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호 평전- 사회변혁을 꿈꾼 민중경제학자의 삶
조용래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경제민주화 주장’ 유인호 교수, 평전으로 기리다
20주기 기념 추모집도 발간… 민중경제학자의 삶 재조명
“어느 날 목사님들이 모여 ‘유 교수는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얘기한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망하지 않은 걸 보니 거짓말 아니냐’고 농을 걸었습니다. 교수님은 되레 ‘목사님들은 예수 재림을 20년 가까이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한 것이 무슨 대수냐’는 위트를 보여줬어요. 자본주의 위기가 세계적 규모로 퍼지고,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니 교수님의 예언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김병태 건국대 명예교수는 민중경제학자 일곡 유인호 전 중앙대 교수(1929~1992)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5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는 유 교수의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330㎡(약 100평) 규모의 행사장은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가득 들어찼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박형규 목사, 한승헌 변호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추모식에 이어 고인의 삶과 사상을 집대성한 <유인호 평전>과 지인들의 추모사를 엮은 <진보를 향한 발걸음>(각 인물과사상사)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렸다.
무엇이 오랜 세월을 지나고도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경제민주화를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가 바로 유 교수였다. 재벌을 비롯한 소수 1%의 정치·경제적 장악력이 강해졌고, 중소상공인·자영업자·노동자·농민의 생활이 어려움을 더해가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평전을 집필한 조용래 박사는 “한국경제는 유 교수가 본격적으로 주장을 펴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줄곧 제기해 온 문제군(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당면 과제로 경제민주주의 실현을 꼽았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유 교수는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제 기본권 7가지 규정’을 제기했다. 여기에는 ‘국가 권력은 경제력 집중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사상은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낸 고도성장의 허상을 지적하는 데서 비롯됐다. 유 교수에게 당시의 성장은 자본과 기술, 시장을 외국에 의존한 ‘종속적’인 성장에 불과했다. 수출과 국민총생산(GNP)이라는 숫자 증대에만 매달리면서 재벌을 비롯한 일부의 배만 불리고 대다수를 피폐하게 만드는 허깨비뿐인 성장이었다. 대신 유 교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경제의 풍부함”(김종걸 한양대 교수)을 이야기했다. 그는 ‘민중’ ‘민족’ ‘민주’의 경제학자로 불렸다. 대다수 민중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민중경제’, 세계화 시대에도 강력한 국내 자본을 육성하는 ‘민족 경제’가 돼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추진하는 데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벌어진 뒤 박정희 군부세력은 정유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당시 동국대에 재직하던 32살의 유 교수에게 계획안을 맡겼다. 유 교수는 외자를 일절 배제하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건설할 것을 주장했으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안에 밀려 채택되지 못했다. 훗날 1970년대 유신경제가 수출은 16억달러에서 150억달러로 늘었지만, 외채를 220억달러나 도입해야 했으며 무역적자도 136억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유 교수의 혜안을 보여준다.
유 교수는 ‘국내 자원 활용 주도형’ 경제 발전을 주창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기업농’ 육성책에 반대해 ‘농업 협업화를 통한 농민들의 연합’을 주장했다. 농민들이 일정한 토지와 농기구를 공동 소유하고 생산의 결과를 나눠가지는 방법이다. 유 교수는 새마을 운동을 농업 협업화의 방향으로 전개하자고 박정희 정부에 건의했으나 정치적 목적을 우선한 집권세력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는 재벌을 소규모 기업들로 해체하기보다 재벌의 소유를 ‘총수’로부터 ‘사회’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을 국유화시켜 관료들에게 맡기는 방법이 아니다. 농업 협업화처럼, 공장도 구성원들에게 운영을 맡기는 소유의 민주화를 뜻한다.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한 유 교수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구소련식의 계획경제가 아니었다.
계급이 사라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는 사회에 가까웠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일곡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료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 1974년 10월 한 일간지에 ‘연료정책의 모순’이라는 칼럼을 쓰기 위해 연탄공장을 찾은 유인호 교수. 유 교수는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인물과사상사 제공
유 교수는 자신의 최대 연구과제가 “나와, 겨레와, 인류의 가난과 슬픔과 비참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1980년에는 민주화를 촉구하는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가 신군부가 만들어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추모집에서 “민중을 위한 스스로의 학문적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고행의 길을 살다 간 용기있는 사람”이라며 “그 발자취가 역사의 한 구석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황경상 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