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 약진을 한국의 역동성과 강력한 규제의 모순이 빚은 결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방송에서 그냥 헐벗고 구르는 서구와 달게 사회적 검열과 규제가 엄하지만, 그 사이를 뚫고 온갖 선정성을 암시한다. 고나리질이 담금질이 된 셈.
지금 보는 수능은 이름은 같아도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이 생각하는 수능과는 전혀 다르다. 숱한 비판과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압박을 뚫고 진화한 결과다.
얼마전 여권에서 '킬러문항' 방지법을 냈다. 초고난도 문제 출제를 막자는 법이다. 그런데 올해 수능에는 킬러문항이 없다. 불수능이었는데 딱 짚어서 문제 삼을 문항은 없다. 시민단체에선 성명서 쓰기 참 머쓱한 결과다.
대신 전반적으로 다 어렵다. 예전에는 풀다가 욕을 했는데, 이제는 풀면서 눈물이 남. 틀에 박힌 해결법으로는 못푸는 요소가 문제마다 들어있다. 문제집 달달 외우고 요령으로 돌파할 수 없다.
여기서 떠오르는 키워드 '창의력'. 지금 수능은 적어도 그 문제지 위에선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문제가 수십개가 있으니 머리 좋은 친구는 고득점을 받고, 아니면 가망이 없다. 학원 다녀봐야 큰 도움 안된다 소문이 난 LEET랑 비슷한 결과다.
수능을 달달 외우기만 하는 암기, 주입식 교육이라고 비판하는 건 오히려 트렌드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모두가 과잉 경쟁하게 해 사교육비 유발한다'는 비판에는 통합 수능으로 대응했다. 이제 문이과는 없다. 그냥 상하위권이 있을 뿐. 이제 (구)이과는 미적분을 응시하고, (구)문과는 확률과통계를 본다. 대부분의 인기 대학은 모두 미적분을 요구한다.
자연스럽게 확률과 통계 응시자는 갈 대학의 천장이 정해진다. 수학 상위권과 경쟁을 할 필요도 없으나 결과도 고만고만. 역설적으로 이제 공부할 친구만 돈써가며 경쟁하면 되는 셈. '문과'라는 큰 집단을 모두 '하위권'으로 몰아서 만든 결과다.
수학 못하는 문과는 여전히 50~70%다. 이 집단은 통합수능 체제에서는 수학 잘하는 집단과 경쟁이 어렵다. 예전처럼 '문과'가 '이과'랑 겸상하는 체제를 뒤엎어 경쟁에서 일찍 배제해 과잉 경쟁을 줄인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건 '코로나 세대'가 실존할 가능성이 짙어졌다는 점. 지난해 수능 때 입시업체는 일제히 '수능 국어 쉽다'고 발표했다. 결과는 불국어. 당시에 업체들(언론도 함께)이 많은 욕을 먹었는데, 같은 일이 올해도 반복됐다. 평가원 교사단도 평이하다고 봤는데 수험생은 곡소리.
올해 수능 국어가 '어렵다'고 평가한 유일한 업체 관계자가 한 말. "강사가 평이하다고 낼거면 어렵다고 하라했다. 애들 공부 실력이 많이 낮아진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연구는 나왔지만, 원격수업 2년을 거치며 특히 '언어 능력'이 떨어진 것 같다는 의심이다. 영어도 1등급 비율이 너무 낮다.
여하튼 평가원은 또 해냈다. 킬러문항을 지적하니 준킬러를 만들고, 과잉경쟁을 지적하니 문과 구조조정으로 대응하고, '고인물 수능'을 비판하니 선택과목을 만들어서 판을 엎는다. 톰이 아무리 쫓아가도 제리는 구멍을 찾는 법.
무엇보다 시스템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놔서 언론이 기사 쓰기도 힘들고, 시민이 이해하기도 어렵게 해서 접근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부수효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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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개진상 손님 1명 오는 것과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손님 10명이 찾아올 때, 둘 중 뭐가 더 힘들까. 오늘 치른 수능, 특히 국어가 역대급 불수능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민단체의 집요한 지적 끝에 초고난도 킬러문항은 사라졌다. 대신 읽다보면 생각이 꼬이는 준킬러 문항이 여럿 나왔다. 타임라인을 달군 헤겔과 브레튼우즈 지문이 대표적. 또 예전처럼 지문을 한없이 늘려서 '스킬'로 승부 보던 방식에서 논리력으로 갈리는 문제가 많아짐. 즉 리트처럼 타고난 능력이 더 중요해진 시험. 욕먹을 부분은 싹 뺐고, 스킬의 중요성은 낮추면서 지적으로 타고난 학생에게 유리해진 수능. 확실히 출제자는 교묘하고 똑똑한 듯. "타고난 똑똑이에게 유리한 시험"이 더 바람직한지 생각하게 한 시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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