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성 화학물질, 균근 네트워크, 제3의 음향 신호 등으로 소통 밝혀져
동료에 위험 알리고, 천적 불러…곁에 좋은 이웃 있는지도 미리 알아채
≫ 식물은 발이 없지만 다양한 방어수단을 갖췄다. 진딧물의 습격에 대해 방출하는 화학물질을 바꿔 천적을 부른다. 사진=안드레아스 아이클러, 위키미디어 코먼스
식물은 초식 곤충의 습격을 받으면 휘발성 화학물질을 방출해 주위에 경보를 발령한다. 잔디를 깎을 때 나는 상큼한 냄새가 바로 이 물질이다. 그런데 식물의 소통방식이 이제껏 알던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진딧물이 날아와 수액을 빨아먹기 시작했다고 치자. 식물은 방출하던 화학물질 성분을 재빨리 초식 곤충이 싫어하는 성분으로 바꾼다. 이 화학물질은 진딧물에 기생하는 말벌을 끌어들이는 구실도 한다. 말하자면 공격을 당한 식물이 포식곤충에게 “도와줘요!”하고 외치는 꼴이다.
그런데 핀란드 연구자들은 참새 목의 작은 새들도 도움을 청하는 식물의 화학신호를 알아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 새들은 식물에 붙어있는 곤충 애벌레를 귀신같이 찾아내는데, 잎에 벌레가 갉아먹은 흔적이나 시든 잎 등 시각적 단서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새들은 애벌레(A)나 그것이 갉아먹은 잎(B)의 시각적 화학적 단서로 먹이를 찾는다. 핀란드 연구진이 실험을 위해 만든 인공 애벌레(C)와 벌레가 쪼은 모습(D). 사진=엘리나 맨틸래 외, <플로스 원>
그러나 시각적 단서를 완전히 차단한 나무 안쪽에서 애벌레가 식물을 먹도록 했는데도 새들은 벌레를 정확히 찾아냈다. 식물이 초식 곤충의 공격을 당했을 때 내는 화학물질을 단서로 보이지 않는 곳의 벌레를 찾은 것이다.
물론 나무가 낸 이 화학물질이 새들만을 위한 신호는 아니고 기생 말벌과 포식성 진드기도 유인하는 것이지만, 식물이 무척추동물뿐 아니라 척추동물까지 끌어들이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연구로 드러났다.
≫ 뿌리와 균사가 형성하는 균근이 식물의 땅속 의사소통의 통로가 되는지를 실험한 영국 연구진의 실험 얼개. 그림=바비코바 외, <에콜로지 레터스>
식물은 잎뿐 아니라 뿌리를 통해서도 화학물질을 분비해 다른 식물과 곤충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단지 뿌리가 아닌 곰팡이의 균사를 통신망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곰팡이와 식물의 공생은 매우 널리 퍼져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식물 뿌리와 곰팡이의 균사가 땅속에서 얽혀 균근을 이루는 것이다. 곰팡이는 유기물을 분해한 영양분을 제공하고 질병과 기생충도 막아준다. 식물은 곰팡이에게 광합성으로 만든 탄수화물로 보답한다.
영국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균근이 영양분뿐 아니라 경고 신호를 전달하는 통로 구실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진딧물의 공격을 받은 식물의 신호물질이 균근을 통해 이웃 식물에 전달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 식물이 내뿜은 도움 요청 화학신호를 받은 기생 말벌이 매미나방 애벌레 몸속에 알을 낳고 있다. 사진=스콧 바우어, 미국농림부,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기를 통한 화학물질 전달을 차단한 콩에 진딧물을 넣자 균근으로 연결된 콩은 진딧물에 대항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했지만, 균근을 차단한 식물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식물은 땅속에서 균근으로 연결돼 있어 이런 네트워크를 통한 신호 전달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진딧물은 한 번 끼면 급속히 번창하기 때문에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 식물에 큰 이득이 된다. 또 곰팡이도 자신에게 한 몫이 돌아올 탄수화물을 진딧물에게 빼앗기기는 싫을 것이다. ‘균근 통신망’은 이런 상호 이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진화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했다.
이 발견을 유기농에 응용할 수도 있다. 작물 사이사이에 진딧물에 아주 민감한 식물을 심어놓는다면, 이 식물은 일종의 조기경보 장치로 작동해 다른 식물이 진딧물을 퇴치하는 화학물질을 분비하도록 해 줄 것이다. 진딧물이 번진 뒤 허둥지둥 약을 칠 필요가 없어진다.
≫ 바실. 고추 씨의 발아를 돕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크리스천 바우어, 위키미디어 코먼스
유럽의 농부들은 고추밭에 바질을 함께 심는다. 토양의 습기를 지켜주는 천연 멀칭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바질은 허브의 일종으로 다량의 휘발성 물질을 내보내 잡초를 억제하고 천연 살충제 구실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농부의 지혜가 옳았음이 호주의 생물학자가 수행한 정밀한 실험에서 밝혀졌다. 바질과 함께 심은 고추의 발아율은 그렇지 않은 고추보다 높았고, 반대로 또 다른 허브인 회향과 함께 심은 고추의 발아율은 떨어졌다.
고추는 누가 좋은 이웃이고 누가 나쁜 이웃인지 안다는 것인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제까지 식물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수단이던 빛, 화학물질, 물리적 접촉이 아닌 제 3의 신호를 통해 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감각이 중요한 까닭은 곁에 누가 있는지 씨앗 때부터 알아내 싹틀지 말지, 빨리 자랄지 말지를 미리 정하는 것이 나중에 대응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 새로운 매체가 음향 신호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세포내 생화학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리로서 세포 골격을 이루는 여러 부위가 "나노 기계적 진동"을 일으켜 만든다는 것이다.
식물이 우리가 몰랐던 미세한 음향 소통을 할 가능성을 제시한 것인데, 그래서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이 열매를 잘 맺는지도 모를 일이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aentylae E, Alessio GA, Blande JD, Heijari J, Holopainen JK, et al. (2008) From Plants to Birds: Higher Avian Predation Rates in Trees Responding to Insect Herbivory. PLoS ONE 3(7): e2832. doi:10.1371/journal.pone.0002832
Zdenka Babikova et. al., Underground signals carried through common mycelial networks warn neighbouring plants of aphid attack, Ecology Letters (2013) 16: 835.843
Gagliano and Renton: Love thy neighbour: facilitation through an alternative signalling modality in plants. BMC Ecology 2013 13:19. doi:10.1186/1472-6785-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