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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동화경제사] 동화 속에 담긴 자본주의 역사

by 성공의문 2018. 2. 2.

넬로는 왜 은화 한 닢이 필요했을까? 마르코네 엄마는 왜 외국으로 떠났을까? 왕자는 왜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했을까? 앤 셜리는 자전거를 마음껏 탈 수 있었을까? 15편의 동화를 통해 당대 사회현실을 들여다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경제의 흐름을 좇는 책이다. 특히 돈과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의 모습을 동화에서 어떻게 풍자했는지 보여주며 자본주의의 민낯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동화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저자는 오히려 어른이 된 이후 동화의 오묘한 세계에 새롭게 눈떴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세계 경제와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두면서, 동화 형식을 빌려 당대 논쟁의 최전선에 뛰어든 사례가 적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거대 월스트리트 패권과의 대결에 대한 은유이자 화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정치적 우화이고, <행복한 왕자>는 가난과 질병, 빈부 격차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상기시켰다. 저자는 동화가 탄생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당대의 주요 사건을 곁들여 동화를 새롭게 읽어보려 했다. 그 결과, 예쁘고 아름다울 것만 같은 동화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15편의 동화 중 8편은 산업혁명의 확산,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립과 함께 생산·무역·금융망이 조밀해지고 계급별·국가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1800년대 후반부에 출간됐다.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가 거리에서 죽은 때는 감자마름병의 재앙이 유럽을 휩쓴 대기근(1845~47년)의 시대였다. 성냥은 당시 ‘핫 아이템’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출간되기 한 해 전인 1844년, 안정적인 마찰·발화 방식으로 사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줄인 ‘안전성냥’이 발명됐다. 그러나 성냥에 들어가는 백린은 인체에 매우 해로웠다. 성냥팔이 소녀는 동사했지만 성냥공장에 취직한 소녀들은 산업재해로 죽어갔다. 성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도 있었는데, 세계성냥 생산의 75%를 차지했던 스웨덴의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는 공격적 투자를 일삼다 피라미드 사기극이 탄로나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윌리엄 포그가 세계여행을 떠난 때는 프랑스에서 ‘애국투자’ 열풍을 일으키며 수에즈운하(1869년 완공), 6093㎞의 미 대륙횡단철도(1869년 완공), 봄베이-캘커타 간 2127㎞에 이르는 인도반도철도가 놓인(1870년) 직후였다. 포그는 이런 인프라를 이용해 정확히 79일5분 만에 지구를 횡단한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토목건설은 과잉투자를 불러일으켰고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불황(1873년)이 발생한다. “세상은 더 가까워졌지만 위기는 더 빨리 퍼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즈의 마법사>(1900년)를 ‘화폐투쟁’으로 읽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이 나오기 4년 전인 1896년 미국 대선은 금만 화폐로 인정할 것이냐, 은도 함께 인정할 것이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화폐선거’였다. 1873년 실시된 금본위제의 여파는 서부 농민들에게 심각한 불황의 타격을 입혔고, 이들을 기반으로 ‘인민당’이 생겨난다(1892년). 1896년 선거에선 금본위제의 공화당이 이겼지만, 동화에선 도로시의 ‘인민주의’가 승리한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묻기 위해 도로시는 ‘노란 벽돌길’(금본위제)을 따라 ‘에메랄드시티’(금권정치가 횡행하는 수도 워싱턴)를 찾아갔으나 믿었던 마법사는 가짜로 밝혀지고(공화당의 클리블랜드 대통령), 결국 자기가 신고 있던 은구두(은본위제)야말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마법의 신발임을 깨닫는다.

캐나다 페미니스트 1세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빨간머리 앤의 입을 통해 “레이철 아주머니는 여성들도 투표할 수 있게 된다면 곧 좋은 변화가 생길 거래요”라며 여성참정권을 옹호한다든지, 로빈슨 크루소를 자본주의 기율을 준수하고 투자에 능한 자수성가형으로 묘사한 작가 대니얼 디포가 악명 높은 투기광풍으로 기록된 ‘남해주식회사’에 투자했다가 돈을 몽땅 날린 일화들이 깨알재미를 선사한다.


목차

여는 말

제1장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위기는 더 빨리 퍼진다

리폼 클럽에서의 2만 파운드 내기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 쥘 베른 

시계는 저녁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자존심 경쟁 

프리먼토리서밋에 박힌 순금 대못 

과잉 투자가 부른 최초의 글로벌 불황 

제2장 성냥을 팔던 고사리손, 성냥으로 떼돈 번 큰손

산업혁명기의 동화작가, 안데르센 

감자마름병, 유럽 중북부를 집어삼키다 

질병을 앓던 성냥공장 여공들 

‘성냥왕’ 크뤼게르 

‘천재’와 ‘사기꾼’의 묘한 조합 

‘소녀’의 유일한 무기 

제3장 넬로와 파트라슈가 걸었던 길, 돈과 욕망이 넘쳤던 길

넬로와 파트라슈, 그리고 플랜더스 농부들 

‘루벤스의 도시’ 안트베르펜 

14~16세기 유럽 대륙의 기간망 

크게 낮춘 넬로와 알루아즈의 나이 

제4장 파시즘은 피노키오를 어떻게 이용했는가?

독자들의 항의로 시작된 속편 연재 

자유분방함과 사회비판의 코드 

무솔리니 정권에서 출간된 4편의 아류작 

‘착한 노동자’ 담론 

중산층 신화로 확대 포장된 디즈니판 〈피노키오〉 

제5장 억눌린 자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유토피아

독일 문화의 원형을 탐구하다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과 독일농민전쟁 

‘목소리’, 브레멘 음악대의 상징적 열쇠 

패배의 상흔을 달래려는 진혼곡 

제6장 월스트리트를 놀라게 한 도로시의 은구두

브라이언의 ‘황금십자가 연설’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에메랄드시티로 

“화폐 발행과 유통에 관한 우화” 

‘은화가 정답이다!’ 

도로시 일행과 닮은 ‘콕시의 군대’ 

〈오버 더 레인보우〉 

제7장 아기 노루 밤비는 정말 유대인이었을까?

생명에 대한 찬가, 폭력에 대한 고발 

『밤비』를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운 나치 정권 

반유대인적?반자본주의적 화폐관 

밝고 평화로운 디즈니판 〈밤비〉 

제8장 삼만리 뱃길에 흐르는 이주노동자의 꿈과 눈물

닮은 듯 다른 얼굴,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이탈리아 디아스포라’ 

탱고, 이주민의 음악 

제9장 영국을 조롱한 아일랜드 소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16년 7개월에 걸친 항해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와 조롱 

출세 야심이 영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금융혁명과 ‘아일랜드 정체성’ 

제10장 나치의 전사로 다시 태어난 꿀벌 마야

마야, 꿀벌 왕국을 도망치다 

전쟁터의 베스트셀러 

꿀벌 왕국 vs. 독일 제국 

낭만주의와 전체주의의 잘못된 만남 

『꿀벌의 우화』가 그리는 사회 

제11장 앤 셜리가 두 바퀴로 굴러가는 세상을 만들기까지

에이번리 마을에 도착한 열한 살 소녀 

『빨간 머리 앤』의 고향, 프린스에드워드섬 

‘상상’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아이 

숨지기 전날 출판사에 보낸 최종 원고 

자전거가 페미니즘을 만났을 때 

제12장 달콤한 초콜릿에 숨은 불편한 진실

전투기 조종사에서 동화작가로 변신하다 

‘움파룸파’는 어떻게 탄생했나? 

퀘이커교 기업들이 주도한 영국 초콜릿산업 

캐드베리월드가 보여주지 않는 것 

제13장 왕자는 왜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했을까?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후기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끔찍한 현실 

나눔과 베풂의 고귀한 가치 설파? 

‘동화 속 동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색채 

평탄하지 않은 삶 

제14장 무인도에 열광한 사람들은 왜 증권거래소로 몰려갔을까?

노예무역을 위해 기니로 떠나다 

대니얼 디포와 로빈슨 크루소의 닮은 꼴 인생 

“내가 이 땅의 주인이자 왕이다” 

디포의 ‘주가 띄우기’ 프로젝트 

아이작 뉴턴을 울린 ‘남해버블’ 

제15장 자본주의는 자유와 낭만을 먹고 자란다 

“미국 현대문학은 이 소설에서 비롯했다” 

노예해방운동과 자유토지론 

흑인 노예, 북부 금융자본의 대출 담보물 

도금시대의 쓴맛 

참고문헌


인상깊은 구절

P.41~42 : 백린 성냥에는 단점이 있었다. 제조 과정에서 독가스를 내뿜는데다 피부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등 인체에 치명적 위험을 지닌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10대 여성이었던 성냥공장 노동자들이 건강을 해치는 산업재해가 비일비재했다. 1840~1850년대 영국 내 성냥공장의 안전 실태를 다룬 근로감독 보고서가 잇달아 나온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까지 백린 성냥이 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 때문이리라.

P.81~82 : 층계 아래로 빛이 들어오는 작은 지하방, 낡은 의자 하나, 허름한 침대, 거의 부서진 탁자……. 작품의 들머리에서 제페토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가진 것 없이 가난에 찌들었을 뿐더러 동네 아이들한테 놀림을 당하는 불쌍한 제페토의 존재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질서 앞에 무릎을 꿇은 수공업과 장인적 생산방식에 대한 조롱으로 읽힐 만하다.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강조된 건 물론이다. 막 뿌리내리기 시작한 산업사회의 노동규율은 자연(전통사회)의 생활리듬을 기계의 생활리듬에 맞추도록 강제했다. 『피노키오의 모험』의 주된 구성 요소인 ‘학교’와 ‘시간’은 그 핵심이다. 빈둥대는 어린이가 교육을 통해 소년이 되는 과정은 이리저리 떠도는 부랑아가 노동훈련소를 거쳐 노동자로 재탄생하는 전형적인 산업화시대의 비유로 읽히기도 했다.

P.113~114 : 미국 땅 한복판에 자리 잡은 캔자스주를 덮친 회오리바람은 경제위기로 커다란 혼란에 빠진 미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온통 잿빛인 도로시네 마을 풍경은 불황에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현주소다. 노란 벽돌길(금본위제)을 따라 동쪽 끝 에메랄드시티(금권정치에 놀아나는 워싱턴 D.C)를 찾아간 도로시 일행에게 가짜 마법사로 밝혀진 오즈(무능한 클리블랜드 대통령)는 먼저 서쪽의 못된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은구두를 빼앗으려는 서쪽의 못된 마녀를 도로시가 무찌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로시가 옆에 있던 물통을 들어 마녀에게 쏟아붓자 마녀는 점점 오그라들었다. 완전히 녹아서 형체가 사라지기 직전 마녀가 내뱉은 말. “내 몸에 물이 닿으면 끝장이란 걸 몰랐니?” 돈 가뭄을 해소하는 화폐공급의 지혜를 은유적으로 일깨우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