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려대 총장을 지내신 홍일식 교수님이 쓰신 책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에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유품을 보면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예사로 보아 넘기지만,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고도의 상징과 합리성, 깊은 속뜻이 담겨 있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런 조상의 슬기가 배어 있는 예를 하나만 이야기 해 볼 까 한다. 바로 제수(祭需)에 관한 것이다.
제사를 모실 때면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이 있듯이 제수를 진열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제수 역시 고인의 생전의 기호나 형편에 따라서 늘거나 줄기도 하고 독특한 것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과채탕적(果菜湯炙)을 마련하고, 과일도 조율시이(棗栗枾梨), 즉 대추, 밤, 감, 배 • • • • 이런 순서로 놓아가는 것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일은 오색 또는 삼색을 쓰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치는 덕목 중의 하나는 아무리 간소한 제사라 할지라도 삼색 과일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대추와 밤과 감 - 감이 없는 계절에는 곶감, 이렇게 세 가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없이 제사를 지냈다면 그 제사는 무효라며 다시 지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할 만큼 이 세 가지는 절대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런가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지금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그것은 어느 집안에서나 어른들의 입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던 고래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단절 속에서 그 전승도 끝이 소실되어 마치 아득한 먼 나라의 일인 양 여기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어른들께 몇 마디 들은 바 있어 여기에 그 의미를 적어 본다.
첫째로, 대추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빛깔이 좋아서도 아니요 맛이 좋아서도 아니다. 거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대추의 특징이라면 한 나무에 열매가 헤아릴 수 없이 닥지닥지 많이도 열린다는 것이 되겠지만,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그것의 묘한 생리다. 그것은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불어도 그냥 꽃으로 피었다가 꽃으로만 지는 법은 없다. 그래서 만약 어느 해에 대추가 흉년이 들거나 풍년이 들었다면, 그만큼 꽃이 적게 피었거나 많이 핀 해라고 보아서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꽃 하나가 반드시 열매를 맺고서야 떨어진다. 이것을 사람에게로 옮겨 놓으면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서 가야 한다 - 그것도 많이 낳고서 가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제사상에 대추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 집안에 후손이 끊어지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극도로 산아 제한을 해서 하나도 많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생각해 보면 걱정스런 세태가 아닐 수 없다.
막 혼례를 올린 신부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 된 사람들이 대추를 한 움큼 새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주는 것도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 아들 딸 구별 말고 ’ 대추 열듯이 많이 나아, 자손이 번창케 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밤을 꼭 쓰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밤이라는 식물도 생리가 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알의 밤이 땅속에 들어가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줄기와 가지와 잎이 되어 성숙한 나무를 이룬다. 여기까지는 여느 식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여느 식물의 경우 나무를 길러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 버리지만, 밤만은 땅속에 들어갔던 최초의 씨밤이 그 위의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도 절대로 썩지 않고 남아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건 간에 애초의 씨밤은 그 나무 밑에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그냥 달려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하고 궁금해 하기만 했지 정작 확인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철든 후 아버지의 산소를 모시고 그 경계를 꾸미려고 할 때에 어릴 적부터 누누이 들어 온 그 이야기 생각이 났다.
대개 산소 주변에는 과일 나무를 심는 법이다. 이것 역시 우리 조상의 슬기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는 ‘ 예출어정(禮出於情), 정출어근(情出於近) ’, 곧 예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가까운 데서 나온다는 생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혈족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면 정이 생기지 않고, 정이 생기지 않으면 예(공경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가령 상가(喪家)에 문상을 가도 문상객중에 어이곡(哭)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구별이 생기는데, 이 때 기준이 되는 것도 고인과 얼굴을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가까이 해야 정이 생기고, 정이 있어야 슬픔이 있고 곡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조상님 산소라고 해도 그것이 먼 조상의 것이면 자연히 돌보기가 힘들어지고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할아버지까지는 얼굴을 안다지만, 증조, 고조, 그 윗대로 올라가면 얼굴 한번 뵌 적 없는데 그 손자 녀석이 알뜰히 돌볼 까닭이 있겠는가? 그래서 산소 근처에 유실수를 심어 놓는다. 그 열매를 따먹으러나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왔더라도 설마 거기 있는 조상의 산소 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까이 하게 해서 정을 쌓고, 정이 쌓이다 보면 예도 나올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나는 조상의 그런 슬기로운 유풍을 좇아, 아버지 산소 주변에 유실수를 심기로 하고 어느 농장에 가서 5년생 밤나무 스무 그루를 샀다. 그것을 옮기기 위해 막 차에 실으려 하는데 예의 그 궁금증이 발동했다. 말로만 들었던 밤의 생리가 정말 그러한가 확인을 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아름드리가 될 때까지도 씨밤이 생으로 남아 있다니까 5년생에도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묘목의 뿌리 부분을 감싼 새끼를 풀고, 그 흙을 살금살금 파 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농장 주인이 펄쩍 뛰었다.
“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가지고 가지 않으면 나무가 죽습니다.”
“ 예,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밤나무가 죽고 못 살아도 좋으니까 뭘 좀 꼭 볼게 있어서 그럽니다.”
나는 그런 말로 농장 관리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흙을 조심조심 다 털어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씨밤이 정말로 생밤 상태 그대로 달려있었다. 내 눈으로 그것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산소 가에 그 밤나무들을 심은 지가 이제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아래 흙 속에는 여전히 생밤을 달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밤의 생리는 이렇게도 묘하다. 그래서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자손이 몇 십, 몇 백대를 헤아리며 내려가더라도 조상은 언제나 나와 영적으로 연결된 채로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조상을 모시는 위패, 신주(神主)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다. 밤나무가 특별히 결이 좋은 것도 아니요 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밤나무의 그 상징성 때문이다.
다음은 감이다. 감나무는 서울 이북, 그러니까 한강 이북에서는 서식하지 못한다. 지금은 기후가 따뜻해져서 서울에서도 감이 된다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서울에서 감나무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런대도 한국 사람이라면 가령 함경도에 살건, 평안도에 살건 어디서나 제사 때는 감을 올린다. 물론 곶감으로 밖에 놓을 수 없지만, 어쨌든 꼭 쓰는 것이다. 감 없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감을 쓰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역시 감이 지닌 묘한 생리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 고 한다. 하지만 감 심은 데서는 절대로 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탐스런 감에서 나온 감씨를 심어도 거기서 나오는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고욤나무다. 감씨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그 나무에 고욤이 열리지 감이 열리지는 않는 것이다. 고욤은 생김새는 감을 닮았지만 크기는 도토리만 하고 떫어서 다람쥐 같은 들짐승이나 먹지 사람은 먹지 못한다.
감나무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감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된다. 그래서 3~5년 쯤 되었을 때 그 줄기를 대각선으로 짼다. 그리고 기존의 감나무 가지를 거기에 접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접합이 되면 그 다음부터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만약 장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줄기가 아니라 가지에 접을 붙이면 , 한 나무인데도 이쪽 가지에선 감이 열리고, 저쪽 가지에서는 고욤이 열리는 기묘한 일도 벌어진다. 감은 이렇게 묘한 과일이다.
이 감나무가 상징하는 바는 이렇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이 쓰신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첫 장 첫 줄도 “ 인생사세(人生斯世)에 비학문(非學文)이면 무위이인(無以爲人)이니라. ” 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에는 생가지를 째서 접을 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先人)의 예지를 이어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이 대추와 밤과 감을 제상에 올리는 의미이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제물 하나를 차리는 데에도 자손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망각한 채로 제상에 이들을 올린다면 마치 돌을 올리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100년 전도 아니고, 200년 전도 아니고, 당장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어져 내려오던 그 가르침들이 한국전쟁 전란의 와중에서 망각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조상의 슬기마저 낡은 것이라고 외면해 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수택(手澤)어린 귀중한 골동품을 플라스틱 제품과 바꿔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단순한 관습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에 이런 상징성이 있는 줄 저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한 식물학적 사실도 새로웠고 그러한 지식을 우리의 문화에 상징으로 사용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징은 상징일 뿐이라고, 그런 과일 없이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에는 공통되는 어떤 물리적 요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 까요? 그리고 그 물리적 요소에 상징적이면서 합리적인 의미가 부여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이 글에서 설명한 것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교과서에라도 실어서 가르쳐야 하는거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