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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세계 각국의 치열한 전략

by 성공의문 2021. 12. 26.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서의 글을 쓰면서, 이미 예전에 중국의 반도체 굴기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일단 외부적으로는 미국이 2019년부터 적극적으로 대중국 반도체 품목 및 기술 제제 조치를 강력하게 이어 가고 있는 상황이고, 이 추세는 정권이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바뀐 이후에도 더욱 세밀하게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중국이 지난 10년 넘게 반도체 굴기에 집중적으로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합심하여 투자한 성과들이 신통치 않았을뿐더러, 그 거대한 자본이 다 잠식될 정도로 대마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 점점 빈번하게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중국의 반도체 산업 경쟁력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고, 중국의 반도체 시장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 그렇게 달성하고 싶어 하는 반도체 자급률 25%는 중국 정부의 갈망과는 반대로 점점 가시권에서 멀어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큰 반도체 소비 시장이다. 2021년 상반기 기준, 미국 (더 정확히는 NAFTA 협정국인 멕시코와 캐나다까지 포함)은 전 세계 반도체 소비 시장에서 32%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그 뒤를 이어 중국이 24% 정도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20%는 한국, 대만, 일본을 포함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실상 이들 세 나라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 그리고 25%는 유럽이다. 전문가 대부분은 현재 중국의 반도체 수요가 매년 급증하는 추세를 기반으로, 대략 2025년 전후, 늦어도 2020년대 말 경에는 중국이 세계 최대의 반도체 소비 국가로 올라설 것임을 전망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어떠한 결말로 이어지든, 중국은 자국의 ‘산업 성장’ 자체를 위해서는 다양한 세대와 범위에 걸친 반도체가 필요하다. 따라서 중국이 조만간 세계 최대의 반도체 시장 ‘큰손’이 될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2020년대는 내가 예전에 전망한 것처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의 예측 불확실성이 점차 가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반도체 시장의 두 ‘큰손’이자, G1, G2인 미-중 간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마찰이 더욱 격심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20세기 중반에서 1990년대 말 사이 이어진 미-소 간 냉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점차 이러한 마찰은 양국 간의 갈등을 넘어, 지역 간, 다자간, 클러스터 간 갈등 양상으로 치달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미국은 2020년 들어 아-태 지역에서의 활발한 클러스터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이른바 '인도-태평양 전략'을 천명하며 이미 QUAD나 AUKUS는 물론, 자국이 주도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양한 기구 혹은 그에 준하는 기구들을 계속 출범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명시하든 안 하든, 결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중국 역시 그간 지속해 왔던 '일대일로' 전략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자국 영향력 확대를 위해 자국 중심의 연합체를 꾸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만큼의 가시적인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중 양국 간의 갈등은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대 국가, 그리고 지역 대 지역, 기구 대 기구의 형태로 점차 입체적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연히 그 영향은 양국이 첨예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첨단 산업의 현장에서도 재현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미-소 혹은 나토-바르샤바조약기구 간의 세력 혹은 이념 간 갈등과 비교해 볼 때, 21세기 초중반에 전개되고 있는 미-중 혹은 그에 영향을 받는 클러스터 간의 갈등 구조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거의 냉전이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가 아니었던 것에 반해, 현재의 갈등 구조는 양국 간의 이해관계, 양 세력 간의 경제적 이익 공유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미국이 소련과 무역을, 기술 거래를, 산업적 협력, 인적 교류를 끊든 말든, 양국의 GDP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양국의 갈등 구조가 첨예화될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국방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은 쪽 (소련)이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미-중 갈등 구조는 이와 결이 많이 다르다. 미국이 지금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무역 및 기술 제제, 특히 반도체나 그에 준하는 첨단 산업에 대한 제재 국면을 더 오래, 그리고 더 강력하게 이어갈수록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점점 lose-lose 게임으로 치닫는 구조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국가는 다름 아닌 미국과 중국이다.

왜 그럴까?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 보자. 이미 1980년대 이후,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인텔로 대표되는 종합 반도체 대기업이 A-Z까지 모두 다 하는 (즉, 설계도 하고, 생산도 하고, 패키징까지 다 하는) 구조를 탈피하여 본격적인 분업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는 각자 잘하는 분야가 국가별로, 회사별로, 지역별로 점차 세분화되는 구조로 변모해 왔음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반도체 업계의 정상급 글로벌 회사들 소수만 관여하는 구조로 글로벌 반도체 산업 구조가 개편되었지만,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이나 대만 같은 동아시아로,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점차 옮겨가면서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은 굉장히 복잡해지고 세분화되었다. 물론 이렇게 복잡한 네트워크를 가져야 할 정도로 경제적 논리가 그만큼 세밀하게 구축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글로벌 공급망의 복잡다단화 배경에는 반도체라는 시장 자체가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한 층위에서 광범한 수요가 폭증이 있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PC 시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닷컴 버블, 그리고 그 이후의 인터넷 혁명과 IT 산업의 폭증세는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분업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업체제의 정교화는 피할 수 없는 양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AI와 메타버스, 빅데이터의 시대 속에서의 반도체 수요는 계속 증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입국이자, 생산국으로서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고, 미국은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키 플레이어로서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도 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을 적어도 산업적으로는 자국 주도의 질서에 편입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다만 아마도 미국이 간과한 것은 중국의 산업, 특히 반도체 산업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 했다는 것, 그리고 중국이 정부 (공산당) 차원에서 ‘굴기’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반도체 산업에 전략적 집중 투자를 감행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국 (1980-1990년대)이나 일본 (1970-1980년대)도 과거 정부 주도로 반도체 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키우려 중장기 지원 정책을 마련한 바 있고, 그 덕분에 양국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의 위치가 공고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이 중국과 달랐던 점은 한-일의 반도체 산업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산업의 질서, 세력권 안에서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예측 범위 내에 있던 위치를 탈피하여, 2010년대 들어 키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립도의 제고, 그리고 나아가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산업 경쟁력을 갖추는 것에 주안점을 둔 굴기 계획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시장의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의 영향력을 적어도 양분하는 구도로 끌고 가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는 움직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는 미국이 중국을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파트너가 아닌, 견제 나아가 좌절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상대로 남아 주었다면 양국은 파이 자체를 두 배로 키워서 양분하는 방법으로, 즉, 각자의 파이를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산업을 재편하되 암묵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합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국은 애초부터 G1으로서의 미국의 지배력을 계속 인정할 의도가 없었던 것 같고, 이는 등소평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도광양회 철학을 버린 시진핑의 등장과도 맞물리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미-중 간의 정치외교적 갈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첨예하게 지속될 경우, 양국은 물론 글로벌 첨단 산업 자체의 시장의 성장세는 조금씩 약화되고, 결국 축소되거나 급격한 비용 상승으로 인한 글로벌 체인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의 형성이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만큼 비용-수익 구조가 거의 최적화된 상태에 근접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중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무역과 기술 거래가 단절되면, 그 영향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 추구해온 비용-수익 구조의 최적화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21년 상반기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는 대략 1.7~1.8조 달러 (~2천조 원) 정도 된다. 이를 무역 관계로 세분화하여 살펴 보자. 첨부한 BCG-SIA (보스턴 컨설팅 그룹-미국 반도체협회)의 공동 분석 자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https://www.semiconductors.org/wp-content/uploads/2021/05/BCG-x-SIA-Strengthening-the-Global-Semiconductor-Value-Chain-April-2021_1.pdf), 일단 주요 플레이어를 나라 단위, 즉, 미국, 중국, EU, 한국, 대만, 일본, 인도, 아세안, 홍콩 정도로 나눠 보자. 반도체 교역 규모 기준, 미-중 관계는 170억 달러, 미-EU 관계는 60억 달러, 미-한 관계는 80억 달러, 미-일 관계는 40억 달러, 미-대만 관계는 80억 달러, 미-아세안 관계는 300억 달러, 미-인도 관계는 2억 달러 정도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중국과의 반도체 무역 규모가 제일 크지는 않다. 대략 한, 대만, 일본과의 무역 규모 전체를 합친 정도와 맞먹는 수준이다. 오히려 아세안과의 반도체 무역 규모가 크며, 이는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반도체 기술 (IP), 소재, 상품 수출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미국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위해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아세안이 아니라 사실 중국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주요 반도체 교역국들이 대 중국 반도체 교역 규모가 과중할 정도로 큰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반도체 교역 주요 상대국은 바로 한국, 대만, 일본, 그리고 아세안이다. 중국은 한국과 810억 달러, 일본과 240억 달러, 대만과는 무려 1천 2백억 달러, 아세안과는 900억 달러에 달하는 반도체 교역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중 한국, 일본, 대만에 대해서는 지난 20-30년 간, 중국은 계속 반도체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아세안에 대해서만 무역 흑자다. 즉, 한국, 일본, 대만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은 그야말로 반도체 교역을 통해 커다란 캐시를 매년 꾸준히 가져다주는 큰 시장이고, 교역 상대인 셈이다. 중국은 EU와도 190억 달러, 인도와는 60억 달러 수준의 반도체 교역 규모를 기록하고 있는데, 유럽 입장에서도 중국은 꾸준히 유럽산 반도체 장비와 소재, 제품을 소비하는 큰 시장이기 때문에 놓치기 아쉬운 시장인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주요 반도체 플레이어들의 대 중국 반도체 교역 의존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무역과 기술 제재를 계속 이어갈 경우,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 질서에 따라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한국, 일본, 그리고 대만 등의 주요 플레이어들은 대 중국 반도체 교역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우선 각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중국 현지에 추가 확장하려는 생산 기지 건설, 팹리스 합자 회사 설립, 기술 교역 등이 어려워진다. 나아가, 고부가가치 생산/검사/패키징/공정 장비, 화합물반도체 등의 소재, 완제품을 수출하는 것 역시 어려워진다. 이를 우회하기 위해 제3국을 거쳐 교역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그렇게 거치는 과정이 누적될수록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고, 애써 최적화된 서플라이 체인의 이점을 누릴 가능성도 그만큼 적어진다. 미국이 이들 주요 국가들에 대해 이들이 중국과 반도체 교역하는 것 전체를 세컨더리 보이콧 형태로서 제재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렇지만 고부가가치 제품과 기술 거래에 대한 목줄을 쥐기 시작하면 각 나라들의 대 중국 반도체 교역 규모는 작게는 10%, 많게는 30%까지도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 편의를 위해 대략 평균 20% 정도 감소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글로벌 반도체 교역 규모는 1.7조 달러에서 1.4조 달러 정도로 격감하게 된다. 교역 규모의 감소는 단순히 시장 축소만 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이 축소됨으로 인해, 생산업체 입장에서는 전체 교역 규모에 최적화되었던 설비 투자가 과잉 투자가 되고, 수요 대비 제품의 공급이 과도해지면 시장 전체의 수익성 약화를 통해 시장 전체가 쇠퇴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교역 규모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체인에서의 노드 몇 개가 이가 빠지듯 빠지는 셈이 되는데, 그 경우, 생산 비용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며, 이는 장기적으로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더 크게 갉아먹는 요인이 된다.

조금 더 극단적인 가정을 해 보자. 고도로 분업화된 현재의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이 붕괴되었을 경우, 비용은 대략 얼마나 상승할까? BCG-SIA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을 기준으로 할 때, 그 비용은 도합 1조 달러 내외다. 특히 가장 비용이 급상승하는 영역은 반도체 생산이다. 파운드리든 패키징이든, 실물로 생산하는 것에 가장 고정 자본이 많이 투입되는데, 그 영향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비용이 급상승하는 영역은 장비 분야다. 대략 900억 달러에서 2.7천억 달러 범위에서 비용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외, 팹리스 분야나 EDA (설계 소프트웨어) 같은 core IP, 반도체 소재 등에서도 골고루 비용의 상승이 예상된다. 즉,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 견고했더라면 전 세계 반도체 소비 주체들은 1조 달러 정도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산업 자체는 글로벌 산업 성장을 위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매년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비용은 더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이 붕괴되었을 경우, 매년 450억 달러에서 1.2천억 달러 범위에서의 비용 상승이 예상되며, 생산, 소재는 물론, 특히 장비 분야에서의 비용 급상승이 예상된다. 그 규모는 대략 200-600억 달러 내외로 추정되는데, 다른 분야에 비해 장비 분야의 비용 급상승이 예상되는 이유는, 장비를 대체하기 위해 독립된 IP로 장비를 만드는 것에 있어 시간과 비용, 그리고 경험적 지식이 많이 요구되는 특징 때문이다. 반도체 소재 역시, 고품질의 소재를 생산하는 경험적 지식과 보호받는 IP는 대체하기 매우 어려우며, 이는 비용의 급상승을 불러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팹리스 부분에서의 비용 상승도 눈에 띄는데, 대략 100억-350억 달러의 추가 비용이 매년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역시 애초에 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분화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설계 비용과 생산 비용의 규모가 다르다지만, 두 영역은 비용 산정 논리가 다르고, 선행 특허에 영향을 받는 범위가 상이한 분야다. 팹리스의 경우, 애초에 파운드리 파트너를 상정하여 맞춤형 생산이 가능할 것을 기대하며 특정 목적에 아주 최적화된 형태의 설계를 추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파운드리와 팹리스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양쪽 모두 비용이 급상승하겠지만, 팹리스 업체는 맞춤형 파운드리가 아닌 범용 파운드리, 전세대 파운드리를 상정하여 재설계해야 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능의 최적화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의 상승은 피할 수 없다.

사실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이 붕괴될 경우,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큰 손해를 보는 나라는 미국이다. 이미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제일 큰 손인 데다가, 가장 큰 무역 규모를 가진 국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가장 많은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분야는 다름 아닌 생산 분야 (특히 파운드리)다. 현재 미국에서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파운드리는 글로벌 파운드리 (GF)와 인텔의 일부 로직 반도체 생산 라인 정도다. 그나마도 미국 내 파운드리 산업의 경쟁력은 대만이나 한국의 업체들에 밀리게 된 지 오래이며, 그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인텔은 자사가 설계한 제품의 생산만 담당하므로, 실제로 파운드리라고 부를 수 있는 업체는 글로벌 파운드리 밖에 없는데, GF는 생산 캐파에서나 기술의 세대에서나 TSMC 혹은 삼성전자에 비견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T나 S는 초미세 패터닝 같은 기술적인 선진화에서도 가장 앞서있지만, 이미 자사 중심의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고, 다양한 세대에 걸친 파운드리를 동시에 대규모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미국 입장에서는 만약 이들을 자국에서 독립적으로 대체할 경우에 생기는 생산 비용의 증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어들이다. T나 S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reshoring하여 다시 파운드리의 국내 기반 다지기에 돌입한다고 해도 적어도 5-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여, 그 동안의 비용 증가분은 최소 500억, 최대 1천5백억 달러까지도 치솟을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이러한 비용의 급상승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손해 역시 만만찮다.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이 붕괴될 경우, 1.7천억~2.5천억 달러의 비용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이 지난 10년간 집중 투자한 반도체 산업 투자 규모의 두 배에 육박하는 수치다. 그리고 매년 100~300억 달러 수준으로 비용의 상승이 예상된다. 중국이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주요 기지이지만, 반도체 자급률은 15%도 안 되는 상황이라, 역시 가장 큰 비용 상승 영역은 반도체 생산이며, 이는 그간 중국의 주요 팹리스 업체들이 TSMC에 파운드리를 의존해 왔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 역시 2.4천억-3.3천억 달러 수준의 비용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며, 생산은 물론 설계나 후공정 영역에서의 비용 급상승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나 대만 역시 비용의 상승은 피할 수 없을 것이며, 한, 대만, 일본 3국은 250~800억 달러 수준의 비용을 당장 감당해야 할뿐더러, 매년 50~200억 달러 수준의 비용 상승분을 감내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의 성립은 이러한 거대한 비용의 절약, 그리고 매년 성장할 수 있는 반도체 산업의 비용 절감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던 것인데, 그 근거가 없어지면 서플라이 체인의 복구는 더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일본은 지난 2019년, 대 한국 반도체 무역 및 기술 제재에 돌입하면서 주요 부품, 장비, 소재의 한-일 서플라이 체인 일부가 일시에 마비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수개월 간 주요 공급처의 재설정, 신규 도입된 소재나 장비의 테스트 및 숙련 기반 구축 과정에서 비용의 급상승을 감당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많은 부분이 다른 공급처로 대체되거나 국산화된 이 시점에도 서플라이 체인의 재조정으로 인한 비용의 상승분이 그리 많이 감소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국산화 성공이나 서플라이 체인의 다변화라는 이점도 누릴 수 있었지만, 사실 그만큼의 비용 상승은 한국 반도체 업계 전체로는 경쟁력의 약화를 의미했으며, 2019년의 일본이 이것을 획책한 것이라면 일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플라이 체인의 부분 붕괴는 사실 일본에게 더 큰 손해를 안겨 주었다. 한국의 큰 손들이 일본 업체의 제품을 수입하지 않게 되면서 (못하게 되면서), 일본 업체들의 설비 투자는 고스란히 비용이 되었고, 자금이 제때 회수되지 않으면서 일본의 반도체 장비, 소재, 부품은 재고율이 높아졌다. 이는 많은 일본의 중소 반도체 업체들의 비용 급상승을 야기하기도 했으며, 버티다 못 한 일부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아예 한국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로의 편입을 획책하며 생산기지나 R&D 센터를 발빠르게 한국의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로 이전하기도 하였다. 그나마도 대중국 수출 활로가 더 확대되었다면 일본 업체들의 비용 상승은 최소화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201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 중국 반도체 산업 견제 기조 속에, 그러한 모멘텀을 누릴 기회도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부분 붕괴된 한-일 간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은 일본의 정권이 두 번 교체되는 과정 속에서도 거의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는 비용의 절감이라는 확실한 동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관계의 회복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어떤 산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의 상황과 경제 주체들의 불확실성 속에, 긴밀한 산업적 관계, 복잡한 이익의 공유 관계를 담보로 하는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각 파트너들 간의 예측 가능성은 그 자체가 큰 자산이다. 그리고 그 예측 가능성은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그 신뢰는 거래한 기간이 오래되었을수록, 거래한 규모가 커질수록, 거래한 결과가 서로 윈윈이었을수록, 강고해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계마저 뒤로 하고서라도, 외생적 원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러한 체인에 마비가 오거나 끊어질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관계를 훼손했던 제반 여건이 다시 복구되거나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상호 간의 신뢰 자산은 금방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당연히 마비/단절된 기간이 오래될수록 신뢰 자산의 회복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회복될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진다.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단절된 서플라이 체인이 복구되기를 마냥 손놓고 기다리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을 것이므로, 새로 대체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들어오고 그 플레이어와의 신뢰 자산이 구축되면 굳이 oldies but goodies를 외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이 미-중 간의 갈등 첨예화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미국이 앞서 언급한 거대한 규모의 비용을 감내하면서까지 중국의 주요 산업 중 하나를 확실히 죽이거나, 적어도 통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 그 지배력을 축소시키는 것을 나라 전체의 중장기 목표로 설정한다면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은 반쪽짜리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국 전 세계 산업의 성장에 있어 반도체는 이제 필수재가 되는 상황이고, 모든 산업의 성장 이면에는 반도체 공급 확대가 꾸준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가정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 하나만 놓고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의 재편을 쉽게 재단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미국이 주로 획책하는 것은 중국 반도체 시장의 말려 죽이기보다는 중국의 차세대 반도체 기술 및 고부가가치 시장에서의 일인자 등극을 막거나, 적어도 그 시점을 한참 뒤로 미루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영향은 어디서 나타나게 될까? 단적인 예로서, 반도체 생산기지로서의 중국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중국이 반도체 생산에 대해 가장 강점을 보이고 있는 부분은 10 nm~100 nm 사이의 다소 성숙한 생산 공정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0 nm 이하의 초미세 공정에서는 여전히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이 유이한 업체로서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시피 하지만, 10 nm 이상의 영역은 이제 많은 업체들이 진입한 영역이기도 하다. SMIC를 비롯한 중국의 파운드리 업체들 입장에서는 이미 집중적인 자본이 오랜 기간 투입되기도 했으려니와, 자국 반도체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생산 캐파를 계속 늘려 나가려 할 것이다. 중국이 특히 성장세나 강세를 보이는 분야는 메모리 반도체 (14% 점유), 28-45 nm 공정 (19% 점유), 45 nm 이상 공정 (23%), 아날로그 반도체 (17%) 영역인데, 이들 영역은 사실 아주 고부가가치는 아니더라도 산업의 수요로 인해 꾸준하게 캐시카우가 되는 영역이다. 특히 중국 내부의 다양한 산업적 수요 (중국은 세계 최대의 IT제품 생산기지이기도 하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정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이미 중국이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이러한 영역에 대한 제제는 굳이 하지 않을 것이며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므로), 중국이 당장 고전하고 있는 10-22 nm 공정 (중국 점유율 3%), 그리고 10 nm 이하 영역 (중국 점유율 0%)에 대한 집중적인 견제를 지속할 것이다. 당연히 이로 인해 14 nm 공정이나, 10 nm 이하 공정에서의 중국발 비용 절감 효과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생산 캐파의 제한으로 인해 이 첨단 공정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반도체 (특히, 인공지능용 반도체, GPU, CPU, AP 등)의 공급은 앞으로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금 더 장기적인 전망을 해 보자. 미국이 10 nm 이하 공정에서의 견제 다음으로 택할 수순은 중국이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양자컴퓨터 기술 개발 및 상용화 부문인데, 사실 미국의 그 동안 취해 온 전통적인 반도체 산업 경쟁력 보존/강화 전략이 '고가의 IP 개발 후 후발 업체들에 대한 이전' 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당연히 양자컴퓨터나 양자통신에 대해서도 같은 전략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미국은 양자컴이나 양자통신 관련, 자국과 충분한 신뢰관계 속에 파트너가 될 수 있는 closed group을 만들어 기술 표준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당연히 이 속에는 중국이 포함되지 않는다. 수십 년 안에 이러한 closed group은 현재의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 같이, 결국 또 하나의 글로벌 양자 ICT 서플라이 체인이 될 것이고, 그 파급효과는 반도체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입장에서는 당장의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에 대한 현안 해결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제2의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의 키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자리 선점을 때에 맞게 해 두어야 하고, 그 지름길은 미국이 취하는 것과 같이 주요 IP에 대한 선점이 되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술 표준그룹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미국이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기술적 프로토타입의 제시 역시 중요하고, 그것이 표준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정책적 뒷받침 역시 매우 중요하다.

중국이 현재 10 nm 이하의 초미세 공정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몇 번 언급했듯 EUV 노광장비 때문이다. 이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하다시피 공급하지만, 그 장비에 들어가는 주요 기술이나 부품은 네덜란드의 비중만 놓고 보면 1/3이 채 안 된다. EUV 역시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의 예외는 아니고, 미국이 27%, 네덜란드가 32%, 그 외 유럽 국가 (주로 영국과 독일)들이 14%, 그리고 일본이 27% 정도의 부품이나 장비/소재를 분배하여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아무리 첨단 기술, 첨단 장비라고 해도, 어느 한 나라가, 한 회사가 독점하여 홀로 기술을 개발하거나 표준을 주도하는 것은 이제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규모가 큰 산업일수록 효율적인 발전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촘촘한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되고 세심하게 조율되는 시스템은 이제 필수적이다. 반도체 산업에서의 글로벌 공급망은 앞으로 더 다변화될 수도 있고 다소간의 플레이어 간 비중 변동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경제적 논리가 앞으로도 계속 지배적이라면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는 그렇게 쉽게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급변하는 환경 속에 공급망의 변동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모든 나라와 회사가 감내해야 하는 요소다. 특히 그것이 미-중 갈등 같이 정치외교적인 원인에 의해 확장되어 추동되는 경우라면 일개 회사나 국가에서 제어할 여지는 별로 없다. 따라서 비용 증가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기본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정하여 준비하고 실행에 옮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최악의 경우 중국이 오판을 거듭한 끝에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도 있고, 그 결과 미-중 간에 국지전 혹은 확대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영원히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제외가 되거나 중국이 홀로 독자적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위험의 분산을 위해 이제 한국 입장에서는 주요 플레이어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다. 차세대 생산기지의 다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특히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시장 (아세안과 인도)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신설하여 대 중국 의존도를 조금씩 낮출 필요가 있다. 미국의 반도체 산업 리쇼어링 정책에 맞춰 미국 현지에 생산 기지를 신설하거나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시장에 대한 선점은 매우 중요한 포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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