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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루돌프 슈타이너

마리 슈타이너 (Mari Steiner)
바젤, 1932년 12월

이번 달 우리는 어느 인간 집단을 지도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일이 루돌프 슈타이너의 운명이 된지 30주년이 되는 날(역주1)을 축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결의가 이루어진 것은 정신과학에 관한 일과 더불어, 자유로운 인격들을 높은 도덕적 이상에 이를 때까지, 예술을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파악할 때까지, 인간의 의무와 봉사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식에 이를 때까지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폭풍우와 험난함을 피할 수 있도록, 그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의 발달에 적합한 신지학을 담당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협회라는 배의 키를 잡았습니다. 그것은 고대 지혜의 신성함을 날카롭게 이해하면서도 서양의 과제와 목표를 포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충동의 중심적인 뜻에 대한 인식이 탄생할 수 있는 신지학입니다. 

그러한 이해를 구축하는, 피로를 잊은 세월이 취임일부터 계속 되풀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양으로 기울어진 신지학 협회의 활동은 현재와 미래의 과제에 대한 감정에 눈을 뜨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향해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고, 현재의 힘과 이후 인간성에 발생하여 인간의 진보에 공헌해야 하는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블라바츠키에 의해 새롭게 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고대의 지혜를 교조적으로 고집하는 자세를 보면서 슈타이너는 당장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신지학 그룹의 구도자들은 그들의 길 위에서 밀어닥치는 수수께끼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동양과 서양과 그리스도교가 신지학을 통해서 만나지 않을까하는 정확한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역주2)

깊은 마음의 인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유기적 발달, 인과의 연쇄, 그리고 그리스도의 행위에 빛을 비출 수 없을까? 그 때에 비로소 슈타이너는 그러한 사람들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일할 가능성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동경이 우선 그에게도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존재하고 나서야 비로소 서양의 그리스도교적인 비교(秘敎)가 동양에 경도된 신지학에게 주어져야 할 충동으로서, 그에게 있어서도 명확하게 공식화 된 과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지학은 이 충동에 의해 한없이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풍부해진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양과 서양, 소우주와 대우주를 인식 가운데서 결합하기 위해서, 자아의식에 이르는 이 길을 위해서 「인지학」이라고 하는, 보다 꾸밈없는 이름이 선택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겸허한 마음에서, 또 인간으로부터 신에 이르는 인식의 길이 자기 인식으로부터 우주 인식에 이르기 때문에 선택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충동에 명확한 성격부여가 행해졌습니다. 「인지학은 인간의 영성을 우주의 영성으로
이끌 수 있는 인식의 길이다.」

헤아릴 수 없는 사고의 풍부함, 루돌프 슈타이너가 그의 강의에 부여한 이상할 정도로 풍요로운 정신적
재산은 그의 연속 강의를 단일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좁은 정의의 틀 안에 집어넣기 곤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강의는 응축된 에너지원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불꽃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가까운 곳이나 먼 곳도 비추어내고, 근원의 시작에 뛰어들어, 시공보다 더 깊이 침잠하고, 그러고 나서 정밀하고 세세한 부분을 끄집어내지만, 그것들은 때로는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암시적인 중요성과 새로운 빛의 힘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세한 부분의 축적된 역동적인 힘 전체로부터 무언가가 운명의 엄격한 법칙과 같이 폭풍우를 품고 있으면서도, 정화의 불을 잉태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어려운 때에 앞서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고, 그 후에도 전대미문의 쟁란이 되어 가까운
장래에도 지속될 세력들(역주3)의 작용에 보다 깊은 의미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초래되어야
했던 것일까, 어떤 과오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합니다. 혹은 못 본채하고 있는 상세한 부분을 이와 같이 정밀하게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적인 사상(事象)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강력한 우주적-인간적 배경으로부터 끝없는 인상적인 역사
그림이 우리의 앞에 떠오릅니다.

이러한 전망은 우주의 원형적 역사와 아득한 태고의 인간 역사에 침잠하면서도 가장 밝은 빛으로 현재를 비추어, 인지학협회의 회원을 위한 강의에 특별한 힘을 띠고 나타납니다. 슈타이너가 많은 여행에 할애하면서도 그가 상주했던 장소, 즉 베를린과 도르나흐에서 그러한 강의가 때로는 중단되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리듬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강의를 통해서 적어도 작은 인간집단의 양심이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이 순간의 한없는 중요함에 눈을 뜨게 해야 했던 것입니다. 실증에 의해 진지하고 인상적으로 생활의 상세한 모든 부분을 묶어, 슈타이너는 우리에게 운명 그 자체의 소리로서, 새롭게 각성 된 인간의 양심으로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이와 같이 견고하다고 믿어지던 온갖 지원이 눈앞에서 비틀거렸을 때, 제동이 걸리지 않는 본능의 반동이 근원적인 힘에 생겼을 때,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 축적과 구축을 가져오는(다시 쌓아올리고 구성하는) 사상을 형성하는 일에 노력한 이가 바로 그였습니다. 인간성은 그의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미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도에서 소수의-확실히 미숙한-그러나 의욕에 불타는 인간집단에 의해 빛을 혼돈에 가져와야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오히려 실천적 상황에 참가하는 시도가 행해졌습니다. 오늘날의 자칭 실천적 현실주의자들은 나태라고 하는 무자비한 무기의 모든 것을 이용해 자신에게는 기묘하게 생각되는 것, 영계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경멸을 담아 물리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살아있는 사고는 그 순간을 초월해 살며,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조차 기대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고의 의무입니다. 

그것과 관련된 문제가 인류의 구원입니다. 그 사고는 그 순수함으로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서서히 눈을 뜨고 있는 영혼들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의 영시(靈視)가 소원해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던 생활의 실천과 이해 그 자체로부터 슈타이너는 생의 모든 영역을 포괄해, 정력적이고 창조적인 충동으로 과학, 예술, 세계관과 종교적 활동이라는 다양한 영역에 침투할 수 있는 인식의 과학을 창조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참여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차의 삶을 느끼는 일입니다. 눈에 의해 깨끗해지고,
태양의 빛에 의해 생기를 얻은 공기를, 힘을 주고 치유해 주는 공기를 호흡하는 일입니다. 이 고차의 현실 영역에, 인간의 생명에 쏟아져 내리는 우주적으로 준비된 현실 영역에 참여할 때, 사람은 숨을 깊게 들이 마십니다. 우주적 실재가 인간의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금도 인간 운명의 미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인간은 사고를 통해 더욱 더 고차 존재의 영역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오는(두려울 정도로) 광휘를 내뿜는 영적보물을 양도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암흑시대-갈리유가의 힘을 쳐부수고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실제로
내부에 어둠을 품고 있지만, 빛은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에 빠진 인간이라도 멀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충동의 새로운 계시를 통해 슈타이너가 우리에게 준 빛은 인류에게 2번째 영적 각성(역주4)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빛을 위해서 인간 의식은 새로운 형식의 주형이 만들어져야했으며, 그 새로운 의식에 빛은 자신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영적 각성만이 구제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감각혼(역주5)의 모든 힘은 합리주의 시대가 초래한 장애를 극복하는데 충분치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비의입문의 길을 걷는 성인과 신비가가 경험한 것과 같은 열정, 중세에 알려져 있던 가장 신성한 감정의 광휘도, 열렬한 생각도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신의(神意)와 인류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다가올 미래의
요구에 맞추어 사람들의 영혼을 서서히 준비하게 될 그리스도교 비의입문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이 길, 그리스도교적 장미십자의 길은 특히 의식혼(역주6)의 힘에 호소합니다. 따라서 인간 인격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 인간에게 인생의 1회성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느끼게 하는 일 또한 그 과제였습니다.깊은 연구에 의해서, 상상인식과 관상(觀想)에 의해서, 그것이 인간을 대우주로 이끌고, 인간은 자신의 내부가 대우주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한 것입니다.

인격의 힘에 대한 완전한 의미는 서서히 자아를 영성의 의식적인 파악으로 이끌 수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의 힘을 발달시켜야했던 인간성의 그 부분으로부터, 재육화의 인식을 당분간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신시대의 개막에 필요한 것은 다시 요가의 길을 채용하는 길로 돌아가는 것도, 지나가 버린
시대의 발달에 적합한 모습을 취한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의 길도, 장미십자의 길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장미십자의 길에 새로운 충동이 주어져야합니다. 장미십자의 길(역주7)은 가장 험난한 인식의 길이며, 그 본질은 그 이름을 부당하게 빼앗은 모든 모조품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충동이 재육화와 가르마(업業)이라고 하는 위대한 진리를 밝힐 것입니다.

장미십자는 신중하게 이러한 진실을 숨겨왔습니다. 슈타이너가 그것을 고지하는 사명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에 대한 침묵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장미십자의 활동 결과, 수세기가 경과하는 가운데 엄격한 사고 훈련의 결실로서, 예민하고 지적인 사고의 귀결로서 유럽의 인간 의식에 이러한 진리가 빛을 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성의 전체와 관계하는 깊은 관심사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인간 발달의 역사가 그 진실한 의의와 의미를 획득할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에서와 같이 윤회전생의 수레바퀴로부터 해방하는 목적을 짊어진 한 존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괴테와 레싱(Lessing)(역주8)에 주목하라고 말해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되풀이되는 지상의 생을 통해 진보하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개아(個我)를 구출하는 것, 인간에게 신적 자아를 재탄생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슈타이너는 그를 지배하는 이루 말할 수없는 인식력으로 되풀이하고 되풀이해서 이 행위를 우리의 눈앞에 제시했습니다. 

슈타이너는 오랜 망설임 끝에 독일의 신지학자들의 탄원에 동의하여 그들 사업의 지도자가 되기로 결단했지만, 신지학 협회가 재육화와 카르마의 교설을 선도하는 자로서 세상에 참여하는 일을 사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독일에서의 이 운동의 지도자로 초대된 이유가 「유럽 중세의 신비가와 근대적 세계관」과 「신비적 사실인 크리스트교」강의였습니다. 그가 그 운동에 가져와야했던 충동은 이와 같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었으며, 가르치는 것에 관한 절대적인 자유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현존하는 영적인 공헌과 인연을 가진 모든 시대의 진정한 오컬티스트의 정신으로 그 공헌을 살리고, 진보의 길에서 그것을 더욱 더 짊어지고 가기 위해 일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충동으로 신지학 협회를 교조적 경직성으로부터 구출하고, 거기에 신선한 힘을 불어넣어 부족한 그리스도교 비의에 대한 이해에 눈을 뜨기를 아직 바랬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례차례 초석을 쌓아 그 이해의 기초를 견고히 하는 일을 했나갔습니다.
고찰하고, 숙고하고, 시행하는 의식이 청중에게 발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청중에게 익숙한 용어를 사용해 서서히 사물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키고, 이념을 생기 있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보다 능동적인 의식 형태와 근대정신에 순응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한 기초가 완성되었을 때, 새로운 빛이 비쳐지듯, 보다 넓은 전망을 열 수 있었고, 지구의 사명과 인간으로서 우리의 과제를 지금까지 귀로 들은 적이 없는 말로 분명히 밝힐 수 있었습니다.
슈타이너가 전해준 연속강의 하나하나는, 특히 연대순으로 읽는다면, 새롭게 정신과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연대순으로 읽었을 때에 비로소 그의 사고의 살아있는 유기적인 힘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은 먼 과거가 된 당시의 일상 사건에 관해서 여기저기 흩어진 비평조차 높은 도덕적 힘과 교육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 빠져들고 싶어지는 의의를 띠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진실을 흐리게 하는 방침과 당파외교, 개인적 야심의 작용으로 신지학 협회가 좀먹어 들어가는 것에 강한 반대의 태도를 취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현재 이것을 읽는 사람은 그러한 의견의 진심을 진실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로 출현하는 구세주를 내세우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내어준, 그 한심스러운 행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도의 소년, 크리슈나무르티(역주9)가 이 역할로 선택되어,「동양의 별」이 떠들썩하게 설립되고, 신지학협회는 이 방침에 숨겨진 목적에 봉사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조잡한 방식에서 슈타이너에 의한 그리스도교적 비교의 해석에 마음을 연 영혼들을 구해내는 것이 요망되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슈타이너를 향해 온갖 중상모략을 이용한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국제 신지학 회의가 1911년 제노바에서 개최될 예정이었고, 슈타이너에 의한 「20 세기의 부처」와
「20 세기의 그리스도」에 관한 두 강의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이
중지되었습니다. 슈타이너의 말이 영향을 주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명백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슈타이너는 그 해의 강의에서 몇
번인가 언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지학협회의 레벨을 매우 통탄할 만큼 타락시킨 그 방식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매우 진지하게 역설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말은 슈타이너 박사에 의해 강한 아픔을 수반한, 그러나 강한 힘을 담아서 발표되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담아, 마음의 모든 것을 말속에 담아 그는 인생의 소망으로서
그가 지도하는 협회가, 오컬트결사가 매우 빠지기 쉬운 흔히 있는 함정에 떨어지지 않도록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진리의 요구로부터 일탈하여 허영과 야심이라는 옆길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한 말은 그 일(신지학협회)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정화의 불꽃으로 살아서 따스함을 가져오는 추억으로서 혼 앞에, 그 말을 언제라도 들을 수 있습니다.
1912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강의는 정신과학을 목표로 하는 운동에서 정신의 순수함을 구하기 위해서·슈타이너가 해야만 했던 고투로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정신과학을 목표로 하는 운동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제 신지학협회의 퇴폐는 결과적으로 중부유럽에서 인지학 사업이 자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외적형태로도 1912년 12월이 저물 무렵 「인지학연합」이 정식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리드미컬하게 추억의 앞에 특별한 힘으로 다시 떠오릅니다.
30년 전, 1902년 10월20일, 슈타이너는 베를린에서 인지학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열고, 10월21일에는
애니 베산트(역주10)의 신지학강의를 요약했습니다. 애니 베산트는 나중에 그녀에게 작용할 불건전한
영향에 아직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20년전 슈타이너는 그가 창시한 인지학적으로 방향을 부여한 정신운동의 정신을, 아디야르로부터의 오칼트정책에 관한 급작스런 공격을 막기 위한 발언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유산으로서 우리에게 울려 퍼지는, 지금 새롭게 당시 하루하루의 추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발언은 쾰른에서 같은 해 12월 마지막 강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슈타이너는 「바가바드기타와 성 바울로 서간」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눈앞에 그리스도교 인식의 빛으로 본 순수한 동양의 지혜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위대함으로 비추어냈습니다. 맺는말에서 그는 그가 창설한 운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인식을 성취하고 겸허한 자세를 유지하기를 재삼재사 간절히 원했습니다.

반대세력도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922년 그믐 괴테아눔이 불타올랐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적들 사이에 서있던 인간의 대표인 나무 조형물들만이 구출되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이 조형물들을 그에 어울리는 괴테아눔의 홀에 소중하게 보관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1912년에 열린 많은 강의(역주11)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예술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영상적인 힘으로 그려졌습니다. 당시 그것을 구상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때였습니다. 지금 예술작품이 되어 볼 수가 있는 것은 말의 힘에 의해 우리 앞에 생생하게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외적으로, 구상적으로 표상하는 것-외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려야할 것인가-그것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하는 물음입니다.」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많은 기획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할 수 있기 전에, 우선 많은 감정이 인간의 혼들을 통해서 흘러야합니다.

그 계획은 이 지구의 발달과 스스로 합체 하려고 하고 있는 초감각적 충동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어떠한
방법으로 나타내는 계획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달성된 것에는 그리스도의 그러한 표상에 관한 첫번째 맹아조차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성장하는 외적 모습에 체현되어, 「경이의 충동」,「공감의 충동」,「양심의 충동」 이들 유기적인 힘들이 결집하여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모양(역주12)은 바로 그 표정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생생하게 한 것이 되어야합니다. 여기, 이 표상이 ‘인간을 대지의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것이, 감각적 욕망에 관계하는 모든 것이, 구석구석까지 빛을 내뿜는「영성」에 의해 극복된다. -이 얼굴모양을 영화(靈化)시킨 것에 의해 극복된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생생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얼굴에는 「승화된 힘」이 있어야합니다. 

그 힘은 양심이 최고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턱과 입의 독특한 형태로 드러냄으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입은-그 앞에 서면, 화가나 조각가가 그것을 만들고 싶다고 바랄 때-그 입이 있는 것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성 안에 육성되어 온 도덕과 양심과 같은 모든 것을 표출하기 위한 것으로 느끼게 할 것입니다. 모든 골격, 이과 아래턱이 같은 것을 표출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러한 얼굴에 표출될 것입니다. 

얼굴의 아래쪽 반의 형태에는 매우 강력한 힘이 있어, 그것이 흘러나오면, 인체의 나머지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것이 이윽고 새로운 형태가 되어,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한 에테르 힘이 극복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입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에 오늘날 육체적 인간과 유사한 몸의 형태를 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만능의 공감(共感)(모든 것에 통하는 공감)」을 이야기하는 눈을 주어야합니다. 그러한 눈만이 내적인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과 함께 다른 사람의 기쁨과 괴로움에 참여하기 위해서 밖으로 향하는 눈입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는 땅의 감각인상에 관한 사념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이마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눈썹은 일부분이 튀어나와 뇌의 어느 부분에 아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눈썹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사고하는 「사상가의 눈썹」이 아니라, 오히려 경이로움이 눈 위로 튀어나와 완만하게 아치를 그리며 머리 부분으로 돌아오는 이 눈썹에 표출 되고 있어, 그것으로부터 이른바 세상의 신비를 둘러싼 경이로움을 표출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머리 부분은 육체를 짊어진 인간에게서는 만날 수 없는 머리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그리는 행위 하나 하나가 실제 그리스도상(像)의 이상(理想)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이 이상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때에는 반드시 이 이상을 지향하는 감정-정신과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이 이 최고의 이상을 예술적으로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한, 다음과 같은 감정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리기 원한다면, 그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그대는
세상의 영적인 행로에 영적으로 몰입함으로써 3개의 중요한 충동-경이와 공감과 양심-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힘이 되도록, 자신의 내부에서 활동하게 만들어, 자신의 전존재에 침투하도록 해야 한다. 


·····································································································

마리 슈타이너:(1867-1948) 마리 슈타이너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반려자이며, 오이리트미, 언어형성
등 모든 무대예술 발달의 출발점에 서있다. 이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신비학에 관련된 일을 하는 출발점에도 그녀가 있었다. 생전의 슈타이너 저작은 그녀가 설립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슈타이너의 강의록이 그의 사후에 출판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헌신에 의해서다. 그녀가 적는 서문은 언제나 슈타이너의 강의를 읽는데 있어서 큰 지침과 통찰을 주고 있다.

역주1) 30주년:루돌프 슈타이너가 신지학의 그룹에서 강의를 시작했던 것이 1902년 10월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고 하는 의미이다.
역주2) 정확한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영국과 인도의 지성에 편중된 신지학 협회에 대해서, 서양의
사변과 예술에 뿌리를 내린 신비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서양사상의 성과인 그리스도교와 서양철학을
감안한 신비학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와 같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마리 폰 지펠스, 후에
슈타이너의 반려자가 된 여성이었다.
역주3) 세력들:물론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이다. 마리 슈타이너의
표현에서, 같은「세력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 또한 명백하다. 하지만 당시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역주4) 두 번째 영적각성:최초의 영적 각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물질영역: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골고다의 비의이다. 그러므로「두번째의」영적 각성된다. 단 슈타이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래는
물질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에테르영역, 생명영역에 출현한다고 말했다. 그 출현을
자각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그것이 개인의 길을 나누게 된다.
역주5) 감각혼:인지학용어. 루돌프 슈타이너가 가장 이지적으로 정신과학의 용어를 정의 한《신지학》
에서 인용해 보자.「사방팔방에서 다가오는 자극에 반응해, 감각작용이 생긴다. 이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을 감각혼이라고 부르겠다.」인간이 감각혼을 발달시켰던 시대는 그리스-로마 시대이다.
역주6) 의식혼:역시 인지학 용어. 이하 《신지학》에서 인용.「혼에서 빛나는 영원한
것을 ‘의식혼’이라고 부른다. …가장 평범한 일상의 감각작용조차 의식과 관련된다. 이같은 의미에서
동물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의식의 핵심, 바꾸어 말하면「혼의 내적인 혼」, 그것을 여기서는
의식혼이라고 한다.」지금이야말로 인간은 의식영혼을 발달시킬 때라고 슈타이너는 주장하고 있다.
역주7) 장미십자의 길:마리 슈타이너가 구술하고 있듯이 현재「장미십자」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그렇게 부른 길과는 무관하다. 장미십자는 중세 유럽의 과학자였다. 그들은 물질의
작용을 객관적으로 추구했다. 당시의 연금술이 근대화학의 기초를 쌓았다는 것을 상기하자. 뉴턴이나
데카르트도 연금술이나 당시의 신비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물론 당시
연금술문헌을 읽으면, 기묘한 시적인 기술로 되어있지만, 거기에는 깊은 의의가 있었다. 보다 많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물질의 작용을 영적인 이미지로 파악하는 일이 이용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장미
십자의 비교' 참조.
역주8) 괴테와 레싱:괴테(1749-1832), 말할 필요도 없는 독일문학의 거장. 루돌프 슈타이너는 유기과학의 아버지로서 괴테를 재평가했다. 괴테의 변태론은 분명히 장미십자의 지혜를 근거로 하고 있다. 재육화 이념과 관해서는「파우스트」를 거론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레싱(1729-81)도 독일의 거장.「라오콘」에 재육화에 대한 통열한 생각이 명기되어 있다.
역주9) 크리슈나무르티:크리슈나무르티(1895-1986). 정신세계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언변, 그 영혼의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을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와 마리 슈타이너는 결코 크리슈나무르티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크리슈나무르티 소년을 이용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확실하다.「동양의 별」그룹에 관한 인지학측의 증언이 일본어로 거의 공표되어 있지 않은 현 상황을 생각하면, 이 문헌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역주10) 애니 베산트:(1847-1933) 버나드 쇼와의 연애로도 유명. 블라바츠키 사후 신지학 협회 회장으로 활약했지만, 리드비터의「영시」에 근거해서 크리슈나무르티를 「세계교사」의 재래로 정한 것이 슈타이너의 반발을 불렀다. 후에 인도국민회의의 리더가 된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역주11) 1912년에 열린 많은 강의:크리슈나무르티 문제는 많은 혜택도 가져왔다. 바로 1912년 슈타이너가 성서에 관한 연속 강의를 열고, 많은 풍부한 인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슈타이너가 크리슈나무르티 사건으로 신지학 협회를 이탈해 인지학 협회를 만들었다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사실에 반한다. 우선 슈타이너가 지도하고 있던 신지학 협회 독일지부는 신지학 협회로부터 제명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지부는 거의 그대로 인지학 협회로 이행했지만, 루돌프 슈타이너는 새로운 「인지학 협회」에 대해서 명예직을 얻었을 뿐이었다. 새로운 그룹으로부터도 주의깊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 흥정을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주12) 그리스도의 얼굴모양:슈타이너의 손에 의한 그리스도의 목조, 거기에 조각되어 있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이상한 표정을 띠고 있다. 서양미술사에 나타난 많은 명화에 그려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표정의 의미를 마리 슈타이너만큼 친밀하고 구체적으로 해명한 예를 나는 본적 없다.「경이의 충동」,「공감의 충동」,「양심의 충동」을 겸비한 「인간의 대표」인,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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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광식 교수가 주로 거론하는 생명역동농업(법)의 일면을 대강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잘 읽어보시면 우리공부와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슈타이너 농법에 대해 회장님께 묻곤 했는데, 슈타이너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단, 지금은 100년이 흐른 시점이라 지구의 (대우주)환경 자체가 너무 변했고, 그 때와는 다르게 심각한 오염상태에 있다는 것이지요.

현 시점에서 슈타이너 농법 자체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도 기술적으로는 ‘전근대적인’ 측면이 있고요, 이를 적용하는 농부도 제대로 들어맞는지에 대해 이른바 ‘체킹’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고, 농업의 정신만을 갖고 볼 때 참으로 올곧은 소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농사를 ‘우리만의 기술’로 어떻게 ‘우리만의 농법’으로 승화시키고 정립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향후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만들어 가는 대안농법

슈타이너와 생명역동농법

글 / 장 길 섭·농부, 풀무학교 교사


** 이 글은 <녹색평론>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저자의 동의 아래 2회에 걸쳐 월간이장에서 소개되었다.(2004. 10)



정농회와 슈타이너 농업 강좌의 인연

귀농한 지 3년째 되던 1995년 1월, 정농회 정기 연수회에서 생명역동농업에 관한 강의를 처음 듣게 되었다. 프랑스인으로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일본에서 생명역동농업을 연구·실험하고 있는 ‘피리오 도니’라는 농부가 칠판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분필로 우주의 별들을 그려 보여 주며 하루 종일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오재길 선생이 통역을 했는데, 너무나 생소한 내용인지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하는 회원이 있는가 하면 우리 전통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인데 외국 것을 또 들여 와 배울 이유가 뭐냐며 투덜대는 회원도 있었고, 진지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반응하는 회원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전에 국내에 소개된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의 『어떻게 초감각적 세계의 인식을 획득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어 보려고 끙끙대던 경험이 있어서 흥미를 느끼는 편이었다.


피리오 도니 씨의 강의가 끝나고,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정농회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농업 형태로서 생명역동농업을 도입하여 연구·실천하자는 오재길 선생의 제안이 별다른 논란 없이 받아들여져, 1995년 1월 이후 생명역동농업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우선, 유럽에서 발간되고 일본에서 재편집된 『생명역동농업 농사력』을 들여 와 1995년부터 해마다 번역하여 농사에 활용하기 시작했고, 루돌프 슈타이너가 독일 농민들을 대상으로 1924년 6월 7일부터 16일까지 열흘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생명역동농업의 근본 원리를 강의한 『농업 강좌』의 번역에 착수했다. 번역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7년만인 2002년 1월에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루돌프 슈타이너의 농업 강좌』라는 제목을 달고 우여곡절 끝에 불완전한 대로나마 우리말 번역본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보다 꼭 100년 먼저 태어난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나는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국내에 간략한 전기가 번역되어 나와 있고 슈타이너의 책이 몇 권 나와 있지만, 300여 권이 넘는다는 그의 전집 중에서 그의 면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책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슈타이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나로서는 다만 지난 7년 동안 생명역동농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농법을 제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농업 강좌』에서 설명된 내용이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늘 의문을 품으며 농사를 지어 왔고, 또 반복해서 여러 번 『농업 강좌』를 읽어 본 경험에 의지해서 이 책에 대하여 어설프게나마 요약·소개해 보려고 한다.


『농업 강좌』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 보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은 세 가지 정도다. 간단히 정리한다면, 인간과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에 대한 올바른 인식 또는 관점이 필요한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충족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그 세 가지를 요약한다면 “첫째, 농업을 지구 안에서만 한정하여 볼 것이 아니라 우주까지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단위 농장 안에서 모든 것을 순환·자급해야 한다. 셋째, 단위 농장 안에서 생물 다양성을 최대한 드높임으로써 생태적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과 우주적 시각

첫째로 농업을 우주까지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은 슈타이너가 시종일관 현대 과학과 현대 농업이 근거한 방법론을 문제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 과학은 ‘현미경적 시야’로 사물을 전체의 맥락에서 분리해 내고 이것을 다시 조각내서 늘 죽은 시체만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농업의 경우, 농업 또는 식물의 성장을 단지 땅과 영양소 등 물리·화학적 요소에 한정시켜, 다시 말하여 지구 안에서만 한정시켜 본다는 점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편협한 현대 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현대 농업의 결과, 화학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농작물의 생명력은 점점 쇠퇴하고 영양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농작물은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20세기가 지나지 않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슈타이너는 말했다. 슈타이너가 보기에 이것은 단지 ‘지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적인 문제’였다. 농업에는 정신적·영적·우주적인 세계에서 오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데, 현대 과학은 이 사실에 무지하고 따라서 당면한 농업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업 강좌』에서 다루어진 것은 어떤 조건에서 여러 종류의 동식물이 잘 성장하는가, 또 어떻게 퇴비를 사용하고 잡초와 병충해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이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슈타이너는 우주적·정신적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면서, 식물의 성장에는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가 총체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슈타이너는 농업을 전체 우주의 한 부분인 땅·식물·동물, 그리고 인간이라는 요소를 가진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고, 인류가 이 우주와의 전체적 관련 속에서 농업을 새롭게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생명과 함께 자연도 소멸되고 퇴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 과학은 현미경적·부분적 관점으로 인해 자연과 농업을 올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농업에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적·정신적·영적 관련 요소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신과학적 관점(인지학적 관점)은 전체적·총체적으로 진정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 과학의 좁은 시야로는 볼 수 없는 농업에 작용하는 우주적·정신적 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태양과 달의 빛과 온기가 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태양계의 모든 행성로가 태양계 밖의 항성에서 오는 별 기운들도 농업(여기에서 농업은 식물, 동물, 인간, 곤충, 광물 등 자연의 살림살이 전체를 포함한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별 기운들이 농업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농업에서 농토를 개량하는 데 주로 사용하는 규산과 석회가 이것을 매개한다는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볼 때,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수성·금성·달(내행성)의 기운은 석회가 매개하여 식물과 동물이 살아가는 데 간접적으로 작용하고, 지구 바깥쪽에서 공전하고 있는 목성·화성·토성(외행성)의 별 기운은 규산이 매개하여 동식물에 간접적으로 작용한다. 이 때, 공전 주기가 짧은 내행성들은 주로 일년생 식물이나 사는 기간이 짧은 식물에 영향을 미치고, 공전 주기가 긴 외행성들은 나무와 같은 다년생 식물에 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러한 태양계 내의 별들과 태양계 밖의 별들의 영향 전체를 한 마디로 ‘우주 기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을 기름지게 하려면 이러한 우주 기운이 땅에 잘 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어떤 하나의 씨앗에는 특정한 천체의 위치가 영향을 미친 특정한 형태, 다시 말해서 운동하는 전 우주의 한 순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꼭 목성(기운)을 먹는다는 것이고, 자두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토성(기운)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만든 것이 ‘생명역동농업 농사력’인데, 이것은 특정한 순간의 별자리들이 곡물과 과일·엽채류·근채류·꽃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관찰하여 파종·정식·수확 시기를 적절하게 알려 주는 구실을 한다. 농사력과 함께 중요한 것이 이른바 ‘예비제’인데, 이것은 정신적 요소를 땅에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다.


농사에는 무엇보다도 질소가 중요한데, 자연의 질소에게는 네 형제가 있다고 한다. 이 네 형제도 질소와 마찬가지로 농업에 아주 중요한데, 수소·산소·탄소·유황이 그것이다. 질소는 별 기운이라고 부르는 정신을 실어 나르는 운반자고, 산소는 생명 기운을 실어 나르는 운반자다. 유황은 정신의 전달자고 탄소는 형태를 만드는 조각가다. 수소는 형태, 정신, 별 기운을 우주로 다시 실어 가서 풀어 주는 존재다. 자연 속에서 위에 든 다섯 원소는 식물과 동물의 형태를 만들고, 성장하게 하고, 정신을 실어 나르고, 그것을 다시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거름을 땅에 넣어 준다는 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활기를 얻고 활동할 수 있는 것처럼 땅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농사를 지을 때는 좋은 퇴비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소와 같은 위장이 긴 동물에게서 얻을 수 있다. 이 동물의 배설물 속에는 생명 기운과 별 기운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우리가 농경지에 퇴비를 넣어 준다는 것은 생명 기운과 별 기운을 땅에 주는 것이다.


암소 뿔 속에 암소 똥을 넣어 겨울 동안 땅 속에 묻어 두면, 긴 겨울 동안 모든 생명 기운이 고도로 응축되어 뿔 안에 있는 똥 속에 들어가 모인다고 한다. 이것이 ‘소똥 예비제’인데 이것을 따뜻한 물에 풀어서 논밭에 뿌리면 땅을 더욱 기름지게 만들고 풍부한 수확물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자연이 하는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농장은 하나의 생명체

두 번째로 농업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단위 농장 안의 모든 것을 순환·자급해야 한다는 내용은 다음에 인용하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하나의 단위 농장은 농장마다 나름대로 고유한 성질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있어야 충분히 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단위 농장은(비록 완전히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독립된 고유의 개체 상태를 이룰 수 있도록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단위의 농장을 꾸릴 때 농장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단위 농장 자체 안에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알맞은 숫자의 가축도 마땅히 키워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농장에 외부에서 들여오는 거름이나 거름 비슷한 것은, 이미 그 농장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여오는 치료제로 여겨야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농장 자체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농장 자체에서 해결되어야 제대로 가꾸어진 건강한 농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두 번째 강좌, 53~54쪽)


이렇게 보면 하나의 단위 농장은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 조직체입니다. 위에서는 과일 나무와 숲이 별 기운을 발달시킵니다. 그리고 동물들은 땅 위에 있는 것을 먹고 자아 ― 기운을 발달시켜 똥으로 내보냅니다. 이 똥은 다시 거름이 되어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름 속에 들어 있던 올바른 자아 ― 기운은 식물의 뿌리로 하여금 지구가 끌어당기는 쪽으로 올바로 자라도록 이끕니다. (중략)


하나의 단위 농장은 하나의 고유한 개체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면 식물과 동물이 언제나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단위 농장 안에서 직접 기르고 있는 동물에서 거름을 얻지 않고(오히려 있는 동물까지 다 치워 버리고), 칠레 같은 먼 나라에서 거름을 가져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순환 관계는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거름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동물은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이 본능에 따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을 수 있도록, 먹이가 될 만한 식물도 심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단위 농장이 제 나름대로 독립성을 갖춘 고유한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시도할 것인지 그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잡히는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또 법칙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가능한 한 하나의 단위 농장 자체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모든 법칙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완전하게 이룰 수는 없을 줄 압니다. (중략) 현대 경제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시도하는 것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찾아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여덟 번째 강좌, 239~241쪽)


1924년에 독일 농민들을 상대로 한 이 이야기는, 내게는 2002년을 살고 있는 우리 유기농업 농민들에게 하는 간절한 호소로 들린다. 관행 농업이나 유기농업이나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모든 순환의 고리가 끊어진 우리 농업과 농촌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먼저 순환·자급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 한, 순환의 고리를 다시 잇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농업 강좌』의 내용이 황당무계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여기 인용한 대목만큼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960년대까지, 아니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땅 곳곳에서는 3000여 평 규모의 땅에서 소 한 마리로 논밭을 갈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풀을 베어 먹이고, 겨울에는 볏짚을 썰어 쇠죽을 쑤어서 먹이고, 가축 분뇨와 인분과 농업 부산물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짓지 않았던가! 다시 이렇게 농사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 내 꿈은 우리의 1960년대 농촌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우리 농장이 순환적이고 자급적인 모습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좀 특별했던 올해의 감자파종
며칠 전에 감자파종을 했는데 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했다. 우선 날짜 선택에 있어서 각별했다. 3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괭이 한 자루로 50여 평 밭에 감자를 심었다. 이날을 나는 제법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왔었다. 3월 10일과 11일은 생명역동농법에서 말하는 뿌리작물을 심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파종을 할 때는 꼭 달이 차기 전에 하고 추수는 달이 기울기 시작할 때 했었다. 그래야 발아가 잘 되고 수확물이 쉬 썩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가을부터 접하기 시작한 독일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생명역동농업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는 태양계의 운행과 지구광물의 상관관계로까지 농사의 영역을 넓혀 설명을 했고 나는 크게 공감이 되었었다.

특히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는 저서에서는 지구과학이나 천체학 측면에서 우주생명의 탄생과 생장, 그리고 소멸을 경이로울 정도로 잘 분석해 놓았다. 목성과 토성의 공전주기가 농사에 미치는 영향과 파종시기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생명역동농사력이다. 매년 독일에서 발행된다. 지난달 말에 정농회 사무국에서 올해의 생명역동농사력 3,4월치를 보내 왔을 때부터 나는 밑줄을 쳐 놓고 이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생명역동농사력은 할머니가 다 된 슈타이너 박사의 외동딸 마리아 툰(Maria Thoun)이 수십 년 전부터 제작을 해 왔는데 그녀가 몇 주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속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었다. 이날 일찍 나는 노심초사하며 보관해오던 씨감자 박스를 내왔다.

저온에 잘 보관해야 감자가 썩거나 싹이 나 버리는 일이 없기에 일반 농가에서 씨감자를 보관하기가 쉽지 않지만 무슨 작물이든 제 땅에 난 것을 제 땅에 심는 게 제일 좋다. 씨감자를 신경 써서 보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달력을 봤더니 음력으로 이월 초여드레였다. 파종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다.



감자농사를 더 늘려 잡은 이유
날짜뿐 아니고 올해 감자농사는 규모에 있어서도 파격적이다. 다시 100여 평이나 더 심을 작정이다. 작년에 감자 맛이 워낙 좋다보니 주변에서 먹는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었다. 어제 야마기시공동체 농장에서 씨감자 두 박스가 추가로 도착했다.

작년에도 이 종자를 갖다 심었었다. 다들 백작이란 종자를 심어서 소출을 많이 내지만 이 수미라는 종자는 소출은 적지만 잘 썩지 않고 2기작도 가능하다. 올해는 감자농사로 벌이도 좀 잘 해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셈이다 보니 작업과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기름 사용하는 기계는 종류를 불문하고 밭에 들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역시 괭이로 골을 다듬고 두둑을 쳤다.

가급적이면 땅을 많이 파지 않는 선에서 지표토가 손상되지 않게 했다. 6년 가량 완전 유기농을 하다보니 땅이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여름에 나는 잡풀들도 이전만큼 독하지 않다. 제초제 치는 밭은 잡초들이 내성이 생겨서 얼마나 억센지 모른다. 괭이로 하다 작은 호미로 바꿨다. 감자 북을 하고나서는 모아 둔 낙엽들을 골고루 펴줄 작정이다.

작년에 감자밭아랑 고추밭을 너댓 번이나 매면서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겨울 동안 낙엽을 틈만 나면 긁어모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겨울 동안 아궁이에서 모아 두었던 재에다 감자 눈 딴것을 버무려 두고 거름을 먼저 놨다.

거름 역시 우리 생태화장실에서 만들어낸 똥을 소재로 하여 각종 농사부산물을 썩힌 것이다. 거름공장에서 사다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믿을 수가 없다. 폐타이어 조각이 나오기가 일쑤라고 한다. 감자를 하나하나 거름 위에 한 뼘 간격으로 놓은 다음에 재를 한 리어카 끌고 와서 감자 씨 있는 곳에다 한 주먹씩 놔줬다. 이래야 감자가 잘 자리는 영양분이 된다. 재는 작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양소지만 해충에게는 독이다. 재를 오래 만지다 보니 장갑 속으로 스며들어서 땀과 섞이면서 손이 좀 따가워졌다.



어떤 식으로든 생산에 참여해야 할 텐데

생명역동농사력은 달이 기울기 시작하는 음력 보름 이후부터는 뿌리작물의 파종시기가 참 까다롭다. 3월 20일 오전 8시나 또는 21일 오전 5시에서 6시 사이. 25일 밤 23시.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시간을 최대한 맞춰 심어야겠다.

유기농에서 최근 보급되고 있는 탄소농법을 올해는 나도 시도해볼 생각이다. 밭에 100m 간격의 삼각형 위치에 서너 자 깊이로 땅을 파서 숯을 묻는 농사법이다. 탄소와 규소가 땅 속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생명역동농법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하늘기운의 통로라고 한다. 농사란 이렇게 할 때 비로소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큰 소리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땅과 공기 그리고 물이나 여러 곤충 등 우주 삼라만상의 생명기운이 성해진다. 사람의 삶도 자연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얼마만큼 소득을 얻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내 정성과 노력, 나아가 우주와의 소통이 시장에서 달랑 가격표 하나로 평가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렇다고 똑 소리 나는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다.

작년에 내가 지은 농산물 중심으로 쇼핑몰을 하나 만들까 하다가도 이런 점 때문에 포기했었다. 상품의 질과 가격으로만 평가되는 자본주의 시장은 참 야만적이다.

그래서 감자의 생산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한 사람에게 이 감자를, 내 땀과 정성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화폐 이상의 그 무엇을 소통하고 싶은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도 유기농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남 장성 한마음 공동체에 모여 이런 문제에 대해 종일 의논을 했었다. 비자본주의적인 시장을 어떤 식으로 만들까 하는 문제를.

[농사] - 생명역동농업 Bio-dynamic Agri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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