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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는다는 건 오늘의 그 어떤 정치적 행보! 

 

키스 W. 휘틀럼, 김문호 옮김,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이산, 2003) 

(원제)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 The silencing of Palestinian history 



1. 들어가며 


일찍이 크리스찬 집안에서 커온 나는 어릴 적부터 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로서 믿으며 자라왔다. 그러다가 20대 초반에 뜻하지 않은 복병이었던 한국의 민중신학과 함께 성서비평학을 만나면서 매우 충격적인 새로운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비평할 수 있냐며 그런 시도는 꿈에도 생각질 못했던 것이다. 


주일학교 신앙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매우 귀감이 될 만한 신앙적 삶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혈연적 관계가 아니라 그 옛날 유명했던 족장들의 이름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들은 서로 편집된 것이라는 점을 접하게 되면서 그때 받은 나의 충격은 상당한 반향을 가져다줬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많다. 천지창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과 관련한다는 점, 이스라엘의 여리고성 정복 기사도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이미 그 이전부터 여리고성은 폐허였다는 점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도 실은 골리앗을 죽인 장수는 따로 있다는 점 등등 성서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로서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를 역사적 사실로서 확고하게 믿어왔던 개신교인이라면 매우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신약성서보다 아주 오랜 고대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훨씬 더 복잡하고 흥미로운 점도 없잖아 있다. 현대에서 구약성서의 시대를 떠올린다는 것은 태고적의 전설 마냥 아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잖은가. 그런데 모든 상상력들의 배후에는 기본적으로 일말의 정치성도 함께 놓여 있음을 우리는 또한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이른바 과거의 역사는 무의식적으로 지배받는 현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상적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는 사실을 우리는 흔히 망각하곤 한다. 



2. 몸말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휘틀럼의 본작은 나 자신이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구약성서 관련 연구서들보다도 더욱 거세게 얻어맞았던 거의 메가톤급 충격의 저서라고 할 만한다. 사실 ‘충격’이란 표현도 실은 우리 자신들이 매우 앞서나간 정보들을 취하지 못하고 열악한 정보의 빈곤에 처해있음을 의미해줄 따름이다. 열악한 정보의 빈곤들은 내가 볼 때 오늘날 한국의 구약성서 학계의 현실도 예외일 순 없다고 보여지는데,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구약성서 역사에 대한 일반적 상식들을 여지없이 허물어트려 버리는, 매우 놀랍고도 굉장한 저서라고 하겠다.

 

일단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이라는 책의 제목부터가 뭔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즉,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자체가 발명된 과거사라는 것이다. 발명이라니? 당연히 매우 쇼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부제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 이것이 바로 그 발명의 숨은 이유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란 사실상 서구의 근대와 현대사 안에서 이해관계와 관련한 <상상의 정치학>을 통해 발명된 것으로, 그것의 성서신학적 학문적 확립은 철저히 팔레스타인 역사를 침묵시키고 해체시켜 나간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본서는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휘틀럼은 애초에 하나의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쓸려고 마음먹었던 성서연구 학자였다. 그런데 세상에나! 휘틀럼은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자료는 고사하고 이들의 역사 자체가 송두리째 날라간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발명이라는 거대하고도 뿌리 깊은 서구인들의 음모와 정치적으로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즉,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파헤쳐 나가면 나갈수록 발견되는 것은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가 고대 이스라엘 중심주의 역사기술에 의해 철저히 방해받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흔적과 자취들만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일단 그 연구 작업의 방향을 바꾸어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쓰기 위한 전초전으로서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가 어떻게 해서 철저히 해체되어 왔고 침묵당해 왔는지를 먼저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너무나도 치밀하게 자료들을 분석하고 논증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나로선 그의 작업 앞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만큼 기가 질려 버릴 정도라고 하겠다.


만일 구약학을 조금이라도 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벨하우젠-알트-노트-올브라이트 등등 이러한 사람들이 구약학에서 차지하는 권위가 얼마나 지대한 것임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휘틀럼의 칼질 앞에서는 그저 맥없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진다. 어디 이들만 그런가. 진보 진영의 민중신학계에서도 활발히 논의되었던 조지 멘델홀(G. E. Mendenhall)이나 노만 갓월드(N. K. Gottwald) 역시 휘틀럼의 치밀한 비판 앞에서는 맥을 못쓰고 있는 형국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착에는 크게 정복설, 이주설, 사회혁명설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멘델홀이나 갓월드는 유명한 사회혁명설의 주창자들이다. 이 사회혁명설 입장은 앞의 정복설이나 이주설을 크게 수렴하고 극복하는 측면이 있어서 매우 앞선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고전가설과 제1수정주의 견해까지는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과 기원을 말할 때 대체로 기원전 12~10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는 주로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해당한다. 


반면에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최근에까지 대두된 제2수정주의 견해는 애초에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변별적 성격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다른 여러 집단들과 아주 두드러진 분별된 특색을 갖지 않고 있었으며,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특징적 성격은 기원전 10세기보다 몇 세기가 더 지난 훨씬 후대에나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 같은 최근의 연구 경향을 내포하는 제2수정주의 견해는 아직 국내 구약학계에선 본격적으로 소개되지도 못한 형편이라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나마 국내에 소개된 제2수정주의 저작으로는 J. M. 밀러와 J. H. 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6)와 I. 핑컬스타인과 N. A. 실버먼의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까치, 2002) 정도 들 수 있다.


국내의 형편이 이러한 데도, 휘틀럼은 지금까지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학계의 논의들과 이러한 제2수정주의 견해조차도 고대 이스라엘 중심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휘틀럼은 지금까지의 구약성서학은 고대 이스라엘 중심의 기술이었고, 그것은 매우 부당하고 편파적인 것에 기초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고대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에서 이스라엘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거주자들 가운데 하나임에도 많은 구약학자들의 기술은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이라는 이분적 구도에서 나눠보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매우 앞서나간 선진적 민족으로 특화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미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다른 여러 집단들보다도 훨씬 우월하고 특별하다는 시각인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존 구약성서학자들의 주장들을 꼼꼼하게 살펴볼 경우, 제반적인 고대 역사의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들에 엄격하게 기초되어 있지도 않으며, 결국은 종교 신앙에 기반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비판 자체가 다분히 배제되거나 종종 침묵되어 온 경우가 많았었다는 점이다. 이 부당성은 성서고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에서 볼 때도 고대 이스라엘이 자리했다는 동부 산악지대에는 유달리 발굴 탐사들이 많이 몰려 있어 왔던 반면에 고대 팔레스타인들이 자리했던 서부 해안 지역과 평야 지대에 대한 발굴은 그 비할 바가 못될 정도로 거의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라, 이러한 점들이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 연구에 대한 편파성과 부당성을 예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휘틀럼의 주장은 이른바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관련한 모종의 정치적 이해관계들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즉, 가장 첨예하게 놀라운 사실은, 고대 이스라엘을 연구하는 기존의 모든 학문적 주장들의 편파성과 고고학적 탐사의 편파성의 이면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유럽의 근대 국민국가관 그리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시온주의 운동이 그 이면에 자리해 있다고 주장한 점에 있다. 결국은 다시 말해서, 고대의 역사를 세우는 저 작업들은 오늘 현재의 역사의 정치적 행보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휘틀럼은 20세기 이스라엘의 국민국가 재건에 동참하고 지지했던 많은 유럽인, 미국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성서 연구 안에서도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재건하는 작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리엔탈리즘은 구약성서 연구 전반에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자리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고대 팔레스타인의 역사의 침묵을 강요하고 억압시켜 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성서학계에서 지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결국 고대 이스라엘의 ‘성지’나 ‘예레츠-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으로 맞바꿔 사용되거나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는 20세기 중동분쟁의 정점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오늘날의 분쟁을 전제한다면, 사실상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쟁관계에 있는 용어이다. 더구나 ‘에레츠-이스라엘’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본질은 이 용어가 1948년 5월에 선포된 이스라엘 국가 독립선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도, 결국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들이 구렁이 담 넘듯 성서학계에 들어와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가 그 고유한 의미를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사용되는 반면, 그 땅의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용어는 성서학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땅은 있는데, 그곳의 거주자들을 일컫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용어는 성서학문의 세계에선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아직 개화하지 못한 미개한 사람들 혹은 익명의 거주자들일 뿐이며, 대신에 ‘이스라엘인’이라는 용어가 들어서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구약성서 공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공간이 자연스레 ‘이스라엘 땅’으로서 인식되기에까지 이른다. 


서구인들에게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의 재건은 사실상 기독교 역사에 기반해왔던 서구 전체 역사의 뿌리를 탐사해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따라서 저들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간에 ‘고대 이스라엘’을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거의 두 세기 동안 막대한 기금이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캐내기 위한 탐사와 연구에 쏟아 부었다는 점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열띤 탐사 분위기에서, 예컨대 돌 하나에 새겨진 다윗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국가로 전환되어 전성기 때의 다윗 제국을 예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로 과장되기에까지 이른다. 돌 하나의 비문이 다윗 제국이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예증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임에도 불구하고 성서고고학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고 휘틀럼은 폭로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성서고고학만큼 매우 정치적 이해관계에 뿌리박고 있는 학문도 더 없이 드물다고 말한다. 즉, 연구자들은 이미 발굴 이전부터 그 어떤 목적을 전제하고서 탐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정치학은 과거의 역사를 변형시키기에 충분하다 고 말한다.


이 책은 한국교회의 열악한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앞서 나가도 한참을 앞서 나간 매우 첨단의 연구서다. 이 연구서와 견줄 경우 진보 진영도 예외 없이 한참이나 뒤쳐져 있는 형편이다. 현재의 진보적 구약학계도 그나마 고전가설과 약간의 수정주의적 견해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며, 그렇기에 전문적인 구약학자들도 오늘날의 제2수정주의적 견해에 대해선 잘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 소개된 저서들도 매우 드물뿐더러 어떤 경우는 기독교 성서연구 학계에서 책이 출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 역사 연구의 분과에서 책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지경인데 휘틀럼의 이 저서는 그러한 제2수정주의적 견해까지도 넘어서는 연구 성과물이라, 정보력에서 한참이나 뒤쳐지고 있는 열악한 한국교회의 구약성서공부의 상황과 관련해서 볼 경우 얼마나 앞선 것인지를 짐작케 할 정도다. 무엇보다 휘틀럼은 기존의 비판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문헌들을 매우 꼼꼼하게 훑어보고 있기 때문에 거의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매우 치밀하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나간다. 쇼킹스럽고 황당할 정도의 책 제목에 비해 정작 그 내용을 읽어보면 거의 틈새가 안보일정도로 너무나 정교하고도 촘촘하게 짜놓았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책의 한계는 무엇인가? 내가 볼 때 그것은 잃어버린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다시 살려내고자 하는 제2부에서나 본격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휘틀럼의 논지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입장을 곧잘 반영하듯<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입장에 기반해 있다. 나는 역사 서술에 있어 탈식민주의 입장은 기본적인 출발로서 당연히 수용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것은 아직 대안을 주고 있는 그러한 형편에 있진 않다. 왜냐하면 워낙 작금의 현실이 부당한 침해와 억압의 굴레에 먼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당성을 폭로하고 벗어나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을 수 없겠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복원작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휘틀럼은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연구가 적어도 인도 역사와 관련한 ‘서벌턴 연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하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파열된 역사에 대한 복원과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책은 절반의 성공으로 얘기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명확히 말해두고자 한다. 물론 그것이 비록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더라도 매우 의미 깊은 것이라는 점에선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3. 나오며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날에 구약학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휘틀럼이 제기한 이 첨예한 문제적 의식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보는 게 책을 읽고 난, 나 자신의 견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오늘날 구약학 공부에 대한 형편을 살펴볼 때 아직은 여전히 요원한 저 먼 나라 얘기일 뿐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는 연구 작업들과 노력들이 결코 멈춰지거나 묻혀져선 안될 것이리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늘 우리의 구약성서 공부는 비정치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학습임을 알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휘틀럼의 이 저서에서 받았던 가장 결정적인 충격은 다른 게 아니다. 현재의 내가 성서를 읽고 독해한다는 것은 옛날 옛적 과거에 일어났던 고대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지금 현재 세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엮여 있는 오늘의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는 것 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 이 책에서 받은 결정적 충격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성서공부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이렇게 억압되고 파열된 역사의 현장 앞에서 우리는 서구 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그토록 침묵 당해왔던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함께 쓰러져 갔던 하나님을 우리는 다시 불러내어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분명 약자의 하나님이며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우선적으로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고통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는지. 


다시금 강조한다.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적어도 억압받는 약자를 위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점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운동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현실은 부당하게 삐뚤어져 있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의 정치 곧 하나님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힘없는 약자를 위한 정치인 것이며, 그러한 정치야말로 궁극적으로는 공평성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성서를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현재 당신의 정치적 행보는 어떠한가?

출처: http://freeview.org/bbs/print.php?bo_table=f003&wr_i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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