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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컬트 생리학 Eine okkulte Physiologie (1911년)

루돌프 슈타이너

타카하시 이와오 / 유창완 

 


◎ 인간의 본성 

이 연속 강의는 인간 생명의 본질이라는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히 밀접한 문제를 다루겠지만, 이 문제는 인간자신과 관련된 것이면서도 대단히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차세계로부터 ‘인간이여 그대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요구가 모든 시대에 대두되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자기를 인식하는 일의 어려움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기인식 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 본성에 관한 인식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대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요구가 영원히 되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렸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먼 여정을 밟아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시작하는 강의의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가까운 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정말로 진실한 고찰을 수행하려한다면 반듯이 통상적인 과학이 무시해온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필요한 것은 인간본성에 대해서 외경의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것도 각각의 인간본성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그 개인이 우리들 자신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개개의 인간본성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 본성에 대해서 외경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앞으로의 고찰에서 기본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외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든 다른 누군가든 일상생활에서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인간 때문에 걱정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인간진화 전 과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의 신령(神靈)의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우주 신성의 한 드러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기인식을 통해서 더욱 더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식욕으로부터 알려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우주의 영적인 존재를 점점 더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의무로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상태로 있는 것은 인간의 숭고한 사명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하는 말을 이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주의 영은 알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엮어 넣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식하는 태도를 포기하려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본래 허용되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우주의 영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영을 체현하는 대신에 점점 더 그 희화(戱畵)가 되어버립니다. 더욱 더 우주의 영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영을 나타내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인식해야만 한다. 인식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다.’라고 하는 말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컬트적인 의미로 인생을, 인간의 본질을 고찰하려는 사람은 인간본성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품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인간존재의 영적인 근본에 입문할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견령능력을 불러 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영학자나 견령자라도 인간의 본성을 향한 한없는 외경의 감정이 가장 내적인 혼의 신경을 건드려 진동시킬 수 없다면, 비록 우주의 어느 영적인 비밀에 대해 영안을 열었다 할지라도 인간자신의 깊은 본성과 관계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영적인 공간 안에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견령자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외경의 마음이 부족하다면 인간성의 심오함을 통찰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올바른 것도 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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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말로 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들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기는 어렵다. 


진리를 이야기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빈 그릇에 물을 부으면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릇이 차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신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신의 존재와 그 본질에 대한 무익한 논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일단 신을 체험하게 되면 

말없이 신의 은총에 젖어 있다.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 처음에는 왁자지껄하다.

그러나 그 왁자지껄한 소리는 음식이 들어오기 전까지이다. 

음식이 들어오게 되면 조용해 진다. 

식사가 다 끝나고 다과가 들어오게 되면 더욱 조용해 진다.

마지막으로 후식이 나오게 되면 이제 오직 먹는 소리밖에 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잔치가 다 끝나고 손님들이 할 일은 잠자러 가는 일 뿐이다.


신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질문과 이유가 적어진다. 

신을 체험하게 되면, 

그때는 이 모든 논쟁이며 이유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 다음은 잠자러 갈 시간이다. 

다시 말하면 신과의 靈的 교섭에 젖을 시간이다.



오직 다음의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첫째,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생각들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 


두 번째, 이 모든 경전과 과학을 공부한 후에

자기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



신의 사랑 속으로 깊이 침잠하고자 열망하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 인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속적인 일들과 신을 체험하기 위한 그 명상과 기도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몇 권의 책을

읽고는 남을 가르친답시고 동으로 서로 뛰곤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인데... 


진정으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사람, 

신을 깨달은 사람, 오직 그만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우선 첫째로 그대 가슴의 사원에 신을 모셔라.

첫째, 신을 깨달아야 한다. 

강연, 강론 등은 신을 깨달은 후에 하라.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브라흐만(신)에 대해서 아주 유창하게 지껄인다.


결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원 안에는 신의 이미지도 없으면서 

신을 찬양하는 빈 소리만 드높은 것과 같다.



꽃의 향기가 미풍에 실려 사방으로 퍼지면 

그 향기에 따라 벌들이 온다.

단 것이 떨어져 있으면 

그 단 냄새를 맡고 개미들이 온다. 

일부러 벌이나 개미를 초대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순수하고 완전하게 되면, 

그의 따뜻함이 사방에 퍼지게 되며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히 그에게 모여 든다. 

그러므로 굳이 청중들을 붙잡고 외쳐댈 필요는 없다.



불을 켜면 어디선지 나방이들이 날아온다. 

그 불꽃 속으로 들어가려다 타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불은 나방이들을 부른 일이 없다. 


완전한 가르침의 경우가 바로 이렇다.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에 무리지어 모여든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마의 물은 양철로 만든 

새의 주둥이를 통해서 땅으로 떨어진다. 

양철새의 입에서 쏟아지는 물은 

그러나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저 성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가르침은 

실은 신이라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스프링 의자를 보라. 사람이 앉게 되면 푸욱 들어가지만, 

그러나 사람이 일어서게 되면 다시 부풀어 원 상태로 된다. 

세속적인 사람도 이와 같다. 

그들은 진리의 말을 듣는 동안만은 신앙심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다시 일상생활로 들어가게 되면 고귀하고

간절한 그 생각들을 모두 잊어 버리고 

전과 마찬가지로 먼지낀 상태에 있다.



어떤 농부가 온종일 사탕수수밭에 물을 주었다.

일을 다 끝내고서야 

그 물들이 모두 쥐구멍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알았다. 

그는 온종일 헛탕만 친 것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세속적인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

신을 찾는 사람의 경우가 이와 같다. 


매일같이 기도를 할지 모르지만 그의 영적 세계는 전혀 진전이 없다.

신을 향한 그의 열정이 이 세속적인 야망의 쥐구멍 속으로 

모두 빨려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봐도 그는 이전과 같은 차원에 머물 따름이다.



때묻은 거울은 햇빛을 반사시킬 수 없다. 

그 영혼이 순수하지 못하고 불결한 사람과 

마야에 현혹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신의 영광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혼이 순수한 사람은 

맑은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듯 신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겨울 하늘을 보라. 

수많은 연들이 날고 있다. 

그 수많은 연 중에서 몇 개의 연만이 

연줄에서 끊어져 자유롭게 날아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명상수련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세속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한 구도자는 혼자 있을 때조차 

어떤 죄악도 짓지 않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신은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돈 뭉치를 발견했을 때 

갖고 싶은 그 유혹을 뿌리치는 사람,

그는 진정한 구도자다. 

그러나 일반의 눈이 무서워, 

일종의 전시효과를 위하여 

종교인이 되는 사람은 진정한 구도자라 할 수 없다. 



이 세상과 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저 목공의 아내를 보라.

그녀는 잡다한 일로 얼마나 바쁜가. 

한 손으로는 절구통 속의 다 찧은 쌀을 꺼내는가 하면 

또 한 손으로는 아기를 본다. 

동시에 그녀는 찧은 쌀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이처럼 그녀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한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절구공이가 그녀의 손에 떨어져서 손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아라. 그러나 언제나 신을 기억하라. 

결코 신의 길을 등지지 말라



이 세상에 살면서 구제받으려 하는 사람은 

성 안에서 싸우는 군대와 같다.

신을 깨닫기 위해서 이 세상을 포기한 고행자는 

들판에서 싸우는 군대와 같다.


들판에서 적과 싸우는 것 보다 

성안에서 적과 싸우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용서, 

이것이야말로 수행자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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