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리트미 예술
혼의 흘러넘침, 오이리트미 예술
- <오이리트미 예술>, 루돌프 슈타이너, 물병자리.
발도르프 교육에 대한 관심은 오이리트미 예술에서 절정을 이룬다.
오이리트미(Eurythmie)는 희랍어로 '아름다운(eu)'과 '리듬(rythmie)을 의미한다. 1912년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안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언어를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이다.
오이리트미는 조화로운 정신적 동작을 중시한다.
'내적 체험을 통한 자기교육'
오이리트미는 이렇게 소개되어지고 있다.
이제, 오이리트미에 대한 슈타이너의 설명을 들어보자.
... 나는 오이리트미가 인간 내면의 저 은밀한 곳에서부터 움직이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동작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주위의 공간과 나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관계인식, 나의 내면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진다. 또한 내 몸의 움직임과 방향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을 그대로 느껴보는 체험은 즐겁고 놀라운 감동이고, 자신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다. p.14
슈타이너는 오이리트미를 통해 몸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공간-따라서 변화하는 공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언어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이란다.
몸짓으로 공간을 변형하고 이 변형된 공간을 그대로 느껴봄으로써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예술. 거기에 더해 오이트리미의 몸짓은 언어를 표현하는 동작예술이라고 말한다.
오이리트미의 움직임은 자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발성 기관의 운동 기능으로부터 취해진 것입니다. 후두부 그밖의 발성 기관에 경향으로서 내재해 있는 것을 그대로 인간 전체에 옮겨 바꾼 것입니다. 낭송이나 음악과 함께 표현되지만, 오이리트미 그 자체는 무언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움직임 속에서, 인간 전체는 후두부가 되어 표현됩니다. - 1920. 3. 21. 슈타이너의 강연
그렇다면 오이리트미는 언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또 언어는 인간에게 무엇일까?
오이리트미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언어로서, 음성에 의한 언어와 마찬가지로 혼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이리트미는 음성에 의한 언어가 귀에 대해서, 그리고 귀를 통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오직 눈을 위한 예술의 수단으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p.28
언어는 인간의 본성에서 생겨났습니다. 모음은 항상 혼이 체험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놀랐을 때는 'a'로 저항에 무딪혔을 때는 'e'로 혼의 체험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를 타인을 향해 열어 보일 수 있는 표현 방법은 아시다시피 언어입니다. 언어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가장 내적인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공간적, 시간적으로 외적인 세계를 제재로 하는 여러 예술에 첨가하여 모든 시대에 그것에 어울리는 상태로, 때로는 다른 여러 예술과 연관해서 언어에 의한 예술인 '시'가 나타났습니다. p.46
언어에 의한 예술이라... 시에 대한 이같은 격찬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다. 물론, 현대(슈타이너 당시가 1920년)의 시에 대해 99%가 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슈타이너의 격찬을 들을 만한 시는 그리 흔치 않다.
오늘날 시작 가운데 99%는 시가 아니고, 1%만이 시인 것입니다. 시인은 정신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을 언어 속으로 흘러 들여보내야만 합니다. 언어의 회화적인 요소와 음악적인 요소 속에서 정신을 표출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p.118
슈타이너가 오이리트미 예술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프란츠 브렌티노에 대한 언급은 정말 흥미롭다. 그 말이 흥미롭다기보다 그것이 지젝이 라캉을 지적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영국 다큐멘터리 중 '지젝'에 관한 것이 있는데(제목이 <지젝>이다. <들뢰즈>도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지젝이 라캉의 비디오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라캉이 하는 강의의 내용이 아니라 라캉이 보여주는 동작, 태도에 있습니다. 저것이 얼마나 계산된 행동인 지 안다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와 유사한 말을 슈타이너가 프란츠 브렌티노에 대해 말한다.
... 우리들은 그가 강의 시간 중에 보여주는 온갖 형태의 이몸짓 속에 그의 철학 자체가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p.49
그런데 이 문제-철학이 팔 움직임, 몸짓 전체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는 것-를 편견없이 심화시켜가면, 우리들이 호흡 기관이나 언어음성기관에 의해 숨을 쉴 때에 내보내는 것. 모음을 발음할 때에 밖으로 토해 내는 것. 그때 입술이나 이나 입천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은 결국, 공기의 몸짓이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케 됩니다.
.... 다만 이 공기의 몸짓을 공간 속에서도 귀로 들을 수 있는 몸짓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 작가의 글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읽게 됐다. 작가가 민주화 항쟁으로 자식을 잃은 어미를 만나 밥을 먹는데 그 어머니의 몸짓 하나하나에 자식을 잃은 슬픔이 있더라는 얘기다. 내면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슬픔이 '흘러넘쳐' 손가락질 하나에도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들이 감각적 혹은 초감각적인 관찰을 통해서 이 공기의 몸짓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되면, 말하자면 모음이나 자음을 발음하거나 문장을 낭독하거나 강약이나 약강 등의 운을 만들 때에 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몸짓 속에 몸을 맡길 수 있게 되면 '아아! 문명 사회의 여러 언어는 관습에 대해서 어떠한 타협을 해왔던 것일까'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의 언어는 마침내 학문적인 인식을 위한 표현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생활 속에서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위한 표현 수단이 되어 버리고, 본래 언어에 구비되어 있던 혼의 힘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인 쉴러가 '혼이 말하고 있는데도, 아아! 말하고 있는 것은 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문명화한 언어에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pp.50-51
아아! 실로 문명화된 언어 이전의 언어가 가진 마술적 힘을 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일까!
그리하여 슈타이너에게 낭독과 낭송은 중요한 이슈가 된다.
낭독과 낭송은 이미 하나의 비밀스러운 '오이리트미'
낭독과 낭송은 언어를 상상 위로, 조소적, 회화적으로, 또는 음악적으로 즉 율동적, 선율적으로 형성하면서 밖으로 그것을 표출해야 하는 것이다. p.62
"'혼의 흘러넘침'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슈터이너의 표현은 얼마나 또 멋진가. 영화 이론서와 미학에서 흔히 듣던 말이지만 이 만한 표현도 없는 듯 하다.
따라서 "오이리트미를 연기하는 사람이 그 인간으로서의 전존재를 어떻게 형성하고 형성되는 운동 속에 옮겨 넣을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p.68)."
실제 오이리트미 예술이 어떻게 공연되고 있는 지 아래 동영상을 보면 느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혼은 어떤 미묘한 동작에 있어서도 혹은 그것이 어떠한 작은 움직임이라해도 신체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p.112
모음은 압박해 오는 외적 지각에 대한 인간 내면의 반작용으로서 형성된다. 자음은 자연의 조형적인 활동이 반동적으로 모방된 언어 형식이다.
... 고대의 인간이 현대의 인간보다 쉽게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형태가 가까워올수록 인간의 육체와 혼은 점점 깊게 되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형태로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의 체험이 점점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로 인해서 영적인 체험은 점점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p.164
현무 [玄舞]
“모든 감각을 정지시킴으로써 고요한 입정상테에 들어가게 되면, 그 상태가 지속되면서 우주대자연의 현묘지기玄妙之氣와 감응 할 수 있는 내력內力 이 생기게 된다. 이런 내력으로 천지대자연의 무한한 기氣를 다스려 자신의 수련상승은 물론 타인과 만물까지 이롭게 할 수 있다. 내력을 사용하여 승유지기乘遊至氣를 부드럽게 타게 되면 전신이 현묘지기에 이끌려 절로 춤사위가 터져 나오므로 이를 현무玄舞라 한다.”
현무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현묘한 기운의 흐름을 타며 추는 춤을 말합니다. 수련 방법은 오감과 육감 등 모든 감각을 정지시켜 깊은 고요함에 들게 되면, 우주 대자연의 현묘지기와 감응하는 심력이 생기고, 이러한 심력으로 기를 부드럽게 타면, 전신이 기운에 이끌려 절로 춤사위가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를 즐기는 것을 현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