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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한국 반도체 역사와 노태우 전 대통령

by 성공의문 2021. 10. 27.

한국에 처음으로 반도체 산업이 들어 온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한국에서 기틀을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다만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일례로 1982년 삼성반도체의 매출은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3%에 불과한 정도였다. 그러나 1982년부터 현대, 금성 (현 LG) 같은 후발 대기업들이 앞다퉈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정부의 전략적인 반도체산업 지원 전략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9년 3월, 2,900만불의 IBRD (세계개발은행) 차관이 도입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981년 10월, KIET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반도체 생산 시설이 준공되어 가동이 시작되었다. 경북 구미에 위치해 있던 KIET의 반도체 연구센터는 한국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초를 확실히 다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82년 5 마이크로급 실리콘 게이트 nMOS 기반 ROM 개발, 1983년 4 마이크로급 CMOS 공정 기술 개발, 8-비트급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 그리고 반도체 설계에 필수적인 CAD 기술의 도입 등, 반도체 산업의 육성에 필수적인 요소 기술 확보 및 부품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81년, 상공부 (현 산자부)는 ‘반도체공업육성세부계획’을 수립하며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반도체 부품 국산화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세계 반도체 시장 진출을 독려하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에 발맞춰 1982년 1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연구소를 신규 설립하고, 부천 공장을 벗어나 1983년 경기도 기흥에 대규모 설비 투자와 함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특히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에 주목했는데, 주력 제품으로 당시에 유망하던 ROM이 아닌 DRAM을 선정했다. 이 결정은 이후 메모리 반도체의 주력이 DRAM으로 자리잡으면서 전략적으로 옳았던 판단으로 확인되었다. 삼성은 16K급 DRAM 개발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세간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며, 반도체 기술 개발 선언 당 해인 1983년 세계 3번째로 64K DRAM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64K DRAM은 한국반도체를 설립한 강기동 박사가 처음 설계했던 CMOS 생산 라인을 NMOS 공정으로 하향 조정하여 제작된 메모리칩이었는데, 처음에는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을 인수한 삼성반도체 부천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당시 불과 반년 만에 현실화된 삼성의 64K DRAM 개발 성공 소식은 일본의 선두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에게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기준으로 일본과 10년 이상 차이가 났던 것으로 평가되던 반도체 제조 분야 기술 격차를 4년 이내로 줄이게 된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삼성을 신호탄으로, 당시 한국의 재벌 그룹들은 경쟁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현대그룹 역시 1983년 2월, 현대중공업 산하에 전자사업팀을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반도체 중심의 전자산업 진출을 천명하였다. 현대전자는 이미 시장의 강자가 즐비한 DRAM을 피하는 전략을 세웠다. 대신 DRAM과는 다고 결이 다른 메모리칩인 SRAM을 주력으로 삼았다.  1984년 12월 16K급 SRAM 개발에 성공했으며, 1985년에는 미국 바이텔릭 (Vitelic)사의 기술을 도입하여, 16K, 64K, 256K, 그리고 1M급 D램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다.

전자산업에서 삼성의 경쟁 회사이기도 했던 당시 럭키금성 그룹 (현 LG)은 19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하여 금성반도체를 창립했고, 구미를 중심으로 반도체 생산 규모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1984년, 금성반도체는 KIET의 반도체 생산 시설을 인수하여 같은 해 마이크로프로세서 생산에 성공하였고, 1985년 11월에는 1M급 ROM을 개발하여 IBM에 납품하기도 하였다. 1989년 9월, 금성 일렉트론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1980년대는 한국이 반도체 제조 입국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후발주자인 한국이 글로벌 레벨에 진입하기 위한 기술적 장벽은 여전히 높았다. 아무래도 후발주자이다보니, 당시 선진 업체들이었던 일본의 반도체 5공주를 비롯하여,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과의 기술 경쟁에서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반도체 시장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다다랐다. 기본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점차 거대 자본이 필요한 장치산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이었고, 또한 종합 반도체 산업이 점차 팹리스와 파운드리, 후공정으로 분화되던 추세였기 때문이다. 자본력이 충분하지 않았을뿐더러, 여전히 모든 부분에서 세계 수준 대비 기술 격차가 있었던 한국 반도체 산업에 있어 선택과 집중은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당시 전체 반도체 시장 중 메모리 반도체의 규모가 가장 컸고 수요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해 보였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기존의 선두주자들과의 기술 격차를 기술 도입과 대규모 투자를 통해 좁히는 것이 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한국의 후발 주자들 입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시스템 반도체 혹은 로직 반도체에 비해 제품군이 비교적 단순하고 공정의 표준화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기 때문에, 제조업에서의 수율 및 공정 관리에 경험이 쌓인 한국의 제조업 중심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매력이 더 컸을 수밖에 없다.

삼성은 1983년 미국의 마이크론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64K D램의 상용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삼성이 개발한 64K D램은 자체 개발이라기보다는 마이크론의 기술을 재조합하는 일종의 역엔지니어링 (Reverse Engineering)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론의 예상보다 개발 기간을 1/3 이상 앞당겼다는 점에서 큰 성과이기도 했다. 64K D램 개발과 동시에, 삼성은 곧바로 다음 세대 메모리인 256K D램 개발에 착수했으며, 착수한 지 반년 만인 1984년 10월에 개발에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은 적어도 256K D램 기준으로는 세계 선두 업체와 기술 격차를 2년 안쪽으로 줄일 수 있었다. 현대전자는 DRAM으로 방향을 선회한 후, 1986년 상반기부터 일본 히타치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CMOS 공정 기반 256K DRAM을 이천 공장에서 양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간 부문에서의 선택과 집중 전략에 의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선진 업체들과 기술을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마중물 역할이 절실했다. 1986년 10월, 한국 정부는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사업’ 계획이 정식 체결되어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산-학-연-관이 연합된 대형 국가주도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KIET를 전신으로 삼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ETRI)의 주관 하에 시행된 이 계획을 통해, 산, 학, 연의 여러 참여 주체 (2개 출연연, 19개 대학, 3개 반도체 기업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는 핵심 기술의 개발 ‘속도전’을 위해 분업 체계를 만들었다. 특히 산업계에서 참여한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같은 회사들은 정기적 미팅과 기술교류회를 통해 협력과 경쟁을 동시에 만들어가며 기술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1차 목표는 1989년 3월까지 0.8 마이크로미터 선폭을 갖는 메모리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용량으로 따졌을 때 4M DRAM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ETRI는 연구개발을 총괄관리, 서울대 부설 반도체공동연구소는 연구인력 양성 및 기초 연구를 맡았다. 삼성전자는 디바이스 기술 같은 핵심 기술 개발 과제 9개 항목을, 금성반도체는 공정 검사 및 신뢰도 기술 같은 후공정 분야를, 현대전자는 조립 기술 등 6개 분야를 담당했고, 설계는 ETRI 주도 하에 공동 연구가 진행되었다. 삼성전자는 1988년 10월, 해당 프로젝트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삼성전자는 4M DRAM 시제품 (수율 7%)이 개발한데 이어, 1989년 2월, 양산 시제품 (수율 20%) 4M DRAM 개발이에 성공했다.

해당 프로젝트는 1989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DRAM 핵심 요소 기술 개발을 위한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1990년 16M DRAM, 1992년 64M DRAM 개발 등으로 그 성과가 계속 이어졌다. 1986년 10월부터 1993년 3월까지 약 6년 반 정도 지속된 이 프로젝트 기간 동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적어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 선두권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 노태우 전 대통령 (원래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법원에서 박탈 당했으므로 노태우씨라고 불러야 한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공과 과가 뚜렷한 20세기 인물이고, 민주정이 한국에 정착하기 전, 군정의 마지막 인물이자, 민주정으로의 교두보를 놓은 인물이라고들 평가한다. 나는 그러한 평가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으나, 노태우씨가 재임하던 1988-1993의 5년 사이, 한국의 반도체,특히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수준으로의 도약을 이뤄낸 배경에는 당시 정부 주도의 꾸준한 연구개발투자가 있었음은 이야기하고 싶다.

당시로서 3년 간 800-900억원 수준, 6년 간 2,000억원 수준의 연구개발비는 현재 삼성전자의 연간 연구개발비 20조원에 비하면 1/100 수준도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연구개발 협력이 있었기에,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선진 업체들의 견제와 치킨게임의 위협 속에서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사업'의 안정적인 수행, 그리고 성과의 배분은 다양한 분야 (소재, 부품, 공정, 기초)에서의 연구개발인력을 양성하는 효과를 창출했는데, 이들이 결국 지금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엔지니어들의 대선배이자 직접적인 스승이 되었다.

이는 유형적인 가치로는 평가할 수 없는 거대한 자산이다. 이러한 자산을 만들어낸 당시의 정부의 결단은 충분히 칭찬 받아 마땅하다. 애초에 이 계획은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기 2년 전에 시작된 것이고, 계획 자체는 그 5년 전에 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한된 정부 재원을 성과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를 사업에 정권 내내 투입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임 정권이 입안한 계획을 언제든 좌초시킬 수 있지만, 노태우 정부는 다행히 그런 우를 저지르지는 않았고, 노태우 정부가 끝나는 시점까지 이 계획은 1단계 완수는 물론, 후속 과제로의 무난한 연계를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나중에 현대 역사가들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은 이 계획이 언급될 것이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주역이자, 군독재의 최후 승계자, 자국민 학살에 참여했던 정치인이자 군인이라는 평가는 선명하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지만, 적어도 재임 5년 간, 정부 주도의 반도체 산업 육성과 기술 확보에 집중할 수 있게 한 정권 차원의 의지를 유지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크레딧 평가가 있기를 바란다.

출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