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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blog.sermo.com


1. 시각 활동에서의 안구근육의 움직임

 

눈의 망막에서 사물이 날카롭게 보이는 중심점은 전체 망막의 0.02%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물의 전체형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눈의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사물의 표면을 빠르게 옮겨 다니고, 이렇게 부분적으로 얻은 시각내용을 ‘자아조직’이 함께 구성해서 사물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손으로 사물을 만지듯이, 눈으로 사물을 더듬는다고 여길 수 있다. 눈으로 더듬는 이 활동을 Saccade라고 하며,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 초당 2~5회 정도 발생한다. 시각 활동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무의식적이지만 매우 능동적인 활동인 것이다.

 


2. TV 화면은 실재인가?

 

TV화면이 움직이는 그림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흔히 그것이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TV화면은 브라운관의 화면에 투사되는 무수한 색점에 불과하다. 아날로그 TV의 경우 초당 25개의 완전한 화면이 투사되는데, 그 25개의 완전한 화면을 위해서 50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만 한다. 즉 완전한 한 화면을 위해서 두 개의 불완전한 화면이 투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산을 해 보면 한 화면이 투사되는 시간이 오십분의 일초가 된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안구 고유의 활동인 Saccade가 일어 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시각대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이 ‘더듬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TV시청 중의 Saccade활동이 20초 안에 5~7회만 발생한다는 사실이 이미 1979년의 연구결과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인 시각 활동에서는 20초 안에 40~100회의 Saccade가 일어나는 점과 비교해 보면 평균 잡아 안구활동이 90%나 줄어 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 시각영역이 200도임에 비해, TV시청 시의 시각영역은 TV의 크기에 따라 겨우 6~7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해서 결국은 TV시청 중에 시각 활동이 생리적으로 완전히 저해될 수밖에 없다.

 


3. Alpha상태

 

두 가지 뇌파가 있다. 눈을 뜨고 의식적으로 깨어서 활동할 경우 생기는 Beta파와, 명상이나 최면상태, 의식활동이 적은 상태, 어두워서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드러나는 Alpha파가 그것들이다. TV시청 중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은, 비록 눈을 뜨고 움직이는 화면을 능동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겨도, 오히려 그 반대로 베타파보다 알파파가 현저하게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결국 눈을 뜬 상태에서 최면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극도로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눈의 근육이 대상물을 ‘의지적으로’ 더듬을 수 없고, 결국은 ‘보는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소극적인 알파파의 상태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정확하게 보자면, TV화면에는 결코 완전한 그림이 생성되지 않는다. 완전한 그림은 결국 신체 내부, 즉 망막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시각은 지속적으로 화면에 고정되어야 하지만, 외부에서 완전한 그림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안구의 활동의지가 사라지고 마는 기이한 현상이 TV시청 중에 일어나고, 알파파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칼로리 소모

 

TV시청 시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 적다는 점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인간은 끊임없이 안구 근육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칼로리 소모가 있기 마련이다. 8세에서 12세 까지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칼로리 소모가 기본소모보다 약간 씩 줄어 든 반면, TV시청 시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보다 평균 14%가 내려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TV시청을 하면서 그저 멍하니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전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어대는 데에 있다. 오늘날 선진국에 만연하는 어린이 비만현상의 원인을 TV시청에만 돌릴 수는 없겠지만, 고려를 할 만한 연구결과임에는 틀림없다.

 


5. 중독성

 

TV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은 될 수 있으면 많이 시청자의 주의를 빼앗는 것이다. 장면의 변화나 화면의 속도감을 조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음향과 프로그램의 주제, 내용을 통해서 시청자가 몰입토록 하는 일이, 미디어 분야가 광범위해진 오늘날 그렇게 쉽지는 않다. 결국은 더욱 더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TV시청자의 칼로리 소모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적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바보상자를 쳐다보더라도, 극적인 비상사태에나 분비되는 호르몬인 Kortisol과 Adrenalin이 예기치 않았던 장면전환에서 분비된다고 한다. 비상상태에 분비되어야 할 호르몬의 잦은 분비가 독성으로 작용해서 신체가 항상 드러나지 않은 스트레스상태에 머물게 되며, 생리학적인 중독현상을 보이게 된다.

 


6. 자기활동이라는 환상

 

인지학적으로 보아서 감각활동은 감성의 성향을 지닌 ‘의지활동’으로 감각을 통해서 인간이 세계로 들어서고, 세계가 인간 내부로 들어온다. 인간의 자아활동에 속하는 의지력이 안구근육을 움직여서 개별적인 사물을 향하게 하고, 시각적인 주의를 지배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감각론, 즉 감각기관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입구에 다름없으며, 그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극을 두뇌의 신경기관이 처리해서 인간이 지각하고, 인간이 이 감각활동에서 소극적이라는 통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화면이 지속적으로, 극도로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TV시청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상당히 활동적이라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지만, 사실은 최면상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동적이 되고 만다. TV시청 중에 인간이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신체적인 근거는 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인지학적인 차원에서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영적-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내어야 할 ‘형상적 상상, Imagination' 즉 ‘생동하는 내면의 그림’을 화면의 그림이 대체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자아의 활동을 완전히 저지한다는 데에 있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슈타이너가 당시의 흑백영화를 보면서 예언하기를, 이 매체가 극도로 빠르게 문화의 한 장르로 발달하고 심지어는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지학적 인류발달사를 조망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예전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물을 바라보면 동시에 그 사물에 작용하는 정신적 존재 역시 형상으로 볼 수 있었다. 후기 아틀란티스 제 5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꿈꾸는 듯한 형상적 인식’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오늘날의 인간은 정신적 존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졌다.

 

현재의 문화기가 들어선지 얼마 후인 17세기에 이미 영화와 유사한 기법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에서,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후의 인간이 외부에서 그 형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칼리유가가 끝날 무렵인 19세기 후반에 무성영화가 개발되었으며, 그 이후 100여 년 동안 미디어는 급속히 발달하였다.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내적인 형상을 일구는 대신,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그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비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한 인간이 TV시청을 하면서 의식적인 자아활동을 놓아 버리고, 수동적으로 외부의 그림에 최면당한 듯 몰두하는 동안, 의식이 비어버린 그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인간이 ‘형상적 인식’을 잃어버린 대신 ‘자유’를 얻었으며, 자유를 얻은 만큼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하는 책임감 역시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인류의 운명을 -여기에서 미래는 역시 확장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자아활동을 통한 형상적 사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런 자아활동이 멈춘 곳에 자연이하의 힘들, 즉 아리만적, 루시퍼적 힘들이 인간의 미래를 양도받는 위치에 들어선다. 이는 비단 TV시청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곳에는 항상 그렇다. 선전을 통한 사고의 조절,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 등은 사실 이런 자연이하의 힘들의 작용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7. 어린이의 TV시청

 

어른과는 달리 어린이는, 특히 7세 이전의 어린이는 ‘존재전체가 감각기관’이다. 어린이는 세계 속에 침잠해서 살고 있으며,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어린이들이 TV를 시청하면, 어른들이 그것을 TV화면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달리, 그것이 ‘실재’라고 여기며,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직 실재와 허상(virtual)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세 이하의 어린이 교육은 의지감각들, 즉 촉각, 생명감각, 운동감각, 균형감각을 올바르게 발달시키는데에 그 중점이 있다. TV시청은 이 의지감각들을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악이 된다. 만질 수도 없으면서 실재로 다가오는 TV 속의 친구들, 동물들, 사건들이 어린이에게 실재와 허상의 구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발생한 청소년 총기난사사건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TV와 컴퓨터 중독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시사해 준다. 위에 언급된 생리학적, 신체적 현상 때문에라도, 어린이를 TV 앞에 앉혀 두는 것은 ‘신체손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 TV가 집 안에 없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TV를 통해서 많이 배운다거나, TV를 어릴 적부터 보아야 나중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독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최종학력이 높을수록, 수입이 높을수록 TV시청률이 적다고 한다. 즉 배움은 책이나 강의와 같은 다른 매체를 통해서 얻는 것이지, TV를 통해서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소일거리가 있기 때문에 TV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고, 다른 소일거리를 배우거나 만드는 것은 TV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그 다른 소일거리를 즐겨서 해 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골라서 보여주어라’, ‘함께 시청을 해라’ 등등 조언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조언들은, 일단 집 안에 TV가 있으면, 부모가 어지간한 고집불통이라서 수미일관적이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집안의 TV존재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조금 더 보겠다고 날마다 떼를 쓰는 아이와, 안 된다고 야단하는 엄마의 ‘TV-연극’을 이미 프로그래밍 하고 있다고 여기면 된다. 꼭 TV가 있어야 한다면, 우선은 ‘철저한 일관성과 무한한 참을성’을 가지고 아이와 싸울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인과 어린이는 다르다는 점을 아이에게 반드시 인식시키고, 집에서 결정권은 부모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특히 ‘양부모가 함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아빠는 보아도 괜찮다고 했는데’ 식의 변명이 통용되면 TV가 부부싸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아이들은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TV를 보게 해주는 아빠에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할 것이다.

 

7세 이전에는 TV금지, 15,6세까지는 선별해서 TV를 시청토록 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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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없으면 아이가 친구 집에 가서 시청한다. 이 점이,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미디어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단답형의 해결안은 없는 것 같다. 각자가 TV시청의 해악을 깊이 인식해서 스스로에게 가능한 개인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 글: 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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