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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으로 본 세계사


세계사 ― 인간정신을 인식하기 위한 기초

도르나흐, 1923년 12월 24일 - 1924년 1월 1일

루돌프 슈타이너

타카하시 이와오 / 유창완



제 1 강 기억의 삼단계

1923년 12월 24일

 


◎ 내면생활의 진화

 

금번 크리스마스회의 기간 중 밤에는 여러분에게 인류사의 발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기회에 지상의 인류 진화를 다시 한 번 개관함으로써 현재의 인간 본질을 지금보다 깊게 집중해서 의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회의는 모든 인류문화의 미래에 대단히 중요한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바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현대인의 혼의 모습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현재 우리 혼의 모습은 과거와의 관련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진화에 관해서든 인류전제의 진화에 관해서든 현대인은 대단히 한쪽으로 편중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인간의 혼적 영적인 생활은 과거도 현재도 역사전체를 통틀어서 본질적으로 달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과학적인 문제에 관해서 고대인은 본질적으로 어린아이 같고, 각양각색의 미신을 믿으며, 인류는 극히 최근이 돼서야 겨우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연구를 별게로 하면 일반적으로 현대인의 혼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인이나 고대 동양인과 같은 혼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인도, 인류전체도 역사상 어떠한 시대에도 기본적으로 같은 마음과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대를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아직 동물의 모습을 한 인간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사 이래 인간의 마음과 몸의 활동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며, 그 이전의 모습은 안개에 둘러싸여있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아직 불완전한 고등영장류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이 거의 일반적인 현재의 사고방식인데, 그 사고방식은 대단히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한, 현대인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11세기, 10세기, 9세기의 인간 사이의 혼의 모습에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를 전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인과 골고다의 성사(聖事) 시대의 인간, 현대인과 고대 그리스인 사이의 혼의 모습을 말하려 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 고대 동양인의 혼

 

그리고 고대 동양 세계에 이르게 되면,―그리스문화는 이 세계의 일종의 식민지, 마지막 식민지였는데―이 세계의 사람들의 혼생활은 현대인의 혼생활과 전혀 달랐습니다. 1만 년 전, 또는 1만5천 년 전의 동양인이 고대 그리스인 혹은 현대인과 얼마나 다른 존재였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뒤 곧 설명할 예정입니다.


우선 우리 자신의 혼에 시선을 향해봅시다. 무엇인가를 체험한다고 합시다. 보거나 듣거나 하는 체험을, 당사자로서 그와 같은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하면, 그 체험은 기억이 돼서 다시 의식 속에 되살아납니다. 예를 들면 10년 전의 체험을 오늘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10년 전 어떤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당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한 것, 모두 함께 무엇인가 한 일, 그러한 일들이 오늘 이미지가 되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이 내적인 혼의 이미지는 10년 전의 사건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학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 떠오릅니다. ―물론 현대인은 그러한 감정을 매우 적은 부분밖에 체험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감정에 의해서 떠오르는 기억이 발생하는 장소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그 위치를 정해놓고 있습니다. 머릿속에는 옛날 체험을 기억해내는 작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아득히 먼 과거로 건너뛰어서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 동양의 거주민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현재의 중국인, 인도인 그 밖의 사람들은 이 거주민들의 자손입니다. 그러므로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인간을 보면 그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머릿속에는 외적인 생활 가운데서 체험한 것을 기억하는 기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생활방식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내적인 체험은 그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머를 그러한 생각(사고)이나 마음(감정)으로 채우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대의 피상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보면 ‘지금 우리와 같은 생각이나 마음을 옛날 사람도 품고 있었다.’고 해야 하지만 그러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먼 과거를 영시하면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이나 마음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는 추상적인 내용을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로테스하게 생각하겠지만―사람들은 머리 그 자체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머리 그 자체를 느끼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미의 추상작용과는 관계가 없는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던 것입니다. 머릿속의 생각을 체험하는 법을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를 체험하는 방법을 알고 있던 것입니다.


 

◎ 머리와 지구, 가슴과 대기권, 심장과 태양

 

우리의 경우 과거 체험을 떠올릴 때 이 기억상을 과거의 체험과 연결 짓습니다. 태곳적 사람들은 자기 머리의 체험을 대지와, 지구전체와 연결 지었습니다. ‘우주에는 지구가 있고, 지구에는 내가 있고, 나에게는 머리가 있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깨위에 얹혀있는 내 머리 그 자체가 지구에 대한 우주적인 기억이었습니다. 지구는 먼 과거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머리는 훨씬 뒤에 가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지구 존재를 향한 우주적인 기억이었습니다.


인간 머리의 형태, 모습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지구의 모상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태고의 동양인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구혹성의 본질을 느끼고 있던 것입니다. ― “신들은 지구와 자연의 모든 영역을, 산과 강을 우주 그 자체로부터 창조해냈다. 하지만 나 자신이 어깨 위에 이고 있는 이 머리는 지구 그 자체의 충실한 모상이다. 이 머리도 그 안에 흐르는 피도 지상을  흐르는 하천과 해류의 충실한 모상이다. 지상의 산계(山系)는 내 머릿속의 뇌의 모습이 되어 반복되고 있다. 내 어깨위에 나 나름의 지구혹성의 모상을 짊어지고 있다.” 그와 같이 태고의 동양인은 말했습니다.


현대인이 자신의 기억상을 과거 자신의 체험과 연결 짓듯이 태고의 동양인은 자신의 머리 전체를 지구혹성과 결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내면생활의 본질적인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에는 태양으로부터 발산하는 열과 빛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자신의 힘들을 이 대기권에 방출하고 스스로를 태양의 작용에 맡깁니다. 그와 같이 해서 우주로부터 오는 작용을 받아들입니다. 그 경우 고대 동양인은 누구라도 지상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를 이 대기권과 관련해서 특별히 중요한, 특별히 본질적인 장소이며,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지도, 태양과 접하고 있는 위쪽 대기권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상의 다른 지역은 오른쪽, 왼쪽, 앞, 뒤로 저 멀리 멀어져감에 따라서 흐리멍덩하게 사라져갔습니다. (그림1 참조)


<그림1>


예를 들어 인도에서 생활하고 있던 고대 동양인이 그 인도의 땅을 성스러운 곳으로 느꼈을 경우 인도 이외의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지역은 일반적인 토지로서 희미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지구와 지구이외의 우주공간의 경계에 대해서도 별다르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자신의 거주지는 특별히 소중한 땅이었습니다.(그림1의 붉은 색 부분) 그 사람에게 그 지역의 생활을 통해서 우주공간을 향해 영향을 주는 일은 특별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땅에서 어떻게 호흡했는지는 그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었다면 어떤 땅에서 어떤 호흡을 하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 날 사람들에게도 숨쉬기 좋은 환경 나쁜 환경이 있지만 그것을 각별한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동양인은 특정한 땅에서의 호흡방식을 특별히 깊게 체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땅의 하늘이 어떤 식으로 우주공간과 연결되어있는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고대 동양인은 머릿속에서 지구전체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단단한 뼈에 의해서 윗부분이나 옆, 뒷면이 닫혀져 있지만 아랫부분에는 통로가 있고 가슴을 향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림1 좌측) 머리가 비교적 자유롭게 가슴 쪽으로 열려있음을 느끼는 일은 고대인에게 특별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고대인은 머리 내부의 형상을 지상의 모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구를 자신의 머리와 연결 짓고,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을 머리 이외의 신체와 연결 지은 것입니다. 머리가 아래를 향해서 열려있는 것, 심장을 향하고 있는 것이 지구가 대기권을 향해서 열려있는 것과 대응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지구는 대기권을 통해서 우주를 향해서 앞으로 열려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커다란 감동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는 지구전체를 머릿속에서 느낀다. 이 머리는 작은 지구이다. 하지만 이 지구전체는 나의 심장을 짊어지고 있는 가슴을 향해서 열려있다. 그리고 나의 머리와 가슴, 심장 사이에서 연출되고 있는 것은 지구와 우주, 대기권과 태양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들의 모상이다.”


거듭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의 머리 안에는 지구가 살고 있다. 더욱 깊이 들어가면 그 지구가 태양을 향한다.(그림1 화살) 그 태양이 안의 심장이다.”


이렇게 말하는 고대인은 우리의 감정생활에 대응하고 있는 혼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의 생활을 감정으로 체험하고 있지만 자신의 심장을 직접 느끼지는 못합니다. 해부를 통해, 생리학을 통해서 심장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하지만 학문에 의해서 얻은 지식은 종이점토로 흉내 낸 심장에 대한 지식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에 의한 심오한 세계체험은 고대인에게 없었지만, 그 대신에 고대인은 심장을 이와 같이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세계와 감정으로 결합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좋아하고, 무엇인가를 싫어하고, 또한 나아가서는 확고한 이 세상의 현실로부터 공기처럼 추상화되고, 떨어져나간 세계과도 감정으로 결합하듯이 고대 동양인은 자신의 심장을 우주와 결부 지었습니다. 즉 자신의 몸으로 지구에서 대기권으로 나아가서 태양을 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외출한다고 합시다. 그때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우리의 의지는 지체(肢體)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동양인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고, 감정, 의지가 고대 동양인 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구인 머리의 체험과 태양에 이르는 대기권인 가슴과 심장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지체와 행성

 

고대 동양인은 손발의 움직임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성을 지체 안에 보냄으로써 지구의 대기권뿐만 아니라 인간과 별 세계와의 관련도 감지했습니다. (그림1 참조) 자신의 머리 안에서 지구를 이미지화 하고, 머리에서 아래 방향의 가슴과 심장 쪽으로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것 안에서 대기권을 이미지화하고, 손과 발의 움직임 속에서 먼 우주공간 안에 살고 있는 별들과 지구의 관련을 이미지화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동양인은 현대인과 같은 ‘의지’의 힘으로 ‘나는 나간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상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앉는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어가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살펴본다면 어떠한 고대어라도 ‘나는 나간다.’라고 말하는 대신 ‘화성이 나를 재촉한다. 화성이 내 안에 작용하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전진할 때 양 다리에서 화성충동을 실감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잡고, 무엇인가를 손으로 느낄 때의 감정은 ‘금성이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 누군가에게 충동을 부여하고 무엇인가 하도록 재촉할 때에는 ‘수성이 사람 안에서 작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앉는 것은 인간 안의 목성의 작용이었습니다. 또한 휴식을 취하든 게으름을 피우든 눕는 것은 토성의 충동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손과 발의 움직임 안에서 외적인 우주의 펼쳐짐을 느낀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 안에서는 지구에서 우주로, 별의 세계로 가는 것과 머리에서지체로 내려가는 것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머리 안에 지구가 있고, 가슴과 심장에 대기권이 있고, 지체 안에 외적인 우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완전히 가능합니다. ― “가련한 현대인인 우리는 추상적인 사색에 빠져있다. 그러한 것을 해서 무엇이 되겠는가? 우리는 자신들의 추상적인 사고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추상적인 사색에 몰두할 뿐 자신의 머리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어떠한 날카로운 사고보다도 훨씬 내용이 풍부한 존재이다. 대뇌피질의 어떠한 주름 하나를 떼어내더라도,―해부학이나 생리학에서는 대뇌피질의 주름이 가진 훌륭한 기능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어떠한 천재적인 과학자의 발상도 미치지 못할 위대한 작용을 하고 있다.”


예전의 지구상에는 인간이 자신의 빈약한 사고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도 의식하고 있던 시대가 존재했습니다. 그 시대의 인간은 머리를 감지하고, 시상(視床)과 네 개의 뇌실(腦室)을 감지하고, 그것을 대지에 놓인 산계(山系)의 모습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들은 추상적인 학문이론을 통해서 심장을 태양과 관련지은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리와 나의 가슴과 심장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지구는 태양과 관계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인간은 일생을 우주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평생에 걸쳐서 이 공생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머리 대신에 빈약한 사고력을 행사하게 된 뒤부터 인간은 사고와 결합한 기억을 갖고, 체험한 내용의 사고상을 기억내용으로서 머릿속에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고내용이 아니라 머리를 감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와 같은 기억내용을 갖지 않았고,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자신의 머리를 감지하는, 사고와 기억을 가지지 못한 태고의 동양인이 살던 지역으로 간다면, 우리가 지금 다시 필요로 하게 될 능력이 발휘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오랜 기간 그와 같은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우리는 지금 다시 그것을 필요로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의 혼작용이 가진 작은 태만 탓이기도 합니다.



◎ 땅과 결부된 기억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시대에 자신의 머리, 가슴, 심장, 지체를 감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간다면 작은 말뚝이 땅에 세워져있고 거기에 어떤 표시가 붙어있는 것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어느 벽이라도 어떤 표시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모든 거주지, 모든 생활공간이 다양한 표식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직 기억을 사고내용으로서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을 때 작은 기념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갔을 때 자신이 세운 그 기념물로 그때의 사건을 다시 체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구와 공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단지 머릿속에 메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메모를 머릿속뿐만 아니라 수첩이나 그 외의 것들에 적어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태만 탓이지만, 점점 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태고 시대에는 그러한 것들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고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표식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이 인간 본연의 소질로부터 ‘기념비’와 같은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류역사상의 모든 것은 인간 본성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현대의 우리에게는 기념비를 만든 근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는 특별히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기념비를 만들고 있지만, 현재 우리가 기념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직 현재와 같은 기억력을 갖지 못한 상태로, 체험한 장소에 표시를 남겨두고 다시 그곳으로 향했을 때 그 땅과 결부된 모든 체험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 태고시대의 흔적입니다. 머리로 체험한 것을 대지에 의탁하는―이것이 태고 시대의 원칙이었습니다.


태고의 오리엔트에는 기념비화된 기억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땅에 표시를  만들었습니다. 기억을 내부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여기저기에 만들어진 기념비에 의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지와 결부된 기억입니다.


현재 우리의 영성을 진화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지 않은 이 토지와 결부된 기억능력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대지와 인간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기억능력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내려고 하지 말고, 이런저런 장소에 표식을 만들자.”,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 바깥의 표시를 기준으로 해서 내적인 혼의 감성을 키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방 한 구석에 성모상을 놓고 그 성모상 앞에 서는 것에서 성모를 향한 나의 마음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모상과 같은 기념물과의 섬세한 연결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동방을 향해 얼마간 들어가면 어느 가정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동유럽 중부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됩니다. 이러한 습관은 모두 땅과 결부된 기억 시대, 기억이 특정 장소와 결합되어있던 시대의 흔적입니다.



◎ 리듬화된 기억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는 땅과 결합된 기억이 리듬화된 기억으로 이행합니다. 처음에는 땅과 결합된 기억, 다음은 리듬화된 기억입니다. 제2단계에서 인간은 기억술이 아닌 내적인 본성으로부터 리듬 안에 살고 싶다는 요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들었을 때 리듬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요구를 발달시킨 것입니다. 소가 모우(서양의 경우)하고 울 때 모우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모우모우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더욱 오랜 시대에는 모우모우모우라고 외웠습니다. 즉 지각한 것을 중첩시켜 리듬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현재도 몇 가지 말에는, 예를 들면 가오가오, 쿡쿡쿠(모두 뻐꾸기라는 뜻)와 같이 이러한 표현법 행해지고 있습니다. 또는 아이들 말에는 반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도 리듬화된 기억 시대의 유산입니다. 체험하는 것만으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울 때 리듬화하여 반복해서 체험하려는 것입니다. 그 경우 이어지는 앞뒤 말 사이에 유사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만(남자)과 마우스(쥐)라든가, 슈토크(계단)와 슈타인(돌)과 같이 말입니다. 이 체험한 것의 리듬화는 모든 것을 리듬화하려는 강한 동경의 마지막 흔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2기의 인간은 리듬화되지 않은 것을 기억으로 붙들어 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시문(詩文)은 모두 이 리듬화된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기억력은 제3단계가 돼서야 비로소 생겨났습니다. 즉 바깥의 공간 안에서 기억의 근거를 발견하는 것도, 리듬에 의존하는 것도 아닌 시간 속에서 경과한 사건을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시간적인 기억력’입니다. 참으로 추상적인 우리의 이 기억은 기억의 진화에서 제3단계에 해당합니다.


그럼 인류사에서 리듬화된 기억이 시간적인 기억으로 이행한 것은 언제일까요? 슬퍼해야할 현대인의 추상성을 완전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시간기억’, 기억해야할 것을 이미지로서 떠올리는 기억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언제일까요? 무의식 또는 반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기억해야할 때 리드미컬한 반복을 통해서 불러일으켜야만 했던 리듬화된 기억으로부터 이와 같은 시간적인 기억으로 이행한 시점은 고대 오리엔트인이 그리스에 식민지를 만들었던 시대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해서 식민지를 건설했던 시대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시아와 이집트로부터 와서 정주한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본래 위대한 영웅들이 과거 리듬화된 기억의 땅을 떠나서 그 기억을 시간적인 기억, 시간적인 회상으로 바꾸기 위한 풍토를 찾아 나선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문화가 시작하는 시점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리엔트에 존재하고 있던 그리스문화의 어머니 나라, 본국은 기본적으로 발달한 리듬화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였습니다. 그곳에는 리듬이 살아있었습니다. 본래 고대 오리엔트를 리듬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에서 말하는 낙원은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리듬이 우주를 관통하여 울려 퍼지고, 그것이 인간 안에서 리듬화된 기억을 탄생시키고 있던 아시아라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리듬체험자로서 리듬 생산자인 우주(코스모스)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가바드기타를 읽으면 그 안에서 과거의 그 장대한 체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베다와 서아시아의 많은 시문에서도 이 과거의 체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근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과거 아시아 전역을 장대한 내용으로 둘러싸고 있던 그 리듬의 여운이 그러한 문헌 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 안에, 인간의 심장 안에 지구 대기권의 비밀을 반영하고 있던 리듬입니다.


그리고 시대를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리듬화된 기억이 땅과 결합된 기억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시대의 인간은 아직 리듬화된 기억을 갖지 못했으며, 무엇인가를 체험했을 때 그 장소에 표식을 세우는 일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장소에 없을 때는 기억을 하지 못했지만, 그 장소에 오면 이전의 체험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체험을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표식이, 대지가 체험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지구는 인간의 머리를 자신의 모상으로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대지에 놓인 표식은, ‘땅과 결합된 기억’을 위한 표식은 인간의 머릿속에 이전의 체험을 모상으로서 다시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인간은 땅과 함께 살았고, 기억을 땅과 결합시켰습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땅에 무엇인가 기록하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과 결부된 기억이 리드미컬한 기억으로 이행한 시점은 옛 아틀란티스 몰락 이후 후 아틀란티스 초기 여러 민족이 동방 아시아로 이동했던 시점입니다. 먼저 사람들은 현재 대서양의 해저가 된 옛 아틀란티스대륙에서 아시아로 이동했습니다. 다음에 그 문화가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림2 참조)


<그림2>


아틀란티스 민족들이 아시아로 이동했을 때 땅과 결부된 기억이 리듬화된 기억으로 이행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리듬화된 기억이 아시아의 정신생활을 완성시켰습니다. 이어서 그리스의 식화를 즈음하여 리듬화된 기억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기억으로 이행이 발생했습니다.


아틀란티스대륙의 파국에서 그리스문명에 이르는 모든 문명은 리듬화된 기억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역사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전승, 신화로서 고대 아시아에서 전해져온 모든 것들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류사의 발전은 역사의 바깥측면에 눈을 향하여 현존하는 사료를 조사하는 것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살고 있는 것의 발전을 봄으로써, 그리고 또한 기억력과 같은 능력이 바깥에서 안으로 진화해온 모습을 봄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 기억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들 누구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병에 걸려 기억해야할 인생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친구 중 한명은 죽음직전에 무서운 운명이 그를 덮쳤습니다. 그는 어느 날 집을 나와 역에서 표를 사고 어느 지역까지 간 다음, 그리고 열차에서 내려 다시 표를 샀습니다. 그의 기억은 이 표를 산 시점부터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는 모든 행동을 정확하게 했습니다. 지성은 완전히 건재했습니다. 기억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에게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베를린의 노숙자수용소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그때까지 그는 전 유럽의 거의 절반의 지역을 여행하며 돌아다닌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체험은 그때까지의 인생체험과 연결되지 못한 채 지나가버렸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베를린의 그 노숙자 수용소에 수용된 후 겨우 기억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에서 조우하는 수많은 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근대인의 내면생활은 만약 기억의 끈이 탄생 후 어느 시점부터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지 않으면 건재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토지와 결부된 기억의 소유자에게 이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기억의 끈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위 대지에 자신이 체험한 사건을 상기시켜줄 각양각색의 기념물에 둘러싸여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경우 내적인 기억내용이 사라져버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혼은 불행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기념물, 선조, 부모, 형제들이 세운 기념물, 그러한 것들은 서로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념비는 친족과 친족을 서로 결합시켰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내적으로 필요한 자아의 조건으로 느끼고 있는 시간화된 기억은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인류의 혼의 변천에 눈을 돌릴 때에만 인류사의 진화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찰을 행할 때에만 역사는 올바른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우선 특별한 예로서 인류 혼의 역사를 기억능력과 연관 지어 언급했습니다. 인간 혼에 대한 고찰로부터 얻은 빛으로 조명을 비출 때에만 역사상의 여러 사건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점을 앞으로 수회에 걸쳐서 고찰할 예정입니다.




제 2 강

 


인류 진화의 역사적 경과과정을 보려면 각각의 시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혼 상태에 시선을 향해야합니다. 어제 이야기에서도 이것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 아시아 ― 영계의 밑바닥

 

어제는 본래의 옛 오리엔트인 아시아계 여러 민족의 진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아틀란티스대륙 몰락 후 이 진화기에 아틀란티스 주민들의 자손이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쳐, 서서히 유럽과 아시아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래 이 민족 집단은 아시아에서 리듬을 기본으로 한 생활태도를 지속했습니다. 처음에는 ‘땅과 연결된 기억’이라는 아틀란티스 시대 기억형태의 분명한 여운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어서 그 여운은 오리엔트 진화 과정에서 ‘리듬화된 기억’으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시대가 되자 시간화된 기억으로 옮아갔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본래의 아시아적인 진화를 짊어지고 있던 것은 후세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체험한 외적인 사건은 후세의 체험보다도 훨씬 인간 심정의 작용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 심정의 작용은 인간존재 전체의 작용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혼의 작용, 사고의 작용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머리의 내적인 경과와 관련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혈액순환과 관련성을 갖지 못한 추상적인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고는 내적으로 머리의 경과과정으로서 체험되는 사고였으며, 모든 감정은 호흡리듬 등으로서 체험되는 감정이었습니다. 인간 전체를 나눌 수 없는 통일체로서 체험하고 느끼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닙니다. 세계와의 관계, 우주와의 관계, 우주의 영적 물질적인 것과의 관계, 그러한 관계도 후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체험했습니다. 현대인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고, 많든 적든 숲이나 강,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는 돌로 쌓은 벽으로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대인에게 우주적=초감각적인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현대인은 우주적=초감각적인 존재를 어디에서 구하면 좋을까요? 어디에서도 그럴만한 영역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실마리가 될 만한, 응답받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혼적=영적으로 말입니다.


태고의 동양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오늘날 우리가 환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통합적으로 파악된 우주환경의 밑바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주위에는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가, 산과 강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존재에는 영이 침투하고 있고, 말하자면 영의 흐름에 노출되어있어 영에 의해서 짜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산과 함께 살아있다. 강과 함께 살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사대령(四大靈)들과도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광계 안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 광물계는 영계의 몸이다. 동시에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영계이다. 말하자면 가장 낮은 차원의 영계이다.” ―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로지 ‘지상계’로만 알고 있는 이 영역은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밑바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 이 그림의 이 부분(hell흰색)이 위쪽으로 사라지면 그곳에 다른 영역(gellrot노랑)이 나타나고 양자는 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위쪽에는 다른 영역(blau파랑)이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역(orange오렌지)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영역을 인지학용어로 말한다면, 최고 영역은 제1하이어라키의 세라핌, 케루빔, 토로네의 영역입니다. 다음은 제2하이어라키의 예지령, 운동령, 형태령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다은은 제3하이어라키의 인격령, 대천사, 천사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제4의 밑바닥 영역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영역입니다. 현재 우리의 과학적 상식에 의하면 자연의 대상과 자연의 경과(經過)만이 존재하는 영역이지만, 과거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경과와 자연물과 함께 물과 땅의 사대령들이 활동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영역이 ‘아시아’인 것입니다.


아시아란 인간이 존재하는 영계(靈界), 가장 저차의 영계를 말합니다. 물론 당시 동양에서는 현대인의 의식에 알맞은 사고방식, 느끼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영적이지 않은 물질이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참으로 난센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산소와 질소 등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고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산소는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더욱 활력을 부여하고, 생명을 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산소와 혼합된 상태로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도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도처에서 살아있는 유기물에 작용하여, 그 유기물이 혼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힘입니다. 당시 사람은 예를 들면 산소와 질소를 그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자연의 과정을 그와 같이 영적인 것과 관련짓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생활방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은 오늘날의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주위의 외적인 대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러한 시선도 가능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비의입문자들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백주몽(白晝夢)과 아주 비슷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꿈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은 이 꿈에서 주위와 관계하고, 꿈에서 목초지나 나무들, 강, 구름과 관계했습니다. 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현대인은 꿈에서 무엇을 할까요? 어떤 사람이 잠이 들자 갑자기 눈앞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부뚜막이 나타납니다. “불이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밖에서는 어딘가로 불을 끄러 소방차가 달려갑니다.


냉랭한 인간 이성의 경험과 화재를 둘러싼 일상의 경험은 이 꿈의 정경과 정말로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고 동양인의 경우 모든 경험이 꿈속으로 흘러들었지만, 바깥의 모든 자연계는 꿈속에서 비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속에서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령들을 체험했습니다. 당시 사람에게는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둔감한 잠, 즉 정신도 모르고 잠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잠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누구나가 그러한 잠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면 중에도 어슴푸레한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 수면 중 하이어라키 체험

 

당시 사람은 잠드는 것으로 몸을 쉬는 한편, 마음은 밖으로 나가 활동하면서 제3하이어라키 존재를 지각했습니다. 사람은 통상적인 각성=꿈의식 속에서, 즉 당시의 일상의식 속에서 ‘아시아’를 체험하고 수면 중에는 제3하이어라키를 경험한 것입니다. 때로는 수면 중 더욱 어두운 의식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체험한 것을 자신의 심정에 깊이 각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동양의 주민들은 모든 것을 비전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일상의식이 존재했습니다. 비전은 더욱 오래된, 예를 들면 아틀란티스기나 레무리아기 또는 월기와 같은 생생함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이 동양 진화 과정에서도 아직 이러한 비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은 일상에서 비전을 체험했고, 수면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 ‘통상적인 지상생활에서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천사, 대천사, 인격령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들 아래에서 지낸다.’ 당시 사람의 혼은 수면 중 몸에서 자유롭게 해방되어 고차의 하이어라키 존재들 아래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아’에서는 그놈, 운디네, 지르페, 자라만타라고 하는 지수화풍의 사대령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쉬고 있던 수면상태에는 제3하이어라키의 본성들을 체험하고, 동시에 지구기에 속하는 혹성계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수면상태가 더욱 심화되어 완전히 특별한 상가 발생했습니다. 그 때 사람은 다음과 같이 느꼈습니다. ―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무엇인가가 나를 붙잡아서 지상 생활로부터 나를 데리고 사라진다.’


제3하이어라키 안에 있을 때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상의 깊은 잠에 빠지면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 제3의 수면상태에 대해서는 도저히 분명한 의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2하이어라키의 체험은 인간존재 전체를 깊이 꿰뚫어, 사람들이 그곳에서 깨어났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 ‘혹성존재를 뛰어넘은 고차 존재들의 은총을 받았다. 그것은 지혜령, 운동령, 형태령이라고 하는 제2하이어라키의 영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태고의 아시아에서는 잠을 자면서 깨어있고, 깨어있으면서 잠을 자는 상태와 제3하이어라키를 만나는 잠, 이 두 가지 의식 상태를 본래부터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보다 깊은 잠을 통해서 제2하이어라키가 인간의식 속에 끼치는 작용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 비의입문자의 각성의식

 

그렇지만 소수의 비의입문자들은 새로운 의식 상태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놀랄만한 의식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낮 동안 지니고 있는 의식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2, 3세 때 자연스럽게 그러한 의식 상태를 발달시킵니다. 그러나 태고의 동양인은 결코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인위적으로 그러한 상태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깨어있는 꿈, 꿈꾸는 깨어남 속에서 그러한 의식 상태를 획득해야만 했습니다. 태고의 동양인은 깨어있는 꿈, 꿈꾸는 깨어남의 상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  뚜렷한 윤곽을 갖고 있는 것을 많든 적든 추상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비의입문자들은 사물을 현재 인간이 낮 동안 통상적인 의식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라면 어느 초등학생이라도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같은 내용을 그 의식으로 배웠습니다. 물론 현재 아이들이 학습하는 추상적인 문자는 당시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자는 세상의 삼라만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 태고시대에 읽고 쓰기가 가능했던 사람은 비의입문자뿐이었습니다. 읽고 쓰기는 현재 인간에게는 당연한 지적인 의식 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평상시의 의식 상태로 태고의 동양에 가서 그 동양인 앞에 선다면, 여러분을 모두 비의입문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차이점은 내용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비의입문자라고 여기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온갖 수단을 이용해서 여러분을 그 지역에서 추방했을 것입니다. 현재는 그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이지만 당시는 비의입문자라고해도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현재 인간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읽고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내면에 들어가서 생각해봅시다. 아주 보편적인 현재의 인간과 같은 유물론적인 비의입문자가 당시의 누군가 앞에 서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이 인물은 쓸 수가 있다. 어떤 의미를 가진 기호를 종이에 기록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일이 얼마나 악마적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우주의 신들의 위탁을 받아서 행해야만 한다. 신이 손과 손가락에 작용하고 혼에 작용하기 때문에 혼이 문자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어떤 의미 있는 기호를 종이에 쓰는 일이 허용된다. 이것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쓰다니 대단히 악마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인 것입니다. 태고의 비의입문자는 이점에서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현대의 인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최근에 재판이 나온 《신비적 사실인 그리스도교》의 서두에는 태곳적 비의입문자의 본질이 바로 이점에 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주 진화에 있어서 나중 시대가 되어 자연스럽게 인간 안에 나타나는 것은 항상 앞선 시대에 비의입문자를 통해서 획득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부터 선사시대 동양 민족의 마음 상태와 이후 문명사회의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하늘을 아시아라고 부르고, 그곳에 자신의 나라를 보고, 주위의 자연을 보았던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다른 인류였던 것입니다. 하늘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비교해 보십시오. 현대인은 주위의 사물을 하늘의 끝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끝을 하늘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사고방식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고대 전쟁의 의미

 

그런데 태고에는 영적인 것이 모든 자연에 깊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들이, 적어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이 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대인이 무엇인가를 쓰는 태도가 대단히 야만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분명 악마가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재 사람들에게는 태고의 아시아에서 아주 당연한 일이 분명히 야만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에서 동으로 이동한 민족 집단이 이미 정착하고 있던 다른 민족 집단을 굉장히 잔혹한 방법으로 제압하고, 그 토지를 빼앗고, 노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난 동양 역사의 내용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영적은 높은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그 한편으로 외적인 역사 과정을 살피면 계속해서 타국을 정복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이와 같은 일은 많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지극히 야만적인 행위입니다. 지금이라도 어딘가에서 침략행위가 일어났다고 하면 그것을 변호하는 사람들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이 침략전쟁에 종사하고 있을 때에는 최고로 양심적이었습니다. 침략을 신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대부분의 아시아 땅에서 평화를 향한 갈망이 퍼졌는데 그것은 문명 후기의 산물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문명 초기의 산물은 타국을 향한 끊임없는 침략과 타민족의 노예화였습니다. 선사시대를 아득히 멀리 회고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집니다. 크세르크세스와 같은 사람들이 행한 것은 그 중의 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정복 원칙의 근저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은 앞서 말한 의식 상태로 인해 다른 인간과 세계에 관해서도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지구의 거주지 차이가 원칙적인 의미를 잃어버렸지만,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종종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입각해서 그 차이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그림을 봐주십시오. 이 좌측에 유럽이 있고, 이 우측이 아시아입니다.


정복 민족(적색rot)은 아시아 북쪽에서도 와서 아시아의 특정지역에 정착하여 선주민(gelb노랑)을 노예로 삼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정복자로서 나타나는 민족 집단은 항상 젊은 민족, 청춘의 힘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 민족의 늙음과 젊음

 

현 지구진화기의 인간에게 ‘젊음’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현재의 ‘젊음’이란 인생의 어느 순간이라도 혼 안에 죽음의 힘을 짊어지고 있어서 죽음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혼의 힘을 언제라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싹트고, 꽃피우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력은 우리를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고 의식을 무력하게,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잇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죽음의 파괴적인 힘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매일 밤 수면 중에 생명력에 의해서 이 힘을 극복하고 있지만, 이 죽음의 힘은 인생의 끝에 가서 처음으로 단 한 번에 한해서 죽음 속에서 다 타오릅니다. 그러나 (역주-죽음의 힘은)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우리 안에 존재하면서 의식을 고양시키고, 우리를 사려 깊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상은 바로 현재 인간성의 특질입니다.


태고의 젊은 인종, 젊은 민족은 자신의 넘치는 생명력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인간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 ‘나는 끊임없이 자신의 피를 몸으로 부딪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의 의식은 사려 깊은 상태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젊음으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닌 비의에 입문한 입문자였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한 사람들이 당시 역사의 흐름 전체를 지도했습니다. 그 민족의 구성원은 과도한 젊음과 생명력을 갖고 있었지만 사려는 아주 적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민족은 이동하여, 오래된 민족의 거주지를 정복한 것입니다. 오래된 민족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죽음의 힘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민족은 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정복자와 노예가 된 사람 사이에 혈연관계가 생겨날 필요는 없었으며, 정복자와 노예가 된 자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펼쳐지는 드라마가 한편에서는 다시 젊어지도록 작용하고, 다른 편에서는 사려 깊게 만들도록 작용했습니다. 궁정을 만들고 노예를 거느린 정복자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이 노예들에게 주의를 기울인 젊은 혼은 이른바 무기력을 향한 동경 속에서 지나친 생명력을 누그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식적인 태도, 사려 깊은 태도가 생겨났습니다.


현재 우리와 같은 개별화된 인간이 달성해야할 내용을 당시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생활 속에서 달성한 것입니다. 지배민족이 된, 아직 젊고 충분히 사려 깊지 못한 주민들은 자신들보다 죽음의 힘을 더 많이 짊어진 다른 주민들을 가까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배하는 주민들은 다른 주민들을 정복함으로써 인류에게 필요한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끔찍할 정도로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태고 동양인들의 전쟁은 단지 인류를 진화시키는 충동을 따른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싸움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화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끔찍하게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전쟁이 만약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상에서 진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 번개

 

비의입문자는 현재 인간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시각은 현대인에게는 없는 혼의 모습, 느끼는 방식과 연결되어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뚜렷한 윤곽을 가진 외적인 사물을 감각을 통해서 체험하듯이 그들도 뚜렷한 윤곽을 가진 사물을 체험했지만, 신들에게서 유래하는 사물로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당시 비의입문자에게 사물은 대체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그림(그림5)을 봐주십시오. 이것은 번개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런 번개를 볼 수 있습니다.(그림위쪽) 그러나 태고의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처럼 보지 않고 그곳에 살고 있던 영적 본성의 작용을 보고 있었습니다. 번개의 뚜렷한 윤곽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주공간을 나아가는 신적 존재들의 진군이 보인 것입니다. 번개 그 자체를 본것이 아니라 우주공간을 부유하는 영들의 행진을 본 것입니다.


비의입문자도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행진을 보았지만, 시력의 진화와 더불어 행진하는 모습이 점차 옅어지고 사라지면서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번개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현재 누구라도 보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태고 시대에는 비의에 입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연으로부터 무엇을 느꼈을까요? 현재 사람처럼 인식내용, 진리내용을 느낄 때의 무관심함으로 느낀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도덕적인 작용을 느꼈습니다. 비의의 학도들은 후세의 모든 사람들에게ㄴ 아주 당연한 자연관을 엄격한 내적 시련을 거쳐서 익혔습니다. 그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 ‘통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사대존재들이 공기 중을 진행하는 것을 본다. 이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갖지 않고 신령의 세계에 완전히 귀의하여 그것을 보고 있다.’


실재로 깨어 있는 꿈, 꿈꾸는 깨어남이라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의지는 자유로운 의지가 아닌 사람들 안으로 흘러드는 신의 의지였습니다. 깨어 있는 꿈속의 형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번개를 본 비의입문자는 ‘신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원했습니다. 신들은 이와 같은 비의입문자를 위해서 우주내용을 바깥 세상에 드러냅니다.


비의입문자는 신들에 의해서 드러난 우주내용을 신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뚜렷한 윤곽을 가진 사물로서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비의입문자는 신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비의입문자가 아무런 보증 없이 신들로부터 독립해버렸다면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보증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비의입문자는 한편으로는 신령(神靈)에 등을 돌린 채 아시아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편으로는 제2하이어라키에 도달했을 때보다 더욱 깊은 의식 상태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을 잃어버린 세계와 더불어 세라핌, 케루빔, 토로네의 세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진화의 거의 중기에 ― 시대구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 비의입문자들은 그 의식 상태에서 지구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고, 근대인이 획득한 것과 같은 광물, 식물, 동물의 영역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신의 몸속에서 신이 없는 지상의 물질 속에서 신들로부터 해방되어있다고 비의입문자들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은 이 신이 없는 땅에서 세라핌, 케루빔, 토로네라고 하는 고차의 신들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숲의 모습, 나무들의 모습 그 자체는 녹회색의 영적존재를 나타내고 있지 않았고, 숲은 영적존재가 사라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그 숲에서 제1하이어라키에 속하는 신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라핌, 케루빔, 토로네 영역의 존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태고 동양의 역사적인 생성에서 본질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젊은 인류와 늙은 인류 사이를 조정하는 일이 그 후 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 진화 과정에서 젊은 사람들은 오래된 사람들과 접함으로써 성숙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지배적인 사람들의 혼과 만나서 성숙을 이루어나간 것입니다.


우리는 아시아 저편을 향해 멀리 시선을 향하면 향할수록 도처에서 이 진화과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사려 깊게 될 수 없는 젊은 사람들은 정복 과정에서 사려 깊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 고대의 생사관

 

그러나 눈을 아시아에서 그리스로 돌리면 어떤 다른 양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에서도 그리스에는 물론 늙음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늙음이라는 것에 영성을 침투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종 언급하고 있지만 ‘어둠의 나라에서 왕이 되기보다 현세에서 거지가 되는 편이 낫다.’라고 현명한 그리스인이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인은 외적인 죽음과도, 내적인 죽음과도 마주할 수 없었으며, 죽음을 자신 안에서 찾아냈을 때는 죽음을 자신 안의 사려 깊음을 향한 동경과 연결 짓지 못한 채 오로지 죽음에 대한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젊은 동양의 여러 민족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방법으로 죽음을 체험할 수 없었을 때에는 전쟁으로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이 체험한 죽음에 대한 내적갈등은 트로이전쟁으로 그들을 내몰았습니다. 그리스인은 사려(思慮)를 획득하기 위해 타민족 아래에서 죽음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내면에서 생명의 왕성함을 느끼게 해준다.’라고 하는 ‘죽음의 비밀’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인과 아시아의 그리스인 선조들 사이의 갈등을 일으킨 것입니다.


트로이전쟁은 불안과 근심의 전쟁이었습니다. 트로이전쟁에서 소아시아 사제문화의 대표와 죽음을 자신 안에서 느끼고 있어도 그것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태의 그리스인이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복에 전념하고 있던 다른 동양 민족들은 죽음을 바래도 죽음이 가깝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인에게 죽음은 가까웠지만 그 죽음과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관계할 수 있도록 동양의 삶의 방식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킬레우스나 아가멤논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 안에 죽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 죽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시아로 눈을 돌려 저편 아시아에 반대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장반대의 혼의 모습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스인은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지만 저편 아시아인은 죽음을 생명에 거스르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호메로스는 이것을 훌륭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라는 인물표현을 봐주십시오. 토로이인과 그리스인이 대비되고 있는 부분에서는 항상 이 대립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립 가운데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태고시대, 아시아에서는 이른바 죽음에 대한 넘치는 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향한 동경이 존재했습니다. 그리스 땅 유럽에는 인간 안에 넘치는 죽음이 존재했지만 그 죽음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유럽과 아시아는 제2의 관점에서도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리듬에 의한 기억과 시간에 의한 기억의 대립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의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대립하는 체험이 존재했습니다.


내일은 지금 암시한 이 대립을 더욱 자세히 고찰하고 인류 진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한 이행과정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현재 인류의 진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 제3 후 아틀란티스기의 영과 혼

 

나는 지금으로부터 딱 13년 전 크리스마스와 신년 사이에도 슈투트가르트에서 이번 연속강의와 같은 테마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때와 같은 테마를 다루겠지만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지금까지 2회에 걸친 도입강의에서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특히 선사시대 이래 인류의 심정, 혹은 혼이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졌는지 명확히 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명확히 하기 밝히기 위해서 적어도 처음은 역사를 수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고 있는 대로 영학적으로 고찰할 때 이른바 아틀란티스대륙의 파국 이후 선사시대, 역사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 통상적으로 ‘빙하시대’의 ‘신빙기’라고 부르고 있는데 ― 아틀란티스대륙 몰락의 마지막 장이 내려지고, 이 대륙이 지금의 대서양 해저를 형성하기에 이르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아틀란티스 파국의 결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다섯 개의 대문화기가 지나갔습니다.


이들 문화기 중 처음 두 개의 대문화기에 대해서는 역사의 전승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저편 오리엔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는, 훌륭한 베다도, 베단타철학도 나의 《신비학개론》에서도 언급한 본래의 인도기, 본래의 페르시아기의 단순한 잔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 고대 인도기, 고대 페르시아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후 아틀란티스 제3기에 해당하는 칼데아=이집트문화기 시대를 다루어보겠습니다. 그리스=로마기가 그 문화기의 뒤를 잇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틀란티스대륙의 붕괴에서 그리스문화기에 이르기는 시대까지 인류의 기억력, 회상능력의 변화를 고찰하고, 그 위에 인간 공동생활의 변화에도 눈을 돌렸습니다. 현재 우리의 기억,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경험을 찾아나서는 기억은 제3 후 아틀란티스기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리듬체험과 결합된 기억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리듬에 의한 기억에 앞서 존재했던 것은 아틀란티스시대에 특히 분명히 나타나는 땅과 결부된 기억이었습니다. 당시 인간은 본래부터 그때그때의 현재의식밖에 갖지 못했으며, 바깥세계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뿐만 아니라 인류의 과거와도 관계가 있는 표식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표식만이 표시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천체, 특히 혹성의 상호위치관계도 기억을 위한 표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별의 위치가 이동하는 것이나 되풀이되는 것으로부터 과거의 사건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깥 땅과 결합된 태고 인류의 기억을 육성하기 위해 하늘과 땅도 서로 함께 일한 것입니다.


아틀란티스기의 인류는 후세, 또는 현재 인류와 신체적으로도 달랐습니다. 현재 인류는 각성시에 자아와 아스트랄체를 당연한 듯이 몸 안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육체와 에테르체가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조직인 아스트랄체와 자아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개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관계를 알고 있지만, 태고의 인류는 자기 존재의 모습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3 후 아틀란티스기인 이집트=칼데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인간은 각성시에 육체와 에테르체 이외에 자신의 혼과 영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 ‘그것은 나의 영이고 혼이다. ― 이 영과 혼을 영학은 자아와 아스트랄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그것은 나의 육체와 에테르체에 결합되어있는 존재이다.’ 당시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은 이중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에테르체를 자아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영과 혼만을 자아라고 불렀습니다. 영적이면서 아래로 육체, 에테르체와 두드러진 관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자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은 이 영과 혼, 이 자아와 아스트랄체 안에서 하이어라키의 활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현재 인간이 자신의 육체 안에서 자연성분의 작용을 느끼고 있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육체는 양분과 호흡을 통해서 외적인 자연계의 성분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 성분은 그때까지는 바깥에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연계의 성분은 육체 안을 통과하면서 육체의 성분이 됩니다.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육체=에테르체를 나누어서 느끼고 있던 당시 사람은 천사, 대천사로부터 지고한 하이어라키 존재에 이르기까지 영적=본질적인 것이 자신의 영혼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와 아스트랄체의 성분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은 인생의 어느 순간이라도 ‘자신 안에는 신들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아는 육체, 에테르체의 성분에 의해서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위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하이어라키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체, 에테르체를 물질계에서 앞으로 나아기 위한 짐차처럼, 인생을 위한 탈것처럼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알맞은 방법으로 우리의 혼의 눈에 비치지 않는다면 인류사의 경과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길가메시와 엔키두

 

이 인류사의 경과를 다양한 예를 통해서 더듬어나갈 수 있겠지만 오늘은 바로 13년 전에도 언급했던 끈을 다시 다루어보겠습니다. 그 끈이란 길가메시서사시라고 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자료를 말합니다. 길가메시서사시의 일부 전설적인 이야기를 오늘은 영시를 통해서 직접 더듬어나가려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도시 우루크 ― 길가메시서사시는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 에 어제 말했던 정복자들 중 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제 말한 바와 같은 바로 그 혼, 그 사회성으로부터 성장한 인물로, 서사시는 이 인물을 길가메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인물은 지금 다루고 있는 제3후 아틀란티스 시대에 살았으며, 또한 그 이전 인간성의 특징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인물 안에서는 신들이 영향을 끼치는 영혼과 지구=우주의 물질적, 에테르적인 성분을 짊어진 육체=에테르체 사이의 이중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길가메시서사시의 주인공이 활동하고 있던 시대의, 특히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음 진화기를 향한 이행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행이란 바로 그 전 시대까지는 높은 영계에 존재하고 있던 자아의식이 이른바 육체적=에테르적인 곳까지 가라앉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길가메시는 자신 안에서 신들의 작용을 느낀 영혼에 대해서가 아닌 자신의 지상적=에테르적인 부분에 대해서 ‘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사람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혼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아는 자기의식적인 자아로서 영적=혼적인 곳에서 육체적=에테르적인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혼의 모습 안에는 옛 습관도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리듬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을 기억하는 옛 습관입니다. 그리고 제2강에서 말한 죽음의 힘을 알려고 하는 , 바로 그 내적인 감정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인물이 되려면 죽음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길가메시라고 하는 인물의 혼은 당시 이미 수많은 윤회전생을 거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혼은 지금 제가 말한 새로운 혼의 모습을 갖게 됨으로써 지상에서 어떤 종류의 불확실함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정복자로서의 기억과 리듬화된 기억, 이 두 가지가 지상에서 더 이상 정당하게 통용되지 않게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길가메시의 체험은 이행기의 혼 체험이었습니다.


이 인물이 예 습관으로부터 도시 우루크를 정복했을 때 이 도시에서 여러 알력이 생겼습니다. 우선 그는 이 도시에서 반기는 인물로 평가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혼자만으로는 이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운명적인 만남이 일어났습니다. 이 서사시에서 에아바니(엔키두)라고 부르는 인물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제가 《신비학개론》에서 말한 의미에서 지상의 인류를 일정기간 이끈 혹성으로부터 비교적 늦게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아틀란티스기에 혼들이 점차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떤 혼은 더 빠르게, 어떤 혼은 더 늦게. 이러한 혼들은 지구기의 매우 이른 시기에 지구에서 우주의 여러 혹성으로 떠나가 있던 혼들이었습니다.


길가메시는 비교적 빨리 지구에 돌아온 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지상에서 많은 전생을 체험했습니다. 우루크로 옮겨온 다른 한 명의 인물은 비교적 오랜 동안 혹성에 머물다 나중이 돼서 다시 지구로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13년 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연속강연에서 조금 다른 관점에서 늙은 혼과 젊은 혼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강한 우정으로 묶여 서로 도와가며 소아시아 우루크라는 도시에 견고한 사회제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제2의 인물 에아바니가 지구바깥 우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던 지식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슈투트가르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인물은 일종의 영시, 영청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인물의 오랜 정복자의 습관과 리듬화된 기억에 이 인물의 우주지혜가 융합함으로써 이 소아시아의 도시에 훌륭한 사회질서가 세워진 것입니다. 도시에는 평화가 주민들에게는 행복이 지속되었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무 일 없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도시의 생활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일종의 비의가, 여신 이슈타르의 비의가 존재했고 대단히 많은 우주의의 비밀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의미로 일종의 종합적인 비의였습니다. 즉 아시아의 다양한 비의가 이 이슈타르 비의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시대의 비밀내용을 변화하고 변용된 형태로 이 장소에서 육성하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길가메시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비의 장소에서 모순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 도시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비의를 비난함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결국에는 비의의 사제가 이 일로 비의의 신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제 고대에서 아시아는 하이어라키의 밑바닥이며, 이 밑바닥에서 사람들은 신령들과 교류하고 있었다고 말했으므로 비의의 사제가 진지하게 고차의 하이어라키 존재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들과의 교류는 특별히 비의의 강소에서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슈타르비의의 사제들은 계시를 얻기 위해 항상 기도를 올리고 있던 영적인 존재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신들로부터 이 도시에 벌이 내려졌습니다.


고차의 영적인 힘이 우루크에서 동물적인, 요상한 괴물 같은 모습을 띄고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의 몸을 병들게 하고 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길가메시의 한쪽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에아바니는 이 재난 아래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사후에도 길가메시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후 길가메시의 인생에서도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 이어졌고 에아바니는 길가메시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길가메시는 혼자가 되었지만 자기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의지의 결합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의 일은 고대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고대인의 심정은 현대인의 심정과 같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인처럼 자유를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 육화하지 않은 신령존재가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있었고, 길가메시의 경우와 같이 죽은 자가 지상의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두 의지의 결합으로부터 길가메시는 자신이 지금 어떤 역사적인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자아’가 죽을 수밖에 없는 몸(육체와 에테르체) 안까지 내려온 사실을 길가메시는 영감을 부여하는 영적존재의 작용에 의해서 알게 되었고, ‘불사’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상에서 불사의 문제에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비의의 장소였지만, 길가메시는 아직 비의에 입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비의의 전통은 태고 아틀란티스 시대라고 하는 ‘근원의 지혜’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의 ‘살아있는 인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원의 지혜의 전수자는 과거에는 영적본성인 채로 지상을 편력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본성은 아주 오래전에 지구를 떠나 달에 ‘우주거주지’를 세워놓았습니다.


오늘날의 천문학은 ‘달은 응축되고, 차가워진 물체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이해방식만을 고수하는 것은 대단히 유치한 사고방식입니다. 달은 지구 인류의 첫 번째 교사로서 지구의 인류에게 근원적인 지혜를 전해준 영적본성들의 거주인 것입니다. 이 본성들은 물질적인 우주체인 달이 지구로부터 분리되어 태양계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게 되었을 때 곧 이 달에 머물렀습니다. 실제로 달을 영시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도 과거 인류에게 근원의 지혜를 가져다 준 교사들이 이 우주거주지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의는 이 가르침의 내용이나, 인류 스스로 이 근원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근동(터키에서 이란까지)의 비의와 길가메시는 아직 연결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된 길가메시의 친구로부터 초감각적인 영향을 통해서 혼의 불사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는 내적인 충동이 길가메시 안에 강하게 생겨났습니다.


중세에는 영계를 알려고 할 때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근세에는 그 내적인 과정이 더욱 철저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시대에서는 지구가 오늘날의 지질학자가 말하는 암석덩어리가 아닌 살아있는 것이며 혼적이고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작은 벌래가 인간에 대해 알려고 피부 위를 기어 돌아다니고, 코와 이마를 통해서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시 인간은 지상을 편력하고, 여러 토지의 여러 지형을 알고, 그것을 통해서 지구를 영계로서 직관한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람들이 영적인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 이곳저곳 여행을 계속한 것은 결코 표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상을 편력하는 것은 각양각색의 지형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영적, 혼적, 몸적인 형상을 통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현대에도 사람들은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지만 인심, 풍속을 접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의 집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지역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본질적인 차이를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은 감수성이 마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을 편력하는 것으로 불사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 충동은 길가메시에게 대단히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 길가메시와 에아바니의 비의입문

 

이렇게 해서 길가메시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성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느 땅에서 오랜 비의와 만난 것입니다. 그 땅은 근대에 들어 많은 화제를 제공해준 지역인데 물론 이 지역의 상회상태는 시대와 함께 본질적으로 변화해나갔습니다. 그곳은 ‘부르겐란트(역주-오스트리아 동쪽 끝, 슬로바키아·헝가리·슬로베니아와 접해 있는 주)’로 알려진 땅입니다. 현재 이 지역은 치스라이타니아(역주-오스트리아·헝가리의 헝가리령이 아닌 부분[오스트리아령 부분]을 흔히 ‘치스레이타니아[라틴어: Cisleithania, 독일어: Cisleithanien 치스라이타니엔<라이타 강 이편’이란 뜻>’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영토 대부분이 라이타 강[독일어: Leitha, 헝가리어: Lajta 러이터 강]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에 속하는지 헝가리에 속하는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비의의 대사제는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시스트로스(우트나피시팀)로 불리고 있습니다. 길가메시는 아틀란티스비의를 올바로 이어받은 비의와 만난 것입니다. 물론 나중 시대의 이미 다른 형식의 비의였습니다.


길가메시의 인식능력은 이 비의의 장소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의에 입문하는 많은 제자들과 같은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일곱 날 일곱 밤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시련이었지만 그는 이 시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다른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를 위해서 조제된 어떤 약을 복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특정한 영적 체험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정해진 특정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진정한 체험을 얻을 수 없습니다. 길가메시는 이 시련에 합격하여 특정한 영적체험을 갖고 우주의 영적인 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이 편력을 완수하여 다시 귀국했을 때 길가메시는 실제로 고차의 영적인 통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나우강 남쪽기슭을 거쳐 다시 고향, 제2의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고향땅에 도착하기 전에 첫 번째 유혹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방금 말한 것처럼 말하자면 정통하지 않은 방법으로 후 아틀란티스기의 비의에 입문했기 때문에 고향 도시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전해 듣고 격심한 분노의 발작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난 거센 분노의 발작은 그가 얻은 깨달음을 완전히 어둡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길가메시의 특징인데 죽은 친구와 함께 영계를 영시하는 능력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영계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비의에 입문하여 직접 영계를 통찰하는 것과 죽은 자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은 다르지만 어쨌든 불사의 본질을 향한 통찰은 완전히 살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후의 생이 어떻게 경과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사후의 모든 현상은 오늘날도 당시도 다음 지상의 각성의식 가운데서 충분히 강하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길가메시와 그의 친구 에아바니, 두 사람은 서로 거의 제3 후 아틀란티스 문화기 중기 인간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의 방식에서 인간이 이중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길가메시는 자아의식이 육체=에테르체 안에 육화했다는 것을 안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인물은 지상의 인생을 불과 조금밖에 되풀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인 인식을 소유한 인물로 물질, 소재는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영적이고 소위 소재는 영적 존재의 다른 존재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인간은 현대인이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오늘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인간이 알 수 있었던 내용은 우리가 초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정신적, 문화적, 문명적인 모든 사항은 비의에서 유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비의의 장소에서 온갖 경로를 통해서 일반대중에게 전해졌습니다. 본래의 지도자는 비의의 사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방금 전 말한 혼의 모습으로 인해 그 지역의 비의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로 있었습니다. 에아바니는 비의에 사후 세계에 머무름으로써 비의와 관계했습니다. 길가메시는 후 아틀란티스의 비의에 입문했지만 그 결과는 어중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의 작용에 의해서 이 두 인물은 태고 지구기의 모든 사정을 느끼고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존재가 되었는가? 우리가 지구 진화를 어떻게 경험해나갔는가? 지구 진화를 통해서 지금과 같은 존재가 된 우리가 그 진화 과정에서 어떤 일을 해왔는가?’ 이 두 사람은 그와 같이 물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혼에게 길가메시가 알려고 했던 불사의 문제는 태고의 지구기 진화에 개한 통찰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 ‘혼의 불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지구기의 태고 진화단계에서도, 월기, 태양기에도 이미 인간 혼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혼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상의 환경과 자신과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지구에 속해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지구와의 관련을 통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시아의 비의의 장소에서 지켜지고 육성되고 있던 비밀은 우주적인 비밀이었습니다. 우주와의 관련 아래 지구 진화를 아는 일이 비의의 교의이며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 비의의 입문자는 대단히 생생하고 이념화된 방식으로 태양기, 월기, 지구기 진화를 통찰하고, 인간이 모든 우주사상과 함께 진화해온 과정을 분명히 바라보았습니다. 



◎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비의

 

이 과정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는 비의 중 하나는 훨씬 나중 시대까지 전해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비의입니다. 에페소스의 비의의 장소 중심에는 여신 아르테미스 신상이 안치되어있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상 모작 중 하나를 보면 매우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것은 여성상(像)으로 수많은 유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상을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대 사람들이 이러한 상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신상을 어떻게 체험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비의의 제자들은 충분한 준비기간을 보낸 뒤 비의 본래의 중심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중심은 아르테미스상을 말합니다. 이 중심으로 인도된 제자들은 이 신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상 앞에 선 사람은 피부에 둘러싸여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이 상이라고 의식하게 됩니다. 자신과 에페소스 여신상과의 일체화 결과 ─더 이상 주위의 돌이나 나무, 강의 흐름이나 구름에 시선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아르테미스상에 심안을 집중한 결과, 에테르계와 자신과의 관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별들의 세계와 자신이 하나임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피부 안에서 지상의 물질성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적인 본모습을 느꼈습니다. 즉 자신을 에테르적으로 느낀 것입니다.


자신이 에테르계에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됨으로써 지구기와 지구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과거 상태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지구는 앞서 말했듯이 일종의 암석 덩어리이며, 그 표면의 대부분은 물러 덮여있고, 주위는 산소, 질소 그 밖의 것들을 포함한 대기로 둘러싸여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통상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고찰하고 관찰할 때 그러한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의 지구 상태에 이르기 이전의 태고의 지구 상태는 영시하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에페소스의 제자들은 자신과 신상을 일체화시켰을 때 지구와 인류의 태곳적 상태를 영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지구의 대기가 태고 시대에는 지금과 같지 않고 극도로 정묘한 유동하는 단백질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재 지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성립했을 때에 지구를 둘러싼 끊임없이 유동하는 단백질 성분의 작용을 필요로 했으며, 이 성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백질 성분 안에는 미묘하게 구별되고, 금방이라도 결정화하려는 ‘규산’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그림 가운데 붉은 부분)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지구의 감각기관으로 기능하며 우주로부터 영시내용을 여기저기서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단백질 성분으로 된 지상의 대기에 포함된 규산 속에 현실의 영시내용이 외적으로 바뀌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영시내용은 거대한 식물상의 유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나중에 대기성분을 받아들여 식물존재가 처음에는 지구의 주변을 유동하며 나타났습니다. 훨씬 뒤에 그 식물존재는 대지에 가라앉고 현재의 식물이 되었습니다.


이 알부민(수용성단백질) 대기 안에는 규산질 성분 외에 석회질 성분도 미세한 형상으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백질의 응고작용의 영향 아래 동물이 그 석회질로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태고의 인간은 지구전체와 하나였습니다. 당시의 인간은 영시내용을 통해서 식물존재 안에서 살고 있었으며, 지금 말한 지상에 생겨난 동물 안에도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지구 전체로 퍼져 지구와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비적 사실인 그리스도교⟫에서 플라톤의 학설에 대해 인간의 이념능력과 관련해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서로 뒤섞여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슈투트가르트의 연속강연에서도 말씀드린 길가메시와 에아바니, 두 사람은 다시 태어나서 에페소스의 비의입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한 것을 혼에 깊숙이 새겨 넣었으며, 이를 통해서 두 사람은 내적으로 강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체험으로서, 그것도 무의식적인 체험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을 지금은 비의를 통해서 ‘지상의 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의 환생을 통해서 이 두 사람은 인간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영계의 깊은 연관성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깊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것이 있을 때 그 두 개가 분명히 분리되지 않고 뒤섞여있으면 양쪽 모두 모호해집니다. 분명히 구별되어있으면 양쪽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가메시와 에아바니는 이전의 되풀이해온 지상생활의 여운으로 가지고 있던 영계의 영적내용을 평가할 수 있었던 한편, 여신 아르테미스의 영향아래에 있는 에페소스 비의에 입문한 지금 사물이 지상에서, 인간의 외부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인간 이외의 것이 인체를 포함하고 있는 근원의 성분으로부터 어떻게 서서히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두 사람은 만년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살아있던 시대에 에페소스에서 풍성한 내면생활을, 우주의 비밀에 정통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 혼의 활동이 수면위로, 지면위로 넓어져 갈 뿐만 아니라 위로도 펴져나가는 것을 분명히 의식했습니다. 이집트=칼데아기에 강력한 우정으로 결합된 이 두 사람의 인격이 이어지는 헤라클레이토스 시대에 만나 함께 지내면서, 함께 에페소스 비의에 입문한 결과 그 다음 인생에서도 두 사람의 혼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로 옮겼다가 다시 지상에서 생을 받았을 때 물론 다른 방식이었지만 전생으로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인류사에 관여해온 방식이 카르마적으로 다음 인생에 영향을 끼쳐 이 두 사람은 인류의 진화를 위해 전혀 다른 인체형식을 두르고 나타났습니다.


내가 이 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인류사의 지극히 중요한 시점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점도 13년 전 슈투트가르트의 연속강의에서 언급했습니다. 그 때 말씀드린 것처럼 이 두 사람은 이집트=칼데아기에 위대한 인생을 거쳐 그 다음 인생에서 그것을 내적으로 심화시키고 혼을 강화시켰으며, 나아가 그 다음 인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대왕이 되어 지상을 살아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대왕의 이 혼의 심층에 시선을 향할 때 그리스문화 쇠퇴기에, 그리고 로마지배의 시작 시점에서 무엇이 이 두 사람의 혼을 충동하여 움직이게 했는지,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무엇이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내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휴베르니아 비의

 

어제는 각각의 인물을 예로 들어 세계사가 진화 발전하는 양상을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영학을 심화시켜나가려고 한다면 인간 안에 반영된 역사상의 사건을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주위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우주전체의 한 가지로 느끼고 있었으며, 앞으로 모든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몇 번씩 말한바와 같이 손가락은 몸으로부터 따로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몸에서 떨어져나가면 더 이상 손가락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패되어 다른 것이 되어버립니다. 손가락은 몸에 붙어있을 때 바로 손가락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지상의 인생에서도, 사후 인생에서도 전우주와 결합되어있을 때 비로소 인간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인식은 옛날에도 존재했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단지 현재만이 구름에 가려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유를 완전히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투명한 우주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먼 과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우주에 함께 속해 있다는 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길가메시와 에아바니라는 두 사람을 들어, 동일한 두 인물이 칼데아=이집트기에 당시에 알맞은 방식으로 지상에서 생활하였고, 다음에 에페소스 비의에 의해서 삶의 방식을 심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어제는 나아가서 이 두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대왕으로 환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다시 태어난 시대의 지구는 어떠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을까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두 사람의 혼이 세 번에 걸친 지상 생활을 통해서 지구환경으로부터 무엇을 수용했는지 더욱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과 같이 길가메시는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 서쪽의 후 아틀란티스 비의에 입문했습니다. ‘후대의 비의의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 이 시대의 비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 아틀란티스 비의의 여운을 오랫동안 이어온 비의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비의로서 우선 최근 여기서(도르나흐)말씀드린 휴베르니아 비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 중 몇 가지를 여기서 다시 한 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아일랜드 비의인 휴베르니아 비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존재했으며, 그리스도교 성립 당시에도 아직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틀란티스 주민의 오랜 지혜의 가르침이 가장 충실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후 아틀란티스기에 아일랜드의 비의에 입문한 사람은 대체 어떤 체험을 가졌을까요? 이 비의를 전수받아야할 사람에게는 엄격한 준비를 요구했습니다. 본래 고대에서 비의에 대한 준비는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그 기간에 혼의 모습을, 인간으로서의 태도를 내적으로 개조해야만 했습니다. 휴베르니아 비의의 경우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 감각세계의 모든 대상이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내적으로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할 때의 모든 방해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기본적으로 감각세계의 환경은 모두가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각은 환각을 발생시키고 진리는 이 환각의 배후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실한 존재는 감각적인 지각에 의해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의 인지학 연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그러한 것이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감각세계의 환각적인 성격은 결코 현대인의 마음을 진동시키기 못합니다. 당시 휴베르니아 비의입문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진정으로 마음을 진동시키는 내적인 비극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환영이며, 마야이다 라고 이론화시켜 말할 경우 우리는 매우 안이한 태도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휴베르니아 제자의 준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까지 나아갑니다. ─‘환영을 꿰뚫고 진정한 현실존재에 이를 가능성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제자들의 준비는 우선 절망에 빠지고, 혼은 내적으로 환영 속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단계까지 진행합니다. 제자들은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세상의 환영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력하고 압도적이기 때문에 완영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준비기간 동안의 생활 중에서 ‘그러므로 이 환영 속에서 계속 머물러야한다.’라고 하는 마음을 되풀이해서 체험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확고하게 설 수 있는 지면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영위에 굳건히 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고대 비의에서 이루어지는 준비의 엄격함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은 내적인 발전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 앞에서면(내적인 발전을 촉진하는 것 앞에 서면) 그곳에서 뒷걸음질 칩니다.


존재와 그 환영성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탐구에 대해서도 사정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어둡고 압도적인 감정이 진리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고 인식의 빛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오류와 허위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때가 옵니다. 그 때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존재와 진리에 절망하지 않으면 비의입문의 때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의 목표와 정반대를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이 목표를 향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실제로 오류와 환영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존재와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모를 것입니다. 휴베르니아의 제자들은 진리와 존재를 정말로 깊이 평가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할 단계의 정반대를 졸업한 제자는 다음에 성역으로 인도되고 매우 암시적인 인상을 부여하는 두 개의 상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휴베르니아 비의에서 그 때 실제로 일루어진 일을 이미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 중 하나는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안쪽은 공동(空洞)이었습니다. 이 상은 바깥쪽만 만들어져있었으며 겉면은 탄력이 있어서 어디를 눌러도 움푹 들어가는데 손을 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상 전체는 주로 머리부분이 잘 만들어져 있고 그 앞에 서면 머리에서 작용하는 힘이 다른 거대한 몸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내부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눌러봄으로써 내부를 눈치 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눌러 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머리 이외의 부분은 머리의 힘이 미치고 있으며 이 상은 머리가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물론 현대인 중 누군가가 현대의 산문적인 마음으로 이 상 앞에 선다면 단지 그것을 추상적으로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은 온몸과 마음으로 환영의 힘, 오류의 무서움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이 거대한 상의 암시적인 힘을 체험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상은 남성상이었습니다. 이것과 나란히 서있는 다른 상은 여성상이었습니다. 이 상의 내부는 공동이 아니었습니다. 소재에 탄력성은 없었지만 가소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상의 표면을 누르면─또다시 누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모양이 허물어지고 거기에 구멍이 생겼습니다.


제자는 한쪽 상은 탄력성으로 인해 모양이 곧 원래대로 돌아오고 다른 한쪽 상은 압력을 가하면 금방 모양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제가 곧 말할 몇 가지 과정을 거쳐 이 방을 떠납니다. 그리고 탄력이 없는 여성상에 가해진 손상을 모두 복구한 다음 다시 이 방으로 인도됩니다. 상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상태가 된 다음 다시 그곳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극히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준비를 통해서 제자는 여성상 앞에서 자신의 모든 영, 혼, 몸으로 혹독한 추위의 땅에 서있는 것 같은, 하나의 내적인 체험을 가졌습니다. 이 내적 체험은 이미 그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바로 지금 상 그 자체의 암시적인 힘에 의해서 완벽하게 체험된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내적으로 경직화되고 얼음과 같이 얼어버렸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결과 혼이 겨울 대지의 이미지로 채워지고 겨울의 본질을 영시하게 됩니다.


남성상 앞에 섰을 때는 이와 같았습니다. 제자는 마치 일생 동안 생명력이 자신의 피 안으로 흘러들어와 그 피가 모든 작용력을 발휘해서 피부를 압박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한쪽 상 앞에서는 얼어붙은 해골이 된듯했지만 다른 한쪽 상 앞에서는 자신의 내적인 모든 생명이 뜨거움에 녹아 자신이 팽팽하게 긴장된 피부 안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부의 표면을 눌렀을 때의 체험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통찰을 갖게 했습니다. ─‘만약 우주에서 특히 태양만이 너에게 영작용을 끼쳤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너는 지금 느끼고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적인 태양의 작용을, 그 각각의 경우를, 그리고 인간과 태양과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그 때 태양의 상의 암시적인 작용 아래에만 서있다고 생각했다하더라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다른 방향으로부터 다른 여러 작용이 이 태양의 작용을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그와 같이 해서 우주와의 관계를 심화시켜나갑니다. 달의 상의 암시적인 작용을 느꼈을 때에는 내적으로 겨울 풍경 속에서 얼어붙는 듯한 추위를 체험했지만 태양의 상 앞에서는 자연스레 여름 풍경을 체험했습니다. 그 때 사람은 다음과 같은 작용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느꼈습니다.


여러분 현재 우리들은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쑥갓 꽃은 노랗고 장미는 빨갛고 하늘은 파랗다고 말하듯이 우주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은 거의 마음을 흔들지 못합니다. 가장 가까운 생활환경에 대해서만 확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주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더욱 집중하는 태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감각기관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태양 상의 암시적인 힘을 통해서 혈액순환 전체에 집중시킵니다. 자신 안의 이 암시적인 작용을 체험함으로써 스스로를 태양존재로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상의 암시적인 힘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달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서 태양과 달이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하는가를 자신의 내적체험으로부터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이 자신의 눈의 체험에 따라서 붉은 장미가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귀의 체험에 따라서 cis라는 소리가 어떻게 울리는지를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비의의 제자들은 후 아틀란티스 시대에서도 인간이 우주 안에 엮어져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직접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것은 하나의 소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상은 실로 장대한 방식으로 서기 초 수세기까지 휴베르니아 비의의 장소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우주체험의 스케치였습니다. 이 우주체험은 사람들을 태양체험, 달체험으로 인도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 에페소스 비의

 

에페소스 비의의 경우 ⟪요한복음서⟫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신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말씀은 신이었다.’를 매우 집중적인 방식으로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수행자는 유명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여신상’ 앞에 서서, 생명으로 가득 넘쳐흐르는 이 조상과 자신을 일체화시킴으로써 우주에테르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 내적인 체험과 함께 지상생활을 초월하여 우주에테르에 입문하는 것입니다. 그때 수행자 먼저 배우는 것은 인간의 말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인간의 로고스, 즉 인간의 모상을 앎으로써 우주로고스가 전우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수행자는 특히 인간이 말함으로써 날숨에 말을 각인할 때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체험하도록 요구를 받습니다. 말한다고 하는 내적인 행위를 통해서 ‘바람’ 안에서 생명이 활동하는 것을 체험하는데 ‘바람’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두 가지 다른 경험을 발생시킵니다.



말을 함으로써 말의 형태가 날숨에 각인됩니다. 날숨이 말의 형태를 띠면서 흉부로부터 밖으로 흘러나갈 때 아래쪽 전신에 흐르는 ‘물’ 원소 안에 율동적인 파도가 밀려옵니다. 사람이 말할 때 후두부의 발성기관 부근에서 바람의 리듬이 생성되는데, 그것과 나란히 말하면서 신체내부에서 체액이 파도를 치며 흐릅니다. 언어기관의 아래쪽에 있는 체액이 발성하는 말과 조응하여 진동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가 항상 감정을 동반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체의 액체부분이 함께 진동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말이 중립적인 상태에서 밖으로 나온 것뿐이라면 우리는 소리를 낸 말에서 공감, 반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할 때에는 열 또는 ‘불’(빨강=rot)이 위쪽 머리 부분으로 향합니다. 날숨에 각인된 말이 열의 파도를 동반하여 위쪽으로 흘러 사고내용과 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을 내뱉으면 바람이 불, 물(또는 체액)과 결합합니다.


인간의 언어활동에 대한 모든 체험을 나타내고 있는 이 경험이 에페소스 비의입문체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다음 수행자는 인간의 이 언어활동이 다름 아닌 의인화된 우주체험이라는 것을, 과거에는 지구 그 자체가 ‘바람’뿐만 아니라 유동하는 단백질 상태의 ‘물’(파랑=blau) 안에서 언어활동과 같은 파상(波狀)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작은 규모로 인간이 말할 때 ‘바람’이 날숨이 되어 생겨나는 것처럼 과거에는 유동상의 단백질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우 위쪽에서 ‘바람’이 ‘불’로 변하듯이 지구에서는 주위가 일종의 ‘바람이 되고 아래쪽에서 일종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 인체 안의 ‘물’에 의해서 감정이 생기고 지구에서는 대지의 형성. 대지의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위쪽에서는 ‘바람’ 안에 우주사고의 활동이 일어나 대지에 영향을 끼치고 대지를 형성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언어는 대우주적인 형성력의 소우주적인 여운입니다. 에페소스 비의는 압도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수행자에게 체험시켰습니다. 수행자는 음성을 낼 때 우주로고스의 활동을 언어의 체험으로 느꼈습니다. 과거 우주로고스는 유동상의 ‘원소’(물)를 움직여서 위쪽으로는 창조하는 우주 사고에 영향을 끼치고, 아래쪽으로는 생성되고 있는 대지의 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네 안에 인간 로고스가 있다. 그리고 인간 로고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구기를 살아가는) 네 안으로부터 작용하여 나간다. 그리고 인간인 너는 바로 인간 로고스다.’ ─ 이렇게 말하는 수행자는 우주로고스 안에  살려고 했습니다. 우리 지상의 인간은 로고스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아래로 흐르는 ‘물’에 의해서 인체를 갖고 위쪽으로 흐르는 ‘불’에 의해서 사고내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네 안의 가장 인간적인 것이 소우주의 로고스이듯이 과거 처음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리고 로고스는 신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로고스는 신이었다.’ ─ 에페소스에서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근본적으로 받아들였고 이해했습니다.


길가메시라고 하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비의의 영향권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고대의 모든 문명, 문화는 본래 비의의 현시였습니다. 길가메시는 고향 우루크에 있었을 때 우루크의 비의에 입문하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우주와 연결된 문명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쪽 여행에서는 휴베르니아 비의와 직접 만나지 못하고 직접적인 비의를 체험하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휴베르니아 비의의 땅에서 육성된 문화를 알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현재의 브르겐란트 지방에 이 비의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문화가 길가메시의 혼 안에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의 충동이 그의 사후 영계에서 더욱 육성되어 다음 지상생활에 즈음하여 에페소스 비의 안에서 혼을 심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두 인물이 이렇게 해서 혼을 진화시켰을 때 일반적인 문명으로부터 이 두 인물의 혼에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이래 우주의 미적 표현이 현실의 힘이 되어 밀려왔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도 살아있던 에페소스에서는 과거 인류가 신령과 직접 만났을 때의 현실을 기원전 6세기, 5세기까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시아 또는 천계의 최하층이었던 시대에는 신령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자연령이나 그 위의 천사, 대천사, 나아가서는 그 위의 형태령과 그 밖의 다른 존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과거 현실이었던 것이 영웅전설이 되어 체험되고 있었고, 또한 근원적인 현실이 아이스큐로스의 비극 중에서 생명을 부여받고 있었으며, 에페소스에서는 여전히 비의의 심연에 침잠하고 있어서 인간과 신령계의 직접적인 연결에 대한 체험을 아직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문화의 본질은 그리스인이 과거 우주와의 직접적인 연결을 인간에게 친근한 신화 안에, 그리고 미와 예술 안에 침잠시켜 가상으로, 미적인 가상으로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 알렉산드로스의 노래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리스문명이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페르시아전쟁에서 보는 것처럼 옛 아시아로부터 오는 영향을 보기 좋게 물리쳤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그 즈음부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과거 신령이 지상에 존재했고 인간의 영과 혼과 몸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을 여운으로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이 몰락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불편한 세계에 살고 있었고 그 세계를 비관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모트라케(역주-에게해 북동부에 있는 그리스령 섬) 비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혼은 사모트라케 비의의 카베이로스신들(역주-헤파이스토스와 프로테우스의 딸 카비로(카베이로)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제우스와 칼리오페의 자식들이라고도 한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기에 걸쳐 이 두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13, 14세기에 이를 때까지 적어도 아시아지역에서는 온갖 신분의 사람들에게서 명확한 영적인 직관이 아직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사제가 지은 ⟪알렉산드로스의 노래⟫라고 하는 시문은 매우 중요한 중세후기의 문헌입니다. 오늘날 역사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왜곡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에 비하면 사제 란플레히트 12세기경에 쓴 ⟪알렉산드로스의 노래⟫는 알렌사드로스대왕에 의해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고대인에 정통한 위대한 견해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음 표현내용을 마음속에 느껴보도록 노력해보십시오. 성직자 란플레히트의 ⟪알렉산드로스의 노래⟫ 안에는 훌륭한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 매년 봄이 오면 사람들은 꽃이 핀 숲 근처로 갑니다. 그곳에는 햇빛이 숲의 나무 그늘을 숲 가장자리에 피어있는 풀꽃에 드리워져있습니다. 그러면 숲속의 나무 그림자 가운데 봄의 풀꽃으로부터 꽃의 정령들이 아이들 모습으로 나타나 왈츠를 추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성직자 란플레히트의 이 기술 가운데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아직 가능했던 고대인의 경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거기에 풀꽃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숲이 되는 등 산문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숲 가까이 다가가면 햇빛이 숲 저편에서 그림자를 던지고, 그 숲의 나무그림자 사이에서 꽃의 정령들의 세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정령들은 사람들이 숲 속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숲속에서는 다른 사대령들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란플레히트가 특히 정성들여 그리고자 했던 것은 들꽃의 정령들이 추는 원무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쓰려고 했을 때 사대령이 활동하는 원소계와 결합한 대자연에 대한 묘사를 거기에 덧붙였습니다. 왜냐하면 란플레히트의 생각으로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원정이나 대왕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말하려면 지상세계를 산문적으로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사대령의 영역도 언급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서는─물론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다음과 같은 기술밖에 하지 못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야만인을 문명인과 하나로 결합하여, 문명화된 그리스인인 헬라스인, 마케도인아니과 야만인으로 구성된 하나의 평균적인 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은 현대인에게는 올바르지만 진정한 현실에게 있어서는 어린애 속임수입니다. 중세의 성직자 란플레히트는 이 아시아 원정에서 전혀 다른 목적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압도적인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연의 물질영역 안에서 자연의 영적인 작용이 나타나 있다는 것, 란플레히트는 이점을 역사기술의 도입부처럼 그리고 잇습니다. 그러면 성직자 란플레히트의 ⟪알렉산드로스의 노래⟫가 말하는 아시아원정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알렉산드로스는 낙원의 문 앞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적인 표현으로 치환되어있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과 같이 그것은 진실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정복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야만인과 그리스인의 혼합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로 고차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으며 영적인 사명을 따른 행위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시대로부터 15세기가 경과한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심오한 귀의의 마음으로 그린 성직자 란플레히트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낙원의 문 앞까지 왔지만 낙원 그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직자 란플레히트가 말하기를 정말로 겸허한 자만이 낙원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아직 진정한 겸허함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겸허함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처음으로 인류에게 전해졌습니다. 어찌됐든 좁은 마음이 아닌 넓은 마음으로 이러한 기술을 읽으면 그리스도교의 성직자인 란플레히트가 알렉산드로스 원정의 비극적인 측면을 어떻게 느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노래⟫의 이 기술을 소개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싶었던 것은 인류역사상 서양이 동양과 결합했던 때의 전후관계를 말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을 이 전원시풍의 시문으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시문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감정은 중세의 비교적 후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감정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알렉산드로스의 노래⟫가 써질 정도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정말로 위대하고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저 두 혼의 활동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 세계사적인 비극

 

마케도니아 역사에서 이 시점은 한편으로는 아득히 먼 과거로 통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로 통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의식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에게서 일어난 모든 일 위에 세계사적인 비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사적인 비극은 외적인 측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은 특별한 세계사의 운명에 의해 극히 적은 부분만 유럽으로 전해졌고, 극히 적은 부분만 교회에 의해서 육성되어 왔습니다. 본질적으로 단지 논리학적인 저술이나 논리학의 옷을 걸친 저술만 전해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논문으로서 남겨진 일부 저술에 침잠하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우주와 인간의 관련성을 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예 하나만을 들어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땅, 물, 불, 바람의 원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한 에테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땠을까요? 그는 지구에 대해서 말할 때 땅과 물, 바람을 포함한 전체에 불이 관통하고, 불로 덮여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와 같은 지구가 달까지 이르고 있으며, 한편으로 우주로부터는 별에서 달에 이르기까지, 즉 더 이상 지구의 영역이 아닌 아득한 우주저편에서 달에 이르기까지, 황도12궁으로부터, 별들로부터 공간적=우주적으로 제5원소인 에테르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에테르는 아득한 저편에서 달까지 이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번역]

우리는 오늘날 흙상태의 엘리멘트(원소), 물상태의 엘리멘트, 공기상의 엘리멘트, 불상태, 혹은 열엘리멘트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것, 에테르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아리스토테레스는 어떻게 기술했을까요? 그는 지구를 기술합니다. “고체상 지구(그림참조, 밝은 색의 핵), 액체상 지구, 물(밝은 빨강), 공기(파랑), 전체는 불이 관통하고 불이 둘러싸고 있다.(짙은 빨강)”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지구는 달까지 닿아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로부터, 별에서부터 달까지 ─ 즉 더 이상 지상영역 안이 아닌 달까지, 여기까지인데 ─ 황도대에서, 별들에서 공간적=시간적 에테르(바깥쪽 밝은색)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에테르는 달까지 하강합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한 학자들이 쓴 문헌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제자인 알렉산드로스에게 뒤풀이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의 열 작용권에서 작용하는 에테르, 즉 빛에테르, 화학에테르, 생명에테르는 과거 지구와 결합되어있었다. 모든 에테르가 지구까지 닿아있었다. 하지만 태고시대에 달이 뒤로 물러섰을 때 에테르가 지구로부터 떠났다. 그리고 외적인 공간이라고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속하는 지상은 에테르가 관통하고 있지 않다. 단지 봄이 되면 달의 사대령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식물, 동물, 인간들을 위해서 에테르를 달의 영역에서 이 존재들 속으로 가져다 넣는다. 그때의 달은 형성자로서 작용하고 있다.”


지난번 말한 것과 같이 휴베르니아 성역에서 여성상과 대면한 사람은 에테르가 본래 지구에 속해있지 않고 매년 사대령들이 생명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에테르를 지상에 보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인간과 우주 사이의 깊은 관련성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역주-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웠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설한 리케이온학원의 후계자가 되었다. 식물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이것을 논한 그의 저작들을 서방으로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저작들 중 몇 개는 동방으로만 전해졌고 동방의 우주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 저작들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유대인, 아랍인의 손으로 서유럽으로 전해졌고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휴베르니아 비의에서 출발하는 사상들과 만나게 됩니다.



◎ 방위와 에테르의 작용

 

하지만 지금 말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준 가르침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전적으로 내적인 체험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여기에 기록한 것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외적인 세계에는 땅과 물과 바람(공기)과 불의 원소가 살아 활동하고 있고 인간 안에도 그것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점에서 하나의 진정한 소우주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우고 내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인간의 뼈에는 땅의 요소가 살아있었고, 피와 그 밖의 체액에는 생명의 물이 있었으며, 호흡과 말 안에 바람의 원소가 활동하고 있었고, 사고 속에 불의 원소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대원소를 자신 안에서 생생하게 느꼈을 때─알렉산드로스도 그것을 깊이 체득했는데─ 사람은 자신과 지구 사이의 깊은 친화성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여행을 떠나도 자신을 향해 영향을 끼치는 에테르의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감각이 지각하는 것만을 주위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대원소가 자신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자기 안에서 작용하는 지상의 성분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 동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너는 더욱더 건조하게 만드는 원소 속으로, 건조한 토지를 향해 들어갈 것이라고.

아시아를 향해 가면 정말로 말라버린다고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더욱 섬세한 작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와 같은 섬세한 작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라서 느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있었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어느 정도의 습기가 살아 있지만 동방을 향해 가면 이 습기가 감소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정 도중에 이와 같은 식으로 지상의 에테르적인 상황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몸을 손으로 어루만져보면 코와 눈과 입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로 건조한 지방으로 갈 때의 체험과 반대로 서쪽의 습한 지방으로 갈 때의 체험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우리는 둔감해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지금도 북으로 향하면 냉기을 남으로 향하면 온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서로 향할 때 냉기와 습기의 결합을 느끼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길가메시가 서쪽을 여행했을 때 무엇을 체험했는지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제자는 북서의 습기와 냉기의 중간지대에서 물을 체험한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인물이 북서를 향해서 진군한다고 말하지 않고 물의 원소가 지배하는 곳으로 향해 진군한다고 말한 것은 착상이 아니라 진실한 체험에 뿌리를 둔 말입니다.



습기와 온기의 중간지대에는 바람의 원소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지의 비의’에서는 그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고대 사모트라케 비의에서도 똑같이 가르치고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직접 제자에게 그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냉기와 건조한 기운의 중간지대에는, 즉 마케도니아에서 볼 때 시베리아 방향에서는 땅 그 자체, 지상적인 것, 고체요소가 지배하는 영역을 체험했습니다. 온기와 건조한 기운의 중간지대, 즉 인도 방향에서는 불의 원소가 지배하는 영역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북서를 가리키고 이 방향에는 물의 영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남서를 가리키고 여기서부터 바람의 영들을 느낀다고 말하고, 또한 북동을 가리키고 땅의 영들이 떠다니는 것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냉기와 습기의 원소에서 불 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한다, 인도로 진군해야만 한다.”라고 말렉산드로스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분명 이 말투 속에서 자연과 도덕의 깊은 연관성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도, 도덕과도 연결된 이 말투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세계사 진화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서 함께 이야기된 내용 중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당시는 아직 내밀한 (수업)시간에 과거 시대의 위대한 비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인류는 논리적, 추상적인 내용, 범주론 등을 배우려고 다른 것들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로인해 여기서 인류의 세계사적인 진화에서 거대한 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리엔트와의 관련에 있어서 유럽문명의 행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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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십자의 비교


제1강 장미십자의 비교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3일

GA109

  

이번 연속강의에서 내 사명은 여러분에게 이른바 장미십자의 방법에 기초한 신지학적 세계관에 대한 영상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장미십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장미십자의 방법」이란 표현은 신지학이 13,14세기 이후 유럽 오컬트학파에서 항상 이용되어 온 방법, 즉 장미십자의 수행이라고 불리던 방법을 나타낸다는 의미로밖에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지학은 세상 마음속에 인간지식에 대한 원천을 형성하기 위해 고대 인류에게 주어진 진리라고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 지식을 지키려는 은밀함 또한 커집니다. 왜 그렇게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연속강연을 기회로 우주적 지혜가 어떻게 오컬트학파와 그 중심에 전해졌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되돌아갈 예정입니다. 그 오컬트학파에서 배우는 각각의 사람은 단순히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투시력을 육성하여 고차세계를 통찰하기까지 자신의 영혼을 변용시키는 수행을 받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개의 사람은 그로부터 사자(使者)로써 보내져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진보라고하는 것은 더욱 더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판단과 지성을 통하여 이 지혜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비밀로 유지되던 것이 차츰 공개되어 알려져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외적인 상황의 결과 19세기 동안 실로 대단히 많은 양의 오컬트지식이 인간성의 진보와 복지를 위해 공개의 길을 걷을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19세기 이 지식의 수호자들은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과거 종교나 그 밖에 다른 수단으로 인류에게 행해진 영적 가르침의 교신(交信)은 영원한 진리에 관한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하지만 지금 인류의 요구는 변했다.’ 그렇게 이러한 태곳적 지혜의 수호자들은 미래에는 오래된 영적 진리의 교신형식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정신을 가진 인간의 수가 증가하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지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교신수단은 현대의 인간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관찰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밀지식의 수호자들은 장래에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음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만, 어떤 시점에 처음 이르러서야 실제로 이 지혜가 인간성에 유입되기 위해 준비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지배적인 인간성으로도 이 비밀이 파악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점은 13,14세기에 실현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이 준비의 출발점을 깨닫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최초의 장미십자회 사람들은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츠(Christian Rosenkreutz)로 알려진 중요한 개아(個我)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이츠는 가장 확신에 찬 명석함으로 다음 같이 말했습니다. 「비밀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초감각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혜의 보고(寶庫)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고수한다면, 과거에 행했던 일, 즉 우리 학파에서 훈련받은 영혼들이 태초의 지혜에 관한 비밀을 배우고 식별하게 되었을 때 다른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는 일이 미래에도 요구될 것이다.」

 

태초의 지혜를 전파하는 옛 방법은 계속 이어져야 했지만, 또 다른 일도 준비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앙 로젠그로이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태초의 지혜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형태로 그들에게 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권위를 높이 신뢰하고 인지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빠르게 인류로부터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판단력이 증가할수록 가르지는 자에 대한 신뢰도 얕아질 것이다. 믿음과 신뢰는 과거 전달수단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성이 있습니다.「자신에게 전수된 지식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 세계를 관찰하는데 이용하는 논리적 지성을 그들에게 전해진 것에 응용하고 싶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지성에 더해 정신세계의 탐사에는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인정하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이 지성을 사용하여 사물을 조사해보고 싶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시대 시작에 태초의 지혜가 새로운 형식을 몸에 걸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장미십자회의 사명은 근대정신과 근대영혼이 수용 가능하도록 새로운 형식으로 태초의 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장미십자의 방법에 따라 보여주는 신지학은 무엇일까요? 신지학 그 자체는 언제어디에 있던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장미십자의 신지학자는 19,20세기의 신지학자입니다. 걸치고 있는 형식에 따라 그 지혜는 인간이 이해를 바라고 또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에 잘 부합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고유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인간성 진화의 여정은 인간이 외적 물질적 실재에 점점 더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고대를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문화를 생각해 보신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소박한 방법과 힘을 이용하여 일하고 건축물을 만들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물질적 안녕을 위해 수많은 교묘한 발명을 탄생시킨 현대생활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두려울 정도의 정신적 힘과 심리적 활동이 매일 물질적 요구를 위해 소비되고 있는지를... 물론 이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세계의 특수한 사명은 외적 문화를 형성하고 외적 자연을 제어하여 물질영역이 진정한 인간정신의 통제 하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는 오컬트학파에 의해 보호되어온 지혜를 흡수할 수 있지만 고대의 경향과는 다른 수단이 필요합니다.

 

한편 칼데아인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정신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현재 우리의 지식과 비교해본다면, 칼데아인이 우리들보다 훨씬 하늘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들이나 외적 과학이 기록한 것들을 보며 감탄하지만 이것도 고대 갈데아인의 지혜와 비교하면 모두 어린애장난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의 연구자들에게 화성은 그 행로나 운동이 계산 가능한 객관적 천체입니다. 하지만 칼데아인은 거기에 더해서 어떤 힘들과 실체가 화성과 관계가 있는지, 어떤 신성한 의지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지, 이러한 힘들과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힘들이 사용하는 신비와 그 지배를 칼데아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연구자들은 이 고대 칼데아문화의 내적인 특징 앞에서 무력하다고 밖에 말 수 없습니다. 현대인은 자유로이 연구를 위한 외적수단을 이용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내적수단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지학자와 장미십자회는 당시 고대문화의 영성에 입문하는 정신적 비교(秘敎)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혜를 새겨 넣은 원기둥 모양의 흙인장을 발굴한 위대한 권위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들은 전기기구 앞에 서있는 3살짜리 아이처럼 그 사물 앞에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고대유적으로부터 발굴한 유물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릅니다. 당시 영적 지식의 흐름은 그만큼 깊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외적 기기와 지성을 이용하여 최근 수세기 동안 행해진 위대한 진보의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감탄해마지않는 창조물, 이것은 현대과학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는 영성의 이해를 위해 또 다른 종류의 사고와 지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진보의 정도에 대해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붓다 중 어느 쪽이 위대한가하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앗시리아의 지혜가 뛰어난지 현대의 지혜가 뛰어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유물주의적 정신으로 물들은 세계에 살고 있고, 인간이 품고 있는 정신적 지식에 대한 동경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적지식의 유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장미십자의 지혜는 바로 현대인에게 적합한 형식으로 이 지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허황되게 생각되실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대로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곧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 장미십자의 지혜만큼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위대한 개아, 크리스티앙 로젠크로이츠는 합리적 사고에 의한 이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예견하고 당시 이미 모든 영적 지식을 현대가 요구하는 형식으로 퍼뜨릴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미십자회는 그 이전의 어떤 유사한 운동보다도 훨씬 어려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왜냐하면 13,14세기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유물주의가 착실히 다가오는 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증기기관, 전보와 같은 모든 현대의 위대한 업적은 인간을 물질계에 단단히 붙들어 매이게 만들었습니다. 장미십자회 회원들은 사람들의 사고가 수학적 원리에 따르게 될 시대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완전히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로는 장미십자주의의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장미십자주의를 육성한 사람은 어떠한 문헌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미십자회 회원을 육성한 가장 심오한 여러 영적진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심하게 오해받은 결과 영적현상은 연금술사의 지하실에서 레토로트 등의 도움을 빌려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암시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연금술 개념이 오늘날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미십자주의의 유물주의적 희화(戱畵)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장미십자회의 사명은 바로 자신들의 지혜를 서서히 쏟아 부을 수 있는 과학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신지학을 설명할 때 그것이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용어법(역주: 장미십자의 신지학)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수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존재 구석구석까지 현대세계와 현대문화에 잠겨있는 개인일 것입니다. 이루어야할 현대의 사명에 주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대생활과 그 표현형태를 엄숙히 받아들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시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한 이 시대에 영적 영향력을 미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사명이요 이념일 것입니다.

 

이번 강의 기간 중 여러분은 신지학이 예를 들면 의학 분야에서 얼마나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 알게 된 기회였을 것입니다. 의학이 유물주의의 길을 내달렸다고 합시다. 그리고 40년 후를 내다본다면 여러분은 의학치료법의 야만성과 의학이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 이용하는 여러 혹독한(죽을 정도의) 형태들에 기절할 것입니다. 오늘날 의학은 어떤 식으로 그 치료법의 효과를 검사하고 있을까요? 병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소재를 사용해서입니다. 즉 외적 관찰을 통해서 그 효과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지혜는 본질 그 자체를 통해서 영성의 내적 관련에 참여하고 물질계의 무엇이 영성의 무엇에 해당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전의학(全醫學)의 창조가 장미십자주의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존재상황의 복잡성을 고대 칼데아의 상황과 비교해 보시기바랍니다. 동경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수표를 뉴욕에서 발행하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지적 에너지와 얼마나 복잡한 공동작업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구전체에 퍼져있는 물질문화를 가진 시대는 과거 시대와 다른 영적 활동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현대의 사고는 인간이 이정도로 깊이 관련 되어버린 외적 상황과 사명이 불확실한 상태를 제대로 처리할 수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이윽고 사고자체도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만 이윽고 사고는 복잡한 삶의 상황에 뛰어들어 그것을 변용시키기에 충분한 유연성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왜 신지학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요? 실천적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지학적 사상은 사고를 유연하게하고 부드럽게 하여 아득히 먼 저편의 상황을 미리 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장미십자주의는 온갖 생활영역에 결실을 가져다 주어야합니다. 신지학의 실천적 결과를 실현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제 에세이 「인지학의 빛으로 본 어린이 교육」을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이 없다면 여러분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장미십자의 신지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합니다. 이 요소를 과거형태의 신지학으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 오컬티즘의 역할은 사람들의 영적 동경(갈망)을 만족시키고 영성이 사람들의 일상 활동 속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장미십자의 신지학은 사교모임이나 은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간문화 전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언제나 반드시 하나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살아가고 진화하여 점점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듯이 인류전체도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에게 계시(啓示)되는 지혜의 형태는 인간의 진화과정에 조화롭게 변화되어야합니다. 위대한 인간성의 교사들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혼으로써 모여 있는 우리도 과거 시대에 육화하고 진화하며 온갖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성취로부터 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로마, 이집트-칼데아, 그리고 그 이전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신비스런 스핑크스에 둘러싸인 이집트시대에 육화한 영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모든 건축물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얼마나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지구가 계시할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지구는 끊임없이 진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영혼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쌓아갈 것입니다.

 

영혼이 지상에 육화하는 것은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몸에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처음 육화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구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또한 마지막 육화에 도달했을 때도 변해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배워야할 것이 있을 때만 이 지상으로 돌아오며 그럴 필요가 있을 때까지는 돌아오지 안 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육화와 육화 사이의 기간이 깁니다. 지형만 해도 현재의 북유럽이 그리스도가 있던 시대의 북유럽과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구 전체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만 진화란 실은 새로운 것을 힘써서 완성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 뒤에 현현하는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도 진화합니다. 인간은 지금 도달한 단계보다 고차의 진화단계에 있는 존재를 향한 길을 찾아야합니다. 분명히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고차존재들과 관계를 갖게 되겠지만 이러한 존재들도 진화의 법칙을 따르고 있고 수  천년 전 우리의 영혼이 지금과 달랐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현재 스스로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들도 과거에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영성의 보고(寶庫)와 함께 갖가지 고차 세계의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 우리 세계에 내려선 한명의 고차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이야말로 완전히 배워야할 신성한 예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조차 그 예술에 숙달해야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1만 년 전에 살던 사람들과 다른 말하는 방법을 가져야합니다. 고차존재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경험합니다. 이 강의 중에 다마스쿠스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은 그들이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영시력을 가진 사람은 외적 환경을 볼뿐만 아니라 지구의 영적 오오라에 속하는 모든 것을 봅니다. 인간이 오오라에 둘러싸인 것처럼 천체도 오오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영능력자는 최종적으로 천제의 오오라를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 영능력자가 본 지구의 오오라와 수천 년 전에 보였을 오오라는 전혀 다르며 오늘날 영능력을 육성한 사람이 보게 될 것과도 또 다를 것입니다. 외적 자연의 모습이 변해가듯이 영능력자가 입문하는 영계의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언급할 사건에 대해 지금 미리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불타는 초목과 시나이산의 고지에 대해서입니다. 당시 모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의 영시력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물질적 현상에서 초감각적 실재를 지각한 것입니다. 영시력이 없는 개아라면 단지 자연현상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불타는 초목 속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 4:14)」라고 스스로를 고지한 존재를 보았습니다. 모세는 이 존재가 틀림없이 그곳에 있으며 불은 단순히 외적인 불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잉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스스로 이름을 고지한 존재, 인간성의 새로운 진화 전체에 밀접히 관여하고 있는 존재가 스스로를 모세에게 고지한 것입니다. 모든 모세의 제자에게 알려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비의학교에서 그들은 시나이산에서 스스로를 계시한 존재가 언젠가 지상에 내려와 한 인간의 몸으로 3년간 설교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서 배운 것입니다. 이 사실은 비의입문자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되는 사울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존재는 틀림없이 존재하고 언젠가 지구를 찾아 올 것이다. 하지만 불타는 초목 속에서 여호와로 스스로를 계시했던 존재가 십자가에서 굴욕적인 죽음을 맞이하라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게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마스커스의 사건입니다. 영시를 할 수 있게 되어 지구의 오오라를 보게 된 순간, 그 오오라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 순간,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존재로써 스스로를 계시한 순간, 그 순간에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시는 이전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2천년 전 그 이전에는 지구의 오오라 속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태양 속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짜라투스투라는 태양을 올려다보고 그 주위에 있는 오오라를 아후라 마즈다, 오르무즈드(Ormuzd)의 위대한 오오라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하강하여 우선 불타는 초목 속에서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그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몸속에서 사람으로서 자상에 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 말을 내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빛」은 그 어떠한 존재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될 때까지 이 주제를 연구해봅시다. 단 오늘은 바울에게 계시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존재가 언제나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존재는 우선 필요한 힘을 축적하고 이러한 계시가 가능해질 때까지 힘을 발달시켜야만했습니다. 2천년 이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각각의 영혼은 각각의 육화로 진보를 이룹니다. 지도적 입장에 있는 개아에게도 이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항상 같지 않다고, 그의 작용에 대한 특징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도 어느 진화단계로부터 다음 진화단계로 진보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자신의 영혼과 육화와 마찬가지로 영적 존재도 점점 더 고차 단계에 도달하여 힘이 더더욱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압도적인 환희의 감정이 솟아오릅니다. 이 자각은 인간에게 생생한 진화에 대한 감정을 부여해줍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과거에 어떻게 일했으며 현재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예를 들면 모세와 바울의 경우 어떻게 일했는지, 이러한 사실로부터 신성한 존재들조차 어떻게 진보하는지 명확히 나타내는 것은 장미십자의 신비적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은 진화에 관한 친밀한 개념을 생성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한번 살펴봅시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세상의 빛을 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첫 수년 동안은 특히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그 후 인생과 비교해보면 진화 정도가 가장 빠른 시기는 그 때입니다. 유물주의 과학도 이것에 대해 충분히 신뢰할만한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수단으로 뇌를 검사해보면 아이의 머리 끝부분이 상당 기간 부드러운 상태로 좀처럼 두개골이 닫히지 않고 뇌가 서서히 형성되어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접합기능이란 아이가 나중에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위한 기구, 다시 말해 사고력, 지각하는 것에 상호관련을 가져다주는 능력을 위한 기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시능력자는 탄생 후 처음 수 주, 수 개월간 아이가 인간의 제2구성요소인 에테르체에 속하는 내적으로 활동적인 강력한 힘들에 어느 정도 둘러싸여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인이 가지고 있는 에테르체의 분포는 실제 물질체의 분포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경우 에테르체는 물질체를 훨씬 뛰어넘어 넓게 퍼져있습니다. 특히 머리 주변이 그렇습니다. 영시능력자에게 빛의 유희처럼 보이는 이 힘들은 머리부분에서 특히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힘들이 어떤 식으로 몸의 아래쪽으로부터 솟아올라 목덜미에서 여러 방향으로 흘러가는 광경은 정말 굉장합니다. 머리카락이 나 있는 모든 곳에서 그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힘들은 살아있는 빛의 유희 속에서 빛나며 아이의 에테르체의 아스트랄-에테르적 빛이 됩니다. 이 광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차 사라집니다만 그 안에는 뇌의 연결섬유를 창조하는 힘들이 있습니다. 뇌는 아이가 태나난 후 영적 실질로부터 형성됩니다. 40에서 50여개 힘들의 흐름이 공동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의 몸은 이러한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태어난 지 첫 수 주간 아이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줍니다. 처음 에테르체는 아이의 외부에 존재하며 머리부분을 둘러싸고 있습니다만 완전히 미숙한 상태입니다. 그것은(머리) 에테르체가 여러 힘들을 모으는 빛의 몸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에테르체는 서서히 아이의 머리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복잡한 에테르적 조직으로 남게 됩니다.

 

진화과정의 매우 훌륭한 점은 물질적인 모든 것이 영성으로부터 창조되고 영성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자신이 거처할 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우주, 즉 인간 아이의 머리부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우주, 즉 온 세상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그리스도가 혼으로써 3년간 살았던 나사렛 예수와 같은 엄청난 진보를 이룬 개아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 안에서 에테르체 자신이 이윽고 들어가게 될 물질적 뇌를 준비하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도 육화이전에 스스로가 살게 될 거처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서 달성해야만 했습니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를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구와 외적으로만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높은 수준의 진화를 달성한 혼들은 그리스도가 더욱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방법으로 지구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 준비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변용시켜 결국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까지 이끌어낸 것일까요? 그리스도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처음 그리스도는 외측으로부터 몸에 작용하여 마지막으로 그 자신을 그 인간 안으로 이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소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우주에서도 일어납니다. 진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보다 높은 상위의 존재들 또한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구령이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가 초감각적으로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우주의 존재는 변함없이 대우주의 존재와 부합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장미십자주의의 서론조차도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이 어떻게 사고하고 지각하는 방법을 배워야하는지를 지적하는 것밖에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게 우리가 우주진화 과정을 더듬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自己)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본위적인 일일 것입니다. 자기는 전우주로부터 형성되어 전우주로부터 태어납니다. 우리 자신의 상승은 최종적으로 우리를 전우주와의 합일로 인도합니다. 자기인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자기인식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계시하기위해 인간에게 대세계에서 차지하는 장소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제2강 우리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혼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4일

GA109 

 

어제 도입 강의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연속강의 목적은  신지학적 세계관의 영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듣고 계시는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신 주제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근본으로부터 이러한 진리를 배움으로서 나중에 고차영역에 대해 고찰할 수가 있습니다.

 

본 주제를 다루기 전에 예외적인 중요사항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실제 정신세계에 대해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신지학적 이념이나 이론에 관계를 가져야하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탐사결과가 우리에게 알려지지만 나는 아직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영시탐사의 결과를 보고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내가 영시능력을 육성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면 그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면 개개인이 스스로 거듭 진보를 이루지 않겠는가?」

 

오컬트탐사의 원리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미리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라고 믿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신세계에는 명확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 중요성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명확히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해 올바른 훈련을 쌓은 영시능력자가 정신세계의 이것저것을 지각했다고 합시다. 다음은 이렇게 상상해보십시오. 그 뒤로 10년 또는 12년 후 다른 비슷한 훈련을 쌓은 영시능력자가 처음의 영시능력자가 획득한 결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같은 것을 보았다고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게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은 탐사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영시능력자나 오컬트학파가 한번 발견한 정신세계의 사실들이 이미 발견된 사실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두 번 다시 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1900년에 어떤 사실을 조사하고, 1950년에 다른 영시능력자가 같은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제2의 탐사자는 누군가가 이미 그 사실을 밝혀냈음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은 이미 행해진 지식으로써 그 중요성을 의식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보편적 우애를 쌓아가는 법칙입니다. 인류의 선구자들이 이미 밝혀낸 것들과 연관성 없이 정신세계의 어떠한 영역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신세계는 「나는 거기에 있는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자력으로 탐사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자신의 법칙으로 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도로 진보를 이룬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정신과학이 전하는 사실에 대해 만약 미리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 무엇 하나도 지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발견된 것들과의 연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신지학운동 또한 이 기반에 입각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부터 비교적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영시력을 몸에 익히게 되겠지만, 만약 이미 조사된 사실에 대해 듣지 못한다면 정신세계에서 진리가 아닌 허위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신지학, 영성과학이 전해주는 이러한 지식을 가져야하며 이렇게 하고난 뒤에야 처음으로 진리를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시능력자라 할지라도 이미 발견된 사실을 알아야하며, 그리고 양심에 기초한 훈련이 있어야 스스로 그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들은 인간의 혼에 단 한번 영시능력을 수태 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단 한번의 처녀수태를 달성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인간은 자신이 그것을 볼 권리를 갖기 위해 이 최초의 혼이 발견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내적 보편적 우애의 기반,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우애의 기반을 쌓아올린 것이 바로 이 법칙입니다. 지혜는 한 시대로부터 다른 시대로 오컬트학파에 의해 전해졌으며 지도자들은 그것을 충실히 보전해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정신세계의 고차 영역으로 가는 길을 바란다면 이 보물을 보전하고 이미 무엇인가를 달성한 사람들과의 우애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어야합니다.  물질영역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법칙이야말로 정신세계에서 자연의 법칙입니다.

 

신지학은 우리에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영성으로부터 생겨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이러한 겨우 이해할만한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의 배후에 영성이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만 영성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이 각 분야에서 어떻게 현현하고 있는지 명확한 개념과 이념을 육성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외적 세계로부터 정신세계로 이끄는 온갖 수단을 취하고 있다고 양심을 가지고 확신해야만 다른 인간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물질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세계는 광물계입니다. 돌의 세계입니다. 광물계는 인간계와 구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때렸을 때 맞은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 광물이 충격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는 외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간 안에는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는 혼이 있고 돌에는 혼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광물도 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이미 영시탐사의 결과에 유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앞에 굴러다니는 돌 속에는 어떤 혼적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장소를 향해 관찰해야 하지 틀린 장소를 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동물이 인간을 관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단 그 동물은 인간의 손가락 끝의 손톱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동물은 손톱을 독립된 물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작은 동물에게는 손톱이 유기조직에 속하며 그 일부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동물이 전체를 조사하고 전체를 잘 볼 수 있다면 그 관찰도 올바른 것이 될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영적 탐사자와 광물계에도 해당됩니다. 돌이 그 자체로 완전한 전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손가락이나 치아가 인간 전체라고, 즉 하나의 완결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작은 동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지구의 암석을 생각해보십시오. 암석은 지구조직 전체로부터 생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존재의 일부인 이러한 암석, 이 모든 암석이 속해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암석계 전체가 속해있는 영적 존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간의 혼과 마찬가지로 행복과 고통, 기쁨과 고뇌를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광물의 혼에 대해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유추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근거 없는 짐작으로 여러분은 돌이 부서지면 광물혼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다릅니다. 사람은 손톱을 다치면 고통을 느낍니다만 비슷한 상황에서 광물혼은 만족과 기쁨을 느낍니다. 광물에 속하는 존재는 돌이 부서지면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파편이 다시 합쳐지면 고통을 느낍니다. 바깥세계에서 광물은 끊임없이 분해되고는 다시 합쳐지고 있기 때문에 광물계에 속하는 존재의 혼속에서는 끊임없이 기쁨과 고통이 느껴집니다. 여기에 소금이 있고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컵이 있다고 합시다. 뜨거운 물에 소금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시관찰에 의하면 소금이 뜨거운 물에 녹는 것뿐만 아니라 평안한 감정이 솟아납니다. 소금이 컵 속의 물에 침투할 때 실제로 기쁨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식혀서 소금이 결정이 될 때 이 현상은 광물혼에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암석이 형성된 산맥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정이 땅 속에서 형성될 때 광물계에 속하는 존재는 고통과 고뇌가 따릅니다.

 

혹성이 탄생하고 응집된 덩어리가 모여서 다시 응집될 때, 이 과정은 여기에 관여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에게 고뇌와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지구와 같은 혹성이 탄생될 때 그 과정은 고뇌와 고통을 동반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고통과 고뇌, 예를 들어 채석장의 노동자가 돌을 부셨을 때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이러한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런 존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비교적 높은 단계의 세계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광물질은 이러한 존재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무형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 존재들이 광물계 전체에 살고 있습니다. 오컬트 탐사에 의하면 즉 무형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왜 「무형태의 세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요? 식물계로 눈을 돌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식물도 어떤 종류의 혼존재에 대한 표출입니다. 여기서도 영적 탐사결과를 연구해 봅시다. 영적 탐사에 의하면 예를 들어 가을에 옥수수가 익어 낫으로 베어 쓰러트릴 때 식물을 몸으로 가지고 있는 혼존재들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환희와 충만의 흐름이 밭을 덮으며 넘실거리기 때문에 여기서 고통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동물에 의해서 먹힐 때도 식물의 혼에게 그것은 기쁨이지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젓을 먹이는 포유동물이 경험하는 감정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고한 기쁨의 감정을 주게 됩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존재를 위해 영양을 공급해주는 수단으로써 우리 혹성이 지표에 만들어내는 것은 이 혹성에 속하고 지구 중심에 거처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내보내는 젓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식물이 지구 중심에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는지 어떤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침투성이 지배하는 그 법 때문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의 자기포기는 어떤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식물의 혼에게 지복을 의미합니다만 식물 전체가 뿌리째 뽑혀나가면 고통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장난이 심한 아이가 이유도 없이 꽃을 딸 때에도 식물의 혼은 행복한가? 식물전체를 뿌리부터 뽑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그것도 고통을 줄뿐인가?」 식물계에 유효한 시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이렇게 말해도 확실히 옳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점이 정신세계에 있어서 반듯이 올바르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처음 난 새치를 뽑는 것이 건강한 머리카락을 뽑는 것 보다 현명할지 모르지만 새치 역시 뽑으면 아픈 것은 틀림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연코 시점이고 우의적 고찰로 오컬트 세계에 대립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식물에도 그 고유의 존재가 있고 혼이 있습니다. 식물계가 몸을 제공하는 존재들이며 혼들입니다. 행복과 고통이 식물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무형태의 영역   아루파(Arupa)    무색계      고차데바찬계

형태의 영역      루파(Rupa)        색계   저차테바찬계

[참고:역주☆1]


 

광물의 혼은 정신세계의 특정영역, 사실은 상위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혼들이 사는 영역이 고차가 되 될수록 그들은 스스로를 점점 저차로 숨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전자를 무형태의 영역으로 부르고 후자를 형태의 영역으로 부를까요? 결정이 부서지면 파괴되는 것은 그 형태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파괴된 형태와 관계없이 다른 장소에서 재구축할 수 있습니다. 소금 결정이 자연 속에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이 꼭 다른 결정으로부터 생성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결정은 소금의 실질로부터만 형성되고 형태로서 다시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형태 실질의 특징입니다. 식물의 경우 형태는 실질, 즉 무형태로부터 같은 방법으로 생성될 수 없습니다. 식물은 부모로부터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식물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형태의 영역에 존재하는 혼의 경우 형태는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전달되어야합니다. 생식은 형태의 전달에 대한 결과로 생겨납니다. 형태만이 종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식물의 종자와 동물의 란(卵)사이에 커다란 차이는 조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의 천박한 신념입니다. 동물의 란의 경우 형태와 생명이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전달됩니다.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백합종자는 형태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백합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광물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말하자면 형태를 새겨 넣는 힘들이 데바찬계의 고차 영역에서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결정의 경우 무형태가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식물이 펼쳐진 혹성전체가 식물의 생명을 생성할 수 있는 충동을 포함한 집단적 생명으로 둘러싸여있다고 말해야합니다. 식물의 종자에서는 형태만이 태어납니다. 이전 백합의 생명은 종자가 심어져 있는 화단이나 화분에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합니다. 새로운 백합에 생명이 넘치는 것은 지구에 충만한 생명 속에 종자가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물계의 변천에 다다랐습니다. 식물은 형태만이 종자를 통해 전달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종자가 지구의 보편적 생명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동물 속의 혼의 특질은 시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경우 행복과 고뇌, 기쁨과 고통에 대해서는 자명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식물계에서의 행복과 고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존재에 대해 연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과 고뇌는 식물 하나하나의 외부에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구라고 하는 유기조직 전체가 행복과 고뇌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가락을 다치면 고통이 손가락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조직 전체에 전달되는 것과 같습니다. 식물의 고통의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다면 식물의 혼과 관련을 갖기 위해 지구 전체에 눈을 향해야합니다. 동물과의 본질적 차이는 동물이 다치면 고통이 피부 안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동물적 성질의 경우와도 역시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별화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진화가 고도로 상승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부에 중심을 가진 존재로 다가갑니다. 식물은 지구전체와의 관련하여 연구해야 비로소 올바른 연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혼을 가지고 있고 그 피부 안쪽에서 행복과 고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 실제 이 혼을 우리들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혼은 우리가 아스트랄계라고 부르는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세계에 관여하는 이념에는 어떤 조직적 질서가 존재합니다. 광물은 그 혼을 깊이 숨기고 있습니다. 식물은 광물만큼 혼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동물은 자신 안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 그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계이외의 세계에서 동물의 혼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4개의 왕국을 식별합니다. 우선 광물, 식물, 동물의 가시형태영역의 물질계입니다. 다음은 동물의 불가시영역이 발견되는 아스트랄계입니다. 3번째로 혼이 저차의 데바찬계에 숨어있는 식물의 영역입니다. 4번째는 상위의 데바찬계로 광물의 혼을 숨기고 있는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외적인 관찰로도 이 식별은 명백합니다. 이번에는 영시탐사 결과를 살펴봅시다.

 

실제로 어떤 광물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에는 어떠한 혼적 성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공간은 혼이 빠져있습니다. 암흑입니다. 하지만 그 주위와 외부에는 빛이 비추기시작합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이 빛은 강도가 증가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우주에서 기원하는 광물의 에테르체입니다. 실제 광물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에테르의 일부로부터 끌려나온 광물의 에테르체인 것입니다. 광물의 우주적 혼의 힘들은 광물의 에테르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기쁨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거기서 고뇌가 시작하기도하고 돌이 채석장에 잘려져 나가는 행복을 영적인 광선처럼 기대합니다. 광물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체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광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공간에서는 에테르체가 물질적으로 될 정도까지 농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물과 식물의 차이는 식물의 에테르체는 식물체내에 있고 모든 부분에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식물에 가득차있는 녹색은 광물의 바깥쪽에 있는 광물의 에테르체로 앞서 말한 실질입니다.

 

하지만 만약 식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식물이 에테르체에 의해 침투되어있다는 것뿐이라면 식물은 꽃을 피우지 않고 단지 초록색 잎만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식물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영시의식은 무엇인가가 식물의 위에 퍼져서 그 주위에서 춤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의 성장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아스트랄적 생명입니다. 초록색 식물은 성장해서 마지막으로 새로운 요소인 아스트랄요소가 그 위에 퍼져서 주위에서 춤을 춥니다만 결코 식물 속으로 침투하지는 않습니다.

 

동물은 영적으로 그 내부에 식물 주위를 비상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의 주위를 비상하는 것이 피부 안에 있을 때 그 존재는 동물이 됩니다. 식물의 위쪽에서 비상하고 있는 아스트랄요소는 지구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꽃이 피기시작하면 식물위에 연기처럼 날아오르는 것은 지구의 집합적 아스트랄 성질입니다. 행복과 고뇌는 식물 내에 있지 않고 지구에 의해서 느껴지게 됩니다. 동물은 그자신이 행복과 고뇌를 경험합니다. 동물 안의 아스트랄체는 지구의 아스트랄 성질 전체 속에 짜여져 움직이고 있습니다. 광물은 마치 에테르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 주위에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에테르체에 침투되어 있습니다. 식물계는 지구의 집합적 아스트랄 성질의 일부인 아스트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통과 행복을 식물 외부에서 경험합니다. 아스트랄요소에 싸여져있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스스로 아스트랄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 이것이 동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3왕국과 고차세계와의 연관성을 탐구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온갖 것들이 만들어낸 그 자체로 작은 세계입니다. 오늘 알아낸 사항들은 내일 인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

 

[역주]

☆1:불교에 는 기독교처럼 전능한 창조자라는 개념은 없지만, 28층으로 되어 있는 하늘과 거기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신적인 존재들에 대한 개념이 있다. 28층의 하늘은 다시 6층으로 되어 있는 '욕망의 영역 (카마로카kamaloka, 欲界天)', 18층으로 되어 있는 '무욕.유형(無慾. 有形)의 영역(루파로카rupaloka, 色界天)', 그리고 4층으로 되어 있는 '무형(無形)의 영역(아루파로카arupaloka, 無色界天)'으로 구분되며 각 영역과 하늘에는 그 상태에 걸맞는 신적인 존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각 하늘과 거기에 거하는 신들은 인간의 깨달음을 도와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단계를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또 대승불교와 탄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붓다와 보살들도 신적인 존재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붓다 또는 보살이라고 부를 수 있다. (欲界, 色界, 無色界를 三界라 한다. 三界는 윤회하는 6단계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욕망이 지배하는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인간계는 欲界로 분류된다. 따라서 欲界天은 6단계 윤회의 최정상인 天上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욕망이 지배하는 영역'을 일컫는 말이다.


 

 

제3강 인간의 성질과 존재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5일

GA109 

 

어제 강연에서는 우리 주위 세계에 존재하는 혼의 삶의 다양한 현현과 기능에 대해서 일반적인 연구를 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인간 자신의 성질과 존재에 대해 상세히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미 알려진 사항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우선 어제 제시한 영상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의 성질에 관한 진실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가장 낮은 차원의 몸은 마치 우리를 둘러싼 첫 번째 왕국인 광물계에서 성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눈앞에 서있을 때 우리 눈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느끼기 쉬운 부분, 즉 물질체(육체)입니다. 하지만 오컬티스트는 이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체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곧 물질체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것은 수소를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입니다. 물질체에는 인간을 조성하는 고차의 요소가 교묘히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이 물질체에는 이미 인간 성질 이외의 요소가 침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살과 뼈의 구조를 가볍게 물질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 물질체는 외부 광물계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실질과 힘들로 만들어져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재주로 인간 구조에 짜여져 있습니다. 이 물질체가 실제로 보일 수 있게 되고 실제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의 성질과 조성 외에 다른 요소가 물질체와 섞여있다고 하는 사실 덕택입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몸은 엄밀히 말하면 물질이 아닙니다. 진짜 물질체는 인간이 죽음의 문을 통과했을 때 남겨진 것입니다. 남겨진 사체야 말로 진정한 물질입니다. 인간 성질의 고차 요소로부터 모두 해방된 몸입니다. 몸만이 남겨지게 되면 이 물질체는 죽음의 순간까지 따르고 있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실은 물질체는 죽기까지 끊임없이 물질적 화학법칙을 계속 거부해 온 것입니다. 만약 물질체가 지상의 존재형태로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물질체의 붕괴에 저항하며 싸우는 에테르체에 침투되어 있지 않다면 물질체는 영원히 사체와 같은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에테르체, 즉 생명체는 인간 존재의 제2요소입니다.

 

이제 우리는 식물과 동물도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른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 차이점입니다. 그럼 어떤 점에서 인간의 에테르체는 동물의 에테르체와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영시의식은 어떻게 해서 에테르체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 물어봅시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영시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시능력을 어느 정도 육성한 사람은 자신의 심리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획득했기 때문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집중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관심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평균적인 인간은 눈앞에 있는 물체의 형태를 사고의 힘으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관심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극히 드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시능력자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영시 능력자에게 물질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에테르체에 의해 완전히 채워져 있습니다. 그 에테르체는 머리, 가슴, 어깨부분 등 대략 인간의 모습입니다만 몸 아랫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인체의 모습을 닮지 않게 됩니다.

 

동물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보면 말의 에테르체는 그 물질적 형태로부터 훨씬 멀리까지 퍼져있습니다. 영시를 통해 코끼리의 에테르체를 보게 되면 그 거대한 범위에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 형태의 경우 아래로 갈수록 에테르체와 물질체와의 차이가 커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좌우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심장은 왼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에테르체에서 심장과 대응하는 기관은 오른쪽으로 향한 에테르심장입니다. 하지만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가장 큰 차이는 남성의 에테르체가 여성적이고 여성의 에테르체가 남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감추고 있으며 인간 성질에 대한 많은 수수께끼가 이 오컬트조사를 통한 발견에 기초해서 해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경우에는 일종의 대응이 있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물질체와 에테르체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관해서는 더욱 명확한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인간 조성의 제3요소입니다. 인간의 에테르체는 영시능력자에게 실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물주의자에게는 단지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부학자나 생리학자는 인간의 물질체 밖에 연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물질체 안에는 인간의 의식과 매우 관계 깊은 것-피와 신경-이 있습니다. 이 의식은 행복이나 고뇌, 기쁨을 지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감정이 물질체가 채우고 있는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담당하는 것은 보통 인간에게는 비가시적이지만 영시의식으로는 빛의 구름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입니다. 아스트랄체는 에테르체와 전혀 다릅니다.

 

물질체의 운동은 에테르체의 특별한 가동성(可動性)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건강한 인간의 에테르체 색깔은 원기 왕성한 복숭아 꽃 색입니다. 에테르체 속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장미색의 음영 속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흰색이 됩니다. 에테르체는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잇습니다만 반복되는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또 다릅니다. 아스트랄체는 갖가지 색과 형태의 변화를 나타내는 마치 끊임없이 변화하는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구름 속에 나타나는 색채와 형태는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경험의 표출입니다. 만약 영시 능력자가 아스트랄체에서 푸른빛을 띤 붉은 색을 보았다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지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개개인 사이에 흐르는 적의의 감정을 보기도 할 것입니다. 인간 혼의 활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아스트랄체의 색과 형태도 변화하고 있으며 다채로운 움직임 속에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집니다.

 

인간 조성의 제4요소는 자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물질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체는 광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에테르체, 에테르체는 식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아스트랄체, 아스트랄체는 동물과 인간 양쪽에 공통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동물의 아스트랄체보다 훨씬 큰 움직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 성질의 네 번째 요소, 자아는 일종의 알 형태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머리의 앞부분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영시자에게 푸른빛을 띤 빛나는 구형으로 보입니다. 푸른빛이 깔린 빛살이 이 구(球)로부터 흘러나와 사람 안으로 이동합니다. 영시 능력자는 인간의 아스트랄체까지 사고로 지울 수 있게 될 때에만 자아를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지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와 공유하는 세 개의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가 인간을 다른 왕국과 구별해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창조의 영예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네 가지 속성을 연구할 때 우리는 인간이 고차세계로부터 부여받은 타고난 재능을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진화단계에 있든지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4층 구조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있습니다. 「나」, 자아가 3개의 몸에 작용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의미로 스스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이룩한 발달이 고차단계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저차단계에 머물고 있는지는 자신이 저차 요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작용해왔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자아는 먼저 아스트랄체에 작용합니다. 이 작용의 결과는 해당 인간이 저차 단계밖에 성숙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쉴러(1869~1945,독일 시인이며 극작가)와 같이 고도의 진화를 이룬 인격인지에 따라 틀립니다. 전자는 아스트랄체를 변용시키는 정도가 후자만큼 많이 성숙되어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내적작용은 오컬티즘에서는 정화, 카타르시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아스트랄체의 완성을 향해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한사람 한사람에게 아스트랄체는 두층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쪽은 작용을 받아서 정화되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만약 그렇다면 해당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선을 행하도록 강요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서서히 도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것이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인이 명령에 따라서 저항 없이 선하고 깊은 의미에서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것과는 명백히 커다란 차이가 발생합니다. 만약 단지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의 자아는 아스트랄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만약 선행이 습관이 된다면 그 때는 자아가 아스트랄체뿐만 아니라 에테르체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가 에테르체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어떤 설명을 듣고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한다면 이때는 자아가 아스트랄체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주의 기도」와 같은 기도문를 반복한다면 여러분은 반복을 통해서 에테르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은 몇 번이고 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은 일시적인 이해와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자아는 어떻게 아스트랄체에 작용하는가가 문제이고 전자의 경우 자아가 반복을 통해 어떻게 에테르체에 작용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해봅시다.

 

식물의 성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아있는 씨앗은 줄기를 만들어내고 이어서 잎들을 만들어 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녹색 잎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식물이 에테르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에테르체의 근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반복입니다. 반복이 발생하면 반듯이 에테르체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절정기 식물의 특징인 개화(開花)는 다른 원리, 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아스트랄체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정점은 아스트랄체에 의해 기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물질체의 구조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척수를 가진 등골은 물질체내의 에테르체의 표출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인간의 머리, 뇌를 생각해봅시다. 이곳에는 정점이 있습니다. 물질적 형태 속 아스트랄체의 작용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의 영향으로부터 생성된 이해의 표출이 아스트랄체에 행한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매일 반복하는 같은 기도나 명상 훈련을 통해 얻어진 생기 있는 활동은 에테르체에 작용한 산물입니다. 명상의 본질은 반복을 통해서 그것이 아스트랄체뿐만 아니라 에테르체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점입니다. 여러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 끼친 영향이 왜 그렇게 강력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는 힘들을 구현하는 원리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에테르체 또한 2중입니다. 한 부분은 자아의 작용을 받고 있습니다만 평균적인 개인의 경우 이것은 아직 한정된 정도입니다. 한편 다른 부분은 아직 전혀 작용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 아직 3번째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를 통해서 물질체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미 인간은 끊임없이 물질체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지만 자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진보된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조성의 4가지 저차요소를 연구해 오면서 그 결과로부터 3개의 고차요소는 자아가 저차요소에 작용하여 변용시킨 결과로 생겨난 산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3개의 저차요소에 작용하여 나타나는 효과는 그 작업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에 따라 상당히 다릅니다. 바꿔 말하면 그 사람이 의식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지 않은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발생합니다. 변용은 예술작품이나 회화에 대한 연구와 감상 또는 경건한 헌신이나 기도 등을 통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은 자신이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식적인 작업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존재의 저차요소에 대한 의식적인 작용과 무의식적인 작용을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2중입니다. 한쪽은 무의식의 활동에 의한 산물이고 다른 한쪽은 의식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작용한 부분은 감각혼으로 불리며 오늘날 인간 안에 완성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에테르체가 자아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지성혼(오성혼), 즉 정신혼입니다. 오래전부터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물질체에 작용한 것이 의식혼, 즉 영적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 안에서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를 구별합니다. 자아는 무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작용하여 감각혼을 생성시키고, 에테르체에 작용하여 지성혼, 즉 정신적 혼을 생성시키며, 물질체에 작용하여 의식혼, 즉 영적혼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성질에 6개, 아니 7개의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질과 조성에 작용해왔습니다.

 

이제 의식적 작용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 결과로 무엇이 생겨났을까요? 영아(靈我), 즉 마나(Mana)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아스트랄체에 새겨 넣은 것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에테르체에 새겨 넣은 것은, 단 이것은 오컬트훈련에 의존한 것입니다만, 붓디(Buddhi), 즉 생명령(生命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아가 최종적으로 의식적 작용을 할 수 있게 되어 물질체에 힘들을 쏟아 부을 수 있게 되면 무엇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오컬트훈련을 통한 호흡훈련에 의해 이것을 의식적으로 일으킬 수 있습니다만 대단히 섬세한 주의와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적 문헌에 공개되어 있는 잘못된 훈련방법은 종종 유럽인들의 몸에 심각한 손상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조성에 적합한 훈련에 대한 지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의식적 호흡방법을 통해 자아는 물질체를 아트만(Atman), 즉 영인(靈人)으로 변용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지상적 형태를 취했을 때 4중 존재였습니다. 처음 지상의 육화로 인간은 이미 자아를 통해 자기 존재에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육화를 거듭하면서 자아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미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육화 기간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혼의 세가지 기능적 측면을 발달시켰습니다. 즉 감각혼, 오성혼(정신혼), 그리고 의식혼을 발달시켰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가 세가지 고차요소로 의식적 변형이 실현되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의 7층 존재가 육화를 통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여러분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라고 하는 4요소가 모든 오컬트학파에서 존중해온 이른바 신성한 사위일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신성한 삼위일체가 더해져 의식적으로 7층 또는 10층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외적으로 인간의 주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스스로의 내부에 가지고 있지만 그 외적인 모든 것을 운반자인 자아에 의해 초월하는 인간의 영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 몸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 배우기 위해 이제부터 깨어있는 상태의 인간과 잠자고 있는 인간을 연구해봅시다. 인간 내면에서 기쁨과 고통이 진정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인간의 의식이 잠에 빠져들 때 무엇이 일어날까요? 이때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물체와 에테르체 바깥쪽에 존재합니다.

 

밤에 잠자고 있는 인간은 말하자면 식물과 같은 레벨로 하강합니다. 인간은 2층 존재가 됩니다.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있고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외부에 존재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렇다면 잠들어 있는 사람은 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때 인간과 식물은 같은 조성으로 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상에서 물질체와 에테르체만 가지고 있는 존재는 식물입니다.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존재하면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변화하게 됩니다. 식물에는 신경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피가 존재하는 것은 자아를 가진 물질체뿐입니다. 고등동물은 원인간(原人間)이 퇴화된 형태로 간주해야합니다. 물질체에서 자아는 혈액으로 표출됩니다. 아스트랄체는 신경으로, 에테르체는 선조직(腺組織,내분비선)으로, 인간의 물질적 성격은 그 몸으로 표출됩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체가 신경조직의 창조자라면 -실제 그렇습니다만- 이 신경조직은 비통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수면 중에 신경조직은 그 창조자로부터 버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조직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에테르체는 그 조직과 함께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혈액조직은 밤에 무자비하게 자아에 의해 버려지게 됩니다. 물질체는 자기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 성질은 그대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조직의 경우에도 같습니다. 에테르체는 수면 중 물질체 내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경조직은 그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이 순간 물질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영시의식을 통해 알아봅시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밤에 물질체와 에테르체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이 ‘신적-영적’ 아스트랄체가 침상에 누워있는 몸으로 이동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혈액조직에도 해당됩니다. 신적-영적 자아가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유지합니다. 밤에도 인간은 4층 존재입니다만 고차존재들이 침상에 남아 있는 두개의 몸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에테르체와 물질체로 돌아오면 인간 자신의 아스트랄체는 위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을 추방합니다. 같은 현상이 혈액조직에도 일어납니다. 인간의 자아는 밤사이 혈액조직을 유지시켜준 신적-영적 자아를 몰아냅니다.

 

신적-영적 존재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낮 동안 그들은 뒤로 물러서야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밤에는 물러나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신적-영적 존재들은 낮에 잠을 자고 한편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잡니다. 밤에 신적-영적 자아와 신적-영적 아스트랄체는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 속으로 들어가서 아침에 이 몸들로부터 떠나갑니다. 인간의 경우는 정반대 과정입니다. 저녁에 인간은 몸을 버리고 아침에 그들의 소유를 회복합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신들이 낮에 잠을 잔다고 하는 정서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신들이 가장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정오에 교회 문을 닫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밤 동안 인간의 몸 외부에 존재하는 것, 즉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잘 알고 있듯이 욕망, 욕구, 정열은 아스트랄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만 밤 동안 인간은 그것들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의 진화단계에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이를 자각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 단계의 인간은 물질적 기관을 통해 지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각기관이 존재하는 만큼, 그 수만큼의 세계가 인간 주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기관이 하나 더 있다면 새로운 세계가 사람들 앞에 스스로를 드러낼 것입니다. 아직 영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아스트랄체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수면 중에 감각을 가지지 못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쉽습니다. 맹인이 있는가하면 다른 감각이 결여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각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침이 되서 인간이 다시 물질적 감각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주위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경우 다릅니다. 생에 전체에 걸쳐서 에테르체와 물질체는 서로 결합된 상태입니다만 죽음에 이르러 일반적으로 에테르체는 처음 물질체를 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죽음의 순간을 지금까지 모든 생애에 대한 회고가 인간 앞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순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에테르체가 기억의 운반자이고 이 기억이 지금에야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테르체가 물질체 안에 있는 한 에테르체는 모든 힘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육체적) 장치가 허락하는 한도밖에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에테르체는 물질체로부터 해방되어 일생동안 그곳에 새겨진 것들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이 파노라마는 쇼크의 결과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만 이 경우 죽음의 경우와 같이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쇼크는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지만 이것도 역시 예외적 사례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이 벽화(파노라마)가 어느 정도 지속되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순간은 인간에 따라 크게 변화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해당 개아(個我)가 잠에 지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는 동안 이 벽화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시간, 50시간, 60시간에서 80시간정도 일 것입니다.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시간이 대충 이 파노라마가 지속되는 시간입니다. 회고는 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의식이 희미해져가고 동시에 영시자는 에테르체가 스스로 이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전면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해당 개아는 지금 끝난 인생의 결과인 에테르체의 정수(精粹), 추출물을 가지고 갑니다. 인간은 에테르체의 정수와 아스트랄체, 자아를 가지고 상승하며 그 뒤 아스트랄체도 놔두게 됩니다. 이렇게 헤서 겨우 인간은 2개의 유골을 남겨두고 영계로 이동합니다.

 

내일은 사후의 삶과 데바찬계로의 진입을 연구해보겠습니다.

 

[역주☆1] 인간의 7층, 10층구조

*아스트랄체 : 감정, 욕망 등의 영체

  에테르체 : 기억의 영체. 세포활동으로 신체를 유지하고, 감정과 욕망을 신체에 전달한다.

  신체 : 사람에게서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몸. 본성상 죽음의 상태에 들어가며(즉, 에테르체와 분리되며), 분자활동

            을 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에테르체에 잠김으로써 세포활동을 유지한다.

 

 


제4강 죽음과 탄생 사이의 인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6일

GA109 

 

어제 우리는 죽음의 순간 무엇이 일어나는지 들었습니다. 어떻게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가 물질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떻게 기억의 벽화가 혼 앞에 나타나는지 들었습니다. 이 벽화의 고유한 특징은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며 일종의 파노라마 같은 형식으로 인생을 돌아보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점은 그것이 영상으로 지각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삶의 현상들은 행복이나 고통과 연관성이 있지만 사후 수일간은 그러한 경험이 없습니다. 기억의 벽화는 완전히 객관적 영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명확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운명적으로 비통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보고 그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을 따라 갑니다만 고통스런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순교에 관한 영화와 같은 것으로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거기에 관한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단지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사후 기억의 벽화에도 해당됩니다. 에테르체가 이탈하여 물질체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보편적인 우주에테르에 용해되기 시작하자마자 이 벽화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정수, 과거생의 열매를 포함한 정수는 남습니다.

 

이렇게 해서 혼에게 본질적으로 새로운 기간이 시작됩니다. 물질계에 대한 혼의 애착을 끊는 기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컬티스트에게 욕구나 욕망은 실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스트랄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은 물질체를 떠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욕구나 욕망 등 모든 것이 실재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탐식하던 개아(식도락가)는 죽은 후에도 맛있는 식사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욕망은 아스트랄체에 단단히 들러붙어있으며 그에게서 없어진 것은 욕망을 만족시켜줄 입과 혀와 같은 물질적 장치뿐입니다. 그의 상황은 -외부상황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욕망을 달래줄 가능성이 전혀 없어서 심한 목마름에 괴로워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에 괴로워하며 만족의 가능성 없이 끝나야한다는 것에 고통 받게 됩니다. 이 고통의 목적은 물질적 장치만을 사용해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기 위함입니다. 이 상태를 카마로카(kamaloka, 欲界天), 욕망의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습성을 버리게 됩니다. 이 기간은 인간이 탄생해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중 1/3에 해당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다루게 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60세에 죽으면 카마로카에서 20년, 과거 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살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카마로카는 물질계와 인간을 연결하고 있는 모든 욕망이 단절될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마로카의 한 측면입니다만 다른 측면으로도 또한 연구해봅시다.

 

인간이 물질체를 가지고 경험하는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상에서 성취한 결과를 통해서 보다 고차 단계로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개아 자신의 발전에 장애를 만들어내는 수많은 유혹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행위들이 그렇습니다. 동료를 경멸하고 자신을 위해 만족을 얻을 때, 이기적 이유로 어떤 형태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계획을 실행할 때 우리는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장애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을 심하게 때렸다고 합시다. 그와 관련된 물리적 고통, 도덕적 고통은 우리의 성장에 방해가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세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이 방해물은 그 후 미래의 우리 삶에 붙어 다닐 것입니다. 카마로카기에는 성장을 방해하는 이러한 장애들을 제거하기위한 충동이 주어집니다. 카마로카기에 해당하는 개아는 자신의 생애를 3배의 속도로 거꾸로 살아가게 됩니다. 카마로카, 즉 아스트랄계의 중요한 특징은 현상이 거울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스트랄계에 입문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혼란의 근원이 되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그가 숫자 346을 보았다면 그것은 643으로 읽어야합니다. 아스트랄계를 탐구할 때에는 모든 것을 반대로 봐야합니다. 온갖 감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훈련의 결과로, 또는 병리학적 상태로 인해 누군가 영시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충동과 감정이 자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방에서 광선이 되어 그에게 다가옵니다. 잘 통제된 방법이든 비정상적인 방법이든 이스트랄 영역에 대한 영시력을 가지게 된 사람은 누구라도 즉시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고블린이나 악마적 모습으로 그를 덮칩니다. 이것은 매우 처참한 체험입니다. 특히 영시력을 가졌으나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점점 더 빈번히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진화단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이것을 말해야만 합니다. 정신과학은 인간을 정신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시력을 얻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과정은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스트랄계의 사실과 상황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스트랄계의 사물을 거울상으로 봅니다만 정신세계의 다른 사물들도 보게 됩니다. 물질계에서는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우선 암탉이 보이고 이어서 알이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아스트랄적으로는 알이 암탉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온갖 것들이 반대로 경험됩니다.

 

60세에 죽은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그가 카마로카에서 40세 때 누군가를 때린 장소에 이르렀다고 합시다. 지금 그는 카마로카에서 그가 때린 사람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상대방의 몸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는 시점까지 반대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고통만이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 주었던 행복이나 기쁨도 경험합니다. 조금씩 혼은 발달과 진화로 가는 장애를 제거하고 속죄를 가능하게해준 현명한 지도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보상하려는 의지와 함께 혼은 어떤 표시 같은 것을 받습니다. 발달을 방해하는 것들을 원상태로 고치기 위해 의지의 충동을 받아들입니다. 다음 생에서 혼은 이것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객관적인 벽화(파노라마)는 카마로카의 회고 경험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마로카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 타인이 느꼈던 것을 그대로 경험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다른 측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물질적 삶에서) 고통으로 경험되었던 것은 저쪽 세계에서 행복과 기쁨으로 경험됩니다. 즉 물질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역으로 행복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카마로카의 목적은 혼에게 회상의 벽화가 주지 못했던 것, 즉 회상 안의 고통과 기쁨의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카마로카기를 통과하면 제3의 시체라고도할 수 있는 것을 버리게 됩니다. 첫 번째로 물질체의 껍질이 벗겨지고, 다음에 에테르체 껍질, 이것은 우주 에테르체로 용해되며 이제 아스트랄체 껍질이 벗겨집니다. 이 아스트랄체 껍질은 인간의 아스트랄체로 아직 자아에 의해 정화되고 조정되지 않은 모든 것들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충동과 감정의 담당자로 그의 것이었지만 자아에 의해 변용되고 영화되지 못한 부분이 카마로카기의 끝남과 더불어 스스로를 해방시킵니다. 다음 여정에서 인간은 아스트랄체의 정수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 정수는 우선 모든 선한 의지에 대한 충동 총체와 두 번째로 자아를 통해 변용시킨 모든 부분입니다. 어떠한 욕구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고귀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든 것, 선으로 변화하고 도덕적으로 변화한 것, 이것들로 아스트랄체의 추출물이 형성됩니다. 카마로카기가 끝날 무렵 인간은 자아와 그가 만들어낸 아스트랄체 추출물, 에테르체 추출물, 선한 의지에 대한 충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인간에게는 새로운 상태, 다시 말하면 비탄으로부터 해방된 삶, 데바찬에서의 영적 삶이 시작됩니다. 오컬티스트가 이러한 진실을 실재적으로 경험하고 나서 다시 그것들을 성스런 기록이나 문서에서 발견하게 되면 마음에 큰 힘을 얻곤 합니다. 그 예가 신약성서의 다음 문장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그대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이것은 반대방향으로 인생행로를 살아가는 경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스런 종교문서를 연구할 때 신성한 순간에 대한 한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컬티스트는 어떤 옛 기록이나 권위에 의해서도 맹세하지 않습니다. 오컬티스트에 관한한 정신세계의 사실만이 결정적입니다만 예부터 내려오는 문서의 귀중함도 서서히 새롭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정신과학은 어떠한 옛 문헌이나 종교에도 근거하지 않고 단지 영적 사실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정신과학의 기반은 객관적 탐사입니다. 그리고 만약 전해오는 기록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판명되면 오컬티스트는 그 기록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데바찬, 영의 나라, 영성세계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 정신세계는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죽어서 처음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 세계는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그 관찰방법에 대해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물질계를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묘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엇비슷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지상에서 우리는 그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단단한 지면과 흐르는 물, 공기영역과 온기가 스며든 이들 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슷한 표현을 이용해 영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경이적인 방법으로 형성된 단단한 육지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바찬의 ‘대륙’ 영역입니다. 이것은 모든 광물의 원형적 유사 모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광물이 나타나는 곳에 영시자는 해당 공간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공간은 공허하게 뚫려있고 광물 주위에 영적 힘들이 존재합니다. 이 힘들은 영시로 빛의 에테르적 도형과 같이 보입니다. 결정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의식이 영계로 상승하면 물질적 실질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위에 보이는 영적 힘들입니다. 결정형태는 영시자에게 빈 구멍 형태로 스스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물질적 형태가 데바찬의 단단한 토양을 형성합니다. 물론 데바찬에는 대단히 많은 다른 것들이 존재합니다. 지상의 온갖 살아있는 생명, 다양한 식물, 동물, 인간에게 분배된 생명 모두가 영시능력자에게는 영계의 액체요소로 나타납니다. 우리 지구의 바다와 물 조직과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데바찬의 이 흐르는 생명을 우리의 강이나 바다와 비교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오히려 인체에 흐르는 혈액에 비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데바찬의 ‘바다’와 ‘액체’ 영역입니다. 고체영역과 액체영역은 단계를 거쳐 나타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의 육지와 바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3영역은 공기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데바찬의 이 영역은 우리의 감정과 동물의 감정이 구성하는 영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스트랄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입니다. 흐르는 고통, 흐르는 기쁨이 지상의 공기와 비교할 수 있는 데바찬의 실질성입니다. 데바찬에서 싸움을 보고 있는 영시자를 상상해 주십시오. 물질적으로 보면 여러분은 병사나 총,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보게 됩니다만 영시자는 인간과 물리적 무기들의 물질적 모습 이상의 것을 볼 것입니다. 영시자는 병사들의 정념(情念)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데바찬에서 여러분은 싸움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혼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정념이 정념을 향해서 서로 싸우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높은 산의 계곡 사이를 미친 듯 불어대는 무서운 폭풍우처럼, 데바찬에서 바라보는 영시자의 눈에 싸움은 대충 그와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랑의 감정도 보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아주 훌륭한 감미로운 울림처럼 데바찬의 공기영역에 침투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 개의 영역을  고체적, 액체적, 기체적으로 구분하고 그것들을 지구의 것과 비교해보았습니다.

 

온기가 물질계의 세 저차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것과 같이 한 가지 공통요소가 지금까지 구분한 데바찬의 세 영역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곳에 침투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실질입니다. 인간이 사고에 의해 지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사고의 실재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캔버스가 걸려있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살아있는 존재의 모습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쪽에서는 그들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물질계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사고는 영의 나라의 사고와 바로 이와 같은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사고가 인간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온기의 상태로서 데바찬 전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다음에 인간이 나아가는 세계는 이러한 곳입니다. 사후의 삶 동안 인간은 데바찬에 들어간 순간의 명료한 감정을 가집니다.

 

카마로카에서의 인간이 물질적 관련을 끊는 정도만큼 바로 그 정도만큼 인간의 의식은 다시 또렷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명료한 회상 후, 사후 존재 동안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정도는 물질적 삶을 향한 집착의 강도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물질적인 사물을 향한 애착을 끊는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의식은 그만큼 또렷해집니다. 데바찬에서의 인간의 경험은 의식적이지 꿈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온갖 사건들을 데바찬에서 경험합니다. 어떤 식으로 적절한 기관이 형성되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아주 정확하게 자신이 영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데바찬의 첫인상은 그의 자아 외부, 즉 ‘나’의 바깥쪽에 전생의 물질적 형태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 몸은 물론 영계의 ‘대륙’ 영역과 짜여져 있습니다. 데바찬의 단단한 육지의 일부입니다. 물질적 삶에서 여러분이 “나는 이것을 하겠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물질체 속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물질체에게 ‘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바찬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은 물질체의 외부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데바찬에 들어간 순간 그 물질체와 그 형태를 깨닫고 그것에게 “저것은 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물질체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혼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이제 혼은 “나는 지금 물질계에 있지 않고 영계에 있는 것이다.”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 이후 더 이상 여러분은 자신의 물질체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저것은 너다”라고 부르게 됩니다. 베탄다철학의 ‘Tat twam asi'는 바로 이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의 이런 류의 말은 영계의 언어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베탄다가 제자들에게 ’저것은 너다‘에 대해 명상하라고 가르칠 때, 이것은 지금 생에서 이미 자기 안에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생기는 이러한 이념과 개념을 눈뜨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순수한 명상의 언어는 실제 영계의 사실에 대한 ’사진‘입니다. 그리고 Tat twam asi는 바로 인간이 영계에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경계(境界)의 표시, 표식입니다. 우리는 서서히 객관적으로 관상(觀想,명상)할 수 있게 됩니다. 공감이나 반감을 갖지 않고 우리 자신의 물질적 삶에 관련된 것을 사진을 보듯 객관적으로 관상할 수 있게 됩니다.

 

데바찬에서 혼이 경험하는 흐르는 생명은 물질계와 성질이 다릅니다. 물질계에서 생명은 수많은 존재 각각에 분배되어 있습니다만 데바찬에서 생명은 단 하나의 총체로 현현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생명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강렬한 지각체험입니다. 이 통일체 생명 속에 경험이란 추상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이 생명에 도입한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차례차례로 인간에 의해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같은 진리를 다시 환희의 원천으로서 데바찬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종교 창시자들로부터 각각의 육화에 흘러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그리고 가장 귀중한 지식은 에테르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만) 영계에서 여러분이 직면하게 될 경험입니다. 물질체로 흘러들어온 모든 것은 여러분 앞에 위대한 인상적인 영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데바찬에서 인류를 서로 이어주는 것을, 인류 사이의 조화를 고양시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를 다른 것, 우리에게 소원한 것, 우리는 저편의 영역에서 그것들에게 조화를 가져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매우 강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쾌와 고뇌는 저편 영계에서 기상상태로 현현합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에 과거 내적으로 경험한 것을 비슷한 모습의 영상으로 경험합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주위의 공기영역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저쪽 세계에서 전체성과의 관련으로 경험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개인적 기쁨과 고통이 전체성에 있어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 명백해졌습니다. 우리는 저편에서 실재하는 사고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자 그럼 인간 존재가 데바찬의 총체 속에 있는 이 생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질문을 해봅시다. 비교를 통해서 이것을 명확히 알아봅시다. 인간이 물질계에서 지각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빛이 인간이 있는 곳을 비추고 그 수용기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괴테는 분명한 의도로 “눈은 빛에 의해서 빛 때문에 형성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진실성은 동물이 어두운 동굴에서 살게 되면 눈이 퇴화되고 다른 기관 예를 들면 그곳에서 중요한 촉각기관이 더욱 섬세한 감각을 발달시킨다는 사실로부터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지각기관은 그것과 관련된 외적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만약 태양이 없다면 눈도 없을 것입니다. 빛이 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조직은 그것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의 산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물질적인 모든 기관이 주위 세계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데바찬계에 있는 인간의 영적기관도 영적환경에 의해 구축된 것입니다. 데바찬에 있는 기간에 인간은 주위의 생명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입니다. 주위의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위한 일종의 영기관(靈器官)을 형성합니다. 인간은 데바찬에서 자신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존재인양 느낍니다. 그 내부에서 계속 영기관이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주십시오. 계속해서 창조되는 모든 지각기관에 은총을 받고 있다는 감정이 동반됩니다. 이러한 성장과 생성(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는 데바찬을 통과하는 인간에게 은총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인간존재는 자신을 위해 인간의 영적 원형을 창조합니다. 사후 데바찬을 여행할 때 언제나 몇 번이고 이미 이 일을 해왔습니다만 매번 이 원형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 즉 이전 생의 결과인 에테르체의 추출물로 데바찬에 가지고 온 것을 포함시킵니다.

 

인간이 처음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그제야 인간은 물질적 인간에게 밀도를 더하는 원형이 이미 영적으로 창조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수많은 육화를 거치면서 매번 데바찬계에 과거 생의 정수를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것에 조화로운 형태로 새로운 인간 원형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만을 말하겠습니다.

 

인간이 지속적으로 육화를 통해 지상에 출현하고 몇 번이고 데바찬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구는 매번 인간에게 변화된 얼굴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경험이 외적 문화 또는 온갖 종류의 관계를 통해서 손에 들어옵니다. 혼은 새로운 경험이 제공되지 않는 동안에는 물질영역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육화와 육화사이의 기간을 숫자로 설명하겠습니다. 그 기간은 인간이 새로운 원형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일단 만들어진 원형은 매번 다시 지상에 출현하고 싶다는 충동을 품게 됩니다. 결국 이 원형이야말로 인간 존재 자신인 것입니다. 이 충동을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특정한 사고와 그 사고를 표출하고 싶다는 욕구를 품으면 그 충동은 사고가 물질적 형태를 취하는 방향으로 이끕니다.

 

데바찬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 창조된 원형의 형태를 다듬어 완성하는 힘은 아직 인간 의지가 미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 생의 주기에서 인간은 아직 스스로 육화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원형에 알맞은 물질체를 제공해주는 부모에게 인도해줄 지고의 영적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인간을 원형에 적합한 사람들과 민족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육화할 때가 오면 인간은 우선 데바찬에서 창조된 원형에 조화로운 아스트랄실질로 자신을 둘러쌉니다. 이제 고차존재들에 의해 부모 곁으로 데리고 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부모가 제공할 수 있는 물질체는 그 아스트랄체와 자아에 대략적으로밖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고차존재들은 해당 개아에게 지상적인 것과 정신세계로부터 오는 것과의 사이에서 최상의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에테르체를 쏟아 붓습니다. 이 에테르체의 수용과 물질적 탄생에 대해서는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인간이 다시 지상에 출현할 때의 과정은 사후에 발생하는 과정과 정확히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죽을 때 인간은 첫 번째로 물질체를 놓아두고, 이어서 에테르체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트랄체를 남깁니다.

 

인간이 에테르체를 받아들일 때는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죽을 때는 지난 인생을 역방향으로 보게 됩니다만 이번에는 앞으로 시작하려고 하는 인생의 예고, 예언적 전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에테르체가 짜여져 들어가는 순간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집니다. 그는 특정한 세부사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능성에 대한 영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예견은 인간에게 있어서 재난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이 그 예견에 의해 쇼크를 받는 광정에서만 일어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 물질체에 들어가는데 저항하고 몸부림친다는 뜻입니다. 만약 바람직한 형태로 에테르체가 들어가면 에테르체와 물질체는 조화를 이룹니다. 한편 쇼크가 일어난 경우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 때는 에테르체가 물질체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채 특히 머리주변 바깥쪽에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적절히 지혜기관을 형성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원인으로 백치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모든 경우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해두지만 전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 삶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 삶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인식은 우리가 자신의 지식을 이타적 삶에 봉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5강 영적 힘과 존재들의 표출인 물질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7일

GA109 

 

우리 물질계를 지배하는 상황이 죽음과 탄생 사이 인간이 통과하는 영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정신과학의 진리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라도 물질계의 모든 사건들이 영적인 영향과 사실, 그리고 영적존재들의 표출임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적 사건들의 기반은 영계, 데바찬에서 찾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반대로 물질계가 영계에 영향을 끼치는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삶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혼과 혼을 이어주는 실은 존재가 처하는 다양한 상황의 결과를 통해 이 물질계와 맺어져 있습니다.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인연은 견고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모든 만남은 물질계뿐만 아니라 영계에서도 중요성과 실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곳(지상)에서의 관계가 영적일수록 데바찬계에서도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이 죽으면 이러한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서 물질적인 것은 모두 없어지고 혼과 영의 성질 부분만 남게 됩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가 그런 예입니다. 우선 이 관계는 자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영적으로 되어 결국 자연조건은 혼과 혼 사이를 서로 이어주는 관계성을 가져다주는 기회만을 제공해줍니다. 인간이 죽으면 자연이 부여한 조건은 사라지고 서로 이어주는 관계성만 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상의 인류전체를 이어주는 모든 우정과 사랑의 관계성을 상상하려한다면 이 관계를 실제 데바찬에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그물로 그려야합니다. 영시자가 데바찬의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그는 이 영적 관계의 그물을 사후 인간이 데바찬에 들어갔을 때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데바찬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재회하게 되는가?‘라는 물음에도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과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혼의 관계성에 베일을 걸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모든 장애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재회합니다. 데바찬에서 혼은 직접 서로를 향합니다. 혼과 혼의 관계는 물질계보다 훨씬 친밀하고 내적인 관계가 됩니다. 데바찬에서는 어떤 혼이 다른 혼을 다시 인식하는 데는 약간의 의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저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혼은 말하자면 영적 얼굴 모양이 새겨진 내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기저음(基底音)으로써 지상에서 가능한 것보다 훨씬 진실한 형태로 자신의 이름을 알립니다. 오컬티즘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기저음을 영계에서 표상하는 것입니다. 두 혼은 데바찬에 있을 때 처음으로 의심이 없는 완전한 교류가 가능해집니다. 그렇지만 몸을 잃어버린 혼이 지상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식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실재 살아있는 사람의 행동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데바찬에 가는 혼은 당연히 지구에 속하는 물질적 색채와 형태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편 영적영역에서 그는 물질적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바찬에는 물질계의 영적파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세상에서 혼이 지각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파편들입니다. 물질계에서 손의 움직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지의 충동이 선행하고 있기 때문에 손의 움직임 같은 모든 물질적 인간의 변화는 지상의 인간보다 죽은 혼이 먼저 데바찬에서 지각할 수 있는 영적파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삶은 꿈이나 잠과 같은 것이 아닌 모든 면에서 의식적인 삶입니다. 데바찬에서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으려고 하는 선천적 재능과 충동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이후 육화에서 그가 다시 지상에서 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면에서 육화의 목적은 더욱 친밀한 관계성을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친구관계는 아무리 작더라도 지상 어떠한 삶보다 떨어지지 않는 친밀한 것입니다. 데바찬에서의 우정은 지상보다 기민한 것이기 때문에 훨씬 친밀한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경험합니다. 지상에서는 많든 적든 타인을 짓밟음으로서 개인적 풍요를 누릴 수 있지만 데바찬에서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높이기 위해 타인을 끌어내린 불행은 자신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을 희생으로 해서 풍요롭게 될 수 없습니다. 수정(修正)이라는 것은 데바찬에서 출발합니다. 우정을 지상에서 실재하게 만드는 충동은 저편 데바찬에서 기인합니다. 데바찬에서의 당연한 법칙이 지상에서는 실현되어야할 사명인 것입니다.

 

영계와 지구와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사실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이 사실에 대해 철저히 고찰해 볼 수 있으며, 데바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생활에 대해서 스스로 많은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바찬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적원형을 완성시켰을 때 다시 물질영역으로 하강하려는 충동이 생긴다고 어제 말했습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당신이 성숙한 사고를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실재 혼을 물질계로 다시 하강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혼에게 이러한 분명한 충동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카마로카기에 서서히 자신을 물질적 생에 속박하고 있던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 혼은 끊임없이 그 통과하는 경험 속에서 진화를 방해하는 것을 배제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충동을 받게 됩니다. 혼 자신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킨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고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경험할 때 혼에게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치유하기 어려운 충동이 생성됩니다. 이렇게 해서 한발 한발 혼은 카마로카에서 데바찬으로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 싶다는 충동을 가지고 갑니다. 고차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적절한 방법으로 보존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집니다. 카마로카기 뒤에 인간이 제3의 껍질인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벗을 때 아직 자아의 작용을 받지 못하는 모든 부분이 떨어져 나갑니다. 하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인간이 세상에 초래한 진화에 대한 방해물로 구성된 그물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물질계를 지나올 때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다고 하는 증거가 되는 모든 형태들을 가지고 자신의 길에 깔아놓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만약 데바찬에서 자신의 원형을 완전히 육성하고 그 안에 자신의 에테르체의 추출물인 지난번 육화로부터 가져온 모든 것을 짜 넣었다면 이제 일종의 수정(受精)이 발생합니다. 보상받지 못한 행위의 그물이 그 원형에 침투합니다. 이렇게 데바찬에서 성숙한 뒤에 혼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은 이른바 카르마가 혼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혼에게 전생에서 행한 해악을 가능한 한도에서 보상하기 위해서 다시 지구로 하강하고 싶다는 충동을 불어넣습니다. 데바찬기가 끝날 무렵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혼에 침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지상에 새로운 존재로 하강할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영시자는 아스트랄계 도처에서 육화를 원하는 혼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아스트랄계의 시간과 공간은 물질계와는 다릅니다. 이러한 혼은 아스트랄계를 무서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힘들에 의해서 이 혼에게 적합한 물질체와 에테르체가 태어나는 장소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와 뉴욕의 거리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시간 요소를 고려하는 것은 육화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 성취 될 수 있는 지상적 가능성이 관계하고 있는 한에만 유효합니다. 아스트랄 공간을 날아다니며 위에서 아래로 퍼져있는 종 모양을 한 혼에게 지상으로부터 유전계통이 만들어낸 물질요소가 찾아옵니다.

 

그럼 우리는 혼을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육화하는 것은 무엇인지 간결하게 맣하겠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생식(生殖)은 어떤 감정의 충동과 사랑의 충동, 그리고 사랑에서 생겨난 공감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생식과정은 ‘사랑으로부터 생겨난 공감’ 뒤에 발생합니다만 영시자는 이 공감을 남녀 사이의 아스트랄적 힘들의 유희, 아스트랄 흐름이 요동하며 넘치는 모습으로 지각합니다. 거기서는  인간이 혼자 있는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살아 있습니다. 두 혼사이의 우정은 아스트랄 흐름의 유희로 표출됩니다. 물론 사랑의 모든 과정은 독립된 것이고 각각의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상의 수태가 일어나기 전에 사랑의 육체적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아스트랄 힘들의 유희 속에 다시 지구로 내려오고 있는 개아가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생식행위의 본질적 실재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수태 전에 영계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존재는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계는 남녀의 만남을 만들어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영계에서는 정말 대단히 친밀한 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강하고 있는 존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처음부터 수태의 산물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개아가 그것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수태 순간부터 이 개아는 물질적 생식의 결과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예외도 있습니다. 수태 후 처음 수일간 하강하는 영적 개아는 아직 실제로 물질적 인간존재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만 바로 그 곁에 존재하며 이미 성장하고 있는 태아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실재 결합은 수태 후 18, 19, 20, 21일 후에 발생합니다. 고차세계에서 하강하고 있는 존재는 성장과정에 있는 존재와 함께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약 인간개아가 도구로서 물질체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필요로 하게 될 섬세하고 유기적인 조직이 처음부터 과거 능력과 조화로운 형태로 준비됩니다. 인간존재가 통합된 통일체인 것은 가장 작은 기관이라도 유기조직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소 단위조차 수태 후 18일부터 21일 사이에 자아가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발달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을 전체 구조가 보증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태어날 존재의 발달에 여성요소와 남성요소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물질적 생식의 배후에 있는 것을 오컬트적 영적으로 연구한다면 매우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본질만을 다루겠습니다. 과거 성이 분리되기 이전에 생식은 남성의 참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상태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일 여성요소만이 인간생식과정에 참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여성요소만 활동한다면 거듭되는 진화는 아이가 최고도로 선조를 닮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태어나는 존재는 모두 완전히 동질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일반성, 동일성의 원리는 여성요소로부터 생성됩니다. 성의 분리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개아가 발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손과 선조 사이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남성요소의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요소는 개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육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지상에 두개의 성이 확립된 후에야 시작된 것입니다. 그전까지 인간은 지상에서 과거의 산물을 자기 몸속에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아래쪽 지상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과 육화를 거듭하며 진화되고 풍성해져야할 인간총체와의 사이에 조화가 존재하는 것은 남성요소와 여성요소가 공동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편적 인간성’의 원리가 남성요소의 활동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다면 즉 보편적 유형이 개체화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아는 오늘날까지도 적절한 몸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성요소가 작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에테르체입니다. 에테르체에는 영겁의 경향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여성요소의 구동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성의 원리, 포괄성의 원리가 에테르체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성의 에테르체에는 오늘날까지도 민족혼, 민족령으로 외적 존재들의 그림자(사본)가 존재합니다. 민족혼과 민족령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럼 수태의 근저에 있는 영적실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수태 그 자체는 에테르체의 살아있는 힘들의 일종의 사멸에 지나않는다고 말해야합니다. 수태에 있어서 이미 죽음은 인체에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테르체를 경화하는 말하자면 사멸하게 만드는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에테르체는 무한히 증식해버릴 것입니다. 에테르체는 여성원리에 기원하고 있으며 다른 요소가 더해지지 않으면 복제밖에 만들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에테르체가 남성영향의 결과로 농밀화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간개아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식은 여성의 에테르체가 복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멸한 에테르체에 새로운 인간존재를 창조하는 형성력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태와 번식이 발생합니다. 상부에서 그 고유의 카르마의 결과로 원형의 수태가 일어납니다. 수태 후 18일에서 21일후 자아는 이미 태아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아까 말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힘들은 훨씬 뒤인 6개월 후에야 비로소 태아에 작용하게 됩니다. 이 힘들은 그 인간의 카르마를 결정하는 힘들입니다. 이것은 카르마로 짜여진 그물에 잡혀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서서히 이러한 힘들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 자아의 교환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자아가 성장의 위해 간섭하는 제1요소인 것입니다.

 

영계에서 하강하려고하는 존재를 개괄한 영상을 얻고 싶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육화과정에 있는 개아가 서로 사랑하는 두 명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육화를 원하는 원형은 스스로 정념이나 사랑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아스트랄실질을 끌어당깁니다. 아래쪽 지상 여기저기에서 넘치고 있는 아스트랄적 감정은 하강하는 실체의 아스트랄실질을 반사합니다. 그러므로 위쪽에서 오는 아스트랄실질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아스트랄적 감정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스트랄적 감정은 육화를 위해 하강하는 실체의 실질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고를 결론에 이를 때까지 철저히 고찰해보면 우리는 재육화하고 있는 개아는 분명히 부모를 선택하는데 참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개아가 누구든지 어떠한 것에 응해서 그는 부모가 될 남녀를 향해 이동하게 됩니다. 만약 부모의 선택이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면 아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찾아내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성질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사랑도 그런 이유로 감소하게 될 것이라고 종종 가볍게 말을 합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떤 의미에서 수태 전부터 양친을 사랑하고 있고 그 때문에 두 사람 곁으로 이끌려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실감하게 되면 모성애와 부성애는 보다 고차적이고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은 그 아이의 사랑에 대한 대답인 것입니다. 사랑의 답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양친의 사랑을 물질적 탄생에 선행하는 아이의 사랑에 대한 재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차존재들이 새로운 인간의 체현(體現)에 참가하고 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로부터 체현을 위해 내려오고 있는 존재와 이 존재가 아래에서 획득한 몸 사이에는 결코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차와 저차의 완벽한 조화는 인간이 진화의 어떤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즉 인간이 영인(靈人)을 달성할 때까지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스트랄체를 영아(靈我)로, 에테르체를 생명령(生命靈)으로, 물질체를 영인으로 변용시켰을 때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마지막 육화를 선택하는 진화의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완전한 조화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아직 아스트랄체, 에테르체, 물질체의 일부밖에 변용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 부분밖에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아직 변용시키지 못한 것은 외부로부터 다른 존재에 의해 인간 안에서 통합되어져야합니다. 서로 다른 두 계통의 존재들이 이 과정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에테르체를 통합시키는 존재들이며 인간을 양친에게로 이끄는 존재들입니다. 현 진화단계에서 인간은 스스로 에테르체를 자신의 구성의 통합요소로 만들 수 없습니다. 어제 강연에서 말한 ‘인생의 예견’을 인간이 갖는 것은 에테르체에 포합되어 있는 힘들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이미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물질체가 더해지면 예견이 사라져야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에테르체는 물질체와 뒤섞여져야합니다. 물론 에테르체는 기억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시간에 관계하는 회상과 예지와 관계하는 모든 것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테르체가 물질체로 이동하면 에테르체는 물질존재의 법칙에 지배되며 이들 법칙은 어떤 의미에서 에테르체의 힘을 소멸시킵니다. 물질체의 영향을 통해서 인간이 기억을 어느 정도까지밖에 전개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해주십시오. 에테르체가 다시 자유롭게 되는 사후에는 에테르체는 기억의 파노라마 전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견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계에서는 미래에 대한 전망도 물질체에 의해 한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과정의 육화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쇼크는 미래의 인생에 대한 어려운 상황을 비정상적 형태로 예견한 결과가 혼에 의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간인 자아가 자신에게 부여된 물질계에서 그가 관계하는 것들에게 작용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탄생이전에 작용하고 있던 다양한 영적 요소의 힘들은 우선 모체조직의 대응요소를 통해 활동합니다. 탄생 직전 인간은 모체의 울타리에 의해서 사방으로 싸여져 있기 때문에 살수 있는 것입니다. 탄생과 함께 인간은 이 물질적 모체의 울타리를 벗어버립니다. 첫 번째로 자유롭게 되는 것은 물질체뿐입니다. 에테르체는 영시자에게 아직 모체의 에테르체의 울타리에 싸여져 있는 것으로 관찰되며 젖니가 빠지는 시기까지 이 울타리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 젖니가 빠지는 시기는 모체의 에테르 울타리를 버리고 제2의 탄생이 일어나는 인간성 진화의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 때에 에테르체는 모체의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현상입니다. 젖니가 빠지는 시기까지는 몸의 구조가 유연하고 어느 정도 변화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습니다만 그 이후부터 몸은 성장력이 지배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가 나기시작하면 본질적으로 몸의 형태의 발달이 완료됩니다. 이 지식은 중요합니다. 외부에서 물질체 형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과 물질체의 항구적 특질이 되어야하는 모든 것은 철저히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이가 빠지는 시기까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모든 외적요소는 예를 들어 빛이나 색 등 인간에게 영향력을 가진 모든 것이 섬세한 인간의 요소와 기관에 형성적 영향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주위에 어떤 색이 있는지, 어떤 환경이 있는지, 무엇을 하면 좋은지가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활동을 통해 점점 더 섬세한 기관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적색이 인간의 보다 미세한 기관에게 주는 영향은 청색의 영향과 다릅니다. 이와 같이 아이의 주변에 있는 색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집니다. 활동이 있으면 기관도 발달합니다. 눈이 습관으로 보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 눈이 보는 것은 인간 성질에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의 눈이 적색을 보는지 청색을 보는지는 아이의 성장과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정신과학이 주류로서 실천적 학문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을 통해서입니다. 왜 우리는 정신과학을 실천하는 것일까요?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과학은 우리를 이런 미묘한 문제에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러한 활동분야에서도 도움을 줍니다.

 

태어나서 7년이 지나면 에테르체가 자유롭게 됩니다. 에테르체는 기억을 담당합니다. 아이의 기억력에 관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세가 될 때까지는 지금의 교육방식으로 기억력을 발달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7세 이후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교육예술을 통해 기억훈련에 영향을 주어도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7세가 되기 전에 이미 아이가 기억력을 사용하도록 자연이 작용하고 있다고 종종 주장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작용하는 것은 예비단계입니다. 모체 안에서 아직 태어나기 전에 아이의 눈은 자연에 의해 모양이 갖추어집니다만 만일 태아의 눈에 태양광선이 작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이 되서야 햇빛이 눈에 올바른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바로 그 때문에 태어나기 전에 자연이 눈에 대해 예비작업을 수행해야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탄생이전의 다른 기관도 이와 같습니다. 자연은 미리 이러한 기관을 만들어 냅니다만 모체의 울타리라는 외적인 덮개에 의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기억은 7년째 이후 올바르게 발달을 계속할 수 있도록 7세가 될 때까지 자연이 작용하도록 놔두어야합니다. 그럼 그 이후부터 인간은 어떻게 아이의 기억에 작용을 해야 할까요? ‘아이의 물질적 탄생까지 자연이 작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가 바로 그 대답입니다.

 

인간은 14, 15세의 사춘기까지 그 주위에 모태(근원)가 되는 아스트랄체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 시기가 이르면 그 울타리는 벗겨지고 아스트랄체는 자유롭게 됩니다. 이른바 제3의 탄생이 발생합니다. 아스트랄체는 인간의 판단력, 식별력의 담당자입니다.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아이가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견은 싹 버려야합니다. 7세에서 14세에 걸쳐 인생의 목적에 알맞은 (유효한, 도움이 되는) 기억의 보고(기억력)를 쌓아두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스트랄체가 태어날 때 가능한 원숙하고 풍요로운 혼의 내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판단력은 이러한 혼이 만들어졌을 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이는 사(2x2=4)'라고 암기시키는 옛날 학교에서 사용되던 방법은 실제 기억력의 문제입니다만 현재 유행하고 있는 ’2x2=4‘를 주판의 빨간 구슬과 흰 구슬로 증명하는 추상적 방법보다 확실히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주판을 이용하는 추상적 방법은 분명히 유해한 방법입니다. 어린아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마음대로 말하지 못하지만 그사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테르체를 위해 좋은 기억을 쌓을 때까지는 판단을 사용하도록 힘을 써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영구적인 경향이나 습관을 발달시키기 전에 판단을 행사하도록 노력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 삶을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 외경, 신성한 두려움은 이후 인생에서 은총의 힘으로써, 흘러넘치는 인간적 사랑으로써 표출되는 감정입니다. 가장 강력한 충동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서, 즉 신적이고 영적인 것, 우주적인 것을 느꼈다고 하는 감정을 통해서 에테르체에게 주어집니다. 에테르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인간이 탄력 있고 유연하게 바꿀 수 있을 때, 경건함이 없는 추상적 사고습관을 형성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추상적 판단능력을 육성해야합니다. 아이에게 전달된 지식이 이미지와 상징으로 생생하게 그려질수록 좋은 것입니다. 감정생활은 우화 의 뜻과 상징을 알게 됨으로써, 특히 역사적 위인의 전기를 통해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흡수함으로써 발달됩니다.

 

아이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탄생이나 그 생과 죽음에 대한 설명으로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나오는 나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물질체로부터 출현하는 인간 혼의 성질에 대한 영상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야기할 때는 당연히 우리 자신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의 진실을 확증해주는 사실을 자연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나비와 번데기의 이미지가 고차단계과정의 상징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상적 철학이 신화나 옛날이야기라고 낙인찍은 것들을 다시 한번 믿을 수 있어야합니다. ‘황새이야기’나 ‘날아라 날아라 풍뎅이‘와 같은 노래는 딱 들어맞는 해석을 붙일 수 있습니다. ‘황새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기 위해 아득히 먼 옛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탄생에 즈음하여 무엇인가가 영계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래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유일하게 일어나는 과정은 남녀의 물질적 연결뿐이라고 믿었었다니 어처구니없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옛날이야기입니다. 미래에는 분명히 “우리가 훨씬 낫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앞으로 올 사람들이 우리가 선조들을 어리석다고 대하는 태도보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관용으로 이해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상징은 아스트랄체에 영향을 주는 최상의 수단입니다. 해방된 아스트랄체를 단련할 시기가 올 때까지 관념화, 심상을 성장시켜야합니다. 이렇게 해야 겨우 판단력을 발달시켜야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현대 인간의 대다수가 슬프게도 혼적 삶이 기형적인 것은 대체 왜일까요? 현대인은 너무 어릴 때부터 ‘예’, ‘아니오’라고 말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 아이는 위대한 인물이나 자연의 위대한 모습을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14~21세 사이에 겨우 판단력이 성숙해집니다. 올바른 교육은 말만 많은(지껄여대기만 하는) 작가의 수를 줄이게 될 것입니다. 문학지향이라고는 하나 미숙한 사람들에게 미숙한 판단력을 형성시킨 결과가 현대의 공허한 유물주의입니다. 이 베일을 뒤집어쓴 유물주의는 과학적 유물주의보다 훨씬 낮은 성질의 나쁜 것입니다.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혼이 순수하게 경험한 것에 의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그 무게를 가집니다. 인간은 판단을 형성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견이 천차만별로 균열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탄생하는 것은 겨우 21세가 되고나서이며 이 이후 처음으로 개인이 정확히 세계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정한 자립된 존재로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략 21에서 28세까지 감각혼의 발달이 일어나고 그다음 7년마다 오성혼(悟性魂, 정신혼)과 의식혼(영적혼)의 발달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35세전의 어떠한 자아도 오컬티즘 분야에서 어떠한 것을 줄 지위도 아니고 어떠한 것에도 도달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는 오컬트적 법칙이 있습니다. 35세는 특별히 중요한 나이입니다. 단테를 떠올려보십시오. 단테가 영계를 환시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계산해보면 단테가 35세 때 비전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컬트전통이 살아남아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주기가 개인의 인생에도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강하고 있는 인간의 영적 힘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어디서 그것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기간이 적절한 발달을 위해 필요한지 알려져 있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나의 커다란 총체로 인간사회의 공동체는 이 통찰에 기초하여 형성되어야한다고 가르쳐야합니다. 신지학은 우리들에게 지혜가 행위로, 사회행위로, 그날그날의(하루하루의) 인생이 되어야한다고 가르쳐야합니다. 신지학의 가치는 그 가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추상적인 지혜로 있지 않고 점점 더 강력하게 손의 기술을 통해서 혼에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손으로 하는 일은 바로 그때 세계령(世界靈)의 물질적 표출, 영성의 물질적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제6강 인간 물질체의 형성과 변용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8일

GA109 

 

인간의 진화에 관한 어제 강의에 이어서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 진화와 관련된 문제를 고찰해봅시다. 재육화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장기간의 인간성 진화를 회상해봅시다.

 

현대인은 육체와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와 완전한 자립을 의미하는 자아 담당자의 집합체입니다. 육체와 에테르체보다 영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아와 아스트랄체가 가장 완벽한 인간요소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가장 경이적인 구성요소로 조성되어 있는 구조체인 육체가 가장 완벽한 요소입니다. 이 인간의 몸은 정말 훌륭하고 진실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육체보다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확실하지만 물질체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아스트랄체는 충동이나 욕망, 정열의 기쁨과 고통을 담당합니다. 어째서 육체가 가장 완벽한 것일까요? 인간의 육체 중 심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심장은 평생에 걸쳐 공격으로부터 그 기반을 지키는 대단히 훌륭한 구조물입니다. 물질체의 다른 기관 역시 똑같이 훌륭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기관들에는 분명히 지혜가 존재합니다. 아스트랄체는 심장을 향해 어떻게 작용할까요? 결코 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완벽(지혜)을 향한 욕구 때문에 아스트랄체는 즐거움이라는 수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아스트랄체는 끊임없이 육체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육체의 심장을 향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한편 심장은 계속해서 저항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육체의 구축과정은 다른 몸(아스트랄체, 에테르체)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에게 육체는 가장 오래된 요소이며 때문에 가장 완벽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진화한 존재들이 이미 육체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모든 물리적 물질적인 것은 영으로부터 진화해서 현재의 형태로 발달했습니다. 물질계 인간의 첫 시작은 육체의 확립이었습니다. 당시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 자아의 담당자의 기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혹성 또한 그렇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이미 다른 혹성으로 육화를 거듭해왔습니다. 첫 번째가 토성, 두 번째가 태양, 세 번째가 달(月)입니다. 여기서는 현재의 달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역주: 토성과 태양도 현재의 토성과 태양이 아님) 그것은 옛날 달의 잔재,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왜 달이 고대부터 ‘달’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듣게 될 것입니다. 과거 오컬티스트가 지은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사물이나 존재에게 부여된 이름은 반듯이 각각이 표출해야할 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지구의 바로 이전 혹성체현(육화)은 달이었습니다. 그 이전의 체현은 태양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태양이 아닙니다. 현재의 태양은 저 옛날 태양에 대한 기억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오컬트시각으로 뒤돌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우주천체는 바로 토성입니다. 이 것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이제 이 옛날 토성진화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먼저 우리는 오컬티스가 말하는 외부세계의 기본요소가 가진 특징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해야합니다. 고대 오컬티즘은 외부세계를 흙, 물, 공기, 불 또는 온기의 4원소(요소)로 식별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물리학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이 원소라고 부르는 것은 오컬티스트가 같은 말로 부르고 있던 것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활동상태’라고 하는 현대적 표현이 대충 ‘엘리멘트’와 같은 의미입니다.(‘엘리멘트‘라는 말은 현대적 표현으로 대충 ’활동상태‘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온도로 지상에서 고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컬티스트에게는 ‘흙’ 또는 ‘고체’로 불립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온도상태에서 수정의 결정은 오컬티스트에게 ‘흙’입니다. 액체 상태의 모든 것은 액체상태일 때의 금속을 포함하여 모두 오컬티스트에게는 ‘물’입니다. 기체상태의 모든 것은 ‘공기’입니다. 현재의 물리학자가 세 가지 ‘활동상태‘라고 부르는 것 중 하나로 간주하는 ’불‘은 오컬티스트에게 ’제4요소‘입니다. 불을 단순한 상태가 아닌 흙, 물, 공기와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보는 의견을 현대과학이 꺼림칙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옛날 토성위에서는 흙이나 물, 공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기 다시 말하면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우주공간에 의자를 갖다놓고 토성진화를 영시력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온기 감각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이것은 순수한 혼의 온기였습니다. 내적인 온기였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주된 상황 하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기구조를 위해 3개의 왕국을 필요로 합니다. 옛날 토성 당시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인간존재 총재가 온기만으로 조성되어진 형상이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인간의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인간으로부터 물질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 들이마시는 공기조차도, 생각까지도 모두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전체가 순환하는 혈액의 온기만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상상하고 현재의 혈액조직을 영상으로 떠올려보십시오. 토성위의 모든 인간은 그러한 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컬티스트에게 있어서 천체는 다름 아닌 영적존재들의 집합체입니다. 지구 또한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에 속해있는 존재들의 집합체입니다. 옛날 토성 사람들의 의식도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의식은 어두웠지만 포괄적이었습니다. 지상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현대의 명료한 낮 동안의 의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토성 위 인간의 의식은 둔하고 기묘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오늘날 인간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은 무의식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럼 식물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배후에 숨어있는 존재들을 무시하고 물질적 식물만을 생각해주십시오. 그 곳에는 보다 깊은 상태, 즉 꿈이 없는 잠이 명백히 존재합니다. 식물은 깊은 잠 상태에 빠진 존재입니다. 이제 보다 깊고 보다 어두운 잠 상태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깊은 트랜스(trance, 혼수상태) 상태입니다. 이것이 토성의식입니다. 현대에는 비정상적 상태인 이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뒤쳐진 의식을 가진 인간에게 발생하는 사례입니다. 18세까지 알코올을 한 방울도 마셔본 일이 없는 여자아이가 어떤 상황 하에서 적포도주를 비울 때까지 마시도록 유혹받았다고 합시다. 어떤 기관의 상황 때문에 이 일은 대단히 강력한 인상을 끼치고 그녀는 빈사상태에 빠졌습니다. 연필을 쥐게 해주면 그녀는 온갖 종류의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해 그것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녀는 기계와 같습니다. 생명도 없고 의식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아이가 그린 것을 오늘날의 혹성이나 우주구조에 대해 신지학의 저작물이 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녀가 쓴 것이 확실히 기묘한 우주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오컬트우주론과 일치하고 있음을 눈치 챌 것입니다. 그 아이는 통상적인 잠보다 깊은 의식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개아(個我)는 그 둔한 의식 속에서 지구를 훨씬 뛰어넘는 먼 곳까지 이동하여 우주적 사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컬티스트는 이러한 의식상태, 즉 적절한 자아가 없는 둔하고 포괄적인 의식상태가 물질적 암석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암석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소녀가 한 것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이 의식은 둔하지만 광대한 영역을 포괄합니다. 옛날 토성위의 인간의식은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토성자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실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토성은 그 내부에 전우주의 거울상을 포함하고 있고 전 우주의 모습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술하고 표현하려고 한다면 위의 예처럼 표현할 수 있는 저차의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른 문제를 고려해야만합니다. 토성은 인간이 최초의 물질체 기원을 형성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도 진화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오늘날 그 위계가 인간보다 훨씬 높은 존재들이 진화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이집트의 현자가 어느 그리스인에게 했던 말을 인용해서 이것을 밝혀보겠습니다. “그대들 그리스인은 영원히 아이 같은 어른으로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비의의 가장 심오한 비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신들도 오래전에는 바로 인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들은(신들은) 물질적 존재가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옛날 토성에서 인간은 일종의 광물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식도 광물의 의식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보다 아득히 높은 단계에 있는 존재들은 인간의 몸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르콘(archon), 최초의 시작, ‘인격의 영’입니다. 그들은 고대토성에서 그들의 ‘인간‘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인간기(人間期)를 경험하기 위해, 즉 자아의식을 획득하기위해 단순히 당시의 ’물질‘체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성한 존재들은 토성에서 자아의식을 획득하고 자신의 거주지를 대체할 매개체로 인간의 몸을 이용했습니다. 어떤 존재들이 인간의 물질체에 그들의 독특한 특징을 침투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두 번의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우선 자아의 담당자가 인간 안에서 하나뿐인 토대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당시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나오는) 형태를 전해준 것이 이들 ’인격의 영‘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들은 인간이 이기심을 발달시키는 것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격령의 영향을 통해서 인간의 몸은 자유로운 개성으로 발달하는 씨앗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기심, 에고이즘을 키우는 능력도 받았습니다. 이것과 연관된 모든 과정을 설명하려한다면 한번의 강의, 한번의 연속강의도 아닌 몇 년 동안을 계속 설명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가지 단계만을 연구해보겠습니다. 토성진화기의 7단계를 각각 고찰해봅시다.

 

제1단계는 아직 물질적 온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직 준비되고 있는 단계로 생각해야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순수하게 혼적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혼의 온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토성진화 중기가 되자 처음으로 물질적 인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 온기의 실질로 만들어진 물질적 인체가 생겨났습니다. 토성진화기 종반부에는 이 온기의 인체가 용해됩니다. 토성진화기에는 3번의 예비단계와 물질적 온기의 단계, 그리고 3번의 하강단계 이렇게 7단계가 존재합니다. 이 7단계는 각각 또다시 7단계의 부차적 분할을 가지지만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진화의 연구단계에서 돌아볼 예정입니다. 현대 신지학문헌에서 이 단계들은 회(回)와 주(周)로 불립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인체를 형성한 실질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신성한 영적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흘러넘치게 하여 인간 물질체의 실질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존재가 ‘의지의 영(좌천사座天使, Thtonse)’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흘려보내는 희생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토성에서는 인체에 실질을 부여하는 의지의 영, 토성에서 인간기를 살고 있는 인격의 영, 그리고 물질적 씨앗으로 존재하는 인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성진화는 시작과 절정,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뒤 혹성전체가 프라라야(Plalaya,휴식기)를 통과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식물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식물은 종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붕괴되어 새로운 존재로 형태를 운반합니다. 최초의 식물과 두 번째 식물 사이의 휴식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혹성에도 바로 이와 같은 상태가 존재합니다. 이 상태를 ‘세계의 잠’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계의 잠’ 뒤에 변용된 토성이 다시 나타나는데 이것이 옛날 태양입니다. 토성과 태양 사이의 차이점은 태양이 토성의 온기의 실질을 가스 상태까지 농축화 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태양은 온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공기 또한 진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고대 태양에는 온기와 공기 그리고 빛도 존재했습니다. 토성이 어두운 온기로 되어 있는 반면에 제2의 혹성 옛날태양은 빛(불타는 가스)과 온기의 에테르, 그리고 공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토성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한 물질적 존재의 기반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옛날 태양에 새로운 것이 덧붙여집니다. 에테르체가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 이 실질(인간의 물질적 실질)에 흘러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식물상태에 도달한 제2의 혹성상태입니다. 이제는 인간 안에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테르체의 통합으로 인해 인간의 물질체도 변화합니다. 그것은 토성기의 알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 자신 안에 편입됩니다. 그것은 이제 빛의 형태가 쇠약해져 여기저기 잘록해진 흔들리는 온기를 가진 알이 됩니다. 에테르체는 이제 물질체에 작용하여 공을 들여 완성해갑니다.

 

토성에서는 ‘의지의 영’이 스스로 물질체의 실질을 흘려보냈습니다만 태양기에서 위대한 희생을 통해서 실질을 흘려보내는 존재는 또 다른 존재입니다. 이 존재들은 ‘지혜의 영(主天使, Dominions 또는 Kyriotetes)입니다. 이들보다 힘든 희생을 수행한 존재는 ’의지의 영‘이였습니다. 만약 ’의지의 영‘이 인간의 기반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지혜의 영‘이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태양기에도 ‘인간’단계를 통과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대천사들, 즉 ‘불의 영’들입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아케인젤리스(Archangelis)로 불립니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 살면서 대리자로서 행동하면서 이렇게 하여 자신의 자아의식을 육성했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을 말하겠습니다. 만약 토성이 프라라야 뒤에 직접 태양으로 출현했다면 인간들의 몸은 에테르체를 자신의 내부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혹성 옛날태양에서 처음에는 짧은 토성기의 반복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관여하고 있던 존재들은 다시 과거의 옛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 어떤 종류의 존재를 태양위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어떤 개성적인 영들은 토성에서 인간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토성에서 자아의식을 획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옛날태양에서 이것을 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성기의 동료들과 같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옛날태양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껍데기 안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즉 에테르체가 침투하지 않은 광물체 안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옛날 태양에서 물질체만으로 만들어진 구조가 탄생했습니다. 이렇게 보다 저급한 구조가 물질체와 에테르체로 되어있는 구조와 나란히 존재했습니다. 전자가 현재 동물의 선조입니다. 고대태양에는 이렇게 2개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인간계와 태양기에서 토성기진화 상태에 있는 존재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동물계를 구성합니다. 태양기에는 이렇게 3개의 예비적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인간계와 동물계입니다. 후자의 계승자가 현재의 고등동물입니다.

 

옛날 태양은 이제 또다시 일종의 ‘우주의 밤’으로 이행합니다. 다시 제3의 변용을 통해 과거의 달로 태어납니다. 월기 처음에는 과거의 단계를 반복하고 여기에 이제 액체 또는 물의 실질이 더해집니다. 태양의 분리가 발생했을 때 온기와 빛은 태양과 함께 밖으로 나갑니다. 신성한 존재들도 미세한 본질과 함께 외부로 나가버립니다. 액체, 즉 ‘물상태’가 된 것은 달로 태어나고 더욱 농축화되어 일종의 제2의 혹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월기에는 당시 온기와 빛과 물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태양기처럼 에테르체 즉 빛의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월기에 추가된 새로운 요소는 소리 또는 진동(울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분말로 덮인 금속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판을 바이올린 활로 켭니다. 분말은 분명한 형태를 형성합니다. 물리학자가 말하는 음향도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소리 또는 진동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진동의 물질적 형태입니다. 월기의 ‘물’은 진동이 침투되어 있었습니다. 진동에 의해서 규칙적 운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월기의 존재는 이 규칙적 운동을 통해 물질체내에서 내적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관이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간이 형태를 가졌다가 다시 사라졌습니다. 이 과정은 기관의 형성과 사멸의 과정이며 도형(형상)과 리듬의 경험이었습니다. 존재하는 몸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내부에 아스트랄실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마칩니다. 물상태의 실질 안에서 일어난 원초적인 소리의 충격은 성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은 계측과 수와 중량으로 온갖 것들의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 그러므로 월기 진화의 본질적 새로운 특징은 물질적 실질에 밀려들어온 내적 진동과정입니다. 여러분은 월기를 규칙적이고 수학적 리듬, 즉 다양화되는 내적 진동이 침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합니다. 오래전 토성기에서 인체를 구축하고 있던 것은 온기라는 조성물이었습니다. 이후 태양기에서는 공기와 같은 조성물이었습니다. 하늘의 환상,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신기루)와 같이 나타난 공기상태의 조성물이었습니다. 월기에서 실질은 물입니다. 내적 진동에 의해 운동 상태에 있는 물입니다. 내적 변용과정에 관여하는 유기적 조직은 이 진동에 의해 만들어져 인체를 빛으로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상태를 생성과 사멸이라는 잠깐 사이의 과정으로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간이나 폐가 인간 안에서 형성되었다가 용해되었습니다. 이것이 월기의 상태입니다. 성서에 표현된 “신은 계측과 수와 중량으로 온갖 것들의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내적 진동입니다. 월기 내부에 우선 처음에는 인간의 과거 구조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물질체와 에테르체가 또다시 생성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토성과 태양체현의 반복이 월기에서 먼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겨우 진정한 달이 태어났습니다. 이제 달은 물상태의 실질을 포함하는 한편 내적 진동을 파생시킨 원초적 진동에 의해 침투된 물질적 인체와 에테르체 안에 ‘운동의 영(權’天使, Principalities)'이 인간의 아스트랄체를 쏟아 넣었습니다. 토성에서 ‘의지의 영’이, 태양에서 ‘지혜의 영’이 행한 것처럼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실질로부터 이제 인간의 아스트랄체를 흘려보냅니다. 이렇게 지구의 발달은 끊임없이 진행되며 그곳에 사는 인간도 역시 발달을 계속해나갑니다.

 

이와 같이 인간 물질체의 완성도는 토성, 태양, 달이라는 3번의 변용을 통해서 제3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이 물질체는 현재의 형태에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달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필요한 새로운 발달은 지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달의 실질 중 기본적 혼을 제외한 그 일부가 밖으로 나와 기본적 혼을 감쌌습니다. 우선 토성이 생성되고 그 다음에 태양, 3번째로 달이 생성되었습니다. 최상의 실질과 존재들은 기본적인 천체로 분리되었습니다. 지구기에도 이 천체들은 분리되며 혹성보다 높은 단계의 항성이 됩니다. 또 하나의 천체가 분리되었지만 혹성 상태로 남았었습니다. 오늘날의 태양은 과거에는 혹성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현재의 태양과 달,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 지구의 실질을 잡아서 거대한 용기에 모도 집어넣고 뒤섞을 수 있다면 거기서 고대 태양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만약 지구와 달을 뒤섞을 수 있다면 고대 달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지금의 태양은 혹성지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최상의 실질과 최상의 존재들은 지구로부터 나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농축된 물상태의 요소는 태양을 따라서 갔습니다. 농축된 물의 형태(姿形)는 고대 달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운반체(담당자, 수단)이었습니다. 인간은 분리되어 남겨진 활동장소를 선택했습니다. 항성인 태양은 혹성이 진화한 결과 탄생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의 3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단계로 진화한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발달이 뒤쳐진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기’를 통과한 존재는 천사였습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앙게로스(Angelis)로 인도에서는 ‘달의 아들(루나피트리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존재들의 의식은 오늘날 인간의 의식과 달랐습니다. 하지만 월기에는 또 다른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태양기에서 뒤쳐져 월기에서 ’인간‘단계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아크앙겔로스(대천사)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비로소 ’인격의 영’(즉 토성기의 인간)단계에 도달한 존재도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뒤쳐진 아크앙겔로스는 물질체와 에테르체만을 가진 인간의 몸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인간보다 하위의 영역이 되었고 지상에서 동물계로 이어진 왕국입니다. 이 왕국에 속하는 존재들은 현재 동물계가 가진 물질체의 선조입니다. 월기에서 물질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는 현재 식물계의 선조입니다. 이렇게 해서 월기에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가 존재했습니다. 토성기에는 인간계만이 존재했습니다. 태양기에는 인간계와 동물계가 존재했습니다. 광물계는 우주진화과정에서 생성된 가장 새로운 존재입니다. 인간, 인간계는 진화과정상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인간은 지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에서 인간은 이 3개의 몸에 제4의 요소, 자아의 담당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참고: 천사의 위계]

생명의아들 - 천사, 앙겔로이

불의령 - 대천사, 아크앙겔로이

인격령 - 권천사, 알햐이

형태령 - 능천사, 에크스시아, 파워즈

운동령 - 역천사, 듀나미스, 바츄즈, 마라킴

지혜령 - 주천사, 큐리오테테스, 도미니온즈

의지령 - 좌천사, 토로네

조화령 - 지천사, 케루빔

사랑령 - 치천사, 세라핌

 

 


제7강 레무리아기 이전의 지구진화단계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9일

GA109 

 

어제 강연에서 우리의 혹성진화에 대한 연구는 월기로 알려진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우리 혹성의 첫 번째 체현은 토성체현이며, 두 번째는 태양체현, 세 번째는 고월체현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모두가 여기까지 진보했다면 인간은 다른 존재들의 우주적 진화 템포를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혀진 지점까지 어제 강연에서 우리는 도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월체현 동안 일종의 분리가 어떤 시기에 발생했습니다. 우주공간 안에서 진화를 계속하고 있던 태양은 가장 섬세한 실질과 고차존재들과 함께 혹성체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혹성체 진보의 뒤쳐진 부분, 즉 고월자체는 현재의 지구와 달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채 일종의 구름상태의 천체로 남았습니다. 어떤 조건이 달의 농밀화 또는 경화(硬化)를 일으켰으며 똑같은 현상이 달에 사는 존재들에게도 발생했습니다.

 

태양이 분리되자 그 힘들은 외부로부터 달에 작용했습니다. 달에 존재하도록 남겨진 인간-동물-식물계는 이제 외부로부터 태양의 힘을 받았습니다. 분리 후 달에는 3개의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아직 광물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경화과정 후에 가장 낮은 차원의 왕국으로서 형성된 것은 일종의 광물-식물계였습니다. 그 특징이 식물적인 광물실질입니다. 또는 그 특징이 광물인 식물실질입니다. 이것이 달의 지면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고체이며 반액체 상태의 기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의 광물표면 위를 걸어 다닙니다. 월기에는 반고체, 반액체상태의 지면이었습니다. 일종의 식물-광물 토양이었습니다.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스폰지와 같은 식물상의 실질로 되어있는 덩어리를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 월기에 존재하는 가장 저차의 왕국에 대한 특징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반쯤 살아있는 왕국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의 지면은 비교적 조용한 상태입니다. 화산 활동은 일종의 내적 삶에 대한 회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월기에는 그런 상태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오컬티스트는 지진이나 화산활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식물기관이 성장하고 이윽고 죽어가는 것과 같이 바로 월기의 이 반쯤 살아있는 실질도 성장하고 죽어갔습니다. 고월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조직과 같았기 때문에 그 위에 살아있는 존재는 오늘날의 기생충처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월기의 식물은 광물실질로 되어있어 생멸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 특징은 식물적이기도 하고 광물적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암석과 비슷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각질 또는 목질 형태를 이룬 물체가 있었습니다. 고월 주위에 일종의 대기와 같이 반은 물 상태이며 반은 살아있는 실질로 되어있는 몇 개의 구름덩어리가 있었고 그 안에 반은 동물 반은 식물인 다음 단계 왕국의 존재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만약 나무를 부러뜨려 동물이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이 동물-식물계에 의해서 경험된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그러한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주 듣는 얘기지만 학교에도 진전이 없는 학생이 있듯이 진화과정 전체에서 정체되어버리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표출하는 형태와 함께 지체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지상 자체에도 지상의 진화를 따라서 충분한 진화를 이루지 못하는 달의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외적 표출로 월기의 생이었던 상태를 창조해야만 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고월의 식물은 오늘날과 같은 광물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혹성의 반쯤 살아있던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겨우살이’는 월기형태의 자손, 낙오자입니다. 겨우살이는 식물-토양에 뿌리를 뻗어야했습니다. 민족 신화에 이것을 지적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바르도르와 로키의 전설입니다. 로키는 월기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한편 바르도르는 지구와 태양의 진화에 내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존재였습니다. 전설이나 신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느 오컬트 조사 영역과 관계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시력의 열매는 외적 과학을 좀더 풍성하게 할 수 있으며,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외적 과학은 전설에서 민족적 공상을 훨씬 뛰어넘는 많은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영과학은 지성뿐만이 아닌 혼 전체로 조사하는 법을 사람에게 가르쳐야합니다.

 

월기에는 동물계와 인간계 사이에 제3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동물-인간계입니다. 이 동물-인간의 형태는 오늘날 유물주의적 과학이 상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어떤 특정한 중요 구성요소가 아직 실제로 내부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동물-인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잠을 자고 있을 때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남고 아스트랄체는 외부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말하면 잠자고 있는 동안 인간은 저차구성요소 중 반만을 가지고 물질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과거 우주적 의식단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영시는 이 상황이 월기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스트랄체는 결코 완전히 물질체와 에테르체 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잠보다 근본적이고 명확히 인간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월기의 인간 머리는 현재와 같이 자기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머리기관이었던 것의 잔재가 부드러운 상태로 오랫동안 열려있는 아기의 머리 끝부분에 있는 장소입니다. 월기의 인간 머리는 아직 열려있었습니다. 만약 이 부드러운 지역에서 수직으로 아래쪽으로 선을 그으면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 척추동물의 간뇌(間腦) 등면에 돌출해 있는 내분비선)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은 퇴화되어 위축되어 있지만 월기 체현에서는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를 아스트랄체와 연결시키는 일종의 감각 기관이었습니다. 섬세하고 빛을 내는 몸이었던 이 기관을 통해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다른 몸에 빛을 비추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수면 중의 의식도 깨어 활동하는 의식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외적 사물을 지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의식은 오늘날의 꿈의 의식과 비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송과선은 일종의 온기 기관으로 온기를 강력한 빛으로 가득 찬 광선으로 방사하고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이 움직이면 이 기관의 기능은 인간이 취해야할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월기의 인간의 지각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꿈의 영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직 눈으로 보거나 지각하는 사물도 없었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영상의 내적 고양과 진정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꿈의 영상은 그것의 허약한 그림자놀이에 불과합니다. 월기에서 인간이 하려고하는 모든 일은, 어떻게 해서 식량을 찾을까와 같은 일들은 외적 세계와 관련된 이러한 영상에 의해서 끊임없이 활성화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인도에 따라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위험을 경고하는 것도 이것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스트랄체는 물질체와 에테르체를 넘어서 멀리까지 퍼져있었습니다. 물질체의 형태만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내적 온기는 아직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는 온기는 실제로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월기에서 인간은 주위의 온기로부터 온기를 흡수하고는 또 방출했습니다. 오늘날 공기를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 것과 똑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온기기관을 통해서 그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온기를 흡수했을 때 반짝이는 빛을 내뿜었습니다. 온기를 내뱉으면 어두워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불을 호흡하는 드래곤으로 이 과정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불을 내뿜는 드래곤 위에 선 모습이나 드래곤과 싸우는 성죠지의 모습은 이러한 상황을 추억하는 영상인 것입니다. 월기의 불을 내뿜는 존재, 태고의 드래곤은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영상입니다. 그것은 극복해야할 어떤 단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컬트지식으로부터 획득된 사항을 설명한 것입니다. 곧 영과학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이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와 영상 안에 보존되어온 진리에 대한 완전히 다른 견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이 동물-인간형태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아스트랄체가 곧 지상에서 가능하게 될 정도로 깊이 물질체에 잠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월진화기에 물질계의 심연으로 하강을 원하지 않은 존재가 이제 지구기에 물질계로 하강하려는 결심을 했다고. 하지만 만약 우주의 이 과정이 좀더 앞서 발생했다면 인간은 훨씬 저차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지구진화기에 영성의 도움으로 인간은 자신을 위해 현재 자신의 것인 고귀한 신과 닮은 모습을 획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모습을 발달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고월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면 아스트랄체의 하강은 미숙한 채로 발생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지도자들은 반듯이 올바른 때를 선택해왔습니다. 고월진화의 본질적인 업적은 물질체 진화를 위한 때가 남겨졌다는 것입니다. 고월에서 저차의 단계에 물질적 진화를 달성한 후 지상에서 인간의 물질체는 아스트랄체에 침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지금까지 분리되어있던 태양에 달이 합체합니다. 고월은 다시 태양에 흡수되고 모든 것은 우주의 잠, 프라라야로 이행합니다. 이것은 달이 태양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고월진화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치며 진행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준비기간. 두 번째 태양과 달의 분리. 세 번째 고월상 3개의 왕국 형성. 네 번째 고월의 태양으로 귀환. 다섯 번째 쇠퇴. 여섯 번째 우주의 잠.

 

우리 지구의 네 번째 변용, 즉 우리 자신의 혹성이 이윽고 우주의 잠으로부터 태어납니다. 지구의 초기 모습은 물론 현재의 형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밤에서 등장했을 때, 황혼의 어두움으로부터 등장했을 때 지구의 규모는 거대했습니다. 그 안에 태양과 달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리는 나중에 발생했습니다. 지구의 규모가 매우 거대했기 때문에 오늘날 토성까지 이르렀습니다. 태양계의 분화는 훨씬 뒤에야 일어납니다. 철학적 사고가 가능한 범위에서 칸트-라플라스이론(역주 -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I.칸트가 1755년에 제창하였고, 약 40년 후에 P.S.라플라스가 《세계계도설(世界系圖說)》(1796)에서 전개한 태양계기원설)은 우리 지구의 이 최초 형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연구입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태양계의 모든 것이 탄생한 일종의 원형적 구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름의 회전에 의해 고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것들이 회전운동의 결과로 농축화되어 혹성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종종 이 과정을 실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같은 밀도의 액체에 기름방울을 넣고 간단한 기계도구로 회전시킵니다. 이 기름방울은 평평해지고 작은 입자로 분리되어 중앙의 기름방울 주위를 도는 기름방울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일종의 혹성계가 회전에 의해 탄생하는 과정의 축소판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암시적 영향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 과정을 이렇게 그려서는 안 될까요? 이 실험은 회전에 의해 혹성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그 형성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중 한사람이 또는 선생이 실제 회전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적인 예증으로는 어떠한 진실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우주도 무로부터 탄생하지 않습니다. 구름으로부터 우주조직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많은 영적 존재들이 그것에 작용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진화 중 어느 시점에서 혼돈된 근원실질로부터 가장 미세한 실질을 끌어내 조잡한 실질, 즉 달을 방출한 것입니다.

 

프라라야 후 초기에 지구는 다시 모든 실질과 존재들을 연결 지은(붙들어 맨) 상태로 토성상태를 반복했습니다. 이 진화 초기의 지구는 종종 기체의 구로 잘못된 가정되지만 실제는 온기의 구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는 토성체현상태를 반복하고 있었고 현재의 토성영역까지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단계에서 그 단계에 관계하는 영적 존재들이 그 실질을 가지고 갑니다. 태양이 분리 될 때도, 고월진화기에도 영이 모든 것의 기반입니다. 외적요소는 여기서는 어떠한 책임이 없습니다. 일부의 존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내적 필요성이었습니다. 고차 존재들은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혼돈된 실질로부터 분리했습니다. 모든 곳의 외적 실재를 지배하는 것은 영성입니다. 최초로 지구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영적 존재들은 다른 진화단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연구 시에도 이점을 염두에 둡시다.

 

이렇게 해서 프라라야 뒤 처음에 지구는 토성상태를 반복했습니다. 그것은 온기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온기의 구는 기체상태로 응축되고 어느 시점에 도달하자 비로소 액체요소를 형성하여 고월상태를 반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의 지구상에서는 과거 월기에서 발생했던 일 반복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에서 분리되고 지구 + 달이 하나의 독립된 천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지구와 달의 실질과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시기까지는 지구와 달, 태양이 하나로 통합된 총체였습니다. 지구 +달은 인간이 더 이상 태양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탈된 것입니다. 만약 태양이 지구 안에 머물고 있었다면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늙어버렸을 것입니다. 우주의 존재들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진화단계에 있습니다. 제4기, 즉 지구기 진화 중 가장 중요한 특징에 관하여 말해두겠습니다. 보다 성숙한 존재들조차도 여러 수준의 단계에 속해있습니다. 태양의 급속한 템포나 지구의 느린 템포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태양과 지구, 달이 아직 합체되어 있을 때, 즉 분리이전에 이미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활동을 위해 스스로 자신들의 지배에 적합한 특별한 영역을 창조했습니다. 외혹성, 토성, 목성, 화성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토성체현을 반복할 때 우라노스, 발칸, 토성이 지구로부터 이탈했습니다. 태양체현을 반복 할 때는 목성과 화성이 분리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난 후에 수성과 금성이 지구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태양의 분리 후에 지구는 달을 방출했습니다. 고월의 분산과 붕괴는 태양전체를 밖으로 끌어낸 진보된 존재들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한편 정상적인 존재들과 뒤쳐진 존재들은 그 주위를 그 주위를 도는 달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 밀의에서 이러한 사건을 하늘의 전쟁으로 불렀습니다. 이탈한 소혹성대가 바로 전장의 유적입니다. 악의 기원에 대한 근원적 비밀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합니다.

 

관여하고 있던 혹성령들은 태양이 지구로부터 이탈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활동에 적절한 토양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진화는 다양한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혹성의 공간적 위치와 운동 상태는 모두 이러한 존재들의 활동에 대한 표현이며 결과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혹성에 사는 영적 존재들의 진화단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전에 가능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태양을 따라 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존재들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습니다. 단 태양이 스스로 지구로부터 이탈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 사건 후에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인간보다 훨씬 높은 진화단계에 있습니다.  금성과 수성이 바로 태양이 지구로부터 분리된 후에 태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우리 태양계의 내행성을 형성한 두 천체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이탈 후 어렵고 음울한 시대가 지구에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어둡고 심각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달과 함께 매어있는 동안 지구는 자신 안에 진화를 늦추게 하는 힘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방해하는 것이 달에서 주로 활동하는 힘들의 특징입니다. 이 시기에 이러한 방해하는 힘들이 지구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이러한 힘들과 관계한 채로 있었다면 생명은 올바른 템포로 자신의 경로를 따라가지 못하고 인간은 미이라가 되는 단계까지 고체화 되었을 것입니다. 지구는 기지(基地) 그자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기지에는 미이라화된 인간상이 늘어서있는 것입니다. 번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났을 때 생명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는 극심한 절망과 고체화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이미 인간의 물질체가 그 영적요소에 의해 내버려지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물질체가 죽음과 더불어 그 영적요소로부터 버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과거 시대에 이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 혼적 존재의 이탈과 출현이 발생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육화가 일어나는 것과 바로 같습니다. 하지만 달과 지구가 아직 합체하고 있던 시기에 혼적 영적 존재가 다시 인체를 찾으려 원해도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혼적 영적 존재들을 수용하기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물질적 실질의 성질로 인해 이들의 몸이 황폐해졌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혼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몸들은 너무 황폐해서 이용할 수 없다. 진보할 아무런 가능성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예로써 하는 말이지만 알코올중독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다음 세대가 서서히 황폐해지고 하강하는 혼들이 몸을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것이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당시 지구 상황입니다. 이것은 달이 떠나기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아래에서 살수 있게 될 모든 존재가 때때로 고체화되고 각질화되고 시들고 미이라화되었습니다. 혼은 지상에서 자신의 진화를 위해 살게 될 몸을 덧없이 기다려야하는 시대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존재들은 당시 인간으로서 물질영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들은 태양으로부터 분리된  다른 천체로 즉 금성이나 목성, 화성으로 갔습니다. 정상적이었다면 지상에서 육화했을 이러한 존재 대다수가 스스로 화성, 목성, 금성, 토성 존재들의 보호아래 들어간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천체로 올라가 살았습니다. 가장 강한 혼들만이 완고하고 무지한 몸을 다루어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잘 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다시 지구에 돌아온 것은 최상의 혼 실질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완고하고 무지한 몸을 지배하는 그 힘이 가장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하에서 진화는 기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태양계에 속하는 가장 높은 존재들은 이제 새로운 수순을 취했습니다.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실질을 지구로부터 끌어내 분리시켰습니다. 달의 분리가 일어났습니다. 이 결과 후에 남겨진 힘들은 더 이상 그 진화를 억압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이 되서야 이 달이 오늘날과 같은 달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의 진화가 그 단계에 적합한 템포를 찾아낼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태양과 달의 두 힘들은 이제 외부로부터 지구에 작용하여 밸런스를 유지하게 됩니다. 지금 말한 시대는 오컬티즘에서 레무리아시대, 지구의 물질적 육화과정 중 달의 분리시대로 부릅니다. 태양이 지구를 떠난 시대는 휴펠볼리아(?)시대로 부르고 태양과 달, 지구가 아직 하나였던 시대는 극지시대(極地時代)라고 부른다.

 

태양이 지구로부터 분리되고 달이 처음에는 지구에 경화프로세스를 만들고 이어서 지구를 떠난 그 시대 전체에 걸쳐 신성한 존재들이 분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중 가장 중요한 종자(從者)는 형태령입니다. 그리스도교 비교에서는 능천사(能天使), 또는 계시의 영, 역천사(力天使)로 불리고 있습니다.

 

토성기에서 자신의 실질로부터 인간 물질체의 재료를 흘려보내는 희생을 한 존재는 좌천사(座天使), 의지령들이었습니다. 태양기에서 에테르체의 실질을 부여한 것은 주천사(主天使), 지혜령이었습니다. 월기에서 아스트랄체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운동령, 권천사(權天使)였습니다. 지구에서 형태령, 능천사는 자아를 침투시켜 이 진화단계에서 자아가 서서히 지금까지 생성된 것, 즉 인간의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형태령의 활동입니다. 자아-인간이 자아의식의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데는,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의 조화가 탄생하는 데는 지금 말한 모든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구에서 태양과 달이 분리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고체화 작용을 받고 이어서 어떤 종류의 연화(軟化)를 경험하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건을 지도하고 지배하는 현명한 존재들이 진화를 위해 시련의 수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진구진화과정 중 많은 부분이 시련의 수단으로써 해당하는 신성한 존재들에 의해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지학운동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인간의 물질체 안에 살면서 오늘날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은 단계에 도달한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지고의 존재들이 19세기의 제3기 이후부터 일부 지혜를 유출시켰기 때문입니다. 고차 영역에서 우리의 문화로 유입되는 이 살아있는 지혜야말로 인지학운동의 실제적 기반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인간성에 의해 무시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들을 수 없게 된 귀가 있다하더라도 인간들이 지혜를 발아들일 준비가 끝날 때까지 노력해야한다고 스승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오컬티즘에서 이것은 인간의 성숙을 위한 시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차 존재들로부터 인간성에 지혜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그 지혜를 받아들일까하는 것입니다. 시련의 성공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시련은 이미 몇 번 존재했었습니다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성이 이 시련으로 성숙해짐을 이해하는 것은 한정적이었습니다. 수용할 수 있는 혼과 마음을 반듯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자아가 깊이 스며들 필요가 있을 때 그 시련은 과거에는 아스트랄체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자아를 서서히 침투시키는 시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정할 필요가 생겨 그 조정은 달의 분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아, 그리스도원리의 주입이 처음으로 성취된 것은 레무리아시대 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 이것과 관계하고 있었습니다. 달이 분리하는 동안 그리고 그 뒤에 지구는 거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오염되어 혼을 위한 주거지를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이러한 우주적 사건은 전설이나 무용담(saga)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오컬트탐사는 그 진정한 기원을 드러내고 달의 분리가 발생하는 동안 지구가 무인화되었을 때 많은 혼들은 우주공간을 향해 적합한 육화를 찾아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지구를 떠나 다른 혹성에서 몸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달이 결국 떨어져 나갔을 때 지구는 다시 적절한 몸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레무리아후기와 그 이후 아틀란티스시대에 여러 혹성으로 흩어졌던 혼들이 다시 지구상에 나타나 그곳에서 몸을 가지고 육화했습니다. 이제 인간집단이 지상에 형성되었습니다. 집단에 의해서 목성, 화성, 금성, 토성의 육화로부터 온 혼에 몸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혼들은 자신에게 적합한 몸을 찾아냈습니다. 이 혼의 집단이 ‘민족’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민족과 천체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해서 토성인, 목성인 등에 대해 말할 수 잇게 된 것입니다. 민족개념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정당성을 얻은 것입니다.

 

월기에서도 그리고 아직 달을 끌어안고 있던 지구에서도 다양한 진화단계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레무리아시대까지 지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달의 이탈 때문에 인간성 분화가 발생했습니다. 그로인해 민족개념이 발생하고 그 이후 어떤 종류의 의미를, 어떤 종류의 의미심장함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은 태어나고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입니다. 민족형성 시대는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를 포함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에는 민족이 남긴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8강 지구진화단계 : 레무리아, 아틀란티스, 후아틀란티스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0일

GA109 

 

어제 강연에서는 지구진화 중 레무리아기에 이르는 단계까지를 주제로 설명했습니다. 이 레무리아시대에는 위대한 우주적 현상, 즉 지구실질에서 달을 방출시키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간이 진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올바른 템포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지구는 형태와 온도가 지금의 지구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현대인은 거기서 살수 없을 것입니다. 서서히 지구는 농밀화되고 고체실질이 형성되었습니다. 어제 강연에서 몸이 ‘고체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은 물질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도(强度)와 질(質)에 관련된 의미로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 어떤 실질이 용해되어 있었습니다. 지구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였고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의 물질적 감각으로 단단하고 농밀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도와 질하고만 관계된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은 인간을 미이라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힘들입니다. 지구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로부터 섬과 비슷한 형태가 나타났고 그곳에 사는 존재들은 현재의 동물이나 식물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레무리아시대 전반기 동안 인간 자체는 지구상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상 높은 곳에서 섬세하고 희박한(저밀도의) 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조성은 지금보다 훨씬 영적이었습니다. 레무리아 초기 인간은 아직 후시대와 같은 몸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보다 고체화된 양분을 섭취하지도 못했습니다. 실제로 레무리아기가 끝날 무렵이 되도 오늘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뼈와 같은 가장 농밀화된 형태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당시 인간이 가진 물질체의 실질은 아직 유연한 젤라틴 상태로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실질과 외적으로 거의 식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구로 너무 빨리 하강한 혼들은 이런 종류의 가장 농밀한 실질을 몸속에 받아들였고 그 결과 지상에 살게 된 사람들의 조성은 비영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여전히 지구상공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레무리아기에 비로소 미세한 재와 불-액체상의 금속덩어리가 만들어져 최초의 광물계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덩어리는 섬을 형성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해 보았습니다만 서서히 농밀화되는 과정이 영시력으로 이와 같이 나타납니다. 이 덩어리로부터 식물계가 출현하고 그 뒤에 동물계가 출현합니다. 물질계가 어떻게 농밀화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곁길로 빠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될  존재는 지구상공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좀더 에테르적이었던 이 영역 안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보다 섬세한 몸을 발달시켰습니다. 인간의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는 아직 물질체와 강한 관련성을 가지지 못한 채로 좀더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농밀화되는 물질체의 고체화와 더불어 물질체에 대한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연관성도 좀더 밀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인간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습니다. 만양 그러한 영향이 없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랜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적자립이 없는 존재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고차의 영적 존재들이 가진 힘들에 의해 휩쓸려 다니는 수동적 존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존재의 힘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이 존재들 중 주로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진화과정에 뒤쳐져있었습니다. 이들이 루시퍼적 존재입니다. 그들이 바로 선하고 정상적인 진화를 이룬 영적존재들이 바라던 것보다 빨리 인간을 물질영역으로 끌어내린 존재입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원래 월기에서 그 사명을 완료했어야할 존재입니다. 그 당시 그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만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스트랄체가 월기의 인간이 가진 최고의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쳐진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은 월기에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아에 영향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월기에서 그들은 자아존재에 대해 몰랐기 때문입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결국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했지만 그 동안 인간 자신도 진보하여 자아를 받아들였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아직 자아에 작용하지 못했지만 고차존재는 그것이 가능했으며 아스트랄체에도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단 자아를 통해서, 자아를 경우해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고자존재는 아스트랄체에 집적 작용할 예정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월기에 이미 성취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고차존재들만이 자아를 통해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작용하여 아스트랄체를 정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레무리아시대에 루시퍼적 존재가 온갖 방향에서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직접 작용하여 그 결과 아스트랄체는 월기에서 완료되었어야할 모든 영향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안에 충동, 욕망, 정열이 들어앉게 되었습니다. 고차존재만이 작용했다면 충동, 욕망, 정열은 인간의 숙명(운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들은 이러한 영향이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시퍼의 영향은 인간에게 2중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 번째 영향으로 이것저것을 하려는 열광의 불, 일종의 정열의 불이 인간 안에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열은 인간의 자아의 인도를 받는 정열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안에서 활동하는 고차존재들의 영향을 받은 정열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루시퍼의 영향은 인간이 고차존재로부터 벗어나서 악을 행하는,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가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주성, 영광, 자유는 루시퍼적 존재의 혜택이지만 악을 행하는 가능성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는 인간의 아스트랄체에 스스로를 침투시켰습니다. 기본적인 상황은 오늘날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들이 바로 한쪽에선 자유를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루시퍼적 존재에 의해 침투된 결과 인간은 미숙한 상태로 지구상공에서 지구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루시퍼적 존재에게 본질적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타락하고 미숙한 상태로 농밀화된 원인이 루시퍼적 존재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상공에서 좀더 오랜 기간 머물러있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 영역을 낙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신들의 영향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지구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액체상태로 대륙이 형성되고 있는 지구로 인간이 너무 빠르게 루시퍼적 존재에 이끌려 내려간 것입니다.  당시 인간의 아스트랄체는 여전히 자기주변의 환경에 지금보다 대단히 큰 영향력과 대단히 큰 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아직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은 사악한 인간이라도 자연에 특별한 위해를 주지 못합니다. 단지 악한 의지를 품는 것만으로는 자연에 어떤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원시 레무리아시대는 달랐습니다. 인간 혼의 사악한 욕망은 자연 속에 눈에 보이는 마술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악한 욕망은 지구상공과 지구에 어떤 불의 힘을 끌어들였습니다. 사악한 욕망과 마술적 의지를 통해서 인간은 광포한 자연의 힘을 해방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것은 불가능하지만 당시는 사람들이 사악해지면 공중에 불이 번쩍였습니다.

 

많은 인간이 어리석음과 지나치게 루시퍼적 존재의 영향에 굴복하여 악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레무리아가 가진 불의 힘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렇게 해서 레무리아는 미쳐 날뛰는 불과  대다수 민족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구원받은 인간들은 서쪽으로 현재의 아프리카와 유럽, 아메리카 사이에 존재했던 대륙 아틀란티스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성 진화가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됩니다. 인간의 수는 서서히 증가하여 폐허의 시대동안(달의 분리 이전) 목성, 화성 등에 가있던 혼들이 이 대륙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민족이라고 하는 개념이 고대 아틀란티스에서 탄생했습니다. 오컬티즘에서는 이전에 화성, 목성, 금성 등에 있던 혼들이 살고 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아틀란티스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를 들어 화성인, 목성인과 같은 말로 불렸습니다. 이 때문에 몸의 외적 형태도 달랐습니다. 아틀란티스 전반기에 걸쳐 인간의 몸은 유연한 구성을 하고 있어 혼적 힘들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적 힘들도 본질적으로 오늘날보다 강력해서 서로 협력하여 물질체를 형성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아틀란티스인은 철도선로 같은 것도 쉽게 부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뼈 조직이 발달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물리적 힘이 아닌 마술적 마음의 힘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포 탄환 같은 것도 마음의 힘으로 튕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육체의 농밀화는 나중이 되서야 발달한 것입니다. 강력한 마음의 힘을 해방시켜 (이 상태에서는 물질체는 고차의 몸[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와 올바른 관련을 갖지 못하지만)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거나 던지거나할 수 있는 미친 사람에게서 당시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의 물질체는 아직 유연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용이하게 혼적 삶의 과정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 모습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틀란티스인이 멍청하다거나 관능적이었다면 그들은 물질 속에 함몰하여 거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좀더 현명한 인간들은 섬세한 조성을 발달시켜 그 모습이 작아졌습니다. 둔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거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인간의 외적 형태는 실질이 단단해진 지금보다 혼의 힘들로부터 훨씬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몸은 혼의 자질에 맞춰서 발달했습니다. 민족간의 커다란 차이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화나 전설에서 소인(小人)을 현명한 존재로, 거인을 멍청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심원한 오컬트 흐름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화성에서 혼이 지구로 하강했을 때 혼이 화성에서 가지고 있던 당시의 자질은 오랜 기간동안 혼과 혼이 거주하는 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실로 민족간의 차이와 민족적 특징을 해명할 수 있습니다.

 

루시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틀란티스 중기까지 인간성 진화가 진행되었다면 인간은 높은 영시력이 침투된 영상의식을 발달시켰을 것입니다. 이 힘을 통해서 혼 안에 외적 세계를 내적 영상으로 계시하는(드러내는) 무엇인가가 탄생했을 것입니다. 눈을 사용해서 외적 사물을 지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초기 단계에서 루시퍼의 영향을 받은 결과 잘못된 모습으로 물질계를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베일을 통해서 외부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신적 영적 존재들이 인간에게 부여하려했던 진화과정은 인간이 지신의 내적 세계를 영상으로 지각하는 몽롱한 영시의식 대신에 외부세계를 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갖 물질적 사물의 배후에 존재하는 영성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질계 배후에 존재하는 영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감자기란 말을 사용했지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이 과정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것이니까요. 인간은 각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내적 세계는 갑자기 사라지고 그 세계를 발생시키는 영성 의식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볼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것들의 원천이 되는 영성도 보았을 것입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인간을 너무 빨리 끌어내렸기 때문에 인간은 외부세계로부터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인간에게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물질을 통해서 세상의 근원이 되는 영적기반까지 통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 안으로 너무 빨리 하강했기 때문에 물질의 농도가 인간에게 너무 짙었고 물질에 침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틀란티스 중기이후에는 다른 뒤쳐진 영적 존재가 물질에 침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물질은 구름이 낀 것처럼 탁해져 인간은 더 이상 영성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리만적 , 메피스토텔레스적인 존재였습니다. 메피스토텔레스, 즉 아리만은 루시퍼와 다른 존재입니다. 진리에 반대하는 아리만을 짜라투스트라는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리만은 인간의 순수한 영성에 구름을 덮어 인간으로부터 영성을 숨겼습니다. 아리만은 루시퍼의 뒤를 쫓아 물질은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환상을 인간에게 주입했습니다. 신적-영적존재가 인간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원했던 그 진화기간 동안 인간은 2개의 다른 영향에 몸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내적 성질, 아스트랄체를 공격해 인간을 혼란에 빠지게 해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존재가  루시퍼. 외부에서 작용하면서 인간을 어느 정도 속여 외부세계를 인간에게 마야(maya), 즉 물질로 보이게 하는 존재가 아리만입니다. 우리는 루시퍼를 인간의 내부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이해해야합니다. 한편 아리만은 영성에 베일과 같은 물질을 펼쳐서 영계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들 두 영적 존재가 영성을 발달시키려는 인간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 아틀란티스대륙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은 주로 아리만의 영향이었습니다.

 

레무리아기에는 인간이 마술적 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면 불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인에게는 더 이상 불가능한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틀란티스인은 의지의 힘으로 깊은 비밀이 숨어있는 배아(胚芽)의 힘-공기와 물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서 제어하는 기차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인간이 석탄에 포함되어있는 힘들을 이용하는 방법, 이 힘을 구동력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은 인간이 석탄의 비생명적인 광물력을 제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틀란티스인은 종자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 그 자체를 제어한 것입니다. 대륙에 나무의 새싹을 트게 하는 생명력을 생각해 주십시오. 이 생명력을 아틀란티스인은 종자로부터 추출하여 이용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이 ‘바람의 배’를 보유한 창고에 오늘날 석탄을 준비하듯이 막대한 양의 종자가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종자로부터 축적된 힘을 사용하여 그들은 탈것을 구동시켰습니다. 영시자가 그 시대를 뒤돌아보면 이러한 탈것이 지상 가까운 어느 정도까지 농밀했던 공중을 떠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종의 조정 장치를 갖추고 상승하거나 이동했습니다. 아틀란티스인은 이러한 힘들을 제어했습니다. 지금은 식물의 힘-식물의 혼적 힘-이 공기와 물의 힘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고 그대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틀란티스인의 의지가 악으로 기울어 이러한 힘들을 자기중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자 그들은 공기와 물의 힘을 해방시켰고 그 결과 아틀란티스는 멸망했습니다. 대륙은 엘리멘트와 함께 인간을 통해서 탄생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리만의 영향이 서서히 강해져 그 결과 인간은 영성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의 배후에 인간은 광물요소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술적 힘은 점점 더 인간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틀란티스시대에 인간은 식물계의 힘을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레무리아시대에는 동물의 생식력을 제어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 레무리아인은 동물의 생식력을 응용하여 동물형태를 인간형태로 변태시키는 시점까지 도달했습니다. 생식력을 사용하여 인간이 행한 모든 마술적 행위가 불의 힘을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한 의지가 악으로 향하자 최악의 흑마술적인 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도 흑마술사가 인류에게서 멀어진 힘을 오용한다면 지상에 가장 사악한 힘이 해방되게 됩니다. 이러한 힘들은 강력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이 힘들은 그에 알맞은 지도자의 현명한 손으로 인류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가장 순수한 봉사에 사용될 힘입니다.

 

이제 서서히 인간은 자유로이 몸을 형성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골과 골격, 단단한 조성물이 주입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점점 비슷해졌습니다. 지금 말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틀란티스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연구자들이 고대 아틀란티스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태고의 인간진화 흔적을 발견하고 싶다는 학자들의 바람은 헛되게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간은 사지가 부드럽고 연약한 실질로 이루어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몸은 보존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연체동물인 문어의 흔적이 백년 정도 지나면 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동물의 화석이 지금도 발견되는 것은 동물 먼저 고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조성은 유연했습니다. 동물은 물질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빨랐습니다. 기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되는 것이 너무 빨랐던 초기 인간부터 가장 퇴화된 인간형태가 탄생했습니다. 가장 고도화된 인간은 지구상공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면서 유연한 상태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물과 같이 경화 단계에 머물러 버리게 하는 시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동물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에 경직화와 고체화의 단계에 머무른 것입니다.

 

진구진화 중 물의 힘이 해방되어 고대 아틀란티스가 멸망하는 시점까지 설명했습니다. 아틀란티스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중 한 무리는 아메리카로 다른 무리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이와 같은 대이동은 오핸 시대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대아틀란티스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초기 사람들은 강력한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힘으로 인간은 종자의 힘을 제어하여 자연의 힘을 지배하였으며 아직 어느 정도 영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시력은 서서히 퇴화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지상에 속하는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진정한 의미로 지상으로 하강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틀란티스말기에 사람들과 민족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었습니다. 우선 아틀란티스문화 절정기에 견자, 영시자, 마술적 힘을 사용하여 영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현재 인류의 모태가 되는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 안에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배아상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고대 아틀란티스인의 위업에 비견할 수는 없었지만 지성과 판단력을 준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초적 계산, 계량, 분석 등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지성의 배아를 발달시킨 사람들로 강력한 아리만적 영향으로 인해 마술을 오용하는 것이 이미 위험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티스의 마술사가 계속 사용했던 마술적 힘에 더 이상 손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경멸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그룹으로 집회를 갖는 오늘날 인지학회원이나 카타콤에 모였던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과 비슷했습니다.

 

아틀란티스에는 문화와 의례의 중심지 [center]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틀란티스 신탁이라고 부릅시다. 그곳에서 아틀란티스의 지혜를 축적하고 실천했습니다. 하강했던 혹성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인간의 혼적 차이에 맞추어 서로 다른 조성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신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성신탁, 목성신탁, 금성신탁 등과 같은 신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신탁은 어느 정도 수준의 현자들인 비의입문자가 화성민족, 목성민족 등 각각의 민족을 지도하는 성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탁들은 이들보다 훨씬 강력한 태양신탁의 지도하에 있었습니다. 이 태양신탁이 바로 다른 모든 신탁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밀의(密議)의 근본적인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화성인이 이 고차적 지도하에 있었지만 동시에 화성신탁의 비의입문자가 제자들과 함께 거쳐하는 센터의 지도하에도 있었습니다. 수성신탁이 모든 수성인을 인도하고 목성신탁이 목성인을 지도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이들 모든 신탁센터는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들의 권위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틀란티스의 가장 위대한 비의입문자인 태양신탁의 위대한 지도자는 앞서 설명한 고대아틀란티스의 일반인과 달랐던 인간무리(이방인)를 특별히 주시했습니다. 그들은 멸시받는 더 이상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비의입문자가 결집시켰던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원시적 형태이기는 하나 새로운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외에 없었습니다.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미래를 만들어나갈 소재(이방인)와 과거 습관에 대한 아집을 버린 옛 비의입문자나 마술사를 결집시켰습니다. 현재도 그와 유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아틀란티스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재 유행하는 문화형태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도 물질적인 것을 다루는 마술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위해 일하기 원하는 멸시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틀란티스에도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인 고대 마술사는 새로운 능력을 발달시킨 소수의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고대 아틀란티스에서 그러한 능력은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긍지 높은 현대문화의 기득권층은 인지학자들을 소수의 사람들이 변변치 못한 모임에서 온갖 종류의 어리석은 활동을 한다고 깔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입니다. 타인의 눈에는 무의미하게 비쳐질 능력을 자기 내부에서 육성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이들입니다. 아득히 먼 옛날 아틀란티스에서는 물질세계와의 관계성을 찾나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의 사명은 다시 영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고대의 비의입문자가 한 장소에 동료들을 모아서 소박하고 경멸받던 사람들에게 외쳤듯이 오늘날에도 이번에는 또 다른 상황 하에서 장소 같은 건 상관없이 인류에게 영적 지혜의 보물을 전해주는 위대한 지혜의 스승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울리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득히 먼 옛사람들이 했던 것과 같이 이 부름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부름에 대답했던 사람들은 원시적 계산능력을 내부에 가지고 있던 개아들이었습니다.

 

이 지혜는 신지학의 가르침(doctrine)을 이성으로 파악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도록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인간은 강해지고 왜 신지학이 오늘날 존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지학이 존재하는 것은 진화라는 위대한 도전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온갖 장애를 정복할 수 있는 강인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지학을 통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영성에 이르는 길을 가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반듯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는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습니다.

 

태양신탁의 그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소수의 인간들을 이끌고 아시아에 문화의 중심지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후 아틀란티스문화의 기초를 만들 수 있도록 인간들을 지도했습니다. 대이동이 일어나는 동안 아틀란티스에서 태어난 자들은 모두 뒤섞였습니다. 그러므로 후 아틀란티스문화기에 민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문명문화에 대해서만 말해야 됩니다.

 

후 아틀란티스문화기 문명의 흐름을 고찰해봅시다. 후 아틀란티스 제1문화기는 고대인도문화입니다. 아틀란티스 붕괴 후 많은 뒤섞인 인간무리가 아틀란티스로부터 벗어나 원시 인도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살게 된 인간들은 영계에 대한 가장 깊고 압도적인 동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계에서 태어나 이제는 영계를 잃어버렸다고 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는 7명의 성인(리시)를 보냈습니다. 고통에 찬 그리움으로 고대 인도인은 감각세계는 실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내려온 영계만이 유일하고 진실한 세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이 태초의 지혜에 대해서 설교하고 비밀의식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고대 인도인에게 있어서 물질계는 마야(Maya), 거대한 환상이었습니다. 후 아틀란티스 제2문화기, 고대페르시아 문화기에는 이미 이전과 다른 혼적인 자세가 우세했습니다. 이 훌륭한 세계는 완벽한 법칙에 따라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영이 침투할 가치가 있다고 서양적 사고와 물질계 연구로 깨닫게 됩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이해에 대한 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고대 페르시아인과 인도인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도인에게 주위의 모든 것은 마야, 즉 환상이었습니다. 영계만이 실재이며 귀의할 가치 있는 목표였습니다. 그 세계만이 고차의 자아에 의해 침투되었습니다. 이러한 혼의 자세는 물질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물질계의 지배가 처음 가능하게 된 것은 태양신탁의 위대한 비의입문자의 제자, 짜라투스트라가 창시한 문화에서였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외부세계가 마야가 아닌 신적-영적실재를 표출하고 있으며 외부세계의 배후에는 아리만이 인간으로부터 감춘 것이 있음을 알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세계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짜라투스트라의 목적은 물질계에서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르무즈드(Ormuzd)와 아리만의 빛과 어둠의 싸움이 나타났습니다.

제3기 이집트-칼데아-아시리아-바빌로니아 문화기에는 이미 인간은 물질계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펼쳐진 별의 위치를 들여다보고 인간에게 계시하는 신들의 행위와 지혜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칼데아의 제례에 나타난 훌륭한 별에 대한 지혜는 이러한 의도를 보여주는 머나먼 기억입니다.

 

제4기 그리스-로마문화기는 인간을 바로 물질영역까지 이끌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물질영역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원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영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것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저승의 왕보다 이승의 거지가 낫다”는 말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훌륭한 조각과 로마의 시민권은 제4문화기의 특징입니다. 제5문화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의 특징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은 유물주의와 백화점입니다.

 

요컨대 이러한 모든 문화의 목적은 물질영역이 서서히 인간의 지배 하에 놓이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문화에는 2가지의 기본적 흐름이 있습니다. 동양세계와 서양세계의 감정적 견해와 흐름이 현재 대치하고 있습니다. 동양세계는 물질영역을 마야, 즉 환상으로 부르고 사고, 행위, 감정 모두에 관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양 세계관의 기본적 목적은 이 물질계에 침투하여 그것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상황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세계는 각각 완전히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은 외적문화에 관여하여 이 방법으로 혼의 힘을 개발시키게 하고 동양은 자신의 길을 가게 하지만 양쪽은 정상에 만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도인은 내적 영적 삶을 영위하면서 외적 물질계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페르시아인은 물질에서 어떤 유한한 것이 있음을 보았지만 그래도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집트인은 영성과 그 법칙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칼데아인은 별들의 운동과 공간에서 신들의 법칙을 보고, 별의 지혜를 신적-영적존재들의 표출로 경외했습니다. 그리스인은 물질 그 자체에 자연이 창조한 것의 아름다움과 완벽한 이상을 새겨 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인이 만든 물질적 예술작품은 경탄해야할 영과 물질이 결합한 시대를 구체적으로 나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깊은 오컬트적 배경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수와 아름다움과 위용을 자랑하는 그리스건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실제로 신의 거처입니다. 이와 같은 건축 조각 작품과 다른 시대의 작품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신전은 순수한 형태로 건축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 선의 완성도는 최고의 것으로 다른 것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혼이 이러한 선에 침잠한다면-그것은 파에스툼의 신전유적에서도 아직 보입니다- 만약 혼이 도리아식 또는 이오니아식 신전을 깊이 생각하고 공간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혼은 이러한 선이 공간에서 어떻게 통합되어 있는지 지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흐름, 어떤 물결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신전은 반듯이 이러한 흐름이 통하는 길(이치)에 따라 물질적 실재 안에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인은 공간에 그가 실제로 그곳에서 찾아낸 것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본질적 비밀은 그 안에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앙 깊은 신자의 집회가 고딕성당의 통합부분인 것에 비해 그리스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총체입니다. 뾰족한 아치와 창을 가진 고딕성당은 신자 집단이 함께 존재해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손은 기도로 합쳐지고 성당 형태의 거울이(성당의 형태는 거울이) 되고 성당과 하나가 되어 총체를 이룹니다. 한편 정신성이 실제 그리스신전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존재가 하강하여 거처할 장소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걸출한 예술작품으로 대지를 숭배하는 방법을 매우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더 영계와의 관계성을 상실했습니다. 물질세계는 인간에게 있어서 광휘와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리스-로마시대에 죽음을 통과했을 때 인간에게 있어서 영계는 황폐하고 차갑고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후 아틀란티스기에 인간은 물질계를 정복했습니다만 영계에서는 비탄과 우울함이 인간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인류의 스승인 비의입문자들 조차도 위로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죽음과 탄생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계에서의 사건들을 얘기하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비탄에 잠겼습니다. 존재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이미 빼앗긴 물질세계를 계속 고집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골고다사건을 통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지하세계로 하강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옥순례’입니다. 더 이상 물질체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스도는 생(삶)이 죽음에 승리했다고 알렸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의해서 다시 혼들이 영계로 상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9강 인간의 사후경험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1일

GA109 

 

현재는 과거와 과거 사건을 조명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듯이 아득한 태고시대를 회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우리자신의 정신적 이상의 특징을 쉽게 발견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고대 아틀란티스의 붕괴 후 일어난 발전과 그 발전과 관련한 인간의 사후생에 대한 경험을 고찰해봅시다.

 

죽음과 탄생 사이에 혼이 경험하는 상황은 반듯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진화 과정과 함께 그것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고대 인도의 성인시대, 고대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문화시대, 이집트-칼데아문화기, 그리스-로마문화기, 그리고 현대문화기와 같은 대문화기에 인간은 물질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점점 더 물질에 대한 애착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시대마다 인간의 혼은 물질영역으로 점점 더 깊게 하강했습니다. 이 세계(물질영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후의 인간은 영계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로마기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물질계를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혼은 훌륭한 예술과 물질존재의 그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여 기쁨에 넘쳐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계는 로마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아 ‘나’의 발견으로 자신의 개성에 대한 감정이 충분히 발달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의 최대 특징은 로마시민권과 사법개념입니다. 로마인은 물리적 세계를 쾌적하게 느꼈습니다. 이 시대이후 권리개념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법개념이 로마시대에 시작되었다는 말은 옳습니다. 이것은 개개의 인격에 대한 외경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아킬레스의 “저승의 왕보다 이승의 거지가 낫다”는 말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후 영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혼이 경험하는 것에 관한 개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 혼이 지구영역에서 모든 능력을 완전히 꽃피울수록 사후 영계에서 자신의 행동을 찾아내는 능력은 점점 더 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혼은 자신이 방금 들어온 영역에서 고립을 느꼈습니다. 영의 나라(데바찬) 조차도 혼은 주위의 모든 것이 어둡고 공허하며 차갑게 느꼈습니다. 혼은 저쪽 세상의 영성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인 비의입문자들조차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저세상에서도 사람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들에게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면 혼들은 그토록 사랑했던 물질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더욱더 고통을 느꼈습니다. 스승들은 죽은 자에게 도움 되는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을 단 하나라도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모두 그저 부질없이 재육화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형제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영의 영역에서조차 버려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지상에서도 사랑과 우정이 점점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영역을 여행한 혼이 물질세계에 에고이즘을 가지고와서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인도기에 인간은 여전히 지상세계를 마야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진화과정과 더불어 상황은 변화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물질세계의 인간도 영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고지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빛을 동반한 태양은 그가 아후라마즈다, 위대한 오라라고 부른 신성한 영적존재의 외적 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길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목적은 이 존재가 지금은 아득한 저편에 존재하지만 언젠가 지상에 내려와 그 실질자체와 결합하여 인간성 진화를 더욱 발전시킬 것이라고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성은 물질적인 것, 사물로 보이는 모든 것에 존재하고 있다. 위대한 태양의 오라, 아후라마즈다가 물질적인 것에 침투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리만이 방황의 원흉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또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 속에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분은 너무도 위대하고 너무도 굳세고 믿음직스럽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기뻐하며 그분에게 나를, 나의 생명을, 내 감각적 에테르존재를, 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바칠 것이다.”

 

이 소원이 바로 위대한 짜라투스트라의 소원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저 위대한 태양령이 직접 지구에서, 지구적 존재들의 실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와 같이 짜라투스트라는 물질적인 것은 겉모양, 즉 정신성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짜라투스트라가 미리 만난 존재가 불타는 초목 가운데서, 또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태양존재를 ‘자아존재’, 인간에게 주입 될 최고차원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태양령의 일부가 하강한 곳은 인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자연과 외적요소 도처에 하강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이름으로 모세가 알린 신은 과거에 짜라투스트라가 아후라마즈다로 전한 그 신이었습니다. 가장 중심적인 핵심, 모든 존재의 근본적 기반으로 나타나는 신을 모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고의 존재로 가르쳤으며, 그 이름은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제의를 담당하는 사제가 가장 중요한 지성소에서만 발설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내부에 살면서 여러 요소(엘리멘트) 안에서만,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만 스스로를 계시하는 신, 이 신이 모세에 의해 알려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짜라투스트라를 여호와의 예언자로, 우리가 시대를 구분하는 처음에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3년간 살았던 그 존재의 예언자로 간주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짜라투스트라가 전한 신은 같은 신입니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다른 이름으로 구약성서가 앞서서 전한 같은 신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상의 현상들이 효력을 나타내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태양존재는 영계의 높은 곳에서 하강하여 요소(엘리멘트)를 통해서 시나이 산, 불타는 초목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계시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그는 점점 더 가까이 지구로 접근하여 요르단강 세례 때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지상에서 골고다의 성례가 일어나고 속죄양의 상처로부터 피가 흘렀을 때, 이것은 위대한 우주적 현상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의 현상들 중 가장 위대한 현상의 표출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구의 오라에 지구령으로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새로운 충동이 전해졌고 영시를 통해서 이것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피가 흘러든 순간) 지구의 오라는 변했고 특정한 색을 띄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색이 나타났고, 새로운 힘이 지구의 오라에 흘러들었습니다. 자아의 물질적 표현인 피가 골고다의 구세주의 상처에서 흐른 순간,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자아는 지구와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후의 혼이 경험하는 영계의 상황 또한 변화하는 그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옥하강(지옥순례)의 의미입니다.

 

골고다의 성례 이전에 살았던 영시자는 지구의 오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에서 죽음을 통과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살펴봅시다. 유대교 신비주의 입문자였던 사울은 ‘위대한 오라’, 아후라마즈다가 언젠가 지구와 결합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 존재가 말도 안 되게 굴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 위대한 영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지상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구의 오라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영,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본 것은 그가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영시력을 얻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그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지구의 오라가 변한다고 예언은 말하고 있다. 지금 그것이 일어났다.” 이 때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은총에 의해서 영시력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은 미숙한 탄생이었습니다.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물질에 그렇게 하강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물질체와의 연관성이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인격은 바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만큼 기독교의 번영을 위해 전력을 다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의 개종은 오컬트적 사실, 오컬트적 사건 덕택입니다. 그 영시체험을 통해서 그의 인간성이 그리스도로 인도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골고다의 성례 이후 지구의 오라는 변화했습니다. ‘나의 빵을 먹는 자는 나를 밟고 간다.’(요한복음 13장 26절)는 요한복음의 말은 이렇게 성취되었습니다. 이 이후 그리스도는 지구령, 혹성령이 되었습니다. 지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의 거처는 지구입니다. 성요한의 이 심오한 말은 반대의 의미, 그리스도를 배반할 유다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여호와와 지구와의 관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컬트탐사자가 사후 인간이 들어갈 세계에 대해서 그리스예술과 그리스도교 후 예술이 주는 영향력을 비교하면 지금도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시자가 육안으로 도리아식의 기둥을 가진 그리스신전, 예를 들어 파에스툼 유적을 본다면, 영적 방향선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이 조화로 인해 실제 신의 거처가 된 신전의 형태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혼이 자신에게 적합한 몸에 끌리는 느낌이 들듯이 바로 그와 같이 신은 그 성질과 존재와 완벽한 조화를 나타내는 신전의 형태에 하강합니다. 하지만 영시자가 그 신전의 영적 대응에 눈을 돌리면 그는 영계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영시자가 그리스도교 이후의 예술작품을 명상하면 예를 들면 성요한의 복음서나 그리스도-여호와와 관련된 구약 신약 성서의 한 구절,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같은 창조물을 견자가 처음에는 육안으로 그리고 영시력으로 관찰하면 이러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지 않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창조물들은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성요한의 복음서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이 창조물의 위대함이 최초로 이해된 것은 영계에서입니다. 골고다의 성례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최초로 빛을 발하고 명료하게 되는 곳은 영계인 것입니다.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피가 흘렀을 때 물질영역의 역사적 사건과 동시에 어떤 영적 상징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의 몸을 떠났을 때, 골고다에서 숨을 거둔 그 순간에 그리스도는 영계에서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삶을 살고 있는 혼에게 나타났고 어두움은 약해졌습니다. 영계에 갑자기 빛이 넘쳐흘렀습니다. 어두운 방안에 한줄기 빛이 들어와 갑자기 방안의 물건이 눈에 보이듯이, 항상 존재했지만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처음 보게 된 것처럼 빛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있던 혼들은 다시 주위의 존재들을 지각하고 영의 영역에서 다시 형제들과의 연관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질계에 사랑과 우정의 덕성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빛이 죽은 자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골고다의 성례는 물질적 세계뿐만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세계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영계가 그리스-로마시대에 죽은 자가 경험하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만약 인간의 혼이 당시 지배적이었던 얼음 같은 한기와 고독 속에서 머물렀다면 우정과 사랑은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인간은 데바찬에서 은둔하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 때 지상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로 흘러들은 빛은 지상에 사랑과 우정의 왕국을 확립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입니다.

 

골고다의 성례와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흐른 피의 비밀을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봅시다.

 

지구상의 인간이 월기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인간의 위한 3개의 저차의 몸, 즉 물질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가 준비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자립의 표출인 자아가 처음 덧붙여진 것은 지구기입니다. 고대에는 인류의 동질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당시 어떤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는 물질적 기반이 주어져야 비로소 존속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피는 자아의 표출입니다. 혈연관계와 피의 인연이 지배원리였습니다. 육체의 피가 인간과 인간에게 작용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대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은 비물질적인 관계성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집단자아적 활동은 쇠퇴했습니다. 옛날 인간은 공동체의 종족자아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으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긴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혈연관계는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 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인간의 고차자아는 혈연관계의 관계성 안에 존재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노아나 다른 족장들이 몇 백 년을 살았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 시대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이 아득한 몇 세대 전까지 다다르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당시 인간은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고 저 먼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삶은 탄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상이 경험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이것저것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루시퍼적 존재가 끊임없이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은 것도 이 피에 기초한 사랑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한사람 한사람의 인간을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과 탄생 사이의 인간에게조차 자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수호자인 신성한 존재들은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혈연에 기초하지 않는 관계성을 통해서 자아를 연결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루시퍼다. 진정한 빛을 가져다주는 자이다.” 그래서 타락한 루시퍼의 적수가 되는 것입니다. 피에 기초한 사랑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신적 사랑으로 변용되었으며 혼으로부터 혼으로 흐르는 형제애로 변용되었습니다. “부모와 형제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은 피에 기초한 사랑이 동일한 정도로 모든 인간을 포용하는 형제애로 변화되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과학은 성서의 말을 무엇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과학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은총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러한 말이 풍성해집니다. 정신적 사랑의 힘은 처음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났을 때 그리스도에 의해 혼에게 전해졌습니다. 골고다에서 구세주의 상처로부터 흐른 피로 인간성의 과다한 피가 희생된 것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 개아는 다른 개아를 형제로 대해야한다는 가르침이 확립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아직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인류는 우선 이 강력한 우주적 현상의 위대함을 이해해야합니다. 소수의 개아가 그리스도와 지상으로의 현현에 대한 의미의 전모를 항상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을까요? 오랫동안 영계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인간과 그 집단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고대 인도인은 물질계와의 관계에서 거의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초감각적 원리와 영계에서의 지고한 정신생활을 획득하는 데에 열심이었지만 물질존재를 사랑하는 소망은 없었습니다. 어느 동양의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원리가 동양에서 얼마나 막연히 파악되고 있었는지를 실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와서 우리의 지구를 지도하는 힘이 나타났다.’ 이 동양의 전설은 부처의 지혜에 귀의한 제자에 의해 북티벳의 사원에서 설파되어 그 이후 그곳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동양전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의 최고 제자 카샤파(迦葉)는 동양에서조차 그리스도지혜에 대한 이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동굴에 들어가 그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륵불이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서 그 때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그의 사체는 그 동굴에 보존되었습니다.

 

이 전설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특별한 현상이 없었다면, 즉 그리스도가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동양도 서양도 영계에 이르는 길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카샤파의 몸은 미륵불이 사체를 지구로부터 해방시킬 때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에 인간이 지상적인 것을 다시 영화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샤파의 몸을 다시 영계로 이끌 존재는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났고 깊이 하강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카샤파의 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대 이후 카샤파의 몸은 더 이상 동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그 몸이 즉시 영계로 들려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카샤파의 몸은 불의 요소 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불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다마스쿠스에 당도한 바울이 본 불은 이미 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지상출현은 물질계에서 영계로 인간이 다시 상승할 수 있게 한 커다란 전환점입니다.

 

그럼 부처의 가르침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늙음, 질병, 죽음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고통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탄생을 바라는 욕망, 육체적 환생을 원하는 욕망을 없앰으로써 고통을 끊어버릴 것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쳤습니다.

 

자 이제 600년 후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하나의 시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죽어서, 그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가져다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명이 죽음과 싸워 이긴 것입니다.

 

1. 태어나는 것은 고통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지구에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태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2. 질병은 고통일까요?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위대한 치료제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충동, 불붙은 혼의 힘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그리스도충동과 연결시고 자신의 삶을(생명을) 영화시킵니다.

3. 늙는다는 것은 고통일까요? 인간의 몸이 허약해진다 하더라도 내부의 진정한 자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건강하게(왕성하게) 됩니다.

4. 죽음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 육체적 죽음이 생명에 의해서, 영성에 의해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결국 생명에 의해 극복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하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과 탄생 사이의 세계에 빛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 있습니다.

6.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오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7.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맺어지는 것은 고통일까요? 그리스도를 인정한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그리스도의 덕을 따라 모든 존재와 모든 사물을 포용하는 보편적 사랑에 불을 밝힙니다.

8.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는 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이별, 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처가 가르친 고통이라고 하는 병을 고치는 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인간성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위의 시신에 귀의하는 이 전환이야말로 진화상 지금까지 발생했던 가장 위대한 변용입니다.  

 

 


제10강 카르마, 재육화, 비의입문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부다페스트, 1909년 6월 12일

GA109 

 

아틀란티스인은 의식적으로 영계와 가까웠고 인간은 영계에서도 낮 동안의 의식을 경험했다고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물질계에서는 밤의 의식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후 아틀란티스시대의 인간성 하강을 하나하나 쫓아왔습니다. 다양한 문화기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출현한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인 제5문화기를 연구해봅시다. 오늘날 사람들의 지성은 물질영역에만 향해있기 때문에 인간성이 다른 문화기에 비해 훨씬 깊이 물질계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유물주의는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일에만 안중에 두고 지력(知力)과 그 활동을 경이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과 같은 것은 현대를 특징적으로 대표하는 결정체입니다. 현대문화는 물질적 욕구에만 쓸모가 있으며 그것도 일찍이 없었던 최상의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다양한 운동으로 현재 표출되고 있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균열이 이처럼 크고 넓은 이유는 오컬티스트에게 명백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투쟁은, 그 싸움아래 예술 또한 고뇌하고 있는데, 문화수준이 쇠퇴하면 반듯이 명료해집니다. 오늘날 과학에서 이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유물주의로 좋든 싫든 추상적 사고형태에 잡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철학은 그것보다 선행하는 존재를 가지고 있으며, 변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철학적 사고가 (그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입니다.) 탄생하기 전 당시 알려진 종류의 지식은 밀교에 포함되어있던 지혜로부터 유출된 것입니다. 이 지혜의 원천은 혼의 내적체험으로 세계현상의 비밀이 드러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인간의 혼이 고대의 직관적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혼의 감각적 지적 분석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철학자들은 여전히 내적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비전을 통해 또는 전통을 통해서 고대의 밀교적 지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것을 당시 발달과정에 있던 지적능력으로 응용했습니다. 영시력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가진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논리를 창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사고의 기술을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중세 사상을 지배하였고 스콜라주의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식과 신앙 사이에 서서히 심연을 향한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성과 그 심적 기술 그리고 초감각적 진리 사이에 단절이 발생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이 단절은 절정에 이릅니다. 칸트와 그의 철학에는 유물주의적 사고가 이끄는 하나의 막다른 골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칸트는 근대철학 총체를 번성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 탐사자가 현대과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를 화석화시키는 길로부터 멀어지는 좁은 길에 빛을 비추기 위해 그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해결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 문화의 3분야가 다시 결합하여 서로를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가 발생해야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영의 생명이 흘러나와야합니다. 이 결합을 성취시키는 것이 서양 영과학의 사명입니다. 영과학은 신앙과 지식의 조화를 확립해야합니다. 이 두가지 측면을 혼은 더 이상 자기 내부에 결합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물세계에서도 영성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성이야말로 물질적인 것들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자랑하는 프라그마티즘은 정신성에 관한 유물주의적 개념을 가진 의사정신성(疑似情神性)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도 어느 정도는 유용한 철학입니다.

 

우리시대는 유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 산물이라고 간주하는 영성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에 원인이 있다고 여겨지는 병리학적 징후는 영성이 물질성의 사악함에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성은 물질 내부로 하강할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물질 안에서의 경험을 모은 후 다시 상승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진화과정에 있습니다. 육체적 인간과 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물질체에는 오늘날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는 기관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들 기관은 과거의 기관입니다. 그 유물을 우리는 아직 몸속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기관이 되는 기반도 몸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변용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기관 중 대표적인 기관이 심장입니다. 심장은 횡문근(가로무늬근, striated muscle : 골격근 및 심근과 같이 근섬유에 가로무늬가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장은 유물과학에게 악몽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것은 평활근(민무늬근, smooth muscle : 근육 중에서 가로무늬가 없는 근)뿐만 아니라 횡문근으로도 만들어져 있는 불구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횡문근은 인간의 모든 수의기관(隨意器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생각지도 못하겠지만 현재 심장은 미래 기관으로 인간 안에서 수의기관이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오늘날 비의입문자들은 이미 이 기관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후두(喉頭 , larynx : 기도(氣道)의 상단에 있는 판상기구(瓣狀機構)를 가진 중요한 발성기관)도 미래기관으로 생식의 깊은 비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춘기의 변성기에 이것을 나타내는 부분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먼 미래에 인간은 자손을 ‘(소리로)내보낼’ 것입니다. 후두는 창조기관입니다. 미래의 인간성은 혼이나 영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영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몸의 변용에 좀더 의식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영화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세계관을 몸에 지님으로써 이러한 미래의 과제에 정면으로 맞설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이 영광스런 진화의 동반자라는 감정이 우리를 행복과 활력으로 가득 넘치게 해야 합니다.

 

카르마와 재육화라고 하는 2개의 위대한 우주법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월기에서는 아직 이러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재육화과정은 자아가 지구에 심겨졌을 때 비로소 탄생했습니다. 즉 레무리아 중기부터 아틀란티스 중기에 자아가 지구에 심겨졌을 때 처음으로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자아가 집단혼으로 존재하는 동물은 오늘날에도 재육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종과 그에 속하는 자아와의 관계는 아스트랄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자의 집단혼의 경우, 물질계에서 사자 한 마리의 죽음은 여러분이 손톱을 자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의미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자는 처음에는 아스트랄구조로 집단혼으로부터 실처럼 매달려있습니다. 이것이 물질영역으로 하강하여, 농밀화되고, 각각의 사자가 죽음과 함께 이 라이온의 성질은 다시 아스트랄영역으로 돌아갑니다. 집단혼은 그것을 손발처럼 다시 오므립니다. 월기에서 인간의 혼은 같은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의 혼은 당시 그 집단혼의 구성요소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듯이 혼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가슴속에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재육화와 카르마는 레무리아시대에 처음으로 의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언젠가 그 가치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영원히 영계로 들어가 그곳에서 계속해서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우애의 충동을 발달시킨다면 민족의 부흥은 멈추고 극복될 것입니다. 제6문화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합하고 제어하는 방법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의 개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 물질적 고찰에 따라 삶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 기반에 입각하여 삶을 판단할 것입니다. 고대 인도를 반영하는 제7문화기는 다시 한번 카스트제도가 생기겠지만 그 문화는 자주적으로 생성될 것입니다. 진화과정의 변화는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착실히 멈추지 않고 진보하고 있습니다. 지구진화의 중기에 속하는 아틀란티스시대는 인간의 물질체에 자아가 완전히 침투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것(자아의 침투)은 지구에서 달이 방출된 후 레무리아시대 중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성은 계속해서 진화했으며 우애의 개념이 실천적 개념으로 성취될 때 민족은 극복될 것입니다. 이때 카르마도 극복될 것입니다.

 

카르마의 법칙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번 육화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다음 육화에서 선으로 만드는 원리입니다. 카르마는 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카르마와 외적 결과를 낳는 카르마를 명확히 구분해야합니다. 내적으로 결과를 낳는 카르마는 성격, 재능, 습관의 형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좀 더 외적으로 나타나는 카르마는 예를 들면 가족, 국적 등과 같은 인간이 놓여지는 생활상황의 형태를 취합니다. 카르마가 물질적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좀더 자세히 고찰해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생에서 욕구, 충동, 욕망, 이념형성이 되서 나타나는 것은 다음 생에서, 또는 매래의 어느 생에서 습관으로 발현됩니다. 좋은 습관으로부터 훌륭하고 공을 들여 짜여진 건전한 물질체가 다음 육화 때 만들어집니다. 나쁜 습관은 다음 생에서 질병의 형태나 병에 걸리기 쉬운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은 전생의 경향과 습관에서 찾아야합니다. 개아의 실제 운명은 그 개아의 과거 행위의 결과입니다. 어떤 생에서 많은 사랑을 펼친 사람은 다음 생에서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언제나 젊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생에서 많은 적의의 감정을 품었던 사람은 다음 생에서 빨리 늙을 것입니다. 평범하고 나태했던 생으로 타락하여 온갖 형태의 정신성을 회피하는 개아는 되돌리기 어려운 것을 다음 생의 자신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비의입문을 주제로 간단히 덧붙이겠습니다. 인간성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의입문의 원천에 의지해왔습니다. 밀의(密儀)를 지배했던, 우리가 스승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개아들이 인간성을 지도하고 이끌어왔습니다. 이것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비의입문의 원리를 고찰해봅시다. 실은 인간에게 비의입문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틀란티스 붕괴 후입니다. 이것은 비의입문의 과정도 인간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발달 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적 형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 인간은 물질계에 둘러싸여있는데 왜 감각인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밤사이 지성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자고 있는 인간의 물질체와 에테르체는 침상에 머무르며, 그의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밖으로 나와 영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영계의 존재들에 대해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아스트랄체와 자아가 밤에 들어가는 영계를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밤에 잠을 잘 때 물질체를 떠나는 평균적인 인간의 아스트랄체가 아스트랄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계에서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평균적 개아의 아스트랄체가 가지는 혼돈스런 아스트랄 성질은 비의입문 또는 영적훈련을 통해서 조직화되고 서서히 여러 기관을 발달시키기 시작하여 그 결과 밤에도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통상적 삶에서 인간은 아직 아스트랄체에 기관을 형성시킬 수없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내적 삶의 힘이 본질적으로 강화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명상, 집중, 그 외의 방향이 명확한 훈련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감정과 사고의 삶에서 제자는 조금밖에 실재와 일치하지 않거나 전혀 일치하지 않는 주제를 골라서 그 특정한 심적 영상에 스스로를 방치해야합니다. 외부세계의 사물을 표상하는 심적 영상은 아스트랄계의 기관을 육성하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장미십자와 같은 도형을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7개의 붉은 장미에 둘러싸인 검은 십자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에 필요한 활력과 인내로 그 훈련을 실천하면 발달과정에 따라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에 의해서 여러분은 아스트랄체를 변용시키고 그 기관에 활력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심적 영상은 추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감정과 풍부한 지각에 대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원하는 결과가 성취될 것입니다.

 

 비의 입문에는 3가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모두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3가지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각 개아의 사정에 달려있습니다. 이 길 중 하나는 영지(叡智)에 관한 비의입문입니다. 인도인과 동양의 훈련에 적합한 방법입니다. 이 길은 유럽인과 서양인의 몸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어서 그들에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비의입문은 감정의 삶에 기초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길입니다. 지금도 이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개아는 극히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강력한 헌신과 자비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비의입문의 길은 장미십자의 훈련입니다. 사고와 의지를 통한 비의입문의 길입니다. 이것은 다른 비의입문의 길의 힘들과 합일에 이릅니다. 각 비의입문의 최종목표는 명확하지만 진화과정에서 혼이 당면한 필요로 하는 것과 인체의 제공 가능성에 맞추어 조정되어야합니다. 고대 비의입문에서 제자는 3일반 동안 무덤에 매장되어 죽은 것처럼 되어야했습니다.  이때 그의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는 물질체의 외부로 나와 영계에 존재합니다. 비의를 담당하는 사제는 그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입문자를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각성 후에 제자는 영계의 목격자가 됩니다. 이것이 고대 비의입문 형태입니다. 오늘날 이런 과정은 더 이상 불필요합니다. 그리스도교적 비의입문과 장미십자의 비의입문은 매우 강력한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참여하는 인간은 고대 입문의식에서처럼 물질체에서 고차요소를 끌어내서 발생시켰던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인상은 현재 3일반의 가사상태를 거치지 않고도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각인됩니다. 아스트랄체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가 성취되었다면 현대의 비의입문은 실제 경험에 기초한 순수한 영시력과 영계의 지식으로 이끄는 영향을 발생시킵니다. 이때 영계에서 혼이 받는 인상은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에 각인됩니다. 이것이 오컬트발달과정의 ‘조명(照明)’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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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 


1)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이란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識;manas -vijnana)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심층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헌데 아뢰야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Unconsciousness) 정도로 생각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한다.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제8식 아뢰야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정(淨)과 염(染), 선과 악 모두의 의지처가 되며, 마음이 정이나 염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다. 


   이 아뢰야식(제8식, 心)은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제6식, 識)을 총괄해서 마음의 흐름에서 주체가 되는 잠재의식이다. 6식의 활동은 인식된 것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보존성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존재가 이어져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따로 상정하고 있다. 즉 업의 저장소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범어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해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모든 일어난 일이나 생각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 아뢰야식이다. 여러 행위가 필름에 찍히듯이 업이 돼 아뢰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바로 말나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무시이래 각자가 해온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種子)가 돼 제8식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훈습(薰習)이라고 하며, 종자를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종자는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가 있는데, 나쁜 종자와 좋은 종자 모든 종자를 훈습시켜 담아둔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들을 저장하는 훈습작용을 한다. 우리가 잠자다가 꾸는 꿈은 제6 의식의 영역인데,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업)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 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잔상들이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종자)을 형성하기도 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결과(업)를 일으키는 특수한 에너지(氣)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존재의 생명과 신체를 유지시켜 나가는 업력(業力)과 윤회의 심종자(心種子)가 저장돼 있는 곳으로 일생동안 끊어지지 않고 존재의 밑바탕에 붙어 있다가 알맞은 환경과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업력이 원동력이 돼 다시 생각하고 행동한다. 


   저장된 종자가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현행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으며,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로 계속 이어지면서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아뢰야식에는 모든 행위(업)가 발생 즉시 자동적으로 저장 입력된다. 행동하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저장되는 의식의 저장 탱크, 선악의 저축 뱅크다. 그리하여 육식(六識)의 심층에 아뢰야식이 있으며, 이 아뢰야식은 육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생으로 이관된다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바로 업(業)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이란 전생의 아뢰야식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으면 종자(아뢰야식)는 다른 모태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해 일체 만법이 연기하는 것이 아뢰야연기설이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모든 것들이 우리 몸속(아뢰야식)에 입력된 의식을 말하는데,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이 어떤 계기로 움직여 일어나는 생각을 업식(業識)이라 한다. 따라서 아뢰야식은 불변의 요소가 아니고 우리 마음 작용에 의해 변하며, 수행 정진에 의해 소멸도 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고정된 실체의 개념이 아니라서 업이 소멸되면 아뢰야식 또한 없어지는 것으로 수행을 통해 자기 업장을 다 소멸시키면 아뢰야식 또한 소멸되는 것이니, 고정된 실체 혹은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선정 수행을 함으로써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만 원권 돈다발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사람은 남이 볼가 봐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남이 보든 말든 돈을 주워서 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관서로 가지고 가서 신고를 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그 차이는 그들이 과거에 정신적 육체적 경험에 의해 축적돼온 종자의 차이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것도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봤기 때문에 그 본 것이 종자로 저장돼 있다가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자기네 부모가 했던 짓을 자식도 따라서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종(善種)을 낳고 다시 선행을 가져오며, 악행은 악의 종자를 낳고 다시 악한 행동을 생산한다. 한번 훈습된 종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현행되는데 선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을 쌓으면 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악의 종자는 업장소멸을 위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의 종자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다.   


   헌데 원래는 8식까지만 있다고 했으나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후대에 제9식인 아마라식(Amala)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됐다. 

    


2)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Amala-vijnana)이란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 아말라식(阿末羅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鎭如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원측(圓測)은 구유식의 9식설을 취하지 않고 신유식의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하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 ‧ 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白淨識)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佛性)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님의 경지라고 한다. 


   현장(玄裝) 이후에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유식론파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想定)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8식이 성불하면 제9 백정식이 되며, 제9식 백정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 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아카식레코드(우주도서관, Akashic Records)


사람의 기억의 창고(도서관)가 뇌에 있는 것처럼 우주에도 기억의 창고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일부 사이킥능력자(영능력자), 예지능력자들의 주장이다. 그 기억의 창고, 우주도서관같은 것을 ‘아카식레코드(Akashic Records)’라고 한다. 

아카식레코드라는 개념이 근래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신지학(神智學)협회’를 창설한 브라바츠키(1831~1891)와 ‘인지학(人智學)협회’를 세운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와 관련이 있다. 브라바츠키는 20세기 신비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러시아 출신의 영매이고 루돌프 슈타이너는 신지학의 신비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것을 더욱 합리적으로 학문화해 ‘인지학’의 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슈타이너는 브라바츠키의 신지학처럼 유체이탈, 영적 의례(채널링 등), 마술 같은데 의거하지 않고, 명상과 도덕적 수양만으로도 ‘초감각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지학 이론을 세웠다. 그는 타고난 투시 능력자, 영시 능력자인데다가 논리적 사고능력, 언어표현능력도 뛰어났다. 


신지학의 브라바츠키같은 순수한 영매와는 달리 자연과학자의 눈과 철학자의 논리적 사고능력에다가 예술가다운 문장력을 갖춘 영적투시 능력자인 슈타이너는 신비학도 학문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초월적 인식’을 획득할 수 있을 때에야 ‘인지학’은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슈타이너는 인지학의 방법에 따라서 수련, 특히 그 ‘명상’과 ‘집중’ 수련을 매일 15분씩 꾸준히 계속하면 초월적 인식능력의 발현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슈타이너는 ‘아카샤연대기(Akasha chronicle)’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거기서 우주의 창생부터 혹성의 진화, 고대의 아틀란티스 대륙과 무 대륙 등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를 했는데, 아카식레코드와 접촉해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바로 이로 인해 아카식레코드라는 용어가 ‘정신세계’ 관련자들 사이에서 곧잘 쓰이게 됐다. 

그런데 이 아카식레코드 즉 우주도서관은 사실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후에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다. 미국의 뇌과학자인 존 C. 릴리 박사는 의식의 심층을 끝까지 탐구한 학자이기도 한데, 그는 자신의 내적 체험의 기록에서 심층의식의 가장 깊은 데에 아카식레코드같은 우주적인 기억층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스위스 출신의 분석심리학자 칼 융 박사가 말하는 ‘집합적 무의식’이라는 사람의 가장 깊은 의식층이 릴리 박사가 말하는 우주적인 기억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꿈 속에서 체험하는 다양한 세계와 직관의 세계, 죽음의 순간에 주마등처럼 체험한다는 ‘자기의 일생’의 광경도 이 심층의식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거나 예지하는 것도 그 일부분은 자기의 심층의 정보를 읽고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슈타이너도 아카식레코드에 접근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수단으로서 명상을 수련할 것을 강조했다. 알다시피 명상은 심층의식과 접촉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의 하나이다. 


결국 슈타이너도 자기의 심층의식에 담겨있는 정보에 접근해 ‘아카샤연대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영적투시 능력자나 예지 능력자 가운데는 특별한 수련을 하지 않았는데도 능력을 발휘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일을 계기로 자기의 심층의식과의 통로가 활짝 열려버렸거나 타고난 심층의식 연결자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명상을 효과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만이 심층의식 속의 우주도서관, 무한한 지혜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심층의식은 우주만물의 의식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우주만물에는 모두 의식이 있으며 그것은 균질적인 것이다. 사람도 에고(자아의식)가 형성되기 전인 갓난아이 때에는 우주만물의 의식과 균질적인 의식인 심층의식만을 가지고 살아 우주만물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우주도서관의 문이 그대로 열린 것 같은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 

말을 할 줄 몰라 표현을 하지 못할 뿐 그들은 아카식레코드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지혜의 덩어리이다. 나이가 들면서 에고(자아의식)가 형성되어 감에 따라 우주도서관이며 지혜의 덩어리인 심층의식은 깊은 심층으로 밀려들어가게 된다. 그래도 심층의식이 완전히 덮혀 있는 어른들과는 달라서 언뜻언뜻 우주도서관과 연결되는 일이 있다. 아이들 가운데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예언·예지의 소리를 하는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이다. 



※ 아카식레코드(우주도서관)에 접근하는 법


아카식레코드라고 불리는 집합적 무의식층(심층의식층)에 접근하려면 자아의식(표층의식)을 제어하여 집합적 무의식층으로 녹아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집합적 무의식은 우주의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만물의 정보가 다 들어 있다. 거기서 필요한 정보를 가져오려면 자기의 책임과 자유의지로 아카식레코드에 접근하겠다는 자기의 결의가 필요하다. 


아카식레코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정보만을 내주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스피릿가이드(지도령)나 고차원적 존재(천사, 장군신 혹은 조상령, 옛 성자 등)에게 지금 필요로 하고 있는 정보만을 열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을 해도 좋을 것이다. 


1) 긴장 이완할 수 있는 자세

긴장 이완이 될 수 있는 상태라면 누워도 좋고, 앉아도 좋다.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것이 긴장 이완이 더 잘된다면 음악을 틀어도 무방하다. 


2)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보통보다 느린 호흡을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한다. 호흡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가 변하는데 따라서 적당히 조절하도록 한다.


3) 빛 구슬을 이미지로 만든다.

이마 한 복판에 탁구공 정도의 크기의 구슬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 구슬은 청자색이고 그 둘레는 흰 구름으로 둘러싸여있다. 구슬이 돌기 시작하면 그 높이를 유지한 채로 머리의 중앙까지 평행으로 이동시킨다. 

회전운동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안쪽의 색(청자색)과 바깥쪽의 색(흰색)을 반전시키고, 머리 한복판에서 빛의 구슬을 곧바로 떨어뜨리는 이미지를 그린다. 


4) 지구의 빛

발밑을 통해 숨을 들이마시는 이미지로 호흡을 해본다. 숨을 내쉴 때에도 그 흐름은 멈추는 일이 없다. 숨을 들이쉬고 있을 때에도 숨을 내쉬고 있을 때에도 발밑에서 지구의 빛이 들어온다. 

이런 호흡에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지구의 빛에 색채를 붙여보도록 한다. 색은 전부 10가지이다. 각 색마다 최저 한 번씩의 호흡을 해보도록 한다.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 색은 여러 차례 계속해서 해보도록 한다. 

빛은 좌회전의 나선을 그리면서 적색, 오렌지색, 황색, 녹색, 청색, 남색, 자색, 로즈핑크, 은백색, 마지막은 밝은 황금색이다. 황금색은 서너 차례 호흡을 해보도록 한다. 

온몸을 황금색 빛이 가득 채워간다. 그 빛은 한 번씩 숨을 쉴 때마다 점점 더 커져가다가 두 팔을 벌린 크기만한 계란 모양이 되었다. 


5) 우주의 빛

정수리를 통해 숨을 들이마신다는 이미지로 호흡을 해보도록 한다. 숨을 내쉬고 있을 때에도 그 흐름은 멈추는 일이 없다. 숨을 들이쉬고 있을 때나 내쉬고 있을 때나 머리 위 30센티쯤 되는 곳에서부터 우주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양팔을 벌린 크기의 공간을 가득 채워간다. 이 호흡에 익숙해지면 다음에는 우주의 빛에 색을 붙여 간다. 

색은 전부 열 가지이다. 각 색마다 최저 한 번씩의 호흡을 해보도록 한다. 우주에서 들어오는 빛은 지구의 빛보다 섬세하기 때문에 투명한 색을 이미지로 그리도록 한다. 

색은 투명한 적색, 투명한 오렌지색, 투명한 황색, 투명한 녹색, 투명한 청색, 투명한 남색, 투명한 자색, 투명한 로즈핑크, 투명한 은백색, 그리고 마지막은 투명한 황금색이다. 

이 투명한 황금색의 알이 차원을 넘어설 때의 우주복(우주를 여행할 때 입는 옷)으로 바뀌어 우리의 육체, 마음, 정신, 혼을 지켜준다. 


의식을 가지고 하는 여행에서는 우리의 내부로의 여행은 동시에 우리의 외부인 우주로의 여행과 같은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장을 이루고 있다. 


6) 빛의 바퀴

머리 위에서는 우주의 빛이, 발밑에서는 지구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이미지로 그리면서 호흡을 계속한다. 

앞에서 머리 중앙에다 만들었던 구슬을 심장 언저리까지 천천히 수직으로 이끌어내린다. 그리고 지구의 빛과 우주의 빛을 그속에서 융합시키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호흡을 해본다. 

두 개의 흐름을 융합시킴으로써 구슬 속은 제로포인트가 된다. 심장에다 의식을 집중하면 언제나 ‘조화’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있다. 


7) 33계단

언뜻 보니 눈앞에 계단이 있다. 모두 33계단이다. 수를 세면서 올라가 보자. 1, 2, 3,…, 11계단째는 자아의식의 최고영역이다. 여기서 잠시 발을 멈추고 주위의 경치를 구경한다. 

그 다음에는 자아의식을 넘어서 12, 13, 14, …, 22. 만약 피로를 느끼면 잠시 휴식을 취해도 된다. 준비가 되었으면 경계선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간다. 23, 24, 25…, 점점 우주도서관이 보인다. …, 29, 30, 31, 32, 33.


8) 우주도서관의 입구

문 좌우에는 돌의 대좌가 있고 오른쪽 대좌에는 ‘지혜의 문장’이라는 상형문자, 왼쪽 대좌에는 ‘용기의 문장’이라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각각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이어라’라는 의미의 말이 쓰여져 있다. 

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 ‘열려라, 문이여’하고 외웠더니 우주도서관의 문이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한다. 도서관으로 한 걸음 발을 옮겨보았더니 깊은 바다 밑에 있는 것 같은 고요함이 느껴진다. 이미 차원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고 싶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돌아갈 수가 있다. 거기서 스피릿가이드나 고차원의 존재를 불러보아도 좋을 것이다. 부르면 언제나 와줄 것이다. 


9) 수정구(水晶球)

똑바로 걸어가면 수정구가 보인다. 수정구에 손을 대고 소리를 내 질문을 하거나 마음 속으로 질문을 떠올리거나 하면, 목적하는 책이 나온다. 도서관에는 거울과 같은 테이블이 있으니 거기에 손을 대고 책을 내와도 된다. 만약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되어 있는 책이면, 읽을 수 있는 문자의 책으로 바꿔달라고 청원해도 된다. 

우주도서관의 정보는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다 만든 제로포인트의 영역에서 읽도록 해보자.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지만 가슴의 영역에서 읽으면 알 수 없었던 문자도 차츰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0) 개인의 책

개인의 책을 읽을 때에는 수정이나 테이블에 손을 대고 자기의 이름을 말하도록 한다. 그래도 책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생년월일을 덧붙인다. 표지를 펼치고 손을 대면 필요한 페이지가 저절로 열릴 것이다. 

당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생이나 상처받은 기억같은 것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펼쳐진 페이지는 당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뿐이니 용기를 내서 읽어나가기 바란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한 장의 사진과 문자가 늘어서 있다.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는 스피릿가이드 혹은 고차원의 존재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사진에는 당신의 전생의 모습이 찍혀있다. 


11) 돌아오기

우주도서관에서의 검색이 끝났으면 스피릿가이드에게 돌아간다고 하자. 검색에 몰두하고 있으면 가이드가 돌아가기를 재촉하는 때도 있다. 여기는 또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니까 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자.

우주도서관의 문을 나서니 눈 밑으로는 별들을 거느리고 소용돌이치고 있는 은하가 보인다. 하나하나의 별이 서로 다른 빛을 방사하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일체감을 맛보기 바란다. 

여기서 보이는 광경은 우주의 집합적 무의식이며 이 계단은 우주와 지구를 잇는 다리가 된다. 33, 32, 31, … 22계단째는 인류의 집합적 무의식이다. 여기서 조금 휴식을 취해도 무방하다. 이곳에서는 태양계와 이웃 별들이 보인다. 21, 20, 19, …, 11계단째는 당신의 의식이다. 지구로의 귀환이 다가왔다. 이 지구에 처음으로 내려선 날의 일을 회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확인하듯이 계단을 내려가도 좋을 것이다. 10, 9, 8, …, 1.


12) 심장의 영역

대지에 단단히 발을 딛고 발바닥에서 대지의 숨결을 느껴보도록 하자. 혹성인 지구와의 조화가 느껴지면 심장에 만든 빛의 구슬을 황금색으로 바꾸어 곧바로 발밑으로 내려보낸다. 우주에서 얻은 정보를 지구의 중심에 가라앉혀 가는 이미지를 그리자. 당신이 우주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은 혹성 지구의 진화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이 된다. 그 빛을 이용해 혹성 지구가 녹색이 넘치는 별이 되도록, 다툼질이 없는 별이 되도록… 당신 자신의 소원을 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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