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GQ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이다. 2월호에 게재되었다. 양이 넘쳐 일부 잘려 실렸고 여기는 원문 그대로 올린다. 이 글로 우리가 먹는 음식 맛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쯤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인간은, 인공제조 식품첨가물과 소금 같은 광물을 일부 먹기도 하지만, 자연의 생물을 먹고 산다. 이 생물을 크게 나누면 식물과 동물이 될 것인데, 문명을 만들기 전 인류는 먹고 죽거나 탈날 만한 것 외 모든 동식물을 닥치는 대로 입안에 쑤셔넣었을 것이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어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농사(축산을 포함하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농사란 인간의 먹이, 즉 자연의 동식물을 계획적으로 가꾸는 일이다. 자연의 여러 동식물 중에 키우기 쉽고 생산량이 많으며 지속 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농사의 대상들이 선택되었을 것인데, 이렇게 선택된 동식물은 오랜 기간 사람의 손길에 의해 길들여져 자연에서의 생태와는 조금 다른 재배식물과 가축으로 우리 주변에 남게 되었다.
인간은 동식물을 키우면서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하여도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개체군들을 발견하였을 것이다.[이 개체군을 품종이라 한다.] 즉, 한 논에 벼를 심었는데 어떤 벼는 키가 작고 알이 굵은 나락을 다는가 하면 키가 크고 나락이 작은 벼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이 차이를 관찰하면서 농사에 유리한 조건의 개체를 선발하였을 것이다.[이런 선발이 가장 고전적인 품종개량이다.] 그렇게 하여 일정 지역 안에서 유사한 특성을 나타내는 재배식물이나 가축이 안착하게 되었는데, 이를 흔히 토종이라 한다. 농업학자들은 이런 고전적인 방식의 품종개량으로 하나의 재배식물이 한 지역에서 주요 농산물, 즉 토종으로 자리잡는 데 걸렸을 기간을 1,000년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우리 조상 농민들은 수천 년 농사를 지으면서 이런 토종들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한반도 토종들에 대한 '과학적' 조사와 분류는 최초로 일제에 의해 시행되었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한 자원조사라 보면 될 것이다. 이 조사에서, 한반도의 대표적 작물인 벼의 경우 토종이 350종 정도로 분류되었다. 소의 경우는 현재 한우의 상징이 되어 있는 '누렁이' 외에도 '얼룩이'인 칡소나 범소, 그리고 온 몸이 검은 흑소 등도 한반도의 토종 가축으로 있었다.
일제는 이 토종의 조사 이후 근대적 개념의 품종개량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 기호도가 낮은 품종을 개량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는 이미 일본에서 개량하여 안정화되어 있는 품종을 한국에 이식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가축 중에 돼지와 닭은 토종을 거의 박멸하다시피했다. 이 때문에 일제에 의한 품종개량이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일 것이라는 의심을 하기도 하는데, 한우는 사육을 권장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 정도 고차원적인 식민지 경영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일본 벼 품종의 유입으로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이 급격히 늘었다. 일제의 품종개량으로 한국농업이 한 단계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과실을 결국 그들이 수탈하였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품종개량은 일종의 생명공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동식물의 특성을 자연 상태의 교배와 수정에 의하지 않고 농작물에서 얻어낸 게놈 정보를 통해 조직배양, 꽃밥 배양, 유전자 표시자 선택 등의 방법으로 얻어내는 것이다.(이 생명공학적 지식은 설명하기 복잡한 일이니 이 정도에서 끝낸다. 독자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품종개량의 결과물에 대해 더 관심이 있을 것이다. 또 가축 분야는, 대체로 품종을 도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한다.)
한국에서 품종개량을 하는 주체는 정부 산하의 농업기관과 종묘회사, 그리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육종연구가들이다.
이들의 품종개량 목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생산성과 기호도. 즉,
병충해와 자연재해에 잘 버티고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품종과, 소비자가 맛있다 여길 만한 품종이다. 이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품종이 있으면 농업계에서는 '대박'인데,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품종이란 것이 묘하여 생산성이 높으면 맛이 없고, 맛있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이 두 종류의 품종 중에 어느 쪽이 선택되는가는 철저히 상업적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다. 농사도 돈 벌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벼의 품종은 변화가 더디다. 정부에서 보급품종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한국 벼 품종 중 가장 혁신적이었던 것이 1972년에 보급된 통일벼이다. 통일벼는 기존의 벼보다 수확량이 40% 많았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주곡자급률 100%를 이루게 한 '위대한' 품종이다. 그러나 밥맛이 없었다. 여러 이유로 쌀이 남아돌게 되자 1992년 통일벼는 퇴출되었다. 이 즈음부터 벼 품종의 경쟁력은 ‘밥 맛’으로 변하였다. 일본에서 도입한 품종인 아키바레가 강세였다가 일품, 오대 등의 한국 품종이 나와 이에 경쟁하고 있다. 최근에는 역시 일본 품종인 고시히카리가 인기이다. 토종 벼라고 판매되는 것이 있는데,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토종 벼라 하여도 현재의 품종보다 맛이 뛰어나다 장담할 수 없다. 쌀이 남아도는 상황이니 벼 품종은 앞으로도 맛 경쟁이 우선일 것이다.
고추는 '품종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국내에 재배되고 있는 고추 품종만 1,0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추 품종이 이처럼 난립되어 있는 이유는 1990년대 들어 국내 종묘회사들이 외국계 회사들에 의해 병합되면서 퇴사한 육종가들이 너도나도 고추 육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고추 선택 기준을 생산지에 많이 기댄다. 그러나 고추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재배지의 환경보다 품종이 우선한다. 고추 품종마다 매운맛과 단맛에 차이가 있고 이 두 맛의 배합이 고추 맛을 결정한다. 그러나 현재 재배되고 있는 고추 품종이 워낙 다양하여 소비자가 품종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한 농가에서 여러 품종의 고추를 재배하고, 고춧가루 가공공장에서도 품종 구별 없이 수매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추 품종의 가장 큰 문제는 내병성 품종이 크게 번졌다는 것이다. 이런 내병성 품종은 고추의 겉껍질이 얼마나 질긴지 풋고추 상태에서 손으로 잘 꺾이지도 않는다. 씹어서 삼키기가 버겁다. GQ의 표지를 찢어 입에 넣고 있는 느낌이다.
배추 품종도, 고추만하지는 않지만, 퍽 다양하다. 속이 노랑 것이 맛있다는 소비자 인식이 있어 '노랑' 이니 '금'이 하는 단어가 포함된 품종 이름이 많다. 그러나 맛은 다 비슷비슷하다. 배추 품종 중 유독 맛없는 품종이 있는데, CR계 품종이다. 고랭지에 주로 심는다. 고랭지는 약탈적 농법으로 지력이 강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곳의 배추는 무사마귀병에 잘 걸린다. 이 질병에 저항력이 있는 품종으로 '개량'된 것이 CR계이다. 뻐덕뻐덕하여 물에 젖은 마분지 씹는 느낌이 들고 단맛은 없으며 약간의 아린 맛이 나는 것이 CR계 품종이다.
이렇게 맛없는 품종이 점령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가 토마토, 특히 방울토마토이다. 토마토는 재배중에 껍질이 터지는 열과가 흔히 일어난다. 또 운송중에 서로 부딪혀 쉽게 상하고 조금만 보관기간이 길어도 쉬 무른다. 종묘회사들이 토마토의 이런 단점을 '개량'하여 겉껍질이 두껍고 질긴 품종을 내놓았고, 농민들은 이를 선택하였다. 이런 품종의 방울토마토는 입안에 넣어 씹으면 뽀도독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겨나가고, 껍질이 이빨 사이에 끼이면 비닐 조각을 잘못 씹은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많은 채소류가 이같은 내병성 품종으로 맛을 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또 이런 내병성 품종의 재배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한반도의 땅은 인구에 비해 좁아 집약적인, 곧 약탈적인 농업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병해충은 더 늘 것이고….
한국의 품종개량 기술은 유럽과 일본, 미국 등의 국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개량한 품종보다는 외국에서 가져오는 품종이 더 많다. 넓게 보면 품종이식이지만 한반도 거주민이 그 품종을 선택한 것이니 내부의 시각으로는 품종개량이라 할 수도 있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사과 품종은 조생종으로는 료까(凉香), 히로사키후지, 시나노스위트 등이며 만생종도 미얀마후지 등 후지 계열이다. 전부 일본에서 육종한 품종이다. 이 일본 품종의 사과들의 특징은 신맛은 덜하고 단맛이 높으며 조직감이 부드럽다는 것이다. 사과 재배 농민들은 그 맛에 대해 "가볍다"고 표현한다.
포도는 국내 생산량의 70% 이상이 캠벨이라는 한 품종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품종이다. 그 뒤를 잇는 거봉은 일본 품종이다. 국내 품종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니 머스캣 등 유럽종의 포도라도 번져 다양화하였으면 싶지만 소비가 적은 탓인지 재배 면적은 넓혀지지 않고 있다.
채소류도 외국 품종이 크게 번져 있다. 딸기는 장희, 육보, 레드펄 등 일본 품종이 주류이며 파프리카는 유럽에서 가져온다. 요즘 한 제과업체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하는 '수미'감자칩의 그 수미 품종은 미국 것이며, 홈쇼핑에서 인기리에 팔리는 속이 노란 호박고구마는 일본에서 온 것이다.
또, 돼지와 오리는 유럽에서 가져오고 닭은 거의가 미국 품종이다.
신석기시대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 최근 100년 사이에 재배작물과 가축의 품종이 완전히 바뀌었다. 수입되는 농수축산물까지 따진다면 우리는 100년 전의 조상들과 전혀 다른 습생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농업의 종속을 넘어 입맛의 종속까지 부를 수도 있는 환경인 것이다.
품종개량에서 최후의 방법은 유전자 조작이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자가채종을 할 수 없다. 농사를 지을 때마다 그 품종의 종자를 사야 한다. 내병성 품종으로 겨우 버티는 지금의 한국농업 환경으로 봐서는 내병성이 완벽히 담보되어 있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 재배 유혹에 쉬 넘어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다국적기업에 종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