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기간: 1948.7 ~ 1960.4
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 · 파면되었다.
사사오입 개헌 이후 1960년 4대 정 · 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원조의 유상 원조로의 전환과 액수 감소의 영향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에 따라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임기 중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경력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재임기간: 1963.12 ~ 1979.10
경력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으로 야당 및 학생운동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1979년 10월에는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 등을 사주하여 부마항쟁을 야기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우선은,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의견이 잇으며, 특히 도시화와 다르게 새마을운동은 농촌발전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친일파 행적에 대한 논란, 남로당과 관련된 공산주의 활동 전력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재임기간: 1979.12 ~ 1980.8
경력
1979년 12월 21일 ~ 1980년 8월 15일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1976년 3월 13일 ~ 1979년 12월 5일 제12대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 일본식 이름: 梅原圭夏, 우메하라 게이나쯔)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최규하는 비상조치를 해제하면서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한 새 정부 출범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12월 12일 전두환과 뜻을 같이 하는 군 내 파벌이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12.12 사태). 이들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자리에서 밀어냈다.
취임 직후 최규하는 전직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유신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은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생존한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이 의장으로 피선됐다.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 됐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했다.
재임기간: 1980.9~1988.2
출생: 1931년 1월 18일
가족: 배우자 이순자, 아들 전재용-전재국-전재만, 딸 전효선
학력: 육군대학
경력
1980 ~ 1981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 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1980년 8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독재를 하였다.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초대 총재가 됐다. 퇴임 이후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에 구속 기소돼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에 사면됐다.
전두환은 수 천억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반체제인사·민주화 운동가·학생운동가 등의 정적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자와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이 주도하는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 2월 보안사는 정보처 아래 언론반을 설치했다.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하려는 목적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을 실행했다. 1980년 3월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앉았다가 이어 4월 14일 헌법이 정한 정보기관의 일인 독점 금지를 위반하고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고,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했다.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했다.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했다.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갑자기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제출됐다.
1986년 4월 30일 개헌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전두환은 5.3 인천사태와 10.28 건국대 항쟁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11월 7일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 이틀 전인 11월 5일 김대중 신민당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계획을 거두게 된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했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박탈당했다.
2002년 2월 대한민국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했다.
13대: 노태우(1932년, 대구)
재임기간: 1988.2 ~ 1993.2
출생: 1932년 12월 4일
가족: 배우자 김옥숙
학력: 육군대학교
경력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정호용의 육사동기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80년 야당 정치인 가택연금 당시 그는 김종필에게 깎듯이 예우했다. 김종필과의 계속된 만남 도중, 김종필은 신군부 세력 중 그에게 유일하게 깎듯이 대했던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가르쳤고, 1인자와 틈이 벌어지지 않는 비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날부터 전국적으로 반정부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제5공화국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였는데, 이때 노태우는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선거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당시 그의 6·29 선언은 고독한 결단이라고 선전되고 연출되었으나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였지만 전두환의 확고한 지배하에 있었으며 노태우의 개별적 자율성은 없었다고 평가된다. 노태우는 민심이 이반되던 1987년내내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대통령 후보자 당시 노태우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하여 보통 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져, 법원으로부터 징역 15년, 추징금 2천6백88억원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97년 12월 사면되었다. 1997년 당시 2629억원을 추징금을 선고받고 6월말까지 2286억원을 납부하였다. 현재 남은 추징금은 387억여 원이다.
한편 최근 노태우는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으며,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이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광주사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직후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일어나자 노태우는 "자신의 발언을 용서해달라"며 사과했고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처지가 못된다"며 답변을 유보했다.
출생: 1927년 12월 20일
가족: 배우자 손명순
학력: 서울대학교 철학과
경력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1954년 26세에 3대 국회 민의원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고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 등의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월에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유신 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간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협의회을 구성해 민주 진영을 구축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권에서 타협없는 투쟁으로 인망을 얻었으나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예술가들의 정치적·사회적 비판 행위 등에 대해 억압하지 않았고,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수감된 박노해, 김남주, 마광수 등의 예술가들을 석방하였다.
15대: 김대중(1924년, 전남 신안)
출생-사망: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 (85세)
가족: 배우자 차용애 (사별), 이희호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경력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김대중은 군사 정권으로부터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 등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했다. 대내외적으로는 민주화와 의회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기도 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박태준, 김종필과의 단일화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민주세력간의 계파 갈등을 야기시켜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재임기간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2000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남북 정상 회담을 처음으로 개최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뤄냈다.
대선 후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최대 정적인 김대중에게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 5월 국회의원 총선유세 도중,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고, 골반 부위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됐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했고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1월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하게 되었고 1999년엔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 평양에 체육관을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김대중의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김대중의 비자금에 대한 의혹도 수차례 제기되었다.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그때 그는 국민회의 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기자들과 만난 “귀국 후에 밝히려 했으나 언론에 터무니없는 일이 자꾸 보도돼 어쩔 수 없었다. 또 연희동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며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 20억원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이와 관련 “김영삼 대통령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만 한다”며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노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김 대통령의 대선자금문제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권의 강삼재 등은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추가 수뢰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검찰은 '20억+알파'설도 김대중의 관련성은 부인했다. 그 외에 주장된 비자금 의혹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닌것으로 확인되었다.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IMF 외환위기를 종결시키기는 했으나 과정에 대한 비판 여론도 상당하다. IMF가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 실시를 요구하게 되면서 많은 기업들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그중 은행들이 공적자금 덕에 부도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수의 국내 은행들이 국제 투기펀드에 헐값으로 매각되었고 투기펀드는 다시 몇 배의 차익을 남기고 다른 외국계 은행에 되팔아 결과적으로 국부 유출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출생-사망: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62세)
가족: 배우자 권양숙
학력: 고려대학교 정치대학원 최고위 지도자 과정 수료
경력
2003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은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판사로 1년 남짓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조세 분야의 변호사로 활동 하던 중 ‘인권 변호사’가 되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었고,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5월 23일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사망 후 일주일간 봉하 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영결식에는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를 메웠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막노동과 사법시험 공부를 병행하였다.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라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출생: 1941년 12월 19일
학력: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력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14대(민주자유당 비례대표)와 15대 국회의원(서울 종로구, 1996년 5월 30일 - 1998년 2월 21일)과 32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으며 2007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일본 오사카 부에서 출생하였고 광복 직후(당시 만 3세) 귀국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왔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군에 입대했으나, 훈련소에서 신검을 받다가 기관지확장증 판정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시위를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계엄령 이후 도피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신문 공고가 나오고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다.
30대에 현대건설 사장이 된 이 대통령은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고 그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한국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1991년 걸프 전쟁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 탓에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1992년 정주영 회장과 결별하고, 그는 민자당후보로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 등으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았다.
그 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7억 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 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국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후에 이 의원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궐선거로 차지하게 된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 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큰 좌절을 겪은 이명박은 2000년 광복절 특사로 복권되면서 2002년 민선 3기 서울시장선거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되었다. 사람들에게 청계천 복원, 서울시 대중 교통 환승체계 구축, 서울숲 조성 등 주력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명박이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바로 군에 강제징집 됐다. 특전사 제대 후 복학해 다시 학생운동을 이끌며 전두환 군부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구치소에 투옥됐으나,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극적으로 풀려났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했으나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거부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03년에 참여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나 히말라야 산맥으로 트래킹을 떠났으나, 도중에 노무현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정계입문 제의를 받아 사의를 표해왔으나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동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며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어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015년 2월 8일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선출되었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제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들을 위해 지원 유세를 다녔다. 2016년 11월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하였고, 이재명, 최성, 안희정과 겨루어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17년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41.1%를 득표하여 24%를 득표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대통령이 파면되어 치러진 궐위선거이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당선인 결정 시간인 2017년 5월 10일 8시 9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바로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