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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만큼 휴대폰이 일상 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은 나라도 드물 것 같다. PC 브로드밴드보다 먼저 활성화된 탓에, 휴대폰에 가입하면 이통사에서는 자사 휴대폰 메일을 디폴트로 제공하고 사용자들은 해당 메일 주소를 계속 간직하고 있다. 또한 휴대폰을 2개 이상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진풍경(?) 또한 독특하다.

반면 국내의 경우에도 휴대폰 자체 메일 주소가  부여되나, 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제공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 한해 동안 일본 휴대폰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기능은 실제로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 마침 리서치 전문업체 아이쉐어에서 20~40대 중심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있어서 살펴보았다.

- 응답자수 : 417명
- 조사기간 : 2008년 12월 2일~4일
- 남녀성비 : 남성 58.0%, 여성 42.0%
- 연령비 : 20대 13.4%, 30대 45.8%, 40대 32.9%, 기타 7.9%

위에서부터.. 메일 > 음성통화 > 인터넷 > 알람시계 > 음악플레이어 > 카메라 > 어플리케이션 > 결제기능 > 원세그 > 동영상재생 > 기타 순


올 한해 동안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기능을 물어본 결과, 전체 54.7%가 '메일' 이라고 응답하였다. 남녀, 연령대를 막론하고 가장많은 응답율을 보였고, 특히 여성과 40대에서 약 60%로 높은 비율이 나왔다.

다음으로는 '음성통화' 21.1%, '인터넷' 11.8%, 기타로 '알람', '음악', '카메라', '응용 프로그램', '결제기능' 순으로 조사되었다.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휴대폰 기능에 대해서도, 전체의 30.2%가 '메일'이라고 나왔는데 기타 다른 기능과 비교하여 큰 격차를 보였다. 다음으로는 '인터넷' 18.5%, '음성통화' 10.1% 순으로 나왔다.

올해 동안 가장 빈번하게 음성통화를 한 상대방은 누구인지 물어본 결과, '연인·배우자' 40.5%, '기타 가족' 23.3%, '친구' 18.2% 순으로 나왔다.

또 올해 동안 가장 빈번하게 메일을 주고받은 상대방에 대해서는, '연인·배우자', '친구'가 각각 40%대 전후로 나왔고, 남성 40대의 경우 '연인·배우자'가 제일 많았으나, 여성 20~30대에서는 '친구'가 가장 많이 나왔다.
-내품속이야기, by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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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 원제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루스 베네딕트, 오인석 (지은이), 김윤식 (옮긴이) | 을유문화사




국화(평화)를 사랑하면서도 칼(전쟁)을 숭상하는 일본인의 이중성을 해부한 책.1946년,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여사가 미 국무부의 의뢰를 받아 2년 간의 자료 수집과 연구 끝에 내놓은 이 일본 문화 연구서는 서구인이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일본인의 '이중성'을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적국을 현지답사할 수 없었던 베네딕트는 일본에 관한 기존 연구서와 2차문헌을 폭넓게 독파하고, 소설과 같은 문학적 자료들과 전시 선전용 영화까지 섭렵해 인류학적 데이터를 추출했다.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 일본문화의 핵심을 지적해낸 이 책은 일본을 이해하는 고전으로 자리하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 (Ruth Benedict) - 1887-1948. 미국 뉴욕 출생. 1905년 바사대학에 입학, 졸업 후 몇 년간 캘리포니아의 한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영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1919년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 입학하여 새로이 인류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겨 프란츠 보아즈 교수의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인류학 공부에 전념한다.
1923년 3학기 만에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북아메리카 수호 신령의 개념〉으로 학위를 받으며, 보아즈 교수의 지도 아래 뛰어난 연구 업적을 거두며 미국 인류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컬럼비아대학의 교수가 된다.
1934년 자신의 대표적인 저작인 <문화의 패턴(Patterns of Culture)>을 발표, 문화상대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강화해 나갔고, 1940년에는 <종족(Race:Science and Politics)>을 발표하여 국내에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1943년 미국 전시정보국 해외정보부 문화연구기초분석 책임자로 부임한다. 그리고 1944년 해외전의분석과로부터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는데,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으로 일본과의 심리전을 위해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연구할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던 때였다. 1946년 그녀는 <국화와 칼>을 출간했고, 책은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일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칼도 국화와 함께 한 그림의 일부분이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그들의 병사는 철저히 훈련되지만 또한 반항적이다. - p.21 중에서

극단적인 의무의 변제와 철저한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일본의 도덕률은, 당연히 개인적 욕망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제거해야 할 죄악이라고 낙인찍을 것처럼 생각된다. 전통적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덕률이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五官의 쾌락을 허용하고 있는 이중성은 의외라는 느낌을 준다. 일본은 세계 유수의 불교 국가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윤리는 이런 점에서 석가 및 불교 경전의 가르침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쾌락은 추구되고 존경받는다. 그렇지만 쾌락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 쾌락은 인생의 중대 사항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 p.23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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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공포감 조성 극대화 프로젝트.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한방으로  세계 군사적 지위의 최강자로



과거에 있었던 여러가지 정부가 주도했던 대형 프로젝트의 이면을 살쳐보면,  미국놈들의 위기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확히 맞물려 들어가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에서처럼, 1차 프로젝트는 1942~46년에 210억$의 규모로 진행된 맨하탄 프로젝트(The Manhattan Project) 였다. 이름 정말 멋있지 않은가?

맨하탄 프로젝트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 미국이 전세계를 운영하기 위한 하나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 의 일부를 발췌 해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근거가 나온다.
[46~59p 중]

-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맨해튼 프로젝트가 파시즘에 대항하는 하나의 전쟁이며 강력한 도덕적 근거가 부여되어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이 가공할 무기의 제작은 곧 무시무시한 수단의 사용을 뜻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행위는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도덕적인 어휘들로 정당화되었다. 원자폭탄의 사용 여부 결정을 맡았던 임시위원회의 책임자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 당시 전쟁부 장관)은 뒷날, 원폭 투하는 “장병들의 인명 손실을 가능한 한 최소화시키면서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는 원자폭탄을 쓰지 않았을 경우 일본 본토를 공략해야 했을 것이며 그랬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 ‘모든 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와 관련된 일본인 생존 지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단이 내린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 해도,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해도 1945년 12월 31일 이전에 아마도 1945년 11월 1일 이전에 틀림없이 항복했을 것이다.’

-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는 그의 글에서 원자폭탄 제작과정을 자세하고 실감나게 묘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원자폭탄의 투하는 일본이 항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허가되었다.’

 


- ‘즉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전후(戰後) 세계에서 미국의 힘을 확립하기 위한 첫 번째 행동으로서, 소련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이 8월 8일 대일전(對日戰)에 참가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원자폭탄은 8월 6일에 투하되었다.’

- ‘1945년 5월 트루먼의 핵심 정책자문위원을 만났던 과학자 레오 질라드(Leo Szilard)는 뒷날 이렇게 보고했다. “번스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일본 도시에 폭탄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 번스의 입장은 우리의 원자폭탄 보유와 실전에서의 사용이 소련을 더 다루기 쉽게 해주리라는 것이었다.”

- 갖가지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원자폭탄을 투하한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보장되어 있었다. 또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할 필요는 거의 없었으니까. 결국 그것은 그 당시에, 그리고 전후에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동원된 수단은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끔찍한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엄청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방사능 후유증을 남겼다.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희생자들의 증언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세 명의 생존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증언 내용들을 몇만 번 곱해야만 전모가 파악될 성싶다.


- 35세 남자: “턱이 날아간 한 여자가 혀를 입 밖으로 늘어뜨린 채 거세게 쏟아지는 검은 비(원자탄이나 대규모 소이탄 공습으로 큰 호재가 발생한 경우 그 재가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릴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함)를 맞으며 신쇼마치 거리를 헤매고 있었어요. 그녀는 살려달라고 외치며 북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 17세 소녀: “저는 히로시마역 앞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 그때 창자와 뇌가 튀어나온 사람들을 보았어요. … 젖먹이를 껴안고 가는 늙은 여인 … 엄마 잃은 많은 아이들을 보았어요. … 제가 느낀 공포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 5학년 소녀: “대피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큰소리로 부르짖었어요. 그들의 목소리는 … 울음소리라기보다 뼛속까지 파고들어 머리칼을 곤두서게 만드는 신음소리였어요. … 나는 불타버린 내 팔과 다리를 잘라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는지 몰라요.”


반미적인 감정은 뒤로 하고 역사라는 녀석은 항상 경제적 진실을 말해주는 중요한 척도 중에 하나다. 맨하탄 프로젝트(The Manhattan Project)라는 뉴욕의 월가를 떠오르게 하는 멋진 한 단어의 문장의 결말은 결국, 전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의 군사적 충격을 이용한 패권 장악과 동시에 이후의 국제 정세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목숨을 담보로 한 쓰레기 프로젝트 였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필립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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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하시 다카아키라는 중소기업 진단가이자 작가인 분이 쓰신 "실은 위험해! 한국경제"라는 책이 벌써 작년 7월경에 출간되었더군요. 혹시 추측이긴 하지만, 미네르바님도 이 책을 참고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번역본이 시중에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분이 최근 일본의 잡지 중 "VOICE" 라는 곳에 한국 경제에 대해 글을 남겼더라구요.

좀 읽어 보다가 흥미가 있어서 한번 쭉 번역을 해봤는데 미흡하지만, 혼자 보기엔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결론은 제 생각과 같이, 이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 궁핍한 생활을 자처해야 하며, 급여가 좀 삭감되더라도 수출 극대화를 위해 좀 희생해서 다시 무역수지 흑자 기조로 들어서자는 것이긴 한데... 한번 봐 보시죠... 혹시 오역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구요....

2008년 11월 17일, VOICE라는 잡지에 기고하신 미츠하시 다카아키씨의 글입니다.. 1,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韓国経済は崩壊寸前だ(1)

◇2次曲線を描くような暴落◇
    2차 곡선을 그리는 듯한 폭락


 韓国経済が、第2次通貨危機の瀬戸際にまで追い込まれている。本原稿を書いているのは10月初旬だが、本稿が掲載される『Voice』が発売されるまで、はたして韓国が第2次通貨危機突入を回避できているかどうか、正直、まったく自信がもてない。
한 국 경제가, 제2차 통화 위기의 갈림길에까지 몰리고 있다. 본 원고를 쓰고 있는 것은 10월 초순이지만, 본고가 게재되는 「Voice」가 발매될 때까지, 과연 한국이 제2차 통화 위기 돌입을 회피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솔직히 전혀 자신이 없다.

 2007年の秋まで「ウォン高」により輸出企業が苦しめられていた状況から一転、最近の韓国では逆に過度の「ウォン安」が進んでおり、今度は「韓国経済全体」が危機に陥っているのだ。
2007년 가을까지 「원 강세」에 의해 수출 기업이 어려움을 겪었던 상황으로부터 돌아서, 최근의 한국에서는 반대로 과도한 「원 약세」가 진행되고 있어, 이번은 「한국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다.


 韓国ウォンは2007年10月末に瞬間風速で1ドル900ウォンを切るまで上昇し、ウォン高のピークをつけた。その後は一貫して通貨の下落が続いたが、2008年の夏に至るや否や、ウォンはまるで2次曲線を描くような速度で暴落を始めたのである。
한 국 원은 2007년 10월말에 순간 풍속으로 1달러 900원을 깰 때까지 상승해, 원 강세의 피크를 올렸다. 그 후는 일관되게 통화의 하락이 계속 되었는데, 2008년 여름에 이르자 마자, 원은 마치 2차 곡선을 그리는 듯한 속도로 폭락을 시작했던 것이다.


 米大手証券会社リーマン・ブラザーズが破綻し、世界的な金融危機とドルの枯渇が拡大した2008年9月には、韓国ウォンはついに1ドル1200ウォンの壁を突破した。
미국의 대기업 증권 회사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해,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달러의 고갈이 확대된 2008년 9월에는, 한국 원은 마침내 1달러 1200원의 벽을 돌파했다.

  さらに10月に入るや否や、ウォンの暴落に明らかに加速がかかり、10月8日の終値はなんと1395ウォン。07年10月末のピークから、韓国ウォンは1 年もたたずに55%も下落してしまったのだ。尋常な事態ではない。図1のウォンの対米ドル推移のグラフを見ていただければ、現在の韓国に明らかに通貨危機 の兆候が見られるのがご理解いただけると思う。
게다가 10월로 접어서자 마자, 원의 폭락이 눈에 띄게 가속되어, 10월 8일의 종가는 무려 1395원이었다. 07년 10월말의 피크로부터, 한국 원은 1년도 지나지 않아 55%나 하락해 버렸던 것이다. 보통 사태는 아니다. 그림 1의 원의 대미 달러 추이의 그래프를 보면, 현재 한국에 분명히 통화 위기의 징조를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いまだ韓国当局に若干の余裕があった 2008年初めごろは、ウォンの下落は韓国の輸出製造業を潤すため、かえって都合がいい、などという論調が流行っていた。たしかにウォン安により、それま で通貨高に苦しめられていたサムスン電子や現代自動車などの大手輸出企業が救われた面もある。しかしその直後から畳み掛けるように襲い掛かってきたウォン の下落に折からの世界的な資源高の圧力が加わった。韓国の輸入物価が急上昇を始めるに至り、ついに韓国の中央銀行は手持ちのドルでウォンを買う為替介入、 いわゆる為替防衛を大っぴらに開始したのであった。
 아직 한국 당국에 약간의 여유가 있었던 2008년초 경은, 원의 하락은 한국의 수출 제조업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적당하다는 등의 논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분명히 원 약세에 의해, 그때까지 통화 강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삼성 전자나 현대 자동차등의 수출 대기업이 도움받은 점도 있다. 그러나 그 직후부터 쉴새없이 덮쳐온 원의 하락에 때마침 세계적인 자원고의 압력이 더해졌다. 한국의 수입 물가가 급상승을 시작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한국의 중앙은행은 보유한 달러로 원을 사는 환율개입, 이른바 환율 방어를 공공연하게 개시한 것이다.


 2008年7月の韓国の輸入物価上昇率は、対前年比で50.6%にも達したが、これは韓国がアジア通貨危 機に苦しんでいた1998年2月以来の高水準である。輸入物価が上昇した結果、韓国は輸入金額の増加率が輸出のそれをつねに上回るようになり、恒常的な貿 易赤字状態に陥ってしまった。08年の韓国の貿易収支(通関ベース)は、5月を除くすべての月において赤字である。
2008 년 7월의 한국의 수입 물가 상승률은, 전년대비로 50.6%에 달했는데, 이는 한국이 아시아 통화 위기로 괴로워했던 1998년 2월 이래의 고수준이다. 수입 물가가 상승한 결과, 한국은 수입 금액의 증가율이 수출 증가율을 항상 웃돌게 되어, 만성적인 무역적자 상태에 빠져 버렸다. 08년의 한국의 무역수지(통관 베이스)는, 5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있어 적자이다.


 中国やドイツのような輸出大国、貿易立国を志していたはずの韓国において、貿易赤字が続いているのである。韓国経済が何らかの構造的な問題、それもきわめて深刻な問題を抱えているのは明らかであろう。
중국이나 독일과 같은 수출 대국, 무역입국을 지향하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 무역적자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어떠한 구조적인 문제, 그것도 극히 심각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韓国経済が抱える問題点は、貿易赤字・経常収支赤字やウォン暴落だけではない。たとえば現在の韓国は、外資による直接投資と証券投資の激減という難題も抱えている。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역적자· 경상수지 적자나 또는 원 폭락 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국은, 외자에 의한 직접투자와 증권투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어려움도 안고 있다.


  9月24日の国連貿易開発会議発表の、2008年版『世界投資報告書』によると、07年の外国人投資家による韓国への直接投資額は26億3000万ドル。 対前年比で46.1%もの大幅な減少になってしまった。韓国への直接投資額が減少したのは、じつは05年から3年連続である。
9 월 24일의 국제무역 개발회의 발표의, 2008년판 「세계 투자 보고서」에 의하면, 07년의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한국으로의 직접투자액수는 26억 3000만 달러. 전년대비 46.1%로 대폭적으로 감소되었다. 한국으로의 직접투자액이 감소한 것은, 실은 05년부터 3년 연속이다.


 また証券投資に至っては、激減どころか、外国人投資家による韓国株式市場からの売り 逃げ、俗にいう「セル・コリア」現象が起きている。アジア通貨危機によりIMF管理下に置かれて以降、韓国の株式市場における外国人投資家の持ち株比率は 上昇を続け、2004年には44%にも達した。しかし07年初め以降、外国人投資家は毎月のように韓国株式の売り越しを続け、07年9月には外国人持ち株 比率が30%を割るところまで落ち込んでしまったのである。
 또 증권투자에 이르러서는, 격감은 고사하고,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한국 주식시장으로부터의 팔아 치우기, 속된 말로 「셀·코리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통화 위기로 인해 IMF 관리하에 놓여진 이후, 한국 주식시장에서의 외국인 투자자의 지분 비율은 계속 상승해 2004년에는 44%에 달했다. 그러나 07년초 이후, 외국인 투자자는 매월 한국 주식의 매도 우위를 계속해 07년 9월에는 외국인 지분 비율이 30%를 깰 때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韓国への直接投資の減少にせよ、外国人投資家による「セル・コリア」にせよ、韓国ウォンを下落させる一因になってい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한국으로의 직접투자의 감소이든,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셀·코리아」이든, 한국 원을 하락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さらに韓国は「純債務国」転落という、厳しく、同時に大きな問題も抱えている。
또한 한국은 「순채무국」전락이라고 하는, 어렵고, 동시에 큰 문제도 떠안고 있다.


  韓国は2000年6月以降、一貫して日本と同様に対外債権が対外債務を上回る純債権国だった。だが韓国の経常収支が赤字化した結果、韓国の対外債権は減少 し、同時に対外債務の増大が続いた。08年第2四半期末時点における韓国の純債権額は、わずかに27億1000万ドル。第1四半期末と比較して、100億 ドルを超える減少である。
한국은 2000년 6월 이후, 일관되게 일본과 같이 대외 채권이 대외채무를 웃도는 순채권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상수지가 적자화한 결과, 한국의 대외 채권은 감소함과 동시에 대외 채무의 증가가 계속 되었다. 08년 제 2 4분기 말 시점에서의 한국의 순채권액은 겨우 27억 1000만 달러. 제 1 4분기 말과 비교하여 100억 달러 이상이 감소하였다.


 第3四半期末の統計はまだ発表されていないが、韓国は今年の8月、もしくは9月に純債務国に転落した可能性がきわめて高いのだ。
 제 3 4분기말의 통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한국은 금년 8월 혹은 9월에 순채무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純債務国ということは、要は海外への借金の額が貸付額よりも多いわけだ。そして韓国の対外債務は、基本的に外貨(とくにドル)建てである。最近の韓国ウォ ンの暴落は、韓国の対外債務のウォン建て額面を増大させ、韓国を刻一刻とデフォルト(債務不履行)へと追い込みつつあるのである。
 순 채무국이라고 하는 것은, 요점은 해외에 빚진 액수가 꿔준 돈보다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외채무는, 기본적으로 외화(특히 달러) 기준이다. 최근의 한국 원의 폭락은, 한국의 대외채무의 원화 기준으로 산출된 액면을 증가시켜, 한국을 시시각각 디폴트(채무 불이행)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韓国経済が抱える問題、「貿易収支・経常収支の赤字化」 「ウォンの暴落」「直接投資・証券投資の激減」「純債務国化」は互いに関連し、マイナスの影響を与え合っている。要は韓国経済は構造的に「悪循環」に嵌ま り込んでしまっており、そこから抜け出せずにもがきつづけているのである。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 「무역수지· 경상수지의 적자화」 「원의 폭락」 「직접투자· 증권투자의 격감」 「순채무국화」는 서로 관련하여 마이너스 영향을 주고 있다. 요컨대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악순환」의 고리에 끼여 버려 그로부터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日本頼み」経済構造の末路◇
「일본 의존」경제구조의 말로


 一時は飛ぶ鳥を落とす勢いに見えた韓国経済が、なぜかくも惨めな有り様に陥ってしまったのであろうか。筆者はここで、韓国経済の基本構造を解き明かし、なぜ韓国が悪循環に嵌まってしまったのかを解説したい。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기세로 보였던 한국 경제가, 어째서 비참한 상태로 빠져 버린 것일까. 필자는 여기서, 한국 경제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 왜 한국이 악순환에 빠져버렸는 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そもそも、韓国経済の特徴を一言で表すと「外需依存国家」となる。
 원래, 한국 경제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수출 의존 국가」이다.

 外需依存ということであれば、日本と同じと思えるかもしれないが、それは大変な誤解である。じつは日本が「外需依存国家」という表現、レッテルは、一部の大手経済紙などが広めたでたらめ、すなわちミスリードなのだ。
 수출 의존이라고 하면, 일본과 동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실은 일본이 「수출 의존 국가」라고 하는 표현, 평판은 일부의 대기업 경제지 등이 아무렇게나 널리 퍼트린, 즉 오도이다.


  実際の外需依存度、すなわち輸出対GDP比率を見てみると、日本の外需は諸外国に比べてむしろ小さい組に所属する。すでに製造業の多くが衰退してしまった イギリスと比較してさえ、日本の外需依存度は小さいのである(2007年の外需依存度は、日本が15.4%、イギリスが15.9%。図2)。
  실 제의 수출 의존도, 즉 수출대 GDP 비율을 보면, 일본의 수출은 여러 나라에 비해 오히려 작은 편에 속한다. 벌써 제조업의 대부분이 쇠퇴해 버린 영국과 비교해 보아도, 일본의 수출 의존도는 작은 것이다(2007년의 수출 의존도는 일본이 15.4%, 영국이 15.9%.그림 2).


 世界最大の内需国家であるアメリカに比べれば、たしかに日本の外需依存度は大きい。だが、主要国では外需依存度が下から2番目の日本を「外需依存国家」と呼ぶのは、さすがに無理がある。日本はむしろ、相対的な内需依存国家である。
세 계 최대의 내수 국가인 미국에 비하면, 분명히 일본의 수출 의존도는 크다. 하지만, 주요국에서는 수출 의존도가 아래에서 2번째의 일본을 「수출 의존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무리가 있다. 일본은 오히려 상대적인 내수 의존 국가이다.


 それでは韓国はどうかと見てみると、2007年の外需依存度は38.3%。中国(外需依存度37.43%)やドイツ(同40%)などと並び、正真正銘の外需依存国であることがわかる。
그러면 한국은 어떨까보면, 2007년의 수출 의존도는 38.3%로써, 중국(수출 의존도 37.43%)이나 독일(수출 의존도 40%) 등과 대등해, 틀림없는 수출 의존국임을 알 수 있다.


  ところが「輸出対GDP比率(外需依存度)」ではなく「貿易黒字対GDP比率」で韓国を他国と比較してみると、きわめて興味深いことがわかる。代表的な外 需依存国であるドイツや中国の「貿易黒字対GDP比率」が共に8%を超えているのに対し、韓国はわずかに1.52%と比率が極端に低い。「内需依存国」で ある日本と比較してさえ、韓国の「貿易黒字対GDP比率」は低いのである(日本の「貿易黒字対GDP比率」は2.4%)。
그 런데, 「수출대 GDP 비율(수출 의존도)」이 아니라, 「무역흑자대 GDP 비율」로 한국을 타국과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수출 의존국인 독일이나 중국의 「무역흑자대 GDP 비율」이 모두 8%를 넘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겨우 1.52%로 비율이 매우 낮다.「내수 의존국」인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한국의 「무역흑자대 GDP 비율」은 낮은 것이다(일본의 「무역흑자대 GDP 비율」은 2.4%).


 先述したとおり、2008年の韓国はほとんどの月 で貿易赤字を続けている。今年の韓国の「貿易黒字対GDP比率」はマイナスの領域に落ち込むであろうことが、現時点でほぼ確定的である。「内需依存国家」 日本よりも「貿易黒字対GDP比率」が低いのであるから、韓国がいかに効率の悪い貿易をしているか、別の言い方をすれば韓国の輸出産業の付加価値がいかに 低いかがわかる。
전술한 바와 같이, 2008년의 한국은 대부분의 달에 무역적자를 계속하고 있다. 금년의 한국의 「무역흑자대 GDP 비율」은 마이너스의 영역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현시점에서 거의 확정적이다.「내수 의존 국가」일본보다도 「무역흑자대 GDP 비율」이 낮은 것이니까, 한국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무역을 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수출 산업의 부가가치가 얼마나 낮은지를 알 수 있다.


 基本的に、サ ムスン電子や現代自動車、現代重工業などに代表される韓国の輸出製造業のビジネスモデルは、「日本部品」のアッセンブル(組み立て)工場である。日本から 資本財(鉄鋼材などの原材料や、部品など)の輸入がないことには、韓国の輸出製造業は成り立たない構造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
기 본적으로, 삼성 전자나 현대 자동차, 현대 중공업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수출 제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일본 부품」의 어셈블리(조립) 공장이다. 일본으로부터 자본재(철강재 등의 원재료나 부품 등)의 수입이 없이는, 한국의 수출 제조업은 성립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結果、必然的に韓国は日本に対して毎年、莫大な貿易赤字を献上しつづけてい る。2007年の韓国の貿易黒字総額150億ドル程度に対し、対日貿易赤字はなんと299億ドルにも達したのだ。韓国は毎年毎年、懸命に日本に貿易赤字を 貢ぎながら、輸出規模から見ると過小ともいえる、わずかな額の貿易黒字を稼ぎつづけてい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わずかな貿易黒字さえも、08年からは稼 げない可能性がきわめて高い。
 결과, 필연적으로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 매년, 막대한 무역적자를 계속 갖다 바치고 있다. 2007년의 한국의 무역흑자 총액 150억 달러 정도에 대해, 대일무역 적자는 무려 299억 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한국은 매년 매년, 열심히 일본에 무역적자를 바치면서, 수출 규모에서 보면 과소라고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액의 무역흑자를 계속 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무역흑자마저도, 08년부터는 벌 수 없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


 アジア通貨危機以前の朴正煕の時代から、この「日本頼み」経済構造については問題視されていた。要は製造業の裾野があまりにも狭すぎ、日本からの資本財輸入なしでは産業が成り立たない構造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
아시아 통화 위기 이전의 박정희의 시대부터, 이 「일본 의존」경제구조에 대해서는 문제시되고 있었다. 요컨대 제조업의 저변이 너무 좁아서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재 수입없이는 산업이 성립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資源国ではない韓国は、対日に加えて中東諸国に対しても大きな貿易赤字を献上しつづけている。原油を全面的に中東からの輸入に頼っている以上、当然ではあるのだが、この歪んだ構造をもつ韓国経済に対し、容赦なく資源高、エネルギー費高騰が襲い掛かってきたわけだ。
자 원국이 아닌 한국은, 대일에 더해 중동 제국에 대해서도 큰 무역적자를 계속 바치고 있다. 원유를 전면적으로 중동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당연하기는 하지만, 이 왜곡된 구조를 갖는 한국 경제에 대해, 가차 없이 자원고, 에너지비용 상승이 습격해 온 것이다.


 2007年から今年にかけた資源価格や原材料価格の上昇、さらにはサブプライムローン問題に端を発す る金融危機により、ウォンの暴落までもが一度に発生してしまった。輸入物価が対前年比で50%を超える上昇を見せるなか、世界的な外需縮小で輸出が頭打ち になってしまった結果、韓国は貿易赤字国に転落したのである。
2007년부터 금년에 걸친 자원 가격이나 원재료 가격의 상승, 또 서브 프라임론 문제로 불거진 금융 위기에 의해, 원의 폭락까지도 한 번에 발생해 버렸다. 수입 물가가 전년대비로 50%를 넘는 상승을 보이는 가운데, 세계적인 외수 축소로 수출이 한계점에 도달해버린 결과, 한국은 무역적자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韓国経済は崩壊寸前だ(2)

◇バブルにすぎなかったウォン高◇
   버블에 지나지 않았던 원 강세


 ところで、貿易収支は経常収支の1項目である。経常収支は4つの項目から成り立っているが、残りの3つ、貿易収支以外の3つの収支をご存じだろうか。
 그런데, 무역수지는 경상수지의 1항목이다. 경상수지는 4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머지 3개, 무역수지 이외의 3개의 수지를 알고 계시는지.


  正解は「サービス収支」「所得収支」「経常移転収支」である。韓国は海外旅行や留学などの収支であるサービス収支が毎年大赤字を繰り返し、経常収支の足を 引っ張りつづけてきた。また韓国は海外への配当金や利払いが多いため、所得収支もけっして良好とはいえず、さらに海外送金(留学している家族などへの)が 膨れ上がった結果、経常移転収支までも赤字から抜けられない状況にあった(図3)。
정답은 「서비스 수지」 「소득 수지」 「경상 이전 수지」이다. 한국은 해외 여행이나 유학 등의 수지인 서비스 수지가 매년 큰 적자를 반복해, 경상수지를 계속 방해해 왔다. 또한, 한국은 해외로의 배당금이나 이자 지급이 많기 때문에, 소득 수지도 결코 양호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게다가 해외 송금(유학하고 있는 가족 등으로의)이 팽창한 결과, 경상 이전 수지까지도 적자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다(그림 3).


 この状況で貿易収支までもが急速に悪化したわけであるから、韓国の経常収支全体が一気に赤字化したのも当たり前である。そして経常収支が赤字化した結果、対外債権の減少が始まり、ついに韓国は純債務国に転落してしまったのだ。
 이런 상황에서 무역수지까지도 급속히 악화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경상수지 전체가 단번에 적자화한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경상수지가 적자화한 결과, 대외 채권의 감소가 시작되어, 마침내 한국은 순채무국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また、経常収支が赤字ということは、海外からの収入よりも、海外への支払いが多いことを意味する。海外への支払いが多ければ、それだけ多くのウォンがドルに両替されることになる。韓国ウォンの下落に拍車が掛かっても、むしろ当たり前の話なのだ。
또 한, 경상수지가 적자라고 하는 것은, 해외로부터의 수입보다 해외로의 지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외로의 지불이 많으면, 그 만큼 많은 원이 달러로 환전되게 된다. 한국 원의 하락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이다.


 前述したように、韓国ウォンの下落は輸入物価を高騰させ、貿易収支の赤字を悪化させる。そして貿易収支の赤字が拡大すれば、それだけ海外への支払いが膨らみ、ウォンの下落が加速していく。
 전술한 것처럼, 한국 원의 하락은 수입 물가를 상승시켜, 무역수지의 적자를 악화시킨다. 그리고 무역수지의 적자가 확대하면, 그 만큼 해외로의 지불이 팽창하여, 원의 하락이 가속화 된다.


 見事なまでの、悪循環である。
 완벽한 악순환이다.

  ところで、経常収支悪化などを主因とする韓国の通貨下落が顕著になったのは、2008年に入ってからであるが、経常収支そのものは2006年前半から月に よっては赤字化していた。韓国は06年、07年と2年連続で、上半期の経常収支赤字を下半期に挽回することを繰り返していたのである。
 그 런데, 경상수지 악화 등을 주 요인으로 하는 한국의 통화 하락이 현저하게 된 것은, 2008년으로 접어 들어가서 이지만, 경상수지 그 자체는 2006년 전반부터 월에 따라서는 적자화하고 있었다. 한국은 06년, 07년 2년 연속으로, 상반기의 경상수지 적자를 하반기에 만회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ところが経常収支の赤字が続いていた 06年上半期、07年上半期においても、韓国ウォンはほぼ一貫して上昇を続けていたのだ。また、同時期に韓国国内では株式バブルと不動産バブルが発生して いた。通貨が上昇し、株式や不動産価格が高騰しているのであるから、この時期の韓国は一見、景気が良いように見えた。これはいったい、なぜだろうか?
그 런데 경상수지의 적자가 계속 되고 있던 06년 상반기, 07년 상반기에 있어서도, 한국 원은 거의 일관되게 상승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 시기에 한국 국내에서는 주식 버블과 부동산 버블이 발생하고 있었다. 통화가 상승하고,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한국은 일견, 경기가 좋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도대체 왜 일까?


  じつは、この時期はいまだ世界的な金融バブルの真っ最中で、韓国に対しても膨大な投機マネー、フェイクマネー(レバレッジにより膨らまされた架空のマ ネー)が流れ込んでいたのだ。海外からなだれ込んだマネーはウォンの需要を拡大し、歪んだ通貨高を引き起こした。そしてウォンに両替されたマネーが株式市 場と不動産市場に流れ込み、バブルを引き起こしていただけなのである。
실은, 이 시기는 아직도 세계적인 금융 버블의 한창으로, 한국에 대해서도 방대한 투기 머니, 페이크 머니(레버리지에 의해 부풀려진 가공의 머니)가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해외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돈은 원의 수요를 확대하여 왜곡된 통화 고를 일으켰다. 그리고 원으로 환전된 돈이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버블을 일으켰던 것이다.


 これはなにも韓国だけの問題ではなく、世界の新興経済諸国の多くに見られた現象である。
 이는 비단 한국 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의 신흥 경제 제국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要するに韓国の07年までのウォン高は、必ずしも韓国の経済が好調だったためではなく、海外からの投機マネーに依存するところが多かったのである。その後 はご存じのとおり、07年夏にサブプライムローン関連の株式・不動産バブルが世界各国で破裂し、世界的な金融収縮が起きた。
  요 컨데 한국의 07년까지의 원 고 현상은, 반드시 한국의 경제가 호조였기 때문이 아니라, 해외로부터의 투기 머니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 다음은 아시는 바대로, 07년 여름에 서브 프라임 론 관련 주식· 부동산 버블이 세계 각국에서 불거져 나와, 세계적인 금융 수축이 일어났다.


 韓国に投下されていた投機マネーについても、一斉に引き揚げが始まった。これが先述の韓国への直接投資と証券投資の激減につながるわけである。
  한국에 투하되고 있던 투기 머니에 대해서도 일제히 인양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전술한 한국으로의 직접투자와 증권투자의 격감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韓国からのマネーの引き揚げは、ドルなどの外貨への需要を高め、ウォン安の一因となる。韓国の現在のウォン安には、経常収支赤字拡大、貿易収支赤字化のみならず、世界的な金融危機も大きく影響しているのだ。
 한국으로부터의 머니의 인양은, 달러 등의 외화로의 수요를 높여 원 약세의 한 요인이 된다. 한국의 현재의 원 약세에는, 경상수지 적자 확대, 무역수지 적자화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금융 위기도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自らを「貧しく」できるか◇
  스스로를 「궁핍하게」할 수 있을까

 今後、韓国ウォンがどこまで下落していくかは誰にも予想がつかないが、1つだけ確実なことがある。
향후, 한국 원이 어디까지 하락해 나갈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지만, 하나만은 확실한 것이 있다.

 
 それは、現在の韓国の経済構造では、世界的な金融収縮を潜り抜けられないのはもちろん、それ以降の世界においても順調な経済成長路線など望めないということだ。
그것은, 현재의 한국의 경제구조에서는, 세계적인 금융 수축을 헤쳐나갈 수 없음은 물론, 그 이후의 세계에 있어서도 순조로운 경제 성장 노선 등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なぜならば、韓国は「日本の資本財依存」「日本部品のアッセンブル工場」という構造的な問題を抱えているのに加え、ここ数年の国内の人件費高騰により、かつては持ち合わせていた「安価」という競争力までをも失ってしまったからである。
왜 냐하면, 한국은 「일본의 자본재 의존」 「일본 부품의 조립 공장」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는데 더해, 최근 몇년의 국내의 인건비 상승에 의해, 이전에는 가지고 있었던 「염가」라고 하는 경쟁력까지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暴力的な労働組合が跋扈し、暴動じみた労働争議が相次いだ結果、最近の韓国の人件費は留まるところを知らないように急騰を続けていた。いまや韓国の大手企 業の初任給は、日本大手企業のそれをも上回るのである。むろん、韓国の国民所得はいまだに日本の半分以下であるから、これがいかに異常な事態であるか、お わかりいただけると思う。
폭력적인 노동조합이 발호해, 폭동과 같은 노동쟁의가 잇따른 결과, 최근의 한국의 인건비는 멈출줄 모르고 급등을 계속하였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의 초봉은 일본 대기업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국민소득은 아직껏 일본의 반 이하이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비정상인 사태인지 이해해 주실 줄로 생각한다.


  韓国経済は21世紀初頭の数年間で、自らの競争力の根源を、1つ、また1つと失っていった。結果的に、韓国で生み出される付加価値が激減し、貿易収支まで もが赤字化した状態でサブプライムローン問題に端を発する金融危機、世界的な需要の収縮を迎える羽目になったのである。
한 국 경제는 21세기 초두의 몇 년간, 스스로의 경쟁력의 근원을, 하나씩, 또 하나씩 잃어 갔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가 격감해, 무역수지까지도 적자화한 상태에서 서브 프라임 론 문제로 발단한 금융 위기, 세계적인 수요 위축을 맞이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もはや経済成長以前に、通貨危機の可能性さえも差し迫る状況にもかかわらず、2008年 9月末、李明博大統領が率いる韓国政府は「2012年に経済成長率が7%に高まる」などという見通しを発表した。正直、国家としての競争力を失ってしまっ た韓国が年に7%経済成長するなど、通貨危機によりGDPが激減したあとでもなければ、ちょっと考えられない。
 이 미 경제성장 이전에, 통화 위기의 가능성마저도 눈 앞에 다다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08년 9월말, 이명박 대통령이 인솔하는 한국 정부는 「2012년에 경제 성장률이 7%로 높아진다」 등의 전망을 발표했다. 정직, 국가로서의 경쟁력을 잃어 버린 한국이 연 7% 경제성장 하는 등, 통화 위기에 의해 GDP가 격감한 후라면 모르겠지만, 이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


 2008年10月に入り、ようやく事態をのみ込めたと見え、第2次通貨危機に怯える韓国当局が、いきなりドルの確保に血眼になりはじめた。
 2008년 10월에 들어가, 간신히 사태를 파악한 후 제2차 통화 위기를 느낀 한국 당국은 갑자기 달러의 확보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外貨準備高が枯渇したのか、あるいは手持ちの外貨を使用したくないのかは不明だが、韓国政府は民間の大手輸出企業に対し、いきなり各企業の手持ちのドルを 為替市場で売却するように要請した。また与党ハンナラ党のパク・ヒテ代表は、韓国国民にドルを提供させるために「金庫や箪笥のなかにあるドルを差し出すこ とが、愛国心の発揮につながる」と発言している。
외화 보유고가 고갈했는지, 또는 가지고 있는 외화를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한국 정부는 민간의 수출 대기업에 대해, 갑자기 각 기업이 보유하는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매각하도록 요청했다. 또 여당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는, 한국 국민에게 달러를 제공시키기 위해서 「금고나 장롱 속에 있는 달러를 보내는 것이 애국심의 발휘로 연결된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まさに1997年の再来である。
 확실히 1997년의 재탕이다.


  先述したように、現在進行形で拡大する金融危機やドル枯渇の猛威を潜り抜けたとしても、韓国経済が順調に経済成長していくことは、いまとなってはほぼ不可 能だ。韓国が経常収支赤字と対外債務を積み上げ、ウォン下落により輸入物価が押し上げられ、物価上昇が貿易収支赤字を拡大し、さらなる経常収支の赤字拡大 を招く悪循環から抜け出せない以上、当然である。
전술한 것처럼, 현재 진행형으로 확대하는 금융 위기나 달러 고갈의 맹위를 빠져 나갔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가 순조롭게 경제성장 해 나간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이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채무를 쌓아 올려 원 하락에 의해 수입 물가를 급등시키고, 이 물가상승이 무역수지 적자를 확대해 새로운 경상수지의 적자 확대를 부르는 악순환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 없는 이상, 이는 당연하다.


 逆にいえば、この悪循環を断ち切ることさえできれば、韓国経済は危機から脱することも可能となる。
 역으로 말해, 이 악순환을 끊을 수만 있다면, 한국 경제는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そのためには大幅なウォン安を許容し、国内の給与水準を下げることで人件費を大幅に削減し、輸出製造業の競争力を回復させるしかない。韓国国内の最大の問題ともいえる人件費高騰が解消されれば、韓国への直接投資も、増加基調を取り戻せるかもしれない。
그 러기 위해서는 대폭적인 원 약세를 허용하고, 국내의 급여 수준을 내리는 것으로 인건비를 큰폭으로 삭감하여, 수출 제조업의 경쟁력을 회복시킬 수 밖에 없다. 한국 국내의 최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인건비 상승이 해소되면, 한국으로의 직접투자도 증가 기조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輸出製造業の競争力を回復させると同時に、外貨浪費の最大の原因である海外旅行や海外留学を制限する必要がある。さらに国民生活を豊かにする奢侈品の輸入を減らし、貿易収支を黒字化させる、一種の「重商主義」的な戦略を採ることが望ましい。
수 출 제조업의 경쟁력을 회복시키는 것과 동시에, 외화 낭비의 최대의 원인인 해외 여행이나 해외 유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민 생활을 부유하게 하는 사치품의 수입을 줄여, 무역수지를 흑자화 시키는, 일종의 「중상주의」적인 전략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海外旅行・留学が減少することでサービス収支の赤字が縮小し、貿易収支が黒字路線を回復すれば、韓国の経常収支全体が黒字化する。経常収支を黒字化することができれば、いずれ純債務国から脱することも叶うだろう。
 해외 여행· 유학이 감소하는 것으로 서비스 수지의 적자가 축소하여, 무역수지가 흑자 노선을 회복하면, 한국의 경상수지 전체가 흑자화한다. 경상수지를 흑자화할 수 있으면, 머지않아 순채무국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실현될 것이다.

 しかしウォンの大幅な下落は、むろん国内のインフレーションを悪化させる。物価上昇のなかで労働者の給与水準を下げるのであるから、韓国の社会情勢は不安定にならざるをえないであろう。
 그러나 원의 대폭적인 하락은, 물론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킨다. 물가상승 속에서 노동자의 급여 수준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 정세는 불안정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要するに韓国経済への処方箋は、韓国国民に対し、自分たちの生活レベルを下げ、より「貧しく」なることを求めるのである。中国や東南アジア諸国など、より 人件費の安い国から激しい追い上げを食ら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自国技術がまったく育っていない以上、韓国の選択肢は残念ながら他にありえない。
요 컨데 한국 경제에의 처방전은, 한국 국민에 대해 스스로의 생활 수준을 내려, 보다 「궁핍하게」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나라 등, 보다 인건비가 싼 나라로부터 격렬한 추격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기술이 전혀 자라지 않는 이상, 한국의 선택사항은 유감스럽지만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


 だが、いくら国家経済の危機とはいえ、自分たちに「貧しくなれ」という施策を「あの」激しい気性の韓国人たちが、はたして素直に受け入れるだろうか。筆者には、甚だしく疑問に思えるのである。
하지만, 아무리 국가 경제의 위기라고 해도, 스스로에게 「궁핍하게 살아」라고 하는 시책을 「그」격렬한 천성의 한국인들이 과연 솔직하게 받아 들일까. 필자에게는 심히 의문되는 바이다.
-미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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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용인 2008.11.25 18:46 신고

    잘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며칠 전 TV에서 일본 도요타 자동차 감원에 따른 여파를 본 적이 있다.
도요타 공장이 있는 지역은 도요타로 인해 유지되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도요타의 침체는 지역경제의 몰락을 의미했다.
도요타의 임시직에서 해고 당한 사람의 일상을 따라가며 보여줬는데, 기숙사에서 쫒겨나 가장 싼 모텔방에서 통장의 돈을 까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은 삼각김밥과 우유고 점심은 없고 통화요금이 좀 더 싼 공중전화기로 구직활동을 하고 추위에 떨며 콧물까지 흐르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쫒겨나 등본을 발급받을 수가 없어 더욱 취직이 어려웠다.

'경기가 언제 회복될 진 모르지만 그 전에 자신이 살아남을 지는 알 수 없다' 는 그의 말이 참 가슴을 답답하게, 아프게 했다.


- 해당기사-
세계 경기 악화로 일본 자동차 업체의 감원, 감산이 잇따르고 있다.
11월 22일 지지프레스(Jiji Press)에 따르면, 일본 자동차 업체 4위의 미쓰비시자동차(Mitsubishi Motors Corp.)는 2008년 회계연도가 끝나는 2009년 3월까지 약 12만대 추가 감산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10월 미쓰비시자동차는 예상 연간 판매량을 당초보다 8만1,000대 감소한 122만8,000대로 하향 조정하고, 8만대 감산을 결정한 바 있다.
이 같은 대규모 감산에 따라 미쓰비시자동차의 일본 내 5개 공장에서 1,000명의 비정규직 인력이 감원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자동차 업체 1위 도요타(Toyota Motor Corp.)는 2009년 3월까지 비정규직 직원을 50% 감원한 3,000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2위의 혼다(Honda)는 이번 회계 연도까지 7만9,000대를 감산, 올해 일본 공장의 생산량을 작년보다 1% 감소한 127만8,000대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3위의 닛산(Nissan Motor)은 3,500명 감원과 감산을 발표했다.
또한, 5위 업체인 마즈다(Mazda)는 비정규직 1,300명을, 이수즈(Isuzu)는 1,400명을 감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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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수
 
Aesculus turbinata, Japanese horse chestnut 七葉樹
 

1. 쌍떡잎식물 무환자 나무목 칠엽수 과의 낙엽교목으로 수고는 20m정도 지름 60㎝에 달하고 굵은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겨울눈은 크고 수지(樹脂)가 있어 점성이 있으며 어린 가지와 잎자루에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털이 있으나 곧 떨어진다.

2. 잎은 마주나고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진 겹잎으로 작은 잎은 5∼7개이고 긴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고 밑 부분이 좁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고 뒷면에는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털이 있다. 가운데 달린 작은 잎이 가장 크고, 밑 부분에 달린 작은잎은 작다.

3. 꽃은 잡성화로 양성화와 수꽃이 있고 6월에 분홍색 반점이 있는 흰색으로 피며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를 이루며 많은 수가 빽빽이 달린다. 꽃차례는 길이가 15∼25cm이고 짧은 털이 있다. 꽃받침은 종 모양이며 불규칙하게 5개로 갈라지고, 꽃잎은 4개이다. 수꽃에는 7개의 수술과 1개의 퇴화한 암술이 있고, 양성화는 7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이 있다.

4. 열매는 삭과이고 거꾸로 세운 원뿔 모양이며 지름이 4∼5cm이고 3개로 갈라지며 10월에 익는다.

5. 종자는 밤처럼 생기고 끝이 둥글며 폭이 2∼3cm이고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다. 종자에 녹말이 많으므로 타닌을 제거한 후에 식용한다.

6. 원산지는 일본이며 한국의 중부 지방 이남에서 가로수 또는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7. 유럽의 마로니에(marronier:A. hippocastanum)는 열매 겉에 가시가 있고 잎에 주름살이 많으며 꽃이 약간 크다. 이 나무는 프랑스 파리의 가로수로 유명하다.


 
이용 - 가로수, 정원수, 밀원식물, 약용
꽃말 - 사치스러움, 낭만, 정열

잎 모양과 개수에 따라 부르는 나무 이름들 중에 잎이 여덟 개로 갈라진 것은 팔손이라고 하고, 작은잎이 일곱 개가 모였다고 칠엽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들과 잎을 세어보면 8개나 9개 짜리 또는 5개 짜리도 볼 수 있다. 시원하게 큰 잎들이 가을이 되어 노란빛을 띤 갈색으로 물들면 마음이 설레인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낙엽이 몽땅 지고 나면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보통 칠엽수를 마로니에라고 부르는데 마로니에는 칠엽수를 비롯한 이 계통 나무들의 통칭이다. 
유럽산 마로니에(A. hippocastanum)는 서양칠엽수라고도 하며 보통 우리나라에 심고 가꾸는 일본 원산의 칠엽수와는 전혀 다르다. 마로니에는 세계 3대 가로수로 프랑스 파리의 가로수로 유명하며, 덕수궁 뒷편에 고종이 선물받았다는 서양칠엽수가 자란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시원한 나무 그늘이 좋으며 자연 수형이 아름다워 가로수로 적합하다. 반면 도시공해에 약하고 잎이 커서 강풍의 피해를 받기 쉽다. 칠엽수의 목재는 무늬가 독특하고 아름다워 공예나 가구재로 많이 사용했고, 그 숯으로 그림을 그리는 목탄으로 사용했다. 

붉은 반점이 들어간 아름다운 하얀 꽃은 많은 양의 꿀을 딸 수 있는 밀원식물이다. 또 씨는 말밤이라 하여 떫은 맛을 없애고 떡이나 풀을 만들어 이용하며, 약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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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투자은행(IB)인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사태 등을 정확히 예측해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미네르바'가 최근 발간된 <신동아> 12월호를 통해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을 맞이하는 정부의 대응기조가 현재처럼 이어진다면 내년 3월 이전에 파국이 올 수 있다"고 밝혔다.

미네르바는 <신동아>와 이메일 인터뷰, 기고 등을 통해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통해 경고한 '노란토끼'의 의미에 대해 "일본 환투기 세력"이라고 밝히면서 "일본의 IMF 외환보유고 제공 등 일본계 자본의 저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네르바는 '노란토끼' 즉, 일본 환투기 세력에 대해 "10년전 외환위기 당시 환율을 끌어올렸던 바로 그 세력"이라며 "외양은 미국 헤지펀드지만 그 배후에는 일본 앤캐리 자본이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원화 약세와 정부의 경기부양정책을 틈타 상대적으로 강세를 달러를 빼내가기 위해 한국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고 강조했다.

미네르바는 최근 '50대 초반, 증권사 근무와 해외체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자신의 신원과 관련된 보도가 나온 것에 대해 "증권사에 근무한 적이 있고 해외체류 경험도 있다. 그러나 나이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겠다. 내가 유명세를 타고 싶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이제까지 글을 써온 게 아니기 때문에 굳이 내 신원이나 얼굴을 공개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정확한 예측과 정보력에 대해 "예측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과거 경제위기 당시의 외국 사례와 현재 시점의 정부 정책 실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제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사항"이라면서 "분석의 근거는 국내외 수많은 경제지표와 사례집, 외신보도 자료를 수집해 통계수치를 규합한 것을 일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미네르바는 이어 "나는 누구의 대변자도 아니고, 아고라에서 이미 밝혔듯 경제 얘기는 앞으로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며 "완전히 절필하겠다"고 다시 한번 절필 의지를 밝혔다. /전홍기혜 기자-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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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끔 들리는 nakedcapitalism blog에 의하면 최근 일본에는 좀도둑질을 하는 노령인구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5년간 65세 이상의 좀도둑들의 수가 두배로 증가하였다네요.

불름버그에 의하면 물론 문제는 정부의 사회보장예산 감소와 늘어나는 의료비용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다른 이유인 임금 하락과 제로 이자율로 저축에 붙는 이자가 없어 그 피해는 더 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요.

지난 1978년의 경우 3.1%에 해당하는 노령 범죄의 비율이 지난해에는 무려 18.9%로 늘었고 이 범죄의 대부분은 (80%) 상점에서 슬쩍하는 shop lifting이라고 하네요. 미국 다음으로 극빈층이 많은 일본의 또다른 면을 보실수 있습니다.
어떤 고령자는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른다네요.

하지만 이 원인을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세계 제일의 저축왕이라 불리는 일본이 왜 그토록 극빈층이 많고 빈부 격차가 크며 불운한 황혼기를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20년간의 경제침체의 영향을 뺄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민자에 대한 홀대와 저출산을 통한 인구 고령화를 들수 있겠지만 근본에는 물론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무능에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정부는 그들의 저축과 세금을 부실 금융기관과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낭비하였고 이제는 빚이 너무 많아 사회보장제도도 제도로 하지 못하고 가장 성실히 일하였던 세대에게 마지막까지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과 우리가 겪어야할 고통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은 이전의 일본이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고 있으니까요. 흉보면서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토록 일본의 경제 정책이 나쁘다고 비난하였던 각국의 행정부와 경제학자들 모두가 현재 일본식 구제 방법들을 하나 둘씩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은퇴하였을때 겪어야할 우리들의 고통입니다.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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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는 하나의 혁명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바뀔 것이다. 그게 좋은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바라보며 도올 선생님이 글을 쓰셨다. 오바마는 북한과 대화를 적극 추진할 것이다. 강공 일변도로 치닫는 이명박 정권과 전혀 다른 해법이다. 이 부분을 선생님은 걱정하신다. 북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이니셔티브를 미국에 빼앗겨 버리면 우리는 다시 강대국의 한반도 전략에서 국외자로 남는 비극이 연출될 수도 있는 것. 우리는 이미 일본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항복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진주로 나라가 양분된 비극을 경험한 바 있다. 그 때 광복군이 흘린 눈물을 상기하면서 선생은 붓을 옮기셨다.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만큼은 꼭 막아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이명박이 북한에 접근했으면 한다. 오늘자 <도올고함>은 꼭 한번 정독하시기를....

-포카라-


-이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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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오바마 원폭’엔 대북 칼자루 내줄텐가


광복 주도권 빼앗아간 히로시마 원폭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다. 당시 그토록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과연 구세의 복음이었을까?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으로 생겨날 수 있는 더 많은 인명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의 패망과 세계대전의 조기 결속을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다행스러운 사건이었을까?

우 리의 이러한 상식적 기대와는 달리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세계사적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원폭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투하 소식을 들었을 때 땅을 치고 통곡했다. 자기들이 과학적 가설과 실험을 통해 만든 원자폭탄이 수많은 인명의 살상에 쓰였다는 사실에 대한 과학자적 양심의 발로 때문만은 아니다. 원폭 투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를 대체하는 더 무서운 미 제국주의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출발에 자기들의 과학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과학 그 자체의 도덕적 근거를 박탈하는 비극을 의미했다.

중 국 대륙의 가장 화려한 고도(古都) 시안(西安)에서 동남쪽으로 20km 떨어진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신라 고승으로서, 현장법사의 수제자였으며 유식과 반야경전에 탁월한 주석서를 남긴 원측(圓測·613~696)의 사리탑이 있다. 흥교사 부근 뚜취(杜曲)라는 곳에는 식량창고가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일본의 패전을 대비해 광복군 제2지대의 70명이 미군들과 함께 OSS(미군전략특수공작대) 훈련을 받던 곳이다. 2005년 4월 나는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들은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요코하마 오사카 무찌르고 동경 드리쳐 동에 갔다 서에 번득 모두 한칼로 국권을 회복하는 우리 독립군 승전고와 만세소리 천지 진동해 나가세 전쟁장으로”라는 용진가(勇進歌) 가사대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며 특수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 는 나락이 쌓여 있는 그곳에서 1945년 8월 10일 오후 OSS 훈련 책임자였던 서전트 소령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나 대원들에게 느닷없이 일본이 투항했다고 외치던 그 순간의 희비 엇갈린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발표가 있자마자 미군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맥주병을 터뜨리고 좋아 얼싸안았다. 그러나 광복군 우리 병사들은 침통한 얼굴 위로 눈물이 얼룩질 뿐이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김구, 『백범일지』)

“진격하는 상륙군이 모두 십자가 하나씩을 내 무덤에 꽂아두기를 바랐건만, 아~ 나는 온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장준하, 『돌베개』)

왜 그랬을까? 일본이 투항했는데 광복군 병사가 왜 그토록 슬피 울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향후 역사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그 자랑스러운 승전의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드골의 파리 입성처럼, 시저의 로마 입성처럼, 광복군은 광화문이라는 개선문을 당당하게 통과했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이후의 동족상잔의 비극도, 분단의 역사도, 좌우의 내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버 락 오바마의 미 대통령 당선은 나에게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것과도 같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히로시마 원폭은 새로운 분단과 냉전과 제국주의적 폭력과 강자의 횡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오바마라는 원폭은 새로운 통일과 화합과 제국주의적 폭력의 거부와 약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순간에 나는 기묘하게도 뚜취의 눈물로 얼룩진 광복군 병사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금 이 순간에 우리 민족이 스스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분단 60년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도 있다. 현 정권은 오바마가 그토록 저주했던 신자유주의적 발상에 모든 이념적 청사진을 그려왔던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더 돈을 벌게 하라!”

“ 남부의 나무에는 기묘한 과일이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 피가 흥건, 따스한 남풍에 검은 몸뚱이들이 흔들린다.” 흑인들의 모습을 ‘스트레인지 푸르트(Strange Fruit)’라고 이름하여 부른 전설적 재즈보컬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1915~59)의 노래 가사도 먼 과거가 아니다.

오 바마의 엄마가 케냐에서 온 루오족 흑인 유학생과 결혼을 했던 1960년 당시에도 미국의 대다수 주가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결혼을 중죄(felony)로 규정했다. “나의 아버지는 단지 엄마를 야릇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무에 목이 매달릴 수 있었다.”(오바마, 『아버지로부터의 꿈』)

이 오바마는 무엇을 외칠까? 시카고 빈민가의 아동이 글을 못 읽습니다. 그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노인이 약값을 낼까, 집세를 낼까 갈등할 때 그것은 나의 가난입니다. 아랍계 출신 미국인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부당하게 체포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인권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니까, 한다는 소리들이 누가 하버드를 나왔냐? 줄 대라! 운운하는 가소로운 소리들! 근원적인 정책에 대한 새로운 튜닝이 없이는 우리 정부는 세계사에서 뒤처지는 정권이 될 것이고 경제는 더욱 혼미하게 될 것이다.

결 국 광복을 우리 손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히로시마 원폭과 함께 미 군정의 손에 넘겼기 때문에 향후 모든 민족사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북·미 관계는 급진전될 것이다. 또다시 남북문제를 우리 손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오바마의 손에 넘길 때는 요번에는 우리 전 민족이 광복군이 뚜취에서 흘렸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빨리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사회가치를 구현하라! 그리하면 경제는 따라온다.


도올 김용옥 / 중앙일보 / 200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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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버블 경제에 관한 글 입니다.
-sde-

주요 자료들은 1982녀 부터 2002년 까지의 데이터들을 사용하였으며 자료 찾기가 어려운 부분은 구굴링으로 그래프 긁어 왔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 경제위기를 맞아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버블 경제 붕괴 당시 이를 막으려고 했던 일본의 정책이 무섭도록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 버블 붕괴시기, 일본도 한국과 똑같은 외환위기를 맞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외환위기를 맞지 않았고, 한국은 겪었습니다. 그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 드립니다.


1. 버블의 발생 직전

1980 년대 초 일본은 제 2 차 석유위기라고 불리던 스테그플레이션 상황에서 경제는 고전을 계속했습니다. 더 이상, 지난 60년대의 고도성장을 생각할 수 없게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재 할인율를 1981년에 무려 14%나 올립니다. 레이건 시대의 고금리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달러가 고평가 되면서 미국은 1982년 2/4분기 부터 마침내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전까지 10%가 넘는 인플레이션)

그 댓가는 혹독해서 1983년 미국의 실업율은 10.8%까지 치솟고 산업은 공동화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의 대미 수출액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연평균 18.2%의 수출 증가세와 미국 전체 수입의 22.2%를 차지할 정도로 일본의 대미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본은 2차 오일쇼크로 부터 발생한 불황에서 탈출 호황기에 들어 갑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 기업들은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벌게 되고 당시 일본 은행들은 이러한 일본 기업의 잉여자금을 유치하여 더욱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1984년 부터 국제금융계는 일본 은행들에게 국제 규범에 맞게 BIS 비율 8%를 맞출 것을 요구했는데 일본은 이를 최대한 늦추면서 1993년까지 BIS 비율을 8%에 맞추기로 합의 합니다. 당시 국제 금융계가 8%를 요구한 이유는 1980년대의 남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남미 국가들에게 융자했던 미국,영국 은행들이 무더기로 도산하면서 얻은 교훈 때문인데, 자기자본이 8%가 넘는 은행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않은 은행들은 위기 때 파산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은행들의 자기자본 확대를 위해 일본 대장성은 일본은행에 이른바 "투금계정"을 기업에게도 허용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원래 투금계정은 투신사들이 은행에 자금을 예치하고 투신 업무를 하기 위해 만든 계정인데 이것을 일반 기업들에게 확대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 버블 경제의 시작을 만들게 된 비극으 첫 단추였습니다.


2. 버블 경제의 시작

기업들이 은행에 투금계정을 놓을 수 있게 되자, 기업들은 이른바 "자이테크(재테크)"에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업무용/비 업무용 부동산 구입 열풍이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을할 때 부동산 담보 대출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더욱 기업들의 부동산 구매를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버블의 메카니즘은 이런 것이었는데

기업의 부동산 구매 -> 부동산 가격 상승 -> 상승된 가격의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은 기업에 더 많이 대출 -> 기업 부동산 구매  이런 식의 레버리지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버블 경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투금 계정과 스왑을 사용한 과잉 출자였는데, 당시 일본은 기업 금융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 마음대로 회사채를 발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유럽에서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달러화 표시 채권으로 발행하고 이것을 일본 엔화 채권으로 스왑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잇게 된 것입니다. 원래, 기업은 이런 짓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은행의 투금계정을 통해 기업이 증권업과 비슷한 행위를 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투금계정을 통해 부동산 구입과 과잉출자가 가능해지자, 일본 기업들은 너도 나도 설비증설에 나섰는데 당시 경제성장의 67%가 이러한 설비증설에 의한 것이었고 일본 기업은 이를 통해 또한 부동산 담보가치를 게속 증가시킬 수 있으니까 일본 기업들은 다투어 재테크에 열중하기 시작합니다.


3. 1986년 플라자 합의

계속 늘어나는 무역적자에 고심하던 미국은 결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G7 재무장관 회담을 통해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에 합의 합니다. 즉, 그 때까지 1달러 259엔에서 150엔으로 합의했는데 이 때문에 수출이 위축되자 일본의 경제성장율은 1986년에 마이너스 0.5%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일본은 이자율을 네차례나 걸쳐 인하하여 3%로 떨어뜨리는데 당시 총통화증가율은 10%,그렇지만 엔화 강세로 물가가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이 때문에 자산 가격이 상승합니다.

(자산 가격의 상승은 자국 통화의 강세와 낮은 이자율로 발생, 2006년 한국의 경우와 동일)

마이너스 성장임에도 이 시기, 기업의 부동산 투기, 낮은 이자율, 은행의 자산 부풀리기등에 의해 1986년 닛케이지수 18,000으로 상승합니다. 여기에 일본은행은 1987년 금리 2.5%로 인하합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은 경제학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재벌 상호출자가 주가를 더 높인다거나, 터무니 없는 대기업 맹신 신화등, 지금의 한국 부동산과 비슷한 말도 안되는 논리로 주식투기를 부추겼고....

주가상승과 풍부한 유동성으로 부동산 가격이 1985년 부터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한 부동산 담보대출에 의한 자산 부풀리기 메카니즘이 본격 작동하면서 1985년 22조엔의 부동산담보대출이 1989년 80조엔으로 상승했고 담보 부동산 가치의 100~200% 대출이 성행합니다. 일본 샐러리맨이 100년 걸려야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였으며 마침내 1990년 일본 부동산 가치는 2000조엔이 넘어가 미국 전체 4배가 됩니다.


 당시 NTT 빌딩의 3.3 평방미터의 가격은 1만달러 (지금 한화로 1200만원 싸네~~~~)

그리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에 1980년대 말부터 기업가치를 기술가치 보다 부동산 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4. 버블의 절정 - 일본은행의 버블 꺼뜨리기

이시기, 내부자 거래에, 정치인과의 결탁 심지어 야쿠자와의 결합으로 점차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폭력적인 모습을 띄기 시작했고. 주가조작, 부동산 개발, 등에 불법적인 행위가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 말 니케이 지수는 거의 4만에 도달했지만, 반면 배당수익률은 0.38%로 하락하면서 실질적 기업 가치에 의문이 발생합니다. "거품이다" 이런 인식이 퍼지기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자

1989년 일본은행 총재로 임명된 미에노 야스시로는 버블 경제를 치료하기 위해 금리인상에 착수합니다. 이때 니케이 지수는 1989년 12월20일 최고 점으로 4만 포인트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1990년 8월까지 5차례에 걸쳐 6%까지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주가는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에는 주가 지수가 2000포인트 하락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부터 주가 폭락이 시작된 후 1991년 부터 부동산 가격도 폭락 하기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차트와는 달리 일본의 6대 대도시 부동산 가격은 금리인상을 단행하기 전인 1989년 여름부터 주가보다 먼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부동산 하락은 한국과 비슷하게 정점에서 가격이 바로 하락하지 않고 어느 정도 가격이 조금씩 빠지다가 6대 대도시의 경우 단 1년만에 절반 정도의 가격이 하락합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완만히 가격이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일본 정부의 1차 대책 1990-1992 (2008년 한국과 너무나 유사)

주가가 하락하자, 대장성에서는 주가 다음 과 같이 부양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1. 1990년 2월 마진론 대출폭 확대하여 담보주식 30% 대출을 50%로 확대합니다.

(2008년 한국의 LTV 확대와 DTI 규제 해제와 유사)

2, 4대 증권사 대표들에게 유상증자, BW 발행 금지를 명령합니다. 이때 주가는 3만으로 하락합니다

3. 마침내 2만 밑으로 하락하자 증권사에게 주식 매입 명령을 내리고

4. 보험회사들의 주식 매도 금지 명령내렸고

5, 연기금 및 우체국 예금까지 동원하여 주식매수를 시작합니다.

6. 동시에 금리인하를 단행합니다.  1991년 7월에 5.5%로 0.5% 인하, 그리고 1991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총 1.0% 인하하여 4.5%.  2008년 한국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1992년 8월 닛케이 지수는 1만 4309로, 60% 하락합니다.


6. 일본 금융시스템의 악화

주식 및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한 일본 대장성의 무리한 주식 부양으로 금융기관들의 실질적인 유동성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주식및 부동산 가격이 하락함에도 매도를 할 수 없어 실질 손실이 누적됨 회계 부정으로 이를 은폐하려 했고 대장성도 이를 묵인합니다.

그러나 결국, 쌓이고 쌓인 적폐는 터지기 마련 곧이어 연이은 금융스캔들이 발생합니다.

1990년 노무라, 니코 증권의 투금계정 회계부정 사건이 발생하고 이 때문에당시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 증권 회장 다무라 요시하라가 사임합니다. 곧이어 다이와 코스모 증권사가 자사의 손실을 고객에게 떠넘긴 회계부정 사건이 드러나 대표가 사표를 냅니다.

스미토모 은행 총재 이소다 이치로 총재는 과도한 부동산 대출이 부실화 되자 불법 주가조작 및 야쿠자 연관된 부동산 투기로 손실을 만회하려다 들통, 결국 20억 달러 규모의 손실이 드러나고 이에 이소다 총재가 사임합니다. (스키토모 은행 사건)

1991년 후지은행의 2600억엔의 CD 위조 사건 (CD를 위조 발행 후 은행에 자금 입금 후 위조 CD라 하여 출금 거부)이 발생하고 이어 오사카은행 위조 CD 사건이 발생합니다. 더 어이 없는 것은 당시 일본 산업은행은 위조 CD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 했고 이 때문에 사건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지게 됩니다. (이철희 장영자 어음위조 사건과 비슷)

1992년에는 부동산 가격이 정점 대비 40% 하락하고... 마침내 일본 금융기관들도 견디지 못하고 손실을 일부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앞서 이야기한 스미토모 은행은 결국 1994년 부동산 대출 부실로 2800억엔 손실을 발표합니다. 이 당시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과 관련된 부실채권 액수는 약 60조엔으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7. 일본 정부의 2차 대책

1990~1992 년도의 증시 부양 대책이 완전 실패로 돌아가자, (2008년 한국과 너무나도 비슷했던..) 결국 일본 정부는 1992년 부터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사용합니다. (2009년부터 한국도 경기부양책을 사용할 예정임) 다음은 당시, 일본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사용되었던 예산 액수입니다.

1992년 8월 10.7조엔 (금리 3.25%로 인하)

1993년 4월 13.2조엔 (효과가 없자 추가 다음 회계년도에 추가, 금리 2.5%로 인하)

1993년 9월 8조엔 (그래도 효과가 없자 추경예산으로 편성, 금리 1.75%로 인하)

1994년 2월 15.3조엔 (그래도 효과가 없어 더 크게 편성) .... 총 37조 3천억엔



결국, 이러한 부양책이 실패하자, 일본 정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제로 금리 정책을 취합니다. 1995년 9월 일본 정부는 그 때까지 사상 최저의 금리인 0.5%로 금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엔고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일본 제조업체를 살리기 위해 1995년 8월 2일 미국, 일본, 독일은역 플라자에 합의하고 1995년 5월 26일 80엔대까지 떨어진 엔을 100엔대로 끌어 올리기로 합의 합니다.

이때까지 일본은 1991년 부터 1995년까지 엔고를 저지하기 위해 173회에 걸친 외환시장 개입을 했으나 결국 엔고를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미국, 독일, 일본 3대국 재무장관이 환율을 다시 재조정하비는 것으로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당시 세계 2 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장기침체가 세계 경제에 위험이 되며 그리고 엔의 이상 강세로 인해 달러 기축 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미국과 일본의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8. 무너지는 일본 금융

그러나 이러한 대책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본 금융시스템에 금이 가면서 일본은 금융위기 상황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1995년 전후 최초로 은행 인출 사태 발생하여 도쿄 신협/코스모 신협이 뱅크런으로 파산합니다. 이어 오사카신협/효고은행이 파산합니다. 파산한 신협은 규모는 작았지만, 이런 식으로 주택금융신용조합들이 연쇄도산하자, 그 피해핵은  6조 4천억엔이르렀고 결국 일본 정부는 긴급구제로 이들 신협의 예금을 대지급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신협은 시작이었습니다.

이어 1996년 부동산 전문 대출 은행인 한와은행이 파산합니다. 다음해인 1997년 10월 산용증권 일본 최초로 증권사로서는 처음으로 파산합니다.

그리고 일본 금융계에서는 마의 11월이라고 불리던 1997년 11월... 일본 10위권의 홋카이도 마규쇼쿠 은행이 파산하고 마침내 11월 23일에는 일본 2위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합니다. 피해액은  3조 2천억엔으로서 일본 역사상 최대의 금융기관 파산이었습니다.

이 마의 11월은 한국과도 많은 관계가 있는데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의 공포에 떨던 일본 은행들은 1997년 당시 한국에 빌려주었던 230억 달러 규모의 외채에 대한 일제 채권회수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종금사들이 파산했으며, 대기업 부도에다가 업친데 덥친 격으로 이런 식으로 일본 금융기관으로 부터 크레디트 라인이 닫히자 제일은행, 서울은행이 사실상 파산해 버립니다. 바로 한국의 1997년 IMF로 상징되는 금융공황이 닥친 것입니다. 

마의 11월 동안 일본 금융기관은 11월 1일부터 13일 까지 2주 동안 19억 달러를 회수했으며 12월까지 70억 달러를 회수해 가면서 한국은 한 때 가용 외환보유고가 14억 달러로 까지 떨어집니다. 그리고 한국은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철하게 됩니다.


9. 일본 경제 파산 위기 - 1998

1998년이 되자 연속되는 금융기관의 파산으로 일본 경제도 위험속에 빠져 듭니다.

한 국에서는 잘 몰랐겠지만, (우리가 더 급했으니까) 일본도 1998년에는 경제위기가 온다는 예측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때문에 새로이 당시 전 수상이던 미야자와씨가 대장상으로 취임하고 곧바로 또 다시 경기부양책을 사용합니다. 

1998년 무리한 증시 부양의 실패와 주식가격 하락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불황에 대응하기 위해 1998년 4월, 16조 7천억엔이나 되는 1차 경기부양책을 시행합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 부양책이 시도 되던 때만 살짝 주가가 부양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듯 하더니 이내, 주가는 곤두박질 치고 부동산 가격은 게속 하락합니다. 1992년~1995년 경기 부양책의 실패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엔화가 속적 없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110엔에서 120엔 정도를  왔다 갔다 하던 일본의 엔화는 1998년 4월의 경기부양책도 실패 조짐을 보이자 한국의 외환위기 때 처럼 그리고 2008년의 한국처럼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일본의 부실채권액이 정부 발표한 5조엔이 아닌 150조엔으로 추정된다는 뉴스가 나오고, 120엔선이 이어 130엔선이 돌파되자 일본 경제계는 위기감에 쌓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환율 1300원이 깨지는 셈) 그리고 마침내 1998년 6월 1일140엔이 깨지면서 140.33 엔을 기록하자, 일본 경제계는 패닉에 휩쌓입니다. 그리고 이러다가는 "일본도 아르헨티나 처럼 된다" , 는 공포가 전 일본을 휩쓸어 버립니다. (워낙 낮은 금리, 경기부양책으로 엄청 풀린 돈, 그리고 엔화 추락으로 하이퍼 인플레의 공포가 엄습)

그런데

슬프게도 여기서 부터 한국과 일본은 다르게 됩니다.

일본의 마쓰나가 대장상과 사카키바라 재무관등은 급거 미국으로 날아가 당시 미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로렌스 섬머스 재무차관을 만나 일본 경제의 구원을 애걸 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일본 경제는 무너진다. 제발 도와달라....

1998년 6월 15일, 한때 장중에서 1달러 150엔이 깨졌습니다. 그날의 종가는 1달러 147엔...

경제대국 일본이 외환위기에 휩쓸리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필사적이었습니다. 이때,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상승으로 경쟁력을 크게 잃어버린 중국에서 미국으로  중요한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만일 일본의 엔이 150엔을 지키지 못하면 중국 위안화도 환율을 조정할 수 밖에 없다"

당시 루빈 재무장관은, 회고록에서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운 결단 중 하나"로  이 결정을 꼽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1달러 150엔을 마지노선으로 강력하게 시장에 개입 엔화 하락을 막기로 한 것입니다.

IMF? , 고금리?, 고통스런 구조조정?

한국이 겪었던 가혹했던 정책들 하나 없이, 조건 없이 미국은 일본의 엔화 하락을 저지하기로 일본과 합의 합니다. 

그리고 150엔선이 위협 받을 때 마다 미국과 일본은 함께 시장에 개입하여 끝내 엔화를 안정시킵니다. (당시 환율 표 참조, 설명 부근을 살펴볼 것) 1998년 8월까지, 거의 두 달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환 협조 정책으로 일본 엔화는 폭락 직전에서 마침내 1998년 9월이 되자 130엔대로 밀리면서 일본의 외환위기는 지나갑니다.


10. 실패로 끝난 일본 사상 최대의 경기부양책

그리고 일본 엔화의 위기가 지나가자 1998년 11월 4월에 행했던 액수 만큼이나 거액의 추경예산이 편성되고 총 17조엔의 제 2 차 미야자와 플랜이 가동됩니다. 그러나 역시 효과는 없었습니다.

다시, 1999년 11월에는 17조엔의 경기부양책이, 2000년 10월에는 11조엔의 경기 부양책이 시도 되었으나 결국 일본 경제는 살아나지 못하고 4차에 걸친 일본 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은 무려 61조엔이나 투하 되었으나 일본 경제를 살리지 못합니다.

1992~1995 일본의 경기부양책 37조엔과 합치면 무려 98조엔의 경기부양책이 실패로 돌안 간 것입니다. 이로서 일본의 재정적자는 GDP의 140%로 까지 치솟게 되고 일본의 국채는 한때 짐바브웨 국채보다도 더 낮은 등급을 받게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사실, 미야자와 대장상은 1999년이 되자 한국과 같은 금융재생 프로그램을 가동하려고 했습니다. 은해의 부실을 털어내고 부실채권을 정부 기관이 매입하여 금융부분을 재생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지금의 한국처럼, 이른바 "토건족" 이라는 건설-은행-정치인/관료의 3각 트라이 앵글이 형성되어 이 틀을 깰 수가 없었습니다. 즉, 은행은 파산 직전인 건설사에게 계속적으로 운전자금을 대 주고, 건설사는 이 돈의 일부를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으로 헌금하고 은행은 이로서 건설사가 망하게 될 경우 부실채권을 양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정치인은 관료와 결탁, 거액의 은행 부실 채권을 눈감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미야자와 대장상이 금융부실에 메스를 가하려 하자, 대장상 관료들이 격렬히 반대하여 결국 그는 재정적자 확대와 경기부양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납니다.


11. 마침내 금융부실에 손을 대다.

결국, 일본의 경기 침체는 그 이후로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이웃 한국이 마침내 IMF 자금을 다 상환하고 계속되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경제를 확장해 나가는데 성공하자, 마침내 일본에서도 한국식 경제 회복을 벤치마킹 하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납니다.

한때 한국의 경제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던 오마에겐이치라는 일본의 보수 경제평론가도 이 때는 오히려 한국의 방식을 칭찬하며 일본도 한국과 같은 경제 구조 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장상과 은행-건설 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있는 한, 은행부실은 은폐될 수 밖에 없었으며 개혁은 지지 부진했습니다.

이때 솔직히 저는 정말 싫어하는 일본의 보수 우익 꼴통 고이즈미가 나타납니다. 그는 꼴통 답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일본 대장성을 해체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되자, 드디어 일본 금융도 한국식 금융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됩니다.

2002년 10월 금융재생프로그램으로 대손충당금 기준 강화합니다. 그때까지, 일본은행들은 느슨한 규제를 통해 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를 은폐했었는데, 이로서 대손 충당금을 훨씬 더 쌓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대손충당금을 쌓게 되자 한국과 마찬가지로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합니다. 이로서 국가가 은해으이 주요 대주주가 되는 동시에 부실채권을 상각할 수 있게 됩니다.

2003년 4월에는 한국 자산관리공사와 유사한 산업재생기구 창설로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매입하여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 은행들을 한국 처럼 부실 은행들은 우량한 은행에 합병 시키고 덩치를 키워 자본금을 확충하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004년 마침내 일본은 2004년에서야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의 장기 불황 탈출은 저금리와 경기부양책으로 상징되는 단순한 케인즈 정책으로는 경제를 살릴 수 없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통화주의와 케인즈를 복합시키고 특히 금융 시스템을 건전화 시켰을 때 살려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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