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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부실한 번역이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들

by 성공의문 2021. 12. 10.

전공인 수학·과학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교과목 중 살면서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영어다. 영어는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온갖 자료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한국어를 쓰지 않는 수많은 이들에게 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나라 한국에 태어났으면서도 세계의 변화를 따라가고, 내 성과를 인정받게 해준 것은 영어였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직장에서 영어 실력을 요구하고, 많은 사람이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세종대왕께 감사하지만, 그러면서도 영어 공부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영어 따윈 필요 없을 거라며 위안도 해보지만, 우리말의 번역은 유난히도 더디다. 구글 번역기조차도 문화와 어순이 다른 한국어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한다. 양질의 번역자료가 적으면 인공지능도 번역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한 단어인 ‘오빠’마저도 ‘my brother’(구글번역기)나 ‘old man’(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라고 번역되는 판이니, 더 말해 뭘 할까.

우리말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심각하다. 필자가 소속된 과학기술계부터가 그렇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학회를 열면 그 학회는 자연스럽게 ‘국제’학회가 된다. 유럽과 미국에 유명 학자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 분야의 공용어인 영어가 쓰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 학회를 열면 대개는 이름만 ‘국제’다. 외국인 연사가 발표하는 강연 두어 개 혹은 공식 발표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우리말이 쓰이고, 상황이 이러니 외국 학자들이 참가하기도 어렵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국제 학계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인데, 언어 장벽이 여기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실한 번역은 과학기술 지식의 확산에도 심각한 장애가 된다. 유럽연합에서는 정부 지원을 받은 연구의 성과물은 출간 즉시 공개하는 정책이 공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 덕분에 방대한 양질의 과학기술 자료가 신속하게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 한국 국민은 언어 장벽 때문에 무료 공개된 자료조차 활용하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늘면서 해외의 성과를 국내에 알리는 자료가 많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통일된 번역체계가 없다보니 번역을 포기하고 외국어를 그대로 표기하거나, 같은 용어도 각자 다르게 번역하곤 한다(예: striatum을 선조체 또는 줄무늬체로 번역). 이래서야 지식이 통합되기 어렵다.

번역은 한류 콘텐츠의 범위와 깊이에도 영향을 준다. 한국은 덕후와 창작자가 유난히 많은 편이다. 작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웹툰과 웹소설은 우리만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우리말 자료로 한정되니, 한류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한류 콘텐츠가 영화, 음악, 드라마에 머물고 있다. 국민들이 해외 과학기술 자료, 심층 기사, 다큐멘터리를 우리말로 접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류 콘텐츠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지지 않을까?

번역은 가짜뉴스와 가짜과학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국내 일부 매체에서, 해외 유명 일간지의 기사,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해외 기관의 보고서, ‘랜싯’ 등 해외 학술지의 내용을 왜곡 보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어가 불편한 대다수 국민은 진위 확인을 못한 채 속는 수밖에 없다. 번역만 쉬워져도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짜뉴스와 가짜과학의 확산이 더뎌질 것이다.

부실한 번역체계는 국내 콘텐츠의 수출에도 심각한 지장을 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영화 <기생충>이 이례적으로 공들인 번역 없이도 그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까? 봉준호 감독이 웃으라고 넣은 장면에서 한국어를 모르는 관객도 웃을 수 있었을까? 더욱이 문화상품의 수출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작품이 나치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에 끼친 영향을 보면, 문화상품은 수출국 사람들의 생각을 외국에 설득하는 정치외교 효과가 크다. 한류를 보면, 수출국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이끌어내는 마케팅 효과도 강하다. 따라서 문화수출은 효과가 큰 정치외교 활동이며 여기에는 번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언제까지 온 국민이 영어를 상대로 각개전투를 벌여야 할까? 모국어도 아닌 외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영어를 못하는 일부 국민이 세계 흐름에 뒤처지도록 방치해도 될까? 세상에 우리 성과를 전파하는 일이 언어 때문에 제약을 받아도 될까? 하루라도 빨리 번역청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 송민령 공학박사
출처: 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