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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이소룡 - 주옥같은 어록들

by 성공의문 2011. 12. 22.


1. 이소룡의 철학

●`앎'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필히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 마음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필히 실천하여야 한다.

● 나는 절대로 내가 천하제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제 2라고 승인하지도 않는다.

● 가장 간결하면서도 유용한 것을 놓쳐서는 안되다. 여러가지를 빠짐없이 배워야한다. 복잡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용하다고 할수는 없다. 심지어 그것이 전혀 쓸모없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것으로 부터 심오한 것으로 파고들어 통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어떤 사람이 이소룡에게 당신의 관(도장)에서는 어떤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사람들은 살을 빼기 위해 들어왔고 어떤 사람들은자기방어술을 배우고 싶어 들어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여기에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직접적인 동기는 역시 일종의 허영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쿵후가 외래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선과 타좌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나 나의 생각은 그와 다르다. 아름다운 것을 배우려면 차라리 현대무용을 배울 것이지 권수나 타좌를 배운들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그들이 상기해야 할 것은 "쿵후는 투사를 위한 것이지 중을 위한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각자가 폼이나 잡는다는 것은 너무나 형식적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방신쿵후(방어쿵후)가 그것인데 마치 물가에서 수영을 배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비록 여러가지 기술을 배웠다하더라도 물에 뛰어들지 않으면 이 모든것이 쓸모 없는 것이다. 관(도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한번도 싸워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3cm 두께의 목판이나 아니면 몇장의 벽돌이나 격파해 보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여러가지가 실질적으로 싸우는데 조금의 도움도 될리 없건만 왜들 그것에 집착하는지 모를 일이다."

● 이소룡은 사람들이 쿵후의 이름을 빌어 대중앞에서 격파술을 보여줄때면 가끔 못마땅한듯이 "저런것이 쿵후와 무슨관계가 있지?" 라고 내뱉곤 했다.

●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숙련시키고 그렇지 못한것은 포기해라.

● 생명이란 잡다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멈추지 않으며 부단히 절도 있게 움직이는 반면 쉴새없이 변화하기도 한다.

● 만약 당신이 서양복서, 쿵후를 하는사람, 가라데맨, 씨름을 하는사람, 내지는 유도가 등등의 관점에서 어떤 격투광경을 지켜볼 경우, 이격투의 전체적인 것을 보기는 어렵다. 오직 당신이 문파관념을 배제해 버릴 때에야만이 그것을 명확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며 `좋다` 또는 `싫다` 라는 주관적인 생각을 버리고 눈으로만 볼 때 당신은 그격투의 전체적인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자가 지자의 대답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지자가 우자의 물음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이 옳다.

● 어떤 일을 철저히 끝내려면 그것엔 반드시 희생정신이 뒤따라야 한다.

● 자기 극복이 끝났을 때가 성공의 시작이다.

● 진실로 중요한 것은 배워 얻은 내용이 아니라 배워서 얻는 방법, 그것이다.

● 비관주의는 오직 해로울뿐 이로울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 육체는 겉모양이고 성격은 그의 영혼이다.

● 낙관주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광의 길목에서 앞서게 인도해 주는 성경이다.

● 목표의 도달은 종점이 아니라 기점인 것이다.

● 오직 정신을 집중시키며 노력하며, 태만을 떨쳐버리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 무슨 일이든지 심히 고려할 뿐,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성취 하기 어렵다.

● 성공하려는 이는 반드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 내일 들통날일이라면 차라리 오늘중에 말하여 밝혀버려라.

● 만약 아는것이 힘이라면 인격은 곧 존엄이다.

● 배울 뜻을 품은 사람이면 대개 창조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 인간에겐 반드시 실패를 승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어떤 일에 대하여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고 행하기를 두려워 하는 것은 곧 한가지 일도 이루지 못함을 뜻 하는것이다.

● 다른이들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당신이 온갖노력을 쏟아 해나가노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것을 중히 여겨 당신의 성과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 인생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시간이다. 인생이란 바로 시간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내란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강렬한 것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 사랑이란 불붙는 우정과 흡사하며 아름답고 뜨겁지만, 단지 반짝이는 불빛에 불과하다. 사랑이 무르익을 때 마음도 무르익으며 마치 석탄이 타듯이 깊은 곳으로 부터 불타오르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

● 한 색채가 없는 물건을 봤을 때, 사람들은 그 물건의 색채가 곧 자신의 소망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가 빨간색을 좋아하는 경우라면 그것이 빨간색이라고 여겨지고, 그가 노란색을 좋아한다면 그것이 곧 노랑색으로 느껴질 것이다.

● 한 사람이 일생의 정열을 쏟아 예술을 연구할 때 비로소 성과를 얻을 수 있으며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자유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잃었을 때에야 자유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는 한 가능하면 이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이용해야 한다.

● 인간을 가장 고뇌하게 만드는것은 `선택`이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엔 자기의 애증을 마땅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에 순종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사이에 줄이 한가닥 가로놓였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진리`가 출현되길 원한다면 함부로 `반대`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고의로 `동의` 해서도 안되며 다만 객관적인 평가만이 존재할 뿐이다. `찬성`과 `반대`ㅡ 이것은 인류의 의식중에서 가장 큰 장애물 이다.

● 지혜란 좋은것을 나쁜 것으로 부터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쁜 것을 좋은것으로 가려주는 것이다.

● `예술`의 존재에는 필히 `창조자`와 `감상자`라는 두 요소가 있어야 한다. 예술과 미학은 비록 상이한 점이 있긴 하나 그 원류는 같은 것이다. 바꿔 말하며 예술과 아름다움은 모두인간에게 정신적인 쾌감을 안겨주며 동시에 인간의 정신적인 결함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 無芸衡의 예술이 가장 고도의 예술이다. 이에 비춰볼 때 예술은 특별한 장식이 필요치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영혼에 의해 산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영혼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고 무술을 연습할 때의 모든 거동은 예술의 정화인 것이며 이모두가 미적 세계를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이다.

● 만약 어떤사람이 '예술가의 영혼이 예술을 창조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예술가의 영혼은 무엇으로 부터 그 예술적 영감을 얻을까요?'라고 물어온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영혼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공허로 부터 얻어냅니다.' 라고...

● 한 학생은 다른 한 사람, 즉 지도자가 되기전에 우선 모호한 개념들을 필히 버려야 한다.

● 예술은 인생의 결함을 보충한다. 예술은 단순히 정신, 영혼 및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한발 앞서 예술은 인류의 사상, 감각, 소망 등등의 일반적인 사유를 표현해서 생명의 선율을 창조한다. 예술가는 '소리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소리들은 생을 조화롭게 한다.

● 예술가의 예술은 부단히 예술가의 영혼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나 완전한 미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완전미의 예술은 오직 인간의 영혼에서 발달할 뿐이지 어떤 형식이나 형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 예술의 활동은 정지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각종 예술에 깊이 들어갈 수 있을 뿐더러 상이한 예술을 혼합시킬 수 있어서 그 예술들로 하여금 공허중에서 조화와 충돌을 일으키게 한다.


2. 연무비결

● 연무시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아울러 자유로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야 한다. 권술의 방법상, 복잡한 것 보다는 간결하면서도 직접적인 것이 좋다.

● 한 권술가가 단지 한가지의 권술만 연마한다면 어찌 그 한가지 권술의 노예가 되지않으랴?

● 연무의 제일요건은 손발이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동작의 신속함은 자유격돌에 있어서 승리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 기공의 연습은 젊은이에게는 적합하다. 이에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의 한가지가 러닝이다. 러닝의 원칙은 자신이 만족할 만한 거리에 이르기까지 매일 뛰는 거리를 첨가하는 것이다. 동시에 러닝을 재개할 때에는 숨을 뱉어도 무방하다. 뛰는 속도는 점차 적으로 빨라야 하고 최후의 순간에는 반드시 속도를 가능한 한 더 가해야 한다.

● 뛰고난 후에는 호흡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이 생기고 심장의 고동이 가속된다. 이 때, 러너는 괴로움을 느끼게 되나 이것은 체력의 한계이므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과도한 체력훈련이 있기전엔 반드시 의사로 부터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심하면 생명에, 가벼우면 무공을 이루지 못한다.

● 무술의 훈련은 필히 끊임이 없어야 한다.

● 격투 연습을 할 때에는 가능한한 많은 목표물을 설정해서 여러가능한 각도에서 목표물을 가격해야 한다. 더구나 이런 연습시에는 필히 민첩하게 실행해야 한다.

● 목의 근육훈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 방법상 박경과 담경등이 있다. 수직된 쇠를 가주끈에 이어서 목에 감싼후 목의 힘으로 위를 받쳐세워 목을 좌우로 흔들면서 훈련하면 목의 근육이 발달하게 된다.

● 격투의 방법은 자기 뜻대로의 선택과 기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격투의 방법은 실제로 시시각각 변화하지는 않으나 오랜 세월을 겪은 사람들도 그가 선택한 연무방법에 가끔 탄력성이 결여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격투는 쌍방의 움직임으로써 이룩된다.

● 격투는 물과같이 잔 속에서는 잔의 모양이 되고 병 속에서는 병의 모양이 되듯 무형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오직 실질적인 행동에 성과가 있을 것이다. 가령 인기스타가 반드시 노력과 시련을 겪어야하듯, 탐험가가 반드시 험난함을 겪어야함과 같다. 무대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연기를 한다고 할 수 없고 험난함을 겪어보지 못한사람은 탐험가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연무도 마찬가지이다. 말만으로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 나는 어떤 사람이 그의 초식이 남과 다르다고 얘기하는것은 주먹이 나가기 전에 물구나무를 선다든지 몸을 뒤트는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볼때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것 외에 또 얼마만큼 다른 스타일을 변화해 낼 수 있을까? '같지않다'함은 가르치는사람이 단지 직선적 발전을 중시한다든가 혹은 곡선적인 발전을 중시하든가 아니면 손을 위주로 하든가 발차기를 중시 하든가 하는 나름대로의 보기에 다를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단지 어떤 한면만 중시하는 문파라도 근본적으로 그 자체에는 많은 제한이 내재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기정된 초식이 아무리 실용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싸우는데 있어서의 상황이란 고정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일정한 범위와 제한도 없나는 것이다. 그것은 수시로 변화한다고 봐야한다. 실질적인 상황에 있어서 어떤 교과서적인 동작만을 가지고 싸우면 그것은 패배를 맛보기에 십상이다.

● 어떤 거다한 적수와 대하였을때에는 첫째 침착해야한다. 상대의 외형에 압도당하여서는 안된다. 다음, 상대의 태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강력하게 젓구의 급소를 향해 진격해야 한다. 그리고 속전속결, 이것만이 상책이다.

● 만약 당신이 권투글러브를 끼고 복싱규칙에 따라 시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그 규칙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권투계에서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좀 다르다. 당신은 발차기와 주먹등 무엇이든지 보다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싸울 수 있다.

● 나에게 있어서 러닝은 한가지 운동일뿐만 아니라 신경을 안정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울러 아침의 한시간은 나혼자 조용히 사색 할 수 있는 나 자신만의 시간이다.

● 적수를 격퇴하는 것이 주요목적이고 왜 적수를 격퇴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은 단지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일 뿐이다.

● 적수의 머리를 찬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 못된다. 단타를 중시해야 하며 또한 마땅히 허리 이하에 있는 급소를 차야 한다.

● 허다한 방어술은 단지 사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실용적인 것은 못된다. 만약 250파운드의 남자가 90파운드 무게의 한 여인을 괴롭힐 때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곧 상대방의 눈과 아랫배, 그리고 다리를 겨냥하여 맹타를 가하는 것이다. 그런후에는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 영화에서의 쿵후동작들은 실전에서 사용하는 동작과는 다르다. 영화촬영시에는 자세의 미묘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가끔 렌즈를 향해 높이 차는 동작을 연출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실전에 있어서는 신체의 중간부분과 하부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손쉽게 적을 격퇴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가격하려고 하든지 또는 차려고 할 때 상대에게는 반응이 생기게 마련이다. 당신이 압력을 가하자 상대는 반사적으로 당신을 피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상대방을 타격할 때의 효율성에 관한 문제는 절대로 정확무결한 전통적형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적중하느냐에 의한다.

● 아름답게, 또한 멀리 찰수 있는 방법을 수련하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허리의 힘이다. 그것은 다른 한쪽다리로 몸의 중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 격투는 탄성적인 것이다. 아울러 올바른 길과 방법은 당신의 예상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순식간에 변화하는 것이다.


3. 절권도

● 절권도를 기타의 무술과 가리는 한계는 없다. 이것은 일정한 격식을 반대하며 특히 파벌을 가리는 것을 반대하는 일종의 자유스러운 박격술 이다.

● 나에게는 초식이 없는 반면 모든 초식을 지니고 있다.

● 나 자신도 내가 어떻게 칠 것인가를 모르는 사실과 같이 상대도 내가 어떻게 치리라는 것을 예지할 수 없다. 나의 동작은 상대방 동작의 결과인 것이며 나의 무기는 상대방 무기의 귀착이다.

● 절권도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른 교정으로서 수련생들로 하여금 모든 조건을 얻을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 절권도의 원칙은 필요한 것들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포기하며 그리고 자신의 특기를 삽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권법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면 가라데에서는 자유대련시, 상대와 몸이 접촉한 경우 코치는 필히 떼어놓을 것이며 시합시에도 상대를 너무 심하게 때리면 감점이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절권도는 그렇지 않다. 몸과 몸이 접촉함과 동시에 싸우기 시작한다.

합기도와 유도는 다리로 차는 법을 사용치 않으나 절권도는 손발을 모두 사용할 뿐더러 심지어 입으로 물기도 한다. 태권도나 가라데는 모두 올려차기와 돌려차기를 사용하게 하나 절권도에서는 하체의 정강이, 무릎, 다리등을 공격하는것을 중요시한다. 유도에서는 상대의 옷을 잡게하나 절권도에서는 거리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절권도는 절대로 복잡하거나 허위적인 것을 배제한다. 절권도는 내외가, 음양오행, 좌선 및 기타의 것도 따지지 않으며 어떤 경전이라든지 철학을 바탕삼지도 않는다. 이것은 상대를 격퇴하는 것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절권도를 배우러 오는 이는 마치, 총을 파는 상점에 몰려드는 고객과도 같은 것이다.

● 찻잔의 용도는 그 빈속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절권도 이며 이것이 그 빈속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에 대한 방법이다.

● 일반 무술에 있어서의 자세 따위는 단지 일종의 연출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적과 맞서 싸울 때에는 이런 자세는 모호하여 지든지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절권도에는 특정한 자세가 없다. 단지 가끔 비교적 강렬하고 신속한 수족을 앞세울 뿐이며 대부분 기회를 운용한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측 손발을 앞세운다. 그렇지 못한 이는 자신이 편한대로 연마해도 상관없다. 상대에 따라 권술의 운용도 달라지므로 격투에 있어서는 가볍게 또는 빠르게 수족을 움직여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형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가라데에는 형이있고 쿵후에는 권법이 있다. 그러나 절권도는 이러한 제한이 필요하지 않다. 이는 순전히 상대방의 내세와 같이 돌격하는 것이다.

● 쿵후나 가라데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그것은 코치가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세뇌와 약속이다. 그들은 일률적인 것을 요구할 뿐, 각개인의 조건등은 요구하지 않는다. 이 무술들에서의 배우는 자로서는 자세를 바로할 줄 알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무술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형을 중시하는 것이다. 가라데를 배우는 사람들은 6개월 정도가 되면 사향전이나 36수를 터득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적으로 허영적인 경향으로 자신을 몰고가게 된다. 기실 세심히 관찰하기만 하면 심오한 권술을 터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울게 없으나 그것이 곧 고수가 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가라데의 형은 쿵후의권법 보다 훨씬 간소화 되었다. 비록 이것이 시대적인 추세라 할지라도 절권도는 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한걸음 더 앞서는 것이다.

● 일반권술의 목적은 몸을 단련하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오랜 세월을 두고 연마해야 한다. 그러나 절권도는 순수한 격투술이다. 이것은 상업사회의 산물이며 고도의 경쟁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 절권도는 제한을 받지않기 때문에 규칙이 없다. 일정한 형식과 동작도 없으며 무술, 또는 기타의 것과 대조해 볼 필요도 없다.

● 절권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자아의 출현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자신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절권도는 최소한의 동작으로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다.

● 절권도를 배우는 것은 결코 지식을 추구한다든지 각 문파의 권술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각개인의 무지와 소재를 밝히는 것이다. 만약 절권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면 차라리 이에 대한 언급을 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절권도는 단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하며 언제나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하여 크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절권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고 모방하게 하는 문파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이 격투동작의 사상및 철리에 관한 것을 수집하고 이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본개념인 것이다.

● 절권도는 자유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절권도는 축적된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무술이 아니다. 우리는 '이다음에 어떻게 된다' 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지금은 어떻다'라고 말한다. 무술의 연마는 과거보다는 현재의 심령을 견향하는 것이며 전환한 상태는 오직 현재의 상태일 뿐이지 미래의 상태가 아닌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상태는 생각만으로 이상과 목적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견고한 형식과 신비스러운 심령의 단련은 내공에 대해서도 별반 이익이 안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심령의 폐쇄를 도울 것이다. 내공을 연마하든, 외공을 연마하든 이런 것을 논할 필요도 없다. 절권도의 기술은 신체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므로.

● 1965년에서 1969년까지 5년동안 나는 전력을 기울여 가장 어려운 동작들을 연습했다. 이러한 것 외에도 나는 매일 달리기를 했다. 이 모든 것은 절권도라는 하나의 형식을 이룩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나는 젊음에 도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절권도의 동작은 민첩하며 능률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내 자신을 송두리째 그것에 던질 수가 있었다. 이것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볼때 큰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 무술에 대한 나의 연구와 단련은 계속되어 왔다. 내가 중국 무술의 원류를 알고자 했을때 나에게는 큰 의문이 생겼다. 어느파의 무공이든 모두 그들의 권술과 형식이 있는데 이런 기정화된 형식은 과연 그 파의 창시자의 뜻으로 이룩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절대 그런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이든 간에 형식이란 오직 진보의 장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들은 후세사람들이 첨가한 것이다. 파를 창시한 자는 그의 무공실력 면에서 특히 남보다 뛰어났을 것이고 남보다 총명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창시자의 의지와 성취가 총명함과 의지력을 지닌 후계자가 없으므로 하여 계속적인 발전을 하지 못한채 형식화의 유입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발전의 길은 막히게 되었다. 더구나 또다른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로 하여금 과거에 익혔던 갖가지 형식을 버리도록 하였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이 터득한 국술에다 다른 명칭을 붙이기는 싫었으나 편리를 위해 절권도라고 명명 했다. 그러나 내가 강족하고자 하는 것은 절권도는 다른 무공과 분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정된 형식과 파벌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 '절권도'란 무엇인가? 나로서는 한마디로 이것은 쿵후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문파의 분계가 없는 무술이며 무술 자체가 형식화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쿵후이고 전통으로 부터 해방되어진 쿵후라고 말하고 싶다. 격투술을 연습함에 있어 가장중요한것은 體와 용(用)의 두가지 측면인데 체는 곧 기초이다. 좋은 기초가 있어야 用의 측면에서 손과 마음이 일치되기 때문에 신체의 단련은 어떤 형식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빠름과 굳셈의 신수 및 힘의 지구력은 연무에 있어서 가장 올바른 것이다. 절권도는 모든 형식적인 것의 속박을 버리고 두뇌를 사용하여 공격 또는 반격해야 함을 강조 한다.

만약 어떤 타법을 "이소룡의 절권도"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스운 일일 뿐이다. 내가 절권도라고 명명한 저의는 단지 신속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만약 반드시 나의 동작을 무슨 도라고 불러야 겠다는 사람이 이싸면 내자신 이것이 절권도라고 가르쳐주고 싶다. 바로 영화 '정무문'에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러시아권법가의 다리를 입으로 덮석 물어버린 초식 말이다. 절권도에는 어떤 고정된 형식이 없다. 그것은 단지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움직이지 않으며 적이 움직이려 할때 내가 먼저 친다는 것, 오직 목적을 추구할 뿐 형식은 무시하며 그리고 신체사지의 힘에 대한 발휘 및 운용을 연습할 뿐 딱딱한 권술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 절권도의 요지는 '무한으로서 유한을 상대하고 무법으로서 유법을 상대하라' 이다.



4. 쿵후

● 쿵후란 곧 '최소한의 동작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만드는 것이다.'

● 전통적인 쿵후는 반드시 간화하고 직접적인 방향으로 개량되어야 한다.

● 비록 아름답기는 하나 너무나 형식이 많다.

● 너무 인공화, 기계화 되어서 배우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싸우는데 필요한 쿵후를 가르칠 수 없다. 정적이고 규칙적인 형식을 따지다 보면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이러한 형식은 내가 보기에는 실질적인 것이 못된다.

● 공격의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단한가지의 동작으로도 대처하기에 족하다. 이것이 곧 쿵후의 간결성이다. 진정한 쿵후가 가르치는 것은 신속한 동작 하나로서 전체적인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 쿵후는 단지 순간적으로 이탈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이를 우리 중국어로는 '간결' 이라고 한다.

● 현재의 쿵후는 실질적인 이론이 아닌 것과 형식에 치우친 형식이 지나치게 많다.

● 쿵후는 일종의 특수한 기교이며 정교한 예술이지, 단순한 하나의 체력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심지와 기교를 배합시켜야 하는 정묘한 예술이다. 쿵후의 원리는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다. 과학분야와 마찬가지로 실증하는 과정에서 취득할 수 있다. 반드시 한송이 꽃과 같이 자연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감정과 욕망의 사상을 해탈하는 속에서 나타난다. 쿵후원리의 핵심은 곧 道이다. 또한 이것은 우주의 자발성이다.

● 어느날 주먹으로 바닷물을 치다말고 나는 갑자기 "물,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 곧 쿵후의 요의가 아닌가?" 하고 깨달았다. 이러한 보잘것 없는 물이 나를 위해 쿵후의 원리를 설명하여 준 셈이다. 비록 주먹으로 친다 하여도 물은 상처하나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잡으려해도 잡히지않지 않는가! 물! 이것은 가장 유명한것이다. 갖가지 용기에 적용할 수 있으니...그렇다. 나도 필히 물의 본성을 터득하여 그와 같아야 한다.

● 갑자기 한마리의 새가 지가치면서 그림자를 물에 드리웠을때 어떤 숨겨진 의미가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적수앞에 서있을 때 나의 모든 사상과 감정은 물에 반사된 새의 그림자와 같은것이 아닐까? 이것은 곧 엽(葉)사부님이 말씀하신 초연적이란 뜻인것이다. ㅡ 감정과 감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하여금 멈춤과 장애를 받지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아를 억제해야하며 자연에 순응하듯 자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 쿵후는 가장 오래된 격투방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강신사상의 계발 및 자기방어등의 작용이 깃들어져 있다. 신비스러운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외계에서는 거의 쿵후가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 쿵후는 약 5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기시대의 쿵후는 단지 어떠한 제한없이 격투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수백년 후 여러대를 내려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어왔다. 거칠은 부분을 없애고 각종 기교를 개량했으며 결국 모든것을 능가하는 예술로 등장 시킨것이다. 쿵후는 대부분 승려나 도사들에 의해 익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과 동작의 결합체로서 보게 되었다. 그들이나 아니면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로서는 쿵후는 일종의 격투방법도, 살생에 주요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일종의 도가와 불가의 철리를 함축한 철학의 일부분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 쿵후는 다음의 두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그 한가지가 양강이고 또한가지는 음유이다. 소위 양강이라는 것은 속도, 동작의 배합 및 체력의 발휘에 중점을 둔다. 격파라든지, 빠른 동작으로 몇초사이에 적을 제압하든지 하는 것들은 이 양강이 외공을 중요시 한다는 증거인 것이다. 양강은 강과 맹을 동시에 추구하므로 공격성이 짙다. 소위 음유라고 하는 것은 그 반대로 중화와 사상과 육체의 융합등을 중시한다.

이 음유는 내공을 중요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와 연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두가지 쿵후에는 모두 상당량의 가와 유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위에서 말한 두가지의 쿵후는 다시 수백가지의 문파로 나눌수 있으며 그들 각 문파들은 글들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간략하게 몇몇 문파의 이름을 들어본다.

○응조공-권과 장이 유명하다.

○당랑권-팔과 발차기를 중시한다.

○태극권-유로 유명

○채이불권-역도와 구전을 중시

○팔선보-보법을 중시

○백학파-초식이 아름답다.

● 중국인에겐 이 쿵후는 일종의 思와 行이 융합된 정묘한 예술이다. 쿵후의 원리는 습득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과학분야에서와 같이 반드시 사실에 입각하여 서만이 얻어질수 있는 것이며 마땅히 한송이 꽃과 같이 무정무욕의 사상중에서 자연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 쿵후는 진(眞)을 추구해야 한다.


5. 쿵후와 타무도와의 비교

● 쿵후는 매우 우수한 무술이다. 이는 가라데와 유도의 선조이며 가라데와 유도보다도 더욱 완미한 것이다.

● 가라데의 일격은 철봉으로 일격을 가하는 것과 같으나 쿵후는 마치 쇠줄에 달린 철구로 일격을 가하는 것과 같을 뿐더러 그 충격은 인체 내부에 까지 이른다.

● 쿵후의 용법은 매우 잔인하다. 우린 흔히 그것을 중국식용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적수가 위에서 공격하여 오는 경우 하부의 생식기에 반격하기도 하는 것이다.

● 유도는 일종의 예의에 쫓고 쫓기는 무술에 불과하다. 허나 쿵후는 가장 짧은 순간에 간단한 동작으로 순간적으로 상대를 격퇴할 수 있는 무술이다.

● 당신의 손이 상대방에게 잡혔을 때 만약 당신이 유도를 배운 사람이라면 우선 자세를 바로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각종 테크닉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나 복잡한가!

● 당신이 등뒤로부터 상대방이 양손으로 당신을 잡고 있을때 쿵후는 단지 발뒤꿈치로서 힘껏 밟기만 하면 그 상태로부터 풀려 날 수 있다. 물론 당신은 유도식으로 어떻게 멋지게 처리하여 친구들에게 위세를 과시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 쿵후문파, 또는 태권도, 가라데 및 기타의 무공문파들은 비록 그 파 나름대로의 자기의 형식 및 동작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모두 완전치 못한 격식들을 즐기고 있다. 이에 그 문하생들은 그저 항상 그것만 배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만다.

● 가라데를 배우는 이들은 모두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반격하는 것을 중시할 뿐이지 마땅히 신속하게 적수를 물리쳐야 하는데도 어떻게 유동적으로 상대에 대처하느냐 하는 것엔 주의하지 않는다. 가라데사범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적수가 하는대로 한 연후에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많은 것들을 기억해 낼 동안, 당신은 적수로 부터 결정타를 맞을지도 모른다.

● 쿵후의 공가와 가라데의 자위술은 모두가 적수를 나무토막처럼 본다. 특히 쿵후는 자유격투를 장려하지 않는다. 마치 축구에서 공차기를 하면서 공이 없듯이, 만약 축구선수들이 공이 없이, 킥연습을 한다면 우리로선 얼마나 정확히 또는 멀리 찰수 있을지를 알수 없다. 이와 같이 무술도 배우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면 우리또한 그의 주먹이 얼마나 빠른가? 정확한가? 그리고 거센가도 일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담력이 있는지의 여부까지도.)


6. 무술이론

● 무술가는 마땅히 사상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내가 그렇다.

● 어떠한 권력가도 마치 자기가 인류지혜의 정상에 도달한 사람인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항상 의문을 품고 있어야 하며 지나치게 어느 것이 옳다고 긍정하여서도 안된다.

● 소위 "모가모파(某家某派)는 반드시 어떠해야한다"는 것은 전혀 주시적인 생각이다.

● 강과 유, 그리고 외와 내가 상대를 이룬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음과 양은 실제로 전체적인 두 부분이며 서로간에 지닌 중요성도 균등할 뿐더러 상호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 쿵후는 물과같이 무형적이며 무극적인 것이다.

● 쿵후의 성질은 액체와 같기에 유동성이 크다. 어떤 움직임 하나 만으로는 정지되지 않으며 언제나 부단히 다른 동작에 연결된다. 나는 쿵후를 물에 비교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물이란 가장 유연한 것이며 아무곳에나 스며들 수 있고 저항을 위한 저항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고금을 통해본 무술가는 모두가 '물과같이 유연하게 상대방의 동작에 대응할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 격파에 대한 나의 의문은 '벽돌도 사람과 싸울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모두 장난에 불과하다. 격투에 있어서 상대방은 벽돌처럼 때려주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 과거에는 발쓰는법을 그리 중시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다르다. 훈련된 발은 확실히 강하다. 힘을 조금만 더한다면 주먹보다 그것이 무게가 강하다.

● 발은 멀리 찰 수 있기 때문에 보다 큰 충격을 준다.

● 서양인들은 대다수가 열심히 주먹을 '철권'이 될수 있게끔 연습한다. 그러나 실제로 격투장소에서는, 만약 상대가 무기를 지녔다면 발을 사용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발 쓰는 법이 큰 비중을 차지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손에 쥔 단검을 빼앗기란 힘들 것이나 발로차서 단검을 지닌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은 쉽다. 왜냐하면 사람은 두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는 각도를 쉽게 상대가 파악할 수 없기때문에 방어하기에 어렵다.

● 4년에 걸치는 엄격한 쿵후 훈련후에 나는 유와 강을 정복할 수 있는 이치을 깨달았고 이해하기에 이르렀다.ㅡ 이것은 즉 어떻게 하면 상대의 힘을 빼게 하고 자기의 힘을 아끼느냐 하는 방법인데 이 모든것은 우선 심령의 안정을 얻은 후에라야 가능하다. 듣기엔 쉬우나 실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마음은 청명함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몇차례 격투를 벌인 후면 유의 이론은 잊어버리게 되고 오직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하든 상대를 제압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하여 지기 때문이다.

나의 사부 엽문선선생은 영춘문파의 최고의 고수이다. 어느날 사부님이 나한테 말씀하시길 "소룡아! 자신을 구속할 필요는 없다. 우선 정신을 가다듬은 후 자기자신을 잊고 상대의 초식을 주의해야 한며 그리고 상대에게 가하는 반격은 본능 적인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초연함을 배워야 함이다."
그렇다! 나는 자신을 구속치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행하려면 나는 의지력을 또다시 운용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를 행할 경우에 '~야 한다`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힘은 곧 '구속치 않아야 한다.'의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나의 이런 자각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을 때 나의 사부님은 나에게 또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룡아! 자신을 자연에 순응하게 하여라. 자신으로 하여금 절대로 자연에 대하여 저항하게 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더욱 그 흐름에 순응시키면서 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