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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한반도의 분단을 한탄해 온 이후, 한국인들은 점점 더 통일을 불필요하고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 38선을 따라 남한과 북한 사이의 분단은, 비록 제멋대로 보일지는 몰라도, 고대에 한반도의 북쪽 왕국과 남쪽 왕국을 나누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경계선을 따르고 있다.

* 이 분단은 현대 지정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통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베이징의 통치 아래 워싱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DOCUMENTARY TUBE

전설에 따르면, 미 육군과 국무성의 젊은 남자들이 단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연필과 벽면 지도로 무장하고 한국을 나누었다고 한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다음날,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들은 새로운 국가 정부를 위한 선거가 치러질 수 있을 때까지 한반도를 소련과 미국 행정 구역으로 나누라는 갑작스러운 명령을 받았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어 그들은 38선 주변에 선을 그었을 뿐이다.

1948년 여름 어느 한쪽에서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그들은 두개의 개별 정부를 세웠다. 그 해 8월, 일본의 항복 3주년에, 맥아더 장군은 한국 국회에서 "인위적인 장벽이 당신의 땅을 분열시켰다"며 "이 장벽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 후에 국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맥아더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기본 가정으로 남아있다. 남한과 북한의 한국인들은 똑같이 그들의 공통된 한민족에 대해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한다. 1991년 평양과 서울에서 체결된 기본 협정은 한국을 두개의 독립국이 아닌 하나의 특별한 중간 과정으로 규정했다. 같은 해, 한국 합동 팀이 새로운 한반도기를 달고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2000년의 "615남북 공동 선언"은 "민족의 평화 통일을 갈망하는 전 국민의 고귀한 의지"를 말했다.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통일부 장관이자 "햇볕 정책"의 책임자였던 정세현씨는 계속해서"남북 분단은 비극이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의 상황은 올해 평창 동계 올림픽에 통일된 한반도기를 달고 출전한 한국 여자 하키 팀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하다. 다만 변화된 것 같은 단 한가지는 현재 한국인들이 점점 더 국가 분단은 단지 비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통일 연구원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14년 통일에 찬성했던 한국인의 69퍼센트가 올해 58퍼센트로 줄어들었으며 한국인의 20대 중 72퍼센트가 통일이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뒤 북한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을 촉구했다. 이 칼럼이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한국 역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아는 것 같다. 남북 분단은 사실 인위적인 임시 방편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 분단은 지난 6,000년 동안 한국을 특징 지어 왔다. 지정학은 항상 한반도가 어떻게 분단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북한을 향한 이른 길

한국 역사의 대부분이 중국의 그늘에 펼쳐졌다. 중국이 우세할 때마다, 한반도의 무게 중심이 북쪽에 있었고, 반면에 남쪽은, 조금씩 다른 각도로, 낙후된 주변을 형성했다. 일본의 힘이 종종 중국의 힘과 경쟁할 때인 지난 6세기 동안만 한반도는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변화는 1,4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남한에 대한 개발에서 북한의 주도권을 잠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발달한 남한과 낙후된 북한 사이에 전례 없는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부와 권력이 커지면서 한국은 다시 한반도 분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이나 30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가지는 통일된 한국이나 한강의 남쪽에 집중된 반도가 어느 쪽이든 "자연스런"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초기 역사는 주로 더 크고 더 복잡한 세계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 계곡 사람들은 기원전 7500년경에 쌀과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5,500년까지 이동식 생활 방식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정착된 마을에 살았다. 대조적으로, 쌀은 기원전 4800년경까지는 한국 근처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장은 기원전 3600년 전까지 도착하지 않는다. 그 때까지도 한국인들은 농부가 되는 속도가 느릴 뿐이었다. 영구적인 마을들은 기원전 2000년경에 북쪽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기원전 1500년 이후에 한강의 남쪽으로 퍼졌다. 아마도 중국에서 이주한 만주족들 덕분에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금속 무기와 도구들을 보았을 것이다.

가장 큰 마을들과 가장 부유한 무덤들이 북쪽에 남아 있고, 중국의 문자들이 기원전 400년경에, 일종의 조직화된 정부가 북쪽에서 형성되고 있었다고 말해 준다. 고조선은 현재의 평양이라는 곳에 수도를 두었다. 우리는 고고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고조선은 분명 현재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연(춘추전국)이라고 불리는 중국 왕국에게 기원전 195년에 무너졌다. 한나라가 그것을 재정복하기 전에 중국 반란군의 지도 아래, 기원전 109년에 지방의 한 무리로 만들었다. 이 전후 사정 전체에 걸쳐서, 두가지 사실이 지배적이다. 북부 한국은 지속적으로 더 부유했고, 인구가 더 많았으며,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국가였다. 평양의 보물인 호화로운 소가니Soganni 무덤 212호에는 쓰촨 성 먼 곳에서 온 중국 비단과 칠기 그리고 보석으로 채워져 있다. 남쪽의 무덤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2,00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대에는 북쪽이 발달되었고 남쪽은 뒤쳐졌다.


한국의 초기 역사는 주로 더 크고 더 복잡한 세계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의 영향권 안팎

북부 한국은 서기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남아 있었지만 중국의 직접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제국의 전 한국 지방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독립 왕국으로 재건했다. 평양의 수도에서, 고구려는 470년대에 한반도와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결국 수 왕조는 612년과 614년 사이의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기 위해 파산할 정도로 전력을 다해 위협을 가했다. 고구려는 동 아시아에 강대국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왕국의 ​​전성기인 순간에도 지정학적 변화가 평양의 지도층들을 앞서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야마토라고 불리는 새로운 왕국이 대부분의 군도를 통일시켰고 중국에 문을 열었다. 남쪽 사람들은 풍부한 거래를 통해 부유하게 되었다. 북쪽의 정교한 방법을 모방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형성하고 평양의 통치에 반항했다. 676년 새로운 국가들 중 하나인 신라는 멀리 남동쪽의 경주에 수도를 두고, 고구려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남쪽 한국은 8세기와 9세기에 북쪽 한국의 앞선 발전에 빠르게 따라가며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정학은 미묘한 일이었다. 만일 신라가 그 중심적인 위치를 영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일본과 중국 사이의 힘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만약 그것이 통제력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들 더 큰 국가들 사이에서 붕괴될 수 있다. 이것은 10세기 초에 일어난 일로 고려(현대식 이름인 "한국KOREA"이 나오는 곳)라고 불리는 이탈한 북쪽 국가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을 때 신라는 두 경쟁자 사이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고려는 비무장 지대의 바로 북쪽에, 한국의 서해안의 거의 정확히 절반인, 개경에 수도를 세웠다.(전통적으로 개성으로 표기) 위치는 좋은 선택이었다: 신라의 성공은 한반도를 전보다 더 통일되고 통합되게 만들었으며, 중앙에 위치한 수도는 이제 평양보다 더 합리적이다. 고려는 1100년 이후 번성하여 칠기와 청자 도자기로 유명해졌다. 최윤의는 구텐베르크가 유럽에서 인쇄하기 200년 전에 가동활자로 된 세계 최초의 인쇄기를 만들었으며 한국 과학자들은 화약 무기로 조숙한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통치자들은 신라의 지도자들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균형 잡을 때 했던 것만큼 거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때때로 중국은 더 무서운 이웃이었고, 1271년에, 고려의 원종은 중국의 황제가 된 몽골의 장군 구블라이 칸에 공식적으로 복종했다. 그 후 80년 동안 한국은 천년도 더 이전에 한나라 때 그랬듯이 중국 제국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1350년대에 제국이 무너졌을 때, 고려는 해방되었다. —일본 해적으로부터의 급습에 즉각적으로 노출된다. 화약은 결국 한국에게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주었지만, 일본은 중국보다 더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392년, 쿠테타로 고려 왕유를 전복시켰을 때, 새로운 조선 왕조는 수도를 남쪽 한양(현 서울)으로 옮김으로써 이 현실을 인식했다. 

다음 400년 동안, 서울에서 통일된 한국 국가가 중국과 일본을 어떻게 떼어놓을지를 결정했다. 동시에, 한반도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커졌다. 한국 관료들은 심지어 한글의 고유 문자를 위해 1446년에 중국의 문자를 버렸다. 하지만 1592년에 미세한 균형이 깨졌다. 일본 총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중국 정복의 서곡으로 일본 열도를 통합한 뒤 한국을 침략했다. 한국은 중국과의 속국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임자들은 그의 공격적인 정책을 포기했고, 17세기 초에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들은 아무도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지역 균형을 받아들였다. 각자는 내부 단합을 도모하고 국경을 점차 폐쇄했다. 한국은 아마도 18세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통일되고 평화로웠을 것이다.


변화하는 균형

외부 충격이 없었다면 이러한 평형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랬듯이 19세기에 지구를 강타한 가장 큰 격변—서양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세 동북 아시아 국가들은 각각 서양 상인들과 선교사들을 그들의 영토 밖으로 내몰기 위한 조치를 취해, 서양인들이 그들의 영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은 가장 멀리 가서 "은둔의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40년에, 영국은 중국에 진출했고, 미국은 같은 일을 하겠다고 위협하며 14년 후에 일본을 개방했다. 한국은 가장 긴 시간을 버티며 1866년에 미국의 초계함이 평양에 침몰하고 선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프랑스 군대가 한국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처벌하기 위해 강화도를 급습했다. 한강에서 서울까지 접근하는 것을 통제하는 이 섬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인들은 1871년 다시 이 섬을 공격해 불과 세명의 전투원를 잃고 수백명을 죽였다. 한편 일본은 1876년에 강화도에 자체적인 공격을 개시해 근대화된 충돌 프로그램으로 미군의 도착에 대응했다. 저항 할 수없는 한국은 일본 무역에 항구를 열었고 1882년에 미국인들도 인정했다.


서양의 침입이라는 가장 큰 지정학적인 격변은 19세기에 한국의 균형을 깼다.


1880년대에 중국이 한국을 자국의 궤도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마지막 큰 추진을 했지만, 일본은 이미 지정학적 균형을 너무 멀리 옮겨 놓았다. 1894년부터 1995년까지 도쿄의 현대화된 비행기와 군대는 단지 몇대의 서부 증기선과 대포를 그들의 낡은 조직에 접목시킨 베이징의 비행기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체결 된 시모노세키의 조약은 공식적으로 한국의 베이징의 속국으로서의 위상을 종식시켰다. 러시아가 중국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했을 때, 1905년에 일본은 역시 그것을 격퇴했다.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1910년에 전면적으로 병합하여, 1931년 만주를 포함하도록 성장한 식민지 제국과 1937년 이후에 중국의 대부분의 해안 지방을 제국에 굴복시켰다.

1930년대에 동북 아시아는 히데요시가 1590년대에 일본 도쿄를 중심에 두고 기대했던 것처럼 보였다. 1945년 일본의 참패조차도 일본을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맞서는 방벽으로 재건하려는 미국의 열망 덕분에 그러한 패턴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지울 수 없는 선

38선을 따라 한국을 분할함으로써 천년의 통일을 끝냈지만 1400년 경에 생겨난 지정학적 균형의 최신 버전이 되었다. 한국이 다시 한번 중국과 일본의 떠오르는 세력 사이에 끼었다. 19세기 말 이후로 러시아와 미국의 개입이 증대되면서 한국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가 넓어지긴 했지만 한반도의 운명이 대륙의 힘과 동북아의 균형에 달려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냉전 기간 동안 38선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북한 지도자들이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된 후, 한반도가 미국의 방식으로 통일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1990년대에 중국이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아주 잘 일어났을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20대 한국인들이 맞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의 분단은 —고대 남북 경계와 거의 같은 위치에— 현대 지정학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똑같은 현실은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미국보다 중국의 통제하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Stratfor

혼란의 시기여서 그럴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잠깐 멍하니 생각해봐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해였다. 
정치, 경제, 환경, 사람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일들이 이어졌다. 

그 때문일까. 올해가 가기전 마지막 대미를 북한 김정일이 생을 마감하며 장식했다. 

미국 눈 밖에 나고도 이토록 오래 나라를 유지하고 살아남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가.
대단한 인물이다. 

이제 아들 김정은이 물려받았는데 세간에 많은 얘기들이 오고간다. 
주류 언론부터 판 밖에 영적,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힘써야 하는 시대, 정보가 곧 힘인 시대에 살다보니 모두들 바쁘다. 정보 곧 힘을 얻기위해.




현재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내용들

시나리오 1 : 3대 세습체제 성공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측이다. 

지난 19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애도 기간이 3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의 애도 기간도 이 수준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북한은 이 기간에 김 위원장에 대한 충성심을 대내·외에 과시하며 내부단속을 강화하고, 대를 이은 충성을 강조하며 김정은의 권력세습을 추진한다는 프로젝트다. 


북한이 19일 발표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김정은의 이름을 가장 앞에 넣은 것도 김 위원장 사후에 김정은이 권력 서열 1위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19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소식을 전하며 "존경하는 김정은 지도자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자"고 보도하는 등 김정일의 후계자가 김정은임을 공식화했다. 


시나리오2 : 숨돌리기…‘임시 집단지도체제’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1982년생으로 올해 29세에 불과하고, 후계자 수업기간이 짧아 권력기반을 다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김정은이 내부 혼란을 수습할 여유를 갖기 위해 당분간 북한에서 그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운영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우선은 군부가 나서서 체제를 안정화 시킨 뒤 김정은에게 권력을 승계하는 복잡한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 경우 김정은은 형식상 1인자 자리에 머물거나, 잠시 2선으로 물러나 있을 수도 있다. 

 

시나리오3 : 소요·내전 발발 


가능성은 낮지만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다. 


끝없는 경제난에 고통받아온 북한 주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주민들과 함께 군부가 동요할 경우 김정은 체제가 일시에 통제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영적(정신) 분야에서 얘기하는 내용

관점 1.
김정은은 북한의 마지막 지도자 입니다.

그래서 그는 암살 당하지 않고 그의 당대에 세상의 끝장을 보게 됩니다.


김정일에 의해 세운의 주요 공사들이 대부분 완성되었으니 김정운이 능력은 이 부분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북조선은 이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그 대표 얼굴마담이 김정운입니다. 


북조선의 리더쉽 공백? 웃기는 소리.

쿠데타 가능성 ? 역시 웃기는 소리.

권력 승계 불안정 ? 더욱 웃기는 소리.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은? 이미 지난 2008년 시기의 대결에서 승복하고 강경파 숙청 후 지금은 김정은의 북조선과 온건파의 밀월시기임.

키신저 (그간 체크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물러남, 소르소 물러남

그리고 유럽에서 줄줄이 일 터졌음.


왜 외부조문단을 받지 않는가? 두려움인가, 자신감인가? 잘 생각해 보시지요.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조문이 갑니다. 굳이 숨길 필요 없는  후진타오는 이미 자기 발로 찾아서 다녀갔더군요.

아마 찔리는게 있어서... 김정은 체제 승인?  승인이고 자시고 이미 몇 년 전에 의사표시 다 했습니다.


김정은 실각 안합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안의 지도제체들은 아주 공고하게 뭉쳐있습니다,

얼치기 언론들이 분석하듯이 무슨 세습이니 신격화니 그런 의미로 뭉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애들 장난하나요...

미국은 이제 더욱 북조선의 주도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김정일이 갖고 있던 제왕의 기운은 김정일과 같이 귀천하지 않고 지금 현재 그대로 북조선에 머물러 있습니다. 

관점 2.

북한의 김정일은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김정은이 당분간 대권을 이어받아 통치를 해나갈 것이다.

군부 실력자들과 손을 잡고 군부를 움직여 주민을 통제하며 그대로 내년 2012년까지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년을 지나기 힘들 것이다.

권력 투쟁 과정에 주민 동요가 발생할 것이며 또한 식량문제가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너무 많은 문제가 북한에 산재한 관계로 인하여 그 처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중국이 도와 주겠으나 중국도 집단 지도체제인 관계로 인하여 전적으로 북한을 돕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 난민으로 현재에도 중국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국경을 개방하면 그 많은 수의 난민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을 속국으로 두기도 뭐하고 그냥 도와주기도 뭣한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미국도 또한 핵 문제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게 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가 다른 나라로 팔려 가는 것을 제일 걱정하고 있다. 통일은 2012년과 2013년이 기회이나 남한의 여론이 분열될 것이며 통 크게 통일을 받아 들일 수 있기가 상당히 힘들 것이다.


북한의 지도층과 선을 연결하여 연방제로 가며 서로 도와 주는 것이 제일 방법이 좋은 듯한데 아직은 조금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도층이 수습이 되는 2012년 1월 쯤에 가면 무엇인가 결정이 되겠지.


그들과 함께 남한 지도층도 서로 터놓고 상의 한다면 통일도 가능하다고 본다.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의 힘이  아시아를 벗어나 세계로 향하게 되고 소련이나 중국 기타 나라가 다 육로로 연결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운이 비약적으로 발전 할 것이며 남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닌 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어쩼든 남한의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져 보면 좋을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2012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동하는 대한민국의 힘을 기대해 보도록 하려므나.

너의 영원한 동반자 신으로 부터. 

출처: 인터넷


오바마는 하나의 혁명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제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바뀔 것이다. 그게 좋은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바라보며 도올 선생님이 글을 쓰셨다. 오바마는 북한과 대화를 적극 추진할 것이다. 강공 일변도로 치닫는 이명박 정권과 전혀 다른 해법이다. 이 부분을 선생님은 걱정하신다. 북한 문제 해결에 있어서 이니셔티브를 미국에 빼앗겨 버리면 우리는 다시 강대국의 한반도 전략에서 국외자로 남는 비극이 연출될 수도 있는 것. 우리는 이미 일본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항복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진주로 나라가 양분된 비극을 경험한 바 있다. 그 때 광복군이 흘린 눈물을 상기하면서 선생은 붓을 옮기셨다.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만큼은 꼭 막아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이명박이 북한에 접근했으면 한다. 오늘자 <도올고함>은 꼭 한번 정독하시기를.... -포카라-



-이하 전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올고함(孤喊)] ‘오바마 원폭’엔 대북 칼자루 내줄텐가


광복 주도권 빼앗아간 히로시마 원폭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다. 당시 그토록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히로히토 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과연 구세의 복음이었을까? 원자폭탄 투하가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으로 생겨날 수 있는 더 많은 인명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의 패망과 세계대전의 조기 결속을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다행스러운 사건이었을까?

우 리의 이러한 상식적 기대와는 달리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세계사적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원폭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투하 소식을 들었을 때 땅을 치고 통곡했다. 자기들이 과학적 가설과 실험을 통해 만든 원자폭탄이 수많은 인명의 살상에 쓰였다는 사실에 대한 과학자적 양심의 발로 때문만은 아니다. 원폭 투하는 일본제국주의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를 대체하는 더 무서운 미 제국주의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출발에 자기들의 과학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과학 그 자체의 도덕적 근거를 박탈하는 비극을 의미했다.

중 국 대륙의 가장 화려한 고도(古都) 시안(西安)에서 동남쪽으로 20km 떨어진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흥교사(興敎寺)라는 절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신라 고승으로서, 현장법사의 수제자였으며 유식과 반야경전에 탁월한 주석서를 남긴 원측(圓測·613~696)의 사리탑이 있다. 흥교사 부근 뚜취(杜曲)라는 곳에는 식량창고가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일본의 패전을 대비해 광복군 제2지대의 70명이 미군들과 함께 OSS(미군전략특수공작대) 훈련을 받던 곳이다. 2005년 4월 나는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들은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요코하마 오사카 무찌르고 동경 드리쳐 동에 갔다 서에 번득 모두 한칼로 국권을 회복하는 우리 독립군 승전고와 만세소리 천지 진동해 나가세 전쟁장으로”라는 용진가(勇進歌) 가사대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며 특수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 는 나락이 쌓여 있는 그곳에서 1945년 8월 10일 오후 OSS 훈련 책임자였던 서전트 소령이 상기된 얼굴로 나타나 대원들에게 느닷없이 일본이 투항했다고 외치던 그 순간의 희비 엇갈린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발표가 있자마자 미군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맥주병을 터뜨리고 좋아 얼싸안았다. 그러나 광복군 우리 병사들은 침통한 얼굴 위로 눈물이 얼룩질 뿐이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김구, 『백범일지』)

“진격하는 상륙군이 모두 십자가 하나씩을 내 무덤에 꽂아두기를 바랐건만, 아~ 나는 온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장준하, 『돌베개』)

왜 그랬을까? 일본이 투항했는데 광복군 병사가 왜 그토록 슬피 울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향후 역사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에 그 자랑스러운 승전의 기회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드골의 파리 입성처럼, 시저의 로마 입성처럼, 광복군은 광화문이라는 개선문을 당당하게 통과했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이후의 동족상잔의 비극도, 분단의 역사도, 좌우의 내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버 락 오바마의 미 대통령 당선은 나에게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것과도 같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히로시마 원폭은 새로운 분단과 냉전과 제국주의적 폭력과 강자의 횡포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오바마라는 원폭은 새로운 통일과 화합과 제국주의적 폭력의 거부와 약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순간에 나는 기묘하게도 뚜취의 눈물로 얼룩진 광복군 병사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금 이 순간에 우리 민족이 스스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분단 60년 역사의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도 있다. 현 정권은 오바마가 그토록 저주했던 신자유주의적 발상에 모든 이념적 청사진을 그려왔던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더 돈을 벌게 하라!”

“ 남부의 나무에는 기묘한 과일이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 피가 흥건, 따스한 남풍에 검은 몸뚱이들이 흔들린다.” 흑인들의 모습을 ‘스트레인지 푸르트(Strange Fruit)’라고 이름하여 부른 전설적 재즈보컬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1915~59)의 노래 가사도 먼 과거가 아니다.

오 바마의 엄마가 케냐에서 온 루오족 흑인 유학생과 결혼을 했던 1960년 당시에도 미국의 대다수 주가 흑인과 백인 사이의 결혼을 중죄(felony)로 규정했다. “나의 아버지는 단지 엄마를 야릇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무에 목이 매달릴 수 있었다.”(오바마, 『아버지로부터의 꿈』)

이 오바마는 무엇을 외칠까? 시카고 빈민가의 아동이 글을 못 읽습니다. 그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노인이 약값을 낼까, 집세를 낼까 갈등할 때 그것은 나의 가난입니다. 아랍계 출신 미국인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부당하게 체포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인권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가 당선되었다니까, 한다는 소리들이 누가 하버드를 나왔냐? 줄 대라! 운운하는 가소로운 소리들! 근원적인 정책에 대한 새로운 튜닝이 없이는 우리 정부는 세계사에서 뒤처지는 정권이 될 것이고 경제는 더욱 혼미하게 될 것이다.

결 국 광복을 우리 손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히로시마 원폭과 함께 미 군정의 손에 넘겼기 때문에 향후 모든 민족사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북·미 관계는 급진전될 것이다. 또다시 남북문제를 우리 손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오바마의 손에 넘길 때는 요번에는 우리 전 민족이 광복군이 뚜취에서 흘렸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빨리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사회가치를 구현하라! 그리하면 경제는 따라온다.
- 도올 김용옥 / 중앙일보 / 2008.11.12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는
앨런 와이즈먼(왼쪽)과 황대권씨.

‘가비오따스’, '인간 없는 세상' 저자 앨런 와이즈먼 · 황대권 대담

‘가비오타스(Gaviotas)’는 콜롬비아 동부 야노스의 오지에 있는 작은 생태공동체다. 그러나 인구 200여명의 조그만 마을이 일으킨 작은 기적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비오타스인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불모의 땅에 열대우림을 부활시켰다.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소나무를 심었다. 또 수경재배법을 통해 채소를 자급자족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실시하며 구성원들이 창조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가비오타스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로 보여주면서 전 세계에 감동과 각성을 불러일으켰던 책이 <가비오따스>(랜덤하우스)다.

저자 앨런 와이즈먼(61)은 가비오타스인들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환경을 손상시키는 힘이 거꾸로 그것을 회복시키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는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도발적인 상상을 통해 오늘날 ‘인간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통찰한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DMZ 보존을 위한 국제콘퍼런스’ 참석과 <가비오따스> 재출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를 <가비오따스>의 번역가이자 <야생초 편지>의 저자인 황대권씨(53)가 지난 24일 만나 대담을 나눴다.

황대권=<인간 없는 세상>은 DMZ(비무장지대)가 모티브였다. DMZ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앨런 와이즈먼(이하 와이즈먼)=같은 민족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사이를 뚫고 새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한때 폐허였던 곳이 생명들로 가득 차 있다. DMZ는 자연의 자기치유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의 DMZ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DMZ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 DMZ 보존은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종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립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대권=나는 <야생초편지> 등을 통해 전통적 농업이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야생의 풀을 식량으로 삼고 야생에 적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와이즈먼=그렇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전통적 농업은 지속될 수 없다. 물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한다. 20세기 농업 기술은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으로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한 만큼 빈곤층도 20세기에만 4배가 늘었다.

황대권=이 시점에 <가비오따스> 출간 10년을 놓칠 수 없다.

와이즈먼=<인간 없는 세상>이 제목처럼 ‘우리가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에 대한 얘기라면 <가비오따스>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주는 교훈이 필요하다.

황대권=10년 동안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어떻게 변했나.

와이즈먼=가장 중요한 것은 가비오타스가 콜롬비아의 극심한 폭력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비무장 공동체인데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지금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야자나무를 심어서 지속가능한 바이오연료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 바이오연료를 위해 숲을 밀어버리지만 가비오타스는 기존 숲과 함께 야자나무를 심고 그것이 숲의 토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황대권=가비오타스가 자급자족 공동체지만, 생산물을 바깥 세계에 파는 구조여서 예측하기 힘든 세계 경제에 의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리면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가 커지는 것만을 위한 성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번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지금까지 크기를 키우는 성장을 번영이라고 했다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비오타스는 ‘선한 자본주의’의 사례다. 지속가능성에 가장 가까운 생태공동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그것이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재활용되도록 노력한다.

황대권=한국에도 생태공동체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생태공동체 운동의 현황은 어떤가.

와이즈먼=미국에는 LA 한가운데에 커다란 생태공동체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등 매우 저렴하게 살면서 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소비자가 생산자의 영농을 미리 지원하고, 수확물을 분배하는 것)가 확산되고 있다. 석유 에너지의 위기와 심각한 대기 오염 등으로 인해 생태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황대권=좌우 대립이 심각한 콜롬비아에서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가 살아남은 것을 보고 희망을 봤다. 가비오타스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

와이즈먼=가비오타스는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또 모든 이들이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그들이 비무장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지만 정치적 중립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운동가도 아니다. 저널리스트다. 연구하고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 책에는 무엇이 그렇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책이 성공한 이유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도 단지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깨달음을 준다.

황대권=세계 금융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 한 발 다가가는 것 아닌가.

와이즈먼=금융위기는 <인간 없는 세상>에서 말한 대로 어떤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더 이상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는 수많은 재앙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남았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순전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생태공동체 가비오타스는 우리가 지구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앨런 와이즈먼은 누구?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리조나대 국제저널리즘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퍼’ ‘뉴욕타임스’ ‘애틀랜틱먼슬리’ 등의 매체와 미국 국영라디오방송인 NPR에 진보적 관점의 글을 기고해왔다. ‘LA타임스’ 객원편집위원을 지냈다. 다수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 작가이기도 하다. 꼼꼼한 현장 취재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써왔다. 지난해 펴낸 <인간 없는 세상>으로 ‘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 20개국에 출간되면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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