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드 (quad)는2007년, 미국, 일본, 인도, 호주의 4개국 정상 미팅이 정례화되면서 시작되어, 2020년 정식으로 인도-태평양 지역 국제기구로 출범한 미니 국제기구다.
현재는 4개국만 가입되어 있지만, 미국은 이 기구를 앞으로 더 큰 기구로 확장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구는 20세기에 만들어졌던 다른 국제기구들과는 달리, 안보는 물론 경제 협력, 특히 기술 협력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첨단산업 분야에서의 기술 협력과 제조업 기반 형성에 대한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는 이들 국가들이 글로벌 반도체 분야의 협력을 위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주요 의제로 삼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며칠 전에 이 쿼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다. (https://www.facebook.com/sjoonkwon/posts/6040423502695718) 그 글에서도 언급했듯,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이면에는 기술 주도 경쟁이 있고, 특히 이는 표준 제정 경쟁과 연결됨을 이야기했다.
사실 쿼드 멤버를 살펴보면 이런 경쟁이 가능한 국가는 미국밖에 없다.
물론 여전히 일본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장비와 소재 분야 키플레이어로서 존재감이 있지만, 생산 능력은 점차 줄고 있고, 반도체 시장 자체도 성장률이 많이 둔화된 상태다. 인도와 호주 역시 글로벌 스케일에서 내세울 수 있는 회사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이 큰 것도 아니지만, 이들 국가들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의 경우, 잘 알려져 있다시피 IT산업 인력 배출 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연간 수백만명의 인력이 배출되며 많은 이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가서 각국의 IT산업 중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미국의 많은 IT기업에서 C레벨 임원 중에 인도계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사실 인도는 반도체 시장 자체가 크지는 않으나, 성장률만큼은 세계에서 중국 다음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는 정부 차원에서 이미 자국의 제조업 기반을 전통 산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을 천명했고, 실제로 적극적으로 이를 드라이브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산업이 바로 반도체 제조업이다.
글로벌 회사들이 인도에 R&D 센터를 세우고 제조업 기반을 닦는 것에 대해 인도는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고, 그것과 별개로 인도에서는 점점 팹리스 스타트업들의 창업이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산업을 위한 AI칩 설계 팹리스 업체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호주의 경우, 인력 배출이나 소부장 관련 회사들의 생태계는 빈약한 수준이다. 반도체 시장 규모 자체도 크지 않기 때문에 언뜻 생각하면 호주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추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현재의 반도체 산업 기준으로만 보면 호주가 실질적인 역할을 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차세대 반도체 산업 중 하나가 비실리콘 계열 반도체 소재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실리콘이 아닌 화합물 반도체 (chemical compound semiconductor)가 앞으로는 더 중요해지는데, 이는 실리콘의 에너지 띠간격 (energy bandgap) 조절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 화합물 반도체는 조성 변화를 통해 이의 정밀한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화합물 반도체로서 GaAs, InGaAs, InGaN, GaN 등이 있는데, 이들 화합물 반도체의 특징이자 한계는 실리콘만큼 원료 확보가 크지 않다는 것에 있다. 갈륨이나 인듐 같은 원소들은 희토류 금속에 속하며, 실리콘을 모래에서 채취하는 것처럼 쉽게 채취하기는 불가능하다. 보크사이트나 철광, 아연광 같은 원광을 채광하면서 제련 과정에서 부산물로 가공되어 겨우겨우 소량 확보하는 수준이다.
중국이 한 때 희토류를 가지고 세계 시장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희토류 매장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희토류 생산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중국의 희토류 매장량은 대략 4천만 톤 수준으로 추정되며, 서부 내륙 지역에 대한 탐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앞으로는 이 매장량 규모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희토류 생산은 단순히 매장량만 가지고는 평가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원광에서 이들을 분리하는 과정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뿐더러, 환경에 대한 영향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미국이 자국에서 생산된 희토류를 중국으로 수출하여 가공한 후, 가공된 희토류를 수입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미국의 국내법상 기준 치 이하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공정으로는 희토류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쿼드든 뭐든 자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 특히 차세대 반도체 산업에서의 주도권 보존을 위해서는 원료부터 안정적인 확보가 필요한데, 중국과의 거래를 줄이면서 이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므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그 대안이 바로 호주와 인도다. 호주에는 대략 400만 톤, 인도에는 대략 600만 톤 정도의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국 모두 총 규모 면에서는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나, 호주 역시 내륙 사막 지역에 더 많은 양의 희토류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특히 호주-뉴질랜드 사이의 해저에 매장이 집중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인도 역시 내륙 데칸고원 지대, 남부 해안지대에 망간과 니켈, 몰리브덴의 매장량이 풍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특히 호주의 경우, 갈륨 생산에 필요한 아연광, 보크사이트의 매장량이 풍부한데, 이는 상대적으로 환경을 덜 오염시키면서 가공 비용을 저렴하게 가져갈 수 있는 조건이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쿼드는 앞으로 쿼드 플러스 형식으로 한국, 베트남, 그리고 뉴질랜드를 편입시키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야 왜 편입시키려 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과 뉴질랜드가 의아할 수 있는 부분인데, 베트남의 경우 1억 인구와 높은 경제 성장률, 그리고 점차 제조업 생산지기로서의 조건이 무르익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배출되는 산업인력들의 퀄리티가 훌륭하며, 창업 열기도 뜨거워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베트남에 매장된 희토류 역시 매우 큰데 대략 2천만 톤 정도로 추정되며, 베트남은 특히 대만이나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지 않다는 장점이 있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소재, 인력, 생산기지로서의 잠재력이 매우 높다.
뉴질랜드의 경우 역시 부존자원 공급처이자, 기존 미국의 five eyes의 일원으로서의 포지션이 확실하므로 남태평양 지역의 키플레이어의 보강 격으로 추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국은 이 쿼드를 시작으로 해서 결국 중국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산업기술적으로나,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난감한 것은 한국일 것이다. 여러 채널에서 쿼드 플러스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반도체를 비롯하여 첨단산업에서의 포지션을 볼모로 한국의 선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는 결코 환영할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한국은 안보 관점에서는 미국과 철저한 동맹국이지만, 사실 경제적 실익은 중국으로부터 가장 많이 얻고 있다. 그리고 그 실익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고부가가치산업에서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한 국가에 대한 과도한 수출 의존도는 국가 전략 관점에서는 유리할 것이 없으므로 점차 줄여나가야 하는 것은 정상이다. 한국이 현재 30% 정도의 대 중국 수출 의존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중국에게 수익 창출의 30%를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에게 있어서는 한국을 제어할 수 있는 좋은 지렛대가 되며, 실제로 중국은 이미 여러 번 한한령 등의 조치를 통해 한국을 제어하려는 시도를 보인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의존도를 단칼에 줄이거나 강제로 줄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으로 수출하던 반도체 제품이나 기술의 대체 수입국을 찾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무리 중국 제조 2025를 외치며 반도체 자급률 제고를 꾀하고 있어도, 자급률은 20% 미만 수준에서 답보하고 있다. 나머지 80%는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미국을 제외하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과 대만에 대부분 집중된다.
중국이 한국을 수출 의존도로 좌우할 수 있다면, 사실 한국은 중국의 반도체 공급 부족에서의 키플레이어로서 역으로 중국의 산업 성장률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이유가 현재까지는 없었을 뿐이었고, 그래 봐야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기업들이기 때문에 굳이 정부 차원에서 그러지 않았을 뿐이지만, 어쨌든 한국 입장에서도 레버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결국 미국이 중국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적대시하고 견제하려는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그리고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은 중국으로 쏠렸던 수익 창출 모델의 다변화를 꾀하는 것은 옵션이 아닌 필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왕 미국 주도의 첨단산업 네트워크의 한 축으로 자리를 보전하려면,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의 키플레이어로서의 포지션 보전은 물론, 차세대 반도체 산업에서의 포지션 확보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양자 ICT 표준 closed group에 더 많이 더 큰 비중으로 참여해야 한다. 기업 단위에서도 그렇지만, 대학들과 연구소 역시 미국 기업과의 협업을 더 강화해야 한다. 더 많은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더 많은 기술이전을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철저하게 미국이 그리는 기술 로드맵의 레퍼런스 포인트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호주가 비록 현재 기준으로는 반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크지 않으나, 이들이 당당히 글로벌 공급망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포토닉스 기술에 대한 기초과학 체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인도 역시 희토류 매장량 외에, 차세대 반도체 산업의 핵심이 될 AI칩 설계에 대한 성장률이 눈에 띄게 높으며, 팹리스 스타트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와중에 10년 후에는 글로벌 수준의 팹리스 업체들이 나올 가능성도 높다.
베트남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R&D 센터는 물론 제조기지로 자리 잡을 수 있고 언제든 이 모델을 참고하여 말레이시아나 태국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시장의 다변화와 차세대 반도체 기술에서의 표준 선점이다. 미국이 격년으로 개최하는 양자암호통신 분야 closed group에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고 기초분야의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중국과의 해당 분야 기술 협력 시도는 장기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표준 그룹에서의 자리 박탈로 이어질 수 있고, 최악의 경우, 그 협력 대상자는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 역시 외연을 넓혀, 단순하게 K-반도체를 외칠 것이 아니라, 클러스터의 외연을 베트남, 인도 등으로 확장하려는 복안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성장할 AI 칩 설계 전문 팹리스 스타트업들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이들이 한국의 생태계에 편입될 수 있도록 더 전문적인 DSP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인도나 베트남 현지에 이런 회사들이 더 많이 진출하게 하여 향후 각 나라에서의 반도체 산업 규모가 커지는 모멘텀의 일부를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산업의 종속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적절하지 않지만,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언제든 이들 이머징 플레이어들이 편안하게 클러스터링 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산업의 지도는 언제든 다시 그려질 수 있고, 짧은 주기로 명멸하게 될 회사는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다. 첨단산업에서의 경쟁력 확보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잃은 후 되찾기는 더더욱 어렵다. 멀리 갈 것 없이 일본의 케이스를 생각하면 된다.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당장 내일 어떤 대기업이 무너지고 새로운 인수합병 소식이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장기적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러한 소식을 제일 나중에 듣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전략을 기업 수준에서 밖에 세울 수 없다. 정부가 할 일은 정부 차원에서 미리 기업들의 진출을 위한 밑 작업을 해 두는 것과 정치적 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일일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카드를 미리 다른 나라에게 다 보여줄 필요도 없고, 대신 히든카드에 대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전략을 주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쿼드가 되었든 쿼드 플러스가 되었든, 한국이 대체 불가능한 포지션을 붙잡고 있는 한, 한국이 새우등 터지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정치적 포지션뿐만 아니라, 경제적 포지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뉴스는 분명 시의적절한 의미를 갖는 뉴스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 깔린 미국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국이 그간 첨단 하이테크 분야에서의 지배력을 어떻게 유지해 왔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 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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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Nikkei Asia에는 미국-일본-호주-인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QUAD'가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체인을 개편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QUAD가 단순히 아시아-태평양 지역 정치적 협의체를 넘어, 글로벌 산업의 지도를 개편하는 동맹으로서의 성격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신호탄으로 볼 수도 있는 소식이다.
그러나 이미 전세게 반도체 산업에서 bottleneck이 된 대만과 한국을 제외하고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일본에는 이제 글로벌 레벨에서의 종합 반도체 회사가 없다시피 하고, 인도나 호주 역시 반도체 산업에서는 주요 소비국가일 뿐이며, 그렇다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수입 비중이 크지도 않다.
이러한 조치들이 중국에 대한 견제 차원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정작 글로벌 반도체 수입액 기준 1위 국가는 중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초에 중국 시장, 중국의 반도체 산업 점유율 등을 고려하지 않은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체인 개편 전략은 반쪽짜리 밖에 안 된다.
그와 별개로, 사실 quad라는 탈만 썼지, 원래도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체인은 미국이 주도하던 시스템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전에는 전공정, 후공정, 팹리스, 파운드리 모두 미국이 석권하다시피 했지만, 90-00년대 초반 일본, 그리고 90년대 후반 이후의 대만과 한국으로 산업이 분화되면서 미국 주도의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은 글로벌 스케일로 확장되어 완성되었다. 이미 미국이 주도하던 질서 체계에 이제는 반도체 산업에는 한물간 일본, 딱히 대표적인 반도체 소부장 산업이 없는 호주나 인도가 추가된다고 해서 글로벌 반도체 서플라이 체인에 뭔가가 더 바뀔만한 모멘텀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 오히려 이러한 움직임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미국의 장기적 전략이다. 미국은 이미 트럼프 정부 시절 이전부터 러시아가 아닌 중국을 주적으로 설정, 대중국 전략을 다방면에서 세워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의 산업 규모가 급성장하고, 바야흐로 경제적으로는 G2에 등극한 후, 이제는 미국의 GDP 1위 아성을 위협하는 위치에 올라오자, 미국은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는 물론 경제 산업 면에서도 중국에 대한 견제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견제책 중에 미국이 먼저 꺼낸 카드는 첨단 하이테크 분야에 대한 기술과 무역 제재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산업은 이미 미국이 선행 기술에 대한 IP를 전방위로 펼쳐 놨기 때문에 당분간 중국은 이에 대항하기 어렵다. 한국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런 면을 고려하더라도 대중국 반도체 수출 비중을 지나치게 높게 가져가지 않도록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한 단계 더 생각해 볼 것은 향후 20-30년 안으로 반도체 산업의 전장이 조금씩 양자ICT 분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거의 한결같은 산업 지배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제조업에 대한 원천기술 표준 선점 및 시장 지배력 보존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석유화학, 기계공업, 플랜트산업, 제철산업, 그리고 반도체 산업 같은 전통적인 산업에서 그래왔듯, 미국은 앞으로 차세대 반도체 산업이나 양자 ICT 분야에서도 길목길목마다 반드시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IP를 깔아 두는 것을 국가적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주요 기술에 대한 표준을 선점하려하며, 특히 동맹국들의 참여를 독려하여 거대한 서플라이 체인을 미리 구축해 두려 한다. 따라서 미국이 주도하는 양자 ICT 분야에서도 한국은 기술 표준 council에 꾸준히 참여하여 지분을 높여갈 필요가 있다.
B2C로는 제품을 잘 안 만들 뿐더러, B2B도 어떤 서비스를 하는지 잘 안 알려져있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이 반도체 기업이라고 하면 잘 납득을 못하는 미국의 회사 중에 하나가 바로 IBM다. 이 회사가 딱히 B2C 제품을 많이 만들지 않더라도 여전히 연간 800억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는 주된 이유 (그리고 매출이 꾸준히 성장세인 이유)는 수십 년짜리부터 수개월짜리 까지 다양한 주기의 선행 기술 프로젝트를 수행함으로써 쌓아둔 원천기술 특허들 때문이다. 대부분이 반도체 소자나 공정, 소재, 툴 등에 맞춰져 있어서 곳곳에서 알박기 노릇을 톡톡히 해 주고 있다.
IBM는 미국 정부가 차세대 산업 전략을 세울 때에도 항상 참여하는 대표적인 키플레이어인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이러한 거미줄 같은 선행 기술 IP들 때문이다. 장판파 같은 IP가 쌓이면 결국 그 기술이 그 업계의 표준이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구글 역시 양자컴퓨터 분야에서 당장 돈이 안 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연간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서 선행 기술을 구축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의 개편은 대중국 견제 전술로 따진다면 성동격서 정도의 조치일 것이다. 눈앞의 반도체 수급 뿐만 아니라, 기술 격차를 줄여 가려던 이러한 조치를 만나면 가용한 자원이 한정된 중국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호흡이나 차세대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여력을 줄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전선이 두 개 생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어차피 중국 반도체 산업을 완전히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 적당하게 시차를 두고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고, 가능하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산업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최상의 결과일 것이다.
중국이 주동작위를 내세워 설사 그렇게 안 하려고 항전을 한다고 해도, 미국 입장에서는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신호를 보내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또 미리미리 차세대 첨단테크 분야의 포석을 깔아 둘 수 있으니 전술적으로도 아주 유효한 방법일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이러한 국면에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지는 이제 명약관화하다. 첨단 산업의 기술적 bottleneck이 될 수 있는 요소기술에 대한 후보군 발굴을 더 다양하고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특히 기초연구개발이 집중된 정출연이나 대학에서의 관련 분야 연구가 단순히 논문에 그칠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가 폭발할 수 있는 특허가 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기술사업화 조직을 대폭 강화하고 대학들은 기술지주회사를 더더욱 전문화하여 본격적인 산업화 키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정출연에서의 첨단 기술 연구는 대학보다 훨씬 더 장기적인 호흡으로 해야 하며, 이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원장이 바뀔때마다 끊기는 경향을 타파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은 기술 표준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컨소시엄을 이뤄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예상컨대 미국 주도의 대중국 견제 정책은 중국이 현재의 노선을 고수하는 한,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점점 실질적인 차원으로 좁혀져 올 것이다. 그 첨병은 첨단 기술에 대한 것이 될 것이고, 이는 글로벌 R&D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한국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의 고비를 맞게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속에서도 계속 밀어부쳐야 하는 것은 기술 혁신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며 그것의 무게감을 높이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