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와 작은 나 (大我와 小我)
단재 신채호
왼편에도 하나 있고 오른편에도 하나 있어서 가로 놓이고 세로 선 것을 나의 '이목'이라고 하고, 위에도 둘이 있고 아래도 둘이 있어서 앞으로 드리운 것을 나의 '수족'이라하며, 벼룩이나 이만 물어도 가려움을 견대지 못하는 것을 나의 '피부'라 하며, 회충만 동하여도 아픔을 참지 못하는 것을 나의 '장부'라 하며, 8만 4천의 검은 뿌리를 나의 '모발'이라 하며, 1분 동안에 몇 번식 호흡하는 것을 나의 '성식'이라 하며, 총총한 들 가운데 무덤에 까마귀와 까치가 파먹을 것을 '해골'이라 하며, 개미와 파리가 빨아먹을 것을 나의 '혈육'이라 하여, 이 이목과 수족과 피부와 장부와 모발과 성식과 해골과 혈육을 합하여 나의 '신체'라 하고, 이 신체를 가리켜 '나'라 하나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며 이같이 작은가. 이 같을진대 한편에 있는 내가 열 곳에 널리 나타남을 얻지 못할 것이요, 일시에 잠깐 있는 내가 만고에 길게 있음을 얻지 못할지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며 이같이 작은가.
이 같을진대 바람과 같이 빠르고 번개같이 번복하며 물거품 같이 꺼지고 부싯돌 같이 없어지는 내가 몇십 년을 겨우 지내고, 형용과 그림자가 함께 없어질지니, 오호라. 내가 과연 이같이 희미하고 이같이 작은가. 과연 이 같을진대 나는 부득불 나를 위하여 슬퍼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칠 만도 하며, 이를 갈고 통곡을 할 만도 하고, 나를 창조하신 상제를 원망할 만도 하도다.
오호라. 내가 과연 이러한가. 가로되 그렇지 않다. 저것은 정신의 내가 아니요 물질의 나이며, 저것은 영혼의 내가 아니라 껍질의 나이며, 저것은 참 내가 이니요 거짓 나이며, 큰 내가 아니요 작은 나이니, 만일 물질과 껍질로 된 거짓 나와 작은 나를 나라 하면 이는 반드시 죽는 나라.
한 해에 죽지 아니하면 10년에 죽을 것이며, 10년에 죽지 아니하면 20세 3,40세 6,70세에는 필경 죽을 것이요, 장수를 하여도 100세에 지나지 못하나니, 오호라. 이 지구의 있을 2천2백만 년 동안에 나의 생명을 100세로 한정하여 백세 이전에 나를 구하여도 없고 100세 이후에 나를 구하여도 없거늘, 그 중에서 가로되 부귀라, 빈천이라, 공명이라, 화액이라 하여 이것을 길하다 하고 저것을 흉하다 하며, 이것을 낙이라 하고 저것을 근심이라 하나니, 오호라.
이를 말하매 나는 가히 슬퍼도 하고 울기도 할 만하다 할지나, 이제 이
물질과 껍질로 된 거짓 나와 작은 나를 뛰어 나서
정신과 영혼으로 된 참 나와 큰 나를 쾌히 깨달을진대,
일체 만물 중에 죽지 아니하는 자는 오직 나라.
천지와 일월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며,
초목과 금석은 죽어도 나는 죽지 아니하고,
깊은 바다와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질 지라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예리한 칼과 날랜 탄환을 맞으면
작은 나는 죽을지언정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독한 질병과 몹쓸 병에 걸리더라도
작은 나는 죽으나 큰 나는 죽지 아니하며,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있으며
천변만겁에 오직 내가 없어지지 아니하나니,
신성하다 나여, 영원하다 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즐겨하며 노래하며 찬양함이 가하도다.
작은 나는 죽는데 큰 나는 어찌하여 죽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작은 나를 의논할진대 이목과 수족이 곧 나라. 보고 들으매 벽으로 막힌 데를 능히 통하지 못하며, 뛰어도 한 길 되는 담을 넘지 못하고 현미경을 대고 보아도 몇억만의 희미한 티끌을 다 보지 못하며, 화륜차를 타고 행하여도 한날에 천리를 더 가지 못하거니와, 큰 나는 곧 정신이며 사상이며 목적이며 의리가 이것이다.
이는 무한한 자유자재한 나이니, 가고자 하매 반드시 가서 멀고 가까운 것이 없으며, 행코자 하매 반드시 달하여 성패가 없는 것이 곧 나라. 비행선을 타지 아니하여도 능히 공중으로 다니며, 빙표(여행허가증)가 없어도 외국을 능히 가며, 사기(史記)가 없어도 천만세 이전 이후에 없는 대가 없나니, 누가 능히 나를 막으며 누가 능히 나를 항거하리요.
내가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 눈물을 흘리는 나의 눈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유심한 눈물을 뿌리는 자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토하면 피를 토하는 나의 창자만 내가 아니라 천하에 값있는 피를 흘리는 자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뼈에 사무치는 극통지원의 원수가 있으면 천하에 칼을 들고 일어나는 자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마음에 새겨 잊지 못할 부그러움이 있으면 천하에 총을 메고 모이는 자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싸움의 공을 사랑하면 천백 년 전에 나라를 열고 땅을 개척하던 성제 명왕과 현상 양장이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문학을 기뻐하면 천만리 밖에 문장명필과 박학거유가 모두 이 나이며, 내가 봄빛을 좋아하면 수풀 가운데 꽃 사이에 노래하고 춤추는 봉접이 모두 이 나이며, 내가 강호에 놀기를 즐거하면 물속에 왕래하는 어별과 물가에 조는 백구가 모두 이 나이라.
한량없이 넓은 세계 안에 한량없는 내가 있어서 동에도 내가 있고 서에도 내가 나타나며, 위에도 내가 있고 아래도 내가 나타나서 내가 바야흐로 죽으매 또 내가 나며, 내가 바야흐로 울며 또 나는 노래하여 나고 죽으며, 죽고 나며, 울고 웃으며, 웃고 우는 것이 대개 나의 참면목이 본래 이 같은지라.
슬프다. 온 세상이 어찌하여 자기의 참면목을 알지 못하고 혹 입과 배를 나라 하여 진진한 고량으로 이것만 채우고자 하며, 혹 피육을 나라하여 찬란한 의복으로 이것만 따뜻이 하고자 하며, 혹 생명이 나라 하고 혹 문호를 나라 하여, 부끄럽고 욕이 오든지 자유치 못함을 당하든지 이것만 보전하고 이것만 유지코자 하다가 조상에게는 패류의 자손이 되고 국가의 죄인도 되며 동포의 좀과 도적도 되고 인류의 마귀도 되나니, 오호라, 자기의 참면목이 나타나는 날이면 어찌 서러워 울고 이를 갈지 아니하리요.
울지어다 울지어다. 내가 이 한 붓을 들고 천당의 문을 열고 분분히 길을 잃은 자들을 부르노니, 울지어다 울지어다. 나의 이르는 바 천당은 종교가의 미혹하는 별세계의 천당이 아니라, 나의 참면목을 나타내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이것이라.
이 참면목만 나타내는 날이면 저 구구한 일개 신체는 모이어 연기가 되어도 가하고 흩어져서 구름이 되어도 가하며, 피어서 꽃이 되어도 가하고 맺어서 열매가 되어도 가하며, 단련하여 황금이 되어도 가하고 부수어서 모래가 되어도 가하며, 물에 잠겨서 어별이 되어도 가하며 산과 들에 행하여 호표 세상이 되어도 가하고, 하늘에 오름도 가하며 땅으로 들어감도 가하고, 불에 던짐도 가하며 물에 빠짐도 가하니, 성인의 말씀에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 하심이 곧 이를 이르심이거늘, 애석하다.
저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그 눈을 감으면 이르되 내가 죽었다 하며, 그 다리만 넘어지면 이르되 죽었다 하고, 반드시 죽는 나를 잠깐 살기 위하여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나를 욕되게 하며, 반드시 죽는 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죽지 아니하는 나를 괴롭게 하고, 반드시 죽는 나를 편안히 하기 위하여 죽지 아니하는 나를 타락케 하니 어찌 그리 어리석으냐.
내가 인간에 유람한 지 20여년에 이 세상 사람을 보건대, 그 누가, 이 반드시 죽는 나를 위하여 구구한 자가 아니리요. 이 사람들이 필경에는 죽는데, 혹 주리다가 죽기도 하고, 혹 배부르다가 죽기도 하고, 혹 근심하다가 죽기도 하고, 혹 즐기다가 죽기도 하고, 혹 초췌하여 죽기도 하고, 혹 발광하여 죽기도 하고, 혹 신음하다가 죽기도 하고, 혹 낭패하여 죽기도 하는도다.
어찌 다만 나의 눈앞에 사람만 이같이 죽으리요. 혹 나의 이전 사람도 이같이 죽었으며, 장래의 사람도 장차 이같이 죽으리니, 슬프다. 이 지구상 인류의 대략 총계 십오억만 명 중에, 세계에 뛰어난 영웅이나 천명을 아는 성인이나, 단장한 미인이나 재주 있는 선비나, 황금이 산 같은 부자나, 세력이 흔천동지하는 귀인이라도 세상에 나던 날, 이미 하늘이 정한 한 번 죽는 것이야 어찌하리요, 그런즉 반드시 죽는 나를 생각지 말고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볼지어다.
반드시 죽는 나를 보면 마침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지 아니하는 나를 보면 반드시 길이 죽지 않으리라.
비록 그러나 나의 이 의논이 어찌 철학의 공상을 의지하여 세상을 피하는 뜻을 고동함이리요. 다만 우리 중생을 불러서 본래 면목을 깨달으며, 살고 죽는데 관계를 살피고 쾌활한 세계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저 작은 내가 칼에 죽거든 이 큰 나는 그 곁에서 조상하며, 작은 내가 탄환에 맞아 죽거든 큰 나는 그 앞에서 하례하여 나와 영원히 있음을 축하기 위함이로다.
1908년 9월 16일, 17일 대한매일신보 국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