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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Adam Smith' 제대로 알기



오늘 소개할 책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는 2008년 <일본경제신문> 선정 ‘올해의 책’ 1위에 뽑히고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산토리학예상 정치경제 부문을 수상한 대중성과 전문성을 고루 갖춘 명저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의 재정 정책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논문을 쓴 바 있는 저자 도메 다쿠오는 이 책을 통해 피상적으로만 드러나 있었던 아담 스미스의 진면목에 보여준다. 


특히 일반 경제사상서들이 아담 스미스에 대해 <국부론> 중심으로만 기술하는 데에 반해 이 책은 아담 스미스의 또다른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국부론>의 연장선상에 놓고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는 저자의 작위적인 기획이 아니다. 실제 아담 스미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최종판에서 ‘독자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추가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책의 초판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정의와 관련된 것, 생활행정, 공공수입, 군비 등과 같이 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런 것들과 관련된 법과 국가의 일반 원리와 이 원리가 서로 다른 시대와 시기에 겪었던 변혁을 또 다른 논문에서 설명해야겠다고 말했다. 


각국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이 약속을 부분적으로 적어도 생활행정, 공공수입, 군비에 관한 한 수행했다.”


이 글에서 스미스가 ‘각국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라고 한 것은 <국부론>을 말한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질서와 번영을 기초 짓는 인간 본성은 무엇이고 또한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해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서 질서와 번영을 인도하는 일반 원리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논하려고 했다. 


그 일부가 <국부론>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의 두 저작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독립적인 책이 아닌 스미스의 웅대한 철학을 이루어 갈 연속적인 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저작을 함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고 바로 이 책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가 그것을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다.


이번 서평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담 스미스의 면모와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겠다. 



아담 스미스


“저는 무료한 시간이나 달랠 생각으로 책을 한 권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프랑스 남서부 도시인 툴루즈(Toulouse)에 체류하는 동안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거두이며 경험론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흄에게 보낸 한 짤막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미스가 스스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책의 이름은 보기만 해도 따분한 <국가의 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eh Wealth of Nationns)>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책을 줄여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라고 불렀다.


아담 스미스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지루한 책을 쓰겠다는 비범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 도시인 커칼디(Kircaldy)에서 태어난 아담 스미스는 세관원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스미스는 열 네살의 나이에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 대학교 발리올 칼리지에 들어간다. 하지만 스미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다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스미스가 옥스퍼드를 떠난 이유를 <국부론>에 나온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은 몇 해째 가르치는 시늉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특히 스미스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옥스퍼드의 검열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스미스는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을 읽다가 압수당하는 일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 일을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불평을 했다고 한다. 옥스퍼드 또한 이런 스미스의 언사를 못 마땅한 탓에 끝내 스미스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온 스미스는 수사학과 법학에 대해 대중 강연을 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1748년에는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교의 강단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은사이자 아일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을 이어 도덕 철학 교수직을 이어 받는다.


옥스퍼드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은 스미스는 그 어떤 교수보다도 열정을 다해 일했다. 철저한 준비와 흥미로운 강의로 학생들의 졸음을 퇴치했으며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은 스미스를 사랑했으며 스미스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심지어 러시아에서 온 명사들도 있었다. 스미스의 이상한 걸음걸이와 말투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고 심지어 스미스의 작은 흉상이 서점의 진열대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미스를 진정한 학자로서 큰 명성을 준 것은 1759년에 출간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이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통해 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도덕적 판단을 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내 놓았다. 스미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에서 철학자로서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1764년 스미스는 교단을 떠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연간 500파운드의 보수와 평생 연금으로 연간 500파운드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젊은 공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스미스는 젊은 공작을 데리고 약 3년동안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스미스는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을 만나며 프랑스의 산업 발전과 경제적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프랑스 여행을 마친 후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스미스는 경제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실시했고 교단을 떠난 후 12년 만인 1776년에 <국부론>을 출간한다.

 


국부에 대한 재정의


스미스가 태어나기 전 17세기에는 거대한 지적 변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교리보다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지동설을 주창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혁명적 관점이 지성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와 영국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성서의 도움 없이 수학과 실험만으로 자연의 법칙을 증명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자신의 저서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서 인간은 실용 학문을 통해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며 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바로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계몽주의가 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세계관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유럽인들은 경제문제 또한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죄였으며 부를 쌓으려고 하는 것은 악마가 추구하는 탐욕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고리대금업자는 추악한 죄인이었으며 상인들은 저급한 인물이자 불신의 대표주자였다. 하지만 기술발전과 상인들의 활발한 교역으로 국가의 부가 실질적으로 증가하자 이를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점증되었다. 


경제사학자 하일브로너의 말을 빌리자면 ‘이익이라는 사상에 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흐름속에서 아담 스미스라는 철학자가 나타나 경제현상의 진짜 그림이 담긴 책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 책의 이름이 바로 <국부론>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국부론>의 원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의 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이다. 다시 말해 국부론은 무엇보다 ‘국부’에 대한 연구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부는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다. 국민들의 연간 노동은 원래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모든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자원이며, 그 생필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러한 노동의 직접적인 생산물이거나 그 생산물로 다른 국민들에게서 구입한 물품이다.”


스미스의 이같은 주장은 당시 정부 각료들과 많은 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던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부란 국가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수입은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해야 한다. 실제로 중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여러 유럽 국가들은 국부를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세와 규제조치를 통해 수입을 억제하고 장려금제도나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상인과 생산자들에게는 막대한 이익이 있었던 반면 그 나라의 일반 소비자들은 값 싸고 질 좋은 제품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중농주의자들은 국가의 부는 오로지 ‘토지’에 있음으로 농민만이 부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여러 공장들을 관찰한 인물이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을 통해 부가 매일 생산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리하면 스미스는 국부란 왕궁에 쌓아 놓은 금과 은이 아니라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며 그 소비품들은 노동을 통해 창조된다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당시의 낡은 편견에 대항했다. 결국 <국부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


그러나 스미스가 정말 위대한 점은 중앙정부의 계획이나 명령 없이도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체 경제가 어떻게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작동하는지를 최초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기심과 경쟁으로 작동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다. 경제학의 모든 학파가 시장의 작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스미스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의 호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미스의 놀라운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핀공장에서 일하는 영성군이 오늘 생일을 맞아 저녁 식사로 빵과  작은 스테이크로 기분을 내고자 한다고 해 보자. 생일 때 와인이 빠지면 섭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영성군이 자신의 저녁식사에서 직접 생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기는 푸줏간 주인에게서, 빵은 빵굽는 사람에게서, 와인은 양조업자에게서 받았다. 그렇다고 영성군이 그 모두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생활에 필요한 서로 다른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분업’을 통해 타인과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저 세사람이 영성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호의로 제품을 만들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고자 한 이기심으로 생산을 했을 뿐이다. 스미스는 경제 주체들 각자의 개인적 이기심에 맡겨 놓더라도 사회의 노동 분업을 조정하는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악 중에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말 각자의 이기심에 맡겨도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까? 이기심에 매몰된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이 영성군에게 질이 나쁘고 양도 적게 두면서 더 비싸게 팔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아담 스미스의 세계는 ‘경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이 경쟁을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최대의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영성군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 영성군이 원하는 상품이란 적정한 가격과 적정한 양을 갖고 있는 상품이다. 경쟁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상품의 가격과 양을 조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시장은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함으로써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게 되고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메세지가 도출된다.


“시장을 내버려두라(Let the market alone)!”



그에 대한 오해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pity)과 동정심(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흔히 슬픔을 느끼는 것은 굳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원제에서 도덕감정을 ‘The Moral Sentiment’라고 하지 않고 ‘Moral Sentiments’라고 하였다. 즉 도덕 원리는 하나의 특수한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스미스는 인간이 이기심만으로 점철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국부론에서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수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원래, 그것이 낳는 일반적인 풍족을 예상하고 의도한 인류의 지혜의 결과가 아니다. 분업은 그와 같은 폭 넓은 효용을 예상하지 못한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비록 매우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곧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바꿔 갖고 거래하고 교환하는 성향(propensity to exchange)이다.”


<국부론>이 출판되기 전에 애덤 스미스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행한 강의에 관한 어느 학생의 필기노트에는 재화의 교환에 있어서 ‘설득 성향’까지 언급되었다. 정리하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에서조차 스미스는 이기심이 주된 본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환성향, 설득성향 등의 다양한 본성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스미스에 대한 또다른 오해는 그가 자본가를 대변하고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부정한 보수주의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선조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부론>을 열렬히 환영했던 인사들도 신흥 자본가계급이었다. 하지만 스미스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다. 스미스는 부자들을 옹호하거나 변론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국가의 부의 증진적 차원에서 일반 소비자와 노동의 가치를 매우 높게 샀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국부론>에는 스미스가 핀공장에서 분업을 통해 작업을 전문화하고 세분화함으로써 놀라운 생산성을 낳는 장면을 예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에 사는 우리는 이 장면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연결시키며 스미스가 생산성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 스미스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18세기 영국으로 가보자. 


18세기 영국의 인구는 1200만명이었는데 무려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빈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흘러든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숙련도조차 없었다. 그런데 분업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의 복잡성이 줄어들며 낮은 숙련도로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하층민에까지 확산되는 보편적 부’를 증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분업을 통해 단순한 작업만 반복하다보면 생산성은 올라가지만 노동자들의 지능과 정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정부의 역할을 명시한다. 스미스는 노동분업을 통한 정신적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정부가 공교육(public education)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또한 민간부분에서 수행하기 힘든 도로 건설 등의 공공투자의 유익성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좋은 사회에 매우 유익하기는 하지만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들이 그로부터 이윤을 얻어 비용을 보상받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공공기관과 공공사업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스미스가 당시 공교육이나 공공투자 이외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이유는 정부가 도제법이나 길드의 경쟁 제한 등을 통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는 현재와 같은 거대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공장은 규모가 작았고 사업은 매우 경쟁적이었기에 시장의 자율 매커니즘이 잘 작동할 수 있었다. 기업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있었기 때문에 어설프게 정부가 개입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는 편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더 나았다. 아마도 거대한 대기업들이 즐비하고 힘의 균형이 깨진 현재의 자본주의를 아담 스미스가 봤다면 그는 분명 정부의 역할을 재정의 했을 것이다.


‘구성원의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 시대의 대표적인 도덕철학자이자 최초의 위대한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3천권의 장서만을 남긴 채 179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내 책들의 애인일 따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담 스미스. 스미스는 이제 경제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애인이 되었다.


# 참고문헌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홍훈 외, 더난출판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세속의 철학자들>,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이마고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후마니타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김영사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도메 다쿠오, 동아시아


팟캐스트 - 경제경영 읽어주는 남자 고영성

출처: http://blog.naver.com/justalive/22026970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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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모델의 선구자들


바로 지금 새로운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모델들은 제2의 애덤 스미스Adam Smith나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머리에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가슴속 소망,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 기지, 수많은 사람의 수고에서 나온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직관적으로 알고, 그것을 일구려는 사람들이다.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s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비즈니스로서 기능하면서 사회적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는 기업이다. 800만 달러의 이익을 올리는 뉴욕 주 용커스Yonkers의 그레이스톤베이커리Greyston Bakery가 그 예다. 그레이스톤베이커리는 홈리스를 위한 일자리를 만든다는 목표로 선불교 수도자들이 세운 회사다. 미국에서는 금융 서비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저소득 공동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기관인 지역공동체개발금융기관Community development financial institutions, CDFIs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10년이 조금 넘는 동안, CDFI 자산은 50억 달러에서 420억 달러로 늘었다. 신규 자금은 예금자 및 투자자, 정부 기금에서 온다.


해양어업에 대한 소유권인 조업권catch shares에 대한 새로운 실험은 어류 자원의 파국적 감소를 멈추거나 증가세로 되돌려 놓았다. 현재 수천만 에이커를 아우르는 보존지역권conservation easements은 토지를 개발로부터 보호하여 농경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미래의 후손뿐 아니라 미래의 야생동물을 위해 토지를 보전하려는 것이다. 시장의 힘이 침입하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있는 보편적 삶의 영역을 존중하고자, 공유 자산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확대되고 있다. 누구 하나가 소유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위키피디아 같은 기관들로 이뤄진, 바이러스처럼 스스로 전파되는 세계도 있다.


혁신적 변호사들은 법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느라 바쁘다. 영국 법에 규정된 공동체이익기업community interest corporation이 그 예다. 미국의 저이익유한책임회사low-profit, limited liability company, L3C는 재단의 사회적 투자를 촉진하고자 법제화되었다. 이 모델은 겨우 2~3년 만에 20개 가까이 되는 주에서 이미 법제화되었거나 고려 중에 있다. 미국의 유일한 주립州立 은행state-owned bank인 노스다코타 은행Bank of North Dakota은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노스다코타 은행은 금융 위기가 닥쳐 민간 은행이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을 때조차 흑자를 기록했다. 노스다코타 은행이 예상치 못했던 회복력을 보이자, 14개 주가 주립 은행 설립을 위한 법제화를 고려하기 시작했다.(주립 은행은 민간이 소유하지 않는 은행으로, 이익 최대화가 아니라 공익에 초점을 둔 대안적 소유 구조라 할 수 있다.)


연대적 경제를 향한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는 지역으로 퀘벡과 라틴아메리카를 꼽을 수 있다. 연대적 경제는 협동조합과 비영리기구들로 구성된다. 퀘벡에서 연대적 경제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독립적인 경제 부문으로서 정부 지원금을 받는다. 나아가 놀랄 정도로 많은 수의 대기업이 이익 최대화 대신 고유한 사명을 중심 목적에 두고 경영하는 사명 경영 구조mission-controlled design를 채택했다. 사명 경영 구조로는 북유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재단 소유 기업이 있다. 110억 달러 매출을 올리는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크Novo Nordisk뿐 아니라, 이케아Ikea, 베텔스만Bertelsmann 및 여러 대기업이 재단 소유 기업이다. S. C. 존슨S. C. Johnson과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처럼 강력한 사회적 사명 아래 가족이 경영하는 기업도 사명 경영 구조에 포함된다.


사회적 기업인 그라민다농Grameen Danone처럼 더욱 색다른 구조도 등장하고 있다. 그라민다농은 다국적 요거트 제조업체인 다농 그룹과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 기관인 그라민 은행이 만든 합자회사로, 방글라데시의 마을 여성들은 이 회사를 통해 요거트를 판매한다. 그라민다농은 빈곤층의 영양 상태를 개선하고자 설계되었다. 그라민다농의 배당금 지급 목표는 1%로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경제 구조 분야의 선구자 두 명, 바로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와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노벨상을 수상했다.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의 설립자로 그라민다농의 창설을 도왔으며, 오스트롬은 인디애나 대학교 교수로 공유지의 경제적 관리 체제를 연구했다. 오스트롬은 동료들과 함께 어류 자원, 목초지, 삼림, 호수 및 지하수원 등의 효과적 관리법을 자생적으로 고안해낸 지역 공동체들을 세계 곳곳에서 찾아냈다. 이들 공동체는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는 방식으로 공유 자원을 관리했다.


협동조합, 종업원 소유 기업, 정부 지원 기업 등, 여러 대안적 소유 모델이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새로 부상 중인 소유 모델들은 새로운 식구인 셈이다. 영국의 최대 백화점 체인인 존루이스 파트너십John Lewis Partnership, JLP도 그중 하나다. JLP는 종업원이 100% 지분을 보유하며, 전통적인 이사회와 더불어 종업원들로 이뤄진 평의회를 운영한다.


이러한 대안적 모델들은 소유 구조의 새로운 일가一家를 이룬다. 산업화 시대의 소유 구조를 단일 작물 모델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구조들은 열대 우림의 생물종만큼이나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구조를 연구하고, 그 구조들의 여러 부분을 접합해봄으로써, 구조 실험의 온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그 온실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가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안적 모델들은 깊숙이까지 새로운 선구자다. 아직 완전히 모습을 갖추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틀로서 기능할 준비가 끝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수가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신호다. 이는 산업혁명 이래 가장 창조적인 경제 혁신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가리킨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 혁신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돈을 더 많이 버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혁신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조직화의 목적과 구조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발명, 삶의 필요를 충족하고자 스스로 조직화하는 경제 체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생성적 vs 추출적 소유


이 소유 모델들은 하나의 일관된 철학을 구현한다. 조직의 공통된 형태를 통해 인류 및 생태 공동체의 생생한 고려 사항들을 재산권과 경제 권력의 세계에 반영하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의 원형原型이지만, 현재까지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아직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길 잃은 개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데 주목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소유 모델들에도 이름을 붙여, 생성적 소유 구조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 이런 모델들이 생성적 경제의 기초를 이룬다.


이런 소유 구조들의 활기찬 목표와 생생한 영향력에는 모든 생명이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생성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generative’라는 말은 그리스어 ge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지’라는 의미의 Gaia(가이아), 그리고 genesis(기원, 발생), genetics(유전학)와 같은 어근을 사용한다. 생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셈이다. ‘생성적generative’은 생명의 영위를 의미하고, 생성적 구조란 그를 위한 제도적 틀을 가리킨다. 생성적 경제는 근본 구조가 해로운 결과물보다는 유익한 결과물을 내놓는 경향을 띤 경제다. 내재된 경향 자체가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살아 있는 경제다.


생성적 소유 구조는 다음 사분기에는 증발해버릴 수 있는 허구의 부phantom wealth가 아니라 진정한 부, 살아 있는 부living wealth를 생성하고 보전하고자 한다. 가족들이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누리도록 돕고자, 삼림을 보존하고자, 쓰레기에서 자양분을 생성하고자, 폭넓은 복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이런 소유 구조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소유 구조와 대조를 이룬다. 그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려면 지배적 소유 구조에도 이름을 붙여야 한다. 이 소유 구조는 물리적, 금전적 추출물을 최대화하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니, 추출적extractive 소유 구조라는 이름이 어떨까? 산업화 시대의 문명은 쌍둥이 같은 두 가지의 추출 과정에 힘입어 발전했다. 하나는 지구로부터 화석 연료를 추출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제로부터 금전적 부를 추출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과정은 동등하지 않다. 금전적 추출 과정이 주된 힘이었다. 생물물리학적 폐해는 시스템이 벌인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을 수 있다. 반면 금전적 부의 추출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경제학자 E. F. 슈마허E. F. Schumacher가 ‘영속성의 경제’라 부른 것을 이 허약한 지구 위에 세우는 첫발을 내딛는 때, 금전적 성장의 최대화는 길을 이끄는 목적으로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성적 소유 구조를 통해 다른 목표가 어떻게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자세히 확인하게 된다. 생성적 구조는 전환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전환이 어떻게 하면 널리 퍼질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혁명적 동력으로서의 소유


“운동인 줄도 모르고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변호사 토드 존슨Todd Johnson이 내게 한 말이다.(그는 새로운 소유 구조를 고안해내는 혁신적인 변호사 중 하나다.) 소유 혁명이 벌어지고 있다. 소유 혁명은 경제 권력을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확대하려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사회적 유익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전환을 두려워하도록 교육받는다. 동시에 경제 구조는 둘 중 하나, 즉 자본주의 아니면 공산주의, 사적 소유 아니면 국가 소유밖에 없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오늘날 자라나고 있는 대안들은 이런 먼지 쌓인 19세기식 분류를 거부한다. 이 대안들은 공익을 위한 사적 소유라는 새로운 선택지다. 이 같은 경제 혁명은 정치 혁명과 다르다.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며, 경제의 바탕이 되는 소유의 기초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위기가 닥칠 때면 사람들은 보호막을 구하고자 대안적 소유 구조로 눈을 돌렸다. 최초의 근대적 협동조합인 로치데일 조합Rochdale Society은 1840년대 잉글랜드에서 생겨났다. 산업혁명이 수많은 숙련 노동자들을 빈곤으로 몰아가던 시기였다. 직공과 장인 들은 힘을 합해 최초의 소비자협동조합인 로치데일을 세웠다. 로치데일 조합은 다른 곳에서라면 식료품을 살 수 없을 노동자들에게 식료품을 팔았다. 그들이 만든 협동조합 모델은 90개가 넘는 나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전 세계의 협동조합 조합원은 10억 명에 이른다.


대공황 기간 미국에서는 연방신용협동조합법Federal Credit Union Act이 불균형적 금융 시스템의 안정화를 도왔다. 법 제정 시 의도했던 바였다. 연방신용협동조합법은 저소득 계층에게 대출이 돌아가도록 하려는 법률이었다. 오늘날 신용협동조합의 자산은 총 7,000억 달러를 넘어선다. 2008년 금융 위기 이래 신용협동조합처럼 소비자가 소유한 은행들의 조합원 수는 150만 명 이상 늘어났다. 처음 위기가 닥쳤을 때 신용협동조합의 대출 연체율이 일반 은행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 금융 붕괴로 수천 곳이 도산하고 수많은 사업주가 도망쳤을 때,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일터를 지켰다. 노동자들은 정부 지원 아래 200개 넘는 기업을 인수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노동자 회생 기업empresas recuperadas을 스스로 꾸려나갔다.


우리 시대, 대안적 소유 구조에 대한 필요는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두 갈래다. 한쪽은 요새 같은 세상을 향해 뻗은 길로서 이제까지의 비즈니스가 걸어온 것이다. 그 세상에서 부유한 소수는 호화롭고 안전한 요새에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대부분은 곤궁에 시달리며 두려움과 싸운다. 다른 한쪽은 새로운 경제를 향해 뻗은 변혁의 길이다. 새로운 경제란 지속 가능하며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번영을 가져올 생성적 경제다. 어떤 세상을 선택하든, 소유와 재무 구조가 그 세상에 본질적 형태를 부여할 것이다.


생성적 소유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근사한 일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라고 묻곤 한다. 아마 대답은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이중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쪽 팔로는 기업의 남용에 고삐를 죄면서 기존 기업의 통치 체제를 개혁하고, 나머지 팔로는 생성적 대안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두 가지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응집력과 동력이 부족한 쪽은 두 번째 전략, 바로 대안을 추구하는 일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경제에 대한 명료한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고, 그 경제가 돌아가도록 하는 구조에 대한 간결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깊숙한 변화를 향해 힘을 합해 일하기란 쉽지 않다.


맨 처음 대안의 개발은 발생emergence에 의존한다. 조직 변화 이론가 마거릿 휘틀리Margaret Wheatley가 말했듯이, 발생이란 공동의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국지적인 행동이 일어나,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고, 행동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발생적 현상은 별 예고 없이 나타날 수 있다. 유기농 식품, 로컬 식품 운동의 등장이 그런 예다.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스템이 더 큰 규모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마법이 일어나서가 아니다. 미리 계획되지 않은 자발적 활동이 일어나고, 이후 좀 더 집중적인 노력이 더해지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8장에서 발생에 대해 다룰 것이다. 나아가 책 전체, 특히 에필로그에서 변화의 전략에 대한 좀 더 많은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로드맵을 그리려는 게 내 목표는 아니다. 나는 목적지에 초점을 맞춘다. 닥쳐올 혼란스러운 시기에 길잡이가 되어줄, 현실적이면서도 심오한 비전과 언어를 탐색하고자 한다.



생명 패턴


대부분이 민주적 권력의 구조는 이해하지만, 경제적 권력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소유의 구조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다. 우리에게 아직 없는 것은 단순한 패턴 언어pattern language다. 그 언어로 보기엔 동떨어진 듯한 모델들을 통합하고 그 근저를 이루는 소유 구조를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패턴 언어다.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가 말했듯이,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패턴을 이야기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의미다. 알렉산더는 『시간을 초월한 건축의 방법 The Timeless Way of Building』에서 “각각의 패턴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인간 지성이 그것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썼다.(알렉산더의 작업에 대해 3부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다른 종류의 소유를 창출하는 데 함께 작용하는 다섯 가지의 본질적 패턴을 발견했다. 목적, 구성원, 통치 방식, 자본, 그리고 네트워크가 그 다섯 가지다. 이들은 단기간에 금전적 부의 추출을 최대화하려는 목적 아래 추출적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혹은 미래의 세대를 위해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적 아래 생성적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새로운 모델이 앞으로 창조되어야 할 테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기초 구조 패턴은 이미 여럿 존재하며, 이 패턴들을 창조적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다.


추출적 소유는 금전적 목적을 갖는다.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목표다. 생성적 소유는 삶을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게 목표다. 오늘날의 주식회사는 실제로는 회사에 속하지 않는 부재자 구성원Absentee Membership으로 이루어진다. 소유주가 기업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방식이다. 반면 생성적 소유 구조는 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뿌리내린 구성원Rooted Membership으로 이루어진다. 소유권이 살아 있는 손에 들린 방식이다. 추출적 소유는 시장에 의한 통치제로 운영된다. 자본 시장이 자동항법장치로 기업을 통제한다. 반면 생성적 소유는 사명 경영 통치제로 운영된다. 사회적 사명을 중심 목적으로 삼아 기업을 경영한다. 추출적 구조의 투자는 카지노 금융을 수반하는 반면 생성적 방식의 대안은 이해당사자 금융을 활용한다. 이해당사자 금융에서 자본은 주인이 아니라 친구가 된다. 재화가 가격을 바탕으로만 거래되는 상품 네트워크 대신, 생성적 경제 관계는 윤리적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는다. 윤리적 네트워크는 여럿의 힘을 모아 사회적 · 생태적 규범을 지탱한다. 모든 소유 모델에 이런 구조 패턴이 전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성적 패턴이 더 많이 포함될수록 그 구조는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중요한 측면에서 이 책은 나의 전작 『주식회사 이데올로기The Divine Right of Capital』의 연결선 상에 있다. 『주식회사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권리를 지탱하는 신화들, 그중에서도 특히 부자들의 필요가 다른 모든 사람의 필요보다 앞선다는 신화를 파헤쳤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살펴보았다. 그 책이 출판된 후 10년 동안 우리 경제의 소유 체계는 기후 변화와 같은, 전례 없이 새로운 위기를 불러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식회사와 자본 시장이 서로 얽힌 제도들, 거기서 요구하는 영속적 성장과 이익의 증가도 큰 몫을 했다. 경제 민주주의가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지구의 생명 시스템living system을 준거의 틀로 삼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어야 할 궁극적인 패턴은 생명 패턴living patterns이다. 즉 자연이 생명을 지탱하고자 진화시켜온 조직화 패턴이다. 물리학에서 시작되어 다른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시스템 사고systems thinking는 생명 패턴과 프로세스를 논하는 데 쓸 수 있는 견고한 언어를 제공한다. 이 언어는 생물학적 시스템과 사회적 시스템에 똑같이 적용된다. 시스템 사고를 통해, 소유 구조의 재설계라는 과제가 인간 문명이 지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더 큰 과제의 일부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미래의 경제에는 풍력발전소, 탄소 배출 제한, 지속 가능하도록 관리되는 삼림 등이 필요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직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문제들은 이런 것들을 누가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누가 유익을 누릴 것인가다. 우리는 물리적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서의 혁신이 필요하다. 물리적 기술이 경제의 무엇에 해당한다면, 사회적 구조란 누구에 대한 문제다. “누가 어떻게 경제적 결정을 내릴 것인가? 어떤 조직화 체계를 사용하여?”를 묻는다. 사회적 구조는 인간관계들의 청사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조직화해서 일이 이루어지도록 할지를 고민한다. 소수를 위한 성장과 최대 이익을 중심에 놓고 조직화된 경제적 구조에 앞으로도 계속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지구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것을 중심에 놓고 조직화된 새로운 구조로 전환할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여정이다.


(본문 중 일부)


출처:http://nabeeya.net/nabee/view.html?type=review&cat1=52&cat2=67&cidx=4677&set_field=title&search=&pag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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