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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에게는 ·········· 세계 창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계 창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창조를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 파악을 위한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 철학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확실한 지반을 찾아야만 한다. 


·········· 사고하는 주체, 혹은 사고되는 객체에 대한 관계가 없이, 우선은 사고를 완전히 중립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체와 객체 속에 이미 사고를 통하여 형성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것을 파악할 수 있기 전에, 사고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창조의 시초 부분이 아니라 최종 부분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을 통한 세계 해명을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현존재의 최초의 요소에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으로부터, 밀접하게 주어진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고찰을 시작하기 위해서 세상의 시초로 훌쩍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최근의 것에서 좀 더 이전의 것으로 점진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지질학이 지구의 현재 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가공의 변혁에 대해서 말했던 동안에는, 그저 암흑 속에서 더듬기만 했던 것이다. 어떤 과정들이 현재의 지구상에 진행되고 있는지 조사하고, 거기에 과거사를 연역해 내는 점에서 출발했을 때에야, 비로소 지질학이 확실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철학이 원자, 운동, 물질, 의지, 무의식과 같은 모든 가능한 원리를 가정하는 동안에는 그저 공중에 유영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자신의 최초의 것으로 간파하게 되면, 비로소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 발달이 향해 온, 절대적으로 최종의 것, 그것이 바로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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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의식은 개념과 관찰이 서로 만나 함께 연계되는 공연 무대다.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 동시에 이 (인간의) 의식이 성격화 된다. 인간의 의식은 사고와 관찰의 중개자다. 인간이 대상물을 관찰하는 동안에는 대상물이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며, 인간이 사고를 하는 한, 스스로 활동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대상물은 객체로, 자기 자신은 사고하는 주체로 고찰한다. 인간이 자신의 사고를 자신 스스로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아 의식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자아 의식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사고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시각을 자기 자신의 행위에 돌리게 되면, 바로 사고가 자신의 근원적 존재, 자신의 주체를 대상물이라는 객체로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로지 사고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을 주체로 결정하고, 객체의 맞은편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사고를 단순한 주체적인 행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사고는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서 존재한다. 사고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개념도 형성한다. 우리가 사고하는 주체로서 개념을 하나의 객체에 연관시킬 때에, 이 관계를 단순히 어떤 주체적인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관계를 이끌어 오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로서 행하는 활동은 그저 단순히 주체적인 것이 아니며,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은, 이 양 개념을 극복하여 넘어서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주체가 사고한다고 말할 권리가 전혀 없다. 이 개인적인 주체는 오히려 사고의 은혜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고는 나를 나의 자아 이상으로 이끌어 내어, 객체와 연결시키는 요소인 것이다. 동시에 사고가 나를 주체로서 객체의 맞은편에 세워 둠으로써, 나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이중성이 기인한다. 인간은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과 나머지 세계를 포괄한다. 그는 동시에, 사고에 의하여 사물의 맞은편에 서 있는 개인으로 자신을 규정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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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의 '유일한 자와 그의 자산' 중에서


"...... 너희들이 보장하듯이 신도 인류도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이기 위해 그 내면에 충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나도 역시 그에 비해 별로 모자란 바가 없다고 느끼고, 내 '공空'에 대해 불평할 것이 없다고 느낀다.

나는 공의 의미에서 무無가 아니라, 창조적인 무無다.

그 무無로부터 나 스스로 창조자로서 모든 것을 창조해 낸다는 의미에서의 무無.


절대적으로 완전히 내 문제가 아닌 것, 그런 모든 것은 쓸어내버려!

너희들은 내 문제가 적어도 '선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냐!


내 스스로가 내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 양자 모두 내겐 아무 의미도 없다.


신적인 것은 신의 문제다, 인류적인 것은 인류의 문제다.

내 문제는 신적인 것도 인류적인 것도 아니다.

내 문제는 진실의 문제도, 선의 문제도, 정의의 문제도, 자유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문제도 아니다.

내가 유일하듯이 내 문제도 유일하다.

아무 것도 나를 넘어서지 않는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유의 철학' 중에서


"......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법칙에도 '이 행위를 실행해야 할까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이상을 파악하는 즉시 실행한다.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것이 나의 행위가 된다. 특정한 윤리적 규범을 인정하기 때문에 실행하는 사람의 행위는 그의 도덕 법적 속에 존재하는 원칙의 결과일 뿐이다. 그는 단지 집행자에 불과하다. 그는 고차적 자동 기계다. 행위를 위한 이유를 그의 의식에 던져 넣으면, 즉시 그의 도덕 원리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법칙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적인 것, 인도적인 것, 그에게 사리사욕이 없어 보이는 것, 혹은 문화 역사적 진보를 위한 행위를 실행한다. 오로지 객체에 대한 사랑을 따를 때에만, 나는 행위하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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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가 말하자면 여러분의 마음에 명심시키고 싶은 것에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키면서 오늘 이 고찰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네 가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교사가 크고 작은 것에서 자신의 직업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정신화 함에서, 교사가 하나하나의 단어를 어떻게 말하는지, 하나하나의 개념과 모든 개별적인 감각을 어떻게 발달시키는지, 바로 그 양식에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교사는 발안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교사가 절대로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달리 말하자면, 교사가 학교에서 행하는 것과 어린이들을 대하는 처신에 완전히 현존해야 한다는 점을 숙고하십시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즉 교사는 크고 작은 전체에서 발안하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 두 번째는, 사랑하는 여러분, 교사로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과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세상사에 대해서, 인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교사로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흥미로울 수 있는 것에 어떤 식으로든 등을 진다면, 그런 것이 교사에게서 자리잡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개별적인 어린이들의 커다란 문제와 가장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두 번째입니다. 교사는 세상과 인간존재를 위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교사는 자신의 내면에서 진실이 아닌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내면 깊숙이 참된 인간이어야만 합니다. 절대로 진실이 아닌 것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많은 경로를 통해서 진실이 아닌 것이, 특히 방법론에서 우리의 수업으로 흘러들어오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진실한 것을 추구하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쓸 경우에만, 우리의 수업이 진실한 것의 각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실현되기 보다는 쉽게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나 역시 교사라는 직업을 위해서 황금률인 것이 있습니다. 교사는 메마르거나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메마르지 않은 신선한 영혼정서! 메마르지 않고, 시대에 뒤 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교사가 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1919년 8월과 9월,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 학교 개교에 즈음한 14일 간의 교사세미나를 마친 후에 행한 슈타이너의 "결어" 독일어 번역입니다. ]

- 최혜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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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슈타이너의 신비학 교실 강의 중 "영적 생각"에 관해서 


루돌프 슈타이너

신비수행반 강의 중

베를린 1911년 1월 17일



신비수행의 방법 중 하나는(이 물질세상에서 관한 생각이 아닌) 물질세상에 관련되지 않은 생각들을 통해서 느낌과 정서를 일으키는데 있습니다. 생각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생각들이 서로 겹치면서 점차로 물질적인하나로 우리 주변의 물질 세상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나는 생각과, 인지학 등에서 가르치는 생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물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신체를 포함하여, 환영(maya)입니다. (역자 주 –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영적인 실체의 현현물이지 그 물질적인 신체가 자신을 존재하게 탄생시킨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물질 세계를 경시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보이는 물질 세계 이면에 그것을 탄생시킨 영적인 실체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럼 그곳에는 무엇이 진짜로 있을까요? 무엇을 통해서 우리 주변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광물들이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높은 존재들이 수백만년 동안 그것들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하고 해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같은 실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광물이 더 굳을수록 그것은 더욱 오래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우리 신체도 바로 높은 존재들의 생각을 통해서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만약 일상적인 물질세상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생각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에 비친 상, 또는 생각의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역자 주 – 물질 세상의 실체들이 높은 존재들의 생각이라면, 우리가 물질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높은 존재들이 생각해 낸 것을 다시 생각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물질세상에 대해서 하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높은 존재들의 생각을 단지 우리의 혼에 비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울상 또는 환영이라 할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질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오래 전에 이미 생각되어진 것이고,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잘못된 방법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종이 울리는 소리는 듣는다고 하면은, 실제로 소리는 실체가 아닙니다. 실제는 이것과 같습니다 : 수백만년 전에 지금의 종과, 지금의 우리의 뇌가 될 무엇이 높은 존재들에 의해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두개가 만남으로서 우리가 들리는 소리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생각은, 생산적이지 않고 점차로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 생각은 우리의 아스트랄체를 특정한 진동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는 이미 높은 존재들에 의해서 심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초감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역자 주 –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사람) 자신의 아스트럴체에 결코 새로운 형성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아스트럴체에 일어나는 일은 에테르체에 작용하는데, 에테르체는 새로운 형태와 생각들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역자 주 – 사람이 성장하는 방향은, 자아를 통하여 자신의 아스트럴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아스트럴체는 다시 에테르체에, 에테르체는 다시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있습니다. 자아의 바른 도덕관념은 아스트럴체를 다스릴수 있게 해주고, 결국은 에테르체를 통해 그것이 자신의 완벽한 습관, 습성으로 되고, 결국은 육체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아를 통해 다스려지고 길러진 아스트럴체, 에테르체, 육체는, 예수님께서 먼 훗날에 너희는 육체를 가지고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니라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변형된 아스트럴체, 에테르체, 육체를 가지고 영혼의 세계에 살게 될 것입니다) 낡은 형태의 생각은 에테르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가져오고, 결국은 육체-신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모든 것은 자면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자면서 아스트럴체가 자아와 함께 몸 밖으로 나가서 높은 존재들의 품에 머무르면서 다시 힘을 얻게됩니다. 그리고 에테르체는 아스트럴체로부터 분리되어 회복되게 됩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자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인지학(영적인 가르침, 영적인 섭리, 영적 세계)에 대한 생각도 처음에는 완벽히 감각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생각되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반복하다가 보면, 그 생각에 붙어 있던 감각적인 부분들은 떨어져 나가고 영적인 생각의 부분만 남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수학이 가장 감각으로부터 벗어난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삼각형을 생각할 때 세상의 어떤 색과 어떤 두께를 가진 형태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직 감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삼각형의 속성이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이는 영적인 생각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소리를 단지 기억하는 것은 감각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멜로디를 생각하는 것은 각 소리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을 생각할 때 각대상의 외적인 인상을 생각하지 말고 그 관계나 속성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를 세상에서 벗어나 영적인 세계로 이끌어 주게 됩니다. (사람들 무리에서도 각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감각적인 생각인데,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와 서로의 관계와 영향 대해서 고찰해 보는 것은 영적인 생각입니다)

 

감각으로부터 벗어난 생각을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어떠한 순서를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의 기도를 꺼꾸로 외워본다던지, 하루의 일과를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억력도 왕성히 키울 수 있습니다. 지난 4-5백년동안 사람들의 기억력은 급속도로 퇴화하였습니다. 지금 시기는 이것을 다시 회복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럴 기회가 다시 없어질 것입니다. 기억력은 단지 과거의 어둠 속에서 문득 문득 떠올려지는 것이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각의 촉수를 뻗어 무언가 실제를 다시 만지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시대는 이것을 기르기에 아주 적합한 시기이고 일반적인 신비수행에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생각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생각인 존재가 해낸 생각입니다. 생각이 생각을 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명상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에테르체도, 아스트럴체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역자 주 – 슈타이너의 인지학에서는 ‘생각’에 대해서 매우 깊이 그리고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칩니다. 우리의 생각은 아직 실체가 아닌 거울이지만, 모든 존재는 생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그곳은 흡사 우리가 하는 생각의 세계와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로는 그 진짜 세계가 진짜 생각의 세계이고 우리의 생각은 그 생각의 세계를 비추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각의 세계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생각되어지고 의미없이 사라지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실체의 세계를 말합니다. 현재 시기의 사람들은 생각을 통하여 영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세상에 속하지 않은 영적인 생각들을 하고, 또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대상물 없이 영적인 대상물에 대해 오랫동안 집중하여 생각할 수 있는 힘이 길러졌을 때, 아스트럴체에 연꽃무늬의 기관이 생긴다 합니다. 이 기관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생각의 세계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요가에서 말하는 차크라입니다. )

 

역자1 : 명상에 중요한 몇가지 문장

1. 세상은 생각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모든 실체 뒤에는 높은 존재들이 생성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뇌는 컵과 같습니다. 세상에 물이 있어야 컵을 채울 수 있지, 컵이 스스로 물을 생성해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뇌도 단지 세상의 대상물에 있는 생각을 담고 비추는 그릇입니다.

3.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월등히 기를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떤 일련의 일들을 마음 속에 생생히 그림으로 그려봅니다. 어떤 상황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 마음으로 그려낼 수 있고 또 다시 세상을 관찰했을 때 우리가 한 생각의 흐름과 세상이 같게 진행되거든 우리가 생각을 바르게 한 것이 됩니다. 처음에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자세한 부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럴때는 아무것이나 상상해서 채워 넣으십시요. 그럼 점차로 나중에는 그 디테일들 또한 기억이 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을 우리의 생각으로 그려낼 수 있으면, 어느 순간에 내가 스스로 임의적으로 생각해 내지 않고, 모든 사물이 자신을 내게 드러냄을 느끼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적인 세계도 우리의 생각 속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을 굉장히 잘한 사람이 괴테입니다. 괴테는 사물을 정확히 그 모습으로 파악하여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만 보고서도 몇시간 후에 비가 올 것인지 어떨지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역자 2 : 처음에 어떤 것이 영적인 생각이고 어떤 것이 감각에 국한된 생각인지 감이 잘 안 올것 같아 몇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눈 앞에 있는 식물을 보고, 이것은 잎사귀, 이것은 줄기, 얘는 물과 빛이 필요해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감각에 국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식물을 이렇게 생생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신선한 힘을 생각해본다면 영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어떻게 씨앗으로부터 쭈욱 줄기가 나와서 잎사귀가 나오고 커지고, 색이 밝았다가 점차 진해지고, 또 소중하게 봉우리가 생기고 통통해지면서 꽃잎이 터지고 활짝 펴지고 색은 진해지고 그리고 시들해지고 쪼그라들고 진해지고 말라가고 하는 전체 과정을 그려보는 것 또한 영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식물이 태양과 공기와 열과 토양과 땅 속의 돌멩이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관찰해 보는 것도 영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 식물은 흙도 필요하지, 하고 생각하고 어떠한 느낌도 이미지도 가지지 않는다면 이는 감각적인 생각입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얘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힘은 무엇을까, 지금도 작용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그 힘은 무엇일까? 내가 누구를 사랑하거나 무엇을 소중히 생각해 낼 때 느껴지는 그런 힘들도 얘들에게 작용하나?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은 좋은 영적인 생각입니다.

2. 또 앞의 아이나 어른이 무언가 잘못하거나 잘못되었을 때, 이 사람이 이렇게 된 피치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좋은 방향을 사랑하여 따르게 만들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영적인 생각입니다. 그냥 얘는 잘못했어, 또는 잘못되었어, 고쳐야해.. 라고 생각하는 것은 감각적인 생각입니다. 모든 사물 속에 있는 실체를(생각을) 파악하고 연관성을 파악해보려는 것은 영적인 생각입니다.

3. 그리고 다른 면에서, 과연 예수님 속에 그리스도님이 들어오셨다는데,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실까? 천사는 어떤 존재일까. 천사와 예수님이 지금 이순간에 세상에 대해 가지는 그 어마어마한 연민과 사랑은 어떤 느낌일까? 죽고나서 예수님의 눈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세상이 모두 바르게 되어 이 세상에 천국이 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등등 도덕적으로 생각-상상해 보는것도 영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영적인 생각의 특징은 그 질문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질문을 하고 느껴본다면, 어떠한 느낌들이 조금씩 커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더불에 생각에 변화가 오고(실제로 아스트럴체에 연꽃모양의 기관이 형성되고) 시간이 지나서야 그 답이 스스로 서서히 자신을 드러냄을 알게 됩니다.

4. 삶에 대해서 항상 영적인 질문을 하시고, 최대한 도덕적이고 긍정적인 느낌으로 그 답을 헤아려 보십시요. 그 답은(높은 존재들의 생각) 준비된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입니다.

 

아래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촬영한 영상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고 집안에 있는 식물들을 보고 어떻게 자라나는지 마음 속으로 그리는 훈련을 해보십시요.

(참고: 신이 우리의 눈앞에서 어떠한 것을 바로 창조하여 생성해내면 우리는 ‘창조다, 기적이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이 우리 사람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무엇을 창조해 낸다면, 우리는 ‘이건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아래 영상을 보십시요, 실제로 세상은 계속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잎사귀가 길어지는 것과 꽃잎이 스스로 면적을 넓히는 것을 보십시요. 이것은 창조되어지는 과정입니다. 온 우주는 이 순간에도 창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 그 성장에 따라가지 못할까봐 또 실패하면서도 배워가며 성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무한히 느리게 해 놓으신 것 뿐입니다. 시간 속의 자비와 우주의 창조성을 마음 속으로 느껴보십시요.)

 

[식물의 창조]

http://www.youtube.com/watch?v=HnbMYzdjuBs

http://www.youtube.com/watch?v=hJ1cp38QeyQ

http://www.youtube.com/watch?v=jC_iXkHR-vA&feature=channel

http://www.youtube.com/watch?v=kpQtQrirV4I&feature=channel

http://www.youtube.com/watch?v=3fnR5P-FQEo&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watch?v=8s_fpRUqpuE

 

[자연의 창조 변화]

http://www.youtube.com/watch?v=LdgrN9WgYWI&feature=channel

 


원문 :


From the Contents of Esoteric Classes

77. EL, Berlin, 1-17-'11


The techniques of esoteric life is to  let thoughts work upon one that awaken feelings and sensations that aren't derived from the physical plane. There are two kinds of thoughts: the ones that are awakened in us through the perception of the physical world, and thoughts such as theosophy gives us. Everything in that physical world is maya, including our physical body. Through what, is this really there? Through what do the animals, plants and stones around us exist? Through the fact that higher beings took a thought many millions of years ago and thought it over and over again. The same thoughts cover each other and eventually form physical objects. The harder a stone is, the longer beings thought it. Our physical body is nothing else than the thought of many higher beings.

If we only think the ordinary thoughts of the physical plane, then this is really no thought, but the mirror image, the illusion of a thought. For everything that's from the physical world was already thought a long time ago, and all we do is to repeat these thoughts, but in the wrong way. For instance, if someone hears a bell ringing, then the sounds is nothing real, but it's like this: millions of years ago what became the bell and also what became our brain was thought, and the knocking together of these two gives the sound that we hear. All physical thoughts are unproductive and eventually have a destructive effect. They bring our astral body into a certain oscillation, but this was already put into it by higher beings. So one who never thinks supersensibly never brings new formations into the astral body. What happens in the astral body works back upon the etheric body, but the etheric body is inclined to take new forms and thoughts into itself. Old forms have a destructive effect on it and from there into the physical strands of our nervous system. All of this must be restored again in sleep. The astral body is inserted into the higher hierarchies for awhile and thereby gets forces; the etheric body is separated from the astral body and becomes regenerated thereby. One couldn't live long without sleep.

However, nonsensorial thoughts have a productive and upbuilding effect They enable a man to fit himself into the hierarchies. New forms, the lotus flowers, are created in his astral body. That's why it's necessary to repeat a meditation hundreds of time.

The ideas we form about theosophical teachings will at first not be entirely sense-free. But if the thought is repeated, the sensory element that is still attached to it falls away by itself and the supersensible part remains.

Out in the world mathematical thoughts are the most sense-free ones; but when a modern thinks a triangle, he thinks it with color and a certain thickness, that is, not abstractly enough. But one gets closer to supersensible thoughts when one notes relations. Remembering a sound is a memory of a sensory things, but remembering a melody is something that consists in relations of sounds that don't as such belong to the sense world. So it's important to see and to study relations in the outer world, for this leads us away from sensory things.

Another way to develop sense-free thinking is to let processes run in the reverse direction, for instance, by saying the Lord's Prayer backwards or by looking backwards through our meditation. That's the only way that a man can improve his memory. Man's memory has gotten much worse in the last four to five centuries, and this will be the case even more if they don't avail themselves of the opportunities that are now being offered. The time for these opportunities is particularly favorable now, and later on they'll simply not be there anymore. Memory will no longer be a mere waiting to see whether things want to emerge from a dark ground. It'll be like a groping towards the past or like a sending out of feelers that'll grasp for the past like towards some thing that's real. Our time is particularly favorable for this development and for esoteric development in general.

Thus, we see that our body is an illusion; it's thoughts of beings who are also thoughts. Thought thinks thoughts — that's a meditational statement that's very important. It's not our brain or etheric body or astral body that thinks — thoughts think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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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생리학 Eine okkulte Physiologie (1911년)

루돌프 슈타이너

타카하시 이와오 / 유창완 

 


◎ 인간의 본성 

이 연속 강의는 인간 생명의 본질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히 밀접한 문제를 다루겠지만, 이 문제는 인간자신과 관련된 것이면서도 대단히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차세계로부터 ‘인간이여 그대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요구가 모든 시대에 대두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자기를 인식하는 일의 어려움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기인식 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 본성에 관한 인식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대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요구가 영원히 되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먼 여정을 밟아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강의의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가까운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정말로 진실한 고찰을 수행하려한다면 반듯이 통상적인 과학이 무시해온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필요한 것은 인간본성에 대해서 외경의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것도 각각의 인간본성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그 개인이 우리들 자신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개개의 인간본성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 본성에 대해서 외경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고찰에서 기본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외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든 다른 누군가든 일상생활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인간 때문에 걱정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인간진화 전 과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의 신령(神靈)의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우주 신성의 한 드러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기인식을 통해서 더욱 더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식욕으로부터 알려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우주의 영적인 존재를 점점 더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의무로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상태로 있는 것은 인간의 숭고한 사명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하는 말을 이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주의 영은 알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엮어 넣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식하는 태도를 포기하려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본래 허용되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우주의 영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영을 체현하는 대신에 점점 더 그 희화(戱畵)가 되어버립니다. 더욱 더 우주의 영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영을 나타내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인식해야만 한다. 인식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다.’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컬트적인 의미로 인생을, 인간의 본질을 고찰하려는 사람은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품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인간존재의 영적인 근본에 입문할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견령능력을 불러 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영학자나 견령자라도 인간의 본성을 향한 한없는 외경의 감정이 가장 내적인 혼의 신경을 건드려 진동시킬 수 없다면, 비록 우주의 어느 영적인 비밀에 대해 영안을 열었다 할지라도 인간자신의 깊은 본성과 관계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영적인 공간 안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견령자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외경의 마음이 부족하다면 인간성의 심오함을 통찰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올바른 것도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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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의 불교론


니시카와 류우항 편역

번역 : 엘토포

 

 

부처의 니르마나카야(應身) 

불교의 영적 전통은 고타마 붓다에게서 정점을 이루었다. 부처는 그때까지 수많은 윤회전생을 되풀이해온 존재이다. 기원전 6세기의 육화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 육화를 통해서 고타마는 비로소 부처가 된 것이다. 그 이전에 그는 보살, 즉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였다.

 

수천 년에 걸쳐서 사랑과 자비를 고차의 영적 영역에서 인간 가운데로 흘려보내는 임무를 가진 존재가 훗날 인도에 부처로서 육화한 보살이다. 물질계에 있는 인간은 사랑과 자비를 자신 안에서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다. 보살들은 비의입문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로 상승하여, 그곳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보리수 아래에 좌정한 보살이 부처가 되었을 때, 지구 전체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인간으로 살았던 부처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나타난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상세히 말한 것이 팔정도이다. 부처가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서 생생하게 인식함으로써 인류는 부처와 장래에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그때 이래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위대한 부처를 따라 팔정도를 실천하는 생활을 보냈다.

 

당시 부처가 체험한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팔정도를 심혼의 능력으로 만들 정도로 성숙하고, 그 시점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부처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쏟아 부었다. 그 이래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 안에서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가져오는 일을 사명으로 한 부처는 물질체를 버리고 떠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란 최후의 육화를 의미한다. 부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타마로서 육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이후로 부처가 된 보살에게는 물질체에 육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에테르까지 육화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영시만이 이 부처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물질체를 갖지 않는 모습을 니르마나카야(應身)라고 부른다.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과거 보살로서 받은 사명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활동한 부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라고 하는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응신불(應身佛)은 ‘만약 내가 힘을 빌려주면 이 아이는 인류를 크게 전진시킬 가능성을 물질체 안에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니르마나카야를 하나의 닫힌 몸으로 표상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힘에 불과했던 것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니르마나카야이다. 우리 안에 사고, 감정, 의지의 능력이 결합하고 있듯이 이 존재의 조직은 고차세계에서 어느 존재의 개아를 통해서 서로 맺어져있다. 영시자는 응신불에 속한 여러 존재들을 지각한다.

 

이와 같은 관계를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응신불이 예수에게로 내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영적세계로부터 천사 무리가 내려와 양치기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시자는 예수 위를 떠다니는 응신불을 보았을 것이다. 나이가 든 현자 아시타가 이제 막 태어난 부처를 보고 이 보살은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인도의 전설이 있다. 이 현자는 자신이 이미 늙어서 그 아이가 부처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아시타는 재육화하여 다시 노인으로서 아이인 예수를 만난다. <누가복음서> 제2장에 기록되어있는 시므온이 바로 그이다. 신전에서 예수를 만나 보살이 부처가 된 것을 보고 ‘주여, 이제 이 종이 평화롭게 가게 해주십시오. 나의 눈은 당신의 구세주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시타=시므온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것을 5백년 후에 본 것이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보살 (1905년 10월 1일, 베를린)  

지상의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그 경험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알고 있으며,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자를 보살(보디삿트바)이라고 부른다. 보디, 지구의 붓디를 충분히 자신 안에 받아들인 인간이다.

창조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지구의 모든 앎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뒤에야 인간은 비로소 보살이 된다. 예를 들면 부처나 조로아스터는 보살이었다.

첫 번째 튀어 오름(카마)이 힘으로서 화성 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이 육화하기 직전에 인간에게 덧붙여진다. 두 번째 튀어 오름(마나스)이 수성에서 아틀란티스의 제5아인종, 원 셈인에게 내려왔다. 이 새로운 추진력은 보다 고차 존재들, 여러 혹성의 응신(니르마나카야)을 통해서 지상에 가져오게 되었다. 그 존재들은 화성에서 카마를 가져오고, 수성에서 마나스를 가져와 덧붙였다. 응신(應身)들은 보살보다 한 단계 고차존재이다. 보살은 끊임없이 진화를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져오는 일은 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응신들 뿐이다. 응신들 보다 한 단계 위에 피트리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서있다.

일곱 단계의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신들, 두 번째 피트리, 세 번째 응신, 네 번째 보살, 다섯 번째 순수한 인간, 여섯 번째 인간, 일곱 번째 사대원소존재가 있다.

-《비의의 기본요소》중에서

 

 

부처와 보탄 (1908년 8월 14일, 슈투트가르트) 

보통 인간은 고대의 불분명한 의식 가운데서 천사를 지각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는 그리스인이 제우스 안에서, 게르만인이 보탄 안에서 신성으로 간주한 존재이다.

보탄은 과거 비의입문자로서 어느 인체 안에서 살면서 신성한 비밀의식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보탄은 충분히 깊게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그 인간그룹 안으로 육화할 수 없었다. 그 인간그룹은 진화로부터 뒤쳐졌고, 그 때문에 물질계를 무가치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계를 가치 있는 신성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번뇌의 장소, 고통의 장소로 보았다. 그들은 물질계로부터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한 지복이라고 고찰하고 있었다. 이 보탄의 개체는 실제로 게르만 민족의 비밀의식 가운데서 가르침을 폈다. 이 개체는 훗날 같은 사명을 위해 부처로 다시 나타났다. 이 세계와 고차세계의 관계를 중계했던 부처라고 하는 개체와 과거 유럽에 존재하면서 북구에서 보탄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개체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부처의 사인  (1908년 8월 16일, 슈투트가르트) 

「부처가 돼지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동양학자는 부처의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기술로부터 평범한 것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비교(秘敎)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 기술은 부처가 동시대인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부처는 바라문교의 신성한 비밀을 너무 많이 세상에 전했다. 너무 많은 신비학을 세상에 전했기 때문에 부처는 죽은 것이다. 감추어진 것을 전하는 자가 죽음을 맞이하듯, 부처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것을 이와 같은 이미지로 말하고 있다.

선정불(禪定佛)로 판단되는 존재는 바로 역사상 실존했던 부처의 에테르체, 신들에 의해 붙들린 에테르체, 보탄의 개체에 의해 붙들린 에체르체이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보탄과 부처 (1908년 9월 12일, 라이프찌히) 

육안으로는 아틀란티스인의 신체를 어느 정도까지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에테르체 안까지만 육화하는 존재도 있었다. 대기가 수증기로 가득했던 당시 어떤 존재가 육화했다. 인간이 물과 안개로 가득한 대기권에서 살고 있던 당시 아직 육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존재가 훗날의 보탄이다.「인간이 이 광액체(光液體) 물질에 육화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띄고 물질계에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지구가 경화되어 인간도 경화된 모습을 취하게 되자,「나는 이러한 단단한 물질 속으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보탄은 지상에서 떨어진 비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렀다.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정화하여 고차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될 때까지 진화를 이룬 인간이 재육화하는 일이 있다. 그 같은 식으로 부처는 보탄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었다. 게르만 신화에서 보탄이라고 부른 존재가 부처로서 다시 나타났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은 물질계를 아주 조금 밖에 고려하지 않은, 물질계는 고통의 장소이고 물질계로부터 해방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부처 안에서 보탄 존재가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을 가장 깊이 이해한 것은 아틀란티스에서 늦게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신화와 밀의》에서 



부처와 보살과 선정불 (1909년 4월 16일, 뒤셀도르프) 

레무리아 시대에 인격의 신들이 인간 존재를 통해서 말하고,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대천사들이 말하고, 후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천사들이 말하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인간이라도 물질체에 이르기까지 자신 내부에 인격의 신들을 짊어진 인물을 동양에서는 선정불(禪定佛)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정불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의 신들이 물질체까지 침투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에테르체까지 대천사가 침투한 인물은 보살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천사가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관통한 존재를 인간―부처라고 부른다. 선정불・보살・부처라고 하는 세 가지 위계가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한 명의 부처뿐만 아니라 많은 부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상을 걷는 부처의 배후에 보살, 그리고 선정불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선정불과 보살이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하강하지 않은 채 보살이 에테르체에 침투하는 정도까지만 하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가지 않고 에테르체에 영감을 부여하는 것에 머무르는 존재를 추정해볼 수 있다. 에테르체 안에서만 충현한 보살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와 같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살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보살은 고차존재로서 인간―부처에게 특별한 영감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사에 의해서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에테르체 안에 대천사로부터 영감을 받는 인간―부처가 있는 것이다.

-《물질계에서 신령존재의 반영》 중에서



부처의 탄생 (1909년 6월 25일, 카셀) 

부처가 인도에 출현했던 시대를 다루어보자. 당시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부처와 같은 존재가 출현한다고 해도 특별히 존경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시대에는 달랐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탄생에서 다른 사람의 탄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깊이 이해한 동양의 문헌은 부처의 탄생을 기품 있는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모상’인 마야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녀가 힘 있는 존재를 세상에 가져오리라 예언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존재의 탄생은 세상에게 있어서 일종의 조산(早産)이었다.


의미 있는 존재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늘은 그 존재를 종종 조산(早産)시키는 일이 있다. 인간 안에 고차의 정신존재가 육화해야할 때, 시기가 무르익은 것처럼 철저하게 물질과 결합하지는 않는 것이다.


동양의 중요한 문헌에는 부처가 태어난 순간, 부처는 빛났고, 곧 눈을 뜨고 동서남북을 보고 일곱 걸음 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곱 걸음 뗀 것은 대지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보살에서 부처가 될 인생이다. 이 지상에서 나의 마지막 육화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물론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기묘하게 여겨질 것이다. 정신적인 눈으로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진실이다. 당시는 자연적(천성적)인 영시력으로 부처와 함께 무엇이 탄생했는지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사람은 지금 말한 동양의 문헌에서 전하는 부처의 이야기를 기묘한 것으로, 전설이나 신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정신세계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부처의 탄생과 같은 사건은 개인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고, 세계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힘을 발산하는 법이다. 세계가 정신적인 힘을 받아들일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처의 탄생과 함께 치유와 화해의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서와 공관복음서》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 (1909.10.18 베를린) 

나단계 소년 예수로 나타난 인물, 즉 본래의 나사렛 예수 위에서 그 아이의 오라로 나타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를 볼 수 있다. 니르마나카야는 석가가 부처가 된 마지막 육화 이후에 입은 형태이다.

보살은 정해진 육화 아래에서 부처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존재는 더 이상 지상의 육체로 육화할 필요가 없는 진화단계에 이른다. 더 이상 육화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성과이다.


그 육화이후 보살・부처는 더 이상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는다.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고 에테르체(생명체)를 가장 낮은 신체적 본성으로서 육화할 뿐이다. 이 개체는 이후에도 에테르체 안으로 육화했다. 부처는 이제 물질체로 육화하지 않고 에테르체까지만 육화하는 것이다.


부처와 같은 개체가 육화하는 에테르체는 닫쳐진 단일한 공간이 아닌 관련이 없는 수많은 부분들로 되어있다.

그와 같은 보살・부처가 에테르체에 육화하여 다시 나타날 때는 한 무리의 존재라고 하는 모양으로 눈에 보인다. 「누가복음서」의 저자가 들판의 양치기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에서 이러한 한 무리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라고 부르는 이 에테르체가 나단계의 어린 예수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이 니르마나카야가 영감을 부여하고 부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 안에 쏟아 부었다.


이것이 「누가복음서」안에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인 천사무리로 쓰여 있다.

보살・부처 안에 육화한 개체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시대에서 시대로 전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보살이 부처로서 존재했던 때 보살을 통해서 사랑에 관한 내용이 암시적으로 불어넣어졌다. 그로부터 인간이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점차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 이른바 팔정도의 가르침을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과거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것이 부처가 지상에서 활동했을 때 처음으로 가르침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져오는 것이 부처의 사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힘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사랑의 힘이 아래로 흘러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 존재를 통해서 드러날 가능성이 주어졌고,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부처를 통해서 전해질 가능성이 주어졌다.


부처가 가져온 것을 위대한 법,「다르마」라고 부른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부처는 법을 혼이 그 법을 인식하고, 인간이 그 법을 자신의 심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태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명령으로서 가져온 것이다.


부처는「그대들은 자신의 혼 깊숙한 곳에서 내가 말한 법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세는「하느님의 법이 이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앞으로 나아갔을 때 보살・부처는 이 가르침을 가져올 수 있었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 대한 부처의 의견 (1913년 10월 5일, 오슬로)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과 이념을 주고받은 결과 예수에게 부처나 나타났다. 그리고 예수와 부처 사이에 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부처는 예수에게「만약 내 가르침이 내가 설파한 그대로 완전히 실현된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속세로부터 벗어난 청정한 승가를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도 세간을 등짐으로써 정신적인 진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깨끗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속세의 사람들을 희생해서 자신이 꺠끗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실현한다면, 에세네파 교단처럼 청정해진 사람들이 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제5복음서》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서 예수와 부처 (1913년 11월 4일, 베를린) 

에세네파 교단의 행동 방식은 부처가 세상에 가져다 준 것과 매우 닮아있다. 예수는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부처는「내가 인류에게 전해준 길로는 모든 사람이 신적・영적 세계와의 연관성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시하는 사람이 없다면 부처와 제자들은 보시를 받을 수 없다. 부처의 가르침은 어떠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5복음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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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십자의 비교


제1강 장미십자의 비교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3일

GA109

  

이번 연속강의에서 내 사명은 여러분에게 이른바 장미십자의 방법에 기초한 신지학적 세계관에 대한 영상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장미십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장미십자의 방법」이란 표현은 신지학이 13,14세기 이후 유럽 오컬트학파에서 항상 이용되어 온 방법, 즉 장미십자의 수행이라고 불리던 방법을 나타낸다는 의미로밖에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지학은 세상 마음속에 인간지식에 대한 원천을 형성하기 위해 고대 인류에게 주어진 진리라고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 지식을 지키려는 은밀함 또한 커집니다. 왜 그렇게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연속강연을 기회로 우주적 지혜가 어떻게 오컬트학파와 그 중심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되돌아갈 예정입니다. 그 오컬트학파에서 배우는 각각의 사람은 단순히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투시력을 육성하여 고차세계를 통찰하기까지 자신의 영혼을 변용시키는 수행을 받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개의 사람은 그로부터 사자(使者)로써 보내져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진보라고하는 것은 더욱 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판단과 지성을 통하여 이 지혜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비밀로 유지되던 것이 차츰 공개되어 알려져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외적인 상황의 결과 19세기 동안 실로 대단히 많은 양의 오컬트지식이 인간성의 진보와 복지를 위해 공개의 길을 걷을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19세기 이 지식의 수호자들은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과거 종교나 그 밖에 다른 수단으로 인류에게 행해진 영적 가르침의 교신(交信)은 영원한 진리에 관한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지금 인류의 요구는 변했다.’ 그렇게 이러한 태곳적 지혜의 수호자들은 미래에는 오래된 영적 진리의 교신형식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정신을 가진 인간의 수가 증가하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지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교신수단은 현대의 인간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관찰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밀지식의 수호자들은 장래에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만, 어떤 시점에 처음 이르러서야 실제로 이 지혜가 인간성에 유입되기 위해 준비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지배적인 인간성으로도 이 비밀이 파악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점은 13,14세기에 실현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이 준비의 출발점을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최초의 장미십자회 사람들은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츠(Christian Rosenkreutz)로 알려진 중요한 개아(個我)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이츠는 가장 확신에 찬 명석함으로 다음 같이 말했습니다. 「비밀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초감각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혜의 보고(寶庫)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고수한다면, 과거에 행했던 일, 즉 우리 학파에서 훈련받은 영혼들이 태초의 지혜에 관한 비밀을 배우고 식별하게 되었을 때 다른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는 일이 미래에도 요구될 것이다.」

 

태초의 지혜를 전파하는 옛 방법은 계속 이어져야 했지만, 또 다른 일도 준비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이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초의 지혜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형태로 그들에게 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권위를 높이 신뢰하고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빠르게 인류로부터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판단력이 증가할수록 가르지는 자에 대한 신뢰도 얕아질 것이다. 믿음과 신뢰는 과거 전달수단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성이 있습니다.「자신에게 전수된 지식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 세계를 관찰하는데 이용하는 논리적 지성을 그들에게 전해진 것에 응용하고 싶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지성에 더해 정신세계의 탐사에는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인정하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 지성을 사용하여 사물을 조사해보고 싶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시대 시작에 태초의 지혜가 새로운 형식을 몸에 걸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미십자회의 사명은 근대정신과 근대영혼이 수용 가능하도록 새로운 형식으로 태초의 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장미십자의 방법에 따라 보여주는 신지학은 무엇일까요? 신지학 그 자체는 언제어디에 있던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장미십자의 신지학자는 19,20세기의 신지학자입니다. 걸치고 있는 형식에 따라 그 지혜는 인간이 이해를 바라고 또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에 잘 부합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인간성 진화의 여정은 인간이 외적 물질적 실재에 점점 더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고대를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문화를 생각해 보신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소박한 방법과 힘을 이용하여 일하고 건축물을 만들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물질적 안녕을 위해 수많은 교묘한 발명을 탄생시킨 현대생활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울 정도의 정신적 힘과 심리적 활동이 매일 물질적 요구를 위해 소비되고 있는지를... 물론 이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세계의 특수한 사명은 외적 문화를 형성하고 외적 자연을 제어하여 물질영역이 진정한 인간정신의 통제 하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는 오컬트학파에 의해 보호되어온 지혜를 흡수할 수 있지만 고대의 경향과는 다른 수단이 필요합니다.

 

한편 칼데아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정신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현재 우리의 지식과 비교해본다면, 칼데아인이 우리들보다 훨씬 하늘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들이나 외적 과학이 기록한 것들을 보며 감탄하지만 이것도 고대 갈데아인의 지혜와 비교하면 모두 어린애장난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의 연구자들에게 화성은 그 행로나 운동이 계산 가능한 객관적 천체입니다. 하지만 칼데아인은 거기에 더해서 어떤 힘들과 실체가 화성과 관계가 있는지, 어떤 신성한 의지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지, 이러한 힘들과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힘들이 사용하는 신비와 그 지배를 칼데아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고대 칼데아문화의 내적인 특징 앞에서 무력하다고 밖에 말 수 없습니다. 현대인은 자유로이 연구를 위한 외적수단을 이용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내적수단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지학자와 장미십자회는 당시 고대문화의 영성에 입문하는 정신적 비교(秘敎)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혜를 새겨 넣은 원기둥 모양의 흙인장을 발굴한 위대한 권위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전기기구 앞에 서있는 3살짜리 아이처럼 그 사물 앞에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고대유적으로부터 발굴한 유물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당시 영적 지식의 흐름은 그만큼 깊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외적 기기와 지성을 이용하여 최근 수세기 동안 행해진 위대한 진보의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감탄해마지않는 창조물, 이것은 현대과학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영성의 이해를 위해 또 다른 종류의 사고와 지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진보의 정도에 대해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붓다 중 어느 쪽이 위대한가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앗시리아의 지혜가 뛰어난지 현대의 지혜가 뛰어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유물주의적 정신으로 물들은 세계에 살고 있고, 인간이 품고 있는 정신적 지식에 대한 동경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적지식의 유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장미십자의 지혜는 바로 현대인에게 적합한 형식으로 이 지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허황되게 생각되실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대로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곧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 장미십자의 지혜만큼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위대한 개아, 크리스티앙 로젠크로이츠는 합리적 사고에 의한 이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예견하고 당시 이미 모든 영적 지식을 현대가 요구하는 형식으로 퍼뜨릴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미십자회는 그 이전의 어떤 유사한 운동보다도 훨씬 어려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왜냐하면 13,14세기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유물주의가 착실히 다가오는 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 전보와 같은 모든 현대의 위대한 업적은 인간을 물질계에 단단히 붙들어 매이게 만들었습니다. 장미십자회 회원들은 사람들의 사고가 수학적 원리에 따르게 될 시대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완전히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로는 장미십자주의의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미십자주의를 육성한 사람은 어떠한 문헌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미십자회 회원을 육성한 가장 심오한 여러 영적진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심하게 오해받은 결과 영적현상은 연금술사의 지하실에서 레토로트 등의 도움을 빌려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암시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연금술 개념이 오늘날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미십자주의의 유물주의적 희화(戱畵)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장미십자회의 사명은 바로 자신들의 지혜를 서서히 쏟아 부을 수 있는 과학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신지학을 설명할 때 그것이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용어법(역주: 장미십자의 신지학)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수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존재 구석구석까지 현대세계와 현대문화에 잠겨있는 개인일 것입니다. 이루어야할 현대의 사명에 주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생활과 그 표현형태를 엄숙히 받아들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시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한 이 시대에 영적 영향력을 미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사명이요 이념일 것입니다.

 

이번 강의 기간 중 여러분은 신지학이 예를 들면 의학 분야에서 얼마나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 알게 된 기회였을 것입니다. 의학이 유물주의의 길을 내달렸다고 합시다. 그리고 40년 후를 내다본다면 여러분은 의학치료법의 야만성과 의학이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 이용하는 여러 혹독한(죽을 정도의) 형태들에 기절할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은 어떤 식으로 그 치료법의 효과를 검사하고 있을까요? 병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소재를 사용해서입니다. 즉 외적 관찰을 통해서 그 효과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지혜는 본질 그 자체를 통해서 영성의 내적 관련에 참여하고 물질계의 무엇이 영성의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전의학(全醫學)의 창조가 장미십자주의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존재상황의 복잡성을 고대 칼데아의 상황과 비교해 보시기바랍니다. 동경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수표를 뉴욕에서 발행하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지적 에너지와 얼마나 복잡한 공동작업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구전체에 퍼져있는 물질문화를 가진 시대는 과거 시대와 다른 영적 활동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현대의 사고는 인간이 이정도로 깊이 관련 되어버린 외적 상황과 사명이 불확실한 상태를 제대로 처리할 수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이윽고 사고자체도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만 이윽고 사고는 복잡한 삶의 상황에 뛰어들어 그것을 변용시키기에 충분한 유연성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신지학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요? 실천적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지학적 사상은 사고를 유연하게하고 부드럽게 하여 아득히 먼 저편의 상황을 미리 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장미십자주의는 온갖 생활영역에 결실을 가져다 주어야합니다. 신지학의 실천적 결과를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제 에세이 「인지학의 빛으로 본 어린이 교육」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없다면 여러분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장미십자의 신지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합니다. 이 요소를 과거형태의 신지학으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 오컬티즘의 역할은 사람들의 영적 동경(갈망)을 만족시키고 영성이 사람들의 일상 활동 속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은 사교모임이나 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간문화 전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살아가고 진화하여 점점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듯이 인류전체도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계시(啓示)되는 지혜의 형태는 인간의 진화과정에 조화롭게 변화되어야합니다. 위대한 인간성의 교사들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혼으로써 모여 있는 우리도 과거 시대에 육화하고 진화하며 온갖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성취로부터 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로마, 이집트-칼데아, 그리고 그 이전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비스런 스핑크스에 둘러싸인 이집트시대에 육화한 영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모든 건축물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얼마나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지구가 계시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지구는 끊임없이 진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영혼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쌓아갈 것입니다.

 

영혼이 지상에 육화하는 것은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몸에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처음 육화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구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또한 마지막 육화에 도달했을 때도 변해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배워야할 것이 있을 때만 이 지상으로 돌아오며 그럴 필요가 있을 때까지는 돌아오지 안 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육화와 육화 사이의 기간이 깁니다. 지형만 해도 현재의 북유럽이 그리스도가 있던 시대의 북유럽과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구 전체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만 진화란 실은 새로운 것을 힘써서 완성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 뒤에 현현하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도 진화합니다. 인간은 지금 도달한 단계보다 고차의 진화단계에 있는 존재를 향한 길을 찾아야합니다. 분명히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차존재들과 관계를 갖게 되겠지만 이러한 존재들도 진화의 법칙을 따르고 있고 수  천년 전 우리의 영혼이 지금과 달랐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현재 스스로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들도 과거에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영성의 보고(寶庫)와 함께 갖가지 고차 세계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 우리 세계에 내려선 한명의 고차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완전히 배워야할 신성한 예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조차 그 예술에 숙달해야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1만 년 전에 살던 사람들과 다른 말하는 방법을 가져야합니다. 고차존재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경험합니다. 이 강의 중에 다마스쿠스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은 그들이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영시력을 가진 사람은 외적 환경을 볼뿐만 아니라 지구의 영적 오오라에 속하는 모든 것을 봅니다. 인간이 오오라에 둘러싸인 것처럼 천체도 오오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영능력자는 최종적으로 천제의 오오라를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 영능력자가 본 지구의 오오라와 수천 년 전에 보였을 오오라는 전혀 다르며 오늘날 영능력을 육성한 사람이 보게 될 것과도 또 다를 것입니다. 외적 자연의 모습이 변해가듯이 영능력자가 입문하는 영계의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언급할 사건에 대해 지금 미리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불타는 초목과 시나이산의 고지에 대해서입니다. 당시 모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의 영시력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물질적 현상에서 초감각적 실재를 지각한 것입니다. 영시력이 없는 개아라면 단지 자연현상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불타는 초목 속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 4:14)」라고 스스로를 고지한 존재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 존재가 틀림없이 그곳에 있으며 불은 단순히 외적인 불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잉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스스로 이름을 고지한 존재, 인간성의 새로운 진화 전체에 밀접히 관여하고 있는 존재가 스스로를 모세에게 고지한 것입니다. 모든 모세의 제자에게 알려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비의학교에서 그들은 시나이산에서 스스로를 계시한 존재가 언젠가 지상에 내려와 한 인간의 몸으로 3년간 설교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서 배운 것입니다. 이 사실은 비의입문자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되는 사울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언젠가 지구를 찾아 올 것이다. 하지만 불타는 초목 속에서 여호와로 스스로를 계시했던 존재가 십자가에서 굴욕적인 죽음을 맞이하라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게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마스커스의 사건입니다. 영시를 할 수 있게 되어 지구의 오오라를 보게 된 순간, 그 오오라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 순간,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존재로써 스스로를 계시한 순간, 그 순간에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시는 이전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2천년 전 그 이전에는 지구의 오오라 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태양 속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짜라투스투라는 태양을 올려다보고 그 주위에 있는 오오라를 아후라 마즈다, 오르무즈드(Ormuzd)의 위대한 오오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하강하여 우선 불타는 초목 속에서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그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몸속에서 사람으로서 자상에 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 말을 내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은 그 어떠한 존재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이 주제를 연구해봅시다. 단 오늘은 바울에게 계시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존재가 언제나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존재는 우선 필요한 힘을 축적하고 이러한 계시가 가능해질 때까지 힘을 발달시켜야만했습니다. 2천년 이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각각의 영혼은 각각의 육화로 진보를 이룹니다. 지도적 입장에 있는 개아에게도 이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항상 같지 않다고, 그의 작용에 대한 특징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도 어느 진화단계로부터 다음 진화단계로 진보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의 영혼과 육화와 마찬가지로 영적 존재도 점점 더 고차 단계에 도달하여 힘이 더더욱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압도적인 환희의 감정이 솟아오릅니다. 이 자각은 인간에게 생생한 진화에 대한 감정을 부여해줍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과거에 어떻게 일했으며 현재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예를 들면 모세와 바울의 경우 어떻게 일했는지, 이러한 사실로부터 신성한 존재들조차 어떻게 진보하는지 명확히 나타내는 것은 장미십자의 신비적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은 진화에 관한 친밀한 개념을 생성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한번 살펴봅시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세상의 빛을 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첫 수년 동안은 특히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그 후 인생과 비교해보면 진화 정도가 가장 빠른 시기는 그 때입니다. 유물주의 과학도 이것에 대해 충분히 신뢰할만한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수단으로 뇌를 검사해보면 아이의 머리 끝부분이 상당 기간 부드러운 상태로 좀처럼 두개골이 닫히지 않고 뇌가 서서히 형성되어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접합기능이란 아이가 나중에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위한 기구, 다시 말해 사고력, 지각하는 것에 상호관련을 가져다주는 능력을 위한 기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시능력자는 탄생 후 처음 수 주, 수 개월간 아이가 인간의 제2구성요소인 에테르체에 속하는 내적으로 활동적인 강력한 힘들에 어느 정도 둘러싸여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인이 가지고 있는 에테르체의 분포는 실제 물질체의 분포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경우 에테르체는 물질체를 훨씬 뛰어넘어 넓게 퍼져있습니다. 특히 머리 주변이 그렇습니다. 영시능력자에게 빛의 유희처럼 보이는 이 힘들은 머리부분에서 특히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힘들이 어떤 식으로 몸의 아래쪽으로부터 솟아올라 목덜미에서 여러 방향으로 흘러가는 광경은 정말 굉장합니다. 머리카락이 나 있는 모든 곳에서 그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힘들은 살아있는 빛의 유희 속에서 빛나며 아이의 에테르체의 아스트랄-에테르적 빛이 됩니다. 이 광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사라집니다만 그 안에는 뇌의 연결섬유를 창조하는 힘들이 있습니다. 뇌는 아이가 태나난 후 영적 실질로부터 형성됩니다. 40에서 50여개 힘들의 흐름이 공동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의 몸은 이러한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지 첫 수 주간 아이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줍니다. 처음 에테르체는 아이의 외부에 존재하며 머리부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만 완전히 미숙한 상태입니다. 그것은(머리) 에테르체가 여러 힘들을 모으는 빛의 몸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에테르체는 서서히 아이의 머리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복잡한 에테르적 조직으로 남게 됩니다.

 

진화과정의 매우 훌륭한 점은 물질적인 모든 것이 영성으로부터 창조되고 영성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자신이 거처할 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우주, 즉 인간 아이의 머리부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우주, 즉 온 세상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그리스도가 혼으로써 3년간 살았던 나사렛 예수와 같은 엄청난 진보를 이룬 개아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 안에서 에테르체 자신이 이윽고 들어가게 될 물질적 뇌를 준비하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도 육화이전에 스스로가 살게 될 거처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서 달성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를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구와 외적으로만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높은 수준의 진화를 달성한 혼들은 그리스도가 더욱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방법으로 지구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 준비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변용시켜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까지 이끌어낸 것일까요? 그리스도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처음 그리스도는 외측으로부터 몸에 작용하여 마지막으로 그 자신을 그 인간 안으로 이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우주에서도 일어납니다. 진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보다 높은 상위의 존재들 또한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구령이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가 초감각적으로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주의 존재는 변함없이 대우주의 존재와 부합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장미십자주의의 서론조차도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이 어떻게 사고하고 지각하는 방법을 배워야하는지를 지적하는 것밖에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게 우리가 우주진화 과정을 더듬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自己)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본위적인 일일 것입니다. 자기는 전우주로부터 형성되어 전우주로부터 태어납니다. 우리 자신의 상승은 최종적으로 우리를 전우주와의 합일로 인도합니다. 자기인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자기인식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계시하기위해 인간에게 대세계에서 차지하는 장소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제2강 우리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혼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4일

GA109 

 

어제 도입 강의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연속강의 목적은  신지학적 세계관의 영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듣고 계시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신 주제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근본으로부터 이러한 진리를 배움으로서 나중에 고차영역에 대해 고찰할 수가 있습니다.

 

본 주제를 다루기 전에 예외적인 중요사항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실제 정신세계에 대해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신지학적 이념이나 이론에 관계를 가져야하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탐사결과가 우리에게 알려지지만 나는 아직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영시탐사의 결과를 보고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내가 영시능력을 육성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면 그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면 개개인이 스스로 거듭 진보를 이루지 않겠는가?」

 

오컬트탐사의 원리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미리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라고 믿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세계에는 명확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 중요성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명확히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해 올바른 훈련을 쌓은 영시능력자가 정신세계의 이것저것을 지각했다고 합시다. 다음은 이렇게 상상해보십시오. 그 뒤로 10년 또는 12년 후 다른 비슷한 훈련을 쌓은 영시능력자가 처음의 영시능력자가 획득한 결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같은 것을 보았다고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게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은 탐사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영시능력자나 오컬트학파가 한번 발견한 정신세계의 사실들이 이미 발견된 사실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두 번 다시 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1900년에 어떤 사실을 조사하고, 1950년에 다른 영시능력자가 같은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제2의 탐사자는 누군가가 이미 그 사실을 밝혀냈음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은 이미 행해진 지식으로써 그 중요성을 의식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보편적 우애를 쌓아가는 법칙입니다. 인류의 선구자들이 이미 밝혀낸 것들과 연관성 없이 정신세계의 어떠한 영역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신세계는 「나는 거기에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자력으로 탐사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자신의 법칙으로 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도로 진보를 이룬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정신과학이 전하는 사실에 대해 만약 미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 무엇 하나도 지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발견된 것들과의 연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신지학운동 또한 이 기반에 입각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부터 비교적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영시력을 몸에 익히게 되겠지만, 만약 이미 조사된 사실에 대해 듣지 못한다면 정신세계에서 진리가 아닌 허위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신지학, 영성과학이 전해주는 이러한 지식을 가져야하며 이렇게 하고난 뒤에야 처음으로 진리를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시능력자라 할지라도 이미 발견된 사실을 알아야하며, 그리고 양심에 기초한 훈련이 있어야 스스로 그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들은 인간의 혼에 단 한번 영시능력을 수태 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단 한번의 처녀수태를 달성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인간은 자신이 그것을 볼 권리를 갖기 위해 이 최초의 혼이 발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내적 보편적 우애의 기반,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우애의 기반을 쌓아올린 것이 바로 이 법칙입니다. 지혜는 한 시대로부터 다른 시대로 오컬트학파에 의해 전해졌으며 지도자들은 그것을 충실히 보전해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정신세계의 고차 영역으로 가는 길을 바란다면 이 보물을 보전하고 이미 무엇인가를 달성한 사람들과의 우애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어야합니다.  물질영역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법칙이야말로 정신세계에서 자연의 법칙입니다.

 

신지학은 우리에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영성으로부터 생겨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이러한 겨우 이해할만한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의 배후에 영성이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만 영성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이 각 분야에서 어떻게 현현하고 있는지 명확한 개념과 이념을 육성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외적 세계로부터 정신세계로 이끄는 온갖 수단을 취하고 있다고 양심을 가지고 확신해야만 다른 인간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물질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세계는 광물계입니다. 돌의 세계입니다. 광물계는 인간계와 구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때렸을 때 맞은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 광물이 충격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는 외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간 안에는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는 혼이 있고 돌에는 혼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광물도 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이미 영시탐사의 결과에 유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굴러다니는 돌 속에는 어떤 혼적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장소를 향해 관찰해야 하지 틀린 장소를 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동물이 인간을 관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단 그 동물은 인간의 손가락 끝의 손톱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동물은 손톱을 독립된 물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작은 동물에게는 손톱이 유기조직에 속하며 그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동물이 전체를 조사하고 전체를 잘 볼 수 있다면 그 관찰도 올바른 것이 될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영적 탐사자와 광물계에도 해당됩니다. 돌이 그 자체로 완전한 전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손가락이나 치아가 인간 전체라고, 즉 하나의 완결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작은 동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지구의 암석을 생각해보십시오. 암석은 지구조직 전체로부터 생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의 일부인 이러한 암석, 이 모든 암석이 속해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암석계 전체가 속해있는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간의 혼과 마찬가지로 행복과 고통, 기쁨과 고뇌를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광물의 혼에 대해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유추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근거 없는 짐작으로 여러분은 돌이 부서지면 광물혼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다릅니다. 사람은 손톱을 다치면 고통을 느낍니다만 비슷한 상황에서 광물혼은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광물에 속하는 존재는 돌이 부서지면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파편이 다시 합쳐지면 고통을 느낍니다. 바깥세계에서 광물은 끊임없이 분해되고는 다시 합쳐지고 있기 때문에 광물계에 속하는 존재의 혼속에서는 끊임없이 기쁨과 고통이 느껴집니다. 여기에 소금이 있고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컵이 있다고 합시다. 뜨거운 물에 소금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시관찰에 의하면 소금이 뜨거운 물에 녹는 것뿐만 아니라 평안한 감정이 솟아납니다. 소금이 컵 속의 물에 침투할 때 실제로 기쁨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식혀서 소금이 결정이 될 때 이 현상은 광물혼에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암석이 형성된 산맥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정이 땅 속에서 형성될 때 광물계에 속하는 존재는 고통과 고뇌가 따릅니다.

 

혹성이 탄생하고 응집된 덩어리가 모여서 다시 응집될 때, 이 과정은 여기에 관여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에게 고뇌와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지구와 같은 혹성이 탄생될 때 그 과정은 고뇌와 고통을 동반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고통과 고뇌, 예를 들어 채석장의 노동자가 돌을 부셨을 때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이러한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비교적 높은 단계의 세계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광물질은 이러한 존재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무형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 존재들이 광물계 전체에 살고 있습니다. 오컬트 탐사에 의하면 즉 무형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왜 「무형태의 세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식물계로 눈을 돌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물도 어떤 종류의 혼존재에 대한 표출입니다. 여기서도 영적 탐사결과를 연구해 봅시다. 영적 탐사에 의하면 예를 들어 가을에 옥수수가 익어 낫으로 베어 쓰러트릴 때 식물을 몸으로 가지고 있는 혼존재들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환희와 충만의 흐름이 밭을 덮으며 넘실거리기 때문에 여기서 고통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동물에 의해서 먹힐 때도 식물의 혼에게 그것은 기쁨이지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젓을 먹이는 포유동물이 경험하는 감정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고한 기쁨의 감정을 주게 됩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존재를 위해 영양을 공급해주는 수단으로써 우리 혹성이 지표에 만들어내는 것은 이 혹성에 속하고 지구 중심에 거처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내보내는 젓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식물이 지구 중심에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는지 어떤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침투성이 지배하는 그 법 때문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자기포기는 어떤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식물의 혼에게 지복을 의미합니다만 식물 전체가 뿌리째 뽑혀나가면 고통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장난이 심한 아이가 이유도 없이 꽃을 딸 때에도 식물의 혼은 행복한가? 식물전체를 뿌리부터 뽑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그것도 고통을 줄뿐인가?」 식물계에 유효한 시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이렇게 말해도 확실히 옳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점이 정신세계에 있어서 반듯이 올바르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처음 난 새치를 뽑는 것이 건강한 머리카락을 뽑는 것 보다 현명할지 모르지만 새치 역시 뽑으면 아픈 것은 틀림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연코 시점이고 우의적 고찰로 오컬트 세계에 대립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식물에도 그 고유의 존재가 있고 혼이 있습니다. 식물계가 몸을 제공하는 존재들이며 혼들입니다. 행복과 고통이 식물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무형태의 영역   아루파(Arupa)    무색계      고차데바찬계

형태의 영역      루파(Rupa)        색계   저차테바찬계

[참고:역주☆1]


 

광물의 혼은 정신세계의 특정영역, 사실은 상위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혼들이 사는 영역이 고차가 되 될수록 그들은 스스로를 점점 저차로 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전자를 무형태의 영역으로 부르고 후자를 형태의 영역으로 부를까요? 결정이 부서지면 파괴되는 것은 그 형태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파괴된 형태와 관계없이 다른 장소에서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소금 결정이 자연 속에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이 꼭 다른 결정으로부터 생성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결정은 소금의 실질로부터만 형성되고 형태로서 다시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형태 실질의 특징입니다. 식물의 경우 형태는 실질, 즉 무형태로부터 같은 방법으로 생성될 수 없습니다. 식물은 부모로부터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식물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형태의 영역에 존재하는 혼의 경우 형태는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전달되어야합니다. 생식은 형태의 전달에 대한 결과로 생겨납니다. 형태만이 종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식물의 종자와 동물의 란(卵)사이에 커다란 차이는 조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의 천박한 신념입니다. 동물의 란의 경우 형태와 생명이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전달됩니다.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백합종자는 형태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백합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광물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하자면 형태를 새겨 넣는 힘들이 데바찬계의 고차 영역에서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결정의 경우 무형태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식물이 펼쳐진 혹성전체가 식물의 생명을 생성할 수 있는 충동을 포함한 집단적 생명으로 둘러싸여있다고 말해야합니다. 식물의 종자에서는 형태만이 태어납니다. 이전 백합의 생명은 종자가 심어져 있는 화단이나 화분에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합니다. 새로운 백합에 생명이 넘치는 것은 지구에 충만한 생명 속에 종자가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물계의 변천에 다다랐습니다. 식물은 형태만이 종자를 통해 전달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종자가 지구의 보편적 생명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동물 속의 혼의 특질은 시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경우 행복과 고뇌, 기쁨과 고통에 대해서는 자명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식물계에서의 행복과 고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에 대해 연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과 고뇌는 식물 하나하나의 외부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구라고 하는 유기조직 전체가 행복과 고뇌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을 다치면 고통이 손가락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조직 전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습니다. 식물의 고통의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다면 식물의 혼과 관련을 갖기 위해 지구 전체에 눈을 향해야합니다. 동물과의 본질적 차이는 동물이 다치면 고통이 피부 안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동물적 성질의 경우와도 역시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화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진화가 고도로 상승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부에 중심을 가진 존재로 다가갑니다. 식물은 지구전체와의 관련하여 연구해야 비로소 올바른 연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혼을 가지고 있고 그 피부 안쪽에서 행복과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 실제 이 혼을 우리들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혼은 우리가 아스트랄계라고 부르는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세계에 관여하는 이념에는 어떤 조직적 질서가 존재합니다. 광물은 그 혼을 깊이 숨기고 있습니다. 식물은 광물만큼 혼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동물은 자신 안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계이외의 세계에서 동물의 혼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4개의 왕국을 식별합니다. 우선 광물, 식물, 동물의 가시형태영역의 물질계입니다. 다음은 동물의 불가시영역이 발견되는 아스트랄계입니다. 3번째로 혼이 저차의 데바찬계에 숨어있는 식물의 영역입니다. 4번째는 상위의 데바찬계로 광물의 혼을 숨기고 있는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외적인 관찰로도 이 식별은 명백합니다. 이번에는 영시탐사 결과를 살펴봅시다.

 

실제로 어떤 광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는 어떠한 혼적 성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공간은 혼이 빠져있습니다. 암흑입니다. 하지만 그 주위와 외부에는 빛이 비추기시작합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이 빛은 강도가 증가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우주에서 기원하는 광물의 에테르체입니다. 실제 광물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에테르의 일부로부터 끌려나온 광물의 에테르체인 것입니다. 광물의 우주적 혼의 힘들은 광물의 에테르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거기서 고뇌가 시작하기도하고 돌이 채석장에 잘려져 나가는 행복을 영적인 광선처럼 기대합니다. 광물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체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광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에테르체가 물질적으로 될 정도까지 농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물과 식물의 차이는 식물의 에테르체는 식물체내에 있고 모든 부분에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식물에 가득차있는 녹색은 광물의 바깥쪽에 있는 광물의 에테르체로 앞서 말한 실질입니다.

 

하지만 만약 식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식물이 에테르체에 의해 침투되어있다는 것뿐이라면 식물은 꽃을 피우지 않고 단지 초록색 잎만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식물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영시의식은 무엇인가가 식물의 위에 퍼져서 그 주위에서 춤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의 성장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아스트랄적 생명입니다. 초록색 식물은 성장해서 마지막으로 새로운 요소인 아스트랄요소가 그 위에 퍼져서 주위에서 춤을 춥니다만 결코 식물 속으로 침투하지는 않습니다.

 

동물은 영적으로 그 내부에 식물 주위를 비상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의 주위를 비상하는 것이 피부 안에 있을 때 그 존재는 동물이 됩니다. 식물의 위쪽에서 비상하고 있는 아스트랄요소는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꽃이 피기시작하면 식물위에 연기처럼 날아오르는 것은 지구의 집합적 아스트랄 성질입니다. 행복과 고뇌는 식물 내에 있지 않고 지구에 의해서 느껴지게 됩니다. 동물은 그자신이 행복과 고뇌를 경험합니다. 동물 안의 아스트랄체는 지구의 아스트랄 성질 전체 속에 짜여져 움직이고 있습니다. 광물은 마치 에테르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 주위에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에테르체에 침투되어 있습니다. 식물계는 지구의 집합적 아스트랄 성질의 일부인 아스트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통과 행복을 식물 외부에서 경험합니다. 아스트랄요소에 싸여져있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스스로 아스트랄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이것이 동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3왕국과 고차세계와의 연관성을 탐구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온갖 것들이 만들어낸 그 자체로 작은 세계입니다. 오늘 알아낸 사항들은 내일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

 

[역주]

☆1:불교에 는 기독교처럼 전능한 창조자라는 개념은 없지만, 28층으로 되어 있는 하늘과 거기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신적인 존재들에 대한 개념이 있다. 28층의 하늘은 다시 6층으로 되어 있는 '욕망의 영역 (카마로카kamaloka, 欲界天)', 18층으로 되어 있는 '무욕.유형(無慾. 有形)의 영역(루파로카rupaloka, 色界天)', 그리고 4층으로 되어 있는 '무형(無形)의 영역(아루파로카arupaloka, 無色界天)'으로 구분되며 각 영역과 하늘에는 그 상태에 걸맞는 신적인 존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각 하늘과 거기에 거하는 신들은 인간의 깨달음을 도와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단계를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또 대승불교와 탄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와 보살들도 신적인 존재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붓다 또는 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다. (欲界, 色界, 無色界를 三界라 한다. 三界는 윤회하는 6단계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욕망이 지배하는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인간계는 欲界로 분류된다. 따라서 欲界天은 6단계 윤회의 최정상인 天上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욕망이 지배하는 영역'을 일컫는 말이다.


 

 

제3강 인간의 성질과 존재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5일

GA109 

 

어제 강연에서는 우리 주위 세계에 존재하는 혼의 삶의 다양한 현현과 기능에 대해서 일반적인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인간 자신의 성질과 존재에 대해 상세히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미 알려진 사항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우선 어제 제시한 영상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의 성질에 관한 진실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가장 낮은 차원의 몸은 마치 우리를 둘러싼 첫 번째 왕국인 광물계에서 성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눈앞에 서있을 때 우리 눈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느끼기 쉬운 부분, 즉 물질체(육체)입니다. 하지만 오컬티스트는 이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체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곧 물질체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것은 수소를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입니다. 물질체에는 인간을 조성하는 고차의 요소가 교묘히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이 물질체에는 이미 인간 성질 이외의 요소가 침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살과 뼈의 구조를 가볍게 물질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 물질체는 외부 광물계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실질과 힘들로 만들어져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재주로 인간 구조에 짜여져 있습니다. 이 물질체가 실제로 보일 수 있게 되고 실제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의 성질과 조성 외에 다른 요소가 물질체와 섞여있다고 하는 사실 덕택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몸은 엄밀히 말하면 물질이 아닙니다. 진짜 물질체는 인간이 죽음의 문을 통과했을 때 남겨진 것입니다. 남겨진 사체야 말로 진정한 물질입니다. 인간 성질의 고차 요소로부터 모두 해방된 몸입니다. 몸만이 남겨지게 되면 이 물질체는 죽음의 순간까지 따르고 있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실은 물질체는 죽기까지 끊임없이 물질적 화학법칙을 계속 거부해 온 것입니다. 만약 물질체가 지상의 존재형태로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물질체의 붕괴에 저항하며 싸우는 에테르체에 침투되어 있지 않다면 물질체는 영원히 사체와 같은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에테르체, 즉 생명체는 인간 존재의 제2요소입니다.

 

이제 우리는 식물과 동물도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른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차이점입니다. 그럼 어떤 점에서 인간의 에테르체는 동물의 에테르체와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영시의식은 어떻게 해서 에테르체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 물어봅시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영시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시능력을 어느 정도 육성한 사람은 자신의 심리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획득했기 때문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집중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관심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평균적인 인간은 눈앞에 있는 물체의 형태를 사고의 힘으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관심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극히 드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시능력자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영시 능력자에게 물질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에테르체에 의해 완전히 채워져 있습니다. 그 에테르체는 머리, 가슴, 어깨부분 등 대략 인간의 모습입니다만 몸 아랫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인체의 모습을 닮지 않게 됩니다.

 

동물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보면 말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적 형태로부터 훨씬 멀리까지 퍼져있습니다. 영시를 통해 코끼리의 에테르체를 보게 되면 그 거대한 범위에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 형태의 경우 아래로 갈수록 에테르체와 물질체와의 차이가 커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좌우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심장은 왼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에테르체에서 심장과 대응하는 기관은 오른쪽으로 향한 에테르심장입니다. 하지만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가장 큰 차이는 남성의 에테르체가 여성적이고 여성의 에테르체가 남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감추고 있으며 인간 성질에 대한 많은 수수께끼가 이 오컬트조사를 통한 발견에 기초해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경우에는 일종의 대응이 있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물질체와 에테르체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관해서는 더욱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인간 조성의 제3요소입니다. 인간의 에테르체는 영시능력자에게 실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물주의자에게는 단지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부학자나 생리학자는 인간의 물질체 밖에 연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물질체 안에는 인간의 의식과 매우 관계 깊은 것-피와 신경-이 있습니다. 이 의식은 행복이나 고뇌, 기쁨을 지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감정이 물질체가 채우고 있는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담당하는 것은 보통 인간에게는 비가시적이지만 영시의식으로는 빛의 구름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입니다. 아스트랄체는 에테르체와 전혀 다릅니다.

 

물질체의 운동은 에테르체의 특별한 가동성(可動性)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건강한 인간의 에테르체 색깔은 원기 왕성한 복숭아 꽃 색입니다. 에테르체 속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장미색의 음영 속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흰색이 됩니다. 에테르체는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잇습니다만 반복되는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또 다릅니다. 아스트랄체는 갖가지 색과 형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마치 끊임없이 변화하는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구름 속에 나타나는 색채와 형태는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경험의 표출입니다. 만약 영시 능력자가 아스트랄체에서 푸른빛을 띤 붉은 색을 보았다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지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개개인 사이에 흐르는 적의의 감정을 보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 혼의 활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아스트랄체의 색과 형태도 변화하고 있으며 다채로운 움직임 속에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집니다.

 

인간 조성의 제4요소는 자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물질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체는 광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에테르체, 에테르체는 식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아스트랄체, 아스트랄체는 동물과 인간 양쪽에 공통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동물의 아스트랄체보다 훨씬 큰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성질의 네 번째 요소, 자아는 일종의 알 형태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머리의 앞부분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영시자에게 푸른빛을 띤 빛나는 구형으로 보입니다. 푸른빛이 깔린 빛살이 이 구(球)로부터 흘러나와 사람 안으로 이동합니다. 영시 능력자는 인간의 아스트랄체까지 사고로 지울 수 있게 될 때에만 자아를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와 공유하는 세 개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인간을 다른 왕국과 구별해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창조의 영예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네 가지 속성을 연구할 때 우리는 인간이 고차세계로부터 부여받은 타고난 재능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진화단계에 있든지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4층 구조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있습니다. 「나」, 자아가 3개의 몸에 작용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의미로 스스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이룩한 발달이 고차단계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저차단계에 머물고 있는지는 자신이 저차 요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작용해왔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자아는 먼저 아스트랄체에 작용합니다. 이 작용의 결과는 해당 인간이 저차 단계밖에 성숙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쉴러(1869~1945,독일 시인이며 극작가)와 같이 고도의 진화를 이룬 인격인지에 따라 틀립니다. 전자는 아스트랄체를 변용시키는 정도가 후자만큼 많이 성숙되어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내적작용은 오컬티즘에서는 정화, 카타르시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아스트랄체의 완성을 향해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한사람 한사람에게 아스트랄체는 두층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은 작용을 받아서 정화되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만약 그렇다면 해당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선을 행하도록 강요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서서히 도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인이 명령에 따라서 저항 없이 선하고 깊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것과는 명백히 커다란 차이가 발생합니다. 만약 단지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의 자아는 아스트랄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만약 선행이 습관이 된다면 그 때는 자아가 아스트랄체뿐만 아니라 에테르체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에테르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어떤 설명을 듣고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한다면 이때는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주의 기도」와 같은 기도문를 반복한다면 여러분은 반복을 통해서 에테르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은 몇 번이고 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은 일시적인 이해와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자아는 어떻게 아스트랄체에 작용하는가가 문제이고 전자의 경우 자아가 반복을 통해 어떻게 에테르체에 작용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해봅시다.

 

식물의 성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는 씨앗은 줄기를 만들어내고 이어서 잎들을 만들어 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녹색 잎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식물이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에테르체의 근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반복입니다. 반복이 발생하면 반듯이 에테르체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절정기 식물의 특징인 개화(開花)는 다른 원리, 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아스트랄체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정점은 아스트랄체에 의해 기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물질체의 구조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척수를 가진 등골은 물질체내의 에테르체의 표출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인간의 머리, 뇌를 생각해봅시다. 이곳에는 정점이 있습니다. 물질적 형태 속 아스트랄체의 작용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의 영향으로부터 생성된 이해의 표출이 아스트랄체에 행한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매일 반복하는 같은 기도나 명상 훈련을 통해 얻어진 생기 있는 활동은 에테르체에 작용한 산물입니다. 명상의 본질은 반복을 통해서 그것이 아스트랄체뿐만 아니라 에테르체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점입니다. 여러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 끼친 영향이 왜 그렇게 강력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는 힘들을 구현하는 원리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에테르체 또한 2중입니다. 한 부분은 자아의 작용을 받고 있습니다만 평균적인 개인의 경우 이것은 아직 한정된 정도입니다. 한편 다른 부분은 아직 전혀 작용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 아직 3번째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를 통해서 물질체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미 인간은 끊임없이 물질체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지만 자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진보된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조성의 4가지 저차요소를 연구해 오면서 그 결과로부터 3개의 고차요소는 자아가 저차요소에 작용하여 변용시킨 결과로 생겨난 산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의 저차요소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효과는 그 작업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에 따라 상당히 다릅니다. 바꿔 말하면 그 사람이 의식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지 않은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발생합니다. 변용은 예술작품이나 회화에 대한 연구와 감상 또는 경건한 헌신이나 기도 등을 통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은 자신이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작업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존재의 저차요소에 대한 의식적인 작용과 무의식적인 작용을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2중입니다. 한쪽은 무의식의 활동에 의한 산물이고 다른 한쪽은 의식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작용한 부분은 감각혼으로 불리며 오늘날 인간 안에 완성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에테르체가 자아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지성혼(오성혼), 즉 정신혼입니다. 오래전부터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물질체에 작용한 것이 의식혼, 즉 영적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 안에서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를 구별합니다. 자아는 무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작용하여 감각혼을 생성시키고, 에테르체에 작용하여 지성혼, 즉 정신적 혼을 생성시키며, 물질체에 작용하여 의식혼, 즉 영적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성질에 6개, 아니 7개의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질과 조성에 작용해왔습니다.

 

이제 의식적 작용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 결과로 무엇이 생겨났을까요? 영아(靈我), 즉 마나(Mana)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새겨 넣은 것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에테르체에 새겨 넣은 것은, 단 이것은 오컬트훈련에 의존한 것입니다만, 붓디(Buddhi), 즉 생명령(生命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아가 최종적으로 의식적 작용을 할 수 있게 되어 물질체에 힘들을 쏟아 부을 수 있게 되면 무엇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오컬트훈련을 통한 호흡훈련에 의해 이것을 의식적으로 일으킬 수 있습니다만 대단히 섬세한 주의와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적 문헌에 공개되어 있는 잘못된 훈련방법은 종종 유럽인들의 몸에 심각한 손상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조성에 적합한 훈련에 대한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의식적 호흡방법을 통해 자아는 물질체를 아트만(Atman), 즉 영인(靈人)으로 변용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상적 형태를 취했을 때 4중 존재였습니다. 처음 지상의 육화로 인간은 이미 자아를 통해 자기 존재에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육화를 거듭하면서 자아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육화 기간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혼의 세가지 기능적 측면을 발달시켰습니다. 즉 감각혼, 오성혼(정신혼), 그리고 의식혼을 발달시켰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가 세가지 고차요소로 의식적 변형이 실현되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7층 존재가 육화를 통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여러분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라고 하는 4요소가 모든 오컬트학파에서 존중해온 이른바 신성한 사위일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신성한 삼위일체가 더해져 의식적으로 7층 또는 10층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외적으로 인간의 주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스스로의 내부에 가지고 있지만 그 외적인 모든 것을 운반자인 자아에 의해 초월하는 인간의 영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 몸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배우기 위해 이제부터 깨어있는 상태의 인간과 잠자고 있는 인간을 연구해봅시다. 인간 내면에서 기쁨과 고통이 진정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인간의 의식이 잠에 빠져들 때 무엇이 일어날까요? 이때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물체와 에테르체 바깥쪽에 존재합니다.

 

밤에 잠자고 있는 인간은 말하자면 식물과 같은 레벨로 하강합니다. 인간은 2층 존재가 됩니다.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있고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외부에 존재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렇다면 잠들어 있는 사람은 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때 인간과 식물은 같은 조성으로 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상에서 물질체와 에테르체만 가지고 있는 존재는 식물입니다.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존재하면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변화하게 됩니다. 식물에는 신경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피가 존재하는 것은 자아를 가진 물질체뿐입니다. 고등동물은 원인간(原人間)이 퇴화된 형태로 간주해야합니다. 물질체에서 자아는 혈액으로 표출됩니다. 아스트랄체는 신경으로, 에테르체는 선조직(腺組織,내분비선)으로, 인간의 물질적 성격은 그 몸으로 표출됩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체가 신경조직의 창조자라면 -실제 그렇습니다만- 이 신경조직은 비통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수면 중에 신경조직은 그 창조자로부터 버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조직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에테르체는 그 조직과 함께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혈액조직은 밤에 무자비하게 자아에 의해 버려지게 됩니다. 물질체는 자기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성질은 그대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조직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에테르체는 수면 중 물질체 내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경조직은 그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이 순간 물질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영시의식을 통해 알아봅시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밤에 물질체와 에테르체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이 ‘신적-영적’ 아스트랄체가 침상에 누워있는 몸으로 이동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혈액조직에도 해당됩니다. 신적-영적 자아가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유지합니다. 밤에도 인간은 4층 존재입니다만 고차존재들이 침상에 남아 있는 두개의 몸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에테르체와 물질체로 돌아오면 인간 자신의 아스트랄체는 위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을 추방합니다. 같은 현상이 혈액조직에도 일어납니다. 인간의 자아는 밤사이 혈액조직을 유지시켜준 신적-영적 자아를 몰아냅니다.

 

신적-영적 존재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낮 동안 그들은 뒤로 물러서야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밤에는 물러나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신적-영적 존재들은 낮에 잠을 자고 한편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잡니다. 밤에 신적-영적 자아와 신적-영적 아스트랄체는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 속으로 들어가서 아침에 이 몸들로부터 떠나갑니다. 인간의 경우는 정반대 과정입니다. 저녁에 인간은 몸을 버리고 아침에 그들의 소유를 회복합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신들이 낮에 잠을 잔다고 하는 정서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신들이 가장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정오에 교회 문을 닫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밤 동안 인간의 몸 외부에 존재하는 것, 즉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잘 알고 있듯이 욕망, 욕구, 정열은 아스트랄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만 밤 동안 인간은 그것들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의 진화단계에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이를 자각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 단계의 인간은 물질적 기관을 통해 지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각기관이 존재하는 만큼, 그 수만큼의 세계가 인간 주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기관이 하나 더 있다면 새로운 세계가 사람들 앞에 스스로를 드러낼 것입니다. 아직 영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아스트랄체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수면 중에 감각을 가지지 못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쉽습니다. 맹인이 있는가하면 다른 감각이 결여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각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침이 되서 인간이 다시 물질적 감각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주위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경우 다릅니다. 생에 전체에 걸쳐서 에테르체와 물질체는 서로 결합된 상태입니다만 죽음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에테르체는 처음 물질체를 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죽음의 순간을 지금까지 모든 생애에 대한 회고가 인간 앞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순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에테르체가 기억의 운반자이고 이 기억이 지금에야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테르체가 물질체 안에 있는 한 에테르체는 모든 힘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육체적) 장치가 허락하는 한도밖에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에테르체는 물질체로부터 해방되어 일생동안 그곳에 새겨진 것들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이 파노라마는 쇼크의 결과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이 경우 죽음의 경우와 같이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쇼크는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지만 이것도 역시 예외적 사례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이 벽화(파노라마)가 어느 정도 지속되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순간은 인간에 따라 크게 변화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해당 개아(個我)가 잠에 지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는 동안 이 벽화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시간, 50시간, 60시간에서 80시간정도 일 것입니다.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시간이 대충 이 파노라마가 지속되는 시간입니다. 회고는 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의식이 희미해져가고 동시에 영시자는 에테르체가 스스로 이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전면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해당 개아는 지금 끝난 인생의 결과인 에테르체의 정수(精粹), 추출물을 가지고 갑니다. 인간은 에테르체의 정수와 아스트랄체, 자아를 가지고 상승하며 그 뒤 아스트랄체도 놔두게 됩니다. 이렇게 헤서 겨우 인간은 2개의 유골을 남겨두고 영계로 이동합니다.

 

내일은 사후의 삶과 데바찬계로의 진입을 연구해보겠습니다.

 

[역주☆1] 인간의 7층, 10층구조

*아스트랄체 : 감정, 욕망 등의 영체

  에테르체 : 기억의 영체. 세포활동으로 신체를 유지하고, 감정과 욕망을 신체에 전달한다.

  신체 : 사람에게서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몸. 본성상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며(즉, 에테르체와 분리되며), 분자활동

            을 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에테르체에 잠김으로써 세포활동을 유지한다.

 

 


제4강 죽음과 탄생 사이의 인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6일

GA109 

 

어제 우리는 죽음의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 들었습니다. 어떻게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가 물질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떻게 기억의 벽화가 혼 앞에 나타나는지 들었습니다. 이 벽화의 고유한 특징은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며 일종의 파노라마 같은 형식으로 인생을 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점은 그것이 영상으로 지각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삶의 현상들은 행복이나 고통과 연관성이 있지만 사후 수일간은 그러한 경험이 없습니다. 기억의 벽화는 완전히 객관적 영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명확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운명적으로 비통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고 그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을 따라 갑니다만 고통스런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교에 관한 영화와 같은 것으로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거기에 관한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단지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사후 기억의 벽화에도 해당됩니다. 에테르체가 이탈하여 물질체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보편적인 우주에테르에 용해되기 시작하자마자 이 벽화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정수, 과거생의 열매를 포함한 정수는 남습니다.

 

이렇게 해서 혼에게 본질적으로 새로운 기간이 시작됩니다. 물질계에 대한 혼의 애착을 끊는 기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컬티스트에게 욕구나 욕망은 실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스트랄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은 물질체를 떠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욕구나 욕망 등 모든 것이 실재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탐식하던 개아(식도락가)는 죽은 후에도 맛있는 식사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욕망은 아스트랄체에 단단히 들러붙어있으며 그에게서 없어진 것은 욕망을 만족시켜줄 입과 혀와 같은 물질적 장치뿐입니다. 그의 상황은 -외부상황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욕망을 달래줄 가능성이 전혀 없어서 심한 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에 괴로워하며 만족의 가능성 없이 끝나야한다는 것에 고통 받게 됩니다. 이 고통의 목적은 물질적 장치만을 사용해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기 위함입니다. 이 상태를 카마로카(kamaloka, 欲界天), 욕망의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습성을 버리게 됩니다. 이 기간은 인간이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중 1/3에 해당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다루게 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60세에 죽으면 카마로카에서 20년, 과거 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살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카마로카는 물질계와 인간을 연결하고 있는 모든 욕망이 단절될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마로카의 한 측면입니다만 다른 측면으로도 또한 연구해봅시다.

 

인간이 물질체를 가지고 경험하는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상에서 성취한 결과를 통해서 보다 고차 단계로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개아 자신의 발전에 장애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유혹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행위들이 그렇습니다. 동료를 경멸하고 자신을 위해 만족을 얻을 때, 이기적 이유로 어떤 형태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계획을 실행할 때 우리는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장애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심하게 때렸다고 합시다. 그와 관련된 물리적 고통, 도덕적 고통은 우리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세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이 방해물은 그 후 미래의 우리 삶에 붙어 다닐 것입니다. 카마로카기에는 성장을 방해하는 이러한 장애들을 제거하기위한 충동이 주어집니다. 카마로카기에 해당하는 개아는 자신의 생애를 3배의 속도로 거꾸로 살아가게 됩니다. 카마로카, 즉 아스트랄계의 중요한 특징은 현상이 거울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스트랄계에 입문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혼란의 근원이 되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그가 숫자 346을 보았다면 그것은 643으로 읽어야합니다. 아스트랄계를 탐구할 때에는 모든 것을 반대로 봐야합니다. 온갖 감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훈련의 결과로, 또는 병리학적 상태로 인해 누군가 영시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충동과 감정이 자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방에서 광선이 되어 그에게 다가옵니다. 잘 통제된 방법이든 비정상적인 방법이든 이스트랄 영역에 대한 영시력을 가지게 된 사람은 누구라도 즉시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고블린이나 악마적 모습으로 그를 덮칩니다. 이것은 매우 처참한 체험입니다. 특히 영시력을 가졌으나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점점 더 빈번히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진화단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이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정신과학은 인간을 정신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시력을 얻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과정은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스트랄계의 사실과 상황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스트랄계의 사물을 거울상으로 봅니다만 정신세계의 다른 사물들도 보게 됩니다. 물질계에서는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우선 암탉이 보이고 이어서 알이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아스트랄적으로는 알이 암탉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온갖 것들이 반대로 경험됩니다.

 

60세에 죽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가 카마로카에서 40세 때 누군가를 때린 장소에 이르렀다고 합시다. 지금 그는 카마로카에서 그가 때린 사람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상대방의 몸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는 시점까지 반대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고통만이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 주었던 행복이나 기쁨도 경험합니다. 조금씩 혼은 발달과 진화로 가는 장애를 제거하고 속죄를 가능하게해준 현명한 지도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보상하려는 의지와 함께 혼은 어떤 표시 같은 것을 받습니다. 발달을 방해하는 것들을 원상태로 고치기 위해 의지의 충동을 받아들입니다. 다음 생에서 혼은 이것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객관적인 벽화(파노라마)는 카마로카의 회고 경험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마로카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 타인이 느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다른 측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물질적 삶에서) 고통으로 경험되었던 것은 저쪽 세계에서 행복과 기쁨으로 경험됩니다. 즉 물질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역으로 행복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카마로카의 목적은 혼에게 회상의 벽화가 주지 못했던 것, 즉 회상 안의 고통과 기쁨의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카마로카기를 통과하면 제3의 시체라고도할 수 있는 것을 버리게 됩니다. 첫 번째로 물질체의 껍질이 벗겨지고, 다음에 에테르체 껍질, 이것은 우주 에테르체로 용해되며 이제 아스트랄체 껍질이 벗겨집니다. 이 아스트랄체 껍질은 인간의 아스트랄체로 아직 자아에 의해 정화되고 조정되지 않은 모든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충동과 감정의 담당자로 그의 것이었지만 자아에 의해 변용되고 영화되지 못한 부분이 카마로카기의 끝남과 더불어 스스로를 해방시킵니다. 다음 여정에서 인간은 아스트랄체의 정수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 정수는 우선 모든 선한 의지에 대한 충동 총체와 두 번째로 자아를 통해 변용시킨 모든 부분입니다. 어떠한 욕구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고귀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든 것, 선으로 변화하고 도덕적으로 변화한 것, 이것들로 아스트랄체의 추출물이 형성됩니다. 카마로카기가 끝날 무렵 인간은 자아와 그가 만들어낸 아스트랄체 추출물, 에테르체 추출물, 선한 의지에 대한 충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새로운 상태, 다시 말하면 비탄으로부터 해방된 삶, 데바찬에서의 영적 삶이 시작됩니다. 오컬티스트가 이러한 진실을 실재적으로 경험하고 나서 다시 그것들을 성스런 기록이나 문서에서 발견하게 되면 마음에 큰 힘을 얻곤 합니다. 그 예가 신약성서의 다음 문장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이것은 반대방향으로 인생행로를 살아가는 경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스런 종교문서를 연구할 때 신성한 순간에 대한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컬티스트는 어떤 옛 기록이나 권위에 의해서도 맹세하지 않습니다. 오컬티스트에 관한한 정신세계의 사실만이 결정적입니다만 예부터 내려오는 문서의 귀중함도 서서히 새롭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정신과학은 어떠한 옛 문헌이나 종교에도 근거하지 않고 단지 영적 사실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신과학의 기반은 객관적 탐사입니다. 그리고 만약 전해오는 기록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판명되면 오컬티스트는 그 기록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데바찬, 영의 나라, 영성세계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 정신세계는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죽어서 처음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 세계는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그 관찰방법에 대해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물질계를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묘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엇비슷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지상에서 우리는 그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단단한 지면과 흐르는 물, 공기영역과 온기가 스며든 이들 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표현을 이용해 영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경이적인 방법으로 형성된 단단한 육지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바찬의 ‘대륙’ 영역입니다. 이것은 모든 광물의 원형적 유사 모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광물이 나타나는 곳에 영시자는 해당 공간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공허하게 뚫려있고 광물 주위에 영적 힘들이 존재합니다. 이 힘들은 영시로 빛의 에테르적 도형과 같이 보입니다. 결정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의식이 영계로 상승하면 물질적 실질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위에 보이는 영적 힘들입니다. 결정형태는 영시자에게 빈 구멍 형태로 스스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물질적 형태가 데바찬의 단단한 토양을 형성합니다. 물론 데바찬에는 대단히 많은 다른 것들이 존재합니다. 지상의 온갖 살아있는 생명, 다양한 식물, 동물, 인간에게 분배된 생명 모두가 영시능력자에게는 영계의 액체요소로 나타납니다. 우리 지구의 바다와 물 조직과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데바찬의 이 흐르는 생명을 우리의 강이나 바다와 비교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오히려 인체에 흐르는 혈액에 비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데바찬의 ‘바다’와 ‘액체’ 영역입니다. 고체영역과 액체영역은 단계를 거쳐 나타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의 육지와 바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3영역은 공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데바찬의 이 영역은 우리의 감정과 동물의 감정이 구성하는 영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스트랄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입니다. 흐르는 고통, 흐르는 기쁨이 지상의 공기와 비교할 수 있는 데바찬의 실질성입니다. 데바찬에서 싸움을 보고 있는 영시자를 상상해 주십시오. 물질적으로 보면 여러분은 병사나 총,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보게 됩니다만 영시자는 인간과 물리적 무기들의 물질적 모습 이상의 것을 볼 것입니다. 영시자는 병사들의 정념(情念)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데바찬에서 여러분은 싸움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혼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정념이 정념을 향해서 서로 싸우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높은 산의 계곡 사이를 미친 듯 불어대는 무서운 폭풍우처럼, 데바찬에서 바라보는 영시자의 눈에 싸움은 대충 그와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랑의 감정도 보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아주 훌륭한 감미로운 울림처럼 데바찬의 공기영역에 침투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 개의 영역을  고체적, 액체적, 기체적으로 구분하고 그것들을 지구의 것과 비교해보았습니다.

 

온기가 물질계의 세 저차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것과 같이 한 가지 공통요소가 지금까지 구분한 데바찬의 세 영역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곳에 침투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실질입니다. 인간이 사고에 의해 지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사고의 실재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캔버스가 걸려있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살아있는 존재의 모습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쪽에서는 그들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질계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사고는 영의 나라의 사고와 바로 이와 같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고가 인간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온기의 상태로서 데바찬 전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다음에 인간이 나아가는 세계는 이러한 곳입니다. 사후의 삶 동안 인간은 데바찬에 들어간 순간의 명료한 감정을 가집니다.

 

카마로카에서의 인간이 물질적 관련을 끊는 정도만큼 바로 그 정도만큼 인간의 의식은 다시 또렷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명료한 회상 후, 사후 존재 동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정도는 물질적 삶을 향한 집착의 강도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물질적인 사물을 향한 애착을 끊는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의식은 그만큼 또렷해집니다. 데바찬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의식적이지 꿈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온갖 사건들을 데바찬에서 경험합니다. 어떤 식으로 적절한 기관이 형성되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아주 정확하게 자신이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데바찬의 첫인상은 그의 자아 외부, 즉 ‘나’의 바깥쪽에 전생의 물질적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몸은 물론 영계의 ‘대륙’ 영역과 짜여져 있습니다. 데바찬의 단단한 육지의 일부입니다. 물질적 삶에서 여러분이 “나는 이것을 하겠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물질체 속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물질체에게 ‘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바찬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은 물질체의 외부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데바찬에 들어간 순간 그 물질체와 그 형태를 깨닫고 그것에게 “저것은 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물질체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혼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이제 혼은 “나는 지금 물질계에 있지 않고 영계에 있는 것이다.”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 이후 더 이상 여러분은 자신의 물질체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저것은 너다”라고 부르게 됩니다. 베탄다철학의 ‘Tat twam asi'는 바로 이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의 이런 류의 말은 영계의 언어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베탄다가 제자들에게 ’저것은 너다‘에 대해 명상하라고 가르칠 때, 이것은 지금 생에서 이미 자기 안에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생기는 이러한 이념과 개념을 눈뜨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순수한 명상의 언어는 실제 영계의 사실에 대한 ’사진‘입니다. 그리고 Tat twam asi는 바로 인간이 영계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경계(境界)의 표시, 표식입니다. 우리는 서서히 객관적으로 관상(觀想,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공감이나 반감을 갖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물질적 삶에 관련된 것을 사진을 보듯 객관적으로 관상할 수 있게 됩니다.

 

데바찬에서 혼이 경험하는 흐르는 생명은 물질계와 성질이 다릅니다. 물질계에서 생명은 수많은 존재 각각에 분배되어 있습니다만 데바찬에서 생명은 단 하나의 총체로 현현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생명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강렬한 지각체험입니다. 이 통일체 생명 속에 경험이란 추상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이 생명에 도입한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차례차례로 인간에 의해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같은 진리를 다시 환희의 원천으로서 데바찬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 창시자들로부터 각각의 육화에 흘러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그리고 가장 귀중한 지식은 에테르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만) 영계에서 여러분이 직면하게 될 경험입니다. 물질체로 흘러들어온 모든 것은 여러분 앞에 위대한 인상적인 영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데바찬에서 인류를 서로 이어주는 것을, 인류 사이의 조화를 고양시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를 다른 것, 우리에게 소원한 것, 우리는 저편의 영역에서 그것들에게 조화를 가져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매우 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쾌와 고뇌는 저편 영계에서 기상상태로 현현합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에 과거 내적으로 경험한 것을 비슷한 모습의 영상으로 경험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주위의 공기영역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저쪽 세계에서 전체성과의 관련으로 경험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개인적 기쁨과 고통이 전체성에 있어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 명백해졌습니다. 우리는 저편에서 실재하는 사고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자 그럼 인간 존재가 데바찬의 총체 속에 있는 이 생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질문을 해봅시다. 비교를 통해서 이것을 명확히 알아봅시다. 인간이 물질계에서 지각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빛이 인간이 있는 곳을 비추고 그 수용기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괴테는 분명한 의도로 “눈은 빛에 의해서 빛 때문에 형성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진실성은 동물이 어두운 동굴에서 살게 되면 눈이 퇴화되고 다른 기관 예를 들면 그곳에서 중요한 촉각기관이 더욱 섬세한 감각을 발달시킨다는 사실로부터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각기관은 그것과 관련된 외적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만약 태양이 없다면 눈도 없을 것입니다. 빛이 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조직은 그것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의 산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물질적인 모든 기관이 주위 세계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데바찬계에 있는 인간의 영적기관도 영적환경에 의해 구축된 것입니다. 데바찬에 있는 기간에 인간은 주위의 생명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입니다. 주위의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위한 일종의 영기관(靈器官)을 형성합니다. 인간은 데바찬에서 자신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인양 느낍니다. 그 내부에서 계속 영기관이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주십시오. 계속해서 창조되는 모든 지각기관에 은총을 받고 있다는 감정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성장과 생성(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는 데바찬을 통과하는 인간에게 은총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인간존재는 자신을 위해 인간의 영적 원형을 창조합니다. 사후 데바찬을 여행할 때 언제나 몇 번이고 이미 이 일을 해왔습니다만 매번 이 원형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 즉 이전 생의 결과인 에테르체의 추출물로 데바찬에 가지고 온 것을 포함시킵니다.

 

인간이 처음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그제야 인간은 물질적 인간에게 밀도를 더하는 원형이 이미 영적으로 창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수많은 육화를 거치면서 매번 데바찬계에 과거 생의 정수를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것에 조화로운 형태로 새로운 인간 원형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만을 말하겠습니다.

 

인간이 지속적으로 육화를 통해 지상에 출현하고 몇 번이고 데바찬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구는 매번 인간에게 변화된 얼굴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경험이 외적 문화 또는 온갖 종류의 관계를 통해서 손에 들어옵니다. 혼은 새로운 경험이 제공되지 않는 동안에는 물질영역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육화와 육화사이의 기간을 숫자로 설명하겠습니다. 그 기간은 인간이 새로운 원형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일단 만들어진 원형은 매번 다시 지상에 출현하고 싶다는 충동을 품게 됩니다. 결국 이 원형이야말로 인간 존재 자신인 것입니다. 이 충동을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특정한 사고와 그 사고를 표출하고 싶다는 욕구를 품으면 그 충동은 사고가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 방향으로 이끕니다.

 

데바찬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 창조된 원형의 형태를 다듬어 완성하는 힘은 아직 인간 의지가 미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 생의 주기에서 인간은 아직 스스로 육화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원형에 알맞은 물질체를 제공해주는 부모에게 인도해줄 지고의 영적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간을 원형에 적합한 사람들과 민족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육화할 때가 오면 인간은 우선 데바찬에서 창조된 원형에 조화로운 아스트랄실질로 자신을 둘러쌉니다. 이제 고차존재들에 의해 부모 곁으로 데리고 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물질체는 그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대략적으로밖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고차존재들은 해당 개아에게 지상적인 것과 정신세계로부터 오는 것과의 사이에서 최상의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에테르체를 쏟아 붓습니다. 이 에테르체의 수용과 물질적 탄생에 대해서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인간이 다시 지상에 출현할 때의 과정은 사후에 발생하는 과정과 정확히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죽을 때 인간은 첫 번째로 물질체를 놓아두고, 이어서 에테르체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트랄체를 남깁니다.

 

인간이 에테르체를 받아들일 때는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죽을 때는 지난 인생을 역방향으로 보게 됩니다만 이번에는 앞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인생의 예고, 예언적 전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에테르체가 짜여져 들어가는 순간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는 특정한 세부사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능성에 대한 영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예견은 인간에게 있어서 재난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이 그 예견에 의해 쇼크를 받는 광정에서만 일어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 물질체에 들어가는데 저항하고 몸부림친다는 뜻입니다. 만약 바람직한 형태로 에테르체가 들어가면 에테르체와 물질체는 조화를 이룹니다. 한편 쇼크가 일어난 경우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 때는 에테르체가 물질체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채 특히 머리주변 바깥쪽에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절히 지혜기관을 형성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원인으로 백치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모든 경우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해두지만 전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 삶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 삶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인식은 우리가 자신의 지식을 이타적 삶에 봉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5강 영적 힘과 존재들의 표출인 물질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7일

GA109 

 

우리 물질계를 지배하는 상황이 죽음과 탄생 사이 인간이 통과하는 영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정신과학의 진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라도 물질계의 모든 사건들이 영적인 영향과 사실, 그리고 영적존재들의 표출임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적 사건들의 기반은 영계, 데바찬에서 찾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반대로 물질계가 영계에 영향을 끼치는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혼과 혼을 이어주는 실은 존재가 처하는 다양한 상황의 결과를 통해 이 물질계와 맺어져 있습니다.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연은 견고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모든 만남은 물질계뿐만 아니라 영계에서도 중요성과 실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곳(지상)에서의 관계가 영적일수록 데바찬계에서도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죽으면 이러한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서 물질적인 것은 모두 없어지고 혼과 영의 성질 부분만 남게 됩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가 그런 예입니다. 우선 이 관계는 자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영적으로 되어 결국 자연조건은 혼과 혼 사이를 서로 이어주는 관계성을 가져다주는 기회만을 제공해줍니다. 인간이 죽으면 자연이 부여한 조건은 사라지고 서로 이어주는 관계성만 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상의 인류전체를 이어주는 모든 우정과 사랑의 관계성을 상상하려한다면 이 관계를 실제 데바찬에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그물로 그려야합니다. 영시자가 데바찬의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그는 이 영적 관계의 그물을 사후 인간이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데바찬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재회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도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과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혼의 관계성에 베일을 걸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든 장애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재회합니다. 데바찬에서 혼은 직접 서로를 향합니다. 혼과 혼의 관계는 물질계보다 훨씬 친밀하고 내적인 관계가 됩니다. 데바찬에서는 어떤 혼이 다른 혼을 다시 인식하는 데는 약간의 의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저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혼은 말하자면 영적 얼굴 모양이 새겨진 내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기저음(基底音)으로써 지상에서 가능한 것보다 훨씬 진실한 형태로 자신의 이름을 알립니다. 오컬티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기저음을 영계에서 표상하는 것입니다. 두 혼은 데바찬에 있을 때 처음으로 의심이 없는 완전한 교류가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몸을 잃어버린 혼이 지상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식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실재 살아있는 사람의 행동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데바찬에 가는 혼은 당연히 지구에 속하는 물질적 색채와 형태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편 영적영역에서 그는 물질적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바찬에는 물질계의 영적파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세상에서 혼이 지각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파편들입니다. 물질계에서 손의 움직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지의 충동이 선행하고 있기 때문에 손의 움직임 같은 모든 물질적 인간의 변화는 지상의 인간보다 죽은 혼이 먼저 데바찬에서 지각할 수 있는 영적파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삶은 꿈이나 잠과 같은 것이 아닌 모든 면에서 의식적인 삶입니다. 데바찬에서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으려고 하는 선천적 재능과 충동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이후 육화에서 그가 다시 지상에서 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면에서 육화의 목적은 더욱 친밀한 관계성을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친구관계는 아무리 작더라도 지상 어떠한 삶보다 떨어지지 않는 친밀한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우정은 지상보다 기민한 것이기 때문에 훨씬 친밀한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경험합니다. 지상에서는 많든 적든 타인을 짓밟음으로서 개인적 풍요를 누릴 수 있지만 데바찬에서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높이기 위해 타인을 끌어내린 불행은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을 희생으로 해서 풍요롭게 될 수 없습니다. 수정(修正)이라는 것은 데바찬에서 출발합니다. 우정을 지상에서 실재하게 만드는 충동은 저편 데바찬에서 기인합니다. 데바찬에서의 당연한 법칙이 지상에서는 실현되어야할 사명인 것입니다.

 

영계와 지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사실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이 사실에 대해 철저히 고찰해 볼 수 있으며, 데바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생활에 대해서 스스로 많은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바찬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적원형을 완성시켰을 때 다시 물질영역으로 하강하려는 충동이 생긴다고 어제 말했습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당신이 성숙한 사고를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실재 혼을 물질계로 다시 하강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혼에게 이러한 분명한 충동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카마로카기에 서서히 자신을 물질적 생에 속박하고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 혼은 끊임없이 그 통과하는 경험 속에서 진화를 방해하는 것을 배제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충동을 받게 됩니다. 혼 자신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킨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경험할 때 혼에게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치유하기 어려운 충동이 생성됩니다. 이렇게 해서 한발 한발 혼은 카마로카에서 데바찬으로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 싶다는 충동을 가지고 갑니다. 고차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적절한 방법으로 보존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집니다. 카마로카기 뒤에 인간이 제3의 껍질인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벗을 때 아직 자아의 작용을 받지 못하는 모든 부분이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인간이 세상에 초래한 진화에 대한 방해물로 구성된 그물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물질계를 지나올 때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증거가 되는 모든 형태들을 가지고 자신의 길에 깔아놓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만약 데바찬에서 자신의 원형을 완전히 육성하고 그 안에 자신의 에테르체의 추출물인 지난번 육화로부터 가져온 모든 것을 짜 넣었다면 이제 일종의 수정(受精)이 발생합니다. 보상받지 못한 행위의 그물이 그 원형에 침투합니다. 이렇게 데바찬에서 성숙한 뒤에 혼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은 이른바 카르마가 혼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혼에게 전생에서 행한 해악을 가능한 한도에서 보상하기 위해서 다시 지구로 하강하고 싶다는 충동을 불어넣습니다. 데바찬기가 끝날 무렵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혼에 침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지상에 새로운 존재로 하강할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영시자는 아스트랄계 도처에서 육화를 원하는 혼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아스트랄계의 시간과 공간은 물질계와는 다릅니다. 이러한 혼은 아스트랄계를 무서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힘들에 의해서 이 혼에게 적합한 물질체와 에테르체가 태어나는 장소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와 뉴욕의 거리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시간 요소를 고려하는 것은 육화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 성취 될 수 있는 지상적 가능성이 관계하고 있는 한에만 유효합니다. 아스트랄 공간을 날아다니며 위에서 아래로 퍼져있는 종 모양을 한 혼에게 지상으로부터 유전계통이 만들어낸 물질요소가 찾아옵니다.

 

그럼 우리는 혼을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육화하는 것은 무엇인지 간결하게 맣하겠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생식(生殖)은 어떤 감정의 충동과 사랑의 충동, 그리고 사랑에서 생겨난 공감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생식과정은 ‘사랑으로부터 생겨난 공감’ 뒤에 발생합니다만 영시자는 이 공감을 남녀 사이의 아스트랄적 힘들의 유희, 아스트랄 흐름이 요동하며 넘치는 모습으로 지각합니다. 거기서는  인간이 혼자 있는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살아 있습니다. 두 혼사이의 우정은 아스트랄 흐름의 유희로 표출됩니다. 물론 사랑의 모든 과정은 독립된 것이고 각각의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상의 수태가 일어나기 전에 사랑의 육체적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아스트랄 힘들의 유희 속에 다시 지구로 내려오고 있는 개아가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생식행위의 본질적 실재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수태 전에 영계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존재는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계는 남녀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영계에서는 정말 대단히 친밀한 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강하고 있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수태의 산물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개아가 그것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수태 순간부터 이 개아는 물질적 생식의 결과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예외도 있습니다. 수태 후 처음 수일간 하강하는 영적 개아는 아직 실제로 물질적 인간존재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만 바로 그 곁에 존재하며 이미 성장하고 있는 태아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실재 결합은 수태 후 18, 19, 20, 21일 후에 발생합니다. 고차세계에서 하강하고 있는 존재는 성장과정에 있는 존재와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약 인간개아가 도구로서 물질체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필요로 하게 될 섬세하고 유기적인 조직이 처음부터 과거 능력과 조화로운 형태로 준비됩니다. 인간존재가 통합된 통일체인 것은 가장 작은 기관이라도 유기조직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소 단위조차 수태 후 18일부터 21일 사이에 자아가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발달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을 전체 구조가 보증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태어날 존재의 발달에 여성요소와 남성요소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물질적 생식의 배후에 있는 것을 오컬트적 영적으로 연구한다면 매우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본질만을 다루겠습니다. 과거 성이 분리되기 이전에 생식은 남성의 참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상태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일 여성요소만이 인간생식과정에 참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여성요소만 활동한다면 거듭되는 진화는 아이가 최고도로 선조를 닮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태어나는 존재는 모두 완전히 동질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일반성, 동일성의 원리는 여성요소로부터 생성됩니다. 성의 분리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개아가 발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손과 선조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남성요소의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요소는 개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육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지상에 두개의 성이 확립된 후에야 시작된 것입니다. 그전까지 인간은 지상에서 과거의 산물을 자기 몸속에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아래쪽 지상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과 육화를 거듭하며 진화되고 풍성해져야할 인간총체와의 사이에 조화가 존재하는 것은 남성요소와 여성요소가 공동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편적 인간성’의 원리가 남성요소의 활동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다면 즉 보편적 유형이 개체화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아는 오늘날까지도 적절한 몸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성요소가 작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에테르체입니다. 에테르체에는 영겁의 경향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여성요소의 구동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성의 원리, 포괄성의 원리가 에테르체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성의 에테르체에는 오늘날까지도 민족혼, 민족령으로 외적 존재들의 그림자(사본)가 존재합니다. 민족혼과 민족령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럼 수태의 근저에 있는 영적실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수태 그 자체는 에테르체의 살아있는 힘들의 일종의 사멸에 지나않는다고 말해야합니다. 수태에 있어서 이미 죽음은 인체에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테르체를 경화하는 말하자면 사멸하게 만드는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에테르체는 무한히 증식해버릴 것입니다. 에테르체는 여성원리에 기원하고 있으며 다른 요소가 더해지지 않으면 복제밖에 만들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에테르체가 남성영향의 결과로 농밀화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개아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식은 여성의 에테르체가 복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멸한 에테르체에 새로운 인간존재를 창조하는 형성력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태와 번식이 발생합니다. 상부에서 그 고유의 카르마의 결과로 원형의 수태가 일어납니다. 수태 후 18일에서 21일후 자아는 이미 태아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아까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힘들은 훨씬 뒤인 6개월 후에야 비로소 태아에 작용하게 됩니다. 이 힘들은 그 인간의 카르마를 결정하는 힘들입니다. 이것은 카르마로 짜여진 그물에 잡혀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이러한 힘들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 자아의 교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자아가 성장의 위해 간섭하는 제1요소인 것입니다.

 

영계에서 하강하려고하는 존재를 개괄한 영상을 얻고 싶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육화과정에 있는 개아가 서로 사랑하는 두 명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육화를 원하는 원형은 스스로 정념이나 사랑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아스트랄실질을 끌어당깁니다. 아래쪽 지상 여기저기에서 넘치고 있는 아스트랄적 감정은 하강하는 실체의 아스트랄실질을 반사합니다. 그러므로 위쪽에서 오는 아스트랄실질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아스트랄적 감정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스트랄적 감정은 육화를 위해 하강하는 실체의 실질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고를 결론에 이를 때까지 철저히 고찰해보면 우리는 재육화하고 있는 개아는 분명히 부모를 선택하는데 참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개아가 누구든지 어떠한 것에 응해서 그는 부모가 될 남녀를 향해 이동하게 됩니다. 만약 부모의 선택이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면 아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찾아내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성질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사랑도 그런 이유로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종종 가볍게 말을 합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떤 의미에서 수태 전부터 양친을 사랑하고 있고 그 때문에 두 사람 곁으로 이끌려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실감하게 되면 모성애와 부성애는 보다 고차적이고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은 그 아이의 사랑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사랑의 답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양친의 사랑을 물질적 탄생에 선행하는 아이의 사랑에 대한 재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차존재들이 새로운 인간의 체현(體現)에 참가하고 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로부터 체현을 위해 내려오고 있는 존재와 이 존재가 아래에서 획득한 몸 사이에는 결코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차와 저차의 완벽한 조화는 인간이 진화의 어떤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즉 인간이 영인(靈人)을 달성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스트랄체를 영아(靈我)로, 에테르체를 생명령(生命靈)으로, 물질체를 영인으로 변용시켰을 때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마지막 육화를 선택하는 진화의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완전한 조화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아직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물질체의 일부밖에 변용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 부분밖에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직 변용시키지 못한 것은 외부로부터 다른 존재에 의해 인간 안에서 통합되어져야합니다. 서로 다른 두 계통의 존재들이 이 과정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에테르체를 통합시키는 존재들이며 인간을 양친에게로 이끄는 존재들입니다. 현 진화단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에테르체를 자신의 구성의 통합요소로 만들 수 없습니다. 어제 강연에서 말한 ‘인생의 예견’을 인간이 갖는 것은 에테르체에 포합되어 있는 힘들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이미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물질체가 더해지면 예견이 사라져야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에테르체는 물질체와 뒤섞여져야합니다. 물론 에테르체는 기억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시간에 관계하는 회상과 예지와 관계하는 모든 것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테르체가 물질체로 이동하면 에테르체는 물질존재의 법칙에 지배되며 이들 법칙은 어떤 의미에서 에테르체의 힘을 소멸시킵니다. 물질체의 영향을 통해서 인간이 기억을 어느 정도까지밖에 전개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해주십시오. 에테르체가 다시 자유롭게 되는 사후에는 에테르체는 기억의 파노라마 전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견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계에서는 미래에 대한 전망도 물질체에 의해 한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과정의 육화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쇼크는 미래의 인생에 대한 어려운 상황을 비정상적 형태로 예견한 결과가 혼에 의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간인 자아가 자신에게 부여된 물질계에서 그가 관계하는 것들에게 작용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탄생이전에 작용하고 있던 다양한 영적 요소의 힘들은 우선 모체조직의 대응요소를 통해 활동합니다. 탄생 직전 인간은 모체의 울타리에 의해서 사방으로 싸여져 있기 때문에 살수 있는 것입니다. 탄생과 함께 인간은 이 물질적 모체의 울타리를 벗어버립니다. 첫 번째로 자유롭게 되는 것은 물질체뿐입니다. 에테르체는 영시자에게 아직 모체의 에테르체의 울타리에 싸여져 있는 것으로 관찰되며 젖니가 빠지는 시기까지 이 울타리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 젖니가 빠지는 시기는 모체의 에테르 울타리를 버리고 제2의 탄생이 일어나는 인간성 진화의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 때에 에테르체는 모체의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현상입니다. 젖니가 빠지는 시기까지는 몸의 구조가 유연하고 어느 정도 변화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습니다만 그 이후부터 몸은 성장력이 지배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가 나기시작하면 본질적으로 몸의 형태의 발달이 완료됩니다. 이 지식은 중요합니다. 외부에서 물질체 형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과 물질체의 항구적 특질이 되어야하는 모든 것은 철저히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이가 빠지는 시기까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모든 외적요소는 예를 들어 빛이나 색 등 인간에게 영향력을 가진 모든 것이 섬세한 인간의 요소와 기관에 형성적 영향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주위에 어떤 색이 있는지, 어떤 환경이 있는지, 무엇을 하면 좋은지가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활동을 통해 점점 더 섬세한 기관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적색이 인간의 보다 미세한 기관에게 주는 영향은 청색의 영향과 다릅니다. 이와 같이 아이의 주변에 있는 색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집니다. 활동이 있으면 기관도 발달합니다. 눈이 습관으로 보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 눈이 보는 것은 인간 성질에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의 눈이 적색을 보는지 청색을 보는지는 아이의 성장과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정신과학이 주류로서 실천적 학문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을 통해서입니다. 왜 우리는 정신과학을 실천하는 것일까요?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과학은 우리를 이런 미묘한 문제에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러한 활동분야에서도 도움을 줍니다.

 

태어나서 7년이 지나면 에테르체가 자유롭게 됩니다. 에테르체는 기억을 담당합니다. 아이의 기억력에 관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세가 될 때까지는 지금의 교육방식으로 기억력을 발달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7세 이후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교육예술을 통해 기억훈련에 영향을 주어도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7세가 되기 전에 이미 아이가 기억력을 사용하도록 자연이 작용하고 있다고 종종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작용하는 것은 예비단계입니다. 모체 안에서 아직 태어나기 전에 아이의 눈은 자연에 의해 모양이 갖추어집니다만 만일 태아의 눈에 태양광선이 작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이 되서야 햇빛이 눈에 올바른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바로 그 때문에 태어나기 전에 자연이 눈에 대해 예비작업을 수행해야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탄생이전의 다른 기관도 이와 같습니다. 자연은 미리 이러한 기관을 만들어 냅니다만 모체의 울타리라는 외적인 덮개에 의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기억은 7년째 이후 올바르게 발달을 계속할 수 있도록 7세가 될 때까지 자연이 작용하도록 놔두어야합니다. 그럼 그 이후부터 인간은 어떻게 아이의 기억에 작용을 해야 할까요? ‘아이의 물질적 탄생까지 자연이 작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가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인간은 14, 15세의 사춘기까지 그 주위에 모태(근원)가 되는 아스트랄체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 시기가 이르면 그 울타리는 벗겨지고 아스트랄체는 자유롭게 됩니다. 이른바 제3의 탄생이 발생합니다. 아스트랄체는 인간의 판단력, 식별력의 담당자입니다.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아이가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견은 싹 버려야합니다. 7세에서 14세에 걸쳐 인생의 목적에 알맞은 (유효한, 도움이 되는) 기억의 보고(기억력)를 쌓아두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스트랄체가 태어날 때 가능한 원숙하고 풍요로운 혼의 내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판단력은 이러한 혼이 만들어졌을 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이는 사(2x2=4)'라고 암기시키는 옛날 학교에서 사용되던 방법은 실제 기억력의 문제입니다만 현재 유행하고 있는 ’2x2=4‘를 주판의 빨간 구슬과 흰 구슬로 증명하는 추상적 방법보다 확실히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주판을 이용하는 추상적 방법은 분명히 유해한 방법입니다. 어린아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마음대로 말하지 못하지만 그사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테르체를 위해 좋은 기억을 쌓을 때까지는 판단을 사용하도록 힘을 써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영구적인 경향이나 습관을 발달시키기 전에 판단을 행사하도록 노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 삶을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 외경, 신성한 두려움은 이후 인생에서 은총의 힘으로써, 흘러넘치는 인간적 사랑으로써 표출되는 감정입니다. 가장 강력한 충동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즉 신적이고 영적인 것, 우주적인 것을 느꼈다고 하는 감정을 통해서 에테르체에게 주어집니다. 에테르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인간이 탄력 있고 유연하게 바꿀 수 있을 때, 경건함이 없는 추상적 사고습관을 형성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추상적 판단능력을 육성해야합니다. 아이에게 전달된 지식이 이미지와 상징으로 생생하게 그려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감정생활은 우화 의 뜻과 상징을 알게 됨으로써, 특히 역사적 위인의 전기를 통해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흡수함으로써 발달됩니다.

 

아이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탄생이나 그 생과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나오는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물질체로부터 출현하는 인간 혼의 성질에 대한 영상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야기할 때는 당연히 우리 자신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의 진실을 확증해주는 사실을 자연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나비와 번데기의 이미지가 고차단계과정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상적 철학이 신화나 옛날이야기라고 낙인찍은 것들을 다시 한번 믿을 수 있어야합니다. ‘황새이야기’나 ‘날아라 날아라 풍뎅이‘와 같은 노래는 딱 들어맞는 해석을 붙일 수 있습니다. ‘황새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기 위해 아득히 먼 옛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탄생에 즈음하여 무엇인가가 영계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래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유일하게 일어나는 과정은 남녀의 물질적 연결뿐이라고 믿었었다니 어처구니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옛날이야기입니다. 미래에는 분명히 “우리가 훨씬 낫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사람들이 우리가 선조들을 어리석다고 대하는 태도보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관용으로 이해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상징은 아스트랄체에 영향을 주는 최상의 수단입니다. 해방된 아스트랄체를 단련할 시기가 올 때까지 관념화, 심상을 성장시켜야합니다. 이렇게 해야 겨우 판단력을 발달시켜야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의 대다수가 슬프게도 혼적 삶이 기형적인 것은 대체 왜일까요? 현대인은 너무 어릴 때부터 ‘예’, ‘아니오’라고 말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 아이는 위대한 인물이나 자연의 위대한 모습을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14~21세 사이에 겨우 판단력이 성숙해집니다. 올바른 교육은 말만 많은(지껄여대기만 하는) 작가의 수를 줄이게 될 것입니다. 문학지향이라고는 하나 미숙한 사람들에게 미숙한 판단력을 형성시킨 결과가 현대의 공허한 유물주의입니다. 이 베일을 뒤집어쓴 유물주의는 과학적 유물주의보다 훨씬 낮은 성질의 나쁜 것입니다.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혼이 순수하게 경험한 것에 의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그 무게를 가집니다. 인간은 판단을 형성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견이 천차만별로 균열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탄생하는 것은 겨우 21세가 되고나서이며 이 이후 처음으로 개인이 정확히 세계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정한 자립된 존재로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략 21에서 28세까지 감각혼의 발달이 일어나고 그다음 7년마다 오성혼(悟性魂, 정신혼)과 의식혼(영적혼)의 발달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35세전의 어떠한 자아도 오컬티즘 분야에서 어떠한 것을 줄 지위도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도달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는 오컬트적 법칙이 있습니다. 35세는 특별히 중요한 나이입니다. 단테를 떠올려보십시오. 단테가 영계를 환시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계산해보면 단테가 35세 때 비전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컬트전통이 살아남아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주기가 개인의 인생에도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강하고 있는 인간의 영적 힘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어디서 그것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기간이 적절한 발달을 위해 필요한지 알려져 있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의 커다란 총체로 인간사회의 공동체는 이 통찰에 기초하여 형성되어야한다고 가르쳐야합니다. 신지학은 우리들에게 지혜가 행위로, 사회행위로, 그날그날의(하루하루의) 인생이 되어야한다고 가르쳐야합니다. 신지학의 가치는 그 가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추상적인 지혜로 있지 않고 점점 더 강력하게 손의 기술을 통해서 혼에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은 바로 그때 세계령(世界靈)의 물질적 표출, 영성의 물질적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제6강 인간 물질체의 형성과 변용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8일

GA109 

 

인간의 진화에 관한 어제 강의에 이어서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 진화와 관련된 문제를 고찰해봅시다. 재육화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장기간의 인간성 진화를 회상해봅시다.

 

현대인은 육체와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와 완전한 자립을 의미하는 자아 담당자의 집합체입니다. 육체와 에테르체보다 영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가장 완벽한 인간요소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가장 경이적인 구성요소로 조성되어 있는 구조체인 육체가 가장 완벽한 요소입니다. 이 인간의 몸은 정말 훌륭하고 진실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육체보다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확실하지만 물질체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충동이나 욕망, 정열의 기쁨과 고통을 담당합니다. 어째서 육체가 가장 완벽한 것일까요? 인간의 육체 중 심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심장은 평생에 걸쳐 공격으로부터 그 기반을 지키는 대단히 훌륭한 구조물입니다. 물질체의 다른 기관 역시 똑같이 훌륭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기관들에는 분명히 지혜가 존재합니다. 아스트랄체는 심장을 향해 어떻게 작용할까요? 결코 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완벽(지혜)을 향한 욕구 때문에 아스트랄체는 즐거움이라는 수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아스트랄체는 끊임없이 육체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육체의 심장을 향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한편 심장은 계속해서 저항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육체의 구축과정은 다른 몸(아스트랄체, 에테르체)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에게 육체는 가장 오래된 요소이며 때문에 가장 완벽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진화한 존재들이 이미 육체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모든 물리적 물질적인 것은 영으로부터 진화해서 현재의 형태로 발달했습니다. 물질계 인간의 첫 시작은 육체의 확립이었습니다. 당시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 자아의 담당자의 기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혹성 또한 그렇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이미 다른 혹성으로 육화를 거듭해왔습니다. 첫 번째가 토성, 두 번째가 태양, 세 번째가 달(月)입니다. 여기서는 현재의 달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역주: 토성과 태양도 현재의 토성과 태양이 아님) 그것은 옛날 달의 잔재,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왜 달이 고대부터 ‘달’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듣게 될 것입니다. 과거 오컬티스트가 지은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사물이나 존재에게 부여된 이름은 반듯이 각각이 표출해야할 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지구의 바로 이전 혹성체현(육화)은 달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체현은 태양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태양이 아닙니다. 현재의 태양은 저 옛날 태양에 대한 기억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오컬트시각으로 뒤돌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우주천체는 바로 토성입니다. 이 것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이제 이 옛날 토성진화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먼저 우리는 오컬티스가 말하는 외부세계의 기본요소가 가진 특징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해야합니다. 고대 오컬티즘은 외부세계를 흙, 물, 공기, 불 또는 온기의 4원소(요소)로 식별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물리학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이 원소라고 부르는 것은 오컬티스트가 같은 말로 부르고 있던 것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활동상태’라고 하는 현대적 표현이 대충 ‘엘리멘트’와 같은 의미입니다.(‘엘리멘트‘라는 말은 현대적 표현으로 대충 ’활동상태‘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온도로 지상에서 고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컬티스트에게는 ‘흙’ 또는 ‘고체’로 불립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온도상태에서 수정의 결정은 오컬티스트에게 ‘흙’입니다. 액체 상태의 모든 것은 액체상태일 때의 금속을 포함하여 모두 오컬티스트에게는 ‘물’입니다. 기체상태의 모든 것은 ‘공기’입니다. 현재의 물리학자가 세 가지 ‘활동상태‘라고 부르는 것 중 하나로 간주하는 ’불‘은 오컬티스트에게 ’제4요소‘입니다. 불을 단순한 상태가 아닌 흙, 물, 공기와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보는 의견을 현대과학이 꺼림칙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옛날 토성위에서는 흙이나 물, 공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기 다시 말하면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우주공간에 의자를 갖다놓고 토성진화를 영시력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온기 감각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이것은 순수한 혼의 온기였습니다. 내적인 온기였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주된 상황 하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기구조를 위해 3개의 왕국을 필요로 합니다. 옛날 토성 당시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인간존재 총재가 온기만으로 조성되어진 형상이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인간의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인간으로부터 물질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 들이마시는 공기조차도, 생각까지도 모두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전체가 순환하는 혈액의 온기만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상상하고 현재의 혈액조직을 영상으로 떠올려보십시오. 토성위의 모든 인간은 그러한 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컬티스트에게 있어서 천체는 다름 아닌 영적존재들의 집합체입니다. 지구 또한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에 속해있는 존재들의 집합체입니다. 옛날 토성 사람들의 의식도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의식은 어두웠지만 포괄적이었습니다. 지상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현대의 명료한 낮 동안의 의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토성 위 인간의 의식은 둔하고 기묘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오늘날 인간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은 무의식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 식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배후에 숨어있는 존재들을 무시하고 물질적 식물만을 생각해주십시오. 그 곳에는 보다 깊은 상태, 즉 꿈이 없는 잠이 명백히 존재합니다. 식물은 깊은 잠 상태에 빠진 존재입니다. 이제 보다 깊고 보다 어두운 잠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깊은 트랜스(trance, 혼수상태) 상태입니다. 이것이 토성의식입니다. 현대에는 비정상적 상태인 이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뒤쳐진 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발생하는 사례입니다. 18세까지 알코올을 한 방울도 마셔본 일이 없는 여자아이가 어떤 상황 하에서 적포도주를 비울 때까지 마시도록 유혹받았다고 합시다. 어떤 기관의 상황 때문에 이 일은 대단히 강력한 인상을 끼치고 그녀는 빈사상태에 빠졌습니다. 연필을 쥐게 해주면 그녀는 온갖 종류의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해 그것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녀는 기계와 같습니다. 생명도 없고 의식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아이가 그린 것을 오늘날의 혹성이나 우주구조에 대해 신지학의 저작물이 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녀가 쓴 것이 확실히 기묘한 우주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오컬트우주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눈치 챌 것입니다. 그 아이는 통상적인 잠보다 깊은 의식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개아(個我)는 그 둔한 의식 속에서 지구를 훨씬 뛰어넘는 먼 곳까지 이동하여 우주적 사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이러한 의식상태, 즉 적절한 자아가 없는 둔하고 포괄적인 의식상태가 물질적 암석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암석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소녀가 한 것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이 의식은 둔하지만 광대한 영역을 포괄합니다. 옛날 토성위의 인간의식은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토성자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실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토성은 그 내부에 전우주의 거울상을 포함하고 있고 전 우주의 모습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술하고 표현하려고 한다면 위의 예처럼 표현할 수 있는 저차의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른 문제를 고려해야만합니다. 토성은 인간이 최초의 물질체 기원을 형성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도 진화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오늘날 그 위계가 인간보다 훨씬 높은 존재들이 진화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이집트의 현자가 어느 그리스인에게 했던 말을 인용해서 이것을 밝혀보겠습니다. “그대들 그리스인은 영원히 아이 같은 어른으로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비의의 가장 심오한 비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신들도 오래전에는 바로 인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들은(신들은) 물질적 존재가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옛날 토성에서 인간은 일종의 광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도 광물의 의식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보다 아득히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들은 인간의 몸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르콘(archon), 최초의 시작, ‘인격의 영’입니다. 그들은 고대토성에서 그들의 ‘인간‘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인간기(人間期)를 경험하기 위해, 즉 자아의식을 획득하기위해 단순히 당시의 ’물질‘체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성한 존재들은 토성에서 자아의식을 획득하고 자신의 거주지를 대체할 매개체로 인간의 몸을 이용했습니다. 어떤 존재들이 인간의 물질체에 그들의 독특한 특징을 침투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두 번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우선 자아의 담당자가 인간 안에서 하나뿐인 토대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당시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나오는) 형태를 전해준 것이 이들 ’인격의 영‘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들은 인간이 이기심을 발달시키는 것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격령의 영향을 통해서 인간의 몸은 자유로운 개성으로 발달하는 씨앗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기심, 에고이즘을 키우는 능력도 받았습니다. 이것과 연관된 모든 과정을 설명하려한다면 한번의 강의, 한번의 연속강의도 아닌 몇 년 동안을 계속 설명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가지 단계만을 연구해보겠습니다. 토성진화기의 7단계를 각각 고찰해봅시다.

 

제1단계는 아직 물질적 온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직 준비되고 있는 단계로 생각해야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순수하게 혼적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혼의 온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토성진화 중기가 되자 처음으로 물질적 인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 온기의 실질로 만들어진 물질적 인체가 생겨났습니다. 토성진화기 종반부에는 이 온기의 인체가 용해됩니다. 토성진화기에는 3번의 예비단계와 물질적 온기의 단계, 그리고 3번의 하강단계 이렇게 7단계가 존재합니다. 이 7단계는 각각 또다시 7단계의 부차적 분할을 가지지만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진화의 연구단계에서 돌아볼 예정입니다. 현대 신지학문헌에서 이 단계들은 회(回)와 주(周)로 불립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인체를 형성한 실질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신성한 영적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흘러넘치게 하여 인간 물질체의 실질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존재가 ‘의지의 영(좌천사座天使, Thtonse)’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흘려보내는 희생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토성에서는 인체에 실질을 부여하는 의지의 영, 토성에서 인간기를 살고 있는 인격의 영, 그리고 물질적 씨앗으로 존재하는 인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성진화는 시작과 절정,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뒤 혹성전체가 프라라야(Plalaya,휴식기)를 통과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식물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종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붕괴되어 새로운 존재로 형태를 운반합니다. 최초의 식물과 두 번째 식물 사이의 휴식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혹성에도 바로 이와 같은 상태가 존재합니다. 이 상태를 ‘세계의 잠’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계의 잠’ 뒤에 변용된 토성이 다시 나타나는데 이것이 옛날 태양입니다. 토성과 태양 사이의 차이점은 태양이 토성의 온기의 실질을 가스 상태까지 농축화 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태양은 온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기 또한 진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고대 태양에는 온기와 공기 그리고 빛도 존재했습니다. 토성이 어두운 온기로 되어 있는 반면에 제2의 혹성 옛날태양은 빛(불타는 가스)과 온기의 에테르, 그리고 공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토성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물질적 존재의 기반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옛날 태양에 새로운 것이 덧붙여집니다. 에테르체가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 이 실질(인간의 물질적 실질)에 흘러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식물상태에 도달한 제2의 혹성상태입니다. 이제는 인간 안에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테르체의 통합으로 인해 인간의 물질체도 변화합니다. 그것은 토성기의 알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 자신 안에 편입됩니다. 그것은 이제 빛의 형태가 쇠약해져 여기저기 잘록해진 흔들리는 온기를 가진 알이 됩니다. 에테르체는 이제 물질체에 작용하여 공을 들여 완성해갑니다.

 

토성에서는 ‘의지의 영’이 스스로 물질체의 실질을 흘려보냈습니다만 태양기에서 위대한 희생을 통해서 실질을 흘려보내는 존재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이 존재들은 ‘지혜의 영(主天使, Dominions 또는 Kyriotetes)입니다. 이들보다 힘든 희생을 수행한 존재는 ’의지의 영‘이였습니다. 만약 ’의지의 영‘이 인간의 기반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지혜의 영‘이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태양기에도 ‘인간’단계를 통과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대천사들, 즉 ‘불의 영’들입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아케인젤리스(Archangelis)로 불립니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 살면서 대리자로서 행동하면서 이렇게 하여 자신의 자아의식을 육성했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을 말하겠습니다. 만약 토성이 프라라야 뒤에 직접 태양으로 출현했다면 인간들의 몸은 에테르체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혹성 옛날태양에서 처음에는 짧은 토성기의 반복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관여하고 있던 존재들은 다시 과거의 옛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종류의 존재를 태양위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어떤 개성적인 영들은 토성에서 인간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토성에서 자아의식을 획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옛날태양에서 이것을 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성기의 동료들과 같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옛날태양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껍데기 안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즉 에테르체가 침투하지 않은 광물체 안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옛날 태양에서 물질체만으로 만들어진 구조가 탄생했습니다. 이렇게 보다 저급한 구조가 물질체와 에테르체로 되어있는 구조와 나란히 존재했습니다. 전자가 현재 동물의 선조입니다. 고대태양에는 이렇게 2개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인간계와 태양기에서 토성기진화 상태에 있는 존재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동물계를 구성합니다. 태양기에는 이렇게 3개의 예비적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인간계와 동물계입니다. 후자의 계승자가 현재의 고등동물입니다.

 

옛날 태양은 이제 또다시 일종의 ‘우주의 밤’으로 이행합니다. 다시 제3의 변용을 통해 과거의 달로 태어납니다. 월기 처음에는 과거의 단계를 반복하고 여기에 이제 액체 또는 물의 실질이 더해집니다. 태양의 분리가 발생했을 때 온기와 빛은 태양과 함께 밖으로 나갑니다. 신성한 존재들도 미세한 본질과 함께 외부로 나가버립니다. 액체, 즉 ‘물상태’가 된 것은 달로 태어나고 더욱 농축화되어 일종의 제2의 혹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월기에는 당시 온기와 빛과 물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태양기처럼 에테르체 즉 빛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월기에 추가된 새로운 요소는 소리 또는 진동(울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분말로 덮인 금속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판을 바이올린 활로 켭니다. 분말은 분명한 형태를 형성합니다. 물리학자가 말하는 음향도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소리 또는 진동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진동의 물질적 형태입니다. 월기의 ‘물’은 진동이 침투되어 있었습니다. 진동에 의해서 규칙적 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월기의 존재는 이 규칙적 운동을 통해 물질체내에서 내적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관이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간이 형태를 가졌다가 다시 사라졌습니다. 이 과정은 기관의 형성과 사멸의 과정이며 도형(형상)과 리듬의 경험이었습니다. 존재하는 몸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내부에 아스트랄실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마칩니다. 물상태의 실질 안에서 일어난 원초적인 소리의 충격은 성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은 계측과 수와 중량으로 온갖 것들의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 그러므로 월기 진화의 본질적 새로운 특징은 물질적 실질에 밀려들어온 내적 진동과정입니다. 여러분은 월기를 규칙적이고 수학적 리듬, 즉 다양화되는 내적 진동이 침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합니다. 오래전 토성기에서 인체를 구축하고 있던 것은 온기라는 조성물이었습니다. 이후 태양기에서는 공기와 같은 조성물이었습니다. 하늘의 환상,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신기루)와 같이 나타난 공기상태의 조성물이었습니다. 월기에서 실질은 물입니다. 내적 진동에 의해 운동 상태에 있는 물입니다. 내적 변용과정에 관여하는 유기적 조직은 이 진동에 의해 만들어져 인체를 빛으로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상태를 생성과 사멸이라는 잠깐 사이의 과정으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간이나 폐가 인간 안에서 형성되었다가 용해되었습니다. 이것이 월기의 상태입니다. 성서에 표현된 “신은 계측과 수와 중량으로 온갖 것들의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적 진동입니다. 월기 내부에 우선 처음에는 인간의 과거 구조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물질체와 에테르체가 또다시 생성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토성과 태양체현의 반복이 월기에서 먼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겨우 진정한 달이 태어났습니다. 이제 달은 물상태의 실질을 포함하는 한편 내적 진동을 파생시킨 원초적 진동에 의해 침투된 물질적 인체와 에테르체 안에 ‘운동의 영(權’天使, Principalities)'이 인간의 아스트랄체를 쏟아 넣었습니다. 토성에서 ‘의지의 영’이, 태양에서 ‘지혜의 영’이 행한 것처럼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실질로부터 이제 인간의 아스트랄체를 흘려보냅니다. 이렇게 지구의 발달은 끊임없이 진행되며 그곳에 사는 인간도 역시 발달을 계속해나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 물질체의 완성도는 토성, 태양, 달이라는 3번의 변용을 통해서 제3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이 물질체는 현재의 형태에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달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필요한 새로운 발달은 지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달의 실질 중 기본적 혼을 제외한 그 일부가 밖으로 나와 기본적 혼을 감쌌습니다. 우선 토성이 생성되고 그 다음에 태양, 3번째로 달이 생성되었습니다. 최상의 실질과 존재들은 기본적인 천체로 분리되었습니다. 지구기에도 이 천체들은 분리되며 혹성보다 높은 단계의 항성이 됩니다. 또 하나의 천체가 분리되었지만 혹성 상태로 남았었습니다. 오늘날의 태양은 과거에는 혹성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현재의 태양과 달,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 지구의 실질을 잡아서 거대한 용기에 모도 집어넣고 뒤섞을 수 있다면 거기서 고대 태양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만약 지구와 달을 뒤섞을 수 있다면 고대 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지금의 태양은 혹성지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최상의 실질과 최상의 존재들은 지구로부터 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농축된 물상태의 요소는 태양을 따라서 갔습니다. 농축된 물의 형태(姿形)는 고대 달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운반체(담당자, 수단)이었습니다. 인간은 분리되어 남겨진 활동장소를 선택했습니다. 항성인 태양은 혹성이 진화한 결과 탄생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의 3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단계로 진화한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발달이 뒤쳐진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기’를 통과한 존재는 천사였습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앙게로스(Angelis)로 인도에서는 ‘달의 아들(루나피트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존재들의 의식은 오늘날 인간의 의식과 달랐습니다. 하지만 월기에는 또 다른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태양기에서 뒤쳐져 월기에서 ’인간‘단계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아크앙겔로스(대천사)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비로소 ’인격의 영’(즉 토성기의 인간)단계에 도달한 존재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뒤쳐진 아크앙겔로스는 물질체와 에테르체만을 가진 인간의 몸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인간보다 하위의 영역이 되었고 지상에서 동물계로 이어진 왕국입니다. 이 왕국에 속하는 존재들은 현재 동물계가 가진 물질체의 선조입니다. 월기에서 물질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는 현재 식물계의 선조입니다. 이렇게 해서 월기에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가 존재했습니다. 토성기에는 인간계만이 존재했습니다. 태양기에는 인간계와 동물계가 존재했습니다. 광물계는 우주진화과정에서 생성된 가장 새로운 존재입니다. 인간, 인간계는 진화과정상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인간은 지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인간은 이 3개의 몸에 제4의 요소, 자아의 담당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참고: 천사의 위계]

생명의아들 - 천사, 앙겔로이

불의령 - 대천사, 아크앙겔로이

인격령 - 권천사, 알햐이

형태령 - 능천사, 에크스시아, 파워즈

운동령 - 역천사, 듀나미스, 바츄즈, 마라킴

지혜령 - 주천사, 큐리오테테스, 도미니온즈

의지령 - 좌천사, 토로네

조화령 - 지천사, 케루빔

사랑령 - 치천사, 세라핌

 

 


제7강 레무리아기 이전의 지구진화단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9일

GA109 

 

어제 강연에서 우리의 혹성진화에 대한 연구는 월기로 알려진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우리 혹성의 첫 번째 체현은 토성체현이며, 두 번째는 태양체현, 세 번째는 고월체현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모두가 여기까지 진보했다면 인간은 다른 존재들의 우주적 진화 템포를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혀진 지점까지 어제 강연에서 우리는 도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월체현 동안 일종의 분리가 어떤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우주공간 안에서 진화를 계속하고 있던 태양은 가장 섬세한 실질과 고차존재들과 함께 혹성체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혹성체 진보의 뒤쳐진 부분, 즉 고월자체는 현재의 지구와 달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채 일종의 구름상태의 천체로 남았습니다. 어떤 조건이 달의 농밀화 또는 경화(硬化)를 일으켰으며 똑같은 현상이 달에 사는 존재들에게도 발생했습니다.

 

태양이 분리되자 그 힘들은 외부로부터 달에 작용했습니다. 달에 존재하도록 남겨진 인간-동물-식물계는 이제 외부로부터 태양의 힘을 받았습니다. 분리 후 달에는 3개의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아직 광물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경화과정 후에 가장 낮은 차원의 왕국으로서 형성된 것은 일종의 광물-식물계였습니다. 그 특징이 식물적인 광물실질입니다. 또는 그 특징이 광물인 식물실질입니다. 이것이 달의 지면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고체이며 반액체 상태의 기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의 광물표면 위를 걸어 다닙니다. 월기에는 반고체, 반액체상태의 지면이었습니다. 일종의 식물-광물 토양이었습니다.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스폰지와 같은 식물상의 실질로 되어있는 덩어리를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 월기에 존재하는 가장 저차의 왕국에 대한 특징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반쯤 살아있는 왕국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지면은 비교적 조용한 상태입니다. 화산 활동은 일종의 내적 삶에 대한 회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월기에는 그런 상태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오컬티스트는 지진이나 화산활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식물기관이 성장하고 이윽고 죽어가는 것과 같이 바로 월기의 이 반쯤 살아있는 실질도 성장하고 죽어갔습니다. 고월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조직과 같았기 때문에 그 위에 살아있는 존재는 오늘날의 기생충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월기의 식물은 광물실질로 되어있어 생멸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 특징은 식물적이기도 하고 광물적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암석과 비슷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각질 또는 목질 형태를 이룬 물체가 있었습니다. 고월 주위에 일종의 대기와 같이 반은 물 상태이며 반은 살아있는 실질로 되어있는 몇 개의 구름덩어리가 있었고 그 안에 반은 동물 반은 식물인 다음 단계 왕국의 존재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만약 나무를 부러뜨려 동물이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이 동물-식물계에 의해서 경험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주 듣는 얘기지만 학교에도 진전이 없는 학생이 있듯이 진화과정 전체에서 정체되어버리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표출하는 형태와 함께 지체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지상 자체에도 지상의 진화를 따라서 충분한 진화를 이루지 못하는 달의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외적 표출로 월기의 생이었던 상태를 창조해야만 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고월의 식물은 오늘날과 같은 광물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혹성의 반쯤 살아있던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겨우살이’는 월기형태의 자손, 낙오자입니다. 겨우살이는 식물-토양에 뿌리를 뻗어야했습니다. 민족 신화에 이것을 지적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바르도르와 로키의 전설입니다. 로키는 월기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한편 바르도르는 지구와 태양의 진화에 내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존재였습니다. 전설이나 신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느 오컬트 조사 영역과 관계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시력의 열매는 외적 과학을 좀더 풍성하게 할 수 있으며,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외적 과학은 전설에서 민족적 공상을 훨씬 뛰어넘는 많은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영과학은 지성뿐만이 아닌 혼 전체로 조사하는 법을 사람에게 가르쳐야합니다.

 

월기에는 동물계와 인간계 사이에 제3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동물-인간계입니다. 이 동물-인간의 형태는 오늘날 유물주의적 과학이 상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어떤 특정한 중요 구성요소가 아직 실제로 내부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물-인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잠을 자고 있을 때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남고 아스트랄체는 외부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말하면 잠자고 있는 동안 인간은 저차구성요소 중 반만을 가지고 물질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과거 우주적 의식단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영시는 이 상황이 월기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스트랄체는 결코 완전히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잠보다 근본적이고 명확히 인간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월기의 인간 머리는 현재와 같이 자기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머리기관이었던 것의 잔재가 부드러운 상태로 오랫동안 열려있는 아기의 머리 끝부분에 있는 장소입니다. 월기의 인간 머리는 아직 열려있었습니다. 만약 이 부드러운 지역에서 수직으로 아래쪽으로 선을 그으면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 척추동물의 간뇌(間腦) 등면에 돌출해 있는 내분비선)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퇴화되어 위축되어 있지만 월기 체현에서는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를 아스트랄체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감각 기관이었습니다. 섬세하고 빛을 내는 몸이었던 이 기관을 통해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다른 몸에 빛을 비추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수면 중의 의식도 깨어 활동하는 의식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외적 사물을 지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의식은 오늘날의 꿈의 의식과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송과선은 일종의 온기 기관으로 온기를 강력한 빛으로 가득 찬 광선으로 방사하고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이 움직이면 이 기관의 기능은 인간이 취해야할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월기의 인간의 지각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꿈의 영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직 눈으로 보거나 지각하는 사물도 없었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영상의 내적 고양과 진정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꿈의 영상은 그것의 허약한 그림자놀이에 불과합니다. 월기에서 인간이 하려고하는 모든 일은, 어떻게 해서 식량을 찾을까와 같은 일들은 외적 세계와 관련된 이러한 영상에 의해서 끊임없이 활성화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인도에 따라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것도 이것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스트랄체는 물질체와 에테르체를 넘어서 멀리까지 퍼져있었습니다. 물질체의 형태만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내적 온기는 아직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는 온기는 실제로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은 주위의 온기로부터 온기를 흡수하고는 또 방출했습니다. 오늘날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 것과 똑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온기기관을 통해서 그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온기를 흡수했을 때 반짝이는 빛을 내뿜었습니다. 온기를 내뱉으면 어두워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불을 호흡하는 드래곤으로 이 과정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불을 내뿜는 드래곤 위에 선 모습이나 드래곤과 싸우는 성죠지의 모습은 이러한 상황을 추억하는 영상인 것입니다. 월기의 불을 내뿜는 존재, 태고의 드래곤은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영상입니다. 그것은 극복해야할 어떤 단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컬트지식으로부터 획득된 사항을 설명한 것입니다. 곧 영과학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이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와 영상 안에 보존되어온 진리에 대한 완전히 다른 견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 동물-인간형태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아스트랄체가 곧 지상에서 가능하게 될 정도로 깊이 물질체에 잠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월진화기에 물질계의 심연으로 하강을 원하지 않은 존재가 이제 지구기에 물질계로 하강하려는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만약 우주의 이 과정이 좀더 앞서 발생했다면 인간은 훨씬 저차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지구진화기에 영성의 도움으로 인간은 자신을 위해 현재 자신의 것인 고귀한 신과 닮은 모습을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모습을 발달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고월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 아스트랄체의 하강은 미숙한 채로 발생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지도자들은 반듯이 올바른 때를 선택해왔습니다. 고월진화의 본질적인 업적은 물질체 진화를 위한 때가 남겨졌다는 것입니다. 고월에서 저차의 단계에 물질적 진화를 달성한 후 지상에서 인간의 물질체는 아스트랄체에 침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지금까지 분리되어있던 태양에 달이 합체합니다. 고월은 다시 태양에 흡수되고 모든 것은 우주의 잠, 프라라야로 이행합니다. 이것은 달이 태양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고월진화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진행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준비기간. 두 번째 태양과 달의 분리. 세 번째 고월상 3개의 왕국 형성. 네 번째 고월의 태양으로 귀환. 다섯 번째 쇠퇴. 여섯 번째 우주의 잠.

 

우리 지구의 네 번째 변용, 즉 우리 자신의 혹성이 이윽고 우주의 잠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지구의 초기 모습은 물론 현재의 형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밤에서 등장했을 때, 황혼의 어두움으로부터 등장했을 때 지구의 규모는 거대했습니다. 그 안에 태양과 달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리는 나중에 발생했습니다. 지구의 규모가 매우 거대했기 때문에 오늘날 토성까지 이르렀습니다. 태양계의 분화는 훨씬 뒤에야 일어납니다. 철학적 사고가 가능한 범위에서 칸트-라플라스이론(역주 -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I.칸트가 1755년에 제창하였고, 약 40년 후에 P.S.라플라스가 《세계계도설(世界系圖說)》(1796)에서 전개한 태양계기원설)은 우리 지구의 이 최초 형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연구입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태양계의 모든 것이 탄생한 일종의 원형적 구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름의 회전에 의해 고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것들이 회전운동의 결과로 농축화되어 혹성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종종 이 과정을 실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같은 밀도의 액체에 기름방울을 넣고 간단한 기계도구로 회전시킵니다. 이 기름방울은 평평해지고 작은 입자로 분리되어 중앙의 기름방울 주위를 도는 기름방울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일종의 혹성계가 회전에 의해 탄생하는 과정의 축소판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암시적 영향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 과정을 이렇게 그려서는 안 될까요? 이 실험은 회전에 의해 혹성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그 형성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중 한사람이 또는 선생이 실제 회전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적인 예증으로는 어떠한 진실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우주도 무로부터 탄생하지 않습니다. 구름으로부터 우주조직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많은 영적 존재들이 그것에 작용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화 중 어느 시점에서 혼돈된 근원실질로부터 가장 미세한 실질을 끌어내 조잡한 실질, 즉 달을 방출한 것입니다.

 

프라라야 후 초기에 지구는 다시 모든 실질과 존재들을 연결 지은(붙들어 맨) 상태로 토성상태를 반복했습니다. 이 진화 초기의 지구는 종종 기체의 구로 잘못된 가정되지만 실제는 온기의 구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토성체현상태를 반복하고 있었고 현재의 토성영역까지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단계에서 그 단계에 관계하는 영적 존재들이 그 실질을 가지고 갑니다. 태양이 분리 될 때도, 고월진화기에도 영이 모든 것의 기반입니다. 외적요소는 여기서는 어떠한 책임이 없습니다. 일부의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내적 필요성이었습니다. 고차 존재들은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혼돈된 실질로부터 분리했습니다. 모든 곳의 외적 실재를 지배하는 것은 영성입니다. 최초로 지구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영적 존재들은 다른 진화단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연구 시에도 이점을 염두에 둡시다.

 

이렇게 해서 프라라야 뒤 처음에 지구는 토성상태를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온기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온기의 구는 기체상태로 응축되고 어느 시점에 도달하자 비로소 액체요소를 형성하여 고월상태를 반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의 지구상에서는 과거 월기에서 발생했던 일 반복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에서 분리되고 지구 + 달이 하나의 독립된 천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지구와 달의 실질과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시기까지는 지구와 달, 태양이 하나로 통합된 총체였습니다. 지구 +달은 인간이 더 이상 태양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탈된 것입니다. 만약 태양이 지구 안에 머물고 있었다면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늙어버렸을 것입니다. 우주의 존재들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진화단계에 있습니다. 제4기, 즉 지구기 진화 중 가장 중요한 특징에 관하여 말해두겠습니다. 보다 성숙한 존재들조차도 여러 수준의 단계에 속해있습니다. 태양의 급속한 템포나 지구의 느린 템포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태양과 지구, 달이 아직 합체되어 있을 때, 즉 분리이전에 이미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활동을 위해 스스로 자신들의 지배에 적합한 특별한 영역을 창조했습니다. 외혹성, 토성, 목성, 화성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토성체현을 반복할 때 우라노스, 발칸, 토성이 지구로부터 이탈했습니다. 태양체현을 반복 할 때는 목성과 화성이 분리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난 후에 수성과 금성이 지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태양의 분리 후에 지구는 달을 방출했습니다. 고월의 분산과 붕괴는 태양전체를 밖으로 끌어낸 진보된 존재들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한편 정상적인 존재들과 뒤쳐진 존재들은 그 주위를 그 주위를 도는 달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 밀의에서 이러한 사건을 하늘의 전쟁으로 불렀습니다. 이탈한 소혹성대가 바로 전장의 유적입니다. 악의 기원에 대한 근원적 비밀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합니다.

 

관여하고 있던 혹성령들은 태양이 지구로부터 이탈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활동에 적절한 토양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진화는 다양한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혹성의 공간적 위치와 운동 상태는 모두 이러한 존재들의 활동에 대한 표현이며 결과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혹성에 사는 영적 존재들의 진화단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능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태양을 따라 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존재들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단 태양이 스스로 지구로부터 이탈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 사건 후에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인간보다 훨씬 높은 진화단계에 있습니다.  금성과 수성이 바로 태양이 지구로부터 분리된 후에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우리 태양계의 내행성을 형성한 두 천체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이탈 후 어렵고 음울한 시대가 지구에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어둡고 심각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달과 함께 매어있는 동안 지구는 자신 안에 진화를 늦추게 하는 힘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방해하는 것이 달에서 주로 활동하는 힘들의 특징입니다. 이 시기에 이러한 방해하는 힘들이 지구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이러한 힘들과 관계한 채로 있었다면 생명은 올바른 템포로 자신의 경로를 따라가지 못하고 인간은 미이라가 되는 단계까지 고체화 되었을 것입니다. 지구는 기지(基地) 그자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기지에는 미이라화된 인간상이 늘어서있는 것입니다. 번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났을 때 생명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는 극심한 절망과 고체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이미 인간의 물질체가 그 영적요소에 의해 내버려지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물질체가 죽음과 더불어 그 영적요소로부터 버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과거 시대에 이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 혼적 존재의 이탈과 출현이 발생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육화가 일어나는 것과 바로 같습니다. 하지만 달과 지구가 아직 합체하고 있던 시기에 혼적 영적 존재가 다시 인체를 찾으려 원해도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혼적 영적 존재들을 수용하기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물질적 실질의 성질로 인해 이들의 몸이 황폐해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혼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몸들은 너무 황폐해서 이용할 수 없다. 진보할 아무런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예로써 하는 말이지만 알코올중독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다음 세대가 서서히 황폐해지고 하강하는 혼들이 몸을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것이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당시 지구 상황입니다. 이것은 달이 떠나기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아래에서 살수 있게 될 모든 존재가 때때로 고체화되고 각질화되고 시들고 미이라화되었습니다. 혼은 지상에서 자신의 진화를 위해 살게 될 몸을 덧없이 기다려야하는 시대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존재들은 당시 인간으로서 물질영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들은 태양으로부터 분리된  다른 천체로 즉 금성이나 목성, 화성으로 갔습니다. 정상적이었다면 지상에서 육화했을 이러한 존재 대다수가 스스로 화성, 목성, 금성, 토성 존재들의 보호아래 들어간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천체로 올라가 살았습니다. 가장 강한 혼들만이 완고하고 무지한 몸을 다루어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잘 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다시 지구에 돌아온 것은 최상의 혼 실질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완고하고 무지한 몸을 지배하는 그 힘이 가장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하에서 진화는 기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태양계에 속하는 가장 높은 존재들은 이제 새로운 수순을 취했습니다.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실질을 지구로부터 끌어내 분리시켰습니다. 달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 결과 후에 남겨진 힘들은 더 이상 그 진화를 억압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이 되서야 이 달이 오늘날과 같은 달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진화가 그 단계에 적합한 템포를 찾아낼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태양과 달의 두 힘들은 이제 외부로부터 지구에 작용하여 밸런스를 유지하게 됩니다. 지금 말한 시대는 오컬티즘에서 레무리아시대, 지구의 물질적 육화과정 중 달의 분리시대로 부릅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난 시대는 휴펠볼리아(?)시대로 부르고 태양과 달, 지구가 아직 하나였던 시대는 극지시대(極地時代)라고 부른다.

 

태양이 지구로부터 분리되고 달이 처음에는 지구에 경화프로세스를 만들고 이어서 지구를 떠난 그 시대 전체에 걸쳐 신성한 존재들이 분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중 가장 중요한 종자(從者)는 형태령입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능천사(能天使), 또는 계시의 영, 역천사(力天使)로 불리고 있습니다.

 

토성기에서 자신의 실질로부터 인간 물질체의 재료를 흘려보내는 희생을 한 존재는 좌천사(座天使), 의지령들이었습니다. 태양기에서 에테르체의 실질을 부여한 것은 주천사(主天使), 지혜령이었습니다. 월기에서 아스트랄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운동령, 권천사(權天使)였습니다. 지구에서 형태령, 능천사는 자아를 침투시켜 이 진화단계에서 자아가 서서히 지금까지 생성된 것, 즉 인간의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형태령의 활동입니다. 자아-인간이 자아의식의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데는,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의 조화가 탄생하는 데는 지금 말한 모든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구에서 태양과 달이 분리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고체화 작용을 받고 이어서 어떤 종류의 연화(軟化)를 경험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건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현명한 존재들이 진화를 위해 시련의 수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진구진화과정 중 많은 부분이 시련의 수단으로써 해당하는 신성한 존재들에 의해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지학운동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인간의 물질체 안에 살면서 오늘날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은 단계에 도달한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지고의 존재들이 19세기의 제3기 이후부터 일부 지혜를 유출시켰기 때문입니다. 고차 영역에서 우리의 문화로 유입되는 이 살아있는 지혜야말로 인지학운동의 실제적 기반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인간성에 의해 무시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들을 수 없게 된 귀가 있다하더라도 인간들이 지혜를 발아들일 준비가 끝날 때까지 노력해야한다고 스승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오컬티즘에서 이것은 인간의 성숙을 위한 시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차 존재들로부터 인간성에 지혜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그 지혜를 받아들일까하는 것입니다. 시련의 성공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시련은 이미 몇 번 존재했었습니다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성이 이 시련으로 성숙해짐을 이해하는 것은 한정적이었습니다. 수용할 수 있는 혼과 마음을 반듯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자아가 깊이 스며들 필요가 있을 때 그 시련은 과거에는 아스트랄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자아를 서서히 침투시키는 시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정할 필요가 생겨 그 조정은 달의 분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아, 그리스도원리의 주입이 처음으로 성취된 것은 레무리아시대 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 이것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달이 분리하는 동안 그리고 그 뒤에 지구는 거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오염되어 혼을 위한 주거지를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이러한 우주적 사건은 전설이나 무용담(saga)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오컬트탐사는 그 진정한 기원을 드러내고 달의 분리가 발생하는 동안 지구가 무인화되었을 때 많은 혼들은 우주공간을 향해 적합한 육화를 찾아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지구를 떠나 다른 혹성에서 몸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달이 결국 떨어져 나갔을 때 지구는 다시 적절한 몸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레무리아후기와 그 이후 아틀란티스시대에 여러 혹성으로 흩어졌던 혼들이 다시 지구상에 나타나 그곳에서 몸을 가지고 육화했습니다. 이제 인간집단이 지상에 형성되었습니다. 집단에 의해서 목성, 화성, 금성, 토성의 육화로부터 온 혼에 몸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혼들은 자신에게 적합한 몸을 찾아냈습니다. 이 혼의 집단이 ‘민족’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민족과 천체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해서 토성인, 목성인 등에 대해 말할 수 잇게 된 것입니다. 민족개념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정당성을 얻은 것입니다.

 

월기에서도 그리고 아직 달을 끌어안고 있던 지구에서도 다양한 진화단계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레무리아시대까지 지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달의 이탈 때문에 인간성 분화가 발생했습니다. 그로인해 민족개념이 발생하고 그 이후 어떤 종류의 의미를, 어떤 종류의 의미심장함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은 태어나고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입니다. 민족형성 시대는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를 포함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에는 민족이 남긴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8강 지구진화단계 : 레무리아, 아틀란티스, 후아틀란티스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0일

GA109 

 

어제 강연에서는 지구진화 중 레무리아기에 이르는 단계까지를 주제로 설명했습니다. 이 레무리아시대에는 위대한 우주적 현상, 즉 지구실질에서 달을 방출시키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간이 진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올바른 템포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지구는 형태와 온도가 지금의 지구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현대인은 거기서 살수 없을 것입니다. 서서히 지구는 농밀화되고 고체실질이 형성되었습니다. 어제 강연에서 몸이 ‘고체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은 물질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强度)와 질(質)에 관련된 의미로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 어떤 실질이 용해되어 있었습니다. 지구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였고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의 물질적 감각으로 단단하고 농밀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도와 질하고만 관계된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은 인간을 미이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힘들입니다. 지구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로부터 섬과 비슷한 형태가 나타났고 그곳에 사는 존재들은 현재의 동물이나 식물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레무리아시대 전반기 동안 인간 자체는 지구상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상 높은 곳에서 섬세하고 희박한(저밀도의) 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조성은 지금보다 훨씬 영적이었습니다. 레무리아 초기 인간은 아직 후시대와 같은 몸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보다 고체화된 양분을 섭취하지도 못했습니다. 실제로 레무리아기가 끝날 무렵이 되도 오늘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뼈와 같은 가장 농밀화된 형태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당시 인간이 가진 물질체의 실질은 아직 유연한 젤라틴 상태로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실질과 외적으로 거의 식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구로 너무 빨리 하강한 혼들은 이런 종류의 가장 농밀한 실질을 몸속에 받아들였고 그 결과 지상에 살게 된 사람들의 조성은 비영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여전히 지구상공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레무리아기에 비로소 미세한 재와 불-액체상의 금속덩어리가 만들어져 최초의 광물계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덩어리는 섬을 형성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해 보았습니다만 서서히 농밀화되는 과정이 영시력으로 이와 같이 나타납니다. 이 덩어리로부터 식물계가 출현하고 그 뒤에 동물계가 출현합니다. 물질계가 어떻게 농밀화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곁길로 빠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될  존재는 지구상공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좀더 에테르적이었던 이 영역 안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보다 섬세한 몸을 발달시켰습니다. 인간의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는 아직 물질체와 강한 관련성을 가지지 못한 채로 좀더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농밀화되는 물질체의 고체화와 더불어 물질체에 대한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연관성도 좀더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인간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습니다. 만양 그러한 영향이 없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랜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적자립이 없는 존재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고차의 영적 존재들이 가진 힘들에 의해 휩쓸려 다니는 수동적 존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존재의 힘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이 존재들 중 주로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진화과정에 뒤쳐져있었습니다. 이들이 루시퍼적 존재입니다. 그들이 바로 선하고 정상적인 진화를 이룬 영적존재들이 바라던 것보다 빨리 인간을 물질영역으로 끌어내린 존재입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원래 월기에서 그 사명을 완료했어야할 존재입니다. 그 당시 그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만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스트랄체가 월기의 인간이 가진 최고의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쳐진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월기에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아에 영향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월기에서 그들은 자아존재에 대해 몰랐기 때문입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결국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했지만 그 동안 인간 자신도 진보하여 자아를 받아들였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아직 자아에 작용하지 못했지만 고차존재는 그것이 가능했으며 아스트랄체에도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단 자아를 통해서, 자아를 경우해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고자존재는 아스트랄체에 집적 작용할 예정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월기에 이미 성취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고차존재들만이 자아를 통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하여 아스트랄체를 정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레무리아시대에 루시퍼적 존재가 온갖 방향에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직접 작용하여 그 결과 아스트랄체는 월기에서 완료되었어야할 모든 영향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충동, 욕망, 정열이 들어앉게 되었습니다. 고차존재만이 작용했다면 충동, 욕망, 정열은 인간의 숙명(운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들은 이러한 영향이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시퍼의 영향은 인간에게 2중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 번째 영향으로 이것저것을 하려는 열광의 불, 일종의 정열의 불이 인간 안에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열은 인간의 자아의 인도를 받는 정열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고차존재들의 영향을 받은 정열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루시퍼의 영향은 인간이 고차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악을 행하는,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주성, 영광, 자유는 루시퍼적 존재의 혜택이지만 악을 행하는 가능성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스스로를 침투시켰습니다. 기본적인 상황은 오늘날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들이 바로 한쪽에선 자유를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루시퍼적 존재에 의해 침투된 결과 인간은 미숙한 상태로 지구상공에서 지구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루시퍼적 존재에게 본질적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타락하고 미숙한 상태로 농밀화된 원인이 루시퍼적 존재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상공에서 좀더 오랜 기간 머물러있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 영역을 낙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신들의 영향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지구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로 대륙이 형성되고 있는 지구로 인간이 너무 빠르게 루시퍼적 존재에 이끌려 내려간 것입니다.  당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여전히 자기주변의 환경에 지금보다 대단히 큰 영향력과 대단히 큰 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아직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은 사악한 인간이라도 자연에 특별한 위해를 주지 못합니다. 단지 악한 의지를 품는 것만으로는 자연에 어떤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원시 레무리아시대는 달랐습니다. 인간 혼의 사악한 욕망은 자연 속에 눈에 보이는 마술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욕망은 지구상공과 지구에 어떤 불의 힘을 끌어들였습니다. 사악한 욕망과 마술적 의지를 통해서 인간은 광포한 자연의 힘을 해방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것은 불가능하지만 당시는 사람들이 사악해지면 공중에 불이 번쩍였습니다.

 

많은 인간이 어리석음과 지나치게 루시퍼적 존재의 영향에 굴복하여 악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레무리아가 가진 불의 힘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무리아는 미쳐 날뛰는 불과  대다수 민족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구원받은 인간들은 서쪽으로 현재의 아프리카와 유럽, 아메리카 사이에 존재했던 대륙 아틀란티스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성 진화가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됩니다. 인간의 수는 서서히 증가하여 폐허의 시대동안(달의 분리 이전) 목성, 화성 등에 가있던 혼들이 이 대륙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민족이라고 하는 개념이 고대 아틀란티스에서 탄생했습니다. 오컬티즘에서는 이전에 화성, 목성, 금성 등에 있던 혼들이 살고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아틀란티스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를 들어 화성인, 목성인과 같은 말로 불렸습니다. 이 때문에 몸의 외적 형태도 달랐습니다. 아틀란티스 전반기에 걸쳐 인간의 몸은 유연한 구성을 하고 있어 혼적 힘들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적 힘들도 본질적으로 오늘날보다 강력해서 서로 협력하여 물질체를 형성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아틀란티스인은 철도선로 같은 것도 쉽게 부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뼈 조직이 발달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물리적 힘이 아닌 마술적 마음의 힘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포 탄환 같은 것도 마음의 힘으로 튕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의 농밀화는 나중이 되서야 발달한 것입니다. 강력한 마음의 힘을 해방시켜 (이 상태에서는 물질체는 고차의 몸[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와 올바른 관련을 갖지 못하지만)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거나 던지거나할 수 있는 미친 사람에게서 당시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의 물질체는 아직 유연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용이하게 혼적 삶의 과정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 모습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틀란티스인이 멍청하다거나 관능적이었다면 그들은 물질 속에 함몰하여 거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좀더 현명한 인간들은 섬세한 조성을 발달시켜 그 모습이 작아졌습니다. 둔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거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외적 형태는 실질이 단단해진 지금보다 혼의 힘들로부터 훨씬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몸은 혼의 자질에 맞춰서 발달했습니다. 민족간의 커다란 차이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화나 전설에서 소인(小人)을 현명한 존재로, 거인을 멍청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심원한 오컬트 흐름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화성에서 혼이 지구로 하강했을 때 혼이 화성에서 가지고 있던 당시의 자질은 오랜 기간동안 혼과 혼이 거주하는 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실로 민족간의 차이와 민족적 특징을 해명할 수 있습니다.

 

루시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틀란티스 중기까지 인간성 진화가 진행되었다면 인간은 높은 영시력이 침투된 영상의식을 발달시켰을 것입니다. 이 힘을 통해서 혼 안에 외적 세계를 내적 영상으로 계시하는(드러내는) 무엇인가가 탄생했을 것입니다. 눈을 사용해서 외적 사물을 지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초기 단계에서 루시퍼의 영향을 받은 결과 잘못된 모습으로 물질계를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베일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신적 영적 존재들이 인간에게 부여하려했던 진화과정은 인간이 지신의 내적 세계를 영상으로 지각하는 몽롱한 영시의식 대신에 외부세계를 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갖 물질적 사물의 배후에 존재하는 영성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질계 배후에 존재하는 영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감자기란 말을 사용했지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 과정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것이니까요. 인간은 각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적 세계는 갑자기 사라지고 그 세계를 발생시키는 영성 의식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볼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것들의 원천이 되는 영성도 보았을 것입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인간을 너무 빨리 끌어내렸기 때문에 인간은 외부세계로부터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인간에게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물질을 통해서 세상의 근원이 되는 영적기반까지 통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 안으로 너무 빨리 하강했기 때문에 물질의 농도가 인간에게 너무 짙었고 물질에 침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틀란티스 중기이후에는 다른 뒤쳐진 영적 존재가 물질에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물질은 구름이 낀 것처럼 탁해져 인간은 더 이상 영성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리만적 , 메피스토텔레스적인 존재였습니다. 메피스토텔레스, 즉 아리만은 루시퍼와 다른 존재입니다. 진리에 반대하는 아리만을 짜라투스트라는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리만은 인간의 순수한 영성에 구름을 덮어 인간으로부터 영성을 숨겼습니다. 아리만은 루시퍼의 뒤를 쫓아 물질은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환상을 인간에게 주입했습니다. 신적-영적존재가 인간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원했던 그 진화기간 동안 인간은 2개의 다른 영향에 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내적 성질, 아스트랄체를 공격해 인간을 혼란에 빠지게 해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존재가  루시퍼. 외부에서 작용하면서 인간을 어느 정도 속여 외부세계를 인간에게 마야(maya), 즉 물질로 보이게 하는 존재가 아리만입니다. 우리는 루시퍼를 인간의 내부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이해해야합니다. 한편 아리만은 영성에 베일과 같은 물질을 펼쳐서 영계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들 두 영적 존재가 영성을 발달시키려는 인간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아틀란티스대륙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은 주로 아리만의 영향이었습니다.

 

레무리아기에는 인간이 마술적 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면 불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인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한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인은 의지의 힘으로 깊은 비밀이 숨어있는 배아(胚芽)의 힘-공기와 물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서 제어하는 기차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인간이 석탄에 포함되어있는 힘들을 이용하는 방법, 이 힘을 구동력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은 인간이 석탄의 비생명적인 광물력을 제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틀란티스인은 종자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 그 자체를 제어한 것입니다. 대륙에 나무의 새싹을 트게 하는 생명력을 생각해 주십시오. 이 생명력을 아틀란티스인은 종자로부터 추출하여 이용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이 ‘바람의 배’를 보유한 창고에 오늘날 석탄을 준비하듯이 막대한 양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종자로부터 축적된 힘을 사용하여 그들은 탈것을 구동시켰습니다. 영시자가 그 시대를 뒤돌아보면 이러한 탈것이 지상 가까운 어느 정도까지 농밀했던 공중을 떠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종의 조정 장치를 갖추고 상승하거나 이동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은 이러한 힘들을 제어했습니다. 지금은 식물의 힘-식물의 혼적 힘-이 공기와 물의 힘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고 그대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틀란티스인의 의지가 악으로 기울어 이러한 힘들을 자기중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자 그들은 공기와 물의 힘을 해방시켰고 그 결과 아틀란티스는 멸망했습니다. 대륙은 엘리멘트와 함께 인간을 통해서 탄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리만의 영향이 서서히 강해져 그 결과 인간은 영성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의 배후에 인간은 광물요소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술적 힘은 점점 더 인간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틀란티스시대에 인간은 식물계의 힘을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레무리아시대에는 동물의 생식력을 제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 레무리아인은 동물의 생식력을 응용하여 동물형태를 인간형태로 변태시키는 시점까지 도달했습니다. 생식력을 사용하여 인간이 행한 모든 마술적 행위가 불의 힘을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한 의지가 악으로 향하자 최악의 흑마술적인 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도 흑마술사가 인류에게서 멀어진 힘을 오용한다면 지상에 가장 사악한 힘이 해방되게 됩니다. 이러한 힘들은 강력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이 힘들은 그에 알맞은 지도자의 현명한 손으로 인류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가장 순수한 봉사에 사용될 힘입니다.

 

이제 서서히 인간은 자유로이 몸을 형성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골과 골격, 단단한 조성물이 주입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점점 비슷해졌습니다. 지금 말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틀란티스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연구자들이 고대 아틀란티스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태고의 인간진화 흔적을 발견하고 싶다는 학자들의 바람은 헛되게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간은 사지가 부드럽고 연약한 실질로 이루어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몸은 보존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연체동물인 문어의 흔적이 백년 정도 지나면 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동물의 화석이 지금도 발견되는 것은 동물 먼저 고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조성은 유연했습니다. 동물은 물질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빨랐습니다. 기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되는 것이 너무 빨랐던 초기 인간부터 가장 퇴화된 인간형태가 탄생했습니다. 가장 고도화된 인간은 지구상공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면서 유연한 상태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물과 같이 경화 단계에 머물러 버리게 하는 시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동물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에 경직화와 고체화의 단계에 머무른 것입니다.

 

진구진화 중 물의 힘이 해방되어 고대 아틀란티스가 멸망하는 시점까지 설명했습니다. 아틀란티스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중 한 무리는 아메리카로 다른 무리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이와 같은 대이동은 오핸 시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대아틀란티스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초기 사람들은 강력한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힘으로 인간은 종자의 힘을 제어하여 자연의 힘을 지배하였으며 아직 어느 정도 영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시력은 서서히 퇴화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지상에 속하는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진정한 의미로 지상으로 하강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틀란티스말기에 사람들과 민족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우선 아틀란티스문화 절정기에 견자, 영시자, 마술적 힘을 사용하여 영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현재 인류의 모태가 되는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 안에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배아상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고대 아틀란티스인의 위업에 비견할 수는 없었지만 지성과 판단력을 준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초적 계산, 계량, 분석 등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지성의 배아를 발달시킨 사람들로 강력한 아리만적 영향으로 인해 마술을 오용하는 것이 이미 위험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티스의 마술사가 계속 사용했던 마술적 힘에 더 이상 손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경멸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그룹으로 집회를 갖는 오늘날 인지학회원이나 카타콤에 모였던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과 비슷했습니다.

 

아틀란티스에는 문화와 의례의 중심지 [center]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틀란티스 신탁이라고 부릅시다. 그곳에서 아틀란티스의 지혜를 축적하고 실천했습니다. 하강했던 혹성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인간의 혼적 차이에 맞추어 서로 다른 조성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신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성신탁, 목성신탁, 금성신탁 등과 같은 신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신탁은 어느 정도 수준의 현자들인 비의입문자가 화성민족, 목성민족 등 각각의 민족을 지도하는 성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탁들은 이들보다 훨씬 강력한 태양신탁의 지도하에 있었습니다. 이 태양신탁이 바로 다른 모든 신탁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밀의(密議)의 근본적인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화성인이 이 고차적 지도하에 있었지만 동시에 화성신탁의 비의입문자가 제자들과 함께 거쳐하는 센터의 지도하에도 있었습니다. 수성신탁이 모든 수성인을 인도하고 목성신탁이 목성인을 지도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이들 모든 신탁센터는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들의 권위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틀란티스의 가장 위대한 비의입문자인 태양신탁의 위대한 지도자는 앞서 설명한 고대아틀란티스의 일반인과 달랐던 인간무리(이방인)를 특별히 주시했습니다. 그들은 멸시받는 더 이상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비의입문자가 결집시켰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원시적 형태이기는 하나 새로운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외에 없었습니다.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미래를 만들어나갈 소재(이방인)와 과거 습관에 대한 아집을 버린 옛 비의입문자나 마술사를 결집시켰습니다. 현재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아틀란티스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재 유행하는 문화형태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도 물질적인 것을 다루는 마술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위해 일하기 원하는 멸시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틀란티스에도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인 고대 마술사는 새로운 능력을 발달시킨 소수의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고대 아틀란티스에서 그러한 능력은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긍지 높은 현대문화의 기득권층은 인지학자들을 소수의 사람들이 변변치 못한 모임에서 온갖 종류의 어리석은 활동을 한다고 깔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입니다. 타인의 눈에는 무의미하게 비쳐질 능력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이들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아틀란티스에서는 물질세계와의 관계성을 찾나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의 사명은 다시 영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고대의 비의입문자가 한 장소에 동료들을 모아서 소박하고 경멸받던 사람들에게 외쳤듯이 오늘날에도 이번에는 또 다른 상황 하에서 장소 같은 건 상관없이 인류에게 영적 지혜의 보물을 전해주는 위대한 지혜의 스승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울리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득히 먼 옛사람들이 했던 것과 같이 이 부름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부름에 대답했던 사람들은 원시적 계산능력을 내부에 가지고 있던 개아들이었습니다.

 

이 지혜는 신지학의 가르침(doctrine)을 이성으로 파악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도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인간은 강해지고 왜 신지학이 오늘날 존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지학이 존재하는 것은 진화라는 위대한 도전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온갖 장애를 정복할 수 있는 강인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지학을 통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영성에 이르는 길을 가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반듯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태양신탁의 그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소수의 인간들을 이끌고 아시아에 문화의 중심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후 아틀란티스문화의 기초를 만들 수 있도록 인간들을 지도했습니다. 대이동이 일어나는 동안 아틀란티스에서 태어난 자들은 모두 뒤섞였습니다. 그러므로 후 아틀란티스문화기에 민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문명문화에 대해서만 말해야 됩니다.

 

후 아틀란티스문화기 문명의 흐름을 고찰해봅시다. 후 아틀란티스 제1문화기는 고대인도문화입니다. 아틀란티스 붕괴 후 많은 뒤섞인 인간무리가 아틀란티스로부터 벗어나 원시 인도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살게 된 인간들은 영계에 대한 가장 깊고 압도적인 동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계에서 태어나 이제는 영계를 잃어버렸다고 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7명의 성인(리시)를 보냈습니다. 고통에 찬 그리움으로 고대 인도인은 감각세계는 실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내려온 영계만이 유일하고 진실한 세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이 태초의 지혜에 대해서 설교하고 비밀의식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고대 인도인에게 있어서 물질계는 마야(Maya), 거대한 환상이었습니다. 후 아틀란티스 제2문화기, 고대페르시아 문화기에는 이미 이전과 다른 혼적인 자세가 우세했습니다. 이 훌륭한 세계는 완벽한 법칙에 따라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침투할 가치가 있다고 서양적 사고와 물질계 연구로 깨닫게 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이해에 대한 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고대 페르시아인과 인도인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도인에게 주위의 모든 것은 마야, 즉 환상이었습니다. 영계만이 실재이며 귀의할 가치 있는 목표였습니다. 그 세계만이 고차의 자아에 의해 침투되었습니다. 이러한 혼의 자세는 물질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물질계의 지배가 처음 가능하게 된 것은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의 제자, 짜라투스트라가 창시한 문화에서였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외부세계가 마야가 아닌 신적-영적실재를 표출하고 있으며 외부세계의 배후에는 아리만이 인간으로부터 감춘 것이 있음을 알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세계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짜라투스트라의 목적은 물질계에서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르무즈드(Ormuzd)와 아리만의 빛과 어둠의 싸움이 나타났습니다.

제3기 이집트-칼데아-아시리아-바빌로니아 문화기에는 이미 인간은 물질계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펼쳐진 별의 위치를 들여다보고 인간에게 계시하는 신들의 행위와 지혜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칼데아의 제례에 나타난 훌륭한 별에 대한 지혜는 이러한 의도를 보여주는 머나먼 기억입니다.

 

제4기 그리스-로마문화기는 인간을 바로 물질영역까지 이끌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물질영역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원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영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것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저승의 왕보다 이승의 거지가 낫다”는 말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훌륭한 조각과 로마의 시민권은 제4문화기의 특징입니다. 제5문화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의 특징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은 유물주의와 백화점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모든 문화의 목적은 물질영역이 서서히 인간의 지배 하에 놓이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문화에는 2가지의 기본적 흐름이 있습니다. 동양세계와 서양세계의 감정적 견해와 흐름이 현재 대치하고 있습니다. 동양세계는 물질영역을 마야, 즉 환상으로 부르고 사고, 행위, 감정 모두에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양 세계관의 기본적 목적은 이 물질계에 침투하여 그것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상황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세계는 각각 완전히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은 외적문화에 관여하여 이 방법으로 혼의 힘을 개발시키게 하고 동양은 자신의 길을 가게 하지만 양쪽은 정상에 만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도인은 내적 영적 삶을 영위하면서 외적 물질계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페르시아인은 물질에서 어떤 유한한 것이 있음을 보았지만 그래도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집트인은 영성과 그 법칙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칼데아인은 별들의 운동과 공간에서 신들의 법칙을 보고, 별의 지혜를 신적-영적존재들의 표출로 경외했습니다. 그리스인은 물질 그 자체에 자연이 창조한 것의 아름다움과 완벽한 이상을 새겨 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이 만든 물질적 예술작품은 경탄해야할 영과 물질이 결합한 시대를 구체적으로 나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은 오컬트적 배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수와 아름다움과 위용을 자랑하는 그리스건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실제로 신의 거처입니다. 이와 같은 건축 조각 작품과 다른 시대의 작품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신전은 순수한 형태로 건축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 선의 완성도는 최고의 것으로 다른 것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혼이 이러한 선에 침잠한다면-그것은 파에스툼의 신전유적에서도 아직 보입니다- 만약 혼이 도리아식 또는 이오니아식 신전을 깊이 생각하고 공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혼은 이러한 선이 공간에서 어떻게 통합되어 있는지 지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흐름, 어떤 물결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신전은 반듯이 이러한 흐름이 통하는 길(이치)에 따라 물질적 실재 안에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인은 공간에 그가 실제로 그곳에서 찾아낸 것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본질적 비밀은 그 안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앙 깊은 신자의 집회가 고딕성당의 통합부분인 것에 비해 그리스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총체입니다. 뾰족한 아치와 창을 가진 고딕성당은 신자 집단이 함께 존재해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손은 기도로 합쳐지고 성당 형태의 거울이(성당의 형태는 거울이) 되고 성당과 하나가 되어 총체를 이룹니다. 한편 정신성이 실제 그리스신전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존재가 하강하여 거처할 장소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걸출한 예술작품으로 대지를 숭배하는 방법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더 영계와의 관계성을 상실했습니다. 물질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광휘와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리스-로마시대에 죽음을 통과했을 때 인간에게 있어서 영계는 황폐하고 차갑고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후 아틀란티스기에 인간은 물질계를 정복했습니다만 영계에서는 비탄과 우울함이 인간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인류의 스승인 비의입문자들 조차도 위로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죽음과 탄생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계에서의 사건들을 얘기하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비탄에 잠겼습니다. 존재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이미 빼앗긴 물질세계를 계속 고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골고다사건을 통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지하세계로 하강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옥순례’입니다. 더 이상 물질체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스도는 생(삶)이 죽음에 승리했다고 알렸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의해서 다시 혼들이 영계로 상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9강 인간의 사후경험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1일

GA109 

 

현재는 과거와 과거 사건을 조명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듯이 아득한 태고시대를 회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우리자신의 정신적 이상의 특징을 쉽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고대 아틀란티스의 붕괴 후 일어난 발전과 그 발전과 관련한 인간의 사후생에 대한 경험을 고찰해봅시다.

 

죽음과 탄생 사이에 혼이 경험하는 상황은 반듯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진화 과정과 함께 그것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성인시대, 고대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문화시대, 이집트-칼데아문화기, 그리스-로마문화기, 그리고 현대문화기와 같은 대문화기에 인간은 물질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점점 더 물질에 대한 애착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시대마다 인간의 혼은 물질영역으로 점점 더 깊게 하강했습니다. 이 세계(물질영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후의 인간은 영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로마기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물질계를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혼은 훌륭한 예술과 물질존재의 그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여 기쁨에 넘쳐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계는 로마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아 ‘나’의 발견으로 자신의 개성에 대한 감정이 충분히 발달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의 최대 특징은 로마시민권과 사법개념입니다. 로마인은 물리적 세계를 쾌적하게 느꼈습니다. 이 시대이후 권리개념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법개념이 로마시대에 시작되었다는 말은 옳습니다. 이것은 개개의 인격에 대한 외경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아킬레스의 “저승의 왕보다 이승의 거지가 낫다”는 말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후 영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혼이 경험하는 것에 관한 개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 혼이 지구영역에서 모든 능력을 완전히 꽃피울수록 사후 영계에서 자신의 행동을 찾아내는 능력은 점점 더 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혼은 자신이 방금 들어온 영역에서 고립을 느꼈습니다. 영의 나라(데바찬) 조차도 혼은 주위의 모든 것이 어둡고 공허하며 차갑게 느꼈습니다. 혼은 저쪽 세상의 영성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인 비의입문자들조차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들에게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면 혼들은 그토록 사랑했던 물질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더욱더 고통을 느꼈습니다. 스승들은 죽은 자에게 도움 되는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을 단 하나라도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모두 그저 부질없이 재육화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형제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영의 영역에서조차 버려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지상에서도 사랑과 우정이 점점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영역을 여행한 혼이 물질세계에 에고이즘을 가지고와서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인도기에 인간은 여전히 지상세계를 마야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진화과정과 더불어 상황은 변화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물질세계의 인간도 영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고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빛을 동반한 태양은 그가 아후라마즈다, 위대한 오라라고 부른 신성한 영적존재의 외적 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길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목적은 이 존재가 지금은 아득한 저편에 존재하지만 언젠가 지상에 내려와 그 실질자체와 결합하여 인간성 진화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고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성은 물질적인 것, 사물로 보이는 모든 것에 존재하고 있다. 위대한 태양의 오라, 아후라마즈다가 물질적인 것에 침투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리만이 방황의 원흉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 속에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분은 너무도 위대하고 너무도 굳세고 믿음직스럽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기뻐하며 그분에게 나를, 나의 생명을, 내 감각적 에테르존재를, 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바칠 것이다.”

 

이 소원이 바로 위대한 짜라투스트라의 소원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저 위대한 태양령이 직접 지구에서, 지구적 존재들의 실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와 같이 짜라투스트라는 물질적인 것은 겉모양, 즉 정신성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가 미리 만난 존재가 불타는 초목 가운데서, 또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태양존재를 ‘자아존재’, 인간에게 주입 될 최고차원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태양령의 일부가 하강한 곳은 인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자연과 외적요소 도처에 하강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이름으로 모세가 알린 신은 과거에 짜라투스트라가 아후라마즈다로 전한 그 신이었습니다. 가장 중심적인 핵심, 모든 존재의 근본적 기반으로 나타나는 신을 모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고의 존재로 가르쳤으며, 그 이름은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제의를 담당하는 사제가 가장 중요한 지성소에서만 발설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내부에 살면서 여러 요소(엘리멘트) 안에서만,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만 스스로를 계시하는 신, 이 신이 모세에 의해 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짜라투스트라를 여호와의 예언자로, 우리가 시대를 구분하는 처음에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3년간 살았던 그 존재의 예언자로 간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짜라투스트라가 전한 신은 같은 신입니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다른 이름으로 구약성서가 앞서서 전한 같은 신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상의 현상들이 효력을 나타내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태양존재는 영계의 높은 곳에서 하강하여 요소(엘리멘트)를 통해서 시나이 산, 불타는 초목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그는 점점 더 가까이 지구로 접근하여 요르단강 세례 때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지상에서 골고다의 성례가 일어나고 속죄양의 상처로부터 피가 흘렀을 때, 이것은 위대한 우주적 현상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의 현상들 중 가장 위대한 현상의 표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구의 오라에 지구령으로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새로운 충동이 전해졌고 영시를 통해서 이것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피가 흘러든 순간) 지구의 오라는 변했고 특정한 색을 띄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색이 나타났고, 새로운 힘이 지구의 오라에 흘러들었습니다. 자아의 물질적 표현인 피가 골고다의 구세주의 상처에서 흐른 순간,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자아는 지구와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후의 혼이 경험하는 영계의 상황 또한 변화하는 그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옥하강(지옥순례)의 의미입니다.

 

골고다의 성례 이전에 살았던 영시자는 지구의 오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에서 죽음을 통과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살펴봅시다. 유대교 신비주의 입문자였던 사울은 ‘위대한 오라’, 아후라마즈다가 언젠가 지구와 결합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 존재가 말도 안 되게 굴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 위대한 영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지상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구의 오라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영,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본 것은 그가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영시력을 얻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지구의 오라가 변한다고 예언은 말하고 있다. 지금 그것이 일어났다.” 이 때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총에 의해서 영시력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은 미숙한 탄생이었습니다.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질에 그렇게 하강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체와의 연관성이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인격은 바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만큼 기독교의 번영을 위해 전력을 다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의 개종은 오컬트적 사실, 오컬트적 사건 덕택입니다. 그 영시체험을 통해서 그의 인간성이 그리스도로 인도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골고다의 성례 이후 지구의 오라는 변화했습니다. ‘나의 빵을 먹는 자는 나를 밟고 간다.’(요한복음 13장 26절)는 요한복음의 말은 이렇게 성취되었습니다. 이 이후 그리스도는 지구령, 혹성령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의 거처는 지구입니다. 성요한의 이 심오한 말은 반대의 의미, 그리스도를 배반할 유다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여호와와 지구와의 관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컬트탐사자가 사후 인간이 들어갈 세계에 대해서 그리스예술과 그리스도교 후 예술이 주는 영향력을 비교하면 지금도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시자가 육안으로 도리아식의 기둥을 가진 그리스신전, 예를 들어 파에스툼 유적을 본다면, 영적 방향선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이 조화로 인해 실제 신의 거처가 된 신전의 형태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혼이 자신에게 적합한 몸에 끌리는 느낌이 들듯이 바로 그와 같이 신은 그 성질과 존재와 완벽한 조화를 나타내는 신전의 형태에 하강합니다. 하지만 영시자가 그 신전의 영적 대응에 눈을 돌리면 그는 영계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영시자가 그리스도교 이후의 예술작품을 명상하면 예를 들면 성요한의 복음서나 그리스도-여호와와 관련된 구약 신약 성서의 한 구절,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같은 창조물을 견자가 처음에는 육안으로 그리고 영시력으로 관찰하면 이러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지 않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창조물들은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성요한의 복음서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이 창조물의 위대함이 최초로 이해된 것은 영계에서입니다. 골고다의 성례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최초로 빛을 발하고 명료하게 되는 곳은 영계인 것입니다.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피가 흘렀을 때 물질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동시에 어떤 영적 상징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떠났을 때, 골고다에서 숨을 거둔 그 순간에 그리스도는 영계에서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삶을 살고 있는 혼에게 나타났고 어두움은 약해졌습니다. 영계에 갑자기 빛이 넘쳐흘렀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한줄기 빛이 들어와 갑자기 방안의 물건이 눈에 보이듯이, 항상 존재했지만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처음 보게 된 것처럼 빛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있던 혼들은 다시 주위의 존재들을 지각하고 영의 영역에서 다시 형제들과의 연관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질계에 사랑과 우정의 덕성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빛이 죽은 자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골고다의 성례는 물질적 세계뿐만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세계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영계가 그리스-로마시대에 죽은 자가 경험하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만약 인간의 혼이 당시 지배적이었던 얼음 같은 한기와 고독 속에서 머물렀다면 우정과 사랑은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인간은 데바찬에서 은둔하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 때 지상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로 흘러들은 빛은 지상에 사랑과 우정의 왕국을 확립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골고다의 성례와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흐른 피의 비밀을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봅시다.

 

지구상의 인간이 월기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인간의 위한 3개의 저차의 몸, 즉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가 준비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자립의 표출인 자아가 처음 덧붙여진 것은 지구기입니다. 고대에는 인류의 동질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어떤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는 물질적 기반이 주어져야 비로소 존속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피는 자아의 표출입니다. 혈연관계와 피의 인연이 지배원리였습니다. 육체의 피가 인간과 인간에게 작용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대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은 비물질적인 관계성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집단자아적 활동은 쇠퇴했습니다. 옛날 인간은 공동체의 종족자아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으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긴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혈연관계는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 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인간의 고차자아는 혈연관계의 관계성 안에 존재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노아나 다른 족장들이 몇 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시대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아득한 몇 세대 전까지 다다르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당시 인간은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고 저 먼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삶은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상이 경험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이것저것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끊임없이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은 것도 이 피에 기초한 사랑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을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과 탄생 사이의 인간에게조차 자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수호자인 신성한 존재들은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혈연에 기초하지 않는 관계성을 통해서 자아를 연결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루시퍼다. 진정한 빛을 가져다주는 자이다.” 그래서 타락한 루시퍼의 적수가 되는 것입니다. 피에 기초한 사랑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신적 사랑으로 변용되었으며 혼으로부터 혼으로 흐르는 형제애로 변용되었습니다. “부모와 형제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은 피에 기초한 사랑이 동일한 정도로 모든 인간을 포용하는 형제애로 변화되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과학은 성서의 말을 무엇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과학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총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러한 말이 풍성해집니다. 정신적 사랑의 힘은 처음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났을 때 그리스도에 의해 혼에게 전해졌습니다. 골고다에서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흐른 피로 인간성의 과다한 피가 희생된 것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 개아는 다른 개아를 형제로 대해야한다는 가르침이 확립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아직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인류는 우선 이 강력한 우주적 현상의 위대함을 이해해야합니다. 소수의 개아가 그리스도와 지상으로의 현현에 대한 의미의 전모를 항상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을까요? 오랫동안 영계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인간과 그 집단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고대 인도인은 물질계와의 관계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초감각적 원리와 영계에서의 지고한 정신생활을 획득하는 데에 열심이었지만 물질존재를 사랑하는 소망은 없었습니다. 어느 동양의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원리가 동양에서 얼마나 막연히 파악되고 있었는지를 실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와서 우리의 지구를 지도하는 힘이 나타났다.’ 이 동양의 전설은 부처의 지혜에 귀의한 제자에 의해 북티벳의 사원에서 설파되어 그 이후 그곳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동양전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의 최고 제자 카샤파(迦葉)는 동양에서조차 그리스도지혜에 대한 이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동굴에 들어가 그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륵불이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서 그 때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그의 사체는 그 동굴에 보존되었습니다.

 

이 전설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특별한 현상이 없었다면, 즉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동양도 서양도 영계에 이르는 길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카샤파의 몸은 미륵불이 사체를 지구로부터 해방시킬 때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에 인간이 지상적인 것을 다시 영화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샤파의 몸을 다시 영계로 이끌 존재는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났고 깊이 하강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카샤파의 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대 이후 카샤파의 몸은 더 이상 동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그 몸이 즉시 영계로 들려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카샤파의 몸은 불의 요소 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불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다마스쿠스에 당도한 바울이 본 불은 이미 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지상출현은 물질계에서 영계로 인간이 다시 상승할 수 있게 한 커다란 전환점입니다.

 

그럼 부처의 가르침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늙음, 질병, 죽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고통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탄생을 바라는 욕망, 육체적 환생을 원하는 욕망을 없앰으로써 고통을 끊어버릴 것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쳤습니다.

 

자 이제 600년 후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하나의 시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죽어서, 그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가져다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명이 죽음과 싸워 이긴 것입니다.

 

1. 태어나는 것은 고통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지구에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태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2. 질병은 고통일까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위대한 치료제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충동, 불붙은 혼의 힘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그리스도충동과 연결시고 자신의 삶을(생명을) 영화시킵니다.

3. 늙는다는 것은 고통일까요? 인간의 몸이 허약해진다 하더라도 내부의 진정한 자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건강하게(왕성하게) 됩니다.

4. 죽음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 육체적 죽음이 생명에 의해서, 영성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결국 생명에 의해 극복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하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과 탄생 사이의 세계에 빛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있습니다.

6.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오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7.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맺어지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를 인정한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그리스도의 덕을 따라 모든 존재와 모든 사물을 포용하는 보편적 사랑에 불을 밝힙니다.

8.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이별, 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처가 가르친 고통이라고 하는 병을 고치는 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인간성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위의 시신에 귀의하는 이 전환이야말로 진화상 지금까지 발생했던 가장 위대한 변용입니다.  

 

 


제10강 카르마, 재육화, 비의입문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2일

GA109 

 

아틀란티스인은 의식적으로 영계와 가까웠고 인간은 영계에서도 낮 동안의 의식을 경험했다고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물질계에서는 밤의 의식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후 아틀란티스시대의 인간성 하강을 하나하나 쫓아왔습니다. 다양한 문화기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출현한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인 제5문화기를 연구해봅시다. 오늘날 사람들의 지성은 물질영역에만 향해있기 때문에 인간성이 다른 문화기에 비해 훨씬 깊이 물질계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유물주의는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일에만 안중에 두고 지력(知力)과 그 활동을 경이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과 같은 것은 현대를 특징적으로 대표하는 결정체입니다. 현대문화는 물질적 욕구에만 쓸모가 있으며 그것도 일찍이 없었던 최상의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다양한 운동으로 현재 표출되고 있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균열이 이처럼 크고 넓은 이유는 오컬티스트에게 명백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투쟁은, 그 싸움아래 예술 또한 고뇌하고 있는데, 문화수준이 쇠퇴하면 반듯이 명료해집니다. 오늘날 과학에서 이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유물주의로 좋든 싫든 추상적 사고형태에 잡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철학은 그것보다 선행하는 존재를 가지고 있으며, 변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철학적 사고가 (그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입니다.) 탄생하기 전 당시 알려진 종류의 지식은 밀교에 포함되어있던 지혜로부터 유출된 것입니다. 이 지혜의 원천은 혼의 내적체험으로 세계현상의 비밀이 드러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인간의 혼이 고대의 직관적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혼의 감각적 지적 분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철학자들은 여전히 내적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비전을 통해 또는 전통을 통해서 고대의 밀교적 지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것을 당시 발달과정에 있던 지적능력으로 응용했습니다. 영시력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가진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논리를 창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사고의 기술을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중세 사상을 지배하였고 스콜라주의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식과 신앙 사이에 서서히 심연을 향한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성과 그 심적 기술 그리고 초감각적 진리 사이에 단절이 발생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이 단절은 절정에 이릅니다. 칸트와 그의 철학에는 유물주의적 사고가 이끄는 하나의 막다른 골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칸트는 근대철학 총체를 번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 탐사자가 현대과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를 화석화시키는 길로부터 멀어지는 좁은 길에 빛을 비추기 위해 그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해결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 문화의 3분야가 다시 결합하여 서로를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가 발생해야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영의 생명이 흘러나와야합니다. 이 결합을 성취시키는 것이 서양 영과학의 사명입니다. 영과학은 신앙과 지식의 조화를 확립해야합니다. 이 두가지 측면을 혼은 더 이상 자기 내부에 결합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물세계에서도 영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성이야말로 물질적인 것들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자랑하는 프라그마티즘은 정신성에 관한 유물주의적 개념을 가진 의사정신성(疑似情神性)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도 어느 정도는 유용한 철학입니다.

 

우리시대는 유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 산물이라고 간주하는 영성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에 원인이 있다고 여겨지는 병리학적 징후는 영성이 물질성의 사악함에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성은 물질 내부로 하강할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물질 안에서의 경험을 모은 후 다시 상승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 육체적 인간과 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물질체에는 오늘날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 기관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들 기관은 과거의 기관입니다. 그 유물을 우리는 아직 몸속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기관이 되는 기반도 몸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변용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 중 대표적인 기관이 심장입니다. 심장은 횡문근(가로무늬근, striated muscle : 골격근 및 심근과 같이 근섬유에 가로무늬가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장은 유물과학에게 악몽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것은 평활근(민무늬근, smooth muscle : 근육 중에서 가로무늬가 없는 근)뿐만 아니라 횡문근으로도 만들어져 있는 불구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횡문근은 인간의 모든 수의기관(隨意器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생각지도 못하겠지만 현재 심장은 미래 기관으로 인간 안에서 수의기관이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오늘날 비의입문자들은 이미 이 기관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후두(喉頭 , larynx : 기도(氣道)의 상단에 있는 판상기구(瓣狀機構)를 가진 중요한 발성기관)도 미래기관으로 생식의 깊은 비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춘기의 변성기에 이것을 나타내는 부분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먼 미래에 인간은 자손을 ‘(소리로)내보낼’ 것입니다. 후두는 창조기관입니다. 미래의 인간성은 혼이나 영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영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몸의 변용에 좀더 의식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영화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세계관을 몸에 지님으로써 이러한 미래의 과제에 정면으로 맞설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이 영광스런 진화의 동반자라는 감정이 우리를 행복과 활력으로 가득 넘치게 해야 합니다.

 

카르마와 재육화라고 하는 2개의 위대한 우주법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월기에서는 아직 이러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재육화과정은 자아가 지구에 심겨졌을 때 비로소 탄생했습니다. 즉 레무리아 중기부터 아틀란티스 중기에 자아가 지구에 심겨졌을 때 처음으로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자아가 집단혼으로 존재하는 동물은 오늘날에도 재육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종과 그에 속하는 자아와의 관계는 아스트랄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자의 집단혼의 경우, 물질계에서 사자 한 마리의 죽음은 여러분이 손톱을 자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자는 처음에는 아스트랄구조로 집단혼으로부터 실처럼 매달려있습니다. 이것이 물질영역으로 하강하여, 농밀화되고, 각각의 사자가 죽음과 함께 이 라이온의 성질은 다시 아스트랄영역으로 돌아갑니다. 집단혼은 그것을 손발처럼 다시 오므립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혼은 같은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의 혼은 당시 그 집단혼의 구성요소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듯이 혼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가슴속에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재육화와 카르마는 레무리아시대에 처음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언젠가 그 가치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영원히 영계로 들어가 그곳에서 계속해서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우애의 충동을 발달시킨다면 민족의 부흥은 멈추고 극복될 것입니다. 제6문화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합하고 제어하는 방법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의 개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 물질적 고찰에 따라 삶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 기반에 입각하여 삶을 판단할 것입니다. 고대 인도를 반영하는 제7문화기는 다시 한번 카스트제도가 생기겠지만 그 문화는 자주적으로 생성될 것입니다. 진화과정의 변화는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착실히 멈추지 않고 진보하고 있습니다. 지구진화의 중기에 속하는 아틀란티스시대는 인간의 물질체에 자아가 완전히 침투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것(자아의 침투)은 지구에서 달이 방출된 후 레무리아시대 중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성은 계속해서 진화했으며 우애의 개념이 실천적 개념으로 성취될 때 민족은 극복될 것입니다. 이때 카르마도 극복될 것입니다.

 

카르마의 법칙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번 육화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다음 육화에서 선으로 만드는 원리입니다. 카르마는 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카르마와 외적 결과를 낳는 카르마를 명확히 구분해야합니다. 내적으로 결과를 낳는 카르마는 성격, 재능, 습관의 형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좀 더 외적으로 나타나는 카르마는 예를 들면 가족, 국적 등과 같은 인간이 놓여지는 생활상황의 형태를 취합니다. 카르마가 물질적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좀더 자세히 고찰해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생에서 욕구, 충동, 욕망, 이념형성이 되서 나타나는 것은 다음 생에서, 또는 매래의 어느 생에서 습관으로 발현됩니다. 좋은 습관으로부터 훌륭하고 공을 들여 짜여진 건전한 물질체가 다음 육화 때 만들어집니다. 나쁜 습관은 다음 생에서 질병의 형태나 병에 걸리기 쉬운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은 전생의 경향과 습관에서 찾아야합니다. 개아의 실제 운명은 그 개아의 과거 행위의 결과입니다. 어떤 생에서 많은 사랑을 펼친 사람은 다음 생에서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언제나 젊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생에서 많은 적의의 감정을 품었던 사람은 다음 생에서 빨리 늙을 것입니다. 평범하고 나태했던 생으로 타락하여 온갖 형태의 정신성을 회피하는 개아는 되돌리기 어려운 것을 다음 생의 자신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비의입문을 주제로 간단히 덧붙이겠습니다. 인간성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의입문의 원천에 의지해왔습니다. 밀의(密儀)를 지배했던,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개아들이 인간성을 지도하고 이끌어왔습니다. 이것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비의입문의 원리를 고찰해봅시다. 실은 인간에게 비의입문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틀란티스 붕괴 후입니다. 이것은 비의입문의 과정도 인간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발달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적 형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은 물질계에 둘러싸여있는데 왜 감각인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밤사이 지성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자고 있는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머무르며, 그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밖으로 나와 영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영계의 존재들에 대해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밤에 들어가는 영계를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밤에 잠을 잘 때 물질체를 떠나는 평균적인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아스트랄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계에서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평균적 개아의 아스트랄체가 가지는 혼돈스런 아스트랄 성질은 비의입문 또는 영적훈련을 통해서 조직화되고 서서히 여러 기관을 발달시키기 시작하여 그 결과 밤에도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통상적 삶에서 인간은 아직 아스트랄체에 기관을 형성시킬 수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내적 삶의 힘이 본질적으로 강화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명상, 집중, 그 외의 방향이 명확한 훈련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감정과 사고의 삶에서 제자는 조금밖에 실재와 일치하지 않거나 전혀 일치하지 않는 주제를 골라서 그 특정한 심적 영상에 스스로를 방치해야합니다. 외부세계의 사물을 표상하는 심적 영상은 아스트랄계의 기관을 육성하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십자와 같은 도형을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7개의 붉은 장미에 둘러싸인 검은 십자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에 필요한 활력과 인내로 그 훈련을 실천하면 발달과정에 따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에 의해서 여러분은 아스트랄체를 변용시키고 그 기관에 활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심적 영상은 추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감정과 풍부한 지각에 대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원하는 결과가 성취될 것입니다.

 

 비의 입문에는 3가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모두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3가지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각 개아의 사정에 달려있습니다. 이 길 중 하나는 영지(叡智)에 관한 비의입문입니다. 인도인과 동양의 훈련에 적합한 방법입니다. 이 길은 유럽인과 서양인의 몸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서 그들에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의입문은 감정의 삶에 기초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길입니다. 지금도 이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개아는 극히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강력한 헌신과 자비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비의입문의 길은 장미십자의 훈련입니다. 사고와 의지를 통한 비의입문의 길입니다. 이것은 다른 비의입문의 길의 힘들과 합일에 이릅니다. 각 비의입문의 최종목표는 명확하지만 진화과정에서 혼이 당면한 필요로 하는 것과 인체의 제공 가능성에 맞추어 조정되어야합니다. 고대 비의입문에서 제자는 3일반 동안 무덤에 매장되어 죽은 것처럼 되어야했습니다.  이때 그의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는 물질체의 외부로 나와 영계에 존재합니다. 비의를 담당하는 사제는 그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입문자를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각성 후에 제자는 영계의 목격자가 됩니다. 이것이 고대 비의입문 형태입니다. 오늘날 이런 과정은 더 이상 불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적 비의입문과 장미십자의 비의입문은 매우 강력한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참여하는 인간은 고대 입문의식에서처럼 물질체에서 고차요소를 끌어내서 발생시켰던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인상은 현재 3일반의 가사상태를 거치지 않고도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각인됩니다. 아스트랄체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가 성취되었다면 현대의 비의입문은 실제 경험에 기초한 순수한 영시력과 영계의 지식으로 이끄는 영향을 발생시킵니다. 이때 영계에서 혼이 받는 인상은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각인됩니다. 이것이 오컬트발달과정의 ‘조명(照明)’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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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광식 교수가 주로 거론하는 생명역동농업(법)의 일면을 대강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잘 읽어보시면 우리공부와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슈타이너 농법에 대해 회장님께 묻곤 했는데, 슈타이너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단, 지금은 100년이 흐른 시점이라 지구의 (대우주)환경 자체가 너무 변했고, 그 때와는 다르게 심각한 오염상태에 있다는 것이지요.

현 시점에서 슈타이너 농법 자체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도 기술적으로는 ‘전근대적인’ 측면이 있고요, 이를 적용하는 농부도 제대로 들어맞는지에 대해 이른바 ‘체킹’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고, 농업의 정신만을 갖고 볼 때 참으로 올곧은 소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농사를 ‘우리만의 기술’로 어떻게 ‘우리만의 농법’으로 승화시키고 정립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향후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대안농법

슈타이너와 생명역동농법

글 / 장 길 섭·농부, 풀무학교 교사


** 이 글은 <녹색평론>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저자의 동의 아래 2회에 걸쳐 월간이장에서 소개되었다.(2004. 10)



정농회와 슈타이너 농업 강좌의 인연

귀농한 지 3년째 되던 1995년 1월, 정농회 정기 연수회에서 생명역동농업에 관한 강의를 처음 듣게 되었다. 프랑스인으로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생명역동농업을 연구·실험하고 있는 ‘피리오 도니’라는 농부가 칠판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분필로 우주의 별들을 그려 보여 주며 하루 종일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오재길 선생이 통역을 했는데, 너무나 생소한 내용인지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하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우리 전통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인데 외국 것을 또 들여 와 배울 이유가 뭐냐며 투덜대는 회원도 있었고, 진지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반응하는 회원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전에 국내에 소개된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의 『어떻게 초감각적 세계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어 보려고 끙끙대던 경험이 있어서 흥미를 느끼는 편이었다.


피리오 도니 씨의 강의가 끝나고,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정농회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농업 형태로서 생명역동농업을 도입하여 연구·실천하자는 오재길 선생의 제안이 별다른 논란 없이 받아들여져, 1995년 1월 이후 생명역동농업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우선, 유럽에서 발간되고 일본에서 재편집된 『생명역동농업 농사력』을 들여 와 1995년부터 해마다 번역하여 농사에 활용하기 시작했고, 루돌프 슈타이너가 독일 농민들을 대상으로 1924년 6월 7일부터 16일까지 열흘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생명역동농업의 근본 원리를 강의한 『농업 강좌』의 번역에 착수했다. 번역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7년만인 2002년 1월에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루돌프 슈타이너의 농업 강좌』라는 제목을 달고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한 대로나마 우리말 번역본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보다 꼭 100년 먼저 태어난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국내에 간략한 전기가 번역되어 나와 있고 슈타이너의 책이 몇 권 나와 있지만, 300여 권이 넘는다는 그의 전집 중에서 그의 면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책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슈타이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나로서는 다만 지난 7년 동안 생명역동농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농법을 제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농업 강좌』에서 설명된 내용이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늘 의문을 품으며 농사를 지어 왔고, 또 반복해서 여러 번 『농업 강좌』를 읽어 본 경험에 의지해서 이 책에 대하여 어설프게나마 요약·소개해 보려고 한다.


『농업 강좌』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 보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은 세 가지 정도다. 간단히 정리한다면, 인간과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 또는 관점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충족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세 가지를 요약한다면 “첫째, 농업을 지구 안에서만 한정하여 볼 것이 아니라 우주까지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단위 농장 안에서 모든 것을 순환·자급해야 한다. 셋째, 단위 농장 안에서 생물 다양성을 최대한 드높임으로써 생태적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과 우주적 시각

첫째로 농업을 우주까지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슈타이너가 시종일관 현대 과학과 현대 농업이 근거한 방법론을 문제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과학은 ‘현미경적 시야’로 사물을 전체의 맥락에서 분리해 내고 이것을 다시 조각내서 늘 죽은 시체만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농업의 경우, 농업 또는 식물의 성장을 단지 땅과 영양소 등 물리·화학적 요소에 한정시켜, 다시 말하여 지구 안에서만 한정시켜 본다는 점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편협한 현대 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현대 농업의 결과, 화학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농작물의 생명력은 점점 쇠퇴하고 영양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농작물은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20세기가 지나지 않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슈타이너는 말했다. 슈타이너가 보기에 이것은 단지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인 문제’였다. 농업에는 정신적·영적·우주적인 세계에서 오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데, 현대 과학은 이 사실에 무지하고 따라서 당면한 농업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업 강좌』에서 다루어진 것은 어떤 조건에서 여러 종류의 동식물이 잘 성장하는가, 또 어떻게 퇴비를 사용하고 잡초와 병충해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이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슈타이너는 우주적·정신적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면서, 식물의 성장에는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가 총체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슈타이너는 농업을 전체 우주의 한 부분인 땅·식물·동물, 그리고 인간이라는 요소를 가진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고, 인류가 이 우주와의 전체적 관련 속에서 농업을 새롭게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생명과 함께 자연도 소멸되고 퇴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 과학은 현미경적·부분적 관점으로 인해 자연과 농업을 올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농업에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정신적·영적 관련 요소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신과학적 관점(인지학적 관점)은 전체적·총체적으로 진정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 과학의 좁은 시야로는 볼 수 없는 농업에 작용하는 우주적·정신적 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태양과 달의 빛과 온기가 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태양계의 모든 행성로가 태양계 밖의 항성에서 오는 별 기운들도 농업(여기에서 농업은 식물, 동물, 인간, 곤충, 광물 등 자연의 살림살이 전체를 포함한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별 기운들이 농업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농업에서 농토를 개량하는 데 주로 사용하는 규산과 석회가 이것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볼 때,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수성·금성·달(내행성)의 기운은 석회가 매개하여 식물과 동물이 살아가는 데 간접적으로 작용하고, 지구 바깥쪽에서 공전하고 있는 목성·화성·토성(외행성)의 별 기운은 규산이 매개하여 동식물에 간접적으로 작용한다. 이 때, 공전 주기가 짧은 내행성들은 주로 일년생 식물이나 사는 기간이 짧은 식물에 영향을 미치고, 공전 주기가 긴 외행성들은 나무와 같은 다년생 식물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태양계 내의 별들과 태양계 밖의 별들의 영향 전체를 한 마디로 ‘우주 기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을 기름지게 하려면 이러한 우주 기운이 땅에 잘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어떤 하나의 씨앗에는 특정한 천체의 위치가 영향을 미친 특정한 형태, 다시 말해서 운동하는 전 우주의 한 순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꼭 목성(기운)을 먹는다는 것이고, 자두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토성(기운)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만든 것이 ‘생명역동농업 농사력’인데, 이것은 특정한 순간의 별자리들이 곡물과 과일·엽채류·근채류·꽃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관찰하여 파종·정식·수확 시기를 적절하게 알려 주는 구실을 한다. 농사력과 함께 중요한 것이 이른바 ‘예비제’인데, 이것은 정신적 요소를 땅에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다.


농사에는 무엇보다도 질소가 중요한데, 자연의 질소에게는 네 형제가 있다고 한다. 이 네 형제도 질소와 마찬가지로 농업에 아주 중요한데, 수소·산소·탄소·유황이 그것이다. 질소는 별 기운이라고 부르는 정신을 실어 나르는 운반자고, 산소는 생명 기운을 실어 나르는 운반자다. 유황은 정신의 전달자고 탄소는 형태를 만드는 조각가다. 수소는 형태, 정신, 별 기운을 우주로 다시 실어 가서 풀어 주는 존재다. 자연 속에서 위에 든 다섯 원소는 식물과 동물의 형태를 만들고, 성장하게 하고, 정신을 실어 나르고, 그것을 다시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거름을 땅에 넣어 준다는 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활기를 얻고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땅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농사를 지을 때는 좋은 퇴비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소와 같은 위장이 긴 동물에게서 얻을 수 있다. 이 동물의 배설물 속에는 생명 기운과 별 기운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우리가 농경지에 퇴비를 넣어 준다는 것은 생명 기운과 별 기운을 땅에 주는 것이다.


암소 뿔 속에 암소 똥을 넣어 겨울 동안 땅 속에 묻어 두면, 긴 겨울 동안 모든 생명 기운이 고도로 응축되어 뿔 안에 있는 똥 속에 들어가 모인다고 한다. 이것이 ‘소똥 예비제’인데 이것을 따뜻한 물에 풀어서 논밭에 뿌리면 땅을 더욱 기름지게 만들고 풍부한 수확물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자연이 하는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농장은 하나의 생명체

두 번째로 농업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단위 농장 안의 모든 것을 순환·자급해야 한다는 내용은 다음에 인용하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하나의 단위 농장은 농장마다 나름대로 고유한 성질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있어야 충분히 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단위 농장은(비록 완전히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독립된 고유의 개체 상태를 이룰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단위의 농장을 꾸릴 때 농장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단위 농장 자체 안에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알맞은 숫자의 가축도 마땅히 키워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농장에 외부에서 들여오는 거름이나 거름 비슷한 것은, 이미 그 농장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여오는 치료제로 여겨야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농장 자체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농장 자체에서 해결되어야 제대로 가꾸어진 건강한 농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두 번째 강좌, 53~54쪽)


이렇게 보면 하나의 단위 농장은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 조직체입니다. 위에서는 과일 나무와 숲이 별 기운을 발달시킵니다. 그리고 동물들은 땅 위에 있는 것을 먹고 자아 ― 기운을 발달시켜 똥으로 내보냅니다. 이 똥은 다시 거름이 되어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름 속에 들어 있던 올바른 자아 ― 기운은 식물의 뿌리로 하여금 지구가 끌어당기는 쪽으로 올바로 자라도록 이끕니다. (중략)


하나의 단위 농장은 하나의 고유한 개체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면 식물과 동물이 언제나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단위 농장 안에서 직접 기르고 있는 동물에서 거름을 얻지 않고(오히려 있는 동물까지 다 치워 버리고), 칠레 같은 먼 나라에서 거름을 가져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순환 관계는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거름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동물은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이 본능에 따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도록, 먹이가 될 만한 식물도 심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단위 농장이 제 나름대로 독립성을 갖춘 고유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시도할 것인지 그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잡히는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또 법칙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가능한 한 하나의 단위 농장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모든 법칙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완전하게 이룰 수는 없을 줄 압니다. (중략) 현대 경제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시도하는 것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찾아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여덟 번째 강좌, 239~241쪽)


1924년에 독일 농민들을 상대로 한 이 이야기는, 내게는 2002년을 살고 있는 우리 유기농업 농민들에게 하는 간절한 호소로 들린다. 관행 농업이나 유기농업이나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모든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우리 농업과 농촌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먼저 순환·자급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 한, 순환의 고리를 다시 잇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농업 강좌』의 내용이 황당무계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여기 인용한 대목만큼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960년대까지, 아니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땅 곳곳에서는 3000여 평 규모의 땅에서 소 한 마리로 논밭을 갈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풀을 베어 먹이고, 겨울에는 볏짚을 썰어 쇠죽을 쑤어서 먹이고, 가축 분뇨와 인분과 농업 부산물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짓지 않았던가! 다시 이렇게 농사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 내 꿈은 우리의 1960년대 농촌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우리 농장이 순환적이고 자급적인 모습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좀 특별했던 올해의 감자파종
며칠 전에 감자파종을 했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했다. 우선 날짜 선택에 있어서 각별했다. 3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괭이 한 자루로 50여 평 밭에 감자를 심었다. 이날을 나는 제법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왔었다. 3월 10일과 11일은 생명역동농법에서 말하는 뿌리작물을 심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파종을 할 때는 꼭 달이 차기 전에 하고 추수는 달이 기울기 시작할 때 했었다. 그래야 발아가 잘 되고 수확물이 쉬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가을부터 접하기 시작한 독일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생명역동농업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는 태양계의 운행과 지구광물의 상관관계로까지 농사의 영역을 넓혀 설명을 했고 나는 크게 공감이 되었었다.

특히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는 저서에서는 지구과학이나 천체학 측면에서 우주생명의 탄생과 생장, 그리고 소멸을 경이로울 정도로 잘 분석해 놓았다. 목성과 토성의 공전주기가 농사에 미치는 영향과 파종시기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생명역동농사력이다. 매년 독일에서 발행된다. 지난달 말에 정농회 사무국에서 올해의 생명역동농사력 3,4월치를 보내 왔을 때부터 나는 밑줄을 쳐 놓고 이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생명역동농사력은 할머니가 다 된 슈타이너 박사의 외동딸 마리아 툰(Maria Thoun)이 수십 년 전부터 제작을 해 왔는데 그녀가 몇 주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속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었다. 이날 일찍 나는 노심초사하며 보관해오던 씨감자 박스를 내왔다.

저온에 잘 보관해야 감자가 썩거나 싹이 나 버리는 일이 없기에 일반 농가에서 씨감자를 보관하기가 쉽지 않지만 무슨 작물이든 제 땅에 난 것을 제 땅에 심는 게 제일 좋다. 씨감자를 신경 써서 보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달력을 봤더니 음력으로 이월 초여드레였다. 파종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다.



감자농사를 더 늘려 잡은 이유
날짜뿐 아니고 올해 감자농사는 규모에 있어서도 파격적이다. 다시 100여 평이나 더 심을 작정이다. 작년에 감자 맛이 워낙 좋다보니 주변에서 먹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었다. 어제 야마기시공동체 농장에서 씨감자 두 박스가 추가로 도착했다.

작년에도 이 종자를 갖다 심었었다. 다들 백작이란 종자를 심어서 소출을 많이 내지만 이 수미라는 종자는 소출은 적지만 잘 썩지 않고 2기작도 가능하다. 올해는 감자농사로 벌이도 좀 잘 해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셈이다 보니 작업과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기름 사용하는 기계는 종류를 불문하고 밭에 들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역시 괭이로 골을 다듬고 두둑을 쳤다.

가급적이면 땅을 많이 파지 않는 선에서 지표토가 손상되지 않게 했다. 6년 가량 완전 유기농을 하다보니 땅이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름에 나는 잡풀들도 이전만큼 독하지 않다. 제초제 치는 밭은 잡초들이 내성이 생겨서 얼마나 억센지 모른다. 괭이로 하다 작은 호미로 바꿨다. 감자 북을 하고나서는 모아 둔 낙엽들을 골고루 펴줄 작정이다.

작년에 감자밭아랑 고추밭을 너댓 번이나 매면서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겨울 동안 낙엽을 틈만 나면 긁어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겨울 동안 아궁이에서 모아 두었던 재에다 감자 눈 딴것을 버무려 두고 거름을 먼저 놨다.

거름 역시 우리 생태화장실에서 만들어낸 똥을 소재로 하여 각종 농사부산물을 썩힌 것이다. 거름공장에서 사다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믿을 수가 없다. 폐타이어 조각이 나오기가 일쑤라고 한다. 감자를 하나하나 거름 위에 한 뼘 간격으로 놓은 다음에 재를 한 리어카 끌고 와서 감자 씨 있는 곳에다 한 주먹씩 놔줬다. 이래야 감자가 잘 자리는 영양분이 된다. 재는 작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양소지만 해충에게는 독이다. 재를 오래 만지다 보니 장갑 속으로 스며들어서 땀과 섞이면서 손이 좀 따가워졌다.



어떤 식으로든 생산에 참여해야 할 텐데

생명역동농사력은 달이 기울기 시작하는 음력 보름 이후부터는 뿌리작물의 파종시기가 참 까다롭다. 3월 20일 오전 8시나 또는 21일 오전 5시에서 6시 사이. 25일 밤 23시.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시간을 최대한 맞춰 심어야겠다.

유기농에서 최근 보급되고 있는 탄소농법을 올해는 나도 시도해볼 생각이다. 밭에 100m 간격의 삼각형 위치에 서너 자 깊이로 땅을 파서 숯을 묻는 농사법이다. 탄소와 규소가 땅 속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생명역동농법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하늘기운의 통로라고 한다. 농사란 이렇게 할 때 비로소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큰 소리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과 공기 그리고 물이나 여러 곤충 등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기운이 성해진다. 사람의 삶도 자연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얼마만큼 소득을 얻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내 정성과 노력, 나아가 우주와의 소통이 시장에서 달랑 가격표 하나로 평가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렇다고 똑 소리 나는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다.

작년에 내가 지은 농산물 중심으로 쇼핑몰을 하나 만들까 하다가도 이런 점 때문에 포기했었다. 상품의 질과 가격으로만 평가되는 자본주의 시장은 참 야만적이다.

그래서 감자의 생산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한 사람에게 이 감자를, 내 땀과 정성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화폐 이상의 그 무엇을 소통하고 싶은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도 유기농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남 장성 한마음 공동체에 모여 이런 문제에 대해 종일 의논을 했었다. 비자본주의적인 시장을 어떤 식으로 만들까 하는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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