밸류체인 결속을 사전에 강화해 놓으면 중국 당국의 불링 손익계산을 복잡하게 만들어 불링을 억제하는 효과 기대

- 차이나불링 시나리오별 사후 대비책 마련을 통해 피해 최소화 필요. 단기적으로는 한국 정부의 지원과 해결 노력을 촉구하고, 당장의 매출 손실과 생산 차질을 수습할 수 있는 비상계획의 차질 없는 이행 중요. 중기적으로는 본사 및 세부 사업부별로 중국에 대한 매출 및 소싱 의존도 실태를 파악하고, 과도 의존부분에 대해 수출 및 구매선 다변화로 리스크 분산 필요. 장기적으로는 대체불가한 고품질 제품과 차별화된 솔루션을 지속 확대함으로써 불링의 희생양이 될 위험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가장 중요

-출처: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십년간 한반도의 분단을 한탄해 온 이후, 한국인들은 점점 더 통일을 불필요하고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 38선을 따라 남한과 북한 사이의 분단은, 비록 제멋대로 보일지는 몰라도, 고대에 한반도의 북쪽 왕국과 남쪽 왕국을 나누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경계선을 따르고 있다.

* 이 분단은 현대 지정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통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베이징의 통치 아래 워싱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DOCUMENTARY TUBE

전설에 따르면, 미 육군과 국무성의 젊은 남자들이 단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연필과 벽면 지도로 무장하고 한국을 나누었다고 한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다음날,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들은 새로운 국가 정부를 위한 선거가 치러질 수 있을 때까지 한반도를 소련과 미국 행정 구역으로 나누라는 갑작스러운 명령을 받았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 그들은 38선 주변에 선을 그었을 뿐이다.

1948년 여름 어느 한쪽에서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그들은 두개의 개별 정부를 세웠다. 그 해 8월, 일본의 항복 3주년에, 맥아더 장군은 한국 국회에서 "인위적인 장벽이 당신의 땅을 분열시켰다"며 "이 장벽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 후에 국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맥아더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기본 가정으로 남아있다. 남한과 북한의 한국인들은 똑같이 그들의 공통된 한민족에 대해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한다. 1991년 평양과 서울에서 체결된 기본 협정은 한국을 두개의 독립국이 아닌 하나의 특별한 중간 과정으로 규정했다. 같은 해, 한국 합동 팀이 새로운 한반도기를 달고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2000년의 "615남북 공동 선언"은 "민족의 평화 통일을 갈망하는 전 국민의 고귀한 의지"를 말했다.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통일부 장관이자 "햇볕 정책"의 책임자였던 정세현씨는 계속해서"남북 분단은 비극이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의 상황은 올해 평창 동계 올림픽에 통일된 한반도기를 달고 출전한 한국 여자 하키 팀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하다. 다만 변화된 것 같은 단 한가지는 현재 한국인들이 점점 더 국가 분단은 단지 비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통일 연구원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14년 통일에 찬성했던 한국인의 69퍼센트가 올해 58퍼센트로 줄어들었으며 한국인의 20대 중 72퍼센트가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 북한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을 촉구했다. 이 칼럼이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한국 역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아는 것 같다. 남북 분단은 사실 인위적인 임시 방편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 분단은 지난 6,000년 동안 한국을 특징 지어 왔다. 지정학은 항상 한반도가 어떻게 분단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북한을 향한 이른 길

한국 역사의 대부분이 중국의 그늘에 펼쳐졌다. 중국이 우세할 때마다, 한반도의 무게 중심이 북쪽에 있었고, 반면에 남쪽은, 조금씩 다른 각도로, 낙후된 주변을 형성했다. 일본의 힘이 종종 중국의 힘과 경쟁할 때인 지난 6세기 동안만 한반도는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변화는 1,4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남한에 대한 개발에서 북한의 주도권을 잠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발달한 남한과 낙후된 북한 사이에 전례 없는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부와 권력이 커지면서 한국은 다시 한반도 분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나 30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는 통일된 한국이나 한강의 남쪽에 집중된 반도가 어느 쪽이든 "자연스런"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초기 역사는 주로 더 크고 더 복잡한 세계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 계곡 사람들은 기원전 7500년경에 쌀과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500년까지 이동식 생활 방식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정착된 마을에 살았다. 대조적으로, 쌀은 기원전 4800년경까지는 한국 근처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장은 기원전 3600년 전까지 도착하지 않는다. 그 때까지도 한국인들은 농부가 되는 속도가 느릴 뿐이었다. 영구적인 마을들은 기원전 2000년경에 북쪽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원전 1500년 이후에 한강의 남쪽으로 퍼졌다. 아마도 중국에서 이주한 만주족들 덕분에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금속 무기와 도구들을 보았을 것이다.

가장 큰 마을들과 가장 부유한 무덤들이 북쪽에 남아 있고, 중국의 문자들이 기원전 400년경에, 일종의 조직화된 정부가 북쪽에서 형성되고 있었다고 말해 준다. 고조선은 현재의 평양이라는 곳에 수도를 두었다. 우리는 고고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고조선은 분명 현재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연(춘추전국)이라고 불리는 중국 왕국에게 기원전 195년에 무너졌다. 한나라가 그것을 재정복하기 전에 중국 반란군의 지도 아래, 기원전 109년에 지방의 한 무리로 만들었다. 이 전후 사정 전체에 걸쳐서, 두가지 사실이 지배적이다. 북부 한국은 지속적으로 더 부유했고, 인구가 더 많았으며,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국가였다. 평양의 보물인 호화로운 소가니Soganni 무덤 212호에는 쓰촨 성 먼 곳에서 온 중국 비단과 칠기 그리고 보석으로 채워져 있다. 남쪽의 무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2,00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대에는 북쪽이 발달되었고 남쪽은 뒤쳐졌다.


한국의 초기 역사는 주로 더 크고 더 복잡한 세계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영향권 안팎

북부 한국은 서기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남아 있었지만 중국의 직접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제국의 전 한국 지방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독립 왕국으로 재건했다. 평양의 수도에서, 고구려는 470년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결국 수 왕조는 612년과 614년 사이의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기 위해 파산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위협을 가했다. 고구려는 동 아시아에 강대국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왕국의 ​​전성기인 순간에도 지정학적 변화가 평양의 지도층들을 앞서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야마토라고 불리는 새로운 왕국이 대부분의 군도를 통일시켰고 중국에 문을 열었다. 남쪽 사람들은 풍부한 거래를 통해 부유하게 되었다. 북쪽의 정교한 방법을 모방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형성하고 평양의 통치에 반항했다. 676년 새로운 국가들 중 하나인 신라는 멀리 남동쪽의 경주에 수도를 두고, 고구려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남쪽 한국은 8세기와 9세기에 북쪽 한국의 앞선 발전에 빠르게 따라가며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정학은 미묘한 일이었다. 만일 신라가 그 중심적인 위치를 영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일본과 중국 사이의 힘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만약 그것이 통제력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들 더 큰 국가들 사이에서 붕괴될 수 있다. 이것은 10세기 초에 일어난 일로 고려(현대식 이름인 "한국KOREA"이 나오는 곳)라고 불리는 이탈한 북쪽 국가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을 때 신라는 두 경쟁자 사이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고려는 비무장 지대의 바로 북쪽에, 한국의 서해안의 거의 정확히 절반인, 개경에 수도를 세웠다.(전통적으로 개성으로 표기) 위치는 좋은 선택이었다: 신라의 성공은 한반도를 전보다 더 통일되고 통합되게 만들었으며, 중앙에 위치한 수도는 이제 평양보다 더 합리적이다. 고려는 1100년 이후 번성하여 칠기와 청자 도자기로 유명해졌다. 최윤의는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인쇄하기 200년 전에 가동활자로 된 세계 최초의 인쇄기를 만들었으며 한국 과학자들은 화약 무기로 조숙한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통치자들은 신라의 지도자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균형 잡을 때 했던 것만큼 거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때때로 중국은 더 무서운 이웃이었고, 1271년에, 고려의 원종은 중국의 황제가 된 몽골의 장군 구블라이 칸에 공식적으로 복종했다. 그 후 80년 동안 한국은 천년도 더 이전에 한나라 때 그랬듯이 중국 제국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1350년대에 제국이 무너졌을 때, 고려는 해방되었다. —일본 해적으로부터의 급습에 즉각적으로 노출된다. 화약은 결국 한국에게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주었지만, 일본은 중국보다 더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392년, 쿠테타로 고려 왕유를 전복시켰을 때, 새로운 조선 왕조는 수도를 남쪽 한양(현 서울)으로 옮김으로써 이 현실을 인식했다. 

다음 400년 동안, 서울에서 통일된 한국 국가가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떼어놓을지를 결정했다.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커졌다. 한국 관료들은 심지어 한글의 고유 문자를 위해 1446년에 중국의 문자를 버렸다. 하지만 1592년에 미세한 균형이 깨졌다. 일본 총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중국 정복의 서곡으로 일본 열도를 통합한 뒤 한국을 침략했다. 한국은 중국과의 속국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임자들은 그의 공격적인 정책을 포기했고, 17세기 초에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들은 아무도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지역 균형을 받아들였다. 각자는 내부 단합을 도모하고 국경을 점차 폐쇄했다. 한국은 아마도 18세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통일되고 평화로웠을 것이다.


변화하는 균형

외부 충격이 없었다면 이러한 평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랬듯이 19세기에 지구를 강타한 가장 큰 격변—서양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세 동북 아시아 국가들은 각각 서양 상인들과 선교사들을 그들의 영토 밖으로 내몰기 위한 조치를 취해, 서양인들이 그들의 영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은 가장 멀리 가서 "은둔의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40년에, 영국은 중국에 진출했고, 미국은 같은 일을 하겠다고 위협하며 14년 후에 일본을 개방했다. 한국은 가장 긴 시간을 버티며 1866년에 미국의 초계함이 평양에 침몰하고 선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프랑스 군대가 한국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처벌하기 위해 강화도를 급습했다. 한강에서 서울까지 접근하는 것을 통제하는 이 섬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인들은 1871년 다시 이 섬을 공격해 불과 세명의 전투원를 잃고 수백명을 죽였다. 한편 일본은 1876년에 강화도에 자체적인 공격을 개시해 근대화된 충돌 프로그램으로 미군의 도착에 대응했다. 저항 할 수없는 한국은 일본 무역에 항구를 열었고 1882년에 미국인들도 인정했다.


서양의 침입이라는 가장 큰 지정학적인 격변은 19세기에 한국의 균형을 깼다.


1880년대에 중국이 한국을 자국의 궤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마지막 큰 추진을 했지만, 일본은 이미 지정학적 균형을 너무 멀리 옮겨 놓았다. 1894년부터 1995년까지 도쿄의 현대화된 비행기와 군대는 단지 몇대의 서부 증기선과 대포를 그들의 낡은 조직에 접목시킨 베이징의 비행기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체결 된 시모노세키의 조약은 공식적으로 한국의 베이징의 속국으로서의 위상을 종식시켰다. 러시아가 중국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했을 때, 1905년에 일본은 역시 그것을 격퇴했다.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1910년에 전면적으로 병합하여, 1931년 만주를 포함하도록 성장한 식민지 제국과 1937년 이후에 중국의 대부분의 해안 지방을 제국에 굴복시켰다.

1930년대에 동북 아시아는 히데요시가 1590년대에 일본 도쿄를 중심에 두고 기대했던 것처럼 보였다. 1945년 일본의 참패조차도 일본을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맞서는 방벽으로 재건하려는 미국의 열망 덕분에 그러한 패턴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지울 수 없는 선

38선을 따라 한국을 분할함으로써 천년의 통일을 끝냈지만 1400년 경에 생겨난 지정학적 균형의 최신 버전이 되었다. 한국이 다시 한번 중국과 일본의 떠오르는 세력 사이에 끼었다. 19세기 말 이후로 러시아와 미국의 개입이 증대되면서 한국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가 넓어지긴 했지만 한반도의 운명이 대륙의 힘과 동북아의 균형에 달려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냉전 기간 동안 38선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북한 지도자들이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된 후, 한반도가 미국의 방식으로 통일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1990년대에 중국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아주 잘 일어났을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20대 한국인들이 맞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의 분단은 —고대 남북 경계와 거의 같은 위치에— 현대 지정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똑같은 현실은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미국보다 중국의 통제하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Stratfor

시진핑Xi Jinping 국가 주석의 외교 안보 정책 구상(BRI)에 제시된 막대한 액수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BRI에 의한 중국의 투자 규모는 1조 달러에서 8조 달러에 이른다. BRI의 규모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다면, BRI의 경제적, 전략적 영향력은 평가하기 어렵다. 자세히 보면 가장 높은 수치가 부풀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베이징에 대한 정치적 점수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기대도 불러일으킨다.

BRI의 지도자는 예술과 과학의 일부이다. 이것은 느슨하게 정의되어 지고, 언제든지 확장되는 움직이는 대상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도로, 항구 및 기타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가 포함된다. 여기에는 거래, 운송 계약 및 기타 "소프트" 인프라가 포함된다. 2013년 9월 이후로 중국을 방문했다면 BRI에 참석했을지도 모르니 축하한다. 그것은 관광과 교육과 문화 교류와 같은 "사람 대 사람" 관계를 포함한다.

BRI는 지리학이나 격식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2013년 발표됐을 때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상용 '벨트'와 인도 해안을 가로질러, 그리고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까지 이어지는 해상 "도로" 등 두가지 주요 구성 요소가 있었다. 2013년에 발표된 이후, 이 비전은 북극, 사이버 공간, 우주 공간으로 뻗어 나갔다. 각국은 중국에서 중앙 아메리카만큼 먼 지역에 있는 BRI에 서명했다.

하지만 BRI에 참여하는 것은 생각보다 의미가 적다. 약 70여개국이 동참했지만 중국의 투자 수준은 크게 다르다. 파키스탄은 프로젝트를 위해 600억달러를 유치했다. 한국은 가입을 했지만, 지난해까지 BRI프로젝트가 없었다. BRI에 대해 가장 큰 비난을 퍼부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여전히 중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라자트Gurajat에 있는 산업 단지는 다른 곳에서 BRI프로젝트로 쉽게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요컨대, BRI에 참여하는 것은 중국과 관련된 사업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도 아니고 더 많은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BRI에 대한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 BRI가 발표되기 전에 시작된 일부 프로젝트 및 활동은 변경되었으며 보다 최근의 프로젝트와 함께 계산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까지 일부 전문가들은, 2022년 시 주석이 사임할 경우 BRI가 단계적으로 폐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임기 제한을 철폐한 후 시 주석은 자신의 외교 정책 비전에 부합하는 것처럼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이론적으로 BRI는 중화 인민 공화국의 100주년이자 중국을 "완전히 발전하고, 부유하며, 강력한 나라"로 만드는 시 주석의 목표를 기념하여 2049년까지 늘릴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다른 가정(무엇이, 어디서, 누가, 언제)은 일반적으로 BRI 크기에 대해 다른 추정치로 이어진다. 어떤 차원이든 확대시키면, 숫자는 증가하기 시작할 것이고, 특히 미래를 내다볼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면 BRI의 원대한 야망을 축소할 수 있는 위험을 포함하여, 좀 더 수수한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장 일반적인 추정치는 1조 달러이다. 이 수치는 일반적으로 약속된 인프라 투자와 관련이 있다. 인프라와 약속이라는 두가지 주요 한정자에 주목하라. CSIS의 아시아 프로젝트를 추적하는 것은 BRI의 주요 구성 요소이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부는 아니다. 사업 계획과 시공 과정의 복잡성을 감안할 때 기반 시설 공약과 실제 투자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지체 현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자국이 전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확실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1조 달러 약속이 아직 지켜지지 않았으며, 현 추세로는 수년 동안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시아 재건 프로젝트는 2014-2017년 동안 운송 프로젝트(구체적으로 철도, 도로, 항구 및 드라이 포트)에 소요되는 중국 자본금 약 900억달러를 추적하고 있다. 올해 후반기에, 우리는 다른 에너지 프로젝트와 함께 BRI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발전소를 추가할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의 투자의 약 절반이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

중국의 건설 및 투자 현황을 추적하는 미국 기업 연구소(AEI)와 중국의 헤리티지 중국의 글로벌 투자 추적 업체는 2014-2017년 사이에 총액을 약 3,400억 달러로 추산했다. AEI의 CeciliaJoy-Perez와 Derek Scissors에 따르면, 현 추세는 BRI가 1조 달러에 도달하는 데 6년에서 7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민간 부문의 참여가 제한된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은 정부 주도의 활동이 BRI를 2030년대에 2조 달러 한계를 넘어서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BRI는 부풀어진 가치를 어떻게 8조 달러로 추정했을까? 여기 한가지 이론이 있다:아시아의 거대한 인프라 수요와 비교적 저렴한 중국 투자를 융합한다.

8조 달러 규모에 대한 많은 언급이 2016년 홍콩 경제지 논평으로 이어져, "국무 회의 재정 전문가들은 시 주석이 8조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할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비슷한 숫자가 비슷한 시기에 유통되고 있었다. 2009년에 아시아 개발 은행은 아시아 개발이 2010년에서 2020년까지 8조 달러의 인프라 투자를 필요로 한다고 추정했다.

만일 국무 회의의 추정이 있었다면, 그 저자는 몇가지 이유로 아시아 개발 은행의 수치를 채택했을지도 모른다. BRI는 광범위하게 정의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추정치를 구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기존 견적을 빌릴 수 있는데 처음부터 새 견적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BRI는 발표 이후 진화해 왔다. BRI산하 해상 협력에 대한 비전 선언서는 2017년 6월에야 발행됐다. 심지어 이름도 "하나의 지대, 하나의 길"(OBOR)로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BRI의 크기에 대한 오해는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중국 관리들이 이 추정치가 오르는 것을 보는 것을 즐길 수 있으며 약간의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들이 세상의 주목을 끈거에 대한 당근을 고안해 냈다. 일부 개발 도상국들은 BRI와 그들의 개발 계획을 "연계" 하고 있다. 국제적인 기업들은 BRI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팀들을 모아 왔다. 이러한 모든 활동들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중국의 비전을 중심으로 조직화하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비현실적인 BRI 추정치에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BRI의 크기는 일부 관찰자들을 흥분시키지만 다른 이들은 걱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노력이 확대됨에 따라 부채 수준, 환경 및 지역 안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국에게는, 아마도 가장 큰 위험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기대일 것이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은 이제 그들의 약속을 이행하라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중국 관리들이 수조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BRI 규모에 대해 조금 겸손함을 갖는 것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지지자들에게는 기대치를 다시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회의론자들에게는 BRI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다. 이점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시 주석의 원대한 비전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의 조언자들 중 몇명이 기꺼이 지불할 가격이다.

- CSIS

오늘날 경제 및 재정 문제는 안보 문제나 국가 및 국제 목표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 고립 상태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경제학자들은 세계 안보에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이는 (세계 1, 2차) 양 대전 사이의 시대에서와 같다.

세계가 무역 전쟁에 직면해 있고 서구는 실제 전쟁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후 시대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경제 및 안보 혼란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 기인한 것이다. 전통적인 경제 정책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 외에도, 위기와 그로 인한 여파는 대서양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의 세계적 균형 재조정을 가속화하고 정치적 불만과 서방의 반체제 운동의 증가를 부채질했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대공황은 보통 경제적 사고에 있어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정책 입안자들은 위기를 초래한 실수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경제의 장기화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대책을 고안했다.

뒤이어 온 개념적, 제도적인 경제 질서 회복은 보통 1936년에 "고용, 관심, 그리고 돈의 일반 이론"을 출판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 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이끌어 낸 것이다. 케인즈는 또한 1944년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컨퍼런스를 주관해 세계 은행, 국제 통화 기금(IMF) 및 전후 세계 통화 질서의 창설을 이끌었다.

케인즈의 협력자이자 전기 작가인 로이 하로드Roy Harrod에 따르면, 케인즈는 브레튼 우즈 회담에서 신과 비슷한 존재감을 즐겼다. 하지만, 일부 다른 동 시대의 사람들, 특히 영국 경제학자인 조앤 로빈슨은, 그가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 낸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은 공적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항상 의심했다.

결국, 케인즈식 사고가 가지는 진정한 이유는 그것의 총 소비, 투자, 그리고 저축을 계산하는 방법이 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과 영국의 군사 계획에 매우 귀중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일관된 국가 회계 방식으로, 정부는 자원을 더 잘 사용하고, 민간의 생산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감소시켜, 소비를 유지하고, 시민 소요를 막을 수 있다.

동일한 도구가 전후 경제를 가계 소비를 향한 방향으로 재배치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요점은 전후 시대의 경제 기적에 따른 경제 혁명은 평시의 반영이 아니라 전시의 계산 결과였다. 안보 우려와 국내 및 국제적 안정성을 보장할 필요성이 절박해짐에 따라 정책 입안자들은 장기간 지속되어 온 경제적 통설에 도전할 의사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이 시대는 현재를 위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요즘, 많은 경제학자들은 금융 위기에서 전통적인 경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현재 케인즈에는 현대와 동등한 요소가 없다. 대신에, 국가와 국제적 목표 사이의 상호 작용이나 안보 문제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 전문가들에 의해, 경제적 및 재정적 문제가 지적인 고립 상태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계 1,2차) 양 대전 사이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불가피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 가정을 재고할 필요가 있는 안보 위협이 존재한다. 비록 금융 위기가 전체적인 지적 계산을 이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2016년 이후로 자유 주의적 국제 질서에 세가지 더 광범위한 도전이 거의 확실하게 일어날 것이다.

첫번째 도전은 기후 변화의 실존적 위협이며, 이것은 특히 이미 물 부족에 직면한 지역들, 그리고 이미 해수면 상승의 영향을 받고 있는 열대 국가들과 해안 도시들에 광범위한 지정학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동시에, 일부 국가는 작물의 더 긴 성장기와 극지방에서의 광물, 탄화 수소, 그리고 다른 자원에 대한 접근이 증가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이득을 누릴 것이다.

궁극적으로, 대기 중의 온실 가스 양을 줄이는 것은 공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상하기 위한 국제 메커니즘이 없다면, 개별 국가는 온실 가스 배출 감축의 균형을 다르게 평가할 것이다.

두번째 세계적인 도전 과제는 인공 지능과 노동 시장의 예상되는 붕괴이다. AI는 고용 뿐만 아니라 안보까지 위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가가 그들의 인구를 보호하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쓸모 없는 많은 기술들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이미 AI와 그 밖의 빅 데이터 기술들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갈수록 위험하고 불안정한 게임을 하게 될 것인데 이 게임에서 각각의 기술적 변화는 오래 된 방어를 쓸모 없게 만들어 근본적으로 정치를 변화시킬 것이다.

세번째 도전은 블록체인Blockphain과 같은 분산 원장 기술에 의해 구동되는 화폐 혁명이다. 비정부 자금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브레튼 우즈 이래로, 통화 지배는 특히 미국에게 있어 하나의 힘의 형태였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자금은 정부와 비정부 행위자들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주장하거나 기존의 권력 구조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비트 코인과 같은 암호화폐Cryptocurrencies는 이미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으며, 언젠가는 현대 산업 사회의 기반이 되는 금융 관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 지리학에서, 중국, 러시아, 인도,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이러한 도전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계화의 미래를 만들어 갈 기회로 본다. 그들이 상상하는 것은 20세기 후반의 모델과는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은 AI를 대규모 사찰(감시)과 국가 주도의 사고를 통해 정치 조직을 재편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있다. 개인주의를 집단 주의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은 세계 정치를 심각하게 편협한 방향으로 밀어 붙일 수 있다.

다행히도, 앞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 경제와 안보를 재고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사회 및 정치적 준비에 관한 공동 심의 체제 내에서 혁신을 발전시키는 접근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새로운 기술의 창조뿐 아니라 이러한 기술을 지배하는 시스템에도 적용해야 한다.

가장 좋은 미래는 정부와 다국적 기업이 모든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 미래가 될 것이다. 따라서 도전 과제는 경쟁적 비전의 파괴가 아니라 협력에 기초하여 일반적으로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PS

[미국 시리아 공습]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군은 4월초 시리아 내 반군 장악 지역에서 발생한 화학무기 의심공격의 배후로 시리아 정부를 지목한 가운데 4/13일 밤 시리아에 대한 군사공격을 단행


 미국 등 서방, 시리아 군사공격 : 미국 등 서방 동맹군은 4/13일 밤 시리아 3개 지역(다마스커스 인근 및 Homs 서부지역 2개)에 대한 군사공격을 단행. 공격 직후 미국은 시리아 공습이 종료되었으며 현재로서는 추가공격 계획이 없다고 발표

–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조금 전 미군에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의 화학무기 시설과 관련된 타겟에 정밀타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고 발표. 또한 러시아를 겨냥해 시리아를 지지할지, 서방과 함께할지 결정을 촉구

– 매티스 국방장관, “미국과 동맹국은 작년보다 고강도의 공격을 단행했으며, 이번 공격은 일회성 공격(one-time shot)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을 것으로 생각”


 프랑스와 영국, 공습 합류 : 프랑스는 수 대의 라파엘 전투기, 영국은 토네이도 전투기 4대가 미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공습에 참여

–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은 프랑스가 작년 5월 설정한 한계선을 넘어서 프랑스군에 미국·영국이 함께하는 군사개입을 명령했다”고 발표

– 메이 영국 총리는 “시리아 화학무기 보유 능력을 낮추기 위한 공격을 수행하도록 군사개입을 승인했으며 이는 내전이나 정권교체 목적은 아니다”고 발표


 시리아, 러시아는 강력 반발 : 시리아 대통령실은 트위터를 통해 “우리의 선한 정신이 굴욕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표. 국영방송은 미국이 주도한 공습이 국제법의 위반이며 공습 자체도 실패라고 비난 보도

– 안토노프 주미 러시아대사는 “미국의 시리아 공습에는 그 대가가 따를 것이며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을 비방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발표


[미국 시리아 공습에 대한 해외시각] 

공습 효과에 대해서는 제한적이라는 시각 우세. 미국의 개입 장기화 및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으나 관련 리스크는 커지고 있다고 평가


 공습 효과 및 추가공습 가능성 : 지난 `17.4월 미국 공습과 같이 이번 공습으로 시리아 정부가 화학무기 사용을 중단하거나 아사드 정권이 약화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제한적. 이에 따라 미국의 추가 공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

– 이번 공습이 아사드 정권의 교체를 도모하는 것은 아니라 수도인 다마스커스 인근을 공격했다는 것은 아사드 정권이 어느 때라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측면에서 의의(Middle East Institute)

– 아사드 정부의 악행을 막고 아사드 정권 비호국에 대해 강경함을 보여주려는 목적이나 이 모두를 얻지 못할 것(Huffington Post). 공습만으로는 시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시리아 내전 및 아사드 정권의 불법행위 근절을 이루지 못할 전망(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

– 피해를 입은 시리아 내 군사시설은 아사드 정부를 지원하는 러시아, 이란에 의해 신속히 복구될 가능성(The Atlantic).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강경하지만 시리아 공습 효과는 제한적 예상(NY Times)

–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정부가 화학무기 사용 중단까지 군사작전을 유지할 것을 시사. 미국 군부도 이번 공습이 ‘현재로서는’ 일회성이라고 강조. `17년 공습 이후에도 시리아 군부는 피해시설을 신속히 복구했으며 화학무기를 사용(WSJ)


 미국의 시리아 개입 장기화 여부 :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가 표방한 對시리아 전략을 감안할 때 주요 분석기관들은 미국의 장기적 군사개입 가능성을 낮게 평가. 다만, 시리아 사태에 대한 개입 리스크는 종전보다 커진 것으로 평가

–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와의 장기적 싸움에는 흥미가 없다”고 강조했으며 이번 공습 이전에도 시리아 내 2천명이 미군에 대한 철수를 시사

–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공습은 정권 교체 등의 실질적 효익은 상대적으로 작은 반면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 필요, 관련 비용 증가, 러시아와의 대립 가능성 등 더 많은 리스크를 낳을 소지(Cato Institute)

– 이번 공습이 미국의 시리아 개입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이끌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Politico). 미국 등 서방국이 일차적인 공습 이후 추가적인 군사작전을 지속할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AP). 이번 공습은 미국을 보다 복잡한 시리아 내전에 휩쓸리게 할 위험 잠재(NY Times)


 러시아와의 충돌 가능성 : 현재로서는 미국의 제한적 공습 양상에 따라 러시아 및 이란이 군사적으로 보복에 나서는 등 대치국면으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 다만 미국의 개입이 장기화될 경우 충돌 리스크가 커질 가능성을 제기

– 이번 공습이 제한적임에 따라 러시아나 이란이 심각한 양상의 대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NY Times). 러시아와 이란은 강경한 톤으로 반박하겠지만 직접적인 대응은 자제할 가능성(Washington Institute for Near East Policy)

– 향후 24시간 내에 러시아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 관건(CNN). 향후 러시아가 시리아 사태에 어떻게 군사적으로 개입할지 불확실성 상당(The Atlantic)

– 미국의 장기적인 시리아 개입시 시리아 정부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보복공격 가능성(AP). 미국 등 서방군이 러시아 군에 타격을 입혔을 경우 분쟁이 확대될 위험 잠재(Business Insider)

– 미국의 군사적 개입으로 시리아 내 군 병력을 상주시키고 있는 러시아와 이란과의 충돌 가능성을 제고(NY Times)


 북한의 대응 관련 불확실성 증가 : 최근 북미 정상회의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번 시리아 공습이 북한의 유화책을 더 끌어낼 수 있다는 시각과 경계감을 더욱 강화시켜 비핵화 협상에 소극적인 전략을 취할 것이라는 시각이 병존

– 트럼프의 시리아 폭격으로 김정은이 시리아 사태를 거울삼아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CNN). 북한은 시리아처럼 당하지 않으려고 핵무기를 반드시 보유해야겠다는 의지를 굳힐 것(Strafor)

– 시리아 사태를 가장 눈여겨 지켜보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북한일 것. 트럼프가 시리아를 공습하는 모습을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북한이 미국 군사력 동원을 두려워하고, 진지하게 비핵화 협상에 임할 수 있다(Washington Post)


[평가]

 주요 분석기관들은 대체로 금번 미국 등 서방의 시리아 공습이 작년 4월과 같은 ‘일회성 공격’으로 종결되면서 더 큰 사태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 이에 따라 국제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가능성

– `17년 4/7일 미국 다우지수는 당일 미국 시리아 공습도 일부 영향을 미쳤지만 이보다는 3월 고용지표 악화(98천명, 10개월래 최저)로 0.2% 하락

 다만, △향후 트럼프 행정부의 시리아 개입 확대 가능성 △시리아 정부 및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 이란의 대응 가능성 등 리스크가 커진 만큼 7년간 진행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 및 이를 둘러싼 관련국들의 동향을 지속 점검할 필요

-출처: 국제금융센터

2018년 4월 7일 시리아의 반대편 벨트인 두마Douma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 무기 공격으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 이상이 병들었다. 두마Douma 공격에서 나온 끔찍한 사진들이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았지만, 화학 무기는 작년의 미사일 공격 이후로 20번 이상 그리고 2018년 초 이후로 적어도 8번 이상 사용되었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사용에 따른 이득이 비용을 초과하기 때문에 화학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화학무기(CW) 사용을 정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 계산을 변경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대응이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9일 긴급 회의를 열어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 파악을 위한 수사 방식에 대한 3가지 결의를 채택하지 못했다. 비록 군사 행동이 범죄에 대한 국제적 대응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지만, 이 문제를 경제적, 외교적 그리고 법적으로도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지속적인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거의 소용이 없을 것이다.


Q1 : 지난해 시리아 공군 기지에 대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공격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에서 화학 무기 사용이 계속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A1 : 이 최근 공격은 반복되는 패턴에 들어맞는다. 국제 사회, 특히 미국이, 철수할 의사를 보이지 않거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는 것처럼 보일 때, 시리아 정권은 화학무기 공격을 통해 전쟁에서 이익을 얻고자 대담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사드 정권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야당 주도 지역을 압박하고 주민을 강제 퇴거시키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이다. 시리아 민간인에 대한 산업 규모의 재래식 병력과 함께 다마스쿠스 외곽의 두마 교외를 겨냥하여 아사드는, 수도에 대한 위협을 없애고 있으며, 다음에 올 다른 대안으로 남아 있는 쪽에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단지 화학 물질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만 이러한 공격의 사상자들을 가두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첫째, 이러한 화학 물질 공격의 심리적 영향과 그로 인해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가해지는 위험이 매우 심각하다. 둘째로, 이전의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도 보호 구역 밖으로 민간인들을 쫓아내 재래식 폭탄에 취약하게 만드는 화학 공격의 전후를 겨냥한 재래식 공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갈래의 전략은 포위된 시민들이 숨을 곳도 없고 그들의 아이들을 보호할 곳도 없다고 느끼도록 한다.


Q2 : 4월 7일에 보고 된 두마Douma에서의 공격에 미국은 어떤 대응책을 취해야 하는가?

A2 : 칸 샤이쿤Khan Shaykhun의 공격 이후, 이런 범죄들을 다루는 옵션들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러시아는 2017년 11월 시리아에서 CW 사건을 맡은 수사 기관인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유엔공동조사기구의 조사를 계속 거부했다. 더욱이 러시아는 화학 무기 협약에 따른 의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UN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권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유엔과 기타 메커니즘을 통해 아사드 정권을 책임지게하는 모든 움직임을 방해했다. 러시아가 이들 공격에 공모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아사드가 지난 한해 동안 자신의 통제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이루어 낸 영토적 이득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앞으로, 시리아 정권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력도 화학 무기의 지속적인 사용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이러한 사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다자 기구를 활용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국가들과 협력해야 할 것이다. 1월 23일, 25개국의 외무장관들이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새로운 다자 간 노력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에서 만났다. 이 새로운 국제적인 계획이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않았다. 그것은 강화되어야 한다. P3(프랑스, 영국 및 영국)에 근접하지 않은 추가 국가는 국제 법 위반을 강조하고 이 문제를 P3와 러시아 사이의 분쟁 중 하나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북유럽과 남 아시아, 남미 국가들이 지지자가 될 것 같다. 그것의 구조는 구성원들의 행동을 소집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약간 사무국을 보강해야 한다. 비확산 체제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포럼과 기관들과도 연계되어 시리아 내전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정치적 노력에 동참하고 CW의 사용을 포함하여 전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기소하기 위한 다른 정치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파트너는 향후 공격이 발생할 경우 시리아 및 그 이상의 지역에서 국제적 대응의 속도와 질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 및 메커니즘을 강구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미국과 다른 안전 보장 이사회 의원들은 안보리 내에서 계속해서 행동을 촉구해야 하며, 러시아가 아사드의 잔혹 행위를 막는데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법무 장관, 또는 OPCW의 권한을 통해 수사관을 즉각 투입해 결정적인 물적 증거와 증인, 피해자를 수집하도록 하고 이와 같은 범죄 기록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것은 안전 보장 이사회 자체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필요할 수 있다.


Q3 : 미국의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A3 : 미국과 동맹국들과 협력자들은 시리아의 위기에 대해 포괄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CW사용은 인도 주의적 의미와 널리 인정되는 법규에 따라 눈에 띄지만, CW에 대한 민간 범죄 사건과 제네바 협정에 따른 재래식 무기 사용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 그들은 동등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추가로, 미국이 그들의 억지력과 책임 옵션을 고려할 때, 너무 자주 심각성이 확실성과 결과의 일관성에 비해 잘못 평가된다. 이러한 경향은 작은 규모의 범죄에 대한 자기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고 가해자에 의한 한계 시험을 조장할 수 있다. 미국과 국제 파트너들은 모든 CW 공격이 전체적인 전략 목표와 여전히 비례하고 일관된 비용 부담 반응을 충족 시키도록 보장하기 위해 군사, 외교, 경제 및 사법 대응 옵션 메뉴를 확대해야한다.

책임성을 개선하고 조사 메커니즘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는 대량 살상 무기 확산에 대응하고, 테러에 대응하고, 이란의 불안정한 행동을 막고, 러시아와 경쟁하는 등 시리아의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포괄적 전략에 중첩되어야 한다. 최종 목표는 아사드(및 그의 지지자들)에게, 민간인들에 대한 고의적인 목표를 끝내고, 내전에 대한 협상된 정치적 해결에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전략의 특정 요소는 다음을 포함해야 한다.

*두마 공격에 사용된 시리아 항공기에 대한 징벌적인 공격과 미래의 잔혹 행위를 막기 위한 유사 항공기 공격, 이상적으로 유럽 및 중동 동맹들과 협력

*시리아 CW 연구, 개발 및 생산 능력의 나머지 요소를 목표로 한다.

*필요한 경우 시리아 헬리콥터의 완전한 이륙금지조치

*아사드의 CW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이란, 러시아, 북한에 대한 제재

*시리아의 장래에 관한 정치적, 기술적 협상을 위해 외교 채널을 통해 압박, 향후 제재와 군사 공격의 위협으로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타깃으로하는 CW 및 재래식 무기의 미래 사용에 대해 아사드가 책임을 지는 정치적 해결책 포함.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조치를 위해 국제 파트너쉽을 사용하여 OPCW 집행 이사회의 모든 회원들을 총괄하여 비준수 절차를 시작하고 시리아를 안전 보장 이사회에 회부하기 위해 필요한 득표에 도달한다.

*시리아 북부 및 동부 지역 파트너들을 통한 대테러 및 안정화 임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이슬람 국가(ISIS)를 격퇴하는 동시에 지렛대와 억지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약속은 임의의 일정이 아닌 현지 조건에 기초해야 하며 걸프 협력자 및 유럽 동맹국들과 짐을 분담해야 한다.

시리아 내전은 그 지역을 불안정하게 하고 무력 사용에 대한 규범적인 틀을 깨뜨리는 데 있어 계속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미국의 적들이 억지력, 경쟁, 그리고 미국과 국제 안보를 뒷받침하는 기본 원칙을 시험하는 분야이다. 만일 미국이 이러한 환경에서 주도하고 경쟁하기를 원한다면, 시리아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해야 하며 무력 사용에 대한 책임성과 규범을 강화해야 한다. 7년 만에 50만명의 사망자와 수백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분명히, 시리아 민간인들은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레베카 허스맨(Rebecca Hersman)은 워싱턴 DC전략 및 국제 문제 연구 센터의 핵 문제 프로젝트에 대한 선임 고문이자 책임자이다. 멜리사 달튼(Melissa Dalton)은 CSIS국제 안보 프로그램의 선임 연구원이자 부 책임자이다.

-영어원문:CSIS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국 주의 시대 이후로 중국 국가와 불화를 빚어 왔고, 중국의 종교를 둘러싼 정치적 역학의 광범위한 양상을 반영해 왔다.

중국의 종교 운동은 불교와 같이 중앙 집권화된 통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가장 잘 성공한다.

하지만 바티칸과 베이징이 타협 가능성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운명이 변할지도 모른다. 이는 중국 기독교 뿐만 아니라 대만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친다.


1594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가라앉지 않는 이슬람 장벽에 의해 수천년 동안 높은 산들과 높은 언덕에 막힌" 후에 가톨릭의 중국 유입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중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의 분명한 양립 가능성과 "기독교 교리와 고대 중국 현자의 합리성과 가르침 사이의 두드러진 통일성"을 축하했다. 리치는 중국에서 살아 있는 동안 환상적인 성공을 거두며 강희제의 고문이 되어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개종시켰다. 하지만 가톨릭을 주류 중국 종교로 만들기 위해 문제를 일으킨 분쟁들이 진행 중이었다. 1700년에는 약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중국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30년이 지난 후, 중국인들이 가톨릭이라고 부르는, "하늘의 종교"의 신자들은,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가 완전히 금지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가톨릭의 도전은 종교에 있어 독특하지 않다. 사실, 그것들은 중앙 집권적인 중국 당국이 현재 자신들을 국가라고 부르는 뻗어 나가는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한 단기적인 투쟁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지난 몇세기 동안, 기독교는 다른 많은 신앙 전통과 함께 중국의 세속적인 권위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 왔다. 오늘날 가톨릭이 전 세계의 신자들을 위한 경쟁에 직면함에 따라, 바티칸은 중국에 공식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의 복잡한 정치적 풍경을 항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빅 픽처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권력을 통합하고 그의 정부가 중앙 집권화를 추진함에 따라, 중국의 그늘 속에서 운영되는 종교 운동은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바티칸은 신앙의 전통과 종종 갈등을 빚어 온 중국과 타협하는데 좀 더 유연해 질 것이다. 사실, 가톨릭 교회는 외교 관계를 대만에서 중국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할지도 모른다.



제국 신앙의 혜택과 함정

신앙 전통은 어떤 제국에서든 도전과 기회를 모두 제공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총체적인 진실(진리)에 대한 주장을 하는데 이것은 신도들로 하여금 제국의 명령에 반대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반면에, 그들은 국가가 휘두를 수 있는 합법성이라는 가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의 중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계속해서 표류하고 있는 영국의 기술과 유럽에 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국가의 힘을 해치지 않는 한 가치가 있었다. 중국의 3000년 역사를 통틀어 정치는 항상 종교를 초월해 왔습니다.


중국의 가톨릭은 1692년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강희제는 기독교를 오랫동안 확립된 다른 신앙 전통들과 동등하게 두는 관용의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칙령에는 유럽인들은 매우 조용하고 거짓된 종파와 달리 내란 선동의 경향이 전혀 없다는 은밀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는 '침묵'을 지키고 중국 정치 질서의 기초를 침식하지 않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처음 가톨릭의 성공은 중국의 철학과 문화를 배우고 중국의 엘리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성직자들의 엄청난 노력에 달려 있었다. 1615년에 바티칸은 심지어 중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라틴어가 아닌 중국어로 전례를 행하도록 허락하는 독특한 특권도 부여했다.


1667년에 그린 이 삽화는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중국 사본과 그의 첫번째 개종자를 묘사한다.

(HULTON ARCHIVE/Getty Images)


하지만 18세기 초에 바티칸과 중국 당국 사이의 분쟁은 이 역학 관계가 얼마나 빨리 풀릴 수 있는지를 밝혀냈다. 소위 중국 의례라고 하는 기간 동안, 가톨릭 성직자들은 중국 가톨릭 신자들이 조상들의 모습을 담은 위폐에 절 하고 다른 유교 의식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중국의 예수회는 이러한 의식들이 세속적이며 가톨릭 의식과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반면에 교회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이교도 숭배로 보았다. 그리고 이 논쟁은 단지 기독교적 하찮은 것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계급을 통해 중국 정치 질서의 근간인 유교 사상에 도전했다. 유교의 계절적 의식은 전국의 관료들의 주요한 책임이었고, 조상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는 것은 중국 사회의 전체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나라를 하나로 만든 황제와 관료 주의에 대한 모욕은 반역에 대한 것이었다.


기독교는 고대부터 AD 388년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황제 숭배에 맞서 저항하며 이전에 중국 폭동과 유사한 관습에 맞섰었다. 18세기 중국은, 오래 전 로마 제국에서처럼, 바티칸이 신자들에게 독립을 명령했다. 교황 클레멘스(Clement) 11세는 1704년에 중국의 종교 의식(Rites)을 금지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선교사들이 수십개의 비 기독교 지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그 권위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2016년 5월 11일자로 촬영된 이 사진은 중국 남부 광시 지역의 디낭(Dingan)에 있는 전 가톨릭 교회에서 프랑스 선교사이자 가톨릭 성인 오귀스트 샤플레인(왼쪽)을 전시한 것이다.

(GREG BAKER/AFP/Getty Images)


이에 대해 중국 황제는 교황 특사를 추방하고 바티칸의 명령에 따르는 모든 선교사를 추방했다. 박해는 특히, 용정Yongzheng 황제가 가톨릭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1724년 이후 몇년 동안 증가했습니다. 1814년에, 지우킹 황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라의 근본적인 법에 모든 기독교를 금지하는 것을 포함해, 그는 유럽인들에게 전도 죄로 사형을 선고했고, 제국의 먼 지역으로 대화를 하지 않을 기독교도들을 보냈고, 같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제국의 군사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추방시켰다. 1858년 천진 조약이 끝난 후에야 병든 청나라는 다시 한번 기독교가 지상에서 한층 큰 명성을 얻도록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한 잠정적인 진보는 1951년 공산주의 인민 공화국이 서방 제국 주의의 안정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에 맞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종교를 표적으로 삼은 때까지 지속되었다.



불교:규칙을 입증하는 예외

중국의 전례를 좇아 중국이 바티칸을 철저히 해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결국 확고한 발판을 마련할 만큼 충분히 개종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그 나라는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신앙 전통에 접근하여 그것들을 억제하고 정치적 질서에 맞게 다듬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중국은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즉각 금지할 것이다.


중국의 가장 큰 종교적 성공 이야기인 불교도, 투쟁의 시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불교는 1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한나라에 진출해, 점차 제국의 구석 구석으로 퍼져 나갔고, 충실한 신자로서 몇명의 황제를 얻었다. 581-618년의 수나라 왕조와 618-907년의 당나라는 중앙 정부의 귀중한 수단이 되었다. 제국들은 제국 전역의 관료들의 권한을 보완하는 일과 가족의 충성심을 초월한 군인들 사이에 보편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윤리를 심어 주는 일을 위해 불교 성직자들을 포옹했다.


하지만 중국의 세속적인 당국은 불교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감시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 항상 의심을 품고 있다. 정부 기관들은 불교 승려들을 감독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고 더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일들을 감독했다. 그리고 84년대 당나라가 중국의 지방을 지배하는 힘을 잃게 되자, 제국은 불교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수도원 부지를 빼앗아가고, 전국의 승려들을 죽인다. (거의 동시에, 중국은 고대 실크 로드를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첫번째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음 세기에 불교는 서서히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많은 중국 문화 요소들을 통합하고 유교의 르네상스를 보완하는 형태였다.


중국 베이징의 시청 구에 있는 가톨릭 교회.

(FOTOKON / Shutterstock)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중국의 권력 정치에 독특하게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종교는 인도에서는 거의 사라져 버렸고 따라서 외부의 권위가 거의 없다. 불교 바티칸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구나 제국 안에서 불교가 제국이 될 위험도 없다. 사실, 중국에서의 불교의 오랜 뿌리는 그것에 거의 토착 신앙의 상태를 부여해 왔다. 반면에 기독교는 항상 서양 외부인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가톨릭은 중국의 수도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진 유럽의 권위에 대한 그것의 충성심 때문에 중국 통치자들에게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현대 시대에 불교는, 중국 밖에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를 두고 있는 티베트 불교의 경우와 같이, 종종 중앙 집권화된 중국의 권위를 위협해 왔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불교의 권위를 지탱하고 중국 영토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으며, 달라이 라마에게 엄격하게 도전하고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권위를 임명하려고 했다. 티베트 당국과 심지어는 달라이 라마 자신까지도 중국 정부의 뜻에 따라 굴복하기 시작했다는 초기 징후들이 현재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바티칸도 크게 뒤쳐지지 않을 것이다.



신과 정부를 둘러싼 현대의 전투

1939년에,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수세기에 걸친 분쟁 지역을 제거하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며 가톨릭 교회의 중국 폭동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10년 후에 이어진 공산당 통치 하에서도 기독교는 오랜 지하 교회 관습으로 인해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정부 관련 교회들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강하게 남아 있다. 베이징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2천 5백만으로 추산되며, 개신교 신자는 1천 8백만명, 로마 가톨릭 신자는 6백만명이다. 퓨 리서치 센터의 추정에 따르면, 이 수치는 더욱 높은 편이며 5,800 만명의 개신교 신자와 9백만명의 가톨릭 교도를 포함한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중국 인구의 5퍼센트만을 차지하지만, 순수한 숫자로 볼 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소수 민족이다.


2016년 중국 상하이 덜룬 거리의 한 기독교 교회 앞에서 배달부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FRED DUFOUR/AFP/Getty Images)


하지만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현대 중국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복잡하다. 이 종교는, 공식적으로 인가 받은 교회와, 소위 지하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절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베이징이 승인한 교회에 대해서도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더욱 동떨어져 있다. 개신교를 위한 3대 애국 운동은 1951년에 설립되었으며, 중국 가톨릭 애국 협회는 1957년에 설립되었다. 베이징에 의해 선정되었지만 바티칸에 의해 인정 받지 못한 신부와 주교들에 의해 감독되었다.


20세기 후반 내내, 중국 국가는 1963-66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가혹한 탄압과 뒤이은 1966-76년 문화 혁명과 1980년대의 급증하는 관용 사이에서 흔들리며 그들의 이해 관계와 기독교 신자들의 이해 관계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바티칸이 승인(수용)과 비난 사이에서 영원한 균형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증가하고 있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바티칸의 존재를 재정립하는 데 있어 두가지 주요 장애 요인은 대만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냉담한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들 중 첫번째가 더 쉽다. 다른 많은 외교 공관과는 달리, 바티칸은 공산주의의 승리로 민족주의자들이 대만에 진출하게 된 이후에도 중국 본토에 대한 지지를 유지했다. (결국 바티칸을 축출한 것은 베이징이었다.) 가톨릭 교회에게 불간섭의 요구는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톨릭 지도자를 중국 당국에 임명하는데 있어 약간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바티칸은 타협하려는 의지를 보여 왔다. 가톨릭 애국 협회와 바티칸 간의 공식적인 거래는 없지만, 가톨릭 애국 협회의 회원들은 교황의 정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허용되며, 대부분의 주교들은 이제 로마 자체에 의해 암묵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2007년 이후로, 바티칸은 중국 정부와 공식적인 합의를 원한다는 안정적인 신호를 만들어 왔다. 

2017년 말 바티칸 관계자들은 중국 내 두명의 지하 주교에게 베이징의 지원을 받는 주교를 대신 물러나게 하여 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2018년 4월에 대규모 거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낙관적이다. 그리고 일단 도달한다 하더라도, 이 마지막 협상은 주교들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을 뿐이며, 외교 관계에 대한 논의는 차후로 미루게 될 것이다.


중국 가톨릭 여성이 부활절 주간 동안, 허베이 성 스지아장 근처의 "지하"교회에서 영성체를 하고 있다.

(KEVIN FRAYER/Getty Images)


바티칸에 있어 중국과 타협하는 논리는 자명하다. 가톨릭은 전 세계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으며, 기독교의 다른 형태들이 기독교에 맞서 한때 그것이 지배했던 장소,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것에 맞서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입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추정치가 믿어 진다면, 중국의 개신교 신자 수는 6대 1로 가톨릭 신자 수보다 많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는 독립적이고 깊이 분열되어 있는 반면, 바티칸은 하나의 연합국으로서 중국과 협상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것이 중국의 공식 가톨릭 교회와 지하 교회를 통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번에 모든 침수된 기구들을 육지로 끌어낼 수 있고 희망적으로 더 많은 지지자들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 측에서는 교회의 공식적인 절차가 지하 교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 기독교인들이 이사회 전체에 걸쳐 변화를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기도 중요하다: 2월에 제정된 새로운 종교 법은 지하의 회색 지대에서 활동하는 것을 상당히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권력의 통합은 불법적인 종교 활동에 대한 나쁜 징조를 보이는 중앙 집권의 새로운 시대를 알린다. 바티칸은 아마 지금이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보고 있을 것이다.


베이징에서 가톨릭 교회를 중국 본토로 다시 들여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만에 대한 외교적 쿠데타이다. 바티칸은 대만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는 마지막 유럽 강국이다. 만일 그것이 이러한 유대 관계를 단절한다면, 몇몇 라틴 아메리카의 수도들이 선례를 따를 수 있다. 이것은 대만과의 외교 및 군사 관계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최근 노력을 고려할 때 특히 중요하다. 중국이 개발을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에 새롭게 중점을 두는 것은 가난을 줄이는 것에 중점을 둔 가톨릭 교회의 업적으로 보충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노령화 인구는, 특히 시골 지역에서, 정부의 사회 복지 서비스에 있어, 위협적인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불교에서 가톨릭에 이르는 종교 기관들의 증가로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바티칸과 중국이 화해의 기미를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딜레마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이 어느 정도 외부의 종교 지도력을 중국 땅에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지는 분명치 않으며, 바티칸은 중국 정부의 뜻에 얼마나 기꺼이 따를 것인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중국 정부에 대한 통제는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지만, 이러한 종류의 합의에 대한 선례는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및 아르헨티나와의 교회 관계에서 발견될 수 있다. 물론, 가톨릭 교회, 특히 지하 주교들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영역들의 노력에 반대하여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이 전 세계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바티칸은 중국의 14억명의 영혼이 거래를 하는데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편집자:우리는 그림에 표시된 교회의 교파를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작품의 네번째 사진에 대한 캡션을 조정했다.

-영어원문:Stratfor

미국이 설계하고 건설을 도운 후 70년 이상 보존한 세계 시스템을 포기하겠다는 결정은 전환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국가는 이해 관계가 없거나 유지 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결과는 미국인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덜 자유롭고 덜 번영하며 덜 평온한 세상이 될 것이다.


거의 1천년이 흐른 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볼테르(Voltaire)가 누명을 씌운 신성 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도 제국도 아니었다. 몇세기가 지난 오늘날, 볼테르의 말을 바꾸어 말하면, 문제는 점차 사라지는 자유 세계 질서가 자유주의적이거나 전 세계적이 아니며 질서도 없다는 것이다.


영국과 다른 국가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를 확립했다. 목표는 30년 동안 두번의 세계 대전을 일으킨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은 법치주의와 주권 및 영토 보전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적 국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출발했다. 인권은 보호되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행성 전체에 적용되기 위한 것이었고, 동시에, 참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으며, 자발적으로 행해졌다. 평화(국제 연합), 경제 개발(세계 은행), 그리고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기관들이 지어졌고 몇년 후에 세계 무역 기구가 되었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이 공격을 저지하는 데 기여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동맹국과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 그리고 핵무기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러므로 자유 세계 질서는 민주주의에 의해 채택된 이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강한 힘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유럽과 전 세계에서 무엇이 질서를 이루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단연코 확실히 자유를 제한하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인해 사라지지 않았다.


냉전 종식과 구소련의 붕괴로 인해 자유주의 세계 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해 보이지만, 2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앞날이 불확실하다.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주의, 보편성, 질서 유지라는 세가지 요소에 도전장을 내밀어졌다.


자유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점점 커지는 포퓰리즘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 극단적인 정치 세력의 정당들이 유럽에서 세력을 얻었다. 유럽 연합을 탈퇴하는 것에 찬성하는 영국의 투표는 엘리트 세력의 상실을 입증했다. 미국 조차도 자국의 언론, 법원, 법 집행 기관들에 대해 자국 대통령으로부터 전례 없는 공격을 받고 있다. 중국, 러시아, 터키를 포함한 권위주의 체제는 훨씬 더 무거워졌다. 헝가리와 폴란드 같은 나라들은 그들의 젊은 민주주의의 운명에 무관심한 것 같다.


세상이 마치 온전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는 지역 질서의 도래를 목격하고 있다. 또는 중동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각각 고유한 특징을 지닌 무질서를 보고 있다. 글로벌 프레임 워크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있다. 보호 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최근의 세계 무역 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이버 공간의 사용을 관리하는 규칙은 거의 없다.


동시에, 거대한 권력 경쟁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무력을 사용해 국경을 변경했을 때 국제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을 위반했고, 2016년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미국의 주권을 침해했다. 북한은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는 강력한 국제적 합의를 무시해왔다. 세계는 시리아와 예멘에서 인도 주의적 악몽을 꾸고 있으며, 시리아 정부의 화학 무기 사용에 대한 대응으로 유엔이나 다른 곳에서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베네수엘라는 실패한 국가이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100명당 한명 꼴로 난민이거나 아니면 내부 난민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고, 지금도 그렇다. 포퓰리즘의 대두는 부분적으로 소득과 고용이 침체된 것에 대한 대응책이다. 대부분 신기술 때문이지만 수입과 이민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민족주의는 특히 어려운 경제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지도자들의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세계기구들은 새로운 힘의 균형과 기술에 적응하지 못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약화는 무엇보다 미국의 태도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환 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에 불참하고 파리 기후 협약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북미 자유 무역 협정과 이란 핵 협정을 폐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하며, 세계를 무역 전쟁의 위험에 놓이게 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정당화(국가 안보)에 의존한다. NATO와 다른 동맹 관계에 대한 헌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있다.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퍼스트"와 자유주의 세계 질서는 양립할 수 없는 것 같다.


내 요점은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 연합, 러시아, 중국, 인도, 일본을 포함한 오늘날의 다른 주요 강대국들은 그들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에 대해 비난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같지 않다. 그것은 자유 세계 질서와 그 배후의 주요한 설계자이자 후원자이며, 주요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난 70여년간 해온 역할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이 전환점이 된 셈이다. 자유 주의적 세계 질서는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자유 주의를 유지할 관심이나 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미국인들과 다른 이들 모두에게 덜 자유롭고, 덜 번영하며, 덜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 영어원문: PS

 미국

- 국무부 애덤스 동아시아태평양 대변인,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 비핵화에 집중

- 헤일리 UN 대사, 북미회담에서 북한에 완전한 비핵화 요구할 계획

- 국무부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 북미 정상회담 의제에 북한 인권 포함 필요


 북한

- 리용호 외무상, 북미 정상회담 앞두고 비동맹회의 참석하여 우군 확보에 주력

- 노동신문,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 속에서 남한은 외세와 공조해 대결과 제재 공세 지속

- 영변 실험용 원자로 부근 새로운 굴착 작업이 진행 중(38노스)


 중국, 러시아 : 외교장관회의,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지지


 중국

- 김정일 위원장의 방문 이후 북한 노동자 유입 재개

- 왕이 외교부장,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전쟁 도화선 제거 기회


 러시아

- 이고르 코스티유코브 해군 중장,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핵 전쟁 촉발


 EU

- 유럽의회 맥아릴스터 외교위원장, 북한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 조치 필요한 단계


 일본

- 외무성, 북한 전담할 북동아시아 2과 신설


 WP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외교적 노력과 함께 중국이 동참하는 대북제재를 시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접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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