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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 대하여 

 

모세, 약속의 땅으로 이끈 구원의 인도자

 

<이집트 왕자>


위대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익이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데 있음을 인식시킨다고 하지요. 비 온 뒤의 지렁이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인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이집트 왕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삶은, 지나온 수천년의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짙은 신화의 연무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단순한 신화에 불과한 존재인지조차 모호하지요. 영화 속에서는 파라오의 친아들 람세스와 양아들 모세 사이의 애틋한 형제애와 칼날 같은 갈등의 두 국면이 교차하며 극적인 긴장감과 흥미를 더해 줍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학자들은 출애굽이 파라오 하렘헤브가 통치하던 시대와 다음의 세 왕,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시대의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파라오 가문은 하렘헤브의 통치가 시작되기 몇 년 전부터 대가 끊긴 상태였다는군요. 하렘헤브는 총사령관을 역임한 직업 군인으로 스스로 왕좌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람세스 1세 역시 왕족이 아니라 직업 군인 출신으로 하렘헤브의 친구이자 당시 재상을 지낸 인물이었구요. 

 

아무튼 모세의 아버지에 해당되는 파라오가 왕족 출신이 아니라면 그가 죽은 뒤 적법한 계승자가 누구인지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자신의 논문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모세가 유대인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을 거라는 설을 주장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라는 이름은 그를 구해 준 이집트 공주가 지어 준 것으로, 히브리어로 '물에서 건져 낸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신분을 감춰야 할 처지에 있는 아이에게 히브리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얼른 생각해도 비상식적인 얘기이기 때문이죠.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어로 '태어나다' 또는 '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집트 역대 파라오 중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요. 카 모세, 투트 모세, 아흐 모세 등. 예를 들어 투트 모세는 '토트 신이 보낸 아이' 또는 '토트의 화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완전한 이름은 '○○ 모세'였을 것인데 앞에 붙어 있던 신의 이름이 생략된 채 뒷부분만 불리게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죠. 

  

프로이트는 또한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준 종교 역시 이집트 종교의 하나인 아텐교(또는 아톤교)였다고 주장하지요. 그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주님)'와 시리아의 신 '아도니스'의 어원을 '아텐(아톤)'으로 볼 수 있다는 점, 할례의 풍습이 이집트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점, 아텐교가 우상숭배를 금기시하고 배타적인(즉 유일신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요.

  

아텐교는 이집트 18 왕조의 파라오 아케나텐(아크나톤)에 의해 국교로 강력히 내세워졌지만 전통적으로 다신교인 아몬교를 믿던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던 종교였다고 해요. 아케나텐은 다신들을 모신 판테온을 없애고 유일신만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고, 결국 두 종교의 갈등은 왕국을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아텐교의 고위사제였던 모세가 당시 쇠락해 가고 있던 아텐교를 재건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을 끌고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즉 야훼를 믿는 유일신교의 원형이 바로 이집트의 아텐교라는 것이죠. 즉, 이집트의 아텐교에서 발원된, 다른 신과 우상을 숭배하지 못하는 유일신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관념의 신,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전지전능의 신의 개념이 그대로 유대교 속에서 계승,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죠.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는 설은 프로이트가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몇몇 역사학자들(마네토, 필로 등)이 주장해 온 것입니다. 심지어 현대의 일부 학자들(카를 아브라함, 로버트 페더 등)은 모세가 바로 파라오 아케나텐이었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아텐교의 최고사제였다는 것이죠. 

 

권력 투쟁에서 밀린 아케나텐은 퇴위 후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그가 바로 출애굽을 이끈 모세였다는 것이죠. 

 

 

성경 이외에 모세의 삶이 기록된 자료로 『오아스프, 새로운 성경Oahspe, A New Bibl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인 존 뉴브러프가 19세기 말엽에 천사들의 도움으로 일종의 자동서기 형식으로 쓴 방대한 분량의 책입니다. 

 

이 책 속에는 아득한 고대로부터 지상에 화신했던 예수의 여러 전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어서, 비교(秘敎)에서 예수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문헌상의 근거로 제시되는 책이기도 하지요.

 

이 책에 기록된 모세의 삶을 보면 파라오의 딸 레오토나스가 강변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아기가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자기 아들로 삼는데, 이때 파라오는 그녀에게 모세가 공주의 형제이자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파라오는 모세를 자기 양아들로도 삼았다는 말이죠. 

  

당시 파라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파라오는 모세를 유달리 사랑했고 이집트 왕자로서 소양을 갖출 수 있는 모든 교육을 시켰다는군요. 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은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모세를 항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끌어내리려고 모함을 했다는군요. 

  

파라오의 대사로서 외국에 12년 동안 나가 있었지만 결국 조신들의 등쌀에 그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는 부분과 신하들로부터 경원시되는 부분은 우연일지 모르지만 영화 속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입니다.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주유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살폈고 파라오에게 그 실상을 고하게 됩니다. 파라오는 모세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신하와 귀족들의 반감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해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파라오의 후계자는 누간(Nu-ghan)이었다고 『오아스프』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누간이 파라오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점 외에, 구체적으로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무척 연로했던 파라오는 열병을 앓게 되었고 자기가 죽게 되면 누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려는 모세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면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이후 『오아스프』에서 묘사하는 출애굽의 과정은 성경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세의 삶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오아스프』와 성경이 다른 부분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현현한 신과 대화를 나누는 대목입니다. 성경과 영화에서 모세는 신(스스로 있는 자)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되지요. 하지만『오아스프』에서는 명백히 모세가 신과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대천사를 통해 대화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요. 

 

이것은 사소한 차이로 보이지만 에소테릭적인 관점에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대의 영적인 스승 아이반호프는, 우리 인간은 결코 신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지요. 왜냐하면 신이 직접 물질계에 현현할 경우 우리는 그 어마어마한 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돼 버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생명나무                       사계(40개의 세피로트) 

 

여기에 바로 천사들의 존재 이유가 있다 할 것입니다. 천사는 바로 신과 인간, 최고천과 물질계 사이를 잇는 단계적인 사다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카발라에서 존재의 4계를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것은 최고천인 아칠루트계뿐이고 그 아래의 세계인 브리아계와 예치라계는 대천사와 천사가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떤 영적인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은 아무리 높아도 대천사 이상의 존재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신과 나누는 이야기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카발라의 가르침에서는 모세가 대화한 것은 신의 최고 메신저인 대천사 메타트론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모세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사실 에소테릭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실제 혈통이 이집트에 속하든, 이스라엘에 속하든, 파라오였든 아니든 그런 사실관계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실제의 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화 속의 모습입니다. 수천년 전 살았던 실제의 모세는 이미 죽어 뼛가루도 남지 않았지만 신화 속의 모세는 지금도 생생히 살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죠.   

 

신화 속의 모세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죠. 사실 이집트 역사 기록 속에는 성서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대탈출 사건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습니다. 

 

카발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출애굽 사건의 이야기는 물질성에 속박된 우리의 자아가 그 구속을 풀고 영의 세계로 해방되는 과정 또는 비전의 성취 과정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것은 카발라의 생명나무에 대입하여 해석할 수 있지요. 

 

지중해의 성자로 알려진 다스칼로스에 의하면 사실 오늘날 알려진 생명나무 심벌의 기원은 아케나톤 시대에 있다고 하지요. 그는 모세가 이집트의 '생명의 심벌'을 변형하여 생명나무 심벌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최소한, 다스칼로스의 견해에 의하면 아케나톤 자신이 모세는 아닙니다.) 생명의 심벌과 생명나무는 매우 흡사한 외관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여러 차이점들이 존재합니다.    



                     고대 이집트 생명의 심벌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카발라의 생명나무에 대입할 때 모세는 생명나무의 세피라 티페레트 속에 거하는 우리의 진아, 이집트는 물질계(말쿠트),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은 네거티브(즉 클리포트의 힘)에 사로잡혀버린 인간의 마음을 각각 상징합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생명나무상에서 티페레트와 대대 관계에 있는 예소드를  나타내는데, 하늘로부터 사명을 받은 뒤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채  아내를 나귀에 태우고 이집트로 돌아오는 선지자 모세의 모습 속에는, 한 육체(나귀) 안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원리와 여성원리의 통합이 표현돼 있지요. 후술하게 되겠지만 이밖에도 지팡이와 관련하여 모세와 십보라는 또 다른 음양원리인 핑갈라와 이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모세=티페레트, 십보라=예소드, 나귀=육체(말쿠트)  

  

우리 안의 영(모세)은 이스라엘 백성(저급자아)을 약속의 땅, 즉 영의 세계로 인도해야 합니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이집트 군대(클리포트의 존재들)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요. 악카르마의 벌이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져 참혹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우리의 저급 자아가 낡은 습을 버리고 영적인 입문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고, 다시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다를 건넌 입문자는 다시 광야에서 내적인 정신적 사막과 직면하여 시험과 수양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러야 했던 40년 동안의 방랑 생활이 그것이죠. 

 

40은 앞서 언급한 존재의 4계에 있는 모든 세피로트의 숫자를 합한 숫자입니다. (각 계에 10개의 세피로트가 있음) 따라서 40은 물질계에서 최고천의 꼭대기에 이르는 사다리의 발판들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이 40개의 발판들을 거쳐 마침내 약속의 땅, 영광의 신의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문자 그대로 지상의 특정 지역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지요. 메마른 바위산과 모래 바람이 불어대는 척박한 팔레스타인 지방을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입문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최고천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련들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끊임 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신이 하루하루 먹을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주건만 배불리 먹고 돌아서면 다시 내일 일을 걱정하며 온갖 푸념을 늘어놓고, 모세 때문에 이 고생이라며 원망을 하곤 하였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행태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속성을 상징합니다.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수십년씩이나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며 고생하게 되는 것도 바로 불안해 하고 의심하고 불평하는 우리 마음 그 자체의 속성 때문인 것이죠.  


 

광야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었지요. 낮에는 구름 기둥이 앞서가며 길을 안내하고,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의 앞길을 비추어 줍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주고, 밤에는 불길로 온기와 밝음을 선사해 주는 이 기둥은 바로 지혜를 상징합니다. 

       

또, 위기의 순간마다 기적을 베풀어 위난에서 구해주는 모세의 지팡이는 마음의 주장자를 상징합니다. (에소테릭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모세의 지팡이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로 표현되는 생명나무임) 이 주장자가 올바로 서면 어떤 마음의 갈등과 혼란 속에서도 기적적인 구원이 오게 되죠. 그것은 우리 내면 속에 거하는 고급 자아의 힘이기 때문이죠.   



헤르메스의 지팡이 = 모세의 지팡이 = 생명나무 


지팡이를 감싸는 두 마리 뱀 = 척추를 감싸는 음양의 신경(핑갈라와 이다)

핑갈라= 모세, 이다=십보라.    



헤세는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의 내면에 이르는 길뿐이다. 거기에만이 신이 있고 평화가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 약속의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초월한 저 너머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열락의 세계입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걱정과 불평불만을 버리고 지혜의 기둥을 의지하고 마음의 주장자를 굳게 세워나가야겠습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eyeinhand/1018667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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