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때 겨울철에도 천둥이 치고 대낮에 금성이 나타나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자 노총각·노처녀를 빨리 장가·시집을 보내야 해결된다는 이른바 '솔로대책'을 내놓았다 ... 중략... 천재이변은 노총각·노처녀가 많은 탓이며 ... 중략... 성종 임금은 심지어 긴 장마의 원인도 '노처녀의 한(恨)'으로 여겼다.(1478년)
■ '솔로대책', 조정이 나선 까닭은?
김준근의 < 조선풍속도 > . 혼례를 마친 첫날 밤 신부집에 꾸려진 신방에서 족두리를 쓴 신부가 상을 받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심지어는 노총각·노처녀들에게 혼수품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법( < 육전 > )으로 규정해 놓았다.
"여자 나이 20살이 되면 시집보낸다는 말이 < 예기(禮記) > 에 나와있습니다. 대저 혼인이란 시기를 놓치면 남모르게 번민하게 되는 것이니,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장성한 처녀는 관에서 혼수를 주어서 혼인시키는 법이 < 육전 > 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1443년(세종 25년) 사간원이 세종에게 올린 상소이다. 노처녀·노총각 구휼법이 있음에도 30~40이 되도록 혼인하지 못하는 남녀가 생기자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세종은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가난한 남녀가 때가 지나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다. 서울에서는 한성부(서울시)가, 지방에서는 감사(도지사)가 힘을 다해서 방문하라. 그래서 그들의 사촌(四寸) 이상의 친척들이 혼수를 갖추어 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이 법에 어기는 자는 죄를 주라."
1472년, 성종 임금은 아예 '전국 노총각·노처녀들의 수를 죄다 파악해서 혼수품까지 주어 혼인시킬 것'을 지시한다. 그 명에 따라 전국의 25세 이상 처녀들의 가계(家計)까지 조사했다. 그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는 쌀·콩을 10석씩을, 사족(士族)이 아닌 경우엔 5석씩을 혼수로 각각 지급했다. 나라에서 노총각·노처녀의 혼인을 관리하고 혼수폼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중종 임금도 1512년 명령을 내려 "가난 때문에 시집 못간 노처녀들에게 관이 혼수를 보조하여 시집가도록 하게 하라"고 했다.
암해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는 영조 임금에게 "혼인을 제 때 하는 것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라고 못박기도 했다.(1730년)
■ 천재이변은 노총각·노처녀 많은 탓
이런 '솔로대책'을 기상이변 및 재이(災異)의 해법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1535년(중종 30년) 겨울 천둥이 내리치고 태백(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등 천변이 일어나자 신하들이 해결책 마련을 위해 격론을 벌인다. 그 가운데 중신들이 한목소리로 '솔로대책'을 마련했다.
신윤복의 < 단오풍정 > . 단오날 여인네들의 나들이 모습. 여성들이 단오를 맞아 창포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고 놀았다. 조선시대 때의 경우 25살이 넘는 여성과 30살이 남는 남성을 대체로 노총각, 노처녀로 일컬었다.
간송미술관 "'재변(災變)은 모두 백성들의 원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재물은 있으면서 혼기를 놓친 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재산이 없어 혼인하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관청에서 혼수를 내려주어야 합니다."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도 '솔로대책'은 필수적이었다. 이익의 < 성호사설 > 에는 '과년(過年)한 남녀를 결혼시키고 젊은 과부와 홀아비를 결합시키는 것'을 기우제 때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1540년 중종 임금은 '기우제의 조항'을 내리면서 "뒷날의 고증에 참고하라"고 전교했다.
" < 문헌통고(文獻通考) > 에 따르면 실직자(失職者)를 다시 심리했다. 부역과 세금을 감하여 가볍게 하여 주었다. 어진 사람을 기용하고 탐욕스런 사람을 내쳤으며, 시집·장가 못 간 사람들을 구휼하여 주었으며,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악기는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다."
< 문헌통고 > 는 중국 송말(宋末), 원초(元初)의 학자 마단림(馬端臨)이 저작한 제도와 문물사(文物史)이다. 중종 임금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옛 서적까지 참고, 노총각·노처녀의 구휼은 물론 실업자 대책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 임금은 심지어 긴 장마의 원인도 '노처녀의 한(恨)'으로 여겼다.(1478년)
"하늘의 도(道)는 아득히 멀어서 알 수 없다. 요즘 장마가 몇 달 동안이나 개지 않는구나. 아마도 가난한 사족(士族)의 처녀가 제때에 출가(出家)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원광(怨曠·시집·장가를 제 때 못감)의 한(恨)이 화기를 범한 듯 하다. 중앙·지방의 공무원들에게 명하여 이들의 혼수감을 넉넉히 주어 시기를 놓치게 하지 마라."
■ 여자 25살, 남자 30살 넘으면 '노처녀', '노총각'
노총각·노처녀를 구분하는 나이는 어떨까.
< 예기 > 에는 "여자 나이 20살이 되면 시집보낸다"고 했다. 20살 언저리가 결혼 적령기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중종 때 겨울철에도 천둥이 치고 대낮에 금성이 나타나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자 노총각·노처녀를 빨리 장가·시집을 보내야 해결된다는 이른바 '솔로대책'을 내놓았다. < 중종실록 > 에 보인다.태종 시대, 즉 1407년 의정부가 올린 상소문에는 "양반의 딸 가운데 나이 30이 지나도록 집안이 빈궁해서 시집을 가지 못한 자는 관가가 혼수를 대준다"고 했다.
하지만 < 경세유표 > 에 나오는 '애민(愛民)의 여섯조목'은 "30살이 되도록 장가 못간 남자와 25살이 되도록 시집 못간 여자는 관(官)에서 성혼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자 30살, 여자 25살 이상을 노총각·노처녀로 본 것이다. 1794년(정조 18년), 수원 유수 김노성은 겨우 혼인을 한 노총각·노처녀들의 명단을 보고했는데 다음과 같다.
"장족면 과부 김씨(金氏)의 딸 나이가 22세인데 혼기가 지나 혼인. 삼봉면 남성 이일손의 나이가 30세인데 혼기가 지나 혼인. 장족면 이원대(李元大)의 나이가 38세인데 혼기가 지나 혼인…."
딱히 법으로 정한 나이는 없었지만 대체로 여성의 나이 20살 언저리가 적령기이며, 25살이 넘으면 노처녀의 반열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남자는 30살이 넘어야 노총각의 대열에 합류한 것 같다.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홀아비, 홀어미
그렇다면 나랏님은 노총각·노처녀에게만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보다 더 긍휼히 여겨야 할 이들이 바로 홀아비와 과부였다. 그 역사는 깊고도 깊다.
그 '환과'를 잘 돌본 이는 바로 주나라 문왕이었다.
"문왕이 정사를 펼칠 때 인을 베풀되 반드시 홀아비나 홀어미 등을 돌봐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한 일"은 조선시대에도 두고두고 선정(善政)의 예로 언급됐다.( < 명종실록 > )
< 서경 > '무일(無逸)'편은 "문왕은 소민(小民)을 품어 보호하고, 홀아비와 과부들도 은혜로 잘 돌봤다.(懷保小民 惠鮮鰥寡)"고 기록했다.
맹자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네 종류의 사람들을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 했다. '환'은 아내를 잃은 남자, '과'는 남편을 잃은 남자, '고'는 부모를 잃은 아이, '독'은 자식이 없는 노인 등을 일컫는다. 맹자는 특히 '환과'를 두고 "홀아비와 홀어미는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鰥寡無告")이라 했다.
공자도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홀아비나 과부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민(士民)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 국법으로 돌봤던 '환과고독'
우리 역사에서도 '환과', 즉 짝 잃은 남자와 여자는 나라가 나서 돌봐야 하는 대상이었다.
예컨대 기원후 28년 신라 유리이사금은 '환과고독', 즉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눠 부양하도록 했다.
"겨울에 왕이 순행중 한 할머니가 얼어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구나. 다 내 죄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전국의 환과고독을 위문하고 부양하게 했다."
또 834년 겨울 흥덕왕도 '해마다 환과고독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차등있게 내려주는 것'을 국법으로 삼았다. 고려 때도 마찬가지였다.
1110년 고려 예종은 나이 80살 이상의 노인과 효자·순손·의부·절부·홀아비·과부·고아·자식없는 늙은이·불구자 등을 초청, 남명문 ?에서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했다.
■ '솔로대첩'은 불가한다.
1525년(중종 20년)의 실록을 보면 이상한 대목이 나온다. 불쌍한 민중의 구제책을 의논하는 내용이다.
조정은 12년 전인 1513년 진제장(賑濟場·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던 곳)을 없앤다. 대신 홍제원과 보제원 등에 분산 수용한다. 무엇 때문일까.
"굶주린 민중을 한 장소에 몰아놓으면 잘 구제하기 어려을 뿐 아니라 도리어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서울 안에는 굶주리는 남편없는 부인들(과부)들이 또한 많을 것인데, 이들을 한 장소에 함께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내 생각에는 오부(五部·서울시내 5개 행정) 및 한성부로 하여금 도성 안 홀로 된 남자와 여자들의 수를 헤아려 음식을 나눠 지급함이 어떨까 한다. 의정부와 의논하라."
홀로 된 남녀들을 한 곳에 모아놓으면 갖가지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굶주린 이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우려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