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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인문사회과학총서 1
막스 베버 (지은이), 박성수 (옮긴이) | 문예출판사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쓰여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20세기에 출현한 정신과학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에 속한다. 이 책은 서구 학문의 경험적 실증적 연구의 축적 위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이 책을 대하게 될 독자들은 서구 학문의 귀중한 보고의 하나에 입문하는 셈이다. 사회과학 역사과학 학습의 길잡이가 되며, 정신적 사상적 기초가 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 이하 리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망에 대해 맑스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전자본주의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자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생력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자본가의 형태가 고전적인 의미에서와 같이 한정적으로 논의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노동의 관점과 시각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또 다른 자본을 소유하고 생산계급이면서도 자본가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합리적 사고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21세기의 자본주의 경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는 경제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한 20세기 초반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이 책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베버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 부분은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 바라본 자본주의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무엇인지, 칼뱅과 루터 그리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노동과 직업의 소명 의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이 책을 읽어야 했던 나는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구절과 구절의 의미는 물론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원전의 의미를 철저하게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번역이 아니라면 긴 문장을 나누고 다듬어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얄팍한 배경지식과 무식의 소치로 돌리기엔 번역된 문자이 주는 고통도 상당하다.

자본주의의 발달을 노동에 대한 직업 소명의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탁월하다. 맑스가 이미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해 놓은 시대의 저작이라면 1905년에 발표된 이 논문도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의 출발선 언저리에서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변화를 바라보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논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종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았던 베버의 진정한 의도는 찾을 수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반론과 수많은 쟁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구를 유발했다. 청교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과 자연스런 부의 축적을 자본주의와 연관지으려는 베버의 태도는 자본주의에 대한 오독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잉태했다는 베버의 주장이 여전히 타당한가?

노동과 직업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물질적 생활 욕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어떤 계층 어떤 계급에 속하든 물질적 부의 척도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삶의 태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생에 대한 통찰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과 인간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반성적 관점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은 공허한 울림이 되겠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종교적인 질문도 세속적인 질문도 아닌 단순한 삶에 대한 자기 점검을 위한 질문일 뿐이다. 도구와 수단을 살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삶에 대한 철학이 부재한 것은 아닌가. ‘유태교의 에토스는 한 마디로 말해 천민 자본주의의 에토스이다.’는 위험한 발언을 선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시대의 베버는 오히려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유태교에 대한 혹은 유태인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청교도주의에서 추구하는 직업과 소명 의식에 대한 반성으로 읽히는 이유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베버가 비판했던 유태교의 에토스보다 악화됐다고 믿는 까닭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오로지 돈에 대한 집착과 인간의 욕망만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무조건 거부하거나 돈을 멀리하자는 멍청한 말이나 태도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태고 변화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자본주의를 변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소박한 낙관주의일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라 그 어떤 대상과도 자본주의 정신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양한 관점과 생산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막스 베버의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번 쯤 떠올렸음직한 고민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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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경제 공황'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간단히 설명하려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살을 덧 붙일 필요는 있겠습니다만, 큰 그림상으로 볼때는 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경제 공황은 상품이 창고에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한명의 노동자가 한달에 100만원어치의 이익을 생산해 낸다고 가정한다면, 이 노동자의 임금은 100만원 이하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일은 100만원어치 하고, 월급은 110만원씩 받아간다면 이 노동자는 곧 해고 되거나 공장이 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은 그 노동자가 생산해내는 상품의 이익보다 작아야 합니다.

여기서 시야를 넓혀, 한 사회의 (혹은 전 지구상의)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을 모두 더한 금액을 X (총 소비) 라고 하고,

이 노동자들이 생산해 낸 상품의 가격을 모두 더한 금액을 Y (총 공급) 라고 정한다면,

항상 X <= Y 인 상태가 되고,

노동자들 전원이, 자신이 받은 월급을 한푼도 안남기고 한달동안 다 써 버린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Y - X 차액에 해당하는 량의 상품은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상품들은 처음부터 팔릴 방법이 없는 물건들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과잉 공급'입니다.


예를 들어, 한 도시에 노동자가 100명이고, 이 노동자 1인당 한달에 100만원어치의 상품을 생산해 내는데 월급은 90만원이다...

그러면 노동자 전체의 임금 합은 100명 * 90만원 = 9000만원, 인데 반해, 한달간 생산되어 나오는 상품의 가격은 총합이 100명 * 100만원 = 10000만원 으로,

10000만원 - 9000만원에 해당하는 1000만원어치의 상품은 과잉 공급 상태로, 팔릴 수가 없게 됩니다.


창고에 천만원어치의 상품이 팔리지 않고 쌓여 있으므로, 다음달에는 생산 목표량을 줄이게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임금 총합은 줄어들게 됩니다. 혹은 일자리 수가 줄거나 월급이 깎일 것입니다.

결국 이 과정이 반복되어 누적되다보면, 창고에는 무수한 상품이 쌓이게 되고,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일자리가 줄어서 월급을 받지 못하므로) 거리에 나 앉고 굶어 죽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 공황을 설명하는 방법은 위와 같이 간단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런 과정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경제 공황이 발생하는 시기를 늦추는 방법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볼때 공황은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트릭은, '미래'에 발생할 소비를 '현재'로 당겨 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가, 김대중 정권때 '신용 카드'를 남발 해서 경기 회복 효과를 노린 것이 있겠습니다만,

좀 더 일반적인 방법은 '투자' 혹은 '재투자'라는 방식입니다.



투자라는 것은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에 기대되는 이윤을 위해 돈을 쓰는 행위입니다.

기업에 투자된 돈은 노동자들에게 월급으로 혹은 설비 구입을 위해 소비되는데,

얼핏 보기에는 아직 상품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는데, 노동자들이 돈부터 받은 것 처럼 보이게 됩니다. ( 일시적으로 X > Y 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투자'가 활성화 되면, 창고에 쌓여 팔리지 않던 과잉 공급 상품들(Y-X)을 '월급'으로 소비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사실, '투자'라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Y - X' 금액에 해당하는 '이윤'의 누적 금액입니다.)

그러나 '투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에 갚아야 할 '빗'이므로, 투자금이 환수 되는 시점에서 다시 공황이 발생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자본가는 '이윤'이 남는 이상 자본을 '재투자'할 것이고, 투자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만 한다면, 경제 공황은 오지 않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 ( X <= Y ) 은 '투자'라는 행위가 더해져서, 소비(X)와 공급(Y)이 균형을 이룬 것 처럼 보입니다. ( X + 투자 = Y )

이것이 고등학교 '정치.경제' 시간에 의미도 모르고 암기 했던 '수요 = 공급 = 소비 + 투자' 의 공식입니다...
(투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은 간혹 '공급(Y) = 소비(X) + 투자 + 수출 - 수입 + 국가 세금 지출 + 환경 파괴....' 등등으로 수식을 길게 늘려서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근본적으로 '과잉 생산' 될 수 밖에 없는 체제에, '투자'라는 요소를 더해서 문제점을 감춘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는 항상 미래에 돌려 받을 '이윤'을 전재로 하는 것이므로, '이윤율( 이윤율 = 이윤 / 투자금)'이 떨어지게 되면, 투자는 멈추고,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모순이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같은 금액의 이윤을 얻는다 하더라도 투자해야할 금액이 커지게 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고 투자는 꺼려지게 됩니다.)

이제 관심의 촛점은 '과잉 생산 문제'가 아니라, '이윤율'이 꾸준히 유지 (혹은 상승)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바뀌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에 '투자'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Marx '맑스(1818~1883)' 였는데, 그가 남긴 책 '자본론' 중 마지막 3권에서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해서, 종국에는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리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장기적 이윤율 하락에 대한 설명은 쉽게 설명할 방법을 찾게 되면 또 글로 정리하겠습니다.)

실제로 맑스가 죽은뒤 50년 뒤인, 1930년에 세계대공황과 같은 '투자를 꺼리는' 상황이 발생했고,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맨 앞에서 지적했던) 근본적인 문제점이 '공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경제 공황은 10년을 주기로 찾아온다고 나와 있습니다.)



1929년부터 1930년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황이 얼마나 갑작 스럽게 발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929년 후반기 (후버 대통령) 미국의 실업률은 1% 미만으로 100만명 정도가 실업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가가 폭락 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은행이 도산 했으며, 실업률이 불과 몇달사이에 26배나 증가했습니다.

다음해인 1930년의 실업자는 2600만명으로 실업률이 25%에 육박 했으니, 4명중 1명은 실업 상태가 된것입니다.

1930년에 공황이 발생했던 과정을 들여다 보면 1997년말에 한국에서 'IMF 사태'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IMF 당시, 주가가 폭락했고, 일부 은행이 문을 닫았고,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져 나갔습니다. 또한, '정리해고'라는 합법적인 절차로 실업자가 급증했지요.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발생하는데에 거의 1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IMF 사건이 갑작 스러웠던 것을 떠올린다면 경제 공황이 얼마나 갑자기 닥치는 것인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갑자기 무너질 수 있는지 감이 올거라 생각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정통 경제학자들은 경제 공황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설명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점입니다.

조선일보등의 기사를 보면, 대부분 불경기는 '소비'가 부진해서 라고 말합니다.

'IMF때 허릿띠를 너무 졸라맸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소비가 부진한 것은 월급이 줄었기 때문이고, 월급이 줄어든 이유는 투자가 줄었기 때문이지요.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설하는 주류 언론들은 돌고 도는 순환 고리의 시작점을 '투자'가 아니라 '소비'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조선일보나 주류언론들 혹은 소위 '경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불경기 원인 설명'은 결국 '소비가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불경기에는 소비가 부진해진다'는 원래 정의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소비가 부족해서 불경기다' => '불경기에는 소비가 부진하다'. 결국 '불경기는 불경기다'라고 말하는 '동어(同語)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

경제 공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자본주의는 완벽한 시스템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모순을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결국 '공황은 왜 오는지 모르겠다', 혹은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다. 이제는 공황은 오지 않는다' 라고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1930년에 일어났던 경제 공황이 1997년 한국에도 똑같이 반복되었는데 '자본주의 문제점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싶습니다..
-by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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