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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품종 재배가 일으킨 대기근



▲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대기근 기념물 


1847년부터 아일랜드에서는 갑자기 감자마름병이 전역에 발생해 대기근을 겪었다. 약 10년 동안 이어진 이 기근으로 인해 800여 만 명의 아일랜드 인구 중 100만 명이 굶어죽고 300만 명이 아메리카 등으로 이주하여 아일랜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했다.


남은 사람들도 풀을 먹거나 애완동물을 잡아먹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는데, 비타민 부족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실명하거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아일랜드의 재앙은 영국인 대지주들의 수탈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감자의 단일품종 재배 때문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재배되던 감자는 ‘럼퍼’라는 단일품종으로서, 전국의 모든 감자가 유전자적으로 똑같았다. 그런데 이 품종은 운이 나쁘게도 감자마름병에 아무런 내성이 없었다. 따라서 단 하나의 전염병으로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밭이 초토화된 것이다.


만약 아일랜드의 감자밭마다 저마다의 특성과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다양향 품종의 감자가 재배되고 있었다면, 감자마름병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감자 스스로 찾아냈을 것이다. 


감자는 원래 유럽에는 없던 작물로서, 남미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이다. 16세기 말 신대륙으로부터 감자가 도입되면서 유럽인들은 먹을거리 걱정을 덜 수 있었는데, 17세기 이후 유럽 인구가 급증한 것은 감자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자의 원산지에서 감자라는 풍부한 식량 덕분에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잉카인들은 그런 대기근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양한 품종의 감자를 함께 재배했기 때문이다. 단일 혈액형으로 인해 멸망한 것으로 알려진 잉카인들이 식량인 감자는 다품종으로 재배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바나나


아일랜드의 감자 교훈은 지금도 제대로 전수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세계식량농업기구는 20년 이내 바나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상업용 바나나의 99%는 캐번디시라는 단일 품종이다. 생산성이 좋고 너무 빨리 익지 않아 해외 수출용으로 적합한 품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바나나는 유성생식을 하지 못하게 개량돼 오직 꺾꽂이 방식으로만 재배되므로 유전적 다양성이 전혀 없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TR4라는 곰팡이 질병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이 질병이 처음 발생한 대만에서는 바나나의 70% 가량이 사멸했는데, 동남아시아와 인도, 호주를 거쳐 현재 중남미까지 질병이 퍼지고 있다는 것. 


중남미는 세계 최대 바나나 수출국들이 포진해 있는 지역이라 대책이 시급한 모양이다. 바나나 멸종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캐번디시 종을 다른 종과 교배시켜 다양한 잡종 품종을 만들어내는 방법뿐이라고 한다.



▲ 현재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상업용 바나나의 99%는 캐번디시라는 단일 품종이다.



획일성이 위험한 것은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정치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약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학살했다. 


당시 히틀러는 글라이히샬통(Gleichschaltung)이라는 획일화 정책을 통해 모든 독일 국민을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무장시켰다. 경찰, 행정부, 사법부, 언론, 각종 협회 등 사회의 모든 고위직도 나치당원들이 장악했다.


이런 획일화된 사회에서 ‘우리’와 다른 ‘그들’을 학살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현재 독일 교육의 특징은 주입식 교육보다 인성 교육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인데, 과거의 교훈으로 인해 획일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를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디오의 혈액형과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


남미의 과테말라는 인구의 95%가 혈액형이 O형이다. 그 주변에 위치한 볼리비아와 니카라과, 페루 등의 국민도 절대 다수가 O형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은 A형이 34.5%, B형이 27.1%, O형이 27%, AB형이 11.4%이다. 유럽 국가의 경우 A형과 O형이 특히 많은 편이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A형, B형, O형, AB형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그럼 왜 남미 주민들의 혈액형은 왜 그처럼 O형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까? 그것은 본래 남미에 살았던 원주민 인디오들의 혈액형이 100% O형의 한 가지 혈액형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한 과학 저술가는 성병에 유독 약한 A형과 B형 유전자가 소멸되고 O형 유전자만 진화해온 것으로 추정했다. 


한 가지 혈액형을 지니고 있으니 이들은 호감이 가는 혈액형이니 비호감 혈액형이니 따위의 문제로 다툴 이유가 없다. 또 서로 간에 수혈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급한 사고를 당해도 혈액 부족이란 불편을 겪을 염려가 적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혈액형의 획일성 때문에 그들은 스페인 군대의 총칼에 앞서 천연두라는 질병에 무너져 버렸다.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잉카 유적으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마추픽추의 주민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 중의 하나로 전염병을 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출처 -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48913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몬드라곤은 같은 이름의 거대한 협동조합 기업집단을 탄생시켰다. 몬드라곤의 인구는 8만명 대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마을기업으로 지역을 살리겠다는 완주와 비슷하다. 


2일 몬드라곤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완 주를 찾은 몬드라곤대학의 이나시오 이리사르 교수와 완주 지역 사회적 경제의 선봉장인 고산농협의 국영석 조합장을 만났다.


[99%의 경제]

전북 완주 '몬드라곤 국제콘퍼런스'


스페인 몬드라곤대 이리사르 교수


"협동조합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

유연한 협동의 힘으로 그러한 경쟁력 살릴 수 있다"


지난 2일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전북 완주군 고산면의 폐교를 리모델링한 지역경제순환센터가 시끌벅적해졌다. 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몬드라곤의 경험을 나누고 완주군의 지역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국제콘퍼런스를 열었다. 지역경제순환센터는 완주군의 사회적 경제를 인큐베이팅하는 구실을 맡고 있다.


"모든 것이 교육에서 시작됩니다. 몬드라곤을 일으킨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님도 '공동체 최초의 기업은 학교'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지요." 몬드라곤대학의 이나시오 이리사르 교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화를 풀어나갔다. 


"지역사회가 발전하자면 지방정부와 연구기관, 기업 사이의 좋은 관계가 구축돼야 해요. 셋 중 하나도 빠질 수 없지요. 특히 열린 혁신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에는 1개의 대학과 14개의 기술센터, 9개의 직업훈련센터를 거느린 지식부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는 일자리 창출이다. 몬드라곤의 250개 기업들 또한 시장에서 경쟁하기에, 얼마나 돈을 벌었는가로 경영의 성패를 평가받는다. 하지만 돈을 버는 궁극적 목적은 조합원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있다. "최근 금융위기가 심해지면서 건설과 가전 쪽 기업들은 평상시 급여의 80%만 지급합니다. 그래도 실업 사태로 가지는 않습니다. 실적이 부진한 기업의 이사들도 이사직에서 쫓겨나지만 일자리는 유지합니다. 다른 직책을 맡게 되지요."


이리사르 교수는 "몬드라곤의 성장 초기 20년 동안 내부의 은행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기업들이 버틸 수 있도록 저금리로 자금을 공급했던 것이다. 지금은 정부 규제로 저금리 특혜가 불가능해졌지만, 몬드라곤은 3개의 공동투자기금을 조성해 어려움에 처하거나 신규투자를 진행하는 협동조합 관계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몬드라곤에서는 사람이 동등하고 윗사람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고 민주주의 1인1표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협동조합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이라는 점을 거듭 말했다. "가격, 품질, 서비스 중 어느 하나에서 영리기업보다 뛰어난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유연한 협동의 힘으로 그러한 경쟁력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했다.


토론에 나선 임경수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장과 이현민 전북협동조합연대회의 준비위원은 "몬드라곤 같은 협동조합의 경험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을 열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협동조합 방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권요안 전주의료생협 이사는 "10년 동안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협동조합 또한 기업이고 조합원의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이제는 협동조합을 디자인한 사람들이 지나친 환상을 심는 것을 오히려 경계해야 하고 실패 사례도 공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완주/글·사진 김현대 선임기자koala5@hani.co.kr



이글은 Steven McFadden가 쓴 책 “마야의 원로들이 2012년에 대해 말한 것”의 일부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카를로스 배리오스(Carlos Barrios)는 과테말라의 고지대(高地帶)인 El Altiplano에서 스페인 가족으로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마야人인 맘(Mam) 종족(種族)의 거주지이기도 한 Huehuetenango에 있었다. 다른 마야인과 다른 토착전통의 보존자들과 함께, 그 맘족은 거북의 땅(즉, 北아메리카)에서 옛 방식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그들은 시간을 보존하는 자들이며, 오래되고 기품 있고 타당한, 주목할 만한 달력에 대한 권위자들이다.


배리오스씨는 역사가이자, 인류학자이자, 연구자이다. 19살부터 전통적인 원로(元老)들과 25년간 연구한 끝에, 그는 마야인의 독수리 씨족의 의식을 행하는 사제(儀式司祭)이자 영적안내자(靈的 案內者)인 Ajq'ij가 되었다. 수년전, 그의 형제인 Gerardo와 함께, 카를로스는 다양한 마야의 달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많은 스승들과 함께 연구했다. 그는 말하길, 자신의 형제인 게라르도는 거의 600명에 달하는 전통적인 마야 元老들과 인터뷰함으로써 지식의 범위를 넓혔다고 한다.


배리오스씨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학자들은 사원부지(寺院敷地: 사원 터)를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돌에 새겨진 글을 읽고는 마야인에 대한 소설을 만듭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부호를 정확하게 읽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읽은 내용이란 것은 단지 그들의 상상일 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야인의 이름으로 예언에 대해 글을 씁니다. 그들은, 세상이 2012년 12월에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야의 원로들은 이 점에 대해 화를 냅니다. 세상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은 변형(變形: 모양이 바뀌는 것)될 것입니다.”


토속인들은 달력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법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시간 계절 순환에 대한 이해인 마야의 달력은, 거대하고 복잡함을 입증했다. 마야인들은 17가지의 다양한 달력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어떤 것은 1000만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정확하게 도표로 나타낸다. 1987년 이래 꾸준히 세계인의 주의를 끌었던 그 달력은 Tzolk'in 또는 Cholq'ij이라 부르는 달력이다.


수년전 고안되었으며 플레이아데스의 순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그 달력은, 여전히 신성(神聖)한 것으로 여겨진다. 토속 달력들과 함께, 원주민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의 자취를 보존했다. 예를 들면, 달력들을 연구하는 ‘날의 보존자들’은 멕시코인들이 1 Reed, Ce Acatal이라고 부르는 해에 한 중요한 날을 확인했다. 그날은 중요한 조상이 ‘나비처럼 오면서’ 돌아온다고 예언된 그 날이었다. 서구의 달력에서 1 Reed 날은 1519년 4월 21일, 부활절 일요일과 일치하며, 그 날은 Hernando Cortez와 그의 11대의 스페인 군함이 동방(東方)에서 오늘날 멕시코의 Vera Cruz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한 날이다.


스페인 배가 해안을 향해 왔을 때, 원주민들은 그것이 어떻게 오는지 기다리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배들의 부푼 돛은, 정말로 척후병들로 하여금 나비들이 바다표면을 미끄러지듯 가는 것처럼 보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달력을 통해 예상했던 바로 그 시대 말이다.


마야인들은 그 새로운 시대를 9 Bolomtiku 즉 52년 마다의 9 지옥이라 불렀다. 아홉 순환이 펼쳐질 때, 땅과 자유는 그 원주민들에게서 빼앗겼다. 질병과 불경(不敬)이 지배했다. Cortez가 도착하면서 시작된 것은 1987년 8월 16일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날은 많은 사람들이 조화의 집중(調和의 集中)이라고 회상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날을 신성한 장소들에서, 새로운 시대, 즉 다섯 번째 태양의 세계로의 매끄러운 천이(遷移: 옮겨가는 것)를 위해 기도하는 의식을 행하는 날로 이용했다. 배리오스씨는, 그 1987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유물주의적(唯物主義的)인 세계(世界)의 오른팔이 천천히 그렇지만 냉혹하게 사라지고 있는 시간에 있어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평화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어머니 지구와 조화롭게 사는 시대의 시작점(開始點)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네 번째 태양의 세계에 있지 않다. 하지만 아직은 다섯 번째 태양의 세계에 있지도 않다. 지금은 중간의 시기, 천이(遷移)의 시간이다. 우리가 천이(遷移)를 지나감에 따라 어마어마한, 전 지구적인 집중적인 환경파괴, 사회적 혼란, 그리고 진행 중인 지구변화가 있다.


배리오스씨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하고 나선모양인 마야 달력의 수학(數學)을 통해 예견되었습니다. 세상은 바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마야의 ‘시대의 보존자들’은 2012년 12월 21일을 재생(再生)(또는 부활(復活))의 날, 다섯 번째 태양의 세상이 시작되는 날로 봅니다. 그날은, 태양의 자오선(子午線)이 은하(銀河)의 적도(赤道)를 가로지르고 지구(地球)가 은하중심(銀河中心)과 일직선으로 맞추어지는 것 때문에 일어나고 또 그것을 의미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일 것입니다.


2012년 12월 21일의 日出 시기는 26000년 만에 처음으로 태양이 떠서 은하수(銀河水)와 황도(黃道)의 교차점과 합(合: 행성과 태양이 황경(黃經)을 같이하는 현상)을 이룰 것이다. 이 우주적인 교차는, 세계의 모든 영적 전통들에서 기억된 나무인, 신성(神聖)한 나무, 생명(生命) 나무의 구체적 표현으로 여겨진다.


(* 합을 이룰 때 신성한 나무 또는 생명나무라고 불렸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뜻임)


어떤 관찰자들은 2021년의 은하계의 중심과의 이러한 정렬이 우주 에너지가 지구를 통과하며 흐르는 채널을 열 것이라고 말한다. 그 채널은 지구와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것들을 정화(淨化)하고, 모든 것을 보다 높은 진동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배리오스씨는 이렇게 시사했다.


“변화가 지금 가속화(加速化)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계속해서 가속화할 것입니다. 만약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이 2012년에 지구의 너무 많은 것을 파괴하지 않은 채로 컨디션이 좋은 상태로 도달한다면, 우리는 새롭고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길을 막으려는 엄청나게 강력한 권력들을 변형시켜야 합니다.”


그 앞길의 그림은 이렇다. 그의 마야의 전통과 달력에 대한 이해로부터, 배리오스씨는 우리가 도달할 곳과 앞길에 놓일 수 있는 것의 그림을 제공했다. 달력에 2012년의 동지점(冬至點)으로 구체적으로 쓰여 있는 그날은 세상의 끝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다. 마야의 달력에 대한 글을 쓰는 외부의 많은 사람들은 이 날짜를 선정적으로 표현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전통을 지키라고 위임받은 사람들인 토착인 元老들이다.


“인류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물질의 구조가 바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한층 높은 인간이 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야 달력과 마야의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전통의 모든 예언들은 지금으로 수렴(收斂: 한 곳으로 모아지는 것)되고 있다.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 시대의 영적이상(靈的 理想)은, 행동(行動)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각자 그리고 그룹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산족(山族)의 元老들은, 만약 ‘빛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하여 하나로 묶인다면 희망(希望)이 있다고 말했다. 이 점을 회상하면서 배리오스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양극(兩極)의 世界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낮과 밤, 남성과 여성, 긍정과 부정, 빛과 어둠이며,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균형을 잡는 존재입니다.”


“바로 지금은 어둠의 편이 매우 강력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젼과 우선권을 분명하게 갖고 있고, 또한 자신들의 계급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가 나선 모양의 2012년의 다섯 번째 세계와 연결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많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빛의 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 또는 자신들의 그룹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의견들이 있으며, 따라서 경쟁, 산만(散漫)이 있고, 단일(單一)의 초점이 없습니다.”


배리오스씨가 보듯이, 어둠의 편은 부정과 유물주의(唯物主義)를 통해 연합(聯合)을 방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쪽은, 지구가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빛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오래되고, 쇠퇴하고 있는 네 번째 세계, 즉 유물주의(唯物主義)의 에너지를 좋아한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합(聯合)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수준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고 다음 수준을 걱정한다.


쇠퇴중인 네 번째 세상의 어두운 힘은 파괴되거나 제압될 수 없다. 그것은 그 점에 대해 너무 강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릇된 전략이다. 어둠의 편은, 순박함과 숨기지 않음과 직면할 때만 변형(變形)될 수 있다. 이 ‘순박함과 숨기지 않음’은 연합(聯合)으로 이끄는 것이며, 다섯 번째 태양의 세계에 대한 핵심 개념이다.


배리오스씨는,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는, (과거엔) 많이 간과되었던 요소에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지구(地) 공기(風) 불(火) 그리고 물(水)이라는 네 가지 전통적인 요소[四大]들이 여러 시대를 지배한 반면,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엔 그에 더하여 다섯 번째 요소, 즉 에테르[空]가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辭典)은, 에테르를 천상(天上)의 정세(精細:정밀하고 가는 것)하게 된 요소라고 정의(定義)한다. 에테르는 매개체이다. 그것은 모든 공간(空間)에 침투하며, 휴대폰[cell phone]에서 인간의 오라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주파수에 걸쳐서 에너지 파동을 전파한다. ‘하늘의 것’인 것은 지구를 넘어선 영역, 즉 천상(天上)과 관련된 것이다.


다섯 번째 태양의 요소인 에테르는 천상의 것이며, 물질적인 재료가 없다. 하지만 나무나 돌 또는 고기보다 덜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배리오스씨는 말했다.


“에테르의 환경 안에서는 양극(兩極)의 연합(聯合:서로 합동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더 이상의 어둠이나 빛이 없습니다. 향상된 연합(聯合)(또는 융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은 어둠의 영역은 이 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연합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와 그 환경의 균형을 깨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2012년에 있을 정렬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도록 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상대편과의 평화(平和)와 균형(均衡)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먹여주고 피난처가 되어주는 지구를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전 마음과 가슴을 통일(統一)과 연합을 추구하는데 써야 한다. 그리하여 상대편을 직면(直面)하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


배리오스씨는 산타 페에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 이 순간에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지러운 상태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놀이를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행성은 새로워 질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깨어야 할 시기 행동해야 할 시기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중요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특별한 때입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배리오스씨는 사람들이 다가 올 몇 년간 균형 있게 걸어가도록 돕기 위한 많은 제안들을 제공했다.


“예언된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그 변화가 얼마나 혹독할지 혹은 가벼울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를 이해하는 사람, 지구를 존경할 정치적인 행동을 할 사람을 우리의 대표자로 뽑을 필요가 있습니다.


“명상과 영적 수련도 좋습니다. 하지만 행동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 여러분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전통과 여러분의 마음이 요청하는 것에 따라 여러분을 개발하십시오. 하지만 서로간의 차이점을 존중하고 연합을 위해 애써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현명하게 먹으십시오.(ormus가 풍부한 음식) (현재) 많은 음식들이 미묘하거나 거친 방식으로 원형(原型)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날은 GMO 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음식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 안으로 섭취하고 있는 것에 주의(注意)를 기울이십시오. 음식을 보존하는 법과 에너지를 보존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어떤 훌륭한 호흡하는 기술을 배우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호흡에 통달하십시오. 명쾌하십시오. 훌륭한 뿌리를 가진 전통을 따르십시오. 어떤 전통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이 여러분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훌륭한 뿌리를 가진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 즉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의 에너지를 감각(感覺)하고 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다섯 번째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다섯 번째 태양의 세계는, 에너지가 사는 곳이자 짜지는 영역인 에테르 요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신성한 곳에 가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옷을 제공하고 피난처를 제공하는 지구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성스러운 곳의 에너지를 다시 가동(可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많은 강력한 힘을 가진 영혼들이, 많은 힘을 가진 이 시대에 환생(還生)해 있다. 이 점은 빛과 어둠, 양쪽 모두에게 사실이다. 양쪽 모두에게 높은 마술적인 법(魔法)이 작용하고 있다. 사물은 바뀔 것이지만, 변화가 실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혹은 쉬울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지금의 경제(經濟)는 하나의 허구이다.(* 사실상 무너진 상태이며, 지금의 세계 경제는 마치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여 목숨을 연장하고 있는 환자와 같음) 1987년 8월에서 1992년 8월까지의 변이(變移: 바뀌어 변함)의 첫 5년간의 기간은 물질세계가 파괴되는 시작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변이의 상태 안으로 10년을 더 깊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른바 재정안정(財政安定)의 원천의 많은 부분이 사실은 속 빈 강정이다. 은행(銀行)들은 취약하다. 지금은 은행에겐 신중을 요하는 순간이다. 은행들은, 만약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전 지구적으로 파산할 수 있다. 만약 은행이 파산하면, 우리는 땅과 우리 자신의 기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화폐 시스템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음식과 피난처를 얻기 위해 지구와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지해야 한다.


북극과 남극은 다 함께 무너지고 있다. 바다의 수위(水位)는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바다의 땅은, 특히 쿠바 근처는 상승할 것이다.


연합을 위한 부탁 : 산타 페에서 청중을 만났을 때, 배리오스씨는 과테말라에서 있었던 가장 최근의 ‘마야의 새해맞이 의식(儀式)’에 대해 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말하기를, 고립된 산속 동굴 속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한 존경받는 맘 종족의 元老께서 Chichicastenango로 여행을 와서는 그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분은 간단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인류가 생명과 빛을 옹호하며 함께 모일 것을 요구했다.


“한 가지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기도법은 이렇습니다. 1. 흰색 또는 엷은 푸른빛으로 채색된 양초에 불을 붙이고, 2. 平和로웠던 순간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의 의도(意圖)를 그 불꽃을 향해 말하고, 4. 그 양초의 빛을, 전쟁이나 평화를 만들 힘을 가진 지도자들에게 보내십시오.”


배리오스씨에 따르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이 시기는 인류에게, 지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각자가 중요하다. 만약 여러분이 이 시대로 환생했다면, 여러분은 행성에 균형을 가져오기 위해 해야 할 영적인 일을 갖고 있다. 그는, 元老들이 다른 종족들이 마야의 세계에 와서 그들의 전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마야인들은 다른 색깔, 다른 종족, 그리고 다른 영적인 체계가 있음을 오랫동안 인정하고 또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분들은 마야인의 운명이 전 세계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배이오스씨는 산타 페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혜는 ‘단순성’에 있습니다. 사랑, 존경, 관용, 공유(共有), 감사(感謝), 용서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지식은 속박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DNA안에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여러분 내면에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심장(heart)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희토류 원소(稀土類元素, 영어: rare earth elements, rare earth metals)는 주기율표의 17개 화학 원소의 통칭으로, 스칸듐(Sc)과 이트륨(Y), 그리고 란타넘(La)부터 루테튬(Lu)까지의 란타넘족 15개 원소를 말한다. 종종 악티늄족 원소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희토류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불안정 원소인 프로메튬을 제외하면) 지구의 지각에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분포한다. 세륨은 68 ppm으로, 지각을 구성하는 원소 중 25번째로 풍부한 원소로 구리와 비슷한 양이다. 그러나 지구화학적 성질로 인해, 희토류 원소는 경제성 있는 농축된 형태로는 거의 산출되지 않는다. 광물 형태로는 희귀한 원소이므로 "희토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희토류 원소를 포함한 광물 중 처음 발견된 건 스웨덴의 위테르뷔에서 발견된 가돌리나이트이다. 많은 희토류 원소가 위테르비의 지명에서 기원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위키백과


세계의 희토류 산출량 (1950~2000)


지난 수십 년 동안 중동은 석유로 세계경제에 만만찮은 영향력을 미쳐왔다. 그런데 앞으로 수십 년은, 중국이 ‘희토류’로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 중순 중국이 희토류 세계시장을 조작하고 있다며 유럽연합(EU)·일본과 함께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중국은 세계의 희토류 생산량 중 90% 이상(95% 이상으로 추정되기도 함)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수출 물량을 크게 제한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선진국들이 일제히 반발하는 것이다.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metals)란 문자 그대로 디스프로슘, 네오디뮴, 란탄, 테르븀, 사마륨 등 ‘희귀한 광물질’ 17종을 가리키는 용어다. 용도는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 LCD, 의료영상기기(MRI와 엑스레이 등), 하이브리드 자동차, 녹색 에너지까지 하이테크 제품에 집중되어 있다. 예컨대 란탄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다. 테르븀을 사용해야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전기 사용량을 80%까지 절감할 수 있다. 희토류가 없다면, 벽돌보다 작은 스마트폰은 만들기 힘들다. 2025년까지 미국 자동차의 연비를 현재의 두 배로 올리겠다는 오바마의 국가전략적 산업정책도 희토류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군사적으로도 희토류는 대단히 중요하다. 사마륨은 유도 미사일, 란탄은 야간 고글 생산에 사용된다.


1960년대부터 텔레비전 브라운관 원료로 쓰이기 시작했던 희토류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것은 최근의 기술혁신 때문이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희토류 수요는 연간 4만 메트릭톤(metric tons)에서 12만5000메트릭톤으로 3배 불어났고, 2014년에는 20만 메트릭톤을 넘을 예정이다.


희토류 채굴에 천문학적 비용


그런데 사실 희토류는 이름과 달리 그리 희귀하지는 않은 광물이다. 납이나 구리처럼 지구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단, 대량 채굴이 가능한 곳은 많지 않다. 더욱이 희토류는 방사성 물질 등 인체에 해로운 광물과 같이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채굴에 엄청난 비용이 든다.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내야 하는 서구의 민간 기업으로서는 ‘희토류 채굴업’에 뛰어들 만한 인센티브가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미국에서 희토류 채굴업을 하려면, 10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15년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중국에는 내몽골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희토류 지역이 존재하고, 국유 광업 기업들이 있어서 단기수익과 상관없이 희토류 채굴업을 할 수 있다. 더욱이 노동 및 환경 규제가 느슨하다. 덕분에 중국이 지구 시장의 희토류 독점 공급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방 각국 희토류 확보 전략 마련


문제는 독점 공급자인 중국의 수출정책에 따라 세계시장이 춤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지난 6~7년 동안 수시로 수출을 제한해 희토류 가격을 치솟게 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모는 2005~2010년 사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에 따라 산화 란탄의 경우 2010년 초에는 1㎏당 5달러였던 것이 지난해 7월 140달러, 같은 해 11월 62달러로,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2010년 한 해만 봐도, 디스프로슘은 ㎏당 300달러에서 1900달러로, 네오디뮴은 45달러에서 450달러로 치솟았다. 더욱이 중국은 국내 기업에는 수출가보다 30~40% 싼 가격으로 희토류를 공급한다. 이는 해외 기업을 중국으로 유치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화’하는 현상까지 실제로 나타났다. 2010년 일본이 분쟁 지역인 동중국해 일대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들을 나포하자 중국이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금지한 사건이 그것이다. 일본은 즉각 중국 선원들을 석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환경오염을 핑계로 희토류 수출 제한을 공언한다. 지난 3월10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환경오염을 이유로 희토류 채굴 제한이 발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중국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WTO에 제소하고 다른 편으로는 다양한 희토류 확보 방안을 모색 중이다. 특히 미국은 자유시장 원칙 따위와 상관없이 희토류 산업을 국가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간 기업의 투자와 국가 지원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경우, 콜로라도 주의 몰리코프(Molycorp) 사가 캘리포니아 사막 지대의 희토류 산지를 다시 채굴하기로 했다. 2002년 환경문제로 채굴이 중단된 지역이다. 몰리코프는 이 사업을 위해 지난해 7월 주식시장에서 4억 달러를 조달했다. 최근에는 캐나다의 희토류 정제 업체를 13억 달러에 인수했다. 그러나 민간 기업이 가격 변동이 심한 희토류 부문에 이 정도의 대규모 투자를 쏟아 붓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유력 경제지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블룸버그>가 ‘국가 차원의 지원’을 역설하기도 한다. “WTO에 중국을 제소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희토류가 미국 경제와 국방에 미치는 중요성을 볼 때 미국 정부는 몰리코프와 다른 관련 기업들의 성공을 위해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 미국 의회 역시 국방부에 희토류 확보 방안을 제출하라고 압박을 가해왔다. 조만간 이에 대한 의회 브리핑도 이뤄질 예정이다. 미국의 경우, IT나 제약 같은 첨단산업 부문에서 국가 주도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져왔다. 희토류 산업도 같은 발전 경로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한편 광업이 기간산업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라이너스(Lynas), 에어러퓨러 리소스(Arafura Resources) 등 광업 부문의 대기업들이 최근 10억 달러 규모의 투자나 정제공장 설립 등으로 희토류 산업에 뛰어들었다.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태 직후인 1992년 초 ‘남순강화(중국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개혁·개방의 가속화 촉구)’에 나서며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엔 희토류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은 30년 뒤 희토류 세계시장의 지배자로 성장했다. <블룸버그>는 이 발언을 인용하면서 “중국 정부가 희토류 가격을 올리거나 공급을 중단하는 사태에 대비해, 국방부는 몰리코프와 장기 매입 계약은 물론 라이너스 같은 비중국 기업과도 협력해서 공급을 다변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희토류를 매개로 한 서방세계의 대중국 연합전선 결성을 촉구한 것이다.

- 시사IN



중국의 희토류 자원무기화에 대한 대응 움직임


지난 12일 일본 언론은 히타치제작소와 히타치산기시스템의 공동연구팀이 희토류 금속을 포함한 자석을 사용하지 않는 에너지 절약형 산업용 모터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모터의 핵심 부품인 철심에 비정질 금속을 채용하는 방법으로 네오디뮴과 디스프로슘 등의 희토류 자석을 사용하지 않는 고효율 영구자석 모터를 개발한 것.


이 연구팀은 이미 지난 2008년에 희토류 금속을 사용하지 않는 모터의 기초기술을 개발한 바 있으나, 대용량화와 고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번에 구조의 최적화와 철심의 손실 저감 등의 응용기술을 개발해 중형 용량급 모터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 개발한 모터는 국제전기표준회의(IEC)의 모터의 에너지 효율 가이드라인의 최고 수준에 대응이 가능한 93%의 에너지 효율을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2014년부터 시중에 나올 전망이다.


이 모터의 개발이 특히 화제가 된 이유는 최근 긴박한 과제로 부상한 탈 희토류 기술의 개발이란 점 때문이었다. 


희토류 수출금지로 영유권 분쟁 대응


2010년부터 중국은 자국 내 희토류 생산량을 제한하고 희토류에 부과하는 세금을 대폭 인상하는 등 정부 통제하에 희토류를 자원무기화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여왔다. 특히 최근에는 자국 언론매체를 통해 오는 6월부터 희토류를 ‘국가전매 대상’으로 편입해 관리할 예정이라고 시사했다.


이는 중국이 희토류 개발을 줄임으로써 이에 대한 가격통제를 통해 대외 수출량을 제한하겠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중국은 현재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의 97%를 공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희토류 사용량을 저감시키거나 대체원소의 이용, 종래와 다른 원리로의 부품개발 등 탈 희토류 기술개발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난 2010년 영유권 분쟁에서 희토류 수출금지라는 뜻하지 않은 철퇴를 맞은 경험을 가진 일본에서 특히 활발하다.


히타치의 모터 개발 외에도 일본은 지난 3월 희토류 원소의 일종으로 액정 TV 등의 유리기판 연마재로 사용되는 산화세륨의 사용량을 저감한 다수의 신규 연마 재료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새롭게 개발한 연마 기술 중 하나는 산화세륨 연마용 입자 대신에 금속 산화물 가루를 넣은 산화지르코늄 연마용 입자를 이용한 것으로서, 마감 품질은 그대로 유지한 채 유리를 연마하는 시간을 2/3로 줄였다. 


또 산화세륨 연마용 입자 대신 금속염을 배합한 산화지르코늄 연마용 입자를 이용한 기술도 개발했는데, 같은 연마 시간에 평활성이 보다 뛰어난 연마가 가능하다. 이들 기술에 의해 세륨을 사용하지 않고 연마가 가능해졌다.


이 기술들의 개발은 일본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에서 추진하고 있는 ‘희소금속 대체재료 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또 미쓰비시전기와 니혼덴산 등에서도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용 모터에 희토류를 사용하지 않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희토류 영구자석 저감형 기술 개발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희토류 자원무기화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개발 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1일 한국전기연구원(KERI)은 반도체, IT, 디스플레이 분야 제조 설비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구자석 선형전동기에 비해 훨씬 낮은 비용으로 생산이 가능한 희토류 영구자석 저감형 고정밀 위치제어용 전동기 기술인 ‘이중돌극형 영구자석 선형전동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기술은 기존 영구자석 선형전동기와 동등 수준의 성능을 구현하면서도 고정자에 영구자석을 ‘N-S-N-S…’ 형태로 배치하지 않고 ‘N-철심-N-철심…’ 형태로 배치함으로써 희토류를 사용해야 하는 영구자석의 총 사용량을 40% 가량 줄어들게 했다. 


선형전동기는 산업 전반에 걸친 기초 기반 제품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특히 반도체 산업 및 IT 산업의 발전에 따라 관련 장비업체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품목이다. 연구팀은 해당 기술이 정밀위치제어응용 시스템, 직접구동 장거리 반송시스템, 자동화장비,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장비의 이송용 구동기, 공작기계, 검사장비의 이송계, 로봇 등 다방면에 걸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폐자동차에 포함된 희토류의 회수율을 높여 재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해 10월 국내 자동차 제조 5사(현대‧기아차, 한국지엠, 쌍용자동차, 르노삼성자동차)와 폐자동차 자원화를 위한 자발적 협약을 맺은 데 이어 지난 3월에는 한국지엠과 쌍용자동차,르노삼성자동차와 폐자동차의 금속자원 회수와 폐냉매의 적정 처리를 위한 ‘폐자동차 자원순환체계 선진화 시범사업’ 협약을 체결했다.


폐자동차에는 온실가스인 냉매와 유해중금속 등이 포함돼 있어 함부로 버리면 폐기물로서 심각한 환경오염을 유발하지만, 철‧비철 등은 물론 희토류 등 다량의 희유금속을 함유하고 있어 이를 회수해 재활용하면 오히려 ‘자원의 보고’가 된다.


그러나 고철 등 유가성이 높은 물질만 재활용돼 현재 재활용률이 84.5%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올해 폐자동차 2만2천600대에 대해 폐자동차 재활용률을 95%(2015년 법정목표)까지 올리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제조사는 폐차장 및 폐차 재활용업체 등과 친환경 폐차 재활용체계를 구축하는 등 제조사와 재활용업계 간 상생협력을 도모할 예정이다.


환경부는 ‘폐금속‧유용자원재활용기술개발 사업단’ 등을 통해 자동차 재활용 부분에 R&D 지원을 확대하며 자동차 제조사의 노력을 뒷받침할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친환경 폐차사업장에 대한 홍보 및 포상 등 인센티브 제공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The ScienceTimes


일본 부자들의 '탈출 러시', 그들은 어디로 가나?
2012.02.20 

엔고, 비싼 연료비, 높은 전기 요금 등으로 일본 기업들의 해외이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기업 경영자나 부유층들도 연이어 일본을 떠나고 있다고 일간 겐다이 인터넷판이 17일 보도했다.

지난달에는 광학 렌즈 회사인 호야(HOYA)의 스즈키 히로시(53) 사장이 싱가포르로 이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앞으로 싱가포르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며 이사회가 열리는 경우에만 일본에 귀국한다. 이미 베네세 홀딩스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66)이 뉴질랜드로 이주했으며, 생활용품 기업인 썬스타의 카네다 히로오 회장(76)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겨 현지 법인 대표로 취임했다.

요즘 일본 부자들 사이에서는 자산의 해외 이전이 가장 큰 이슈다. 자산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자산 플라이트'라는 제목의 세미나와 강연 등이 잇따라 열리고, 이민 등의 방법으로 자산의 해외이전을 준비하는 부유층들이 몰려들고 있다.

해외 이주를 검토 중이라는 50대 IT기업 경영자는 겐다이와의 인터뷰에서 "세금제도가 유리한 싱가포르로 이주를 생각하고 있다"며 "일본에서는 개인 소득세가 최대 40%에 이르지만, 싱가포르는 최고 세율이 20%이고 주민세는 없다. 또 일본에서는 최고 50%에 이르는 상속세 및 증여세도 싱가포르에는 없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외에 일본 부자들이 이주국으로 선호하는 뉴질랜드는 소득세가 최고 33%이며, 스위스도 25 %로 일본보다 싸다. 또 지진이나 방사능으로 인한 위험, 정치에 대한 불신 등이 부유층들의 해외이주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자들의 해외이주는 결국 샐러리맨과 서민층의 부담만 늘릴 것이라는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결국 부유층들로부터의 세금이 감소하면 부담이 국민들 전체에게 돌아가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될 수 밖에 없다고 겐다이는 전했다.
-중앙일보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일본 '앞날에 대한 불안', 일본 부자들의 자산 '엑소더스'
엑소더스는 탈출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 일반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특정 장소를 떠나는 상황을 의미한다.  
2011.10.17 
 
일본에서 상장사를 경영하는 40대 중견기업인 A씨는 지난 3월11일의 대지진 이후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를 대거 처분했다. 적지 않은 자산을 현금화한 그는 이후 해외 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난생 처음 겪은 대지진과 원전사고, 수십 년 째 이어지는 저성장고 엔고, 종잡을 수 없이 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은 일본에 전 재산을 묶어 두는 것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엔화가치가 달러당 70엔대까지 치솟으며 해외 자산을 매입하기에 유리한 여건이 형성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국내 자산에서 해외 자산으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안전을 찾아 외국으로 옮겨둔 것은 자산뿐이 아니다. 후쿠시마(福島) 제1 원전사고로 방사능 공포가 지속되면서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싱가포르로 터전을 옮긴 상태다. 

일본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 속에 일본에서 부자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일본의 경제 주간지인 다이아몬드는 지진과 방사능의 공포, 정체된 경제와 국정 혼란, 재정난, 그로 인한 국력 저하 등 총체적인'재팬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수십억 자산을 보유한 부유층들의 '일본탈출'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최신호에서 보도했다.

사상 초유의 엔고를 견디다 못한 기업들이 일본 본토를 등지는 '산업 공동화'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일본이 직면한 온갖 리스크를 피해 거액의 국내자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자산 공동화'가 진행되기 시작됐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금융회사들의 프라이빗뱅킹(PB) 창구에는 해외 계좌개설이나 자산 매입에 대한 문의가 끊이지 않고 않고 있다고 다이아몬드지는 전했다. 한 대형 신탁회사 관계자는 "지진 이후 현금을 스위스 등 외국 계좌로 옮기겠다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며 "수억엔 규모로 자산을 이전한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한 40대 자산가의 경우 약 10억엔(154억원 상당)에 달하는 보유 자산 가운데 엔화 자산은 30%에 불과하다. 달러와 유로화 표시가 각각 30%, 신흥국 자산이 10%에 달한다. 실제 일본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의 금융자산 가운데 지난 4분기 연속 자금이 순유입된 부문은 해외 주식이 유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시장도 사장은 비슷하다. 신탁업계에 따르면 도쿄 내에서 매입할 토지를 물색하던 '큰 손' 고객이 대지진 이후 갑자기 매입 희망지역을 하와이로 바꾸는 등 부유층 고객들이 국내에서 해외 시장으로 빠르게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외국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40대 안팎의 비교적 젊은 자산가들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부유층비즈니스연구회를 주관하는 후나이종합연구소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해외로의 자산 이전이 금융에 대한 전문지식이 높은 부유층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지금은 보수적인 고령의 부유층까지도 자산의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우 통상 부동산을 제외한 순금융자산 1억엔(15억4,000만원 상당) 이상의 자산가를 일컫는 부유층 가운데 고령층이 상당수에 달한다. 미국의 컨설팅업체인 캡제미니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부유층 가운데 만 31세 미만 청년 자산가는 세계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 수준인 반면, 66세 이상 노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47%에 달해 세게평균 29%를 크게 웃돈다. 56세 이상은 80%에 달한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들 보수적인 고령 부유층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경우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개인자산이 빠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보수적인 고령층까지 움직이게 만드는 '재팬 리스크'는 다각도에서 일본 부자들의 불안심리를 들쑤시고 있다. 초유의 엔고로 인한 기업 경쟁력 약화와 산업 공동화에 대한 우려, 대지진과 원전 사고로 인한 신체적 안전 리스크,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증세 가능성, 장기적으로 재정이 파탄나면서 국채가 폭락하고 엔화가 급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우려, 정부의 리더십 부재와 정국 혼란 등이 모두 부유층이 일본에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여기에 대지진 이후 지속되는 초유의 엔고(円高) 현상은 해외자산 매입을 더욱 부추기며 자산 공동화를 초래하고 있다. 국가에 신뢰가 떨어진 상태에서 엔고로 해외 자산을 저렴하게 매입할 기회가 마련되자 기존에 보유했던 국내 주식이나 부동산에서 해외 자산으로의 갈아타기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이 금융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일본의 한 대형 증권사 지점장은 "엔고로 인한 산업 공동화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그와 동시에 진행되는 '국민자산 공동화'야 말로 중요한 이슈"라고 지적했다. 

일부 부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자산뿐 아니라 가족들이 외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기업가 비중이 높은 부유층 사이에서는 회사의 해외진출 등을 이유로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해외 이주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것도 한몫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원전사고 이후 방사능에 대한 공포다. 

다이아몬드지는 "과거에도 세금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자산을 빼돌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지진을 기점으로는 부자들이 일본에 불안감을 느껴 본격적으로 자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재팬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부유층을 충심으로 시작된 자산 유출이 인적 유출로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경제 신경립기자 klsin@sed.co.kr 


석양빛이 반사된 폭포가 용암이 흐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핵실험 영상



1945년 ~ 1998년까지 핵실험 및 핵공격(2053회)

 
세계각국의 핵실험 현황

핵실험은 핵무기의 성능을 확인하고 성능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핵무기를 설계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하여 실시합니다.

최초의 핵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뉴멕시코 사막에서 실시되었고 이후 2차대전이 끝난 후 러시아(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의 순서로 핵무기를 개발하여 핵실험을 실시하였습니다.
 
핵실험은 초기에는 대기권에서 실시되었으나, 방사성 낙진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로 핵실험에 대한 비난이 강해지자 1963년 발효된 미-소간의 부분핵실험 금지조약을 계기로 점차 지하핵실험만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프랑스는 1974년까지 중국은 1980년까지 대기권 핵실험을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핵실험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기 위한 핵실험완전금지조약(CTBT : Comprehensive Test Ban Treaty)은 강대국의 비준 거부 등 조약이 발효되기 위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아직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핵실험은 총 1,851회이며 각국별 핵실험 횟수는 표를 참조해 주십시요.

각국의 최초 핵실험 관련 사항

이미지: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각국의 알려진 핵실험 실시 횟수
(본 통계는 북한 핵실험 실시 이전까지의 수치를 근거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미지: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오늘은 John Kozy라는 전직 철학/논리학 교수가 쓴 글을 올려 봅니다. 논란의 소지가 있을 듯 한데요, 저 역시 이 사람의 주장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되는 부분도 많이 있어서 올립니다. 종교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그건 핵심이 아니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어쨌든, 저자는 종교인은 아닌 듯)

 
The Crisis of Education in America: "How to Become a Serf"
A society in which people exist for the sake of companies is a society enslaved
 
미국 교육 시스템의 위기: “노예가 되는 방법”
기업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는 노예 사회다
 
Man is a pathetic creature; a brute trying to be god but traveling in the wrong direction.

인간은 참으로 한심한 존재다; 신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짐승이다.
 
For many years, I have been troubled by what I saw as the results of what passes for education in America and perhaps elsewhere too. Why is it, do you suppose, that one generation does not seem to get any smarter than the previous one? Oh, it may know more of this or that, but what it "knows" does not translate into smarts. In other words, why don't people ever seem to get wiser? Why do they repeat the same mistakes over and over?
 
나는 지난 수년간 미국(외국 국가들도 해당될 것으로 생각됨)의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의 실체를 지켜보며 근심해 왔다. 여러분은 새로운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똑똑해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물론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이것저것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 – 하지만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즉, 왜 새로운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현명해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왜 그들은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일까?
 
For centuries, an education was thought to be comprised of considerably more than one providing the skills and requirements needed to carry on a trade or profession. For instance, consider this passage:
 
지난 수백 년 동안 교육은 단순히 어떤 일이나 직업상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크고 광범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다음 인용문을 한 번 읽어보자:
 
"Education is not the same as training. Plato made the distinction between techne (skill) and episteme (knowledge). Becoming an educated person goes beyond the acquisition of a technical skill. It requires an understanding of one’s place in the world - cultural as well as natural - in pursuit of a productive and meaningful life. And it requires historical perspective so that one does not just live, as Edmund Burke said, like 'the flies of a summer,' born one day and gone the next, but as part of that 'social contract' that binds our generation to those who have come before and to those who are yet to be born.
 
“교육과 훈련은 다른 개념이다. 플라톤 역시 기술(techne)과 지식(episteme)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습득을 넘어서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은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문화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Edmund Burke가 얘기했던 것처럼, 인생은 하루살이처럼 어느 날 태어났다가 어느 날 부질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대를 이전 세대/다음 세대와 연결시켜 주기 위한 사회적 계약과 역사 인식을 필요로 한다.
 
An education that achieves those goals must include the study of what Matthew Arnold called 'the best that has been known and said.' It must comprehend the whole - the human world and its history, our own culture and those very different from ours. . . ."
 
이와 같은 교육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Matthew Arnold가 얘기했듯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최고의 지식과 지혜”가 습득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세계와 역사, 우리의 문화, 그리고 남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해가 요구된다는 얘기다.”
 
This idea of an educated person was often summarized in the phrases, a Renaissance man, and un homme du monde. But these expressions are hardly heard any more. Educated people no longer exist. We are nothing but the monkeys of hurdy gurdy grinders, tethered to grinders' organs with tin cups in hands to be filled for the benefit of the grinders.
 
과거의 식자들은 이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을 “르네상스 맨”, 또는 “un home du monde(The man of the world)”라 칭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표현을 좀처럼 들을 수 없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연주자의 악기에 묶여 철제 캔을 들고 재주를 부리며 연주자의 배를 불려주는 원숭이들에 불과하다.
 
"Governor Rick Snyder wants to tie retraining programs to companies' needs . . . and encourage more Michigan residents to earn math and science degrees under an initiative aimed at making workers more competitive in the global marketplace."
 
“Rick Snyder 주지사는 기업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재훈련 프로그램을 개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Michigan 주의 주민들이 글로벌 마켓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수학과 과학 분야의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The hurdy gurdy grinder's monkey exists for the sake of the organ grinder; Governor Snyder wants Michigan's residents to educate themselves for the sake of companies. Workers are to fulfill companies' needs rather than vice versa. President Obama has said similar things.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는 연주자를 위해 존재한다 – Snyder 주지사는 주민들이 기업을 위해 교육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를 위해 기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위해 노동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Obama 대통령도 이와 같은 뉘앙스의 발언을 한 바 있다.
 
But there's something wrong, something terribly wrong, with this picture. A society in which people exist for the sake of some non-human entity is a society enslaved. And this picture gets even more horrid with the realization that workers are expected to pay to acquire the required skills. Students are being asked to pay for the privilege of becoming serfs.
 
하지만 이 주장에는 아주 큰 오류가 있다. 인간이 아닌, 어떤 독립체를 위해 인간이 존재해야 하는 사회는 결국 노예 사회다. 게다가 노예 노릇을 하기 위해 노예가 자기 돈을 들여 기술까지 습득해야 한다는 현실은 더욱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은 노예가 되기 위한 영광을 얻기 위해 큰 돈을 지불하고 있다.
 
Living things in the natural world exist as ends in themselves. Everything they do is done for their own benefit or the benefit of their offspring. Horses in the wild do not acquire skills in order to perform tasks that benefit other horses. When a human being acquires a horse and trains it to perform a skill for the person's benefit, the person provides for all the natural needs of his horse. Horses don't come begging to be trained to be ridden. What kind of perversion is the requirement that people should beg to be trained to be serfs?
 
자연의 세계에 서식하고 있는 생명체들은 말 그대로 매우 자연스러운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과 새끼들을 위해 일을 한다. 야생마는 동료 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기술을 연마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을 구입하여 훈련을 시키고, 말이 자연적으로 필요로 하는 요구사항들을 충족해 준다. 하지만 말이 자신을 훈련시켜 달라고 인간을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노예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 구걸을 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변태적인 현상인가?
 
But neither a hurdy gurdy grinder's monkey or a riding horse are educated; they are trained. There is no such thing as a Renaissance monkey!
 
하지만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도, 승마용 말도 교육을 받지는 않는다 – 오로지 훈련을 받을 뿐이다. “르네상스 맨”은 있어도, “르네상스 원숭이”는 없다!
 
Education in America, and perhaps other places too, is as fractured as shattered glass. The federal agency called the Department of Education's only power is the ability to cajole schools mainly by offering them money. There are public and private schools, and the public ones are governed by local school boards, the members of which are not even required to be able to read or write. State school boards exist to have some influence over local boards, but again, the power of the states is limited. Education in America is a local affair. The people on these school boards are the ones that control what is and how it is taught. For instance, creationism is often given equal standing with evolution. Students are often required to engage in practices that are clearly unconstitutional. All of this is done to suit the views of school board members, not society or even students.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교육 시스템은 깨진 유리창이나 다름 없다. 교육부라 불리는 연방 기관이 가진 유일한 권한은 돈으로 학교들을 꼬드기는 것 뿐이다.

공립과 사립 중 지역 교육 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곳은 공립학교이며, 위원회에서 활동하기 위한 채용 조건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요구사항 조차 명시되어 있지 않다. 지역 위원회들을 통제하는 주립 교육 위원회가 상위에 있긴 하지만, 역시 주 정부의 권한은 여로 모로 제한되어 있다. 오늘날 미국의 교육은 지역 레벨에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고 있다. 지역 교육 위원회에 속해 있는 인사들이 사실상 어떤 것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창조론과 진화론을 동일한 비중으로 가르치는 학교들도 있다. 학생들이 위헌의 소지가 있는 활동에 참여할 것을 강요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의 발전이나, 심지어 학생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위원회를 위한 것들이다.  
 

Teachers are certified by subject matter. Perfectly good mathematics teachers may not be able to write literate essays. English teachers are not required to understand even elementary algebra. The schools do not employ hommes de monde. And what is true in the primary and secondary schools is also true in colleges and universities. Les specialistes rule the classroom. Trained monkeys all!
 
교사들은 오로지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서만 평가를 받는다. 글을 못 쓰더라도 셈만 잘 할 줄 알면 수학 교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기초적인 대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영어 교사가 될 수 있다. 학교들은 “hommes de monde”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인재들을 채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초등학교 1,2학년 과정 뿐 아니라, 대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오로지 교과목 내용에 해당되는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교사가 될 수 있다. 모두 다 잘 훈련 받은 원숭이들인 것이다!
 
Now vocational training works, of course, if people know what industries need workers and if workers want those jobs. But often, especially in times of crisis, this knowledge doesn't exist. Yet there's a deeper problem with the notion that education should equal vocational training. To paraphrase a very famous and renowned person, man does not live by work alone. Indeed, the knowledge and skills needed to earn a living in a capitalist industrial economy are of little use in human relationships, and human relationships are the core of everyone's life.
 
물론 어떤 업계에서 인력을 필요로 하고, 어떤 구직자들이 어떤 직업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면 직업훈련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교육과 직업훈련을 동일시하는 대중의 인식이다.

어느 유명한 인사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직업만으로는 살 수 없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사회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은 인간관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하지만 모든 인간들의 삶의 핵심은 인간관계다.
 
Although the United States is often referred to as a multicultural melting pot, most highly developed nations today have multicultural populations. Different cultures embody different values. Those values often clash and erupt in violent behavior. If people understood these cultural differences, these clashes could be ameliorated. But schools devoted to vocational training provide no venue for teaching cultural differences, for trying to understand the person who lives next door or in another country. Various value systems are never evaluated, and alternatives are never considered. As a result, although we all live on the same planet, we do not live together. At best, we only live side by side. At worst, we live to kill each other.
 
가장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실 요즘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이러한 양상을 띠고 있다. 다양한 문화는 곧 다양한 가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가치는 언제든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으며, 가치의 충돌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돌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화의 차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 옆 집에 사는 이웃, 그리고 다른 나라에 사는 국민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가치 시스템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차선책도 고려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기껏해야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수준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살아간다.
 
Education as vocational training reduces everything to ideology. Religion is an ideology and no one ever questions a person's right to her/his own. Economics, although often touted as a science, is an ideology. Part of free market economic theory is the belief that when an established industry falters and declines, some new industry will come forth and employ the newly unemployed. But nothing in economics can compel that to happen. This belief is akin to the belief in a Second Coming. It is purely ideological. Even science has become an ideology. People believe, for instance, that science will discover solutions to all of our problems. But again, there is nothing in science that compels that. It is perfectly possible that, as human beings destroy their environment, science will be unable to correct the damage and that life on this planet will perish. Worse, ideologies contribute to human stupidity; our devotion to them causes us to reject the stark realities that stare us in the face. (See here and here.)
 
직업훈련을 목표로 하는 교육은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다. 종교도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며, 어느 누구도 타인의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경제(비록 과학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지만)도 이데올로기다. 자유시장 경제학 이론에서는 잘 나가는 업계가 위기를 맞아 휘청거리고 관련 직종 종사자들이 직업을 잃게 되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업계가 등장하여 실직자들을 다시 고용하게 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경제학의 어떠한 요소도 이를 보장할 수 없다. 이 이론을 믿는 것은 마치 예수의 재림을 믿는 것과 비슷하다.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과학도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어떤 요소도 이를 보장할 수 없다. 인간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지구의 환경을 파괴시키면 과학으로도 이를 고칠 수 없게 되고, 이 행성에는 더 이상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데올로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코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So what is required if we are to make one generation smarter than the previous one? We need to educate Renaissance men who comprehend the whole human world, its history, our own culture, and those very different from ours. Vocational training will never produce such people.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똑똑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될까? 우선 교육을 통해 인간 세계, 역사,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아우르는 전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르네상스 맨들을 길러내야 한다. 직업훈련을 통해서는 이러한 인재를 절대로 양성할 수 없다.
 
John F. Kennedy was glorified when he said,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but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Shouldn't he have been vilified? Do countries exist to benefit their peoples or do their peoples exist to benefit their countries? What good is a country that requires the sacrifice of its people?
 
John F. Kennedy 대통령은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는 명언을 남겼다. 비난을 받아 마땅한 발언 아닌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맞나, 아니면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맞나?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가 무슨 짝에 쓸모가 있나?
 
Since the Enlightenment, it is generally agreed that legitimate governments are those that govern with the consent of their peoples. Does anyone really believe that people would consent to living in a nation that made it clear that the lives of most citizens would be fated to live for the benefit of the few who control the nation's institutions? Isn't that exactly what slavery is?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국민의 동의 하에 통치를 하는 정부만이 합법적인 정부로 여겨져 왔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기관들을 소유한 극소수의 혜택을 위해 일해야 하는 체제의 국가를 국민들이 승인했으리라 생각 하시는가? 이게 노예제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Analytical thinking, even when valid, can lead people down invalid roads, because analysis alone tends to overly simplify questions. When used to answer the question, What must be done to put unemployed people to work?, it leads to attempts to make education equivalent to vocational training. But when put into practice, it results in people who lack the ability to understand their value systems and evaluate them properly. They end up being hurdy gurdy monkeys or, as Arnold put it, the flies of a summer, born one day and gone the next. If a nation's institutions do not exist to benefit its citizens, the institutions, not the people, are faulty.
 
유효하다고 여길 수 있는 분석적인 사고도 사람을 유효하지 않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 – 분석만으로는 주어진 과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직자들이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분석적인 사고를 대입하면, “직업훈련을 강화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자”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현실에 적용하다 보면 가치 체계를 이해하고 평가할 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력이 양성되는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 또는 어느 날 태어났다가 어느 날 죽는 하루살이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 기관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국민의 잘못이 아니라 기관의 잘못이다.
 
In Classical Greece it was known that the unexamined human life is not worth living. Vocational training never presents people with opportunities to examine one's life; so people end up relying entirely on ideologies which have no intellectual basis and are often absurdly false, but "falsehoods are not only evil in themselves, they infect the soul with evil."
 
고대 그리스인들은 “의미를 조명할 수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직업훈련은 삶의 의미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 그래서 사람들은 지능과 무관하고 터무니 없이 잘못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이데올로기에 매달리게 된다. “거짓은 그 자체로서 악일 뿐 아니라, 영혼까지 악으로 전염시킨다.”
 
If human beings wish to endure, their ideologies must be subjected to serious criticism; otherwise, no generation will ever be smarter than its predecessors and continuing to refer to ourselves as sapient is a sheer delusion.
 
인류가 앞으로도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많은 이데올로기를 심판대에 올려 놓고 비판해보아야 할 것이다 – 그렇지 않을 경우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은 지금보다도 더욱 어리석어 질 것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인간을 “현명하다(sapient – 즉, 호모 사피엔스)”고 칭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망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혼란의 시기여서 그럴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잠깐 멍하니 생각해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해였다. 
정치, 경제, 환경, 사람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일들이 이어졌다. 

그 때문일까. 올해가 가기전 마지막 대미를 북한 김정일이 생을 마감하며 장식했다. 

미국 눈 밖에 나고도 이토록 오래 나라를 유지하고 살아남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가.
대단한 인물이다. 

이제 아들 김정은이 물려받았는데 세간에 많은 얘기들이 오고간다. 
주류 언론부터 판 밖에 영적,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힘써야 하는 시대, 정보가 곧 힘인 시대에 살다보니 모두들 바쁘다. 정보 곧 힘을 얻기위해.




현재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내용들

시나리오 1 : 3대 세습체제 성공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측이다. 

지난 19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애도 기간이 3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의 애도 기간도 이 수준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북한은 이 기간에 김 위원장에 대한 충성심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내부단속을 강화하고, 대를 이은 충성을 강조하며 김정은의 권력세습을 추진한다는 프로젝트다. 


북한이 19일 발표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김정은의 이름을 가장 앞에 넣은 것도 김 위원장 사후에 김정은이 권력 서열 1위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19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소식을 전하며 "존경하는 김정은 지도자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자"고 보도하는 등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은임을 공식화했다. 


시나리오2 : 숨돌리기…‘임시 집단지도체제’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1982년생으로 올해 29세에 불과하고, 후계자 수업기간이 짧아 권력기반을 다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김정은이 내부 혼란을 수습할 여유를 갖기 위해 당분간 북한에서 그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운영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우선은 군부가 나서서 체제를 안정화 시킨 뒤 김정은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복잡한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 경우 김정은은 형식상 1인자 자리에 머물거나, 잠시 2선으로 물러나 있을 수도 있다. 

 

시나리오3 : 소요·내전 발발 


가능성은 낮지만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다. 


끝없는 경제난에 고통받아온 북한 주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주민들과 함께 군부가 동요할 경우 김정은 체제가 일시에 통제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영적(정신) 분야에서 얘기하는 내용

관점 1.
김정은은 북한의 마지막 지도자 입니다.

그래서 그는 암살 당하지 않고 그의 당대에 세상의 끝장을 보게 됩니다.


김정일에 의해 세운의 주요 공사들이 대부분 완성되었으니 김정운이 능력은 이 부분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북조선은 이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그 대표 얼굴마담이 김정운입니다. 


북조선의 리더쉽 공백? 웃기는 소리.

쿠데타 가능성 ? 역시 웃기는 소리.

권력 승계 불안정 ? 더욱 웃기는 소리.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이미 지난 2008년 시기의 대결에서 승복하고 강경파 숙청 후 지금은 김정은의 북조선과 온건파의 밀월시기임.

키신저 (그간 체크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물러남, 소르소 물러남

그리고 유럽에서 줄줄이 일 터졌음.


왜 외부조문단을 받지 않는가? 두려움인가, 자신감인가? 잘 생각해 보시지요.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조문이 갑니다. 굳이 숨길 필요 없는  후진타오는 이미 자기 발로 찾아서 다녀갔더군요.

아마 찔리는게 있어서... 김정은 체제 승인?  승인이고 자시고 이미 몇 년 전에 의사표시 다 했습니다.


김정은 실각 안합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안의 지도제체들은 아주 공고하게 뭉쳐있습니다,

얼치기 언론들이 분석하듯이 무슨 세습이니 신격화니 그런 의미로 뭉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애들 장난하나요...

미국은 이제 더욱 북조선의 주도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김정일이 갖고 있던 제왕의 기운은 김정일과 같이 귀천하지 않고 지금 현재 그대로 북조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관점 2.

북한의 김정일은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김정은이 당분간 대권을 이어받아 통치를 해나갈 것이다.

군부 실력자들과 손을 잡고 군부를 움직여 주민을 통제하며 그대로 내년 2012년까지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년을 지나기 힘들 것이다.

권력 투쟁 과정에 주민 동요가 발생할 것이며 또한 식량문제가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너무 많은 문제가 북한에 산재한 관계로 인하여 그 처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이 도와 주겠으나 중국도 집단 지도체제인 관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북한을 돕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 난민으로 현재에도 중국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국경을 개방하면 그 많은 수의 난민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을 속국으로 두기도 뭐하고 그냥 도와주기도 뭣한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미국도 또한 핵 문제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게 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가 다른 나라로 팔려 가는 것을 제일 걱정하고 있다. 통일은 2012년과 2013년이 기회이나 남한의 여론이 분열될 것이며 통 크게 통일을 받아 들일 수 있기가 상당히 힘들 것이다.


북한의 지도층과 선을 연결하여 연방제로 가며 서로 도와 주는 것이 제일 방법이 좋은 듯한데 아직은 조금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도층이 수습이 되는 2012년 1월 쯤에 가면 무엇인가 결정이 되겠지.


그들과 함께 남한 지도층도 서로 터놓고 상의 한다면 통일도 가능하다고 본다.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힘이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로 향하게 되고 소련이나 중국 기타 나라가 다 육로로 연결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운이 비약적으로 발전 할 것이며 남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닌 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어쩼든 남한의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져 보면 좋을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2012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동하는 대한민국의 힘을 기대해 보도록 하려므나.

너의 영원한 동반자 신으로 부터. 

출처: 인터넷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원문


미군이 파병됐던 한국과 독일 등의 나라에서 평화와 번영이 증진됐다며 미군의 아프간 파병을 옹호했고, 
북한과 이란에 대해선 무력이 아닌 효과적인 외교와 제재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자료 : 美백악관 whitehouse.gov 



이하 번역문

국왕 폐하, 귀족 여러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의 훌륭한 구성원 여러분, 미국 국민여러분, 그리고 세계인 여러분.
깊은 감사와 크나큰 겸손으로 이 상을 받습니다. 이 상은 우리의 가장 큰 열망에 이렇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상의 그 모든 잔인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저 운명의 수인(囚人)만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사의 발전 방향을 ‘정의(正義)’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관대한 결정이 자아낸 그 엄청난 논란을 제가 인정치 않는다면, 저는 무신경한(remiss) 사람이 되고 말겠지요. 부분적으론, 이는 제가 세계차원에서 지고 있는 과업을 시작하고 있을 뿐, 끝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을 받으신 여러 역사적 거인(巨人)들, 그러니까 슈바이쳐 박사, 킹 목사, 마샬 장군, 그리고 만델라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제 성과는 미미합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의를 추구하다 투옥당하고, 폭행당한 분들이 계십니다. 인도주의적 단체에서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고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용기와 사랑을 담은, 드러나지 않는 행동으로 가장 완고한 냉소주의자들마저 고무시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분들도 계십니다. 몇몇은 저명하시고, 몇몇은 그분들이 돕는 이들을 제외하곤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저보다 이 분들이 훨씬 더 이 영예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에 저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저의 수상에 대하여 제기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제가 두 개의 전쟁 와중에 있는 나라의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일겁니다. 둘 중 하나는 잦아들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추구한 분쟁이 아닙니다. 이곳 노르웨이를 포함한 42개국이 우리 자신과 모든 나라들을 더 많은 공격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하여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전쟁 중이고, 저는 수천 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파병하는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몇몇은 죽일 것이고, 몇몇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여기에 무력분쟁의 대가란 통렬한 인식을 갖고 왔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관계,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로 다른 것을 대체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 말입니다.
지금 이 문제들은 새로운 건 아닙니다. 전쟁은 여러 방식으로, 초기 인류부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시작될 무렵엔 그 도덕성은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가뭄이나 질병 같은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전쟁은 부족들, 그 다음엔 문명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이견을 해결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법 규정들이 집단 내의 폭력을 제어하려 했고, 철학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정치가들이 전쟁의 파괴적 힘을 규제하려 했습니다. “정전(正戰, just war)”의 개념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전쟁이 단지 특정한 조건이 맞아야 정당화 될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그 조건은 전쟁이 최후의 수단, 혹은 자위(自衛)로 치러지고, 사용된 무력이 침략 세력의 무력 크기에 비추어 적절해야하고, 그리고 언제나 가능한 한 민간인은 폭력의 피해를 입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이런 “정전”개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이 타인을 죽이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는 능력은 고갈되질 않았습니다. 우리가 달리 세상을 보거나, 다른 신(神)에 경배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능력도 그러했습니다. 군사집단간의 싸움은 국가 간의 전쟁, 즉 전투원과 민간인간의 구분이 모호해진 전면전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30년간, 그러한 살육이 이 대륙을 두 번이나 집어삼켰습니다.(주: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제 3제국과 추축세력의 패배보다 더 정당한 전쟁의 이유를 생각해내기 어렵긴 해도, 2차 세계대전은 전사한 병사들의 수보다, 죽어간 민간인들의 총 수가 더 많았던 전쟁입니다.
그런 파괴에 이어, 그리고 핵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른 세계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이 승자와 패자에 공히 명백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미합중국 상원이 국제연맹-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 기구의 창설 아이디어로 이 상을 받았습니다만-의 가입을 거부한지 사반세기가 지나, 미국이 평화유지의 구조를 만드는데서 세계를 이끌었습니다. 마샬플랜, 국제연합, 전쟁수행을 다스리는 메커니즘, 인권을 보호하는 조약들, 제노사이드의 방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무기들을 제한하는 것들 말입니다.
여러모로, 이 노력들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고, 잔학한 행동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러나 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냉전은 기쁨에 찬 군중들이 베를린 장벽을 부수며 끝났습니다. 교역이 세계 대부분을 엮어주었습니다. 수십억명이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유, 자결, 평등, 그리고 법치의 이상이 힘들게나마 진전해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대의 불굴과 통찰의 수혜자이며, 이는 우리나라(미국)가 정당하게(rightfully) 자랑스러워하는 유산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의 첫 10년간, 이 오랜 구조는 새로운 위협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두 핵 강대국간의 전쟁이란 전망에 떨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확산은 재앙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테러리즘은 오랫동안 일종의 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기술로 말미암아, 엄청난 분노를 품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끔찍한 규모로 살육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게다가, 점점 국가들간의 전쟁이 국가안의 전쟁으로 변했습니다. 인종, 분파간의 분쟁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리주의운동, 소요, 그리고 실패한 국가들(failed states)이 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점차, 민간인들을 끝없는 혼돈 속에 빠지게 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전쟁에서, 군인보다 더욱 많은 민간인들이 죽고 있습니다. 미래의 분쟁의 씨앗이 뿌려지고, 경제는 파괴당하고, 시민사회는 산산조각나고, 난민은 늘어가고, 어린이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전쟁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해결책을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러한 난관에 맞서는 데는 수십년전에 그렇게나 용감하게 행동하셨던 분들과 동일한 비전, 노력 그리고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전(正戰)의 개념과 ‘바른 평화(just peace)’의 규범에 대하여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괴로운 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폭력적 대립을 없애지 않을 것이란 진실입니다. 개개로든, 함께하든, 국가들은 필요에 의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무력을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이와 같은 행사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했던 말을 염두에 두고 이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항구적 평화를 절대 이뤄낼 수 없습니다. 폭력은 어떤 사회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폭력은 단지 새롭고, 더욱 복잡한 문제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킹 목사께서 평생에 걸쳐 쌓은 업적의 직접적 결과로 여기에 서 있는 저는 비폭력이란 도덕적 힘의 살아있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저는 마하트마 간디와 킹 목사가 지녔던 삶의 신조에 연약함도, 수동성도, 안이함도 없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보호(protect)하고 수호(defend)하겠다고 맹세한 국가수반으로서, 저는 그분들의 모범만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world as it is)을 마주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들에 대한 위협에 맞서 게을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에는 악(惡)이 존재합니다. 비폭력운동은 히틀러의 군대를 멈출 수 없었을 겁니다. 협상으론 알카에다 지도자들이 무기를 내려놓도록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가끔은 무력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냉소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정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불완전성, 그리고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제기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많은 나라들에서 군사행동에 대하여 심각한 반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의가 무엇이건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종종, 여기엔 세계의 유일한 군사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즉응)반사적 의심이 함께 합니다.
하지만 세계는 기억해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세상에 안정성을 기한 것은 국제기구만도, 조약도,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미합중국은 국민의 피와 무기의 힘으로 60년 넘도록 세계 안보를 유지하는 대가를 치르는 걸 도와왔습니다. 군복을 입은 미국 국민의 복무와 희생은 독일에서 [한국]까지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켜왔으며, 발칸반도 같은 곳에서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걸 가능케 했습니다. 우리가 이 짐을 진 것은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몽된 자기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그래왔습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손자들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과 손자들이 자유와 번영 속에 살 수 있다면 우리 후손의 삶이 더욱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이란 수단은 평화를 지켜나가는데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실은 다른 진실과 함께해야 합니다. 즉, 얼마나 정당화되건 간에, 전쟁은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군인의 용기와 희생은 영광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나라와 대의와 전우들에 대한 헌신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전쟁 그 자체는 전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전쟁을 영광스러운 것이라 소리 높여 말해선 안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난관중 일부는 이 두 가지, 일견 조화할 수 없는 진실들-즉 ‘전쟁이 가끔은 필요하다’와 ‘특정 수준의 전쟁은 인류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을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이 오래전에 촉구했던 과업으로 우리의 노력을 이끌어야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욱 실용적이고, 더욱 이룩할 수 있는 평화에 주목합시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갑작스런 혁명이 아니라, 인류의 제도에서 이뤄지는 점진적인 발전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인류의 제도에서 이뤄지는 점진적 발전 말입니다.

이 발전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이 실용적인 단계일까요?

우선, 저는 강국이건, 약소국이건 간에 모든 나라들이 무력사용을 다스리는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가수반들처럼, 저는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필요하다면, 일방적으로 행동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준을 따르는 것이, 국제기준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하는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을 고립시키고 약화시킨다고 확신합니다.
9.11 테러가 일어난 후, 세계는 미국과 함께 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노력을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나간(senseless) 테러에 대한 두려움과, 널리 인정된 자위(自衛)원칙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세계는 그에 맞설 필요를 인정했습니다. 침략행위의 대가에 대하여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던 (전세계적) 합의였습니다.
게다가, 사실 미국만이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세계의 규칙을 따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미국 스스로 그 나라들의 행동을 따르길 거부한다면 말입니다. 그리하지 않을 때, 우리의 행동이 자의적으로 보일 것이고, 얼마나 정당화되건 간에 향후 개입의 정당성을 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사적 행동의 목적이 자위와 침략자에 대항한 국가의 방위를 넘어섰을 때, 이 행동은 특히 중요하게 됩니다. 더욱 더, 우리 모두는 ‘자기네 정부가 저지르는 민간학살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혹은 ‘폭력과 고통이 전 지역을 집어삼킬 수 있는 내전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는 인도주의적 근거로 무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칸 반도에서 그랬듯, 혹은 전쟁의 공포를 겪은 다른 곳에서 그랬듯 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양심을 찢어놓으며, 후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모든 국가들은 역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명확한 위임을 받은 군대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미국은 세계 안보에 대한 약속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협이 더욱 퍼져있고, 임무는 더욱 복잡한 세계에서, 미국은 혼자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미국 혼자서는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러합니다. 테러리즘과 해적행위가 기아와 인간적 고통과 어우러진 소말리아같은 실패한 국가들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향후 오랫동안, 불안정한 지역들에서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소속 국가들의 지도자와 군인들, 그리고 다른 우방과 동맹들은 이 진실을 아프가니스탄에 대하여 맹세해온 능력과 용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선,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복무하는 이들의 노력과 광범위한 대중의 반감사이에 단절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전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압니다만, 이 점도 알고 있습니다. 즉, 평화가 바람직한 것이라는 믿음만으론, 평화를 이뤄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평화에는 책임이 필요하며, 희생이 따릅니다. 그렇기에 나토가 계속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국제연합과 지역 평화유지활동을 강화해야하며, 그 과업을 일부 국가들에 떠맡기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해외 평화유지활동 및 훈련을 받고 고국에 돌아온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분들은 오슬로와 로마에서, 오타와와 시드니에서, 그리고 다카와 키갈리에서 복무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분들을 전쟁을 일으킨 자가 아니라 전쟁을 치러낸 분들로 기립니다. 평화를 이뤄낸 분들로 기립니다.

무력사용에 대하여 마지막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쟁을 치르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싸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노벨 위원회는 첫 번째 평화상을 적십자의 설립자이자, 제네바 협약의 추동력으로 활동했던 ‘앙리 뒤낭’에게 수여하며 이 진리를 인정했습니다.
무력이 필요한 곳에서, 우리는 스스로 특정 행동 규칙을 지키는 데에, 도덕적이고, 전략적인 이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어떤 규칙도 지키지 않는 흉악한 적에 맞설 지라도, 저는 미합중국이 전쟁수행에서 계속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자들과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문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타나모 만 수용소의 폐쇄를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네바 협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재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키려 싸우고 있는 그 이상을 후퇴시켰을 때,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쉬울 때가 아니라, 어려울 때, 그 이상들을 떠받침으로써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치르기로 한 선택할 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내리눌렀던 의문에 대하여 좀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극적 선택을 피하려 했던 우리의 노력, 그리고 우리가 정당하고 지속될 수 있는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규칙과 법을 어기는 국가들을 상대함에서, 저는 우리가 폭력에 대한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실제로 행동을 바꿔놓을 만큼 충분히 강한(tough)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속되는 평화를 원한다면, 국제사회의 발언에 위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어기는 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제재는 실질적인 대가를 강요해야 합니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는 점증적인 압력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압력은 세계가 하나로 뭉칠 때만 존재합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화급한 사례는 핵무기의 확산을 막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노력입니다. 지난 세기 중반에, 여러 나라들은 그 주고받음(bargain)이 확실한 어떤 조약을 지키기로 합의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모든 나라는 평화적인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다. 핵무기가 없는 나라들은 핵무장을 포기한다. 핵무기가 있는 나라들은 핵군축을 위해 노력한다. 저는 이 조약을 지킬 것입니다. 그게 제 외교정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저는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의 핵무기 보유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겐 이란이나 북한 같은 나라들이 이 체제를 유린(game)하지 않도록 주장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국제법을 준수한다 주장하는 나라들은 이 법이 무시당할 때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자국의 안보에 신경쓰는 나라는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군비경쟁의 위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이 핵전쟁에 대비하여 군비를 갖출 때, 손 놓고 있을(stand idly by) 수는 없습니다.
자국민을 잔인하게 대하며 국제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다르푸르에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났을 때, 콩고에서 계획적인(systematic) 강간이 일어났을 때, [버마]에서 탄압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는 ‘결과(consequences)’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예, 간여(干與, engagement)할 겁니다. 예, 외교가 이뤄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실패했을 때는 그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밀접하게 함께할수록, 우리는 ‘무력 개입’과 ‘압제와의 공모’사이에서의 선택에 직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요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의 본질 말입니다. 평화는 그저 눈에 보이는 대립이 없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권리와 존엄에 기반을 둔 평화만 진정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 통찰이야말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기초자들을 이끌었던 것이었습니다. 대규모 파괴가 일어난 후에야, 그들은 인권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평화란 일종의 공허한 약속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이 발언들은 무시당했습니다. 몇몇 국가들은, 인권 유린을 이것(인권)이 서구의 원칙이라는 혹은 지역 문화 및 국가 개발단계에 이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변명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안에선, 스스로를 현실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라 묘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랫동안 긴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좁은 범위의 국익을 추구하는 것’과 ‘미국의 가치를 전 세계에 부과하는 끝없는 운동’사이에서 내려질 명백한 선택을 의미하는 긴장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선택을 거부합니다. 저는 국민이 자유롭게 말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신앙을 갖고, 두려움 없이 자기의 지도자를 뽑거나 집회(assemble)할 권리가 부인되는 곳에선 평화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갇혀버린 울분은 썩어 문드러지고, 부족과 종교적 정체성의 제거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반대가 이뤄짐도 압니다. 유럽은 오직 자유로워졌을 때만, 결국 평화를 이뤄냈습니다. 미국은 민주정체에 대항하여 싸운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우방들은 자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부들입니다. 아무리 무정하게 규정한다 해도, 미국의 국익, 그리고 세계의 이익은 인류의 열망을 부정함으로써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들의 특별한 문화나 전통을 존중한다손 치더라도, 미국은 항상 그런 보편적 열망의 목소리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아웅 산 수 치(Aung Sang Suu Kyi) 여사’같은 개혁자들의 평온한 존엄을 위해, 구타에도 불구하고 투표한 짐바브웨 국민들의 용감성을 위해, 이란의 거리를 조용히 행진했던 수십만명을 위해 증언할 것입니다(bear witness to). 이 정부들의 지도자들이 자국민의 열망을 다른 나라들의 국력보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telling).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들, 그리고 자유로운 국가들은 이런 운동들, 즉 희망과 역사의 움직임에서 우리가 그들의 편에 서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인권의 진흥은 충고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님도 말씀드립니다. 종종, 매우 힘든 외교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탄압을 일삼는 정권에 대한 간여(engagement)에 ‘비분강개(indignation)’란 만족스러운 순수성이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먼저 손을 내밀어보지도 않고 제재하는 것, 다시 말해 대화하지도 않고 비난하는 것은 괴로운 현상유지를 이어갈 뿐임도 압니다. 개방이란 선택이 없다면, 어떤 압제적 정권도 새로운 길로 옮겨 올 수는 없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공포란 관점에서 보면,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을 만났던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중국이 수백만의 자국민들을 가난에서 구하고, 개방사회와 연결시키는 길을 걷게 한 것을 도왔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폴란드에 간여하신 것은 가톨릭(천주교) 교회를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레흐 바웬사 같은 노동자 지도자들에 대한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의 군비통제 노력과 페레스트로이카의 수용은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유럽에서의 (소련)반대자들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공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립과 간여사이에서, 압력과 유인(誘因, incentive)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인권과 존엄이 신장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셋째로, 올바른 평화는 그저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만 포함하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경제안보와 기회를 아울러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안보(security)가 없으면 발전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음식, 깨끗한 물, 혹은 의약과 피난처를 이용할 수 없다면, 안보가 존재하지 않음도 사실입니다. 안보는 어린이가 훌륭한 교육,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일자리를 바랄 수 없는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사회는 그 내부로부터 썩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식솔을 먹이는 걸 돕는 것(helping farmers feed their own people), 혹은 국가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병자를 돌보는 것은 그저 자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계는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욱 많은 가뭄과, 기근, 대량 유민(流民, displacement)을 맞이하리란 점에 대해서는 과학적 이론(異論)이 거의 제기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향후 수십년간 더 많은 대립을 격화시킬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속하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저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미국)의 군사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공동의 안보가 그 균형에 달려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국가들 간의 합의. 강력한 제도. 인권에 대한 지지. 개발에 대한 투자. 이 모든 것들은 케네디 대통령이 말했던 발전을 가져오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이 과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의지, 결단, 인내력을 가지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계속하여 확장되어 온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으며, 더 이상 축소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세상이 작아지면서, 여러분은 인류가 ‘우리가 얼마나 유사한지’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 즉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성취를 이뤄낼 어느 정도의 수단을 갖고, 우리의 삶을 살 기회를 원한다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쉬워지리라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현기증 날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세계화 추세에서, 사람들이 자기네 특별한 정체성에서, 즉, 인종, 부족, 그러고 아마도 가장 강력하게는 자신들의 종교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몇몇 지역에선, 이 두려움은 대립(conflict)으로 이어졌습니다. 종종, 우리는 퇴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를 중동(Middle East)에서 보고 있습니다.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간의 대립이 더욱 심각해지고(harden)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부족간 경계로 산산이 부서진 나라들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하게도,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걸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가 이용되는 방식에서 이것을 목격합니다. 이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위대한 종교인 이슬람교를 왜곡하고,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나라(미국)를 공격했습니다. 이 극단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른 첫 번째 사례는 아닙니다. 십자군의 잔학함이 충분히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성전(聖戰)도 정전(正戰)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신의 의지를 행한다 믿는다면, 자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임산부, 의료진, 적십자요원, 혹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해를 끼쳐도 된단 말입니다. 그런 왜곡된 종교관은 평화개념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목적 그 자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주요 종교의 핵심에 자리한 한 가지 규칙이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한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법칙을 따르는 것은 항상 인간 본성상 핵심적 노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존심, 권력, 그리고 종종 악의 유혹에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심지어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갖고 있는 분들조차 종종 우리 앞에 놓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완벽하게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 믿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이 완벽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그런 이상들에 다가가기 위하여 이상화된 세상에서 살지 않아도 됩니다. 간디와 킹 목사 같은 분들이 실천한 비폭력은 모든 상황에서 실용적이지 않고, 가능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분들이 설파하신 사랑,  즉 인간 진보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은 항상 우리의 여정을 인도하는 북극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즉 우리가 그것을 하찮거나 안이하다고 저버린다면,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로부터 그것을 떼어 내어 버린다면, 우리는 인류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도덕의 나침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앞선 여러 세대처럼,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합니다. 킹 목사가 오래 전 이 수여식에서 말씀하셨듯, “저는 절망을 ‘역사의 불명확성에 대한 마지막 반응’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저는 인간의 현재 조건에 대한 ‘그러함(isness)’이 영속적인 ‘그러해야 함(oughtness)’에 도달하는 것에서 인간을 도덕적으로 무능하게 만든다는 관념을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이 ‘그러해야 함’은 인간이 영원히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해야 하는 세상’에 도달합시다. 신께서 주신 불꽃이 아직 우리 각자의 영혼에서 꿈틀거리는 세상 말입니다.
오늘날 어디에선가, 여기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어떤 군인은 전력(戰力)이 부족함(outgunned)을 깨달아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꿋꿋이 맡은 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에선가, 이 세상에선, 젊은 시위자가 자국 정부의 만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그는 계속 행진할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에선가, 힘겨운 가난에 맞선 어떤 어머니는 아직도 자기 아이들을 가르칠 시간을 내며,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갖고 있는 몇 푼의 동전을 그러모읍니다. 왜냐하면, 이 어머니는 잔인한 세상일지라도 아직 자기 아이가 꿈을 이룰 여지는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범을 따라 살도록 합시다. 우리는 압제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리란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정의를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질적인 타락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존엄을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명확한 시각으로(clear-eyed), 우리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진보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 세계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도전의 순간에, 그것은 여기 지구에서 우리가 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The White House

Office of the Press Secretary

For Immediate Release 
December 10, 2009 
Remarks by the President at the Acceptance of the Nobel Peace Prize
Oslo City Hall
Oslo, Norway

1:44 P.M. CET

THE PRESIDENT:  Your Majesties, Your Royal Highnesses, distinguished members of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citizens of America, and citizens of the world:
 
I receive this honor with deep gratitude and great humility.  It is an award that speaks to our highest aspirations -- that for all the cruelty and hardship of our world, we are not mere prisoners of fate.  Our actions matter, and can bend history in the direction of justice.
 
And yet I would be remiss if I did not acknowledge the considerable controversy that your generous decision has generated.  (Laughter.)  In part, this is because I am at the beginning, and not the end, of my labors on the world stage.  Compared to some of the giants of history who've received this prize -- Schweitzer and King; Marshall and Mandela -- my accomplishments are slight.  And then there are the men and women around the world who have been jailed and beaten in the pursuit of justice; those who toil in humanitarian organizations to relieve suffering; the unrecognized millions whose quiet acts of courage and compassion inspire even the most hardened cynics.  I cannot argue with those who find these men and women -- some known, some obscure to all but those they help -- to be far more deserving of this honor than I.
 
But perhaps the most profound issue surrounding my receipt of this prize is the fact that I am the Commander-in-Chief of the military of a nation in the midst of two wars.  One of these wars is winding down.  The other is a conflict that America did not seek; one in which we are joined by 42 other countries -- including Norway -- in an effort to defend ourselves and all nations from further attacks.
 
Still, we are at war, and I'm responsible for the deployment of thousands of young Americans to battle in a distant land.  Some will kill, and some will be killed.  And so I come here with an acute sense of the costs of armed conflict -- filled with difficult question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war and peace, and our effort to replace one with the other.
 
Now these questions are not new.  War, in one form or another, appeared with the first man.  At the dawn of history, its morality was not questioned; it was simply a fact, like drought or disease -- the manner in which tribes and then civilizations sought power and settled their differences.
 
And over time, as codes of law sought to control violence within groups, so did philosophers and clerics and statesmen seek to regulate the destructive power of war.  The concept of a "just war" emerged, suggesting that war is justified only when certain conditions were met:  if it is waged as a last resort or in self-defense; if the force used is proportional; and if, whenever possible, civilians are spared from violence.
 
Of course, we know that for most of history, this concept of "just war" was rarely observed.  The capacity of human beings to think up new ways to kill one another proved inexhaustible, as did our capacity to exempt from mercy those who look different or pray to a different God.  Wars between armies gave way to wars between nations -- total wars in which the distinction between combatant and civilian became blurred.  In the span of 30 years, such carnage would twice engulf this continent.  And while it's hard to conceive of a cause more just than the defeat of the Third Reich and the Axis powers, World War II was a conflict in which the total number of civilians who died exceeded the number of soldiers who perished.
 
In the wake of such destruction, and with the advent of the nuclear age, it became clear to victor and vanquished alike that the world needed institutions to prevent another world war.  And so, a quarter century after the United States Senate rejected the League of Nations -- an idea for which Woodrow Wilson received this prize -- America led the world in constructing an architecture to keep the peace:  a Marshall Plan and a United Nations, mechanisms to govern the waging of war, treaties to protect human rights, prevent genocide, restrict the most dangerous weapons.
 
In many ways, these efforts succeeded.  Yes, terrible wars have been fought, and atrocities committed.  But there has been no Third World War.  The Cold War ended with jubilant crowds dismantling a wall.  Commerce has stitched much of the world together.  Billions have been lifted from poverty.  The ideals of liberty and self-determination, equality and the rule of law have haltingly advanced.  We are the heirs of the fortitude and foresight of generations past, and it is a legacy for which my own country is rightfully proud.
 
And yet, a decade into a new century, this old architecture is buckling under the weight of new threats.  The world may no longer shudder at the prospect of war between two nuclear superpowers, but proliferation may increase the risk of catastrophe.  Terrorism has long been a tactic, but modern technology allows a few small men with outsized rage to murder innocents on a horrific scale.
 
Moreover, wars between nations have increasingly given way to wars within nations.  The resurgence of ethnic or sectarian conflicts; the growth of secessionist movements, insurgencies, and failed states -- all these things have increasingly trapped civilians in unending chaos.  In today's wars, many more civilians are killed than soldiers; the seeds of future conflict are sown, economies are wrecked, civil societies torn asunder, refugees amassed, children scarred.
 
I do not bring with me today a definitive solution to the problems of war.  What I do know is that meeting these challenges will require the same vision, hard work, and persistence of those men and women who acted so boldly decades ago.  And it will require us to think in new ways about the notions of just war and the imperatives of a just peace.
 
We must begin by acknowledging the hard truth:  We will not eradicate violent conflict in our lifetimes.  There will be times when nations -- acting individually or in concert -- will find the use of force not only necessary but morally justified.
 
I make this statement mindful of what Martin Luther King Jr. said in this same ceremony years ago:  "Violence never brings permanent peace.  It solves no social problem:  it merely creates new and more complicated ones."  As someone who stands here as a direct consequence of Dr. King's life work, I am living testimony to the moral force of non-violence.  I know there's nothing weak -- nothing passive -- nothing naïve -- in the creed and lives of Gandhi and King.
 
But as a head of state sworn to protect and defend my nation, I cannot be guided by their examples alone.  I face the world as it is, and cannot stand idle in the face of threats to the American people.  For make no mistake:  Evil does exist in the world.  A non-violent movement could not have halted Hitler's armies.  Negotiations cannot convince al Qaeda's leaders to lay down their arms.  To say that force may sometimes be necessary is not a call to cynicism -- it is a recognition of history; the imperfections of man and the limits of reason.
 
I raise this point, I begin with this point because in many countries there is a deep ambivalence about military action today, no matter what the cause.  And at times, this is joined by a reflexive suspicion of America, the world's sole military superpower.
 
But the world must remember that it was not simply international institutions -- not just treaties and declarations -- that brought stability to a post-World War II world.  Whatever mistakes we have made, the plain fact is th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has helped underwrite global security for more than six decades with the blood of our citizens and the strength of our arms.  The service and sacrifice of our men and women in uniform has promoted peace and prosperity from Germany to Korea, and enabled democracy to take hold in places like the Balkans.  We have borne this burden not because we seek to impose our will.  We have done so out of enlightened self-interest -- because we seek a better future for our children and grandchildren, and we believe that their lives will be better if others' children and grandchildren can live in freedom and prosperity.
 
So yes, the instruments of war do have a role to play in preserving the peace.  And yet this truth must coexist with another -- that no matter how justified, war promises human tragedy.  The soldier's courage and sacrifice is full of glory, expressing devotion to country, to cause, to comrades in arms.  But war itself is never glorious, and we must never trumpet it as such.
 
So part of our challenge is reconciling these two seemingly inreconcilable truths -- that war is sometimes necessary, and war at some level is an expression of human folly.  Concretely, we must direct our effort to the task that President Kennedy called for long ago.  "Let us focus," he said, "on a more practical, more attainable peace, based not on a sudden revolution in human nature but on a gradual evolution in human institutions."  A gradual evolution of human institutions.
 
What might this evolution look like?  What might these practical steps be?
 
To begin with, I believe that all nations -- strong and weak alike -- must adhere to standards that govern the use of force.  I -- like any head of state -- reserve the right to act unilaterally if necessary to defend my nation.  Nevertheless, I am convinced that adhering to standards, international standards, strengthens those who do, and isolates and weakens those who don't.

The world rallied around America after the 9/11 attacks, and continues to support our efforts in Afghanistan, because of the horror of those senseless attacks and the recognized principle of self-defense.  Likewise, the world recognized the need to confront Saddam Hussein when he invaded Kuwait -- a consensus that sent a clear message to all about the cost of aggression.
 
Furthermore, America -- in fact, no nation -- can insist that others follow the rules of the road if we refuse to follow them ourselves.  For when we don't, our actions appear arbitrary and undercut the legitimacy of future interventions, no matter how justified.
 
And this becomes particularly important when the purpose of military action extends beyond self-defense or the defense of one nation against an aggressor.  More and more, we all confront difficult questions about how to prevent the slaughter of civilians by their own government, or to stop a civil war whose violence and suffering can engulf an entire region.
 
I believe that force can be justified on humanitarian grounds, as it was in the Balkans, or in other places that have been scarred by war.  Inaction tears at our conscience and can lead to more costly intervention later.  That's why all responsible nations must embrace the role that militaries with a clear mandate can play to keep the peace.
 
America's commitment to global security will never waver.  But in a world in which threats are more diffuse, and missions more complex, America cannot act alone.  America alone cannot secure the peace.  This is true in Afghanistan.  This is true in failed states like Somalia, where terrorism and piracy is joined by famine and human suffering.  And sadly, it will continue to be true in unstable regions for years to come.
 
The leaders and soldiers of NATO countries, and other friends and allies, demonstrate this truth through the capacity and courage they've shown in Afghanistan.  But in many countries, there is a disconnect between the efforts of those who serve and the ambivalence of the broader public.  I understand why war is not popular, but I also know this:  The belief that peace is desirable is rarely enough to achieve it.  Peace requires responsibility.  Peace entails sacrifice.  That's why NATO continues to be indispensable.  That's why we must strengthen U.N. and regional peacekeeping, and not leave the task to a few countries.  That's why we honor those who return home from peacekeeping and training abroad to Oslo and Rome; to Ottawa and Sydney; to Dhaka and Kigali -- we honor them not as makers of war, but of wagers -- but as wagers of peace.
 
Let me make one final point about the use of force.  Even as we make difficult decisions about going to war, we must also think clearly about how we fight it.  The Nobel Committee recognized this truth in awarding its first prize for peace to Henry Dunant -- the founder of the Red Cross, and a driving force behind the Geneva Conventions.
 
Where force is necessary, we have a moral and strategic interest in binding ourselves to certain rules of conduct.  And even as we confront a vicious adversary that abides by no rules, I believ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must remain a standard bearer in the conduct of war.  That is what makes us different from those whom we fight.  That is a source of our strength.  That is why I prohibited torture.  That is why I ordered the prison at Guantanamo Bay closed.  And that is why I have reaffirmed America's commitment to abide by the Geneva Conventions.  We lose ourselves when we compromise the very ideals that we fight to defend.  (Applause.)  And we honor -- we honor those ideals by upholding them not when it's easy, but when it is hard.
 
I have spoken at some length to the question that must weigh on our minds and our hearts as we choose to wage war.  But let me now turn to our effort to avoid such tragic choices, and speak of three ways that we can build a just and lasting peace.
 
First, in dealing with those nations that break rules and laws, I believe that we must develop alternatives to violence that are tough enough to actually change behavior -- for if we want a lasting peace, then the words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must mean something.  Those regimes that break the rules must be held accountable.  Sanctions must exact a real price.  Intransigence must be met with increased pressure -- and such pressure exists only when the world stands together as one.
 
One urgent example is the effort to prevent the spread of nuclear weapons, and to seek a world without them.  In the middle of the last century, nations agreed to be bound by a treaty whose bargain is clear:  All will have access to peaceful nuclear power; those without nuclear weapons will forsake them; and those with nuclear weapons will work towards disarmament.  I am committed to upholding this treaty.  It is a centerpiece of my foreign policy.  And I'm working with President Medvedev to reduce America and Russia's nuclear stockpiles.
 
But it is also incumbent upon all of us to insist that nations like Iran and North Korea do not game the system.  Those who claim to respect international law cannot avert their eyes when those laws are flouted.  Those who care for their own security cannot ignore the danger of an arms race in the Middle East or East Asia.  Those who seek peace cannot stand idly by as nations arm themselves for nuclear war.

The same principle applies to those who violate international laws by brutalizing their own people.  When there is genocide in Darfur, systematic rape in Congo, repression in Burma -- there must be consequences.  Yes, there will be engagement; yes, there will be diplomacy -- but there must be consequences when those things fail.  And the closer we stand together, the less likely we will be faced with the choice between armed intervention and complicity in oppression.
 
This brings me to a second point -- the nature of the peace that we seek.  For peace is not merely the absence of visible conflict.  Only a just peace based on the inherent rights and dignity of every individual can truly be lasting.
 
It was this insight that drove drafters of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after the Second World War.  In the wake of devastation, they recognized that if human rights are not protected, peace is a hollow promise.
 
And yet too often, these words are ignored.  For some countries, the failure to uphold human rights is excused by the false suggestion that these are somehow Western principles, foreign to local cultures or stages of a nation's development.  And within America, there has long been a tension between those who describe themselves as realists or idealists -- a tension that suggests a stark choice between the narrow pursuit of interests or an endless campaign to impose our values around the world.
 
I reject these choices.  I believe that peace is unstable where citizens are denied the right to speak freely or worship as they please; choose their own leaders or assemble without fear.  Pent-up grievances fester, and the suppression of tribal and religious identity can lead to violence.  We also know that the opposite is true.  Only when Europe became free did it finally find peace.  America has never fought a war against a democracy, and our closest friends are governments that protect the rights of their citizens.  No matter how callously defined, neither America's interests -- nor the world's -- are served by the denial of human aspirations.
 
So even as we respect the unique culture and traditions of different countries, America will always be a voice for those aspirations that are universal.  We will bear witness to the quiet dignity of reformers like Aung Sang Suu Kyi; to the bravery of Zimbabweans who cast their ballots in the face of beatings; to the hundreds of thousands who have marched silently through the streets of Iran.  It is telling that the leaders of these governments fear the aspirations of their own people more than the power of any other nation.  And it is the responsibility of all free people and free nations to make clear that these movements -- these movements of hope and history -- they have us on their side.
 
Let me also say this:  The promotion of human rights cannot be about exhortation alone.  At times, it must be coupled with painstaking diplomacy.  I know that engagement with repressive regimes lacks the satisfying purity of indignation.  But I also know that sanctions without outreach -- condemnation without discussion -- can carry forward only a crippling status quo.  No repressive regime can move down a new path unless it has the choice of an open door.
 
In light of the Cultural Revolution's horrors, Nixon's meeting with Mao appeared inexcusable -- and yet it surely helped set China on a path where millions of its citizens have been lifted from poverty and connected to open societies.  Pope John Paul's engagement with Poland created space not just for the Catholic Church, but for labor leaders like Lech Walesa.  Ronald Reagan's efforts on arms control and embrace of perestroika not only improved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 but empowered dissidents throughout Eastern Europe.  There's no simple formula here.  But we must try as best we can to balance isolation and engagement, pressure and incentives, so that human rights and dignity are advanced over time.
 
Third, a just peace includes not only civil and political rights -- it must encompass economic security and opportunity.  For true peace is not just freedom from fear, but freedom from want.
 
It is undoubtedly true that development rarely takes root without security; it is also true that security does not exist where human beings do not have access to enough food, or clean water, or the medicine and shelter they need to survive.  It does not exist where children can't aspire to a decent education or a job that supports a family.  The absence of hope can rot a society from within.
 
And that's why helping farmers feed their own people -- or nations educate their children and care for the sick -- is not mere charity.  It's also why the world must come together to confront climate change.  There is little scientific dispute that if we do nothing, we will face more drought, more famine, more mass displacement -- all of which will fuel more conflict for decades.  For this reason, it is not merely scientists and environmental activists who call for swift and forceful action -- it's military leaders in my own country and others who understand our common security hangs in the balance.
 
Agreements among nations.  Strong institutions.  Support for human rights.  Investments in development.  All these are vital ingredients in bringing about the evolution that President Kennedy spoke about.  And yet, I do not believe that we will have the will, the determination, the staying power, to complete this work without something more -- and that's the continued expansion of our moral imagination; an insistence that there's something irreducible that we all share.
 
As the world grows smaller, you might think it would be easier for human beings to recognize how similar we are; to understand that we're all basically seeking the same things; that we all hope for the chance to live out our lives with some measure of happiness and fulfillment for ourselves and our families.
 
And yet somehow, given the dizzying pace of globalization, the cultural leveling of modernity, it perhaps comes as no surprise that people fear the loss of what they cherish in their particular identities -- their race, their tribe, and perhaps most powerfully their religion.  In some places, this fear has led to conflict.  At times, it even feels like we're moving backwards.  We see it in the Middle East, as the conflict between Arabs and Jews seems to harden.  We see it in nations that are torn asunder by tribal lines.
 
And most dangerously, we see it in the way that religion is used to justify the murder of innocents by those who have distorted and defiled the great religion of Islam, and who attacked my country from Afghanistan.  These extremists are not the first to kill in the name of God; the cruelties of the Crusades are amply recorded.  But they remind us that no Holy War can ever be a just war.  For if you truly believe that you are carrying out divine will, then there is no need for restraint -- no need to spare the pregnant mother, or the medic, or the Red Cross worker, or even a person of one's own faith.  Such a warped view of religion is not just incompatible with the concept of peace, but I believe it's incompatible with the very purpose of faith -- for the one rule that lies at the heart of every major religion is that we do unto others as we would have them do unto us.

Adhering to this law of love has always been the core struggle of human nature.  For we are fallible.  We make mistakes, and fall victim to the temptations of pride, and power, and sometimes evil.  Even those of us with the best of intentions will at times fail to right the wrongs before us.

But we do not have to think that human nature is perfect for us to still believe that the human condition can be perfected.  We do not have to live in an idealized world to still reach for those ideals that will make it a better place.  The non-violence practiced by men like Gandhi and King may not have been practical or possible in every circumstance, but the love that they preached -- their fundamental faith in human progress -- that must always be the North Star that guides us on our journey.
 
For if we lose that faith -- if we dismiss it as silly or naïve; if we divorce it from the decisions that we make on issues of war and peace -- then we lose what's best about humanity.  We lose our sense of possibility.  We lose our moral compass.
 
Like generations have before us, we must reject that future.  As Dr. King said at this occasion so many years ago, "I refuse to accept despair as the final response to the ambiguities of history.  I refuse to accept the idea that the 'isness' of man's present condition makes him morally incapable of reaching up for the eternal 'oughtness' that forever confronts him."
 
Let us reach for the world that ought to be -- that spark of the divine that still stirs within each of our souls.  (Applause.)

Somewhere today, in the here and now, in the world as it is, a soldier sees he's outgunned, but stands firm to keep the peace.  Somewhere today, in this world, a young protestor awaits the brutality of her government, but has the courage to march on.  Somewhere today, a mother facing punishing poverty still takes the time to teach her child, scrapes together what few coins she has to send that child to school -- because she believes that a cruel world still has a place for that child's dreams.

Let us live by their example.  We can acknowledge that oppression will always be with us, and still strive for justice.  We can admit the intractability of depravation, and still strive for dignity.  Clear-eyed, we can understand that there will be war, and still strive for peace.  We can do that -- for that is the story of human progress; that's the hope of all the world; and at this moment of challenge, that must be our work here on Earth.
Thank you very much.  (Applause.)
END
2:20 P.M. C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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