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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나이에 따른 이칭의 유래와 의미

by 성공의문 2012. 1. 10.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유가철학과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의 정치가 · 사상가이다.
 
1세(生) 
농장(弄璋) : 득남(得男), 아들을 낳으면 구슬{璋} 장남감을 주는데서 유래. 아들을 낳은 경사 - 농장지경(弄璋之慶). 
농와(弄瓦) : 득녀(得女), 딸을 낳으면 실패{瓦} 장난감을 주는데서 유래. 딸을 낳은 경사 - 농와지경(弄瓦之慶). 

2세-3세 
제해(提孩) : 제(提)는 손으로 안음, 孩(해)는 어린아이, 유아가 처음 웃을 무렵(2-3세). *해아(孩兒)도 같은 의미로 사용. 

15세 - (논어)
지학(志學) : 공자(孔子)가 15세에 학문(學問)에 뜻을 두었다는 데서 유래. 
육척(六尺) : 주(周)나라의 척도에 1척(尺)은 두 살반{二歲半} 나이의 아이 키를 의미.- 6척은 15세.* cf) 삼척동자(三尺童子). 

16세 
과년(瓜年) : 과(瓜)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八'이 되므로 여자 나이 16세를 나타내고 결혼 정년기를 의미함. 
* 남자는 64세를 나타내면서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뜻함. - 파과(破瓜). 

20세 -  (예기)
약관(弱冠) : 20세를 전후한 남자. 원복(元服;어른 되는 성례 때 쓰던 관)식을 행한데서 유래. 
방년(芳年) : 20세를 전후한 왕성한 나이의 여자. 꽃다운{芳} 나이{年}를 의미. 

30세 -  (논어)
이립(而立) : 공자(孔子)가 30세에 자립(自立)했다는 데서 유래. 

40세 - (논어)
불혹(不惑) : 공자(孔子)가 40세에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 
강사(强仕) : <예기 designtimesp=19502>에 "四十曰强 而仕 - 40세을 강(强)이라 하는데, 이에 벼슬길에 나아감{仕}"에서 유래. * 强(강) 마흔살. 

48세 
상년(桑年) : 상(桑)의 속자(俗字)는 '十'자 세 개 밑에 나무 목(木)을 쓰는데, 이를 파자(破字)하면 '十'자 4개와 '八'자가 되기 때문. 

50세 -  (논어)
지명(知命) : 공자(孔子)가 50세에 천명(天命:인생의 의미)을 알았다는 데서 유래. "知天命"의 준말. 

60세 -  (논어)
이순(耳順) : 공자(孔子)가 60세가 되어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순화시켜 받아들였다는 데서 유래. 

61세 
환갑(還甲),회갑(回甲),환력(還曆) : 태어난 해의 간지(干支)가 되돌아 간다는 의미. 곧 60년이 지나 다시 본래 자신의 출생년의 간지로 되돌아가는 것. 풍습에 축복(祝福)해 주는 잔치를 벌임. 
화갑(華甲) : 화(華)자를 파자(破字)하면 십(十)자 여섯 번과 일(一)자가 되어 61세라는 의미. 

62세 
진갑(進甲) : 우리나라에서 환갑 다음해의 생일날. 새로운 갑자(甲子)로 나아간다{進}는 의미. 

70세 -  (논어)
종심(從心) : 공자(孔子)가 70세에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 從心所欲 不踰矩에서 준말. 
고희(古稀) :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의 구절 "人生七十古來稀(사람이 태어나 70세가 되기는 예로부터 드물었다)"에서 유래. 

71세 
망팔(望八) : 팔십살을 바라 본다는 의미. 70세를 넘어 71세가 되면 이제 80세까지 바라는 데서 유래. 

77세 
희수(喜壽) : 희(喜)자를 초서(草書)로 쓸 때 "七十七"처럼 쓰는 데서 유래. 일종의 파자(破字)의 의미. 

80세 
산수(傘壽) : 산(傘)자의 약자(略字)가 팔(八)을 위에 쓰고 십(十)을 밑에 쓰는 것에서 유래. 

81세 
반수(半壽) : 반(半)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一"이 되는 데서 유래. 
망구(望九) : 구십살을 바라 본다는 의미. 81세에서 90세까지를 기원하는 장수(長壽)의 의미를 내포함. 
* '할망구'로의 변천 

88세 
미수(米壽) : 미(米)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되는 데서 유래. 
혹은 농부가 모를 심어 추수를 할 때까지 88번의 손질이 필요하다는 데서 유래. 

90세 
졸수(卒壽) : 졸(卒)의 속자(俗字)가 아홉 구(九)자 밑에 열 십(十)자로 사용하는 데서 유래. 
동리(凍梨) : 언(凍) 배(梨)의 뜻. 90세가 되면 얼굴에 반점이 생겨 언 배 껍질 같다는 데서 유래. 

91세 
망백(望百) : 백살을 바라 본다는 의미. 역시 장수(長壽)의 축복,기원.

99세 
백수(白壽) :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1000 백(白)자가 되므로 99세를 나타냄. 파자(破字)의 뜻.

100세 -  (장자)
상수(上壽) : 사람의 수명을 상중하로 나누어 볼 때 최상의 수명이라는 뜻. 좌전에는 120살을 상수로 봄. 백세상수(百世上壽). 
  
약관(弱冠) : 약년(弱年/若年)·약령(弱齡)이라고도 한다.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 나오는 말로, 사람이 태어나서 10년이면 유(幼)라고 하여 이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20세를 약(弱)이라 하며 비로소 갓을 쓴다. 30세를 장(壯)이라 하고 집(家:妻)을 가진다. 40세를 일컬어 강(强)이라 하며 벼슬을 하는 나이다. 50세를 애(艾)라 하며 관정(官政)을 맡는다. 60세를 기(耆)라 하고 남을 지시하고 부린다. 70세를 노(老)라 하는데 이쯤 되면 자식 또는 후진에게 전한다. 80·90세를 모(耄)라고 하며, 모는 도(悼:7세를 가리키는 말)와 마찬가지로 죄가 있어도 형벌을 더하지 않는다. 100세가 되면 기(期)라 하고 기린다.
 
방년(芳年) : 스무 살을 전후한 여성의 나이. 방령(芳齡)·묘년(妙年)·묘령(妙齡)과 같은 뜻이다. '방(芳)은 '꽃답다'는 뜻이고, '년(年)·령(齡)'은 모두 '나이'를 뜻한다. 따라서 방년은 꽃다운 나이, 곧 스무 살을 전후한 여성의 나이를 가리킨다. 남성의 경우 갓[冠]을 쓰는 나이[弱]인 약관(弱冠)을 20세라고 하는데(《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 넓은 의미에서 서로 대응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방년은 여성에게만, 약관은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과 같이 성별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서로 어울려 써도 틀리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국어사전에는 '여성의 스물 안팎의 나이', '스물을 전후한 여성의 꽃다운 나이', '이십 세 전후의 한창 젊은 꽃다운 나이' 등으로 올라 있어 반드시 20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곧 스물을 전후한 무렵의 젊은 나이를 통칭하는 용어로, '방년 18세', '방년의 꽃다운 처녀'와 같은 형태로 쓰인다.
  
 
고희(古稀)
1) 음훈 : 古 옛 고, 稀 드물 희
2) 관련사항 : ① [동의어] 종심(從心) ② [출전] 杜甫의 詩 〈曲江〉
3) 의미 : 사람이 일흔을 산 것은 예로부터 드물다. 일흔 살
4) 유래 : 나이 일흔이 된 것을 古稀라고 쓰는데, '인생 70은 예로부터 드물다'란 杜甫(두보) 의 <人生七十古來稀>라는詩句(시구)에서 유래하여 일흔 살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즉 사람이 일흔을 산 것은 예로부터 드물었으니 일흔을 산 것은 예부터 드문 일을 한 것이 되는 셈이다. 


두보의 이 구절이 나오는 <곡강이수>라는 제목의 둘 째 시를 소개하면 이렇다.
 
조정 일이 끝나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잡혀/곡강 가에서 술 마시고는 취해서 돌아오네/ 술 외상은 어디에나 으레 있게 마련 아닌가/인생 칠십 살기 어려 우니 술이나 마시세(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꽃 사이에서 꿀을 빠 는 나비는 자욱이 날아들고/물을 스치는 잠자리떼는 한가로이 날고 있네/ 이 내 심사 풍광에 실어 함께 흘러 가니/잠시라도 서로 즐겨 어긋나지 말자 꾸나.

 
이시는 두보가 마흔 일곱 살 때 지은 것이다. 李白(이백)과 더불어 唐詩壇(당시단)의 쌍벽을 이룬 두보는 나이 47세가 되어서야 左拾遺(좌습유)라는 벼슬자리에 앉아 보았다. 
그러나 어지러운 政局(정국)과 부패한 관료사회에 실망한 두보는 관직생활 보다 詩作(시작)에 더 마음을 두었으며 매일같이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술이나 마시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상대로 시간을 보냈다. 

곡강은 수도장안 중심지에 있는 유명한 연못 이름으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며, 특히 봄이면 꽃을 찾 는 사람들로 붐비었다고 한다. 曲江(곡강)가에서 1년간 머물며 몇 편의 시를 남겼는데 曲江이란 七言律詩(칠언율시) 두 편도 그 때 지은 것이다. 

두번째 작품에 '古稀'가 나온다. 
시의 뜻은, 요즘은 조정에서 돌아오면 매일 곡강가로 가서 옷을 잡히고 마냥 술이 취해 돌아오곤 한다. 술꾼이 술 빚을 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 로 내가 가는 술집마다 외상값이 밀려 있다. 하지만 내가 살면 몇 해나 더 살겠느냐, 예부터 말하기를 사람은 七十을 살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더냐 꽃밭사이를 깊숙이 누비며 지나가는 호랑나비도 제철을 만난 듯 즐겁게 보이고, 날개를 물에 적시며, 날아 다니는 잠자리도 제사상을 만난 듯 기운 차 보이기만 한다. 나는 이 약동하는 대자연의 풍광과 소리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우리 함께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면서 잠시나마 서로 위로하며 즐겨보자 꾸나 하고 말이다.

인생칠십고래희, 란 말은 항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을 그대로 두보가 시에 옮긴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말은 두보의 시로 인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古稀라는 말이 나왔지만 작자 자신은 고희와는 거리가 먼 59세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論語(논어) 爲政篇(위정편)에서 나온 말로 孔子(공자)가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학문수양의 발전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 을 두었고(志于學·지우학) 서른에 뜻을 확고하게 세웠으며(而立·이립) 마흔에 무엇에도 미혹되지 않았고 (不惑·불혹) 쉰에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고(知 天命·지천명) 예순에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귀에 걸림이 없었으며(耳順·이순) 일흔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좇아 했지만 법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從心) 

이때부터 志學은 15세를, 而立은 30세를, 不惑은 40세를, 知命은 50세를, 耳順은 60 세를, 從心은 70세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 밖에 일흔 일곱을 喜壽(喜字의 草 書가 七七), 81세를 望九(망구), 여든 여덟을 米壽(米를 破字 하면 八八), 아흔 아 홉을 白壽(百에서 한 획이 없음)라고 한다.


3세 해제 (孩提) - 어린아이 

15세 지학 (志學) -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20세 약관 (弱冠) -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30세 이립 (而立) - 서른살 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40세 불혹 (不惑) - 공자는 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는 데서 나온 말 

50세 지천명 (知天命) -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60세 이순 (耳順) - 또는 육순 (六順)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 

61세 환갑 (還甲) - 회갑 (回甲) 예순하나가 되는 해의 생일 

62세 진갑 (進甲) - 회갑 이듬해, 즉 62세가 되는 해의 생일 

70세 고희 (古稀) - 두보의 곡강시에서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 (人生七十古來稀)에서 유래된 말.)

71세 망팔(望八) - 팔십세를 바라본다는 뜻 

77세 희수 (喜壽) - 오래살아 기쁘다는 뜻. 喜자의 약자가 七자로 이루어져 77을 뜻함 

80세 산수 (傘壽) - 傘자가 八十을 의미함 

88세 미수 (米壽) - 여든 여덟살의 생일. 米자는 八十八의 합성어임 

99세 백수 (白壽) - 百(100)에서 一을 빼면 99, 즉 白자가 됨 

100세 기이지수 - (期臣頁之壽) 사람의 수명은 100년을 1期로 하므로 기라하고, 이(臣頁)는 양(養)과 같은 뜻으로 곧 몸이 늙어 기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뜻.
 
 
공자의 일생에서 따온 말이 많습니다.
15세를 지학(志學) - 공자가 이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죠.
20세를 약관(弱官) - 아직 관리가 되기에는 어린 나이라는 뜻이랍니다.
40세를 불혹(不惑) - 이제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 다는 것이죠
50세를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는 뜻입다.
60세를 이순(耳順) - 귀가 순해진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든 유순하게 들어줄 수 있는 나이라는 말이죠
70세를 고희(故喜) - 늙어서 기쁜, 이제까지 살았으니 기쁘지 않겠냐는 뜻이죠.
88세를 미수(米壽) - 쌀나이가 아니라. 살미자가 팔八 십十 팔八을 합쳐놓은 모양이라서.
99세를 백수(白壽) - 흰 나이가 아니라 백百자에서 한일一 자를 빼면 白자가 되서 쓰는 말이죠


15세 지학(志學) : 배움, 학문에 뜻을 두다
지금 15살이면 아직 어린 나이다. 그러나 과거 15살이면 대개 결혼을 하고 관례를 했다. 15살이 어린 나이인 것은 어린아이들이 보호받는 존재일 뿐인 현대의 이야기다. 근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로서가 아니라 작은 성인으로서 대우받았다. 따라서 15살이라는 나이는 공자 시대만 하더라도 한 사람의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그런 나이였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뜻을 두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는 그리 다양한 학문이 있던 시대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 그것도 사족士族에 속한 자가 입신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은 달리 없었다. 고래의 경전이나 역사를 공부하여 글을 배우고, 나라를 경영할 경륜을 쌓는 것과 전장에 나아가 적을 무찌르고 공을 세울 수 있는 무예와 병법을 익히는 것 정도다. 선택이 좁은 만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보다 일찍 정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어느정도 시기가 지나 다른 공부를 하더라도 그리 무리가 없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 시기가 15살이라는 것은 전혀 빠르지 않다.
 
다만 당시와 지금이 전혀 다른 시대인 만큼 해석에 있어 어느 정도 변화를 줄 필요는 있다. 실제 지학의 나이라는 15살은 현대로 따지면 20살 정도에 해당하니까.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짊어지는 책임이나, 사회적인 기대, 그리고 접하게 되는 세계에 있어 지금의 20살은 그때의 15살, 아니 그보다도 더 어리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지학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20살로 바뀌어야 한다. 아니 갈수록 배워야 하는 분야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많아지는 보다 복잡해지는 앞으로에 있어 그 나이는 더 높아져야 한다.
 
 
30세 이립(而立) : 드디어 서다, 곧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다 또는 학문적 성과를 거두다.
조선시대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게 되는 나이는 대략 30대 정도였다.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어 30살이면 15년 이상 학문에 매진해온 것이다. 아직 경전의 수도 많지 않고, 축적된 역사 또한 그리 풍부하지 않던 시대에 15년이면 한 사람의 전문가가 되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은 30대 정도에 그 이름을 얻는다.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고 깊은 지식과 이해를 추구할 것이라면 모를까, 30대 정도라면 이미 한 사람의 권위로서 자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나이인 것이다. 하물며 지금보다 배워야 할 것이 적었던 공자 시대에서야.
 
따라서 현대에 이르러 이 조항은 약간의 수정이거쳐져야 한다. 뜻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는다는 것으로. 20대에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고 30대에 이르러 자신이 선택한 한 분야에서 하나의 권위로서 그 이름을 인정받게 된다는 뜻으로 지금에 있어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때에 비하면 10년 정도가 단축되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과거에 비해 개인에게 요구되는 일들이 보다 전문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40세 불혹(不惑) : 의심이 없어지다. 곧 세상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다.
의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세상만물의 이치라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보고 느끼는 개인의 주관과 선택. 그 중심에 선 자기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 가치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둘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이 나이에 이르면 주위의 선동이나 조언에 이끌리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자기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자칫 그것이 보수적이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선택일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도 현대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40살 쯤 되면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책임있는 자리에 있게 된다. 자기 한 몸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그 속해있는 집단의 여러 사람들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40살이라는 나이에 함부로 흔들리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주위를 위해서나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40살 이상의 중년이 되어서는 자신은 물론 주위를 위해서라도 더욱 엄히 자신을 단속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미혹되지 않는 불혹이다.
 
 
50세 지천명(知天命) : 천명을 알다.
천명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공자 시대에는 아직 성리학 이후 유가의 중요한 화두가 된 이理의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천하의 이치라 하는 것은 오로지 기氣 하나였다. 기라고 하는 것은 물질의 이치. 곧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치다.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치가 아니라, 그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뒤쫓는 이치다. 즉 공자의 천명이라 하는 것은 기의 천명,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천명이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금에 이르러 천명이라는 것에 이理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 주희에 의해 상제라는 구체적 인격이 이理라고 하는 인격이 배제된 몰인격의 절대적 주제자로 발전하면서, 천명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로서만이 아닌, 세상을 그리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원칙으로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근대에 이르러 천주교가 도래하면서 야훼를 중심에 둔 일신교적 가치가 더해지면서 천명은 그때에 비해 더욱 복잡하고 고도화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도 좋다. 이와 기가 조화된 천명이라는 것도 한 번 추구해볼만 하다. 그러나 이理라고 하는 것은 결국 종교의 영역. 철학의 영역이다. 그것은 생활에서 느낄 수는 있으되 깨달을 수는 없는 인류의 영원한 지향이다. 평생 종교와 철학에 뜻을 둔 사람도 이르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영원한 미제다. 한 개인으로서 평생을 걸기에는 너무도 높고 너무도 넓고 너무도 깊다. 그것은 마음의 한 켠에나 스스로를 다짐하는 숙제로서 놓아두면 된다.
 
따라서 현실에 있어서의 지천명에서의 천명이란 공자시대에 공자가 말했던 그 천명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의 원칙을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을. 그리 되어야 함을. 50이라는 나이가 되어서 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 나이에 이르러, 반드시 그러한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그러한 당위로서. 그것이 50에 이르러 알아야 할 천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천명이라 해서 꼭 올바른 천명을 쫓을 필요는 없다. 반드시 모두가 인정하는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천명을 스스로 찾아내려 고집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자신이 속한 사회,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만의 이해를 다져두면 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이 선 위치에서, 자신이 짊어진 책임에서, 자신의 역할에 맞는 자신만의 이해를 가지고 스스로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하면 된다. 그것이 현대에 있어서의 지천명의 의미다.
  
 
60세 이순(耳順) : 귀가 순해진다. 곧 어떤 말을 들어도 성내지 않는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 자신과 관련된 누군가에 대한 욕심,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무언가에 대한 욕심. 그 욕심이 자신과 다른 이해에 화를 내게 하고, 자신과 다른 가치에 미움을 갖게 만든다. 채워지지 못한 욕심은 공포가 되어 더욱 큰 또다른 분노와 증오로 이어진다. 공포와 증오와 분노는 곧 기쁨과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 힘. 사람이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60살에 이르면 그러한 것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공자 시대 이미 평균수명을 훌쩍 넘겨버린 나이에 더이상 새로운 욕심을 갖는 것은 부질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60살은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많은 것을 포기해왔던 나이. 이제는 얼마 안있어 자신의 삶에 대한 욕심마저 버려야 하는 때다. 그러한 때에 새삼 다른 욕심을 갖는 것은 그 스스로도 그렇고 주위에서 보기에도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노욕이라 하지 않는가? 다 늙어서 욕심부린다고. 노망이라고.
 
60살이 되어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이미 욕심이 사라져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어 화낼 일도 없다는, 이제까지의 욕심을 위해 억척스럽고 힘들게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뜻이다. 그것은 노자가 말한 도와도 관계있다. 선도 악도 아닌,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닌, 이제는 더이상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서의 도. 60에 이르러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그러한 60살을 보기란 쉽지 않다. 수명이 늘어난 때문인지 60살이 넘어서도 노욕을 부리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면서, 영화를 보더라도 고작 몇 년에 불과할 것이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여전히 욕심을,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노귀들. 차라리 살아있는 시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들이다. 이순이라는 말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말이다. 더이상 부질없는 욕심으로 집착하지 말라는.
 
 
70세 종심(從心) : 마음에 따르다. 곧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진정한 바람을 가리는 것은 욕심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바람이 아닌,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한 욕심. 유가에서 그러지 않는가? 재화라는 것은 신외지물이라고. 결국 그 욕심이라는 것 또한 자기 몸 밖의 것들, 그 신외지물에 대한 것이다. 권력이라 하는 것도, 명예라 하는 것도, 성취감이라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밖의 것에서 구하는 신외지물에 대한 욕심일 뿐이다. 사람은 그러한 욕심에 가려져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이 바라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한다. 욕심을 버려 그 마음을 바로 보자는 것이 결국은 종교인 것이고.
 
60살이 넘어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면서 욕심으로부터 또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의 진정한 바람을 보게 된다. 그것은 곧 회한이다.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루어야 했던 것들에 대한, 끝내 버리고 와야 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미련에 대한 회한이다. 욕심 때문에 도리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 그리고 그때야 사람은 솔직해질 수 있게 된다. 더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이를 먹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던가? 그것은 나쁜 뜻에서의 말이기도 하면서 또한 좋은 의미에서의 말이기도 하다. 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충실한 존재. 자기 밖의 무언가에 대해서보다는 자기 자신의 바람에 더욱 솔직한 존재다. 그것은 철없음이면서 또한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에서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동경하는 것이고. 70에 이르러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과 경륜이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만남을 뜻한다. 스스로에 솔직하여도 그 살아온 길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경지.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따르는 종심이다.
 
물론 이순조차 찾아보기 힘든 지금 종심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자기 마음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몸 밖의 것을 쫓아 탐하고 집착하는 이들이 많은 때문이다. 수명이 늘어난 탓일까? 앞으로도 한참을 더 살 것이라 믿은 것일까? 나이를 잊은 주착과도 같은 노욕은 주위를 눈쌀찌푸리게 하고, 스스로를 욕되게 만든다. 얼마 안남은 삶의 끝자락을 경멸과 무시와 조롱 속에 보내는 것이다. 그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기에.
 
이순이든 종심이든 결국 뜻하는 바는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쌓아온 모든 욕심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보다 솔직한 마음을 해방시키고 그 마음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가르치는 깨달음의 경지. 도가에서 말하는 진인이며, 불가에서 말하는 부처이며,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이다. 공자가 말한 종심이라는 것은 그러한 뜻인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수명이 더욱 늘어난 현대이기에 더더욱.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주장한 사회주의와 지금 유럽 여러나라에서 실현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와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크게 다르다. 자본론에서의 사회주의와 현대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시간의 차이가, 그로 인한 경험과 사유의 차이가, 같은 사회주의에서 출발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그토록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그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유교만 하더라도 그렇다. 공자시대의 유교와 맹자 시대의 유교는 또 다르다. 한나라 때의 유교가 다르고, 송나라 때의 유교가 다르고 명나라, 청나라 때의 유교가 다르다. 같은 성리학도 송나라의 성리학과 조선의 성리학은 근본적인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필요와 이해와 수용과 적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상을, 이념을, 철학을, 살아있다 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서 살아 변화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송나라의 주희가 굳이 공자시대의 유교에 얽매이지 않았듯 지금이라고 굳이 공자나 주희 시대의 유교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조선의 이황이 송나라의 주희에 집착하지 않았듯, 지금 우리가 굳이 그 때의 유교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때의, 지금에는 지금의, 가치와 필요에 따라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에 맞는 지금에 필요한 가치와 이해를 발견하여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를 위한 현대의 유교일 것이다. 머나먼 옛날의 해석을 고집하는 그런 유교가 아니라.
 
 
덧) 나는 유교전문가가 아니다. 그리고 유교에 그리 우호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많은 시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해왔던 가치를 한 마디로 매도하고 부정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이 유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근대서구의 사상과 철학에 근거한 일방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수 천 년간 동아시아의 수많은 왕조와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해왔던 이념이라면 그렇게 한 번에 매도해버릴 수 없는 그만한 의의와 가치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실제 내가 공부한 결과 그러하기도 했고.
 
위의 해석은 그러한 나의 반발과 나의 바람에 의한 내 나름의 나를 위한 유교 이해의 결과이다. 유교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날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게 있어 내가 느끼고 있고 내가 필요로 하고 있는 유교는 바로 이러한 유교다. 그 유교를 보여주고 싶었다. 과거의 유교가 아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고 느끼고 있는 지금의 유교를. 솔직히 쓰고 나니 쪽팔리긴 한다. 유학자도 아닌 주제에 무슨 뻘짓거린가 하고. 그래도 일단 이것이 지금 나의 이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