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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by 성공의문 2014. 11. 17.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지은이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프라하 독일계 대학에서 독문학과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립 근로자 사고 보험회사에 법률가로 입사하여 1922년 은퇴할 때까지 14년 간 이곳에서 근무했다. 1904년 《어느 투쟁의 기술》집필을 시작으로《고찰》《시골에서의 결혼식 준비》《실종자》《소송》《변신》《시골 의사》《단식 광대》《성》등의 작품을 써서 남겼다.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마흔한 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키어링에 있는 호프만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 이 글은 카프카가 그의 창작 활동에 절정에 달해 있던 때 아버지를 상대로 쓴, 그러나 결코 보낸 적은 없는 한 통의 편지이다. 카프카 문학의 중요 원천으로,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지배했던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 자신의 생생한 고백과 증언을 전하고 있는 이 편지글을 통해 카프카의 진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만 제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요! 그것은 이야기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저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일 뿐이며ㅡ그 일이 만일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일어났다면 결코 눈치 챌 수 없었을 겁니다ㅡ.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일은 어렸을 때는 어렴풋한 예감으로서, 나중에는 희망으로서, 더 나중에는 종종 절망으로서 제 삶을 지배해왔고ㅡ이를테면 또다시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ㅡ제가 몇 가지 작은 결정을 내릴 때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직업 선택의 경우가 그 한 가지 예입니다. 확실히 아버지는 그 일에 있어서만큼은 마치 인심을 쓰시듯 관대하게도 저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셨지요. 다만 그때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기로 한 데에는 유대인 중류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아들을 다루는 법이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지요. 그와 더불어 또한 저라는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오해도 한몫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자부심에서, 혹은 제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모르셔서, 혹은 저의 허약한 모습으로부터 거꾸로 추론을 하셔서, 저를 대단히 부지런한 인간으로 여겨오셨지요. 아버지가 보시기에 저는 어렸을 때는 부단히 무언가를 배웠고 나중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써댔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약간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오히려 저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배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오랜 세월을 지내며 제 머릿속에 약간의지식이나마 남아 있게 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제 기억력이 남들만큼은 되고 이해력도 아주 형편없는 편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제가 갖게 된 지식이란 다 합쳐 봐도ㅡ특히 그 기초에 있어서는ㅡ겉으로 보기에 걱정 없고 편안해 보이는 삶을 살며 들였던 시간과 돈에 비하면, 더구나 제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 비해서도, 너무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초라하긴 해도 저로서는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저는 줄곧 정신적 생존의 문제에만 너무도 깊이 몰두해왔기 때문에 다른 일들은 모두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김나지움 학생인 경우는 금방 눈에 띄게 마련이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한없이 환상에 빠져들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아이로서 저의 무관심은 차갑고도 거의 노골적이었으며,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어린아이답게 어찌할 바를 몰랐고, 바보처럼 보일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고, 동물처럼 자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저는 더욱더 유별난 존재였을 겁니다. 제 자신도 그런 모습의 무관심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 불안과 죄의식으로 인해 신경이 마멸되는 일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어 수단이었지요. 저는 오직 제 자신에 대해서만 몰두했는데 그 방식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가령 제 건강에 대한 염려도 그 한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되었지요. 그러다 차츰 소화 불량, 탈모, 척추 만곡 등등에 대한 가벼운 불안으로 나타났고 그 불안은 무수히 많은 단계들을 거쳐 고조되다가 마침내는 실제로 병이 나버리게 됨으로써 끝이 났지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에도 자신이 없었고, 매순간 저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해야 했고, 나 자신만의 확실한 소유물, 오직 나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ㅡ사실 저는 무슨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자격이 없는 내놓은 자식이긴 했지만 말입니다ㅡ.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제 자신의 몸조차도 확실치 않게 되었습니다. 키만 껑충하게 자랐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지요. 웬만한 짐은 너무 무거워 등이 휘어져버렸지요. 몸 움직이는 일을 꺼려했으므로 기계 체조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요. 그래서 저는 내내 허약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나의 소유로 느껴지는 것이 있을 때면 저는 마치 기적을 본 듯이 놀라워했지요. 


가령 저의 뛰어난 소화력과 같은 경우가 그런 예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잃는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이제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일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겠다는 엄청난 결심을 한 후(이에 대해서는 뒤에 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가히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면서는 그만 각혈을 하고 말았지요. 그렇게 된 데에는 아마 쇤보르 궁의 방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겁니다. 제가 굳이 그 방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단지 글을 쓰는 데 그 방이 그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이 글도 그 방에서 쓴다면 잘 어울릴 텐데 말이에요). 따라서 그간의 일은 아버지께서 늘 상상하셨던 것처럼 무슨 엄청나게 큰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저는 넘치도록 건강하면서도 아버지가 병 드셨을 때를 포함해서 평생 동안 소파에 누우셨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파에 누워 빈들거렸던 적이 있었지요.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듯 저는 황급히 아버지한테서 달아나곤 했는데 대개는 제 방에 들어가 드러눕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실에서나(그곳에선 게으름을 피워도 잘 눈에 띄지도 않거니와 소심한 성격 때문에 저의 게으름은 도를 넘은 적이 없었지요.) 집에서나 제가 하는 일의 양은 다 합쳐 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제 생활을 위에서 내려다보실 수 있다면 기가 차서 입을 다무시지 못할 겁니다. 아마도 저는 기질상 결코 게으른 편은 아니지만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저는 비난을 받고, 저주를 받고, 무참히 짓눌렸지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자 무진 애를 써보았으나 그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몇 번의 작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제 힘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재황옮김,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