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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을 사이에 둔 유럽과 북미를 가리키는 '서구'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비롯됐다. 이후 40년에 걸친 냉전 시대 국제질서를 통해 그 뜻이 재정립됐고, 현재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서구를 지리적 개념과 착각해선 안된다. 물론 서구의 특유한 문화와 규범, 종교 등은 지리적 연관성을 갖고 발전해왔다. 하지만 현재 대서양 동서쪽의 세계패권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1차세계대전은 중부유럽 국가와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국 사이의 싸움이었다. 1914년 시작된 싸움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건 미국이 참전한 1917년이다. 이때가 바로 현재의 '서구'의 개념이 형성된 시기다.


서구라는 개념은 2차세계대전을 통해 출생신고를 했다. 1941년 8월 나찌 독일군이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하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캐나다 동부의 섬 뉴펀들랜드 인근 해상에 있던 전함에서 만나 '대서양헌장'에 서명했다. 대서양헌장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세계 국민복지와 평화 등에 관한 양국 정책의 공통원칙으로,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낳은 산파가 됐다. NATO는 이후 40년 동안 비전과 시장경제를 공유한 민주독립국가들이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는 수행기구가 됐고, 오늘날까지 유럽의 안전망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라는 개념은 동맹국을 지켜주겠다는 미국의 약속에 기초했다. 서구적 질서는 중심역할을 맡은 미국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트럼프 당선자는 이를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서구는 그 뿌리부터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물론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어떤 의미인지, 그가 취임한 이후 무엇을 바꿀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2가지 합리적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그는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정책까지 분열로 몰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선거기간 트럼프는 미국 정치판의 모든 관례를 조롱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뿐 아니라 공화당 기득권도 꺾어버렸다. 내년 1월 20일 취임 이후 그가 이같은 승리전략을 갑자기 폐기할 것이라고 믿는 건 어리석다.


또 다른 합리적 추측은 트럼프가 '위대한 미국의 재건설'이라는 공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집권 기간 동안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위대한 미국'을 공약했고,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냉전을 치르면서 이를 달성했다. 레이건은 막대한 군비확장을 통해 결국 소련을 붕괴시켰다. 엄청난 빚을 졌지만 경제적 부양에도 성공했다.


물론 트럼프 당선자에게 제국주의적 접근법을 누릴 호사는 허용되지 않을지 모른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선거기간중 중동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전쟁에 미국이 개입한 데 대해 비판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상당수도 미국이 전 세계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고립적 국수주의로 빠진다 해도 여전히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무역과 글로벌화에 기초한 국제질서나 서구 국가들의 집단안전보장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미국의 정책이 얼마나 빨리 변화할 것이냐, 그 변화가 얼마나 급진적일 것이냐다. 트럼프는 이미 12개국이 합의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폐기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가 인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중국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는 남중국해와 관련한 또 다른 선물을 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곧 글로벌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새로운 국제리더가 될 것이다. 기후변화협약의 이행을 독려하는 선도국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는 시리아도 러시아나 이란의 손에 넘겨줄 수 있다. 이는 중동 내 힘의 균형을 깨는 것으로 그 파급력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시리아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와 동유럽도 블라디미르 푸틴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호의 항로는 이미 확연해지고 있다. 단지 그 배가 얼마나 빨리 운행할지 모를 뿐이다. 그 속도는 미 의회와 트럼프를 찍지 않은 절반 이상의 국민이 반대하는 강도에 달려 있다.


중요한 건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점. 유럽은 미국의 전략적 역할을 대신하기엔 너무 약해졌고 분열됐다. 미국의 리더십이 없다면 서구는 살아남지 못한다. 오늘날 발 딛고 선 서구세계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다음 벌어질 일은 뭘까. 누구나 예견하듯,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봉인이 해제된 국수주의의 망령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요제프 마틴 피셔(Joseph Martin Fischer, 1948년 4월 12일 ~ )는 독일의 정치인이며, 헤센 주의 환경부장관(1985~87, 1991~94, 적녹연정), 독일연방공화국의 부총리겸 외무장관(1998~2005)을 역임하면서 1991년부터 2005년까지 독일 녹색당을 이끈 지도자(실질적 당수)였다. 현재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이다.

출처: 내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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