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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한국 '빚'의 역사

by 성공의문 2016. 9. 20.

빚 권하는 사회

- 70년대 ‘농어촌 고리채’

- 80년대 ‘경제깡패’ 등장

- 90년대 첫 ‘소비자 파산’



한국 서민들 ‘빚의 역사’

“넓은 평야에 산더미처럼 쌓인 볏더미를 쳐다보는 농부들은 자기 몫을 계산하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대부분이 ‘남의 농사’이기 때문이다. 벼종자까지 남의 돈으로 시작해서 일체의 영농비를 농협 융자가 아니면 이웃의 사채를 끌어대어 썼다.” 경향신문은 1964년 11월 ‘소리없는 아우성, 오늘의 농촌 현지를 가다’ 연재기사에서 빚더미에 신음하는 농촌의 현실을 고발했다. 농민들은 비료값을 마련하려고, 흉년 때 먹을 것을 구하려고 월 5부(5%) 이상의 고리채를 끌어다 쓰곤 했다.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8월3일 정부가 사채 동결 조치를 내리자 

시민들이 은행에서 현금 다발로 돈을 한가득 빌려가고 있다.



농촌 고리채와 ‘무진회사’

1970년대 농어촌 고리채 미상환액은 당시 돈으로 20억원에 달했다. 빚더미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파라티온’ 같은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 사례가 속출했다. 


제도권 금융기관의 문턱이 높기는 농민이나 도시 서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출이 필요한 서민들은 제도권 금융의 바깥에서 돈을 끌어다 썼다. 금융기관보다는 ‘계(契)’에 가까운 이런 사금융업체들을 ‘무진회사’라고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긴급경제조치를 통해 무진회사들을 ‘신용금고’라는 이름으로 법 테두리 안에 끌어들였다. 


폭력주식회사 등장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피습사건의

 주범 김태촌과 일당이 목포에서 붙잡혀 인천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해결사 ‘폭력주식회사’ 등장

1980년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깡패’ ‘폭력주식회사’라 불리는, 채무만 전문적으로 받아내는 범죄조직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80년 7월 서울 관악경찰서는 모 부동산개발주식회사 이사에게 채권 400만원을 위임받아 채무자인 중소기업 사장을 콜택시로 납치, 감금하고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과 부두목 2명을 검거했다. 1986년 3저호황을 맞아 시중에 돈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주가도 급등했다. 하지만 은행 창구엔 찬바람이 불었다.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1987년 통화당국이 통화환수정책을 강력히 시행했기 때문이다. 서민과 영세기업들은 은행 대신 신용금고 같은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학생 등 신용카드 무차별 발급 2001년 서울의 한 대학교 정문 앞에서 

신용카드사 직원들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드 회원을 모집하고 있다.



속출하는 개인파산

1990년대엔 개인파산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1996년 대학교수를 남편으로 둔 주부 현모씨(당시 48세)는 “카드대금과 은행대출로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다”며 “국민신용카드 등 12개 금융기관과 사채업자에게 진 빚 2억6000여만원을 면제해달라”고 법원에 파산선고 신청을 냈다. 1962년 개인파산 관련법 제정 이후 처음 있는 ‘소비자 파산’이었다. 이듬해 법원은 현씨의 파산 신청을 받아들였다. 현씨를 시작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개인파산자가 약 10만명에 달했다. 


신불자 채무조정 시작 2005년 4월 서울 신용회복위원회 사무실이 

채무 재조정을 받으려는 신용 불량자들로 붐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민 10명 중 1명 신용불량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1998년 이자제한법을 폐지했다. 이전까지 연 40%로 제한돼 있었던 최고이자율 이상으로 폭리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정부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 등을 도입해 카드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부자 되세요” 같은 광고 문구가 사람들을 현혹했다. 카드사들은 미성년자, 기초수급자, 노숙자, 심지어 사망한 사람의 명의로도 카드를 발급했고,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카드 돌려막기, 카드깡 등의 용어가 생겨났다. 카드 발급 열기는 2003년 신용불량자 증가로 카드사들에 유동성 위기가 닥칠 때까지 계속됐다. 2003년 전국의 신용불량자는 400만명에 육박했다. 


‘하우스푸어’ 등장

2002년 대부업법 제정으로 사채업이 합법화됐다. 법정 최고이율은 66%로 고정됐고, 서류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대부업자로 등록할 수 있게 됐다. 법의 맹점을 이용해 수백%, 수천%의 폭리를 챙기는 대부업체들도 등장했다. 저축은행들도 연 40~50%대의 고리대금 영업을 시작했다. 1999년 A&O크레디트(러시앤캐시의 전신)를 시작으로 산와머니, 원캐싱 등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채권추심 행위가 일상화됐다. 채무자에게 신체포기각서를 받아 실제로 콩팥 등 장기 매매대금을 받아내거나 채무자의 아내를 유흥업소로 팔아넘기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부동산시장에 폭등기가 찾아오면서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부동산 투기 열풍에 가담했다. <2000만원으로 20억 부동산 부자 되기> 같은 재테크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미몽(迷夢)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삭 내려앉았고, ‘하우스푸어’라는 용어가 일상화됐다. 2014년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버는 돈의 20% 이상을 대출 갚는 데 쓰는 ‘하우스푸어’가 248만가구에 달했다. 


비료대금이 없어, 자녀 대학 등록금 때문에, 부동산을 구입하기 위해… 지난 50년간 한국의 서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빚을 지고 살아왔다. 국내 가계부채 규모는 현재 1350조원에 이른다. 특히 지난해 정부의 부동산 활성화 대책 이후 100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 된 지 오래다. 빚 때문에 목숨을 끊고 가정이 파탄나는 사례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된다. 우리는 ‘빚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