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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탈세계화 Deglobalization 한국의 생존과 기회

by 성공의문 2021. 12. 1.

0. 요소수만 문제가 아니다. 당장 올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제설용 염화칼슘도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99% 이상인데, 벌써 수입가격이 예년보다 3배 수준으로 올랐다고 한다.


이런 품목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마그네슘은 자동차, 배터리, 스마트폰 등 온갖 곳에 쓰이는 중요 원자재인데, 이 역시 중국이 전세계 공급량의 85%를 점유하고 있고, 가격이 오르고 있다.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는 전세계적 공급망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겨 가격이 뛰고 생산 차질이 빚어지는 현상이 점차 잦아지고 있다. 이쯤되면 우리는 보다 깊은 변화를 의심해 봐야 한다.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과 달라진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해도 괜찮은걸까?

지금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우리가 물고기라고 치면 바닷물의 온도와 염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그런 변화다. 사실 몇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탈(脫)세계화(deglobalization)다. 국경 없는 세계, 사람과 자본과 정보와 상품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가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던 신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될 것 같던 세계는 다시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제 살길을 찾는 중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내년 이후 맞닥뜨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시계를 20여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 탈(脫) 세계화? 세계화가 어쨌길래 그걸 벗어난다는거지?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해 학자들은 70,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80년대만 해도 세상은 지금처럼 밀접하게 연결돼 있지는 않았다. 세계는 자본주의-민주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중이었다. 미-소 핵전쟁으로 세상이 망해버릴 거라는 위기감도 깔려 있었다. 해외출장이나 유학을 가려면 남산 자유총연맹에 가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회유-납치되지 않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같은 진영 내 국가들 사이의 교류도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제한돼 있었던 만큼 한계가 있었다.

동서독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 11. 9. 사진: 위키피디아.

천지개벽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시작됐다.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을 이어져온 거대한 대립이 종식됐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갈등이 종식됐다며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마침 1990년대 들어 인터넷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세계의 통합은 더욱 빠르고 깊게 이뤄졌다. 정보와 함께 서비스도, 사람도 국경을 넘기가 쉬워졌다. 이제 기업들은 굳이 자국 내에서 재료와 부품과 노동력을 조달할 필요가 없었다.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공급해 줄 곳이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갖다 쓸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지식인들은 "평평해진 세계", 거리(distance)와 국경의 소멸을 이야기하며 세계화 찬가를 불렀다. 자유무역은 성장을 위한 신앙이 되었다.

가장 큰 이익을 본 건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기업들이었지만, 국제적 분업체계의 하단에 위치한 나라들에게도 거대한 기회의 창이 열렸다. 한국은 이런 흐름에 잘 올라탔고, IMF 외환위기와 같은 고통도 따랐지만 결과적으로 큰 이익을 봤다. 그런데, 비교도 안될 만큼 더 큰 이익을 본 나라가 있으니, 바로 중국이다.

    1-1. 세계화 최대의 문제작 : 중국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과 자원, 거대시장을 보유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무섭게 성장했다. 덩샤오핑의 지휘 하에 세계시장에 본격 편입된 지 20년이 채 안돼서 중국은 세계경제의 균형추 역할까지 하게 됐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2010년대초 유로존 위기가 터졌을 떄, 국제경제체제가 녹아내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찌보면 중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은 위기가 닥칠 때 마다 자신들의 돈(달러와 유로)을 마구 찍어내고 빚을 냈다. 중국은 세계화된 시장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미국과 유럽의 채권을 사 줬다. 서방국가들은 다시 중국이 찍어내는 상품을 사 줌으로써 중국의 성장을 도왔다. 서방국가 내에서 점점 살림이 쪼그라드는 중산층과 서민층은 중국에서 나오는 값싼 상품이 없이는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이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큰 문제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상당부분 중국 덕분이었다. 급성장하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각종 상품을 우리가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결과로, 우리나라의 중국 의존도는 갈수록 커져갔다.

중국 의존증이 심해진 건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도 그랬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수많은 공장이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미국내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그렇게 생산된 값싼 제품이 미국의 상점을 채우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미 익숙한 현실이 된 경제환경을 뒤엎어 바꾸는 건 마약을 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2. 세계화가 키운 양극화

사람과 물품을 세계 어디서나 조달하고 판매하는 체계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는 상위의 엘리트들은 예전보다 훨씬 큰 부를 얻게 되었다. CEO가 공장을 개발도상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할 때, 회사의 수익은 늘어나고 주가도 높아지고 임원들은 더 큰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공장의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들의 가족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계화(globalization)를 주도한 국가인 미국에서 이런 부작용이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던 1994년 미국-캐나다-멕시코 사이에 '나프타(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라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다. 자동차 섬유 등 수많은 업종의 공장이, 임금이 싼 멕시코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프타(NAFTA)로 인해 미국에서 멕시코로 넘어간 조립공장. 2001년. 게티 이미지 코리아.

그 전까지 미국사람들은 동네 고등학교를 나와서 지역의 공장에 취업하면 모기지 끼고 집 한 채 사서 평생을 큰 문제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양질의 일자리들이 하나 둘씩 멕시코로 떠나가면서 미국의 지방 소도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프타(NAFTA)로 일자리를 잃은 미국 노동자가 고용센터 앞에서 단식 시위를 벌이는 모습. 텍사스 엘 파소. 2000년. 게티이미지코리아.

반면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 인재와 돈이 몰려드는 대도시 (이를테면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등)들은 더욱 발달했다. 이와 함께 기술 혁신도 세상을 뒤집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세상을 더욱 밀접하고 빠르게 연결했다. 파괴적 혁신을 통해 수많은 회사가 망하고, 또 새로 생겼다. 세상은 이제까지 본 적 없던 거대한 부와 혁신을 목도하게 되었다.

구글의 나스닥 상장. 2004년. 게티이미지 코리아.
아이폰을 공개하는 스티브 잡스. 2007년1월.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리고 그런 세상의 내부순환을 담당하는 금융도 더욱 빠르고 크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따랐다. 하나는, 부의 팽창과 함께 경제시스템에 내재된 문제도 점점 크고 복잡해져갔다는 것, 둘째는 성장의 과실이 점점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3. 세계화에 제동 건 세가지 사건

    3-1. 세계금융위기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안전거리, 차선변경 방법, 끼어들기 등에 관한 규제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몰면 결국 사고가 난다. 금융도 그랬다.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해, 급속도로 진행되던 과정을 멈추었을 때 영어에서 '렌치를 던져 넣었다' (throw a wrench)라는 표현을 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금융의 중심인 미국에서조차 금융은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1929년 대공황을 일으킨 주범 중 하나가 방만한 금융사들이었다는 자성의 결과, 미국은 상당한 수준의 금융규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화와 인터넷의 물결을 타고 전세계에서 돈을 벌어들이기 바쁜 월가의 금융사들은 규제의 완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 요구를 들어준 게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다.

1999년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 등으로 각종 규제의 족쇄를 벗어난 금융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탐욕스러워졌다.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은 자신들조차 내용을 이해못하는 상품을 빚에 기반해 거래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달이 났다. 그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초(超)연결된 세계는 월가로부터의 충격을 실시간으로 받았다. 90년대부터 정신없이 점점 빨리 돌아가던 세계화가 이대로 괜찮은가?하는 자성이 일었다.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자 직원이 짐을 싸서 본사를 빠져나오는 모습. 2008년 9월 뉴욕. 게티이미지 코리아.

우여곡절끝에 세계는 일단 이 위기를 넘겼다.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에는 다시 탄력이 붙었다. 성공신화를 쓰는 기업과 개인이 늘어나는 한편, 각 나라들은 속으로 곪아갔다. 앞서 말한 '두가지 문제' 중 두번째 문제- 양극화가 갈수록 악화했다. 중산층의 저소득층화, 서민층의 빈곤화가 어느나라 할 것 없이 나타났다.

3. 세계화에 제동 건 세가지 사건

    3-2.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이용하는 정치: 트럼프 등장과 미중 갈등

양질의 일자리에 접근할 기회를 잃고 가난해진 대중은 분노했다. 이런 세상을 초래한 지식인과 엘리트들을 불신하고 혐오했다. 그런 정서를 투표로 표출했다.

영국에선 이런 분노가 EU탈퇴- 브렉시트(Brexit)-로 표출되었다. 프랑스에선 '노란 조끼' 시위로 번졌다. 중산층의 안온한 삶이 밑바닥부터 꺼져가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데 대한 불안감이 각국의 대중을 자극했다.

파리에서 불타오른 노란조끼 시위. 2018년.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런 대중의 분노와 반(反)엘리트주의가 가장 거대하게 분출한 현상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었다.
90년대 세계화 이전의 세상에선 고등학교만 나와도 공장에 취직해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미국 중하층민은, 클린턴과 오바마의 민주당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똑똑한 척 입바른 소리만 하는 당신들 치하에서 우리의 삶은 갈수록 나빠졌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는 클린턴의 업적이었다.)

2016년 트럼프의 대선 유세. 청중들이 '침묵하는 다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트럼프는 대중의 그런 정서를 정확히 읽고, 행동으로 옮겼다. 값싼 노동력의 유입을 막겠다며 불법입국자 단속을 비인도적인 수준까지 몰아붙였다. 기업들에게는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리쇼어링(re-shoring, 공장을 다시 국내로 이전하는 것)'을 채근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중엔 속된말로 '멀쩡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가 말이 좀 거칠긴 한데, 그래도 화끈하게 일은 잘 하잖아?"
가장 중요한 건 중국에 대한 새로운 견제 전략을 천명한 것이었다. 전임 민주당 정부의 전략적 판단미스때문에 중국이 돈만 많은 깡패로 자라나 미국의 중산층을 피폐하게 한다며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글로벌화의 바퀴에 걸린 두번째 급브레이크였다.

3. 세계화에 제동 건 세가지 사건

    3-3. 코로나 팬데믹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감염병이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진 건 세계화가 이미 너무나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이지만, 역설적으로 코로나19는 세계화의 톱니바퀴에 가장 큰 렌치를 던져넣은 셈이 됐다.
코로나는 선진국들보다 개발도상국들에 훨씬 큰 타격을 줬다. 그런데, 개발도상국들에는 선진국에 각종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이 있고, 해상물류를 움직이는 선원들도 상당수는 이런 개발도상국 출신이다. 전세계적인 상품 생산과 유통에 차질이 생겼다.

코로나19는 국경을 넘나들던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감염병을 옮겨올 지 모르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와 분노 심리를 자극했기 때문에, 탈(脫)세계화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컸다.

세계각지에서, 외국인노동자는 혐오의 타겟이 됐다. 사진은 2020년 5월 말레이시아의 불법체류노동자 단속. 게티이미지.

4. 나라들도 '각자도생' - 점점 위험해지는 세계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급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각국의 대중은 점차 자국우선주의, 보호주의, 민족주의, 분리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어갔다. 그걸 자양분 삼는 정치지도자들이 득세했다. (유럽의 경우 아프리카-중동 출신 난민들의 유입 문제가 이런 현상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이 전세계에 안녕과 질서를 제공하던 시대는 끝났고, 전세계적인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다. 각국은 점점 '남들 사정은 모르겠고, 우리부터!' 로 흘러가는 중이다.

의도적으로 상품이나 서비스의 흐름을 막아서 상대국에 고통을 주는 경우도 늘고 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출 통제, 중국이 우리에게 가했던 사드 보복, 일본이 우리에게 가했던 반도체용 불화수소 수출통제 등이 그런 사례다. 그런 정책들은 자국 유권자들의 지지도 받으니, 국가지도자로서는 돌 하나로 새 두마리를 잡는 격이라고 좋아할 법도 하다.

이런 세계는 사실 위험한 세계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교역과 글로벌 단일시장은 자본의 탐욕이 낳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전쟁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실제로 세계화는 지식과 과학, 자유와 인권의 확산을 수반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 서방세계의 지도자들은 국경을 맞댄 세계대전의 두 당사자 - 프랑스와 서독이 철강과 석탄을 공유하도록 했다. 철강과 석탄은 석유와 함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서로가 석탄과 철강으로 뭘 하는지 투명하게 알면, 상대 모르게 힘을 길러 전쟁을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는 나중에 유럽연합의 토대가 됐다.

1984년, 세계1차대전 발발 70주년 행사에서 손을 맞잡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좌)과 콜 독일수상(우). 행사가 벌어진 베르덩은 10제곱km의 전장에서 8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최악의 격전지였다.

유럽발 세계대전은 두번 다 독일이 지나치게 강해져 세력균형이 깨지면서 촉발됐다. 공산권 붕괴로 동서독이 재결합하게 되자, 주변 국가들은 불안해 했다. 통일독일이 다시 강성해지면 또다시 전쟁의 불씨가 될까봐서다. 통일 독일을 유럽 다른 나라들과 운명공동체로 엮을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현실로 등장한 것이 '유로화'라는 단일화폐에 의한 경제통합이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의 헬무트 콜 수상, 두 거물 정치인이 이런 거대구상에 대해 견해를 같이 했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동의를 얻는대신,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서독 경제부흥의 상징인 마르크 화를 포기하고 유럽단일통화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급부상 또한, 중국을 세계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육성함으로써 소련과는 다른 안정적인 국제질서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미국의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시진핑이 등장해 중화패권을 추구하면서 미국이 잘못 판단했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중국의 WTO 세계무역기구 가입 조인식, 2001년. 미국이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은 중국이 돈 잘 벌고 행실도 바른 자유진영의 모범생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지금의 탈 세계화-각자도생의 흐름과 그에 따른 각국의 배타적 포퓰리즘은 추가적인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많은 지도자들이 기울였던 노력의 결과들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 세계가 다시 전쟁이 터지기 쉬운 상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5. 물가 인상의 세계화?…탈 세계화의 역설

영국의 EU탈퇴를 요구한 브렉시트 시위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친 트럼프 지지자 등 탈 세계화 세력들은, 세계화를 늦추거나 되돌리면 공장과 함께 일자리도 돌아오고, 자기 나라 안에서의 삶은 자기들 뜻대로 결정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유럽연합을 탈퇴해서 영국의 화폐, 국경, 주도권을 되찾자고 연설하는 보리스 존슨 (2016년 당시 런던 시장/ 하원의원). 지금은 영국 총리.

하지만 세상일은 꼭 기대했던 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세계화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20여년간, 세계경제에서 대체로 공급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더 싸고 좋은 물건이 끝도 없이 만들어져 나왔다. 문제는 수요였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수요가 부진해져 경제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가라앉는 상황을 막는 게 미국과 유럽 주요국 주요은행들의 가장 큰 과제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이 물가상승률을 2%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지금까지 돈을 풀었던 것도 수요부족으로 인한 침체를 막기위해서였다.

그랬던 세상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19의 세계에선 물가 인상이 대세가 됐다. 빚을 내고 돈을 찍어 경기를 부풀리던 각국의 정책은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제는 과열과 거품붕괴를 예방하기 위해 각국이 금리 인상 경쟁을 벌인다. 기업들은 생산이 멈추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어느정도 공급망 중복투자와 재고 증가를 감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 안정성이 높아지지만, 가격을 전보다 올려받아야 하는 압력이 생긴다.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에서 넘어와 제조,농업, 수송, 건설 등의 일자리를 채우던 노동력의 공급이 줄어드니까, 곳곳에서 차질이 빚어지고 가격이 오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노동자가 부족해 인건비가 치솟는 바람에 농민과 중소기업들이 애를 먹고 있다. 영국은 EU탈퇴에 코로나까지 겹쳐 유럽 대륙 출신 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최근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는 등 생필품 공급 대란을 겪었다.

트럭 기사가 부족해 기름이 떨어진 런던의 한 주유소. 2021년 9월. 게티이미지 코리아.

자유무역과 세계화는 각 나라 기업들의 거래비용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혜택은 '가격인하'로 전세계의 소비자들에게 돌아갔다. 지금은 각 나라별 진영별로 도로 칸막이를 높이 세우고 있다. 국경이 없다던 정보의 흐름마저 미국 주도 서방세계, 중국, 러시아 등 주요 권역별로 쪼개지고,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 기업들은 이제 뭘 하든 예전보다 높은 비용을 치러야 하고, 정부는 전에 하지 않아도 됐던 걱정을 미리미리 하고 대비해야 한다.

6. 설상가상: 기후이변과 에너지 공급난

나쁜 일은 겹쳐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세계 각지의 기후 이변과 에너지 공급 교란은 그 자체로 물가인상 요인이 되며, 국가간 갈등을 악화시킨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은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난처한 일이나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유럽은 풍력, 수력, 태양광 등 대체에너지 비중을 늘려왔는데, 올해 바람이 불지 않거나 비가 덜 오는 등 기후변화로 대체에너지 발전이 크게 줄었다. 그로 인한 에너지 공백을 채우려고 천연가스 사용을 늘렸다.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최대 공급자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돈도 벌겸 유럽국가들 길도 들일겸 가스가격을 크게 올렸다. 유럽의 천연가스 수입가격은 본격적인 난방 시즌을 앞두고 지난해보다 최대 5배나 올랐다. 유럽은 디젤차를 많이 쓰는데, 거기에 필요한 요소수를 만드는 원료가 천연가스다. (요소는 석탄 또는 천연가스에서 뽑아낸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석탄에서 뽑아내는 게 요소를 가장 싸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지만 유럽에선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해 왔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보내는 파이프라인을 점검하는 엔지니어. 이곳을 잠그면 유럽엔 에너지 대란이 벌어진다. 게티이미지 코리아.

미국의 경우 농업용 비료가 문제다. 요소는 질소비료의 원료가 된다. 그런데 요소의 국제가격이 오르고, 공급망 곳곳에 차질이 생기고, 전반적인 에너지가격이 상승하니 비료가격이 뛰게 됐다.


옥수수 밀 등 곡물의 세계적 산지인 미국 중부 곡창지대가 비료가격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다른 주요 농산물 생산국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애초에 중국의 요소 수출 통제가 내년 농사에 대비해 비료용 요소를 충분히 확보하려는 데서 비롯됐다는 걸 기억하자.) 이로인해, 내년 전세계적 곡물 가격 상승 전망이 나온다. 곡물가격 상승은 고대 중국과 고대 로마의 시대부터 민란이나 전쟁의 불씨가 되어왔던 악재다.

7. 효율보다 생존이 우선 : 다시 조명받는 중복투자(Redundancy)

리던던시(redundancy)라는 개념이 있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문맥에 따라 중복성, 여분 등으로 옮길 수 있다. 기업 경영에서는 재고를 충분히 비축해둔다든지, 제조설비나 전산시스템을 백업용으로 하나 더 갖춰놓는 것 등을 말한다. 사람의 몸속에 폐나 신장이 2개씩 있는 것도 일종의 리던던시다. 폐나 신장을 하나씩 떼어내도 사람이 살지만, 두 개씩 있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효율이 가장 중요한 가치일때는 이 리던던시(redundancy)가 뒷전으로 밀린다. 걷어내도 돌아가는 걸 하나 더 끼고 있다는 건 비용 부담과 에너지 소비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의 세계경제는 리던던시를 제거하고 효율과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달해 왔다.

세계화가 한창이던 90년대, 국내에선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쌀 농업 보호를 포기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었다.
필요한 건 어디서든 사올 수 있었으니 기업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부품과 원료의 재고를 줄여갔다. 다른 나라에서 더 싸게 만들어 들여올 수 있는 것은 생산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일은 전세계적으로 벌어졌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선 반도체 공장과 조선소 등 제조업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한국이나 중국, 대만 등지에서 만들어 공급하는게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가격경쟁에 밀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스페인의 한 조선소. 2013, 게티 이미지.

그러다 탈이 났다.

지난해초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유럽은 마스크를 구할 수 없어서 당황했다. 백신처럼 고도의 기술이나 값비싼 원료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물품이 일회용 마스크였다.

지금 세상에선, 또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글로벌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고 생산이 멈춰설 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이제 세계는 중복성(redundancy)의 복원을 고민하고 있다.

앞서가는 기업들은 팬데믹 이전부터 대비를 시작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타이완이나 일본의 지진으로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회사가 부품을 공급받지 못해 생산을 못한다든지 하는 일이 벌어져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핵심부품이나 자재를 외국 어느 한 곳의 공급처에 전량 의존하지 않고, 문제가 생길 경우 다른 나라의 공장에서 공급받을 수 있도록 조달 시스템을 만드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국가 단위에서도 그런 대비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나라가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원자재와 물품이 뭐가 있는지 따져보고, 가능한 대로 국내에 생산시설을 만들거나, 아니면 어려울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공급처를 복수로 확보해야 한다. (미국이 반도체 회사들을 닦달해 미국내 생산공장을 짓도록 하고, 반도체 주요 공급국인 타이완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8. 망망대해 위 한국호, 태풍을 제대로 읽어야 산다

각국이 칸막이를 다시 높게 세우고 나부터, 아니 나만 살겠다는 아우성이 심해지는 가운데, 각종 생산요소의 가격은 오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변화로 인한 곳곳의 균열을 더 크게 벌려 놓았다. 미중간의 전략적 경쟁은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 대한 줄세우기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의 대외의존도(GDP 대비 수출입 비율)는 70%를 넘는다. (2020년 72.9%) 한국호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험난한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한다. 내년 3월에 들어서는 대한민국의 새 정권은 선거승리의 단꿈에 취해있을 겨를이 없을 것이다. 항로는 제대로 잡았는지, 거대한 태풍이 어디서 접근하고 있는지, 기본적인 것부터 넓은 시야로 다시 점검해야 한다. 집채만한 파도가 덮쳐오는 바다 위에서 선장이 한눈 팔거나 잔재주를 피우면 배가 어찌될 지는 자명한 일이다.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 장선이 기자 / 디자이너 : 명하은, 박정하) 

출처 : SB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