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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버락 오바마 일대기

by 성공의문 2008. 11. 6.

혼혈 눈으로 미국 경험 “인종 초월한 공동체 꿈”
경제위기 앞 초선상원 ‘다자주의 세계’ 지향


그는 ‘혼혈’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수많은 경계를 넘어선 인종·문화·정치·사회적 혼혈이다. 미국 최초의 코즈모폴리턴(세계주의자) 대통령이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이념에 상관없이, 미국 중심주의 사고를 버리지 못한 대통령과는 다른 첫 대통령이다.

“충분히 흑인적이지 않다.” “백인처럼 행동한다.” “충분히 미국적이지 않다.”

오바마를 괴롭혔던 공격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혼혈성이 오바마를 다인종 국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 갈 21세기형 코즈모폴리턴 지도자로 성장시켰다.

아버지는 케냐 출신 흑인 유학생이고, 어머니는 캔자스 출신의 백인이다. 1961년 태어나 성장한 곳은 동서양이 만나는 하와이다. 여섯 살 때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서 아시아·이슬람 문명권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4년을 보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다문화적 배경에서 관용과 화합을 익혔다. 그리스도 연합교회를 다니는 개신교도지만, ‘버락’이라는 아랍어 이름을 갖게 됐다.

1. 마약까지 손댔던 방황

혼혈과 경계의 삶은 그를 괴롭혔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검은 피부 탓에 백화점에 가면 감시원이 오바마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피부색을 하얗게 바꾸려고 화학수술을 받은 흑인의 사진을 보고 충격도 받았다. 마약에까지 손을 대며 방황했다. “나는 여러 인종의 혈통과 문화를 물려받은 흑인의 눈으로 미국을 경험하게 됐다. 인종과 계층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 것인지 영원히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오바마는 자서전에 적었다. 26살 때, 아버지의 고향 케냐를 찾아 정서적 뿌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흑인 오바마는 “흑과 백의 두 세상에서 줄을 타는 법을 익혔다.”

‘버락’은 축복을 뜻했지만, 세상은 대신 역경을 안겼다. 아버지는 두 살 난 오바마의 곁을 떠나 하버드대로 유학을 간 뒤 케냐로 돌아가,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가 13살 때 어머니는 인류학 공부와 사회운동을 위해 다시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이후 오바마를 돌본 것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

2. 공동체와 미래의 꿈을 키우다

시련은 그를 담금질했고, 흑백의 장벽과 경계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흑인의 자존심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질병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는 사람들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그것은 오바마가 새로운 시대의 흑인 정치인이기에 가능했다. 오바마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의 시대만을 살지는 않았다.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제시 잭슨 목사와 같은 흑인 투사가 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

오바마는 대신 증오를 껴안았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흑인으로) 바라본다 해도, 그런 깨달음은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큰 미국이라는 공동체, 흑인과 백인과 아시아인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를 떠올렸다.

그는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1983년 시카고 흑인거주지역에서 도시빈민운동을 벌였다. 공동체 건설의 출발이었다. 오바마의 ‘아메리칸 드림’도 같이 시작됐다. 다문화적 성장 배경과 함께,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지적·문화적 역량을 다졌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법과 정치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판단에 하버드 법대 대학원에 1988년 진학했다. 1991년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을 맡으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1992년 “나의 최고의 친구이자, 가족의 바위와 같은 존재”인 변호사 미셸 로빈슨과 결혼한다.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딘 그는 2004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지난해 2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고, 노예제로 얼룩졌던 미국에서 232년 만에 첫 흑인 대통령에 오르는 꿈의 대장정에 올랐다. 드디어 지난 6월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민주당 경선에 승리하면서 미국 첫 흑인 대통령에 다가섰다.

3. 투사가 아니라 통합으로

정치인 오바마는 증오와 분열, 대립의 정치를 뛰어넘었다. “나는 인종적 성적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 일반적으로 피해의식에만 기반한 정치행위를 배격한다.”

그의 공동체 건설 꿈은 통합의 정치로 이어졌다. 오바마가 새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합쳐진 통합의 꿈이었다. 오바마가 ‘하나의 미국’, 흑인과 백인,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뉜 것이 아닌 ‘하나의 미국’을 강조한 배경이다. 희망과 통합의 정치, 그 세상으로의 변화는 이후 정치인 오바마의 최대 슬로건이었다.

4. 21세기 코즈모폴리턴 지도자

“아메리카는 이들의 꿈을 모두 실현시키고도 남을 만큼 넓고 크다.” 오바마는 중남미 이민자 가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라는 닫힌 경계를 넘어 세계를 보듬는 21세기 지도자의 탈경계적 가치관이다.

그가 배운 통합의 정치는 미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간다. 그는 대결과 분열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 외교와 동맹을 내세운다. “‘악의 축’ 지도자와도 만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의 당선에 전세계가 환호하는 까닭이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철군을 주장했다. “명확한 논리적 근거와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지 없이 이라크를 침공한다면 중동의 타오르는 불길에 부채질을 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미국의 우월주의와 일방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포용하는 다원적 세계질서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붕괴, 미국의 추락은 오바마에게 이런 시대정신을 절실히 깨닫게 만드는 기회였다. 오바마는 4일 당선 연설에서도 “진정한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부의 규모가 아니라, 영구적인 이상이다”라고 강조했다.

47살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의 하나에 오른 오바마. 그 앞에는 수많은 난제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파탄난 미국과 세계의 경제를 회생시키고, 시장과 자본의 폭주가 빚은 상흔을 치료해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미국과 세계의 분열을 아우르는 통합의 지도자, 21세기 세계적 지도자가 될지 다시 그 경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