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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한의학 - 서양철학에 의한 해체

by 성공의문 2012. 2. 6.



한의학에서 발견한 과학

흔히 비판적 사회의식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한의학에 친밀도가 높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 중에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한의학적 치료를 선호하는 것만이 아니고 직접 한의대에 들어가 한의사가 된 사람이 적지 않다. 한의학 이외에도 한의학과 뿌리를 같이 하는 단전호흡이나 여러 가지 기공 수련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단순한 민족적 의식의 발로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배웠던, 그리고 지금도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근대 서양적 가치관이다. 이에 비해 한의학은 전근대의 동양(정확하게는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이론이며 그 동안 한의학 자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의 근간이 되는 세계관과 방법론은 아직도 전근대의 동양이다. 
 
따라서 오늘날 제도권의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의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필자 자신도 한의학을 처음 접하면서 느낀 당혹감은 일반적인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필자는 3대째 한의학을 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사람에 비해 한의학적인 분위기에 익숙했음에도 막상 들어가 본 한의학의 세계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대부분 한의대에 들어간 학생들은 최소 1-2년의 방황기를 갖게 되고 때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자퇴하거나 그럭저럭 졸업을 하더라도 한의학의 진수에 다가서지 못하고 무늬만 한의사인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정을 필자는 오래 전에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나의 직업은 한의사다. 한의대가 없는 대학 출신으로는 좀 드문 직업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경제과를 나와 한의학이라는 매우 생소한 분야를 접하면서 당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부딪친 것이 그때까지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나의 인식 체계가, 한의학이라는 거울에 비춰지면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대상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어색한 것이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인식 행위를 스스로 대상화하고 느껴야 한다는 것은 어색함을 넘어서 괴롭기까지 한 일이다. 
 
그전까지는 음양(陰陽), 오행(五行), 기, 천지인(天地人), 우주, 운기(運氣) ... 이 모든 것들이 ‘이상한 것들’로써 ‘비과학적인 어떤 것’ 아니 별다른 관심의 범주에조차 끼어들지 못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책 속에서는 물론 강의실과 진찰실에서 언제나 논의되고 이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당혹감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걸로 밥 벌어먹어야 한다는 비감한(!) 현실 앞에서 우선은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외우고 시험보고 나면 빨리 지우고 또 외우고 ... 그것도 서양 과학과 서양의학을 포함하여. 이런 세월이 지났다. 가뜩이나 외우는 데는 재주 없던 나에게는(그 열등감을 없애기 위하여 나는 늘 외우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고 늘 주장해 왔던 터였다) 너무도 과중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날로 먹어만 가는 나이와 이에 비례해 늘어만 가는 주력(酒歷+酒力)은 나를 더욱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논리들을 받아들이면서 점점 나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바로 그 ‘이상한’ 논리나 개념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니었던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기가 막힌다” “감기(感氣) 걸렸다” “간(肝)이 부었다” “대담(大膽)하다” “비위(脾胃)가 좋다” “간담(肝膽)이 서늘하다”는 말들은 정확히 한의학 용어이면서 동양 사상의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융해되었던 말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한의학은 아니 동양 사상은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와 있는가. 피클은 감칠맛이 나지만 김치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치즈는 감미롭고 된장은 구린내가 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더욱 더욱 나를 혼란시킨 것은 내가 그토록 열망하던 ‘과학’이 바로 그 이상하던 한의학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과학관을 포괄해 버리는 거대한 것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는 한의학으로도 난치병을 고치는 수가 있고, 양방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면도 있고 하는 따위의, 그야말로 소가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격으로 한의학에도 ‘어쩌다 과학’이 있다는 식의 발견과는 정반대로, 한의학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오늘의 의학은, 나아가 모든 과학은 진정한 과학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며 새로운 과학의 기초는 바로 한의학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는 발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김치와 된장이 아닌 피클과 치즈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더욱 심각하게는 왜 이런 사실조차가 여태껏 아무런 반성 없이 숨쉬듯 당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져야 했는가 하는 충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제국주의의 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는 곧 주체의 문제이다.

지금 ‘집’이어야 할 우리의 집은 ‘집’이 아니라 ‘한옥’이라 해야 하며 옷도 ‘한복’이고 의학도 ‘한의학’이다. 서양의학을 일상생활 속에서 ‘양의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도 불편해져 버린 현재의 기원은 제국주의에 있지만, 이를 생명의 양식으로 생활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 것이 최고라는 고루한 국수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 것도 좋으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저급한 절충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과학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밀한 부분을 보되 완전한 전체를 놓치지 않는 과학, 격렬한 투쟁을 보되 궁극적인 조화를 지향하는 과학, 정신과 물질을 통일하여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하나인 과학을 찾자는 것이다. 이것의 가능성을 한의학에서 본다.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을 한의학에서 본다. 
 
물론 그러한 패러다임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요즘의 일이고 당시로서는 말 그대로 ‘가능성’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신경(神經) 개념의 도입과 기

“똑같은 몸을 보고 똑같은 병을 치료하면서 한의학과 근대 서양의학은 왜 그렇게 다른가? 혹은 서로 합쳐질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병을 보는 각 의학체계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두 체계의 관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동일한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위의 질문에 적절하게 답할 수 없다. 
 
모든 이론에는 그 이론이 탄생하고 실현되는 바탕이 되는 각자의 시대와 사회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론의 사회 구속성이라는 말처럼 사회를 떠난 이론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볼 때 사회의 성질은 전근대와 근대를 경계로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근대 사회는 경제적으로 생산주체를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근대 사회가 완성한 근대적 분업은 생산과정에서 전체와 부분을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를 포함하여 문화,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게 된다. 이제 봉건 사회를 유지시켰던 자기 완결적 구조나 유기적 총체라는 개념은 생산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성립될 수 없게 되었다. 
 
근대 사회는 전체와 부분을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도 분리시켰다. 생산주체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관계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주체가 분리됨으로써 생산주체는 생산수단을 나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게 된다. 근대 사회는 우리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보통 내가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일한 어떤 정치적 사건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다른 것처럼, 언뜻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몸과 병에 대해서도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마치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보는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듯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하는 그 사람의 실천적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

본다는 것은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한낱 돌멩이에 불과한 것을 아이들은 소중한 보물로 삼기도 하고, 스쳐가는 눈빛 하나에 짝사랑하는 상대는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다. 그 실천적 관점은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나 입장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이 탄생한 시대에 따라서도 변한다. 
 
물론 관점의 차이가 대상 자체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관점과, 주체와 본원적으로 결합된 대상이라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여전히 동일하다. 
 
권력의 한 형태인 의학은 역사상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으며 오늘도 변하고 있다. 권력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배타적 지배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인정은 물론 그 사회와 그 사회의 바탕이 되는 자연에 대한 관계까지도 지배해야 한다.

정치가 자연에 대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권력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는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까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다. 
 
이런 전제하에 이 글은 동양의 전근대 사회에 ‘신경(神經, nerve)’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특히 ‘기(氣)’ 개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의학(漢醫學)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마음, 몸, 신경 그리고 근대적 개인의 탄생

한의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한의학(漢醫學)’을 동양, 특히 한중일 삼국의 전근대사회에 탄생하여 실천된 의학체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해서 사용하고, ‘한의학(韓醫學)’은 현재 실천되고 있는 다양한 내용을 지칭하기로 한다. 이하 이 글에서 사용된 한의학은 따로 한의학(韓醫學)으로 지칭하지 않는 한 모두 전근대 사회에서의 한의학을 말한다. 
 
 
번역의 어려움 
 
번역(飜譯)은 말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뒤집어서 뜻을 가리는 것,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가 특정 시대와 사회라는 바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쏘싸이어티society’라는 말은 오늘날 ‘사회(社會)’로 번역된다. 물론 사(社)와 회(會)는 기존에 있던 말이지만 ‘사회’처럼 연용해서 쓰인 예는 드물며 더욱이 오늘날의 사회라는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社)’는 원래 토지의 신을 의미하여, 새 왕조를 세우면 반드시 토지의 신인 ‘사’와 곡물의 신인 ‘직(稷)’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사직(社稷)은 곧 국가를 의미했다. 행정단위로는 25가(家) 또는 사방 6리(里)를 ‘사’라고 했다. 조선 중기 한 ‘가(家)’의 구성원 수가 100-200명을 상회하기도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미암 유희춘의 경우) 그런 ‘가’가 25개씩 모여 있는 ‘사’는 매우 큰 조직인 셈이다.

또 사회에서의 ‘회(會)’는 원래 고기와 같은 음식을 담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하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는 데서 모인다는 말로 뜻이 넓어졌다. 이처럼 ‘사’와 ‘회’는 각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전근대 사회에 도입된 ‘사회’라는 말은 근대적 개인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형성된 관계를 말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근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번역어들이 당시에 이해되기 힘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근대에서의 사회는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가(家)’의 결합이었고 그것도 봉건제를 바탕으로 하는 결합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자(自)’나 ‘기(己)’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가’에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나를 가리키는 ‘아(我)’ 자의 어원은 낫처럼 생겨서 벨 수 있는 무기인데, 글자 속의 ‘과(戈)’는 적이 아니라 아군 혹은 공동체 내의 배반자를 처단하거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쓰였던 무기였고 동물을 희생(犧牲)으로 쓸 때도 썼다. 희생 역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아(我)’는 오늘날 나를 의미하는 글자지만 원래의 의미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근대에서 ‘가’를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의 ‘호적을 판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호적에서 빠지는 것은 곧 사회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전근대 ‘사회’에 근대적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가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 
 
‘자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전근대 문헌에서 자연은 오늘날의 ‘네이춰nature’의 번역어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오늘날의 자연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더 넓은 개념이다.

외부에서의 충격이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동을 하면서 거기에 일정한 법칙, 곧 도(道)를 실현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그 실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므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하면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도는 자연에서, 스스로 그러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전근대의 ‘자연’은 명사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도 주체인 나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곧 ‘자연’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근대의 ‘자연’은 이를테면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며 내 마음까지 투영된 자연이다. 이에 비해 ‘네이춰’는 주체와 대립하는 대상이면서 정신과 대립한다. 
 
기(氣)의 경우는 번역의 어려움이 더 크다. 우리는 ‘氣’를 그냥 ‘기’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vital force’ 혹은 ‘vital energy’ 등으로 번역한다. 영역에도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氣’를 ‘기’라고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한 단계 올라선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역된 용어는 적어도 기를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외국어로 인식하는 것과 자국어로 인식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외국어로 기를 보게 되면 적어도 기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설혹 기 본래의 의미는 알 수 없거나 일면적인 이해에 그친다고 해도 대상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氣’를 모국어로 보게 되면 ‘氣’ 본래의 뜻과 기존의 모국어로서의 기의 뜻이 뒤섞이게 되어, 마치 ‘nature’를 자연이라고 번역하면서 본래의 ‘自然’이라는 뜻을 혼동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Ch'i’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 
 
번역이 어려운 것은 어학상의 단어나 문법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려운 영어나 한자 단어 때문에 해석이 안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문법을 잘 몰라서 해석이 안되는 것만도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것은, 사실은 번역이 될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용이란 곧 그 글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체계를 말한다. 바로 이 인식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어려움이 생긴다. 
 
위에서 말했던 기를 예로 들어보자. 
 
기는 무엇인가. 많은 정의가 있어왔지만 오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 서양과학의 인식, 곧 대상은 주체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과 대비하여 말한다면, 기는 주체의 몸으로 느끼는 현상이며 이런 점에서 신체적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를 에너지로 정의하든 물질로 정의하든 아니면 물질도 정신도 아닌 어떤 신비한 것으로 정의하든 기는 몸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는 객관적으로 주체와 독립한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몸을 통해서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이런 관점은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는 오로지 생산과 유통과정, 곧 교환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의 경제활동(직업으로서의 정치나 외교 등도 포함된다)과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이론 작업, 곧 근대 서양과학(자연과학은 물론 인문과 사회과학을 포함한다)의 학습과 그 실천과정에서만 대상을 객관화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제외한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대상이 객관화되는 일은 없다. 특히 소비에서는 철저하게 대상과 하나가 되어 소비한다.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당신과 이제는 사용가치를 즐기기 위해 떠나야 하는 당신이 완벽하게 분리된다. 교환가치의 생산을 위해 머무는 곳(이곳도 자연이다)과 사용가치를 즐기기 위해 머무는 곳(이곳도 자연이다)도 분리된다. 
 
인간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아무도 어머니나 아버지, 가족은 물론 친분관계를 갖는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몸무게 몇 킬로그램에 키 몇 센티 등으로 수학화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모든 것이 대상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일상의 삶과 사회적인 삶이 분리됨으로써 사람들은 교환가치의 생산을 위해 일할 때는 자신을 하나의 동물, 기계로 느끼고 그 일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사람임을 느낀다. 일은 그 일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근대에서의 자연은 나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몸을 통해 느껴지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는 대상이라는 표현도 사실상 부적절하다. 동서양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보통 대우주(자연)와 소우주(몸)를 말하는데, 이런 발상은 바로 자연과 몸이 하나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 다른 말로 하자면 위계질서는 있어도 모두 하나의 우주일 뿐이다. 
 
기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바로 이런 인식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번역하려는 사람은 물론 번역된 글을 읽는 사람도 이런 인식의 차이를 이해할 때 그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근대적 용어를 번역하면서 생긴 혼란과 어려움은 바로 이런 인식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신경(nerve)이라는 역어는 무엇을 도입했는가 
 
이제 ‘신경’이라는 말이 어떻게 도입되어 번역되었는지를 보자. 
 
1815년에 발행된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중영사전 1권은 ‘nerve’ 라는 영어를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그는 기(氣)를 ‘nervous fluid’라고 번역했다. 기를 신경의 흐름(액체)으로 이해한 점이 특이하다. 모리슨의 기에 대한 이해 방식은 고체로서의 신경이 아니라 신경과 연관을 갖는 액체이다. 이는 기의 한 측면, 곧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무엇이라는 기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비해 1851년에 벤자민 홉슨은 전체신론에서 신경계를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하면서 신경을, 뇌의 활력을 전달하는 건(腱), 또는 근육이라는 의미에서 뇌기근(腦氣筋)으로 번역하였다. 모리슨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여기에서는 액체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홉슨이 신경을 뇌기근으로 번역한 것은 분명히 선교상의 이유에서였다. 홉슨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의식과 경험, 감각은 모두 신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말함으로써 그때까지 모든 의식과 경험, 감각이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이며 이것이 사건을 통해, 곧 몸과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정(情)으로 드러난다는 인식체계를 부정한 것이었다. 이는 뇌를 정신의 본원으로 내세우기 장치였다.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홉슨의 말을 들어보자. 
 
“눈에 뇌기근[신경]이 없으면 볼 수 없고, 귀에 뇌기근이 없으면 들을 수 없으며, 코에 뇌기근이 없으면 향과 악취를 가릴 수 없고, 혀에 뇌기근이 없으면 달고 쓴 맛을 알지 못한다. 온몸의 손발이 아픔과 가려움, 차고 뜨거움, 부드러움과 단단함, 껄끄러움과 미끄러움을 알고, 고금을 기억하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뇌가 지도하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뇌는 머리뼈 안에 있는데 어떻게 온몸을 운용할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뇌는 매우 높은 곳에 있어 한 몸의 주재자이다. 다만 그 기근이 새끼처럼 줄처럼 실처럼 나뉜 것을 함께 ‘뇌기근’이라고 말하니, 모두 온몸을 휘감아 5관(五官)·백체(百體)·피육(皮肉)·근골(筋骨)·장부(臟腑)의 내외로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온몸은 뇌가 시키는 것을 따르고,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니 만일 손과 발과 살의 뇌기근이 망가지면 폐해져 쓸 수 없다.”(合信, '全體新論', 8 '腦爲全體之主論') 
 
“모든 사람의 영혼은 두뇌의 가운데 있고 영혼은 묘하게도 바탕이 없이 온몸의 뇌기근을 빌어 그 쓰임을 운용한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피차 모두 같으니 그 쓰임은 눈에 볼 것이 있으면 뜻하여 보게 하고, 귀에 들을 것이 있으면 뜻하여 듣게 한다. 언어 또한 이와 같고 행동 또한 이와 같다.”(合信, 앞의 책, 40 '靈魂妙用論')
 
여기에서 홉슨은 전통적으로 사고와 생명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설(心主說)을 부정하고 뇌주설(腦主說)을 내세운다.

그는 자율신경의 작용을 예로 들면서 “뇌기근이 있어서 항상 스스로 행동할 수 있으니, 그 작용은 사람의 뜻이 명령함을 기다리지 안는다”(合信, 앞의 책, 8 '腦爲全體之主論')고 말한다. 나아가 홉슨은 “폐가 항상 호흡하고, 심장이 항상 열리고 수축하고, 위가 소화하며, 신장이 오줌을 만들고, 성기가 정(精)을 만드는 등의 이치가 이것이다.

충분히 잠에 푹 빠진 사람의 입에 물을 넣으면 입이 스스로 삼킬 수 있고, 그 발을 간질이면 그는 반드시 움츠린다. 그 눈을 들쳐서 불로 비추면 그 눈동자가 반드시 작게 수축하고 빛을 피한다. 이와 같은 종류가 뇌근이 스스로 감각하고 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력(氣力)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니, 또한 그 사람의 의지가 아니다”(合信, 앞의 책, 8 '腦爲全體之主論')라고 말한다.

이제 사람은 마음과 분리되지 않은 몸으로 대상이 나에게 작용하는 효과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율신경이 그러한 것처럼 나라는 주체와는 별개의 객관적으로 독립된 물질, 곧 신경에 의해 느끼는 존재가 된다. 이 신경은 영혼이 작용하는 기틀이다. 
 
홉슨은 영혼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각오(覺悟)’로,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분별하며 사려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심성(心性)’으로, 욕망이나 바람, 성정(性情), 의지 같은 것이다.

영혼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어서 태어나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 벌을 받는다. 영혼을 더럽힌 사람은 문둥병 같은 병에 걸린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좋은 의사이고 '성서'는 좋은 약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신(God)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홉슨의 목적은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홉슨이 신경(뇌기근)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기(氣) 
 
전통적으로 인식의 출발점인 ‘의(意)’는 마음[心]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靈樞 本神第八)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心]은 외부의 대상과 접하여 반응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은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心]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마음이 외부와 작용하는 통로가 아홉 개의 구멍[구규(九竅), 곧 눈, 코, 입, 귀, 항문, 요도]이며 이런 통로를 통해 나는 외부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외부를 느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아홉 개의 구멍은 내 몸의 기가 외부의 기와 상호 교통하는, 교제하는 곳이다.

이 교제는 몸 내외의 기를 전제로 한다. 사물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몸 안에 빛을 볼 수 있는 기가 없으면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는 표현은 몸에 대한 이런 인식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안 밖의 교제 과정을 통해 몸으로 느끼는 효과가 바로 기이다. 곧 기는 몸 밖의 대상이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작용(이것도 기이다)이 몸 안의 기와 작용한 결과 효과로서 느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외부의 기와 내부의 기가 상호 작용한 결과다. 예를 들어 전근대 사회에서 음식의 성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기미(氣味)가 있는데 여기에서 기는 차고 더운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차고 더움은 그 음식 자체가 갖고 있는 객관적인 성질로서의 물리적 온도가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들어가 몸 안의 기와 작용하여(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사계절의 기에 의해 규정되면서) 내 몸에 차거나 더운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의 온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사물이 나를 미혹하게 할 수 있지만 그 유혹은 내 몸 안의 기와 작용하여 일정한 작용을 해야 느낄 수 있다(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작용의 결과 나타난 내 몸의 기를 상화(相火)라고 한다).

마음의 변화는 마음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몸이라는 기 덩어리의 변화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작용에 따른 변화나 효과를 느끼는 것은 특정한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몸 전체다.

다시 말해서 몸 자체가 하나의 기이기 때문에 외부의 작용은 그것이 음식이든 기후든 아니면 사건이든 그것 자체가 역시 또 하나의 기로서 내 몸의 기와 작용을 주고받게 되고 그 결과 변화된 기의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그것이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정서든(한의학에서는 슬픔이나 기쁨도 역시 하나의 기일 뿐이다), 아니면 판단과 같은 사고과정이든 모두 몸의 기라는 차원에서 설명된다. 
 
기를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세계를 통일된 하나의 전체, 곧 기일원론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양념이 많이 된 음식을 좋아한다. 그 양념 중에서도 특히 매운 맛을 좋아한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때 자연을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연과 인간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고 해도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예에서 음식보관의 필요성 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하고 그러므로 음식을 소금에 절이거나 갖은 양념을 해서 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날씨와 음식과의 관계만을 고려하여 분석한 다음 사람을 거기에 결합시킨 것이다.

이런 설명은 자연을 주체인 몸과 분리시켜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분석한 뒤 소위 종합한 결과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는 말리거나 훈제하는 방법도 음식보관에 유리한데 양념, 그 중에서도 왜 매운 맛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에 비해 한의학에서는 더운 곳의 사람들이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에는 사람의 몸속은 상대적으로 차게 된다(이를 복음(伏陰)이라고 한다). 날씨라는 자연은 이미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거기에 따라 내 몸도 이미 변했다. 그러므로 내가 섭취할 자연은 아무 것이나 일 수 없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음양의 질서를 맞추기 위해 내 몸에는 필연적으로 속을 덥히는 자연이 필요하다. 그 자연은 매운 맛이다. 그러므로 더운 곳의 사람들은 음식을 말리거나 훈제하지 않고(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매운 맛을 중심으로 양념을 진하게 한다. 우리가 더운 여름에 삼계탕을 먹는 이유도 내 몸이 자연과의 교류를 통하여 닭고기와 인삼의 더운 기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설명 방식은 기일원론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자연이 분석과 종합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내 몸과 하나인 세계, 자연과 몸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 자연에 대한 실천이 곧 몸에 대한 실천이고 몸에 대한 실천이 곧 자연에 대한 실천인 세계, 그럼으로써 자연과 몸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 작용하면서 조화될 수 있는 세계(만일 조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병이라는 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가 기일원론의 세계다. 

 
순환적 발전과 관계의 세계 
 
동양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을 오행의 논리로 설명한다. 오행은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의 양태를 각각의 성질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서 분류라고 했지만 이 분류는 배제를 위한 분류가 아니라 그렇게 분류된 것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분류다. 이는 생식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따라 하나의 종(種)을 다른 종과 구분하고 배제하는 근대 서양 식물학의 분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을 하나의 기로 보는 관점은 모든 사물을 그것이 생겨나 발전하고 성숙해져서 다시 쇠퇴하게 되는 일련의 순환과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오행에서 말하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는 현실의 나무나 불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현실에서 하나의 기가 생장화수장(生長化收臧)하는 운동 양식을 정식화한 것이다.

생겨나서 자라며 무르익어 거두어지는 발전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단계들은 서로에 대해 상대의 기를 낳아서 키워주거나[相生] 반대로 억누르는 작용[相克]을 한다. 예를 들어 사계절은 기후라는 하나의 기의 발전과정이지만 봄의 기는 여름의 기를 낳아 키우며[木生火] 여름의 기는 겨울의 기에 의해 제압된다[水克火]. 
 
또한 오행의 논리는 다양한 층차를 갖는 다양한 사물들을 다섯 단계의 기의 양태로 분류함으로써 같은 기의 발전단계에 있는 사물 사이에 마치 같은 음(音)이 공명하듯 동질적이면서 서로 작용하게 되면 그 기를 더 강화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발전단계에 있는 사물 사이에는 낳아서 키워주거나 반대로 억누르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오행의 체계가 완성되면 이제 마음이나 색깔, 계절, 오장육부와 같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기의 상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감정은 여름의 기를 억누르기 때문에[水克火], 음양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공포영화는 여름에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마음과 몸, 그리고 신경 
 
마음의 경우에도 장기의 오행분류에 따라 예를 들어 성내는 감정은 간과 같은 기이고 기쁜 감정은 심장의 기와 같다는 식으로 배속된다. 같은 기라고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오히려 같은 기를 상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지나치게 내면 간을 상하게 된다. 이러한 작용은 상호 작용과 반작용이 가능한 열린 관계다.

따라서 간이 나빠지면 성을 잘 내게 된다. 다양한 감정 상호간의 관계 역시 오행에 따라 성립된다. 그러므로 성내는 감정은 슬픈 감정에 의해 누그러지게 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어서 이 세계가 하나의 기로 이루어졌다는 전근대의 사고가 완성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마음과 몸을 나눈다는 것은 다만 기의 양태의 차이 혹은 기의 발전 단계의 차이를 나누는 것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유를 담당하는 뇌를 따로 설정하지 못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유 역시 몸 전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그것은 생명의 근본 물질인 정(精)이 변화하여 만들어지는 수(髓)가 모이는 곳일 뿐이다.

전근대의 사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두고 심주설(心主說)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심(心)은 사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오장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의학에서의 사유는 몸 전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는 심주설이 아니라 몸주설(主說)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바로 이런 세계 속에 홉슨은 신경이라고 하는 객관적으로 독립된 물질을 도입함으로써 몸과 마음은 물론 세계는 기로 이루어졌다는 기일원론을 정면에서 부정하게 된다. 이제 세계는 상호 관계를 갖지 않는, 혹은 배제의 관계를 갖는 사물들의 세계가 된다.

홉슨이 도입한 신경이라는 개념과, 감각을 느끼는 몸과 관계없이 오로지 신경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영혼이라는 개념은 바로 마음과 몸을 분리시키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기 개념의 부정이며 나아가 모든 전근대적 사고의 부정이었다. 

 
감각을 상실한 물질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성질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물질의 제1성질은 물질에 속해 있으면서 인간의 감각기관의 인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성질이다. 크기나 모양, 운동 등이 그러한 성질에 속한다. 이에 비해 물질의 제2성질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주관적인 성질이다. 여기에는 맛, 소리, 냄새, 색 등이 속한다. 
 
근대 서양의 과학은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물질의 제2성질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한다. 물질의 제2성질을 부정함으로써 자연은 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수학화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대상을 양적(量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임의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표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기초다. 어떤 상품이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표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나아가 질적인 것도 표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색이나 냄새, 맛과 같은 것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동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똑같은 입맛을 갖게 되며 입맛 이외의 다른 감각에서도 똑같은 대상에 대해 똑같은 느낌을 갖도록 강요당한다. ‘미스 코리아’라는 미(美)의 정형이 탄생하는 것도 이런 표준화의 요구다. 이제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36-24-36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는다. 
 
거칠게 말한다면 인식 주체의 감각에 기초한 주관적인 물질의 제2성질은 상품의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사용가치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반면에 제1성질은 교환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물질의 제2의 성질을 배제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유용한 쓰임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환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

그런데 어떤 상품이 다른 것과 교환되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교환의 기준이 되는 동가(同價)의 무엇(동일한 단위)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환원되어야 할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았던 ‘등질부분’이기도 하다('동물지'). 
 
이런 동가의 무엇은 노동이라는 측면에서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추상적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구체적인 노동은 주체에게 ‘유용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고, 추상적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형태나 그 결과물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상품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추상적 노동의 경우, 그것이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것이건 살기 좋은 집을 만드는 것이건 모두 단순한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 파악된다.

옷을 만드는 노동과 집을 만드는 노동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추상적 노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과 같은 것들을 생산적으로 사용한 결과일 뿐이며 오로지 양적인 측면(노동 시간의 양)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에 비해 물질의 제2성질을 만드는 구체적 노동의 생산 결과물은 나에게 유용한 것이다. 그것은 교환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오로지 소비하는 주체의 감각을 통한 것,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그러므로 유용한 것이다. 
 
기는 바로 이러한 물질의 제2성질, 감각에 기초한 개념이다. 이는 근대적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기는 객관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추상적 물질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기는 주체의 감각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주체의 기의 상태에 따라 늘 변화한다. 같은 부류끼리는 통하며(공명하며) 다른 부류의 기와는 오행의 논리에 의해 상호 작용한다.

하나의 기(의 양태)를 다른 것과 교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교환을 위한 기준, 곧 동가의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환원이 되기 위해서는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는 그 자체가 양화(量化)될 수 없는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환원은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신체적 인식을 배척한다. 물질에서 정신을 배제함으로써 데카르트는 물질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물질에서 독립한 정신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기 인식을 추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추상적 노동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을 확보함과 동시에 사유의 자립성, 곧 근대적 주체를 확립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인식의 근대화다.
 
이는 감각적 인식, 신체적 인식에 기초한 전근대 사회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봉건적 질서[家]에 예속된 전근대적 개인의 해방, 곧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기도 했다. 
 


"민중의료는 독자체계 구축 못하고 소멸"

오늘날 한의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내용에서도 과거의 한의학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모습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한의학의 근대 서양의학과의 결합 내지 근대 서양의학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의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변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학문의 대상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 특히 한의학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며 또 시대의 흐름에 따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과거와 어떤 점에서 다르며 어떻게 다른가를 규명하지 않으면 오늘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또 나아가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 속에서의 학문 체계로서의 한의학을 이해할 필요가 생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은 과거, 정확하게는 전근대 사회 속에서의 한의학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규명함으로써 한의학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근대의 한의학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한의학의 내포와 외연을 확정짓는 것은 한의학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문헌이나 제도에 의해 전승되어 온 이론이나 임상이 사실은 전근대 사회의 일부분에 한정되어 이해되고 실천되었다는 점, 따라서 대다수 민중의 삶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는 점, 또한 대다수 민중의 의료를 담당한 계층과 그러한 임상 실천의 내용, 이론적 구성은 기존의 한의학과 일정한 층차를 갖고 있다는 점 등으로 인해 전근대 한의학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잣대는 무엇인지, 그러한 잣대의 차이에 따른 근대와 전근대의 이해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또한 전근대 사회 속에서의 한의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황제내경 이전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이후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이론적 경향과 분파의 성립은 무엇을 한의학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를 어렵게 한다. 
 
위의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해 본 논문에서는 나름대로의 입장을 세우고 연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첫째는 한의학이 전근대 사회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한의학은 당대의 사회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리고 가장 선진적인 이론과 실천 체계라는 점에서 다른 맹아단계 혹은 기술 수준에서의 의료를 대표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한의학은 자신의 고도한 이론과 임상 체계로, 당시 사회에서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여러 의료 체계 혹은 기술 체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역사에서 양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비록 數的으로 적지만 그것이 미래의 변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그 역사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의학은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다. 양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던 것이 다음 시대에 소멸되거나 아니면 다른 체계로 흡수되어 버렸다면 그 존재 자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는 갖지만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서는 그만큼 그 의미가 축소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한의학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의학 체계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소위 민중 의료의 역사적 경과에 관한 부분이다. 소위 민중 의료는 부분적으로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론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결국 한의학이라고 하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융해되어 가거나 아니면 자신의 전승 체계를 갖지 못함으로써 소멸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최근 대체의학 혹은 대안의학(심지어는 보완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행해지던 민중 의료의 내용이 근대 서양의학의 틀 속에 융해되어 일부는 소멸되어 갔지만 일부는 다시 부활하는 현실과 연관하여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두 번째로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잣대에 대해서 본 논문에서는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을 택한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소유관계의 변화와 거기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바탕을 두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나타나는 문화 양태의 차이를 잣대로 삼는다.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에서 언급할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의학사에 대한 전반적인 논구를 통해 검증되어야 할 작업이지만 일단 본 논문에서는 '황제내경'과 '상한론' 그리고 그 이후의 임상과 이론적 발전의 산물인 금원사대가, 이를 다시 종합한 '동의보감'에서 완성된 한의학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중국의 경우, 금원사대가를 종합한 시도가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으며 명말청초에 도입된 근대 서양의학의 영향과 그에 따른 다양한 변모라는 사정이,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전근대 사회 속에서의 한의학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며, 일본의 경우에는 금원사대가로부터의 일탈(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동의보감'이 '황제내경' 혹은 금원사대가의 이론과 임상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봉건적 사회 구조에 가장 적합한 의서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동의보감' 자체도 매우 방대한 체계를 갖고 있으며 또 그 안에는 매우 다양한 편차를 갖는 이론과 임상이 포함되어 있어서 한 마디로 규정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동의보감의 이해를 위한 전제로, 동아시아 전근대 의학의 일반적인 특징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는 '동의보감'이 무엇보다도 동아시아 전근대 의학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전근대 의학의 일반적인 성격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동의보감'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의학만이 아니라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전근대를 근대의 관점에서 보는 오늘날의 무반성적이며 비역사적인 관점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반성적 인식을 기본으로 하는 철학계에서조차 이런 태도가 보인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근대 의학에 대한 본고의 접근은 그러한 학문 풍토에 대한 직간접적인 비판이 될 것이다. 
 
전근대 시대에 대한 비역사적 접근은 특히 한의학계에서는 ‘상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황제내경을 황제가 직접 지은 것으로 간주한다거나(의학의 聖人 창조설)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체계로 간주하는 연구자 혹은 임상가가 적지 않은 것이 한의계의 현실이다.

전근대의 한의학은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임상에서의 변화나 발전은 무의미하다는 의미에서 과거의 이론과 처방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한의학계에서는 한의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백안시하거나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의계에서 이러한 비역사적 접근이 가능한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사람의 몸이라고 하는 조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점과 한의학은 서양의학에 비해 상당히 오래 전에 상대적으로 완결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 한의학 이론의 유기적 성격으로 질병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전근대와는 다르며 거기에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 인식, 그리고 총체적으로 문화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음양오행을 믿지 않으며 자연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실적인 자연에 대한 태도는 정복과 약탈 이상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자연에 대해 전근대적인 접근을 한다는 것은 경쟁에서 뒤지는 일이며 경쟁에서 뒤진다면 더 이상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으로는 무엇보다도 의학이 실현되는 사회구조가 바뀌었고 또 명백한 현실로 근대 서양의학이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한의학은 변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동의보감에 대한 연구는 크게 임상적 측면에 대한 연구와 실험실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일부 의사학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작은 흐름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동의보감'에 대한 연구는 '동의보감'이 탄생하여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종적 연관(역사성)과 그것이 실현되는 당대의 횡적 구조(사회성과 철학성)를 도외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에 형성되고 사용되었던 개념들을 근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비역사성) '동의보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어렵게 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역사성과 철학성을 담보한 연구가 한의학, 좁게는 '동의보감'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특히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전근대와 근대라는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고를 통하여 밝혀지겠지만, 전근대를 전근대로 이해하지 않는 관점은 전근대 혹은 근대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설정하려는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동의보감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비역사적이며 비철학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文史哲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공자는 '시경'을 정리했으며 주희의 글을 집대성한 '朱熹集'은 詩를 비롯한 文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은 근대적 학문 체계 속에서 文은 문학으로, 史는 史學으로, 哲은 철학으로 해체되었다. 그럼으로써 전근대를 전근대로 볼 수 있는 틀을 벗어나버렸다.
 
따라서 본고에서는'동의보감'이라고 하는 의학 분야를 다루지만, 그것을 전근대를 역사로서 볼 뿐만 아니라 철학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럴 때에만이 전근대 의학으로서의 '동의보감'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누구나 '동의보감'을 보아왔고 누구나 '동의보감'에 의거해서 임상실천을 해 왔지만 그것은 근대의 관점에서 본 '동의보감'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통한 나름대로의 '동의보감'일 뿐, 정작 '동의보감'을 '동의보감'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면 먼저 과거에 대한 역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변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동아시아의 전근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근대 의학의 특징과 전근대 의학의 대표적인 예로서 '동의보감'의 역사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

이를 '동의보감'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목차와 '동의보감'의 사상적 이론적 구조를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동의보감' 제일권 '내경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한의학은 漢醫學, 韓醫學, 동양의학, 중국의학, 중의학, 한방, 한방의학, 전통의학, 민족의학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한의학은 그냥 ‘醫學’이었다. ‘漢醫學’은 거란족의 국가인 遼에서 자신들의 國醫인 契丹醫와 구분하여 漢族의 의학이라는 의미에서 ‘漢醫學’ 혹은 ‘中原醫’라고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던 것이 제국주의와 함께 서양의 문물, 특히 근대 서양의학이 들어오고 식민지화 과정과 함께 그것이 헤게모니를 장악함에 따라 ‘西醫’, ‘洋醫’ 등으로 불리던 근대 서양의학은 그냥 ‘의학’으로 불리게 되고 상대적으로 기존의 의학은 ‘漢醫學’으로 불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한의학 말살정책을 편 명치유신의 정책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기존의 의학은 단순한 기술에 불과한 ‘漢方’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므로 ‘漢方’이라는 말에는 기존의 의학을 멸시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


"교환가치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 몸인가"


1절.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특징 
 
전근대 사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자면 대상과 주체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유기적 총체성(organic totality)에 기초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사회와 사람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작동하는 구조,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간 사유의 양식도 유기적 총체성을 띈 사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대상은 인식하는 주체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서 대상 자체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내 눈 앞에 대나무가 있다고 할 때 대나무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대나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곧 대나무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이 가능하다. 
 
왕양명이 하루 종일 대나무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대나무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왕양명은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곧 대나무에 대한 실천을 매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대나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은 조건에서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해결, 소위 진리에 대한 문제는 儒家의 경우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의 해결책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리가 내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간주하거나[心卽理] 아니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理[이를테면 天理]를 주체인 내가 일정한 틀을 갖고 궁구해나가는[格物] 방법이다. 주체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 자체에 대한 궁구는 그 어느 경우에도 제기될 수 없는 문제였던 셈이다. 
 
道家의 경우에도 대상 자체에 대한 탐구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서 볼 때, 도가는 대상의 진리는 道이며 주체인 나는 다만 도를 내 몸에서 실현하는 것, 곧 자연스러운 실천이 문제가 될 뿐이다. 유가와 도가의 차이는 유가의 理가 만물의 理라고 해도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인 차원[특히 도덕]에 한정되고 있는데 비해[修己治人] 도가의 그것은 자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물 자체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2절. 근대란 무엇인가 
 
이에 비해 근대 사회는 전근대와 근본적인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먼저 본고에서 말하는 근대란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전자본주의 사회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그것은 노동주체의 사회적 존재형태에서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노동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생산관계의 형태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사회관계가 物象的 관계로 전화되어 物과 物의 관계로 현상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와 달리 근대의 인식에서는, 위와 같은 조건 하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인간과 사회 혹은 자연과의 관계는 物化되어 객체는 물론 주체 역시 대상화된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통하여 이제 대상은 분석의 대상(곧 인간에 의한 자의적인 작용의 대상)이 된다. 
 
이 분석은 보편적으로, 또한 等價的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다시 대상의 질적 측면까지를 量化하거나 아니면 양화될 수 없는 부분은 배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객관적으로(흔히 ‘과학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양화된 대상은 예를 들면 물리학에서는 세포, 물리학에서는 분자, 사회에서는 가치와 같은 것으로 환원된다. 
 
이제 객체와 분리된 주체는 대상화되어 특정한 요소로 환원되게 되며, 스스로도 생산과정에서의 분업에 필요한 한 부품 혹은 요소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원자론적 사고가 일상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근대의 특징이다.
 
다른 한편 생산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에는 性的, 사회적 분업이 주요한 분업의 형태였음에 비해 근대 사회는 생산과정에서의 분업이 더 중요한 형태가 된다. 이에 따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분업의 분해 정도만큼 분해되며 소외 역시 확대된다. 
 
근대적 분업에 기초한 소외는 이론에서도 반영되어 이론의 분석적이며 분절적인 경향이 강해진다. 물리학적으로 참인 것이 화학적으로도 참인지, 나아가 자연이나 사회, 그리고 몸에서도 참임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교환가치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의학에서 개별성[情]보다는 보편성[性]을 추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한의학에서도 증상들을 변증하여 병의 본말을 가리고 개개인이 자연과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내는 神을 알아내기보다는 病名이라는 보편성을 선호하게 한다. 
 
식물의 분류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주례'에서 식물을 그것이 서식하는 토양에 따라 분류한 것은 그 식물을 자연과의 연관 속에서 분류한 것이다. 그 식물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는가 하는 문제는 그 식물의 성장조건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주체인 ‘나의 몸에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습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습기를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은 나에게 습기라는 기를 준다. 나는 기를 매개로 그 식물과 끊을 수 없는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이해방식은 우주 전체에 대한 보편적 인식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다음의 글은 대상에 대한 전근대적인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침저녁으로 화초들을 보니 그 性이 습기에 마땅한 것과 건조함에 마땅한 것이 있고, 또 차가움에 마땅한 것과 따뜻함에 마땅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일 때마다 한결같이 옛날 방법대로 하였고, 옛 법에 없는 것은 혹 전해들은 것을 참고하였다. ... 그런 뒤에야 제각각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것은 다만 화초 각각이 타고난 천리[天]를 온전하게 하고 각각의 성을 따랐을 뿐이지만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天性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전근대의 인식은 습기나 한열과 같은 대상이 갖고 있는 자연과의 연관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인 나와 결합된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충하여 양생법으로 내 몸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면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도 통하게 된다. 
 
이에 비해 근대적 인식은 대상을 대상 자체로 분리한다. 근대 학문에서 내거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cetreris paribus)’이라는 전제는 바로 이러한 분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근대 학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근대 학문에서 ‘다른 조건’은 불순한 요소로 배제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조건이 변한다면 분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거나 변화하는 모든 조건 하나하나에 대해 그 조건 이외의 다른 조건을 고정시킨 분석(아마도 무한한 경우가 나오겠지만)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대 학문에서 얻은 진리는 ‘다른 조건이 변한다면’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조건’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근본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는 전제는 현재 분석할 대상 이외에 그 대상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땅은 또 하나의 비유기적 육체"


3절. 전근대 한의학의 지리경제학적 특징
 
한의학은 동아시아 전근대의 모든 이론과 실천이 그러하듯이 농경사회에서 탄생한 의학이론이며 임상 체계다. 물론 한의학의 형성과정에는 인도의학과 티베트의학의 영향1)이 없을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는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농경사회는 다른 사회, 특히 유목사회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농업은 특정한 지역의 토지에 긴박(緊縛)되어 행해지는 경제행위다. 일정한 기간 동안 특정한 지역에서 경작(耕作)과 수확이 반복되는 농업의 특성상 전쟁이나 계절과 같은 조건에 따라 그때마다 이동해야 한다면 농업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정착에 대한 요구는 전근대 사회에 적용되었던 직업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상업을 가장 천시했던 것은 상업이 본질적으로 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은 자연, 특히 토지라는 조건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토지는 땅과 그 의미가 다르다. 땅은 거주를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늘이 준 식량의 거대한 창고다. 땅은 인간의 모든 생산활동이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곳(작업장)이면서 최초의 생산수단을 제공하는, 모든 생산활동의 전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땅은 또 하나의 비유기적 육체라고도 할 수 있다. 토지는 그러한 땅 중에서 생산활동을 위해 인간에 의해 점취(占取)된 땅을 가리킨다. 특히 인류의 초기 단계, 원시 공동체 단계에서는 인간 자신이 가축과 더불어 객관적인 자연물의 계열 중 하나를 이루어 땅의 부속물로서 매몰되어 나타난다.
 
둘째로 농업이 토지에 긴박되어 이루어지는 경제행위라는 조건은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곧 농민의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한 규정의 하나는 사람 중심, 땅 중심의 세계관이다. 농경사회에서의 세계는 땅에 묶여 있는 나를 중심으로 운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은 내가 뿌리박고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에서는 자연의 변화, 곧 목초지의 이동에 따라 나도 이동해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유목사회의 세계관은 하늘 중심의 세계관이다.

셋째로 농경사회라는 특수성은 폐쇄적 공간을 전제로 한다. 농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정적으로 점취된 땅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외부에 대해 열린 공간이 아니라 고립된 공간이어야 한다. 농사를 지으려면 물을 가두고 도랑을 쳐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끝없이 움직이는 열린 공간을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한다. 정착 생활에 필수적인 상하수도 시설이나 관개시설은 유목사회의 개방성을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
 
넷째는 기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폐쇄성에서 오는 것이면서 봉건제라는 정치, 경제 체계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하지만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생활을 위해 자기 완결성을 강조하게 되며 폐쇄된 공간 속에서의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를 불가결하게 요구하게 된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외부사회를 자신의 생존 조건의 하나로 하며 톱니바퀴와 같은 완결된 유기적 관계보다는 각 조직 사이의 다양하면서도 신속한 교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다섯째로 농경사회는 관개의 필요성과 노동집약적인 전근대 농업의 특성상 상명하달식의 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이 조직화는 봉건제의 구조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가'(家)라고 하는 사회조직으로 나타나며 사회의식(조직을 포함하는 것이지만)에서는 '례'(禮)로 나타난다. 동아시아에서 영어의 ‘state’를 '국가'(國家)로 번역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國)은 '가'(家)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농경사회가 다른 사회를 지배하고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는 철저하게 ‘가’와 ‘예’의 체계로 재편되어야 했다. 그리고 ‘가’와 ‘예’를 지탱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유교, 특히 주자학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사회는 모두 무례(無禮)한 야만사회로 간주된다. 
 
이에 비해 유목사회는 그러한 ‘가’나 ‘예’의 체계가 없었다. 거기에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경쟁하는 부족 혹은 나라가 있을 뿐이었으며 칭기스칸과 같은 강력한 구심점이 마련되면 곧바로 그들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목사회가 다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은 그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지배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사회가 갖고 있던 기존의 질서와 이데올로기는 거의 그대로 유지되며 각 사회의 독자성과 다양성이 인정된다.

 
4절. 전근대 한의학의 봉건제적 특징
 
전근대 사회의 특징을 살피기 위하여 경제적인 측면 외에 정치적인 측면도 중요하다. 전근대 동아시아 의학의 배경을 알기 위하여 본고는 주(周)나라 당시의 봉건제적 상황을 검토한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은나라의 '읍'(邑)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읍은 물가에 가까운 남향의 구릉 위에 수혈의 주거취락으로 형성되고 거주지는 동조동혈(同祖同血)의 관념 하에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씨족 내지는 분족(分族)이었다. 
 
읍에는 씨족적 결속을 위한 각 씨족마다의 사당이 있었고 읍 주위에는 경지나 목지, 임야 등이 있고 경지는 '전(田)이라고 하여 읍의 공유지가 있었다. 이 경지는 다른 목지나 임야 등과 함께 씨족 공동체에 의해 공동체적으로 소유되어 공동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읍은 상호간에 연합하여 씨족연합으로 성장하여 원시국가를 형성한다. 이것이 이른바 읍제(邑制)국가다. 읍제국가의 지배체제는 지배적인 씨족에 의한 지배 피지배 관계였다. 
 
이러한 읍제국가라는 틀 속에서 주나라로 왕권이 교체되게 되며 주나라는 새로운 지배질서로서 은나라 말기에 발전되어 오던 '봉건제'(封建制)와 '종법제'(宗法制)를 확립한다. 봉건제와 종법제는 중국의 서북지역 모퉁이에 거주한 낙후된 가족으로 출발한 주왕조로서 광대한 동방의 선진 지역을 통치할 경륜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자구책이기도 했다. 
 
‘봉건’은 주왕실이 새로이 자기의 지배권내에 편입된 분족(分族)을 그 지역의 지배자로서 파견하여 설치케 한 것이었으며, 그 분족의 중심이 된 것이 제후(諸候)다. 제후의 분봉은 실제로는 가족조직을 지방 행정조직으로 대체하여 새로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후가 '봉건'(封建)된 지역을 '국'(國)’이라고 하며, ‘국’이란 바로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을 말한다. 
 
따라서 봉건이란 주왕실을 분읍(分邑)과 동시에 분족(分族)의 과정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점령지를 통치하는 방식을, ‘읍(邑)을 설치하고 종(宗)을 세운다’고 한다. 이렇게 분읍된 읍은 다시 분족되어 도(都)라는 읍이 되고 국이나 도가 아닌 읍을 비(鄙)라고 했는데, 이러한 주실(周室), 국(國), 도(都)를 결속시키는 원리는 분족이라는 혈연적 연대의 관념이며, 현실적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의제화(擬制化)되었다. 
 
이러한 혈연적 연대를 나타내는 것이 '종'(宗)이었으며, 주실을 종주(宗周)라고 하였다. 종묘(宗廟), 종족(宗族) 등과 같은 것은 모두 이러한 관념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 관념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종법(宗法)이라고 하는 예제(禮制)였다. 
 
주나라에서 봉건제와 종법제가 시행되었지만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은 은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읍제국가의 원리인 씨족 상호간의 지배 - 피지배 관계였다. 따라서 읍의 전답은 지배자층인 씨족의 공동체적 소유에 속하고 궁극적으로는 주실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여기에서 왕토(王土)사상이나 왕신(王臣)사상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읍을 단위로 하는 계층적 지배관계에서 왕 또는 제후의 지배력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왕이나 제후의 정치적 지위는 동족(同族)에 의해 보장된 것인 만큼 국인(國人)이라고 불린 그 종족의 지배자층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주왕(周王)은 ‘국’의 백성 혹은 제후가 도민(都民. 都의 피지배층)을 직접 지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왕권은 아직 신장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라는 실체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봉건제와 종법제는 그 기초가 읍이었으며 읍은 다시 ‘가’라는 체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읍의 지배적인 친족 관계는 부자간의 차별과 남녀간의 차별, 적서(嫡庶)간의 차별이다. 이러한 차별은 뒤에 유교적 례(禮)의 질서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한의학은 ‘아직’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 과학


5절 전근대 한의학의 황로학적 특징
 
주나라의 易인 『주역』은 소위 고대적 중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근원이 된다. 『주역』은 역사상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주역』의 모습은 전국시대의 『주역』이다. 그러나 『주역』에는 전국시대에 발전한 陰陽이나 五行의 사상이 없다. 특히 오행은 주나라의 문화권에서는 배척하던 것이었다.

음양오행사상은 非周文化圈에서 연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비주문화권은 바로 산동성 북쪽을 포함한 발해만 주위의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齊나라였다. 이곳은 周 문화와는 다른 黃老學이라는 독자적인 문화가 성립한 지역이다. 바로 여기에서 음양과 오행이 결합하여 음양오행이라는 동아시아 고유의 사고체계가 탄생했던 것이다. 황로학은 이를테면 해안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소위 내륙문화라고 할 수 있는 주문화와 여러 측면에서 차이점을 갖고 있다. 
 
황로학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황로학은 人事를 중시하는 주문화에 비해 자연(우주)과 사회, 그리고 몸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인사를 중시하는 전통에서는 의학이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의학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황로학에서의 天은 우주, 자연, 역사, 인생 등을 포함하며 이는 氣象이나 物象을 통해 드러난다. 황로학에서의 ‘천’은 이를테면 자연의 질서다[自然天]. 그것은 사람의 자의적인 뜻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질서는 예를 들어 봄여름가을겨울, 風寒暑濕燥火, 자연에서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사람은 그 스스로 자연의 하나로서 이러한 질서에 따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유체계 속에서 건강은 자연의 흐름에 따를 때 얻어지는 것이다.  


반면 주문화에서의 ‘천’은 역사적 의지나 사회적 운명을 말하며 그것은 ‘덕(德)’이나 백성의 ‘民心’ 등으로 드러난다[人格天]. 맹자는 마음[心]을 다하면 性을 알 수 있고 ‘성’을 알 수 있으면 ‘천’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주문화에서 ‘천’은 도덕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천’은 사람의 마음과 같은 수준에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뭄이나 홍수, 유행병, 전염병과 같은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를 곧바로 정치적 상황과 연결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상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災異論이다. 재이론은 흔히 미신이라고 치부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글은 재이론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릇 하늘과 인간은 한 가지 기로 되어 있고, 기가 통하기 때문에 感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 상서란 하늘의 기쁨이며, 變이란 하늘의 노함인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노함이란 하늘의 기쁨이나 노함이 아니라, 바로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은 임금님의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님의 하시는 일이 至善이 아님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기쁜 마음은 和氣를 낳아 이 화기가 위와 아래에 충만할 것입니다.”

첫째, 재이론은 황로학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지만 자연과 사회, 그리고 몸의 보편적 연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연관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사회에서도 자연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재이를 곧바로 정치와 연결시킬 수 없다. 재이론은 자연과 사회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리하여 보지 않는 전근대적 사유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셈이다. 
 
둘째, 재이론은 주로 왕권과 臣權 사이에서의 정치투쟁의 수단이었다. 재이론이 논의되던 시기의 천문이나 의학 등의 문헌에서는 재이를 정치와 직결시켜 설명하지 않는다. 재이론은 대개 역사서와 같은 정치 문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7) 당시의 사람들이 미개하여 자연이나 몸에서의 재이를 정치와 직결시킨 것이 아니라 주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천’의 의지가 자연이나 몸에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민심 조작용으로서 재이론이 역할했던 것이다. 황로학의 전통 속에 있는 한의학에서는 유행병이나 전염병의 원인을 자연 질서 자체의 어그러짐이나 자연의 질서를 어긴 사람의 잘못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황로학을 道家와 法家의 결합이라고 평가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로학은 자연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정치에서는 엄격한 법의 질서와 힘에 의한 질서의 유지를 강조한다. 정치 역시 하나의 자연적 흐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일견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 곧 법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황로학에서의 자연은 대상화된 자연의 법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와 같은 차원에서 파악된 것이며, 사람 역시 그러한 질서의 하나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법 역시 자연의 질서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주문화에서는 禮를 중시하고 德을 숭상한다. 법은 일정한 사회적 틀[刑]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강제하지만 예는 일상생활을 규제하며 덕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까지 규제한다. 물론 황로학에서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로학에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비울 것을 요구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외부의 대상에 의해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질서를 올바로 볼 수 있고 거기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비해 ‘예’와 ‘덕’은 항상 타인에 대한 것이다. 내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修身]은 자연의 질서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집안[家]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齊家]이며 나아가 나라 사람들을 다스리고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治國平天下]. 몸을 다스리는 원리와 집안을 다스리는 원리,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는 모두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것은 예에 따르면서 덕을 키우는 것이다. 
 
황로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성의 포용에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 발생 초기에서부터 공자로부터 ‘怪力亂神’으로 불렸으며 맹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제나라 동쪽 野人들의 말’이라고 하였다(『맹자』 「만장」 상). 육로에 비해 자유로운 해상교통을 통해 해안문화는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그런 과정에서 경제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풍부한 문명도 함께 발전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주문화권에서는 왕도가 무너지니 제자백가가 분분히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로학은 바로 그러한 다양성을 포함하여 용광로와 같이 새로운 사상을 융합해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황로학의 結晶이 바로 한의학이었다.

 
6절 한의학의 탄생 
 
한의학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 맥락에서 형성되어 발전되어 온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농경사회와 그에 기초한 봉건제의 세계관과 방법론을 통하여 성립한 것이 바로 한의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의학은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향하며 이론의 유기적 정합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이 한의학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에는 외부와의 교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근대로부터 하나의 국가가 오늘날의 근대적 민족국가로 일직선상의 발전을 해온 것이 아닌 것처럼 한의학 이론의 형성과정에는 다양한 종족과 나라 사이에서의 경합과 융합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본고에서는 한의학의 탄생이 지리사회학적인 융합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은 농경문화인 황하와 양자강지역에서 발생한 의학과 유목문화인 북방의 의학 , 유목문화를 계승하면서 농경문화를 집대성한 발해만을 둘러싼 지역의 의학, 인도의학 등이 융합되어 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베트남과 일본에서 발전된 의학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의 중심은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의학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융합과 더불어 의학은 인류학적 역사의 총체적 산물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한의학은 단순한 인류의 의학적 경험을 종합한 경험의학이 아니다. 그것은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되어 온 인류의 경험과 이론을 종합한 것이다. 북방의 유목문화가 쌓아온 유산과 주문화로 대표되는 농경문화의 유산이 발해만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융합되어 나타난 결정이 바로 한의학이다. 
 
한의학은 춘추전국시대 해안문화의 황로학이라는 토양 속에서 발원하여 한나라, 특히 後漢 때에 현재와 같은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거기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무수한 임상경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은 잘 알려진 扁鵲이다.

편작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미 그 때에 한의학의 기본적인 진단법이 어느 정도 완비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치료에서는 침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문헌의 기록으로는 외과적인 수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경험과 이론이 축적되어 『황제내경』을 이루게 된 것인데, 대체로 진한시대에는 한의학의 이론과 더불어 임상에 관한 대부분의 기본적인 내용이 정리된다. 
 
한의학에서 쓰이는 약재를 本草라고 부르는데, 이는 약재의 상당 부분이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재로 쓰이는 것은 식물만이 아니고 동물과 광물은 물론 몸의 배출물이나 몸의 일부(예를 들면 머리카락이나 치아 등)도 사용된다. 그럼에도 약재를 가리키는 말로 본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한의학이 기초하고 있는 농경사회가 식물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던 사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러한 약재에 관한 지식은 東漢 시대에 『神農本草經』이라는 책으로 집대성된다.
 
한편 남부 지역에서는 고온 다습한 지역적 특성상 각종 전염병이나 유행병이 많았고 이런 사정으로 외부의 나쁜 기운에 의해 생긴 질환의 진단과 치료를 집대성한 『傷寒雜病論』이 나온다. 이처럼 한의학은 다양한 문화와 풍토 속에서 축적된 경험을 황로학이라는 틀 속에서 융합해낸 총체적인 이론 및 임상체계다.

여기에는 독자적인 진단 체계와 변증 체계, 그리고 치료체계가 있으며 치료의 방법으로는 침구와 약물요법은 물론 기공이나 방중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방대한 체계인 것이다. 
 
한의학은 그 출발에서부터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그리고 해안문화를 아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계를 이룬 이후에도 불교의학(아유르베다 의학), 한의학과 출발을 같이 했지만 독자적인 체계를 이룬 도교의학,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근대 서양의학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근대 서양의학과의 만남은 한의학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근대 서양의학이 거의 모든 면에서 전근대의 한의학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화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강화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었지만 불교는 기존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교는 그것이 도입된 지역의 전통 문화와 융합되어 새로운 모습의 불교로 재탄생하는 면모까지 보이고 있다.

유목민의 국가인 金元시대에는 오히려 한의학이 더욱 융성하여 전근대의 한의학 이론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 金元四大家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온 근대 서양의학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일신을 강요하였으며 기존의 전통문화를 배척하고 나아가 말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의학은 ‘아직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동아시아의 과학이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라는 관점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탈근대를 말하면서도 거기에는 근대의 입장에서 보는 전근대만 있을 뿐 전근대를 전근대로 보는 시각은 없다. 한의학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근대를 전근대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는 근대 서양의학의 담당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전근대의 전통 속에서 근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한의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한 시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의계의 변화는 자신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근대서양과학 일변도의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도적, 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전통을 갖고 있는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는 의료가 다원화 되어 있다. 이는 스스로 근대화를 이룬 나라에서조차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또 어떤 면에서 그것은 해결되어서도 안 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만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또 하나의 의료제도로 존재하는 한국의 한의학의 역사를 올바로 아는 일은 오늘날의 의료제도와 미래의 의료에 대한 전망에서 불가결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7절 철학적 사유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개념의 혼란
 
모든 개념과 이론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실천되는 사회의 산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이론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하고 이때 그 실천은 항상 총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실천은 자연과 사회와 사람의 몸이라는 조건을 항상 동시적으로 포함하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사회와 몸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깨졌을 때는 더 이상 그 사회에 적합한 이론 혹은 실천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정책이나 간단한 기술에 불과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자연과 사회와 몸에 대한 관계가 동시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정치나 경제 이론 혹은 그 이론에 기초한 실천이 단순히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만 기반하고 있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관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그 이론이나 실천은 머지않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파괴하여 이론이나 실천 자체가 파기되든가 아니면 자연 혹은 사회, 나아가 몸이 파괴되는 수밖에 없다. 

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실천을 의미하는 의학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생명복제나 안락사와 같은 문제가 의학의 주요한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의학 자체가 사회적인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잘못된 혹은 일정 定度를 넘어선 실천의 결과로서 윤리문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의학 이론이나 실천 자체에 이미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이 마르고 나서 우물을 파고 전쟁이 나서야 무기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그러한 가능성을 미리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역사는 단순한 史實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총체적 연관을 분석함으로써 현재를 되돌아보고 나아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철학적 사유구조를 알아보는 것은 한의학이 과거의 사회에서 실천되었던 총체적 연관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통하여 현재의 한의학과 또 하나의 의학 체계인 근대 서양의학의 모습,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고 현재를 되돌아보면서 미래 의학을 발전적으로 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구조의 차이는 번역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과거의 역사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전근대를 보는 근대의 시각을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연구는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서양의 과학(science)이라는 말이 초기에 ‘格物’로 번역되었던 것처럼 모든 과학적 연구는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한다.

격물이란 物을 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상을 일정한 액자, 틀 속에 넣는 작업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연구자 자신이 일정한 틀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성적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 틀은 사회적으로는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단계에 의해 규정되며 주체의 측면에서는 그것을 적용하는 주체의 실천적 입장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본다면 틀 자체의 진리성은 역사적이며 상대적이다.
 
번역의 문제는 이러한 틀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전근대 의학에 없었던 ‘신경’이라는 번역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알아보기로 한다. 
 
飜譯은 말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뒤집어서 뜻을 가리는 것,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가 특정 시대와 사회라는 바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쏘싸이어티society’라는 말은 오늘날 ‘社會’로 번역된다. 물론 社와 會는 기존에 있던 말이지만 ‘사회’처럼 연용해서 쓰인 예는 드물며 더욱이 오늘날의 사회라는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社’는 원래 토지의 신을 의미하여, 새 왕조를 세우면 반드시 토지의 신인 ‘사’와 곡물의 신인 ‘稷’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社稷은 곧 국가를 의미했다.

행정단위로는 25家 또는 사방 6里를 ‘사’라고 했다. 조선 중기 한 ‘家’의 구성원 수가 100-200명을 상회하기도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미암 유희춘의 경우) 그런 ‘가’가 25개씩 모여 있는 ‘사’는 매우 큰 조직인 셈이다. 또 사회에서의 ‘會’는 원래 고기와 같은 음식을 담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하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는 데서 모인다는 말로 뜻이 넓어졌다. 이처럼 ‘사’와 ‘회’는 각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전근대 사회에 도입된 ‘사회’라는 말은 근대적 개인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형성된 관계를 말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근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번역어들이 당시에 이해되기 힘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근대에서의 사회는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家’의 결합이었고 그것도 봉건제를 바탕으로 하는 결합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自’나 ‘己’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가’에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나를 가리키는 ‘我’ 자의 어원은 낫처럼 생겨서 벨 수 있는 무기인데, 글자 속의 ‘戈’는 적이 아니라 아군 혹은 공동체 내의 배반자를 처단하거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쓰였던 무기였고 동물을 犧牲으로 쓸 때도 썼다. 희생 역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我’는 오늘날 나를 의미하는 글자지만 원래의 의미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근대에서 ‘가’를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의 ‘호적을 판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호적에서 빠지는 것은 곧 사회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전근대 ‘사회’에 근대적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가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 
 
‘자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전근대 문헌에서 자연은 오늘날의 ‘네이춰nature’의 번역어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오늘날의 자연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좁은 의미의 자연만이 아니라 人事 등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외부에서의 충격이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동을 하면서 거기에 일정한 법칙, 곧 道를 실현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그 실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므로 ‘道法自然’이라고 하면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도는 자연에서, 스스로 그러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전근대의 ‘자연’은 명사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도 주체인 나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곧 ‘자연’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근대의 ‘자연’은 이를테면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며 내 마음까지 투영된 자연이다. 이에 비해 ‘네이춰’는 주체와 대립하는 대상이면서 정신과 대립한다. 
 
氣의 경우는 번역의 어려움이 더 크다. 우리는 ‘氣’를 그냥 ‘기’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vital force’ 혹은 ‘vital energy’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영역에도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氣’를 ‘기’라고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한 단계 올라선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역된 용어는 적어도 기를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외국어로 인식하는 것과 자국어로 인식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외국어로 기를 보게 되면 적어도 기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설혹 기 본래의 의미는 알 수 없거나 일면적인 이해에 그친다고 해도 대상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氣’를 모국어로 보게 되면 ‘氣’ 본래의 뜻과 기존의 모국어로서의 기의 뜻이 뒤섞이게 되어, 마치 ‘nature’를 자연이라고 번역하면서 본래의 ‘自然’이라는 뜻을 혼동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는 ‘氣’를 차라리 ‘Ch'i’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해체신서’는 무엇을 해체했는가?

‘해체신서’(1774)는 일본에 번역된 최초의 서양 해부학 책이다.

이 책은 서양의 해부학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소개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의학 용어를 번역해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이 책을 계기로 네덜란드의 학문인 난학(蘭學)이 대중화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서양문물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일본에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재적 흐름도 있었지만 난학은 이를 강화하고 발전시켜 동양에서는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오늘의 일본이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해체신서’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도 할 만한 책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의 발간을 둘러싼 사정과 그 의미를 알아봄으로써 전근대와 근대를 대비하고자 한다. 
 
이 책은 독일의 쿨무스(Johann Adam Kulmus, 1689-1745)가 1722년에 펴낸 책(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 번역서(Tabulae Anatomicae. 1743)를 기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네덜란드어-일어 사전 하나 없는 상황, 거기에다 그나마 네델란드어를 안다고 하는 마에노 료오다쿠(前野良澤, 1723-1803)가 겨우 7, 800 단어 정도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정도의 상황이라면 번역은 거의 무모한 일이었겠지만 이들은 3년 반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도록, 이들을 몰아넣은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한국에서는 서양 근대의대에서만이 아니라 한의대에서도 해부학은 기초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해부학의 도입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규경(李圭景, 1788-?)에 의해 최초로 아담 샬(湯若望. Joannes Adam Shall von Bell, 1591-1661)의 ‘주제군징(主制?徵)3)’의 내용이 ‘서의(西醫)’로 소개되었고 그 뒤 최한기(崔漢綺. 1803-1872)는 홉슨의 ‘전체신론(全體新論)’을 비롯한 의서오종(醫書五種)을 소개하였다. 이 중 대표적인 ‘전체신론’은 해부학을 포함한 서의의 전반에 관한 해설서였다. 
 
그러나 이런 의서의 소개가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도 그랬지만 해부학 자체가 아직은 의학의 영역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런 서적이 번역, 출판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도입된 나라에 적응하여 발전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중국에 소개된 서의서(西醫書)들은 대부분 사상가들의 관심에 그쳤다. 

 
‘신경’이라는 번역어 
 
문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의 번역은 모든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이 부딪친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기존에 없던 개념을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번역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담고 있다.

사회가 다르고 따라서 문화가 다른 언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곧 번역하려는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 곧 자신의 문화로 옮기는가 하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 전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회에 전혀 존재하지 않던 개념을 옮긴다는 것은 언어적으로 새로운 창작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개념, 곧 새로운 인식체계와 문화를 자신의 사회에 도입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유일한 인격신과 같은 신(神)의 개념이 없었던 중국이나 한국의 전근대에 기독교의 신이라는 단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 신의 승인 여부를 둘러싸고 분열되는 사회 집단 간의 사상적인 대립을 유발할 수 있는 문제였으며 이러한 사상적 대립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대립을 유발하거나 반영한다. 실제 신이라는 개념의 도입은 역사상, 사상적인 대립을 넘어서 그 나라에서는 사회 집단 간의 분열과 분쟁을 야기했고 국가 간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를 초래했다. 
 
이러한 예는 신만이 아니다. 성(性. sex)이나 예(禮)와 같이 그 문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곧 사람들이 몸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의학이다.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을 괴롭혔을 단어 중의 하나가 ‘신경(神經)’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경은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없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전근대에서도 분명히 해부가 있었고 또 분명히 전쟁과 같이 인체의 속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음에도 신경이라는 개념은 나오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는 전근대 사회의 이론 자체가 해부를 기초로 한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기의 의학이다. 기는 객관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몸을 통해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기 의학에서는 해부와 해부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해부학이라는 관념이 생긴 데에는 당시 일본의 사상적 풍토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은 18세기가 되면서 사변적인 성리학을 부정하고 실증적인 경향으로 흐른다. 일본에서 흔히 고방파(古方派)라고 부르는 고의방파(古醫方派)의 ‘상한론’ 중시 경향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이들은 내경의학(內經醫學)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이주(李朱)의학’을 강하게 비판한다. 
 
야마와끼 도우요우(山脇東洋, 1705-1762) 역시 이러한 흐름의 하나로, 그는 의학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의혹을 해부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야마와끼에 의한 해부학 책, '장지(藏志)'(1759)라는 책은 이러한 흐름의 한 결절점이었다. 물론 일본에 '상한론'을 중심으로 한 의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내경'을 기본으로 의학이 형성되었으며 이런 점에서는 동아시아 3국이 거의 비슷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3국 공통적으로 전근대적 사유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일면서 후에 ‘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상적 흐름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장지'가 나오자 비판이 없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고의방파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요시마스 토오도(吉益東洞, 1702-1773)는, 해부학의 지식은 병의 치료에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고 했고, 사노 야스사다(佐野安貞)는 '비장지(非藏志)'(1760)를 출판하여 죽은 내장의 관찰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즉 ‘장(藏)’의 의미는 외적인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기(氣)가 들어 있는 장소이고 기가 없어진 후에는 빈 통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노의 견해다. 그는 기를 ‘기능을 가진’ 어떤 것이라고 보았다. 장은 단순히 그런 기능을 갖는 기가 들어 있는 장소일 뿐이다. 
 
기는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라는 것이며 대부분의 근대적 관점에서 기능과 실체를 하나의 짝으로 보는 것과 달리 기능과 실체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전근대에서 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기가 없어지고 기가 없어지고 난 뒤의 그릇(장부)은 더 이상 담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 기는 몸으로 느껴지는 기능 내지는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해부나 해부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부학은 기 의학인 한의학(漢醫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해부는 병의 치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요시마스의 말은 바로 이러한 기 의학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신경이라는 말은 기존의 의학에 없던 개념이다. 신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은 신경을 의학의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대상은 신경이 아니라 기의 흐름인 경락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 서양의학은 신경을 비롯한 해부학의 내용을 의학의 대상으로 한다.
 
‘해체신서’에서의 ‘해체’는 ‘장분(臟分)’을 말한다. 장을 나누어 갈라본다, 해부(解剖)한다는 말이다. ‘해체신서’에 따르면 해부의 방법은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뼈와 관절을 조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선(腺. 편도선과 같이 분비작용을 하는 기관)이 있는 장소를 조사하는 것, 셋째는 신경을 조사하는 것, 넷째는 맥관(脈管)의 주행과 맥이 닿는 곳을 조사하는 것, 다섯째는 장기(臟器)의 형상과 그 작용을 조사하는 것, 여섯째는 근육의 주행을 조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체신서’의 역자인 스기다 겐바쿠(杉田玄白, 1733-1817)는 선(腺)과 신경에 대해, 이것은 중국인도 지금까지 기술한 적이 없는 것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또 혈관을 의미하는 맥관도 중국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보면 스기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스기다 등이 해부학 책을 번역하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네덜란드의 뛰어나 기술에 대한 감명이었다. ‘해체신서’의 도판을 그린 화가 오다노 나오다케(小田野直武, 1749-1780)는 범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네덜란드의 기술은 대단히 뛰어나다. 지식이나 기술의 분야에서 사람의 힘이 미치는 한 궁구(窮究)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속하게 세계에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은 의학이다”.
 
이러한 감명은 상대적으로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치료법이나 학설을 연구해 보면 그것은 무리한 억지가 많고 더구나 모자란 곳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명백히 하려고 하면 점점 알 수 없게 되고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더욱 틀려버리게 되어서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치료법은 하나도 없다”.
 
'영추'에도 ‘해부해서 관찰한다’는 구절이 있고 또 해부도 분명히 이루어졌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여 마시(馬蒔)나 손일규(孫一奎), 활백인(滑伯仁), 장중경(張仲景)이 말하는 삼초나 추절[椎節. 등뼈]에 관한 학설이 서로 엇갈린다(이상 범례)고 보는 것이다. 

 
'기' 철학의 해체 
 
그런데 ‘해체신서’를 번역하게끔 추동한 최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변혁 의지였다. 이들에게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은 완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의 질병 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이 갖고 있던 질병관, 곧 병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인 몸 안의 음과 양이라고 하는 기가 어긋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있는 몸의 구조의 이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이러한 질병관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첫째는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이 외과가 아니라 내과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점이다. 한의학(漢醫學)은 기 의학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몸으로 느끼는 기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실체로서의 내장(內臟)과 신경은 의미가 없고 오로지 기의 작용 기전을 밝힐 수 있는 내경(內景)과 경락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해부를 했어도 내장이나 신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혹은 볼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외과라는 과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조적 실체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질병, 예를 들면 골절과 같은 질환에서 일정한 한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 도입된 초기의 서양의학은 남만류(南蠻類)나 화란류(和蘭類)라고 하는 외과가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입된 외과는 의학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학문과 문명을 가리키는 난학(蘭學) 전반에 대한 신뢰와 명성을 가져왔다. 
 
세 번째는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고의방파의 성립이다. 고의방파는 기존의 사변적인 한의학(漢醫學) 이론을 부정하고 오로지 병 자체의 진행과정과 그에 대한 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경’과 ‘상한론’이 재해석되고 수많은 저작과 논쟁이 꼬리를 물었다.

특히 고의방파를 만든 고또오 곤잔(後藤艮山, 1659-1733)은 모든 병은 하나의 기가 머물러 막혀서 생긴다는 일기류체설(一氣留滯說)을 주창했다. 이는 일견 전통적인 기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서 한의학(漢醫學)의 기는 이미 부정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는 일기(一氣)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특정한 장소에 머물러 막혀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데서 복진(腹診)이 중요한 진단의 수단으로 발전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근대의학이 도입되기 이전에 일본에서는 단순히 서양의 근대의학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를 부정하면서 해부를 받아들일 내재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사상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고학파(古學派)인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오규 소라이(荻生沮徠, 1666-1728)의 영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해체신서’를 번역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열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 ‘한 방울의 기름을 넓은 호수에 떨어뜨리면 그것이 퍼져서 연못을 가득 채우듯’이 ‘의도(醫道)’의 위대한 경전이자 위대한 근본[大經大體]인 신체의 내경(內景)을 다룬 책’을 하루라도 빨리 번역하여 세상에 퍼뜨리고 그럼으로써 치료에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열망이 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열망이 있었기에 네덜란드 언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감히 번역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의 열망은 단순한 해부학의 도입에 그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해체신서’의 발행은 난학, 나아가 근대 서양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일본 근대화(서구적 근대화)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면 한의학(漢醫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문제는 복잡하면서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어서 다음의 과제로 삼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우선 질병관에서의 변화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은 고의방파에 속했거나 그러한 흐름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질병관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병의 원인을 특정한 장소에서 찾는, 이를테면 질병국재론(疾病局在論)이라고 할 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심은 기의 상태가 아니라, 아마도 객관적 실체로서 인식했을, 기가 어느 장소에서 막혔는지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기는 질병을 이해하는데 과정에서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제 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체학, 곧 해부학의 도입은 그동안의 한의학(漢醫學)의 단점으로 간주되는 외과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기를 배제한 내과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곧 한의학(漢醫學)을 근대 서양 의학화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결국 ‘해체신서’가 해체한 것은 단순한 인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의 해체였으며 나아가 한의학(漢醫學)의 해체였던 것이다.
-박석준의 의학철학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