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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by 성공의문 2014. 11. 17.


아버지께선 최근에 저에게 물으셨지요. 왜 아버지가 두렵다는 말을 하느냐구요. 그때 저는 평소 늘 그랬듯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한마디도 못하고 말았던 까닭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제 두려움 탓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두려움의 근원을 이루는 갖가지 요인들이 너무 많아 빠짐없이 정리해서 말씀드린다는 게 힘겨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도 몹시 미흡한 대답밖에는 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빚어낸 결과들로 인해 저는 글을 쓸 때도 역시 아버지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거든요. 더구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도 제 기억과 오성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일들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께서 저에게, 아니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시던 말씀으로 보면 그랬다는 겁니다. 대체로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힘들게 일하셨고, 자식들을 위해, 특히 저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셨다구요. 그 덕에 제가 아무런 걱정 없이 호사스럽게 살았고, 배우고 싶은 건 무엇이건 마음대로 다 배울 수 있었다구요. 배고픔으로 근심한 적이 없었다는 건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다는 말 아니냐구요.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고마운 줄 알라고 하신 적이 없다구요. 그래도 자식들이 과연 고마워하고 있는지, 최소한 다정하게 말하면서 공감의 뜻을 나타내는지 그렇지 않은지쯤은 아신다구요. 그런데 저만 이상하게 옛날부터 아버지로부터 숨으려고 했다는 거죠. 제 방 안으로, 책 속으로, 정신 나간 친구들 틈으로[카프카의 부친은 아들과 절친했던 막스 브로트를 친척들 앞에서 '다혈질에다 넋빠진 놈'이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 엉뚱한 생각 속으로 틀어박히려고만 했다는 거예요. 한 번도 아버지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없고, 유대교 사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프란첸스바트[체코 에거 강변의 온천지]에 계시던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러 가지 않았다구요. 평소에도 가족에 대한 관심 같은 건 전혀 없었으며, 아버지의 사업과 다른 일들에 대해 염려해 본 적도 없었고, 공장을 아버지께 맡겨버리고 아버지 곁을 떠난데다가[카프카는 자신과 부친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매제 카를 헤르만 명의의 석면 공장이 1차대전과 참전으로 어려웠음에도 경영에 관여하기를 기피해서 부친의 심한 원망을 들었다], 오틀라가 고집 부릴 때도 역성이나 들었다고 하시겠죠[오틀라는 카프카의 세 누이 가운데 엘리와 발리 다음의 셋째로서 카프카와 가장 친했는데, 카프카와 달리 아버지와 정면으로 충돌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아버지께 극장표 한 번 갖다드린 적이 없으니까요) 친구들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구요. 저에 대한 이런 판단들을(제가 최근에 결혼하려 했을 때의 일만[카프카가 율리 보리체크와 결혼하려 했던 일을 말한다. 이때 아버지의 반대가 가장 심했는데, 그로 인한 갈등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쳐두고) 종합해보신다면, 저를 버릇없고 나쁜 녀석이라고 나무라시지는 않더라도, 냉담하고 서먹하고 고마워 할 줄 모른다고 서운해하실 겁니다. 심지어 저의 그런 태도가 마치 저만의 잘못인 것처럼, 제가 한 번만 생각을 바꾼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꾸짖으실 겁니다. 아버지의 잘못이 있다면 오로지 저에게 너무 잘해주셨다는 것뿐, 그 밖에는 티끌만큼의 잘못도 없다고 말이죠. 



아버지의 이런 평상시 생각 중에 저 역시 동의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저 사이가 서먹해진 책임이 절대 아버지께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이 말에 수긍해주실수 있다면, 지금 아버지의 연세와 제 나이로 보아 새 삶을 시작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어떤 평화라 할 만한 것이 찾아들 것이며, 설사 아버지의 잇따른 꾸지람이 그치지는 않는다 해도 좀 완화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 때 신기하게도 그 내용을 미리 감지하시는 것 같아요. 가령 얼마 전에도 이런 말씀을 제게 하신 적이 있지요. "나는 늘 너를 좋아했단다. 겉으로는 다른 아버지들이 자기 자식을 대하듯 너에게 다정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그건 다만 내가 다른 아버지처럼 가식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아버지, 저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저에 대한 아버지의 따사로운 속마음을 의심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말씀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버지께서는 가식적으로 행동하실 수 없는 분이에요. 그 말씀이야 옳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버지들의 다정한 행동이 가식적이라고 단언하신다면, 그 주장은 아마 재론의 여지가 없는 독선이 아니라면, 그 주장은 우리 사이가 뭔가 잘못되어 있고, 그 원인-책임이 아닌-의 한쪽이 아버지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지요. 제 생각으로는 후자가 진실이에요. 아버지께서도 사실 그건 그러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버지와 저의 생각은 일치하는 겁니다. 


물론 현재의 제가 오로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렇게 되어 버렸노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몹시 과장된 말이겠지요(저에겐 그렇게 과장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자라났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에는 아주 어려웠을 거예요. 아마 허약하고 걱정 많고 우유부단하고 불안정한 사람, 로베르트 카프카도 아니고 카를 헤르만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겠지요[로베르트 카프카는 카프카의 사촌형으로 변호사였다. 카프카는 그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이 엘리의 남편 카를 헤르만은 체면을 중시하고 경박하고 수단 좋은 멋쟁이로, 장인인 헤르만 카프카의 호감을 샀다]. 그럼에도 어쨌든 지금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아버지와 저는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를 친구처럼, 직장 상사처럼, 아저씨처럼, 할아버지처럼, 심지어는(이 말을 하려니 벌써부터 좀 망설여지지만) 장인처럼[실제로는 웬만큼 사교적이고 활동적이었음에도 카프카에게 결혼은 무척 어려운 문제여서 몹시 망설이고 포기하는 곡절을 겪었는데, 그 점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대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로서 저를 대하실 때만 지나치게 엄격하신 분이셨어요. 그건 특히 제 남동생들이 어려서 죽은 지 한참 후에 누이동생들이 태어난 탓에 제가 그 최초의 충격을 완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인데, 그러기에 제가 너무 나약했던 거죠. 



아버지와 저, 두 사람을 비교해보세요. 아주 간략히 말해서 저는 카프카 집안의 특성이 바탕에 깔려 있는 뢰비 집안 자손이에요. 카프카 식 삶의 의지와 사업 의욕 그리고 정복을 향한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고, 뢰비 가문의 특성에 의해 자극을 받지요(사회적 상승 욕구는 당시 프라하 유대인들의 집단적 특성이기도 했다. 카프카의 어머니 율리 뢰비의 조상들은 상당수가 경건하고 소극적이거나 섬세한 성품이었고, 카프카는 그 후손인 모든 외숙들을 좋아했다). 이 특성은 비교적 은밀하고도 소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그 영향은 종종 중단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힘으로 보나 건강으로 보나, 또 식욕, 성량, 타고난 말솜씨, 자기 만족, 세상에 대한 우월감, 끈기, 침착한 순발력,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어느 정도의 대담성으로 보더라도 진정한 카프카 집안 사람이십니다. 물론 아버지의 기질과 급한 성정(性情)은 그러한 장점들에 걸맞는 결함과 약점들로 아버지를 유인하고 부추기기도 하지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일반적인 견해를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도 아마 가장 전형적인 카프카 집안 사람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필립, 루드비히, 하인리히 백부들을 비교해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아직 그다지 확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백부들께서는 모두가 아버지보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억지스럽지 않고 쉽게 살아가시고, 또 아버지만큼 엄격하시지도 않잖아요(덧붙여 말씀드리면 이 점에서는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고, 그 닮은 점을 지나칠 정도로 잘 유지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카프카 자신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생각한 특성은 완벽을 향한 노력과 엄격한 의무감, 그리고 자학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점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고 계신 데 반해 저의 본성에는 물론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께서는 다양한 상황들을 겪으며 살아오셨고, 그러면서도 비교적 명랑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자식들, 특히 누구보다도 제가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마음 상하게 해드리기 전까지는요(손님들이 오시면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지곤 했지요). 그동안 아마 발리를 뺀 다른 친자식들에게서 느끼실 수 없었던 따뜻한 마음을 손자 손녀들과 사위가 얼마간 충당해드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버지께서는 다시 꽤 명랑해지신 듯도 싶습니다. 아무튼 아버지와 저는 아주 달랐고, 이렇게 다르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몹시 위험한 존재였어요. 그러므로 만약 서서히 발전해나가는 저라는 아이와 아버지라는 노력한 남자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게 될 것인지를 미리 산정해보았다면, 한마디로 아버지가 저를 짓눌러서 납작하게 만들 것이라고, 또 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리라고 가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산정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해서 제가 거듭 부탁드리겠지만, 아버지께서 뭔가 잘못하셨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제 꿈 속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영향을 미치신 것은 아버지로서는 꼭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는 제가 그 영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을 저의 특별한 단점으로 간주하시는데, 이제 그런 생각만은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저는 겁이 많은 아이였어요. 그럼에도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고집 센 아이이기도 했구요. 확실한 것은 어머니께서 제 뜻을 너무 잘 받아주셔서 제가 버릇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특별히 말을 잘 안 듣는 아이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제게 다정한 말을 한마디쯤 건네시거나 호의 어린 시선으로 한 차례쯤 바라보시거나 손을 한 번쯤 가만히 잡아주셨다면, 언제나 저를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었을 거예요. 물론 아버지는 진정 기본 바탕에 있어서는 관대하고 정이 많은 분이세요(이 점이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것과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전 단지 아버지께서 아이들을 대하는 외적인 태도만을 말할 거니까요).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어떤 행동에서 아버지의 호의를 발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끈기가 있거나 겁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자신이 겪었던 식으로만 아이를 다루실 수 있었어요. 완력을 쓰고 고함을 지르고 성을 내면서 말이죠. 게다가 그러한 방식이 아버지께서는 평소 저를 기운세고 씩씩한 아들로 길러내고 싶은 아버지 자신의 희망과 대단히 잘 부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겠죠.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교육방식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직접 제 기억을 되살려가며 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좀 나중에 있었던 일들, 또 아버지께서 손자인 펠릭스를 대하는 태도에 비추어 대충 추론할 수는 있지요. 여기서 제가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지금보다 젊으셨고, 그래서 더 거칠고 활기에 차 있으셨고, 덜 다듬어지셨고, 근심과 걱정이 적으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그 밖에 또 참작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일하시기 바빠 하루에 한 번이마나 저를 마주 대할 틈조차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 저에게 새겨진 깊은 인상들은 결코 그렇고 그런 것으로 여겨질 만큼 퇴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제일 어렸을 때의 일 한가지가 고스란히 생각납니다. 아버지도 어쩌면 기억하실 거예요. 어느 날 밤중에 제가 물이 마시고 싶다면서 오래도록 훌쩍거렸던 적이 있지요. 그러나 목이 말랐던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구태여 이유를 따져보자면 아마도 그냥 기어이 아버지를 하나게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법도 하지요. 아무튼 몇차례 저를 엄하게 나무라고 얼러도 소용이 없자 아버지는 침대에 있던 저를 발코니로 데리고 나가서 얼마 동안 닫힌 문 앞에 셔츠 바람으로 혼자 서 있게 하셨어요. 그게 옳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필경 식구들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겠지요. 다만 저는 그때 일을 들어서 아버지의 교육 방식, 또 그 방식이 제게 미친 영양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짚어보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그 일이 있고 나서 곧 유순해졌지만, 속으로는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를 계속 안고 지내야 했습니다. 물을 달라고 졸랐던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다는 건 저에게 자명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행동이 어찌해서 밖으로 쫓겨나는 엄청나게 무서운 일로 귀결될 수 있었는지요, 저는 나름대로 그 두 가지 일 사이의 적절한 연관성을 찾아보려 했지만 한 번도 찾아내지 못했답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나도록 저는 고통스러운 생각에 시달려야 했지요. 거대한 몸집의 남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심판자인 나의 아버지가 굳이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어찌 그처럼 달려들어 나를 침대에서 들어올려 낭하로 내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께 그토록 아무것도 아닌, 하잘것없는 존재였구나. 이런 사무치는 아픔에 부대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픔은 대단치 않은 시작일 따름이었어요. 걸핏하면 달려들어 저를 짓누르는,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지금의 이 감정도(물론 달리 생각하면 제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고귀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근원을 두고 있거든요. 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약간의 격려와 약간의 호의였을 겁니다. 제가 살아가려는 대로 조금만 두고 보셨다면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제가 가려는 길을 가로막으셨기에 저는 다른 길을 가야만 했지요. 아버지는 물론 좋은 의도에서 그러신 것이지만, 전 그 다른 쪽으로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가령 아버지께서는 제가 제법 경례도 하고 행진도 곧잘 한다고 칭찬하셨지만, 제가 자라서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어요[1차 세계대전 때 카프카는 자원 입대를 원했지만 심사숙고하다가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가치 기준을 충족시키려는 갈망으로 이해된다]. 또 제가 씩씩하게 먹어대고 심지어 맥주까지 곁들여 마실라치면, 혹은 뜻도 모르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아버지가 잘 쓰는 말투를 흉내내어 종알거리면서 저를 치켜올려주시곤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제 장래와는 상관이 없었어요. 

요즘도 아버지께서는(예를 들어 결혼 문제 때문에) 저와 함께 괴로움을 겪게 되는 처지에 놓이거나, 저 때문에 혹은(페파[페파는 카프카의 둘째 매제 요제프 폴락의 애칭으로, 건실하고 재치있고 겁많고 성급하고 고지식한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을 즐겨 조롱했다고 한다]가 저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하는 경우) 아버지의 자식이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자존심이 손상될 때에만 그러신다는 게 특기할 만하지만요. 그럴 때의 격려 말씀은 제 기분을 달래주고 저 자신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며, 제가 저의 자격으로 과연 어떤 처녀의 배우자가 됨직한가를 떠올려보게 합니다[부친이 카프카와 율리 보리체크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것은 카프카가 법학박사이자 명망 있는 사업가의 아들인 반면 율리의 부친은 유대교당의 사환이자 구두수선공으로 사회적 지위에서 크게 차이가 났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위 상승의 욕구가 강했던 부친으로서는 카프카에게 '더 나은' 여자와 결혼하기를 권했을 법하다]. 아울러 아버지의 격려로 인해 페파는 완벽하게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제가 그 덕에 원기를 회복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나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런 격려가 일차적으로 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면 저에게 어찌 도움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린 시절 저에게는 늘 격려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몸집만으로도 저는 사뭇 기가 죽어 있었으니까요. 예컨대 저는 아버지와 종종 수영장 탈의실에서 함께 옷을 벗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위고 허약하고 홀쭉했는데, 아버지는 억세고 떡 벌어지고 키도 크셨지요. 그러니 탈의실에서부터 저는 저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단지 아버지께서 제 앞에 계신다는 이유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제 앞에는 세상이 있었던 거지요. 왜냐하면 저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분이셨으니까요. 작고 해골처럼 마른 저는 탈의실에서 나와 아버지의 팔을 잡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자신 없이 널빤지 위에 맨발로 섰지요. 저는 물이 무서웠고, 아버지께서 시범을 보이는 수영 동작을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했어요. 저는 사실 창피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선 저를 가르쳐보시려고 꾸준히 노력하셨어요. 그러다가 결국 저는 자포자기하고 말았고, 바로 그 순간 그 전에 겪었던 온갖 좋지 않은 경험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뒤엉키곤 했지요. 가끔 아버지께서 먼저 나가시고 저 혼자 탈의실에 남게 될 때면, 기다리지 못한 아버지께서 혹시나 하고 다시 오셔서 저를 탈의실 밖으로 끌어내실 때까지 남들 앞에 나서는 망신스러운 순간을 늦출 수 있었기에, 그나마 참 다행스러웠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의 그런 심정을 알아채지 못하시는 것 같았는데, 전 그런 아버지가 고마웠어요. 한편으로 내 아버지의 몸집이 자랑스럽기도 했구요. 그때보다 좀 줄어들긴 했지만, 아버지와 제 몸집의 격차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지요. 

아버지의 정신적인 최고 통치권이야말로 그 격차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직 아버지 혼자의 힘으로 노력해서 그처럼 자신을 높이 밀어올리셨고, 그 때문에 아버지 자신의 판단을 무한히 신뢰하셨지요[다른 편지에서도 카프카는 "아버지께서는 평생 힘겹게 일하셨고, 무에서 시작하여 상당한 것을 이루어내셨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 신뢰는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그랬지만 그후 어른으로 자라난 시절에도 더욱 눈부시게 비쳐졌습니다. 아버지께선 높은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셨죠.. 아버지의 생각은 타당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돌았거나 극단적이거나 비정상이었어요. 그럴 때 아버지의 자기 신뢰는 무척이나 굳건해서 굳이 논리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래도 타당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는 없을 정도였지요. 


어떤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 아무런 의견도 갖고 계시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그럴 경우엔 그 일과 관련하여 나올 수 있는 모든 의견들이 몽땅 틀린 것이라는 점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요. 가령 아버지께서는 먼저 체코인들에 대해, 다음으로 독일인들, 그 다음엔 유대인들에 대해 불평하셨고, 심지어 온갖 사람들을 온갖 관점에서 불평하셨죠. 급기야 어버지로부터 욕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버지만 남게 되었습니다[유대인이었던 카프카의 부친은 처음에 체코인들에게 동화된 후 부를 쌓으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프라하의 중산층에 편입되고자 했는데, 체코인과 독일인들 중에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있었고 민족주의적 유대인들은 어떠한 형태의 동화(同化)도 죄악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적어도 저에게만은 불가사의한 특징을 지닌 분이 되어갔습니다. 전제군주들의 권능은 그들의 이성적 판단이 아닌 그들 자신에 근거를 두고 행사되거니와, 이 때문에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그런 불가사의한 특징을 지닌 분으로 생각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자주 아버지의 생각은 우리 사이에서 정당성이 입증되었습니다. 이 점은 특히 대화를 나누어보면 자명했지요. 대화라고 할 만한 대화가 이루어진 적은 드물었으니까요(카프카에 따르면 아버지와의 대화는 외형상으로만 대화였을 뿐, 강력한 어조로 계속되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 자신은 줄곧 수긍만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의 삶 속에서도 그 정당성은 자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늘 아버지의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아버지와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압박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럴 때가 특히 심했지요. 그런 생각들은 겉으로만 아버지의 입장에 구애받지 않는 생각들로 보였을 뿐, 처음부터 예외 없이 아버지의 부정적인 판결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버티면서 생각을 이어가고 완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지요.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생각이란 어떤 고귀한 상념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질구레한 착상들입니다. 무슨 일인가로 제 가슴이 잔뜩 부풀어서 온통 그 생각만 하다가 집에 와 말씀드리면, 고개를 내저으시거나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두드리시거나 빈정거리듯 한숨을 쉬시는 게 아버지의 반응이었지요. "벌써 더 멋진 것도 보았는걸." 혹은 "별것도 아닌 것까지 다 얘기하는구나." "그렇게도 머리 쓸 일이 없니?" "그게 너한테 무슨 소용이 있니?" 아니면 "하기야 그것도 일이라면 일이겠구나." 하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물론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시던 아버지께서 아이들의 사소한 관심사에 일일이 감탄해주시기를 갈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게 문제도 아니었구요. 

문제라면 아버지께서 자식과는 대조적인 본질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자식에게 그런 실망을 안겨줄 자세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여러 가지 일들이 쌓여가면서 그 상호 대립이 부단히 강화되어 드디어는 아버지와 제 생각이 일치할 때에도 습관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구요. 또 아버지는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되는 분이었기에 끝내 자식의 실망이 일상생활 속의 있음직한 실망으로 머무르지 않고 온갖 상심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얻어지는 용기와 결단, 확신과 기쁨도 아버지께서 반대하시면, 심지어 반대하실 소지만이라도 있겠다 싶으면 끝까지 지속되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반대에 봉착할 소지를 안고 있기도 했겠지요. 



그런 일들은 저의 어떤 생각일 때도 있었고 대인관계일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약간의 관심을 갖는 것 만으로도-제 성격상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아버지께서는 제 판단을 존중하시지도 않고 제 감정을 전혀 고려하시지도 않은 채, 모욕하고 흠잡고 근거 없이 깎아내리셨습니다. 순수하고 천진스런 사람들, 가령 유대인 극단 배우인 뢰비[카프카는 1911년부터 알게 된 이샤크 뢰비와 무척 가까워졌고, 그를 통해 유대 전통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얻었으며, 이디시어와 시온주의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와 같은 사람들이 아버지로부터 벌을 받아야 했지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그 사람을, 구체적으로 어떤 끔찍한 표현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해충에 비유하셨어요. 하긴 아버지께서는 제가 호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반사적으로 적용할 개와 벼룩에 관한 속담들을 무척 많이 마련해두고 계셨지요. 지금 그 배우에 대한 일이 특별히 기억나는 까닭은 당시 그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말씀을 따로 적어두고 몇 마디 덧붙여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전혀 아시는 바가 없는) 제 친구에게 단지 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다구요. 또 아버지께서 저를 자식으로서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부족하다고 질책 하실 때마다 이 예를 들어 반박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요[카프카의 일기에는 부친이 자신에게 뢰비를 지칭하여 "개를 데리고 자면 빈대와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라 했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두서없이 대꾸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아버지께서 또다시 나를 나쁜 아들이라 하실 경우를 생각해서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 어제 뢰비가 내 방에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비웃음의 표시로 몸을 흔들거리시고 입을 비죽거리시면서 방문자들을 가리켜, 남의 어떤 점이 흥미로우냐, 무엇 하러 그렇게 쓸모없는 연분을 맺느냐 등등의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다]. 


저에게는 항상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과 판단들은 저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모멸의 나락에 빠뜨릴 수 있는데도, 어쩌면 아버지는 그런 것에 대해 그다지도 철저하게 무감각하신가 하는 점이었지요.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자신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계신 것만 같았어요. 저도 이런저런 말씀으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적이 분명히 있지만, 그럴 때 저는 늘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고 있었답니다. 제가 하는 행동이 저에겐 고통스러웠지만, 저 자신을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삼갈 수가 없었는데, 그런 말을 채 마치기도 전부터 후회스러웠어요[실제로 카프카의 일기에는 이런 후회의 심경이 거듭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아무 거리낌 없이 아무한테나 그런 말씀을 해대셨고, 전혀 연민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말씀하시는 도중이건 말씀하시고 난 다음이건 말입니다. 그 누구도 아버지 앞에서는 결코 항거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런 행동 방식은 아버지의 교육 방식에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제 생각으로 천부적인 교육자적 자질을 지니고 계셨어요. 아버지와 동일한 유형의 사람에게는 아버지의 교육이 틀림없이 유익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 말씀의 이성적인 의미를 간파할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점들이야 전혀 신경 쓰는 일 없이 묵묵하게 말씀을 따랐겠지요. 하지만 어린 저에게 아버지가 소리질러 지시하시는 모든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리는 명령이어서 한 번 들으면 절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세상을 판단할 때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누구보다 아버지라는 분을 판단할 때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에 따르면 아버지께서는 완전히 낙제였지요. 


제가 어렸을 땐 주로 식탁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는 가르침은 대부분 올바른 식사 예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식탁 위에 올려진 것은 조금도 남김없이 먹어야 했고, 음식 맛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작 아버지께서는 종종 맛없는 음식을 드실 때 '처먹는다'는 표현을 쓰셨어요. 또 '집짐승(조리사)'이 음식을 망쳐놓았다고 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그 맹렬한 허기와 각별한 식욕으로 음식이 채 식기도 전에 연신 듬뿍 입에 넣어가며 빠르게 식사를 마치셨기 때문에, 어린 자식들도 서둘러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한 식탁 주변의 무거운 침묵은 경고의 말씀으로 깨지곤 했지요. "말은 다 먹고 난 다음에 하거라."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혹은 "봐라, 난 한참 전에 다 먹어치웠잖니." 라고 말씀하셨어요. 뼈를 이빨로 으깨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아버지는 그러셨어요. 또 식초를 쩝쩝거리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아버지는 그러셨지요. 빵을 반듯이 자르는 건 중요한 문제였는데, 아버지께서 소스가 잔뜩 묻은 칼로 자르시는 건 무방했습니다. 바닥에 음식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나중에 보면 부스러기는 아버지 자리 밑에 제일 많았어요. 식탁에서는 식사만 하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정작 아버지는 손톱을 깎고 소제하셨으며, 연필도 깎으셨고, 이쑤시개로 귀도 후비셨지요. 


아버지, 부디 제 말을 잘 이해해주십시오. 그런 일들은 그 자체로서야 하등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일들이었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가늠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아버지라는 분이 제게 어떤 지침을 부과하시고서 자신은 그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제 마음은 무거워졌습니다. 그로 인해 저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고 말았지요. 그 하나는 저라는 노예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저만을 위해 제정되었고,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제가 한 번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법의 지배하에 있는 세계였습니다[대표작 "소송"에서 법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오직 요제프 카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저의 세계에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두 번째 세계는 아버지께서 사시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통치를 위한 일, 즉 명령을 내리고 명령 불이행 때문에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셨지요. 그리고 세 번째 세계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수치스러웠지요. 우선 제가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수치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저에게만 내려지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 명령에 반항하는 것도 수치스러웠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저 자신을 용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제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어떤 것을 요구하셨는데, 제가 아버지만큼의 기력과 식욕과 솜씨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요구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가 가장 수치스러웠음은 물론이지요. 그리하여 어린 아이의 사려 분별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아이의 감정은 동요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