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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농사짓는 반항아로, 사춘기를 나다 - 산촌 홈스쿨링 이야기

by 성공의문 2013. 3. 15.

‘자급농사의 달인’ 엄마와 두 딸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인 우리 가족을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엄마가 있다. 한때 집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시골에서 키운 장본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소규모 자급농사의 달인, 예민한 초감각을 가진 잔소리꾼이다.

 

큰딸인 나는 아침에 머리도 빗지 않고 밭으로 나가는 털털함의 화신이자 양서류, 굳이 말하자면 청개구리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혼자 괭이질하면서 자기 솜씨에 감탄하는 자뻑 기질이 있는 십대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밥 먹을 때만 나타나는데도 ‘사랑스럽게 가르랑거리는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고양이는 동생과 딱 어울린다. 내가 곰이라면 동생은 여우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겠다.

 


이상적인 농사 vs. 흙투성이 현실의 농사 

▲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깨를 심고 있는 여연.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학교를 그만 둔 첫해였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왜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나는 농담처럼 “밭을 빌렸었는데 집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 말에는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둘 다 여자인 어른 하나랑 애 하나가 기계 없이 500평 밭농사를 짓는다!’ 매일 학교에 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물론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학교 비슷한 걸 만들어서 한참 재밌게 놀러 다니긴 했지만).

 

게다가 나는 일을 참 못했다. 물론 그 나이에 농사일을 잘하는 애는 한국 전역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였다. 풀 베겠다고 낫 들고 설치다가 작물을 베는 일이 허다했고, 내가 캔 감자에는 유난히 호미로 찍은 자국이 선명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하려니까 눈물 콧물을 다 짜낼 만큼 힘들었다. 

 

한동안은 그 힘든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농사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였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이미 농사일 때문에 가족들과 으르렁거리면서 만들어진 반발심이 얼룩처럼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은 뒤였다.

 

이상적인 농사가 땀 흘리는 건실한 노동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적인 삶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면, 내게 있어서 현실의 농사는 욕 나오게 바쁘고, 무식하게 힘들기만 하고, 흙투성이가 되는 일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미리부터 뼈저리게 깨달은 나는 내심 밭에서 벗어날 기회를 꿈꾸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뭔가 일을 칠 용기도 없는 어린애가 갈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 나는 집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와 자주 싸우지만 않는다면 집은 계절마다 신선하고 맛있는 먹을 거리들이 넘쳐나고, 주변에는 산과 별, 꽃과 나무로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땀방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가난한 우리 집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아마 나는 농사일을 집이라는 좋은 곳에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임시방편일 따름이었다. 곧 농사에 대한 내 진짜 마음을 시험할 때가 왔으니.

 

밭일하며 마음의 격동기를 거친 시간들 

▲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이 시대에는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저항이야.’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다. 이 말처럼 엄마는 농사야말로 산업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책상 앞에 앉아 죽어라고 책만 파는’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딸들은 그런 불균형한 공부를 하지 않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나 청개구리 기질이 충만했던 큰딸의 비비꼬인 마음은 엄마가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에 관심 좀 가지라고 잔소리를 하면 할수록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로 기울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타입의 아이였다면 내 반항에 뭔가 정당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일하러 나가기 싫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눈앞에 닥친 일들에서 어떻게든 내 이익을 보호하려고 미친 듯이 싸웠다.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쉬고, 힘을 덜 써서 일하고, 작업복을 안 빨아보려고 잔머리를 마구마구 굴리다가 엄마에게 걸리면 그날은 싸움의 날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조금씩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 마음속에서 좀더 깊은 분노가 부글부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벌써부터 농사를 짓고 살라고 할 수가 있어?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잘할지 엄마가 어떻게 알고? 내 인생을 미리 설계해 놓은 거야? 그럼 도대체 제도교육 안에서 부모의 관리를 받으며 사는 애들이랑 뭐가 다른데?

 

엄마에게는 분명 인생의 많은 것들이 ‘농사’와 ‘생태주의’로 수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세대인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스스로 선택한 가치가 아닌, 너무 흔해서 있는 줄도 모를 정도인 산소 같은 거였다. ‘귀한 줄 몰랐다’는 게 돈도, 넘쳐나는 정보도 아닌 가치관이었다.

 

사춘기가 지난 어느 시점부터는 나도 확실히 농사일을 꽤나 즐기고 있기는 했다. 아침 일찍 안개에 몸을 가린 산 근처에 있는 밭에 나가 새벽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일하는 건 하루 중에서도 기분 좋은 순간이다. 단지 일하는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초조했을 뿐이다. 이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책을 읽었으면, 수학문제를 풀었으면, 기타를 연습했으면, 뭐라도 좋으니까 다른 걸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밭에만 가면 늘 시간에 쫓기고 불만에 차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대는 시간에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 십대 여자애들이 할 만한 그런 걸 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고 자신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실제 모습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속 빈 강정 같은 아이였다(지금도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명료하게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고민한다  

▲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뭘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앞으로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만약 내가 200년쯤 전에 한국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을 것이다. 다른 삶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냥 꿈만 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면에서 내가 이렇게 온갖 고민을 하는 이유는, 이 시대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농사와 식량자급의 가치를 워낙 하찮게 생각하고, 부모가 농사를 지어도 자식은 다른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물이 들었는지 농사일을 순수하게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나중에 나이 들고 해도 되는 일을 왜 벌써부터? 라는 통속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차피 이미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있으니 걱정 없다는 여유로움도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농사일을 배우는 게 내 나머지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은근히 생각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 앞으로의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뭐지?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려서 회사를 다닐 생각도,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뭘까? 이것저것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농사 쪽으로 생각이 흘러왔다. 하지만 역시 찝찝했다. 정말 이걸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님 그냥 살아온 대로 사는 게 편한 거야?

 

게다가 농사도 농사 나름이라, 관행농법으로 대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고, 유기농이어도 억 소리가 나오는 커다란 하우스를 몇 동이나 짓는 부농(?)도 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을 기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급자족을 꿈꾸며 다양한 작물들을 소규모로 심어 기르는 엄마와 같은 사람도 있다. 이 안도 단순한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알을 뚫고 날아가기를 아주 간절하게 원한다. 하지만 그전에 과연 그 ‘알’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분명 땅에서 먹을 것을 직접 기르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사는 일이 진솔한 삶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다른 걸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에 공감하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문제라면 문제다. 애매모호한 상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다. 아니, 젊다. 그러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떤 가치가 의미 있는 가치인지에 대해서. 

- 여성주의 저널 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