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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르디] 정치를 한다는 것은 왜 서핑과도 같은가

by 성공의문 2016. 12. 15.

▲ <거친 파도>, 2008 - 토드


기후변화, 제국주의의 쇠퇴, 끝나지 않는 전쟁, 그리고 내가 사는 도시의 불운한 미식축구팀 등으로 우울해야 할 이 때, 나는 어울리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다름 아닌 ‘희망’이다. 어째서일까? 아마 지난 20년 간 재기를 노려온 불쌍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팀처럼, 나 또한 장기전을 뛸 수 있었을 만큼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정확히 대체 그 무엇이, 이 순간 나를 희망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이는 트럼프가 멕시코인들을 강간범과 마약장수라고 불렀기 때문도, 물고문을 부활시키고 다른 전쟁범죄들을 일으키겠다고 장담했기 때문도, 백인 우월주의 군중들과 그들의 친구인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 인기 웹툰 캐릭터였으나 2016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와 백인우월주의, 신극우주의의 이미지로 떠올랐다-역주)와 노닥거리기 때문도 아니다. 갈라져 있던 댐을 마침내 무너뜨리고 충직한 공화당 지도자들까지 범람하는 대중의 혐오에 휩쓸려 내려가게끔 한 결정적인 한 방울의 물은, 트럼프가 여자의 ‘성기’를 움켜잡았다고 떠벌리는 11년 전 동영상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공포스럽고도 우울한 대통령 선거를 지켜보던 중, 이 동영상을 통해 트럼프의 내면을 들여다 본 사람들의 반응은 내 기분을 반전시켜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와 빌리 부시(미국의 유명 텔레비전 진행자-역주) 간의 이런 대화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희롱은 일하는 여성이라면 각오할 법한 일-트럼프 골프장에서의 기준 타수 정도에 비길 법한-에 속했다. 내가 집에서 구독하던 <뉴요커>지에 실린 위트니 대로우의 만평에서 비서학교의 수업을 다룬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 한 사업가가 책상을 빙빙 돌며 어떤 여성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교사가, “학생 여러분, 안젤라가 어떻게 항상 책상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 간의 거리를 유지하는지 잘 보세요”라고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보라. 이 만화는 여성의 직무에 대한 비하(상사의 성적 접근을 차단하는 기술이 비서의 역량 중 하나로 치부된 점에서), 상사의 성적 희롱에 대한 일상화, 안젤라의 통달한 듯한 미소에서 자신의 가치와 유머감각을 동시에 지키는 여성에 대한 감탄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트럼프 동영상의 음담패설 내용에 대한 반응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트럼프의 성추행에 관한 생각이나 발언이 정상적이지도 않으며, 재미있지도 않다고 전 국민이 명백한 의견일치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여성이 더 이상 우승 트로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이 공감대는 현대에 들어서 간신히 이루게 된 양성평등에 좀 더 다가간 진일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꽤 놀라운 문화적 변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깨달은 후에는, 램프에서 나온 지니를 다시 병 속으로 집어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성을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다수 존재한다. 공화당 하원의장인 폴 라이언이 트럼프 비디오에 관한 입장 표명에서 “여성들은 싸워서 지켜줘야 하고, 존중해줘야 할(Championed and revered) 존재”라고 밝힌 것에서 보더라도, 여성은 ‘챔피언’에 의해 구출돼야 할 무기력한 존재, 또는 빅토리아 시대의 석고상같은 비인격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힐러리가 “구조적 인종차별”을 말하다


도널드 트럼프와의 첫 토론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구조적 인종차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주요 대선후보가 미국의 인종제도를 그런 식으로 묘사한 적은 없다. 실제로, 흑인인권운동 시대 이후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당면했던 가장 큰 정치적 문제는, 법적 차별이 없어진 이후에도 유색인종, 특히 흑인들이 빈곤인구와 무주택인구, 그리고 수감인구의 상당 부분에 속해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제도적, 또는 ‘구조적 인종차별’이라는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토론회에서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만약 젊은 흑인남성이 젊은 백인남성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젊은 흑인남성이 백인남성에 비해 체포 또는 기소되거나, 유죄판결을 받거나, 감옥에 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형사사법 제도에 존재하는 구조적 인종 차별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힐러리의 이야기는 물론 옳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힐러리가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게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레이스포워드(RaceForward) 등 NGO의 보고서와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같은 젊은 인권운동가들의 조직력, 흑인인권단체 NAACP의 노스캐롤라이나 지부의 윌리엄 바버 2세 목사와 같은 연륜 있는 지도자들의 양심의 소리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유력 정치인들이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는 상전벽해 같은 변화를 목격하는 중이다. 물론 힐러리의 수사법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흑인들의 삶을 제한하는 깊은 구조적 모순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이제는 대화석상에 올려진 것이다.


흑인사회는 오랫동안 흑인들, 특히 젊은 흑인들이 경찰에 의한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점을 인식해 왔다. 그래서 경제계층을 막론하고 다수의 흑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그 위험으로부터 최대한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트레이븐 마틴(2012년 플로리다에서 자율방범대원의 총에 맞아 숨진 17세 흑인 소년. 이 사건은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을 촉발했다-역주)의 죽음 후 2년 간 블랙 라이브즈 매터는 무장하지 않은 흑인남녀가 경찰이나 공권력의 손에 의해 사망하는 반복적인 사건들에 처음으로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제, 주요언론들도 그러한 사망 사건들을 보도할 필요 없는 우연의 일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사건들이 일정한 반복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고 인식되면서 대선후보들까지도 이 문제에 대응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명백한 승리다. 물론, 진정한 승리는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못하는 때 오는 것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러한 현실을 여론이 인정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마찬가지로, 많은 좌익세력은 이 나라의 임금수준이 1970년대 중반부터 정체돼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최저임금(한때 “가장”들을 위해 만들어진)이 생활보조금으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수입과 부의 불평등이 19세기 길드 시대 이후로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나 오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 뉴욕 월가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훼손에 반발하는 사회운동-역주)은 99%의 국민이 정치적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나오면서 힘을 받은 아워 월마트(Our Walmart: 시급 인상과 근로 시간 안정 등을 요구하기 위해 만든 월마트 근로자들의 단체-역주)나 파이트포15(Fight for $15: 맥도널드 등의 패스트푸드체인점 종업원들로 구성된 단체로 시급 15달러와 노조설립권 등을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을 함-역주) 같은 조직들이 그에 관한 토론을 단상 위로 가져왔다.


아주 오랜만에 “노동자 계층”이라는 말이 다시 공적토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CNN은 다시금 ‘백인남성 노동자들이 1996년보다 더 적은 돈을 벌고 있다’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다룬다. 몇 년 전만 해도 주요 언론에 비친 우리나라는 획일적인 “중산층” 인구와 소수의 부자이거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트럼프와 클린턴 진영 모두 노동자 계층의 고통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그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 또한 모종의 변화이자 승리다. 


잠깐! 우리가 뭔가를 얻어냈다고?


오랫동안 미국 좌익의 어딘가에 자리한 나의 정치적 세계에서 승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미국의 표준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슈퍼맨이 뭘 믿었던 간에 미국의 방식이 진실이나 정의와 얼마나 동떨어져있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태어나서부터 미국인들은 대개 미국 예외주의에 관한 영웅적 신화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많은 이들이 이 강한 조류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힘들게 얻어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미국이 세계 자유의 수호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상습적으로 독재자와 고문기술자들을 지원해왔다는 것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미국이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같은 독재자들을 지지하려는 노력을 반대했고, 미 정부가 그들의 실체를 발견하고 “충격 받았다!”고 외쳤을 때 우리는 이를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미국 예외주의 묘사의 허구들을 알아차리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을 들인 나머지, 우리는 우리 정부가 뭔가 옳은 일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0개 국가가 서명한 파리 기후변화협약이 11월 4일 발효됐다. 이는 10월 5일, 55개 이상의 서명국의 비준과 지구 온실 가스의 55%에 대한 책임이 있는 국가들의 비준이라는 두 가지 핵심 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가 상징하는 멸종단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이 협약이 오바마 정부 없이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다른 어떤 협상안처럼 이 합의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구가 인류(많은 다른 생물 종 중에서도)를 위해 지난 수만 년 간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살 만한 곳으로 남아있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을 오랜만에 보여줬다. 이 승리는 전 세계 모든 환경운동가들이 일궈낸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당당히 차지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전 세계무대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위상을, 그리고 국내에서의 지도권력층의 역할과 위상을 이해하려고 전력투구한 나머지, 우리나라가 실제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라고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거대한 미국 국가권력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밝혀진다면, 어렵게 획득한 세계관이 무너질 거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옳은 일을 하도록 우리가 요구할 수 있고, 우리 편이 때로는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선택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늘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지만, 승리를 기대하기에는 우리의 적수가 너무 강한 존재라고 믿는 쪽을 말이다.


국내적으로도 우리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신의 내적 인종편견을 인지하려고 노력해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습을 계속 바꾸며 끈질기게 이어진 구조적 인종차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미국역사에 대해 배운 것들을 재검토하고자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승리를 인지하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8천만 국민 앞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내적 편견은 경찰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승리이고, 우리는 그 승리를 받아들이고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량감금에 대한 대응책으로 연방 마약범죄자들의 형량을 감한 것 역시, 겸손하게 말해도 승리라 할 수 있다. 미셸 알렉산더의 획기적인 저서 <새로운 짐 크로우(The New Jim Crow: 수감자 중 흑인남성의 비중이 높은 것에 대해, 1965년 철폐된 공공장소에서의 흑백분리법인 짐 크로우법의 부활이라고 분석한 책-역주)>의 내용이 5년의 세월이 지나 대중에게 전달된 것이다.


“최고의 자유국가, 미국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수감자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는 수감 반대주의자들의 주장이 마침내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일부 커뮤니티와 소수 인권주의자들에게만 보였던 잔혹행위가 마침내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감옥이 국내외적인 수치이며 이에 대한 조치가 시급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는, 비록 조건부일지라도 자축할 가치가 충분한, 또 하나의 승리다. 


희망을 가장 크게 느끼는 이는 누구인가


1980년대 나는 니카라과의 전투지대에서 6개월을 보냈다. 레이건 정부가 산디니스타 정부에 반대하는 콘트라 군대를 지지하던 상황이었다. 니카라과 사회의 여러 지지층과 함께 산디니스타 정부가 미국이 지지하는 독재자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자를 축출한 직후였다. 그곳에서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두 개의 시공간을 동시에 누비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라파’라는 마을의 한 니카라과 여성은 오전에는 아이들을 공습에서 피신시킬 공동 은신처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그 여성은 오후에 미국이 후원하는 콘트라 군의 공습이나 납치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모자 독재정권 시절 미국 목재회사들이 벌거숭이로 만든 산에 다 자라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묘목들을 심는다. 한 쪽 시선은 현재에, 다른 한 쪽 시선을 ‘더 나은 미래’에 맞춰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던 니카라과인들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항상 파티를 열었다. 하루는 ‘에스텔리’라는 도시에서 만난 미국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살던 곳 근처 작은 마을에서 콘트라군의 공격으로 7명의 어린이가 죽었다. 그는 이런 비극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너무도 침울했다. 그날 밤, 그가 머물던 집의 가족들이 함께 축제에 가자고 했다. 그는 너무 우울해서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가족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우울함은 사치예요. 당신은 곧 당신의 집에 돌아갈 수 있잖아요. 우리는 계속 이 전쟁 속에 살아야만 해요. 그래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죠. 그래서 우리는 춤을 춰야만 해요. 자, 옷 갈아입고 함께 파티에 가요.”


미국에서 미래에 대해 가장 낙관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최근 갤럽 헬스웨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가난한 흑인들이라고 한다. 억만장자들이 아니고 말이다. 그 이유에 관한, 브루킹즈 보고서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흑인들, 특히 최빈곤층의 미국흑인들의 낙관주의는 우리에게 좀 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재선 임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현재의 역사적 시점에서, 아메리칸 드림에의 신념을 아직도 잃지 않는 이들이 흑인이라는 점은 괄목할 만하다.” 


<아틀란틱>지에서 주관한 2015년 여론조사에서도, 흑인 인구와 남미계 인구가 백인 인구에 비해 자신의 인생이나 전반적인 국가의 미래에 관해, 훨씬 낙관하고 있다고 나타났다. 그들이 멍청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한편, 그들은 ‘춤을 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왜 서핑과도 같은가


여성도 같은 인간이라거나, 미국이 너무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거나, 동성애자들도 원한다면 결혼할 권리가 있다든가…. 과거에는 ‘충격적’이던 말들이, 어떻게 상식으로 자리 잡았을까?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이런 문제들에 헌신해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이 이를 상식으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때때로 나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이 서핑과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부지런히 노를 저어 부서지는 파도를 지나, 앞으로 나아가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러고 나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오는 파도를 확인한다. 때로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파도가 오는 순간, 당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도를 즐겨야 한다. 


그 파도가 도널드 트럼프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글·레베카 고든 Rebecca Gordon

<톰 디스패치>의 고정기고가이자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저서로는 <미국의 뉘렌베르크: 9/11사후 전쟁 범죄로 재판에 서야 할 미국 공직자들>, <고문의 부활: 9/11 사후의 미국의 윤리적 접근>, <니카라과에서 보낸 편지> 등이 있다.  


번역·이유민

연세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