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Adam Smith' 제대로 알기
오늘 소개할 책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는 2008년 <일본경제신문> 선정 ‘올해의 책’ 1위에 뽑히고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산토리학예상 정치경제 부문을 수상한 대중성과 전문성을 고루 갖춘 명저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의 재정 정책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논문을 쓴 바 있는 저자 도메 다쿠오는 이 책을 통해 피상적으로만 드러나 있었던 아담 스미스의 진면목에 보여준다.
특히 일반 경제사상서들이 아담 스미스에 대해 <국부론> 중심으로만 기술하는 데에 반해 이 책은 아담 스미스의 또다른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국부론>의 연장선상에 놓고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는 저자의 작위적인 기획이 아니다. 실제 아담 스미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최종판에서 ‘독자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추가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책의 초판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정의와 관련된 것, 생활행정, 공공수입, 군비 등과 같이 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런 것들과 관련된 법과 국가의 일반 원리와 이 원리가 서로 다른 시대와 시기에 겪었던 변혁을 또 다른 논문에서 설명해야겠다고 말했다.
각국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이 약속을 부분적으로 적어도 생활행정, 공공수입, 군비에 관한 한 수행했다.”
이 글에서 스미스가 ‘각국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라고 한 것은 <국부론>을 말한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질서와 번영을 기초 짓는 인간 본성은 무엇이고 또한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해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서 질서와 번영을 인도하는 일반 원리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논하려고 했다.
그 일부가 <국부론>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의 두 저작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독립적인 책이 아닌 스미스의 웅대한 철학을 이루어 갈 연속적인 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저작을 함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고 바로 이 책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가 그것을 친절하게 도와주고 있다.
이번 서평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기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담 스미스의 면모와 그의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겠다.
아담 스미스
“저는 무료한 시간이나 달랠 생각으로 책을 한 권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프랑스 남서부 도시인 툴루즈(Toulouse)에 체류하는 동안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거두이며 경험론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흄에게 보낸 한 짤막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미스가 스스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책의 이름은 보기만 해도 따분한 <국가의 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eh Wealth of Nationns)>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책을 줄여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라고 불렀다.
아담 스미스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지루한 책을 쓰겠다는 비범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 도시인 커칼디(Kircaldy)에서 태어난 아담 스미스는 세관원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스미스는 열 네살의 나이에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 대학교 발리올 칼리지에 들어간다. 하지만 스미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다 마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스미스가 옥스퍼드를 떠난 이유를 <국부론>에 나온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은 몇 해째 가르치는 시늉조차 아예 그만두었다.”
특히 스미스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옥스퍼드의 검열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스미스는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을 읽다가 압수당하는 일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 일을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불평을 했다고 한다. 옥스퍼드 또한 이런 스미스의 언사를 못 마땅한 탓에 끝내 스미스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으로 온 스미스는 수사학과 법학에 대해 대중 강연을 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으며 1748년에는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교의 강단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은사이자 아일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을 이어 도덕 철학 교수직을 이어 받는다.
옥스퍼드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은 스미스는 그 어떤 교수보다도 열정을 다해 일했다. 철저한 준비와 흥미로운 강의로 학생들의 졸음을 퇴치했으며 세심한 관심과 배려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은 스미스를 사랑했으며 스미스의 명강의를 듣기 위해 심지어 러시아에서 온 명사들도 있었다. 스미스의 이상한 걸음걸이와 말투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고 심지어 스미스의 작은 흉상이 서점의 진열대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미스를 진정한 학자로서 큰 명성을 준 것은 1759년에 출간한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이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통해 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도덕적 판단을 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내 놓았다. 스미스는 이 책을 통해 영국에서 철학자로서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1764년 스미스는 교단을 떠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연간 500파운드의 보수와 평생 연금으로 연간 500파운드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젊은 공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스미스는 젊은 공작을 데리고 약 3년동안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스미스는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을 만나며 프랑스의 산업 발전과 경제적 변화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프랑스 여행을 마친 후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스미스는 경제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실시했고 교단을 떠난 후 12년 만인 1776년에 <국부론>을 출간한다.
국부에 대한 재정의
스미스가 태어나기 전 17세기에는 거대한 지적 변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교리보다 합리적 이성에 근거해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지동설을 주창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혁명적 관점이 지성인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와 영국의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성서의 도움 없이 수학과 실험만으로 자연의 법칙을 증명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자신의 저서 <방법서설(Discourse on Method)>에서 인간은 실용 학문을 통해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며 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바로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계몽주의가 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세계관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유럽인들은 경제문제 또한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죄였으며 부를 쌓으려고 하는 것은 악마가 추구하는 탐욕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고리대금업자는 추악한 죄인이었으며 상인들은 저급한 인물이자 불신의 대표주자였다. 하지만 기술발전과 상인들의 활발한 교역으로 국가의 부가 실질적으로 증가하자 이를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점증되었다.
경제사학자 하일브로너의 말을 빌리자면 ‘이익이라는 사상에 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흐름속에서 아담 스미스라는 철학자가 나타나 경제현상의 진짜 그림이 담긴 책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 책의 이름이 바로 <국부론>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국부론>의 원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의 부의 본질과 원인에 대한 연구>이다. 다시 말해 국부론은 무엇보다 ‘국부’에 대한 연구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부는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다. 국민들의 연간 노동은 원래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모든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자원이며, 그 생필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러한 노동의 직접적인 생산물이거나 그 생산물로 다른 국민들에게서 구입한 물품이다.”
스미스의 이같은 주장은 당시 정부 각료들과 많은 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던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부란 국가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수입은 억제하고 수출을 장려해야 한다. 실제로 중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여러 유럽 국가들은 국부를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세와 규제조치를 통해 수입을 억제하고 장려금제도나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상인과 생산자들에게는 막대한 이익이 있었던 반면 그 나라의 일반 소비자들은 값 싸고 질 좋은 제품을 제대로 얻을 수 없었다.
중농주의자들은 국가의 부는 오로지 ‘토지’에 있음으로 농민만이 부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여러 공장들을 관찰한 인물이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을 통해 부가 매일 생산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리하면 스미스는 국부란 왕궁에 쌓아 놓은 금과 은이 아니라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 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며 그 소비품들은 노동을 통해 창조된다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당시의 낡은 편견에 대항했다. 결국 <국부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
그러나 스미스가 정말 위대한 점은 중앙정부의 계획이나 명령 없이도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체 경제가 어떻게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작동하는지를 최초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기심과 경쟁으로 작동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을 무대 전면에 내세운다. 경제학의 모든 학파가 시장의 작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스미스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의 호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미스의 놀라운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핀공장에서 일하는 영성군이 오늘 생일을 맞아 저녁 식사로 빵과 작은 스테이크로 기분을 내고자 한다고 해 보자. 생일 때 와인이 빠지면 섭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영성군이 자신의 저녁식사에서 직접 생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기는 푸줏간 주인에게서, 빵은 빵굽는 사람에게서, 와인은 양조업자에게서 받았다. 그렇다고 영성군이 그 모두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생활에 필요한 서로 다른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분업’을 통해 타인과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저 세사람이 영성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호의로 제품을 만들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고자 한 이기심으로 생산을 했을 뿐이다. 스미스는 경제 주체들 각자의 개인적 이기심에 맡겨 놓더라도 사회의 노동 분업을 조정하는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악 중에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말 각자의 이기심에 맡겨도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까? 이기심에 매몰된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이 영성군에게 질이 나쁘고 양도 적게 두면서 더 비싸게 팔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아담 스미스의 세계는 ‘경쟁’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 굽는 사람들이 경쟁을 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최대의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영성군이 원하는 상품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 영성군이 원하는 상품이란 적정한 가격과 적정한 양을 갖고 있는 상품이다. 경쟁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상품의 가격과 양을 조절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시장은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함으로써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게 되고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견해를 하나로 모으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메세지가 도출된다.
“시장을 내버려두라(Let the market alone)!”
그에 대한 오해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pity)과 동정심(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흔히 슬픔을 느끼는 것은 굳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원제에서 도덕감정을 ‘The Moral Sentiment’라고 하지 않고 ‘Moral Sentiments’라고 하였다. 즉 도덕 원리는 하나의 특수한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스미스는 인간이 이기심만으로 점철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국부론에서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수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분업은 원래, 그것이 낳는 일반적인 풍족을 예상하고 의도한 인류의 지혜의 결과가 아니다. 분업은 그와 같은 폭 넓은 효용을 예상하지 못한 인간성의 어떤 성향으로부터 비록 매우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생긴 결과이다. 그 성향이란 곧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과 바꿔 갖고 거래하고 교환하는 성향(propensity to exchange)이다.”
<국부론>이 출판되기 전에 애덤 스미스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행한 강의에 관한 어느 학생의 필기노트에는 재화의 교환에 있어서 ‘설득 성향’까지 언급되었다. 정리하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에서조차 스미스는 이기심이 주된 본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교환성향, 설득성향 등의 다양한 본성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스미스에 대한 또다른 오해는 그가 자본가를 대변하고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부정한 보수주의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선조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부론>을 열렬히 환영했던 인사들도 신흥 자본가계급이었다. 하지만 스미스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다. 스미스는 부자들을 옹호하거나 변론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국가의 부의 증진적 차원에서 일반 소비자와 노동의 가치를 매우 높게 샀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국부론>에는 스미스가 핀공장에서 분업을 통해 작업을 전문화하고 세분화함으로써 놀라운 생산성을 낳는 장면을 예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에 사는 우리는 이 장면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와 연결시키며 스미스가 생산성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 스미스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18세기 영국으로 가보자.
18세기 영국의 인구는 1200만명이었는데 무려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빈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흘러든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숙련도조차 없었다. 그런데 분업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의 복잡성이 줄어들며 낮은 숙련도로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하층민에까지 확산되는 보편적 부’를 증가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는 분업을 통해 단순한 작업만 반복하다보면 생산성은 올라가지만 노동자들의 지능과 정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정부의 역할을 명시한다. 스미스는 노동분업을 통한 정신적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정부가 공교육(public education)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또한 민간부분에서 수행하기 힘든 도로 건설 등의 공공투자의 유익성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좋은 사회에 매우 유익하기는 하지만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들이 그로부터 이윤을 얻어 비용을 보상받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공공기관과 공공사업을 설립하고 유지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스미스가 당시 공교육이나 공공투자 이외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이유는 정부가 도제법이나 길드의 경쟁 제한 등을 통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는 현재와 같은 거대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공장은 규모가 작았고 사업은 매우 경쟁적이었기에 시장의 자율 매커니즘이 잘 작동할 수 있었다. 기업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있었기 때문에 어설프게 정부가 개입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는 편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더 나았다. 아마도 거대한 대기업들이 즐비하고 힘의 균형이 깨진 현재의 자본주의를 아담 스미스가 봤다면 그는 분명 정부의 역할을 재정의 했을 것이다.
‘구성원의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 시대의 대표적인 도덕철학자이자 최초의 위대한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3천권의 장서만을 남긴 채 179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내 책들의 애인일 따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담 스미스. 스미스는 이제 경제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애인이 되었다.
# 참고문헌
<경제의 교양을 읽는다>, 홍훈 외, 더난출판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시민, 푸른나무
<세속의 철학자들>,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이마고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후마니타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김영사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도메 다쿠오, 동아시아
팟캐스트 - 경제경영 읽어주는 남자 고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