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역동농업은 인지학의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루돌프 슈타이너 (1861~1925)가 세상에 선물처럼 주고 간 것이다.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교육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슈타이너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독일 카이저링크 백작의 초청을 받아 열흘 동안 자신 평생의 지혜를 농업 강좌로 풀어놓았다. 당시는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토양오염이 경고되는 한편 1차 대전 이후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의 강좌를 들은 농민들이 그의 가르침을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이라 이름 짓고 곧바로 데메테르협회를 창립했으며, 1928년에는 데메테르 유기농 인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금 생명역동농업에서 사용하는 9가지 증폭제의 제작 방법과 파종달력의 기본원리 또한 그날의 농업 강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슈타이너의 농업 강좌를 정리한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에는 “빛과 온기의 작용에 따라 식물 안에 있는 요소들의 함량이 달라진다”는 생명역동농업의 원리가 설명돼 있다. 예를 들어 아침저녁에는 식물 안의 질소 함량이 많아져 성장이 촉진되고 한낮에는 질소 함량이 적어져 성장이 위축되는데, 기운의 원천인 천체가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이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생명역동농업의 요체는 달과 행성의 천체 기운이 땅과 먹을거리에 잘 깃들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생명역동농업은 우리의 절기농사와도 맥이 닿는다.
지금은 세계 50여개 나라의 15만㏊ 농지에서 생명역동농사를 짓고 있으며 곡물과 과일, 채소뿐 아니라 커피와 차, 포도주, 낙농과 육류, 화장품, 유제품, 꽃, 종자 등 다양한 데메테르 인증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데메테르 포도주 생산자만도 450농가에 이른다.
생명역동농업의 공동체 마을로 유명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도텐펠더호프 협동농장에서는 1년 과정의 인지학 및 생명역동농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평생교육기관인 에머슨대학에서도 올해부터 1년 과정의 생명역동농업 원예학 강좌를 개설한다.
이민호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파종달력 맞춰 천체 기운 머금은 먹거리 생산
김준권 회장이 생명역동농법으로 재배한 벼를 살피고 있다.
[나는 농부다] 생명역동농업 일구는 김준권씨
“해마다 발행하는 파종달력에 맞춰 농사를 지어요. 과채류, 화채류, 엽채류, 근채류를 나눠, 각각 씨 뿌리고 수확하기에 적합한 날을 열매, 꽃, 잎, 뿌리의 날로 표시해요. 별자리에 따라 그날이 정해지고요. 예를 들어 달이 사수자리와 양자리, 사자자리에 있을 때가 과채류 농사에 적합한 ‘열매의 날’이에요.”
한국의 유기농을 이끌어온 경기도 포천의 김준권(67) 정농회장은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에 푹 빠져 있다. 수년 전부터는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를 만들어, ‘세계 최고 유기농법’의 보급과 확산에 나서고 있다. “일본 자연농법의 후쿠오카 마사노부 농장도 찾아가 봤어요. 하지만 말로 듣던 것과 많이 다르고 수확량이 너무 적었어요. 실망스러웠죠. 그러던 차에 생명역동농업을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게 느껴졌어요. 생명역동농업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고서야, 기본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0년 전부터 이 농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증폭제. 소뿔 속에 수정 가루와 물을 가득 채워 만든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생명역동농업이 유기농 중의 유기농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도 김 회장의 용기를 북돋웠다. 실제로 1928년 독일에서 시작한 생명역동농업은 데메테르(Demeter)라는 별도의 인증 프로그램을 두고 있으며, 50여개국의 농민이 가입해 있다. 데메테르 인증이 붙은 농산물은 일반 유기농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부인 원혜덕(59)씨도 거들었다. “같은 무를 파종달력의 ‘뿌리의 날’과 ‘잎의 날’에 심어보았어요. 뿌리의 날에 심은 무는 동그랗게 튼실했는데, 잎의 날에 심은 무는 잎만 무성하고 뿌리가 가늘었어요. 데메테르 농산물을 특수카메라로 촬영하면, 조직의 모양이 아주 활기차고 또렷해요. 일반 유기 농산물이나 관행 농산물과 확연하게 다르지요.” 원씨는 풀무원을 세운 고 원경선 선생의 딸이다. 김 회장은 풀무원 농장에서 일하면서 원씨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http://www.montirius.com/en/our-philosophy/bio-dynamic-culture/]
김 회장과 생명역동농업을 실천하는 회원들은 해마다 두차례 모임을 열고 ‘증폭제’(Preparation)라는 것을 만든다. “4월과 10월에 우리 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해요. 재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기도 어렵거든요. 땅의 활력을 살리는 9가지의 자연 제제인데요. 아주 적은 양으로 강력한 효과를 낸다 해서, 증폭제라고 우선 번역했어요. 처음 생명역동농업을 접하는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증폭제 때문이지요.”
대한민국 생명역동농법의 산실인 김 회장의 포천 밭. 파종달력에 맞춰 심은 배추와 무가 잘 자라고 있다.
500번에서 508번까지 번호를 붙인 증폭제는 모두 9가지. 그중 첫번째인 500번 증폭제는 암소뿔과 소똥으로 만든다. 한차례 이상 새끼를 낳은 암소의 뿔에다 암소의 똥을 집어넣고, 겨우내 여섯달 동안 땅에 묻어두는 식이다. “암소뿔이 땅속의 생명 기운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똥이 기운을 가득 머금게 되지요. 겨울에 묻는 이유는 땅의 기운이 가장 살아있을 때거든요. 봄에 꺼내서 물을 채운 양동이에 담아 1시간 동안 좌우로 번갈아가며 세게 저어 희석시켜 쓰면 됩니다. 암소뿔 1개 분량으로 3000평의 땅을 기름지게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증폭제 만드는 방법도 유별나다. 수정(실리카) 가루를 소뿔에 넣고 여름 동안 비옥한 땅에 묻어두는 501번, 서양톱풀 꽃을 수사슴 방광에 넣어 여름철에는 상온에 매달아두었다가 겨울 동안 묻어두는 502번, 카밀러(캐머마일) 꽃을 소의 장에 넣어 겨울철에 묻어두는 503번 등이다. 이렇게 만든 증폭제는 퇴비 더미에 뿌려 사용하는데, 1티스푼의 극소량으로 500~1000평의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김 회장은 20여마리의 한우를 직접 사육한다. 농사지을 퇴비를 얻으면서 증폭제로 쓸 좋은 소똥을 얻을 요량이다. 서양톱풀과 캐머마일,
떡갈나무 껍질을 속에 채워넣은 소 두개골을 땅에 묻어 증폭제를 만드는 모습
쐐기풀 등의 까다로운 재료들도 직접 재배한다. 수사슴 방광, 소의 장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독일에서 수입한다.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회원들이 소똥을 속에 넣은 암소뿔을 땅에 묻고 있다.
김 회장의 집념과 끈기는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이미 2008년에 국제데메테르협회에서 김 회장의 공을 인정해 한국을 준회원국으로 등록했으며, 최근에는 근처 포천 지역의 농민들도 생명역동농법실천연구모임을 창립했다. 농촌진흥청 유기농업과에서는 포천의 일부 지역을 생명역동농업 실천단지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 회장은 1만5000㎡의 밭에서 토마토, 케일, 무, 배추, 마늘, 콩 등의 농사를 짓는다. 해마다 증폭제를 뿌리고 파종달력에 맞춰 씨를 뿌리고 거두어, 사람 몸에 가장 좋고 우주의 기운을 한껏 머금은 먹거리를 생산한다. 당연히, 김 회장의 농산물은 ‘포천 김준권이 기르고 만든 유기농 토마토주스’ 등으로 유기농 매장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맛도 으뜸이다.
김 회장은 “사람이 어떤 것을 먹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지를 늘 생각한다”고 말했다. “20세기 초반 화학비료가 개발되면서 유럽의 농지가 급속하게 황폐해졌어요.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런 땅에서 키운 곡식이나 채소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기운이 빠져 있다고 보았어요. 망가진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방법으로 생명역동농업을 제시한 거예요.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 또한 사람이 어떤 것을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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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Bio-dynamic Agriculture
Bio-dynamic 증폭제 뿌리는 모습
Bio-dynamic Agriculture 와인 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