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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철학의 왕국이었다.



인문학으로 살아가기 - 전 세계인이 조선선비들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


조선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알려지지 않는 좋은 면들을 재조명함으로써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복구해보고자 한다.


1.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민족이 사는 국가였다

옛날 조선에서는 ​아이가 새벽에 오줌을 싸면 다음 날 동네에서 소금을 받아오게 시켰다. 얼핏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미신적인 풍습 같지만 여기에는 조선인들의 심오한 사상이 반영되어 있었다. 음양오행상 새벽은 수기(水氣)가 지배하는 시간대이므로, 수기운이 약하면 신방광 계통에 이상이 온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이 때 오줌을 지리기가 쉬운 것이다. 반면, 염기의 양이온인 Na+와 산의 음이온인 Cl-가 만나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소금은 활동전위를 발생시켜 신경물질을 전달하고, 삼투압을 조절하고, 신체 내 노폐물을 해소시키는 기능을 하는 원소인데 오행상 생명력을 주관하는 수기로 본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아이의 부족한 수기를 채우라는 의미에서 아침에 이웃집을 돌며 소금을 받아오게 한 것이다. 순수한 연역적 추론(음양오행)에 의거한 조선인들의 과학성이 놀랍지 않은가?


조선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영적인 민족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사람들만큼  이음양오행 이론을 철저하게 지킨 민족이 없었다.

먼저 음양이 합하여 이루어진 태극은 한민족이 예로부터 건물, 가구, 일상용품에 애용하는 문양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국기로 이어지고 있다. 

 

오행은 목(木, 봄;동쪽), 화(火, 여름;남쪽), 토(土, 중앙), 금(金, 가을;서쪽), 수(水, 겨울;북쪽)의 다섯 기운이 서로 상생하고 상극하며 우주의 조화를 이룬다는 사상으로, 오행설에 따라 유난히 5를 좋아했던 민족이 한민족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5부족, 고구려의 중앙의 5부와 지방의 5부, 백제의 5부 5방제의 행정구역, 통일전 신라의 지방 5주제, 발해의 5경 제도, 조선의 한양을 5방으로 나눈 것과 장시가 5일장으로 열린 것 등이 오행설과 관련이 있다. 오행설은 상생과 상극의 원리 속에서 우주만물이 생성, 변화, 발전한다는 이론이지만, 한국인은 토(황제)-목(하)-금(은)-화(주)-수(진)-토(한)로 상극적이고 투쟁적인 중국보다 평화적인 상생의 측면을 선호한다. 그래서 사람도 상생의 순서에 따라 태어난다고 보아 목→화→토→금→수의 원리로 이름을 짓는다. 이것이 항렬인데 예를 들어 조부대에 흠(欽)과 같이 쇠금(金)변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아들대의 항렬은 연(淵)과 같이 물 수변이 들어가게 짓고, 손자대는 동(東)·상(相)·식(植)자와 같이 나무목(木)변이 들어가게 작명을 한다.

한편 왕조의 교체도 상극의 논리인 중국과 달리 상생논리로 이해하여 신라는 금, 후고구려와 고려는 수, 조선은 목의 왕조로 인식해 각 왕조는 이를 상징하는 9, 6, 8의 숫자를 애용하였다. 예를 들어 박-석-김으로 왕위가 교체되다가 김(金)으로 왕위가 세습된 신라는 금(4, 9)을 선호하였는데, 지방의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고, 중앙의 군사도 9서당으로 편재하여 금의 왕조임을 나타내었다. 수는 후고구려와 고려가 사용하여 후고구려의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사용했고, 고려는 전국을 6도(5도 양계)로 나누었다. 또한 숙종때 수도를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으나 남경의 주인은 목성을 가진 자가 주인이 된다는 설 때문에 수도를 옮기지 못하였다. 인종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1126년)도 목성인 이씨로 정권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목성을 가진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목(木, 3·8)을 표방한 조선은 유난히 3자를 선호했는데. 3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 삼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 삼법사(형조·사헌부·한성부), 3년마다 자(쥐띠해), 오(말띠해), 묘(토끼해), 유(닭띠해)년에 과거를 보는 식년시를 시행하고, 전국을 8도로 나눈 것과 장시가 5일장으로 열린 것은 모두 음양오행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오행을 오상(인·의·예·지·신), 방위(동·서·남·북·중), 빛깔(청·백·적·흑·황), 짐승(청룡·백호·주작·현무·황룡), 오장(간장·폐·심장·신장·비장)과 관련시켜 받아들이는 자세도 매우 진지했다. 

사실상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서울)은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세워진 계획도시였다. 북쪽에 백악산(북현무)을 주산으로, 왼쪽에 낙산(좌청룡),  오른쪽에 인왕산(우백호), 남쪽에 남산 목멱산(남주작)이 서 있었다. 


가장 중요한 궁전인 경복궁의 3개 문을 차례로 지나면 왕의 정사를 돌보던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전 중앙은 토(土), 황제의 자리다. 그 뒤쪽 깊숙한 곳에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이 있다. 교태전의 모습은 태극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천지의 음양의 기운이 한데 어울려 만물의 근원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쪽에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오행의 목(木)을 뜻하며, 세자는 자라서 왕이 된다는 뜻이다. 서궁(경운궁)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는데 대비의 거처로, 대비는 지는 해라는 의미로 오행의 가을(金)을 나타내고 있다. 

궁실의 ​대문은 우주의 기운이 흐르는 입구로 건춘문, 오행에서 목(木)으로 봄을 마주하는 문이다. 서쪽에는 영추문, 오행의 금(金)으로 가을을 보낸다는 뜻이다.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한쌍의 해태의 눈은 관악산을 응시하고 있는데, 왜 광화문 앞에 세워진 것일까? 해태는 물을 관장하는 신으로써 물은 오행상 수(水)에 해당되면서 한강 너머의 관악산은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水)와 화(火)가 있어서 물로써 불을 제압하기 때문에 해태상을 양쪽으로 세워 관악산의 화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남대문의 옛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으로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예(禮)는 오행중 불인 화(火)로써 방향으로는 남쪽을 나타내는데, 숭(崇)은 글자의 모습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는 이유는, 세로 현판으로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이열치열의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임진왜란과 6·25전쟁도 무사히 넘겼지만 2008년 2월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북쪽의 동대문의 현판 역시 특이하다. 다른 곳의 현판이 세 글자인 데 비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네 글자다. 한양의 가장 큰 약점은 동쪽 약산의 기세가 약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동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들을 통해 서울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때문에 1869년 고종 때 '흥인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에 산맥을 뜻하는 '갈 지(之)' 자를 넣어 좌청룡의 약한 기운을 보강했다고 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음양오행에 따라 설계된 것이 왕궁이 터를 잡고 있던 강북이었기 때문에 강남보다 지진 빈도가 현저히 낮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한국의​ 산천 곳곳에서도 음양오행 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산은 그 기세에 따라 양산과 음산으로 나뉘어 진다. 탑의 둥근 모양은 음탑, 각진 모양 양탑이라 불린다. 남근석은 대표적인 양의 기운이다. 양기를 누르기 위해 물을 갔다 붓는다. 좋은 기운은 더욱 북돋아 주고, 약한 기억은 보충하는 것이 풍수지리의 원리이다. 

​마이산은 80여개의 다양한 돌탑이 쌓여있는데, 특이하게도 양산과 음산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축조된 탑들은 우주순행의 이치를 담고 있다. 천지탑(음양탑)은 마이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탑으로 음양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탑은 동서남북으로 한쌍으로 음돌과 양돌을 싸놓고 있다. 마이산의 탑들이 200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태극 모양으로 안고 도는 형세로 마을 입지 조건으로 최고로 꼽힌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장승을 만나게 된다. 장승은 남녀를 상징하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마주 보거나 나란히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양인 천하대장군은 양각으로 깎고, 음인 지하여장군은 음각으로 깎는다. 이 역시 음양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정승과 함께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는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도 음양론에 따라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했다. 대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사랑채가 있고 서쪽에 안채가 있다. 안채로 들어가면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는 여성만의 공간이다. 안채는 여자들의 주 생활 공간이다. 가사 공간이기도 하다. 마루를 따라가면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주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랑채는 건축에서 하늘에 해당된다. 사당은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죽음은 탄생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오행론적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아이들의 거처인 동채는 탄생에 해당하는 동쪽에 해당한다. 곳간은 모으는 힘이 강한 금(金)의 방향인 서쪽에 위치한다. 

북쪽에는 부엌이 있다. 아궁이는 생산을 의미하는 자궁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엌은 집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신앙의 대상이었다. 불을 다루는 부엌에는 화재 예방을 위해 숫자나 한자를 써붙었다. 장독대는 북쪽 제일 끝에 위치해 있다.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는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고추의 붉은색은 양색으로 음인 악귀를 쫓는 힘이 있고, 숱의 검은 빛은 음색으로 귀신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장독대는 성역처럼 여겨졌기에 금줄로 잡귀의 침입을 금하고 있다.


 

​한국의 집은 천지인 세계관을 반영한 소우주다. 하늘에 닿기 위한 계단은 신성한 장소이며, 기둥은 권위를 상징하고, 지붕은 하늘의 상징이다. 네개의 기둥이 둘러싸여진 단은 신성한 영역을 상징한다. 

 

공동우물은 마을의 생명줄로 마을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예로부터 우물을 잘못파면 마을에 병고가 생긴다고 믿었다.그래서 재앙을 막고 1년내내 물이 잘 솟으라는 샘굿은 동신제(洞神祭)에서도 가장 좋은 볼거리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서 농기의 삼색은 각기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이다. 농악은 음양오행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우리의 민속음악이다. 

​혼례(婚禮)는 저물 때 행하는 예식이라는 뜻이다. 결혼이 남자와 여자, 즉 양과 음의 결합이기 때문에, 시간도 양인 낮인 양과 밤인 음이 만나는 저녁 때 하는 것이다. 신랑이 입는 청색은 태양을 상징하는 동방이기 때문에 양기가 왕성한 것을 상징한다. 신부의 다홍색은 기쁨을 표현하고 액혼을 막고, 흙을 상징하는 노란 저고리는 탄생과 새출발을 의미한다. 전통 혼례복은 부부금실과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음양이 끝없이 돌며 태극을 만드는 강강술래는 이러한 생명의 과정을 재현하는 민속놀이이다.

​한복에도 음양오행의 이치가 숨어있다. 윗옷과 아래옷으로 나뉘어 만든 것은 양인 상채와 음인 하채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녹색 저고리(활옷), 홍색치마는 목생화(木生火)의 상생의 원리를 담고 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3세기 초에 이미 오색을 갖춘 색동옷이 출연하고 있다. 아이들이 주로 입는 색동옷은 오행을 두루 갖춤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오방색이 잘 들어간 것이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궁중 무용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을 상징하는 오방처용무는 음양오행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목(木)을 상징하는 동반신장은 청색 의복을 입고, 화(火)를 상징하는 남방신장은 적색 의복을 입으며, 금(金)을 상징하는 서방신장은 백색 의복을 입으며, 수(水)를 상징하는 북방신장은 흑색 의복을 착용한다. 중심에 위치한 중앙신장은 토의 색깔인 황색 의복을 입고 있다. 다섯 신장은 원을 돌면서 오행의 상생 상극을 그려낸다.

우리의 주식인 밥 속에도 오행의 기운이 다 들어있다. 적당한 양을 맞추어 붓는 물은 수기(水氣), 나무의 불을 피는 밥음으로 화기(火氣)와 목기(木氣)를 고루 갖추게 된다. 또 밥을 짓는 가마솥은 쇠로 만든 금기(金氣)다. 음식이 놓이는 단상은 주로 둥근 상태로 하늘을 나타낸다. 다리가 네 개인 것은 땅을 상징하고 음을 상징한다. 둥근 숫가락은 양, 긴 젓가락은 음으로, 수저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낸다. 어륙은 불에 구은 것으로 화기(火氣)가 포함되어 있고, 국과 찌개 간장 동치미 등은 수기(水氣)가 포함되어 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쇠(金氣)나 흙(土氣)으로 만든 도자기다. 이렇듯 음식과 식재료로 이루어진 상차림에는 음양오행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

쌀, 보리, 수수, 콩, 조 오곡밥은 오행의 원리를 두루 갖는다. 김치는 오색은 물론이고 오미를 두루 갖추고 있다. 대추의 쓴맛과 단맛, 고춧가루의 매운맛, 젓갈과 소금의 짠맛 익었을 때의 신맛 등 김치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완벽한 식품이다. 


음양오행 말고 조선의 무속신앙은 어떤가? 무신도 속의 붓다와 보살 등 무속신앙은 중국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가장 오래된 한국적인 신앙이다. '신난다'는 말과 그 어원인 '신명(神明)난다'도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멋의 원류인 풍류나 요즘 유행하는 한류나 월드컵 때 붉은 악마도 결국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신바람(神氣)은 샤머니즘(巫氣)과 통한다. 



2. 조선은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민주주의 국가였다


조선 중기 선조 이후 사림의 정권 독점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예송논쟁 등 하찮은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국가로 전락하였지만, 조선초 훈구파, 관학파에 의해 구축된 조선의 시스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놀랍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를 이해하면, 한국인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윤리관, 생활방식 등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조선은 개천에서 용 나는 기회평등지향 사회였다​.

500년간 유지된 조선의 과거제도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조선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는 양반뿐 아니라 평민과 서얼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대거 과거에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를 출간했다. 이 책을 보면 조선 전기 태조∼선조 대에 선발된 문과 급제자는 모두 4527명이며, 이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는 1100명으로 전체 급제자의 24.3%를 차지한다. 신분이 낮은 1100명 중 3품 이상 고관에 오른 급제자는 306명에 이른다.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태조∼정종 대에 40.4%, 태종 대에 50%였다가 광해군 대에 이르면 14.6%로 낮아지고 다시 점차 증가해 고종 대에 이르면 58%대에 이르는 U자형 추이를 보인다. 조선 중기인 17세기를 전후로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문벌가문이 득세하면서 신분이 낮은 급제자들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시험을 통한 신분 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역동적이었다.

애초에 조선시대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양천제를 지향했다(이후 변질된 것이 문제였다). 양반가에서 태어났더라도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집안에 벼슬한 사람이 없거나 집안에 돈이 없으면 평민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양반은 농사 짓고, 남의 집 허드렛일도 해주며 살았다.

 

또 조선시대는 노비고 여인이고 할 것 없이 왕에게 글로 상소를 할 수 있었다. 글을 못 쓰는 서민들은 왕궁 옆에 매달아 둔 신문고를 울려 형조의 당직관리에게 민원을 제기할 수 있었고, 보고 내용은 왕의 귀에 들어갔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는데,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인데 그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이다.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었으며, 최소한도의 합리성도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 때도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는 등 법의 공포와 시행에 수 년이 걸렸다.​

조선 시대의 법제도도 상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조선 왕조는 사형수에 한해 3복제를 실시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간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는데,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보면 왕들은 사형수가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 무수히 노력을 했고,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3. 조선은 세계적인 복지 국가, 공동체주의 사회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아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라"는 말을 했고, 플라톤은 "장애아는 사회에서 격리시켜라"는 말했다. 중세 유럽에서 장애인은 신에게 벌을 받은 사람으로 장애인에게 고문과 사형 집행이 가해졌다.

 

서양에서 자행되었던 장애인의 잔혹한 역사에 비해 조선은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국가의 기본 정책 기조로 삼았다.

 

독질인(篤疾人) - 매우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

잔질인(殘疾人) - 몸에 질병이 남아있는 사람

폐질인(廢疾人) -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

 

이처럼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겼던 조선시대 왕들은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했는데 세종 14년(1432년 8월 29일)에는 이런 법령이 반포되었다.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이 있는 사람은

나이가 70세가 차지 않았더라도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시정 -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군역에서 면제된 사람)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 (오늘날의 병역면제), 장애인을 정선껏 보살핀 가족에게는 표창제도 실시되었다.

 

반면 장애인을 학대하는 자에게는 가중 처벌을 내리는 엄벌제도를 시행해서 장애인이 무고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고을의 읍호(邑號)를 한 단게 강등시켰다. 장애인을 천시했던 서양과 달리 선진적인 복지 정책을 펼쳤던 것이 우리 선조들의 나라 조선이었다.

 

특히, 장애인의 자립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 장애인을 위한 전문직 일자리 창출이 그 예다.

 

세종 16년(1434년 11월 24일)에는 '관현(관악기와 현악기)을 다루는 시각장애인 중에 천인인 자는 재주를 시험하여잡직에 서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애인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 위주의 채용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명통시(明通寺)가 설립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명통시에 소속된 장애인들은 기우제 등 국가의 공식 행사를 담당 그 대가로 노비와 쌀을 받았다. 장애인에 대해 편견과 차별없는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국가관 때문에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척추장애인 허조 -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

간질장애인 권균 -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

지체장애인 심희수 -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

청각장애인 이덕수 -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

 

조선시대, 장애인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종 13년 (1431년), 박연이 아뢰기를 '옛날의 제왕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거문고를 타며 시를 읆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밖에도 조선이 이상적인 공동체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두레'는 농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부락 단위로 둔 조직이다. 두레는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이겨내는 공동체 생활의 본보기였다. 절기마다 빚어먹는 과자와 떡, 술과 명절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벌이는 각종 놀이와 굿판도 이웃끼리 나눔을 위한 것들이었다. 떡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고 소외된 이웃을 감싸주었다. 노동요와 타령, 육자배기, 판소리, 농악, 살풀이 등의 춤사위도 심신의 조화를 이루게 하며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공동체의 건강법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실시한 '새마을 운동'이 농촌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4. 조선은 세계적인 인문 국가였다


조선시대 왕은 바로 곁에 사관을 두고 있었다.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정리한 문서를 목판활자로 찍고,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정본을 남겨주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500년 역사가 실록으로 남았다. 

왕에게 올릴 보고서를 정리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2억 5,000만)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난다고 한다. 

왕들이 쓰는 일기였던 일성록(日省錄)도 정조 때부터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150여년간 계속 쓰여졌다. 선대왕들이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고민해서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이렇게 각종 문서에 적힌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이다.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약진)에서부터,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법이 있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다. 

조선의 세계적인 인문학적인 수준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감은 있지만, 조선의 과학기술 역시 서양을 제외한 세계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이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한 일이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 갈릴레오의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다. 결국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이 그로부터 100년 뒤인 1767년이다. 

 

한국에서는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가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고 말해 지동설을 선언했다. 이것이 1400년대이다. 서양의 1632년, 또는 1767년보다 한참 앞서 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을 다룬 책으로,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이순지가 1,444년에 만든 달력은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낸 뒤 만든 것인데,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이순지의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다. 1,400년대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이다. 

 

조선에서는 국학의 명산과(수학과)를 졸업하면 공무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산관(算官)이라고 했다. 산관들은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정밀한 수학적 지식을 이용했다. 이런 제도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시대 때 수학교재로 썼던 책 중 하나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을 보면, 2차 방정식과 미지수 다섯개(5원 바정식), 피타고라스의 정리(구고의 정리), 원주율(밀률), 삼각함수 문제 등 다양한 수학 문제들이 나온다. 우리는 벌써 삼국 시대 때부터 이 정도 수준의 수학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학자 홍대용이 쓴 <담헌서(湛軒書)>에도 cos, sin, tan 등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다.  



5. 조선의 조공 시스템은 만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의 사대주의를 문제삼는다. 또 조선의 조공도 문제삼는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賜與)를 내린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나라 멸망의 주요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의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이와 반면에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싶어도 바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사대주의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명나라와 청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건축 양식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초라하고 보잘 것 없기가 그지없다. 당장 세계에 자랑할만한 문화유산이 빈약하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만들었던 시황제의 만리장성이나,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면, 조선의 볼품없는 건축은 역설적으로 조선에서 백성들을 억압하는 정치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끝으로, 조선의 조경 양식은 화려한 중국, 섬세한 일본에 비해 시각적인 임팩트는 떨어지지만,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동화되도록 만들어졌다. 정원을 조성할 때는 지형을 함부로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물의 이용에 있어서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을 이용했고 인공적인 힘을 가하여 하늘에 쏘는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꽃이나 나무는 생성하는 생물이므로 관상수 따위를 심어 인공의 수형을 만드는 가지치기 작업을 피하였다. 정자나 누각을 배치 할 때도 자연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여 연못이나 강가, 산자락에 세워 원을 감상하는 장소로 삼았다. 무심한듯 자연스러운 조선의 조경양식은 한민족의 솔직하고 순수한 본래의 성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stratic007/220426988803



철학왕국과 조선선비 이야기



인문학 고전콘서트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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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찾은 고조선의 강역 - 고대사학자 심백강


<심백강 원장은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후학(後學)들이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연구할 수 있도록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강역(疆域) 문제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서 우리 고대사는 그 뿌리인 출발부터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우리 상고사(上古史)가 이처럼 부실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사료(史料) 부족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후반 일연(一然) 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이며, 그나마 책 한 장 분량에 그친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는 우리 고대사를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일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미로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 사학계(史學界)는 일제가 연구해 놓은(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해 놓은) 고대사(고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그는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라며 <사고전서> 등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이런 우리 사학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학자가 있다. 바로 심백강(沈伯綱)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이다. 그는 “상고사(上古史)는 사료가 생명”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20여 년간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사료(1차 사료)의 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심 원장이 눈을 돌린 사료는 바로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에 학자 1000여 명을 동원해 10년에 걸쳐 청나라 이전 중국의 사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료의 보고(寶庫)이다. 심 원장은 8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료를 포함하고 있는 <사고전서>를 이 잡듯이 뒤져 우리 고대사와 관계된 모든 기록을 추려내 책으로 엮어냈다.

 

그는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단군(檀君)과 고조선 관련 자료도 모두 발췌해서 후학(後學)들이 우리 상고사 관련 1차 사료를 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문제는 이렇게 심열을 기울여 만든 책이지만, 모두 한문으로 된 책이라 후학(後學)들이나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어렵다는 것. 심 박사는 요즘 국사학계에서 한문 원전을 해독할 수 있는 교수나 학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고전서>의 우리 역사 관련 기록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지난 6월과 8월 <사고전서> 자료 중에 일차적으로 고조선과 한사군(漢四郡)의 낙랑(樂浪)관련 자료를 모아 펴냈다.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 역사)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두 책에서 심 원장은 고조선과 낙랑관련 사료의 원문과 번역문, 해설문, 주석을 실어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편집했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사료는 국내학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인용이나 번역이 된 적이 없는 초역(初譯) 자료들이다.



낙랑의 위치가 곧 고조선의 강역 


고전의 정확한 번역과 상세한 주석, 그리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이는 것은 단순한 한문 독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국책연구기관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심 원장 개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높은 한문 해독 실력을 갖춘 한학자이자 역사가, 문학가이기 때문이다. 한중(韓中) 고대사 전공으로 중국에서 역사학박사 학위를 받은 심 원장은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주요 고전과 역사 기록물을 번역했다. 또한 월간 현대문학 출신의 문학평론가로서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조예가 깊은 학자다.

 

지난 10월초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는 민족문화연구원 사무실에서 심백강 원장을 만났다. 심 원장은 “이번에 펴낸 두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중국의 새로운 사료(사고전서)를 통해 고조선의 발상지와 강역을 고증한 것으로, 오랜 고대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사의 척추를 바로 세운 작업”이라고 자평했다.

 

-원장님께서는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사고전서>에서 우리 민족과 고대사 관련 자료를 많이 발췌하여 책으로 엮으셨는데, 이번에 특별히 <사고전서>에 있는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자료를 따로 묶어낸 이유가 있는지요.

 

“그동안 펴낸 책은 원전(原典)을 그대로 발췌해서 엮은 1차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작업은 이런 사료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하는 2차 작업에 해당합니다. 국내에 사료의 원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적이고, 특히 요즘에는 역사학과 교수 중에도 사료의 원전을 제대로 해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일이 만무합니다. 따라서 제가 후학들을 위해 단순히 1차 자료를 모아서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자료들을 직접 해석하고, 주석과 해설을 붙여 엮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고조선과 낙랑 부분에 관한 작업을 했으니 이어서 삼국시대에 관한 사료 정리 작업을 할 것입니다.”

 

-‘낙랑’은 한나라 사군(四郡)의 하나인데 어째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지요.

 

“고조선이나 낙랑은 다 우리 상고사에 속합니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사료에 등장이라도 하지만, 중국 사료에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은 한무제(漢武帝: BC 156 ~ BC 87)가 고조선(위만 조선)을 침략해서 설치한 한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도) 중의 하나기 때문에 중국 문헌에 많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이 낙랑과 현도(玄菟)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낙랑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존 강단 사학(이병도 학설을 계승한 현재의 통설)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이 부근이 되는 것이고, 낙랑이 대동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다른 곳이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더 이상 '사료의 빈곤' 주장은 통하지 않아"

 

-<사고전서>에 낙랑이 평양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요.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입니다. 20여 종의 각기 다른 자료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동쪽, 내몽고 남쪽, 요녕성 서쪽, 즉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요서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동안 강단 사학이 상고사 연구에서 그토록 강조해 온 ‘사료의 빈곤’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 낙랑 관련 사료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국사 책에 실린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이 압록강과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이병도 학설을 따르고 있다. 

심백강 원장은 "낙랑의 영토가 곧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에 낙랑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우리 고대사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이미지 출처: 영토한국사(소나무)


-현재 학계의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첫 수도를 중국 요녕성(遼寧省) 오녀산성(홀본 혹은 졸본)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요.

 

“그 문제는 낙랑의 위치가 어디인가만 밝혀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출발지가 바로 낙랑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를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으로 해놓았는데 이는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가정하에 고정된 학설입니다.

 

이병도씨는 그 가운데 낙랑군이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학설에 반발한 사람들이 소위 민족사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같은 분들로 이들은 낙랑을 요동(신채호)이나 요서(정인보 등) 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신채호ㆍ정인보 같은 민족사학자들도 당시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중국 측 1차 사료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강역을 요동이나 요서지역 이상 확대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사고전서>를 보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현재의 심양(瀋陽) 부근을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죠?

 

“맞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요하의 동쪽인 요동 지방인 현재의 개주(盖州) 부근을, 정인보 선생은 요하의 서쪽 지방인 조양(朝陽)을 낙랑군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고전서>의 기록을 고증해 보니, 낙랑군은 하북성의 발해만을 끼고 현재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의 남쪽 일대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동으로 당산(唐山) 천진을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보정시(保定市) 수성진(遂城鎭)과 백석산(옛 갈석산)까지 이르는 지역입니다. 즉 이곳이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그 근거를 설명해 주시죠.

 

“당시 한나라 수도는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이었습니다. 한무제가 동쪽에 있던 고조선을 침략해서 낙랑군으로 삼은 겁니다. <전한서>(前漢書)에 ‘한무제가 동쪽으로는 갈석(碣石)을 지나 현도ㆍ낙랑으로써 군(郡)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갈석을 지나서 낙랑군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성현은 현재의 보정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의 서쪽이 바로 갈석산과 수성현이라는 의미이고, 이곳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 어디까지인지 국내 학계에서 정확히 연구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고전서>의 기록을 통해 서쪽 변경의 국경을 찾아낸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사고전서>등 중국에서 펴낸 1차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를 고증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의 주 활동무대(중심지)는 오늘날 노룡현 일대(하북성 동쪽 일대)로, 그 세력 범위가 동쪽 발해만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수성현, 동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이른다. 심 원장은 "이 하북성 동쪽 일대가 바로 우리 배달민족(동이족)이 수천년간 한족(漢族)과 흥망을 다투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최근 펴낸《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북경 부근에 있는 '조하'가 예전에는 '조선하'였다는 것을 고증했다. 그는 "진시황과 한나라 시절에는 이 조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날 요녕성의 요하를 기준으로 나눈 요동ㆍ요서와는 다른 지역"이라고 밝혔다. /구글맵



-그러면 <전한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이나 ‘수성현’이 현재 북경과 천진 남쪽에 있는 보정시(수성진) 부근인지 어떻게 고증을 할 수 있는지요.

 

“일부 민족 사학자들이 이병도의 낙랑군 대동강 유역설을 비판하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고증하려고, 나름 애를 썼습니다. 그중에 한 이론이 현재 ‘갈석산’이라는 산이 있는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秦皇島市)와 이웃한 창려현(昌黎縣) 동쪽 즉, 산해관(山海關) 부근을 낙랑군의 서쪽 변방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일부 민족 사학자들이 이곳을 고조선과 한(漢)나라와의 국경이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이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그 부근에 ‘갈석산’이라는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고전서>를 보기 전까지는 이 이론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중국 <사고전서> 기록을 차례로 고증하니 진황도시 부근의 갈석산은 <전한서>에 등장하는 그 갈석산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낙랑 위치 고증의 핵심인 '갈석산'과 '수성' 


-<전한서>에서 이야기하는 원래의 갈석산은 어디입니까.

 

“중국 역사상에 갈석산이 두 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갈석산입니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진(西晉: 265∼316) 시기에는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고,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당(隋唐) 시대 이후 갈석산이 지금의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盧龍縣)에 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수서 <지리지>, 당 두보의 <통전>, 송의 <태평환우기> 등). 문제는 갈석산이 있다고 언급된 북평군에는 ‘수성현’이 설치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서진 시대에 말한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갈석산과는 분명 다른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전한서>에 기록된 갈석산인데, 현재의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 부근에 있습니다.”

 

-그곳에도 갈석산이 있다면 왜 많은 학자가 찾아내지 못했습니까.

 

“현재 보정시의 수성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내려온 지명입니다. 낙랑군의 25개 현 중에 수성현만 빼고 현재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곳에 있던 갈석산은 도중에 이름이 바뀌면서 후대에 혼란을 준 것입니다.

 

<사기>에 보면 전국시대 종횡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문후(文候)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滹沱)와 역수(易水)가 있는데 지방이 2000리쯤 된다’(사기 열전). 이어서 그는 ‘연 나라가 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수익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을 하지 않더라도 대추와 밤의 수익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천혜의 땅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진은 바로 연나라 남쪽 변경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호타하와 역수는 지금도 하북성 보정시 남쪽에 있습니다. 역수는 역현(易縣) 부근에 있습니다. 소진은 이어서 ‘호타하를 건너고 역수를 건너서 4ㆍ5일을 넘기지 않아 국도(國都)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의 수도에서 남쪽으로 4~5일 거리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종합하면 갈석과 안문은 호타하와 역수 유역 부근에 위치한 연나라 남쪽 강토라는 말입니다. 안문은 현재 산서성 북쪽에 있는 안문산입니다.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의 하나인 안문관도 있습니다. 즉, 연나라 남쪽의 안문산과 함께 거론된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과 동일한 산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입니다.”

 

-현장을 가보셨습니까.

 

“제가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현장에 갈석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없습니다. 갈석산은 ‘백석산’이라고 글자 한 자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갈석산의 갈(碣)은 비석 중에 짤막한 돌로 비를 세우는 것을 특별히 ‘갈’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큰 것은 비(碑)라고 하고요. 그래서 합쳐서 비갈(碑碣)이라고 하는데 백석산에 가니까 산의 돌이 전부 비석 같은 모양의 갈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지맥으로 연결된 낭아산(狼牙山)이 있는데, 이 역시 산 위에 돌들이 삐죽삐죽 한 것이 이리의 이빨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백석산’과 ‘낭아산’이 예전에 바로 갈석산으로 부르던 산입니다.”

 


“낙랑의 평양 대동강 유역설은 어불성설”

 

-그러니까 진황도시 창려현 부근의 갈석산은 한무제 당시의 갈석산이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갈석산은 서한 말엽 신왕조의 왕망시대에 ‘게석산’으로 출발했다가,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 갈석산으로 개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ㆍ낙랑군은 바로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한사군이 압록강과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다면,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의 원래 갈석산은 물론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과도 수천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갈석산과 한반도 사이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백두산 등 큰 산이 있고, 조하(潮河), 난하(灤河), 대릉하(大凌河), 압록강 등 여러 큰 강이 있습니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수천리 밖에 있는 갈석산을 특징적인 산으로 들어 설명하지 않고, 백두산이나 압록강을 지나 현도ㆍ낙랑을 설치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만약 요녕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가장 특징적인 산인 의무려산을 지나서 설치했다고 했을 겁니다.”

 

-혹시 전한시대 기록이 오기(誤記)일 수는 없는지요.

 

“한무제가 압록강을 건너 고조선을 평정해 놓고 잘못 기록해 놓았다는 주장인데, 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예를 들어 <전한서>에서 이 말을 한 당사자인 가연지(賈捐之)가 낙랑군이 설치된 지 500년이나 1000년 뒤쯤 사람이라면 그동안의 역사를 고증하는데 착오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불과 50년 뒤의 기록입니다. 50년 전에 일을 말하면서 공간적으로 수천리가 떨어진 지리를 혼동할 정도로 큰 착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가연지는 한무제가 설치한 주애군(珠厓郡)의 폐기를 건의했고, 한원제가 이를 받아들였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가 사적인 저술이 아니라 황제에게 정중히 올리는 글에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이 기록이 잘못되었다면 후대에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을 텐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은 사대 식민사관적 논리를 따르는 근거 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그 밖에 낙랑군이 오늘날 보정시 부근이라는 근거가 더 있는지요.

 

“수성현에서 장성(長城)이 시작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곳이 만리장성의 기점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옛 기록에 모두 맞으려면 현재의 보정시 수성진이 예전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지명이어야 하고, 여기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또한 만리장성의 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장성은 오늘날 북경 위에 있는 장성이 아니라,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북경 부근에 쌓은 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성이기 때문에 ‘명장성’(明長城)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을 진시황의 장성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천리장성을 쭉 연결해서 쌓은 것만이 ‘만리장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연나라 장성이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기점이 바로 수성입니다. 거기가 예전 고조선과 접경지역이었으니까 당연히 장성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참고로, 현재 갈석산이 있는 산해관 부근의 창려현 쪽에는 연나라 장성이 없습니다.”

 


연나라가 점령한 고조선의 요서ㆍ요동은 북경 부근

 

-그나마 기존의 민족 사학자들이 고조선이나 낙랑의 서쪽 변경을 산해관까지 확장해서 보기는 했지만,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 부근에는 수당시대에 와서 명칭이 ‘갈석산’이라고 바뀐 산이 하나 있다는 것 외에는 고대의 기록과 맞는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진태강지리지>에 말한 지역이 아닙니다.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가? <한서> 무제기에 갈석산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해석했는데, 그것이 시발이 되어 많은 사가(史家)들이 이를 근거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게석산이 갈석으로 둔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당 이후에 갈석산이 창려현쪽으로 옮겨오면서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갈석산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것이죠.” 

 


심백강 원장은 <조선왕조실록>과  중국측 기록인 <사고전서>에 있는 단군(檀君)과 고조선 관련 자료를 모두 발췌해서 후학(後學)들이 1차 사료를 통해 상고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놓았다.

 

 

-소진이 연나라 동쪽에 ‘조선ㆍ요동이 있다’고 했는데 이 기록을 근거해도 오늘날 요동에 낙랑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요동ㆍ요서의 구분은 심양 앞에 남북으로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이나 전국시대에는 요동 ㆍ요서를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요동을 예전의 요동으로 해석하니까 연나라의 영토가 요동까지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하북성 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전국 7국 중 가장 약소국이 었습다. 춘추시대의 패권 국가였던 제(齊)나라도 산동성의 절반밖에 못 차지했던 상황인데 한 번도 패주(覇主)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연나라가 오늘날 요녕성 요동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나서 ‘연나라 영토가 2000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가 강성할 때인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소진의 설명에 의하면 연나라는 동서로 좁고 길게 늘어져 있던 나라입니다. 중국은 이런 연나라의 영토를 요동까지 확장해서 요동은 물론 어떤 때는 압록강까지 확장해 놓은 것입니다.”

 

-연나라 강역에 대한 고증이 왜 중요한지요.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서 요서ㆍ요동 등 5군을 설치했는데 바로 그 요서ㆍ요동이 고조선이 통치한 지역이기 때문에 연나라 영토가 곧 고조선의 영토와 중첩이 되고, 후에 다시 낙랑이 됩니다. 문제는 방금 말씀드렸듯이 당시 요서ㆍ요동이 지금 심양 부근의 그 요서ㆍ요동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연나라 당시의 요서ㆍ요동 지역은 현재 북경 부근의 상수원이 있는 곳인데, 여기가 바로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서 빼앗은 지역입니다.

 

중국 사학계나 일제의 반도사관을 따르는 우리 강단 사학의 논리라면 하북성 남쪽에 있던 작은 연 나라가 현재의 요동까지 차지한 초강대국이 됩니다. 이런 논리로 중국이 지금 동북공정을 한 것입니다.”

 


1500년 전 선비족의 금석문에 기록된 고조선의 위치 


-그러니까 고조선의 강역 고증은 유물조사까지 갈 것 없이 1차 사료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씀이시네요.

 

“더 결정적인 것은 고조선 영토에 대한 금석문(金石文)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무려 1500년 전의 선비족이 남긴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가 그것인데 정말 귀중한 사료입니다. 사료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문헌사료는 필사(筆寫) 과정에서 글자를 고칠 수가 있지만, 금석문은 그것이 거의 어렵기 때문에 더욱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이 기록에 요서에 건국한 전연(前燕)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건국(朝鮮建國)’ 즉 ‘조선이 그 지역에서 건국했었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금석문은 고조선이 바로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준 겁니다. 물론 이때의 요서는 오늘날의 요녕성의 요서 지역이 아니고, 고조선과 한사군, 연나라가 있던 하북성의 북경 부근 지역을 말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1차 사료가 왜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그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일연 같은 분이 이 비문을 봤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단 한 줄만 인용을 했었더라도 우리 고대사가 이렇게 참담한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되었으면 일본이 아무리 우리 고대사를 위조한들 위조가 되겠습니까.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000년의 역사를 ‘신화’ 혹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잘라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부터 역사로 인정해서 일본의 역사보다 우리나라 역사의 길이를 줄여놨습니다. 이런 일제의 반도사관을 강단 사학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역사를 왜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조선의 역사만 비틀어 놓으면 뿌리를 비틀어 놓은 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의 모든 부분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 강역도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해놓은 것입니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이제부터는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요서 지역과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은(殷)나라가 망하면서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기자는 자기 선대(先代)가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은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남성(河南省: 은허)에서 한반도의 대동강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망명객 신분에 이(異)민족이 있는 지역을 지나서 한반도로 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우리 사학계도 기자조선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요서조선(진한 시대의 요서군)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한 하북성 동부 일대 지도.

 


원나라 말기까지 존속한 '조선하' 명칭 


-고조선의 중심 도시나 무대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발해만에서 동북쪽 일대가 활동 영역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송나라 때 나라에서 펴낸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인데, 여기에 바로 ‘조선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선하는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무경총요>에 등장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왜 북경 북쪽 지역에 이 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경총요>가 편찬된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씨(李氏) 조선 건국보다 348년이 앞섭니다. 따라서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성계의 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고대 조선의 주무대가 대륙 깊숙이 중원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조선하’가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잠시 정리를 해보면, 중국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활동지는 주로 섬서성(陝西省)입니다. 조선하는 고대 요서조선 수도의 서쪽에 있던 강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모든 기록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사기> 열전에 섭하(涉河)가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것이고, 위만이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겁니다. 당연히 수(隋)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이병도의 주장처럼 청천강이 아니고 조선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천강 패수설’과 ‘대동강 낙랑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무경총요>는 어떤 책입니까.

 

“이 책의 저자 증공량(曾公亮)은 북송(北宋) 왕조의 중신(重臣)입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신당서>와 <영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입니다. <무경총요>는 북송 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아 4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펴낸 역작으로 정사(正史)에 뒤지지 않는 권위 있는 사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하가 허위일 수 없고, 저들이 허위로 조작하여 조선하를 기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 조선하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제가 고증을 해보니 오늘날 북경 부근의 ‘조하’(潮河)가 바로 조선하입니다. 저의 이번 책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사고전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하가 왜 조선하인지 자세하게 고증했습니다. 최소한 원(元)나라 말년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습니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 같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소유한 나라에 불과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원 수도 근처에 조선하가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불편한 명칭이었을 겁니다.”

 


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최고 지리서 <산해경>, '동해 안쪽에 나라가 있으니…' 

 

-혹시 노룡현 쪽이 고조선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다른 기록도 있는지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편을 보면 ‘동해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산해경광주>는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과 ‘대황경(大荒經)’을 ‘조선기’(朝鮮記)라고 했습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한 셈이 됩니다.

 

<산해경광주>는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이란 학자가 쓴 <산해경> 주석서입니다.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입니다. 서한(西漢) 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유흠(劉歆)은 <산해경>이 하(夏)나라의 우(禹)왕과 백익(伯益)의 저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근거 없는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사기>에도 <산해경>이 인용된 것을 보면 선진시대의 사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에서 사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한대(漢代) 이전 고조선의 직접 사료인 <산해경> 중 ‘해내경’과 ‘대황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해경>에 말한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가 노룡현 부근입니까.

 

“풀이할 것도 없이 글자 그대로입니다. 지금의 황해를 예전에는 ‘동해’라고 했습니다. 한족의 근거지인 섬서성을 기준으로 보면 북해(北海)는 현재의 ‘발해만’밖에 없습니다. 발해의 다른 이름이 ‘북해’입니다.

 

<해내경>은 첫줄에서 조선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북해의 모퉁이’라고 했습니다. 삐죽 튀어나온 곳을 모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북성 발해만 지역에 있는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이 바로 <산해경>이 말한 지역이 됩니다.

 

<태평환우기>에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하고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나 한나라 때는 이 지역을 ‘요서’라고 했습니다. 즉 조하의 동쪽이 요동, 조하의 서쪽이 요서로, 지금의 요동ㆍ요서하고 다른 기준입니다.

 

이처럼 옛날의 모든 기록이 고조선과 낙랑의 중심적 위치를 일괄적으로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맞아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이 현재의 요동이나 반도에 위치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조하(조선하)를 기준으로 요동ㆍ요서를 나눈 근거는 무엇인가요.

 

“〈산해경〉에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동ㆍ요서를 나누는 오늘날의 요수(요하)를 보세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요녕성에서 지리 구조상 강이 동남쪽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녕성의 요하는 옛날 <산해경>에서 말해온 그 요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요하로 바꾼 거죠.

 

거기에 반해 조하는 정확하게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갑니다. 기록이 정확하잖아요. 이병도 같은 분들은 요동ㆍ요서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낙랑군이 요동군 동쪽이라고 하니까 대동강 유역이라고 본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가 요서군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과도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요동군에 한나라의 군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압록강에 있다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넘어서 성을 쌓을 수 있습니까. 강단 사학은 앞뒤가 안 맞으면 무조건 오류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냥 옛 기록에 있는 그대로만 따르면 다 맞는다는 말씀이시네요.

 

“<사고전서>에 기록된 대로 요하를 조하로 보고, 노룡현 지역을 ‘요서고조선’의 평양으로 보면 고대사 전체가 다 맞아 들어갑니다. 그동안 사료가 없다 보니까 우리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더듬이 길 찾듯이 고대사를 다루었는데 이제 사료를 통해 다 밝혀졌으니까 더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강단 사학은 새로운 사료가 나와도 자기들 통설하고 안 맞으면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척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전서>에서 밝혀진 사료는 강단 사학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든탑을 허무는 것이 너무 아까우니까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또 보려고 해도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이 안되다 보니까 그동안 이런 내용이 보이지가 않았던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최근 펴낸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심 원장은 계속해서 <사고전서>의 삼국시대 관련 사료를 펴낼 계획이다.



"북한이 만든 시조 단군릉은 가짜" 


-바로 그 강단 사학의 뿌리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우려된다는 말씀이시죠.

 

“일본 사람들이 단군조선은 ‘신화(神話)’라고 해서 부정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거리가 멀어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습니다.

 

이런 논리로 단군조선 1000년, 기자조선 1000년을 잘라내고, 위만(衛滿)조선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를 2300년으로 만들었는데, 일본의 2500년보다 역사가 짧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의 길이를 단절시켰고, 역사의 무대를 축소해 놓았습니다.”

 

-재야사학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사료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먼저 알아야할 것은 <환단고기> 등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주로 ‘재야사학자’라하고, 신채호, 정인보 선생처럼 정사(正史) 사료를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들은 ‘민족사학자’로 구분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고전서>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료는 연대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는데, 이런 원자료를 부정한다면 역사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말씀대로 중국 중원(中原)에서 활동하던 우리 민족은 어떤 계기로 한반도 쪽으로 영역을 계속해서 축소해 왔는지요.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興亡) 했습니다. 돌궐, 흉노, 말갈, 여진…. 그 모든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지만, 오직 우리만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토, 언어, 전통, 민족, 역사를 모두 유지하면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로마가 아무리 강성한들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단군이 세운 그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 민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세계사에서 이처럼 생명력이 긴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천년의 역사적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환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옛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처음 주 무대가 노룡현 일대라면,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제가 다음번에 <사고전서>의 자료를 모아서 책으로 펴낼 부분이 바로 삼국의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주 무대가 동북을 포함하는 역사였습니다. 반도(半島) 쪽으로 완전히 축소된 것은 고려 이후 조선조에 넘어오면서입니다.

 

고구려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노룡현 지방이고, 현재의 평양 천도는 그 한참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의 수도가 바로 노룡 지방입니다. 이때 당(唐)나라에 요서평양(노룡 지역)을 내주고,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번 책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북한은 “평양에서 단군의 시신이 발겼되었다”며 단군릉을 조성했습니다.

 

“고조선이 워낙 오래 존속되었기에 훗날 단군의 후손이나 왕족의 일부가 평양에 건너와 거주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그 무덤이 시조(始祖) 단군일 수는 없습니다. 단군에게 제사를 철저하게 지냈던 조선 시대에도 평양 일대 민간에서 단군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묘를 시조 단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삼원 구조의 원형제단(좌)과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대규모 적석총 유적. 

/ 이미지 출처: 우실하 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 쏟아지는 유물ㆍ유적 증거 


-기록과 함께 유물ㆍ유적 같은 고고학적 증거가 받쳐 주어야 더욱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민족이 원래 중원의 주인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발굴되면서 입증되었습니다. 기록뿐 아니라 유물과 유적까지 뒷받침하는 것이죠.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던 요서군 지역입니다.

 

홍산문화의 3대 특징은 여신을 모신 사당과 원형제단,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섬서성처럼 중국 한족 문화가 융성한 지역(황화문명권)에서는 이런 특징을 가진 유적이 발굴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우리 동이족 매장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 황제는 무덤 조성 시 평지에 흙을 끌어모아 토갱(土坑)을 만들었습니다. 능(陵)과 태묘(太廟), 제단(祭壇) 등은 부락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인데, 대규모 제단이 황화문명에 앞선 홍산문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국가의 전야(前夜) 단계라고 합니다. 황화문명이 아직 국가 단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때 벌써 국가의 전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거주하는 곳에서 먼저 문명이 시작되어 황화문명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홍산문화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신상. 

오른쪽은 두상이고, 왼쪽은 복원한 반가부좌상이다.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라는 것이죠. 


“그것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올 수는 없잖아요. 이러한 문화의 전야(前夜) 위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면 무슨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가지고 고대국가의 건국을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중원 대륙의 우리 민족이 살던 곳 요서지역에서 국가의 건국을 상징하는 유물이 최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중국 문명의 서광(曙光)이 홍산문화에서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명의 시작이 황화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족의 무대는 섬서성이고, 동쪽은 동이족, 그 가운데 우리 ‘박달민족(배달민족)’의 주무대였습니다. 박달민족 국가를 한자로 쓰면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 되는 데, 현재 이 지역에 ‘아사달’이나 ‘박달’과 연관된 무수한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은 홍산문화도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동북공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홍산문화를 발굴해놓고 보니까 기존 중화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건국도 홍산문화에서 먼저 이루어졌고요.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용(龍)이 황화문명에서 발굴된 용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봉황(鳳凰)도 최초로 이쪽에서 나왔고요.

 

그러다 보니 ‘황화문명에서 문명이 시작되어 오랑캐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기존의 이론이 뒤집어 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달라지다 보니까 아예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를 이쪽 지방으로 갖다놓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우리 강단 사학 이론"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족 입장에서 동북지방은 동쪽과 북쪽 사이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입니다. 즉 동쪽과 북쪽 사이를 일컫는 말인데 그동안 이 지역의 역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은 해왔지만, 명백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입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람뿐 아니라 우리 강단 사학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이 이룬 많은 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학회도 만들고, 정부의 움직임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겠다고 출범한 연구재단도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면 기존의 일제나 이병도의 반도사관 학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보낸 자료가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자료에 불과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일일이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요서고조선’ ‘요서낙랑’ ‘요서고구려’(여기서 말하는 요서는 오늘날의 요서 지역이 아니라 진한시대의 요서군 지역임)만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모든 사료는 중국의 조상이 만든 중국 측 자료이고, 그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우리가 합리적이고 치열하게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반박하면 중국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군요.

 

“당연합니다. 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예컨대 선비족(鮮卑族)은 고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세워진 선비족의 ‘두로공신도비문’이 지금 전해집니다. 어떤 이의 비문을 쓸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조상(뿌리)부터 이야기하는데, 그 첫마디가 바로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건국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선비 모용부(慕容部)가 나라를 세우고 활동한 지역이 요서와 요동 지구,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곳은 기자조선이 건국하고, 고죽국이 통치하고, 이후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사군을 설치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는데, 제가 사료분석을 하니 고죽국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분명합니다. 고죽국은 백이ㆍ숙제의 고사로 유명합니다. 이 고죽국이 바로 요서에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고죽국’까지 나오니까 좀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주시죠.

 

“그러니까 발해만에서 가까운 노룡 지역에 조선성이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 ‘고죽성’, ‘요서성’으로 불렸습니다. 요서성은 진시황이 이쪽 지역을 요서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있었으니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고, 고조선 때는 조선이 있어서 ‘조선성’이란 이름이 있었던 겁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중국 동북지방 전체가 우리 역사이고, 우리 조상의 무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교과서 개정으로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갑골문자(좌)와 이보다 앞서는 골각문자(우).


-동북아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은나라도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다면 은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로 봐도 됩니까.

 

“갑골문자는 한자(漢字)가 아니라 ‘은나라의 문자’ 즉 은문자(殷文字)입니다. 갑골문자에서 4000천자(字)가량이 해독되었는데, 미해독 문자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의 문자가 통용될 정도라면 이미 이에 앞서 갑골문을 탄생시킨 문자 체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문자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습니다(수년 전 산동성 창려현 지방에서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 앞선 골각문자가 발견됨=편집자주). 

 

한자(漢字)는 갑골문자를 한족이 더욱 발전시킨 문자입니다. 정리하면 한자는 당연히 갑골문을 토대로 한족이 발전시킨 글자이지만, 이 문자를 발생시키고 문명 자체를 연 서광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문명의 뿌리이자, 시초를 열어준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서 중국의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현재 우리 역사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반도사관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신화이고, 기자는 허구이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민족은 타율적이며,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관을 아직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꾸려면 교과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료를 정리해 놓아야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작업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가르칩니다. 로마나 한(漢) 왕조보다도 훨씬 위대했던 고조선만 바로 서면 동서화합,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사업은 범국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사학계의 주류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학회나 재단이 만들어진들 연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일연 스님이 고조선에 대해 단 몇줄의 기사를 남김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살려내는 공헌을 했습니다. 만약 일연 스님이 그 기록조차 안 남겼다면 후대에 누가 고조선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제가 하는 이 일도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조선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사료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 사료를 찾아내서 세상에 내놓고 있는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이라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심 원장은 "고죽국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한다" 


-우리 사학계에 하실 말씀은.

 

“국사 학자라면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능력보다 한문 원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교수로 임명해야 합니다. 사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대사학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놓은 ‘요서낙랑’ ‘요서고조선’ 자료를 가지고도 박사학위 논문이 수십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북경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라는 것을 밝히는데 3개의 자료를 인용했지만, 후학들이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고전서>는 동양 삼국이 공히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고전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바로 세우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여러 난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를 통해 한국사의 근간을 바로잡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며, 한중(韓中)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는 여러 문제에 대해 상호 우의(友誼)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심백강 박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광복 이후 모든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정권도 여(與)에서 야(野)로, 야에서 여로 여러 차례 교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 가까운 세월을 조금도 변화없이 식민사학을 계승한 이병도 학파가 줄기차게 주도하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입니다.

 

이제 늦었지만, 역사학계도 하루빨리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야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인문학의 핵심은 역사입니다. ‘역사광복’을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을 때입니다.”


출처: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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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이 자급할 수 없는 건 경제개발 전략만이 아니라 가장 큰 무역 상대인 미국에게 오랫동안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남한이 아시아의 경제적 문화적 강대국으로 빠르게 변화하며 나타난 농업의 역할, 식량안보, 사회운동을 조사한 첫번째  글이다. 이 글은  어떻게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단 50년 만에 부유한 나라가 되면서 가장 혜택을 입지 못한 것이 농민과 농촌사회라는 관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이다.



인구 1000만 이상(수도권에 2450만)이 사는 남한의 수도 서울을 걸어다니면 많은 식당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외식은 식품이 싸고 풍부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집에서 먹는 것만큼 일상적이다. 서울은 한국의 심장이다. 그곳은 삼성, 현대, 대우, 엘지와 같은 대기업과 정부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유행에 밝고, 현대적이고, 빠르게 세계의 코스모폴리탄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 음식은 또한 특히 미국에서 대중적인 민족요리가 되었다. 사실 남한 정부는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문화적 위치를 바탕으로 활발히 한국음식을 해외시장을 겨냥하여 홍보하기 시작했다.


한국 요리는 이웃한 중국과 일본과 다르기에 국가 자존심의 근원이다. 당신은 남한에서 수백 개의 케이블 방송을 휙휙 돌려봐야 한다. 거의 모든 다양한 방송이 남한의 많은 지역적 요리법에 관한 것이다. 가을에 내가 캐나다 몬트리올을 방문하여 나의 오래된 거리를 걸었을 때, 나는 한국식당이 내가 살던 곳에서 몇 블럭 떨어져 문을 연 것을 보았다. 식당의 이름은 한국의 옛 음식 전통만이 아니라 이웃한 두 거인의 나라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뜻하는  “5000 Years”이었다. 한국 요리는 그 나라의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 주변 제국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살아남기 위한 빈번한 투쟁을 상징한다. 그러나 남한은 거의 어떠한 식량도 기르지 않는다. 안보 차원으로 자급하는 쌀을 빼고 한국은 90%의 식량을 해외에서 수입한다.


남한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겪은 한 나라이다. 1950년에 인구의 70~80%가 농업 부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늘날 8% 이하의 인구가 농업 부문에서 일하고,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되고 현대의 산업화된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지난 몇 년 전에 남한은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 등과 같은 나라와 함께 식량안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수탈하던 일로 관심을 받았다. 어떻게 식민지에서 벗어나 가장 가난했던 이 나라가 세계에서 최근 가장 큰 토지수탈자의 하나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국내 농업 부문에 대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은 식민지, 빠른 경제개발, 농촌경제에서 산업경제로 빠르게 전환을 이루어 현저히 대조되는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소농의 생계와 토지변형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다. 본질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순간은 소농이 부패한 정부관료와 무거운 세금에 반대하여 일으킨 1894년 동학혁명이다. 그혁명은 조선 정부와 지배적인 토지소유 계급의 요청으로 건너온 일본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일본에 의해 조선의 모든 직업이었던 소농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의 유일한 관심은 조선을 식량과 그들 제국의 야심을 채울 다른 생산물의 공급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일본인 관리자들은 지배적인 토지소유자 계급과 연합했다. 1920년대까지 조선에서 소농의 대부분은 수확의 50%까지 떼이는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조선에서 소작농은 편안히 앉아 있지 못했고, 일본인 식민지 개척자는 농경지를 사들여 조선에 여전히 존재하던 매우 계층화된 봉건사회 구조를 강화시켰다. 한국의 소농은 일제와 그 협력자들에게 대항해 수없이 들고 일어났다. 사실 소작농은 2차대전이 끝난 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운동을 이끌었다. 소련이 점령한 북쪽에서 과감한 토지개혁이 1940년대 말에 이루어졌다. 9000평 이상의 모든 농장은 몰수되었고, 마을의 소농위원회가 소농에게 토지를 재분배했다. 이러한 토지개혁은 이승만이 이끈 남한 국수주의자의 보수적인 정권을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 군정은 거대한 소농 봉기에 대한 두려움(그리고 적화통일을 이유로)으로 그들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개혁을 시행하라고 남한 정부를 압박했다. 남한에서 토지개혁은 북한처럼 포괄적이 아니라 소농의 불만을 달래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중요한 개혁에도 남한은 한국전쟁 이후 농업 부문에 별 관심이 없었다. 농촌 인구는 국가의 아찔한 산업화를 위한 값싼 식량과 노동력의 원천으로 취급되었다. 토지개혁은 소농의 운동을 진정시키는 데 이용된 반면, 농업에 대한 투자는 적절한 생계수단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몇몇 기근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빈약한 삶을 자수성가하고자 노력했고, 1960년대 이후 젊은 세대의 대부분은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권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시골을 떠나 노동력 착취의 현장에서 끔찍한 조건을 견디며 그들의 일가친척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일했다.


남한 농촌이 제공하는 값싼 식량과 노동력은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가 산업혁명을 이룬 결정적인 요인이다. 반면 시골은 방치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농사를 퇴보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본다.  차이는 아주 놀랍다: 한편으로 남한의 도시 중심가는 공식적으로 "반짝이는 한국"의 상징이고, 다른 한편으로 모험적으로 귀농하는 일은 농촌 지역사회의 어려운 삶이라 본다. 남한에서 평균 농민은 구식 기계로 약간의 땅을 일구는 50세 이상이다. 빈곤은 모든 곳에서 발견되고, 농사짓는 삶은 경제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고, 많은 농촌의 한국인은 시골을 떠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들과 결혼한다. 농촌 지역에서는 세 가구 가운데 하나는 현재 한국인과 외국 여성의 가정이다.


농민과 소비자 모두는 한국에서 주류인 개발논리에 맞서 대안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삶을 꿈꾸고 있다: 사회적으로 옳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며, 농촌 생활의 역사와 전통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귀농운동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유기농업과 식량주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협동조합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다음 기사에서 이러한 현상의 일부를 분석할 것이다. 이번 시리즈에서 다음 기사는 식량위기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살필 것이다.


By Anders Riel Muller


남한의 개발 모델은 어떻게 이 나라가 50년도 안 되어서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경제적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는지 종종 외부인을 놀라게 한다. 그 모델은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한 빠른 산업화의 가장 좋은 사례로 일컬어졌다.  분명 이러한   관찰자는 서울 외곽으로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인간적, 환경적 비용은 당신이 도심에서 더 멀리 나서면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은 1980년대 말 마침내 연이은 정부에서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더 많든 적든 똑같은 경제 궤도를 밟아갔다. 역동적이고, 세계적이고 첨단기술 사회인 듯한 한국의 공식적인 인상은 대개의 방문자와 주류 한국인들이 보는 것이다.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정책은 한국을 현대사회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한국의 농촌은 이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증가하는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농지에 대한 압력은 주요한 쟁점이다: 농지는 사상 최저로 줄었다(farm land). 도시와 산업개발을 위해 토지에 우선순위를 매긴 최근 사례는 40년 뒤 마침내 실현된 새만금 간척사업이다. 401㎢ 사업은 쌀 생산량을 위한 농지를 늘리고자 1971년 제안되었다. 2011년 3월 정부는 이미 한국의 쌀 생산은 충분하다는 논거를 기반으로 그 땅의 오직 30%만 농지로 보존하고 나머지 70%는 주거용, 산업용, 상업용으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한 논거는 쌀 생산을 위한 해외기지를 얻으려고 정부 스스로 개입하는 데에서 극명하게 대조된다(landoverseas). 한국의 경관을 바꾸고 있는 다른 주요한 사업은 4대강 사업이란 이름의 어마어마한 물 사업이다. 정부는 농민과 도시지역이 똑같이 혜택을 보고 심지어 UNEP에서 좋은 기후 적응의 사례로서 갈채를 받았다고 이러한 거대한 물길 복원 사업을 홍보했다. UNEP는 나중에 한국의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서 그들의 지지를 철회했다. 비판자들은 농지를 더욱 감소시키고, 수많은 문화역사유산(heritage)을 파괴한다고 역설한다. 두 사례는 정부가 도시지역에 집중하고 농민과 농촌주민의 필요와 요구는 무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업의 위기에 기여하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은 주로 도심지의 식습관 변화이다. 서구식 먹을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즐기게 되었다. 한식에 대한 자부심은 남아 있지만, 서구식 요리법은 부와 세계적 생활방식의 상징이다. 유제품, 빵, 고기는 수요가 높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빵집은 골목마다 있다. 한국 농업생산과 한정된 토지의 양이란 구조에서는 이러한 많은 생산물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치즈와 고기의 생산은 훨씬 많은 자원이 집중되고, 이렇게 하여 토지, 물, 사료에 대한 수요를 높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농촌에 있는 가족을 찾아갈 때, 고기는 여전히 가끔 먹는 호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주로 구워 먹는 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식량위기에 대한 ‘해결책’: 시장 개방과 해외기지 확대


시간이 지나면서 산업개발과 인구압이 토지의 수용력 너머로 한국의 식량 수요를 밀어붙였다. 2008년 식량 가격의 위기 이후, 남한은 해외의 농지를 얻으려는 중국, 일본,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나라들 사이에서 가장 적극적인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farm land acquisitions). 최근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해외의 농지를 확보하여 세계 농산물 시장의 투기(speculation)에 대응해 나라를 보호하고 식량 공급을 안정적으로 하려는 남한의 시도를 독려했다. 이러한 점은 한국이 20세기 초반 일제에 강점되며 한국의 소농들을 엄청난 이주와 빈곤에 빠지게 만든 토지수탈에 저항했던 역사를 고려하면 흥미롭다. 


이렇게 토지를 얻는 곳은 대부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다. 토지 구매의 자세한 사항은 접근하기 어렵고, 그러한 거래의 대부분은 수단처럼 인권 침해가 의심스러운 나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남한의 가장 큰 식품기업의 대부분은 종종 협상을 돕는 등 남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 농촌공사와 같은 공기업이 직접 이러한 농지를 소유하고 경영한다. 가장 유명한 토지 거래는 2008년 발표된 남한의 대우가 마다가스카르의 농지 130만 헥타르(경작할 수 있는 땅의 거의 절반)를 99년 동안 임대한 일이다. 그 제안은 마다가스카르에서 광범위한 사회불안을 불러일으키고 대통령인 Marc Ravalomanana이 떨어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새로 선출된 반대편 지도자는 서둘러 토지 거래를 뒤집어버렸다(land deal).


그런데 남한이 자급하지 못하는 것을 경제개발 전략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고 -곧 도시 인구와 농업을 두고 산업 개발을 우선시하는- 가장 큰 무역 상대인 미국과 장기적으로 유대 및 의존한 결과이다. 미국 식량 수입에 대한 남한의 의존성은 한국전쟁의 종료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반도는 연합군과 공산군 사이의 엄청난 전투로 폐허가 되었다. 특히 미공군은 군인과 민간인을 목표로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퍼부었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내내 그러했듯이 한국전쟁에서도 네이팜탄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 전쟁은 한국을 폐허로 만들었고, 이 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오랫동안 미국의 막대한 구호식량을 받았다. 미국의 식량원조는 처음에는 가난하고 굶주린 수백만 전쟁 피해자를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국의 식량원조는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이에 따라 남한의 농업 부문은 침체되었다.


이 글에 썼듯이, 그 마무리는 미국과 남한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이다. 협상은 오래전인 2007년 시작되었고, 남한에서 광범위한 시위의 주제가 되었다. 특히 2007년 미국산 소고기 수업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US beef). 남한이 2005년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한국의 농민은 값싼 수입품으로 농촌 생계가 점점 어려워지는 압력을 느껴왔다(rural livelihood). 미국 농무부는 자유무역협정의 승인이 한국으로 수출되는 식량을 상당히 늘릴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미국은 이미 미국 농산물을 위한 다섯번째 큰 시장인 한국으로 이미 50억 달러를 넘게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 FTA가 체결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남한의 농업이 가장 보호하던 쌀을 포함하여(protected area) 거의 모든 농업 무역 관세는 사라질 것이다.



파도와 싸우기


해외의 토지 취득과 자유무역협정은 기업의 이윤, "식량안보"와 "현대의" 강대국으로 한국을 확립하려는 끈질긴 추구라는 명목으로 전국 방방곡곡 농촌사회의 관 속으로 손톱을 더욱 깊숙이 밀어넣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은 강력히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점점 더 국제 무대에서 들려주고 있다. 남한 농민의 역경이 처음 국제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은 2003년 칸쿤에서 열린 장관회의에서였다. 협상장 밖에서 농민활동가 이경해는 울타리에 올라가 WTO의 소농에 대한 폭행에 항의하는 수천의 시위대와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은 세계의 식량 체계에 대한 신자유주의 무역정책과 농산업 지배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투쟁에서 강력한 목소리가 되었다. 


또한 소비자는 점점 한국의 개발노선이 농민과 농촌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23만 이상의 소비자 회원과 1700의 생산자가 함께하는  생태적인 지향의  협동조합 한살림은 농민과 도시 소비자들의 직접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일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개발노선에 환멸을 느낀 도시와 농촌의 활동가들이 급속한 산업화와 끊임없는 부의 추구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문화, 역사, 토지, 음식에 대한 연결을 회복하고자 그들 스스로 농촌 지역에 설립하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에 시작했다(recover the connection).


남한은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 역사, 문화를 존중하는 대안적인 방법이 있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출처 http://www.foodsovereigntytours.org/2011/04/south-korea-part-ii-modernization-and-global-amb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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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조선은 어떤 나라였는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허성도 교수 강연 녹취록

 

○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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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같은 수를 두 번 곱해 A가 되는 수를 ‘A의 제곱근’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4의 제곱근은 2와 ―2, 9의 제곱근은 3과 ―3이다. 제곱근은 땅의 넓이나 그릇의 부피에서 한 변의 길이를 측정하는 데 활용된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제곱근 계산 방법은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얼마 전 19세기 우리 조상들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제곱근을 계산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정하가 지은 ‘구일집’의 일부. 산가지를 이용해 10차 방정식을 푸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막대기를 겹쳐 쌓아 놓은 모양이 산가지로 표시한 숫자다. 사진 제공 전용훈 씨

서울대 전용훈 연구원 ‘홍길주 풀이방법’ 소개



서울대 과학문화연구센터 전용훈 연구원은 19세기 초 유학자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나눗셈과 뺄셈만으로 제곱근을 구했다는 사실을 옛 문헌 조사 결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과학사’ 분야의 권위지 ‘사이언스 인 콘텍스트’ 2월호에 소개됐다.



중국의 셈법과 다른 독자적 방식


홍길주의 풀이법은 간단하다. 먼저 수를 반으로 나누고 나눈 값을 1부터 오름차순으로 뺀다. 9의 경우 반으로 나눈 값 4.5에서 1을 빼고, 남은 값 3.5에서 2를 빼는 식이다. 그렇게 더는 뺄 수 없을 때 남은 수를 2배한 뒤 그 수가 뺄 수와 같으면 제곱근이라는 것. 


3.5에서 2를 빼고 남은 수 1.5는 3으로 더는 뺄 수 없고 이를 2배한 3이 빼려는 수 3과 같기 때문에 9의 제곱근은 3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서양 수학에 등장하는 수열의 합을 구하는 공식과 유사한 독특한 풀이법이다.


그전까지는 중국에서 넓이 계산에 썼던 ‘개방술’의 영향이 컸다. 개방술은 어떤 수의 제곱근이 ‘A백B십C’라고 추측하고 A, B, C를 구하거나 방정식의 근사해를 이용하는 식으로 제곱근을 얻었다.


전 연구원은 “나눗셈과 뺄셈만 이용하는 이 풀이법은 ‘산학계몽’이나 서양수학을 담고 있는 ‘수리정온’에 근거한 중국의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홍길주 스스로도 자신의 저서 ‘숙수념(孰遂念)’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어린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는 풀이법”이라고 설명했다. 



소수점까지 계산… 세제곱근 이상도 가능


전 연구원은 “이런 계산법은 제곱근이 2.449…처럼 소수로 나오는 6과 같은 수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응용하기 좋다”고 설명한다. 6의 경우 일단 100을 곱해 세 자릿수로 만든 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24보다 크고 25보다 작은 값이 나온다. 6의 제곱근을 구하려면 이 수를 100의 제곱근 10으로 다시 나눠주면 2.449…라는 수가 나온다는 것. 


제곱한 숫자가 만 단위를 넘을 때도 얼마든지 쉽게 풀 수 있다는 게 전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런 방법으로 홍길주는 세제곱근, 네제곱근, 다섯제곱근의 풀이방법도 제시했다.


그는 제곱근 풀이 외에도 정수의 나머지 구하기(부정방정식), 원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성질, 황금분할, 세 정수로 이뤄진 직각삼각형의 조합 등 현대 수학에 나오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독특한 풀이법을 함께 내놨다.


당시 조선의 수학은 어떤 수준이었을까. 서강대 수학과 홍성사(수학사) 교수는 “송나라와 원나라 때 이미 4차 이상의 고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으며 그런 전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넓이나 부피를 구하는 정도의 문제는 쉽게 풀 수 있었다는 얘기다. 



宋-元시대 고차방정식 해법 조선이 계승


당시 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에 이미 ‘산판(算板)과 산가지’를 활용해 제곱근은 물론 10차 방정식 해까지 구할 수 있었다. 


실제로 상수항을 진수(眞數), 1차항을 근(根), 2차항 평방(平方), 3차항 입방(立方), 4차항 삼승방(三乘方)이라고 해서, ‘3χ4+5χ-2’라는 4차 방정식을 ‘삼삼승방 다오근 소이진수(三三乘方 多五根 少二眞數)’라고 표현했다. ‘다(多)’는 더하기, ‘소(少)’는 빼기를 뜻한다. 


중국이 명나라 청나라로 들어와 실용수학 중심으로 흐름이 바뀐 것과 달리 조선은 송·원시대의 수학 전통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명문장가 집안 출신인 홍길주가 수학에 몰두했던 것도 이런 전통 위에 수학과 천문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18세기 실학의 영향과 함께 서양의 수학과 과학이 들어오자 ‘종합지식인’이었던 선비들도 수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실제로 홍대용을 비롯해 황윤석, 홍정하, 서유본 등 당대의 많은 유학자가 이 시기를 전후로 수학을 연구했다는 기록을 자신의 책에 남겼다. 전 연구원은 “글뿐 아니라 수학에서도 비상한 재주를 가졌던 홍길주는 17, 18세기와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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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전윤수 식객(2007) , 파랑주의보(2005)

주연
김민선 신윤복 역
김영호 김홍도 역
김남길 강무 역
추자현 설화 역

250년을 뛰어넘은 센세이션!
천재화가의 매혹적 비밀!
4대째 이어온 화원 가문의 막내딸이자 신묘한 그림솜씨로 오빠 신윤복에게 남몰래 대신 그림을 그려주던 7살 천재 윤정. 평범하던 그녀의 삶은 어느날 오빠의 자살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뀐다.
그림을 위해 여자를 버리고 오빠 신윤복의 삶을 살게 된 것.

욕망과 아름다움의 아슬아슬한 경계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의 마음을 설레이게 할 만큼 빼어난 그림 실력을 가졌던 윤복은 자유롭고 과감한 사랑을 그려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을 선보인다. 하지만 그의 '속화'는 음란하고 저급하다는 질타와 시기를 받는다.

<미인도>를 둘러싼 네 남녀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사랑!
그림을 위해 남자로 살았던 윤복 앞에 어느날 강무가 나타나고 생애 처음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사랑 앞에 여자이고 싶었던 윤복, 윤복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그녀의 첫사랑 강무, 제자의 재능을 사랑하고 그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 김홍도, 홍도를 향한 사랑으로 질투에 사로잡힌 기녀 설화.
250년간 숨겨진 비밀을 간직한 <미인도>를 둘러싼 그들의 엇갈린 사랑과 치명적 질투는 예기치 못한 불행을 불러온다.


[ Sensation Prologue ]
금기와 위선을 조롱한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
2008년 세상을 뒤흔들 센세이션을 만나다!

첫 번째 센세이션 ; 250년을 뛰어넘은 천재화가의 매혹적 비밀!
신윤복, 남자인가 ? 여자인가 ?

"신윤복 [申潤福, 1758~]
자 입부(笠父), 호 혜원(蕙園), 본관 고령(高靈), 첨사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속설(20세기 초 문화평론가 문일평)과 함께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단 두 줄의 기록만 남긴 채 역사 속에 사라진 천재화가 신윤복.
신윤복 탄생 250주년인 2008년, 역사 속에 숨겨진 그의 매혹적 삶을 영화 <미인도>를 통해 다시 만난다. 김홍도가 힘이 넘치는 남성적 화풍으로 소박한 서민의 삶을 그렸다면, 신윤복은 섬세하고 화려한 색감으로 여심이 담긴 풍류를 그렸다.

당시에 금기 소재였던 여자를 과감히 화폭의 중심에 담았던 그,
누구보다 여자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탁월했던 그.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는 ‘미인도’의 한 줄 화제에서 시작된 하나의 의문. ‘미인도’는 어쩌면 그의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영화 <미인도>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남자 신윤복의 삶과 우리가 몰랐던 여자 신윤복의 삶을 동시에 조명해 2008년 영화계에 또 하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번째 센세이션 ; 욕망과 아름다움의 아슬아슬한 경계!
춘화인가 ? 예술인가 ?

기녀들의 벗은 가슴과 둔부가 농염하게 그려진 ‘단오풍정’
짝짓기 하는 개를 보고 웃는 과부를 담은 ‘이부탐춘’
달빛 아래 두 남녀가 안타까운 정을 나누는 ‘월하정인’
기녀의 외출을 틈타 기녀의 몸종과 양반이 나누는 애정행각을 담은 ‘기방무사’
"사랑하기 때문에 유혹하고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아름다워서 그렸다"는
신윤복의 그림들은 당시 획일화된 규율과 정형화된 화풍을 그려야 했던 도화서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신윤복의 천재성을 시기 질투하던 화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음란한 춘화라고 비난했던 희대의 문제작들은 과연 욕망을 담은 춘화였을까?
사랑의 아름다움을 그린 예술이었을까? 이미 250년 전에 시대를 앞서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을 선보였던 천재화가 신윤복의 욕망과 아름다움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수작들은 영화 <미인도>속에서 또 한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예정이다.


세 번째 센세이션 ; <미인도>의 숨겨진 치명적 러브스토리!
욕망인가 ? 사랑인가 ?

그림 때문에 남자로 살았지만 사랑 앞에 여자이고 싶었던 천재화가 신윤복,
신윤복을 여자로 살고 싶게 만든 그녀의 첫사랑 강무,
제자의 재능을 사랑하고 그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 스승 김홍도,
홍도를 향한 사랑으로 질투에 사로잡힌 비운의 기녀 설화.

욕망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빠진 네 남녀의 치명적 러브스토리를 그린 영화 <미인도>는 격정적이고 도발적이다. 조선 후기 두 천재화가와 예인들의 엇갈린 사랑은 과연 어디까지가 욕망이고 또 어디까지가 사랑일까?


[ Sensation Movie ]
역사와 상상의 경계를 깨버리다!
웰메이드 한국형 팩션무비!
조선 후기 3대 풍속화가 중 한 명인 혜원 신윤복의 드라마틱한 삶을 그린 영화 <미인도>가 올 가을 스크린에 ‘사극팩션’ 바람을 몰고 온다. <말아톤>,<살인의추억>,<그놈목소리> 등 실화를 근간으로 삼은 한국영화들이 저력을 보여주었고 이후 '팩션' 열풍은 사극으로 이어졌다.
<왕의남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폭군과 요부인 ‘연산’과 ‘녹수’를 ‘궁중광대’라는 매개로 새롭게 재해석해 천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올해는 <미인도>를 비롯,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세계 최초 다연발 로켓화포 '신기전'을 소재로 한 <신기전>과 고려 시대 실존했던 동성애를 다룬 <쌍화점> 등 새로운 소재의 작품으로 또 한번 '사극팩션'의 전성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역사적 인물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팩션'과 '사극'은 이제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였고 소재의 고갈에 목말라하는 충무로의 단비가 되고 있다. 특히 <미인도>는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 잘 다뤄지지 않던 화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 센세이션한 그림으로 시대를 앞서 간 천재화가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설정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을 선보인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과 치명적 사랑에 매료될 <미인도>는 웰메이드 한국형 팩션무비의 새 지평을 열 것이다.


色다른 조선멜로, 에로티시즘을 만나다!
<스캔들> <왕의남자> <음란서생>을 잇는 센세이션!
도발적인 소재와 보수적인 조선시대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사랑으로 이슈를 낳았던 <스캔들>, <왕의 남자>,<음란서생>의 계보를 이을 또 하나의 센세이션 조선멜로 <미인도>가 올 가을 스크린을 강타한다. 정절녀를 무너뜨리기 위한 조선 제일의 바람둥이와 요부의 대결, 조선 최초의 궁중광대와 왕의 사랑, 음란소설 작가 추월색과 왕의 여자 정빈의 로맨스 등 시대적 금기를 넘어선 독특한 소재와 화려한 볼거리는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 <미인도>는 조선시대 천재화가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충격적인 소재에서 시작했다. 조선 최초의 에로티스트 화가로 평가되는 신윤복과 청동거울을 만드는 신윤복의 첫사랑 강무 사이의 치명적 사랑은 물론 제자의 전부를 사랑한 스승 김홍도와 조선 제일의 기녀 설화의 4色로맨스로 또 한번의 센세이션을 예고한다. 그림 ‘미인도’를 둘러싼 매혹적 비밀과 <색,계> 못지 않은 파격적이고 세련된 베드신을 선보일 영화 <미인도>는 조선 최초 고품격 에로티시즘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사극 열풍의 신화를 다시 이어갈 치명적 유혹 <미인도>는 <음란서생>보다 色스럽고 <왕의 남자>보다 화려하고, <스캔들> 보다 슬픈 사랑을 담은 색다른 조선멜로로 ‘센세이션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입증시켜줄 것이다.


한국최초, 신윤복의 삶을 그리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신윤복!
조선 후기 천재화가 신윤복의 삶을 최초로 기획한 영화<미인도>가 최근 대중문화계의 화두로 떠오르는 '신윤복신드롬'의 시초가 되어 화제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까지 요즘 대중문화계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이미 베스트셀러인 소설 ‘바람의 화원’과 9월부터 방영중인 드라마 ‘바람의 화원’ 보다 놀랍게도 영화<미인도>가 가장 앞서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오랜 기획단계를 거치다 보니 가장 늦게 관객과 조우하게 됐지만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미인도>는 이미 지난해 4월 저작권협회에 등록을 마쳤다. 이는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이 지난해 8월에 출간되었으며 드라마 제작사인 드라마하우스가 10월에 판권을 계약한 것보다 선행된 기획이었다. 또한 소재는 같지만 스토리가 전혀 달라 드라마와 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그림을 둘러싼 미스터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영화 <미인도>는 멜로에 중점을 두어 차별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해외에서는 바스키아, 클림트, 폴록, 프리다 등 서양화가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인기를 모았지만 국내에서는 장승업의 일생을 담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이후 최초로 다루어지는 천재화가 신윤복의 이야기인 <미인도>를 통해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신윤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고혹적인 매혹, 그 치명적 유혹에 빠지다!
아름다운 배우 김민선의 재발견!
<색,계>의 탕웨이가 있다면 <미인도>에는 김민선이 있다. 탕웨이가 <색,계>에서 거침없는 파격적 정사신으로 관능과 청순을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였다면 <미인도>에서 김민선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찔한 자태로 과감하고 세련된 정사신을 소화해 냈다. 몸을 아끼지 않은 연기 투혼을 발휘한 김민선은 <미인도>를 통해 한층 성숙해진 연기를 뽐낸다. 그림 때문에 남자로 살아야 했던 예술가로서의 천진함과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처음 여성성을 드러내는 관능적 모습을 오가며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이미 <미인도> 티저 포스터를 통해 보일 듯 말 듯한 고운 뒤태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던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는 영화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 Sensation Production ]
250년을 뛰어 넘은 예술혼의 부활!
스크린 속 신윤복, 김홍도 그림 완벽재현!
<미인도>는 조선후기 천재화가 신윤복과 김홍도의 삶과 치명적 사랑을 그린 만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화가의 그림은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신윤복의 도발적인 자화상 <미인도>를 비롯해 교과서를 통해 더욱 친숙한 <단오풍정>, <월야밀회>, <월하정인>, <이부탐춘>등 신윤복 화첩 속 그림들과 <씨름도>, <송하맹호도>등 김홍도의 그림이 철저한 고증과 섬세한 모사를 통해 25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스크린 속에서 완벽 재현됐다. 김홍도의 그림을 직접 모사한 최순녕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는 영화 속 김홍도 대역까지 무난히 소화해 내는가 하면 배우들의 그림 수업까지 도와 영화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김민선의 대역을 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 정통 동양화를 그리는 작가가 많지 않고 더구나 여성작가는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윤복 그림의 완벽한 모사를 위해서는 실력 또한 필요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김홍도 대역의 최순녕 교수의 추천으로 홍익대 대학원 동양화과를 수료한 적역의 인재를 섭외해 무사히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완벽한 모사로 다시 태어난 신윤복과 김홍도의 화풍을 살린 그림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중요한 중심축을 이루며 스크린에 예술혼을 불어 넣을 것이다.


영화 한 편으로 만나는 움직이는 박물관!
무형문화재가 만든 작품들의 화려한 향연!
영화 <미인도>에 등장하는 총 8억원 상당의 소품들은 대부분 문화재급 작품들이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캔들>,<음란서생> 등 이미 기존 사극에서 고가의 소품들이 이슈화 된 바 있지만 이번 <미인도>에 선보이는 소품들은 인간문화재, 명인들의 작품들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영화 속에서 서로의 그림을 동경하고 아껴주는 신윤복과 김홍도가 사용하는 붓은 무형문화재 이인훈씨의 작품이며 설화방의 화각장 역시 무형문화재 한춘섭씨의 작품이다. 화각이란 소의 뿔을 얇게 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자개보다 더 고급스러운 고가품이다. 또한 한우의 뿔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귀하게 여겨져 민가에서는 쓸 수 없고 궁중가구로 쓰였다. 국내에는 단 2명만이 화각을 작업하고 있으며 그 중 한 분인 한춘섭씨의 작품을 삼고초려 끝에 협찬받을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숨은 문화재를 찾아보는 즐거움은 영화 <미인도>를 보는 또 하나의 백미가 될 것 이다. 신윤복, 김홍도의 그림을 비롯 문화재급 소품들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영화 <미인도>는 움직이는 박물관이 되어 관객을 찾아갈 것이다.


인물의 감정선 까지 담아낸 의상!
때론 화려하고 때론 우아한 감성의 色!
<미인도>에서 의상은 캐릭터의 감성과 내면의 자아까지 보여주는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인물의 감성까지 한눈에 보여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의 의상은 위엄이 느껴지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강무의 의상은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한편 과감한 색채를 쓰는 신윤복의 의상은 그의 화려한 화풍처럼 보랏빛, 분홍빛 등의 컬러를 사용해 남성 안에 숨겨진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을 강조했다. 기녀인 설화는 조선 제일의 미모와 내면의 질투심을 표현하기 위해 화려함과 우아함을 주었다. 영화 <미인도>의 의상은 신윤복 그림의 화두처럼 그리움의 색과 사랑의 어둠과 밝음의 색 등 인물 내면의 감정선을 찾아내는 새로운 상상의 작업이었다. 우선 캐릭터 분석을 통한 캐릭터별key color가 정해졌다. 여자이지만 남장을 해야만 했던 천재화가 신윤복은 순수함과 열정을 뜻하는 쪽빛을,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사랑 앞에선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거친 남자 강무는 풀색, 김홍도는 조선 당대 최고의 화가다운 위엄과 높은 자존을 뜻하는 갈색, 조선 최고의 기녀 설화는 화려한 붉은색과 질투를 뜻하는 자색이 key color로 정해졌다. 또 캐릭터 내면의 심상에 따른 변화를 의상 색감의 변화로 표현하여 인물의 마음을 담아냈다. 신윤복의 의상에는 강무의 밝은 사랑과 김홍도의 어두운 사랑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또한 한복의 형태는 철저한 고증에 따르되 소재, 색감, 문양 등은 현대적인 이미지를 접목시켜 익숙함 속에 새로움을 시도했다. 그림을 그리는 씬인 ‘단오풍정’과 ‘씨름도’의 기녀들과 구경꾼, 씨름꾼은 각각 종이 위에 먹이 그어지듯 명료한 색대비와 그룹 별 의상의 대비를 통해 포인트를 주었다. 종묘행차 장면에서 궁중악사들의 화려한 의상은 양쪽에 늘어선 구경꾼들의 순백색의 의상과 대비를 보여준다. 이렇듯 <미인도>의 의상은 궁중의상부터 기녀, 천민까지 동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복식 문화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씬별 인물의 감정선에 따른 색의 변화까지 볼 수 있어 감성을 자극하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조선최초 에로티시즘의 완성!
춘화 완벽재현을 위한 고군분투!
조선 최초 에로티시즘의 정수를 선보일 영화 <미인도>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는 춘화의 완벽재현이다. 야사로만 전해내려오는 조선 시대 점잖은 양반들의 점잖치만은 않은 성문화가 조선 최고의 기녀 설화의 기방을 중심으로 화끈하게 표현된다.
조선 최초의 에로티시즘을 재현할 춘화의 실제 구현을 위해 150평 규모의 미로 같은 복도로 이루어진 은밀하고 비밀스런 공간인 색주가가 탄생했다.
또한 청나라체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 공간은 기존 한국적 건축양식에서 탈피한 "ㅁ"자 구조를 도입, 다양한 각도에서 무대를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세트라는 제한적 한계를 벗기 위해 약 3톤 정도의 물을 채우고 그 위에 무대를 올려, 보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공간을 탄생시키는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춘화 재현을 위한 특별한 세트 제작 못지않게 험난했던 작업은 바로 춘화기녀의 캐스팅이었다. 기상천외한 고난이도 체위를 선보여야 하는 춘화 기녀의 캐스팅 조건은 까다로웠다. 유연성과 전라노출은 기본이고 조선 제일의 기녀들인 만큼 고전미를 두루 갖춰야 했다. 약 100일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70여명의 배우들과 미팅을 진행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했고 방방곡곡을 다니며 춘화기녀를 찾아 나서야 했다. 찜질방까지 다니며 몸짱을 찾아 헤맸을 뿐만 아니라 레이싱걸, 누드배우, 에로비디오 배우 등을 수소문해 춘화기녀 캐스팅 삼매경에 빠졌다. 천신만고 끝에 춘화기녀에 적격인 2명을 캐스팅하게 됐고 4주간 일주일에 2번씩 전문 안무가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완벽에 가까운 자태를 익혔다. 상상조차 못할 현란하고 육감적인 체위들을 선보이게 될 춘화기녀들의 파격적인 활약상은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그림에서 말타기 가야금까지!
예인으로 거듭난 배우들의 연기투혼!
영화 <미인도>는 한국영화 최초로 천재화가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영화 속에 비춰지는 주인공들은 각각 조선 후기의 예인으로서의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극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씬이 많은 신윤복과 김홍도 역을 맡은 김민선, 김영호는 무려 세달간 일주일에 3번, 하루 3시간동안 꼬박꼬박 그림 수업을 받았다. 사군자를 기본으로 시작해 김영호는 김홍도 그림을, 김민선은 신윤복의 그림을 모두 모사하는 열의를 보였다. 특히 김민선은 동양화 수업을 받는 것은 물론 틈틈이 박물관에 가서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찾아보는 등 자신이 맡은 신윤복 캐릭터에 깊이 심취했다. 한편 영화 속 경장으로 나오는 강무 역의 김남길은 촬영 틈틈이 공예작업실을 찾아 작업자들의 자세나 손놀림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김홍도의 그림 ‘씨름도’의 배경이기도 한 장터 씨름대회 장면을 위해 무술감독에게 씨름 특훈을 받기도 했다. 부족한 연습시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운동신경으로 들배지기, 호미걸이 기술 등을 마스터한 김남길은 박진감 넘치는 씨름 시합 장면을 연출해내며 액션연기에도 탁월한 배우임을 증명해 보였다. 한편 영화 속에서 가야금에 능한 기녀 설화로 나오는 추자현 역시 한달간 일주일에 2번씩 빠짐없이 가야금 수업을 받는 열정을 보였다. 추자현은 손가락이 길어 보통사람들보다 가야금 연주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금에 매진해 손 클로즈업을 제외한 영화 속 모든 장면에서 직접 가야금 연기를 선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민선과 추자현은 영화 속 말타는 장면까지 직접 소화해내 온 몸을 바친 연기투혼을 발휘했다. 영화 <미인도>에서 예인으로 거듭날 그들의 활약상을 마음껏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Sensation Painting ]
알고 보면 더 유익한 영화정보!
미리 감상하는 영화 속 걸작!

미인도 (美人圖) : 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혜원 신윤복의 대표작.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잘 드러낸 18세기 말기~19세기 중기의 걸작.
쪽물을 들인 회청색 치마에 받쳐 입은 남자주색의 삼회장저고리, 옆구리의 자주빛 고름등 옷맵시가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고 말려 올라간 치마 끝으로 한쪽만 살짝 드러나는 외씨 버선과 고개 숙여 응시 하는 여인의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영화 <미인도>속 ‘미인도’는?
미인도의 찬문 "얇은 저고리 밑, 가슴 속 가득한 정을 붓끝으로 전하노라"라는 한 줄에서 시작된 상상력. 미인도는 신윤복의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그림 ‘미인도’는 신윤복이 사랑하는 연인 강무 앞에서 처음으로 여성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에서 나온다. 그림 때문에 남자로 살다가 사랑 앞에서 여자이고 싶었던 그녀의 설레임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춰 보는 모습에서 묘사된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긴다.


단오풍정 (端午風情) : 종이에 채색 28*35cm 간송미술관
그림의 중심 상단에는 강렬한 색채로 그네 뛰는 여인을 묘사하여 화면의 초점을 이루었고, 왼쪽 위에서 사각(斜角)으로 흘러내리는 개울과 둔덕 등 거의 빈틈없는 구도는 신윤복의 그림 중에서도 백미이다. 큰 타래머리의 여인들과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반라(半裸)의 여인들, 그리고 바위 틈으로 숨어서 넘겨다보는 승려의 모습 등을 대담하게 그렸다.

영화 <미인도>속 ‘단오풍정’은?
강무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윤복에게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소개한 개울가. 평소 풍속화를 그리고 싶어하던 윤복에게 최적의 장소로 추천한 곳은 다름 아닌 평소 기녀들이 목욕을 하는 개울가이다. 강무가 건낸 청동거울 속으로 비치는 개울가 풍경, 목욕하는 기생들의 농염한 자태가 아찔하다. 그림 ‘단오풍정’이 그려진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림을 생생하게 재현한 영화 속 장면이 압권이다.


월야밀회 (月夜密會) : 종이에 채색 28.2*35.2cm 간송미술관
대담한 묘사와 색감이 탁월한 관능미를 보여주는 신윤복의 또 다른 대표작품.
인적이 끊어진 골목길 보름달이 비치는 담 그늘 아래서 한 남자가 여인을 감싸고 있다. 담 모퉁이에 비켜서서 조마조마하게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그림 속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영화 <미인도>속 ‘월야밀회’는?
영화 속에서 그림 "월야밀회"는 스승 김홍도가 자신도 모를 감정을 느끼게 된 제자 윤복의 화첩 속 그림 중 하나이다. 우연히 몰래 보게 된 화첩속의 ‘월야밀회’를 본 김홍도는 마치 윤복과 강무의 사랑을 훔쳐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고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월하정인 (月下情人) : 종이에 채색 35.6*28.2cm 간송미술관
“밤 깊은 삼경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 알지.”
신윤복의 섬세한 감성을 보여주는 작품. 달빛아래 두 남녀의 은밀한 밀애를 담은 작품.

영화 <미인도>속 ‘월하정인’은?
‘월하정인’은 처음 여자의 모습을 들켜버린 윤복이 강무에게 설레임을 느끼면서 그리게 된 작품. 깊은 밤에 윤복과 강무가 몰래 사랑을 나누는 떨리는 감성을 담았다.


이부탐춘(二婦探春) : 종이에 채색 28.2*35.2cm 간송미술관
봄날 한 쌍의 개가 교접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한 청상과부와 이를 말리는 몸종의 노골적인 표현이 웃음을 자아내는 작품.

영화 <미인도>속 ‘이부탐춘’은?
영화 속에서 ‘이부탐춘’은 김홍도가 그의 스승 표암 강세황의 집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는 동안 윤복이 마당을 둘러보다가 담장 너머에 소복 입은 과부와 몸종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으로 그린 작품이다.

씨름도 : 종이에 채색 27×22.7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대표적 풍속화중 하나이다. 맞붙어 힘을 겨루는 씨름꾼의 마지막 안간힘과 구경꾼들의 엇갈린 표정 및 탄성의 몸짓이 열띤 분위기와 함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영화 <미인도>속 ‘씨름도’는?
김홍도와 신윤복은 정조에게 바칠 속화를 그리기 위해 저잣거리 구경을 나간다. ‘씨름도’는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강무의 씨름시합이 한창인 것을 보고 김홍도가 그린 것이다. 강무는 이날 시합에서 우승을 해 상품인 송아지를 윤복에게 선물한다.


습득도(拾得圖) : 비단에 채색21.5*15.2cm, 간송미술관
단순한 구도이면서 먹의 농담으로 세상을 떠돌며 백성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었다는 고승 습득의 삶을 표현한 그림이다. 단원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영화 <미인도> 속 ‘습득도’는?
값비싼 거울을 깨뜨려 꼼짝없이 붙잡힌 강무를 위해 윤복은 스승 김홍도의 그림 ‘습득도’를 모사한다. 거지로 살면서 가난한 이를 돌보았던 당나라 거지 중 습득의 그림을 귀신같이 모사해낸 윤복의 지혜와 필법에 거드름을 피우던 관료들도 강무를 순순히 놓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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